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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7 (8/13)

Chapter 07

거슬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호흡기가 죄 아팠다. 입자가 굵고 거친 쇳가루가 허공을 떠도는 느낌이었다. 불 꺼진 실내엔 블라인드 틈을 벌리고 쳐들어온 흐린 달빛뿐이었다.

〔정신 좀 차려라, 아휴, 내가 진짜, 웬 조카 놈 하나 잘못 둬서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머리, 울려요.〕

쪼개질 것 같은 이마를 한 손으로 감쌌다. 말 한 마디 들려올 때마다 골이 쩡쩡 흔들렸다. 오정수는 바닥을 기는 한숨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장가 못 간 건 순전히 너 때문이다. 너 같은 아들 낳을까 무서워서. 그거 아냐, 이 놈아?〕

강도영은 픽 웃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웃겨 돌아가시겠네요. 언제는 난우 같은 아들 낳고 싶어서 꼭 장가 갈 거라며? 이제 와 왜 딴 소리예요.〕

〔너 같은 새끼 붙을까 무서워서 어디 길거리나 내보내겠냐? 쓴 눈물을 삼키면서 내 신조 철회했다. 그것도 다 너 때문이야. 이 자식아.〕

오정수는 가차 없이 쏴 붙였다. 그럼에도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몸을 끙끙거리며 추슬러 올렸다.

관절이 녹아난 사람처럼 강도영은 품에 기대왔다. 숨결 한 움큼마다 술 냄새는 짙게 풍겨 나왔다.

〔그러게…… 난우가 팔자가 진짜 사납긴 사나운가 봐요. 내 눈에 띈 걸 보면 알잖아. 은근히 인복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참 실속이 없어, 걔가.〕

삼박 사일 술에 절인 듯한 뻣뻣한 혀는 뭉개진 발음만 내뱉었다. 어그러진 시야는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땀 젖은 티셔츠가 등에 쩍 달라붙은 감각이 적잖이 불쾌했다.

〔미친놈. 이딴 소리 하려고 불러냈냐? 정신이라도 좀 차려! 도대체 왜 술은 또 왜 이렇게 많이 퍼마신 거야?〕

〔…아. 소리 좀 지르지 마요. 머리 울린다니까.〕

강도영은 사이드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들어보지만 텅 빈 무게감만 손아귀에 잡혔다. 채워지지 않을 걸 자각하자마자 갈증은 불이 붙었다.

〔물 갖다 줘?〕

오정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물으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식은땀 젖은 창백한 얼굴을 성의 없이 훑어냈다.

강도영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물 먹은 솜처럼 다리는 무겁고 발은 바닥을 긁었다.

벗어던진 티셔츠는 오정수가 발로 낚아채 침대 위로 날렸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고집스레 옮기는 뒷모습을, 오정수는 길게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한숨이 길게 뻗어 나왔다.

불쌍한 새끼.

다이닝을 찾아갈 게 분명한 강도영을 내버려두고 짧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폭탄 맞은 것처럼 온통 난장판이 었다. 뒹구는 옷들과 지갑, 휴대폰, 키홀더. 하여간 뭐 하나 정돈되어 있는 게 없었다.

진열장 제일 위엣 칸의 CD들도 반절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건 손을 뻗어야만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낮게 숨죽였을 고함의 잔여물들이 뒤엉킨 플라스틱 케이스들 위롤 떠돌았다. 도처에 널린 어지러운 불안정함은 강도영의 내면을 투영하고 있었다.

불쌍한 새끼, 오정수는 다시금 뇌까리고는 빠르게 방 안을 정리했다. 옷가지부터 일단 구석에 물아두고 쓰러진 스탠드를 바로 세웠다. 꽉 닫힌 발코니 문을 열어두고 환기를 시켰다. CD들도 대강 꽂아뒀다.

옷 뭉치를 드레스룸 세탁바구니에 처박아두고 다이닝으로 나갔다. 강도영은 홈 바 스툴에 앉아 늘어져 있었다. 느리게 오르내리는 맨 등 위에서 조도 낮춘 조명이 오렌지 빛으로 부서졌다.

달그락. 달그락.

크리스털 글라스가 느리게 흔들릴 때마다 얼음 부대끼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잔을 쥐고 있는 건 찬물도 제대로 안 묻혀 봤을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었다.

얼음이 반쯤 차 있는 틈을 투명한 액체가 빼곡히 메웠다. 굳이 냄새를 맡는다거나 맛보지 않아도 저게 물이 아니라는 건 직감했다.

〔아오, 저 씹 새끼, 하여간.〕

오정수는 이를 갈며 냉장고에서 생수 통을 꺼내 홈 바에 앉았다. 강도영의 맞은편이 아니라 옆 자리였다. 저러다 분명 어느 순간 바닥으로 거꾸러질 거다. 미워도 조카 놈이라고, 챙겨 줄 놈 저밖에 없었다.

〔작작 좀 처 마셔라. 그렇게 들이부어서 자학하면 어디 시간이 거꾸로 홀러 가냐?〕

오정수는 한숨과 함께 생수 뚜껑을 땄다. 목구멍 안에 그대로 반절을 한꺼번에 들이붓고 나서 물었다.

〔술독에는 왜 빠졌는데?〕

〔그러게요, 왜 마셨더라.〕

강도영은 어눌한 대답을 했다. 기억은 흐릿하고 조각나 쉽게 맞추기가 힘들었다. 다만 오늘은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날이었다. 그 강렬한 느낌만이 홀로 선명했다.

깨질 듯한 이마를 지압하며 생각에 잠겼다. 느리고 느리게 짚어가는 회상은 가장 가깝게 돌출된 시간에 걸려 멈췄다.

낮에 전파를 타고 날아온 차가운 활자들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불현듯 거친 조소가 코끝을 스쳤다.

〔요새 난우 지겹게 쫓아다니는 놈이 하나 있어요. 그건 삼촌도 알죠.〕

〔알아. 에녹 밀리건.〕

폭음한 건 강도영인데 제가 머리가 핑 돌았다. 술 냄새만으로도 취했는지 모른다. 오정수는 팔꿈치로 바를 누르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왜. 신경 쓰이냐? 이제 와서?〕

〔뭘 ‘이제 와서’예요. 주시하고는 있었어요. 처음부터.〕

〔미친놈. 스토커 뺨치네.〕

타박하긴 했지만 저도 떳떳하지는 못했다. 에녹 밀리건, 그 이름에 신경을 곤두세운 건 강도영이나 저나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패쇄적으로 사는 정난우의 주변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마냥 반가워할 수도, 마냥 불안해할 수도 없는.

강도영이 중얼거렸다.

〔초반에는 그냥, 저건 뭐냐 싶었지. 가볍게 공연 보러 왔다가 안면을 텄나, 뭐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이게 다른 도시, 다른 나라까지 쫒아 간다니까 본격적으로 의심 아닌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설마 설마 한다. 밀리건 여자 경험 이력이 아마 배우 커리어보다 더 화려할 테니까.〕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했죠. 화려한 꽃만 골라 옮겨 타고 다닌다는 가벼운 몸뜽이를 녀석에게서 조기에 찢어놓을 건지, 아니면 속이 타도 일단 지켜봐야 하는 건지.〕

〔찢어놓을 자격은 되고?〕

〔자격은 없어도 능력은 있으니까, 가지고 놀다 버릴 생각이라면 가만 놔뒀을 거예요, 내가.〕

징글징글하다는 듯 오정수는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대를 물고 필터만 질겅질겅 씹었다.

〔가능성이 보이니까 놔둔 거였어요. 삼촌도 프라하 길거리 콘서트 영상 봤잖아요. 그거 보면 딱 눈에 들어왔을 거 아니냐고.〕

물론 봤다. 그리고 강도영처럼 약간의 희망을 발견했다. 충격이 사라진 정난우의 연주, 열정의 지고, 그건 누군가가 억지로 손을 뻗어 어그러뜨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거였다. 그리고 그건 저도 강도영도 여태껏 해주지 못했던 거다.

오정수는 착잡함에 미간을 긁었다. 강도영이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에서 방황했을 건 뻔했다. 필터 씹힌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놔두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락가락 하지 말고 신경 꺼. 내내 눈에 불을 켜고서 기다렸던 거 아니었냐.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오정수는 비스듬히 흘린 시선으로 가차 없이 강도영을 찍어 눌렀다. 맞부딪쳐 오는 눈은 느슨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침침한 조명은 차가운 얼 굴에 우울한 음영을 드리웠다.

강도영은 바람처럼 웃었다.

〔그러려고 했어요. 진짜 눈 딱 감고 두고 보자고 했다고. 적어도 그 새끼가 친히 날 찾아와 들쑤셔 놓기 전까지는.〕

〔…만났냐? 언제?〕

〔파리 공연 끝나고 그린 룸으로 찾아 왔더라고요. 만난 김에 내가 좀 시험해 보려고 살살 긁어봤지. 그런데 이 새끼가 아주 근사한 가면 쓰고서 눈알은 번쩍번쩍 광휘가 돌더라고. 단번에 알았지. 아, 놈이 어쨌건 난우한테 단단히 홀리기는 했구나. 그리고 나를 연적으로 생각하는구나.〕

〔미친놈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오정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결국 제 몫의 잔 하나를 더 꺼내 오고 말았다. 얼음을 반쯤 채우며 한숨을 거듭 삼켰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잔데 왜 비역질 못 해 그리들 안달인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치정싸움이라도 했냐?〕

〔그 꼴을 보니까 갑자기 울화가 막 치미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백조들처럼 겉모습은 우아하게 치장해 놓고 물 아래서 열심히 치고받았죠.〕

〔뭐 하자는 짓이야, 도대체. 너 거기 끼어들면 안 돼. 그렇게 목 빼고 기다리던 거 네 손으로 망칠 셈이야?〕

〔알아. 나도 안다고. 나도 내가 참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씨발, 막상 눈앞에 닥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너 따위 내가 맘만 독하게 먹으면 언제든 제쳐놓을 수 있으니까,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비웃어 줬어.〕

〔…돌았다, 강도영. 단단히 돌았어.〕

〔맞아요. 나 그 때 돌았어. 난우도 성인이고 그 새끼는 어딜 보나 아랫도리가 가벼워 보였는데, 언젠가는 침대 위에서 뒹굴겠지 그런거 떠올리니까 결심이고 나발이고 다 시궁창에 처박히더라고. 근데 그 새끼,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참 당당하대. 자신감이 아주 넘쳐. 대놓고 이젠 내거다 지껄이고 돌아가더 라고요.〕

〔그래. 돌은 놈이 둘이었지.〕

오정수는 기가 막혀 결국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 냄새가 배건 말건 속이 터져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케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허공에 흐드러졌다.

강도영은 개의치 않고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씨발. 졌다…… 그런 생각했어요, 내가. 계속 긁어도 흠집 하나가 안나네. 발끈하긴 하는데 결국에는 자기 승리를 확신하고 있어. 읽힌 것 같아요. 아무리 요란하게 짖어도 내가 결국 아무것도 못할 거라는 거.〕

〔…….〕

〔어린 새끼가 눈이 좋더라고. 갈팡질팡 불안한 나랑은 너무 다른 치졸하게 질투가 나. 다 때려치우고 자폭이나 해 버릴까 생각마저 들 정도로.〕

강도영은 안쪽으로 굽혀 놓은 왼 팔을 베고 있었다. 느리게 돌리던 팔을 그대로 입술에 붙였다. 한 모금 넘기는데 반절이 목을 타고 오정수가 잔을 거칠게 뺏어 들며 고성을 질렀다.

〔이 새끼가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래서 이제 와 후회해? 후회해서 또 뭘 어쩔 건데!〕

〔말했잖아요. 자폭이나 해 버릴까? 나는 난우가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거든. 찌르는 건 일도 아니지. 다 같이 진창에서 구르게 된다는 부작용이 문제지만.〕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에서 선득한 이채가 빛을 발했다. 오정수는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쳐 눈가를 찡그렸다. 탁한 연기를 폐부 가득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심각하게 대꾸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강도영이 정난우를 잘 아는 만큼, 저 역시 강도영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센 척 하지 마. 네가 그거 못 견딘다는 거 나도 알고 너도 알아. 다시는 신 놀음 안 하겠다고,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꼬인 거 다 뒤집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던 건 너야.〕

오정수의 어투는 싸늘했다. 공기마저 차갑게 얼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강도영의 젖은 입술이 느리게 비틀렸다. 웃는 듯 찡그린 얼굴이었다.

〔그 땐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잖아요. 내가 눈이 멀어서 네가 그렇게 망가졌다고 고해라도 해요? 나만 믿고서 겨우 버티고 있는 애한테?〕

〔성자 나셨네. 그게 이직도 네 탓이라고 생각해? 네가 납치했냐? 네가 감금했어? 네가 사주라도 했어?〕

오정수는 작작 좀 하라며 냅킨을 넉넉히 뽑았다. 술을 부어 적시고 그 위에 반쯤 태운 담배를 지졌다. 까맣게 뭉개진 담배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강도영은 길게 침묵했다.

탁하게 내려앉은 눈은 음산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오정수의 손에서 다 시금 제 잔을 강탈해 왔다. 넘칠 때까지 가득 채워 물 마시듯 들이켰다. 입술에서 흘러 넘친 술은 목을 타고 가슴골을 따라 줄줄 흘렀다. 텅 비어도 묵직한 잔이 거칠게 바닥에 부딪쳤다.

〔말, 안 한 거 있어요. 이제껏 아무한테도.〕

낮은 음성은 잔뜩 젖어 있었다. 오정수는 거의 흘려듣다시피 했다.

〔너 지겹게 했던 말 오늘 계속 할 분위기야. 어차피 들었던 걸 테니까 상관 말고 그냥 다 털어. 나도 적당히 대꾸해 주다가 너 기절하면 침대에 던져놓고 갈 거니까.〕

〔무섭다고 했어.〕

강도영은 무심한 듯 한 마디를 내던졌다. 막 얼음 하나를 입 안에 물려던 오정수의 눈썹이 슥 솟아 올라갔다.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진짜 못 들어 본 레퍼토리 같은데?〕

〔아직 정신 안 놨어요. 그냥 막 머리가 어지럽고 울렁거리고, 오늘 이거 안 뱉어내면 나 미칠 것 같아서 삼촌 불렀어.〕

오정수는 잔을 내려두었다. 완전히 돌아앉으며 기묘한 시선을 내렸다. 강도영은 갈라진 복부에 고인 술을 느긋하게 훑어 올리고 있었다. 척척한 물기가 가슴 위에서 아무렇게나 뭉개졌다.

텅 빈 시선이 오늘 유독 불길했다. 뭔가 치명타 한 방을 맞고 넋이 나간 모양새였다. 오정수는 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눌러 체중을 지탱하며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뭔데, 말해 봐.〕

〔그 정신병자 새끼가 처음 따라다니기 시작할 때, 무섭다고 했다고요, 난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정수는 고개만 한 번 갸우뚱했을 뿐, 그저 잠자코 귀만 열어 두었다. 강도영이 느리게 과거를 끌어왔다.

〔난우 눈 안 보일 때 말이에요, 삼촌. 걔 자기 예뻐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아챘잖아.〕

〔뭐……, 그랬었지. 너나 나한테도 그랬고, 누나한테도 그랬고, 지휘자 선생님들, 나이 지긋한 악장, 하여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낌새만 맡으면 예쁜 짓만 해 댔지.〕

열일곱의 정난우는 일곱 살만큼이나 무지했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아 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녀석은 누군가 진심으로 체온을 나눠 주면 스스럼없이 품에 파고들었다. 보이지도 않는 눈을 말갛게 올려 뜨고서.

어쩌면, 조금은 절박하고 애타는 몸짓으로.

아마도 신기했을 거다. 늘 튕겨져 나갔는데, 늘 차별 속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제게 관심을 가지고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오정수는 쓰게 부서진 미소가 고여 든 입술에 잔을 기울였다. 독한 보드카가 혀를 흠뻑 절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항상 반으로 쪼개진 심장이 다른 온도의 고동을 울렸다. 방긋방긋 잘 웃던 녀석이 그립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 보던 녀석 이 안타깝기도 하고.

〔맞아. 그랬어요. 제가 안다는 것도 자각 못하면서 그냥 무조건 앵기더라고. 그 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서 그냥 열이 받았어. 성질대로 하면 수도 없이 윽박질렀을걸. 그런데 한 번도 못 했어요.〕

〔…왜. 뭐 그 빌어먹을 사랑 어쩌고 그거냐?〕

〔사랑은 무슨. 그 직전이긴 했겠지만.〕

강도영은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오정수는 미심쩍은 듯 가늘게 뜬 눈을 흘겼다.

〔아니라고 너는 끝없이 주장하지만, 내 보기엔 여전히 의심스러워.〕

〔무슨 소리예요. 만약 삼촌 말대로였다면 이미 난리 나고도 남았어요. 그대로 내 걸로 만들어서 집 안에 들여 놨을걸. 어머니 기절하시건 말 건.〕

〔너, 이 자식아! 그거 범죄야. 이거 큰일 날 소리 하네.〕

〔내가 어디 그런 거 신경 쓸 놈인가. 다만 그 땐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정말 그 직전이었던 건 확실해요. 일단 잘 키워서 나중에 데리고 살까 그런 생각은 했었거든. 열심히 작업질도 해 놨고.〕

오정수의 낯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무, 무슨 작업? 너 설마 난우한테 이상한 짓…….〕

오정수의 떨리는 말끝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강도영은 깨질 듯한 미간을 불쾌하게 찡그렸다.

〔이상한 상상하지 말아요. 키스도 못 해봤으니까. 벌써 잊었어요? 걔 성장기 한국에서 요양할 때 한꺼번에 왔어요. 열일곱 때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더 애 같았는데 무슨 흑심을 품어요.〕

오정수는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별 광기를 다 부려도 묵인해 주겠지만, 성범죄만큼은 용납하지 못했을 거다.

강도영은 피곤함에 겹겹이 쌍꺼풀 진 눈을 비비며 대화의 물꼬를 바로 잡았다.

〔어쨌든 그 땐 그냥 마냥 귀여웠지. 아무리 열이 받아도 도무지 걔한테는 화를 못 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랑도 아니라며 왜.〕

〔신기하게, 녀석이 내 발소리를 귀신 같이 알아듣는 거예요.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거의 매번 그랬어. 내가 부르기도 전에 이미 날 돌아보는데…….〕

강도영의 느른하게 취한 눈이 가늘어졌다. 아득한 과거를 곱씹는 입술에도 희미한 곡선이 그려졌다.

〔누구한테 달라붙어 있다가도 가차 없이 버리고 나만 찾아. 앞도 안 보이는 게 맘만 급해서 자꾸 휘청거리는데, 달려가서 안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지. 삼촌 같으면 안 예쁘겠어요?〕

〔……말만 들어도 소름끼치게 예쁘겠네.〕

오정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강도영의 몸이 조금 더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그래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나 같은 놈조차 그렇게 주변 못 보고 정신도 못 차리고…… 모르는 사이에 다 망가뜨리고, 다 부숴 놓고 그랬던 거지. 그 때는 진짜 몰랐거든요.〕

강도영은 끈끈한 한숨을 내뱉고 나서 뒷말을 엮어 붙였다.

〔그게 녀석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는 거. 정말 몰랐다고요, 나.〕

어느 가을 날, 녀석은 평소처럼 다리를 베고 누워 뭔가 한참을 고민했다. 왜 그래? 다정하게 묻자 녀석이 말했다.

「형. 오늘 어떤 아저씨가 팬이라면서 찾아 왔어.」

그 때, 자신은 웃었다. 녀석은 그 즈음 클래식 판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맹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미 열여섯 살에 데뷔 음반까지 나온 뒤로, 리사이틀은 물론 협연도 종종 잡히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팬이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랬어? 막 꽃도 주고? 사인해 달라고도 그러고?」

「응. 음반 내밀어서 망설이다 해 줬는데, 아저씨가 웃었어. 글씨 되게 이상하다고.」

「그래서 속상했어?」

짧은 머리를 손끝으로 빗어주며 물었다.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 글씨 못 쓰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괜찮았어.」

「그래. 연습하면 돼. 우리 난우 뭐든 금방 배우잖아.」

응, 해 놓고,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자꾸 오래 못 보고 시선을 피하니까 아저씨가 조금 상심하는 것 같았어.」

「그래, 난우야. 아직 좀 어색하고 무서워도 자꾸 피하지 마. 사람들 입이라는 게 정말 가벼워. 너한테 실망했던 사람들은 뒤에 가서 더 크게 부풀려서 퍼뜨린다고, 형이 말했지?」

그 때는 그게 정답에 가깝다고, 나름 합리화를 했다. 비열했던 내심은 지겹도록 천재 소리를 들어 왔던 제 얄팍한 경험에 가까스로 당위성을 얻었다.

유혹하듯 지껄이고, 속이고, 사기치고, 그래서 결국 녀석이 저만 의지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끊임없이 덫을 놓았다.

그러나 그날, 어쩐지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녀석은 매달리듯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 그 아저씨 왠지 좀 무서워, 형.」

〔이제 이해 돼요? 저 예뻐하는 거, 저 싫어하는 거. 그런 거 본능적으로 느끼던 애가 그랬다고요. 무섭다고. 그 때는 지금처럼 폐쇄적이던 애도 아니었는데, 그냥 저 좋다고 하면 무조건 파고들려고 해서 내가 따끔하게 야단만 치던 시기였는데.〕

아아, 오정수는 탄식했다. 이제야 비로소 문맥의 핵심을 파악한 거였다. 강도영의 서늘한 눈매에 음울한 그림자가 번졌다.

〔그리고 멍청한 내가 대답한 거지. 무섭다고 평생 피하기만 할 거냐고. 앞으로는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널 둘러쌀 거라고.〕

〔…도영아, 그건.〕

〔그리고 또 말한 거지. 사람들의 호의는 적당히 이용해 주지 않으면 악의로 바뀐다고.〕

아마 녀석이 원했던 대답은, ‘그럼 그냥 모른 척 피해 다녀.’ 정도였을 거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정난우에게 강도영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전혀 다른 소리를 늘어놨고, 녀석은 꾹 참고서 그 말을 따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강도영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조급 다급하고 초조한 듯이 목울대가 세차게 움직였다. 탁, 잔을 내려둔 그가 한 손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가 그대로 이마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친해져 보라고 했다고, 내가. 스킨십만 안 하면 되니까, 꽃 들고 찾아오면 살짝 웃어도 주고, 공연 보러 오면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도 해 주고, 기타 등등. 등등, 등등. 내 말이라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꼭 지켰던 녀석한테 말이에요. 그거 보면서 음험하게 희열을 느끼던 병신이 미친놈한테 애를 갖다 바친 거야. 내가 그런 짓거리를 한 거라고.〕

〔…….〕

〔이 정도면 내가 사주했다고 봐도 되겠네. 그쵸?〕

그 맹목적인 눈길, 숨 막힐 듯이 다가오는 애정, 그 감각에 탐닉해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도리어 그 숭배의 눈길을 보내고 싶었던 건 정작 자신이었음에도.

〔도영아. 삼촌이 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네가 네 말대로 눈이 멀어서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름대로 녀석을 많이 아꼈어. 다만…….〕

〔…다만, 뭐요.〕

건조한 시선이 찌르듯 엄습해 왔다. 오정수는 동공 풀린 눈동자를 잠시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잔에 얼음을 떨어뜨리며 말을 골라 내뱉었다.

〔안 맞았던 거지. 시기적으로나 상성으로나. 누구를 탓할 수가 있겠냐. 너도 난우도 통찰력을 바라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는걸. 네가 단숨에 휩쓸렸다는 그 이상한 교감 같은 건 범인인 나는 이해 못 할 영역이니 말을 말더라도, 단순히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너는 지금도 난우를 감당 못해.〕

〔…….〕

〔그러니까 애초에 맘먹은 대로 가. 밀리건, 가능성 보인다며. 난우한테 새로운 신인지 뭔지 만들어 주고 넌 너 갈 길 가면 되는 거야.〕

〔나만 왜 그래야 되는데?〕

강도영의 목소리가 끈끈한 점성으로 젖어들었다.

〔억울하잖아. 나만 빠지면 모두가 행복하다는데. 외면하고 살면 포기가 될 줄 알았더니 더 갖고 싶어지잖아. 그런데도 나만 계속 참아야 돼요? 다 같이 시궁창에서 살자고 하면 내가 난우 가질 수 있어요. 지금도 가능해. 그 둘이서 얼마나 붙어먹었는지는 몰라도, 난우가 얼마나 마음을 많이 줬는지는 몰라도…….〕

〔난우는 누구든지 감당할 수 있어. 다만 난우를 건강하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는 그리 많지 않아. 도영아, 너도 알잖아. 그래서 더 불행하게 안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거잖아. 이젠 제발 인정하고 받아들여.〕

흐트러져 뭉개지기 직전이었던 눈동자가 일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뒤로 떨림은 꼬리를 물었다. 좌우로, 위아래로, 그리고 온 사방으로 굴러 다녔다.

〔씨발. 그런 게 어딨어. 처음부터 그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되고. 그런 게 정해져 있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도영아…….〕

강도영은 두 눈을 양 손목으로 짓뭉개듯 눌렀다. 그대로 비슬비슬 웃음을 터뜨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마치 흐느끼는 듯했다. 오정수는 다시금 뱃속에서 끓는 안쓰러움에 눈을 흐렸다.

〔아, 씨발. 알아, 안다고요. 그 새끼는 돼도 나는 안 돼. 그거, 구 년 전에 (1줄 잘림)모르고.〕

강도영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 때,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울렁거리는 공기에 뜨거운 음악이 번져갔다. 헝가리 무곡, 정난우의 새 빨간 불꽃을 담았던 그 선율이었다. 정신 못 차리는 강도영을 대신해 오 정수가 막 스툴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받지 마요.〕

〔……왜.〕

〔난우일 거예요. 오늘 전화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했거든.〕

강도영의 목소리가 실바람처럼 흩어졌다.

〔왜 또 피해?〕

강도영은 비틀거리는 손으로 술병을 찾았다. 초점도 안 맞는지 헛손질만 연방 해댔다. 오정수는 말없이 짙은 한숨으로 두 개의 잔에 원액을 채웠다.

〔오늘 낮에 난우한테 메시지 왔었어요. 기쁜 소식 있다고.〕

〔기쁜 소식?〕

〔구 년 전에 난우 구해줬던 학생, 찾았대.〕

오정수는 막 입에 머금으려던 술을 쿨럭 하고 뿜어냈다. 턱과 셔츠가 젖었는데도 느끼지 못했다. 눈시울이 찢어질 듯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진 말에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밀리건이라네, 그 학생이.〕

오정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손 안에 든 잔이 힘없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엎어져 나뒹구는 술과 얼음이 독한 향을 뿌렸다.

〔그냥 대가도 없이, 이틀 동안 개처럼 뛰어다니면서 구해냈대. 운명 참 기구하죠. 내가 심취했던 환상의 세계가 부서지던 그 순간에, 그 놈은 난우의 영웅이 된 거라고요. 그것도 나와는 달리 흑심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강도영은 매끈하게 커팅 된 잔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갈라진 음성으로 그르렁거렸다.

〔좆같아, 씨발. 나는 못 하는 거, 나는 못 가진 거, 그 새끼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거잖아.〕

기가 막혀 한참을 웃었다. 아슬아슬하게 딛고 있던 살얼음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런 인연이라도 없었더라면 이 정도로 지독한 패배감은 없었을 거다.

왜 하필 그 새끼야. 왜 그것마저도 그 새끼야.

질투로 온 몸이 썩어 들어갔다. 부패한 공기가 어둡고 탁한 내심을 가득 메웠다. 결국 돌아선 건 자신인데 얽매어 있는 것도 저였다.

선량했던 처음 의도가 악의로 돌변하려 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차라리 에녹이 정난우에게 쉽게 질려 떠나고, 남겨진 녀석이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아 저를 찾아오기를.

〔최악이다, 강도영.〕

강도영은 홈 바 위에 흐느적거리는 상체를 늘어뜨리며 이를 갈았다.

〔그냥 놔뒀으면 어디서든 예쁨 받고 잘 살았을 녀석, 내 품 안에만 가두려다 다 망가뜨리더니…… 미친 새끼. 이젠 아예 바닥을 보려고 하네. 나 진짜 최악이다.〕

조명 흐린 허공을 오래 담는 눈동자는 죽음처럼 적막하고 불투명했다. 모호하게 묻어둔 음습한 내심이 피처럼 비린내를 풍기며 나부꼈다. 그저 속한 본성이 저를 또 아프게 했다. 자꾸만 누군가와 비교가 돼서 더 가슴이 쓰렸다.

〔삼촌. 오늘 나 좀 지켜 줘요. 어디 못 나가게. 전화도 못 하게.〕

〔…그래.〕

강도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들썩이던 어깨는 느리게 잦아들었다. 오정수는 강도영의 젖은 눈가를 외면한 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린 룸은 한산하다 못해 썰렁했다. 정난우는 계속 안절부절 못하며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움찔 입을 열었다가 시무룩하게 다물기만 반복했다. 한태영의 얼굴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거스러미 돋은 공기를 녹일 말주변이 제게 있을 리가 없었다. 정난우는 죄지은 사람처럼 활 털만 만지작거렸다. 한태영의 바짝 곤두선 신경 조각들만 정적 속을 예리하게 부유했다. 그는 오늘 오전 공항에서부터 내내 저런 살벌한 기세를 흘렸다.

사실 그때 자신은 에녹의 코트에 꽁꽁 싸매어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한태영의 마중을 기다리는 사이 바닥난 체력과 안심되는 향기 덕에 정신을 놔버린 거였다.

에녹은 깨우지 않고 저를 들쳐 업었고, 차에 오르기 전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했다. 어차피 항시 붙어 있는 매니저들에게는 숨길 수 없는 관계였기에 수긍했다. 제 생각에도 이건 자연스레 헤치고 나아가야 할 장벽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장난치지 말라며 피식 웃던 한태영은 이내 사태파악을 끝내자 당연히 경악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며 거의 애원하다가, 그게 안 먹히니 ‘이 연애 반댈세!’를 외치며 당장 회사에 전화해 회의를 해야겠다는 둥 길길이 날뛰었다. 에녹은 되도 않는 뇌물을 찔러주려다 욕만 먹었고, 현재 그린 룸 출입마저 금지 당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근데 태영 씨,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태영은 울컥한 기류를 흘렸지만 제게 고성을 내뱉지는 않았다. 연신 가벼운 욕설만 혼자 삼키며 거친 숨만 몰아쉬었을 뿐이었다. 한참 뒤에 진정한 그가 앓는 소리를 했다.

「이거 들키면 큰일 나요, 난우 씨. 당신도 에녹도 주목받는 사람들이잖아요. 지금도 사람들 무서워서 눈도 못 보는 당신이 그걸 어떻게 견디려고 그래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호모포비아들의 집요함은 상상을 초월 한다고요.〕

그런 게 두렵지는 않았다. 따가운 시선은 오히려 익숙했다. 걱정되는 걸 말하자면 오히려 에녹이었지만, 정작 그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픽 웃어 버렸었다.

「원래 나 정도 위치에 있잖아? 그럼 나를 차별하는 놈을 차별할 힘이 생겨. 걱정하지 마. 난 그런 걸로 상처받을 만큼 여린 성품도 아니니까.」

한태영의 주머니에서 또 진동이 바르르 울렸다. 무심결에 그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이 딸려갔다. 초조하게 손끝을 움찔거리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VIP석에서 불만어린 얼굴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에녹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입술만 깨물었다.

고용인 눈치만 살피며 주눅 들어 있는 고용주를 힐끔 쳐다본 한태영의 마음이 약해졌다. 저 소심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용기가 나서 그 비장한 결심을 했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둘이 내내 붙어 다니던 걸 의심조차 못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둘 다 진심인 건 알겠다. 스스럼없이 눈을 맞추고 다정히 대화하는 것 만 봐도 아주 깨가 쏟아졌다. 오전 커밍아웃 이후 에녹은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정난우를 챙겨댔다. 유리로 만든 세공품 대하듯 애지중지 눈 꼴셔서 못 봐줄 정도였다.

하지만 둘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그렇고 그런 상상을 하자면 사고가 멎었다. 그건 생리적인 거부감이었다. 혐오감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의 고지식한 상식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인 거다.

한태영은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 한창 타오를 연애 초기에 원치 않게 제 1호 장해물이 된 스스로의 처지가 못내 처량해졌다.

결국 맘 약해진 한태영은 호주머니에서 압수해 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장대 유리 위에 던지듯 내려두었다. 움찔한 정난우의 눈이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한태영은 착잡한 어로로 말했다.

 “아직 결정 못했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회사에서 알면 난리 날 텐데 내가 언제까지 함구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가 주제넘게 두 사람 생이별…….”

그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뒷말을 절단했다. 이젠 말조심도 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우울함에 한숨이 멎질 않았다. 얌전한 고용주가 제대로 홀리더니 정말 사고 한 번 크게 쳤다.

 “난우 씨. 일단은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내가…… 아, 정말 돌겠네. 하여간 그냥 입 닫고 생각 좀 할게요.”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은 나중에 들통 나서 나 회사에서 잘리면 해요.”

순간, 정난우의 표정이 급격히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곧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안 그래요. 그럴 일 없어요. 태영 씨 해고하면 내가 화낼 거예요.”

…응?

한태영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좁혔다. 정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엉거주춤 다가왔다. 그리고 재킷 소매를 꽉 붙들며 제법 심지 곧게 말을 이었다.

 “나 진짜 화낼 거예요. 내 허락 없이 매니저 못 바꾼다고 계약서에도 썼어요. 사람들이…나 싫어하게 돼서 공연 취소되고 그런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런 건 참을 수 있지만…….”

정난우가 화내는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것도 전혀 그림이 안 나왔다.

한태영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감동한 내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내뱉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전화나 확인해요. 아주 난리 났어. 답장 없다고.”

쉽사리 자리로 못 돌아가는 정난우를 한태영은 억지로 끌어가 다시 앉혔다. 휙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난우가 재차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었다.

『이젠 휴대폰도 압수했어? 정말 그래? 나 쳐들어간다?』

『이거 엄연히 사생활 침해야!』

『한, 우리 이러지 맙시다. 회사에 알리려면 알려요. 일 끊어지면 내가 책임진다잖아. 나 능력 있다?』

『난우 지금 불안해하잖아. 통화만 잠깐 할게요.』

협박도 있고 통사정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길게 문자를 주고받을 틈은 없었다. 스태프가 들어와 입장 대기를 알려온 탓이었다. 정난우는‘휴대폰은 받았어요. 공연 후에 봐요.’라고 짧게 보내두고 나서 그린 룸을 나섰다.

운전이 다소 거칠었다. 정난우는 안전벨트를 한 손으로 꼭 쥔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는 오늘도 렌탈차량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정난우는 또 에녹의 차지가 되었다. 한태영은 도끼눈을 떴지만 결국 묵인해 주었다. 냉가슴 앓는 며느리처럼 율리안과 함께 호텔로 사라졌다.

에녹은 체크인을 마치고 또 벨맨의 안내를 거절했다. 옮겨지는 걸음은 다급했다. 며칠 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상황에 얼굴이 점차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가 뭣 때문에 이렇게 흥분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휩쓸려 끌려가다 보니 어느새 객실 소파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나뒹구는 코트들은 바닥에서 음란하게 뒤엉켰다. 뜨겁게 키스해 오는 그도 자신도 셔츠 단추는 단정치 못하게 풀어져 흐트러졌다. 버클과 지퍼 풀린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속옷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일어선 남성이 닿았다. 에녹은 느리게 허리를 움직여 마찰했다. 정난우는 몸을 움찔거리며 제 머리 옆을 짚은 남자다운 팔뚝을 감싸 쥐었다.

에녹이 문득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헤프게 풀어진 눈동자를 빛내며 정난우를 깊이 내려다보았다.

 “세레나데 잘 들었어.”

 “…네?”

 “네 앙코르곡들 말이야, 오늘 듣는 순간 확 느낌이 왔다고. 요 맹랑한 것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을 줄이야.”

정난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픽 웃는 입술이 다가와 열오른 뺨을 살짝 물었다. 그가 낮게 끓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쌀 뻔했잖아. 참느라 혼났다고.”

에녹은 짓궂게 속삭이고는 새빨간 혀로 진득하게 얼굴을 핥아 올렸다. 농담처럼 건넨 말이지만 쌀 뻔했다는 건 진짜였다.

정난우는 본 프로그램의 여파에 상기된 얼굴로 앙코르곡들을 연주했다. 달콤하게 속삭이기도, 뜨겁게 매달려오기도 했다. 첫 경험을 무사히 치른 정난우는, 육체의 쾌락보다 정신적 교감에서 오는 쾌락에 더 먼저 눈을 뜬듯했다.

정난우는 절정의 순간조차 현에 실었다. 열렬히 뒤엉킨 몸과 결렬하게 서로의 몸에 뿌려지던 체액, 그 황홀감이 생생한 공명으로 체온을 순식간에 불붙였다. 급격히 딱딱해지는 중심에 조금 당황했을 정도였다. 팔걸이에 올려둔 코트가 없었다면 가리지 못해 곤란했을 거다.

 “마,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정난우는 조금 민망한 듯 눈을 피하며 말했지만, 이내 다시 마주쳐 왔다. 에녹은 흰 속살 위에 늘어진 까만 셔츠 속을 더듬다가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엄지에 걸린 유두를 살살 문지르다 당기듯이 잡아 비틀었다.

 “덕분에 내가 지금 꼭지까지 흥분해 버렸어.”

셔츠 끝자락을 들춰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금세 빨갛게 일어난 유두를 소리 나게 빨았다.

 “제발…씻고라도…….”

정난우가 또 의미 없이 어깨를 밀어냈지만 에녹은 꿈쩍도 안 했다. 눈을 치켜뜨며 더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핥았다. 재차 눈빛이 부딪친 순간 정난우는 울상을 지었다.

말하기 전엔 안 돼, 에녹은 단호하게 짙은 눈을 빛내며 헐렁하게 풀어 놓은 슬랙스 손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브리프 밴드를 벌려 탱탱한 엉덩이를 꽉 손에 쥐었을 때였다.

 “시, 싫어요!”

정난우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여기는 이렇게 기대하느라 꿈틀거리는데.”

에녹은 여전히 살짝 부은 채인 구멍의 입구를 능청스럽게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흣, 쪼그라든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정난우가 재차 거부의 뜻을 내비쳤다.

 “정말, 싫어요. 에녹. 씨…씻고 해요.”

에녹의 눈가가 녹아내렸다. 장한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에녹은 정난우의 다리를 벌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편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뜨끈하게 감겨 오는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 싫으면 싫다고 말해. 잘했어. 예쁘다.”

 “…에녹은 가끔 못됐어요.”

 “슬프네.”

에녹은 맘에도 없는 대꾸를 내뱉으며 정난우의 허리를 바싹 끌어왔다. 안구까지 적실 기세로 한쪽 눈꺼풀을 몇 번 핥았다. 작은 자극에도 정난우의 숨은 빠르게 가빠졌다.

 “아…안 한다고…….”

 “진짜 안 넣을게. 한 번만 풀어줘. 아까부터 참아서 좀 힘들어.”

에녹은 거칠게 속삭였다. 망설이는 손목을 끌어와 제 중심으로 이끌었다. 경직된 손가락이 천 위에 닿는 순간 낮은 탄식이 목 안에 절절하게 끓었다.

 “응? 한 번만.”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일부러 노골적인 호흡을 내뱉으며 잘근잘근 깨물자 정난우는 결심한 듯 떨리는 손으로 브리프를 끌어내렸다. 어제 오후부터는 공연 때문에 몇 번 이렇게 손으로 해 줬었다.

딱딱하게 모양을 갖춘 성기를 조심히 손 안에 쥐었다. 에녹은 느리게 어깨를 들썩이며 귓불을 빨았다. 그가 가르쳐준 대로 기둥을 쥐고 미끈거리는 귀두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어때. 이제 내 거 좀 익숙해?”

에녹은 불규칙하게 결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바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음란한 음성과 아래쪽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마찰음이 머리를 눅눅하게 적셨다.

 “그냥 자주 보니까…….”

정난우는 불그스름한 눈가를 떨며 시선을 내렸다. 위아래로 흔들고 주물럭거릴 때마다 검붉게 발기된 것은 뜨끈하게 꿈틀거렸다. 귀두의 갈라진 틈으로 몽글몽글 점액이 맺혔다. 탁하게 쉰 듯한 신음이 기분 좋게 그의 목 안을 떠돌았다.

에녹은 정난우의 턱을 한 손에 쥐어 들어올렸다. 취한 듯이 울렁거리는 눈으로 한 박자 늦게 올려다보는 순간 입술의 더운 표피들이 맞닿았다. 그는 짙푸른 눈을 일렁이며 물었다.

 “나중에 입으로 빨아 줄 수 있겠어?”

 “네. 그거 좋아하시면.”

정난우의 대답은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귀를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빤히 주시하던 에녹의 눈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침묵이 쏟아졌다. 달콤한 기류가 흩어지자 정난우는 쭈뼛거리며 눈을 굴렸다.

에녹이 낮게 정돈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좋아하면 넌 다른 놈하고도 자겠다. 아무데서나 벗으라고 하면 벗고, 아무 놈한테나 가서 다리 벌리라고 하면 벌릴 거고.”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뽑아내자 정난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흔들리는 초점이 생생했다.

 “한 명 더 끼우는 건 어때. 셋이서 섹스하면 뇌가 다 삶아질 정도로 좋다던데.”

에녹의 눈동자는 시시각각 변했다. 불꽃이 어른거리다가 순식간에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지금은 타오르는 빙하에 가까웠다. 집요한 시선을 물고 늘어진 싸늘한 눈초리에 정난우는 말을 잃고 입술만 떨었다.

 “네 구멍에 같이 넣기도 하고, 입이랑 아래랑 사이좋게 나눠도 쓰고, 그럼 우리 난우 좋아 죽으려나?”

그는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정난우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좋아하세요?”

그러자 에녹은 정말로 화가 터졌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어정쩡하게 쥐고 있던 정난우의 손을 단숨에 낚아챘다. 굉장한 악력에 잡힌 손은 파르르 경련했다.

 “너 미쳤어? 나 먹기도 아까운데 내가 왜 다른 새끼랑 너를 나눠 먹어.”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방금 전에는 고민도 하지 말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어야지! 그런 거 좋아하냐는 병신 같은 질문은 왜 하는데 너, 내가 좋다면 정말 할 생각이었어?”

에녹의 눈에서 위협적인 광채가 번들거렸다. 사나운 음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침수될 것 같은 압박에 정난우는 숨 가쁜 듯 표정을 흐렸다.

 “저는 그냥, 당신이 기뻐해 줬으면 해서………”

빌어먹을, 에녹은 질끈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혼내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상처받은 듯한 표정에 심장이 뜨끔거리는 거다.

 “미안해요. 그런데 다행, 다행이에요.”

정난우의 목소리는 울먹이듯 떨렸다. 에녹은 제 아랫입술 안쪽을 두껍게 물며 눈꺼풀에서 힘을 풀었다. 느리게 벌어진 시야에 발갛게 익어 헐떡이는 정난우가 맺혀 왔다.

 “다른 사람이랑 이러는 거, 생각만 해도 너무 싫은데, 에녹이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했어요.”

에녹의 눈동자가 일순 미동을 보였다. 서늘한 눈초리에 더운 온기가 스쳤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싫다고 말했어야지. 난 너랑만 잘 거고 네 앞에서만 다리 벌려주겠다고 했으면 되잖아.”

에녹은 정난우의 셔츠 깃을 벌리며 목에 얼굴을 묻었다. 달큼한 체향이 예민해진 신경을 눅눅하게 이완시켰다.

 “젠장. 그럼 좋아 죽었을 텐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풀죽어 있던 중심은 뜨겁게 일어났다. 가학성을 부추길 게 아니라 독점욕을 부추겨 줬더라면 지금쯤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을 거다.

에녹은 신음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스친 창백한 목에서 솜털이 일어섰다. 바르르 떨리는 몸을 다시 소파에 눕히고 팔걸이에 한 손을 짚었다. 느리게 뻗은 손끝이 긴장으로 굳은 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꾹 눌리고 빙글 돌릴 때마다 정난우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에녹은 고조된 숨결과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화내고 후려쳐도 좋으니까 네 생각을 말해.”

에녹은 바닥에 한쪽 다리를 짚어 체중을 실으며 정난우의 셔츠 단추를 마저 끌러냈다. 정난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감촉 좋은 피부엔 제가 집요하게 씹어 문 자국들이 낭자했다. 앞섶이 활짝 벌어진 검정색 셔츠는 흰 피부 위에서 지독하게 색정적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복종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에녹의 눈가에 비친 열기도 점점 농도가 짙어져갔다. 그는 단단하게 발기해 끄덕거리는 제 성기를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 안에서 용솟음쳤다.

 “나 지금부터 너 보면서 자위할 거야.”

소파에 짓눌려 있던 에녹의 한쪽 무릎은 정난우의 옆구리를 밀고 올라왔다. 뻣뻣하게 굳은 턱과 가슴 사이에 제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내 붙인 거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은근하고 저열하게 속삭였다.

 “네 가슴, 네 얼굴에 질펀하게 쌀 거라고. 정액 범벅된 네 얼굴에 말랑하게 죽은 내 걸 문질러 줄게. 이건 아까처럼 헛소리 아니야.”

에녹이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노골적인 의도가 피처럼 붉게 그의 입술에 번져갔다.

정난우는 당혹해서 눈만 어지럽게 굴렸다. 머리 위를 짚은 그의 팔뚝에 남자다운 시퍼런 핏줄이 툭툭 솟아올랐다.

정수리 위쪽, 그가 틀어쥔 소파 팔걸이에서는 빠드득 하는 마찰음이 울렸다. 그건 마치 야생동물이 뼈를 씹어 으깨는 소리와 닮았다.

에녹은 나른하게 풀어진 시선을 내리떴다. 검붉은 욕망으로 가득 부푼 제 것을 부드럽게 몇 번 쓸었다. 그리고 기둥을 감싼 채 느리게 펌프질을 시작했다.

얇은 표피는 손안에서 앞뒤로 죽죽 딸려가며 귀두 끝에 우윳빛 이슬을 맺었다. 그는 촉촉하게 젖은 선단을 보란 듯이 엄지로 비비적거리며 눈썹을 들었다.

 “나는 이렇게 천박하고 난잡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데, 싫으냐고 묻지를 못 하겠네. 넌 당연히 좋다고 할 거니까.”

하아, 낮고 탁한 신음에 정난우의 까만 앞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숨결에 스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멈췄다.

에녹의 등허리는 도약직전처럼 곡선으로 구부러들었다. 이마에 키스할 듯 다가와 있는 그에게 망설이다 입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싸늘하게 피했다.

에녹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난우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자연스레 벌어진 안의 축축한 지대를 성의 없이 훑고 나서 떨어졌다. 그러자 정난우는 무심결에 입을 닫으려 했고, 에녹의 손가락이 제지하듯 다가와 다시 벌렸다.

 “벌리고 있어. 거기 넣는 걸로 상상하면서 쌀 거니까.”

거칠게 갈라진 음성에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달렸다. 그건 마치 제 안에서 그가 뜨겁게 폭발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정난우는 열기로 델 것 같은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집요하게 번들거리는 푸른 안광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스쳐 벌어진 채 얼어붙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좀 더 벌려. 그렇게 작으면 안 들어가잖아.”

에녹은 검붉은 그늘에 잠겨 있는 정난우의 입 안을 태울 듯이 응시했다. 정난우는 홀린 것처럼 입을 더 벌렸다. 거칠게 훑는 성기 끝이 배와 가슴 중간 어딘가 쯤에서 끄덕거렸다. 그가 콱콱 주물러 올릴 때마다 갈

라진 가운데에서는 비릿하고 야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흔들리던 까만 눈은 점차 붉게 풀어져 제 얼굴과 흉물스런 성기를 헤매듯이 오고갔다. 그간 살 섞은 게 헛짓거리는 아니었는지 얼굴은 금세 붉어지고 가슴은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에녹은 하반신을 뒤로 조금 무르며 더 고개를 숙였다. 크게 벌어져 헐떡이는 정난우의 입술 선을 혀끝으로 느긋하게 덧그렸다.

에녹은 제 흉기 같은 성기 대신 갈증에 타는 혀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학, 정난우가 젖은 눈으로 숨을 들이켰다. 안달 난 침입을 강행하는 혀끝에 탐스러운 것들이 차례차례 닿았다. 오돌토돌한 입천장과 말랑 한 혀, 부들부들한 볼의 안쪽을 샅샅이 핥았다.

고개를 비틀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쑤시듯이 목구멍까지 살덩이를 밀어 올렸다. 맞닿은 입술이 끈끈하게 뭉그러졌다. 그 감각은 상상 속에서 충혈 된 성기까지 순식간에 뻗어나갔다.

에녹의 동공은 차츰 눅눅하게 풀어졌다. 연결된 입술 안쪽으로 낮고 흐린 신음이 뒤엉켰다.

정난우가 갑자기 도리질 쳤다. 젖은 입술이 불에 덴 듯 달아났다.

 “시…싫어요…….”

정난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에녹의 미간에 일순 주름이 졌다. 열기 맺힌 눈초리는 본능적으로 사나워졌다. 정난우가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을 벌렸다.

 “하, 할래요. 나도…그러니까…….”

두서없는 말들이 습도 높아진 허공에 튀었다.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뻔뻔하게 자위하던 손을 정난우가 머뭇거리며 감싸며 말을 이었다.

 “같이…….”

 “그러니까 같이, 뭘?”

기다리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물었다. 정난우는 꾹 다문 입술을 몇 번 달싹거렸다. 그러다 말로 표현하는 게 힘들었는지 직접 손을 내렸다. 반쯤 내려가 있던 지퍼를 풀고 스스로 아랫도리를 내렸다. 슬랙스와 브리프가 엉덩이 아래에 걸쳐졌다.

흥분의 찌꺼기가 탁하게 떠다니는 눈으로 빤히 내려다보다가, 끙끙거리는 정난우 대신 아랫도리를 벗겨 주었다. 활짝 노출된 몸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린 검정색 셔츠가 다였다.

그 도색적인 모습으로 정난우는 하체를 띄웠다. 제가 자진해서 다리를 벌리고 꽉 붙든 손을 끌어가 제 입구에 갖다 댔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가, 같이 해요.”

홍시처럼 붉은 얼굴로 정난우는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나도 하고 싶어요.”

에녹은 미묘하게 울렁거리는 눈으로 정난우를 내려다보았다. 자줏빛 울혈이 흩어진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있었다. 확인하듯 눈을 내렸다. 정난우의 예쁜 성기도 맹랑하게 선 채 존재를 주장했다.

거친 숨만 교차로 흐르는 침묵이 잠시의 공백을 메웠다. 투시할 것처럼 날카롭고 뜨거운 눈길이 동공 안 깊은 안쪽을 찔러왔다.

정난우는 제가 관찰당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무언가 작은 부스러기라도 긁어낼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잠자코 올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에녹의 날선 눈매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기특하네. 잘 말했어. 오늘은 정말 순둥이 정난우가 싸대기를 후려갈 길 때까지 잔인하게 굴려볼까 고민하던 중이었거든.”

정난우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에녹은 제 하의와 브리프도 모두 벗어던졌다. 다시 상체를 수그리며 정난우의 두 다리를 크게 벌렸다. 한 쪽은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나머지 한쪽은 바닥에 내렸다.

치부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순간 갈급증이 식도를 태웠다. 복부가 꽉 조일 만큼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탐스러운 둔부 아래 제 하반신을 밀착시키며 고개를 숙였다. 젖은 입술의 표피가 맞닿은 채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정말 하고 싶어?”

잠시 멈칫한 정난우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빤히 올려다보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래요.”

 “왜? 내가 혼자 개처럼 헐떡거리니까 한 번 대 주자 뭐 이런 거야?”

흠뻑 젖은 귀두를 갈라진 골에 슥슥 비벼대며 물었다. 며칠 내내 혹사 당한 야한 구멍은 정난우의 얼굴처럼 발갛게 부어 있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좋아서요…… 당신도 좋고, 섹스할 때 드는 이상한 기분 같은 거, 같이 안고 있는 거, 그런 거 저도 좋아요. 특히 그…….”

 “특히?”

 “그…… 저한테 넣고 움직일 때 에녹의 얼굴이, 정말 예뻐요. 설레고 기쁘고,…그냥 그래요.”

쿵쿵 울리던 맥동이 순식간에 절정까지 치솟았다. 에녹은 꿈틀거리는 성기를 쥐고서 귀두 끝을 구멍 안에 조금 밀어 넣었다.

꽉 다물린 구멍이 저항하듯 조여 댔다. 흡, 하고 다급히 숨을 몰아쉬던 정난우는 곧바로 빠져 나가는 느낌에 화들짝 눈시울을 키웠다.

에녹이 한쪽 눈썹만 희미하게 들며 물었다.

 “한 번으로 안 끝날지도 몰라. 이젠 알잖아, 그렇지?”

 “…알아요. 괜찮아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에녹은 프리컴으로 흠뻑 젖은 끝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여전히 빡빡하고 좁은 입구는 힘겹게 틈을 벌리며 제 것을 꾸역 꾸역 삼켰다.

흐으, 정난우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반쯤 들어갔을 때, 에녹은 터질 듯한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빡빡하고 뻣뻣했지만 금방 또 녹일 것처럼 풀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에녹은 잇새에 짓눌린 정난우의 입술을 혀끝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부드럽고도 음탕한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내 거 좋지? 크기도 그렇고,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이제야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쿵쿵대던 심장이 다른 물꼬로 빨라졌다. 정난우는 턱을 당기면서도 기쁘게 미소를 지었다.

 “네. 다 좋아요.”

그러자 에녹은 코끝을 뺨에 비비며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망할. 이게 이젠주 대놓고 사람을 갖고 놀지.”

번번이 휘둘리면서도 난 이게 왜 이렇게 좋을까.

에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소리에 민감한 정난우는 한 단어를 속삭일 때마다 조르듯이 내벽을 콱콱 조였다.

에녹은 낮게 호흡하며 벌어진 셔츠 사이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중간에 툭 걸린 유두의 감각에 정난우가 소스라쳤다. 등허리가 부드럽게 휘는 광경은 뇌 주름을 잔뜩 풀어헤쳤다.

에녹은 움찔거리는 정난우의 입술을 진득하게 할짝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아? 해 달라는 대로 해 줄게. 남창처럼 써 먹어 봐. 난 그런 거 즐긴다고 했잖아.”

경직된 허리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살살 주물렀다. 천천히 풀어지는 몸에서 긴장도 덩달아 빠져나갔다. 정난우는 열기로 흐려진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말했다.

 “그냥…끝까지 넣고, 평소처럼…….”

 “아아. 끝까지 넣고?”

에녹은 단숨에 허리를 튕겨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밑동을 뭉갤 것처럼 아랫배를 밀어붙여 느긋하게 휘돌렸다.

 “이렇게?”

홀린 듯이 숨만 할딱거리던 정난우가 자지러지며 팔을 뻗었다. 에녹은 기꺼이 낚아채며 팔꿈치 안쪽을 달콤하게 씹어 물었다.

흐으, 정난우의 성대에서 더운 바람이 셌다. 늘어져 있던 새하얀 목에 푸른 혈관이 툭 돋아났다.

 “그 다음엔?”

애처롭게 벌어진 팔에 에녹은 제 목을 내 줬다. 정난우는 매달리듯 꽉 끌어안아 왔다. 난폭하게 숨죽이고 있던 성욕에 기름이 들이부어졌다. 그건 정난우도 마찬가지인 듯, 더듬거리는 말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우, 움직여 주세요. 그거……그거 있잖아요. 막 뜨겁고, 조금 아프고, 그리고 그냥 막 정신없이 좋은…….”

에녹은 배부른 짐승처럼 포만감 짙은 숨을 흘렸다. 그리고 대꾸 없이 곧장 허리를 움직였다. 거의 끝까지 빼냈다가 빠르게 꽂았다. 정난우는 크게 벌어진 눈을 바들바들 떨었다. 몇 번 연달아 쑤셔대니 금방 또 눈물이 맺혔다. 일그러진 눈꺼풀을 축축한 입술로 달랬다.

 “아파? 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아주 빈말도 아니었다. 만약 진심으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으면 정말로 관뒀을 거다. 지금 이 순간에서는 그래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정난우는 눈 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면서도 고개를 휘저었다.

 “안 아파요. 할래요…… 하고 싶어요.”

정난우는 열렬히 원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온 진심을 눈빛에 담아 전송했다. 기분 좋은 듯 짙고 묽게 타는 눈은 전류처럼 얼굴 여기저기를 찔러왔다. 그 시선 끝에 닿은 모든 곳이 따끔거렸다.

 “나도 그래.”

에녹은 치골이 묻힐 만큼 깊게 삽입했다. 물기 어린 까만 눈은 경악한 듯 균열을 보였다. 소파 가죽에 푹 파묻힌 등이 뽀득거리며 위로 밀렸다 그 사이에 손을 넣어 상체를 조금 들어 받쳤다.

잔뜩 수축한 내부는 경직된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쉬이, 아기 달래는 목소리를 귓가에 붙였다. 정난우는 그제야 가늘게 흐느꼈다.

 “흐…에녹…….”

응, 부드럽게 대답하며 척추 근처를 애무했다. 금세 젖은 눈가를 꼼꼼히 핥으며 허리를 부드럽게 돌렸다. 아무 사전 준비도 없었으니 일단 통로를 좀 더 넓히고 프리컴은 더 많이 적셔 둬야 했다. 사방의 점막을 마구 마찰했다.

굵은 것은 전립선 아래를 계속 누르며 밀고 올라왔지만 결정적으로 콱 찍어 올려 지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한 통증과 감질 나는 욕구에 정난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었다. 애타는 신음이 비음 섞여 허공에 흩어졌다.

 “아…아……!”

에녹은 바닥을 지탱하는 발에 더 단단히 힘을 주며 빈손으로 탱탱하게 올라온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꼬리뼈를 훑다가 그대로 미끄러지 교접부까지 닿았다.

화들짝 놀란 구멍이 움찔거리며 수축했다. 약간 젖어든 그 곳은 뜨겁게 제 것을 받아내고 있었다. 팽팽하게 늘어난 입구를 살살 문질렀다. 끝까지 박힌 성기는 후퇴 없이 사방을 돌기만 했다. 꼬챙이에 꽂힌 것처럼.

그의 아랫배가 돌아가는 방향을 향해 정난우의 몸이 딸려갔다.

 “그러지 마요. 으, 흐옷……!”

정난우의 발간 전신은 조금씩 땀에 젖어가고 있었다. 에녹은 사포 같은 침을 삼켰다. 짐짓 여유로운 듯 굴지만 사실은 거칠게 날뛰고 싶은 걸 겨우 참는 거였다. 조금만 더, 하며 깊이 파묻힌 성기의 뿌리를 더 뭉근하고 나긋하게 움직였다.

 “이거 아닌가? 깊이 들어가면 좋지 않아?”

 “이……! 으응…흐옷……!”

정난우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윗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더니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꽉 감은 눈 꼬리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아, 아닌 거 알잖아요. 윽…….”

정난우는 정말 서러운 듯이 울먹거렸다. 에녹은 조금 난처하게 웃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뜨끔한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미안. 내가 너무 심했어?”

 “흐윽…으읏…….”

정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사내를 받는 자세로 저렇게 어여쁘게 울어대니 발가락이라도 핥아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에녹은 피처럼 붉은 귓불을 살짝 입에 물며 속삭였다.

 “미안해.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만 울어.”

땅에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떠 있던 다리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허벅지를 쓰다듬고 오금을 누르고 종래는 발목을 꽉 휘어감아 들었다. 생각했던 대로 발가락을 물자 흠칫한 정난우가 더럽다며 잡아 뺐다. 아랑곳 않고 끌어당겨 복사뼈에도 불긋한 자국을 만들었다.

 “이제 정말 안 놀릴게. 사실은 나도 박아대고 싶어 안달 나 있거든.”

정난우는 그제야 겨우 젖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에녹은 늘어진 허리마저 다른 손으로 단단히 붙잡아 올렸다. 맞부딪친 눈길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허공을 떠돌았다.

에녹은 갑작스레 허리를 뒤로 물렀다. 고환이 찰싹 부딪칠 정도로 빠르게 다시 구멍 안을 침략했다. 놀란 내벽은 물어뜯을 듯이 팽창한 살덩이를 조였다. 갈라진 탄식이 허공에 흩어졌다.

정난우는 고통과 열락의 경계선에 올라섰다. 헤매는 입술에 뜨거운 숨을 뿌리며 에녹은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까만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흔들리다 소파 팔걸이까지 닿았다.

에녹은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목울대를 긁었다. 정난우는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흐느꼈다. 발갛게 물든 뺨이 움찔움찔 떨렸다. 공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프리컴으로 젖어들기 시작하는 점막은 성기를 빼낼 때마다 쭉쭉 빨아들였다. 가빠 오른 숨이 거칠게 흩어졌다. 모골에서는 뜨끈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체온 높은 건강한 몸은 이 난잡한 행위에서 유독 헤프게 진액을 흘렸다.

못박인 손끝이 어두운 금발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어쩔 줄 몰라 그냥 본능대로 움직이는 거였다. 에녹은 턱을 비틀었다. 제 머리칼을 쓰다듬고 문지르는 팔 안쪽에 타액을 덕지덕지 칠했다.

유연한 몸은 겉도 속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착착 감겼다. 얇은 물막이 감싼 까만 눈동자는 약에 취한 듯 풀어진 채 흔들렸다. 올라탄 건 자 신이고 몰아붙이는 것도 저였는데,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어째 이거 정말 남창이 된 기분이잖아.

에녹은 그 어이없는 생각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급격히 팽창한 흥분이 정수리를 쪼갤 뿐이었다.

에녹은 폐가 뻐근할 만큼 따가운 들숨을 삼켰다. 볼록한 귀두 끝으로 전립선을 짓뭉개고 터뜨릴 것처럼 찌르기 시작했다.

 “아…아아! 아!! 에녹!”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 방황하던 정난우가, 그 노골적인 토끼몰이에 결국 무너졌다. 뜨겁고 울렁거리는 열락의 파도에 온전히 집어삼켜진 거다. 그 뒤로는 한참 동안 원초적이고 난잡한 교미만 존재했다.

정난우가 잔뜩 헝클어뜨려 놓은 머리칼 안에서 땀이 함께 뭉개졌다. 구레나룻에서 길게 맺혀 있던 땀방울이 점차 크기를 부풀렸다. 그리고 깎은 듯이 가파른 턱을 따라 느리게 흘러내렸다.

에녹은 턱 끝에 뭉친 땀방울을 정난우의 입술 위에 거칠게 비볐다. 달콤한 흐느낌 위에 잔뜩 뭉그러뜨려 놓고는 뺨을 물었다. 맞닿은 피부는 같은 온도로 활활 타올랐다.

 “후우…… 좋네, 몸이 다 흘러내릴 것 같아.”

에녹은 어지럽게 눈을 굴리며 여기저기 눈도장을 찍었다. 그 스친 자리에는 반드시 입맞춤이 뒤를 따랐다.

땀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매끈한 피부는 대중없이 아무 곳이나 혀로 핥아졌다. 까맣게 젖은 눈은 새끼오리처럼 줄곧 따라왔다.

 “예뻐, 너.”

에녹의 혼탁한 음성은 잔뜩 짓눌린 헐떡임에 섞여 있었다. 정난우는 ‘당신도…….’말하다가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느리게 조절한 움직임에 종이배처럼 힘없이 떠밀렸다.

깊이 박아 넣을 땐 날카롭게 벼려진 신음을 들려주었다. 애태우듯 천천히 뽑아낼 때는 간절하게 잡아 물며 낮게 울먹였다. 얼른 도로 넣어달라는 듯이 보채는 그 반응을 정난우는 아마 자각하지 못할 거다.

그러나 그 안에 생생히 살을 묻은 에녹은 알고 있었다. 야한 몸뚱이를 본능적으로 고급 창부처럼 온 몸을 활용했다.

속살은 음란하게 조였다 풀고, 등받이에 올려둔 다리는 언젠가부터 허리를 감아 조였다. 미끄러지고 흘러내려도 다시 기어 올라와 빼낼 때마다 안달하며 제 쪽으로 당겨 댔다.

개화하는 꽃을 기분 좋게 음미하던 내심은 흥분으로 날뛰다가 사납게 폭주했다. 에녹은 한쪽 종아리를 큰 손으로 감싸 어깨에 걸었다. 팔걸이에 짓이겨지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붙들고 있던 이성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흥분으로 날뛰는 허리가 내벽을 다 헐어낼 듯 헤집었다. 대화 없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호흡만이 서로 섞이고, 떨어지고, 뒤엉켰다. 키스는 물어뜯을 듯이 난폭하다가 눈물 나게 다정한 끝을 보였다.

크게 휘어 있는 허리를 더 바싹 올려 안으며 유두 옆을 깨물었다. 이미 그 부근에는 제가 남긴 자줏빛 울혈이 가득했다. 치졸한 독점욕과 정복욕은 검붉게 번들거리는 성기의 빛깔과 닮았다.

군살 없는 가슴은 타액으로 금방 번들거렸다. 불규칙하고도 음탕한 자국은 줄어들 새 없이 늘어만 갔다. 척추를 빠듯하게 조이는 파정의 문턱에서 에녹은 잔뜩 숨을 죽였다.

빠듯하게 물고 있던 구멍에서 재빨리 성기를 잡아 뺐다. 그대로 헐떡이는 입술에 제 것을 물렸다. 고개를 깊이 숙여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렸다. 가파른 호흡은 낭비 없이 서로에게 녹아들었다.

정난우는 괴로운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에녹은 갈급에 등허리를 떨며 무례하게 그 안을 유영했다.

볼 안쪽의 살점을 긁어내 마실 것처럼 비벼댔다. 막 입천장을 쓸어내리고 혀를 휘감으려 했지만 정난우는 턱을 비틀어 올렸다.

곧장 따라가 다시 집요하게 매달렸다. 또 도망치지 못하게 단번에 혀를 빨아 제 입 안으로 끌어왔다. 벌어진 입 안에서는 목구멍에 걸린 신음 이 툭툭 튀어 올랐다.

 “아…흐으…으으……!”

땀 젖은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 때문인지는 알고 있었다. 에녹은 한 숨 열기를 식힌 제 것을 움찔거리는 구멍 안에 다시금 꽉 채워 넣었다.

정난우는 그제야 만족한 듯 뒤틀린 몸에서 힘을 뺐다. 아아아, 새된 음성이 노골적인 만족의 탄성을 흘렸다. 괴롭게 찌푸려졌던 미간도 나긋하게 풀어졌다.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까만 눈동자는 마치 제 성기처럼 검붉게 일렁거렸다.

에녹은 허기진 듯 빨던 혀를 놓아주었다. 망연히 벌어진 입술 밑은 타액으로 질퍽했다. 한 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부푼 유두를 끼우고 혀끝으로 몇 번 찔러 내렸다.

정난우는 소스라치면서도 프리컴을 몇 방울 쏟아냈다. 에녹은 다시 부드럽게 허리를 돌리며 눈매를 좁혔다.

느리게 시작된 움직임은 금세 가속이 불었다. 퍽 꽂히는 강렬한 삽입에 정난우는 감전된 듯이 턱을 젖혔다. 연달아 몇 번 구멍 안의 민감한 곳에 불꽃을 피웠다. 꽉 감싼 내벽이 뱀처럼 꿀렁거리며 흡착해 왔다.

제 몸 안의 정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것처럼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에녹은 이를 한 번 악물며 뿌리까지 삽입했다.

하얀 엉덩이 사이에 까칠한 음모를 비벼대고, 조르는 구멍 안을 살살 달래듯 휘저었다. 활짝 벌어져 낱낱이 드러난 가랑이는 어느 순간부터 박자를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뜨겁게 진탕 된 뇌리로 문득, 정난우가 연기를 못 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스쳤다. 요령 피울 줄 아는 성격이었더라면 의심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누구보다 난잡하게 놀았던 과거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꼬리뼈부터 시작된 극렬한 쾌감은 정수리까지 단번에 꿰뚫었다. 온 몸에서 열기가 절절 끓었다.

 “진짜 치졸한데, 네가 나밖에 몰라서 다행이야.”

에녹은 갈라진 금속처럼 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난우는 당연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오늘도 한없는 무력감과 열띤 충만감에 정신없이 휘둘렸다.

출렁이는 온 몸이 세포 하나까지 녹아내려 소파 가죽에 흘러내리는 건 아닌가 더럭 겁이 났다. 뼈와 관절이 무사한지도 의심이 갔다.

몇 날을 집요하게 침범 당한 항문 안쪽은 오늘도 불기둥이 뜨겁게 들락거렸다. 그 감각이 소름끼치게 생생한 탓에 이것이 현실임을 겨우 자각 할 따름이었다.

그가 무서운 기세로 밀고 올라올 때마다 간간히 마찰되는 고환은 약간 쓰라리고 불타듯 화끈거렸다. 그 위쪽의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을 벌리고 드나드는 횟수가 누적되어 갈수록 정난우는 더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거칠게 몰아쉬는 그의 토막 난 호흡에 얼굴은 자꾸만 델 것 같았다. 데다 못해 살갗이 벗겨질 것 같았다.

애초에 감출 생각조차 없이 날 것으로 내뿜어대던 신음과 낮은 교성은 그의 입술이 간간히 받아마셨다. 타액 맞붙은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엉덩이가 더 높이 들렸다. 수치도 잊고 넓게 벌어진 다리가 결국 탁 풀려 흘러내렸다. 그의 강한 팔이 차곡차곡 오므려 가슴으로 밀어 올렸다. 종아리가 허벅지에 딱 닿은 정도로 굽은 다리는 사타구니가 당길 만큼 벌어졌다.

그의 시선 아래 교접부가 훤히 드러났다. 용광로의 증기처럼 뜨거운 눈이 그 아래를 어지럽게 더듬었다. 냉정을 잃고 헤매는 손은 벌어진 허벅지를 더 벌리고, 발목 하나를 그의 어깨에 다시 걸어두었다.

늘어진 몸이 힘없이 위아래로 덜컥거렸다. 숨차게 밀어붙여지는 힘에 따가운 성대에서 색색 금속 긁는 소리가 흘렀다. 그 바로 위에는 그의 짧게 끊어내는 거친 숨결이 꾹꾹 짓눌러 왔다.

첫 날부터 느꼈지만, 그의 끝없는 체력은 조금 버거웠다. 아무리 쏟아 내도 그는 항상 갈증에 허덕이는 몸짓으로 제 안을 탐했다.

무엇보다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그의 살 냄새가 너무 짙었다. 그래서 머리는 늘 몽롱하게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가 한 손을 깊이 깍지 껴 고정했다. 얼얼하게 꽂혀드는 시선이 피부 위에 따끔하게 박혀 들었다.

활활 어른거리는 눈동자는 많은 말을 열기에 싣고 있었다. 뒤섞이는 체액에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암컷을 독차지한 제왕처럼 오만하고 당당하게 섹스를 주도했다. 거친 야생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수컷만이 영유할 수 있는 특권이라도 가진 듯이 모든 걸 만끽했다.

그가 말했다 비굴해지지 말라고. 그리고 또 스스럼없이 말했다. 침대위에서는 창부처럼 대할 거라고. 너도 날 그렇게 대하라고.

몸을 파는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정난우는 막연히 생각했다. 이 세상 모든 창부가 침대 위에서 이런 행위를 받아내는 거라면, 그들은 제 몸 위에 올라탄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아래로는 음란하고 난잡하게 날뛰지만 교묘한 관찰의 시선은 늘 불처럼 따라다녔다. 좋아하며 울면 그는 더 미친 것처럼 굴었다. 사납고 난폭해지고 야만스러워져도, 그의 껍질 벗은 감정은 고스란히 전신을 짓눌러 왔다.

그러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가 보내는 숭배 섞인 사랑이었다. 그 날 비린내 나는 흥분이 선득하게 등허리를 채찍질해 왔다.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닿고 싶어 안달하는 눈빛 아래 제 몸을 다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힘 빠진 손을 겨우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관자놀이에서 막 흐르던 땀방울이 손가락 사이에 엉겨 흘렀다. 음란하게 맞물린 치부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던 그가 멈칫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애달프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 안에 감기는 피부는 데일 듯이 뜨거웠다. 아름다운 얼굴, 활활 일렁이는 서늘한 눈동자, 새빨갛게 핏줄 올라 연신 할짝거리는 입술, 그 모든 게 가슴 벅차게 사랑스러웠다.

 “왜?”

할 말 있어 보이는 눈빛에 에녹은 허리 짓을 조금 느리게 조절하며 상체를 좀 더 내렸다. 땀 젖은 그의 금발은 더욱 더 짙게 물들었다. 미끈거리는 가슴이 맞닿은 채 슬슬 문질러졌다. 바짝 솟은 유두가 그의 피부에 짓눌려 뭉개졌다.

그는 부드럽게 재촉하듯 입을 맞췄고, 정난우는 잔뜩 흐려진 목소리를 겨우 잡아 빼냈다.

 “내일은…… 우리 나가요.”

에녹의 눈가가 가늘게 좁아들었다.

 “안 돼. 사흘 뒤 또 오전에 서울에 가야 하잖아. 내일 너 여기서 못 나가. 우리 아직 신혼이라고.”

맘에 안 드는 소리에 에녹은 다시금 사납게 허리를 튕겨 올렸다. 사정 봐주지 않고 온 사방을 들쑤셨다.

리듬도 깊이도 일정치 않았다. 다만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쾌감이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정난우는 마구 흔들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용기 내서 꺼낸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제주도예요. 으…”

 “알아. 그게 뭐.”

 “우리나라…저기. 그러니까…….”

정난우는 폭격처럼 쏟아지는 자극에 연신 자지러졌다. 한 마디조차 쉽게 이어붙일 수가 없었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제 것에서 정액이 찔끔찔끔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허니문…여기, 아윽! 아아!”

헐떡이고 흐느끼고 울먹이느라 정난우는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에 꽤 오래 걸렸다. 우리 이제 이렇게 같이 자는 사이니까, 다른 커플들처럼 여행 온 기분으로 섬을 둘러보자고 하는 거였다.

신음 같은 웃음이 짧게 에녹의 목 안을 울렸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애, 고작 섹스 몇 번 한 것 가지고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인 줄 아는 것 같았다.

순진한 건 질색인데 이 기괴한 녀석에게 듣는 소리는 참 예쁘고 듣기 좋았다. 인스턴트 식 사랑에 탐닉해 있던 제 영혼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신혼여행이라, 그거 좋지.

에녹은 극락 같은 구멍 안에 성기를 깊이 묻고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녹아내려 부드럽게 얼렀다.

 “내일까지만 진탕 놀고 모레 나가자. 하루 종일 너 가고 싶은 곳에 다 데려다 줄게. 먹고 싶은 것도 다 사주고, 응?”

 “흐…으응…….”

정난우는 대답도 못하고 허리를 뒤틀며 움직임을 재촉했다. 제가 나가자고 해 놓고 달아오른 몸뚱이는 빨리 박아 달라 안달이었다. 허탈하고 뿌듯하고 자극적, 뭐라 하나로 꼬집을 수 없는 감각이 말초감각을 온통 휘저어 놨다.

에녹은 곧장 절정을 향해 달렸다. 몰아붙이듯 몇 번 삽입 질을 반복하며 잔뜩 굽힌 무릎을 크게 벌렸다. 앗, 하고 정난우의 달아오른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게 휘돌리며 반복해 쳐올렸다.

미끈거리는 액체의 마찰음이 교접한 살덩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입은 자꾸 바짝바짝 말라 연신 혀로 축였다. 정난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절제를 잃고서 목을 울렸다.

하아, 에녹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눈가며 뺨이며 턱이며 샅샅이 핥았다. 혀끝에 닿는 피부 감촉은 축축하고 매끈했다. 짠 눈물을 몇 번이나 훑어내 뜨거운 맛만 느껴질 때 쯤, 단전 아래가 급격한 진탕에 들쑤셔졌다.

에녹은 어금니가 바스러질 듯 이를 한 번 악물었다. 저릿한 전류가 콧등을 뱄다. 한쪽 눈가가 일순 확 좁아들며 경련했다. 조각처럼 깎은 듯한 복근이 일순 크게 울렁거렸다.

강요하듯 얼굴을 쥐고 뺨을 문질렀다. 정난우는 잔뜩 풀어진 눈을 겨우 맞춰 왔다. 번들거리는 얼굴 위로 차가운 조명이 바스러졌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귀두 끝이 가장 깊은 곳을 꿰뚫었다.

흐으, 정난우가 예쁜 신음을 흘리며 파정했다. 세찬 줄기 없이 힘없이 흐르는 액을 꼼꼼히 어루만지며 에녹 역시 꽉 조인 내부에 뜨겁게 정액을 뿌렸다. 진득한 액은 울컥 울컥 몇 번이나 그 안을 채웠다.

완벽하게 오싹한 오르가즘은 길게 머물렀다. 섬광처럼 번득이는 감각은 뇌를 가르고 척추를 쪼겠다.

서서히 줄어드는 중심을 푹 젖은 그곳에 느긋하게 비벼 올렸다. 온 사방에 다 처발라야 깊은 만족의 끝이 왔다.

창문 밖에서 거뭇하게 물결치는 파도가 실내마저 휩쓰는 듯했다. 피부 가죽이 떨어져 나갈 듯이 몰아치는 기분 좋은 후희였다.

에녹은 고개를 기울여 정난우의 벌어진 입술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격렬하게 헐떡이는 호흡이 서로를 옭아맸다.

잘게 떠는 와중에서도 정난우는 착실하게 혀를 포개고 비벼왔다. 설레게 물결치는 맨 가슴이 맞닿은 채 길게 호흡했다.

정난우가 태어난 작은 나라의 아름다운 도시, 제주의 겨울밤은 에녹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노을 번진 바다가 핏빛으로 물결쳤다. 잔뜩 흐린 구름이 수평선 위를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곧 한바탕 비가 쏟아질 듯했다.

풀로 돌아가는 히터 바람을 정화시키기 위해 차창은 조금 내려두었다. 그 틈으로 바닷바람이 이따금씩 쏟아져 들어와 건조한 공기를 끌어안고 도로 빠져나갔다.

툭. 투둑.

예감이 맞았다. 빗방울이 전면유리에 하나 둘 자국을 만들었다. 에녹은 차창을 올리며 히터를 낮췄다.

바싹 눕혀둔 보조석엔 정난우가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늘 위태롭게 창백하던 얼굴에서 건강한 혈색이 비쳤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사랑해 주고 잘 먹이고 운동을 시킨 결과였다.

숨 가쁘게 뛰고 싶었다던 정난우에게 천천히 트레이닝을 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알아보건 말건 정난우가 호텔 피트니스에 갈 때는 항상 따라갔다. 자신이 몸 만들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짜 줬다.

하루 운동의 마무리는 트레드밀 러닝이었다. 정난우는 속도를 조금만 올려도 우왕좌왕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시력을 되찾고 나서도 자기가 조금만 뛸라 치면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고 했다. 조심해야지, 넘어질라, 이런 소리만 계속 듣다 보니까 천천히 걷게 되었다고.

덕분에 정난우는 근력은 좋은데 근지구력이 떨어졌다. 천천히 조절해서 운동량을 늘려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스케줄이 아직 빡빡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4년 뒤 쯤, 뉴욕 마라톤에 함께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마라톤이라는 단어에 정난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걸 제가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저 그렇게 오래 걸어본 적도 없 는데…….」

「네 몸에 장애가 있지 않는 이상 훈련만 잘 하면 돼. 너 끈기 있잖아. 그리고 내가 또 그 옆에 함께 있을 거고. 같이 완주해 보자. 내가 주저앉지 않게 도와줄 테니까.」

그러자 정난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새끼손가락을 꽉 걸던 눈은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신뢰와 애정, 그리고 기대감이 깃든 눈빛이었다.

빙긋 웃어줬지만 속내는 참 복잡했다. 촛불 밝힌 케이크가 다인 초라한 크리스마스파티에도 행복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거다. 반짝이는 작은 추억의 조각들은 이렇게 이따금씩 흉기처럼 날을 세워왔다.

그 별 거 아닌 모든 것들이, 정난우가 가져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아름다운 추억은 제게 아픈 경험이 되기도 하는 거였다.

에녹은 정난우의 잠든 얼굴을 길게 응시했다. 자연스레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에서 비볐다. 염색이나 펌 한 번 안 했을 직모였다. 매끈한 감각을 즐기다가 점퍼를 다시 고쳐 덮어줬다.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꺼내 SNS에 접속해 봤다. 한국 리사이틀 투어 중이라 공연 반응들은 거의 낯선 언어였다. 한태영과 의도치 않은 냉전기를 겪고 있는 탓에 번역을 부탁할 곳이 없었다.

어설프나마 구글 번역을 돌려 봤으나 뭔 소린지 거의 못 알아듣겠다. 눈치로 때려 맞춰보건대 일단 찬사 일색이고 앙코르 곡들이 본 공연과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뭐 이 정도 같았다.

간혹 영어로 단 코멘트들만 정확히 알아들었다. 미국에서도 리사이틀 투어 좀 하자는 둥, 그 좋다는 앙코르곡들 우리도 핥아보자는 둥, 공연도 안 본 것들이 오히려 더 난리였다. 모국 애들보다는 영어권 애들이 더 요란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휴대폰을 꺼낸 김에 에녹은 카메라에 정난우를 담아 보았다. 점퍼에 푹 싸여서 잠든 얼굴은 온순하고 평온해 보였다. 각도를 바꿔 여러 장 찍어보고 있을 때였다.

기절하듯 자고 있던 정난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아무래도 셔터 효과음 때문에 깬 듯했다. 느리게 초점이 돌아오는 눈은 흐리멍덩했다. 묽게 풀어진 검은 동자가 짧게 배회하다가 운전석으로 넘어갔다.

보조석으로 몸을 틀어 앉아 있던 터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에녹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콘솔박스에 아무렇게나 굴렸다. 엄지와 검지로 뺨을 꼬집듯 매만지며 물었다.

 “기껏 신혼여행 구색이나 맞춰주려고 데리고 나왔더니, 너무 잠만 자는 거 아냐?”

 “…아.”

정난우는 맹하니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기울여둔 등받이를 세우자 몸을 덮고 있던 에녹의 점퍼가 허벅지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달아나는 잠기운이 싹 사라질 때까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정난우는 결국 에녹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 설마 드라이브 도중에 잠들어서 지금까지 잔 거예요?”

에녹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기특하다는 듯이 뺨을 매만지는 손길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정난우는 그와 한참 눈을 맞추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향기가 담뿍 묻은 점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정말 차가 달리고 있는데 그렇게 오래 잤어요?”

 “너 잠들고 나서 한 십오 분 더 달리다가 여기에 정차했어. 세운 지는 한 십 분 쯤 된 것 같고.”

시동은 내내 켜 뒀다는 말이었다. 엔진 소리와 미세한 진동에도 깜빡 놀라 소스라치던 게 저였다.

놀라웠다. 악몽조차 꾸지 않았다. 식은땀도 없었다. 따끈하게 데워진 보송보송한 몸이 신기했다.

에녹은 정난우의 턱을 들어올렸다. 투명하게 와 닿는 시선을 담담히 마주보며 말했다.

 “그것 봐. 나만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다고 했잖아.”

방향제 하나 없는 차량 내부엔 에녹의 향기만이 짙었다. 아니, 실제로 는 미약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가 봐요.”

정난우는 멍하게 풀린 눈으로 대꾸했다. 에녹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렸다. 그 아래 서늘한 눈은 뜨끈한 빛을 내뿜었다.

 “나 정말 당신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전면유리로 곧 가느다란 빗줄기가 빼곡하게 메워졌다. 일몰은 순식간에 물러가고 어둠이 그 위를 짓눌렀다. 아득한 곳에서 날아와 잔상만 남기는 불빛들이 으깨진 채로 방울지어 튀어 올랐다.

흐린 조명과 짙은 음영은 에녹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 위에서 야누스처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뜨거움과 냉랭함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파랗게 날 선 안광이 가루처럼 흩날렸다.

 “안 무서워?”

그가 물었다. 목적어도 없는 미완성형 질문에 정난우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뜨거운 눈길을 곧게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정말 아무것도.

에녹은 묘한 표정 변화를 보였다. 그 정체를 파헤쳐보기도 전에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뜨겁게 맞닿고 부드럽게 얽혔다. 활짝 열린 마음처럼 입술도 열렸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깊숙이 혀를 얽었다.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의 혀는 조심스레 점막을 쓸었다. 천천히 혀를 올려 그의 것을 감았다. 가벼운 악수처럼 겹친 살덩이의 느낌은 아늑하고 달콤했다.

젖은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뒤로 물러갔다. 그는 번들거리는 타액을 혀로 느리게 훔쳐냈다. 내려다보는 그의 하늘색 눈동자는 태양을 삼킨 바다처럼 숨 막히는 열기가 일렁거렸다.

 “내 육아 기술이 환상인 건지, 네가 참 적응이 빠른 건지 나도 가끔 헷갈려.”

에녹은 픽 웃으며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두 사람 분의 안전벨트가 달칵 달칵 잠겼다. 익숙하게 포개어 맞물린 손이 기어 위에 안착했다.

 “눈 보러 가자.”

 “…비가 오는데요?”

 “이 정도 날씨면 산자락쯤에서는 눈이 오고 있을 거야.”

에녹은 부드럽게 대답하며 액셀을 밟았다. 능숙하게 차를 빼 도로에 들어섰다. 궂은 날씨에 국도는 텅텅 비었다. 상향등까지 밝힌 차는 거침 없이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난우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길을 알아요? 꼭 여기 사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가네요.”

 “지도 봐 놨어. 내가 헐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나름 준 비성 철저해.”

참 여러모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가 힐긋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미소 한 줌을 훔쳐간 그의 눈은 다시 전방에 고정되었다.

와이퍼가 끊임없이 훑어내지만 전면유리 안에 갇힌 세계는 번진 그림처럼 울렁거렸다. 가로등 불빛들도 엿물처럼 끊임없이 흘렀다.

한참을 달렸을 때였다. 물결치던 전면유리로 미세한 입자의 가루들이 안착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개, 두어 개, 여러 개…….

정말 눈이었다. 헤드라이트의 창백한 불빛에 눈꽃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하늘거리던 그 몸집은 초가 다르게 커져갔다. 와이퍼는 쉼 없이 움직였지만 제 영역을 지키기 요원해 보였다.

함박눈은 섬을 뒤덮을 듯이 쏟아져 내렸다. 에녹은 결국 방향을 틀었다. 이름 모를 목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와이퍼가 닦아내는 부채꼴 모양의 풍경은 온통 새하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녹이 안전벨트를 풀고 돌아앉으며 빤히 시선을 건냈다. 드라이브 내내 단절되어 있던 대화가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정난우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가만히 정리해 둔 생각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번 전국투어 끝나면, 디트로이트에서 협연하고 나흘 여유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게 왜?”

 “우리 그 때 뉴욕에 가요.”

 “뉴욕?”

에녹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살짝 키웠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얽힌 손을 끌어왔다.

 “제 매니지먼트 이사님한테, 우리 사이를 먼저 알려야겠어요.”

눈보다 시린 눈동자에 의미 모를 이채가 스쳤다. 그는 자연스레 흐트러뜨려 놓은 금발을 느긋하게 쓸어 넘겼다.

나른하게 내리뜬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

 “사람들한테 비밀로 하는 건 괜찮지만, 회사는 아니에요.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태영 씨나 율리안에게 질책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만약에 회사에서 반대하면?”

정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런 걸 강요할 수 있는 계약사항은 없어요.”

 “회사 입장에서는 네 이미지에 타격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야. 우리 사이는 영원히 비밀로 묻어질 수 없어. 지금이야 내가 영화 때문에 너를 따라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크랭크업 이후에도 줄곧 붙어 다닌다면 스캔들 터지는 건 시간문제겠지. 게다가 넌 나와 동거인이 될 거니까 더 더욱 숨길 수 없는 문제야. 언제가 됐든 결국 사람들에게 밝혀질 거고, 이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난은 보통 내가 아닌 너를 찾아가겠지. 회사에서 반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다행이네요.”

정난우가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에녹이 눈썹을 희미하게 추켰다. 정난우는 부드럽게 눈가를 허물어 웃었다.

 “자랑은 아닌데요, 저 그런 거 익숙해요. 사람들이 괜히 병균처럼 대하고 껄끄럽게 거리를 두는 그런 거요.”

 “…….”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나 그런 거 잘 견디니까. 만약 나 때문에 당신이 다치고 상처 입는다면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들 거예요.”

말없이 경청하던 에녹이 돌연 어금니를 꽉 사려 물었다. 턱 근육이 하얗게 돋아났다. 그리고 온기 없는 거울 같은 눈으로 쏘아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너 그냥 나 따라다닐래?”

에녹의 짙게 가라앉은 눈은 장난기 하나 없이 차가운 온도로 팔팔 끓었다.

 “나 영화 찍을 때도 따라오고, 나 쉴 때도 따라오고, 방송이건 영화제건 화보 촬영이건, 어디든 너를 데려가고 싶어. 그럼 내가 네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

 “그렇게 공연 안 해도 된다며. 바이올린만 연주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내가 미국 전역에 네 이름 건 교습소라도 차려 줄까? 네가 내킬 때 강의도 나가고, 네 생활 충분히 여유롭게 가지면서 바이올린도 마음껏 연주할 수도 있게 해 줄게.”

 “…날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진지하게 제 열망을 늘어놓던 에녹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화를 냈는데도 정난우는 주눅 들지 않았다. 검은 동자가 거의 다 파묻힐 만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에녹은 사납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젠장, 낮게 욕설을 삼키며 사선으로 시선을 흘렸다.

정난우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손 안의 보드라운 피부가 짧은 경련을 전해 왔다. 접촉 부위의 눈가에도 그 떨림은 잠시간 머무르다 허상처럼 흩어졌다.

어루만지는 손짓은 점차 농밀해져갔다. 애틋하고 부드러운 채근에 결국 다시 눈이 맞았다. 돌아온 눈빛은 아팠다. 그의 눈빛이 아파서 저도 아팠다. 정난우는 차분하게 말했다.

 “에녹.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을 받고 살았어요. 미친 여자의 아들, 맹인 꼬마, 그렇게 십오 년을 넘게요. 내가 숨 가쁘게 축적해 놓은 솔리스트의 커리어보다 그 이력이 더 긴 거예요.”

 “…….”

 “이해돼요? 차별의 시선을 견디는 것에서조차 제가 프로라는 거.”

그의 미간이 구겨지고 시원하게 트인 눈시울이 일그러졌다.

와이퍼 멈춘 전면유리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갔다. 온 사방이 하얀 벽이었다. 인적 없는 설원에 덩그러니 둘만 남은 듯했다.

정난우는 망설이다가 그의 입술에 제 것을 천천히 포겠다. 타액이 섞이지 않는 감미로운 베이비키스였다. 에녹의 숨결은 젖은 채로 짧고 격렬한 파도를 탔다.

스치듯 지나간 입맞춤 끝에서 정난우는 에녹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동안 날 아껴준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면서까지 비겁하게 도망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혼자서는 못 하는 거, 에녹에게 기대서 한 번 해보려고요.”

그의 숨결이 귓가에서 토막토막 끊어졌다.

 “용기, 주세요. 넘어지면 또 일으켜 줄 거잖아요. 당신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정말로…….”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꽉 마주 안아 줬을 뿐이었다. 정난우가 운전석 차창 너머를 부드럽게 내다보며 속삭였다.

 “뉴욕에 가요, 우리. 그 옛날처럼, 제 손 잡아주세요.”

*

디트로이트에서의 협연 공연 당일, 루스가 캐리어 두 개를 끌고서 일행에 합류했다. 그는 리사이틀을 관람하지 못한 걸 매우 아쉬워했지만 워낙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도리가 없었다. 이번 짧은 취재 기간에도 아마 공연을 보는 시간 빼고는 내내 일에 매달릴 거였다.

정난우의 카덴차는 늘 인상적이었다. 달처럼 서늘하던 정난우의 주변 공기가 태양조차 삼킬 것처럼 음산하게 불타올랐다. 관객들은 물론 오케스트라의 숨소리조차 교살시킬 정도였다.

『Tchaikovsky, Violin Concerto D major Op. 35』

바이올린 선율은 울음소리를 닮았다. 현의 떨림은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구걸하는 작은 소녀가 바람에 실려 보내는 목소리와 참으로 흡사했다.

천재는 수두룩했고 화려한 테크닉을 뽐내는 이도 발에 차일 만큼 많았다. 그러나 분명 정난우는 그 안에서 독보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루스는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이제야 점차 깨달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화려하게 날고 있으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가졌다. 눈부신 비상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할 뿐이었다. 그 거대하고 짙은 그림자는 만물의 색을 퇴색시킬 듯이 대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끔, 루스는 정난우의 장조 비브라토에서 극치를 후벼 파는 단조를 느끼곤 했다. 정점을 솟구쳤다가 순식간에 땅 끝의 극점까지 처박히는 거다. 그 무거운 투신은 일순 신경을 마비케 할 만큼 강렬했다.

있을 수 없는 해석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순간순간 느껴왔던 그 짧은 직관은, 끈질기게 정난우를 폄하하는 일부 평론가들의 비난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그들은 종종 말했다.

중간이 없다. 파괴와 고통만이 있다. 충격적인 새드엔딩의 영화 후유증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껏 자신은 정난우의 희망의 탈을 뒤집어쓴 절망마저 열렬히 사모해 왔다. 넋 나간 듯 홀려 전율을 느끼곤 했다.

그런 스스로가, 처음으로 역겨웠다. 수개월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애곡의 실체를 움켜쥔 탓이었다.

비명처럼 뻗어나가는 통한, 그 울음이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

정난우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3악장은 정열을 가장한 죽음의 노래였다. 천사의 얼굴을 한 요녀가 하이소프라노로 성대를 울리며 손짓했다.

아아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그녀의 고음은 숱한 칼날처럼 허공을 찢었다. 모든 것을 분쇄하고 바스러뜨릴 것이다. 유혹으로 끌어들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거였다.

일반적으로 절망과 희망을 함께 보여주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마치 그 의미를 잃은 듯했다. 정난우가 말하는 희망은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 잔인한 매혹에 오케스트라가 반란하듯 일어났다. 정난우의 활이 그 순간 현을 떠났다.

그 잠깐의 공백은 풀숲 뒤에 잔뜩 도사리고 기회를 엿보는 맹수와도 같았다. 습격의 때만 기다리는 날카로운 주시는 정난우의 눈동자 위에서 선명히 타올랐다. 이윽고 날카로운 선율이 그 반란을 짓밟고 튀어 올랐다.

물처럼 흐르는 왼손이 현 위를 유연하고 빠르고 짚어갔다. 협주가 아닌 싸움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잘못된 해석이란 있을 수 없었지만 기괴한 건 분명했다.

맹수와 사냥감이 번갈아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사납게 내뿜는 선율이 격정적으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피의 투쟁이었다. 승리한 맹수가 환희로 몸을 떨었다. 황량하게 젖은 대지를 무참히 밟고 석양을 향해 뛰어갔다.

그것이 정난우의 희망이었다. 모든 걸 다 씹어 삼키고 단 하나도 토해내지 못한 채 다음 결전의 무대를 방황하는 거다.

어린 정난우는 고통에 쫓길 때마다 좁은 피아노의자로 피난을 갔다고 했다. 어머니가 연주하던 그 자리에서 건반을 누르고 홀로 음악을 익혔다. 그 도피처가 지금은 저 넓은 무대 위로 바뀐 것뿐이었다.

그게, 정난우의 바이올린이었다.

모두가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했다. 에녹과 루스만이 자리를 떨치지 못했다.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이었다.

관객들의 환호는 폭죽이 아니라 포탄이었다.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비린내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스스로가 폐허가 되었다는 걸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는 팔걸이를 부술 듯이 쥐고 있었다. 저항하듯 가느다란 떨림이 하얗게 튀어나온 관절 위에서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전율이 이제는 선명하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거였다. 제가 이제껏 사모해 왔던 예술가는 너무 아프다. 그 아픔이 너무 깊고 어두워 빛이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씨발…… 이거 뭐야.”

에녹은 이를 갈며 욕설을 씹어뱉었다. 단 한 번 완전히 열린 빗장의 충격의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문턱을 채 밟아보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그 파괴 속에 끌려들어갔다.

그 안에는 소리 내어 울지 않던 어린 정난우가 피에 젖어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제 상처를 핥는 버려진 짐승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번득이는 칼날이 제 모든 것을 부셨다. 육신도 혼도 갈가리 찢겼다. 절절한 고통이 으스러진 뼈마디마다 사무쳐 왔다.

멸망한 세계에서 에녹은 울부짖었다. 그 붕괴 속에서 에녹을 가장 슬프게 했던 건, 도망치는 길조차 찾을 수 없어 애초에 포기와 인내부터 배웠던, 맹인 정난우의 죽은 눈동자였다.

루스는 테이블 위에 씬 카드와 완성된 초고를 늘어놓고 대사와 내레이션을 완성하는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무테안경에 언뜻언뜻 스치는 노트북의 불빛은 날 선 집중력처럼 차가운 온도로 번득였다.

초고가 완성된 이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에녹 밀리건의 차기작에 관한 내용들이 공개되었다. 조직적인 홍보가 서막을 올린 거였다.

기자들도 대중들도 루스 커넬과 에녹 밀리건의 조합을 대부분 의아해 했다. 둘이 추구하는 영화의 성향이 극명하게 갈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스는 지겹게도 같은 질문을 들어야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 씨의 실제 일화들이 근간이 된다고 하셨는데, 에녹 밀리건이 주인공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그게 가능하겠냐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배역이 요구하는 능력들을 담기에 에녹의 그릇이 좀 작지 않느냐는 뜻일 거다. 그에 대한 루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에녹은 드러난 것보다 계발되어질 게 많은 좋은 배우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여러분 모두가 그걸 느끼게 될 겁니다.」

그게 공수표가 되지 않을 확률은 딱 5.”5였다. 그 텅 빈 절반은 에녹이 정난우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느냐에 달렸다.

에녹은 정난우가 거쳐 온 숱한 절망의 문턱들에 서게 될 거다.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주저앉는다.

차갑고 불친절한 세상을 등진 메마른 얼굴을 하고서 가슴 속으로 뜨겁게 울어줄 수 있다면…….

루스는 에녹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안겨줄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굉장히 강렬한 촉이 움직인 거였다.

단순한 시놉시스를 세세한 플롯으로 변환하기 전, 머릿속으로 수많은 스틸 컷들을 먼저 떠올려 스케치를 남겨두는 건 루스의 방식이었다. 모든

플롯의 살들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상상 속에서 스틸 컷을 영상으로 풀고, 그것들을 엮으며 플롯을 완성하는 거였다.

애초에 이번 영화는 에녹을 배역으로 찍어 뒀기에 장면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배우의 표정, 대사, 동선, 심지어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까지, 루스가 에녹에게 바라는 한계치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에녹이 만약 자신의 상상 속 그림을 완벽히 소화해내 주기만 한다면.

루스는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신했다. 그런 기적이 벌어진다면, 그 이듬해 열릴 영화제들은 에녹의 독무대가 될 거다.

일단, 저 상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반드시…….

루스는 씬 카드 중 한 장을 집어 든 채 한없이 정지해 있었다. 고요한 시선은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에녹을 좇았다.

질리지도 않고 정난우와 한 세트로 목격되었던 이유를, 사람들은 보도가 나가고 나서야 이해했다. 에녹의 팬들은 크랭크인도 한참 남은 배역을 일찌감치 분석에 들어간 열정을 칭송하기 바빴지만, 루스 자신은 더 정확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배역이 정해지기 전부터 에녹은 저렇게 정난우를 졸졸 따라다녔다. 환심 사고 싶어 안달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영혼 밑바닥 한 방울까지 짜내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루스는 안경을 벗어 손끝에 걸고선 입을 열었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에녹은 차가운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루스를 마주보았다.

 “뭐. 주연배우가 시나리오 보는 거 처음 봐?”

 “난우 씨 불편하게 자세가 그게 뭐냐고.”

 “내 자세가 뭐가 어때서.”

두 사람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엉켜 있었다. 정난우는 둘둘 말아 깔아 둔 이불에 엎드려 시나리오를 보고, 에녹은 그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중 이었다. 그뿐 아니라 팔을 세워 머리를 괸 에녹은 정난우의 온 몸을 거의 그러안다시피 했다.

포즈 한 번 묘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구도였다.

루스는 눈시울을 가늘게 좁혔다.

 “난우 씨, 거추장스러우면 발로 차 버려도 됩니다. 오냐오냐 해 주면 정도를 모르는 녀석이라.”

 “아니에요. 같이 봐야죠. 에녹은 주연배우잖아요.”

정난우는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본인이 그렇다니 더 할 말은 없었다. 루스는 안경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피로가 응어리진 콧대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다른 손으로 머그잔을 잡았다가 식어버린 온도에 혀를 찼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하다가 입 안이 텁텁해서 그 생각은 접어 뒀다.

 “난우 씨. 저 밖에 다녀올 건데 간식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아, 딱히…….”

 “얘 간식은 달달한 것도 좀 먹어. 케이크, 아이스크림. 이런 거.”

괜찮다고 사양하려던 정난우 대신 에녹이 대답했다.

 “아이스크림 살 거면 초콜릿 없이 큰 통에 들어서 스푼으로 퍼 먹는 걸로 집어오면 돼. 케이크는 과일 올린 생크림케이크 잘 먹더라. 발레 빌은 내 점퍼 주머니에 있으니까 알아서 가져가.”

덧붙이는 내내 에녹은 루스에게 시선 한 자락 내주지 않았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그는 정난우의 머리카락 끝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적거리기 바빴다. 어딜 봐도 저건 시나리오가 아닌 정난우를 보고 있는 거였다.

루스는 잠시간 에녹을 빤히 쳐다보다가 발레 빌을 챙겨 객실을 나섰다. 로비에서 주차된 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뭔가 계속 애매하게 갉작거리는 이 기분에 대해 파헤쳐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정난우는 에녹과 스스럼없이 눈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루스는 일생 최대의 놀라움을 경험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지는 고작 몇 달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에녹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선 끈끈한 신뢰가 보였다.

둘은 확연하게 친밀한 분위기를 홀렸다. 에녹은 원래 친한 사람들과는 스킨십이 잦아 갖은 오해를 양산해 내는 놈이었지만, 정난우가 그걸 꽤 자연스레 받아들인다는 게 신기했다.

온갖 단서들이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그게 자꾸만 이상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갔다. ‘설마’ 하면서도 ‘어쩌면’ 하고 애매해지는 거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차를 몰아 편의점 앞에 세웠을 때 결국 속 알맹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 정난우랑 열애 중. 사람들 눈치 많이 보는 녀석이니까 티내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해. 눈치껏 자리도 좀 비켜주고. 밤엔 얼씬도 하지 말고.』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보며 10여 분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사실 머릿속은 온통 순결한 하얀 색이었다. 

손아귀에서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삐걱삐걱 관절을 움직여 확인을 눌렀다. 이번에도 에녹이었다.

『아직 돌아오는 길 아니면 과일 좀 사 와. 먹고 싶대.』

…아주 지랄을.

패닉에서 벗어나 가장 처음 떠올린 게 욕설이라 조금 찝찝했다. 짧게 한숨을 쏟아낸 그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핸들을 돌렸다. 과일이라면 편의점이 아니라 마트를 찾아야 했다.

일단 먹고 싶다는 건 사다 먹이고, 에녹은 따로 좀 조져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냉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트에서 착실히 과일들을 쓸어 담았다. 케이크는 호텔 베이커리에 주문하면 되니 기타 간식들만 더 담았다. 한가득 채워진 봉투 두 개를 들고 객실 앞에서 벨을 눌렀다. 한참을 지나도 반응이 없어 호수를 확인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서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에녹이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급히 채운 듯한 셔츠단추가 돌부리처럼 시선을 걸고 넘어졌다. 에녹은 봉투를 받아 들며 낮게 잠긴 목소리로 뻔뻔하게 말했다.

 “아, 정말 타이밍 하고는.”

먼저 등 돌려 걸어가는 에녹을 수 초간 노려보던 루스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에녹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엄청난 타격음 뒤로 에녹의 숨죽인 신음이 겉돌았다. 봉투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너 이 새끼 나 좀 따라와.”

루스가 그대로 에녹의 뒷덜미를 잡아채 밖으로 끌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밖의 소란에 깜짝 놀란 정난우가 뛰어나왔다.

역시나 흐트러진 차림이었다.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불긋한 자국이 언뜻 보여 루스는 기가 막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바닥을 헤매는 눈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이 녀석이랑 볼일이 좀 있어서요.”

 “비명소리가…….”

참 귀신같이도 알아들었다. 에녹이 셔츠 칼라를 쥔 루스의 손을 악력으로 뜯어냈다. 그리고 힐금 뒤돌아보며 ‘잠깐만.’ 했다. 맞은 데에 대한 울분은 없어 보였다. 제가 왜 맞았는지는 아는 눈치였다.

루스는 팔짱을 끼며 짧게 눈짓만 해 보였다. 에녹이 정난우에게 다가가더니 자연스럽게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정난우는 흠칫 놀라 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에녹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턱을 딱 고정해 들어올렸다. 까맣게 올려다보는 눈을 가만히 굽어보며 말했다.

 “나 루스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아무 걱정 말고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고 있어. 알겠지?”

정난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나서 루스에게 다가갔다.

 “하여간 커넬 씨 집안 성질 한 번 불같다니까.”

에녹은 피식 웃으며 먼저 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루스는 잠자코 그 뒤를 따라갔다. 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복도는 적막이 깔렸다. 잠시 동안 숨소리만 주고받던 루스가 짧게 말했다.

 “맞고 설명할래. 설명하고 맞을래?”

 “충실하게 설명하고 면죄부 좀 받을 생각인데.”

난감한 듯 웃으며 대답하자 루스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터졌다.

 “네가 지금 이 따위 짓을 해 놓고도一”

그러나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멀리서 둔탁한 구듯발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곧이어 젊은 남녀 한 쌍이 복도 귀퉁이에 나타났다가. 그들은 길을 막고 있는 두 남자의 흉흉한 기류에 움찔 놀라 걸음을 멈췄다.

대치 아닌 대치 상태였다. 에녹은 그들의 시선이 어지러이 떠돌다 제 얼굴에 꽂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얼굴을 안 가렸다.

 “따라와.”

루스가 턱짓하며 말했다. 에녹은 토끼 눈으로 절 보고 있는 낯선 이들에게 ‘실례했습니다.’ 하며 지나쳤다.

루스의 객실에서 두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난 네가 적어도 분별은 있는 놈인 줄 알았다.”

루스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운을 뗐다. 싸늘한 비난이 노골적으로 깃든 어투였다.

 “넌 건드려도 될 사람, 안 될 사람 구분도 못 해?”

 “말 심하네. 누가 들으면 내가 몇 번 먹고 버릴 속셈인 줄 알겠어.”

에녹은 굽힌 허리 뒤로 두 팔을 짚으며 대꾸했다. 불쾌한 속내가 언뜻 차가운 눈동자 위를 긁어냈다. 루스는 비웃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진지하게 사랑 중이시다?”

 “그 진지하다 못해 숭고한 사랑에 애타게 목을 매고 있지.”

 “그 숭고한 사랑이 몇 번째인지는 세고 있냐? 늘 그렇게 말해 놓고 금방 끝나 버렸지. 이번엔 몇 주나 갈 것 같은데?”

이래서 전과란 무서운 거였다. 특히나 루스는 그 전과를 비교적 낱낱이, 날 것의 상태로 알고 있는 자였다. 에녹은 떳떳함에도 떳떳하지 못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담백하게 사실만 전하기로 했다.

 “쟤가 내 애를 배는 순간까지 갈 것 같아.”

 “뭐, 이런 미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콘돔 없이 아무리 싸도 쟤가 평생 내 애는 못 낳는다고. 더 솔직하게 밀체 줘? 나 이번 영화 끝나면 쟤랑 같이 살 거야. 정식으로 내 집 명의에 올릴 거고 , 쟤가 허락해 주면 결혼도 할 거라고.”

루스의 미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에녹은 열은 한숨을 흘리며 엄지를 툭 세워보였다.

 “캘리포니아 짱.”

충격이 너무 강해 씹 소리도 못했다. 에녹의 입에서 결혼 얘기를 듣는 날은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이건 세기말의 징조였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는 많고 연애하고 싶은 여자도 많다며 유쾌하게 웃던 머저리가 지금 눈앞에서 순정한 탈을 쓰고 있는 거였다.

 “너 화려한 여자가 취향이었잖아. 이목구비 큼직하고 가슴도 골반 큰 여자들. 그런데 난우 씨는一.”

 “몰라. 걔는 뭔가 설명이 안 돼. 그냥 욕 나오게 예뻐.”

에녹은 희미하게 볼을 붉히며 턱을 젖혀 올렸다. 루스는 이제 숨마저 멈췄다. 그 사이 에녹은 천장 조명을 멍하니 응시하다 픽 웃었다.

 “아, 너무 예뻐서 돌겠다고. 가끔 내 집구석에 박아 놓고 나만 보고 싶을 만큼.”

 “…….”

 “얼른 걸음마 떼 주고 사람들 사이를 걷게 해야 되는데,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유혹이 너무 크다. 나 같은 놈이 채 가겠다고 덤비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그냥 막 아무데서나 물고 빨고 핥고 싶은一.”

 “그쯤에서 닥쳐라. 좋은 말로 할 때.”

루스는 살벌하게 말을 잘랐다. 그는 닭살 돋는 팔을 부르르 떨었다. 에녹은 눈만 한껏 내리뜨며 눈썹을 꺾었다.

 “설명하라며. 닥치면서 어떻게 설명을 해?”

 “누가 그 따위 개소리 지껄이래.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사람 왜 들쑤셔 놨냐는 거지. 사랑? 쇼하고 있네. 탐욕이고 충동이겠지. 늘 그랬듯이.”

에녹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 좋은 사람이 아마추어처럼 왜 이리 설레발이야. 지켜보라고, 하루고 이틀이고. 내가 그 녀석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견적 뽑잖아. 그거 루스 커넬 특기 아니었어?”

 “…….”

 “지금 득달같이 나 범죄자 취급하는 거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다행이다 하는 거야. 그래도 쟤한테 가서 지랄하는 것보다 내가 낫지.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네 싶다고. 할리우드 날아다니던 바람둥이가 이젠 남자에까지 손 뻗는다고.”

미쳤다. 얘가 단단히 돌았다. 루스는 그냥 그 생각만 내리 계속했다. 그리고 에녹은 그 미친 소리를 더 이어갔다.

 “말하고 보니까 이거 은근 스토리 좋네? 에녹 밀리건이 호기심에 남자한테 빠지고, 열렬히 탐닉하다가, 식을 때가 됐는데 계속 안 식는 게 내가 나중에 쟤한테 목매고 죽네 사네 하면 우리 난우 스타 되려나? 세기의 바람둥이한테 고삐채운 위대한 예술가로.”

루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콱콱 지압했다. 뭔가 평소의 에녹이랑은 달라서 쉽게 두드려 패지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고 보기엔 에녹이 영 못 미더웠다. 적어도 연애 문제에서만큼은 그랬다.

이제껏 제가 목격한 것만 해도 수두룩했다. 헤어진 뒤의 상처는 모두 상대방의 몫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정난우가 연애하다 질려 시원하게 에녹을 차 버리면 저 철부지도 정신이 좀 들까 방조라도 하겠지만, 그의 성격 상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만약 스캔들이라도 터지게 되면, 영화는…….

루스는 무심결에 흘러간 생각의 끝에서 자조했다. 이래서 예술 한다는 놈들이 자괴감을 많이 느끼는 거구나 싶었다. 정난우가 한없이 걱정되면서도 차가운 머리는 차기작 우려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스캔들은 최대한 미뤄 볼 생각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지.”

루스의 뇌를 스캔한 마냥 에녹이 적절한 대화의 물꼬를 가져왔다. 루스는 광휘 번득이는 눈으로 에녹을 노려보았다. 이 쓸데없는 고민은 모두 다 네 놈 탓이라고 노골적으로 쏘아 보내는 거였다.

 “그런데 스캔들이 나도 흥행에 도움이 되면 됐지,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내 공략 대상은 팔 할 이상이 여자관객들인데 여자들은 의외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쓴다고. 게다가 벗길 거라며. 이렇게 잘난 남자가 게이가 됐다는데, 전 세계의 핍박받는 게이들이 날 보고 싶어 하지 않겠어?”

 “정난우 씨 걱정은 안 되고?”

루스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에녹의 고개가 그제야 제 자리로 돌아왔다.

시원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어둡게 풀어졌다.

 “당연히 걱정돼 미치겠어. 누가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데 아무 말 못하고 고개 숙이고 있을 거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져. 그래서 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 다 때려치우고 나랑 살자고 했다고. 그랬더니 걔가 뭐라는 줄 알아?”

눈발이 휘날렸다. 온 세상을 하얗게 탈색시킨 눈의 벽, 그 안에서 서로만 바라보던 그 순간. 담담한 표정, 차분한 목소리, 생각보다 굳건했던 검은 눈동자, 그리고 울화 치미는 고백.

 “차별을 견디는 것에서도 자기는 프로래.”

정난우는 견디는 방법밖에 몰랐다. 저항해 싸우거나 교묘하게 회피하는 방법도 모르는 거였다. 그 순간에는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화를 내고 싶었다.

혼자 견뎌야 했을 그 때 나를 찾아왔어야지. 나를 만났어야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싶었다. 제가 있어주지 못했던 시간들 속에서 차갑게 곪아갔을 정난우가, 너무 안타깝고 가여워서 대신 울어주고 싶었다.

열일곱의 제가 그렇게 도망치지 않고 한 번 문병이라도 가 봤다면, 그런 후회를 자꾸만 곱씹게 되는 거다. 그랬다면 분명 반했을 텐데, 지금처럼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아파할 틈도 주지 않았을 텐데.

결국 모두 다 개소리.

 “염병할. 차라리 그냥 보호해 달라고 안겨 오면 내가 충분히 그렇게 해 줄 거잖아. 그런 데에선 왜 그렇게 쓸데없이 자립심이 강하나 몰라. 사람 맘 아프게.”

그 담담한 고백의 순간은 루스의 눈앞에도 그려졌다. 나 그런 거 견딜 수 있어요, 이제껏 그래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했을 거다. 제가 해체하듯 분석했던 정난우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다. 정적 속에서 루스는 아주 길게 고민에 잠겼다.

다음 날, 디트로이트에서의 협연 일정이 끝나고 루스가 가볍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내일 스케줄은 어차피 이동밖에 없었다. 그것도 공연을 위해서가 아닌 뉴욕 행이었다. 정난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시나리오는 어때요. 어디 거북하다거나, 좀 불편하다거나, 그런 부분은 없었어요?”

일상적인 대화 이후, 루스는 자연스레 화두를 던졌다. 최대한 편안하게 대하고 싶은데 그게 맘처럼 잘 안 됐다. 자꾸 에녹이 눈앞에서 깔짝깔짝 거슬리게 하는 탓이었다.

에녹은 어미 새처럼 정난우의 입에 계속 안주를 물어다주기 바빴다. 괜찮은데요, 정난우가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한 번에 여러 개를 입 안에 넣고 뺨이 볼록 튀어나오면 그 정중앙을 쿡 찌르며 기분 좋은 듯이 웃기도 했다. 가늘게 흰 그 눈에는 열렬한 애정이 충만했다.

진짜 역겨워서 못 봐주겠다. 외면하고 싶은데 마주앉아 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루스는 결국 정난우만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없었어요. 어차피 제 얘기 갖다 쓰신 건 인터뷰에서 다 밝혔던 제 옛날 일뿐이고. 그냥 그대로 하셔도…….”

루스는 차분하게 빈 잔들을 채웠다. 더블 잔에 가득 찬 코냑은 초콜릿처럼 진한 향기를 흘렸다. 얼음 채운 온더락 글라스에 반쯤 덜어내며 입을 열었다.

 “난우 씨. 에녹이 아역배우로 데뷔한 계기가 뭔지 아십니까?”

 “…아뇨. 뭔데요?”

 “에녹은 원래 아기 때부터 아역배우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껍데기는 최상품이라 감독이고 프로듀서고 틈만 나면 집에 찾아 와 난리였죠. 하지만 어머님의 단호한 반대로 내내 성사가 안 됐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에녹의 집에 놀러 가면 항상 신기했다. 다른 엄마들은 자기 아이 배우 만들겠다고 바리바리 싸 들고 돌아다니기 바쁜데, 에녹의 어머니는 늘 콧대 높게 거절했다.

 “그런데 그 영화 캐스팅 직전에 에녹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나요?”

 “심리요법 같은 겁니다. 에녹이 맡았던 배역의 상황이 에녹의 실제 상황이랑 상당히 흡사한 면이 있었거든요. 사이코드라마 알아요?”

 “알아요.”

 “뭐, 완벽하진 않지만 그 비슷한 효과를 바라셨던 겁니다.”

정난우는 느리지만 착실히 이해했다. 촬영하면서 실제로 롤플레잉이 가능하고, 필름에 담긴 걸 타인이 되어 다시 본다.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어요. 어린 에녹은 정말 아픔을 다 덜어냈고, 그리고 다시 활기차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난우는 오래 전 이야기에도 크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에녹의 닭살 짓거리를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 늑골 아래 찰랑거렸다. 요령이 없어 진심을 감추지 못하니, 그 투명한 속내는 늘 빤히 읽혔다.

루스는 잔을 내리며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그 비슷한 효과가 이번 영화에서 난우 씨에게 돌아갔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 같군요.”

 “……네?”

정난우는 조금 당황한 듯 눈시울을 키웠다. 에녹이 피스타치오 한 알을 매섭게 던지며 사나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루스는 제 목에 맞고 테이블 위로 낙하한 피스타치오를 주워 제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닥치고 있으라는 듯이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의혹에 젖은 에녹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루스는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난우 씨. 몇 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신경정신과를 들렀죠. 의사 앞에서 수도 없이 이야기했을 겁니다. 과거의 이야기, 힘들었던 순간들. 그래서 달라졌습니까?”

정난우는 눈만 깜빡이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초점 흐린 시선은 늘 그랬듯 낮게 포복하듯 움직였다.

 “사람들은 정석대로 말해요. 속에 곪은 걸 밖으로 털어내라고. 의사도 그랬을 겁니다. 주위 사람들도 그랬겠죠.”

 “…….”

 “그런데 달라진 게 없을 거예요. 의사는 긴 시간을 그 분야에서 공부하고 논문도 쓰고, 또 여러 케이스들을 겪으며 전문지식을 쌓은 베테랑입니다. 정난우 씨가 바이올린에 통달한 것처럼 그들도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그 전문가가 하라는 대로 하는데도 왜 나는 달라지는 게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어요?”

어쩐지 머리가 텅 비었다. 그의 말들이 다 맞았기에 정난우는 아무 말도 못했다. 꾸지람 듣는 학생처럼 일말의 불안감이나 자괴감이 침묵에 녹아들었다.

에녹의 손이 다가와 무릎 위에 얹어졌다. 정난우는 축축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깊은 우수가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위에서 반짝거렸다. 괜찮아, 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는 용기를 주듯이 무릎을 도닥였다. 정난우는 루스의 잔으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없…없었어요.”

 “네. 알아요. 그랬을 겁니다. 아마 그 괴로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만 하염없이 하다 병원을 나왔겠죠.”

일순 가슴이 뜨끔했다. 루스의 예리한 통찰력이 칼끝처럼 찔러오는 거였다.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정난우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작은 목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냥, 뭐랄까…… 저는 그 상담이라는 것 자체가 계속 불편했어요. 처음에는 말하는 것만도 괴롭다가, 나중에는 먹은 게 체할 만큼 거북해지기도 하더라고요. 병원 특유의 분위기나 의사 선생님의 흰 가운, 그 사무적인 말투라든지, 그런 것만 봐도 파헤쳐지는 느낌이 든달까…… 부속품 점검 당하는 기계가 된 기분도 들고요.”

 “그래도 난우 씨라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는 했을 거 아닙니까?”

 “네. 다 했어요. 괴로워도 참고 묻는 말엔 다 대답하고…… 음악 말고 다른 취미도 가져봐라 해서 책도 읽어 보고, 외국어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운동도 더 오래하고요.”

 “그럼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할 차례네요. 일단 하라는 건 다 했는데, 왜 아무것도 안 달라졌을까요?”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그 정답을 알려 줄까요?”

루스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고 나서 잔을 테이블에 두었다. 그리고 꼰 다리 위에 빈손을 얹으며 판결을 내렸다.

 “난우 씨는 애초에 극복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되새김질 하듯 천천히 말뜻을 곱씹어가던 정난우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명쾌하고 직선적인 만큼 통렬히 정곡을 찔린 거였다.

 “사이코드라마건 정신상담이건 심리치료건, 결국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스스로가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임할 때 모든 치료가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는 거고요. 공부를 끔찍해 하는 학생을 데려다가 책상에만 앉혀 놓는 게 해결책은 아니라는 겁니다.”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루스는 정난우가 좀 더 제 위치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정난우를 아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루스는 한 인간의 모든 천성과 사고방식, 행동양식까지 만 8세 이하에 굳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기준에서 봤을 때, 태어날 때부터 지속적인 정신적 학대를 겪은 사람치고 정난우는 꽤 잘 버틴 축에 속했다.

에녹이 그 곁에서 열렬한 사랑으로 감싸주는 역할이라면, 자신처럼 냉 정하고 차가운 인간이 해 줄 몫은 따로 있는 거였다.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제 성미와는 전혀 안 맞음에도, 해 주고 싶었다.

 “제가 사람을 잘 못 보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런데 난우씨는 이상하게 계속 헷갈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난우 씨가 보통사람들과 비교해서 유별날 정도로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난우 씨는 꼭 겁이 많은 사람처럼 행동을 한단 말이죠.”

에녹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으로 루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거였다. 되짚어 보면 저도 가끔 그런 직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학대당한 어린애가 거듭해서 동네 아이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했다. 부들부들 떨어대지만 결국 참고 기다려주면 느리게나마 꼭 따라와 줬다. 뭐 그런 것들만 봐도 ‘정난우 겁쟁이 설’은 순 영터리였다.

정난우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느리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뇨……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저 겁 많은 거 맞는 것 같은데요. 낯선 사람들도 무서워하고.”

 “그러니깐 이게 묘하다는 거예요.”

루스의 손 안에서 잔이 느리게 돌았다. 액체 안에 잠긴 얼음이 부대끼는 소리가 둔하게 울렸다. 그의 눈에 짙은 이채가 머물다 사라졌다.

 “병적일 정도로 타인을 피하고 어둠 속으로 숨는 게 우리 정난우 씨인데, 가만히 보면 빈틈이 너무 많거든.”

 “빈틈, 이요?”

 “그래요. 겁이 많은 사람치고는 경계가 너무 허술하다는 겁니다. 타인을 두려워하는  강박이라면 의당 그에 필요한 의심과 불신이 뒤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난우 씨는 사람을 대하는 게 너무 깨끗해요. 심하다 싶을 만큼 빤히 들여다보이고, 치장도 안 한 속내를 내보이는 것에 너무 자연스럽죠. 미안한 말이지만 구슬리고 사기 치기 딱 좋은 타입이에요. 이건 완전한 모순이거든요, 내가 봤을 때.”

겁쟁이. 의심. 불신. 모순.

정난우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가 내뱉은 단어들이 어둡고 축축한 밑바닥을 갈고리처럼 긁고 휘져었다. 퀴퀴한 불순물들이 잔뜩 헤집어져 그 위를 부유했다. 벌어진 상흔에서 붉은 피가 스몄다. 약간의 울렁거림을 동반한 현기증이 뒷골을 흔들었다.

루스가 말을 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난우 씨에 대해서 분석을 해야만 했어요. 인터뷰 자료, 제가 봐온 난우 씨의 언행들, 그런 걸 토대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죠. 그래서 저는 내내 난우 씨가 되어야 했고, 난우 씨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루스는 또 한차례 짧은 침묵을 끌어왔다. 아랫입술을 잇새로 말아 혀 끝으로 몇 번 쓸어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우 씨가 사람들을 피하는 건, 그 상대가 문제라기보다는 정작 스스로를 못 믿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어지럽게 맴돌던 정난우의 눈이 그 순간 한 곳에서 정지했다. 뒤엉키고 꼬이고 난리법석을 치던 사고들이 일순 완전 똘똘 뭉친 채 굳어버렸다. 뇌리를 떠돌던 소음들도 일제히 멎었다.

 “누군가 불편한 기류만 흘려도 저게 나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생각부터 하지 않아요? 또는, 내가 실수해서 누군가 피해를 입으면 어쩌나, 나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지면 어쩌나,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지레 걱정부터 하는 거지. 혹 더 깊이 들어가 보자면.”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정난우의 뺨을 소리 없이 베었다.

 “내가 겪는 고통은 내가 불러들였으니 마땅히 감내해야하는 거다, 라는 이상한 당위성을 느껴고 있다거나.”

정난우는 아가미로 호흡하는 물고기처럼 온 몸을 움직여 숨을 쉬었다. 아, 하고 멍한 소리가 입술 틈새를 벌리고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가 작은 단어들을 조립해 만든 완성품은 정확했다.

루스는 테이블 가까이로 더 당겨 앉았다.

 “난우 씨.”

낮은 부름에 정난우는 차분하게 네, 했다. 꾸중 들은 학생처럼 두 손을 차분히 무릎에 모았다. 루스의 눈 꼬리에 설핏 온기가 깃들었다. 그리고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에녹이 아주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합니다. 내가 그렇게 오래 봐 왔는데 아직 두 달 넘긴 연애를 못 봤어요. 전 애인들이 매스컴에 퍼뜨린 섹스 테크닉 찬사는 또 어찌나 사방팔방 날아다니는지, 아마 두 사람 관계가 알려지면 여러 모로 피곤해一”

 “뭐! 미쳤어?!”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에녹은 발끈하며 상체를 곧추세웠다. 나름 정난우를 아끼고 있는 루스를 믿고서 내내 상황을 살피던 차에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거다. 곧고 흰 목에 퍼런 핏줄이 굵게 돋아났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라니. 두 달 못 넘긴 연애, 다 까발려진 섹스 테크닉, 이중에 뭐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나?”

루스는 담담하게 받아쳤다. 에녹은 입술을 한 번 씹어 물었다가 아차 싶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눈빛이 뒤엉켰다. 미지근하게 올라오던 술기운이 단번에 휘발했다.

정난우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난도 의문도 아닌 깨끗한 시선에 제가 매우 착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에녹은 빠른 어투로 열심히 변명했다.

 “아니야. 이건 모함……. 아니, 그게 맞긴 한데, 그거 다 과거야. 그래도 너랑 두 달, 뭐 그런 거 아니라고. 나 이제껏 아무한테도 동거하자고 한 적 없어. 네가 처음이라고. 정말이야. 하늘에 맹세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적미적 끄덕이던 머리가 그의 커다란 두 손에 감싸였다. 마주친 눈이 습격하듯 가까워졌다. 알코올 섞인 숨결이 입술과 인중에 눌어붙어 왔다.

그는 다급한 눈빛이었다.

 “나 원래 약속 같은 거 어기고 그런 놈 아니야. 내가 그간 했던 말 다 기억하지? 그거 다 지킬 거야 그냥 다 믿으면 돼. …믿지?”

 “네. 믿어요.”

에녹이 허언을 내뱉을 사람은 아니었다. 뼈에 사무칠 만큼 느끼고 또 느끼게 해 줬다. 그래서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에녹은 그런 신뢰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 굳은 대답에도 에녹은 맘이 안 놓였다. 그래서 굉장히 이상한 고민을 뇌리에서 반복해야만 했다. 맹렬한 갈등이었다.

더 빌어야 하나? 비는 게 맞는 건가?

고민은 짧았고 초조한 혀는 가벼웠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에녹은 일단 빌기로 했다. 사람 마음에 멍 들여 놓으면 적립됐다가 한 번에 돌려받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새삼 가슴에 사무쳐 왔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하던 참에 정난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정말 사과 안 해도 돼요. 우리 약속했잖아요. 그거면 돼요.”

정난우는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을 보내왔다. 에녹은 멍하니 정지해 있던 눈동자를 일순 흐트러뜨렸다.

내가 운 좋게 이런 걸 주우려고 그 기나긴 방황을 했나 싶었다. 사실, 방황이라기보다는 철없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응. 다 지킬게. 정말 약속.”

에녹은 급격히 정난우화 되어 새끼손가락을 굳게 걸었다. 정난우는 기쁜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에서 상황을 살피던 루스는 그 깜찍한 짓거리에 픽 웃고 말았다.

여기저기 페로몬 흩뿌리고 다니면서 여럿 잡더니, 한 번 홀딱 빠지니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린다. 정난우가 손만 뻗으면 얌전히 뺨을 비비며 애교라도 부릴 기세였다.

애교로 시작해 담백하게 끝낼 놈은 아니었지만, 뭐 어쨌든.

 “연애 쪽에서는 망나니긴 하지만, 난우 씨. 에녹이 제가 내뱉은 말 어기고 그런 놈은 분명 아닙니다. 그 점에서는 저도 보증하니까 정말 맘 편히 먹어도 돼요.”

병 주고 약 치는 발언에 에녹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돌아갔다. 허공을 벨 것처럼 형형한 안광에도 루스는 태연했다. 그저 정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 말을 엮어낼 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난우 씨를 위해서 제가 조언 하나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인간이라는 동물이 원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점점 물들어 갑니다. 말투, 행동, 입맛, 모든 방면에서요. 나는 에녹이 당신을 닮아가는 것보다 당신이 에녹을 닮아갔으면 좋겠어요. 一아, 물론 바람기만 빼고.”

 “욕이든 칭찬이든 하나만 해라, 좀.”

에녹이 이를 갈며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루스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에녹은 충분히 믿을 만한 녀석입니다. 아픈 거, 힘든 거, 다 털어놔요. 울어도 좋고 매달려도 좋으니까.”

 “……네.”

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난우의 더블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건배를 청하자 차분하게 쨍 부딪쳤다. 둘 다 한 번에, 그러나 느리게 넘겼다. 루스는 젖은 입술을 훔치며 정난우의 낮은 시선을 바라보았다.

 “가기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가는 병원에 갈 때처럼 말고요, 정말 진심으로 상대를 믿고 의지하고 아픔을 나눠 보세요. 에녹은 그 정도로 어둡게 물들거나 부서지지 않으니까요.”

정난우는 늘어진 눈 꼬리를 더 아래로 처박았다. 질책과 위로를 한꺼번에 받은 기분이었다. 네, 아주 작게 대답했다.

 “그런데, 난우 씨.”

정난우는 또 네, 했다. 루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방금 전에 제가 했던 것과 비슷한 얘기들, 이제껏 들어본 적 없습니까?”

정난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기억에 없어 고개만 흔들었다.

루스는 미세하게 턱을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할 때였다. 이번에는 정난우가 ‘그런데요.’ 하며 입을 열었다.

 “아, 네. 말씀하세요.”

루스는 잠깐의 의혹에서 벗어나 얼른 대답을 돌렸다. 정난우는 무언가를 깊이 고뇌하듯 흐린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몇 번 입술을 씹어 물더니 매달리는 듯한 어투를 내뱉었다.

 “만약에, 제가 정말로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 만큼 큰 잘못을 했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냉기처럼 정적이 가라앉았다. 에녹과 루스는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미동 없이 눈만 깜빡였다. 정난우는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 고해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좀 불우하게 자랐어요. 그런데요. 그거, 정말 모두가 제 잘못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어요. 엄마가 손목을 그은 것도, 아빠가 저를 학대한 것도…….”

 “잠깐만.”

루스는 재빨리 한 손을 들었다. NG장면에서 가차 없이 잘라 내듯 떨리는 음성을 제지했다.

 “말 잘라서 미안한데 끊었다 가죠, 난우 씨.”

 “아…… 네.”

루스는 확연히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좀 이상한데요. 내가 알기로 난우 씨는 만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고 시력도 잃었어요. 아닌가요?”

 “…맞아요.”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애들은 잘못 하면 야단맞으면서 큽니다. 그리고 용서받죠. 그게 당연한 거고요. 긴긴 불행을 기꺼이 받아들여도 될 정도의 책임감을 얹어주기엔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정난우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심결에 여러 번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진정해야 하는데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왼손 끝의 굳은살만 뜯어낼 듯 긁어대고 있을 때였다.

 “얘가 또 이러네.”

낮은 음성이 귓가에 열기처럼 욱 번졌다. 강한 팔이 감아오고, 힘없는 몸은 무기력하게 딸려갔다.

가슴 설레는 향기가 뜨끈한 체온과 함께 등을 푹 감싸왔다. 에녹이 거친 음성으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왜 떨어. 한때 바람둥이였으나 깊이 회개하고 네 전용 방공호로 재취업한 내가 이렇게 옆에 떡하니 있는데.”

등 뒤로 그의 심장 고동이 전해져 왔다. 느리고 강하게 울리는 건강한 생명의 울림이었다. 그의 팔이 사슬처럼 상체를 옭아맸다. 구속복처럼 두 팔도 함께 안겼다. 혈관에 기생하는 진득한 찌꺼기들마저 압사당할 만큼 강한 힘이었다.

정난우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딱 붙어 있던 그의 얼굴이 곧장 시야를 가득 메웠다. 차게 끓는 눈이 모든 것을 꿰뚫을 듯 견고한 섬광을 그렸다.

그의 다리 사이에 꼼짝 없이 갇힌 몸은 극렬한 속박에서 도리어 평온을 얻었다. 떨리는 입술이 움찔 벌어졌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어깨를 꽉 틀어쥔 손이 순식간에 턱을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이 삼켜졌다. 뜨겁게 젖은 혀끝이 입술을 가르고 곧장 침범해 들어왔다. 날뛰듯 튀는 숨결은 모든 걸 녹일 듯이 입 안에 불길을 옮겼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키스는 격정적일 때도 온화할 때도 뇌혈관을 몽롱하게 끊어냈다. 마치 창백하게 죽어버린 세계에 그와 자신 둘만 남은 것처럼.

탄력적인 침략은 짧고 강렬하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입술이 떨어지자 정난우는 불규칙한 헐떡임을 허공에 뿌렸다. 에녹의 날카로운 코끝은 그 흩어지는 공기를 그러모아 샅샅이 흡입했다.

턱 쥔 손이 더 올라와 뺨을 감쌌다. 감싸고 어루만졌다. 그가 말했다.

 “인공호흡 솜씨가 기가 막히지?”

에녹은 열꽃 오른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 안 떨잖아. 어디 보자…….”

그의 손이 능청스레 왼쪽 가슴 아래를 슥슥 문질렀다. 움찔 튄 몸은 달래듯 매만져졌다.

 “심장은 아직도 콩콩 빨리도 뛰네. 그런데 이건 다른 의미로 떨리는 걸 테고?”

그의 말이 맞았다. 직전까지 자신을 집어삼키려던 떨림은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것에 무참히 뒤덮였다. 그의 향기, 목소리, 체온, 길들여진 심장은 조건반사처럼 두려움마저 떨어내고 그만을 찾는 거였다.

 “네. 아무리 자주 봐도 계속 떨려요.”

정난우는 치미는 감정을 덜어내듯 고백했다. 오만하게 고개를 기울여 내려다보던 그의 나른한 눈빛미 일순 난처한 듯 흔들렸다.

 “조금 덜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심해지기만 해서 걱정이에요. 가끔은…… 저도 감당이 안 돼서…….”

 “야, 거기까지만 해.”

에녹은 재빨리 끊어 냈다. 가만 놔두면 끝도 없이 사랑고백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제발 부탁인데 그런 소리는 단 둘이 있을 때만 하라고.”

영문을 몰라 멀거니 눈을 깜빡이던 정난우는 짙은 숨소리를 들었다.

루스의 한숨이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거였다.

깜짝 놀라 파드득 에녹의 손을 떨어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에녹은 더 엉겨붙어 왔고 루스는 관대한 자비를 보였다.

 “괜찮습니다. 난우 씨 진정된 것 같으니 못 본 척 할게요.”

정난우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제가 뭐 하나에 신경이 쏠리면 가끔……그래서요.”

 “집중력 좋은 건 장점이죠. 다만 밖에서도 그러면 여러 모로 곤란할 거란 건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녹은 동물적 습성이 짙어요. 뭔가 끓어 오르면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놈입니다.”

정난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명심하겠다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꽤 결연했다.

 “그래요. 이제는 안정을 되찾은 것 같으니까 하던 얘기 계속 할까요? 그 화제가 불편하면 그만 둬도 좋습니다. 제가 싫다는 사람 억지로 채근해 호기심 채울 만큼 피곤한 스타일 아니니까, 그건 난우 씨 좋을 대로.”

정난우는 오래 망설였다.

루스와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날 역시 적었다. 그간 느낀 바에 의하면 그는 대체로 필요 이상의 말은 잘 늘어놓지 않는 타입이었다.

오늘 그가 뱉어낸 말들은 직선적인 만큼 정확했다. 제가 애써 도피하고 있던 것까지 낱낱이 들어냈다.

판단력, 논리력, 분석력, 그가 현재 거머쥐고 있는 성공의 기저에는 그 모든 게 탄탄한 반석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각본상은 아무나 타는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깨를 꽉 끌어안고 있는 에녹의 손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루스의 헐렁한 티셔츠에 작게 박힌 브랜드 로고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망설임은 길었지만 결심은 의외로 쉬웠다.

그간 묵혀 두다 몇 번이고 곪아 터져 악취를 풍기는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이제껏 자의로는 단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왜일까, 그 이유만큼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별로 없어요. 너무 어릴 때라…… 다만 몇몇 장면만은 확실히 머리에 남아 있어요. 특히 제 어머니에 관한 부분들은요.”

「난우야. 엄마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어.」

엄마의 꿈.

「엄마한테는 우리 난우가 전부야. 난우도 그렇지, 응?」

엄마가 움켜쥐고 있던 유일한 생의 의미.

 “원래는 그냥 들어주기만 했었어요. 엄마가 울거나 엄마가 아파하거나 매달려오면 꼭 안고 머리를 토닥토닥 해 주면 됐거든요. 그럼 엄마는 울음을 그치고 항상 예쁘게 웃어줬어요. 우리 예쁜 난우 때문에 엄마가 산다면서, 계속 그 말만 하면서…….”

어느 날, 엄마는 심하게 앓아누웠다. 온 몸이 멍으로 새파랗고 입술은 하얗게 부르터 색색 가느다란 숨만 내뱉었다. 아빠가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추측해보건대 엄마가 집 밖을 나가서였던 것 같았다.

집 대문 안쪽에는 거의 무서운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게 365일 지속되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가끔 그 아저씨들은 사라졌고, 아마 그 때 엄마가 잠깐 밖에 나갔던 것 같았다.

쏟아지는 폭력에 엄마는 늘 무력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인질이었기에 엄마는 반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아빠는 특하면 날 가지고 협박을 했고, 엄마는 내가 손끝 하나라도 다칠까 아무 것도 못 했다. 도망가다 잡히면 네 아들놈부터 네 눈앞에서 죽이겠다고, 그렇게만 말하면 엄마는 그냥 핀에 꽂힌 나비 신세였다.

얼음물을 세숫대야에 받아다 옆에 놓고서, 계속 물수건을 갈아줬다. 엄마는 식은땀만 흘리며 ‘난우야…난우야…….’그 말만 계속 했다. 맘이 아프고 어쩔 줄을 몰라 손만 꼭 잡아 줬다.

응, 엄마. 나 여기에 있어.

항상 아프고 항상 다치는 엄마 때문에 너무 슬펐다. 그래서 엄마가 겨우겨우 눈을 떴을 때,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도 엄마가 전부랬어 . 그런데 엄마는 왜 아빠를 안 좋아해?」

그 때는, 그랬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빠를 사랑해 주면 엄마가 그렇게 맞지도 않을 거고, 이렇게 부서질 것처럼 누워있지도 않을 거라고. 단순히 그런 생각에 매일 가슴을 졸이던 나날들이었다.

그 원망 아닌 원망이 엄마의 남은 생애를 갈가리 찢어놨다는 걸, 어린 나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그 뒤에 불어 닥칠 어마어마한 폭풍우도, 물론 예상할 수 없었다.

 “사실 어머니가 자살하려고 했던 날은, 충격이 너무 커서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그냥 엄마가 도망가라고 했던 거, 그리고 욕실 안에서 새빨간 물에 잠겨 죽어가던 엄마 모습. 아무것도 못 하고 누군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 ……피. 엄마의 짙은 피 냄새, 그런 것만 단편적으로 뇌리에 박혀 있어요.”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심지어 상대를 쳐다보던 눈빛마저도 똑같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의 부재를 용납하지 못하는 만큼 내게 가혹해졌다.

엄마가 2층 전원주택에서 겪었던 모든 불행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매일 아침 아버지의 손에 머리를 밀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광포한 폭력이 쏟아졌다.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피아노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내게 상속해 준 유일한 도피처였다. 엄마 역시, 고통과 외로움에 떠밀릴 때면 그 초라하고 좁은 공간을 찾았다.

엄마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눌러 짚던 건반 위에는 내 작은 지문이 끝없이 덧입혀졌다. 엄마와 함께 종종 연주했던 바이올린은 방치된 구석에서 먼지만 받아 마셨다.

어느 날, 옆집 사는 할머니께서 그날은 감자탕을 끓여오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감자탕에 메탄올을 탔다. 아빠는 내가 먹는 걸 한참을 지켜보고, 원액을 마셨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는 삶은 고기를 더 가져온 할머니께 발견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할머니가 지금 제 어머니세요. 그 뒤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셨고, 직업도 딱히 없었어요. 그냥 동사무소에서 연결해 준 청소하는 일, 폐지 줍는 일, 그런 걸로 적은 돈 벌어서 저 키우셨어요. 밖에 나가면 아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자랑하시면서 아무 테이프나 얻어 오셨고, 저는 바이올린으로 듣고 그걸 따라 연주하면서 놀았어요. 유년기도 청소년기도 그냥 혼자서 그렇게. 그러다가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던 걸 우연히 본 맹인학교 음악 선생님이 저를 청년 오케스트라에 추천하셨고, 거기에 있다가 크리스토퍼 강을 만나게 되었고 데뷔도 성공적으로 마쳤죠.”

아마 데뷔 이후부터였을 거다. 나를 병균 취급하거나 깔보고 조롱하던 사람들의 기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첫 음반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더 심해졌다.

친척이라고 나타나는 사람들, 그리고 청년 오케스트라 단원들, 모르는 사람들까지, 그들은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그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하루아침에 너무 달라진 내 모습에 낯설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마치 나와 같이 진창에서 살던 동료가 홀로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질시 같은 것들…… 그들은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제 곁으로 다시 끌어내릴 준비가 되어있는 거였다.

 “그런 거요. 저 이상하게 잘 느꼈어요. 머리로 분석은 안 되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예요. 그냥 굳어버리고,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밉보이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래서 저 예쁘다고 기특하다고 잘한다고 누가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면 무조건 그 사람 곁에만 있었어요. 거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더 잘 보이려고 굳은살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커넬 선생님께서 다시 눈 뜨자고 하시더라고요. 수술 끝나고는 너무 기뻤죠.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겠구나 싶어서. 줄리아드 예비스쿨에 합격하고, 유학도 순조롭게 잘 되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주말에 줄리아드 가서도 열심히 하고, 저는 그냥 다 기뻤어요.”

그러던 어느 날, 중년의 아저씨가 학교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는 작은 동물병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별 다른 거 없이 CD를 내밀며 팬이라고,  사인해 달라고 했다.

그 때는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는 걸 열심히 연습할 때였다. 어설픈 필체로 사인하면서 그 아저씨를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몸이 이상하게 으슬으슬 떨려왔다. 뭔가 조금 무서웠는데, 그게 왜인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눈이 제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충혈 된 아빠의 눈을 얼핏 닮아서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두려워 피하고 싶었는데, 그 얘길 꺼내면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는 얼굴로 축하한다고 했다. 1호 팬이니까 잘 해 주라고, 이제 우리 난우도 곧 톱클래스 반열에 끼게 될 거라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가 알게 될까 무서웠던 거다.

보통사람들의 보편적 기준 안에 들지 못하면 그들은 잔인해지고 차가워졌다. 무관심이 도리어 따뜻하다는 걸, 다시 느끼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특별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그저 보통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자꾸만 이상한 집착을 보이고, 연락을 안 받으면 화를 내기 시작했을 때도 차마 어디에 그걸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상한 거라고, 나만 이상한 거라고, 그 말을 듣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외롭고 무서워서.

 “아저씨는 묻지 않아도 많은 얘기를 제게 했어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처럼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고로 아내와 같이 죽어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애가 저를 참 많이 닮았대요. 제 눈이요, 눈빛이. 그리고 눈매가요.”

아버지의 망령이 무덤에서 되살아났다. 네 놈이 엄마를 닮은 탓이라고, 그 년이랑 똑같이 생긴 눈이 나를 미치게 한 거라고.

나는 순식간에 먼 과거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숨도 못 쉴 무저갱의 공간이었다. 까마득히 몰려오는 두려움은 광기처럼 무시무시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생각만이 뒤늦게 들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찾아와도 나가지 않고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했다.

납치하고, 감금하고, 소리 지르면 혀를 자르겠다, 도망치면 발목을 부러뜨리겠다, 그런 무서운 협박들이 쏟아졌다.

 “닷새였어요. 제가 감금되어 있었던 건. 아저씨는 제가 도망갈까 밥도 안 먹이고 물만 주더라고요. 네가 그렇게 닮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렇게 나를 보지만 않았어도, 그런 눈으로 웃어주지만 않았어도, 다 네 탓이라고, 돌아가신 제 아빠처럼…….”

죽었던 아들이 연주했다던 바이올린, 악보들이 억지로 들이밀어졌다.

그는 아버지처럼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다만, 날 놔두고서 혼자 밖에 나가는 것조차 불안해했다. 그래서 사흘 지나던 날부터는 나를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현기증과 무기력, 정신적 고문에 모든 의욕을 잃어 숨만 쉬기 시작했던 때였다. 내 손발을 묶고, 수건으로 몇 번을 둘러 입도 막고, 커다란 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나갈 때 그는 내게 수면제까지 먹였다.

 “잠에서, 깼어요. 어둡고 컴컴한 건 익숙한데 너무 추웠어요. 입은 바싹 마르고, 침도 잘 안 삼켜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내가 아까 트렁크에 갇혔지, 하고. 발자국 소리 하나 없고, 고요하고 적막했어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려 해도 몸에 힘은 없고, 한 시간인지 두 시간인지 그냥 멍하니. 바람소리만 듣고 있는데…….”

무언가 직직 끌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건 운동화 밑창이 자갈 바닥을 긁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 남자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다시금 몸이 떨려 왔다.

그런데 그 때.

쿵. 무언가 부딪쳐 왔다. 갇혀 있던 세계가 일순 요동쳤다. 밖에서 누군가의 끓는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욕을 한 것 같은데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게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며, 그보다 훨씬 어린 누군가라는 것만은 정확히 알았다.

또 다시 직직 끌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소리가 한 발, 두 발, 그렇게 멀어져 갔다.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목을 울려 소리를 냈다. 음파의 진동은 여러 군데에 막혀 바깥까지 뻗어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힘없는 몸은 꽉 조인 가방 안에서 미미한 흔들림만을 만들어냈다.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 봐도 작게 열린 지퍼는 머리 위에 있었다. 등 뒤로 묶인 팔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바깥은 조용했다. 닿지 않은 거다.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다고, 익숙한 절망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기적처럼 발소리는 도로 가까워졌다.

「뭐야…… 이게 왜 혼자 흔들려?」

추운 날씨에 혀가 굳기라도 한 건지 그의 발음은 어눌했다. 온 몸에 전율이 돋아났다. 아, 살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필사적으로 힘 빠진 목을 울리고, 몸을 흔들었다.

그는 한참을 말없0I 서 있었다. 이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 안에 사람도 있어?」

 “사람 불러 올게.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기다려,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나는 너무 조급해져서 가지 말라고 막 붙잡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어요, 말은 못하고. 그냥 멀어져 가는 거, 듣고만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소름끼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차는 다시 출발했어요.”

철옹성 같았던 루스의 눈에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기이한 예감으로 머리가 묵직해졌다. 점토 바른 듯이 뻣뻣한 손을 간신히 움직여 잔을 들었다.

희석된 술로는 부족해 정난우처럼 더블 잔을 들어 비워야 했다. 갑갑한 목을 술로 적시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에녹은 여전히 정난우를 등 뒤에서 품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이마와 콧날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어깻죽지에 입술을 묻은 채 에녹은 느리게 눈을 치켜 떴다.

일순 극렬한 시선의 뒤엉킴이 있었다.

너야? 저거, 너냐?

루스는 눈으로 물었다. 대답은 정난우가 했다.

 “에녹이에요. 그 때 나 처음으로 발견했던 것도, 이틀 뒤에 다시 찾아 내준 것도. 믿었어요. 그 사람이 기다리라고 했어요. 기다려 달라고…… 그래서 믿고 있었어요. 잘 버티고 있으면 정말 찾아내 줄 것 같았어요. 그냥, 그런 확신이 있어서…….”

정난우가 말끝을 흐리며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며 눈을 맞췄다. 쓰디쓴 신물의 기억에 눈 밑이 가늘게 떨리다 멈췄다. 정난우가 달래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어요. 도리어 나는 평생을 두고 갚아도 모자란 빚을 졌어요. 아마 제가 늙어서 무덤에 들어가는 날에도 부채감은 남아있을 거예요.”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정난우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강건하게 말했다. 에녹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처음 제대로 고백을 한 이후 그 당시의 일은 다시 어둠 속에 묻어놓았다. 두 번 다시 꺼내 보고 싶지 않았다.

제 가슴 밑바닥에 남아있는 죄책감, 그리고 후회, 그 시리게 얼어붙은 과거에는 영원히 볕이 들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와 버린 이상 더 침묵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친구 별장에서 놀다가 내려오던 길이었어.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라 주량을 한참이나 초과했지. 친구들은 자고 가라고 그러는데 어머니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외박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거든. 산 입구에 콜택 시 불러 놓고 가는데, 하늘은 핑핑 돌고 몸은 못 가누겠고. 그러다가 그 차에 부딪친 거야.”

부딪치는 순간 헉 소리가 났다. 무릎에서 전류 같은 통증이 사납게 신경을 타고 뻗어갔다. 욕이 나왔다. 차에 기대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거슬렸다. 또 욕이 나왔다. 뒷좌석 문 쪽에 버클이 세로로 긁어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던 거다.

씹, 재수도 없네, 그런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렸던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운전석 쪽으로 갔다. 그런데 남겨둔 번호가 없었다. 게다가 휴대폰 전원도 언제인지 나가버렸다. 평소에도 등산객이 드문 터라 인적은 전무했다.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하지만 번호도 없는데 어쩌라고, 중얼거리며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보닛 짚은 손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뼈까지 얼릴 듯한 겨울 냉기가 기도를 짜릿하게 메웠다. 눈살을 찌푸렸다. 착각인가 싶어 귀를 대 보는데 또 다시 슬쩍 움직이는 거다.

느낌 탓인지 이상한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마치 땅에 추락한 새끼 새가 죽어가며 흘리는 소리. 한겨울 산바람이 나뭇가지를 긁는 음향과 버숫해 그건 확실치 않았다.

취기를 떨어내려 고개를 크게 흔드는 와중에도 희미한 진동은 불규칙하게 계속 느껴졌다. 술에 절여진 사고는 영민함도 날카로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냥 뭔가 직감적으로 이 차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다. 혹시나 싶어 트렁크로 다가갔다.

「뭐야…… 이게 왜 혼자 흔들려?」

트렁크에 귀를 바짝 붙이면서도, 사실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어렴풋이 꼭지까지 취했다는 자각은 있었던 거다. 그런데 차갑게 식은 트렁크에 귀를 갖다 댔을 때, 그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들이 폭발하듯 올라왔다.

가녀란 흔들림과 처절한 소리들…….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설마 하며 물었다.

「이 안에 사람이라도 있어?」

대답이라도 하듯 반응은 거겠다. 놀라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또 한차례 머리가 핑 돌아 몸이 휘청거렸다. 머릿속이 일순 섬광처럼 하얗게 번져갔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누가 어린애를 유괴해서 이 안에 처넣고 도망간 거다. 뭘 해야 되지, 계속 그 물음만 반복했다.

휴대폰, 휴대폰이…….

아, 전원이 꺼졌다. 패닉이 왔다. 안 그래도 울렁이던 시야는 우왕좌왕 어지럽게 부서졌다가 흔들리다가를 반복했다.

제가 당장 구해줘야 한다는 사실은 떠올리지 조차 못했다. 정말 바보처럼, 트렁크를 두드리며 두서없는 말들만 쏟아 내뱉었다.

「사람, 사람 불러올게. 내가 지금 막 정신이 하나도…… 산 입구에… 그러니까 10분이면 가. 거기 가면 택시 있을 거야. 내가 전화, 전화 빌려서 얘기해서…… 신고하고, 그러니까 꼬마야.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나 믿고 안심하고 꼭 있어. 금방 다시 올게. 금방, 정말 금방 다시 올게.」

그렇게 내려갔던 거다. 수도 없이 땅이 달려들고 하늘이 거꾸러졌다.

구토감이 치밀어 몇 번이고 목울대에 힘을 줬다.

중간에 누군가와 부딪쳐 바닥을 굴렀다. 검정색 코트, 무릎 아래까지 오는 낡은 코트 깃이 유령의 치맛자락처럼 시야를 스쳤다.

이상한 냄새, 털 있는 동물에게서 나는 노린내, 뭔가 정보는 들어오는데 정렬도 분석도 되지 않았다.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산 입구에 도착해 있던 택시기사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냥 가 버렸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다짜고짜 상황을 설명했다. 꼬인 발음에 그냥 장황한 말들이 뿌연 입김에 섞여 마구잡이로 튀었다.

휴대폰을 빌려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아까의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근방을 다 뒤져봐도 소용없었다. 등산로와 차도는 분리되어 있었다. 내려갔다 오는 사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거였다.

그제야 선독한 소름과 함께 깨달았다. 차량 종류도, 심지어 번호판도 안 봐뒀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산길을 내려오다 부딪쳤던 그 남자가 범인일 지도 모른다는 걸.

내가, 구했어야 했던 거다.

 “경찰서에 가서 진술했는데. 근거도 증거도 댈 게 없었어. 경찰들은 술 냄새 진동하는 날 한심하게 보고, 허위신고는 아닌 것 같으니 어머니 봐서 훈방조치 하겠다고 그러고. 나만 혼자 미치는 거지. 그래서 진짜 그 후 이틀간은 정말 미쳐 있었어.”

다음 날 아침 새벽, 무기력감에 치를 떨었다. 광폭하게 솟구치는 분노와 자괴감을 절제할 길이 없었다. 노트를 펴 들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봤다. 그러나 어설픈 기억들 중 결정적인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검정색 차, 버클에 긁힌 흠집, 그리고 어쩌면 검정색 코트의 남자. 이것만으로 어떻게 찾아,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차갑게 정돈했다. 못 찾으면 그 애는 죽는다. 살해당하건 얼어 죽건 어쨌든 무사할 수 없을 거다.

내가 포기하면 끝이다. 오로지 그것만 떠올리기로 했다.

 “그냥 그 근처 계속 돌았어. 오토바이 몰고서. 비슷한 차만 보여도 일단 따라붙어서 뒷좌석 문 확인하고, 뭔가 비슷한 흠집 있으면 일단 두드려 보고. 무식했지, 그 땐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아침이 왔다. 눈을 뜨자마자 포타주에 빵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을 때, 루스가 소프트 캐리어를 끌고서 집에 들이닥쳤다.

또 아버지랑 한 판 거나하게 했으니 여기서 며칠 묵고 가마, 그렇게 말했다.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어머니는 루스를 보자마자 날 좀 말려달라고 애걸했고, 루스는 내 미친 짓거리를 듣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뭐 하나 꽂히면 끝장을 보는 놈이니 말해도 안 들을 거라고 꽤 냉정하게 얘기했다. 어머니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그에게 찢어 놓은 한 장의 노트틀 내밀었다. 루스는 한참을 읽어 보다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부족해, 그렇게 말했다.

결국 나는 다시 점퍼를 챙겨 입고 키홀더를 쥔 채 현관으로 갔다. 등 뒤에서 루스가 야, 하고 불렀다. 돌아보자 그가 무심한 눈으로 말했다.

「그 애가 아직 안 죽었고, 다시 싣고 다닐 필요가 있다는 전제 하에, 네가 목격했던 장소나 그 비슷한 곳에 다시 나타날 수도 있어.」

다시 오면 그게 병신이지. 기가 막혀 대꾸하자 루스는 피식 웃었다.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을 트렁크에 싣고 다닐 놈이라면, 이미 이지를 잃었다고 봐도 돼. 생각해 봐라, 에녹. 범인은 아직 목격자가 있다는 걸 몰라. 네 증언은 다 묵살됐고 탐문 수사도 전혀 없이 조용할 테니까 안심하고 있겠지. 그 상황에서 위험천만한 현행범죄 증거를 아무데나 방치해둘 수 있겠냐? 주차장이나 주택가 같은 데는 꿈도 못 꿔. 여기 뉴욕이다, 에녹. 범인이 갈 수 있는 곳은 매우 제한적이야. 단, 앞서 말한 전제조건은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넌 절대 그 애 못 찾는다. 이건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어.」

행운을 빈다, 루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2층으로 사라졌다. 멍한 머리에는 루스가 차근차근 풀어낸 말들이 계속해서 떠돌았다. 그래서 그날은 온 종일 산길을 헤맸다.

오후부터 쏟아진 눈은 해가 지자 폭설로 변했다. 오토바이를 세워 기댄 채 망연히 하늘을 보았다. 하얀 눈은 쉼 없이 쏟아졌다. 만월의 무거운 몸은 불길한 구름에 가려졌다.

음습한 겨울밤이었다. 헐벗은 나무들이 몸을 부대끼며 곡소리를 냈다. 미친놈들이 설치기 딱 좋은 밤이었다.

야, 너 도대체 어디에 있냐.

어딘가에서 또 살려달라고 몸부림 치고 있을 꼬맹이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이 쓰렸다.

 “그날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어. 그래도 집에 돌아가 젖은 옷 갈아입고 다시 나왔어. 혹시나 해서 한 번만 다시 가보자고 했지. 내가 너를 처음 발견했던 곳, 거기 말이야.”

산길을 오르기 전, 편의점에 들렀다. 하루 종일 뜨거운 캔 커피만 몇 개를 마셨는지 셀 수도 없을 거다.

파카에 묻은 물기를 대강 떨어내고 나갔다. 빌어먹을 눈은 아직까지 쏟아지는 중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오토바이를 향해 뛰었다.

그 때, 누군가가 눈발을 헤치며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다급한 걸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옷깃이 스치자 반사적으로 한 번 돌아봤던 건 조금 불쾌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오토바이로 가서 앉아 막 헬멧을 쓰고 장갑을 꼈을 때였다.

순간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냄새, 털 가진 애완동물들이 분출해 내는 그런 냄새, 노린내라든지 배설물 냄새라든지…….

그 남자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났었다. 갑자기 가슴 속이 날뛰었다. 설마 하면서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정색 차, 두 대가 있었다, 당장 달려가 확인부터 하고 싶은 걸 참았다.

침착해야 했다. 점퍼의 지퍼를 반쯤 내렸다. 후끈하게 열 오른 몸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만나자 김이 펄펄 났다. 칼바람의 포옹에 정신이 좀 더 명료해졌다. 이성이 칼날처럼 곤두섰다.

빠르게 헬멧을 벗고 오른손의 장갑을 벗어 잇새에 물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백미러를 쏘아보았다. 거울 표면에서 굴절된 뜨거운 시선은 뒤쪽으로 날아가 꽂혔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부터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이어폰을 꼽고 휴대폰은 다시 호주머니에 넣었다. 헬멧을 다시 쓰자마자 수화부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건너 왔다.

《왜.》

「전화 끊지 말고 듣고만 있어. 혹시 낌새 이상하다 싶으면 안 늦게 신고 좀 해 주고.」

그 순간, 편의점 문이 벌컥 열리며 그 남자가 튀어나왔다.

《뭐야. 진짜 찾았어?》

「아니. 일단 차부터 좀 보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예민한 시선으로 차주를 빠르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백미러를 쏘아보는 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구였다. 진한 회색 슈트에 광택 없는 구두를 신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이 눈 섞인 칼바람에도 휘날리지는 않는다. 낮 동안은 왁스나 젤로 깔끔히 빗어 고정해 뒀을 거다.

그의 손에 든 반투명한 봉투는 손잡이까지 꽉 차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편의점에서 쓸어 담은 것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야, 섣불리 덤비지 마.》

「그래서 상황 보고 있잖아. 봐서 진짜인 것 같으면 받아버릴 거야. 마이크 켜 놓을 테니까 귀나 잘 열고 있어.」

남자는 분명 조급했다. 그리고 백미러에 비친 남자는 운전석에 타기 전, 트렁크 쪽을 약 1초 간 힐끔거렸다. 거리가 좀 있어서 그 눈빛까지 읽는 건 실패했지만, 가능성은 점점 몸집을 불려갔다.

남자가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이 켜지는 소리는 짐승 울음소리 같았다. 검정색 세단에서 벤츠 엠블럼이 독니처럼 가로등 불빛을 반사했다.

남자의 차는 급발진해서 곁을 스쳐 지나갔다. 따가워질 때까지 부릅뜨고 있던 눈에, 선명한 흠집이 걸렸다. 갑자기 각성제라도 투하된 듯 그 모양이 기억에서 생생히 되살아났다.

나는 시동 걸린 차보다 더 들끓는 울분을 토해냈다.

「찾았다. 저 씨발 새끼!」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액셀을 밟았다.

 “미행하는 거 안 들키려고 속도 조절해 가면서 따라붙었어. 집으로 가더라. 차고 문이 열리는데 마음이 다급해졌어. 저대로 차고 안에 들어가 버리면 트렁크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들이받기로 했어.”

콰앙一

오토바이는 벤츠의 펜더미러와 앞바퀴 사이에 처박혔다. 한 순간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속력을 적절히 줄인 탓에 날아가는 참사는 면했다. 대신 보닛에 어깨로 떨어졌다. 적잖은 충격이 찌르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너, 괜한 사람 잡은 거면 이거 그냥 넘어가기 힘들다.》

귓가에서 뭔 소리가 들려오건 말건,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짚어보았다.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을 털어내고 일어나며 다시금 뒷좌석을 힐긋 보았다. 정확했다. 저건 내가 긁어놓은 거였다. 운전석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요.」

들렸을지는 모르겠으나 뜻은 전해졌을 거다.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노크했다. 남자는 뻣뻣한 얼굴로 눈만 굴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을 내리라는 뜻으로 손짓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옅게 선팅 된 차 창 건너에서 남자는 망설였다. 헬멧 유리 안에서 내 눈은 스산하게 날이 서 버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도, 하얗게 질린 입술도, 가까이서 보니 선명했다.

헬멧을 벗어 한 손에 쥐었다. 부러 선한 미소를 인공으로 그려내며 소리쳤다. 이 정도 연극쯤이야 애들 장난도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잠깐 졸았어요. 보험사 불러요. 저도 전화를 좀…….」

그 때였다. 스르륵, 창문이 반 뼘 정도 내려갔다. 남자의 전신을 싸고 든 응고된 긴장감이 불쾌한 점성을 가지고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그는 구겨진 가면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가도 돼. 아직 학생 같은데. 그, 차는 내가 알아서 수리할 테니까.」

「안에서 잘 안 보이는 모양인데 지금 보조석 타이어 위쪽으로 다 나갔어요. 보닛도 좀 찌그러졌고. 내려서 한 번 보세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가 봐.」

 “그렇게 잠깐 실랑이를 했어. 이상하잖아. 완벽히 내 과실로 벤츠를 구겨놨는데 묻지도 않고 그냥 가라니. 그래서 루스도 그 때 확신을 갖고 경찰에 신고를 했어.”

남자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아예 무시하고 일단 자리를 피하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그 순간, 내 얼굴에서는 미소가 싸늘히 증발했다.

차가 다시금 작게 흔들거렸던 거다. 운전석 차창을 쥔 내 손에 그 필사의 몸부림은 선연하게 감겨들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고막을 바늘처럼 관통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외치는 거였다.

이성이 날아갔다. 쥐고 있던 헬멧을 힘껏 휘둘렀다.

퍽一!

파열음이 흐린 달빛을 갈랐다. 거칠게 돌변한 기류에 남자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나는 상관 않고 몇 번 더 사납게 헬멧을 들어 차창을 부셨다.

김 서린 창문이 파스스 조각나며 떨어져 내렸다. 남자의 놀란 눈이 휘둥그레지며 돌아왔다. 나는 을씨년스럽게 뻥 뚫린 안으로 손을 뻗었다. 잠금을 풀고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남자는 혼을 빼놓고 있다가 멱살이 잡혀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그의 눈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에 젖은 채 번들거렸다. 너울거리는 물막 같은 그의 눈동자 위에서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트렁크는 사람 넣고 다니라고 있는 거 아니야, 아저씨.」

일순 남자가 얼어붙었다. 경직된 입술이 곧이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대범한 일을 치기에는 담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 이거 놔! 이 미친 새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발버둥 쳤다. 그러나 40대는 훌쩍 넘었을 그가 한창 팔팔한 나이인 내 악력을 뿌리치기에는 무리였다. 운전대를 다시 잡으려는 팔이 허공만 움켜쥐었다. 판단력이 조각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투둑, 그의 셔츠 단추 하나가 스프링처럼 허공에 튀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끌어내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깡마른 체구였지만 역시 남자인지라 무게감은 묵직했다.

남자의 신음이 함께 흙 위를 굴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까 보닛에 처박힌 어깨를 휘휘 돌렸다.

어쩌면 금이 갔을 지도 모르겠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부상부위에서부터 확 퍼졌다. 알싸한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남자가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농도 짙은 어둠 속에서 악에 받친 눈이 희번덕거리는 궤적을 남겼다. 어렵지 않게 그의 팔을 붙잡아 뒤로 꺾었다. 빠득, 뼈가 어긋나는 느낌이 손 안에서 울렸다.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나는 벌레 다루듯이 그를 밀쳤다. 그가 나동그라지더니 거세당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내, 내 아들이야. 쟤는 내, 내 아들…….」

「그럼 아동학대 죄인가? 아무튼 범죄자는 범죄자고.」

이젠 아예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남자를 버려두고서, 나는 트렁크부터 열었다. 그리고 빠르게 차 뒤로 뛰어갔다. 애가 살아있는 건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빠끔 입을 벌린 트렁크를 붙잡아 확 열어젖혔다.

구름 뒤에서 한 꺼풀 벗겨진 달빛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후끈한 열기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트렁크 안은 거대한 미지생물의 입 안 같았다. 음험하고 축축하고 아득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이를 곧 집어삼킬 것처럼…….

커다란 가방이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닫힌 지퍼를 얼른 열었다.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체구도 작고 깡말랐지만 소년에 가까워 보였다.

측축한 해초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흑발이 숨을 열 때마다 애처롭게 오르내렸다. 도톰한 스웨터와 검정색의 트레이닝팬츠가 땀에 흠뻑 젖어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일단 입에 물린 겹겹의 수건과 재갈부터 풀어줬다. 그리고 막 손목을 묶고 있던 로프를 풀어내는데,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구해낸 녀석의 눈은 동공과 눈동자가 구분이 안 갈만큼 검었다. 초점은 부정확했고 묶인 손발은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나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참아내며 물었다. 그 애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잔뜩 쉬어터진 목소리로 흐리게 대꾸했다.

「아, 아니에요. 안 늦었어요.」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잠깐 사이에 그 새끼가 갑자기 달아났어. 무심결에 튀어나가 잡으려고 했었지. 그런데 그 때, 뭔가가 내 뒷덜미를 꽉 틀어쥐는 거야. 그건 바로 네 목소리였어. 잔뜩 쉬고 갈라져서, 끝없이 침잠해 버릴 것 같은 힘없는 목소리.”

「…지, 마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애는 팔을 움직여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깨끗하게 잘 깎인 손톱 밑으로 거무튀튀한 피가 굳어 있었다. 야트막하게 일렁거리는 불안감이 그 손끝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가, 가지 마세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제발 날 버려두지 마세요.

잔뜩 부은 성대를 제대로 울리지도 못하는 음성은 토막토막 끊어져 나왔다.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져 감에도 별 도리가 없었다.

홀로 두기에 이 애는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풍랑 앞의 촛불처럼 아슬아슬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더라도 자신은 여기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런 식으로 한 번을 놓쳤다. 이 애도 나도 이틀을 지옥에서 살았다. 

「그래. 안 가, 아무데도. 곁에 있어줄 테니까…….」

뿌연 숨결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 애의 전신을 구속한 것들을 조심히 끌러냈다. 빠르게 점퍼를 벗어 추워 보이는 몸을 덮어줬다. 트렁크에 걸터앉으며 약속했다.

「내가 지켜줄게. 절대로,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게.」

그 애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뻗어왔다. 트렁크 바닥을 짚고 있던 내 손에서 새끼손가락을 훔쳐가 꽉 쥐었다. 뜨겁고 습하고 강하게 틀어쥐는 힘, 그 감각이 피를 타고 전신을 콸콸 흘렀다.

망설이다 그 애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덮었다. 움찔 떨긴 했지만 더 꽉 옥죄어 왔다. 마지막 한 줄기 구원의 동아줄을 붙잡듯이 매달려오고 있는 거였다. 그야말로 맹목적인 신뢰였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오롯이 둘만 남은 듯이 사위가 고요했다. 존재하는 건 깊이 얽힌 채 닿아 있는 체온뿐인 듯했다.

문득 하늘로 고개를 꺾었다. 검은 밤은 굵은 눈송이로 가득했다. 숨소리가 침묵의 빈 공간을 틈 없이 메웠다.

바람이 실어간 흰 눈이 자꾸만 트렁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맡으로 옮겨 앉아 젖은 뺨을 감싸 엄지로 살살 닦아줬다.

펄펄 끓는 열이 못내 불안했다. 뜨겁게 맥동하는 손목의 핏줄 위로 그 애의 숨소리가 스몄다.

그 애는 간헐적으로 헐떡거리다 가녀린 호흡을 뿌리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찰들과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 애의 창백한 얼굴을 초조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죽지 마. 너 여기서 죽으면 나는 내내 지옥에서 살 거야.

이기적인 생각이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벌게진 눈으로 그 녀석을 찾아 헤맸던 시간들은, 결국 순결한 정의감이라기보다는 내 미래의 평온을 위해서였다. 내 평생에 기생하게 될 찝찝함, 죄책감, 그런 것들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거다.

「집에 금방 가게 해 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견뎌.」

그 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대답한 것도 같았다. 나는 힘을 실어주듯이 그 애의 뺨을 조심조심 어루만져 주었다.

 “범인이 도주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말 듣고는 허무했지. 트렁크 열기 전에 다리라도 부러뜨려서 기절시켜 놓을 걸. 씨발, 하여간 그냥 그 때만 생각하면 모든 게 다 후회덩어리야.”

에녹은 향긋한 목에 얼굴을 파묻어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싸늘한 눈빛은 허공을 벨 듯 스산한 날이 섰다. 정난우는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살며시 눈을 휘었다.

 “아니에요. 증거도 다 남아있었고, 법원에서 안 마주쳐도 되니까 저는 오히려 잘됐다 싶더라고요.”

에녹은 피식 웃으며 눈가를 누그러뜨렸다. 그리 생각하면 또 다행인 것도 같았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에녹의 이야기까지 바닥을 드러냈을 때, 루스가 뜬금없이 사과했다. 정난우는 어리둥절해서 그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외곽시야의 상단에 들어찬 그의 희미한 얼굴이 을씨년스럽게 굳어 있었다.

 “저한테…요?”

 “네, 난우 씨.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영문을 몰라 멀거니 눈만 깜빡거렸다. 루스는 띵한 머리를 한 손으로 수차례 지압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 때, 사실 저라면 포기했을 겁니다. 에녹이 뭔가를 잘못 관찰할 놈은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만취상태였다고 하니 신뢰도도 떨어진다고 판단했어요.”

 “아…….”

 “설사 그게 다 사실이라고 해도 에녹이 당신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도 생각했고. 더 솔직히 말하면 아예 가망이 없다, 시간낭비다, 그런 얘기도 했었습니다. 그 부분은 에녹이 절 위해서 묻어둔 것 같군요.”

 “아,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인 건 맞을 거예요. 다만 에녹이 조금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래요. 그 때 그 차를 발견한 게 에녹이 아니라 나 같은 놈이었더라면, 난우 씨는 아마 훨씬 더 오래 지옥 같은 생활을 했거나 최악의 경우에는一”

 “재수 없는 소리는 거기까지 해.”

말을 잘라낸 건 에녹이었다. 루스는 물끄러미 그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에녹은 마치 보호하듯이 정난우를 더 깊이 품에 안았다.

팔과 몸통을 한 번에 옥죄어 안는 힘은 얼핏 보기에도 꽤 억셌다. 정난우는 짜부라지듯이 안겨서도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네. 정말 괜찮아요. 결국에는 에녹이 구해줬고, 루스 역시 저를 찾아 낼 실마리를 주셨잖아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죠.”

루스는 한참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던 잔을 다시 들었다. 얼음은 완전히 녹아 있었다. 잔뜩 풀어진 술을 느리지만 단번에 목안으로 넘겼다.

맛은 밍밍했다. 더블 잔을 채워 한 번 더 속을 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정난우를 바라보았다.

 “저는 기적을 믿지 않았고, 에녹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기적이라는 건 믿는 사람에게 찾아가네요. 저는 이미 틀려먹은 놈이지만 난우 씨에게도 그 기적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네. 고마워요.”

잠시 대화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정난우는 연신 과거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진땀을 뺐다.

루스는 문득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얘기가 많이 샜네요. 본래는 난우 씨가 가진 근원적 죄책감에 대해 논하고 싶었는데, 결국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까지 듣게 될 줄이야. 난우 씨와 에녹,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정난우와 에녹, 두사람이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흐리게 웃었다. 그 안에 녹아든 애정과 신뢰는 건조한 루스에게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럼 다시 난우 씨 얘기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다음에?”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고개를 바로 하는 정난우의 얼굴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에녹이 쉴 새 없이 제 심장 고동을 전해 주고 체온을 나눠준 탓일 거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만큼 후퇴보다는 직진이 나을 거다. 루스 역시 서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듣다가 중간에 좀 이상한 걸 느꼈어요. 이야기 흐름 끊기 싫어서 계속 들었습니다만…….”

루스가 생각하기에 정난우의 친모가 보인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맞아요, 난우 씨가 어머니께 한 말. 그게 어떤 계기가 된 건 확실해 보이네요. 증오해 마지않는 남자의 말버릇, 그걸 무심결에 제 자식에게 답습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지했다면 그건 충분히 충격적이었을 거예요. 뭔가, 잘못됐다,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면 그건 이해가 갑니다. 다만.”

 “…네.”

정난우는 턱을 조금 당기며 선선히 수긍했다. 특별히 다른 대답은 기대하지는 않은 듯 의외로 담담했다. 루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난우 씨는 분명 현장을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어가던, 피 냄새 나던 욕실을요. 맞죠?”

 “네.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었어요. 아빠가 올 때까지.”

루스는 정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욕실 문은 어떻게 열었습니까? 아버지는 집을 비웠다고 하셨잖아요.”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정난우는 맹하게 네? 했다. 루스는 깊이 다리를 꼬고서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하려고 했다면 분명 안에서 문을 잠갔을 거 아니에요. 키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습니까? 다섯 살 꼬마가요?”

갑자기 머리에 혼란이 왔다. 정난우의 눈은 낮게 허공을 짚어나갔다. 그날, 분명 자신은 잠긴 욕실 문을 열었다. 손에 열쇠가 있었다. 금속의 날카로운 이빨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느낌이 뒤늦게 따끔하게 번져왔다.

그게 어디서 났더라?

그 때, 갑자기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열쇠 찾아, 당장 들어가서 말려, 수화기에서 피처럼 쏟아지던 아빠의 목소리였다.

정난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네, 열쇠…… 그거 제가 찾았어요. 아빠가, 빨리 찾으라고, 막 닦달을…… 제가 전화를……, 전화를 했던 것 같아요. 아빠한테, 엄마가 죽는다고.”

 “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다섯 살 꼬마면 엄마가 욕실에 들어갔을 때 씻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왜?

정난우는 말을 잃었다. 왜였지?

잘게 부서진 조각들은 너무 일부만 간직하고 있었다. 큰 조각들은 그 형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작은 것들은 먼지처럼 하찮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도망가라고 했다고 했죠?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루스의 말투는 취조라기엔 따뜻하고 상담이라기엔 차가웠다. 그 미묘한 온도를 가진 음성 탓일까, 아니면 보호막처럼 전신을 감싸는 온기 탓일까. 정난우는 이 상황이 거북하지 않아 도리어 기묘했다.

「도망가. 난우야. 도망가…….」

엄마는 분명 그 외에 더 무슨 말을 했었다. 바싹 메말라 피딱지 앉은 입술이 눈앞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가까이 밀착한 얼굴, 처음 보는 단단한 눈빛, 울지 않았던 엄마.

 “기억이…잘 안 나요. 너무 충격적이어서…….”

루스는 흐음, 코끝으로 한숨을 지었다.

 “물론 그러시겠죠.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아들이 당시 정황을 명료하게 기억해내는 게 도리어 이상할 겁니다. 그게 정상인 거니까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요.”

루스는 곤란한 듯이 미간을 긁었다. 어디까지 더 물어야 괜찮은 건지 그걸 가늠하기 힘들었다. 상처를 후벼 파고 싶지는 않은데 결국 심층 분석을 하려면 낱낱이 들어내야 하는 거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고심하던 차였다.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정난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는 멈칫 시선을 들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이 테이블 위의 한 점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미간에는 희미한 주름이 비쳤다. 그 골에 고여 든 음영이 급속도로 짙어졌다.

 “엄마가, 저한테 말했어요. 죽겠다고.”

 “네?”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저한테 말했다고요. 엄마 죽을 거니까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그 때부터,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잘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랬었다. 엄마는 분명히 미리 예고를 했었다. 엄마 죽으러 들어가니까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그래서 너무 충격 받은 자신은 울면서 잠긴 문을 두드리다가 전화를 찾아 들었다.

엄마가 죽어, 아빠, 빨리 와, 엄마가 죽어.

아빠가 가르쳐 준 대로 열쇠를 찾아 들고, 문을 열었다. 묽게 흐려진 피가 욕실에 흥건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숨이 콱 막혔다. 가늘게 색색 흐르는 엄마의 숨소리, 작게 묻는 목소리.

엄마 말, 기억하니?

 “잠깐만요, 난우 씨. 제가 지금 좀 헷갈려서 그러는데요.”

정난우의 추억이 괴상한 물꼬를 타고 역류해갈수록 점점 의혹은 짙어져 갔다.

 “어머니의 행동이 굉장히 이상해요. 일관성이 없어요. 오랜 학대로 정신분열을 앓았나 했더니 묘하게 일의 순서가 맞아요.”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어요.”

 “만약 어머니의 처음 의도가 자살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고 전제를 깐다면 앞뒤가 치밀하게 잘 맞는다 이겁니다.”

루스는 내내 동요 없는 얼굴이었다. 마치 해부대 위에 놓인 개구리를 담담히 내려다보는 태도였다.

 “굳이 내가 죽을 거라고 미리 알리셨다면서요. 엄마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아들은 엄마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겁먹어서 아버지께 전화를  하겠죠. 그런데 그렇게 미리 예고를 해 버리면 실패할 확률이 분명 존재합니다. 정말 자살이 목적이었다면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어차피 모든 건 연역에 의한 추론일 뿐, 실제로 정난우의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앓았다고 한다면 모든 건 우연으로 엮는대도 큰 무리는 없는 거였다.

 “그럼, 왜…….”

정난우가 표정을 무너뜨리며 물었다. 이쯤에서 고뇌는 찾아왔다. 사실 루스는 어머니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러나 만약 그대로 제 의견을 말한다면 정난우는 다시금 상처받을 게 분명했다. 결국 어떻게 말 해도 저 때문에 어머니가 죽은 거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였으니까.

루스는 어차피 모든 게 불확실한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빛나는 여생을 움켜쥐고 있는 그를 위해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그건 어머니께서만 아실 겁니다. 어쩌면 난우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백에 꼭꼭 숨어있을지도 모르고요.”

루스는 오늘의 대화에서 가장 부드럽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뱉었다.

 “어쨌든 난우 씨 때문에 어머니가 죽을 결심을 했다는 죄책감은 처음부터 성립이 될 수 없는 거였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제 말이 맞죠?”

현기증이 뒷머리를 끈끈하게 핥아 내렸다. 정난우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녹의 숨결이 귓가에서 끝도 없이 위로를 건네 왔다.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애써 묻어둔 의문들이 이제와 뇌리에서 되살아나 생생히 호흡했다.

가끔씩 엄마의 그림자를 느낄 때마다 두려움 섞인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떠나가 버렸던 엄마는 왜 자꾸만 나를 찾아 왔을까. 왜 영영 가 버리지 못 하고서 계속 내 곁을 맴도는 걸까.

핏물 속에 잠겨 있던 엄마는, 정말로 나를 원망했던 게 아니었을까?

 “난우 씨는 정말 잘 버텨 왔어요. 이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을 만들어준 건 아마, 그 혹독한 상황에서도 난우 씨를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던 어머니의 의지일 거예요.”

루스의 판결문이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메마른 눈물샘은 오늘도 고요한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정난는 한참 후에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이 턱을 젖혀들며 그 애처로운 몸을 보듬어 안았다.

 “그럼 이만 주무세요. 내일 뉴욕 가신다면서요.”

루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이야기 탓에 시각은 벌써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보디블로우 상태로 내내 멍했던 정난우는 아, 하며 달려가 그의 옷소 매를 붙들었다. 루스는 가만히 굽어보며 기다렸다. 몇 번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정난우가 더듬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고, 고마워요. 정말로.”

루스는 흐린 미소로 대꾸를 대신했다. 마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나서 돌아섰다. 객실 문을 열고 나설 때 에녹이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에녹은 어정쩡하게 선 정난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주무르며 허리를 굽혔다. 시선을 일직선상에 두고 서 말했다.

 “나 루스랑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한 십 분 정도면 될 거야. 길어도 이십 분. 샤워나 먼저 하고 푹 쉬고 있으면 금방 올게.”

정난우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곧장 루스를 끌고서 객실을 나섰다. 루스가 의문 띈 눈으로 물었다.

 “무슨 할 말?”

야심한 밤 복도는 적막했다. 적당한 조도의 조명 아래 에녹은 조각상처럼 근사하고 온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볍지 않은 대화가 될 것 같았다.

루스는 슬쩍 턱짓을 해 보였다. 제 룸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었지만 에녹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금방 들어가야 돼. 오늘 같은 날 혼자 오래 두기 싫어. 궁금한 거 몇 개만 물어볼게.”

 “그러든지. 말해 봐.”

 “크리스토퍼 강 만나본 적 있어?”

에녹은 뜬금없는 이름을 혀끝에 실었다. 루스는 조금 둔해진 시신경을 움직여 빤히 그를 응시했다.

 “물론. 크리스토퍼 강이라면 오래 전부터 뉴욕 필과 인연이 깊으니까, 당연히 아버지랑 인연도 돈독해서 집에도 몇 번 왔었지. 그건 왜?”

에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반 발자국 더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 전에 그 새끼를 만나러 갔었어. 알지? 놈이 난우랑 꽤 친밀한 사이라는 거.”

 “그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근데 그 새끼가 좀 이상해.”

루스가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들어올렸다. 에녹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그 새끼 어떤 것 같아?”

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좁혔다. 아주 조금 위에 있는 에녹의 눈빛은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건 에녹 특유의 열정이라기보다는 경계심이나 적대감에 더 가까워 보였다.

질투인가.

루스는 이제 에녹이 조금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망나니처럼 저 하나만 잘난 줄 알고 살아온 놈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 싶었다.

 “내가 호감을 가질 타입은 아니야.”

 “무슨 대답이 그래. 좀 더 자세하게 느낀 바를 말해 보라고.”

 “네 질문이 광범위하니까 내 대답도 이 정도인 거야. 답지 않게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을 정확히 짚어 봐. 그럼 나도 성심성의껏 내가 아는 바를 알려줄 테니까.”

 “놈이 난우랑 설립한 기부재단이 있어. 이름은 Christ’s rain.”

 “그게 왜.”

 “Christ가 크리스토퍼의 애칭이고 rain은 정난우의 한국식 이름 뜻이거든. 그것도 십여 년 전에 그렇게 지었대.”

루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했다.

 “너 좀 의처증 같다.”

 “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그 새끼가 난우 SNS에서 좀 거슬리게 해서 내가 파리 로케 갔을 때 찾아가 봤어. 직접 관찰 좀 해 보려고. 그런데 그 새끼가 내내 이상하게 나오는 거야. 깔짝깔짝 건드리는 게 내 반응 떠보는 것처럼. 아무리 뜯어 봐도 나오는 게 없어서 일단 그쯤에서 그만 두려고 했었어 . 그런데 내가 막 돌아서는데 굳이 날 부르더니 그러는 거야. 정말 뜬금없이. 난우 이름 뜻 아냐고.”

루스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이다 이내 정지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는 건지 생각을 곱씹는 건지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그 때, 휘청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몸을 못 가누는 아가씨를 건장한 남자가 겨우 추슬러 객실을 찾고 있었다.

 “잠깐 들어와.”

결국 두 사람은 루스의 객실로 향했다. 루스는 술기운에 뜨끈한 머리를 짚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불쑥 입을 열었다.

 “일단 아까도 말했듯이 그 남자, 강은 내가 호감을 가질 유형은 아니야. 네 말에 나도 동의해. 약간 좀 뒤틀려 있어. 근데 그건 후천적인 거라기보다는 천성에 가까워.”

 “…원래 미친놈이라는 거야, 뭐야.”

 “네가 나한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그 남자는 아주 인간 말종은 아니었어.”

루스는 자연히 오래 전 일을 기억에 되살렸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십 년도 훨씬 넘은 일이야. 강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했던 해였지. 클래식계는 광풍이 불고, 아버지는 흥분해서 또 날뛰시고. 뉴욕 필 협연 뒤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를 초대했어. 나는 또 억지로 그 자리에 참석해야 했고, 그 때의 내 느낌은 간단했지.”

 “뭔데.”

 “무료하고, 지루하고, 게으른 천재.”

젊다 못해 어린 축에 있었던 강도영은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아 보였다. 제가 타고난 능력은 범상치 않은데 딱히 열정이 없어서 문제인 타입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다 가졌다. 집안, 재능, 최적의 환경. 그 모든 것이 손쉽게 그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손만 대면 척척, 피나는 노력까지는 필요 없는 타고난 천재였어. 그러니 성취의 기쁨이 있을 턱이 있나. 애초에 자기 거였고, 애초에 자기 길이었을 뿐.”

 “그 외에 이상한 점은 못 느꼈고?”

에녹은 집요하게 눈을 빛냈다. 루스는 몰려오는 피로에 주먹으로 제 어깻죽지를 툭툭 내리쳤다.

 “안타깝게도 그 인간 자체가 불안정해.”

루스는 에녹의 의혹에 제법 근접한 말을 내뱉었다. 에녹이 사납게 눈 꼬리를 세우며 시선을 내렸다.

 “빙빙 돌리지 말라며. 똑바로 얘기해.”

 “글쎄. 이렇게 얘기하면 네가 이해가 빠르려나.”

루스는 팔짱을 끼며 곧게 에녹을 마주보았다.

 “재능에 너무 쉽게, 빠르게 눈을 뜬 어린 천재는 의외로 망가지기 쉽지. 그게 연주자건 배우건 가수건 간에. 특히나 그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네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미래가 완벽하게 굳어져 버렸어. 세계가 넓다는 건 알지만 시야는 좁고, 바다에서 살고 싶어도 사막에서 살 수밖에 없는 생물로 태어난 거라고. 그건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할지도 몰라.”

에녹은 허공으로 눈을 굴리며 짧게 상념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제가 칸에서 수상하고 배우를 계속 하겠다고 했을 때, 제 어머니도 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어린아이는 좁고 잘 닦여진 길보다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

 “내가 대학 다니던 도중에 집을 뛰쳐나가는 바람에, 이후로 그를 다시 볼 기회는 없었지. 그래서 정확하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내 눈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다만 그전까지 내가 봤던 강은 외롭고 게으른 사람이었어. 그 다음에 어떻게 변했는지까지는, 본 적이 없으니 말해 줄 게 없고  “

 “잘 하는 거 있잖아, 시물레이션.”

또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에녹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아, 그 상태에서 정난우 씨를 만났다?”

루스는 미간을 좁히며 비스듬히 고개를 젖혀 들었다. 가만히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공허와 고독에 허덕이던 스무 살의 강도영, 온 몸을 뜨겁게 불사르던 열다섯 살의 정난우, 두 사람의 만남.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글쎄, 내가 크리스토퍼 강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루스는 한쪽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웃었다.

 “아주 확고한 무신론자로 살아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겠지.”

*

뉴욕에는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정오의 일광도 거뭇하게 그을린 구름 뒤에서 기를 못 폈다. 아무래도 한바탕 폭설이 올 법한 낌새였다.

정체된 도로는 더딘 흐름을 유지했다. 에녹은 느리게 핸들 쥔 손을 까닥이며 비스듬히 시선을 빗겨 내렸다.

 “정말 괜찮겠어?”

에녹은 벌써 다섯 번째 묻고 있었다. 보조석에서 거의 돌아앉아 있는 정난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오리 같은 시선은 운전 내내 제 얼굴 위로만 돌아다녔다.

음악에건 사람에건 한 번 빠지면 참 깊이도 침잠해 들어간다. 바람피울 염려는 없겠다 싶어 다행이다. 맹목 담긴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다가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나 다시 눈길을 전방으로 돌렸다.

 “저기, 혹시…… 자꾸 물어보는 거, 같이 들어가는 거 좀 껄끄러워서 그런 거예요?”

액셀을 부드럽게 밟을 때, 정난우가 물었다. 에녹은 피식 웃었다.

 “싫기는. 너 혼자 들어간다고 우겼으면 나는 변장하고 잠입해 들어갔을 걸.”

 “…에? 왜요?”

 “왜긴 왜야. 나쁜 어른이 사탕 흔들면서 꼬셔갈까 봐 그러지.”

순간 정난우는 미간을 흐리게 주름잡았다. 검은 눈동자를 위로 한껏 치켜 떴다. 낯설지 않은 게 어디선가 들어본 대사였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기억해 내고 말았다.

오정수도 저 말을 했었다. 정난우는 약간 걱정스러워졌다.

 “에녹. 은근히 아저씨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오늘 만날 오정수 이사라는 사람?”

 “네.”

 “갑자기 왜?”

 “그냥 뭔가 화법이 좀…… 비슷해요.”

 “어떤 식으로?”

 “그냥 저를 아기 대하듯이 하는 게…….”

부드럽게 웃던 에녹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들었다. 여물지 않은 불순한 의심의 싹이 텄다. 에녹은 뻣뻣하게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왜 다 큰 사내놈을 애 대하듯 해? 계약 관계로만 아는 사이 아니었어?”

아, 정난우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까 오정수에 대해 매니지먼트사 이사라고만 하고 자세한 설명은 안 했다.

정난우는 그가 강도영의 외삼촌이며 열다섯 살 때부터 뉴욕에서 줄기차게 왕래한 사이라고 말했다. 에녹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놈 집에서 몇 년을 살기까지 했다고?”

 “…….”

또 실수했나 싶어 정난우는 대답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에녹은 느리게 입술을 휘었다. 칼날이 번득일 것 같은 미소였다.

 “놈이 아무 짓도 안 했어?”

 “…짓?”

멍하니 되물었다. 어떤 의미인지 언뜻 파악이 안 됐다. 차가운 안광이 스치듯 얼굴을 핥고 물러갔다. 그가 자조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랬으면 이 지경으로 모를 리는 없었겠지. 방금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보다는, 너 도대체 그 놈 가족들이랑은 왜 그렇게 다 친밀해? 사돈지간도 그보다는 멀겠다.”

 “아무래도 크리스나 저나 일하는 분야도 같고요. 특히 오정연 교수님은 제 줄리아드 은사님이기도 하고, 또…….”

정난우는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말을 이었다.

 “좋은 분들이세요.”

에녹은 기가 막혀 실소했다.

 “네 관점에서 좋은 사람들의 기준은 나랑 좀 안 맞아. 그거야 내가 보고 판단해야지. 평생 안 보면 더 좋겠지만.”

예약 된 레스토랑 간판이 시야에 잡혔다. 에녹은 한 손으로 머플러를 크게 두르며 핸들을 돌렸다. 입구에서 발레파킹을 맡기고 코트를 열어주자 정난우는 셔츠 끝자락을 주섬주섬 잡아 빼서 손가락에 감았다.

픽 웃음이 터졌다. 이 재미가 은근히 쏠쏠해서 에녹은 틈틈이 셔츠를 벨트 안으로 꼼꼼하게 정리해 넣어두곤 했다.

예약 룸에 아직 오정수는 도착해 있지 않았다. 약속시간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에녹은 웨이터에게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고 일러두고 옆으로 돌아앉았다.

 “이것 봐. 머리 좀 정리하니까 훨씬 예쁘잖아.”

물을 마시던 정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보았다. 눈꺼풀을 다 덮을 듯했던 앞머리가 눈썹 바로 아래에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 오전 가위손에 빙의되었던 에녹의 솜씨였다.

 “이렇게 눈도 다 보이고, 아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런데 저는 위에 시야가 이 정도로 트여 있으면 좀 그런데…….”

정난우는 조금 뭉그적거리며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에녹은 물방울 맺힌 입술을 엄지로 훑어주며 말했다.

 “뭐든 억지로 할 필요는 없지만. 나름 네가 겁먹지 않게 속도조절하고 있으니까 이끌어주는 대로 천천히 따라와 봐. 그러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도 보이게 되고, 그동안 미처 몰랐던 소소한 행복도 발견하게 되고, 뭐든 자연스러워져. 그리고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게 변해 있을 거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에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언제까지나 내 품에 넣고 나 혼자만 보면 좋지.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이기심이고, 언젠가는 너도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마주보고 먼저 말도 걸 줄 알고, 그렇게 돼야지.”

 “…….”

 “걱정 마. 어디까지나 내 프로젝트의 기본은 ‘자연스럽게’니까. 너는 아주 조금의 용기만 내면 돼. 나한테 항상 보여주는 것처럼.”

실패의 아픔이 떠오르는 건 불가피했다. 조금 자신 없어 하는 표정은 에녹에게 고스란히 읽혔다.

에녹은 뺨을 살짝 꼬집으며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물론, 아무한테나 웃어주고 예쁜 짓 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나 독점욕 살벌하니까 그 꼴은 절대 못 봐. 그건 나한테만 하고, 넌 타인에게 딱 예의만 차릴 수 있을 정도로만 크면 돼.”

열 섞인 눈빛 공격에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일단은 그를 믿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뺨을 툭툭 두드리고 떨어졌다.

오정수는 약속 시간 5분 전에 룸으로 들어왔다. 숱 많은 머리를 매끈하게 넘긴 슈트 차림이었다. 뛰어왔는지 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는데, 그는 정난우를 발견하더니 눈이 하트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문가에서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우리 아깽이!〕

저 인간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며 에녹이 희미하게 인상을 그었다. 정난우는 어물쩍 일어나 망설였다.

원래 이 타이밍에서 아저씨한테 한 번 안겨 줘야하는데…….

하지만 불처럼 뜨거운 애인의 성격을 잘 아는 정난우는 쉽사리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에녹은 타인과의 스킨십에 상당히 민감했다. 방금 전에도 분명 경고를 받았다.

오정수가 섭섭한 듯 투덜거리려던 참이었다. 에녹이 시기적절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에녹 밀리건입니다.”

오정수의 눈시울이 크게 벌어졌다. 마치 이 안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인지한 듯했다. 그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대꾸했다.

 “아. 반가워요. 오정수라고 합니다. 기사 봤어요. 이번 영화에서 난우 역할 하신다고.”

 “네,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잘 상상은 안 되지만 참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네요.”

가볍게 악수하고 나서 그는 제 명함을 건넸다. 한 번 읽고 재킷 주머니에 갈무리해 넣은 에녹이 자리를 권했다. 자연스레 셋이 착석해 웨이터를 호출했다.

 “근데 그 동안 굉장히 친해진 모양이네요. 난우가 이제껏 친구라고 누구를 소개시켜 준 적이 한 번도 없는 앤데.”

오정수는 시치미를 딱 떼며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녹은 일단 미소를 지었다.

 “네. 최근에 그렇게 됐습니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들어왔다. 오정수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정난우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넸다.

 “우리 아깽이.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아저씨가 다 사 줄게.”

 “아깽이 Babitt?”

정난우는 메뉴판을 든 채 움찔 굳었다. 무심결에 숨을 멈췄다. 굳은 빰에 에녹의 따갑게 가시 선 눈빛이 꽂혔다.

저 개소리가 뭔지 설명해.

무언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생생한 음성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답은 호쾌하게 웃은 오정수가 대신했다.

 “아아. 네, 제가 직접 지어준 애칭입니다. 애가 순한 표정으로 귀를 자꾸 쫑긋거리는 게 아기토끼baby rabbit처럼 귀여워서요.”

 “…그렇군요.”

이 때부터 에녹의 얼굴에는 온기 없는 웃음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정수는 굳은 낯빛이었지만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반사적으로 담뱃갑을 꺼냈다가 금연임을 깨닫고 도로 내려뒀을 뿐이었다. 흐트러짐 없이 넘긴 머리카락 속을 엄지로 몇 번 긁던 그가 살얼음 같은 침묵을 깼다.

 “우리 난우가 연애를 하겠다고?”

정난우는 잠깐 눈치를 살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정수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크게 기대며 팔짱을 꼈다. 웃음기는 깨끗하게 메말랐다. 식사 내내 팔불출 아빠처럼 이것저것 음식을 권하며 하트 레이저를 쏘던 눈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도 이 옆에 청년하고 말이지?”

 “…네.”

오정수가 식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레몬 조각이 담긴 냉수를 입 안에 몇 번이고 머금었다. 결국 불 못 붙인 공허한 담배 필터를 깨물었다. 잇새로 몇 번 가볍게 씹다가 물었다.

 “밀리건 씨.”

 “네.”

에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지라 내내 상황만 보던 참이었다. 오정수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에녹은 미세하게 일그러지려는 얼굴에 능숙한 가면을 썼다.

강도영이 외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의 전체적인 이목구비에서 강도영과 닮은 구석이 많이 보였다. 시원하게 찢어진 냉담한 눈매나 콧대가 그랬다. 그리고 저 읽기 힘든 눈은 저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아니면 동양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거나.

오정수가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애 데리고 지금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네. 난우야 워낙 세상 물정 모르는 애라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우리 밀리건 씨는 놀아 볼 만큼 놀아도 봤고, 워낙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과 상대하며 살고 있으니 본인에게 어울리는 짝이 어떤 타입인지 정도는 알 거라 생각하는데.”

어투가 꽤 노골적이었다. 에녹은 표정변화 없이 일단 듣고만 있었다.

 “난우는 사람을 가볍게 상대하는 법을 몰라. 이제껏 연애 한 번 못해 본 숙맥인 건 알지?”

 “압니다.”

 “두 사람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결국 다치는 건 우리 난우일 거고 둘이 헤어지면 남겨지는 것도 난우일 거고. 결국 자네는 별로 손해 볼 게 없어 보이는군. 허전한 침대를 몇 주 동안 따끈하게 불태워 줄 아름다운 아가씨라면 주위에 널렸지 않나?”

 “그래서 요점이 뭡니까?”

부드럽게 묻자 오정수가 기이하게 눈을 빛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순진한 애 데리고 장난치지 말라는 말이야.”

그 말 뒤에는 약간의 욕설이 생략되어 있을 거다. 가령 ‘이 새끼야.’ 라든가 ‘씹 새끼야.’ 라든가. 에녹은 그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에녹은 잠시 대꾸를 보류하고 비스듬히 시선을 흘렸다. 중간에 낀 정난우는 살벌한 기류에 안절부절 못했다. 꼼지락거리는 제 손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따악.

에녹은 정난우의 창백한 코끝에서 손가락을 튕겨 그 불안한 시선을 끌어왔다. 올려다보는 까만 눈은 희미한 떨림을 보였다. 에녹은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고개를 조금 가까이 기울였다.

 “내가 이걸 해명해야 돼?”

 “…네?”

갑자기 건네진 질문에 정난우는 멍하게 반응했다. 에녹은 나른하게 눈을 내리떴다.

 “나 같은 망나니가 어디 주제도 모르고 너한테 앵기냐고 물으시잖아. 그런데 나는 너한테 빌었으면 빌었지, 네 소속사 이사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못 느껴.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의도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난우는 갈팡질팡하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얌마. 중요해. 중요하니까 묻잖아.”

에녹은 강경한 어조 끝에 한숨을 실었다.

 “난 별로 안 내키지만, 네가 해 달라고 하면 해 보겠다고. 안 먹힐 게 분명해 보이지만.”

에녹은 딱 다물린 정난우의 입술만 내리 바라보았다. 옆얼굴에 고요히 따라붙는 오정수의 눈길은 무시했다.

식사 내내 관찰했다. 오정수는 진심으로 정난우를 아끼고 예뻐했다. 정말 거슬릴 만큼 심할 정도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짜증나는 놈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는 정난우를 그간 살뜰하게 보듬어 줬다는 것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단번에 쌍욕 섞어 면도날처럼 맞받아치지 않은 건, 그것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난우가 원한다면 까짓 거 자기 PR 정도는 해줄 수도 있었다. 오정수가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에녹은 고심하는 정난우의 뺨을 말랑말랑 꼬집고 쓰다듬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주변을 헤매던 눈이 딱 맞아 올 때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려 경청의 자세도 취했다. 창백한 뺨 위에 홍조가 흐리게 번졌다.

턱을 조금 당기고 눈만 살짝 올려 뜬 정난우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제가…….”

 “응. 네가?”

 “제가, 할게요.”

에녹은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추측했던 여러 유형의 대답 중에서 저런 말은 없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묻는 눈을 하자 정난우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누가 강요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제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건데. 설득을 하려면 제가 해야죠. 에녹은 그냥 제가 같이 와 달라고 해서 와준 건데, 그런 것까지는…….”

말끝은 흐려지다가 종래에는 아주 사라져버렸다. 에녹은 미묘한 표정으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등받이에 올려둔 팔 위로 턱을 괴었다.

희미한 미소가 눈가에 번졌다. 시린 색감의 눈동자에는 열기가 일렁거렸다. 낮고 탁한 목소리가 공기를 데웠다.

 “이게 또 방심하고 있을 때 예쁜 짓을 하네.”

정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확연하게 얼굴을 붉혔다. 당황에 흐려진 눈은 정신없이 허공을 헤댔다. 빨라지는 박동이 공기의 진동으로도 전해졌다.

 “얼씨구. 이제는 연타도 날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 맹랑한 게.

에녹은 눈이 다 파묻힐 만큼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숨김없이 보낸 사인을 제대로 해석한 거다. 하긴, 스케줄에 빈틈이라도 보일라 치면 지겹도록 안아줬으니 이젠 알 법도 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스스로 옷을 벗고 달려들어 주지 않을까.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먼저 흥분해서 풀린 다리로 착착 감겨 오기만 해도 껌뻑 넘어갈 거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그냥 옆에 있어 줄게.”

에녹은 웃음이 잔재하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정난우는 화끈거리는 뺨에 손등을 누르며 오정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던 오정수의 얼굴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끔하게 휘발했다.

 “저기, 아저씨…….”

 “응, 그래. 뭐?”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해 보였다. 정난우는 왼 손끝의 굳은살을 손톱으로 찍찍 누르며 망설였다.

오정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 상체를 굽혔다. 다 식어버린 커피 잔이 달그락거렸다.

 “괜찮으니까 편히 말해.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 아깽이 편이야. 알지?”

커피를 즐기지 않는 에녹은 빈 홍차 잔에 물을 채웠다. 오정수가 자꾸 아깽이 아깽이 할 때마다 비위가 뒤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저만 부를 수 있는 애칭 하나쯤을 만들어야겠다.

 “저, 에녹이랑 저…….”

에녹은 느긋하게 잔을 들어 입술에 붙였다. 오늘 호텔에서는 어떻게 예뻐해 줄까, 어떤 애칭을 지어줄까, 속으로 생각이 바삐 오고갔다.

밤에만 활짝 피는 달맞이꽃Evening primrose를 활용해 볼까.

음란한 상상을 즐기며 물 한 모금을 입 안에 빨아들였을 때였다. 계속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던 정난우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이미 잤어요! 그러니까 이제 되돌리고 그런 거 못해요!”

그 순간 에녹은 입에 머금었던 걸 그대로 내뿜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난우가 내민 비장의 무기는 오정수뿐 아니라 에녹에게도 치명타였다. 기침은 연달아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도 모자라 연한 슬랙스에 짙은 얼룩이 졌다.

 “에녹, 괜찮아요?”

정난우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른 냅킨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낚아채서 잽싸게 입가부터 찍어 눌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정난우는 에녹의 허벅지에 점점이 젖은 자국에 우왕좌왕 냅킨을 꾹꾹 눌렀다.

에녹은 재빨리 그 손목을 낚아채 떨어뜨렸다. 그는 진정된 속에 다시 찬물을 들이붓고 나서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야, 만지지 마. 지금 진짜 위험해.”

짧게 기도를 긁고 간 사레에 에녹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메마른 나뭇결처럼 갈라진 듯한 목에 연신 물을 적셨다.

섹스 좀 했다고 못 무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물론 그걸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물러줄 생각이 애초에 없으니까.

에녹은 걱정스러워 보이는 정난우를 힐긋 일별하고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아플 정도로 물어야 여기에서 병신이 되지 않는 거다.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몸은 팔팔 끓었다. 당장 업고 가 진탕 체액을 섞고 싶을 정도로 발기해 버렸다. 더욱더 무를 수 없게 몇 번이고 안고 싶었다.

에녹은 한 손으로 제 악관절을 부서뜨릴 듯이 감싸 쥐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눈을 올려 떴다. 오정수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말을 잃고 있는 참이었다.

아까 연애한다느니 어쩌느니 할 때는 의외로 담담하더니, 이제와 새삼 하얗게 굳었다. 곱게 키운 아이의 첫 경험을 들은 아빠의 얼굴이었다.

에녹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순간이 여러 모로 괴로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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