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8
〔어이구. 또 왔어?〕
최순애가 기특하다는 듯이 눈가를 허물며 맞아주었다. 이정운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네.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응. 지금 집 안에서 할매랑 같이 콩나물 다듬고 있어. 어여 들어가 봐.〕
할매는 정난우의 어머니 양명옥을 말하는 거였다. 이정운은 고맙습니다, 하며 주인집 건물로 들어가 현관을 열었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펴 놓고 마주 앉은 제 어머니와 양명옥이 보였다.
〔어머님. 그냥 계세요. 제가 할게요.〕
이정운은 제 어머니를 잠시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녀, 김혜영은 극구 만류했지만 양명옥은 후후 웃으며 마다했다.
〔눈 안 뵌다고 자꾸 안 쓰면 더 안 좋아져.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 그래도…….〕
김혜영은 안타깝다는 듯이 양명옥의 손에 들린 콩나물을 응시했다. 이정운은 운동화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혜영이 반짝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정운이 왔니?〕
〔네. 콩나물 다듬고 계시네요.〕
〔응. 너도 도울래?〕
이정운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지 한 면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몸이 약한 어머니시라 항상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이정운은 능숙하게 콩나물 껍질을 벗기고 상한 꼬리도 잘라냈다. 양명옥이 소리 내서 웃었다.
〔세상에. 사내 놈 손이 참 야물딱지기도 하지. 덩치는 커다래갖고 어쩜 이리 야무지게 잘도 다듬어. 우리 동생 아들 하나 참 잘 키웠다니까.〕
김혜영은 쑥스러운 듯이 볼을 붉혔다. 이정운은 묵묵히 콩나물만 다듬었다.
〔어머님이 더 아들을 잘 키웠죠. 이 녀석은 영 애교도 없고 무뚝뚝해서…….〕
〔우리 난우?〕
양명옥이 빙그레 웃자 얼굴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럼. 내 새끼처럼 금이야 옥이야 길렀지. 그런데 애가 장님으로 산 지가 너무 오래 돼 나서 그런지, 너무 앳돼. 어리고 응석받이고, 펜션 올 때마다 봐봐. 제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아주 쫄쫄쫄쫄. 그나마 눈 새파란 외국인 친구 데려왔을 때는 좀 덜하니 다행이지. 아주 딱 달라붙어서 앵앵거리는데 귀찮아 죽겠어.〕
양명옥은 맘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김혜영도 이정운도 그 따뜻한 속내를 잘 알기에 별 말 없이 경청했다. 양명옥이 콩나물 한 줌을 더 들어 올리다가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멈췄다.
〔그런데 정운이는 왜 아직 한국에 있어? 원래 일월부터 미국에 있는 학교 간다고 안 했나?〕
〔가을로 조금 미뤄졌어요.〕
〔아아. 그래. 그럼 둘 다 살림 정리해서 같이 가는 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이정운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뇨. 저 혼자서 가요.〕
〔왜? 요새 애들 엄마랑 같이 유학 가는 경우 많다던데. 아들 혼자 보내고 외로워서 어찌 살려고.〕
김혜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국 물가가 비싸잖아요. 아무리 회사에서 보내주는 거라고 해도 제가 어떻게 얹혀살겠어요. 지금도 저 낮에 화장품 가게에서 푼돈 버는 걸로 근근이 사는데.〕
양명옥이 가만히 김혜영을 바라보았다. 조카 손자 박찬영에게 들은 건데, 이 고운 여편네는 몇 년 전 바다 귀신에게 남편을 잃었다.
그 때 함께 목숨을 잃은 선원들 장례 치르느라 마을이 온통 울음바다였다고 했다. 그래도 듬직한 아들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볼 때마다 비쩍 마른 게 참 안쓰러웠다.
〔동생 가게 잘 안 돼?〕
〔어려울 정도는 아니고요, 우리 정운이랑 생활비 아껴 쓰면서 살 만큼은 돼요. 걱정 마세요.〕
〔그냥 여기서 아예 일하지 않을래?〕
김혜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에서요?〕
〔그래. 난우가 자꾸 제 엄마 힘들다고 사람 한 명 더 쓰라는 걸 내가 고집부리고 있거든. 아마 동생 데려다 같이 일한다고 하면 기뻐할 거야. 애가 베푸는 건 잘 해서 월급도 섭섭지 않게 줄 거고.〕
아아, 김혜영이 멍하게 생각에 잠기려 할 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실내를 진동했다.
〔형님!〕
세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불청객에게 향했다. 퉁실퉁실한 살집을 가진 50대 여성이 제 집 안방처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양명옥이 침침한 눈을 깜빡였다.
〔형님, 난우 또 연락이 안 돼요!〕
아이고, 양명옥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난우의 고모였다.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곁에 앉아 목청을 높였다.
〔아휴, 내가 정말. 조카라고 하나 있는 게 어른들 전화 꼬박꼬박 무시하고. 내가 꼭 이렇게 일 있을 때마다 여기 찾아와야겠어요? 네?〕
〔무슨 이유가 있겠지. 또 왜 그러는데?〕
〔하아. 참. 우리 아들 이번에 미국에 이민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걔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뭐 아는 게 있어지. 뭐 좀 물어 보려고 할 때마다 연락이 안 돼.〕
〔바쁘게 사는 애가 전화 좀 못 받는 거 가지고 왜 그리 난리야. 채신 머리없이.〕
〔형님 전화는 꼬박꼬박 받을 거 아니에요!〕
이정운의 낯빛이 점차 일그러져갔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자꾸 귀에 거슬렸다. 어른이라 뭐라고 말도 못하고 콩나물만 잡아 뜯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김혜영이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난우 그 놈.’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 험한 말만 연달아 내뱉는 그녀는 결국 형님이 직접 전화해 달라며 억지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날이 안 좋은 듯했다. 이정운은 이쯤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너무 시끄럽네요, 아줌마.〕
김혜영이 표독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리는 양명옥에게 난동을 부리려던 그녀가 멈칫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통통한 얼굴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뭐? 네가 뭔데 남의 집 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아줌마야 말로 뭔데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남의 집 자식한테 전화를 걸어라 마라예요?〕
〔이게 돌았나! 걔가 왜 남의 집 자식이야! 걔 내 동생 아들이야!〕
〔못 키우겠다고 버렸다면서! 그럼 남이잖아!〕
김혜영이 지지 않고 윽박질렀다. 이정운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어머니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어쩌면 처음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 정난우의 고모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별, 별 미친년이!〕
그녀가 머리채를 잡아 뜯을 것처럼 손을 뻗었다. 이정운이 그 손목을 재빨리 낚아챘다. 흉흉하게 빛나던 눈이 어머니에게서 제게로 꽂혔다.
〔이건 또 뭐야? 넌 또 뭔데?!〕
이정운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에 그녀가 움찔 눈썹을 꺾었다. 이정운은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 으스러뜨릴 듯이 힘을 주며 말했다.
〔어디서 손찌검이에요? 나 저 아줌마 아들이에요.〕
붙들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제가 겁먹은 걸 애써 감추며 과장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왜, 한 대 치려고? 쳐 봐, 쳐 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끼가 어디 어른 손을 붙잡아?〕
이정운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내가 왜 나가! 여기 내 조카 소유야! 나가려면 생판 남인 너희들이 나가야지!〕
〔그 조카. 고아원에 보내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버렸다면서요.〕
이정운도 제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했다. 담담히 찔러 내려오는 눈빛에 그녀는 얼굴을 꿈틀거렸다. 붙들린 손목을 거칠게 빼내려고 용을 써보지만 한창 힘이 남아 돌 나이인 사내 녀석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당장 놔! 놓지 못해?!〕
〔조용히 나간다고 약속하면 놔 드릴게요. 〕
한숨만 푹푹 내쉬던 양명옥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됐어, 정운아. 어른이랑 몸싸움 하는 거 아니야. 자네도 이만 가.〕
이정운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목을 놔 주었다. 하얗게 질려 있던 손목은 곧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녀는 치를 떨며 그걸 내려다보다가 바람소리가 나게 뒤돌아섰다.
막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던 그녀가 멈춰 섰다. 가방을 마구 뒤지더니 바닥에 박스 하나를 내던졌다. 그게 뭔가 싶었지만 그녀는 세 사람을 차례로 노려보고 휑 나가버렸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한바탕 폭풍이 분 거실에 김혜영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양명옥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지, 그럼. 으휴. 내가 죽어야 저 꼴을 더 안 보지.〕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님 돌아가시면 난우는 어떻게 해요.〕
〔속이 터져 그래, 내가. 가족이랍시고 나타났을 때야 좋았지. 이제야 우리 난우가 시력도 찾고 가족들 품에서 잘 자랄까 싶었지. 그런데 지 애비나 지 고모라는 거나 어쩜 저리 지밖에 몰라.〕
양명옥이 미어지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 어린 것 그렇게 사지로 몰았으면 됐지. 뭘 더 뜯어먹을 게 있다고…… 인면수심도 정도가 있는 거지. 불쌍한 내 새끼.〕
양명옥의 한탄을 뒤로 하고 이정운은 거실 바닥을 정리했다. 고모라는 여자가 내팽개친 건 국제소포였다. 수신지는 펜션 주소, 수신자는 정난우였다. 이정운은 상자를 집어 들며 일어났다.
〔할머니. 이거 형한테 온 것 같은데요.〕
〔응?〕
양명옥이 미간을 좁히며 손을 내밀었다. 이정운은 상자를 건넸다. 양명옥은 둘둘 말린 테이프를 손톱으로 뜯으려다 다시 이정운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잘라서 가져와 보련.〕
〔네.〕
이정운은 부엌에 가서 가위로 테이프를 갈랐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만 건져냈다. 그 때, 뭔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용물들 감싼 포장 완충제를 뜯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건 카드였다. 봉투 없이 빠끔 입을 벌린 사이로 인쇄된 활자가 언뜻 보였다. 영어였다.
뭐지, 하며 무심코 집어 들어 필쳐보았다. 담담한 눈으로 짧은 메시지를 읽어낸 이정운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 들어갔다.
꽃 피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2월도 며칠 안 남았다. 3월을 목전에 둔 훈훈한 공기에도 정난우는 그저 침울했다. 봄이 오면 에녹은 스케줄 때문에 바빠지기 때문이었다.
“자주 볼 수 있어. 진짜야.”
정난우는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봐야 지금처럼 쭉 붙어있지는 못할 거다.
오정수에게 당차게 커밍아웃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잤다고 세상 끝나는 거 아냐!’ 강력히 주장하던 그에게 ‘저한테는 안 그래요.’하고 소심하게 우기자 그는 상처받은 얼굴로 회사에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한 고비 넘기니까 이제는 떨어져 지낼 걱정을 해야 하는 거다. 마냥 우울하고 걱정되고 하여간 맘이 편치 않았다.
에녹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입가에 대 줬다. 입을 벌리자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사르르 혀에 녹았다.
“그렇게 섭섭해?”
“네. 섭섭해요. 한 달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지…….”
에녹은 희미하게 웃으며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 날랐다. 막 한 숟가락 더 입에 넣어 주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정난우는 그대로 떠밀어 에녹의 입술 위에 가져갔다.
“같이 먹어요. 맛있네요.”
에녹은 기꺼이 받아먹었다. 그 때,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작작들 좀 합시다.”
대사와 내레이션 작업까지 모두 끝내고 마지막 시나리오를 꼼꼼히 훑고 있는 루스였다. 막바지 작업을 남겨 둔 그는 공연 있는 일본까지 따라왔다.
이틀 내로는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면 되지만 이쯤 되니 도저히 집중이 안 됐다. 정난우에게 틈틈이 이것저것 물어야 하는 통에 붙어있긴 해야겠고, 그러자니 저 꼴을 계속 봐야 하고, 참 착잡한 상황이었다.
“저 내일 협연만 관람하고 갈 거니까 그 동안 좀 자제 좀 해 주세요. 난우 씨, 에녹은 말려도 안 들을 놈이니 난우 씨에게 부탁 좀 합시다.”
정난우는 뜨끔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딱 달라붙은 에녹을 저만치 밀어내고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악보를 다시 유심히 살폈다. 오늘 추가로 나온 OST 곡이었다.
“연주해 볼게요.”
신중하게 머릿속에서 시물레이션을 돌려 보고 나서 곧장 바이올린을 들었다. 에녹이 굽힌 무릎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곤두선 신경으로 작업에 몰두하던 루스의 시선도 정난우에게 향했다.
공기가 느리게 진동했다. 선율은 물결처럼 모든 공간을 습하게 적시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 조용히 걷고, 조용히 휘돌고, 격렬함 없는 그 음표의 떠돎이 각박한 세상을 걷는 주인공을 불러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맹인, 에녹은 간간이 벽을 더듬고 지팡이로 바닥을 훑어가며 걷고 있다. 낡아빠진 바이올린 케이스를 추슬러 메는 손은 추위로 발갛다.
손톱 만 한 눈이 뺨에 떨어진다. 손을 들어 그것을 만져본다. 체온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담벼락 너머에서는 어린아이가 연습하는 미숙한 바이올린 선율이 들린다. 불투명하게 초점 나간 눈으로 에녹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든다. 퀴퀴한 냄새 나는 뒷골목, 어둠 속에서 에녹은 그만의 광명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一외롭지 않다, 이 찬란한 어둠이, 음악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니까.
“환상적이네요.”
4분 여 간의 연주가 끝나자 루스는 극찬을 늘어놓았다. 정난우는 그의 발치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방금 제가 떠올렸던 이상적인 그림이 딱 그려졌습니다. 완벽해요.”
에녹의 시선이 루스의 충격 섞인 감동을 일별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정난우는 멋쩍은 듯 바이올린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에녹이 부드럽게 청했다.
“한 번 더 해 봐.”
정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란한 기교가 필요 없는 터라 짧은 악보의 코드들은 머리에 다 저장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신중하게 장면들을 끌어올리며 활을 그었다.
그 때였다.
휘이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휘파람 소리에 깜짝 놀라 연주를 멈췄다. 에녹이 턱짓을 해 보였다. 계속 하라는 뜻이었다. 토끼처럼 눈만 깜빡이다가 얼떨떨하게 활을 다시 움직였다.
에녹은 악보를 보고 있었다. 느리게 울리는 선을 위에 그의 휘파람 소리가 얹어졌다. 바이올린은 비브라토를, 휘파람은 바이브레이션을, 두 떨림이 끈끈하게 공명했다.
정난우의 까만 눈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의 휘파람 소리는 목소리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지녔다. 그저 바람 새는 소리일 뿐인데, 그것은 자유로운 음을 돌아다니며 짧거나 긴 파장을 만들어 냈다. 울음을 삼키는 하모니카처럼 여운은 강렬했다.
고음으로 쭉 치고 올라갈 때, 에녹은 잠깐 눈을 맞췄다. 리듬을 타느라 그의 고개는 나른하게 흔들렸다. 그는 곧 다시 악보로 시선을 내렸다. 연주가 끝나고 정난우는 멍했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바람 소리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숨만 색색 내쉬었다. 에녹의 마음이, 그가 떠올렸을 외롭고 쓸쓸한 겨울밤이 제 가슴에 들어왔다.
“왜, 새삼 반했어?”
에녹이 능청스레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복숭아처럼 상기된 정난우의 뺨이 볼록 올라왔다. 활짝 웃으며 바이올린을 내려두고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깊고 까만 눈동자에 빛 가루가 반짝반짝 흘렀다. 조금 당황한 듯 눈썹을 꿈틀 한 에녹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굉장해요! 정말 굉장해요! 휘파람으로 어떻게 그런 바이브레이션을 만들어요? 천재 같아요!”
천재한테 천재 소리를 듣다니, 에녹은 피식 웃으며 제 얼굴을 감싼 손을 억지로 뜯어냈다.
“야. 좀 떨어져 봐.”
“…왜요?”
정난우는 풀썩 주저앉아 안타까운 듯이 눈을 빤히 올려 떴다. 에녹은 키스할 것처럼 다가와 짓궂게 더운 숨을 흩뿌렸다.
“나 흥분돼. 루스 있잖아. 구경꾼 앞에서 일 치르고 싶一”
퍽.
티 테이블에 놓여 있던 각 티슈가 날아와 에녹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아, 하며 에녹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저 인간 은근히 손버릇 나쁘다니까.”
정난우는 강타당한 에녹의 뒷머리를 살살 매만지며 물었다.
“아파요?”
에녹은 눈 꼬리를 살살 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어디선가 진동이 바르르 울렸다. 메슥거리는 속을 커피로 달래던 루스도, 넋 빠진 것처럼 굴던 에녹도 순간 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직 정난우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를 단번에 찾아갔다.
소파 구석 옷 더미에 파묻혀 액정을 깜빡이는 기기가 그 손에 구조되어 나왔다.
“쟤 귀는 신기해.”
에녹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난우는 소파 아래 앉은 채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번호에 결국 도로 내려두었다. 에녹이 다가와 어깨에 턱을 얹으며 물었다.
“왜? 누구 전환데?”
“몰라요. 몰라서 안 받았어요.”
고모님인 것 같아요, 라는 말은 평화를 위해 잠재워 뒀다. 요즘 계속 전화를 해 대지만 한 번도 안 받았다. 그녀와의 통화는 늘 피곤했다. 차라리 그냥 서론 다 빼고서 문자로 돈이 얼마가 필요하다고 용건만 말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어수룩한 저도 알 만큼 의도는 빤했다. 예쁘지도 않은 포장지를 몇 겹이나 두르는 걸 지켜보는 게 더 고역이었다.
“너 또 그 친척 중에 하나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에녹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위로 솟구쳤다.
“너 요 며칠 계속 전화 울리는데 안 받잖아. 어머니 제외하고는. 거기 고모라고 쓰여 있던데?”
“…하, 한글인데.”
정난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녹이 가끔 가나다라를 읊는 걸 보긴 했지만 특별히 짬을 내서 공부하는 건 못 봤다. 그보다는 맹인들의 생활이 담긴 영상을 본다거나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구한다거나 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 글자 그대로 적어서 한한테 물어봤어. 고모래.”
에녹의 대답은 간단했다. 정난우는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손 안에서 짧은 진동을 느꼈다.
문자 메시지였다. 단번에 확인을 못하고 쭈뼛쭈뼛 에녹의 눈치만 봤다. 진짜 친척이면 에녹이 화를 낼 거다.
“확인해.”
에녹이 고압적으로 턱짓해 보였다. 빤히 주시하는 시선에 못 이겨 결국 액정을 꾹꾹 눌렀다. 잔뜩 긴장했던 정난우는 문자 메시지를 연 순간 눈을 크게 깜빡였다.
『형. 저 이정운이에요. 갑자기 죄송해요. 놀라실 것 같아 며칠을 망설였는데 좀 급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어머님께 번호 여쭤봤어요. 펜션으로 형한테 국제소포가 하나 왔는데, 이거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거든요. 통화 가능할 때 전화 좀 주시겠어요?』
차가운 활자는 차분하고 편안한 이정운의 음성을 아득하게 전해왔다. 정난우는 물끄러미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왜? 누군데?”
대답을 망설이자 에녹은 미간을 좁혔다.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다가 결국 돌려 앉혀지고 말았다. 큰 손이 양 뺨을 꽉 감싸 쥐고 도주로를 차단했다. 한 뼘 거리에서 정확히 눈을 맞춘 그가 물었다.
“말하기 싫은 거야. 곤란한 거야?”
“…그게.”
“어떤 이유로 망설여? 바람이라도 피웠어?”
정난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에녹이 농담이라는 듯 눈 꼬리를 살짝 접었다.
“그럼 왜? 정말 친척이야?”
“아뇨…… 친척은 아닌데…….”
“그런데?”
발신인을 얘기하는 순간, 그러게 미리 잘 처신하지 그랬냐며 혼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얼렁뚱땅 넘어가 줄 상대도 아니었다. 미세한 동요조차 핥아낼 것처럼 주시해 오는 시선 아래에서 정난우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에녹.”
“응.”
“화 안 낸다고 약속하면…….”
“안 낼게. 하늘에 대고 맹세.”
에녹은 선언하듯 한 손을 허공에 세워 보이며 즉시 답했다. 정난우는 에녹의 새끼손가락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지난 달 강원도 팬션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에녹의 얼굴은 내내 표정이 없었다. 눈동자는 겨울하늘을 가둬 둔 창문처럼 차가웠다. 짧은 침묵 후에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내 놔 봐.”
“……에?”
“줘 보라고. 일단 통화 내가 먼저 할 테니까.”
에녹은 턱을 비스듬히 젖혀든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연히 기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저기, 그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냥 제가…….”
“너 금방 바꿔 줄게. 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어요. 어머니도 잘 챙기고…….”
“심한 말 안 해. 정말이야.”
에녹은 손끝으로 정난우의 뺨을 툭 건드리며 약속했다. 그제야 정난우는 풀어진 표정으로 휴대폰을 건넸다. 에녹은 곧장 통화버튼을 누르더니 자리에서 아예 일어났다.
“어디 가요?”
정난우가 물었지만 에녹은 앉아있으라는 듯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타이밍도 좋게 그 때 딱 통화 연결음이 끊겼다.
《안녕하세요. 무례인 줄은 아는데 어쩔 수가…….》
“나 정난우 아니고, 에녹 밀리건. 베를린 리셉션장에서 봤지? 일단 나랑 먼저 얘기 좀 해야겠다.”
상대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에녹은 창가로 다가가 섰다.
“너 국제소포 받았다고 했지. 거기에 카드 있어, 없어一”
《수신인이 정난우 씨고, 저는 본인에게 직접 말할 생각인데요.》
“난우가 보면 안 되는 게 있어. 카드 있는지 없는지 그거나 대답해 봐.”
《죄송한데 직접 얘기해야 해요. 남한테 알리기 좀 그런 거라서요.》
아, 이 어린놈의 새끼가…….
에녹은 농도 짙은 한숨을 흘렸다. 말하는 방식은 정난우인데 훅 풍겨 오는 느낌은 루스 커넬이었다. 칼 같고 고집 있고 가끔 짜증나는 스타일 말이다.
“너 나 통과 못하면 평생 걔랑 통화할 일 없어.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 해. 그러면 바꿔줄 테니까.”
안 되면 별 수 없었다. 협박이라도 할 수밖에.
“카드 있었지.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어?”
상대는 신중하게 호흡했다. 마치 풀숲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대 영역을 훔쳐보는 짐승처럼. 그리고 녀석, 이정운은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정난우 씨랑 무슨 사이예요?》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협박 같아요, 이게. 당신이랑 연관된 거고》
성가시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에녹의 얼굴에서 온기가 싸늘히 증발했다. 일순 머릿속이 극렬히 요동쳤다. 뇌는 모닥불이고 생각들은 불티처럼 두개골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씹 새끼가 이번엔 또 뭐라고 하는데.”
《……이전에도 있었나요?》
“그래. 내가 발견했고, 경찰에 신고해 뒀어. 난우가 불안해할까 봐 내용은 얘기 안 했고. 그러니까 그게 협박이라면 내가 가장 먼저 들어야 돼. 말해. 뭐라고 씨부려 놨는지.”
이정운의 목소리는 또 잠시 멈췄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에녹은 짓뭉개듯이 빠르게 입술을 문질러댔다.
저를 끼워 넣어서 협박이라면 유추할 수 있는 쪽은 하나였다. 당연하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주 불쾌한 벌레 하나가 뇌 주름 사이를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를 정난우랑 엮는다고?
지금 대외적으로 제가 정난우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영화배역 때문이라고들 알고 있었다. 이제껏 연애 상대들도 죄 여자들뿐이었고, 그녀들은 당당하게 제 경험담을 흩뿌려 댔다. 당연히 보통사람들은 저와 정난우 사이에서 로맨스를 상상하긴 힘들 거다.
《짧았어요.》
이정운이 한참 후에야 운을 뗐다.
《나의 난우, 당신은 결국 에녹 밀리건도 망치게 될 겁니다. 그게 끝이 었어요.》
에녹의 눈꺼풀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뒤엉켜서 비벼지다가 끊어지길 반복하는 추론과 의심들이 뇌를 달궜다.
“그 문구, 정확해? 철자 하나 틀리거나 빠지지 않고.”
《정확해요. 지금 보고 있어요.》
“그 외에는 뭐가 있었지?”
《명품 커프스단추랑 봉투 없는 카드만 상자에 담겨 있었어요.》
“상자는 버렸나?”
《아뇨. 버린다고 하고서 제가 카드랑 들고 나왔어요. 정난우 씨 어머니는 카드, 모르세요. 걱정하실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리고 제가 챙겼어요. 정난우 씨한테 직접 드리려고.》
잘했다고 대꾸해 주면서도 에녹은 의아하게 한쪽 눈썹을 꺾었다.
“넌 그런데 왜 그렇게 정난우한테 신경 써?”
이정운은 그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게 그것도 아닌 터라 에녹은 추궁을 멈췄다. 부르튼 입술을 혀로 축이고 나서 말했다.
“상자랑 카드 잘 보관하고 있어. 그리고 난우한테는 얘기하지 마.”
《…그건 안 돼요. 본인이 알아야죠.》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고 있어!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아는데!”
아, 씨발.
에녹은 울컥 소리 지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꽉 닫힌 문을 빠르게 일별하고 숨죽인 뒷말을 이었다.
“내가 반드시 그 새끼 찾아서 잡아 쳐 넣을 거야. 그러니까 너, 그전까지 난우한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너 때문에 쟤 또 겁먹어서 땅 파고 기어 들어가면 가만 안 둔다.”
알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서는 본인이 알아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정난우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다. 만약 이게 그 민감한 귀에 들어간다면, 하루 종일, 몇 날 며칠, 아주 내내 불안해할 거다.
제가 날카로운 종이에 손끝만 베어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나면 새파랗게 질려서 떨 거다.
정난우. 그 끔찍한 감금에서 건져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았던 독한 정난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제 모든 걸 바칠 것 같은 맹목의 정난우. 고통을 참는 데에서도 빌어먹게 숙련자인 가엾은 정난우.
그런 정난우라면, 이별을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또 누군가가 저 때문에 다치고 부서지기 전에, 그냥 끝내자고 할지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결말이었다. 차갑게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 그만 해요.’ 말하고 돌아서는 비현실적인 뒷모습이 너무나 가깝게만 느껴졌다. 불길한 상상은 바싹 마른 산등성이에 떨어진 성냥불처럼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맥박을 울렸다. 늑골이 부서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가증스럽게 울분을 가장한 불안함 때문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매달리고 화를 내고 그것도 안 되면 몸으로라도 들이 댈 인간이 저란 놈이었다. 끝도 없이 구질구질해질 거다. 그 정도 더러워지는 건 괜찮았다.
다만 문제는 정난우였다. 한 번 밀어낼 때마다 속으로 엉엉 울 바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제 지독한 이기심은 끝끝내 다시 품고 싶어 발악을 해 댈 거니까.
《알겠어요. 일단 보류해 둘게요. 그럼 이건 어떻게 해요?》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얼룩진 상념을 뜯어냈다. 에녹은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가지고 있어. 매니저들한테도 얘기하지 마. 아무한테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이 비가 소나기가 될지 장마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난우는 온실에 들여놓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전화 바꿔줄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소포 얘기는 적당히, 그냥 비싼 물건으로 보이는 게 왔더라 하고 끝내고.”
《그렇게 할게요.》
기다려, 그렇게 통보하듯 말하고 에녹은 제 표정을 가다듬었다. 몇 번 숨을 고르고 나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가자 정난우는 아까 자세 그대로 멀뚱히 앉아 있었다. 단정히 잘린 앞머리 아래 환히 드러난 눈매가 곧바로 자석처럼 끌려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린 눈치였다. 가슴 한 구석이 또 콱 비틀렸다. 저런 녀석을 어떻게 놔 줘, 에녹은 멋지게 자기합리화를 끝내며 휴대폰을 건넸다.
“받아. 난 용건 끝났어.”
정난우는 에녹의 눈만 빤히 올려다보면 휴대폰을 건낸받았다. 심한 소리 안 한다고 햇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그래도 그 용건이라는 게 뭔지 궁금했다. 하지만 뭐라 입을 뗄 사이도 없었다. 에녹은 잠시 코트를 뒤적거리더니 루스의 팔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아예 객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닫힌 문을 황망히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이정운이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얼른 휴대폰을 귓가에 붙였다.
〔여, 여보세요?〕
《잘 지내셨어요?》
〔아, 네. 나야 잘 지내요. …그런데 저한테 할 말이…….〕
《그냥 소포 온 거 핑계로 안부나 물어볼까 해서 전화했어요. 이런 사소한 기외 아니면 따로 이야기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부담스러우시면…….》
차분하고 낮게 흐르는 음성이었다. 따스한 온기는 없지만 무뚝뚝한 배려가 묻어 나왔다. 그전에는 미처 몰랐던 감상이었다.
〔아니에요. 따로 연락할 건 예상 못해서 처음엔 당황하긴 했는데, 괜찮아요.〕
이정운은 소포 시야기를 했고, 펜션에 계신 노모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난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있어요? 줄리아드 예비스쿨 갈 거라고 안 했어요?〕
《원래는 봄 학기에 가려고 했는데, 미리 떠나려던 날 어머니가 갑자기 며칠을 앓으셔서 그냥 가을 학기로 미뤘어요. 그 때 저희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도 가을 학기였고요.》
〔왜…왜, 왜요? 어디가 많이 안, 안 좋으세요?〕
정난우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었다. 그러자 이정운은 처음으로 목소리에 흐린 웃음기를 섞었다.
《아뇨, 평소에는 은근히 잔병도 없고 건강하신데, 가끔가다 겨울에 한 번식 그러세요.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까지 방에서 꼼짝 못하고 숱가락 들 힘도 없어지시거든요. 저 없으면 돌봐드릴 분도 없고, 한 학기 미룬다고 뭐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어서 그렇게 결정했어요.》
아아, 정난우는 안도로 가슴를 쓸어내렸다. 다행이었다. 유학도 미룰 정도라기에 뭔가 큰 병이라도 났나 싶어 걱정했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엄마도 기뻐하실 거예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효자구나.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엄마에게 못해 줬던 것들을 이 아이는 묵묵히 해내고 있는 듯했다. 뜨끈한 기기를 한참 매만지다가 다시 말문을 뗐다.
〔그럼 가을에는 혼자 유학 가는 거예요? 어머니는?〕
《어머니는 한국에 계신대요. 외국생활 자신 없다고 하시네요.》
그럼 홀로 남은 어머니는 누가 지켜드려요?
정난우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지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주제넘게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유학비는 회사에서 다 지원이 되는 거고요?〕
《기본적인 것들만요. 생활비 같은 건 다 빚이죠, 뭐.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그 뒤로는 전액 지원해 준다고는 해서 열심히 준비는 하고 있어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콧대 높은 대회였다. 역대 한국인 입상자는 강도영 한 명이었고, 그는 최연소 우승자가 되며 클래식계에 파란을 일으켰었다.
〔데뷔 음반은 아직……?〕
《제가 형이나 강도영 씨처럼 십대에 데뷔 음반 낼 만큼 천재는 아니어서요.》
음반수익도 없고, 공연수익을 바랄만큼의 커리어도 없는 상태 같았다. 강릉에서 박찬영과 같은 동네에서 함께 오래 살 정도면 형편도 그리 안 좋을 거다. 아직 어린 학생인데 벌써부터 유학하며 빚을 지면 그 마음이 자못 무거울 것 같아 걱정이었다.
정난우 자신은 유학생활에서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학비며 살 곳이며 생활비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에 계신 어머니까지 회사에서 다 책임을 져 줬다.
만약 그 중 하나라도 지원받지 못했더라면 제가 유학을 할 일은 없었을 거다. 심지어 계약금도 그 당시 파격적일 정도였는데, 하나도 안 떼갔다. 공연, 음반수익 모두 계약서에 적힌 배분율을 칼 같이 지켰다.
〔저기…… 정운 학생. 내가요…….〕
《말씀하세요.》
〔나는 그맘때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되게 좋은 기회를 많이 가졌거든요. 돈 걱정…그런 거 한 번도 안 해 보고, 그냥 바이올린만 생각하고 연습하고 그럴 수가 있었, ……아, 아니. 내가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
흠칫 하며 얼른 덧붙였다. 이건 너무 오해를 불러올 발언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이정운은 또 희미하게 웃었다.
《알아요. 그런 거 아니라는 거.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고마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 걱정 없이 연습에 몰두하고 그런 환경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서…… 어머니도 그게 마음이 편하실 거고. 그래서 이번에, …내가 이번에 매니지먼트사랑 전속 계약 유지 하면서 계약금을 좀, 진짜 엄청 많이 받았거든요. 도영이 형한테 남아있던 빚도 한 번에 다 갚았고, 나머지는 다 통장에 있는一〕
결국 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 때마다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 정말 미안해요. 이게 아닌데…….〕
정난우는 울상을 지으며 주먹 쥔 손으로 제 머리를 세게 쳤다. 그냥 두드린 정도가 아니라 눈앞에서 불꽃이 될 정도로 후려쳤다.
정말 바보였다. 그러게 평소처럼 천천히 생각해서 정리해서 내뱉었어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막 나오는 대로 내뱉으니까 이 꼴인 거다.
정난우는 다시금 꽉 쥔 주먹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그 때 뭔가 다급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빠르게 엄습해왔다.
뒤따라야 할 아픔은 손목으로 옮겨갔다. 퍽 소리도 안 났다.
“뭐 하는 거야.”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에녹이 험악한 표정으로 제 손목을 꽉 옭아 쥐고 있었다. 사납게 달려드는 눈빛은 그의 속내를 고스란히 담았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너 미쳤어? 왜 때려. 네가 뭔데 때려!”
“…에, 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머리통의 주인입니다, 라고 말할 주변머리가 한 올도 없는 정난우는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에녹이 화난 얼굴로 방금 전 한 대 맞은 머리를 콱콱 문질러 왔다.
“독한 놈.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 아 씹, 깜짝 놀라서 신발도 못 벗었네.”
에녹은 한 손으로 구두를 한쪽 씩 벗어 문 쪽으로 내던졌다. 루스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에녹을 바라보다가 벽에 부딪쳐 바닥에 뒹구는 구두들을 발로 툭툭 차서 신발들 사이에 골인시켰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아서 아직도 통화 중이야? 빨리 끝내.”
에녹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정난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여, 여보세요. 안 끊었죠?〕
《네. 안 끊었어요.》
휴. 정난우는 야트막하게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신중히 말을 골라 내뱉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요. 회사에 빚 지지 말고, 내가 후원해 주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기기가 침묵했다. 정난우는 부드럽게 변한 에녹의 손길 아래 몸을 편안히 늘어뜨렸다. 역시 그가 옆에 있으니까 이렇게 뭐든 안심이 됐다.
《아니에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적은 금액도 아니고, 차라리 회사에 달아 놓고 나중에 갚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재단 통해서 학생들 장학금도 원래 주던 거예요. 심사가 있긴 한데 아마 줄리아드 예비학교 들어갈 정도에 콩쿠르 수상 경력도 있다고 했으니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해도 아마 통과가 될 거예요.〕
에녹은 왠일로 말이 많아진 정난우를 빤히 주시했다. 조금 초조한 것처럼 손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등 뒤에 딱 붙어 앉아 꽉 품어 주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꺾어 희미하나마 눈 꼬리를 휘었다.
귀여운 놈. 이젠 제법 잘 웃기도 하고.
에녹은 피식 웃으며 힐긋 시선을 돌렸다. 소파 위에는 제가 두고 간 녹음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저걸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도청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영 맘이 안 놓이니 도리가 없었다.
〔그래요. 꼭,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네, 어머니 잘 보살펴 드리고요.〕
정난우가 통화를 끝내자 에녹은 슬쩍 손을 뻗어 녹음기를 꼈다. 아무렇게나 벗어둔 외투 안에 숨겨두며 물었다.
“뭘 그렇게 오래 얘기했어?”
그러자 정난우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쥔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기쁜 듯이 웃었다.
“기특한 학생이에요. 어머니가 좀 아프셔서 유학을 미뤘대요. 그래서 내가 가을 학기에 유학 오면 부족한 거 재단 통해서 후원해 주겠다고 했어요.”
에녹은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아니,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경계는커녕 이렇게 대놓고 친밀해 질 건수를 남겨둔 거다. 그런데 너무 반짝반짝 웃으니까 차마 가시 돋친 소리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왜 네가 그렇게까지 해 주고 싶은데?”
아, 하며 정난우는 살짝 입을 벌렸다. 요새 자주 물고 빨아서 그런지 혈색 옅었던 입술은 불그스름한 생기가 돌았다.
반들반들한 눈동자가 생각을 정리하듯 몇 번 미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정난우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 때문에.”
“…….”
“혼자 키우신다고 들었거든요. 아버지는 뱃사람이셨는데 바다에서 돌아가셨다고…… 재능 있는 애가 돈 걱정하고 벌써부터 빚지고 눈치도 봐가면서 공부하면 엄마 맘이, 많이 아플 것 같아서…….”
짙은 한숨이 코끝을 베었다. 이렇게 나오면 차마 야단을 칠 수가 없었다. 에녹은 낮게 혀를 한 번 차며 중얼거렸다.
“걔도 따로 만나지 마.”
“…네?”
“나 옆에 끼고서만 만나라고. 대놓고 감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나 걔 기분 나빠. 너 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열렬했거든.
에녹이 귓가에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낮고 결이 거친 음성은 등가죽이 떨릴 만큼 관능적이었는데, 그 내용은 어린애 같은 질투가 다였다.
그 기묘한 괴리감에 정난우는 가슴이 떨렸다.
“네. 그럴게요.”
웅얼거리듯 대답하자 에녹은 열심히 뺨을 맞대 비볐다. 로케이션 헌팅 문제 탓에 전화상으로 라인一프로듀서를 쥐 잡듯이 잡던 루스가 결국 폭발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방해 안 할 테니까 차라리 침실 들어가서 좀 부비다 나와.”
“그냥 감독님이 좀 피해주지?”
“나도 맘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 그런데 마무리만 남았잖아. 조금 있다 또 점검 받아야 돼.”
에녹은 냉큼 정난우를 훌쩍 안아 어깨에 짊어졌다. 희희낙락 침실로 가는 그의 등 뒤로 루스가 점잖게 충고했다.
“섹스는 하지 마.”
그 말에 빨개진 건 정난우 혼자뿐이었다.
루스는 완성된 스크립트를 조감독에게 넘기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워낙 빡빡하게 일정을 잡아둔 탓에 누적된 피로가 한계치였다. 전날 협연도 관람했겠다, 원래는 푹 자고 나서 곧바로 LA행 비행기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 한 통이 제 휴식을 망쳤다.
그 어마어마한 짜증의 여파는 적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카드 보낸다는 작자에게 이젠 악의마저 생겼다.
이 새끼 반드시 잡아서 꼭 교도소 관광이나 보내줘야지 , 안 그러면 왠지 억울한 거다. 조언하는 선에서 끝내고 나머지는 에녹에게 맡기자 싶었는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점핑해 들어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초인종이 울렸다.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자 예상대로 정난우와 에녹이 서 있었다. 안에 들여 소파에 앉혀두고서 가볍게 술상을 세팅했다. 명목은 시나리오 완성 기념 조출한 파티였다.
술자리가 약간 무르익었을 때쯤, 루스는 캐리어에서 명함 보관함을 꺼냈다. 길이가 어른 팔뚝만 한 보관함은 노란 고무줄로 플라스틱 뚜껑을 고정해 둔 상태였다. 루스는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제가 종종 자문을 구하는 신경정신과 의사 분이 계십니다. 현재는 뉴욕에 계시고요.”
정난우는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 들었다. 병원과 의사 이름을 멀거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루스가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난우 씨라는 이야기는 안 했고, 저 아는 사람에 빗대서 난우 씨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한 번 찾아와 보라고 하시네요. 이 쪽 분야에서는 꽤 저명하시니 부담 갖지 말고 상담 받아 보시라고요.”
“…그런데 저는 주치의 선생님이 계신데.”
루스가 빙긋 웃었다.
“난우 씨.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했죠?”
묻는 의도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뭘 배우는 건 좋아해서요.”
“난우 씨야 음악은 당연히 좋아했을 거고, 특별히 과목과는 상관없이 좋아하는 선생님 있었습니까?”
“영어 선생님 좋아했어요. 다정하시고 목소리도 편안해서요.”
“영어 수업은 다른 과목보다 더 열심히 들으셨겠네요. 공부도 더 열렬히 하셨을 거고.”
“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에 가서도 바이올린 안 할 때면 영어 테이프 틀어놓고 그냥 외우고 그랬어요. 등교하면 선생님 찾아가서 시키지 않아도 막 외웠던 거 줄줄 읊으면 잘한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셨거든요.”
“성실했던 꼬마 정난우였네.”
에녹이 흐린 미소와 함께 다리를 꼬았다. 루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이상적인 선생과 제자 사이의 그림이네요. 그런데 사실 심리치료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서로간의 신뢰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자주 쓰는 단어나 억양까지 결국 자신과 잘 맞는 의사를 찾는 것도 중요해요. 난우 씨 현재 주치의를 만나면 늘 불편하다고 하셨는데, 정작 저와 얘기를 나눌 때는 묻지 않은 것까지 다 말해 주셨잖아요. 저는 좀 더 편 안한 분을 만날 때까지 난우 씨가 여러 의사들을 만나보는 걸 권하고 싶군요.”
아아, 하며 정난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이제야 머릿속에 쏙쏙 파고들어온 거다.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대강 알겠어요. 그러니까 저하고 더 잘 맞는 새로운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 그런 거죠?”
“맞아요. 일단은 제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확실히 믿을 만한 분부터 추천을 해 드린 겁니다.”
정난우는 빳빳한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간 제가 굳이 한 병원을 고집한 건, 또 낯선 사람을 만나 그 괴로운 시간들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현재의 주치의는 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특별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그에게 아픈 과거를 다시 이야기할 일은 없었다. 그 단 하나의 장점이 제가 그를 고집해온 이유였다.
“루스를 믿고, 한 번 가 볼게요.”
“그리고 기왕이면 선생님 찾아가셨을 때, 그간 상담했던 일들도 함께 털어놔 보세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고,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의사가 어떤 말을 해 줬는지, 그런 것들.”
“…그것도 치료에 필요한 부분인가요?”
“네. 새로운 의사에게 미리 실패 경험을 알려주면 참고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들을 진작 알면 일찍이 고려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가 있겠죠?”
정난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저도 기억력은 좋은 편이니까 생각나는 건 다 말할게요.”
한 번 신뢰를 적립해 두니 의심조차 없었다. 무서운 정난우의 천성이 새삼 실감이 돼 한숨을 삼켜야 했다.
루스는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힐긋 시선을 옮겼다. 나른하게 내리 뜬 에녹의 눈동자는 옅은 술기운이 일렁거렸다. 됐냐, 눈으로 묻자 에녹이 미미하게 까딱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난우에게 어깨동무 건 팔을 움직이더니 손등으로 뺨을 슥슥 문질러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이제는 에녹이 더 걱정이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가 말끔하게 손 터는 과거의 잔영들이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 거다. 이대로 미래를 그려보자면 맘고생은 에녹의 몫이 될 공산이 컸다.
에녹은 늘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할 거고, 벌레 안 꼬이게 여기저기 약 치느라 바쁠 거다. 뜨거운 정력에 모든 걸 쏟아 붓겠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빠지고, 이 놈 저 놈 의심하느라 속이 새카매질 거다.
손쉬운 상대를 교묘히 가지고 놀며 희열을 느끼는 정신이상자가 있다면 정난우는 참 구미가 당기는 상대였다. 그것도 제가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다는 자만심이 늘 충만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이를 테면, 한껏 비틀린 정신과 의사, 라든가.
처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정난우에게 왜 극복의 의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는가, 였다. 주치의라면 당연히 이 부분을 지적하고 개선해 나갈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거다.
초기 약물 처방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걸 다 했다면 의당 남은 것은 심리적 접근이었다. 그런데 얼핏 들어보면 정난우와 주치의의 상담 시간은 거의 티타임에 가까웠다.
두 번째, 범인은 종종 명품 선물을 보낼 정도의 재력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정난우가 첫 번째 협박 카드를 받았을 때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 역시 알아야 한다.
신고 이후의 다음 소포는 펜션으로 직접 날아왔다. 이전까지 그랬듯이 투숙 호텔을 통해서 전하기에는 위험해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난우는 스토킹 신고를 했다는 걸 주치의에게 말했다고 했었다.
마지막으로 카드의 문구. 짧게 메시지를 남긴 그는 분명 에녹 밀리건 ‘도’ 망치게 될 거라고 했다. 이게 꽤 결정적이었다.
정난우에게는 아주 깊고 어두운 원죄의식이 있었다. 범인이 이걸 정확히 찔렀다는 건 결국, 정난우가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망가졌음을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 트라우마가 빛 속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랐다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는 걸 전제해야 가능한 협박이었다.
정난우는 지극히 폐쇄적인 인간이다. 제 얘기를 아무에게나 흘리고 다닐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의 폭은 아주 좁아진다. 정난우의 과거를 낱낱이 알고 있는 자들, 그 중에 한 명이었다.
강도영, 그는 처음부터 배제했다. 두 사람의 특별한 공감대와 인연에 빗대어 볼 때, 그는 마음만 먹으면 사실 정난우를 얼마든지 수렁에 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정난우의 완전한 신뢰, 그것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할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또 용의자는 줄어든다. 키워드는 바로 그 ‘정난우의 완벽한 신뢰’였다. 그걸 받는 이들은 절대로 그 카드의 주인이 아니다.
카드의 문구들은 기본적으로 정난우가 변하게 될 걸 의심하고 있으며, 막고 싶어 하고, 그로 인해 협박을 한다. 결국 자신이 자만하는 권능의 범위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없기에 그런 유치한 방법을 쓰는 거다.
예를 들면 강도영,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 모든 절차가 다 무의미하다. 그는 언제든 정난우를 부술 수 있다.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건 정난우에게 절대적 신뢰를 받는 에녹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말조심에 단단히 주의를 줬다. 어떤 구석에 몰려서도 정난우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一당신이 나를 버리면,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고 망가지고 부서질 거다.
아, 정말 파괴적인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애정이 떠났다 한들, 정난우는 그 사람 곁을 영영 떠나지 못할 거다.
한 때 깊이 사랑했던 이가 저로 인해 산산조각난다. 흉측한 상흔에 압도되어 있는 정난우에게 있어서 그보다 두려운 건 없었다. 제 발로 지옥의 화마에 기어들어가는 게 덜 고통스러울 거다.
다행이 제가 일 순위로 용의선상에 놓은 주치의는 정난우에게 그 정도 신뢰를 받지 못한다. 그가 택할 수 있는 건 교묘한 말장난 뿐.
다만 물리적 상해, 이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걸 확신할 수가 없는 게 못내 찜찜했다. 보통의 지능범이라면 늘 주목 속에 살아가는 정난우에게 직접적 위해를 끼칠 생각은 하지 못할 거다. 그러나 늘 비상식은 상식 아래 교묘하게 둔갑한 채 공존하는 법이니 단언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 의심한 대로 주치의가 환자들의 심리를 통제해 구원과 고통을 부여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자라면, 정난우는 매우 탐나며 놓치기 싫은 먹잇감이었다. 찬사와 영광의 빛, 그 안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홀로 고통 받는 정난우, 매혹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정난우가 스스로 제 권능 밖으로 빠져나가겠다고 한다면, 그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발끈해서 다른 조치를 취하려 들 거다. 그 타이밍을 잘 잡아야 구속까지 가능한 거였다.
만약 스토킹에 대한 물증을 캐내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명분이 없다. 결국 정난우의 곁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거였다.
“뭐, 병원이야 당장 옮겨도 상관없으니 그건 이쯤에서 접어두고.”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술 젖은 성대를 역류해 나온 음성은 축축하고 매끄러웠다. 정난우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아 돌린 그가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생각을 해 봤는데, 우리 열애설 밑그림을 좀 그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밑그림?”
의아해하며 묻자 에녹은 순한 눈시울 곁을 엄지로 매만졌다.
“대중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지.”
정난우의 의식은 좀 더 미궁으로 빠져 들어갔다. 뭐가 뭔지 하나도 예측이 안 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한쪽 눈썹 끝을 슬쩍 바깥으로 밀어내며 입술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때부터야. 내가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도 놀라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두는 거.”
그가 손끝으로 뺨을 툭 치며 중얼거렸다. 정난우는 미적미적 닿은 뺨부분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눈만 굴렸다.
놀라지 말라고 직접 예고까지 하니 어쩐지 조금 불길했다. 뭐냐고 물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에녹의 서늘한 눈에 부드러운 온기가 덧입혀졌다.
“이젠 네 차례 같은데.”
정난우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아아, 했다. 저도 오늘은 루스에게 용건이 있었다. 아직 희석되기 전인 위스키로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긴장에 경직된 눈으로 루스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에녹이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잘라 놓은 앞머리는 외곽시야를 더 넓혀 놓았다. 처음엔 조금 불안했지만 점점 익숙해져갔다. 초록빛깔 싱싱한 루스의 눈동자가 어스름히 보였다.
“꼭…… 꼭 할 얘기가 있었어요. 이제 곧 루스 씨도 많이 바빠질 거고,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루스의 입술이 선명한 미소를 그렸다. 얼핏 냉랭한 인상은 웃는 얼굴 조차 자로 잰 듯 그림 같았다.
“얼마든지.”
“네…… 그러니까, 디트로이트에서 루스가 저에게 해 주셨던 말들, 많이 생각하고 에녹이랑 얘기 많이 나눴어요. 편안하게, 그냥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도움이 됐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다 루스 덕분이에요. 에녹이 제가 가진 어둠에 물들까. 그래서 내가 또 누군가를 망가뜨리면 어쩌나, 그런 것만 걱정했지 나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고요. 정말 바보 같아요.”
“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변화의 시점은 왔을 겁니다. 에녹 역시 직관력은 뛰어나거든요. 저보다 조금 느리기는 할 테지만 분명 언젠가 당신의 지팡이가 되어 줬을 거예요. 그러니 저에게 빚 졌다는 생각이라면 안 했으면 합니다.”
루스는 겸손하게 말하며 잔을 살짝 흔들었다. 달그락, 얼음 사이의 공간이 줄어들었다. 한 모금 머금자 아직 알알했다. 얼음 두 개를 더 잔에 채웠을 때, 정난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네, 그래서…….”
불현듯 끓는 체온이 목덜미를 감싸 왔다. 목덜미를 감싸고도 한참 남는 큰 손은 후두부 아래까지 덮어 왔다.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리고 나서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제 몸을 자각했다.
정난우는 멈칫 고개를 돌렸다. 에녹은 가만히 내리 뜬 눈으로 굽어보기만 했다. 재촉도 만류도 없었다. 낯선 선택권이 제 손 안에 있는 거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방황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차가운 빛으로 뜨겁게 불타는 그의 눈동자가 이렇게 지켜봐 주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정난우는 에녹에게 왼손을 뻗어 내밀었다.
“손도, 잡아 줄래요?”
에녹은 기꺼이 빈손으로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육감적으로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손등에 온기를 찍어냈다. 그리고 흉하게 못박인 손은 이내 그의 체온 안에 완전히 파묻혔다.
정난우는 고개를 바로 했다. 쾅쾅 뛰어 늑골까지 진동하던 심장박동이 차츰 가라앉아 갔다. 준비가 끝난 거다.
“그래서 꼭, 당신께 제가 보내는 최대한의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요.”
정난우의 움찔거리는 뺨에 약간 붉은 혈색이 올라왔다. 술기운 탓인지 다른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었다.
눈썹을 슬쩍 올리며 그저 의아해만 하던 루스는 문득 타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비스듬히 돌아갔다. 에녹이 빤히 저를 보고 있었다.
“뭐, 이 자식아.”
루스가 인상을 팍 구기며 살벌하게 눈 꼬리를 치켜들었다. 에녹은 시원하게 트인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뻔뻔하게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찔리는 거 있나.”
“……하?”
기가 막혔다. 어딜 보나 저건 바짝 가시 돋친 경계였다. 수컷의 음습한 영역 주장이 날 비린내처럼 풍기는 눈이었다. 루스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의처증 꿈나무를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그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눈길을 원위치 시켰다. 그리고 그 때.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검붉게 뭉친 흔들림이 물결처럼 공기를 휘젓고 훅 밀려들었다.
왜요, 눈으로 물으며 대수롭지 않게 잔을 들다 멈칫했다. 루스는 일순 미간을 꿈틀거렸다.
一뭐?
“고…고맙습니다.”
떨리는 눈꺼풀만큼 떨리는 음성이 꺼져 들어가는 파장을 만들었다. 루스는 생애 가장 큰 당황을 직면했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문득 지금 제 표정관리가 형편없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었다.
“많은, 많은 걸…… 깨닫게 해 주셔서…….”
루스는 에녹의 비이상적인 감시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두 사람이 충분히 의견을 나누고 결론을 내려서 판을 짠 거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눈부터 천천히 보기. 에녹은 그렇게 격려했을 거다.
놀라지 않을 만큼, 도망치고 싶어지지 않을 만큼, 조금씩, 천천히, 떠밀기보다는 가끔씩 부축해주는 선에서.
정난우는 숨을 헐떡이며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에녹의 손을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있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연신 혀로 축여졌다.
한참 후에 정난우가 다시 눈을 곧게 떴다. 그리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난우는 루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에녹이 살고 있는 빛 속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은 거였다.
*
돌비 극장에 에녹이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들과 수많은 팬들의 시선이 뜨겁게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에녹은 바리케이드로 통제된 길을 여유롭게 밟아갔다.
팬 관람석으로 손을 흔들어주던 중. 재킷 앞섶이 활짝 벌어지며 단추가 풀렸다. 포근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순백의 셔츠와 넥타이가 하늘거렸다. 에녹은 짧게 시선을 내렸지만 잠그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레드카펫 위에 선 그에게 수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단추 풀렸어요, 고수머리 아가씨가 두 손을 입에 모아 외쳤다. 에녹은 그녀를 향해 윙크해 보이며 돌아섰다.
캐스터가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에녹. 복장 불량입니다! 너무 껄렁껄렁하군요!”
턱 끝까지 마이크가 디밀어졌다. 에녹은 재킷 앞섶 한쪽을 붙잡아 옆으로 느리게 펄럭여 보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 언제 누가 뛰어 들어올지 모르거든요. 열어놔야 돼요.”
“요즘 외로우신가 보네요. 하긴, 지금 벌써 몇 개월째죠?”
“내가 솔로라고 누가 그래요?”
에녹은 나른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깊은 눈매에 바다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불티처럼 반짝거렸다. 캐스터는 그 열기에 덴 듯 숨을 멈췄다. 그리고 남들 들으라는 듯이 힘차게 외쳤다.
“에녹 밀리건이 또 열애를 시작했군요!”
주변의 시선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돌아 에녹에게 안착했다. 호기심어린 눈들이 노골적으로 에녹을 발라먹을 듯이 훑어댔다. 저들끼리 귓속말을 열심히 시작하는 소리에 달아올라 있던 레드카펫이 더 검붉게 출렁거렸다.
캐스터는 흥분해서 목청을 높였다.
“누구죠? 누굽니까! 아니, 파파라치들 다 파업했답니까? 어떻게 에녹이 연애를 하는데 안 걸릴 수가 있는 거죠?”
“그러게. 내가 이번엔 아주 조심조심 만나서 그런가 봐요.”
“상대는 배우? 모델? 얼마나 됐어요?”
“상대는 비밀. 그리고 연애기간은, 제가 좀 길게 구애한 시간들 빼 놓으면 얼마 안 됐어요.”
캐스터의 흥미로운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불신 섞인 눈으로 에녹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짝사랑을? 누가?”
“누구긴, 나지. 아름다운 꽃을 꺾으려면 그 정도 공은 들여야 되잖아요.”
에녹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캐스터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나 차기작 얘기 쫙 뿌려 놨는데 그 얘기는 안 하나?”
에녹은 진지함 없이 농담을 던졌다. 결국 오늘의 영화제 이야기나 차기작에 관한 질문은 몰살당할 거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심지어 에녹 본인마저도.
그날 에녹 밀리건은 열애설을 파헤치려는 질문의 홍수에 침수되어 모든 인터뷰들을 소진해 버렸다.
“미쳤어!!”
한태영이 랩톱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평평한 액정에는 레드카펫 인터뷰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매끈하고 완벽한 얼굴이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달콤하게 젖어 있었다.
《당연하지, 나의 에버로즈Everose가 얼마나 예쁜데요.》
“그래. 너 진짜 미쳤다고오오!!”
《내가 걔만 보면 그냥 녹는다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어.》
“차라리 아예 녹아서 없어져 버려!”
에녹이 한마디 할 때마다 한태영은 격렬한 추임새를 넣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미국 현지는 지금 후끈하게 들썩이는 중이었다. 난데없는 에녹의 열애 폭탄이 수상자들의 영예마저 빛을 바래게 했다.
에녹이 당당하게 열애를 밝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먼저 애인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캐스터가 물으면 간단히 답변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대놓고 제가 정신없이 빠졌다고 광고하는 짓거리는 없었다 이거다.
그래서 지금 미국은 LA를 기점으로 물질적 흐름이 없는 지진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고, 오정수 이사가 있는 뉴욕도 폭격 맞은 양 폐허가 되었으며, 정난우 일행이 있는 스위스의 아침도 발칵 뒤집어졌다.
정난우가 호텔 피트니스에 가 있는 동안 한태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오정수였다. 그리고 불벼락을 맞았다. 장장 30분 동안.
한태영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기사와 영상들을 검색했다. 그나마 ‘he’ 라고 안 하고 ‘my everose’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만이 작은 위로거리였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네? 꼭꼭 숨겨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깽판이냐고요! 난우 씨, 말 좀 해 봐요!”
한태영은 튀어나올까 걱정될 만큼 부릅뜬 눈을 사선으로 내렸다. 정난우는 보약에 꽂힌 빨대를 혀끝에 댄 채 굳어 있었다.
그래. 난우 씨도 충격이겠……이 아니잖아!
한태영은 속에서 치미는 천불을 이기지 못했다. 제 예술가는 귀하디귀하게 대하겠다는 초심이 무참히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난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터뜨릴 듯 움켜쥔 채 짤짤 흔들었다.
“지금 볼 붉힐 때야? 엉?! 사태 파악 안 돼요? 이제 어쩔 거야! 그간 잠잠했던 파파라치들이 이제 아주 눈에 불을 켜고서 밀리건을 따라다닐 텐데!”
정난우의 당혹스런 시선이 힐끔힐끔 마구잡이로 튀었다. 손에 들린 보약도 함께 출렁출렁 흔들렸다.
“태…태영 씨, 그게요…….”
“그래, 뭔데! 뭔데! 대책 있어? 너희들 지금 세기의 사랑한다고 광고 내기로 작정했어? 뭐 자랑이라고 떠벌리냐고, 떠벌리기는!”
“저, 제 말 좀…….”
“그래 뭐냐니까? 지금 난리 났어, 오 이사님 눈 돌아가고 나도 지금 돌게 생겼다고!”
결국 정난우는 야생마로 분한 한태영의 고삐 잡기를 포기했다. 아무 말도 귀에 안 들어가는 상태인 것 같았다. 한태영이 울분을 다 토해낼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힐긋 액정을 훔쳐보았다.
Everose.
결국 그가 굴린 발음은 에버로즈라고 하지만 그가 상징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정작 에녹 역시 닭살 돋아 못 부르는 애칭一이라기보다는 he를 대체할 단어一의 실체는 이브로즈eve-rose였다.
밤에만 활짝 피는 달맞이꽃evening primrose이라나 뭐라나.
낯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음탕하고 저속적인 언행을 놀이처럼 즐기는 그가 이쯤 되면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머릿속에 온통 그 짓 생각밖에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딱히 불만이라는 건 아니지만…….
보약이나 쪽쪽 빨며 얼굴만 붉히고 있을 때였다. 한참을 열을 내던 한태영이 탈진한 듯 정난우의 곁에 털썩 쓰러져 끙끙 앓았다.
“망했어. 이제 망했어. 금방 탄로 날 거야. 이제 우리도 지겹게 파파라치에 찍히겠지. 나랑 율리안은 달려드는 기자들 막느라 매일 거지꼴이 될거고. 아아…….”
“아휴. 실장님. 그만 하세요. 일은 이미 터졌는데 어떡해요.”
평소 웬만하면 안 끼어드는 율리안이 슬쩍 다가와 진정시켰다. 한태영은 우는 소리를 내다가 실성한 것처럼 웃다가를 반복했다. 율리안조차 그를 포기하고 정난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난우 씨. 정말 사전에 얘기가 된 거예요?”
“…구체적인 얘기는 안 했는데요. 저를 위해서 밑밥들을 좀 깔아야 한다고 해서, 믿어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요.”
“그게 뭘 위해서야! 뭘! 뭘!”
한태영이 다시 무덤에서 일어나는 강시처럼 벌떡 상체를 세웠다. 다시 발악의 징조를 흘리는 그를 율리안이 워워, 하며 붙들었다.
“난우 씨를 위해서요?”
“네. 갑자기 터지면 정말 치명적인 스캔들로 흘러갈 거라고…… 그 전에 에녹이 먼저 시달려야한다고…… 루스도 그게 좋겠다고 말했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알겠다고, 알아서 하라고 한 건데…….”
루스의 이름이 나오자 모든 소음이 멎었다. 정난우는 그 정적이 도리어 불안해서 빨대를 깨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얼굴 위를 근질근질 돌아다녔다. 한태영이 근 20여분 만에 목소리를 낮췄다.
“커넬 씨가 그랬다고요?”
정난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영화 준비 시작되잖아요. 그 때 기자들이 지겹게 에녹을 괴롭혀야 한다고 했어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루스랑 에녹이 나름 플랜까지 짜겠다고 해서, 저는 그냥 두 사람 믿고…….”
실내에는 또 한차례 침묵이 고였다. 이미 식은 지 오래인 보약을 힐긋 내려다 본 정난우는 이걸 이 분위기에서 계속 먹어도 되는 건가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로 짓이겨 놓은 빨대 끝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을 때 쯤, 한태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인당수에 몸 던지는 심청이처럼 다시 털썩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스프링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난 모르겠네요. 감독님이라면 믿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해요. 이사님 많이 화나셨죠?”
정난우는 머뭇거리며 한태영의 옷깃을 붙들었다. 잡힌 옷자락이 푸슬푸슬 흔들렸다. 옷의 주인이 웃고 있어서였다.
“저 직화구이해 드실 것 같은 분위기던데요. 육즙 하나 안 남기고 통째로 씹어 삼킬 기세였습니다. 이사님한테 전화나 한 통 해 드려요. 지금 어디 말도 못 하고 속 잔뜩 끓이고 계실 거예요.”
면목이 없었다. 에녹과 루스는 알아서 최선의 방법을 택했겠지만, 그게 이들을 괴롭게 한다면 제 책임인 거였다.
정난우는 잔뜩 풀이 죽어 휴대폰 액정을 꾹꾹 눌렀다. 신호가 끝나자 마자 오정수는 한태영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아깽아. 저 종마 같은 새끼가 지금 뭐 하자는 거니. 이거 너랑 사전에 협의된 거야?》
〔네…… 어느 정도는요.〕
《……하아.》
오정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난우는 그에게도 비슷한 말들을 주절 주절 내뱉었다. 에녹과 루스가 자신을 위해 나름 머리를 맞대 시나리오를 만든 거고, 에녹은 어떤 순간에서건 제게 돌아올 상처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오정수는 별 말 없이 협연이나 잘 끝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매니저들도 객실로 돌아갔다. 정난우는 차가운 보약을 마저 비우고 쓰레기를 버렸다. 그리고 다시 랩톱 앞에 경건하게 정좌했다.
아직 레드카펫 풀 영상을 찾을 곳은 없었다. 그러나 에녹의 이름만 검색하면 여러 토막 영상들이 나왔다. 그야말로 핫이슈. 핫토픽.
왁스로 세팅된 머리와 깔끔한 검정색 슈트 차림이었다. 렌즈를 응시하는 하늘색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익숙한 열기가 어른거렸다.
희미하게 무너진 눈 꼬리, 부드럽게 흰 입술, 그리고 나직하게 울리는 금속성 녹은 목소리.
《말했잖아요. 내가 지금 정신을 못 차린다고.》
정난우는 매트리스에 웅크리고 누웠다. 폭신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채광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 아래 몸을 맡겼다. ‘완전 사랑에 미친 팔불출처럼 연기하고 올게’ 그렇게 말하고 간 에녹은 정말 그 역할에 충실했다.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정난우는 살짝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 저를 바라보던 표정, 눈빛, 입술, 다 그대로였다. 저렇게 빤히 보다가 문득 손을 뻗고, 뺨을 어루만지고, 뜨겁게 키스하곤 했다. 키스가 페팅으로 넘어가거나 섹스까지 이어질 때도 많았다.
에녹은 인터뷰 도중 가끔 한 손으로 재킷 한쪽을 펼쳐 그 안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정난우는 그 안의 절절한 체온과 향기에 순식간에 뒤덮였다.
풀어헤쳐진 옷 속으로 몸을 넣고, 재킷 아래 손을 더듬어 올라가 그의 등을 감싸는 거다. 상체를 구부려 싸매듯이 안아주던 그의 포옹, 그리고 귓가에 뜨겁게 퍼지는 그의 울림 깊은 목소리까지.
아, 큰일이다.
정난우는 자꾸만 달아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서로만 아는 은밀한 사인이 이렇게 달콤한 건 줄 몰랐다. 제 앙코르곡을 듣고 터질 듯이 흥분했던 에녹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만약 지금 눈앞에 그가 있었더라면 저도 그랬을 거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목덜미에 팔을 둘러 안으면 그는 분명히…….
몽롱한 눈으로 망상 중이던 그 때, 천둥처럼 진동소리가 울렸다.
드르르륵.
헉, 정난우는 저도 모르게 체할 정도로 큰 들숨을 기도로 넘겼다 놀란 심장이 1초에 서너 번은 달음박질치는 것 같았다. 사이드테이블 위에서
미동을 보이는 휴대폰을 헐떡거리며 응시했다.
아, 에녹.
애프터파티 직전에 잠깐 전화를 걸어 왔던 그가 분명 이 시간 쯤 대기하라고 했었다.
정난우는 얼른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그가 느른하게 말끝을 늘였다. 약간은 술에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뭐 하고 있었어?》
“아, 그…그…… 네, 전화…전화 기다렸어요.”
정난우는 당황해서 사정없이 말을 더듬었다. 잠시 침묵했던 그가 옅은 웃음기 섞어 물었다.
《왜 말을 더듬지? 목소리도 좀 달뜬 것 같고. 혹시 나 없는 새 바람이라도 피워?》
농담인 듯 가볍게 던진 말에 은근히 날 선 신경이 녹아있었다. 정난우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저 에녹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황한 것 같은데?》
와, 와, 완전 무섭다.
정난우는 반사적으로 소름 올라온 어깨를 움츠렸다. 제가 팍팍 티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목소리만 듣고 딱 아는 에녹에게 경외를 느낄 뿐이었다.
《너 그대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시 전화할 거니까 곧장 받아.》
“에, …네, 네? ……여보세요?”
벌써 끊겼다. 뭐가 뭔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정말 곧바로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이번엔 영상통화였다. 이러려고 다시 걸겠다고 했구나.,깨닫는 것과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
순식간에 화면이 휙 바뀌었다. 에녹의 뒤로 호텔 객실이 비쳤다. 옷차림도 그대로인 걸 보면 도착하자마자 연락한 것 같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위로 치솟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작은 동선을 그렸다. 어쩐지 관찰 당하는 기분에 정난우는 말없이 침만 삼켰다.
한참 화면을 주시하던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러내며 물었다.
《너 왜 얼굴이 빨개?》
“…그냥, 좋아서…그런 거一”
《시끄럽고 주위 비춰 봐. 방 다 보이게.》
에녹이 단칼에 잘라냈다. 변명은 씨알도 안 먹혔다. 묘하게 긴장해서 방 안을 꼼꼼히 비췄다. 천장 구석과 벽면, 그리고 침대 위까지 샅샅이 돌리고 있을 때였다.
《스톱.》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가 뭘 보고 있는지 깨닫자마자 황급히 팔을 회수했다. 정난우는 휴대폰을 얼굴 앞에 세운 채 당혹에 젖은 눈을 굴렸다.
《뭐야. 나 보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잦아든 금속성에 끈끈한 찰기가 녹아들었다.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네. 인터뷰하신 거, 토막 영상으로 벌써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어서요…….”
《보고 싶어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재차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녹은 침대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눈가를 허물었다.
《근데 전화 받을 때 목소리는 왜 그랬는데?》
정난우는 뽀득뽀득 닦인 액정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좀 막막해서였다. 얼굴은 더 뜨뜻해져만 갔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웃는 모양을 그렸다.
《뭐야. 설마 했는데, 나 보면서 진짜 이런 저런 야한 상상하고 있었어?》
“…….”
《구체적으로 어떤 거?》
에녹은 은근히 눈꺼풀을 내리고 목소리도 낮췄다. 새빨간 혀가 통통한 아랫입술을 슬쩍 훑는 걸 설레는 가슴으로 훔쳐보았다.
정난우는 쭈뼛쭈뼛 대답했다.
“재킷이…… 열려 있어서요…….”
《응. 그래서?》
“그냥, 파고드는 생각을…….”
자신을 위해서 열어뒀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자연히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파묻히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체온과 향기, 그 앞에서 번번이 무력해졌다.
《얼만큼 파고들었는데.》
에녹은 렌즈가 아닌 화면을 빤히 보고 있었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 그의 눈동자는 익히 보았던 것처럼 차갑게 끓었다.
“그냥…온전히 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할 때 머릿속은 항상 삐걱거렸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닫고 말을 한참 골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바보처럼 버벅거리니까.
어지러운 머리를 정렬시키고, 그러고 나서 내뱉었다.
“지금 내 눈앞에 에녹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벌어진 재킷 속으로 제가 들어가면, 꽉 안고서 올려다보면, 분명 아주 예쁘게 웃어줄 얼굴이 떠올랐어요. 나만 열렬히 바라봐 주고 내게 키스해 주고 나를 정신없이 뜨겁게 만들어 줄 것 같았어요. 그냥,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요.”
오전 햇살 아래 아주 미세한 먼지들이 나풀나풀 춤을 췄다. 3월, 따뜻한 봄이 낯선 걸음을 한 발 내딛는 시기였다. 환하게 스미는 일광 아래 손을 뻗었더니 물처럼 흐르던 먼지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언제 와요?”
에녹은 분명 모레 새벽에 도착한다고 했다. 알면서도 물었던 건 유난스러울 만치 그가 그립고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장된 스피커에선 잠자코 그의 숨소리만 나직이 흘렀다. 느리고 거친 숨결이 미묘한 온도를 가지고서 허공에 나부끼고 있었다.
“얼른 보고 싶어요. 에녹.”
그의 앞에서 솔직해지는 데에 이젠 용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자신이 속을 드러내 보일 때마다 그는 격렬하게 반응해 줬다. 진심이 통하는 데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몇 배로 돌려받곤 했다.
문득 에녹의 짙게 갈라진 한숨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제가 몇 마디 내뱉을 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애타게 속삭였다.
《벗어 봐.》
“…네?”
정난우는 멍하니 눈시울을 키웠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출렁 흔들렸다. 툭툭 뛰던 심박동이 쾅쾅 소리를 높여갔다.
어느 샌가 그는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어두운 금발을 느리게 쓸어 넘기는 그는 잔뜩 헤프게 흐려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좋은 상상 좀 해 보게. 조금만 놀자. 벗고 다리 좀 벌려 봐.》
정난우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얕게 드나들던 숨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독특하게 갈라진 음성에 조르는 듯한 비음이 흐리게 섞여 나왔다.
《얼른. 나 그거 못 보면 잠도 안 올 것 같아.》
그제야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벗고, 다리를 벌리고, 그건 아마도 섹스할 때의 모습을 뜻하는 걸 거다. 갑자기 왜 그런 걸 주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망설이다가 ‘잠깐만요.’ 하고서 휴대폰을 매트리스에 놓아두었다.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를 차곡차곡 벗어서 옆에 개 두었다. 몸에 딱 맞는 브리프를 수 초 바라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한 올까지 벗어던지고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 속 에녹은 약간 상기된 뺨으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버, 벗었는데요.”
《다 벗었어?》
정난우는 괜히 긴장에 타 들어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고개를 끄덕 이자 그는 ‘누워 봐.’ 했다. 길게 몸을 뉘이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거칠어진 숨결을 섞어 말했다.
《다리는?》
화면 안에는 상체밖에 들어가지 않아 벌어진 다리가 그에게 보일 리가 없었다. 밑에까지 보여줘야 하나, 그런 생각은 했지만 어찐지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온 몸이 점점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나랑 섹스하는 상상까지 했어?》
“아…아뇨. 거기까지는…….”
《아쉽네. 그럼 이것저것 물어봤을 텐데. 네 상상 속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런 것들.》
농도 짙은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나랑 하고 싶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묘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희미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솔직해서 예쁘기도 하지. 딴 거 안 시킬 테니까, 살짝 젖꼭지만 만져 봐. 내가 해 주는 것처럼.》
그 순간 든 생각은 에녹이 어떤 식으로 만졌더라, 하는 거였다. 그와 뒤엉켜 있을 때는 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팔팔 끓는 엿물에 잠긴 것처럼 뼛속까지 녹아내리는 열기에 무참히 떠밀려갔다. 짐승처럼 뛰어놀 듯이 섹스해야 만족한다던 그의 말처럼 함께 살을 섞는 모든 밤이 그랬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식으로 만졌는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은 거였다. 다만 격정적이었던 순간의 기억들, 무수한 섬광 아래 신경 줄을 태워 먹던 뜨거운 희열, 그런 것들만이 아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정난우는 망설이다가 빈손의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살짝 집었다.
“이, 이렇게요?”
《…뭘 그렇게야. 내가 언제 그렇게 어설프게 만져줬어?》
“기억이 잘…….”
안 나서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이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네가 너무 잘 하면 내가 오늘 밤잠을 설칠 테니까.》
정난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에녹의 눈동자가 짙푸르게 일렁거렸다. 오고가는 말없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우야.》
“네.”,
《우리 이번에 만나면 다음 날 저녁에 또 너랑 헤어져야 하잖아.》
“…네. 알아요.”
그 때부터 에녹은 본격적으로 영화 준비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그 말은 곧 일주일에 하루 정도나 볼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소리였다. 가만히 제 스케줄에서 비는 날들을 꼽아보며 우울해하던 때였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매니저들한테 내가 잡아둔 호텔 절대 알려주지 마. 가서 깨끗이 씻고 다 벗고서 먼저 한숨 자고 있어. 내가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도 놀라지 말고.》
“그럴게요.”
에녹은 그 후로도 한참 음탕한 말을 속삭였다. 당장 박아 넣고 흔들면서 울리고 싶다는 둥, 폰 섹스라도 하고 싶다는 둥, 예쁜 짓 했으니까 내일은 흠뻑 싸 주겠다는 둥…….
정난우는 뺨을 붉히면서도 ‘네, 저도 좋아요.’ 착실히 대답했다.
잠깐만 잠들다 깨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이 깼을 때는 침대 위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어리둥절했지만 코앞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뜨끈뜨끈한 체온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전신을 푹 감싸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밀착해 있는 몸을 더 파고들었다. 그의 살 냄새에 코를 묻고 설레는 한숨을 흘렸다. 맞닿은 피부가 생생해 또 떨어져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쩔까 잠깐 고심하다가 결국 손을 뻗었다. 근사하게 꾸미고 당당하게 인터뷰하던 그의 모습보다 이렇게 편안히 잠든 얼굴에 더 가슴이 뛰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편안히 늘어진 입술, 감은 눈 아래 늘어진 속눈썹까지.
내 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거였다.
“에녹. …에녹.”
정난우는 느리게 오르내리는 그의 맨 가슴을 살짝 짚어 흔들었다. 응, 늘어지는 대답과 함께 그는 좀 더 깊이 등허리를 구부렸다. 더 꽉 안아오는 팔의 힘에 숨이 점차 가빠왔다.
“에녹. 일어나요.”
포기 않고 좀 더 흔들었다. 에녹은 한쪽 눈만 가늘게 뜨며 응? 했다.
살짝 드러난 그의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안 깨웠어요?”
아아, 하며 그가 잠깐 질끈 감은 눈을 몇 번 꿈틀거렸다. 이내 그의 시리고 달콤한 눈동자가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났다. 그가 픽 웃으며 콧등에 입을 맞췄다.
“너무 예쁘게 자서 고민하다가 그냥 씻고 나도 잤어. 푹 자고 아침에 괴롭혀야지 하고. 알잖아. 나 모닝섹스 좋아하는 거.”
“그냥 깨우지 그랬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난우는 침통하게 말을 이으며 미간을 좁혔다. 에녹의 눈가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혹시 기대했어? 자다가 덮쳐지기 뭐 이런 거?”
“…그렇게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빨리 보고 싶어서.”
그의 목 안에서 등줄기가 쭈뼛할 만큼 매혹적인 웃음이 끓었다. 그의 손이 느리게 밑으로 내려와 허벅지를 벌렸다. 가랑이 사이를 슥슥 더듬더니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섰네? 언제부터 이랬어?”
모르겠어요, 정난우는 조금 헐떡이며 대답했다. 그의 딱딱한 허벅지가 그 사이로 숙 밀려들어왔다. 그가 나른하니 내리 뜬 눈으로 코끝을 비벼왔다.
“아침 식사 전에 한 번 울려줄까?”
“…네.”
그의 눈 꼬리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 속에 긴 손가락을 풀 찔러 넣어 쓰다듬던 손이 슬슬 내려왔다. 귓바퀴를 문지르고 악관절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다. 턱이 불잡혀 조금 더 위로 고개가 들렸다.
“왜 이렇게 몸이 달았을까? 귀엽게.”
“안 돼요?”
“안 될 거 있나. 그런데 그 전에 할 게 있어. 잠깐만, 응?”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에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몸으로 침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근사했다. 곧게 쭉 뻗은 넓은 어깨와 등, 딱딱한 근육들이 감싼 팔다리, 그리고 바짝 올라붙온 엉덩이와 단단하게 단련된 허리까지, 정난우는 괜스레 가슴이 간지러웠다. 중심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열기가 한층 농밀해졌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브리프 차림으로 활보하길 주저하지 않던 그가 웬일로 가운을 걸쳤다.
헐렁하게 묶인 매듭 아래 보드라운 실크 끈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그의 한 손에는 쇼핑백이, 한 손에는 주스 잔이 들려 있었다.
“일어나 앉아서 이것부터 마셔.”
정난우는 상체를 세우고 얼떨결에 주스를 받아 마셨다. 반쯤 남은 걸 내밀자 그는 먼저 마셨다며 고개를 저었다.
에녹은 쇼핑백 안에서 벨벳 케이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분위기를 보니 선물인 듯싶었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이거 뭔지 알아?”
빠끔 입 벌린 케이스 안에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펜던트가 영 범상치 않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했는데, 웬 남자가 수직으로 늘어뜨린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에녹의 긴 손가락이 목걸이 줄을 걸어 올렸다. 펜던트가 허공에서 약하게 흔들렸다. 금빛 몸체가 햇살을 튕겨내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가 말했다.
“오스카야.”
“…오스카?”
“그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받는 트로피야. 아카데미 시상식을 오스카라고도 부르는 건 이 트로피의 애칭이 오스카라서 그래.”
그렇구나, 하며 정난우는 호기심 반짝이는 눈을 했다. 에녹의 눈길도 펜던트를 향해 꽂혔다.
“크기는 비교도 안 되지만 모양은 똑같아. 올해 수상은 어차피 물 건너 가서 내가 특별히 주문해 뒀어. 나온 지 며칠 됐는데 이번에 찾아 왔어.”
“…저 주려고요?”
에녹의 시원한 눈매가 달콤하게 휘었다. 그는 대답 없이 목걸이를 정난우의 목에 걸었다. 금 펜던트는 좋아하지 않지만 최대한 트로피에 가깝게 주문 제작하느라 그 부분은 포기했다.
크기는 달라도 비을은 거의 완벽했다. 실제 오스카는 브리태니엄에 순금을 덧입혔지만 이건 그냥 순금이었다.
에녹은 펜던트를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곧게 눈을 맞췄다. 시린 바다를 닮은 눈동자에 열기를 닮은 야망이 울렁거렸다.
“내년엔 진짜 오스카를 선물로 줄게.”
정난우의 눈시울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깊은 의도까지 파헤쳐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잠자코 들었다.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해서 꼭 시상대에 서서, 너한테 다시 한 번 프러포즈할 거야. 결혼하자고.”
“…….”
“그러려면 훈련 열심히 받고, 역할 분석도 더 꼼꼼하게 해야 하고, 리허설 같은 거, 사실 그렇게 착실하게 안 해도 돼. 적당히 꼼수 부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고. 그런데 이걸 받아들자마자 생각이 바뀌었어.”
미니 오스카를 찾아 들고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끌려가서 풍덩 빠져있는 동안 한 가지 간과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마 매일매일 갈등하겠지. 너한테 날아오고 싶어서 애간장이 녹을 거야.”
“…….”
“그래도 되도록 참아 보려고. 레퍼토리 모조리 외우면서도 하루도 연습 안 빼먹는 너만큼은 아니어도, 최선을 다해 쏟아붓지 않으면 내년 오스카도 내 게 아닐 것 같아.”
에녹은 정난우의 뺨을 슥슥 어루만졌다. 맹목적이다시피 바라봐 오는 까만 눈동자를 열렬히 들여다보았다.
“넌 언제든 나를 보러 와도 돼. 그리고 너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날아갈게. 그런 거 제외하고서는 정말 독하게 참고 영화 준비에 전념하겠다고.”
에녹은 멍해져 있는 정난우를 품에 끌어와 안았다.
“그러니까 내가 안 찾아온다고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마. 무슨 일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꼭 나한테 연락하고. 알겠지?”
자주 보지 못할 거라고 미리 예고까지 들었는데 조금도 우울하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만남을 보채는 것보다 그가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정난우는 에녹의 등을 꽉 마주 안았다.
“네. 네. 그럴게요. 제가 만나러 갈게요.”
에녹은 픽 웃으며 보들보들한 어깨를 토닥거렸다. 약속한 건 잘 지키는 녀석이니까 그 부분에서 조금은 마음을 놔도 될 거다. 바보처럼 저 혼자 끙끙 앓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다.
에녹은 정난우를 살짝 떼 내고 쇼핑백을 매트리스 위에서 거꾸로 세웠다. 안에 든 내용물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뒹굴었다. 정난우가 멀뚱멀뚱 눈을 깜빡거렸다.
“웬 녹음기들이 이렇게 많아요?”
“그 동안 틈틈이 녹음해 둔 거야. 이동하는 시간에 음악 듣지 말고 내 목소리나 실컷 들으라고.”
정난우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녹음기들에는 간단히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에녹은 그 중 ‘자장가’라고 쓰인 하나를 집어 들어 재생시켰다.
Rockabye baby on the treetop.
(잘자라 우리 아가 나무에서)
When the wind blows, the cradle will rock.
(바람이 불 때면 요람은 흔들거릴 거야)
If the bough breaks, the cradle will fall.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요람은 떨어지겠지)
But I will catch you cradle and all.
(하지만 내가 너의 요람을 받아줄게.)
정난우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웬 자장가, 하는 표정이었다. 에녹은 정난우를 침대에 눕히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가운 매듭을 끌러 벗어던진 그의 한쪽 팔뚝이 매트리스를 꽉 눌러 짚었다.
빈손이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난우 어린이 떼 놓고 일하러 가려니 걱정이 한두 개여야 말이지. 나 없으면 또 비행기 안에서 차 안에서 악몽 꿀 텐데,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좀 나아질까 해서.”
“…….”
“종류 많아. 노래도 있고 그냥 헛소리들도 있고. 골라 듣는 재미는 있을 거야.”
귓가엔 그의 자장가가 나지막이 울렸다. 반주 없이 흥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관능과 달콤함이 함께 살아 숨쉬었다. 정난우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못박인 손으로 턱을 긁적거렸다.
에녹이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손등을 댔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요사스러울 만큼 짙게 빛났다. 어쩐지 긴장돼서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시선을 낮게 깔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지금 하나 더 녹음해 줄게.”
“…지금?”
“그래, 지금. 어제처럼 나랑 하고 싶을 때 들을 만한 것도 있어야지.”
정난우는 황망히 눈을 크게 떴다. 에녹은 개의치 않으며 기기 하나를 들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당황해 얼은 얼굴 위로 깊이 입술을 내려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늘의 모닝섹스는 대화도 신음도 이주 풍성하게 들어갈 수 있게 리드해 줄게. 한 두 시간이면 되려나. 일단 해 보자.”
에녹은 혀끝으로 입술라인을 덧그려 왔다. 어제 자신이 그를 흉내 내려다 실패한 젖꼭지가 잡혔다. 엄지와 검지로 은밀하게 비벼졌다.
솜털 일어난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민감한 몸은 금세 달아 올랐다. 헐떡이며 입술을 열었다. 그의 혀가 들어와 느긋하게 안을 훑어왔다. 볼이 깊게 팰 정도로 강하게 흡입하자 그의 축축한 늪지에 제 혀가 쭉 빨려 올라갔다. 잇새로 물고 빨 때마다 타액이 흘러 목구멍에 고였다.
정난우는 코로 다급한 숨을 들이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고인 타액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크게 울렸다. 순간 에녹의 눈이 어둡게 풀어져 탁한 미소를 머금었다.
뒤늦은 의혹이 뒷머리를 스쳤다. 새벽에 깨우지 않은 건무래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닌가 싶은 거다. 그의 물기 젖은 혀가 목을 핥고 느리게 내려갔다. 가슴, 복부, 그리고 아랫배까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빼곡하게 붉은 자국이 음란하게 솟아올랐다.
에녹이 허벅지 안쪽을 크게 베어 물었다. 정난우는 불규칙하게 헐떡이며 몽롱하게 흐려진 눈을 무심코 곁으로 내렸다. 녹음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장담한 대로 모든 소리가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갈 거다.
“어이, 집중해.”
잡념에 빠진 걸 질책하듯 그가 미끈한 액이 몽글몽글 솟아 있던 성기 끝을 혀끝으로 쿡 찔렀다. 정난우는 약한 신음을 뱉어내며 다리를 움츠렸다. 집요하게 물고 빠는 입놀림에 전신이 떨렸다.
올려다보는 푸른빛은 살갗을 조금씩 떼 내 갈 것처럼 드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싹함이 등허리를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