Chapter 09
에녹 밀리건의 열애 상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파파라치들은 눈에 불을 키고 쫓아다녔지만 꼬리를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스위스에서 하루 머무를 때에도 LA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곁엔 여자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한 배우의 탈을 쓰고서 영화 준비에만 매진했다. 파티에 가도 술 몇 잔 먹고 깨끗하게 돌아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가 매번 물먹은 파파라치들은 하다 안 되니 거의 막 나갔다. 바람둥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사기 친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다가, 이제는 열애설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튈 조짐이 보였다.
“고자 밀리건, 트레이닝 참 열심히 하네. 보기 좋아.”
에녹 고자설에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촬영감독 알론소 윔블레이는 체통 없이 낄낄댔다. 에녹은 눈썹을 사납게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장난도 정도껏 해요. 남자 자존심이 걸린 문젠데.”
“야, 너무 신빙성 있어서 아니라고 말도 못 하겠어. 애인이 있다고는 하는데 만나지는 않지, 파티도 요즘 잘 안 간다며.”
“아 내가 정말, 애인한테 내 밤 기술에 대해 증언하라고 할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에녹은 착잡하게 한숨을 쉬며 매니저 쉐인에게 키홀더를 받아 들었다. 윔블레이가 타깃을 쉐인에게 바꿔 에녹의 사기 열애설을 캐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쉐인은 시종 딱딱한 표정을 하고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무튼 내 정력 아직 팔팔하니 남 걱정 말고 감독님이나 말 안 나오게 잘 좀 해 봐요. 얼마 전에 모모 씨한테 대시했다가 차였다고 이 바닥에 소문 쫙 났는데.”
에녹은 싱긋 웃으며 반격했다. 윔블레이가 모함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 계집애가 꼬리를 먼저 살살 쳤는데 나중에 쏙 모른 척 내뺀 거라고!”
촬영감독으로서 능력은 분명히 뛰어났지만, 여배우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장 함께 훈련에 들어간 여배우 아만다 샌포드도 그의 추파에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네네. 그러시겠죠. 아무튼 전 먼저 가요.”
에녹은 억울하다고 외치는 그를 매정하게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고 주위를 짧게 둘러보았다. 멀찍이서 체격 좋은 남자와 대화 중인 루스가 보였다. 에녹은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주얼은 흠 잡을 데가 없어요. 사실 내가 뭘 지적해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운지법 같은 거야 아마추어로서는 한계가 있긴 한데…….”
에녹의 기척에 남자가 힐긋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번 훈련에서 에녹의 연주 장면에 관해 조언을 줄 LA필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 밀리건 씨. 어서 와요. 안 그래도 당신 얘기 중이었어요.”
에녹은 루스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현 누르는 위치까지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건 사실 진짜 전공자가 아니면 불가능해. 다만 밀리건 씨가 가끔 연주 도중에 왼손을 보더라고요. 그게 본능적으로 눈으로 확인하려는 건 알지만 어쨌든 배역이 맹인이니까 그것만 좀 더 신경 쓰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아, 맞아요. 자꾸 내가 잘 짚은 건가 확인하게 돼.”
에녹은 선선히 인정했다. 정난우에게도 종종 지적받던 사항이었다. 맹인 정난우는 현을 볼 수 없었어요, 손끝 느낌과 손가락을 벌리는 정도를 수도 없이 연습해서 몸에 익힌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가 뇌리를 부드럽게 적셨다.
보고 싶다.
에녹은 속으로 앓듯이 중얼거렸다. 훈련이 시작되고 나서 한 달 보름여 동안 딱 다섯 번 만났다. 날수로는 8일이었다.
정난우의 미국 스케줄 도중에 짬이 날 때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최대였다. 두 번은 정말 얼굴만 보고 미친 듯이 몸만 부대끼다가 그날 저녁에 보내야했다.
“그래도 진짜 열심히 배운 티는 나네요. 정과 원 포인트 레슨이라, 그거 돈 주고도 못 하는 건데 밀리건 씨가 전공자가 아닌 게 통탄할 일이죠.”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녹은 그만 우울감도 날려버린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아저씨가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다.
“걔가 그리 좋은 선생님은 못 돼요. 이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맹하게 눈만 깜빡이다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느낌대로 하면 되는데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세상 사람들이 다 저 같은 줄 알아.”
남자와 루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폼은 정이랑 굉장히 비슷해요. 엄청 놀랐다고요. 그 손가락 휘어지는 타이밍이라든지 숨을 멈추는 순간, 그리고 발 움직이는 것까지 베꼈던데요?”
“아, 에녹이 원래 관찰력은 정말 뛰어나요. 그래서 깊이 있는 감정은 못 끌어올리는 순간에도 흉내 내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죠.”
“루스는 제 안티입니다. 새겨듣지 마세요.”
에녹은 능청맞게 루스의 오금을 살짝 후려 차며 자기변호를 했다. 그 때,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슬쩍 꺼내 확인하니 액정에 기다리던 이름이 떠 있었다.
에녹은 루스에게 힐긋 시선을 건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그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지금 말씀하신 곳에 와 있는데요.》
“금방 나가. 전화할게.”
상대는 네, 하고 끊었다. 남자와 대화를 끝낸 루스가 곁에 다가오더니 가자, 했다. 주차장으로 앞장서던 루스가 옅은 한숨을 지었다.
“열여덟 살짜리 애를 뭘 봐 달라는 거냐, 도대체.”
“뭔가 이상해.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 동양 애들은 희한하게 다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표정도 별로 없잖아.”
“그래서 정확히 뭘 의심하는 건데. 스토킹 범인 윤곽은 대강 나왔잖아. 애먼 사람 잡으려고 이래?”
“내가 바보도 아니고 걔를 그런 쪽으로 의심하는 건 아니야. 그냥 뭔가 깔짝거려서 그래. 생각해 보라고. 아무리 내가 항공권이랑 경비 다 대준다고는 해도, 소포 들고 직접 와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거절 한 번을 안 했다고.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루스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했다. 녀석의 팬심이 약간 과하다싶기는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다른 데에서는 몰라도 정난우와 관련된 일에서 에녹은 자주 이성을 잃었다. 의처증 꿈나무의 편견 섞인 시선을 온전히 믿으면 곤란했다.
“난우 씨가 제 우상이라는데 태평양 대서양 건너는 것쯤 뭐가 대수야. 유학 준비하느라 자퇴하고 시간도 여유롭다면서. 배우가 돼서 열성팬 심리도 의심하는 네가 더 이상해, 내 보기엔.”
햇볕 내리쬐는 주차장에서 에녹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보면 안다니까. 그……, 아, 암튼 진짜 보면 알아.”
에녹은 더 설명하길 포기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루스는 쯧 하며 보조석에 탔다. 육중한 팬텀이 부드럽게 햇살을 가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정운은 마담투소 박물관 근처에서 픽업했다. 루스는 뒷좌석에 몸을 실은 이정운에게 일단 악수부터 청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난 루스 커넬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전 이정운이에요.”
이정운의 손은 연주자들이 그러하듯 굳은살이 느껴졌다. 무심하게 훑어 본 얼굴은 동양인을 기준으로 제법 흰 편이었다.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가 낯익은 듯 낯설었다. 검붉은 긴장이 습윤하게 젖어 있던 정난우의 눈이 떠올라 그런 걸 거다.
“오면서 안 헤맸어?”
루스가 몸을 바로 하자 에녹이 물었다. 이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씨 다 알아보고 말 다 통해서 안 어려웠어요. 셔틀버스 타니까 한 번에 오기도 하고요.”
“그래도 공항에 있으라니까. 내가 부른 거라 픽업해 주겠다는데 굳이 싫다는 건 뭐야.”
“부른 건 밀리건 씨인데 오겠다고 정한 건 저니까요. 그 정도로 폐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똑 부러지네, 루스는 차창 턱에 팔꿈치를 걸쳐놓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에 반해 에녹은 꽉 막힌 놈이라며 첫인상 점수에서 더 마이너스를 줬다.
“아무튼 시간 내서 와줬으니 맛있는 거 사 줄게. 호텔도 좋은 데 잡아 주고. 해산물 좋아하나? 나 잘 가는 로브스터 전문점 있는데 괜찮으면 거기 가고.”
이정운은 ‘괜찮아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해산물은 입에 달고 살았던 터라 무엇보다 친숙했다. 느끼한 스테이크보다는 그쪽이 입에 더 맞을 거다.
“일단 가는 길에 가져온 건 저한테 주세요.”
루스는 뒷좌석으로 상체를 틀며 한 손을 내밀었다. 이정운은 메고 온 백 팩 안에서 뜯어진 상자와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
루스는 자세를 바로하고서 카드부터 휙 들춰보았다. 인쇄된 문구는 에녹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나의 난우, 당신은 결국 에녹 밀리건도 망치게 될 겁니다.」
“이 뒤로 펜션에 또 온 건 없죠?”
루스가 묻자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미국 갈 때 전해드린다고 뭐 도착하면 뜯지 말고 가지고 계시라고 말씀드려 뒀는데 아직 없었어요.”
그랬을 거다. 주치의에게 붙여 둔 사람에게 별 연락이 없는 지금, 만약 소포가 하나 더 도착했다면 그거야말로 골치였다.
“어떤 것 같아?”
에녹이 성급하게 물었다. 루스는 창턱을 지탱한 팔을 세워 턱을 괴었다. 한껏 내리뜬 눈으로 불쾌한 카드를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나 사이코메트리 아니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머리 모아 생각했던 딱 그 선이야.”
어차피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에녹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브리프케이스에 카드와 뜯긴 상자를 갈무리해 넣었을 때였다.
“의심 가는 용의자가 있는 건가요?”
잠자코 있던 이정운이 불쑥 물었다. 루스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있긴 한데, 자세히 말하기가 좀 그래요.”
“잡을 수는 있어요?”
“왜. 걱정 돼?”
에녹이 룸미러를 힐긋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정운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길까 걱정이에요. 평창에까지 소포 보낼 정도면 뭔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게 연기면 쟤는 배우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스는 흐리게 웃었다.
“학생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 건 어른들한테 맡기는 거예요. 우리도 다 생각이 있고 착실하게 준비 중이니까 이 건은 마음 놓고 잊고 있어도 돼요.”
“알겠습니다.”
이정운은 차분하게 대답하고 깔끔하게 물러섰다. 질척거리지 않는 점에서 루스는 그에게 좀 후한 점수를 얹어 줬다.
에녹은 자연스럽게 카 오디오를 작동시켰다. 차내로 여리고 애처로운 선율이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라흐마나노프의 보칼리제였다.
에녹은 내리깐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또 버릇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정난우가 뽑아내는 보칼리제의 물기 어린 선율에 올라탄 바람 소리는 제법 매력적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 들었지만 루스는 새삼 눈을 가늘게 떴다. 에녹의 감성이 나날이 풍부해지는 게 제법 흡족했던 거다.
정난우의 선율을 따라가는 휘파람소리는 무대 위의 외로운 검투사를 싸매 안듯 섬세하고 뜨거웠다. 마치 에녹이 실제로 정난우를 푹 감싸 안는 것처럼.
보칼리제가 막 끝났을 때 , 루스가 불쑥 제안했다.
“에녹. 너도 OST 작업해야겠다.”
에녹은 황당하다는 듯이 짧게 곁눈을 흘겼다. 악기 하나 못 다루고 가창력도 보통 수준인 저한테 이 무슨 망발이냐 싶었던 거다. 그러나 언뜻 본 루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풀잎처럼 싱그러운 초록의 눈에 선명한 불꽃이 어른거렸다.
그가 목소리만큼은 무심하게 말했다.
“비루한 음악적 감성에도 휘파람 하나는 쓸 만하네. 협연해 봐, 난우 씨랑. 꽤 멋진 게 나올 거야.”
에녹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어려운 것도 아니라 그냥 선선히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정운이 조심스레 말을 붙여 왔다.
“저, 죄송한데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말 해, 에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영화에 예전에 강도영 씨랑 정난우 씨 즉흥 이중주 장면도 들어가나요?”
아, 그 장면.
루스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한숨 섞어 대답했다.
“그 장면이 분명히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그 부분은 다른 걸로 대체해야하나 고민 중 입니다.”
“왜요?”
“크리스토퍼 강이 거절했거든요. 나는 당연히 그가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죠. 난우 씨를 그 정도로 리드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있을까가 문제입니다. 테크니션이야 널렸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뭔가 강렬한, 모르는 이들이 듣기에도 두 악기가 그 순간 극명하게 서로를 향해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 아무 피아니스트나 데려다 놓고 난우 씨랑 맞춰볼 수도 없고, 그래서 고만 중이에요.”
이정운은 아쉽다는 듯이 옅은 한숨을 지었다. 루스가 헤프게 흘리듯이 말을 이었다.
“학생도 피아노 친다면서요, 난우 씨 만나게 되면 한 번 해 봐요. 혹시 또 아나. 둘이 상성이 생각 외로 잘 맞을지.”
“제가 그정도 실력이…….”
“아, 누구 맘대로?”
이정운이 겸손하게 거절할 틈도 없었다. 에녹이 거친 음성으로 불만을 씹어뱉었다. 벌레라도 삼킨 것처럼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루스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일침을 날렸다.
“너 오케스트라 지휘자 선생님들은 위장이 꼬여서 어떻게 보냐?”
“참는 거지. 난 이성을 가진 짐승이니까.
지랄도 참 가지가지라며 루스는 치를 떨었다.
식사 후 이정운을 호텔에 데려다주고서 에녹은 곧장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녀석을 내려준 지 5분도 안 돼서 쟤 정말 안 이상하냐고 물었다. 루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 의처증 새끼야. 난우 씨 너 때문에 숨도 못 쉬고 살겠다. 나이에 비해서 차분하고 속도 깊어 보이던데 뭐가 문제야?”
“진짜 이상한 거 1그램도 없어?”
“적어도 애 자체는 바르게 보여. 다만 그 학생이 난우 씨한테 뭔가 특별한 감정이 있느냐가 문제라면, 그건 그런 것 같기는 해.”
“저 애송이가 내 라이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에녹의 눈초리에 예민한 날이 섰다. 루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넌 생각이 그 쪽으로 밖에 안 돌아가냐. 난우 씨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잖아. 스토커가 혹시 무슨 해코지는 안 할지.”
루스의 단언에도 에녹은 계속 인상을 썼다. 뭔가가 자꾸 갉작거리는데 저도 모르고 루스도 모르니 정말 제가 예민해져있는 건가 싶기는 했다.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고심하는 사이 차는 금방 집에 도착했다. 둘은 병맥주를 따 1층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배우질 해 먹는 나도 평생 안 당해 본 악질 스토킹, 걔는 왜 그렇게 들러붙나 몰라.”
에녹은 늘어지듯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서 중얼거렸다. 루스는 브리프케이스에서 꺼내 든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이제 슬슬 액션이 올 때가 됐는데…… 설마 이대로 쉽게 포기하려는 건가.
2주 전. 정기 상담일에 정난우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다만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다른 병원을 찾아볼 셈이라며 통보를 했다.
정난우는 스토킹 신고를 접수했다는 사실을 주치의와의 상담에서 밝힌 바가 있었다. 그 뒤로 호텔에 전해지던 선물은 평창으로 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모든 단서를 다 충족하고 있는 건 주치의뿐이었다. 이것만은 명백했다. 공범자가 있을지 여부는 아직 속단하기 힘들지만,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타입은 스스로를 특별히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심부름꾼은 둘지언정 무언가를 같이 꾸밀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루스는 맥주 든 병을 허공에서 몇 번 돌리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난우 씨를 납치, 감금했다던 범인 말이야. 동양인?”
뜬금없는 질문에 에녹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혼혈 아닌 완벽한 동양인으로 보였어.”
“놈한테 죽은 아들이 있다고 했지?”
“그랬지.”
“죽은 건 확실한가?”
“확실해. 난우 입원해 있을 때 그건 크리스토퍼 강 측에서 철저하게 확인해 뒀다고 했어. 혹시 보복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랬겠지. 루스는 어차피 필요 없는 질문에 당연히 돌아온 대답을 받아들였다. 에녹이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아니. 아주 만약에 네 눈이 이번만큼은 나보다 더 정확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 봤어. 타인은 볼 수 없는 미묘한 감정 같은 거. 연인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걸 만약 네가 아까 그 학생에게 느낀 거라면.”
“그런 거라면?”
“범인이 난우 씨를 감금하는 내내 그런 말을 했다고 했지. 네가 내 아들을 닮아서 그렇다, 네 눈이, 네 눈빛이, 네 눈매가 닮았다. 네가 그런 눈으로 웃어주지만 않았어도…….”
루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빛을 비스듬히 흘렸다.
“그 애 눈매가, 묘하게 난우 씨랑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잠깐 네 가능성을 떠올려 본 거고.”
에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오 교수가 아주 길길이 날뛰면서 경찰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고 했어. 나름 데리고 살면서 보호자 역할 했는데 그 부인도 충격이 엄청났겠지. 그 쪽에서 실수는 없었을 거야.”
루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쓸데없는 가설이었던 거다.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킬 때였다. 속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 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드는 사이 에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를 세 병 더 챙겨와 앉으려는데, 무심결에 멈칫하고 말았다.
휴대폰을 귀에 댄 루스의 표정이 묘하게 굳은 듯 웃는 듯 그 경계에 걸쳐있는 거다. 상대방이 말하는 바를 한참 듣던 그는, 이제 온전히 기가 막힌다는 듯 바람 새는 웃음을 지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약속한 보수는 물건 받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아뇨. 계속 감시해 주세요.”
직감적으로 에녹은 통화 상대를 눈치 챘다. 주치의에게 붙여 둔 사설 탐정일 거다. 주로 정치공작 같은 큰 의뢰만 받는 이라던데, 후한 보수에 그는 흔쾌히 일을 맡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부터 시작해 도청, 절도, 사이버감시에도 유능한 베테랑이라고 했다.
“뭐야, 뭐 나왔어?”
루스가 전화를 끊자마자 에녹이 물었다. 루스는 혀로 볼 안쪽을 느리게 훑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센터가 있대. 받는 의뢰는 배달이 안 되는 식사를 포장해서 가져다준다거나, 이벤트업체를 연결해서 프러포즈를 도와준다거나, 뭐 그런 자잘한 심부름을 해 주는 곳이라네. 주로 홈페이지나 유선 상으로 일을 받는데, 놈이 오늘 거기에 접촉했어.”
“내용은?”
“소포 하나와 메모 한 장을 사무실 우편함에 넣어둘 테니 그걸 메모에 적힌 곳으로 보내달라는 거야. 발송 후 제가 지시한 대로 홈페이지에 비밀 글을 남겨두면, 확인 후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했대.”
“그게 그거라는 거지? 난우한테 질척거리던 씨발스러운 거.”
대답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드디어 꼬리를 붙잡은 거다. 에녹의 짙푸른 안광이 칼날처럼 번득였다.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루스는 진정하라는 듯이 그의 어깨 한쪽에 손을 올리며 대꾸했다.
“어쨌든 증거는 잡았어. 이제 남은 건 네 선택뿐이야. 어떻게 할래?”
에녹은 아랫입술 한쪽을 지그시 잇새에 문 채로 길게 생각에 잠겼다.
*
“에? 공연장이 무너져요?”
정난우는 휴대폰을 든 채 황망히 눈만 깜빡거렸다. 한태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폭삭 무너진 건 아니고 삼층 객석 일부가 낡아서 떨어져 내렸대요. 그래서 지금 단원들도 그렇고 오케스트라 관계자들도 그렇고 다 정신 없다고 합니다.”
“인명피해는요?”
“공연시간 아니라 다친 사람은 없대요.”
다행이네요, 하며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태영이 곤란하는 듯이 미간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럼 이제 어쩌죠? 본의 아니게 닷새 휴가를 얻어 버렸네. 그냥 이탈리아로 바로 갈까요?”
다음 스케줄을 염두에 둔 제안이었다. 정난우는 슬금슬금 눈을 굴리다가 한태영의 옷깃을 툭툭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저기…….”
“…왜요. 왜.”
너 설마 또 LA 가자는 건 아니지? 이 지구 반대편에서 네 뜨거운 애인 보러 날아가자는 거 아니지? 난우야, 형 너 그렇게 안 키웠다.
한태영이 불안해하며 미간을 움직였다. 하지만 점점 밝아지는 표정과 급격히 혈색 도는 뺨은 이미 대답을 미루어 짐작케 했다.
“우리, 우리 LA 가요. 가면 안 될까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한태영은 상처 받은 소녀처럼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쪼그려 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정말 애인에 홀딱 빠지면 다 소용 없는 거였다. 예전에는 사흘만 비어도 한국 가자 조르더니 이제는 제 애인 만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아뇨. 안 될 거 있나요. 고용주가 가자면 고용인들이야 실처럼 딸려가는 건데요.”
한태영은 체념하듯 중얼거리며 율리안에게 항공권 수배를 명했다. 율리안이 창구로 가 있는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힐긋 본 정난우는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한태영이 힘없는 투로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정난우는 일순 표정을 지웠다. 저만 너무 들떠있었던 걸 깨달으니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연신 축여댔다.
한태영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난우 씨가 음악 외의 뭔가에 그렇게 무섭도록 집중하는 걸 보니까 그냥 신기해서 그러지.”
정난우는 손 안에 쥔 녹음기를 엄지로 꾹꾹 쓸었다. 깔끔하게 붙여 놓은 견출지에는 ‘동화책’이라고 씌어 있었다. 들어봤는데, 뭔가 역동적인 웅변 어투가 담겨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마치 바로 곁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 나직하게 얘기하는 투였다. 에녹의 목소리 컬렉션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서 제일 자주 간택되는 놈이었다.
“태영 씨.”
나지막이 부르자 그가 네, 했다. 정난우는 여전히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태영 씨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을 겨우 이겨낸 경력이 있다면, 그 고단한 시간들을 떠올리는 건 참 힘든 일이겠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한태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난우는 눈가를 흐리게 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이 갑자기 꿈에 나타나 그 고난의 보상으로 내가 너에게 감당키 힘들 정도의 행복을 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게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 했다면, 과거가 더 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겠지요?”
“…뭐, 그렇게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야 그렇겠죠.”
정난우는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는 제가 이제껏 지나왔던 아프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다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종종 생각해요. 살아있길 잘했다, 견디길 잘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거다. 내가 감히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주려고, 그냥 주기는 아까우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셨구나, 그런 생각이 참 자주 들어요.”
헐…….
한태영은 제가 다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한 만큼 가감 없이 내뱉어 버리는 저 언어습관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앉은 게 에녹이었다면 아마 당장 이성을 잃고도 남았을 거다. 에녹이 왜 정난우만 보면 그렇게 흐물흐물 녹아 정신을 못 차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에녹은 제 영웅이고. 제 태양이에요.”
정난우는 대합실 창문 너머 창창한 오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우주처럼 까만 눈동자에 따가운 볕이 듬뿍 스몄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철벽처럼 가로 막던 불투명한 선글라스는 요새 통 볼 수가 없었다.
늘 어둠 속으로 숨어들던 정난우가 빛을 보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누가 감시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완전한 제 의지로.
정난우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모습이었다. 뭐가 뭔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작은 변화조차 그 남자의 힘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거다.
한태영은 혀를 차고는 중얼거렸다.
“뭐, 난우 씨가 그렇다는데 제가 더 뭐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서로에게 긍정적 변화를 주는 사랑이라면 할 만 하겠다 싶긴 하네요.”
“네. 열심히…… 정말 열심히 따라가 보려고요. 에녹만큼은 못 돼도 옆에 서 있기 부끄러운 건 저도 싫어서…….”
정난우는 셔츠 속에 숨겨 놓은 펜던트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그 순간, 한태영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난우 씨가 밀린다고 누가 그래요! 절대 , 절대 아니라고! 누가 봐도 당신이 아깝지! 제발 자각 좀 하고 살아요. 난우 씨. 당신은 인류의 재산이라고, 재산!”
목청이 어찌나 큰지 몇 쌍의 시선이 슬쩍 달라 붙어왔다. 정난우는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귀를 붉혔다.
“태, 태영 씨, 조용히…….”
“웅크려들지 마요. 그 사람이 얼마를 벌건, 얼마나 잘 났건, 결국 봉 잡은 건 그 쪽이지 당신이 아니라고.”
당신이 아니었으면 어디 그 바람둥이가 정신이나 제대로 차리고 살았겠냐며 한태영은 열변을 토했다. 열에 아홉은 에녹이 아깝다고 할 텐데,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한참 후 율리안이 돌아오고 나서야 한태영의 일방적 소동은 끝을 맺었다. 율리안은 4시간 후 이륙하는 항공권을 발권해 왔다. 운 좋게 빈 좌석이 있었던 거다. 비행 소요시간은 20시간 남짓이었다.
“저,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요. 맘대로 해요.”
한태영은 득도한 사람 마냥 휘휘 손사래를 쳤다. 정난우는 휴대폰을 꼭 쥔 채 인적이 드문 구석을 찾아 그대로 처박혔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에녹은 전화를 받았다.
《음? 이동해서 전화한다더니?》
“아, 그게요…… 저, 원래는 그래야 하는 건데요. 갑자기 공연장 삼층 객석이 무너지는 바람에 취소가 돼서…….”
《그래서 지금 어딘데.》
“공항인데요.”
《당장 나한테 튀어와야지, 그럼.》
에녹이 낮은 음성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난우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지금 LA행 항공권 끊었어요.”
옅은 금속성 긁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가슴이 또 설레 무심결에 마른침을 삼켰다.
《잘했어. 언제 도착해?》
“네 시간 후에 이륙하는데, 스무 시간 걸리니까 꼭 하루 뒤에 도착해요.”
《아, 그럼 내일 딱 이 시간에 데리러 가면 되겠네. 보자, 오후 일곱시 반쯤. 알았어. 먼저 가서 딱 대기하고 있을게.》
보고 싶다, 내일 봐, 네. 저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대화를 끝냈다. 끊긴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쥐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당연하게 그를 만나러 가고, 그는 기쁘게 팔 벌려 맞아 준다. 이 소소한 행복에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나와 정난우는 제 얼굴을 한 손으로 마구 주물러댔다.
“으……, 에, 에녹…신발, 슬리퍼부터 신어야…….”
실외화로 카펫 밟는 걸 끔찍해하는 정난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알았어, 잠깐만, 에녹은 조급하게 귓가에 속삭이며 손목시계를 풀어 던졌다.
거친 손이 티셔츠 아래를 들추고 빠르게 등허리를 훑고 올라왔다. 아아, 정난우는 앓듯이 신음했다. 그의 손끝이 움푹 파인 척추의 뼈마디를 누를 때마다 벽과 그 사이에 짓눌린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에녹의 팔뚝에 걸린 티셔츠는 쇄골 아래까지 말려 올라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귀밑과 턱 아래에 사정없이 비벼졌다. 살갗이 벗겨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겨우 벗어던진 운동화가 반질반질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곧바로 입술이 잡아먹혔다. 그의 혀가 입 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강하게 밀어붙인 아랫도리는 딱딱하게 부푼 채 거칠게 비벼졌다.
그가 티셔츠를 붙잡더니 그대로 위로 끌어올렸다. 저절로 팔이 딸려 올라갔다. 입술이 떨어지자 티셔츠는 멀리 내던져졌다. 금색 펜던트가 가슴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에녹이 물기 어린 입술을 가볍게 마주대고서 말했다.
“바지 풀어. 팬티까지 한 번에 다 벗어 .”
더운 숨결이 입 주위에 흩어졌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면바지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 동안 그의 혀는 얼굴 여기저기를 핥으며 제 셔츠 단추를 끌러냈다.
그의 손 역시 자꾸만 엇나갔다.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그는 다시 용암 같은 타액을 입 안에 건네 왔다. 그는 거의 풀어헤치듯 셔츠를 내던졌다. 아랫도리도 마찬가지였다.
정난우는 숨이 헐떡거려도 착실하게 바지와 속옷을 붙들어 엉덩이 아래까지 내렸다. 스르륵, 뭉친 옷가지가 발목에 걸렸다.
그의 한 손이 허벅지 한쪽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발목에 걸쳐 있던 허물 같은 것들이 딸려오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플 정도로 혀가 빨렸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 쯤 그가 살짝 입술을 물렀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는 마치 취한 사람처럼 풀어진 눈을 정신없이 움직였다. 불같은 시선이 얼굴 여기저기를 헤매고 핥아댔다.
훌쩍 들려진 몸은 그에게 으스러질 듯이 끌어 안겼다.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다리로 휘어 감았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열기 펄펄 끓는 얼굴이 다시금 쇄골과 목에 거칠게 비벼왔다.
그는 마약중독자가 약 가루를 흡입하듯 연신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잔뜩 잠겨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
“저…저도…….”
열흘 만이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그리웠다. 정난우는 에녹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카락에서는 아직 햇볕 냄새가 났다. 그 안에 정신없이 뺨을 비비자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게스트 욕실에 설치된 실내용 핫 터브였다. 그는 한 손으로 수납장에서 수건들을 잡히는 대로 끄집어내 던졌다. 텅 빈 욕조에 반 듯하게 접어둔 새 수건들이 수북이 쌓였다.
에녹은 욕조 턱에 걸터앉아 온도를 맞추고 물을 틀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탁한 빛깔이 짐승의 발톱처럼 번득거렸다.
“씻을 여유 없으니까 씻으면서 해.”
에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어깨를 깨물었다. 읏, 하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잇자국 난 위를 혀로 덧그리며 허리를 더 당겨 안았다. 다리가 한껏 벌어져 발기한 아랫도리가 그의 근사한 복근에 철썩 들러붙었다.
목선을 따라 올라온 입술이 턱 끝에 달라붙어왔다. 그는 키스해 보라며 살짝 입을 벌렸다. 정난우는 헐떡이는 호흡 속으로 얼른 달려들었다. 아랫입술 위에 얌전히 놓인 그의 혀를 주저 없이 물었다.
안달하는 가슴을 맞대 비비며 빨자 그는 그르렁대듯이 목을 울렸다. 뒤엉킨 몸이 훌쩍 욕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슴까지 찬 물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았다. 열심히 물고 빠는데도 성이 안 찼는지, 그가 갑자기 고개를 꺾어 깊이 침투해 들어왔다.
세차게 움직이는 살덩이는 볼 안쪽을 벗겨낼 듯 문질렀다. 입천장도, 혀 아래의 폭신한 살들도, 꼼꼼하게 핥아댔다. 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깊이 파고들기도 했다.
정신을 못 차린 채 가슴만 들썩거렸다. 따라가기 벅찬 혀는 어설프게 그의 것을 건드리기만 했다. 따뜻한 온수에 노글노글하게 풀어진 몸은 거칠면서도 다정하게 매만져졌다.
긴 손가락이 허리를 주무르다 아래로 쑥 내려왔다.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곧장 항문에 닿았다. 무심결에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달래듯이 탄탄한 복부를 움직여 아래를 마찰했다. 수면이 찰랑거리며 작은 물결이 일었다. 딱딱하게 부푼 성기와 고환이 미끌미끌하게 비벼질 때마다 비음이 목 안에 고였다. 신음소리는 그의 들숨이 낱낱이 거둬갔다.
꽉 다물린 구멍은 조심조심 벌어지고 단번에 꿰뚫렸다. 아프지 않은 이물감에 허리만 조금 뒤틀렸다. 그의 것에 비하면 한없이 가는 손가락이었다. 꽉 문 내벽은 머리에 앞서 먼저 조르듯이 울렁거렸다.
그가 입술을 떼 내며 물었다.
“오늘은 직접 넣어 봐.”
“…제가…요?”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방울 맺힌 그의 속눈썹은 나른하게 반쯤 감긴 채 깜빡거렸다. 엉덩이 골에 뜨겁고 굵은 기둥이 조르듯 문질러졌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구멍은 꽉 닫혔다가 다시 움찔거렸다.
열기가 가스처럼 두개골 안을 가득 메웠다. 저도 그의 것을 얼른 안에 품고 싶었다. 정난우는 조금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잡고 넣으면 돼요?”
“손으로 감싸서 끝을 구멍에 잘 비벼 봐. 그럼 느낌이 오잖아. 그 때 넣으면 돼.”
고개를 숙여 수면 아래를 응시했다. 빤히 바라보다 엉덩이 뒤로 손을 내렸다. 검붉게 달아오른 성기가 손 안에 걸렸다. 조심히 감싸 쥐자 에녹은 신음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아래쪽을 잘 가늠해서 귀두 끝을 구멍 주위로 갖다 댔다. 손 안에 잡힌 기둥은 민감하게 툭툭 튀었다. 얼른 꽂아달라고 안달하는 것 같았다.
가쁜 숨을 흘리다가 눈을 딱 감았다. 그리고 가장 굵은 끝부분을 꾹 밀어 넣었다. 촘촘하게 다물린 통로는 억지로 살을 벌렸다. 귀두만 겨우 삼켰을 뿐인데 허리가 딱딱하게 굳어 떨렸다.
에녹은 새끼짐승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뺨을 핥아 올리며 경직된 허리를 주물렀다. 그에 긴장은 점차 풀려갔다. 조금씩 오물거려 끝까지 삼켰다. 그의 아랫배에 엉덩이가 마침내 꽉 닿았을 때였다.
“잘했어.”
에녹은 칭찬하듯 엉덩이를 숙숙 문지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전용 구멍에 들어오니 이제야 좀 진정이 되네.”
점막을 한계까지 벌리고 들어찬 것은 그의 말과 달리 안달하듯 꿈틀거렸다. 에녹은 천천히 아랫배를 움직였다. 펌프질이라기보다는 틈 없이 조인 내부를 음미하는 듯했다.
“아, 잠…….”
잠깐만요, 정난우는 흐느끼듯이 애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에녹은 정난우의 토실한 엉덩이를 양손으로 붙잡아 바싹 당겨 안았다.
“아파?”
좀 더 벌어져야 되나, 그가 물었다. 정난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턱을 물고 핥으며 조그맣게 솟은 유두를 엄지로 눌렀다. 나긋나긋 돌리자 군살 없는 등허리가 점차 느른하게 풀려갔다.
“일단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에녹은 조금만 참으면 금방 기분 좋아지게 해 주겠다며 유혹했다. 조각처럼 높은 코끝이 슥슥 뺨에 비벼졌다. 정난우는 물 젖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더운 열기가 질척하게 손금에 감겨왔다. 묽게 풀어진 눈동자도 통통하고 붉은 입술도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매번 홀려버렸다.
“그럼 좀 짧게 한 번만…….”
“응. 금방 끝내 볼게.”
허락이 떨어지자 에녹은 곧장 허리를 쳐 올렸다. 전류 같은 게 급작스레 등허리를 수직으로 꿰뚫었다. 짧고 낮은 비명과 함께 무너지려던 몸을 에녹의 팔이 강하게 붙들었다.
에녹은 무식하다싶을 만큼 퍽퍽 박아 넣었다. 균형 잃은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연신 비명이 젖은 공기를 갈랐다. 한 번 나갈 때마다 젖어서 다시 들어오는 불기둥은 무지근한 고통과 야릇함으로 점막을 벌리고 쑤셔댔다.
에녹은 어깻죽지를 물었다. 흡혈귀처럼 빨았다. 못 본 기간을 증명하듯 먹음직스런 몸에는 제가 남긴 자국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쇄골과 어깨에 붉은 자국을 집요하게 다시 새겨 넣었다.
“흑…아! 하, 아아!”
정난우의 신음에서는 점점 날카로움이 무뎌져 갔다. 비음에 절인 달콤한 목울음이 찰랑이는 수면 위로 눅눅히 풀어졌다. 점차 물렁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열기 일렁이는 눈으로 집요하게 주시했다.
에녹은 제 볼록한 귀두로 전립선 아래를 지나며 수도 없이 왕복운동을 했다. 눕혀놓고 위로 쑤셔주면 자지러지는 포인트였다.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하니 일단 아껴둬야 했다.
에녹은 엉덩이를 한쪽씩 손에 쥐고서 벌렸다. 혀끝을 세워 목울대를 긁어주니 정난우는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렸다.
“흐으…응…아, …에녹……!”
에녹은 대답 대신 허리를 깊숙하게 구부렸다. 사납게 찍어 올리자 정난우는 몸서리치며 어깨를 붙들어 왔다. 물기에 미끈거려 자꾸만 헛손질을 하더니 아예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평평한 가슴팍이 시야 아래에서 흔들렸다. 퍽퍽 박아 넣을 때마다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여 보조를 맞췄다. 찰박찰박 물소리는 음란한 공기를 더욱 더 부추겨 달궜다.
에녹은 고개를 숙여 미니 오스카 펜던트를 잇새에 물었다. 벌어져 신음하는 정난우의 입술에 갖다 댔다. 물어, 명령조로 나간 말은 거칠게 뭉개져 있었다.
정난우는 흐리멍덩한 눈을 내렸다. 그리고 입을 벌려 그걸 받아 물었다. 금색의 작은 펜던트가 혈색 오른 입술에 반쯤 빨려 들어갔다. 팬던트는 십자군 칼을 든 남자 형상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질투가 늑골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충동을 이기지 못해 내뱉었다.
“정성껏 빨아 봐. 내 거기라고 생각하고.”
정난우는 조금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가벼운 몸은 수직으로 흔들렸다. 윽, 윽, 억눌린 신음만 내뱉다가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던 금색의 발까지 그 탐나는 안으로 쑥 밀려들어갔다.
하아, 에녹은 짙은 한숨을 뿌리며 펜던트를 빨고 있는 입술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아직 저기에 한 번도 못 넣어 봤다. 네가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을 때 직접 지퍼를 풀고 빨아보라고 숙제를 내 준 상태였다.
에녹은 더딘 학생의 어설픈 예행연습을 지켜보았다. 정난우의 뺨은 연신 움직였다. 손가락만도 못한 걸 물고서 정성스레 움직이고 있을 혓바닥을 생각하니 뇌혈관이 지끈거렸다.
혈관이 뜨겁게 용솟음치는 제 걸 저렇게 열심히 빨아준다고 상상하면 머리가 타들어갈 것처럼 흥분됐다. 말랑한 점막을 들쑤시는 움직임은 느려지는 법 없이 사나워져만 갔다.
“상상하고 있어? 맛이 어때?”
에녹은 정난우의 성실함이 기계적으로 바뀌기 직전에 다시금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발갛게 혈색 핀 뺨이 더 농밀하게 물들었다.
“네, 네…… 그, 그런데…….”
정난우가 입을 벌릴 때마다 작은 동굴 안에서 뒹굴거리는 펜던트가 언뜻언뜻 보였다. 에녹은 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제 것이 들락거리는 구멍 주위에 손끝을 세워 꾹꾹 매만졌다.
주름 하나 없을 만큼 팽팽히 벌어진 곳은 독립된 자아와 점성을 가진 것처럼 흡족하게 제 걸 물었다. 물어뜯듯 달려들었다가 유혹하듯 울렁거렸다.
“그런데?”
“사, 상상이 잘…안 돼…으흣……너, 너무 빨라요……!”
정난우는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앉은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다 결국 눈물을 뽑아냈다. 눈 밑 살에 번들거리는 물기가 덧씌워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목걸이 줄은 그 입안에 들어 있었다.
에녹은 토해내듯 숨을 몰아쉬며 속도를 죽였다. 성기를 꽉 조인 점막은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마치 터뜨릴 듯이 졸라대는 거다. 위아래가 다른 말을 하는데 어디다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몽롱하게 풀어졌다. 뇌수는 아마 이 욕조 물처럼 찰랑거리고 있을 거다. 수직으로 박아 넣던 걸 부드럽게 돌려주자 정난우는 흐으, 하며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왜 상상이 잘 안 돼?”
벌어진 구멍을 문지르던 손으로 고환을 자극했다. 갈고리처럼 휜 손가락들이 제 살덩이를 굴릴 때마다 정난우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너무 작아서…….”
에녹은 실소하며 속으로 짧은 욕설을 씹었다.
“더 큰 걸 넣어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닌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맹랑한 게.”
에녹은 노려보듯 눈 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냥감 겨누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에 정난우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비해 쏟아져 나오는 음성은 부드러웠다.
“이제 뱉어. 슬슬 기분 나빠.”
정난우는 얼른 펜던트를 뱉어냈다. 에녹은 타액으로 음란하게 번들거리는 걸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기다리다 목 빠지겠군.”
관대하게 무기한 숙제 내 준 건 본인이면서 에녹은 불평했다.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아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에녹은 바닥에 수북이 가라앉아 있는 수건들을 차곡차곡 욕조 턱에 포개어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정난우를 눕혔다.
욕조 턱의 폭은 팔뚝만 했다. 그래서 견갑골 위로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처럼 허공에 붕 떠있었다. 정난우는 불안한 자세에 에녹의 목을 꽉 감아서 안았다. 에녹이 얕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등 아파?”
정난우는 등허리를 조금 비틀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안 아파요.”
물을 흠뻑 흡수한 천들은 딱딱한 대리석의 촉감마저 흡수했다.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를 감아도 톡 튀어나오는 척추의 마디마디가 배겨 아프지는 않았다.
에녹은 한쪽 눈가를 좁히며 정난우의 허리 옆으로 한 팔을 짚었다. 아랫배를 조금 밀어 올리자 몸에서 흐르는 물이 교접부로 줄줄 흘러 고였다. 아랫배 위 척척한 물기를 한 손으로 슥 걷어낸 에녹이 눈을 내리깔았다.
“간다.”
정난우는 물처럼 흐르는 결 거친 음성을 입을 벌려 받아 마셨다. 에녹은 한 손으로 불안하게 떠 있는 정난우의 목덜미를 감싸고는 곧장 허리를 짓누르듯 펌프질을 시작했다.
아까 문질러 스치기만 했던 전립선을 망설임 없이 세게 긁어 올렸다. 정난우는 파드득 몸을 떨며 소스라쳤다. 젖은 교성이 물방울들에 엉겨붙어 온 사방으로 튀었다.
“아! 아앗! 학, 윽! 아아아!”
습기 찬 내부에서 신음은 여러 번 굴절되었다.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눈 꼬리를 느리게 타고 흘렀다. 에녹의 혀끝이 점을 찍듯 눈가를 훑어갔다. 삽입할 때마다 수축하는 옆구리도 연신 주물러졌다.
뜨겁게 들락거리는 살덩이는 온 사방을 헐어낼 것처럼 움직였다. 지져지는 듯한 감각을 압도하는 화끈한 쾌감에 정신없이 휩쓸려갔다.
몸을 비틀며 떨 때마다 등에 짓눌린 수건 뭉치는 찍찍 물을 내뱉었다. 그림자가 덮쳐오고 후텁지근한 숨결이 눈꺼풀을 뭉겠다. 정난우는 그의 허리를 더 휘감아 당기며 혀를 내밀었다.
키스해 주세요. 정난우는 앓듯이 조르며 에녹의 목을 당겼다. 살덩이 꽂힌 엉덩이도 요부처럼 꿈틀거렸다.
에녹은 짙은 탄식을 쏟아냈다. 오감이 모두 짜릿해 머리가 얼얼했다. 고개를 꺾어 기꺼이 그 달콤한 혀를 제 안으로 끌어왔다. 잇새로 씹고 입술로 비비고 타액을 삼켰다.
“으…응…….”
허리를 감은 다리가 일순 경직했다. 허벅지가 꽉 조여들며 정난우는 턱을 젖혀 들었다. 힘껏 빨며 뒷머리를 받쳐주었다. 오르가즘,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얼굴을 마음껏 감상했다.
약에 취한 듯 검은 동공이 불투명했다. 정난우는 입술을 한껏 벌려 끙끙대는 신음을 몇 차례에 걸쳐 배출해 냈다. 뽀얀 정액이 툭툭 튀어 젖은 나신 위에 꽃잎처럼 흘어졌다.
에녹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진득하게 반복적으로 핥아 올렸다. 감상하느라 느리게 조절하던 허리를 다시 세차게 움직였다.
정난우는 사정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안을 들락거리는 뜨겁고 딱딱한 침략에 파드득 떨어댔다. 풀어진 채 물결을 타던 내벽이 다시금 꽉 조여들었다.
하아, 죽여주네, 에녹은 깊이 상체를 내리며 만족스러운 탄성을 흘렸다. 온 사방으로 귀두 끝을 찔러 올렸다.
정난우는 말랑하게 쪼그라든 성기를 아랫배에 비벼오며 아예 흑흑 울었다. 더 이상은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저려요, 이제 그만 안에다 싸 주세요, 정난우는 학습된 말을 그냥 막 내질렀다. 그렇게 자극해주지 않으면 몇 십 분이고 계속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야한 말이건 야한 행동이건 모조리 쏟아 부어야 이 끔찍하기까지 한 쾌감을 멈출 수가 있었다.
에녹은 조금 질기게 그 입술을 핥으며 더 난잡하게 구멍 안을 헤집었다. 여기저기 콱콱 쑤시던 게 전립선을 정확히 찔러오면 정난우는 또 애처럼 울 수밖에 없었다.
“으, …… 에녹, 제발요. …제발, 네?”
싸 주세요, 먹고 싶어요, 정난우는 아랫배가 당길 때까지 구멍을 조였다. 힘이 잘 안 들어가서 생각대로 안 됐다. 뿌리까지 박혀올 때마다 엉덩이를 흔들었다.
내려다보는 눈은 불투명하게 잠긴 심해 같았다. 모든 걸 흔적 없이 집어삼킬 것 같은 바다 빛깔이었다. 정난우는 허겁지겁 그의 눈동자를 핥았다. 뭉글거리는 시야에서 그제야 그가 짧게 웃었다.
“알았어. 그만 싸 줄게. 잘 물고 있어.”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자 정난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후두둑 뺨에 번졌다. 에녹은 제 아랫입술을 핥고는 곧장 절정까지 내달렸다.
길고 단단한 근육이 감싼 에녹의 다리는 욕조 물에 잠겨 있었다. 거칠게 삽입할 때마다 수면은 마치 파도처럼 크게 일었다. 철썩 와서 부딪치고 수십, 수백 개의 방울이 되어 허공을 날았다.
에녹은 턱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두피에 스며있던 땀이 투명한 물에 섞여 턱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혀 내밀어.”
에녹이 말했다. 정난우는 빨간 혀를 한껏 내밀었다. 그 위에 땀인지 물인지 알 수 없을 물방울들이 점점이 안착했다. 에녹은 그 유혹적인 늪지
를 태울 듯이 주시하며 한계까지 살을 벌리고 깊은 안쪽을 들쑤셨다.
무릎 아래 짓이겨지는 수건 뭉치가 짐승처럼 빠득빠득 그르렁거렸다. 마른 상체를 지탱한 팔뚝에서 섬세한 근육들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에녹은 정난우의 골반을 쓸다가 옆구리를 주물렀다. 밋밋한 가슴에 이를 세우자 정난우는 몸을 움츠리며 흐느꼈다.
유두를 물고 빨면 무심결에 가슴을 내밀며 허리를 흔들었다. 꽉 물린 성기도 자극적으로 흔들렸다.
에녹은 저릿한 쾌감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거친 숨결이 붉게 돋은 울혈 위로 쏟아졌다. 그 붉은 자국은 순식간에 낭자하게 주변으로 전염되어 갔다.
잔인하다 싶을 만큼 몰아붙여질 때마다 정난우는 비명과 교성을 번갈아 냈다.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지만 상체를 휘감은 다리는 더 뱀처럼 휘감아 왔다.
뭔가가 부족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에녹은 눈가를 찌푸렸다. 무릎을 올려 욕조 벽을 찍어 누르자 자세는 더 불안해 정난우는 다급히 더 매달려 왔다.
꽉 잡아, 귓가에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등을 받쳐주던 팔을 뺐다. 에녹은 양 손으로 정난우의 허리를 붙들어 단단히 끌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위로 쿵쿵 찍어 올렸다.
목덜미를 꽉 안은 정난우는 온 몸을 떨어댔다. 엉덩이 사이에서 빠르게 들락거리는 성기는 피에 젖은 흉기처럼 검붉게 번들거렸다.
거친 숨이 젖은 공기에 풀어졌다. 풀죽었던 정난우의 성기는 또 발갛게 익어 올랐다. 얼른 끝내달라고 칭얼거려도 예민한 몸뚱이는 늘 착실하게 반응했다.
뜨거운 시선을 미끄러뜨려 바싹 붙은 복부와 가슴까지 타고 올라갔다. 입을 벌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몽롱한 눈을 보는 순간, 에녹은 어금니를 꽉 사려 물었다.
오싹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뇌혈관까지 순식간에 솟구쳤다. 완만하게 치솟던 절정의 파도가 급박한 해일로 변해 모든 감각을 휩쓸었다.
아…….
에녹은 짧게 탄식하며 눈가를 좁혔다. 탁하게 잠겼다가 화끈하고 짧게 터진 신음을 코언저리에 뿌려주었다. 정난우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소량의 정액을 또 뱉어냈다. 극치의 쾌락이 달아오른 몸에 엉겨등었다.
“으…아아…….”
정난우는 마음껏 몸을 뒤틀며 눈을 즐겁게 했다. 에녹은 흉물스레 핏줄 돋은 제 성기를 반만 빼 냈다가 다시 끝까지 쑤셨다. 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물소리와 섞여 더없이 음란했다.
에녹은 고개를 깊이 내려 젖은 뺨을 맞대 비볐다. 구멍에 뿌리까지 삽입한 성기를 부드럽게 돌려가며 몇 번에 걸쳐 방출했다.
젖고 있어, 더 조여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봐, 저열하고 음탕한 말들을 움찔거리는 귓바퀴 안쪽에 쏟아 부었다. 정난우는 그저 무력하게 비음만 흘리며 네, 네, 했다.
툭 쏟아진 걸 시작으로 이내 퍽퍽 흘러나온 정액은 내벽에 샅샅이 발라졌다. 그 느낌이 생생했다. 긴 토정이 끝물을 보인 순간에는 뿌리까지 먹이고서 아랫배만 살살 움직였다.
제 안쪽이 미끈하게 젖어들어 마찰되자 정난우는 온 몸을 떨며 자지러졌다. 말랑하게 죽은 성기를 꽉 틀어진 내부는 풀어지지 않고 다시 착 붙어 꿀렁거렸다.
“좋아?”
에녹은 탁하게 쉰 음성으로 물었다. 정난우는 물기 젖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며 할딱거리기 바빴다. 네, 늘어진 대답을 느리게 뱉어냈다. 고개를 끄덕인 건 그 다음이었다.
에녹은 제 걸 빼지 않고 그대로 욕조에 다시 앉았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온 몸은 쉽사리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움찔움찔 떨렸다. 작은 물결이 진동처럼 수면 위로 퍼져나갔다.
에녹은 욕조 물을 끝까지 채웠다. 간헐적으로 튀는 등허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정난우는 힘없이 머리를 어깨 위에 기대왔다.
에녹은 귓바퀴를 입술로 물어 당기며 고개를 바로 세워주었다. 좀체 초점을 못 잡는 눈빛이 허공을 헤매다 겨우 제 자리를 찾았다.
에녹은 빤히 눈을 맞춘 채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정난우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헐떡이면서도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느리고 부드러운 리듬으로 입술을 핥아왔다.
가슴에 저릿하고 뭉클한 덩어리가 푹 떨어져 터져버렸다. 에녹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쉰 목소리를 깔았다.
“조금 쉬었다가 또 먹자. 알았지?”
에녹은 축축한 입술로 열꽃 핀 뺨을 수도 없이 눌렀다. 정난우는 간질 간질한 눈 꼬리를 떨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오늘은 많이 먹을게요.”
에녹의 헤프게 풀어진 눈동자에 일순 정적이 스쳤다. 근사한 선의 눈썹도 꿈틀 반응했다. 빤히 쳐다보자 정난우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눈시울을 휘고 있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싶으면서도 차츰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하여간 희한했다.
에녹은 앓는 듯한 웃음으로 목을 울리며 물기 흥건한 귀밑 턱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혀까지 제 이상형에 완벽히 들어맞아 가는 거였다.
“넌 진짜 날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아.”
정말 미치게 좋아, 속삭이는 음성은 탁하고 눅눅하고 거칠었다. 정난우는 에녹의 젖은 목덜미를 꽉 감싸 안으며 기쁘게 웃었다.
*
봄이 무르익은 공기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초저녁부터 달이 어둠을 헤 치고 사위를 은은히 밝혔다. 구름 사이로 흐드러진 달빛이 필요한 테스트 촬영이라 루스는 제법 흡족해했다.
스태프들 뒤로는 구경하러 나온 일반인들이 겹겹이 띠를 둘렀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경꾼들의 눈은 에녹을 향해 있었다. 파파라치들과의 밀당 고수로 익히 이름값을 하는 에녹은 LA시민들에게 있어서도 마주치기 힘든 톱스타였다.
“에녹, 졸지 마요!”
빼곡한 구경꾼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에녹은 피로한 목을 툭툭 꺾으며 간단히 손사래만 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번 대답해 주면 끝도 없이 말을 걸어대니 도리가 없었다.
비록 조는 건 아니었으나, 에녹이 지금 지극히 무료한 상태인 건 맞았다. 원래대로라면 의자에 편히 앉아 카메라와 눈싸움만 하면 되는 거였다. 동선을 맞춘다거나 대사를 치는 작업이 아니라 그저 의류와 조명과 필름 등의 조화를 보려는 게 오늘 테스트촬영의 목적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는 작업도 아닌 게 이렇게 늘어지는 건 순전히 루스 때문이었다.
그간 풍문으로 들었던 루스 악마 설을 직접 겪고 보니 저 역시 좀 기가 질리고 말았다. 본 촬영 들어가면 저 욕심 몇 배로 뻥튀기 될 걸 예상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윔블레이 역시 루스와 앙숙지간을 형성한 지 오래였다.
디렉터와 프로듀서가 사이 안 좋은 게 어제 오늘 일이겠냐만, 아무래도 저 둘 사이는 크랭크업 이후에 영영 안 보지 싶었다. 특히나 윔블레이 감독 쪽에서 극구 피할 거다.
그 둘은 지금도 언쟁 중이었다. 깐깐하게 구는 건 루스인데 소리 지르는 건 다혈질 윔블레이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윔블레이가 덤터기 쓰기 딱 좋은 구도였다.
에녹은 득도한 사람처럼 노래나 흥얼거렸다. 그리고 오늘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정난우 구경하기에 신경을 돌렸다.
오늘은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를 더 잘라줬다. 아주 짧은 스타일보다는 이마를 반쯤 덮는 댄디 스왓컷 정도로 주문했다. 미용사는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치고 윗머리는 조금 길이를 남겨 폭신한 상태를 만들어 줬다. 예쁜 두상과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나자 주눅 든 느낌도 많이 사라졌다. 에녹은 굉장히 만족스러워 꽤 큰 팁을 남겼다.
미용실에서 나와 식사를 하고서 테스트촬영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정난우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 가도 돼요? 방해 안 될까요?’ 이러는 소리에 슬쩍 치솟은 못마땅함을 꾹 참고서 차분히 대꾸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가고 싶다면 데려 갈 거고 가기 싫다면 놓고 갈 거니까. 어쩔래.」
하고 싶은 대로…….
정난우는 그 말을 몇 번 뇌까렸다. 별 쓸데없는 혼란에서 잠깐 허우적거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정난우는 아주 장한 결심이라도 한 양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갈래요. 저도 에녹이 일하는 거 보고 싶어요.」
결심까지가 어려웠지.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다. 감정 못 숨기는 정난우는 주인 따라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아마 꼬리라도 있었으면 초당 열 번은 흔들었을 거다.
현장에 데려온 정난우는 낯선 이들에 잔뜩 기가 죽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가 모두들 자기 할 일에 바쁘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씩 낯선 환경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모양이 꼭 주워 온 고양이가 새 집에 적응 하는 것 같아 에녹의 눈에는 마냥 귀여웠다.
정난우는 지금처럼 제가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는 루스 주위만 알짱거렸다. 루스에 대한 신뢰가 제법 두터워서인지 불안한 기색은 없었다. 도리어 모든 게 다 신기해 보였다.
루스는 자기 셔츠 한쪽 밑단을 내내 헤프게 내 주었고, 정난우는 그걸 손가락 사이에 휘감은 채 졸졸 따라다니기 바빴다. 너무 옆에 꼭 달라붙어 있으니 종종 위장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촬영된 영상을 빤히 보기도 하고 궁금한 걸 묻기도 하는 걸 보면서 그런 마음도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예전의 정난우였다면 눈치만 보면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을 거다. 아니, 아예 이 자리에 오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정난우는 짧은 머리가 아직 어색한 듯 가끔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러면 그 다음은 항상 어리둥절한 눈을 한껏 치켜 떴다. 제 앞머리가 어디
로 가 버렸나 살피다가 ‘아, 잘랐지.’ 하고 납득하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그 일련의 표정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십여 년 가까이 덮고 있던 게 사라져 버렸으니 허전하기도 할 거다.
루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윔블레이에게 한 소리 할 낌새를 흘릴 때였다.
유심히 카메라를 보고 있던 정난우가 꼭 쥐고 있던 루스의 셔츠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루스는 멈칫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정난우가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무언가 열심히 설명했다. 루스는 가만히 경청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뭐야, 왜 또 저렇게 다정해.
에녹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려던 찰나였다. 루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리 와 보라고 손을 까닥였다.
에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루스가 짧게 토막 스케치를 하나 그려 보자고 했다. 예정에도 없던 일이라 에녹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 참. 잠깐만 앉아있으면 되는 걸 계속하고 있으면서 이젠 여기서 뭘 하라고?”
“아예 장면을 하나 따 보면 감이 올 것 같아. 난우 씨도 궁금해 하고.”
에녹은 못마땅하게 인상을 긋다가 마지막 말에 정난우를 내려다보았다. 까만 구슬 같은 눈이 달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상상 속에 그려 놨던 복슬복슬한 꼬리가 또 힘차게 파닥거렸다. 피식 웃음이 샜다.
“뭐가 궁금한데?”
“그거 있잖아요. 에녹이 벽 더듬어서 길을 가는데, 담 너머 음악이 들리고…….”
“아아. 눈 오는 날 내가 하늘 보는 거?”
정난우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거요!”
“그건 계절이 안 맞아서 로케 촬영해야하는 건데.”
아……, 하며 정난우는 입을 다물었다. 적잖이 낙담한 듯한 표정이었다. 에녹은 혀를 차며 손끝으로 말랑말랑한 뺨을 툭 쳤다.
“아냐. 해. 뭐 어렵다고. 긴 장면도 아닌데.”
“…아, 그럼, 감정 잘 잡을 수 있게 제가 백 뮤직 넣어 드릴게요!”
정난우는 얼른 어깨에 멘 바이올린 케이스를 풀어 내렸다. 과거 정난우의 거였고, 이제는 에녹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어 내내 트레이닝에 쓰였던 악기였다. 케이스를 열어 활 털을 조이는 정난우가 이상하게 신나 보여서, 에녹은 없던 의욕도 생겼다.
루스가 멀리로 턱짓하며 말했다.
“간단히 일 분 삼십 초 정도로 가자.”
“알았어.”
에녹은 맹인 지팡이를 받아들고서 시작점에 가 벽을 짚고 섰다. 이게 참 뭔 짓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건성건성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빛을 되찾기 전 정난우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헬퍼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 오르던 어설픈 발걸음,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발끝이 만들었던 동선들.
모두 수도 없이 반복해 본 것들이었다. 맹인들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많이 봤지만 그보다는 실제 정난우를 참고하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만큼 뛰어보지 못했다는 정난우. 깊은 배려가 도리어 독이 되어 제 발목을 스스로 묶어버린 정난우.
루스가 큐 사인을 보냈다. 정난우가 OST를 라이브로 연주했다. 감미롭게 젖은 선율이 울려 퍼지자 구경꾼들이 나지막이 와아, 했다.
휘파람과 함께 초연했던 곡이었다. 따스한 봄에 있을 리가 없는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그건 정난우의 음표들이 조각해 놓은 겨울바람이었다.
거칠고 오돌토돌한 벽 표면이 손끝에 감겨왔다.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외곽시야 아래로 균열 가 움푹 파인 보도가 언뜻 스쳤다. 지팡이는 그 곁을 헛돌았다. 튀어나온 돌덩이가 발끝에 걸렸다. 에녹은 능숙하게 발을 짚어 평평한 땅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 감각에 의지해 발길을 트는 거다. 소리를 감지하는 귀도 작은 소리에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눈을 감으면요, 정말 많은 소리들과 많은 향기들을 느낄 수 있어요. 눈을 뜨고 바삐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무심코 흘려보내는 그런 것들이 모두 제 놀이 대상이었어요. 작은 소리만 들려도 그게 뭘까 고민해 보고, 상상해 보고, 희미한 냄새만 나도 이건 무슨 맛일까 떠올려 보고요. 그 때의 저는 눈이 다시 보이게 되면 그것들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호기심을 망치는 건 결국 차갑게 정돈된 현실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음악 외에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게 됐으니까요.」
아, 하며 에녹은 한 쪽 눈가를 접었다. 뺨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걷어내며 하늘을 보았다. 눈이 오고 있을 거다. 주인공 벤자민은 정난우처럼 눈 오는 날을 좋아했다.
짧은 워킹 끝, 멀지 않은 곳에서 루스의 컷 소리가 났다.
에녹은 젖혀든 얼굴 그대로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검고 광활한 밤, 오른쪽 시야 끄트머리에 겨우 걸쳐 있던 달이 사라졌다. 정난우가 보던 암흑의 세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든 감각이 까맣게 침수되었다.
그 암흑 속으로, 일순 짙은 소음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구경꾼들의 소리 죽인 박수 소리, 들뜬 탄성들, 발자국 소리, 스태프들이 기자재를 건드리는 소리, 참 다양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모든 것들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영원히 섞일 수 없을 거라는 체념, 시끌벅적한 소리의 홍수 속에서 저 홀로 유리되어 있는 듯한 기묘한 이 느낌…….
에녹은 고개를 바로 하고서 눈꺼풀을 느리게 밀어 올렸다. 비스듬히 굴린 눈빛이 정난우의 시선 끝을 동여댔다. 정난우는 양손에 연주를 멈춘 바이올린과 활을 각각 든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살짝 입을 벌리고 숨만 내쉬는 얼굴이 달빛에 젖어들었다. 그 창백한 빛깔은 마치 흠뻑 눈물을 흘려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는 시선 교환 속에서 에녹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난우야. 너 되게 외로웠겠다.
에녹은 반듯하게 누워 정난우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뚱이 두 개는 나른한 맥박의 박자를 맞췄다.
정난우는 맨살 촉감이 못내 좋은지 자꾸만 얼굴을 목에 파묻고 비비적거렸다. 에녹은 그럴 때마다 픽픽 웃으며 어깨며 등이며 엉덩이를 가볍게 애무했다.
“예전의 저도 아까의 에녹처럼 그렇게 슬프게 웃었을까요?”
문득 귀밑으로 흐린 물음이 번졌다. 에녹은 살집이 볼록한 엉덩이를 주무르며 놀다가 멈칫 했다.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나 겁나 환하게 웃은 건데.”
“……거짓말.”
“많이 컸네, 정난우. 이제 의심도 하고.”
“나 바보 아니에요.”
정난우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에녹의 목 안에 낮은 울림이 고였다. 뺨에 닿은 정난우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당신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좋다고 광고하는 것처럼.
에녹은 그 귓바퀴를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 때의 네 곁에 내가 없었으니 진실은 알 길이 없지. 그냥 내가 분석한 정난우는 그랬을 것 같아.”
“아아, 분석…… 제가 악보 보고 이미지 떠올리는 것처럼요?”
“그래. 네가 그러는 것처럼.”
정난우는 얼추 이해했다. 제가 그렇게 웃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이야 영원히 미궁 속에 갇혀 있을 거다. 다만.
“마음이 아팠어요.”
정난우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발이 막 들썩들썩 하더라고요. 에녹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거든요.”
“내가 표현을 잘 했나 보네.”
뜬금없는 말에 정난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에녹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가 짧아진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내가 널 보면 종종 그렇거든.”
그거 참느라 죽을 맛이야, 에녹은 농담처럼 덧붙였다. 밀착해 있는 까만 눈동자가 조금 흐트러졌다. 정난우는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뭐가.”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해요. 가슴이 울렁거리고, 목도 울렁거리고. 눈이 자꾸 뜨끔뜨끔하고.”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소린가 보다. 정난우는 과거의 저 자신을 조금 가엾게 여길 필요가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외롭고 두려운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느낀다면 노력은 자연히 따라오는 거였다. 에녹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정난우가 보고 싶었고, 제 바람대로 느리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에녹은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열일곱 감금되어 있었던 정난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 다시 만나 강렬히 끌렸던 것, 마음 가는대로 줄기차게 쫓아다녔던 것, 루스에게 주인공 시켜달라고 우겼던 것, 사랑에 빠지고 미래를 약속했던 것, 그 모든 걸다.
“우리 밤 데이트나 가자.”
가벼운 제안에 정난우가 또 반짝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요?”
“드라이브 좀 하다가 코리아타운 갈까? 식사한 지 좀 돼서 슬슬 배고파질 텐데, 거기 너 입에 맞는 군것질 할 것도 많을 거야.”
코리아타운, 말만 들어봤지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하는 거였다. 잠깐 망설였지만 에녹이 함께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네. 가요 “
그래서 두 사람은 데이트 준비에 들어갔다. 둘 다 면바지에 셔츠차림을 했다. 캡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 도구를 챙기는 게 끝이었다.
주차장에 나가자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오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는 가늘었지만 점점 불어날 낌새였다. 좌석에 올라 막 안전벨트를 매던 때였다.
정난우는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촌누나 최순애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용건은 간단했다. 어머니 휴대폰이 고장 나서 번호가 바뀌었다는 거였다. 문자로 보내달라고 하고는 어머니와도 짧게 통화를 했다.
잠시 후 도착한 문자를 전화번호부에 입력하고 있을 때였다. 에녹은 아예 보조석 쪽으로 돌아앉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그건 뭐야? 단축번호?”
“아…… 이거는요…….”
정난우는 한국 휴대폰 디바이스에 내장되어 있는 단축번호 기능에 관해 설명했다. 에녹은 운전석 등받이에 올린 팔을 까딱거리며 귀만 열어 뒀다.
“그런데 딱히 쓸 일은 없어요.”
정난우는 성실하게 답변을 마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휴대폰을 낚아채 갔다. 눈만 끔뻑끔뻑 빈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왜요?”
그의 큼직한 손 안에 든 기기는 제가 들고 있을 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묘령의 작업을 계속하던 그가 돌연 사납게 인상을 그었다.
“너 제정신이야? 순서가 왜 이래?”
예측 못한 질문이 날아왔다. 정난우는 맹하게 고개만 가웃하다 노려보는 시선에 목을 움츠렸다. 에녹은 짧게 욕설을 입 안에 굴렸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액정을 수차례 눌렀다. 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휴대돈올 돌려주며 말했다.
“나머지 서열 정리는 네가 알아서 해.”
에녹은 곧장 액셀을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핸들 돌리는 손이 묘하게 거칠었다. 별 거 아닌 거에 울컥한 스스로가 치졸함은 인정했다. 그러나 불가항력 이라고 밖에 변명할 길이 없었다. 침묵을 중화시키기 위해 에녹은 오디오 볼륨만 높였다.
정난우는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는 몸을 내버려둔 채 그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고민했다. 당사자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대답해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난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탐색했다. 불 밝힌 액정을 이리저리 눌러보다보니 금세 깨달았다. 직전까지 화두로 올라있던 단축번호를 얘기하는 거였다.
혁명의 바람이 쓸고 간 단축번호 목록을 빤히 보았다. 〇번 어머니의 번호는 그대로였다. 1번에 들어있던 강도영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에녹이었다.
이 순서 자체가 중요했던 건지, 아니면 크리스의 이름이 그를 자극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라면 아마 둘 다였겠지만.
“이거, 잘 안 쓰는 기능인데…….”
정난우는 소심하게 자기변호를 해 보았다. 돌아온 건 싸늘한 침묵과 꽝꽝 울리는 음악소리뿐이었다.
표정 없이 전방을 주시하는 그의 옆얼굴에서 밤 조명이 날카로운 선으로 일렁거렸다. 간헐적으로 와이퍼가 움직여 빗물을 닦아내지만 젖은 유리는 계속해서 굴절된 빛을 뿌렸다.
어떡하지.
한참 눈치를 보다가 슬쩍 손을 뻗었다. 차에 타기만 하면 거의 포개져 있던 그의 왼손이 오늘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소맷자락을 톡톡 잡아당겼다. 싸늘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에녹은 뿌리치지 않았다. 자연히 그 손을 내준 그가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에녹, 하고 부르자 그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꿈틀 들었다.
“저, 당신 번호는 외우고 있어요. 제가 원래 숫자에 되게 약해서 비상용으로 태영 씨 번호만 외우고 다니는데…… 그…크리스 번호도 못 외우는데…… 어떻게, 이걸로는 안 될까요?”
정난우는 자신 없는 투로 딜을 걸어 봤지만 그의 침묵은 변함없이 지속됐다. 하지만 경직된 뺨은 한 단계 풀린 것 같았다.
“저, 에녹.”
한참 뒤에 그가 왜, 했다.
“저 목마른데, 주스 좀 사면 안 될까요?”
분위기를 풀어보려 꺼낸 말인데 정말로 목이 말라졌다. 차가운 눈동자가 슥 굴러와 얼굴을 한 번 훑어 내리고는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 꼬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뭐 마시고 싶은데.”
“주스요. 과일 주스.”
정난우는 냉큼 대답했다. 에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한 오 분만 참아. 생과일 갈아주는 가게 알아.”
다행이다. 화 풀렸다. 정난우는 독점욕 살벌한 애인의 손을 가만가만 주물렀다. 봐 달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여 조금 들이밀기도 했다.
에녹은 힐긋 곁눈을 한 번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못 말린다는 듯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가 불리한 상황이란 건 기가 막히게 아는 거다. 혼난 강아지처럼 부대껴오는 모양을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어두운 과거만 아니었더라면 여기저기 참 예쁨 받고 다녔겠지.
천성이 예쁘고 사람을 좋아했으니 꼬마 정난우는 낯가림도 없이 방긋방긋 잘 웃었을 것 같았다. 미운 욕심도 안 부리고 나눠주는 걸 좋아하니까 친구도 많았을 거고, 예의도 발라 어른들도 귀여워해줬을 거다.
혀끝이 썼다. 저 역시 달콤한 음료 생각이 간절해졌다. 곧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에녹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대로변에 위치한 가게 앞에 정차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며 보조석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배달비 선불.”
평소의 에녹으로 돌아와 뻔뻔하게 뺨을 내밀었다. 정난우는 뽀얀 눈가를 접었다. 가볍게 키스하려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 입술을 맞댔다.
정난우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에녹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금방 사 올게.”
마스크를 귀에 걸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비상등을 켜둔 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감 시간에 임박한 가게 내부는 한산했다. 카운터에 가서 두 잔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호주머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루스였다. 전화를 받자 그가 대뜸 물었다. 결 거친 목소리였다.
《너 지금 어디야.》
“바깥.”
주위를 의식해 짧게 대답했다. 루스의 언성이 기이할 만큼 높아졌다.
《차 타고 있어?》
“잠깐 세워 놓고 주스 사러 들어왔는데, 왜?”
《방금 긴급 통신 걸려 왔어. 너 꼬리 붙은 거 같다고.》
“…꼬리? 무슨 꼬리?”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눈썹 끝을 말아 올릴 때였다.
끼이이익一一
닫힌 문 너머의 날카로운 소음이 고막을 쥐어짰다. 제동 걸린 타이어가 시멘트 바닥에 갈리는 소리였다.
이유 없이 전신에 가시 같은 긴장이 돋아났다. 번쩍 고개를 틀어 밖을 내다보았다. 모자 그늘 아래 잠긴 눈매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조명 밝힌 유리문 너머로 제가 정차해 둔 팬텀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이 밑바닥까지 까라졌다. 청각세포가 가장 먼저 몸을 낮췄다. 심박동이 느려지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풍경이 멎었다.
짙게 선팅된 차창은 보조석 안에 있는 이를 비춰주지 못했다. 거멓게 죽은 작은 세계 너머 정난우의 그림자가 갇혀 있었다.
아마도 저를 보고 있을 거다. 늘 그랬듯이, 언제 오나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귓가에서 루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번졌다. 익숙한 언어들은 철자하나도 건져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막연하고 불길한 예감이 목을 잡아 비틀었다. 일순 얼어붙었던 심장이 수백 조각으로 파열하며 고동이 튀었다. 폐에 들어찬 마지막 산소 한 덩어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만 골을 뒤흔들 뿐이었다.
멍하니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였다. 모든 지각세포가 순식간에 되살아나 뒷머리를 강타했다. 전신의 솜털이 바짝 기립해 비명을 질렀다. 튕겨져 나갔던 소리들이 머리를 깨뜨릴 듯 범람했다.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제 흐름을 찾은 거다. 멈춰있던 무수한 빗줄기가 벼락처럼 번득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앙一!
육중한 충돌음이 고막에 꽂혀 들어왔다. 느리게 회전하는 승용차 한 대가 시야를 침범했다. 그것은 팬텀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콰앙, 연달아 터진 험한 소리가 눈 꼬리를 뒤틀었다. 으스러진 신음 한 조각이 아귀처럼 성대를 씹어 발겼다.
손에 힘이 풀려 휴대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액정 박살나는 소리는 물속에 잠긴 듯 멀기만 했다.
답답하게 콧등까지 덮은 마스크 속이 화마처럼 뜨거워졌다. 막혔던 숨이 겨우 터진 거다. 그러나 그것은 낮고 고른 호흡이 아니라 천식환자처럼 새되기만 했다.
불타오를 것 같은 열기가 입가는 물론 얼굴을 모조리 도려낼 것만 같았다. 참지 못하고 뜯어내듯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주위로 비명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아…….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뇌는 백치처럼 하얗게 굳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튀어나갔을 뿐이었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가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열었다기보다는 거의 부딪쳤다. 충격의 반동으로 모자가 날아갔다.
고무 타는 냄새가 빗줄기에 눌려 바닥을 기었다. 행인들의 발을 묶은 도로는 이중추돌로 엉망이었다. 영업용 트럭에 받힌 승용차 한 대가 팬텀을 뒤에서 덮친 거였다.
반듯하게 세워 뒀던 팬텀은 비뚤게 밀린 채 뒷범퍼가 흉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 아래로 깨진 후미등 조각들이 나뒹굴어 날카로운 물방울을 튕겨냈다.
머리카락을 적시고 옷의 무게를 덧입히는 빗물의 감촉이 까마득했다. 에녹은 철근처럼 무거운 다리를 겨우 바닥에서 뜯어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번째 발을 내딛는 동시에 날듯이 팬텀의 보조석을 향해 뛰어갔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몇 번이고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목울대가 살갗을 튀어나올 듯이 끄덕거렸다.
겨우 차문을 열었다. 에어백 터진 보조석에서 정난우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툭 떨어져 있는 머리는 미동이 없었다.
건드리기조차 두려웠다. 시야가 소용돌이치듯이 울렁거렸다. 바람이 실어간 봄비가 차내로 무수히 빨려 들어갔다.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 순간 열일곱의 잔인한 겨울이 떠오르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왜 넌 매번 이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부서질까.
흠뻑 젖은 세상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난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안했다. 이런 건 줄 몰랐다. 부르면 곧장 대답해 주는 건데, 옹졸하게 뒤틀린 속을 감당 못해 이 끔찍한 침묵을 줘 버렸다. 초조함에 바싹바싹 말라가는 가슴을 찌르고 싶었다.
에녹은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가벼운 몸은 지지할 곳이 사라지자 즉시 앞으로 거꾸러졌다. 재빨리 받아 품에 안아들고 보도블록 위로 옮겼다.
별 일 아니겠지, 반복해서 뇌까리며 천천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발 밑이 울렁거렸다. 물방울 터지는 시멘트 바닥이 살아있는 짐승처럼 숨을 쉬는 거다.
한쪽 무릎을 세워 정난우의 상체를 기대게 했다. 힘없는 고개가 뒤로 넘어가 한 손으로 받쳐 들어야만 했다. 정지된 사고가 그대로 마비가 되었다. 생기 없는 뺨을 겨우 손으로 감싸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왜 그래. 일어나 봐.”
행인들이 모여들었다. 주위로는 온갖 것들이 격랑 치듯 뒤엉켜 싸워댔다. 누군가 소리치고, 웅성거리고, 누군가는 또 놀란 숨을 들이켰다. 구급차 불렀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고함소리가 웅웅거렸다.
쇄도해 오는 소음과 역한 냄새들 모두 에녹에게는 닿지 않았다. 마치 빗물이 피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홀로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에녹은 주저하듯 고개를 내렸다. 목덜미는 기름칠 안 한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렸다. 날카로운 코끝을 빗물 고인 인중에 묻었다. 따뜻한 숨결이 콧등에 맺혀왔다.
숨은 쉬고 있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거다. 차가운 머리는 긍정적인 생각만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흔들리는 시선이 정난우의 이마에 가 닿았을 때, 불길하게 뛰던 심장은 급속도로 치솟아 단번에 극점을 찍었다.
눈썹 뼈 위쪽이 미세하게 부어 있었다. 입술을 대 보자 차갑게 식은 얼굴에서 그 부위만 뜨끈했다. 머리를 부딪친 거다.
“정신 좀 차려봐. 별 거 아니잖아.”
에녹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빗물이 스민 시야는 멍울진 것처럼 흔들렸다. 아무리 핥아줘도 창백하게 굳은 뺨은 자꾸만 젖어들었다. 되풀이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침묵이 돌아와 뼈마디를 벌렸다.
이런 장면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공포와 충돌해본 경험도 없었다. 어지러운 머리는 꿈꾸듯 몽롱했다. 이게 꿈이라면 물론
지독한 악몽일 거다.
생명을 불어넣듯 그 젖은 입술에 키스했다. 맞닿은 표피는 부드럽지만 차가웠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반복해서 입을 맞추고 이내 그 뺨에 얼굴을 묻었다.
목소리는 증발했다. 숨만 내쉬고 들이마시길 반복했다. 목덜미를 받쳐 든 손끝에 푸르게 요동치는 경동맥이 걸쳐 있었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른다. 그걸 확인하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떨리는 숨결이 빗물 틈을 수도 없이 채웠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이 모든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봄비가 바늘처럼 몸을 난도질해 왔다.
얼마 안 가 자신은 난자된 고깃덩이가 될 거다. 몇 번이고 지켜주지 못한 고통에 주리가 틀리던 순간을 기억할 거다.
어디선가 환청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에녹……?”
귓가에 흥건히 퍼진 음성은 낯선 듯 익숙했다. 제 미숙한 심장을 제멋대로 주물러대던 고약한 목소리였다.
쉼 없이 빗물이 스며드는 눈동자가 알싸하게 흔들렸다. 손끝을 더듬어 건강하게 뛰는 목의 혈맥만 재차 확인했다.
그 때, 좀 더 명확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사고가…… 에녹?”
환청이 아니었다. 뜨겁게 조각난 사고가 조금씩 아귀를 맞췄다.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봐 왔다.
온기 날아간 창백한 뺨을 뻣뻣하게 몇 번 쓰다듬었다. 기계처럼 굳은 입술이 끔찍하게 쉰 목소리를 내보냈다.
“다친 데는…….”
정난우는 가만히 상체를 세워 몸을 훑어보았다. 발목을 까닥여 보고 등허리도 비틀어 봤다. 뻐근한 목을 슬쩍 돌리다가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듯한 눈썹도 흉하게 찌그러졌다.
에녹은 그 미세한 반응들조차 집중해 살폈다. 깜빡이지도 않는 눈은 각막이 벗겨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니에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냥 머리가 좀 아프고 어지럽긴 한데…… 기절, 기절했나요, 제가? 그런데…… 우는 거예요?”
“아니…….”
하지만 네가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뒷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뻗어 온 손이 젖은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가만가만 매만지는 못박인 손, 거친 손 끝, 착각이 아니었다.
에녹은 아랫입술을 씹어 물었다. 매끈한 미간에 흉한 골이 파였다. 눈꺼풀을 타고 들어온 미지근한 물이 안구를 휘돌아 뜨겁게 뺨으로 흘러내렸다. 온 몸이 떨려왔다.
안도의 꼬리를 집어문 건 극렬한 분노였다. 득득 이가 갈렸다. 완전히 돌아온 이성이 낱알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빠르게 그러모았다.
루스와의 통화, 그리고 직후 이어진 접촉사고.
이 불행한 사건마저 우연이라면 신이 정난우를 버렸다고 봐도 좋을 거다. 에녹은 어금니를 바스러뜨릴 듯이 사려 물었다. 물비린내 풍기는 허공에서 푸른 안광은 점차 사납고 날카로워져갔다.
정난우는 그 이상기류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 에녹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절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힌 것은 한 줌 공기뿐이었다.
에녹은 몸을 뒤로 무르며 한 서린 망자처럼 일어섰다. 정난우는 주저 앉은 채 불안한 눈으로 그를 따라 시선을 끌어올렸다. 내리뜬 그의 눈은 잘 조각된 빙하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튕겨냈다.
그가 몸을 돌렸다.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눈알들이 우왕좌왕 허공에 튀었다. 그의 시선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정난우는 고개를 들었다.
충돌했던 게 분명한 트럭과 승용차가 보였다. 중년의 남성에게 젊은 아가씨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누가 봐도 상황은 명백했다.
에녹은 거친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갈라진 인파 사이를 걷는 그의 뒷모습은 고독한 검투사처럼 젖어들었다.
그가 보도블록을 내려서서 차도로 진입했다. 소매 아래 꽉 쥔 주먹은 하얗게 뼈마디가 올라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칼이 그의 빈주먹에서 뻗어 나와 날을 세웠다.
그는 겉도는 법 없이 곧장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갇힌 남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정난우는 에녹의 전신에서 폭발할 듯 끓는 분노를 감지했다. 에녹, 성대도 울리지 못한 속삭임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거였다.
정난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황급히 발을 떼 내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자신은 에녹처럼 사람들 틈을 거침없이 파고드는 법을 몰랐다.
뜀박질은 느렸고 에녹은 무시무시할 만치 빨랐다. 운동화에 짓이겨지는 물 바닥이 치덕치덕 발목을 감아왔다.
“아, 제발……에녹……!”
정난우의 애타는 부름은 채 닿지 못했다. 에녹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한 손으로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왔다. 음산한 목소리가 빗속을 꿰뚫었다.
“당신이야?”
작고 왜소한 체구의 중년 남자는 파리한 얼굴로 대답을 못했다. 나이를 가늠케 하는 주름 속에 찌든 삶의 고단함이 고여 있었다.
소모품일 거다. 에녹은 그렇게 직감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래도 울분이 잦아들 일은 없었다. 에녹은 고개만 비틀어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여자에게 물었다.
“이 남자가 트럭 운전수 맞습니까?”
여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녹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유명인사에 화도 잊고 멍한 표정이었다.
“마…맞아요. 제가 차선을 바꾸려는데 저 사람이 갑자기 뒤를 들이받아서…….”
에녹은 끝까지 듣지 않고 고개를 바로 했다. 짙게 내려앉은 푸른 눈에서 차가운 불티가 튀었다. 난생 처음 드는 극렬한 살심에 이성은 그대로 제물로 던져졌다. 막 주먹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아, 안 돼요!”
느리게 올라가 빠르게 추락하려던 팔에 뭔가가 다급히 매달려왔다. 에녹은 충혈 올라오는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놔.”
“그러지 마세요. 에녹, 제발…… 사고, 사고니까…….”
“다쳐. 놓으라고 했다.”
스산한 음성은 잔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정난우는 에녹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그의 옆구리를 스쳐 두 사람 사이에 제 몸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불안한 듯 올려다보자 그의 서늘한 시선이 느리게 아래로 떨어졌다.
“화…화내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정난우는 얼얼하게 식은 입술을 떨었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뇌리에서 꼬이고, 그것들은 날 것으로 튀어나와 흩어졌다.
“사고잖아요. 에녹, 그러면 안 돼요.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당신은 흠집 나면 안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돼. 이 새끼가 너를 칠 뻔했잖아. 잘못 부딪쳤으면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에녹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이글거렸다. 이성을 상실한 그의 고성은 사무치는 감각들로 난잡하게 들끓었다. 그가 내장을 다 토해내듯이 소리쳤다.
“네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내 눈앞에서!”
거친 호흡에 깨진 빗방울들이 비명을 질렀다. 눈가에 열기가 몰려 안구까지 타들어가는 듯했다. 이 불덩이 같은 분노를 분출해 내지 못하던 심장이고 폐고 다 시커멓게 타 버릴지도 몰랐다.
널 노린 거야. 너를, 너를 노린 거라고, 중간에 다른 차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상상은 고문과도 같았다. 에녹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피나도록 짓씹었다. 정난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며 멱살 쥔 손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아 애가 탔다.
“아, 안 다쳤잖아요. 그럼 된 거잖아요. 경찰, 경찰 올 거예요. 우리 그 사람들한테 맡겨요. 저 안 죽어요. 이제 좀 살 만한데 제가 왜 죽겠어요. 에녹, 제발…….”
에녹의 얼굴은 굳건한 방패처럼 모든 것을 튕겨냈다. 법이라는 건 결국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의 편이었다.
내내 얼어있던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한테, 왜, 왜 이러시는지, 사고는 죄송하지만…….”
“사고? 죄송?”
에녹의 입술이 써늘하게 뒤틀렸다. 남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사고였습니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닌…….”
“이 씹 새끼가 누구 앞에서 개소리를!”
그 순간 꽉 억눌러 놓은 마지막 인내가 산산이 흩어졌다.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아 옆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피를 고아낼 것 같은 눈빛이 위협적으로 터져나가고, 이번에야말로 남자의 핏기 없는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아, 안……!”
휘청 물러났던 정난우가 다급히 팔을 뻗었다. 휘둘러진 팔꿈치가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의 셔츠 앞섶에 손끝이 걸렸다. 정난우는 그걸 틀어쥐고 있는 힘껏 당겼다.
단추 하나가 날카롭게 허공을 날았다. 에녹의 무게축도 일순 무너졌다. 그는 족쇄 채워진 야생짐승처럼 거칠었다. 발악하듯 떨어내려는 그의 움직임에 젖은 옷자락이 손안에서 미끄러져나갔다.
그 순간, 기우뚱 뒤로 몸이 기울며 순식간에 하늘이 뒤집혔다. 정난우는 짧은 비명을 삼켰다. 다가올 추락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멍청한……!”
물기에 짙어진 향기가 온 몸을 푹 싸매왔다. 젖은 셔츠에 얼굴이 파묻혔다. 충격에 가까운 진동이 몸을 울렸다. 낮게 기는 신음은 억눌린 목 안에서 구속되었다.
쏴아아아一
얼마나 지났을까.
빗줄기는 한층 굵어져 있었다. 에녹은 증기처럼 끓는 숨소리를 흩뿌렸다. 몸뚱이 두 개가 하나로 뒤엉킨 채 급박하게 오르내렸다.
에녹은 제 품안에 무사히 안긴 몸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뒹군 몸을 세우며 참담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게 끼어들지 말랬잖아. 안 다쳤어?”
대답하지 못하는 정난우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기절할 듯했다. 에녹은 재빨리 그 턱을 틀어쥐었다.
“왜 그래, 너.”
그 순간, 정난우는 발작하듯 몸을 틀었다. 에녹은 당황으로 얼어붙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진득한 액체를 토해내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토는 내장을 다 쏟아낼 듯이 격렬하게 몇 번이고 이어졌다.
에녹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얼른 팔을 뻗었다. 울렁거리는 정난우의 가슴을 조심히 받쳐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급박히 오르내리는 등을 두드렸다.
“아, 옷, 더러워지는…….”
“괜찮아. 토해. 상관없으니까.”
식사한 것들은 거의 소화가 된 건지 덩어리진 것은 별로 없었다. 팔뚝과 허벅지를 타고 토사물이 흘러내렸다.
에녹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들었다. 이건 뇌진탕 증상 같았다. 헛구역질만 가볍게 할 때 쯤, 빗물이 씻어낸 입가를 한 번 더 제 손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괜찮아?”
정난우는 잔뜩 갈라진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기마저 비치는 얇은 눈꺼풀은 줄줄 흐르는 빗물에 연신 녹아내리듯 늘어졌다.
에녹의 눈동자는 초조한 동선으로 움직였다. 그 아름다운 바다 빛깔에 다시금 걱정과 불안이 넘실거렸다. 조심히 턱을 쥔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절로 눈가가 일그러졌다.
“다친 건 에녹이잖아요.”
정난우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토사물로 얼룩진 왼팔의 셔츠는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찢어지고 헤진 흰 옷감에 점점이 피얼룩이 맺혀 있었다. 방금 전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때 바닥에 갈린 거다.
“나 때문에 다쳤잖아요.”
정난우는 냉동 창고에 갇힌 사람처럼 전신을 떨며 말했다. 초점 흐려진 까만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울렁거렸다.
“화가 난 것도, 다른 사람을 때릴 뻔했던 것도, 다친 것도, 다 나 때문인 거잖아요.”
에녹의 눈 꼬리가 일순 떨렸다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너덜너덜해진 팔뚝이 보였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알싸한 통증이 뒤늦게 말초를 자극했다. 머리가 온통 엉망이라 신경도 둔해진 거였다.
이건 엄연히 제 실수였다. 통제를 잃은 제 행동이 정난우에게 칼이 되어 돌아갔다. 에녹은 급히 정난우를 끌어와 가슴에 품었다.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정난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휘감기는 떨림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에녹은 이를 한 번 악물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분노와 안타까움이 진창으로 뒤섞였다.
“네 잘못 아니야.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구급차가 올 때까지 , 에녹은 그 한마디만 끝도 없이 뇌까렸다.
정난우는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정밀 진단 결과는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의사는 링거액이 다 들어가면 귀가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에녹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딱 한마디 했다.
입원해.
그 목소리는 소름끼칠 만큼 잔뜩 갈라져 있었다. 십 년 치 수명은 깍아 먹은 몰골이었다. 그래서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입원 절차를 밟고 빗물을 씻어내고 나올 때까지, 휴대폰은 끊임없 몸살을 앓았다. 그 열렬한 진동은 발칵 뒤집어진 미 대륙을 대변하는 작은 표식이었다. 결국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들에게만 짧게 통화를 끝내고 나서 아예 전원을 죽여야 했다.
사고를 낸 트럭 운전수는 현장에서 음주 측정을 받았으나 알코올 수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가 뱉어낸 변명은 ‘그저 아픈 딸 생각에 넋을 놓고 있다가 실수로 들이받았을 뿐’이었다. 큰 인명 사고가 없었기에 형사처벌 받을 일은 없는 것 같았다.
합의를 하지 않아도 기껏해야 벌금, 집행유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더 화를 못 참은 거였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는 수법을 즐기는 놈이니 그럴 거라 확신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이번 사고는 분명 증거가 손에 들어올 거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하는가, 였다.
“에녹.”
축축 늘어지는 침묵을 견디다 못해 정난우가 입을 열었다. 동공 풀린 눈으로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에녹의 눈썹이 꿈틀 반응했다. 시선이 움직인 건 그 다음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래. 왜?”
정난우는 침대 곁에 앉아 있는 에녹을 조심히 끌어당겼다. 그는 순순히 끌려와 품을 내줬다.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네 탓이 아니야, 이를 갈듯이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선했다.
그런데 정말 내 탓이 아닐까.
일단 말을 걸긴 했는데 그 뒤에 엮어낼 말이 부족했다. 굳어버린 혀만 움찔거리며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먼저 귓가에서 나직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속 울렁거리는 건 어때? 머리 아프고 어지러운 건.”
“링거 맞으니까 좀 나아요. 에녹은 어때요, 팔…….”
그가 몸을 떼 내며 보란 듯이 왼팔을 내밀었다.
“이깟 거 며칠 지나면 다 아물어. 꿰멜 것도 없잖아.”
시선을 내려 그의 팔뚝을 살폈다. 옷이 젖고 더러워진 탓에 그는 현재 환자도 아니면서 환자복을 빌려 입고 있었다.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 연고 번들거리는 그의 빨간 상처들이 보였다.
마음이 쓰렸다. 차마 그 부근은 못 만지고 손만 주물럭거렸다. 에녹이 검지로 이마를 툭 밀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너야말로 어디 안 좋은 데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 증상들 다 괜찮아질 때까지 병원에서 나갈 생각도 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답답해서 싫단 소리 했다가는 불벼락이 날아올 거다. 한숨을 삼키며 잠자코 고개만 끄덕일 때였다. 병원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난우 씨 !”
정난우는 멈칫 고개를 들었다. 사색이 된 매니저 둘이 까치집 머리를 하고서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예요. 사고, 어디 다쳤어요?”
한태영이 핏기 가신 얼굴로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댔다. 율리안도 별반 다르지 않게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창에 머리를 부딪쳐서 잠깐 혼절한 것뿐이었어요. 가벼운 뇌진탕이라 증상들도 일이 주 내로 나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고요.”
“세상에. 이게 뭔 일이랍니까. 손은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한태영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연락 받자마자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혼났습니다. 그래도 쉬면 낫는다니 다행이네요. 스케줄 조정해야겠지요?”
“아, 그럴 필요는…….”
반사적으로 나가려는 대꾸를 에녹이 칼같이 잘라냈다.
“당장 다 취소해요. 최소 이 주, 길게는 한 달까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빼요. 울렁거림에 두통에 현기증까지 있는데 공연을 어떻게 해?” 한태영은 정난우의 말보다 에녹의 말에 더 힘을 실어줬다.
“그래야겠네요. 일단 저 오 이사님한테 전화부터 드릴게요. 상태보고 바로 연락해드리겠다고 했거든요. 지금 아마 발 동동 구르면서 전화만 기다리실 겁니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영이 휴대폰을 손에 쥐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율리안이 널찍한 특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바깥에 지금 난리 난 건 알죠? 지금 난우 씨랑 밀리건 씨 초대형 열애설 때문에 자던 사람들도 벌떡 일어나서 컴퓨터부터 켠다네.”
“…대강은요.”
스캔들 덕분에 휴대폰이 불이 날 지경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은 그간 이를 갈며 에녹의 뒤를 쫓아다니던 파파라치들이 축제를 벌이는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기의 사랑 됐어요. 폭력사건으로까지 번질 뻔했던 건 다 알려졌고, 밀리건 씨가 난우 씨한테 키스하는 사진도 아주 사방팔방 날개 돋친 듯이 퍼져나가고 있어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인터넷에 어떤 것들이 떠돌아다니는지는 세세히 알려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은 뻔뻔한 표정으로 눈썹을 사납게 치켜들었다.
“왜. 내가 내 거에 키스 좀 했다는데.”
“…아니. 뭐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요…….”
정난우는 화끈거리는 껏바퀴를 멋쩍은 듯 만지작거렸다. 하필 그 손이 링거 바늘 꽂힌 데라 에녹은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계획보다 훨씬 빨리 터졌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어. 그러니까 아픈 거 핑계로 잠깐 좀 쉬어. 퇴원하는 순간부터 기자들한테 징그럽게 시달릴 테니까.”
이번만큼은 정난우도 진지하게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낯선 사람들이 카메라 들이대며 닦달할 걸 생각하니 벌써 두통이 도지는 것 같았다.
그 때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한태영인 줄 알았는데 에녹의 매니저 쉐인이었다. 그는 정난우에게 먼저 까딱 인사하며 들어섰다. 납덩이같은 얼굴의 그는 에녹에게 액정 박살난 휴대폰과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찾긴 했는데 맛 간 것 같더라.”
“찾았으면 됐어. 고마워.”
“편한 옷들도 대충 골라 왔으니까 갈아입고. 이 초대형 폭탄에 난 휴대폰 꺼 놓을 테니까 특별한 거 있으면 내 아내한테 전화해.”
그는 그렇게 짧게 용건만 전하고 사라졌다. 에녹은 쇼핑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박살난 액정을 보며 혀를 찼다. 전원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새 것을 개통해야 했다.
에녹은 욕실에서 한 번 더 샤워를 한 뒤 새 속옷과 운동복을 입고 나왔다. 정난우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링거 바늘을 빼고 있던 참이었다. 간호사가 사라지자 매니저들 역시 가까운 호텔로 투숙을 옮기겠다며 병실을 나갔다.
에녹은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빳빳한 환자복이 품 안에서 서걱거렸다.
“푹 자. 아무 생각 말고.”
에녹은 보송보송하게 말라있는 까만 머리카락 속에 입술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목 언저리에 낮고 고른 숨이 흩어졌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등허리를 가만히 매만지며 어둠이 고인 허공을 노려보았다. 정난우에게는 아무 생각 말라고 했지만, 정작 에녹은 끈적끈적하게 뒤엉킨 잡념들에 압사할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에서 어긋났다. 루스도 자신도 놈이 이렇게 극단적인 수를 둘 줄은 예상치 못했다. 기껏해야 정신적 압박에 더 힘을 실으리라 속단했던 게 실수였다.
“저는 어떻게 하면 돼요?”
불현듯 날아온 질문에 에녹은 멈칫 고개를 내렸다. 목에 코를 묻고 있던 정난우가 어둠 속에서 빤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녹은 눈에 흥건히 고여 들었던 독기를 순식간에 탈수시켰다.
“뭘?”
“막 기자들이 찾아와서 추궁하고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한동안은 그냥 되도록 병실에 있어. 그리고 퇴원하는 날부터는 내가 경호원 여럿 붙여줄게. 특별히 네가 의무적으로 상대해야 될 사람은 없으니까 대부분 무시해 버리면 돼.”
“…무시하면,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욕하지 않을까요?”
이건 또 무슨 발상이야.
에녹의 눈썹이 꿈틀 휘었다. 그는 정난우의 머리 위를 한 손으로 꾹 내리누르며 쏴 붙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그것들 다 제 주머니 불리자고 온갖 자극적인 기사거리 찾아 따라다니는 놈들이야. 한마디 잘못 하면 왜곡하고 부풀리고 제 멋대로 편집해서 사람 병신 만드는 데도 선수지.”
“모함, 같은 걸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말 한 토막만 딱 끊어서 앞뒤 정황 다 빼면 많은 그림이 나와. 그리고 그런 것들은 남들의 상처 따위 안중에도 없고. 따져 봐야 소용도 없어. 당신이 그런 말을 한 건 맞지 않느냐, 도리어 뻔뻔하게 받아치지.”
정난우는 그간 제가 만난 기자들이 참 점잖았다는 걸 깨달았다. 에녹이 차갑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무례한 작자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건 참 쓸데없는 짓이야. 똑같이 받아치라는 얘기가 아니라 무시하는 게 가장 좋다는 거지.”
“…….”
“다만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싶을 때는 사실대로 말하면 돼. 너 그거 잘하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거.”
사실 에녹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촬영 직후 제 쪽에서 먼저 터뜨릴 생각이었다. 포스트 프로덕션 기간에 충분히 시달려 주고, 휴식기까지 한창 떠들게 놔두고 차기작에 들어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일정대로라면 적어도 제가 곁에 있어줄 수 있는 동안에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할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영 안 좋았다. 크랭크인이 나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복잡한 머리를 최대한 차갑게 가라앉혔다.
“죄 지은 사람처럼만 굴지 마. 네 성격에 갑자기 도도하게 굴라는 거 억지겠지만, 누군가 몰아붙이면 할 말은 해.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네. 그럴게요.”
하여간 대답은 잘하지, 하며 에녹은 애써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내일 내 쪽에서 정식으로 보도자료 뿌릴 거야. 나도 내 공식 SNS에 직접 글도 올릴 거고, 인터뷰 들어오는 것도 몇 개 골라서 할 생각이야. 하여간 할 수 있는 건 내가 다 할게. 이럴 때 대비해서 사전작업 좀 해 둔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에녹은 정난우의 등을 툭툭 도닥이며 눈을 감았다. 너무 긴 하루였다. 정적이 가득한 새벽 속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입원한 지 이틀 동안 에녹은 발 빠르게 인터뷰 대처를 하느라 바빴고, 정난우는 병실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후유증에 조금 괴로워했다.
병문안 온 오정수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구멍 난 스케줄은 알아서 잘 메울 테니 염려 말라며 안심시켰다. 그 외 별 다른 말없이 금방 돌아갔다.
한태영의 휴대폰으로 수많은 위로 전화를 받았다. 지휘자 선생님들이나 실내악으로 어울린 적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전화는 모조리 받았다. 특별히 친분이 없는 사람들은 한태영이 적당히 잘라냈다.
어머니께는 먼저 전화를 드렸는데 떠들석한 열애설을 모르시는 건지 그냥 몸 걱정만 하셨다. 전화상으로 풀어낼 이야기는 분명 아니어서 자세한 내막은 다음에 만날 날로 미뤄뒀다.
정난우와 에녹의 SNS는 폭격을 맞았다. 설마 아닐 거라는 둥, 그럴리가 없다는 둥, 키스 사진이 쫙 퍼져 있음에도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부정하기 바빴다. 그러다 에녹이 정식으로 열애설을 인정한 순간부터 두 사람의 SNS는 격전의 콜로세움으로 탈바꿈했다.
처음에는 저들끼리 갈라져서 실망했느니 더럽다느니, 탐탁찮지만 이렇게 된 거 응원해 주자느니 싸워대더니, 나중에는 두 사람의 팬들이 앞 다퉈 상대방 탓을 하며 원정 싸움판이 벌어진 거다.
정난우 팬들은 에녹에게 거칠게 쏟아 부었다. 그 바람기 어디 가겠냐며 순진한 애 열심히 꼬드겨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네가 우리 난우 차는 순간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거시기를 난도질 할 거라고 과격하게 난리쳤다.
에녹의 팬들은 당연히 정난우를 탓했다. 에녹 밀리건이 여자 좋아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어떻게 홀렸기에 애가 저리 정신을 못 차리느냐, 도대체 네가 얼마나 엉덩이를 굴려댔으면 쟤가 다 넘어가느냐며 맹렬히 퍼부어댔다.
놀랍게도 팔로워 수는 열 배가 넘게 차이 나는데 화력은 정난우 팬들이 더 좋았다. 성희롱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한 번 물면 너덜너덜할 때까지 안 놔주는 사냥개 기질도 다분했다. 어찌나 집요하게 물어뜯고 난리를 쳐 대는지 싸움의 양상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차 고조되어만 갔다. 그리고 그쯤, 에녹이 나타나 한 방에 쓸어냈다.
『내가 내내 쫓아다니고 공들여서 겨우 프러포즈 성공한 거야. 그만들 싸워.』
그 뒤로는 이제 누가 아깝느니 그걸로 티격태격했다. 에녹은 이번에도 정난우가 몇 배는 아깝다고 정리하려 했으나 제 팬들에게마저 닥치고 있으라며 쌍욕을 얻어먹었다. 아무래도 이 종식되지 못한 논란은 꽤 오래 갈 전망이었다.
크랭크인 장소인 플로리다로 떠나기 하루 전, 에녹은 마지막으로 필요 물품들을 사두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 동안 병문안 차 들른 루스가 병실을 지켰다. 매끈하게 면도를 했지만 어쩐지 까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 못 잤어요?”
루스는 괜스레 주눅이 들어 있는 정난우의 어깨를 힐긋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요.”
“네. 크랭크인 앞두고 한창 바쁘실 텐데 안 오셔도…….”
“괜찮습니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에녹이 올 때까지인데요.”
사실은 미친 듯이 바쁘다. 정말 신물이 올라올 만큼 정신이 없다. 감시 붙여서 탈탈 털고 있는 정난우 주치의 때문에 신경도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저, 루스.”
“네.”
품이 큰 환자복을 입은 정난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이 보이는 얼굴에 루스는 의아해졌다.
“저한테 뭐 할 말 있어요?”
루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난우는 멈칫 고개를 들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은 금세 매트리스 위로 처박혔다. 루스에게 어디까지 더 기대도 되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더 멀리로 떠밀려 갈 거다. 촬영기간 동안은 배우보다 감독이 더 바쁘다고 했다. 응어리처럼 가슴 한 편에 굳어 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혼자서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고 두렵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녹에게 털어놔 볼까도 고민했지만, 번번이 제풀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짐을 덜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었지만, 에녹보다는 루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함께 슬퍼하지 않는 루스 커넬, 냉정하게 상황만 봐 주는 그의 차가운 눈이 이 문제에서는 더 절실히 필요한 거다.
정난우는 한참을 망설이다 돌연 운을 뗐다.
“제가, 요즘 가끔 꿈을 꾸는데요.”
“…꿈?”
“네. 전에 제 친엄마 얘기를 루스에게 했던 이후부터 가끔씩…….”
갑작스런 화두에 루스는 잠시 관자놀이를 긁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이건 상담요청의 전주곡인 듯싶었다. 루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괜찮으니까 편히 말하세요.”
“이게 실제로 있었던 건지, 그냥 제 바람이 꿈으로 나타난 건지 가늠할 수는 없는데…….”
정난우는 잠시 혀로 입술을 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날로 돌아가요. 엄마가 손목을 긋던 그날로요.”
루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내리떴다.
“기억나지 않았던 장면들이 보이는 겁니까?”
“네. 아주 조금이지만…….”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숙되지 않은 뇌는 불완전하게 부서진 기억들을 조각내 담고 있었다.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기에 애써 뒤져보지 않으며 살아 왔다.
아니, 사실은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 되새김질은 그 자체로 유리 조각을 삼키듯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제가 강렬히 기억하는 단 하나는, 엄마가 저로 인해 생을 놓을 결심을 했다는 거였다.
그것으로 모든 과정은 무의미해지는 거다. 제게 닥쳐온 불행들은 분석 되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놓고 간 한(恨)은 작고 질긴 씨앗이었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열매까지 맺은 거였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했다. 제가 견뎌야 할 몫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다.
“꿈속에 나타난 엄마가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자꾸 말하는 거예요.”
「우리 난우도 평생 이렇게 살겠지? 엄마 다칠까봐 도망가지도 못 하고, 엄마 맞을까봐 다 꾹 참고, 우리 착한 난우 그렇게 평생을 살겠지? 엄마가 우리 난우 다칠까봐 이렇게 아무 것도 못 하는 것처럼…….」
“자꾸만 미안하다고 해요. 그리고 조금만 더 크면 도망가라고, 계속 그 말을 해요. 누가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된다고……. 그럼 누군가 고아원에 데려다 줄 거라고.”
탈출.
루스는 말을 아끼는 채로, 제 안에만 묻어둔 단어를 홀로 꺼내 살폈다 어머니의 자살 예고에 겁을 집어먹은 아들이 기억하는 두 가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할 것, 그리고 도망가라는 말.
그녀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었을까, 자신은 그렇게 추측했었다. 다만 정난우에게 그 가능성을 말해 주지 않았던 건, 그 가설이 설사 딱 들어맞는다 해도 정난우에게 득이 될 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위해 죽을 결심을 한 엄마, 그것 역시 정난우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함구를 택한 거였다.
다만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꼭 택해야 했는가에 의문이 있었는데, 이제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정난우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어머니는 제가 인질이 되는 걸 조기에 막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제 아들이 인질이 되었던 것처럼.
차라리 그 독한 각오로 아들을 데리고서 도망치지 그랬습니까,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례일 수도 있음은 자각하고 있었다.
때로는 상식의 끝 날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녀와 정난우가 살던 그 세계가 아마도 그렇게 절망적인 공간이었을 거다.
“저는, 이제껏, 엄마가 저를 원망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다른 경우의 수는 조금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믿고 있었거든요. 겨우겨우 버티던 고단한 삶에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제가 배신을…….”
정난우는 떨리는 입술을 한 번 질끈 물었다. 그리고 또 몇 번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네, 엄마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꼈을 거라고, 내내 그렇게 이해해 왔어요. 그래서 엄마가 나를 찾아오는 건가, 나를 괴롭게 하려고, 나한테 벌을 주려고,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보려고…….”
정난우의 젖은 시선이 더듬듯이 루스의 가슴팍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정말 간절히, 그의 대답을 구했다.
“만약에, 정말로 엄마가 저를 위해서 그 위험이나 아픔들을 감수하셨던 게 진짜라면요…… 모든 게 저를 사랑해서, 제가 행복해지길 바라서 그런 거였다면…….”
“…….”
“지금이라도 제가 용기를 내도 될까요? 제가…… 이제라도…….”
루스는 정난우의 말 속에서 의혹을 건져냈다. 잠깐만요, 하며 입을 열려던 때였다.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숨죽이고 있던 공기에 갑작스레 뜨거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대화는 자연히 단절되었다. 정난우와 루스의 눈이 반사적으로 열린 문을 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태영이 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 바깥바람을 한가득 실어온 한태영의 낯빛은 얼핏 스치는 것만으로도 흙빛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곧장 침대 곁에 다가와 섰다. 장승처럼 선 그의 그림자가 어둑하게 정난우의 얼굴로 내려앉았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난우 씨…….”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가랑잎처럼 팔락거렸다. 그 출렁이는 동요가 심장을 진득하게 핥아왔다. 고동이 점점 빠른 리듬으로 치고 올라갔다. 불길한 예감에 손끝이 차갑게 굳어들었다.
“놀라지 말고, 놀라지 말고 들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한태영은 괴로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머니께서, 쓰러지셔서…… 지금 중환자실에…….”
아아, 내뱉지 못한 신음이 명치에 돌처럼 굳어졌다.
나는 너만 행복하면 정말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돈 같은 거, 좋은 집 좋은 옷,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 난우, 내 배 아파 낳은 건 아니지만 넌 진짜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키웠어. 엄마 아빠 벌이가 시원치 않아 고기도 제대로 못 먹이고 키운 게 미안할 뿐이지. 너 성공하고 엄마가 제일 좋았던 건, 엄마 잘 먹는 게 아니라 너 잘 먹일 수 있는 거였어. 너 미국서 험한 꼴 당하고, 한국에서 요양하겠답시고 다시 엄마 집에서 지낼 때 키가 한 번에 자랐지. 엄마가 그 때 매일 가슴을 쳤다. 진작 잘 먹였으면 키도 훌쩍 더 컸을 거라 생각하니까 내가 미안해서 눈물이 막 나려고 그러는 거야. 엄마가 조금만 젊고 많이 배웠으면 너 따라 미국 가서 나쁜 놈들 못 붙게 혼쭐 내주고 그랬을 텐데, 그것도 못 해줘서 그게 한이 된다. 우리 난우, 지금 이렇게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연주하러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는 거 보면 엄마가 주책없이 가끔 눈물이 나. 그 낙으로 산다, 엄마가. 우리 난우만 행복하면 엄마는 정말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엄마는, 정말 우리 난우만 행복하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그러게 내 전화 진작 받았어야 하잖아!〕
중환자실 면회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데, 고모님이 나타났다. 그녀는 정난우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윽박질렀다.
〔계단 밑에 쓰러져계신 걸 내가 발견해서 겨우 사신 거야. 너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야 돼. 나 아니었으면 형님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알아듣니?〕
중환자실 면회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보호자들의 찌푸린 눈살이 여기 저기서 날아들었다. 그 중에는 저를 향한 호기심의 눈들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난우는 그저 모든 게 무감각했다. 오감도 잔뜩 무뎌 소리까지 웅웅 번졌다. 의자에 앉아 땅만 응시했다.
〔이게 또 대답을 안 해. 얘! 내 말 듣고는 있어?〕
해미의 할머니이자 제게 친척누나뻘인 최순애에게 대강의 일은 전해 들었다. 최순애 부부가 장을 보러 나간 사이 어머니에게 변고가 있었다.
그걸 발견한 게 고모님이셨다.
수술을 집도한 교수는 왼쪽 두개골에 금이 갔으며 병원에 실려 온 당시부터 출혈이 심했고, 숨골 쪽에도 약간의 출혈이 있으나 그 외 수술은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했다.
다만 워낙 고령이시고 체력이 좋지 않아 이번 주가 고비였다. 수술 후 한차례 심정지가 오며 자가 호흡이 불가능해져서 벤틸레이터를 달았고, 의식이 돌아와도 어느 정도 후유증은 각오해야 하는 상태였다.
〔형님 돌아가시면 다 너 때문이야. 형님 그 때 신문 들고 계셨어, 알아? 너랑 그 사내새끼 연애하느니 어쩌느니 그거 보고 충격 받아서 떨어진 게 분명하다고!〕
〔아주머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보다 못한 한태영이 그녀를 밀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가만 놔두면 안 그래도 혼이 나가 있는 정난우를 내내 쥐 잡듯 할 기세였다.
뒤로 훅 떠밀린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오르내렸다.
〔매니저 주제에 지금 쳤어? 쳤냐고!〕
〔여기서 제일 가슴 아픈 건 난우 씨니까 제발 좀 닥치고 계시라고요! 패악도 정도껏 부려야 봐 주지, 그 어미에 그 아들새끼라더니 아주 악독하고 거머리 같은 건 지긋지긋하게 똑같네!〕
한태영은 그간 쌓아둔 울분을 격렬하게 터뜨렸다. 몇 년 간 곁에서 지켜본 것만도 수두룩했다.
툭하면 전화하고 찾아와서 돈 타령에, 네 어미 돌아가시면 그 펜션 누구 줄 거냐 뻔뻔하게 묻던 철면피들이었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걸 참는 게 고작이었다.
〔내 아들 얘기는 여기서 또 왜 나와!〕
〔당신 아들이 미국 집까지 쳐들어와서 난우 씨한테 집 내놔라, 차 내 놔라, 애들 학비도 대 줘라, 거지처럼 지랄 생 쇼하고 간 거 모르시나? 아니지. 모를 리가 없지. 당신이라면 부추기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니야?!〕
〔너 말 다 했어? 거지? 누가 거지야!〕
〔왜, 그 말은 기분 나빠? 유감스럽지만 네 아들은 거지보다 못 해!〕
〔이 미친놈이……!〕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여기 당신들만 있어요?〕
결국 보다 못한 청년 하나가 화를 냈다. 고모님은 눈을 부릅뜨고 그 청년과도 한 판 할 기세였다. 율리안이 다급히 그녀를 대기실에서 끌어내고서야 평온이 찾아왔다.
한태영은 한참을 거친 숨만 씩씩대다 안타까운 눈을 내렸다. 정난우는 여전히 망연자실 땅만 보고 있었다. 곁에 털썩 주저앉아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냥 보다 보면 제가 다 눈 물이 날 것 같아 애먼 허공만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충격이 크셨을까요?”
정난우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한태영은 해줄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 그저 침묵을 지켰다.
“저만 행복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어떻게 된 거냐 물을 여유도 없으셨을 만큼, 그렇게 충격이 크셨던 걸까요?”
자책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정난우는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땅바닥이 몇 번이고 울렁이고 들끓는 구토감이 내장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도닥여서 잠재운 것들이 비웃듯이 기지개를 키는 거다. 제가 사랑했던 이들이 자꾸만 부식되고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 애써 조각내 묻으려던 그 법칙이 이렇듯 불쑥 목울대 앞에서 시린 날을 세웠다.
너무 익숙한 일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감당 못할 만큼 벅찬 행복 속에서 숨을 쉬면서도, 문득문득 가슴을 뜨끔하게 긋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언젠가는 이 살얼음 같은 세계가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영원히 단단하리라 생각했던 에녹마저도 비 오는 거리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간신히 살아 계셨던 어머니도 저 때문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겨우 붙들고 있던 두 사람이 이렇게 한 번에.
손 안에서는 끈질기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지금쯤 발만 동동 구르며 연락을 기다릴 에녹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내뱉는 저도,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그도, 온 몸을 저미듯이 아플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그저 짧은 문자 메시지로 여유가 생길 때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겨둔 상태였다.
면회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쯤 최순애 부부와 김혜영, 그리고 이정운까지 대기실에 도착했다. 몰골이 형편없는 최순애는 정난우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네 엄마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고, 그저 다 자기 탓이라고 했다. 정작 어머니가 쓰러지신 건 저 때문인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김혜영의 흐느낌이 옅게 흘렀다. 숨죽여 울며 다가오지도 못하는 그녀는 양말 신을 겨를도 없이 뛰어왔는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은 바이올린 받치는 제 턱처럼 거멓게 착색된 모양이 애달팠다. 부러질 것처럼 가녀리기도 했다. 이정운에게 기대지 않으면 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애처로운 발이 외곽시야에서 자꾸만 어른거려 정난우는 더 아팠다.
간호사가 면회시간을 알렸다. 최순애와 함께 중환자실로 향하려던 정난우에게 이정운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CD플레이어예요. 안에 형 음반 들어 있거든요. CD 자동반복 되니까 어머님 머리맡에 두세요.〕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정난우는 잠자코 받아들고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최순애가 울먹이며 그 뒤를 따랐다.
중환자실 내부는 면회 온 환자 가족들로 조금 부산스러웠다. 넓은 공간에 환자들 침대가 여러 개 있었고, 방으로 따로 있는 곳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격리되듯 그 방 안에서 숨만 쉬고 계셨다.
음악을 재생시킨 플레이어를 선반에 두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링거 꽂힌 팔은 고목나무처럼 생기가 없었다. 소독액으로 손을 깨끗이 닦아내고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돌아오는 반응은 조금도 없었다.
〔엄마. 나 왔어.〕
목 안쪽이 사납게 울렁거렸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떠오르는 게 없어 그저 가슴이 미어졌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장님 꼬마 거둬서 내내 고생하며 길러주셨는데, 이 위기의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인 거다.
정난우는 억지로 생각을 쥐어짜냈다. 딱딱하게 굳은 혀를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엄마. 일어나자. 여기 좀 무섭다. 퇴원 못 하면 일반병실이라도 옮기자, 응? 여기 있으면 하루에 두 번 밖에 못 만난대. 나 엄마 계속 보고 싶은데 어쩌면 좋아. 그 사람이랑 나…….〕
말문이 막혔다. 가시 걸린 듯 목 안쪽이 뜨끔거렸다. 몇 번이고 씹어 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자학하듯 더 물어뜯고, 그 비린 맛을 침과 함께 삼켰다.
그 사람이랑 나, 아무 사이 아니야. 기사 잘못 나갔어. 일어나면, 일어나기만 하면 내가 다 설명할게. 엄마 하라는 대로 내가 다 할게.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였다. 거칠게 헐떡이는 숨은 나오는 것보다 들어가는 게 더 많았다. 폐가 크게 부풀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참았던 눈물이, 예고도 없이 울컥 터졌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채우고 떨어지고 반복하는 뜨거운 것들에 뺨과 턱은 하염없이 젖어들었다.
〔엄마…… 나 너무 무서워…… 그냥 다 무서워…….〕
어머니가 잘못되는 것도, 에녹이 슬퍼할 것도, 그와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저 모든 게 두렵기만 했다.
고통을 참는 것에도, 홀로 남겨지는 것에도 익숙하다 믿었다. 뜬금없이
심장을 좀먹는 불안감 속에서도 난 또 잘 견딜 거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담담히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 봐도 소용없었다. 심지 잃은 다리는 소금 성이었다. 터져버린 눈물샘에서 흘러나오는 것들만으로 쉽게 녹아내렸다.
정난우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미동 없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뜨겁게 폭발하는 오열이 차가운 기계 번득이는 중환자실에 절절하게 고여들었다.
겨우 찾은 안식의 땅은 이토록 불안한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위기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나 천지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만약 저 때문에 어머니가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 버린다면…….
정난우는 막연히 직감했다. 아마 영영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그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보상으로 이제야 겨우 봄을 맞은 게 아니었나.
불행을 불러온다. 제 생존도, 제 사랑도.
제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사신의 낫이었다. 모두를 베고, 모두를 땅에 묻는다. 소년을 사랑했던 괴테의 마왕처럼, 가질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어 결국 죽은 영혼만을 손에 쥐는 거다.
늘 태양처럼 웃어주던 에녹의 얼굴이 차츰 까맣게 물들어갔다. 그건 제 곁에 잠시 머물렀던 참람한 빛 무리가 멀어져가는 걸 뜻하는 건지도 몰랐다.
네게 어울리는 건 역시나 빛 한 줌 들지 않는 암흑 속이라고, 누군가가 비웃으며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