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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 (6/13)

Chapter 05

매니저 쉐인은 불안한 기분으로 제 배우를 살폈다. 매끈했던 미청년의 낯은 못 본 새 축축한 음영이 더 농밀해졌다. 살이 조금 빠진 얼굴선은 그가 원했던 대로 날카롭게 다듬어졌고, 매력적으로 깊었던 눈의 음각도 더 선명해졌다. 내리깐 속눈썹이 눈 밑 살에 가시 같은 그늘을 드리웠다.

섹스어필을 감소시키려 근육을 줄이고 있지만 기가 막히게도 퇴폐미만 짙어져 가는 불운한 남자는 지금 넋이 나가있었다. 헤어와 메이크업하는 내내 그랬다. 아니, 이미 픽업했을 때부터 저 상태였다.

 “어이, 에녹. 말 좀 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쉐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에녹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팅 짙은 차창만 건너다보던 에녹이 그제야 느리게 눈을 굴렸다. 옆 좌석을 바라보는 그의 서늘한 눈동자는 헐겁게 풀어져 있었다.

 “내가 뭘?”

쉐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스타일리스트 로렌에게 눈짓했다. 로렌은 재빨리 큰 손거울을 들어 에녹의 얼굴 앞에 대령했다. 에녹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리며 거울을 마주봤다. 수 초 간 눈만 깜빡거리던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미모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는데, 정작 나비가 봐 주질 않으니 정물화만도 못하구나.”

 “…….”

차내에 일순 충격 섞인 정적이 돌았다. 로렌은 경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쉐인은 숨을 멈춘 채 말을 잃었다. 에녹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거울 든 로렌의 손을 힘없이 밀쳤다. 쉐인의 눈 꼬리가 미친놈 보듯이 위로 솟았다. 그가 에녹을 경계하며 물었다.

 “야, 너 진짜 약이라도 해?”

 “내가 약을 했으면 이렇게 진실을 읊었겠어?”

에녹의 반문에 쉐인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속이 더 끓었다. 에녹은 저 잘난 건 귀신 같이 아는 놈이었다. 배알이 뒤틀려도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쉐인이 포기하고 말문을 닫았다. 에녹은 고개만 주억거리다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멀리 떠밀었다

익숙한 LA, 할리우드의 풍경이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정체된 도로는 인간들과 번쩍이는 차들로 가득했다. 열흘 여 전에 똑같이 이 거리를 달렸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사로잡았던 즐거움은 현존하지 못하고 증발한 상태였다.

자신은 운전석이 아닌 리무진의 뒷좌석에 앉았고, 제 곁에는 정난우가 아닌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부재가 같은 배경을 정반대로 뒤틀어 놓는 거였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장에 가는 길이었다. 물론 정난우도 지금 공연 준비에 바쁠 거다.

「잘 다녀오세요. 응원할게요.」

정난우의 배웅에  ‘응원하지 마. 이번에도 물 먹을 게 뻔하니까.’ 하고 대꾸했다. 어투는 제가 들어도 거칠고 퉁명스러웠다. 자꾸만 달라붙고 싶은 마음을 두드려 패느라 난폭해져 있었던 탓이었다.

해안도로 갓길에서 무섭다고 떨던 걸 겨우 달래둔 게 불과 열흘 전이었다 바람처럼 왔으나 돌처럼 굳어진 자신을 믿어달라고, 뭐든 할 테니까 일단 믿고 기다려 달라고, 수도 없이 애간장을 녹이며 속삭였다.

사실 달랬다기보다는 거의 빌었다고 봐야했다. 더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대놓고 빌었다고 할 수 있었다. 보조석 의자를 뒤로 한계까지 밀어두고 깔판 매트 위에 무릎 꿇고 앉아 말했으니, 뭐 더 어떻게 아름답게 포장할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얼른 일어나라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정난우는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어떻게든 살살 녹게 하려고 그 뺨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눌렀다. 믿어달라고 빌었고, 가벼운 스킨십으로 꼬시기도 했고, 긍정적 답변이 없을 경우 계속 이러고 있을 거라며 협박도 섞어 가면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순둥이 정난우는 결국 또 그 기세에 밀려 백기를 들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셔츠자락 대신 니트 한 줌을 쥐고서 말했다.

「저 기다리는 건 잘해요.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요.」

에녹은 그 순간, 제가 정말 세상을 다 얻은 놈처럼 미소 지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직 고백도 제대로 안 했는데 마음이 통한 것 같다는 착각마저 느낀 거다.

그날 이후로는 계속 함께 잠들었다. 정난우는 스스로가 말했던 대로 낯선 사람을 꺼릴 뿐, 스킨십에 대한 개념은 매우 흐렸다. 한국 본가에서 자는 날에는 아직까지 그렇게 어머니 품에 꼭 안겨서 잠든다고 했다.

처음엔 좀 어색해하더니 이제는 익숙하게 한 침대에서 부둥켜안고 잠들게 되었다. 장족의 흐뭇한 발전이었다. 물론 세뇌는 잊지 않았다.

「야, 아무하고나 이러면 정말 안 돼. 이제부터는 나하고만 해야 돼.」

당연히 정난우는 왜냐고 물었고, 대답은 간단명료하게 했다.

「왜긴. 내가 눈이 돌 게 분명하니까 그렇지.」

「어머니도 안 돼요?」

「어머니만 제외.」

정난우는 뭐가 뭔지 모르겠단 표정을 했지만 고개는 끄덕끄덕했다. 그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붙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다가가고, 정난우는 조금씩 곁을 넓혀주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연애는 처음이라 사실 저 역시 조금은 어려웠다. 그 동안은 스치듯 마주친 눈길이 몇 번이고 포개지고, 그게 결국 어느 순간 스파크가 튀면서 자연히 연애로 이어졌다. 제가 끌린 육감적인 아가씨들은 모두 열정적이었고, 빼는 법 없이 서로를 탐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연애의 초입이 에녹을 전에 없이 설레게 했다. 마치 열다섯 어린 소년소녀의 어설픈 첫 입맞춤처럼, 어쩔 줄 몰라 조금은 헤매고, 고작 그런 걸로 기뻐 얼굴을 붉히고 마는 거다.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짙은 고동이 튀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갑자기 그 차분한 목소리가 그리웠다. 충동에 이끌려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자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쉐인이 말했다.

 “내릴 준비 해.”

힐끗 바깥을 내다본 에녹이 빠르게 문자를 찍어 보냈다.

「식사 거르지 말고 연습 잘 하고 있어. 틈 봐서 전화 할게.」

리무진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내렸다.

스태프와 경호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섬광 같은 플래시가 터졌다.

에녹은 매끈한 미소로 레드카펫을 걸어갔다. 포토존에서 지겹도록 사진을 찍혔다. 혼자서도 찍고, 직전 영화를 함께했던 여배우와도 찍고, 그냥 얼굴 아는 사람들과도 찍고,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캐스터와 인터뷰 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에녹!’하고 불렀다. 돌아보기도 전에 뒤에서 상쾌한 웃음이 덮쳐들었다. 묵직하고 딱딱한 뼈가 무게를 얹어왔다. 상체가 앞으로 풀썩 꺾였다.

 “하하하. 우리 이쁜이 에녹, 안 본 새 더 섹시해졌어?”

멘트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에녹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 쉬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곁눈을 줬다.

 “아 좀. 정상적으로 아는 척 해줄 수는 없어? 나 방금 넘어졌으면 십 년 원수 감이야.”

에녹은 제 허리를 감싼 묵직한 다리를 뜯어내려했지만 그보다 캐스터가 더 빨랐다. 이 흥미로운 장면을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다른 쪽으로 사라지려던 그가 잽싸게 다가와 마이크부터 디밀었다.

 “오, 역시 로드니 맥케이의 에녹 사랑은 여전하군요. 공개적으로 프러포즈 했다가 차인지가 언젠데 아직도 포기를 못했나요.”

다소 익살스런 질문에 할리우드 공식 톱 게이 로드니가 싱긋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우리 에녹은 보기만 해도 은혜롭잖아요. 안 보면 그런가보다 하는데 꼭 이렇게 만나면 다시 끓어오른다니까? 이것 봐. 살 좀 빠졌더니 더 치명적이야. 이런데 내가 얘를 어떻게 잊겠냐고요. 안 그래요?”

 “그건 그래요. 정말 미모 전성기란 말이 절로 나오기는 하죠. 에녹, 이제 못 이기는 척 한번 넘어가 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입니다.”

 “뭔가요?”

에녹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맞게 대꾸했다.

 “영화제에도 이제 도핑테스트 도입이 시급하다는 거죠. 가장 철저히 감시해야 할 인물은 바로 로드니 맥케이고.”

구경하던 이들이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캐스터도 박장대소했다. 로드니는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에녹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세상에, 나 또 차였어. 열 번째까지 세고 안 세서 몇 번째인지도 모르 겠다고.”

 “백 번 되면 내가 알려줄게. 나는 세고 있거든.”

 “그걸 왜 세는데!”

 “기념식 해 주려고. 그보다는 나 좀 따라와.”

에녹은 로드니를 등에 달고서 걸음을 옮겼다. 캐스터는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작 영양가 없는 인터뷰보다 에녹에겐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평범하게 자세를 바꿔 어깨동무한 로드니를 그나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갔다.

 “로드. 나 물어볼 거 있는데.”

 “응? 뭐?”

로드니가 큰 눈을 소처럼 끔력거렸다. 모델처럼 마른 패셔니스타라 어려보이긴 하지만 그는 벌써 서른이었다. 스무 살 복귀작을 함께하며 알게 됐는데, 그때부터 말이 잘 통하고 성격도 잘 맞았다. 지금은 일명 베스트 프렌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에녹이 진지한 목소리로 괴상한 질문을 던졌다.

 “남자들은 뭘 좋아해?”

 “…….”

로드니가 뒷머리를 후려 맞은 표정으로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우리 에녹…… 사실은 여자였어?”

매끈하게 다듬어진 에녹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내려왔다. 로드니가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네 노출 신을 얼마나 집중해서 반복재생을 했는데…….”

 “물어 본 내 죄다.”

에녹은 제 순간의 실수를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긴 질문부터 NG였다. 남자가 돼서 남자는 뭘 좋아하냐고 묻다니 저런 놀림을 받아도 할 말 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진 프러포즈 이벤트를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거다. 혀를 차며 돌아서던 때였다. 다급히 팔을 붙잡는 힘에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아니지?”

로드니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로드니는 호모포비아인 척 굴어대다가 아웃팅을 당한 과거가 있었다. 그로 인해 여기저기서 뭇매를 맞아야 했다. 현재의 당당한, 아니, 당당한 척 구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경험의 고통이 가져다 준 결실이었다.

에녹은 가만히 눈시울을 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얘가 미쳤나, 정말 왜 이래? 야, 시작하지 마. 너 아니잖아. 아니어도 되잖아.”

할리우드에도 물밑 차별은 존재했다. 그 속에서 깨지고 다쳐 본 로드니는 에녹이 진심으로 걱정됐다. 에녹은 로드니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묵묵히 친구로 남아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딱히 비중도 안 큰 조연만 전전하던 자신은 아웃팅으로 인해 금방 비호감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간간히 이어가던 일도 끊기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에녹은 틈만 나면 그런 저를 찾아와 밖으로 끌어냈다.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바에 데려가고, 파티에 데려갔다. 그로 인해 에녹 역시 게이가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아, 어떡해. 자꾸 애타게 마음이 가는데 나 커넬 감독 만나러 가야 돼. 이따가 또 봐.”

에녹은 픽 웃으며 로드니의 손을 떨어냈다. 우려 섞인 시선을 등 뒤로 하고 열심히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찾아다녔다. 아직 도착 안 했나 싶어 전화를 걸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들었을 때였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눈을 찔렀다.

『네. 기다릴게요.』

정난우였다. 틈 봐서 전화하겠다던 데에 대한 답변이었다.

에녹은 곧장 그린 룸으로 튀어갔다. 아직 배우들은 모두 레드카펫에 있었고, 그린 룸 안에서는 스태프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석으로 달려가 머리를 처박고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정난우 특유의 차분한 음성이 넘어왔다.

《네, 에녹.》

 “기다렸어?”

에녹은 대뜸 낮게 물었다. 정난우가 느리게 대답했다. 네, 하고. 에녹의 눈 꼬리가 살며시 무너졌다.

 “미안해. 정신이 좀 없었어. 식사는?”

《아까 호텔 조식 먹었어요. 이제 피트니스에 가려고요. 점심은 운동한 다음에 먹으러 갈 거예요.》

 “그래. 운동 열심히 하고. 시상식 끝나면 애프터파티 직전에 전화 한 번 더 할게.”

《……몇시쯤에요?》

에녹은 일순 당황했다. 정말로 전화를 걸어야지 생각했지만 정난우가 이리 구체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시간 계산을 마치고 나서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여기 시간으로 밤 열한시에서 열두시 사이쯤?”

《네. 알겠어요.》

연습 잘 하고 밥 잘 먹고 기타 등등 잔뜩 애정 담은 목소리를 전송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따끈하게 달궈진 기기가 손 안에 착 감겼다.

구석에 찌그러진 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표정도 감정도 수습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안 뗄 거다. 이대로 레드카펫에 나갈 수는 없었다. 잔뜩 풀어져 웃는 얼굴이 내일 잔뜩 온라인에 깔릴 게 분명했다.

에녹은 공연히 주먹 쥔 손으로 벽을 몇 번 후려쳤다. 가슴이 간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속에서 팔팔 끓어 정수리를 뚫고 뜨겁게 분사해 나갈 것만 같았다.

정난우가 자꾸만 사람을 미치게 했다. 아무 것도 아닌 말을 던져 단단하게 여문 속을 물렁하게 만들고, 때론 부수기도 하고, 그 안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는 거다.

얘를 정말 어쩌면 좋지.

조금 아까 찾아 헤매던 루스는 뇌리에서 새까맣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에녹은 긴 시간 고민하다 다이얼을 눌렀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형 연립을 찾던 걸 전망 좋고 정원 예쁜 저택으로 바꿨다. 업자는 반색하며 마침 좋은 물건이 있다고 말했다. 내일 오전에 당장 가겠다고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시선을 내려 발끝을 응시했다. 반질반질한 구두코에서도 설렘이 묻어났다. 그린 룸이 천천히 채워졌다.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잡아 돌렸다.

 “너 뭐 하냐. 상 달라고 기도라도 해?”

루스였다. 희미하게 들어 올린 그의 눈썹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에녹은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방금 내가 일생일대의 결정을 한 역사적인 순간이었거든? 함께 한 걸 영광으로 알라고. 자서전에서 지금 이 순간을 회고할 때 이름 철자는 넣어 줄게.”

 “너 약 한다는 소문 돌더니 그냥 미친 거였냐.”

루스는 담담하게 응대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거친 단어 선택이었다. 에녹이 픽 실소했다.

 “뭐야, 어지간히 정신없나보네. 잘 안 풀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이래서야 올해 안에 개봉하겠어?”

 “막바지작업 중이야. 초고까지 동시에 가고 있으니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될 거고. 여주인공 캐스팅 후보 봤지?”

더 난장판이 된 모양이었다. 제작기획서도 안 나왔을 마당에 초고 얘기를 듣다니 참 별난 인간이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프리-프로덕션까지 한 방에 가겠다고 설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보면 뭐 해. 다 생 신인 데려다 놔서 모르는 얼굴들이던데.”

 “네가 다 커버해야 되니까 몰라도 그냥 봐 둬. 네 개런티 때문에 신인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야 했으니까. 미팅 있을 때마다 나와서 얘기도 좀 나눠 보면 좋고.”

 “나 바빠. 그럴 시간 없어.”

에녹은 딱 잘라 거절했다. 루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너 온 동네방네 정난우 씨 따라다닌다고 소문 다 났다. 덕분에 네 차기작이 클래식 소재 영화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 다 눈치 챘고. 그런데 바쁘긴 뭐가 바빠?”

 “말했잖아. 역사적 사건. 내 미래가 결정된 이 순간이라고.”

에녹이 의연하게 양 팔을 벌리며 대꾸했다.

 “여주인공 누굴 데려다 놔도 상관없을 것 같아. 적어도 기본만 쳐 주면 돼.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거든.”

루스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단번에 이해 못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루스가 느리게 턱을 비틀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자신감에 근거가 있길 간절히 바란다.”

에녹은 흐린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걱정 마시라고, 감독님. 나 믿어.”

에녹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뜨거운 이채가 빛을 발했다. 루스는 픽 웃으며 생각했다.

그간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길은 없으나, 분명 둘이 함께 한 시간들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꽉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정말 열렸을 지도 몰랐다.

 “그래. 믿어 볼게.”

예민하게 날을 세운 신경이 무뎌졌다. 작업을 하면서 내내 틀어놓는 정난우의 음반들과 그의 아픈 과거가 저를 그렇게 만든 거였다.

루스는 에녹이 특권처럼 가진 그 열정과 패기를 높이 사주기로 했다. 어차피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부터 영화의 성공여부는 대부분 에녹의 역량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걸로 굳어져 있었다.

루스는 무릎으로 에녹의 허벅지를 가볍게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좋은 각오야. 그게 과장이 아니라면, 내가 반드시 내년엔 네 손에 남 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 주마.”

에녹이 장난스럽게 눈가를 찌푸리며 항의했다.

 “뭐야. 올해는 당연히 안 될 거라는 것처럼 말한다 ”

 “텄어. 너 아직 그 정도 아냐 알면서 왜 물어.”

 “……냉정해.”

에녹은 우는 시능을 하면서도 목 안으로 웃었다. 그리고 본인도 예감하고 루스가 예언했듯이 올해에도 에녹은 멋지게 물을 먹었다. 루스 역시 2년 연속 수상은 실패했다.

두 남자는 애프터파티에서 결연하게 술잔을 부딪치며 다짐했다.

내년엔 우리가 꼭 저 오만한 무대를 휩쓸어주자고.

밝아오는 여명이 그의 얼굴을 밝혔다. 어슴푸레한 빛은 시리게 다가와 태양에 녹아들듯 따뜻하게 번졌다. 건성으로 닫힌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 오는 미풍은 선선했다.

LA의 겨울은 사람들의 옷차림을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반팔과 슬리퍼, 가벼운 코트와 까만 스타킹까지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몸에 열이 많아 겨울은 끄떡없다는 남자는 어디서건 항상 맨 상체로 잠들었다.

고르게 흩어지는 숨이 이마를 간질여 왔다. 조심조심 손을 뻗어 자연스레 헝클어진 어두운 금발을 손끝에 담았다. 매끄럽다기보다는 부들부들하게 감겨오는 머리카락이었다.

높고 반듯한 콧대와 육감적인 붉은 빛깔의 입술, 샤프한 턱까지 떨어지는 라인을 느리게 눈에 담았다. 누군가의 얼굴이 뇌리에서 선명히 그려지는 감각은 낯설면서도 설렜다.

신기한 마음으로 방황하던 눈길이 문득 그의 입술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대로 눌어붙었다. 다가와 맞물리던 감촉이 불현듯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숨결, 빨아들이던 느낌, 그건 등줄기를 날카롭게 긁는 느낌과 비슷했었다.

그건 분명 달랐는데.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대방의 타액이 묻는 키스, 그건 연인들 사이에서나 오고가는 거였다. 겪어보지 못했더라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게다가 그날 그가 내뱉은 모든 말들은 자꾸만 이상한 결론을 현실로 끌어오려 했다.

「아무도 날 이 지경으로 만들지는 못했어.」

분하다는 듯이, 혹은 애원하듯이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머릿속이 또 어수선하게 풀어졌다. 가슴은 덥게 요동쳤다. 우울한 내심이 눈가를 물고 늘어졌다.

「저 기다리는 건 잘해요.」

그건 부스러기만 남은 용기의 진액 한 방울까지 고아낸 거였다. 생전 처음 가져보는 검은 탐욕의 결과이기도 했다. 뭘 기다려 달라는 건지, 언제까지 기다려 달라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내민 손을 또 잡아버린 거였다.

기다림, 그 외로운 순간을 견뎌내면 그는 반드시 꿀처럼 달콤한 보상을 건넸다. 그 불순한 중독이 모든 감각을 부패시켜가는 거였다. 이성적 사고도 잔뜩 절어 빈사상태였다.

「그렇게 넋 놓고서 창밖만 볼 정도로 신기해하는 걸 보니까 운전하는 보람이 있네. 그것 봐. 내가 뭐랬어.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고 했잖아.』

1번 국도를 타고서 시린 새벽 말리부 해변을 지날 때,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잊을 때쯤에는 반대로 LA에서 북부로 쭉 타고 올라가자. 같을 것 같지만 다르거든. 네가 사색이 됐던 죽음의 코스도 없고.」

…금방 잊을 것 같아요. 풍경을 본 게 아니거든요.

겁쟁이 정난우는 그 쑥스러운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몇 번이고 도닥이며 또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 언젠가는 그 말도 전할 수 있을 거다.

차창에 흐리게 비친 당신이 바다보다 훨씬 더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야…… 이러지 마.”

문득 탁하게 잠긴 음성이 콧등에 맺혀왔다. 동시에 손목이 꽉 붙들렸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치고는 꽤 억센 악력이었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짧게 숨을 멈췄다. 멋대로 뻗어나간 손이 어느새 그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당혹으로 물든 시선을 얼른 도피시켰다. 맥박이 땅으로 떨어졌다가 거세게 튀어 올랐다. 전신에 열꽃이 뿌리를 박았다.

그가 늘어지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난 밤보다 아침에 훨씬 더 민감해. 이렇게 자극하면 유혹하는 거랑 마찬가지야.”

평소와 다른 뭉개진 발음이라 불평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정난우는 딱 붙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아꼈다.

 “아, 역시. 섰잖아.”

에녹은 찌푸린 눈을 살며시 뜨며 중얼거렸다. 뿌옇게 흐려진 눈앞이 점차 선명함을 되찾았다.

그 또렷한 시야 안에서, 눈꺼풀을 한껏 내리깐 정난우는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당혹 번진 눈가가 붉었다. 본능적으로 핥아먹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색이었다.

제 품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눈도 못 마주치고 긴장된 호흡만 색색 내뱉는 거다. 묘한 착각이 잠 덜 깬 뇌를 뭉근하게 반죽했다.

작은 구멍 안을 한계까지 침범해 잠시 숨을 몰아쉴 때, 정난우는 꼭 그런 표정을 지어줄 것 같았다. 아픈데 빼 달라는 말도 못하고 이렇게 끙끙댈지도 모르겠다.

별 미친 상상에 중심으로 열기가 더 돋았다. 움찔 놀란 정난우가 교차로 얽힌 다리를 슬그머니 뒤로 뺐다. 의식은 어린애에 가까운 주제에 이게 뭘 뜻하는지는 아는 얼굴이었다.

에녹의 눈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걸렸다. 갑자기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느긋하게 상체를 일으켜 정난우의 다리 사이에 몸을 끼웠다. 강제로 벌어진 허벅지가 일순 굳었다. 그 느낌이 생생했다.

에녹은 머리를 깊이 내려 단아한 이마를 후 불었다. 가닥가닥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옆으로 사라락 넘어갔다.

 “정난우 어린이. 예민한 짐승 잘못 건드리면 이 꼴이 나요.”

덮치듯 누른 그림자 안에서 정난우는 사냥당하는 토끼마냥 얼어붙어만 있었다. 움직이는 건 상황을 열심히 살피는 눈동자뿐이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좀 애매했다. 느낌표보다는 물음표에 더 가까워 보이는 거다.

에녹은 불길한 느낌에 눈매를 찡그렸다.

 “야, 설마 너 이 상황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

 “…….”

정난우는 우물쭈물했다. 대답은 못하고 못박인 손끝으로 턱만 긁었다. 이게 뭐냐고 묻고 싶은데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에녹의 목 안에서 기막힌 실소가 끓어올랐다.

 “얘가 정말. 야. 이거 진짜 위험한 구도거든?”

 “……왜요?”

정말 설마 했다. 기가 막혀 일순 말을 잃었다. 날카롭게 주시해 오는 눈빛을 감지한 정난우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에녹이 취조를 시작했다.

 “너 학교 다닐 때 성교육 안 받았어? 배운 거 다 털어놔 봐.”

정난우는 다리를 벌린 야한 포즈로 순진하게 고민에 잠겼다. 성교육이라고 하면 나긋나긋하던 양호선생님 목소리만 떠올랐다. 과거를 파헤치며 천천히 대답했다.

 “남자와 여자의 이차 성징 배웠어요. 남자들의 성기는 외부에 있고 여자는 몸 안에 있고……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서 아기가 생긴다고…….”

 “그 정자와 난자는 어떻게 만나는데.”

 “체내수정으로…….”

 “지금이 생물시간이냐!”

에녹이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정난우의 목울대가 차게 경직했다.

 “당연히 포유류니까 체내수정을 하겠지! 얼빵한 소리 말고 섹스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눈이 확 돌아서 살을 섞는 그거!”

정난우의 딱딱한 표정이 차츰 심각해졌다. 반듯한 미간에 얼핏 주름도 졌다. 에녹은 충격 받은 얼굴로 숨을 멈춘 채 곧 이어질 대답을 예견했다. 그리고 정난우는 제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말했다.

 “그런 건 안 배운 것 같은데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질한 머릿속에 생각들이 뒤엉켰다.

열여섯까지 맹인학교를 다녔을 테니 시청각교육은 물론 없었을 거다.

하지만 10년이 흐를 동안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차마 포르노도 본 적 없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영화도 한 편 안 봤다는데 그런 동영상을 결제해서 봤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 이게 뭘 뜻하는지는 알아?”

에녹이 정난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다 반쯤 발기한 성기 위에 대 줬다.

그러자 이번에 확연히 놀라 귀까지 빨개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느껴야하는 스스로가 딱했다.

 “이건 남자가 섹스를 하고 싶을 때 몸에서 나타나는 반응이야. 이 정도는 알지?”

 “……네, 성감이 고조되면 그렇게 변한다고.”

머뭇거리던 정난우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손길이 닿자 민감한 살덩이가 더 심지를 세웠다. 에녹은 마른침을 삼키며 친절한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그 체내수정, …젠장.”

에녹은 사납게 이를 한 번 갈며 단어를 뜯어고쳤다.

 “아무튼 섹스라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고, 지금 이 구도가 보통의 연인들이 섹스할 때 하는 자세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에녹은 정난우의 오금 아래 양 팔을 끼워 올렸다. 정난우의 잠옷 대용인 헐렁이는 5부 바지가 자연히 허벅지 밑으로 흘러내렸다. 꾸준히 유산소 운동을 하는 허벅지는 매끈하고 탄력이 있었다. 에녹은 살짝 들린 엉덩이에 팽팽히 올라온 제 성기를 바짝 붙였다.

그 순간 무심결에 아랫입술을 씹어 물었다. 얼굴에 살짝 피가 몰렸다. 평소엔 그럴 생각이 없다가도 이렇게 적나라한 자세를 취하면 남자란 동물이 음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이해 돼? 보통 이런 자세로 연인들이 섹스를 해.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서 서면 그걸 상대의 몸에 넣었다 뺐다 운동하다가 절정에 이르면 정액을 싸는 거야.”

 “몸 어디에 넣어요?”

 “여자는 질에, 남자는 항문에.”

성실하게 답변해 주는 와중, 갑자기 뭔가 억울해졌다. 에녹은 멍하니 벌어진 윗입술을 보복하듯이 세게 빨았다. 혀끝에 닿는 감촉이 달았다. 가시 세운 눈빛이 허망할 만치 순식간에 녹아 풀어졌다.

애가 달아 조금 더 맛을 음미했다. 가지런한 이 안쪽을 살짝 긁자 정난우가 어깨를 움츠리는 게 보였다. 천 몇 장 사이에 두고 제 엉덩이 골에 파묻힌 성기보다 그 키스에 더 놀란 눈치였다. 정말 저 머릿속은 음악 빼고 뭐 하나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 게 없었다.

정난우가 헐떡거리며 입을 벌렸다.

 “나, 남자랑도…….”

 “가능해.”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턱을 꼬며 피했지만 에녹은 집요하게 따라와 기어코 또 젖은 입술을 물었다. 그 깨물리는 느낌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숨이 가빠 올랐다. 몽롱하게 고동치는 가슴이 덜컥거렸다. 벌리지도 다물지도 못한 입술이 자꾸만 떨려왔다.

이런 키스는 자꾸 심장에 무리를 줬다. 아파서 멍드는 게 아니라 혹사 당해 너덜너덜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싫지가 않아서 더 당혹스러웠다. 화끈거리는 뺨 위에서 에녹의 입술이 미끄러지다가 귓전에 멈췄다.

 “나중에 나랑 하자. 잘해 줄게.”

고막을 진동하는 에녹의 음성은 묘하게 늘어지고 거칠었다. 신음 같은 숨소리가 몇 번이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왔다.

정난우는 반대로 숨을 죽였다.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에녹의 말들이

갑자기 한데 뒤엉켜 쌈박질을 해 댔다. 기이한 의심이 또 불쑥 모서리를 드러냈다.

그거……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하는 거잖아요?

묻지도 못할 말을 곱씹고만 있을 때였다. 그가 옅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상한 질문을 했다.

 “속도위반 취미 없지, 너는?”

녹슨 사고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과속 이야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니까요.”

그가 바스러지는 웃음을 흘렸다. 진동하는 그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여 자꾸만 몸이 뒤틀어졌다.

 “그래, 이거 위험한 거라니까. 나 말고 누가 이렇게 올라타면 발로 급소를 차 버려. 알았지?”

에녹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침대 아래 내려섰다. 정난우는 덩달아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움직였다. 에녹이 사이드테이블에 올려 둔 바이올린을 건네며 말했다.

 “스케일인지 뭔지 그거 하고 있어. 난 이거 좀 빼고 올 테니까. 이러다 진짜 일 치겠다.”

에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 딸린 욕실로 사라졌다. 세찬 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뒤를 이었다.

 “맞아, 그 때 소개해 줬던 집. 지금 가는 중이야.”

에녹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그 대화상대가 자신이 아니었기에 정난우는 안전벨트를 매고서 가만히 손만 꼼지락거렸다.

라구나 비치가 전면과 측면에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낮 동안 기력을 소진해 버린 태양이 수평선을 향해 침몰하는 중이었다. 늘어진 솜사탕 같은 구름이 서서히 일몰을 준비하며 흘러갔다. 인공조명이 없는 바다의 풍경은 무료관람이 가능한 한 폭의 명화였다.

에녹이 대뜸 나지막이 웃었다.

 “시끄러워. 보긴 뭘 봐. 보면 뭐 달라져?”

정난우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다 유리 위로 미끄러졌다. 차창에 유령처럼 비치는 에녹의 얼굴이 차갑게 지문을 뭉겠다. 부드럽게 휘어 있는 입술을 뽀득뽀득 문질렀다. 거친 말투에 녹아 있는 그 매혹적인 미소가 손끝을 타고 스며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에녹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데 무겁지는 않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내일 당장 계약하려고. …뭘 그딴 걸 물어? 싫다면 당연히 딴 데 알아봐야지.”

뽀득뽀득. 조심스레 훔쳐보는 눈가도 문질렀다.

 “맥케이 씨,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굴고 그래. 그는 낯을 많이 가려. 그리고 오늘은 최대한 편안한 상태여야 하고.”

몰래 장나질 하는 듯한 손길이 뚝 멎었다. 정난우는 슬며시 눈을 굴려

차창 위에 흐리게 뭉개진 에녹의 눈을 바라보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그, ……는 나를 말하는 건가.

 “응, 환장하게 예뻐. 나보다 더 예뻐.”

내가 아니구나.

정난우는 잠시의 착각을 고이 접어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에녹의 얼굴을 감상했다. 마주보지 않아도 이렇게 훔쳐볼 수 있으니 드라이브라는 건 꽤 괜찮은 데이트였다.

 “그래. 진짜 약속. 다음에 꼭. 나중에 꼭.”

에녹은 핸즈프리를 껐다. 힐긋 고개를 돌리자 정난우는 오늘도 바다에 투신할 기세였다. 그렇게 좋은가 싶어 픽 웃음이 터졌다. 맞물린 손을 살짝 당겨 시선을 끌어왔다.

 “야, 나도 좀 봐 줘.”

멈칫 고개를 돌린 정난우는 난감하게 입을 다물었다. 진작부터 당신만 보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편안한 셔츠에 니트 차림이었지만 골격이 좋으니 그것만으로도 근사했다. 두 개 풀어 놓은 깃 위로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내가 왜 널 공항에서 납치해서 LA로 튀어왔는지 안 궁금해?”

납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어리둥절했다. 항상 그는 그런식으로 불쑥 나타나 후다닥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어제의 공항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기세였다.

공연 일정 후 이동을 하려는데 에녹이 갑자기 얼굴 가린 슈퍼맨처럼 나타났다. 캐이러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빈 몸이었다. 그가 대뜸 물었다.  ‘여권은?’ 그래서 대답했다.  ‘제 가방에…….’ 듣자마자 그는 한태영의 어깨에서 바이올린을 강탈하고 반대쪽 어깨에 저를 들쳐 업었다.

어떨떨한 얼굴로 반응 못하는 매니저들에게 에녹은 일방적인 이틀 휴가를  가를 명하고 중행랑을 쳐 버렸다. 따라붙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한태영은 요즘 나사 풀어진 자신의 모습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모른 척 그냥 내버려뒀지 싶다.

 “언젠간 물어보겠지 했는데 말이 없어서. 관심이 없는 거야, 나를 그만큼 믿는 거야?”

정난우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에녹이 먼저 제 마음을 꺼내 보였다.

 “나는 네가 나한테 뭔가 끊임없이 물어보고, 얘기해 달라고 조르고 궁금해 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런 것처럼.”

정난우는 눈동자를 움직여 꽉 얽힌 손 위에 고정했다. 그리고 교통정리 끝낸 단어들을 느리게 뱉어냈다.

 “그러는 에녹은 항상 저를 왜 따라다니세요?”

에녹은 예상외라는 듯 한쪽 눈썹만 꺾어 올렸다.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선뜻 어떤 대답을 꺼내야 하는지 잠시 고민의 기로에 섰다.

이유야 많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 사랑하니까, 옆에 있어주고 싶어서, 혹시 웬 해충이 널 야금야금 갉아먹진 않을지 걱정이 되어서. 기타 등등.

정난우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특별히 뭘 물을 필요가 없어서 그랬어요. 그냥 에녹이랑 같이 있는 거, 그 자체로 모든 시간은  ‘왜’라는 질문이 따로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전방을 주시하는 차가운 눈이 설핏 굳어들었다. 포개진 손에도 힘이 실렸다. 부드러운 얼굴과 달리 거칠고 딱딱한 정난우의 손마디는 그럼에도 얌전히 잡혀 있었다.

 “이번엔 국도 탐험 때와 달리 바이올린도 챙겨 왔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스케줄에 차질 없게 내일 비행기만 잘 타면.”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나만 있으면 된다 이거잖아. 그게 어디든 이유가 뭐가 됐든.”

 “……네.”

에녹은 말없이 핸들을 두드렸다. 자주 드는 생각이지만 정난우의 언어 표현은 어른스러운 듯 어린아이 같았다.

착색 없이 투명한 진심은 늘 짙은 여운을 남겼다. 좀 더 뭔가를 해 주고 싶어서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나 방금, 좀 병신처럼 감동했어.”

에녹이 실소 섞어 중얼거렸다. 정난우는 잠자코 있었다. 꽉 얽힌 손이 다가와 뺨을 쿡 찌르고 사라졌다. 손등으로 그 위를 비비적거렸다. 어쩐지 또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걸 꿋꿋하게 참아냈다.

에녹은 그림처럼 예쁜 저택들을 비집고 돌아다니다 속도를 줄였다. 몰고 온 차는 차고에 세워두고 바이올린을 한쪽 어깨에 맸다.

 “어때? 위치 좋지?”

그가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을 열며 물었다. 멀뚱멀뚱 올려다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완전 해안가 끝에 있는 집은 처음 봐요. 강원도만 해도 바다에 인접할수록 비싼데 라구나 비치면…….”

그 가격이 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에녹이라면 이런 집에서 살아도 위화감은 없겠다 싶었다. 할리우드 스타고 팝 스타고 수백, 수천 만 불짜리 저택에 산다고 들었다.

 “집 구하고 계신다더니, 여기로 이사 오시는 거예요?”

 “아직 계약 전이야. 너한테 보여주려고 오늘 내일 풀로 빌렸어.”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바이올린을 1층 응접실 소파에 내려두고 말했다.

 “시간 충분하니까 마음에 드는지 찬찬히 봐.”

 “……제가요?”

 “응. 네 맘에 들어야지. 같이 살 건데.”

이게 무슨 소리지.

당연히 전혀 이해를 못해 관자놀이만 긁적였다. 자주 놀러 오라는 말을 이렇게도 하는 건가 싶었다.

에녹은 그런 저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2층으로 안내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넓게 트인 살롱이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반들반들한 바닥을 밟아 곧장 발코니로 향했다.

에녹은 온 사방에 끝까지 내려와 있는 블라인드를 하나 걷어 올렸다. 투명한 여닫이 유리문이 드러나자 에녹은 곧장 그걸 옆으로 밀어냈다. 그가 문턱에 기대서며 바깥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너 바다 좋아하잖아. 눈도 자주 오면 좋겠지만 여긴 캘리포니아니까. 그건 뭐 다른 나라 가서 보자고.”

정난우는 그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해는 금방이라도 바다 아래 사라질 듯했다. 찬란한 석양이 수평선을 불태우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구름은 신이라도 강림할 듯 강렬했다.

미색의 대리석 바닥이 깔린 발코니에는 다정한 한 쌍의 라운지의자가 놓여 있었다. 에녹은 그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난우도 자연스레 다리 사이에 앉혔다. 크리스마스 때 창턱에 앉았던 포즈와 똑같았다. 에녹이 허리를 당겨 안으며 물었다.

 “어때. 근사하지? 조망권 침해하는 건물 하나 없고.”

정난우의 시선이 멀리로 떠밀려갔다. 그의 말대로 전경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몇 걸음 나가면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해변 가이기에 가능한 거였다. 도시의 삭막한 불빛들은 완전히 씨가 말랐다.

 “네. 예쁘네요. 휴양지 온 것 같아요.”

파도는 숨죽이듯 낮게 일었다. 습한 해풍이 머리카락을 헤집을 때마다 전신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몰에 물든 물결은 물고기 비늘처럼 조각조각 반짝거렸다.

 “비벌리힐스보다는 여기가 네 맘에 더 들 것 같았어. 나는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화려한 도시도 좋아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아, 그건 그렇지만 제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닌…….”

 “내가 굳이 널 여기에 왜 데려왔겠어. 너도 나중에 여기에서 살아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지 미리 보라고 데려온 거지.”

품 안에 싸인 정난우의 몸이 얼핏 경직했다. 머리카락 그늘 아래 눈도 조금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무슨 확신에 가까운 추측까지는 간 것 같은데 차마 입 밖으로는 못 내뱉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 고백도 못했는데 대뜸 동거부터 하자니, 저 단순한 듯 복잡한 머리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리와 봐.”

에녹은 혀를 차며 정난우를 일으켰다. 혼란의 바다를 헤엄치느라 정난우의 걸음마 못 뗀 발이 자꾸만 바닥에 끌렸다. 집 구경부터 빨리 끝낼 요량으로 앞으로 가 등을 보였다.

 “업혀 봐. 일단 후딱 한번 돌게.”

망설이는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 어깨너머로 끌어왔다. 얼떨결에 등에 업힌 정난우의 손끝이 목 앞에서 꿈틀거렸다. 에녹은 벌어진 다리를 양 허리에 단단히 끼웠다. 그리고 성큼성큼 큰 걸음을 옮겼다.

 “가구는 보지 마. 집주인이 원하면 넘겨준다는데, 내가 신혼집 가구 헌 거 쓸 만큼 낭만 없는 놈이 아니거든. 내 미적 감각은 믿을 만하니까 그건 염려 붙들어 매고.”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에녹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침실, 드레스룸,파우더룸, 욕실, 살롱, 다이닝, 홈 바, DVD룸, 서재, 와인저장고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에녹은 마지막으로 1층 구석으로 갔다. 문이 없는 아치형 입구 안에는 소파와 티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응접실의 용도로 보였다.

에녹은 짧게 턱짓하며 제가 생각해 둔 바를 줄줄 읊었다.

 “여기 말이야 다 치워 버리고 네 음악실로 쓰면 좋을 것 같아. 그랜드 피아노도 놓고, 너 가지고 놀 수 있는 악기들도 하나씩 놔두고. 저기 구석에 유리로 전시관 하나 짜 두자. 네가 좋아하는 음악가들 악보 같은 거 경매에 나올 때마다 내가 낙찰 받아서 차곡차곡 넣어 줄게.”

정난우는 등에 늘어진 채 반응이 없었다. 에녹은 바닥에 그를 내려주고서 몸을 돌렸다. 정면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흐리멍덩한 시선이 가슴팍을 헤맸다. 뺨도 귀도 희미한 붉은 기가 돌았다. 표정은 멍했다. 내내 맹하게 굴더니 이제 상황파악은 대충 끝난 모양이었다.

에녹은 일단 이실직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란 놈이 좀 믿음직스럽지가 못해. 소문이라는 거 원래 믿을 게 못 되는데 난 대부분이 사실이거든. 내가 아무리 진심을 말해도 네가 불안해하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에녹은 어색한 듯 맞잡아 꼼지락거리던 정난우의 손을 그대로 들어 제 목에 걸었다. 얇은 눈꺼풀이 움찔 놀랐다. 차마 거두지도 못하고 마냥 그러고 있을 수도 없어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에녹은 긴장한 허리를 감싸 한 팔로 바싹 끌어당겼다. 복부가 닿고 가슴이 닿았다. 충분히 밀착된 숨결이 까만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래도 이러고 있으면 떨리잖아. 그렇지?”

정난우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심장이 급격히 달아올라 박동을 높였다. 맞닿은 부위들이 다 화끈거렸다. 머릿속이 엉켜들었다. 뜨겁게 끓는 그 느낌이 불안했다.

에녹이 낮은 목소리를 느리게 뱉어냈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이것저것 겁나고, 나라는 놈은 영 못 믿겠고, 그런데도 좋아서 자꾸만 나를 따라와. 내가 길 터주면 넌 한참 고민하다가도 가만가만 걸음마해서 꼭 와 주거든.”

음영 깔린 에녹의 눈동자가 깊고 짙어졌다.

 “그리고 난 그런 네가 참 예뻐. 네가 고작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게 될 만큼.”

 “…….”

 “프러포즈라고 해 봐야 이렇게 멋대가리가 없어서 미안한데, 나도 그런 거 아직 해본 적 없는 초짜니까 이해해 줘. 그냥 지금의 나는 빨리 너한테 내 마음을 전하고, 얼른 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초조해. 사실은 아까도…….”

에녹은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결국 털어놨다.

 “욕실에서 자위하면서 네 생각해버렸어.”

 “……네? 뭘……했다고요?”

 “그러니까 내 상상 속에서 널 홀딱 벗기고 네 항문에 내 걸 넣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고. 그러다 네가 좋아서 우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싸 버렸다 고 말이야.”

적나라하고 난잡한 묘사였다. 정난우는 일순 한 대 맞은 얼굴을 했다. 상황하던  것마저 깡그리 날아가 하얗게 탈색된 얼굴이었다. 충격이 너무 심했나 싶었지만 언제까지고 애 대하듯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녹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 정말 또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게 하필 딱 오늘 아침에 봉인해제가 돼 버린 거야. 그래서 솔직히, 이전까지 그랬듯이 널 소중히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주기만할 자신이 없어지고 있어.”

밀가루반죽처럼 창백했던 얼굴에 확연히 열꽃이 피었다. 에녹은 그 반응에 못내 안심했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보다는 부끄러워하는 편이 백 번 나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일 때였다.

 “야, 움직이지 마.”

에녹은 성난 듯이 거칠게 말했다. 무심결에 몸을 뒤틀던 정난우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에녹의 얇은 슬랙스 안쪽, 딱딱하게 부푼 성기를 둘이 동시에 느낀 거였다.

 “움직이면 더 심해져. 내가 전에 하고 싶은 거 진짜 못 참는 성격이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가만히…….”

에녹은 미미하게 열 오른 얼굴을 정난우의 뺨에 붙였다. 그대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정난우는 박제짐승처럼 뻣뻣하게 굳어 아무것도 못했다. 에녹은 고조된 성감을 잠재우려 애쓰며 속삭였다.

 “쉬이. 괜찮아. 그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돼.”

무지한 정난우에게도 완연한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뜨거운 그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금속성이 진하고, 둔탁한 듯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거칠게 폭발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휴지기의 화산이었다.

정난우는 등줄기를 긁어내리는 오싹한 소름에 숨을 멈췄다. 그 느낌이 현기증을 불러왔다. 에녹은 충동을 조각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얕고 밭게 흐드러진 숨결이 그 증거였다. 가까이 밀착된 귀 연골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에녹은 한참 뒤에야 평정을 되찾고 입을 뗐다.

 “우리 연애하자. 서로 열렬히 원하고 사랑해주는 그런 연애.”

피습 같은 고백이었다. 창자를 찔린 마냥 정난우는 파리한 입술을 떨었다. 노골적으로 흘려댄 단서들을 하나로 꿰맞추는 단어가 기어이 그의 입에서 나와 버렸다.

연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단단하게 묶는 그 단어가.

 “이렇게 안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리고 오래 같이 살자. 여기에서.”

에녹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 또 씹었는지 살짝 부풀어 붉어진 윗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가슴에 약한 불꽃이 번졌다. 심장이 늑골을 향해 튀어 올랐다. 입술을 벌려 깊이 맞물렸다. 에녹은 조심히 혀끝을 밀어 넣었다.

가늘게 흐르던 호흡이 재차 멎는 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고정된 혀를 느리게 포개 문질렀다. 뜨거운 살덩이를 공들여 휘감았다. 묽은 타액이 좁은 목구멍 너머로 몇 번이고 넘어갔다. 신음인지 탄식인지 가날픈 뭔가가 이어진 통로를 울렸다. 통제를 잃기 직전에 물러났다.

정난우는 다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완전히 놔주지 않고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그 자극적인 숨소리에 홀려 눈을 깜빡였다. 부드러운 표피가 부대끼는 그대로 느리게 입을 열어 속삭였다.

난우야.

그러자 정난우의 뼈마디가 일순 모두 뻣뻣해졌다. 아랫배에 붙은 에녹의 남성이 또 뜨겁게 윤곽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에녹이 재차 속삭였다. 난우야. 정난우의 붉은 귀가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에녹은 정확한 발음으로 낯선 언어를 굴리고 있었다.

널, 사랑하고, 있어.

그가 말하는 언어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해서 도리어 딱딱했다. 그럼에도 못 견디게 달콤하게 느껴졌다. 수도 없이 연습했을 그 한마디가 온 마음을 녹였다. 뼈도 관절도 물렁물렁 액체처럼 흔들렸다.

 “시간 얼마나 주면 돼?”

그가 맞닿은 입술을 문대며 물었다. 머리카락의 장벽을 꿰뚫는 시선은 달궈진 칼날 같았다. 고작 그것만으로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꽉 짓눌려 으스러지기 직전인 목소리를 힘겹게 혀끝으로 떠밀었다.

 “제가, 제가 만약, 거절하면…….”

에녹은 곤란한 주름을 미간에 채웠다. 그러나 동요 없이 대꾸했다.

 “그야 상처받겠지. 그리고 또 금방 툭툭 털어내고 돌진할 거고. 나 좀 끈질기잖아.”

안 갈 생각인 거다. 처음부터 이 남자는 거절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기뻐하는 스스로의 내심이 못내 참담했다.

 “그런데 너, 정말 거절할 생각이야?”

그의 질문에 정난우는 신음을 삼켰다 무심결에 내저으려던 고개를 고정하느라 목덜미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가 예측하는 것보다 자신은 아마 그를 훨씬 더 좋아하고 있을 거다.

사랑,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녹이라는 남자가 항상 그렇게 빛나고 예뻤으면 하고 바랐다.

그가 떠날까 두렵고, 그가 떠나지 못할까 두려웠다. 달콤한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 그를 가지고 싶었지만, 그가 흠집나기 전에 도망가주고도 싶었다.

온통 시커멓게 그을린 모순투성이였다.

난우야, 에녹이 약점을 들쑤시듯 또 이름을 불렀다. 덩어리 같은 숨이 식도에 걸렸다. 폐가 종잇장 두께만큼 짜부라진 듯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마.”

에녹이 나지막이 충고했다. 단호하지만 상냥한 목소리였다. 허리를 감싼 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가만가만 주물러 왔다. 그 손길에 흐물거리던 몸은 아예 녹아내릴 듯했다. 토막 난 호흡이 천천히 그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할딱이듯 벌어진 입술 위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해. 고작 몇 번 차이는 것쯤 기다려줄 수 있어. 문제는 너지.”

그다운 당당함이 숨결에 녹아 있었다. 정난우는 그걸 고스란히 받아 마셨다. 달짝지근하면서 반대로 씁쓰레한 맛이었다. 머리가 몽롱해졌다.

 “상처를 주더라도 수위조절은 해. 그래야 나중에 네가 이런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덜 아플 테니까.”

정난우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괴기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이 통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를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싶을 만큼 좋아하지만, 그가 다칠까봐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공들인 프러포즈가 거절당할 위기에서도 몰아세우기보다는 기다려주는 걸 택했다.

갑자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순간 의식이 저만치 떠밀려갔다. 눈앞이 캄캄하게 암전되었다.

한 순간 우주를 헤맸다. 생명 없는 행성들이 쓰레기처럼 암흑을 떠다녔다. 풀잎 하나 맺지 못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우주는 제 폐허 같은 내부였다. 사장된 감정 조각들이 버려진 채 한없이 떠도는 공간이었다. 그 곳에서, 절대로 존재할 리가 없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건 에녹의 숨소리였다. 검게 물들어 의지조차 잃었던 사고가 본능적으로 그 희망을 붙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겨우 입을 열었다.

 “얼마나……한데요?”

실바람처럼 목소라는 허망하게 흩어졌다. 에녹은 바짝 세운 귀를 정난우의 입술에 가져갔다.

 “미안. 못 들었어. 다사 한 번 말해 봐.”

새된 숨소리가 몇 번이고 귀를 적셨다. 에녹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다시금 떨려오는 몸을 강하게 옭아매 품어주었다. 그 숨 막히는 압박감이 모든 의심이나 두려움을 산산이 부숴주길 바랐다.

이윽고 정난우는, 마치 우는 것처럼 속삭여 물었다.

  “당신은, …얼마나, 단단한데요?”

집중하느라 무심결에 가늘어진 눈매가 그대로 정지했다. 에녹은 제 목덜미를  꽉 끌어안아 당기는 정난우의 간절함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매달리고 있는 건 자신인데 왜 정난우가 그 역할을 뺏어가는 건지 이해가 안됐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뇌리에서 교차했다. 미세하게 허공을 짚어가던 눈동자가 어느 한 군데서 멎었다. 불현듯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 아닌 확신이 굳어졌다.

 “정말 그렇게 단단해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만큼. 정말, 그래요?”

정난우의 물음은 다급했다. 거의 모든 체중을 맡겨왔다. 에녹은 흔들림 없이 그 몸을 지탱해 줬다.

품 안의 몸이 바르작거렸다.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그 끝에서 묻는다는 게 고작 그런 거였다. 남겨질까 무서웠던 거라고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 대더니, 그 때부터 이 바보는 자신을 더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예민하게 돋아 있던 눈에도 애잔함이 물들었다.

이러니 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있나.

에녹은 헐떡이는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떨리는 귓바퀴 안으로 심폐소생술 같은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강하지 그럼. 네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 순간, 정난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첫 숨을 게워내는 갓난아기처럼 날카롭게 호흡이 터졌다.

*

『제작기획서 나온 거 함께 첨부해서 보낸다. 투자사 이미 확보 끝났고, 작업 완료 최소 사흘에서 최대 일주일 정도 예상.』

좋은 타이밍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에녹은 재빨리 첨부파일을 받아 열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 가장 중요한 제작 스케줄부터 살폈다. 개봉 예정이 12월쯤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그렇지.

에녹의 서늘한 눈동자에 한순간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그는 몇 번이고 손가락을 튕기며 기쁨을 삭였다. 언제가 됐든 올해만 안 넘기면 되는 거였다.

느긋하게 눈을 움직여 문서의 첫 페이지부터 정독해 나갔다. 크랭크인 예정은 5월이었다. 5월이면 끽해 봐야 4개월 남았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프리-프로덕션 계획표가 미친 듯이 딱딱해 보였다. 이게 가능할지 의심이 돋을 정도였다. 그래도 루스라면 스태프들을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한이 있어도 해낼 거다. 스태프들의 곡소리가 절로 환청으로 깔렸다.

루스나 자신이나 골든 글로브에서 미끄럼틀을 탔으니 아카데미 시상식도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이 지옥 같은 스케줄은 올해를 깨끗하게 포기한 루스가 어지간히 의욕에 불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런 루스의 야망은 수익 시뮬레이션 표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수익 예상 - $ l,500.000.000』

…얼마라고?

에녹의 눈이 미묘하게 변했다. 매끈한 눈썹 한쪽 역시 슬쩍 위로 치솟았다. 잘못 봤나 해서 숫자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 그러나 잘못 봤다면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뭉개지는 거였다. 저를 데리고 고작 1억5천 예상했다면 그거야말로 결투 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노려보듯 한참을 되읽었다. 물론 몇 번을 봐도 15억이 1억5천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에녹은 침대 헤드에 등을 늘어뜨리며 팔짱을 꼈다.

이 인간이 돌았네, 돌았어. 아주 저 혼자서 세기에 길이 남을 초대형 블록버스터를 찍으려나 보네.

에녹의 눈시울이 가늘어졌다. 착각도 꿈도 자유라지만 아무래도 이 천문학적 예상수치가 못내 찜찜했다.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을 들어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내가 개런티 협상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뭐? 예상 박스오피스 십오억 불? 이거 못 벌어내면 내 탓이라 이거냐?』

이게 문제였다. 루스는 에녹 자신이 의사를 밝힌 첫 날부터 높은 개런티는 못 맞춰 준다고 못 박듯이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를 충분히 이해했다. 작품 자체가 좋다면 2백만 정도 까내는 건 고민거리도 못 됐다.

그런테 막상 계약 직전에 루스가 말을 번복했다. 제작비 예산이 대폭 뛰었으니 개런티를 충분히 높여주겠다고 제안한 거였다. 뭐 더 까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 주겠다는 건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계약을 끝낸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뭔가 함정 같은데.

진지하게 수익 그래프를 머리로 굴려보고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한창 폭탄 속을 뒹구느라 내일쯤에야 반응할 줄 알았던 루스가 아예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예녹은 곧바로 받았다. 루스가 피곤한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그래서. 자신 없냐?》

이렇게 강하게 나오면 또 할 말이 없었다. 에녹은 거하게 선빵 맞은 사람처럼 기막힌 실소만 내뱉었다. 루스는 누워 있는 건지 구겨져 있는 건지 다소 짓눌린 음성을 흘렸다.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로 일찍이 정하고 시놉부터 시작해서 모든 스토리며 스케치며 다 구상한 거라고. 그건 제작비 역시 마찬가지야. 주인공이 너로 굳어지자마자 모든 예산이 전체적으로 껑충 뛰었어. 네가 기본적으로 가져다주는 게 있기 때문에 배우, 스태프 캐스팅은 물론 CG작업까지 급을 대폭 높일 수 있었던 거고.》

와아. 이 인간이 사람 잡겠네.

에녹은 황당한 얼굴로 반박했다.

 “인간적으로 내 개런티가 수익를에 비해서 양심 없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걸로 생색은 내지 말자. 예산 빵빵해서 영화 잘 나오는 거야 나도 좋지. 그런데 대뜸 제작기획서에 예상 수익이랍시고 십오억 써 놓으면 주연 배우가 황당할까요, 안 황당할까요?”

수화부에서 희미하게 부싯돌 마찰음이 들렸다. 담배도 잘 안 피우는 인간이 이맘때면 헤비스모커로 돌변했다.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일 시간이 딱 지났을 즈음, 뭉개진 발음이 넘어왔다.

《너 직전 영화 박스오피스만 얼마 났는데.》

 “팔 억이 조금 안 됐지. 차트 꿰고 있으면서 왜 물어?”

《아니까 묻는 거다. 그거 전 세계 네 팬들이 네 껍데기 보려고 치른 값이 대부분이야. 그걸 기본 수치로 내가 수익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게 십오억이고. 네가 장담했던 대로 내가 원하는 그림 속에 들어가만 준다면 불가능은 아니야.》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지만 결국 맥락은 같았다. 흥행 파워 있는 배우 데려와서 최상의 무대를 깔아줬으니, 망하면 배우 탓이다 이거였다.

루스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적어도 내년 시상식에서 최소 일곱 개 이상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되게 할 거야. 네가 남우주연이라도 거머쥘 정도로 잘 해 준다면, 십오억? 우습지.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해.》

 “세계정복도 꿈꿀 기세네. 이쯤 되니 욕을 해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나도 헷갈려.”

《너 며칠 전에 라구나 비치에 이천만 넘는 저택 계약했다며.》

루스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에녹의 눈매가 갸름하게 좁아졌다.

 “그래. 동네방네 소문 다 났다. 그게 뭐.”

《개런티에 위약금까지 토해낼 생각 없으면 그냥 닥치고 집중이나 하란 말이야. 십오억을 지불하라는 것도 아니고 벌어오라는 건데 왜 난리야?》

루스는 목소리에 심지도 세우지 않고서 막말을 해 댔다. 누가 들으면 15억이 어디 옆집 개 이름인 줄 알 거다.

말 그대로 지출이 컸던 에녹은 웃는 얼굴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받아먹은 거야 충분히 채워 넣을 수 있어도 위약금까지는 좀 곤란했다.

잔고를 탈탈 털면 가능은 했다. 하지만 신혼을 기다리는 예비신랑은 앞으로 돈 쓰고 싶은 데가 많은 법이었다.

왠지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에녹은 가벼운 한숨을 섞어 웃었다.

 “그래. 됐다, 됐어. 그거 못 채운다고 뭐 날 죽일 거야, 살릴 거야. 난 몰라.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피 한 방울까지 고아서 헌신해 볼게. 됐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감독 혼자 이르게 샴페인 터뜨린 것까지 자신이 책임져 줄 이유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루스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잘 들어, 에녹. 내가 지금 한계까지 보는 수치가 딱 이십억이야.》

가관이다. 에녹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게 실현된다고 가정했을 때 네가 가져갈 러닝개런티만 해도 일 억이 되지? 그거면 너 내년에 당장 할리우드 톱 수익으로 이름이 오를 건 물론이고, 그거 보통사람들은 수십 대를 거쳐서 뼈가 휘게 벌어도 손에 못 쥐는 금액이다.》

 “우리 지금 게임머니 얘기하는 거였냐?”

《장난치지 말고, 자식아. 너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은 거야. 그건 신의 적극적 편애가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이고. 당장 네 곁에 정난우 씨 보면서 뭐 느끼는 거 없어?》

 “걔가 왜. 뭐.”

《난우 씨는 고소득자에 속해.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재능도 있으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백 년 가까이 공연노예로 살아야 가질 수 있는 금액이 그 일억이라는 가치야.》

 “미쳤어? 백 년 노예? 말을 해도 그 따위로, 내가 그 꼴을一 “

 ‘봐 줄 것 같아?’라고 소리치려던 에녹이 불현듯 이를 사려 물었다.

이 달콤하게 무르익기 시작하는 관계가 들킨대도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그 겁 많은 정난우가 문제였다.

루스가 뭐? 했지만, 에녹은 퉁명스럽게 말을 돌렸다.

 “알았다고. 감독님 염원대로 필름에 뼈를 박을 기세로 할 테니까 잔소리 그만합시다. 누가 그 돈이 적다고 했냐? 왜 가만히 있던 사람 양심 털고 난리야.”

루스는 픽 웃더니 그제야 당근을 꺼내 흔들었다.

《근거 없이 블러핑날린 거 아니니까 넌 배역 연구나 계속 잘하면 돼. 내가 영화 흥행 성적 때려 맞추는 데에는 귀신같다는 거 잊지 말고.》

에녹은 매정하게 끊어진 전화를 애증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박스오피스 20억이면 과거 흥행 신화를 썼던 로맨스영화의 기록이다. 물론 배우고 스태프고 제작비고 거의 최고로 처바른 영화였다. 루스는 그 아성마저도 눈독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꿈 깨라는 소리는 끝내 못했다. 스스로가 장담했듯이, 박스오피스 현황 점치는 루스의 능력은 가끔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1억이라…….

정난우 100년 치 공연수익이랬다. 자신이 영화 한 편 당 개런티와 러닝개런티를 합한 평균치는 5천에 달하니, 그것만 해도 50년 어치다.

왼손 끝이 흉하게 못박이고 턱의 피부가 까맣게 죽을 정도로 죽도록 연습해서, 끔찍한 대륙횡단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벌 수 있는 돈. 그걸 고작 몇 개월 피로만 참는 대가로 손쉽게 얻을 수도 있는 거다, 자신은.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 쏟은 노력들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데뷔 이후부터 세기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는 정난우는 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에녹의 차가운 눈동자에 사나운 빛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 못마땅하게 짜증내던 스스로가 조금 불쾌해진 탓이었다.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입술을 헐도록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정난우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에녹은 랩톱을 접어 사이드테이블에 밀어두고 한 손을 까딱였다.

 “이리 와.”

힘없는 시선이 팔에 엉겨붙더니 이내 타박타박 걸어왔다. 물기 덜 마른 머리는 평소보다 더 새카맸다. 낯빛은 유독 창백했다. 모국 리사이틀 전국투어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의 여파였다.

정난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끌어와 다리사이에 앉혔다. 자연스레 구부러져 있던 등을 가슴에 편히 기대게 했다. 에녹은 쓰게 혀를 찼다.

 “아주 그냥 상온에 며칠 놔둔 채소처럼 푹 늘어졌네. 그렇게 힘들었어?”

고개를 끄덕일까 흔들까 정난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야 물론 기자회견은 지옥과도 같았지만 지금 제가 시무룩해져 있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샤워하면서 힐끗 살펴본 무언가가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 거였다.

 “네, 좀…….”

결국 애매하게 긍정하고 말았다. 에녹은 상체를 단단히 동여 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공연은 끊임없이 하는 이유가 뭐야? 역시 돈 때문인가?”

지척에서 쏟아지는 낮은 음성에 무심코 뒷목이 뻣뻣해졌다. 뜬금없이 쏘아진 질문보다 그 느낌에 당황해 정난우는 절로 어깨가 움츠리고 말았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요.”

 “돈 때문은 아니란 소리?”

에녹은 차라리 돈 때문이라고 말했으면 싶었다. 그건 충분히 제가 해결해줄 수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정난우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돈을 벌어야 생활이 되는 건 맞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공연을 다니든 시골마을에서 작은 애들을 가르치 주는 일을 하든. 사는 데에 필요하 만큼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제 손엔 바이올린이 들려 있을 테고, 전 그거면 사실 아무래도 좋거든요.”

 “그럼 굳이 이렇게 빡빡하게 돌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는 거 아닌가? 가끔 바쁠 때 보면 질릴 정도던데.”

정난우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에녹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바쁘게 살면 편해서요.”

에녹의 한쪽 눈초리가 느른하게 가늘어졌다. 관찰의 눈빛을 세우며 의문을 제기했다.

 “몸은 녹초가 되는데, 그게 편하다?”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요. 그냥 정신없이 살다 보면 시간은 훌쩍 가 있고, 흘러간 것들은 점점 옅어지고. 그게 좋았어요.”

에녹이 따가운 침묵을 숨소리에 실었다. 뺨으로 쏟아지는 그의 눈빛은 살가죽을 따끔하게 할 만큼 매섭기도, 뜨겁기도 했다. 영문을 몰라 그늘 아래 눈만 굴렸다.

그는 마치 야단칠 것 같은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그는 웃었다.

 “재밌는 소릴 하네.”

거칠거칠하게 거스러미 돋은 기세가 단번에 쓸려나갔다. 옆구리에서 대각선으로 올라와 어깨를 쥐고 있는 그의 손 위로 그림 같은 얼굴이 내 려앉았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앞으로는 바쁘게 사는 게 싫어지겠는데?”

 “…무슨 말이에요?”

 “내가 끈질기게 난입했던 시간들을 너는 곧 그리워하게 될 거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게 아쉬울 만큼.”

정난우는 이해 못하는 얼굴로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에녹은 랩톱을 다시 열어 정난우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잠금을 풀자 직전까지 보고 있던 제작기획서가 곧바로 화면을 채웠다.

 “삼월부터는 바빠질 것 같아.”

에녹은 제작 스케줄 페이지를 찾아 넘기며 말했다. 정난우가 일순 멈칫하더니 천천히 물었다.

 “왜요?”

 “루스가 좀 전에 제작기획서를 보냈어. 여기 보이지? 삼월부터가 배우 훈련이랑 리허설이 시작되잖아. 촬영은 오월부터 구월 정도까지고.”

에녹은 랩톱 화면을 검지와 중지를 교차로 튕겨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횡단하는 화살표들이 있었다. 다른 건 안 보이고 그가 찍어준 것만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정난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평소에도 흐리멍덩하기 일쑤인 눈동자는 초점이 묽게 풀어졌다.

3월부터 9월까지면 최소 6개월인 거다. 그는 조연도 아닌 주연이었다. 정신없이 바쁠 거다. 당연히 지금처럼 안락한 시간도 없을 거다. 설레는 고민을 하느라 현실을 잊고 있었다.

그 실망하는 내심은 에녹에게 투명하게 읽혔다. 투정도 안 부리고 가만히 수긍하는 모습이 참 묘한 감정을 불러왔다. 섭섭하기도 하면서 가엾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뭔가 아무튼 복잡했다.

에녹의 눈가에 흐린 미소가 걸렸다.

 “야, 너 이거 반칙이야.”

우울하게 내려앉아 있던 눈꺼풀이 살짝 위로 향했다. 왜요? 그렇게 묻는 듯했다. 에녹은 정난우의 옆얼굴을 뻔히 주시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상기시켰다.

 “잊은 모양인데 너 아직 나한테 프러포즈에 대한 대답 안 했어. 시간 좀 달라며. 그래서 줬잖아. 그런데 얘가 벌써부터 애인처럼 구네. 남 속은 지금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정난우는 마치 잊고 있었던 것처럼 아랫니를 혀끝으로 덮었다. 작게 들이켜 멈춘 숨이 지척에서 생생했다.

 “머리 굴려 조련하는 거면 깜찍하기라도 하지.”

 “…그런 거, 아닌데.”

 “알아, 그런 거 아니라는 거. 그래서 가끔 네가 무서울 정도야. 몰아가는 건 분명 난데, 희한하게 그 안에서 번번이 홀려서 정신 못 차리는 것도 나라는 생각이 들거든.”

에녹은 묘연한 말을 중얼거렸다. 풀 길 없는 우주 같은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할 말은 없었다.

프러포즈에 즉각 대답을 못 한 것도,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었다. 충동에 이끌려서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게 두려워서 그랬다. 냉정을 되찾은 뒤에 아주 깊이 고민해 보고 싶었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다음날부터였다. 에녹은 평소처럼 거침없이 뜨겁게 다가왔다. 자신은 그런 그를 방치했다. 방치하는 걸로 모자라 동조했다. 변명의 여지없이 이미 마음을 빼앗긴 거였다.

도망쳐 줄 생각 같은 거, 애초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거다

 “난우야.”

뜨겁게 꼬인 상념을 그의 호명이 썩둑 잘라냈다. 그는 이렇게 약점이라도 쥔 듯이 자꾸만 난우야, 난우야, 해 댔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난우는 그 친근한 호칭에 순식간에 귓불을 붉혔다.

 “네. 말해요.”

 “거래를 하자. 네가 어느 날 대답해줄 건지 정해주면, 나는 그 바쁜 촬영 스케줄 도중에서도 서로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야.”

정난우의 귀가 순간 쫑긋했다. 표정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쨌든 솔깃하긴 한 거였다.

 “어때, 콜?”

에녹은 웃는 입술로 붉은 귀를 잘근 물고 놀며 반응을 기다렸다. 작게 맺힌 귓불은 뚫은 자국 없이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그 말랑말랑한 살을 입술 새로 말아 안으로 끌어왔다. 흠칫 놀라 굽는 어깨를 더 조여 안았다. 혀끝을 밀어 살을 문지르고, 이로 살짝 물어보기도 했다. 무심코 흘린 탄식에 정난우는 등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 미세한 진동에 위기감을 느꼈다. 에녹은 인상을 찡그리며 맛있는 살덩이를 뱉어냈다. 그 순간 정난우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 단번에 풀어졌다.

발개진 뺨에 잇자국을 내 보고 싶었다. 짙은 눈빛을 느낀 정난우가 본능적으로 얼른 입을 열었다.

 “그, 이번에 다녀오시는 날…….”

정난우는 젖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모델로 있는 브랜드 화보 촬영 때문에 파리 로케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동안 꼭 머릿속을 정리해 놓을게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에녹은 갈라진 목소리로 아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니, 잊고 싶었던 거였다. S.”S 시즌 화보 촬영이 코앞이었다. 일정에 지장이 없으려면 적어도 이틀 후에는 저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이 나라를 떠야 했다.

 “미안할 거 없어. 길게는 몇 달까지도 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조급한 거지, 너는 지금 충분히 속도를 내는 중이야. 어쩌면 네 입장에서는 과속 일지도 모르고.”

에녹은 큰 손으로 까만 정수리를 덮어 누르며 위로했다. 뜨끈한 체온에 눈꺼풀이 늘어졌다. 정난우는 에녹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요, 에녹.”

 “응. 왜?”

 “어떻게 만나요? 엄청 바쁠 텐데.”

재촉하는 법 없는 정난우가 그새를 못 참고 물어 왔다. 표정은 꽤 진지하고 무거웠다. 또 며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했던 에녹은 노글노글하게 풀어졌다

 “콜 시트 나오면 내가 완벽한 계획표를 짜서 줄게.”

 “콜 시트가 뭐예요?”

 “아. 배우들 촬영 시간하고 촬영 장소 같은 것들을 표로 정리해두는 거 있어. 그거 나오면 내가 네 스케줄 표랑 비교해서 어느 날 만날 수 있는지, 어디서 보면 되는지 대강 나와. 그런 거 딱 정리해 두고 그대로 하는 거지.”

이해했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워낙 여기저기 날아다녀서 이동하는 시간만도 엄청 걸릴 텐데,가능할까요?”

적극적으로 묻는 모습이 뿌듯했다. 에녹은 매끈한 뺨에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안 돼도 되게 해야지. 전에 말했잖아. 한 시간이든 십 분이든 어때.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봐이지 그럼.”

정난우는 멍하니 감탄사를 삼켰다. 에녹의 거침없는 말이 문득 지난날을 눈앞으로 끌어온 거다.

눈 오는 야경을 선물 받은 크리스마스. 그가 그렇게 열렬히 뛰어가 거친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는 말을 건넬 상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부럽기도 했었던 그날의 기억이 뇌리에 젖어들었다.

자신이 부러워하던 사람이 저 스스로가 된 거다. 그건 몹시도 낯설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항상 평범한 행복을 꿈꿨다. 부유하지 않아도 단란한 가족, 서로 다투기도 하고 위해주기도 하는 친구와 연인, 땀 흘려 번 돈으로 가난한 풍요를 나누는 그런 삶.

그러나 늘 제가 부딪친 세상은 험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간절히 원했던 건 늘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바스러져 흘러갔다. 손 안에 남은 건 사랑하던 이들이 부서진 날카로운 파편들뿐이었다.

그 끝에서 불쑥 튀어나온 에녹이라는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 굳건하고 단단하게 남아준다면 완벽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간 꿈꿔 온 행복이 낱낱이 현실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 그마저 부서진다면 더는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다친 몸을 추슬러 일어났던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절망이 될 거다. 그걸 정난우는 꽤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은 용기의 문제였다. 에녹은 가시밭길에 고운 모래를 뿌려서 다듬어 둔 길을 만들어 주었고, 몇 발자국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또 떨면서도 그 길을 밟아 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 제가…….”

정난우가 머뭇대듯 입을 열었다. 에녹이 응? 하며 귀를 가까이 붙였다.

 “촬영 들어가시면, 아마 제가 더 한가할 거예요. 다 같은 곳에 묵으실 텐데, 혼자 이탈하면 사람들이 나쁜 말, 뒤에서 할지도 모르고…… 전 바쁘긴 해도 중간 중간 이틀, 사흘씩 여유 있을 때도 있고, 그러니까…….”

에녹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이리 서론이 긴가 싶었다.

 “응. 그러니까?”

 “제가…….”

 “응. 네가?”

부드럽게 말미를 북돋아 주었다. 정난우는 불그스름한 눈가를 파르르 떨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찾아…갈게요. 어디로, 오라고 하시면 제가…… 공연만 제대로 하면 되니까…….”

정난우는 윗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땅을 파고들 기세로  ‘그 땐 제가 많이 갈게요.’ 하고 있었다. 움츠러든 몸은 작아지다 못해 사라질 기세다.

에녹은 말이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지해 있었다. 조바심에 정난우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왜?”

그가 불쑥 물었다. 낮게 잠긴 음성이었다. 정난우는 곤란한듯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에녹이 재차 물었다. 왜.

온 몸의 열기가 얼굴로 몰려들었다.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박동을 올렸다. 꽉 조여 오는 시선이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모르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실토했다.

 “저, 저도…… 비행기 타고서라도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에녹의 단단한 눈매가 동요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딱딱 끊어지는 시선은 정난우의 얼굴 곳곳을 빠짐없이 배회했다. 질끈 감긴 눈꺼풀이 떨리는 게 생생히 보였다.

고작 그 얘길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였다. 고작 그런 허름한 말로 제 단단히 여문 속을 또 깨부순 거였다.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가 전신을 휘돌았다. 절로 숨결이 거칠어졌다.

메마른 목구멍을 마른침이 몇 번이고 들쑤셨다. 피부를 살짝 벗겨 그 아래를 핥고 싶을 만큼 잔인한 충동이 일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나중에 이 녀석을 벗겨 통째로 한번 씹어 삼키고 나면 혹시 제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몇 날 며칠을 헐도록 뒹굴고 싶을지도 모른다. 촬영하다가도 불쑥 생각나 서 버릴지도 모르는 거다.

그건 정말, 순수한 공포였다. 에녹은 거칠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야, 섰을 때 움직이지 말라니까.”

치골에 맞붙은 엉덩이의 움직임이 그제야 딱 멎었다. 창백한 어깻죽지에 코를 묻었다. 관자놀이에 닿는 정난우의 매끈한 얼굴이 화끈거리는 열기를 뱉어냈다. 녹아내릴 것 같은 온도였다.

정난우의 속살도 이렇게 뜨거울까.

온갖 음탕한 생각이 머리를 달궜다.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송진가루도 악기 냄새도 깨끗이 씻어낸 날 것의 향기가 폐를 들쑤셨다. 끝까지 안 갈 테니까 잠깐만 만지기만 하면 안 되겠냐고 난봉꾼처럼 속삭이고 싶은데,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포기했다.

 “젠장, 하고 싶어 돌겠네. 진짜.”

에녹은 사나운 말을 씹어 삼켰다. 그 괴로움이 생생하게 전해져 와 정난우는 당혹했다. 뭐가 하고 싶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조목조목 알려줬던 섹스를 말하는 거였다.

문득, 아까 욕실에서 저를 못내 우울하게 만들었던 생각이 다시금 뇌리를 점령했다. 손가락이 절로 굽어들었다.

자신은 손끝 감각이 꽤 섬세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그가 발기한 성기에 손을 끌어간 순간 그 크기가 짐작이 갔다. 매일 몇 번씩 보는 제 것과는 비교가 안 됐다. 그게 정난우에게는 정말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아무리 봐도 정말 안 들어갈 것 같던데요…….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정난우는 또 우울해지고 말았다.

포토그래퍼 왓츠의 눈에 비치는 에녹 밀리건은 늘 완벽에 가까웠다. 에녹은 스스로의 장점을 한계치까지 끄집어낼 줄 아는 영리한 피사체였다.

얼굴형부터 이목구비의 비율과 매치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부담이 없는 거다. 콘셉트의 이해도도 빠르고 표현력도 풍부했다. 따로 지시 할 것이 없이 작업은 항상 순조로웠다.

파리 일정 첫 날은 스튜디오 촬영이었다. 오픈 촬영은 오후 3시부터인터라, 현재 실내에 있는 건 에녹과 스태프들뿐이었다.

 “이건 색채를 다 죽이는 게 더 근사사하겠어. 이야, 눈빛 좋네.”

왓츠가 가늘게 뜬 눈으로 찬사했다. 에녹은 그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려 모니터를 살폈다. 키 작은 왓츠가 머리로 에녹의 턱 부근을 부딪치며 씨익 웃었다.

 “어때? 잘 나왔지?”

 “나 가지고 이 정도 못 찍으면 카메라 버려야죠. 다 아는 사이에 왜 이러실까.”

에녹이 윙크하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 오만불손함 대꾸에 어시스턴트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왓츠는 그저 허허 웃으며 맞장구만 쳤다.

 “그래. 난 에녹의 리즈 시절을 함께하는 행운의 포토그래퍼니까. 그런데 요새 이상한 소문 들려? 너 다음 영화 루스 커넬이랑 한다는 얘기가 솔솔 나돌던데? 둘이 스타일 좀 다르지 않아?”

 “완전 다른 건 맞는데 이번엔 그렇게 됐어요. 내가 좀 들이댔지. 같이 하자고. 작품도 배역도 느낌이 빡 왔거든.”

 “무슨 배역이었는데?”

 “아픈 과거가 있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에녹은 구체적 가지들은 잘라내고 큰 줄기만 설명했다. 왓츠는 뭔가 납득했다는 듯이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네가 요새 뻔질나게 클래식 공연장에서 사진만 찍히더라. 난 또, 어디 음악 하는 여자한테 푹 빠졌나 했지.”

 “사실 열애설이 가장 유력했죠. 그래서 파파라치들이 포기 안 하고 내내 잠복한 거잖아요. 모두 다 멋지게 물 먹었지만.”

어시도 몇 마디 거들었다. 에녹은 쓰게 웃었다.

폭 빠진 건 사실이지만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앞으로 연애가 될 전망인 건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딥 키스 한 번 못 해 봤다. 물론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에녹은 모니터에 뜬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이거 메일로 한 장 보내 줘요.”

방금 전 왓츠가 컬러를 다 죽일 거라던 사진이었다. 한 손으로는 타이 매듭을 반쯤 끄르고 눈길은 비스듬히 아래로 향하고 있었는데, 제가 봐도 베스트 컷으로 꼽을 만했다.

왓츠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원본 유출 안 해.”

 “보여줄 사람 있어서 그래요. 어디 안 뿌릴 거니까 걱정 마요.”

왓츠의 눈이 카메라 플래시처럼 번쩍 호기심을 터뜨렸다. 조마조마하게 상황을 살피던 에녹의 매니저 쉐인이 움찔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이 스태프들은 제 할 일에 바빴다. 물론 취재기자들은 아직 입장도 전이었다. 쉐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야! 또 누구야! 있어도 그런 얘길 하면 안 되지!”

 “걱정 마. 스캔들 날 상대 아니니까.”

그 정도로 상상력 좋은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미 자신은 수도 없이 염문을 뿌렸다. 그 중에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스캔들을 흘려서 만 천하에 내 거라고 도장을 꽉…….

에녹은 짓궂게 든 생각을 쓴웃음에 태워 보냈다. 그랬다가는 그 겁많은 녀석이 땅굴 속으로 영영 숨을지도 모른다.

왓츠가 신상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목소리를 낮췄다.

 “뭐야. 이번엔 누구야? 배우야?”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있어요. 나 잘 생겼죠, 하니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괘씸한 사람.”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처음 정난우와 술잔을 기울였던 날, 강제로 얼굴을 만지게 하고 의기양양하게 물었었다.

「어때, 나 좀 끝내주지?」

그랬더니 정난우가 한다는 소리가.

「제가…… 누가 예쁘고 근사하고 그런 걸 잘 구분을 못하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 봐도 조금 열이 받았다.

 “뭐? 아니 누가!”

쉐인은 발끈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자기 배우의 미모엔 자부심이 대단한 남자였다. 그는 마치 자신이 모욕당한 표정을 했다.

 “네가 성격이 좀 뭐 같아도 얼굴은 진짜 최상인데! 누가 그런 소릴 해!”

그냥 욕만 해라.

미세하게 가시 돋친 에녹의 눈초리가 쉐인의 얼굴에 가 박혔다. 따가운 시선 테러에 그가 어색한 미소로 입을 다물었다.

왓츠는 박장대소했다. 어시스턴트도 꼬습다며 열렬히 손벽을 모았다. 둘 다 아주 신이 났다. 남자들의 공공의 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 가끔 짜증나는 일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야, 굉장한데! 그 아가씨 엄청 도도하네!”

도도하지, 그럼. 아가씨는 아니지만.

에녹은 바람 같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난우의 첫인상에서 절대 짜낼 수 없었던 도도함이란 단어가 이제는 어색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이 아니라 마음부터 얻겠답시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힘든 상대도 처음이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정난우가 도도하게 구는 건 아니었다. 에녹 자신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거였다. 야만스럽게 손을 뻗으면 꺽일 거다. 허나 그런 걸 바랐다면 미래까지 내다 볼 이유가 없었다.

활짝 만개해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낼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자신만을 위해 흘리는 향기에 흠뻑 젖어들고 싶었다. 그 때 올라타 마음껏 달콤한 꿀을 음미할 거다. 그 순백의 꽃이 농밀하게 무르익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눈을 맞춰야 했다. 섹스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해야 하는 거다. 눈물 맺힌 눈동자에 끊임없이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얼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4D가 아직 무리라면 사진부터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줘요. 어디 뿌리고 그럴 사람 아니니까.”

눈물까지 맺혀 가며 좋아하던 왓츠가 그 순간 프로페셔널하게 정색했다.

 “안 돼. 아무리 너라도 안 돼.”

 “벗어 줄게. 위에만.”

승부사 에녹이 결정적 한 방을 날렸다. 정확히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왓츠는 에녹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냉큼 그 제안을 집어삼켰다.

 “촬영 후에 어시가 메일로 보내 줄 거야. 주소 알려주고 가.”

왓츠는 같이 작업을 할 때마다 벗기지 못해 안달이었고 에녹은 콧대 높게 거절해 왔었다. 에녹이 노출 자체를 꺼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영화 배역들에서도 툭하면 섹스어필을 강조하는 게 문제였다. 이미지가 굳어진 다는 건 배우로서 좋은 일이 결코 아니었다.

에녹은 왓츠의 손목시계를 힐끔 살폈다. 2시가 좀 안 됐다. 영상 촬영팀과 파트너 모델이 도착하려면 1시간 남짓 남았다.

 “오후에 오픈 촬영 시작되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도 다시 안 벗어요. 시간도 별로 안 남았는데 지금 벗어요, 말아요?”

 “가자. 지금 당장.”

에녹은 셔츠 단추를 툭툭 풀어내 벗었다. 그 순간, 주위의 공기 밀도가 급변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소용돌이처럼 그에게 휘말려들었다. 휘익, 경박한 휘파람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부드럽게 한쪽 어깨를 돌리며 에녹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뭐. 체중조절 중인데 더 빠지기 전에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괜찮겠네. 나 벗은 사진도 줄 거죠?”

 “그래. 유출만 안 한다면. 그런데 웬 체중조절?”

 “배역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감싸주고 싶은 캐릭터거든요. 약간 보호 본능을 일으키려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너무 대놓고 섹스어필이잖아.”

 “…글쎄. 이미 네 전략은 반 정도 실패한 듯싶다만. 보호본등보다는 어둡고 음산한 미모로 선회하는 게 낫겠는데.”

왓츠가 맨 상체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품평했다. 에녹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네. 무대 위의 그는 음울하고 강렬하며 매혹적이기도 하거든. 참고할게요.”

 “네 몸뚱이 보니까 나도 다음 영화 기대된다. 그림 하나는 기막히게 잘 나오겠어.”

심미안을 자랑하는 왓츠의 평가가 에녹을 웃음 짓게 했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 다시금 미래를 밝게 점쳤다. 암초처럼 툭툭 솟아오르다 발끝에 차이는 것들은 다 낙락한 징조들뿐이었다.

 “세트 정리할 동안 팔굽혀펴기라도 해서 살짝 탱탱하게 만들어 놔.”

에녹은 군소리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투욱.

휴대폰이 손 안에서 굴러 떨어졌다. 액정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무심코 메시지를 확인했다가 봉변을 당한 거였다.

정말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폭격 맞은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정난우는 부산스레 걸음을 옮기다가 미니바에서 꺼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쏟아 부어도 진정이 안 됐다. 발치에 떨어지는 햇살마저 출렁 거렸다. 벌떡거리는 가슴을 떨리는 주먹으로 콱콱 두드렸다.

괜찮아, 정난우. 그냥 사진일 뿐이잖아.

윗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짓씹었다. 천천히 쪼그려 앉아 처참하게 나뒹구는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야 액정 위로 눈길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강화유리 위로 조명이 번득거렸다. 섬광 같은 반사광이 눈을 찔렀다.

한심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연습했다. 그가 돌아오는 날 용기 내서 꼭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고작 이런 거였다.

새삼스레 서글픔이 몰려왔다. 눈도 못 맞추는 연인사이가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쓰라린 통증이 식도에 젖어들었다. 새된 숨이 몇 번이고 끊어져 나왔다. 폐에 고름 같은 물이 찬 게 틀림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손 안에 쥔 휴대폰 각도를 바꿨다. 크지도 않은 체스트 샷이 화면 한 가득이었다. 틈을 엿보는 맹수를 노려보듯 눈빛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의 눈은 태평양의 바다처럼 시린 하늘색이었다. 외곽시야에서 언뜻 언뜻 비치던 게 이제야 제대로 된 색을 갖췄다. 아름다운 눈동자에선 차가운 관능이 끓었다.

고작 2〜3초였을 거다. 시선을 떨어뜨리자마자 막혔던 숨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고 있었던 거였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수도 없는 연습이 필요했다. 지금은 이게 한계였다.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며 화면을 밀어 올렸다. 아래로 그의 짧은 메시지가 딸려왔다.

「다른 곳엔 유출 금지」

기이한 현기증이 뒤늦게 말초를 야금야금 먹어 왔다. 정난우는 쪼그려 앉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만든 검붉은 장막 위로 선들이 유려하게 흘렀다.

실뱀처럼 지나가던 궤적이 이제야 비로소 완벽한 모양을 갖췄다. 화선지에 물감이 떨어지듯이. 하늘색 투명한 눈동자와 어두운 금발에 아름다운 색깔이 번졌다.

천의 얼굴, 천의 눈빛을 타고났다. 열정적이지만 냉혹하고, 날카롭지만 달콤했다. 사나우면서도 다정하고, 거칠면서도 섬세한 그의 특징이 완성된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정난우가 처음으로 해석한 에녹의 눈빛은 자신감이었다. 뉴욕의 제일 높은 건물에 서서, 미물처럼 꼬리를 물고 달리는 불빛들을 내려다보는 듯이 오만함하기도 했다.

그 누구의 마음도 훔칠 수 있는 타고난 도적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서 이 사진을 찍었을 게 틀림없었다.

재차 울리는 진동에 눈을 떠서 내려다보았다. 또 에녹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번엔 벗은 사진이 몇 개 연달아 왔다.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일 한계용량이 다 차 있는 관계로 텍스트부터 찾아 읽었다.

『답장은 네 사진 한 장이면 돼. 이전에 찍어둔 거 말고 오늘 자 싱싱한 걸로. 올 때까지 안 자고 애달도록 기다릴 거니까 꼭 보내. 농담 아냐. 진짜야. 보고 싶다.』

덜컹.

이번에는 휴대폰이 아니라 심장이 발치에 나동그라졌다. 정난우의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당황으로 허공을 떠돌았다.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 그 자리를 맴돌았다. 초조하게 휴대폰 쥔 손 안에 진땀이 찼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40분. 인터넷으로 시차 계산을 해 보니 파리는 지금 밤 11시 40분이었다.

망설이다가 시간이 훌쩍 가 버리면, 에녹은 정말 이를 갈며 밤을 지새 울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그 별 거 아닌 답장을 안 보내준 탓에.

해일에 쫓기듯 마음이 급해졌다. 한태영에게 전화를 걸어 객실로 건너 와 달라고 했다. 금세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갑작스런 호출에 놀란 기색이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낌새가 역력했다.

정난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한태영에게 건네며 다짜고짜 소리쳤다.

 “사진, 찍어주세요!”

한태영은 멍하니 석상이 되었다. 경직된 침묵이 잠시의 공백을 스쳤다.

그가 이내 귀를 후비적거리며 피식 웃었다.

 “제가 아직 귀가 먹을 나이가 아닌데 이상하네요. 난우 씨가 제 입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리가…….”

 “제가 말한 거 맞아요. 찍어 주세요.”

 “에…이게 무슨…….”

 “어, 얼른요.”

정난우는 한태영의 셔츠 끝자락을 감아 안으로 이끌었다. 다급한 재촉도 발걸음도 정난우답지 않았다.

한태영은 얼떨떨하게 끌려 왔다. 눈 깜짝 할 사이였다. 그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손 안에 정난우의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한 장이면 돼요.”

정난우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한태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으로 휴대폰과 정난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휴대폰은 뜨끈했고 정난우는 불안해 보였다. 여전히 상황파악은 안 됐지만, 일단 급해 보이니 부탁부터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카메라 기능을 켜고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한태영은 한숨을 길게 쏘았다. 그는 물끄러미 정난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난우 씨. 찍으려는 사진의 용도가 뭐예요? 뭐 대단한 잘못해서 벌 서는 콘셉트예요?”

정난우는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주먹 쥔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였다. 시선은 또 애매하게 아래쪽으로 향했고, 내리깐 눈은 머리카락 속에 빈틈없이 숨어들었다.

정난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에녹이 사진 안 보내면 잠 안 자겠다고 해서요.”

 “예? 밀리건 씨가요?”

 “아니, 왜요?”

뜬금없는 전개에 한태영과 율리안이 동시에 음성을 높였다. 정난우는 곤란한 듯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이유는…… 기브앤드테이크 같은데요. 에녹이 화보 촬영한 사진 보내 줬거든요.”

이게 뭔 벌건 대낮에 상한 우유 먹고 토 하는 소리야.

한태영은 기가 막혔지만 그냥 묻어 뒀다. 추진력 강한 세기의 로맨티스트 에녹의 기행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제 무의미했다. 그는 한태영에게 영원히 미지의 인류로 남을 거다.

 “그렇게 찍은 거 보냈다간 바로 퇴짜 맞겠네요. 시즌 브로슈어나 팸플릿 촬영할 때 잘 하는 포즈 있잖아요. 그건 익숙할 테니 써 먹읍시다.”

 “아. 네.”

경난우는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버릇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바이올린을 집어 들려고 했다. 뜬금없이 울컥한 한태영이 즉각 야단쳤다.

 “진짜 팸플릿 찍는 거 아니니까 그것 좀 내려 놔요! 바이올리니스트 매니저 주제에 바이올린만 보면 헛구역질 하겠어요, 나!”

정난우는 찔끔 하며 손을 거뒀다. 그러나 맨 손이 되자 어딜 봐야 할지 손은 어디 둬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엉성하게 이랬다저랬다 허우적거리기만 반복했다. 보다 못한 한태영이 율리안의 엉덩이를 발로 밀며 말했다.

 ‘ ‘야, 가서 난우 씨 잘 좀 세워 봐.”

율리안은 결연하게 네, 대답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정난우를 그냥 직립보행 하는 원숭이처럼 세웠다. 한태영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내가 미쳐 버리겠다, 진짜.

 “관둬! 때려 쳐, 이 자식아!”

한태영은 벼락같은 고함으로 율리안을 질책했다. 율리안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그 큰 덩치를 바싹 졸인 채 슬금슬금 멀어졌다. 눈알이 빠지도록 노려보고,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그냥 편안히 소파에 앉아요.”

 “…이렇게요?”

 “네. 그럼 다음에는 살짝 빗겨서 허공 봐요. 여기.”

한태영이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소리 난 곳으로 정난우의 눈길이 쭉 딸려 올라왔다.

 “네. 거기 보고 있어요. 눈에 힘은 좀 빼요. 어깨도 편안히 늘어뜨리고요. 부자연스러우니까. ……좋아요. 초점 좀 맞출게요.”

찰칵.

시원한 서텨 효과음이 굳은 긴장을 함락시켰다. 정난우는 막혀 있던 숨을 거칠게 개방시켰다.

 “오호라…… 이거 좋은데?”

찍힌 사진을 빤히 쳐다보던 한태영이 불숙 중얼거렸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드물게 훌륭한 경과물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반 측면 각도라 이목구비가 모두 담겼다. 표정도 눈빛도 의도된 스틸 컷처럼 자연스러웠다. 왼쪽 턱 아래의 거멓게 죽은 살도 안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씉에 올려 뜬 속눈썹이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그랬다. 포인트는 이거였다. 눈동자가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브로슈어에 실리는 사진들은 바이올린을 든 전신 컷. 그것도 거의 옆모습이라 눈이 정말 콩알만 했다.

컴퓨터로 옮기면 여기서 몇 배는 더 커질 테니까…….

 “이건 레어템! 나도 가져야겠어요!”

한태영이 비장하게 선언했다. 율리안이 들소처럼 뛰어가 확인하더니 엄지를 세워 마구 흔들었다. 그도 약간 흥분해 있었다.

 “레어템에 한 표 추가! 이런 건 닥치고 소장이에요!”

 “으하하하. 드디어 SNS 프로필 사진을 바꿀 수가 있겠구나!”

저렇게들 난리를 치니 확인하기가 조금 겁났다. 정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그들에게 접근했다.

한태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난우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미간을 좁히며 약 1초 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기, 다 좋은데 일단 에녹에게 전송부터 해 주세요. 그래야 자죠. 배우라 잘 자고 피부 관리도 해야 하는데.”

 “아, 아아 네. 일단 보내고요.”

 “한 실장님한테 보낼 때 나도 보내줘요.”

 “당연하지, 율리안. 이런 건 만 천하와 공유를 해야 돼. 나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이 뭐라 하건 말건, 정난우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문제없이 에녹에게 전송된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급작스레 수행하게 된 미션을 무사히 치른 걸로 만족했다.

 “좋았어. 내 폰에 도착. 너는?”

 “저도 왔어요. 빨리 SNS 프로필 사진부터 바꿔요. 팬들 완전 좋아할 것 같아요.”

 “그렇지? 지금 당장!”

가난한 행복 발화점을 가진 두 남자는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의 들뜬

마음에 전염된 정난우도 흐리게 미소 지었다.

에녹과 알고 나서부터, 자신의 주변은 이렇게 자주 소란스러워졌다. 그간 늘 호텔-공항-홀一호텔-공항 루트를 밟았다. 푸르게 난 잔디 사이로 단 하나 있는 길을 걷듯이, 흐트러짐 없이 그렇게만 살아 왔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자신도 한태영도 율리안도 활력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분명 숨 가쁠 정도로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에녹의 영향이었다.

 “자, 이제 즐겁게 아침 먹으러 갑시다!”

한태영이 리듬을 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정난우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율리안이 바이올린을 정리하는 동안 정난우는 외투를 입었다.

막 객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정난우는 호주머니에서 진동을 느꼈다. 짧게 끊어지는 것이 아닌 긴 진동. 전화, 에녹일 거다.

 “저기, 태영 씨. 먼저 내려가서 기다려 주세요. 저 금방 갈게요.”

 “그래요.”

한태영은 제 휴대폰에 넣어둔 사진에 희희낙락해서 궁금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매니저들이 나가고 재빨리 몸살 앓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받으려다 멈칫했다. 어머니하고나 가끔 하는 영상통화였다.

정난우는 조금 망설였지만 수신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수화부에서 거친 음성이 그르렁거렸다.

《너 이…… 아, 젠장.》

…왜 화가 났지?

정난우의 얼굴이 얼핏 굳어들었다. 어쩔 줄 몰라 눈만 굴렸다. 혹시  사진이  마옴에 안 든 건지, 너무 기다리게 한 건지, 온갖 적정들이 밀려왔다.

잠시 후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나 안 봐도 되니까 렌즈 봐봐.》

머뭇거였지만 그의 말대로 했다. 이런 구도는 처음이라 가슴이 떨렸다. 아무리 렌즈만 본다고 해도 그 아래 외곽시야는 탁 트여 있었다.

그의 얼굴, 넓고 강해 보이는 어깨, 가슴까지 자꾸만 눈을 어지럽혔다. 다시금 어지러움이 몰려오려 했지만 참을 거다.

《그렇지, 그렇게. 눈 피하지 마.》

정난우는 굳세게 눈만 깜빡이다 갑자기 뺨을 붉혔다. 잔뜩 갈라져 낮은 곳에 끌리는 음성이었다. 그 안에는 노골적으로 짙게 깔린 뭔가가 넘실거렸다. 그게 그리움 섞인 정욕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거다. 정난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렌즈를 바라 보았다. 오고가는 대화는 없었다. 움직이는 소음조차 씨가 말랐다.

숨죽인 정적만이 아득한 거리를 메웠다. 그 칼 같은 침묵 속에 심장소리만 거세게 귓전을 울렸다.

보이지 않는 시선은 얼굴을 낱낱이 돌아다녔다. 불길이 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마른침이 자유만 목젖을 건드리며 넘어갔다. 해방의 순간은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전파를 타고 건너오는 집요한 주시에 관절들이 꽁꽁 묶었다. 손에 잡힐 듯한 그의 뜨거운 격정에 어깨가 떨려 왔다. 뼛속까지 파고들 기세의 도였다.

형태 없는 압박감이 목을 조였다. 열병 오르듯 숨이 가빠 올랐다. 화끈거리는 눈가가 자꾸만 경련했다. 하지만 벗어나고픈 욕구는 들지 않았다.

이대로 그와 가슴을 맞댈 수만 있으면 바스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 저도…….”

저도 모르게 움찔 입술이 벌어졌다. 가쁜 숨이 미약하게 터져 나왔다. 몇 번이고 망설였으나 시장을 터뜨릴 듯 가득 채운 감정이 버거워 결국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정난우는 잔뜩 취한 듯이 희미한 음성을 내보냈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 더운 감정이 덩어리져 흘러나왔다.

눈물도 취기도 없이 시야가 흐렸다. 초점 나간 눈은 그의 실물을 가까이에서 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불붙은 그리움이 모골에 사무쳤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꽉 잠겨 거칠게 보풀 일어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돌기 직전이야, 지금.》

그 후로도 그는 그렇게 조금의 방황도 없이, 길게 바라보기만 했다.

*

이번 리사이틀 투어는 약 보름 동안 서울과 제주를 비롯한 도시들을 돌며 9회의 공연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구미 공연을 앞둔 아침, 오정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야, 진짜 이 아저씨가 우리 아깽이 좋은 바람 쐬라고 스케줄을 그냥 환상으로 잡았어요. 그렇지? 응?》

그는 생색내려고 전화를 한 게 틀림없었다.

《이 아저씨 예쁘지? 일곱 번째 날 수원 공연 후 이틀 쉬고 제주 공연 뒤 또 이틀 쉬고 마지막에 서울에서 피날레!》

〔……네. 고마워요, 아저씨. 안 그래도 제주도 처음 가 봐서 조금 설레요. 가면 관광도 하고 푹 쉴게요.〕

《그래, 좋은 거 많이 보고 좋은 거 많이 먹어, 응? 아저씨가 예전에 갔을 때는 갈치회랑 고등어회가 그렇게 맛있더라. 또 호텔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꼭 찾아 먹고.》

〔그럴게요.〕

《응. …아참. 로베인이랑은 어때?》

정난우는 힐끔 시선을 옆으로 둘렸다. 오정수가 말한 카를로 로베인은 열심히 포크질 중이었다. 그는 이번 리사이틀을 함께 하게 될 피아니스트였다.

〔옆에 계신데…… 이번이 두 번째라 호흡도 잘 맞아요, 성격도 좋으시고. …왜요?〕

《아, 걔가 네 이번 프로그램 듣고서 처음에 질색을 했었거든.》

〔…그 얘길 왜 지금 하세요. 뭐가 문제였는데요?〕

《슈베르트의 마왕 말이야. 그거 바꾸면 안 되겠냐고 좀 징징댔다더라. 그래서 그거 국내에서는 초연이라 국내 팬들 때문에 특별히 넣은 거라고 억지로 픽스해 뒀거든. 너한텐 별 말 없었어?》

〔네. 없었는데…….〕

《그럼 됐지, 뭐. 문제없네. 오늘 공연도 잘 하고. 아저씨 끊는다.》

정난우는 끊긴 휴대폰을 발아래 두고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오늘 점심은 꽤 이름 있는 한정식 집으로 왔다. 코스로 나오는 요리는 외국인들의 입맛에도 제법 잘 맞아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천천히 찬을 집어 먹으며 카를로의 눈치를 살폈다. 리허설 때나 본 공연 때나 호흡이 잘 맞아서 프로그램에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었다.

혹시 편곡 버전이 마음에 안 들었나…….

언제 화제를 꺼내야 하나 재고 있던 중이었다. 포크 두 개로 꼬리 찜을 열심히 발라내던 카를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싶기는 한데, 요새 뭐 좋은 일 있어?”

너무 추상적인 질문이라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무슨 좋은 일이요?”

 “아, 저번에 함께 공연하던 때와는 좀 달라진 게 느껴져서 말이야. 본 프로그램 말고 앙코르곡들에서 확연히 나타나.”

 “사랑의 인사요?”

 “뭐, 그것도 그렇고. 헝가리 무곡도 그렇고.”

정난우는 어색하게 젓가락을 물었다. 사랑의 인사는 자주 등장하는 앙코르곡이었지만 헝가리 무곡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건 한 사람만을 위한 앙코르였다. 파리에서 그 태양 같은 에너지를 필름에 녹여내고 있을 에녹이었다.

그가 손수 변이시켜 놓은 헝가리 무곡을 꼭 선물로 주고 싶었다. 표현력 없는 제가 아낌없이 감정을 실어 보낼 수 있는 건 결국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록 네 번째 공연까지는 그가 함께하지 못하지만, 서울 공연 때부터는 들려줄 수 있을 거다.

카를로가 눈빛을 반짝였다.

 “역시 프라하 길거리 공연이 영감을 준 건가?”

 “…보셨나 보네요.”

 “당연히 봤지. 당신 팬들이 하도 법석을 떨어대니 안 볼 수가 있나. 잊었어? 우리 맞팔인 거.”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워보였다.

 “그거, 진짜 좋았어. 아, 정말 좋았다고.”

 “그랬어요?”

 “그래. 나는 정이 그렇게 열렬한 무곡을 뽑아낼 줄 몰랐거든. 평소의 그 충격적인 음울함도 없고 말이야. 게다가 그거, 직접 편곡한 거지?”

 “아, 편곡이랄 것까지는 없어요. 그냥 그 때 갑자기 솔로로 연주해야 되는 상황에 부딪치다 보니까, 실내악 했을 때 주워들은 것들 다 현에 실어본 거예요.”

카를로가 혀를 내두르며 입 꼬리를 늘어뜨렸다.

 “허, 이 사람 참 쉽게 말해. 그건 당신 같은 테크니션이니까 애드리브로 가능한 거야. 피아노고 첼로고 하여간 공백에서 갖다 쓸 수 있는 건 다 끌어 왔던데 뭘. 신기했다니까, 손가락이 저렇게도 날아다닐 수 있나 싶어서.”

쑥스러움 많은 정난우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빈 물 컵을 채우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카를로가 일순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새삼스럽다는 눈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손가락이 생각보다 길어?”

카를로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제 손을 정난우도 함께 응시했다.

 “네. 제가 키에 비해 손발도 좀 크고, 팔도 좀 길고…… 좀 그래요.”

 “유연하기도 하고, 그렇지?”

 “음…… 그럴 거예요, 아마. 보통사람들보다는.”

 “맞아. 파가니니가 그랬잖아. 기괴한 손가락이 뿜어내는 악마의 선율. 그래서 정이 그렇게 파가니니랑 궁합이 잘 맞나?”

카를로는 늘 누구를 칭찬하는 데에 아낌이 없었다. 모나지 않은 성격이라 함께 있기는 편했지만 이렇게 한번 가속이 붙으면 주체가 안 될 경우가 많았다. 더 길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때마침 음악 얘기가 나왔으니 타이밍도 좋았다.

 “저, 그런데 이번 슈베르트 마왕은 어땠어요? 처음에 되게 싫어하셨다고 들었는데…….”

 “아, 그건 솔직히 아직 좀 그래.”

카를로의 낯빛이 대번에 침침해졌다. 그는 집착하던 꼬리 찜을 버려두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의 마왕은 너무 숨 막히거든.”

직설적인 표현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정난우의 입매가 조금 얼어붙었다. 카를로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어, 아니야. 이건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었어. 기괴한데 그럴듯하거든. 그리고 나는 악보만 보고서도 정이 그렇게 연주를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처음에는 좀 꺼려했던 거야.”

카를로의 설명은 더 없어도 되는 거였다. 정난우는 그가 말한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카를로가 쓰게 한숨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편곡 가이드라인 정이 직접 뽑았지?”

정난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곡의 가이드라인을 직접 악보에 초연까지 해서 작곡가 닐 핸더슨에게 의뢰를 맡겼다. 그가 기꺼이 수락하면서 지금의 바이올린 편곡 버전이 나온 거였다.

 “뭐, 정말로 나쁘다는 건 아니야. 독특하게 뒤틀어서 해석한 마왕은 신기하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했지. 그걸 제외하면 아버지도, 아들도 그 오리지널의 느낌이 극치까지 다 표현되어 있어. 무엇보다 정난우스럽지. 다만 나는 그게 조금 부담스러웠던 거고.”

 “…….”

 “아무튼 내가 했던 말은 내 취향의 문제에 가까운 거니까 신경 쓰지마. 평론가들 반응도 좋았다며. 관객들도 그렇고.”

정난우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다가 물었다.

 “로베인 씨는 그럼 누구의 마왕이 좋아요? 성악이건 기악 버전이건.”

그가 잠시 침음에 잠겼다가 슬쩍 흘리듯이 대답했다.

 “사실 이거 비밀인데, 나는 크리스의 마왕을 좋아해.”

 “……에, 네?”

정난우의 얼굴이 오늘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인 순간이었다. 창백한 뺨이 위협받은 듯이 실룩거렸다. 카를로가 숨죽여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왜, 예전 리사이틀 폭망할 뻔했던 크리스의 마왕 말이야. 나는 그 무대 직접 관람했거든. 협연 일정이랑 겹쳐서.”

 “로베인 씨가 말하는 크리스가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퍼 강, 인가요?”

 “에이, 그 친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래.”

강도영의 마왕은 단 한 번의 무대에서만 존재했다. 말하자면 초연이자 마지막 연주였던 거다.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레전드였다. 아주 좋은 쪽과 지독하게 안 좋은 쪽, 양극단의 평가가 엇갈렸다.

 “영상으로 남았으면 내가 정말 질리도록 봤을 텐데. 아, 정말 아쉽다니까.”

벌써 3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건이었다. 강도영은 원래 정통 악보를 고집하는 쪽이었다. 뮤지컬 히트곡이나 대중가요 편곡 버전은 아예 공연 후보에도 넣지 않았다. 그런 그가 생각을 달리했던 건, 정난우의  ‘마왕’ 편곡이 완성되었을 때였다.

그는 묘하게 뒤틀린 그 악보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 악보를 중심으로 피아노 편곡까지 추가로 의뢰해 곡을 받았다. 그렇게 충동처럼 끼워진 단 한 번의  ‘마왕’은 초유의 티켓 환불 사태를 초래할 뻔했었다.

그날 강도영은 마왕의 막바지에서 갑자기 연주를 멈췄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를 악문 채 수 초간 정지해 있었다. 웅성거림조차 없는 살벌한 정적이 흘렀다.

강도영은 단 한 번, 건반을 부술 듯이 열 손가락으로 꽝 내리쳤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관객들은 동요로 술렁거렸다. 이어진 인터미션 타임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강도영은 인터미션 후 평온한 얼굴로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 그리고 직접 제 감정 컨트롤 미숙을 사과했다. 공연 프로그램은 마치겠으나 티켓은 전액 환불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수습이 되었다. 완벽주의자 강도영의 공연 역사 상 초유의 스캔들이자 유일한 오점이었다.

정난우는 웃는 듯 마는 듯 흐리게 입술을 휘었다.

 “크리스가 들으면, 정말 싫어하겠네요.”

 “…정. 제발 함구해줘. 나 정말 그 치한테 찍히기 싫거든.”

문득 카를로가 진지하게 말해 와서 정난우는 조금 의아했다. 그런 걸로 앙심 품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귀에 좀 들어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거였다. 정난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 마세요. 사적으로 나눈 얘기까지 옮길 필요도 없고…… 크리스가 그런 거 맘에 담아두는 성격도 아니고요.”

로베인은 잠시 묘한 침묵을 입술에 걸었다. 손에 쥔 물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내려두었다.

 “그래. 정이 보는 크리스가 어찌되었건, 익속은 지켜야 돼?”

 “그럴게요. 그런데 크리스의 그날 무대는 왜 좋으셨어요? 사람들도 충격 받아서 그 전까지 느꼈던 감상도 다 날아갔다던데.”

 “그게 말이야…….”

카를로는 회상하듯 가는 눈을 했다.

 “크리스는 차갑잖아. 차갑고 또렷한 테크닉이고, 불꽃도 차갑고, 뭔가 그래. 그런데 그날의 마왕은 전혀 달랐어.”

 “어떻게요?”

 “아버지의 간절함이나 절박함, 아들의 고통과 공포, 점차 파괴적으로 변해가는 마왕의 유혹, 그리고 막바지에서 아버지의 그 소리 없는 오열이랄까. 아…… 이건 정말 말로 표현이 안 돼. 아버지의 비통한 절규 같은 게 너무 생생했어. 마치…….”

늘어지는 말미에 귀를 쫑긋 세웠다. 카를로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크리스 그 스스로가 우는 것처럼 보였어, 내 눈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도영의 서늘한 눈매가 젖어드는 장면이 좀체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크리스처럼 냉랭한 남자가 와르르 무너지던 순간의 그 파괴적인 매혹이랄까. 그런 게 있었거든. 그래서 티켓 환불 신청을 안 했던 관객들도 꽤 됐지.”

정난우는 괜히 심란해졌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씹혔다. 식도로 넘어가는 느낌도 톱밥처럼 텁텁했다.

다그닥. 다그닥. 슈베르트의 셋잇단음표가 그려낸 포악한 말발굽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두려움에 떠는 아들, 불안함에 달래는 아버지, 그들의 어긋난 대화가 뇌리를 떠돌았다.

一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제게 속삭이고 있어요. 一진정하거라, 아가. 걱정하지 마라. 그건 단지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란다.

一아버지, 아버지, 저기 보이지 않으세요? 저 음침한 곳에 있는 마왕의 딸들이요!

一아가, 아가, 아무것도 아니란다. 저건 잿빛의 바래버린 늙은 버드나무 가지일 뿐이란다.

마왕은 아들의 눈에만 보인다. 아버지는 아들의 환영을 보지 못한다. 환청도 듣지 못한다. 말하자면 아들의 공포를 공감할 수 없는 거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들을 달래며 불안해하는 것뿐이다.

결국 아버지는 무력하게 아들을 잃고 만다.

마왕은 과연 이들만 볼 수 있었던 환영에 불과한가. 아버지가 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보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가 아들의 말을 조금 더 신뢰해 시야를 틔워보았더라면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까.

 “말 나온 김에 궁금했는데, 굳이 마왕만 다르게 해석한 이유가 있었어? 몇 군데는 편곡이 아니라 거의 작곡에 가깝던데.”

상념에서 벗어나 그의 질문을 가만히 곱씹었다. 정난우는 젓가락을 완전히 내려놓으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대답했다.

 “제 눈에는 마왕이 가여워 보여서요.”

 “…으응?”

로베인이 희한하다는 듯이 말미를 높였다. 정난우는 희미하게 미소만 지었다. 모태가 된 곡은 슈베르트의 마왕이 맞지만, 그보다 더 파고들었던 건 음표가 탈색된 괴테의 마왕이었다.

정난우는 괴테의 세계에서 더 강한 인력을 느꼈다. 그 안에서 극렬한 핏빛의 꽃을 발견했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늪지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피를 양분삼아 핀 한 떨기 기괴한 꽃.

그것은 마왕이었다.

첫 로케 촬영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까칠한 얼굴로 나타난 에녹을 다들 걱정했지만 중간 중간 넋 빠진 모습을 보여준 걸 제외하면 결과물도 모두가 만족할 만했다.

이제 내일 있을 두 번째 로케만 끝내면 파리 스케줄은 끝이었다. 뒤풀이 파티 제안은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해 뒀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공항으로 튀어가 밤 비행기를 탈 계획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 에녹은 창턱에 팔꿈치를 올려둔 채 절인 배추처럼 늘어졌다.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낭만적인 거리의 풍경이 햇살 속에서 부서졌다.

 “아…돌겠네. 돌겠어.”

얘가 정말 사람 잡겠어. 낮에도 밤에도 날 죽일 것 같아. 느낌이 그래.

에녹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머리를 지탱하던 손을 이동해 눈 밑의 피로가 뭉친 그늘을 슬슬 문질렀다. 힐끔 매니저를 보니 그는 폰 게임 삼매경이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갤러리를 켰다.

가장 최근의 사진 한 장을 눌렀다. 꽃이 개화하듯이 화면 가득 누군가의 얼굴이 펼쳐졌다. 빗겨 내린 시선으로 뚫어지게 뜯어보고 또 보았다.

이게 피로의 원흉이었다. 닳도록 보라고 사진을 보내 놨더니 도리어 닳도록 보게 되는 사진을 날려 온 거다. 기가 막힌 카운터펀치였다.

받자마자 쓰러졌다. 정말 바보처럼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한참을 봤다.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품에 넣고 물고 빨기에 여념이 없었을 거다. 

참을 수 없어져서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그건 너무 크리티컬이라 반추하기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정난우는 렌즈를 봤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똑바로 눈이 맞은 거였다. 가는 떨림을 애써 감추고서 보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함락되지 않으면 그건 남자도 아닌 거다.

고뇌의 밤은 길었으며 지리멸렬했다. 사진 한 장에 발정해 수음해 버리는 비참한 꼴을 겪지 않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에녹은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씹었다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대로 화면을 끄려다 문득 뇌리를 스친 불쾌감에 인터넷 창을 켰다. 곧장 정난우 SNS에 접속해 들어갔다.

한태영이 올려둔 한 장의 사진 밑으로 엄청난 수의 댓글이 엉켜 있었다. 폭발적인 반응이 줄을 이었다. 심미안을 가진 에녹 자신도 이 지경인데 팬들은 오죽하랴 싶었다. 온갖 소프트한 성희롱이 오늘도 낭자했다.

『나처럼 모니터 핥은 사람 손!』

씨발, 에녹은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욕설을 씹었다.

『우리 난우 덕분에 이 년 동안 먼지 안 턴 모니터가 깨끗해졌어요.』

지랄 축제가 벌어졌다. 열이 올라 더운 한숨만 연거푸 쏟아냈다.

제 실수였다. 아무한테도 주지 말고 제게만 보내라고 단단히 일러뒀어야 했다. 장이 뒤틀리다 못해 끊어질 것 같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한태영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 인간을 어떻게든 요절을 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더 분했다.

닫아야지, 닫아야지 하면서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던 에녹은,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눈을 멈췄다. 돌연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반갑지 않은 이름과 함께 낯선 언어가 줄지어 있었던 것이다.

『Christopher Kang - 우리 난우 눈부시네. 형이랑도 뽀뽀 할까? :)』

『Nanwoo Jung -ㅠㅠ』

『Christopher Kang - 하하하. 농담이야. 형 지금 프랑스거든? 오늘 파리에서 공연 있어. 다음 달 쯤에 날짜 맞춰서 한번 보자. 알았지?』

『Nanwoo Jung - 응!』

두 사람이 만든 지독하게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끼어들 틈이 바늘구멍 만큼도 없었다. 이건 불공평했다. 기분이 더럽고 직감적으로 불쾌함이 용솟음쳤다.

목 조르듯 움켜쥐고 있었던 휴대폰으로 한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통역 좀 해 봐요, 정난우 SNS에 크리스토퍼 강이랑 대화한 부분. 씹으면 복수합니다, 기필코.』

내 더러워서 한국말을 마스터하든지 해야지.

간단한 인사말이나 자주 쓰는 말들만 익혀뒀는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전용 통역사를 고용하든지, 짬짬이 회화를 공부하든지 해야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응답은 없었다. 연하게 된 메이크업도 지울 생각을 못 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화만 노려봤다.

이 인간, 혹시 농담인 줄 아나?

꼬리뼈에서 폭죽이 터질 만큼의 파급력을 지닌 협박을 날려줘야겠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드디어 한태영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는 늘 그랬듯 짜증으로 시작했지만 요구를 착실히 들어주었다. 그가 해석해 준 텍스트들을 이를 갈며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뭘 해?

에녹의 얼굴에 북풍한설이 휘몰아쳤다. 한파에 얼어붙은 피부 조각들이 쩍쩍 균열 갔다. 극렬한 분노가 살갗을 포 뜨고 소금물이 그 틈을 절였다.

에녹은 한 손을 크게 벌려 양 쪽 관자놀이를 꾹 눌러 짚었다. 뜨거운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근 하나하나가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건 그냥 유하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보통의 남자들 사이에서 저러고 놀았다가 핵주먹이 날아올 거다. 가까운 예로 제가 루스에게 저런 농담을 쳤다면 루스는 오토바이를 몰아 집 문을 박살내 놓을지도 몰랐다.

에녹은 흉흉한 기세로 정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받았다. 오매불망 기다린 것처럼 반가운 목소리로.

《네, 에녹.》

 “…….”

《…에녹?》

…아아. 정말 미치겠네.

에녹은 짙은 한숨을 삼켰다. 화를 내려고 했다. 내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다른 놈이랑 입술을 맞댄다느니 그런 농담을 받아준 거냐고, 정말 혼줄을 내 주려고 했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하지만 결국 또 물러터진 소리만 내뱉고 말았다. 자신은 정난우한테 지나치게 약했다. 약해도 너무 약했다.

정난우가 꾸물거리더니 느리게 대꾸했다.

《네. 저도 자기 전에 통화할 수 있어서 기뻐요.》

에녹은 한쪽 눈만 가늘게 접으며 실소했다. 이러니 안 물렁물렁해질 수가 있나.

 “예쁜 소리 하네. 더 해 봐.”

정난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뒤 대답했다.

《연습, 하고 있어요. 그…사진 속의 에녹이랑 마주보는 거. 방금 전에는 십 초 봤어요. 한 번도 안 피하고.》

에녹은 슬픈 눈으로 천장 조명을 응시했다. 토실토실 살 오른 토끼가 눈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사자를 겁주는 형국이었다. 새삼 정난우가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다.

《모, 모레…될 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연습, 하고 있으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에녹은 쓰게 혀를 차고는 곧바로 웃음을 흘렸다. 자기 전에 딱 10초만 더 보라고 일러두고는 통화를 끝냈다. 그 다음은 매니저 차례였다.

 “오늘 파리에서 크리스토퍼 강이라고 피아니스트 공연 있을 거야. 티켓 좀 끊어 줘. 없으면 암표라도 구하고. 당신도 보려면 두 장 끊어도 되고. 스태프들 다 데려가도 상관없으니까 몇 장이든 구해만 놔.”

《뭐? 에녹. 그게 무슨—》

에녹은 제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렸다. 옷장을 열어 봤으나 캐주얼과 운동복만 걸려 있었다. 촬영 일정을 위해 챙긴 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곧장 객실 밖으로 튀어 나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서 쇼핑을 시작했다.

그를 알아본 점원들과 손님들의 눈빛이 조명에 반사 돼 번쩍거렸다. 돌아봐 주길 바라는 돌출된 속삭임이 발끝을 방해했다. 훈훈한 실내 공기를 똬리 트는 시선은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에녹은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뭉겠다. 팬서비스의 개념은 통째로 말아먹은 지 오래였다. 온 명품관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에녹의 차가운 눈은 시종 전투적으로 이글거렸다. 쇼핑이라기보다는 격전 지역의 참전용사를 차출해낼 기세였다.

슬랙스와 셔츠, 니트, 외투에 구두에 시계, 넥타이, 벨트, 지갑, 머플러에 커프스단추까지 고르는 데까지 세 시간 남짓 걸렸다. 옷과 소품을 고르는 에녹의 눈은 원래도 까다로웠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

한태영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샤워를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도 메이크업도 촬영 때 공들인 그대로였다. 과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꼭 들었다.

호텔로 돌아가 입고 갔던 옷들을 담아 온 쇼핑백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곧바로 쉐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죽는 소리를 했다.

《야! 내가 촬영 다 끝나고 네 암표 심부름까지 해야겠어? 네 이름만 대면 VIP석에 데려다 줄 텐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굴어? 갑자기 표 구하느라 얼마나 애 먹었는지 알아?》

 “VIP석 안 가. 그 자식 공연을 내가 왜 공짜로 봐?”

《뭐야. 팬이라서 갑자기 보겠다는 거 아니었어?》

팬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지금 당장 지구에서 말끔히 들어내도 성이 안 찰 것 같은 놈이었다.

 “어쨌든 구하긴 했단 거지?”

《그래. 살 가보 공연장으로 와. 데리러 가 주리?》

 “됐어. 택시 타고 가면 돼.”

전화를 끊고 전신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체크 무늬가 들어간 그레이 슬랙스가 맞춘 듯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도톰한 하프코트 안으로 흰 셔츠와 넥타이 니트가 언뜻 보였다.

에녹은 혀를 차며 타이를 풀어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너무 딱딱한 차림이었다. 지나치게 의식하는 티를 내는 꼴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점검을 끝내고 나서 머플러로 콧등까지 덮었다.

호텔을 나서자 어느새 무겁게 기울었던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를 집어 삼킨 택시 한 대가 어두운 도로를 갈랐다.

공연장에 도착해서 보니 쉐인은 혼자였고 그가 들고 있는 표는 두 장이었다. 죄다 클래식에 관심 없다며 술 마시러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팬도 아니라면서 갑자기 왜 보러 오잔 거야?”

로비로 들어서며 쉐인이 궁금한 듯 물어 왔다. 에녹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얼굴 좀 봐야 될 일이 있어서.”

 “네가? 크리스토퍼 강을? 왜?”

에녹은 불분명한 정면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라이벌 견제.”

강도영의 그린 룸은 객들의 방문으로 북적거렸다. 에녹은 입구로 들어서서 짧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를 알아 본 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술렁거렸다. 그러나 백화점에서도 그랬듯, 면식 없는 이들의 관심까지 수확할 정도로 오늘은 너그럽지 못했다.

에녹의 눈길이 사람들 사이를 유영해 한 사람에게 가 꽂혔다.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강도영이었다. 인터뷰 중인 듯 그의 맞은편엔 녹음기를 든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 혹시, 크리스토퍼 강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에녹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곱슬머리를 가진 남미계 외모의 남자였다.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을 대신해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응시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전 크리스토퍼 매니저 알렉스 그리보라고 합니다. 에녹 밀리건 씨 맞죠?”

 “네. 일이 있어서 파리에 체류 중인데 우연히 본 공연이 인상 깊어 인사나 나누고 갈까 해서 왔습니다.”

…연기 봐라.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뻔뻔한 거짓말에 쉐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조금 전까지 에녹의 하늘색 눈을 팔팔 끓게 했던 전투적인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러다 불이라도 내지 싶어 그냥 돌아가자고 말렸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질 지경이었다.

 “크리스는 지금 인터뷰 중인데 거의 끝나가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에녹은 괜히 손목을 걷더니 내리 뜬 눈으로 시계를 훑었다. 묘하게 입술을 흰 에녹이 쉐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겠지?”

너 오늘 촬영 다 끝났잖아. 이 자식아!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라고 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후환이 두려웠다. 에녹의 웃는 낯짝에서 형형한 눈동자가 위협하듯 한 번 깜빡, 했다. 다년간의 노하우로 쉐인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썩어 나오려는 미소를 짓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십 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다들 너 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리니까 길게 노닥거리지는 말고. 내가 나가서 전화 해 두마.”

왓츠는 지금쯤 스태프들과 꼭지 돌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에녹이 아무리 환상적인 미남이라도 그는 쭉빵한 언니들이 더 좋은 건강한 남자였다.

쉐인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그린 룸 밖으로 사라졌다.

 “그럼 잠시 기다리죠.”

에녹은 매너 좋게 입 꼬리에 매끈한 미소를 매달았다. 알렉스는 네, 대답하고는 빠르게 강도영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강도영이 어깨너머 고래를 돌렸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파스스 부서지려는 입술의 곡선을 붙들었다. 공기가 증발했고 주변의 모든 이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둘만 남았다. 인위적인 눈웃음 속에서 불꽃같은 마주침이 있었다. 똬리 틀린 시선의 끝에서 그는 묘하게 입매를 휘었다.

정난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였다. 그러나 정난우에게서 느꼈던 따뜻하고 애잔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의 유리알이었다.

야, 순둥이. 저게 어딜 봐서  ‘열정과 애정이 가득한 눈’이라는 거야?

에녹은 직감했다. 저건 낯설음이나 반가움이 아닌, 확인의 눈도장이었다. 요 근래 정난우의 그림자를 받아 마시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거였다.

균형을 잃은 대외용 얼굴근육이 비틀리기 직전, 그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연예인처럼 근사하게 웃으며 기자의 질문에 집중했다.

인터뷰는 매니저의 말대로 금방 끝맺음 되었다. 강도영은 기자가 일어서자 곧장 다가왔다.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밀리건 씨. 크리스토퍼 강입니다.”

 “공연 잘 봤습니다. 클래식 일자무식이지만 아름다운 걸 느낄 줄은 알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이렇게 좋은 연주를 들었으니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악수에 응하며 입발림 말을 쏟아 냈다. 사실은 공연 내내 귀는 악의로 닫혀 있었다. 네가 잘해 봤자 정난우만 하겠냐 싶었다. 아집의 귀마개가 효과를 발휘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정말로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햇다.

강도영의 연주는 차가웠다. 온기 없는 불꽃이었고, 흐트러지지 않는 칼날처럼 매서웠다. 제 몸마저 태울 것처럼 타오르던 정난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환호하는 객석의 무리에서 에녹은 그렇게 기이한 감상만 느꼈을 뿐이었다.

강도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거뒀다. 가까이서 보니 웃어도 냉랭한 인상이었다. 동양인치고 콧대가 좁고 높은 편이었다. 시원하게 트인 눈매에도 입술에도 낮은 온도가 흘렀다.

그는 자연스레 그린 룸 안쪽으로 안내했다. 방금 기자와 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다른 손님들의 접근을 은연중에 차단하는 위치선정 같았다.

 “난우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가 자연스레 대화의 맥을 텄다. 그 한 마디로 여러 가지가 유추가 가능했다. 이를 테면 지금 이 영혼 없는 만남이 누구 때문인지, 둘 다 관심 있어 하는 건 서로에 관한 게 아니라는 거라든지.

에녹은 실소를 누르며 물었다.

 “뭐가 고맙단 말입니까?”

 “난우 친구 돼 주셔서요. 애가 워낙 호텔 죽돌이라 걱정이 많았거든요. 제가 그냥 사업하는 사람이면 자주 같이 있어줄 텐데 직업이 이렇다 보니.”

하, 이것 봐라?

에녹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했다. 강도영의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물처럼 흘러 그 미동을 스쳤다. 돌을 던져 숨은 야생짐승을 끌어내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에녹 역시 그의 반응을 샅샅이 시야에 담았다. 일방적으로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뜯어보고 평가하러 온 건 저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보통 초딩 아이 둔 학부모가 할 법한 인사네요. 왕따인 우리 애랑 놀아줘서 고맙다, 뭐 그런?”

 “비슷하죠.”

강도영은 동요 없이 미려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난우 처음 본 게 녀석이 열다섯 살 때였는데, 성장도 더뎌서 제 눈엔 꼬맹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

 “들었습니다. 직접 데뷔까지 신경써주셨다고.”

강도영이 슬쩍 턱을 젖히며 반쯤 눈꺼풀을 내렸다. 잠시의 공백 뒤, 살짝 다물린 그의 입술이 이상한 곡선으로 휘었다.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그냥 놔뒀어도 결국에는 누구라도 건져서 물에다 던져 놨을 것을.”

강도영의 동공을 파묻은 검정색 눈동자는 규칙 없는 우주 같았다. 먼지 같은 불순물이 끊임없이 그 안을 떠돌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도 어려울 것처럼 미세한 감정의 부스러기들이었다.

루스만큼 알기 어려운 족속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히 눈치 챘다. 이 놈은 루스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질이 나빴다.

루스의 냉정함은 이성적 사고가 그 뿌리였다. 그러나 이 남자 강도영의 근원은 어둡고 깊었다. 음습하다고까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난우의 뇌리에 박힌 강도영이 가짜라는 데에 에녹은 제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강도영이 의도한, 강도영이 만들어낸, 강도영이 제 멋대로 덧칠해 놓은 무기질의 껍데기를, 정난우는 보고 있는 거였다.

 “후회하시나보네요.”

적대감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감지하라고 아낌없이 드러냈는데도 강도영의 고요는 흠집 하나 없었다. 물과 불, 아니, 얼음과 불이었다. 상극을 맞닥뜨린 에녹의 기백이 사나워졌다.

 “네. 후회합니다.”

강도영이 깨끗하게 긍정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대도, 제가 그 애를 그 시골구석에서 썩게 놔두지는 않을 것 같네요.”

 “후회는 하는데 바로 잡을 생각은 없군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이라…….”

강도영은 느슨하게 풀어진 말미를 느리게 엮어 붙였다.

 “예술 하는 작자들이 원래 재능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 집니다. 고고한 이성도 차가운 본능도 결국 허상처럼 흩어지게 마련이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워지는 데까지, 정말 순식간이거든요.”

 “아아. 당신도?”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였고.”

강도영이 배설한 말들에 악취는 없었다. 수치 없는 담담함으로 제 치부를 까뒤집는 그가 점점 꺼림칙해졌다.

에녹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재차 그의 속내를 박박 긁어보려 했지만 한 점 나오는 게 없었다. 진심이건 거짓이건 이 놈은 분명 이상했다. 뭔가 좀 뒤틀려 있나 싶었더니 다시 볼 땐 결벽처럼 정돈되어 있는 거다. 

 “그런데 밀리건 씨는…….”

강도영이 조금 고개를 기울여 빤히 시선을 던졌다.

 “난우와도 그냥 오늘처럼 공연 보러 가셨다가 만나셨던 겁니까?”

그걸 네 놈이 알아서 뭐 하려고.

에녹은 꼬인 심사를 감추고 각본대로 연기했다.

 “네. 제가 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꽤 됐죠. 그런데 사람 인연이란 게 우습더군요. 제가 다음 영화에서 정난우 씨를 연기하게 됐거든요.”

 “영화?”

강도영은 멈칫했다가 이내 아, 했다.

 “그거 주연 배역이 벌써 정해졌군요. 그 정도면 제작기획서가 이미 나왔을 텐데, 투자자 확보는 다 끝난 겁니까?”

 “배역이야 예전에 저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투자사들도 다 구했고요. 왜요, 투자에 관심 있으십니까?”

에녹이 그를 유심히 뜯어보며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 부모님께서 난우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이시라 접촉해 보라고 얘기해 뒀거든요. 밀리건 씨가 주연배우라면 굳이 언질 둘 필요도 없었네요.”

 “아버님께서 정난우 씨를 많이 예뻐하시나 보군요.”

비꼬듯 나오려는 어조를 간신히 다듬어 내뱉었다.

이건 무슨 며느리 아끼는 시아버지도 아니고 바이올린 대여에 영화 투자에, 졸부처럼 왜 이래?

강도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순하고 예쁜데 재능까지 갖췄으니 노친네들 눈에 단단히 들었죠. 게다가 당신 자식들한테 없는 애교까지 부리니까 정이 안 가겠습니까. 애가 숫기가 없어서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들한텐 예쁜 짓도 많이 하거든요.”

나도 알아. 그 녀석이 요새 나한테 예쁜 짓을 엄청 하거든.

똑같이 찔러주려다가 참았다. 뭔가가 한없이 애매한 지금 모든 걸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제가 당한 채로 있자니, 사전견제나 하러 와서 상대에게 실컷 들쑤셔지는 꼴이 되었다. 에녹의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저랑 기부 재단도 하나 하고 있는데 낌없이 베푸는 것도 잘 하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기부 재단 티가 팍팍 나더군요.”

그 때, 그의 매니저가 다가와 강도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또 다른 손님이 찾아 온 모양이었다.

에녹은 눈치껏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전 일이 좀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네, 저 역시 반가웠습니다. 혹시 난우랑 친해지는 과정에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 보세요. 뭐든 대답해 드릴 테니.”

강도영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건 또 뭐냐 싶었지만 에녹은 갈등 없이 그의 휴대폰에 제 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적은 가까이에 두고 관찰 할수록 좋다. 정난우와 그와의 거리는 지금도 충분히 머니 일단 가만히 주시해 볼 참이었다.

 “제 번호는 문자로 찍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그가 아, 하는 목소리로 발길을 붙들었다. 돌아보자 강도영이 묘하게 웃으며 의뭉스런 소리를 내던졌다.

 “한국에서는 아직 한자로 이름을 많이 짓습니다.”

 “…그래서요?”

 “한자에는 다 고유의 뜻이 있죠. 이름 지을 때 어감이나 이미지보다는 그 뜻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아직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라고.

에녹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추켰다. 잘 정리된 눈썹이 바깥으로 쭉 당겨졌다. 본능적으로 심장에 가드를 쳤다. 느낌이 왔다. 곧 다가올 결정적 한 방을 대비해야했다.

 “난우 이름의 뜻, 아십니까?”

강도영의 입술이 그린 미소는 그의 검은 눈동자까지 닿지 않았다. 단절된 감정의 부스러기가 매캐하게 흩날렸다.

그가 은근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한번 물어보세요. 꽤 예쁜 뜻이거든요.”

 “…그러죠.”

 “살펴 가십시오. 그럼 이만.”

에녹은 느긋하게 돌아섰다. 천천히 옮기던 발이 중도에 멎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과는 몹시도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제가 그린 그림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에자 내리뜬 눈을 치켜뜨며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돌아갔다. 막 자리를 이동하려던 강도영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바로 했다. 

에녹은 달큼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을 세웠다.

 “난우 자산관리도 해 주시는 모양이던데, 부동산 소유 내역 이런 것도 잘 아시겠네요.”

강도영은 대답 없이 허공을 담담하게 노려보았다. 에녹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엇갈린 공기를 주시하며 다른 온도로 끓고 있었다. 미묘한 기류가 첨예하게 기 싸움을 했다.

 “혹시나 놀라실까봐 미리 알려드립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집을 하나 샀는데, 그게 곧 난우랑 공동명의가 될 거거든요.”

에녹은 웃는 낯으로 눈썹 끝을 들어 올리며 한 보 뒤로 물러났다. 강도영의 서늘한 가면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공기 한 줌 없어 보이던 검은색 눈동자는 분명 과격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날짐승의 비린내가 드디어 코끝을 스쳤다. 본성의 일각을 드러낸 그에게 에녹은 선량한 미소로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애가 너무 겁이 많아. 자꾸 내가 어디 갈까봐 불안해하는데, 우리 크리스토퍼 강 말대로 예뻐서 내가 그냥 녹아내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안겨줄 수 있는 건 다 안겨줘야 그나마 좀 마음을 놓을 것 같아서. 안 그렇습니까?”

강도영의 숨은 아주 느리고 위험하게 바닥을 기었다. 그는 아랫입술의 얇은 상피 조작을 잇새로 뜯어내며 말했다.

 “건투를 빕니다.”

그의 눈은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담았고, 그의 입술은 희미한 비웃음을 담았다. 에녹은 아주 복잡한 감정의 건더기들을 빤히 노려보고 나서야 완전히 몸을 돌렸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을 옮겨 그린 룸을 나섰다. 로비에 무사히 들어서자마자 아슬아슬한 피막으로 보호하고 있던 본성이 튀어나왔다. 쌍욕이 목젖 아래 소용돌이쳤다.

 “저 개, 씹…….”

배역을 내던진 에녹의 얼굴이 광포하게 일그러졌다. 밖에서 기다리던 쉐인이 말을 걸려다 멈칫해서 물러날 정도였다.

에녹의 손은 코트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렸다. 평평한 휴대폰의 강화유리가 열 섞인 체온에 뜨끈뜨끈해져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머풀러를 콧들까지 덮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묻고 싶지만 지금 한국은 이른 새벽이었다.

에녹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 쉐인의 눈치 살피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홍흉한 기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건투를 법니다.」

무슨 뜻이야, 그건.

보통이 아니었다. 뭔가가 절대로 심플하게 풀어낼 수 없는 부류였다. 어쩌면 제가 감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두울지도 몰랐다.

적수를 발견한 몸은 내내 뜨거웠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찬물을 뿌려내는 샤위기 아래 맨 몸을 던졌다. 정수리와 어깨를 따갑게 두드리는 세찬 물줄기가 끓는 머리를 차갑게 식혀갔다.

샤위를 하고 밤을 기다렸다. 맞잡아 깍지 낀 손이 위험하게 꿈틀거렸다.

「건투를 빕니다.」

놈의 마지막 한 마디가 신경 줄을 예민하게 잡아 당겼다. 허세가 아니다. 자신감도 아니다. 무관심에도 속하지 않았다. 사람을 관찰하는 데에 탁월한 제가 이 정도로 갈피를 못 잡는 건 분명 기이한 일이었다.

마치 진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잖아?

무의식중에 에녹은 입술이 부어오를 만큼 문지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한국은 아침 8시 정도 됐겠다 싶은 시각이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은 금방 끊어졌다.

《여보세요.》

느리지만 청량한 목소리는 정화제였다. 진흙탕이었던 기분이 조금 맑아졌다. 목 아래 넘실거리던 혼탁한 덩어리들이 차츰 가라앉았다.

에녹은 가다듬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받아. 흑시 기다렸어?”

《…네 아침에 전화한다고 하셔서.》

 “그냥 네가 하지. 나도 타이밍 재고 있었는데.”

《오늘 로케 촬영이라고 하셔서, 혹시 피곤할까봐.》

 “아무리 피곤해도 네 전화 받을 체력 정도는 항상 남아 있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다음부터는 그냥 해.”

매트리스에 길게 몸을 뉘였다. 한 팔로 뒷머리를 받치며 천장을 바라 보았다.  ‘네, 그럴게요.’ 하는 정난우의 숨소리를 잠시 듣고 있었다. 환한 조명 아래 정난우가 둥둥 떠다녔다.

 “보고 싶다, 난우야.”

《…아. 저도…….》

백열등 빛이 쏟아지는 이마가 뜨끈했다. 에녹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겁게 휘돌던 내심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혈관을 타고 도는 꺼림직함은 여전했다. 알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은데 꼭 알아야 되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에녹은 불쑥 물었다.

 “너 이름 뜻이 뭐야?”

《뜻이요?》

 “그래. 너희 나라에서는 이름에 뜻을 강하게 부여한다며.”

정난우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장면이 상상됐다. 귀도 쫑긋거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난, 은 따뜻하다. 우, 는 비.》

 “그러니까, 따뜻한, 비?”

《네, 비요. 난우는 따뜻한 비Warm Rain라는 뜻이에요.》

에녹은 가만히 그 예쁜 뜻을 입 안으로 읊조렸다

Warm Rain. Warm Rain…… …Rain?

순간 에녹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고요하지안 급박하게 굴러가던 머릿속에 섬광처럼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쳤다. 정난우의 샌프란시스코 자택으로 가던 길의 차 안이었다.

「크리스Chris가 모태신앙이 가톨릭이어서요.」

Chris’s rain? 가톡릭은 얼어 죽을.

헛웃음이 나왔다. 강도영은 무언가에 종교적 의의를 둘 리가 없는 인종이었다.

 “네가 참여했다는 파운데이션 말이야, 그거 언세 설립한 거야?”

「음…… 열여섯 살? 십 년 정도 됐으니까 그쯤일 거에요.」

십 년 전이라, 그 미친 새끼가 나랑 뭐 하자는 걸까.

덮어놓고 열이 치받기엔 상황이 참 묘했다. 강도영의 온도 낮은 눈초리에 멍울져 있던 괴이쩍은 미소를 떠올렸다.

만약 그게 선전포고였다면 그에 상응할 뭔가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강도영의 눈동자는 뙤약볕 아래 바싹 마른 사막 같았다. 여린 꽃잎 하나 맺을 생명력도 없을 황량한 바람만 불었다. 투쟁심이 거세된 투견은 애초에 링 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거였다.

뭐지, 도대체, 눈이 뒤집히는 걸 참을 정도로 열은 끓는데, 정작 싸울 의지는 없다?

이렇게 알기 어려운 인간은 처음이었다. 복잡한데 단순해 보이고, 단순한데 또 복잡해 보이는 거다.

《무슨 일…… 있어요?》

조심스레 살펴 묻는 말에 에녹은 정신이 확 깼다. 순식간에 맑아진 머리를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별 거 없어. 아, 내가 모레 도착시간 알려줬던가?”

《네, 공항에 세 시쯤…… 차 보내드릴까요?》

 “아니. 인터내셔널 택시 예약해 뒀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율리안이 네 매니저지 내 매니저는 아니잖아.”

에녹은 굽힌 한쪽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었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 턱을 비틀어 내렸다. 빗장뼈 위의 허공을 더듬는 코가 익숙한 향기를 빨아들였다.

에녹은 나른하게 어깨 위에 턱을 찍어 누르며 중얼거렸다.

 “네 냄새 나.”

《……네?》

 “샴푸, 바디클렌저, 치약까지 나 네걸로 바꿨잖아. 다 챙겨왔는데 아침에는 그러 못 써. 촬영하다가 갑자기 네 냄새가 나면 흥분되거든.”

《…그, 그런…….》

 “모래야. 대답 잘 생각해 나 ”

부끄러워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정난우의 뺨에 가 있을 열기를 작은 기기가 대신 전해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보송한 시트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스프링의 탄력이 몸을 뒤흔들었다.

깨끗이 청소된 머리로 가만히 생각을 곱씹었다. 강도영, 정난우, 그리고 에녹 자신. 복잡한 듯 단순하게 이어진 관계였다.

정난우의 껍데기는 불안하리만치 투명했다. 그러니 그 겁 많은 토끼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은 굳이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문제는 강도영과 정난우를 잇고 있는 무언가였다. 아주 가늘지만, 그러나 쉽사리 끊어낼 수 없을 만큼 질긴 끈이 그 둘을 묶고 있었다.

강도영은 정난우에게 기본적으로 소유욕 같은 게 있었다. 그 망할 재단 이름만 봐도 그 시커먼 속내는 빤히 읽혔다. 그리고 강도영은 망설임도 없이 그 명확한 단서를 건넸다.

명백히 자극하려는 의도라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원조적으로 쑤셔 대서야, 놈이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설마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다.

강도영의 내심에 하수구 침전물처럼 검게 깔린 본바탕은, 분명 자신감이었다. 그게 못내 찝찝하고 불쾌했다. 마치 얼마든지 발버둥 쳐 보라는 듯이 방관하는 듯도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부추기는 것도…….

에녹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뿜었다. 정말 난해한 새끼였다. 첫 만남은 분명 무승부에 가까웠다. 나쁘지 않은 스코어였다.

어차피 마지막 순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거다. 많이 때린 놈이 이기는 게 아니다. 끝까지 버티고 선 놈이 이기는 거다.

에녹은 불쾌한 공기를 한 번의 웃음으로 떨어내며 뜨겁게 눈을 빛냈다.

그 자신감은, 반드시 짓뭉개주지.

네 번째 공연이 있는 서울로 가기 전 평창에서 하루를 묵었다. 카를로에게도 권해 봤지만 어차피 사양할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나라를 가건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회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난우는 새벽녘 일찍 눈을 떴다. 창백한 여명이 비춰들기도 전이었다. 사실은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오늘 오후에는 에녹이 돌아올 거다. 연습해 뒀던 말을 무사히 다 내뱉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곧바로 서울에 올라갈 채비를 했다. 미리 챙겨 둔 짐을 매니저들이 실을 동안 정난우는 펜션 내부를 정리했다. 빼 두고 간 것이 없나 확인하고 있을 때 루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난우 씨, 작업 결과물들 메일로 보내 놨으니 확인 후 답장 부탁합니다. OST 삽입 후보곡도 하나 나왔어요. 악보도 함께 보낼 테니 초연해 보시고 뭐든 의견 주세요.』

『아 참. 저도 취재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었죠? 저 여기 일 좀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대본 작업 들어갈 때쯤부터 신세 좀 질게요.』

연달아 두 개였다. 정난우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네, 지금은 제가 이동을 해야 해서요. 이따가 확인하고 답변 드릴게요. 그리고 취재는 좋으실 시기에 오시면 돼요.』

막 전송을 누르고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정난우에게는 사촌누나뻘이지만 벌써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최순애가 나타나 말했다.

〔난우야. 잠깐 나와 봐. 손님 왔어.〕

〔손님이요? 누구 손님인데요?〕

〔네 손님이니까 널 부르지. 어여 나와.〕

정난우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최순애를 따라 펜션을 나섰다. 마당 앞에는 검정색 밴이 정차해 있었다. 짐을 다 실었는지 율리안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태영은 범퍼 앞에서 활기찬 목소리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대화 소리도 점점 귀에 들어왔다. 한태영과 대면하고 있는 인물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인지의 영역에 그 음성이 파고들어와 분석이 끝난 순간.

정난우는 걸음을 멈췄다. 일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골이 흔들렸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음성이었다.

차갑게 언 땅을 더듬어 상대방의 신발을 살폈다. 큰 발, 하얗고 낡은 운동화가 기척을 느낀 듯이 방향을 틀었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이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역시, 제 귀가 틀릴 리가 없었다.

「팬은 팬으로 남겨둘 때가 제일 좋은 거야.」

에녹의 경고가 관자놀이에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손끝이 차게 굳었다. 이 상황을 분석할 만한 요령이 없었다. 고요하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어지러운 생각들만 두개골 안을 가득 채웠다.

여긴 어떻게 알았지? 왜 찾아온 거지? 무슨 볼일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피해야 되나? 의심해야 되나? 이 애도 내게 팬이라며 따라다닐 생각인가?

몸이 얼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부드러운 연골들이 마취제에 취한 듯 했다. 한파 한 줌만 담은 빈손이 못 견디게 불안했다. 늘 다정하게 셔츠 끝자락을 내 주던 에녹의 부재가 갑자기 칼날처럼 손가락을 베었다.

〔난우야, 왜 그래? 정운 학생이 인사하잖아.〕

얼어붙어 있던 정난우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최순애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난우는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이정운이 아닌 최순애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아니, 누나도 저 학생 알아요?〕

최순애가 주름 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알지. 그럼. 우리 찬영이 네랑 정운 학생 부모님이 예전부터 동네주민으로 친했는걸. 펜션 성수기 때나 갑자기 손님 몰린 날 종종 와서 일 도와주는 아줌마 있잖아. 너도 몇 번 봤지?〕

억지로 기억을 헤집었다. 연산의 과부하가 걸린 뇌는 그 간단명료한 작업조차 느리게 수행했다. 정난우는 아주 겨우, 두어 번 마주쳤던 아주머니 한 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아줌마 아들이야, 정운이가. 너 없을 때 가끔 제 어미랑 밥 먹고 가고 그랬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도. 〔죄송해요. 혹시 놀라셨어요?〕

상황을 가만히 방관하던 이정운이 물었다. 변성기를 무사히 거친 편안한 저음이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심장 박동은 여전히 기차처럼 날뛰었다.

체한 것처럼 명치끝에 걸려 있던 목소리를 겨우겨우 끌어올렸다.

〔강릉…… 살았어요?〕

〔네. 부모님도 저도 강릉서 산 지 한 팔 년쯤 됐어요.〕

8년. 8년이면 자신은 18살, 이 애는 10살이었을 때다.

〔저희 가족 모두 해미 돌잔치에도 갔었어요.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신년음악회에서 인사 드렸을 때 기억 못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대화가 끊기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요.〕

잔뜩 눌린 호흡을 천천히 정돈해 내뱉었다. 그 때부터 박찬영과 오래부터 알던 사이라면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찐 일로…….〕

〔저희 어머니 좀 모시러 왔어요.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셔서 혼자 집까지 오시라고 하기가 뭐해서요. 온 김에 인사하고 가려고 형 찾은 거예요.〕

그래요, 하며 정난우는 어색하게 팔을 문질렀다.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정운의 뒤로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겼다. 작고 마른 체구의 아주머니였다.

〔그럼 전 어머니 모시고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형.〕

그래요, 반사적으로 또 대꾸하려다가 정난우는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의구심은 옅어졌지만 자꾸 에녹의 꾸짖음이 귓가를 울렸다. 나중에라도 우연히 알게 되면 정말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날 것 같았다.

팬은 팬으로, 먼 거리로 여지를 남기고, 약속 같은 건 하지 말 것.

그가 주지시켜준 강령들만 열심히 되뇌었다.

〔우리 갈게요, 난우 학생. 감기 조심하고….〕

애써 대답을 회피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먼저 흐리게 입을 열었다. 끝맺음 되지 못한 말미에 가래 끓는 기침이 들어찼다. 조금 휘청하는 그녀를 이정운이 얼른 부축했다.

순간 흠칫 놀란 정난우는 그녀의 발치를 응시했다. 엉망으로 꼬여 있던 생각들은 조금도 정리되지 않은 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뻣뻣하게 굳은 혀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네. 아주머니도…… 얼른 나으시고 조심히 살펴가세요. 정운 학생도 잘 가고요.〕

그 때, 최순애의 남편 박경호가 멀리서 목소리를 높였다.

〔정운아! 얼른 와! 데려다 줄게!〕

박경호는 펜션 손님들을 픽업해 주거나 장을 볼 때 사용하는 승합차를 타고 있었다. 이정운을 부르는 목소리는 제법 친근했다. 그의 아들 박찬영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다고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승합차에 올랐다. 희미한 매연을 분출하며 차가 출발했다. 펜션 부지를 벗어나 산 속으로 파묻히는 그 잔명을 오래 지켜보았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몸이 떨려 와서, 정난우는 에녹의 목소리가 급격히 목말라졌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창 비행기 안에 있을 거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불안한 얼굴로 손을 뻗으면 그는 또 코트 앞섶을 열어줄 거다.

한태영이 우리도 이만 가자며 재촉했다. 정난우는 말없이 뒷좌석에 올랐다. 밴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강원도의 눈 쌓인 풍경이 점점 멀어져갔다.

가는 내내 손 안에 쥔 휴대폰의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가 인천 공항에 도착할 오후 3시는 아직도 멀었다.

톨게이트를 지나 시원하게 달리던 밴이 시내로 접어들었다. 내비게이션은 투숙 예약을 한 호텔로 직행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서울 시내의 전경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겼다.

주인공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 화재사고로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냉대에 지쳐 어둠 속으로 숨은 여자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돈 몇 푼 쥐어 주고 데려온 거리의 악사가 주인공, 즉 정난우 자신의 분신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주인공이기에 그녀는 추한 외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짧은 관찰 뒤에 주인공에게 다가갔고. 곧 그의 연주에 평온과 환희를 얻었으며,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주인공 역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이 여자는 천사와 악마와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주인공을 위해 모든 걸 다 희생하지만 단 하나, 주인공이 다시 시력을 되찾지 못하도록 방해해요. 눈이 다시 보이게 되면 자신의 추한 얼굴을 보고 실망할 거라 생각하거든요.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인물입니다.」

루스가 그랬다. 그녀의 캐릭터 전기를 읽었을 때 정난우는 괴로워했다. 꼭 죽여야 하나요. 했더니 루스는 담담하게 그게 주인공의 비극적 코드를 극대화하는 장치라고 대답했다.

주인공은 시력을 되찾자마자 연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정난우가 아버지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 감금으로 인해 어둠으로 도망쳤다면, 주인공은 스스로의 미래를 얻은 대가로 연인을 잃어 어둠으로 도망친 거였다. 결국 그의 음악에 매혹된 이들의 위로와 보살핌 속에서 주인공은 다시 빛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는 줄거리였다.

몰입해서 보다보니 페이지는 반절이 넘게 훌쩍 넘어가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길 타고난 정난우는 기분이 묘해지고 말았다. 자신의 인생과 허구가 헝클어진 결정체라는 건 알지만, 지나치게 이입해 버렸다.

그녀의 죽음에 절망한 주인공이 약에 취해 환상 속을 헤맬 때, 정난우는 파일을 닫았다. 좀 쉬었다가 다시 봐야할 것 같았다. 감성이 너무 물렁물렁해져 버렸다.

루스가 함께 보내온 PDF 형식의 악보를 열었다. 오선지 위에 늘어진 음표들을 차분한 눈으로 훑어 내려가며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그 어떤 편견도 덧씌우지 않은 채 담백하게 음표들이 떠도는 궤적을 읽어가려 했다.

작곡가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다. 이것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테마였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눈이 멀어,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 속에서 조용히 멍들어 가는 아이. 그런 주변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이해하기도 했지만, 가슴에 할퀴어진 상흔은 치료할 길을 찾지 못해 아파했던 아이.

아득히 먼 곳에서 젖은 선을이 밀고 들어왔다. 물에 빠져 죽은 혼령의 노랫가락처럼 구슬픈 한이 맺혀 있었다. 흐물흐물 엿물처럼 흐르는 까만 음표들이 희게 탈색되어 우수수 시야로 쏟아져 내려왔다.

멍하게 깜빡이는 눈앞으로 광막한 어둠이 번졌다. 빛이 차단 된 환상 속에서 정난우는 까맣게 입 벌린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다. 엄마 없이 벽을 더듬어 밖으로 나갔던 날이었다.

가느다란 눈발이 사선으로 날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스웨터 구멍을 송곳처럼 뚫고 들어왔다.

외투 없이 나간 어린 정난우는 손을 뻗어 눈송이를 받았다. 아무리 차게 얼어도 손에 닿으면 녹고 마는 눈송이의 감촉이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했다.

발갛게 언 손을 호호 불며 조금 더 용기를 내 걸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운동화 밑창 사이로 스미는 물에 발도 감각이 점차 사라져갈 때쯤, 정난우는 동네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돌맹이를 던지고 장님이라고 놀렸다. 엄마 아빠도 쭈구렁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조롱했다. 장님인 건 맞지만 부모님 이야기엔 울음이 터졌다.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의 조롱 소리는 굵어지는 눈발을 따라 부피를 늘려갔다.

「난우야!」

엄마의 목소리, 달려오는 발소리에 더 서럽게 울었다. 몰려들어 눈덩이와 돌맹이를 던지던 아이들이 파스스 흩어졌다. 거대하고 따뜻한 바다에 잠기듯이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귓가로 습윤한 목소리가 흩어졌다.

「괜찮아. 우리 난우, 울지 마. 애들이 어려서 뭘 잘 몰라서 그런 거야. 우리 난우 착하고 고운 아인데, 애들이 몰라서 그래.」

바닥을 더듬던 손에 엄마 발이 닿았다. 거칠고 마른 발, 꽁꽁 언 발, 헐벗은 맨발. 정신없이 뛰어나온 거다.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간 것에 대한 대가였다. 혹독하게 돌아온 결과물이 얼어붙은 촉각을 아프게 난도질했다.

집에 돌아와 지독하게 앓았다. 밤새 고열과 구토에 시달렸다. 안 되겠다 싶어 부모님이 들쳐 업고 응급실에 갔다. 폐렴이었다.

앓는 내내 악몽을 헤맸다. 여물지 않아 흐리게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무의식 속에서 선명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완성된 조각들은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괘씸한 년. 사람 미치게 하는 눈으로 날 홀려 놓고…….」

남자의 핏발 선 눈은 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황폐하게 메마른 눈동자에 어린아이가 갇혀 있었다.

「난우야. 엄마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어.」

남자가 집을 비우면, 그녀는 부르튼 입술을 움직여 종종 아이에게 허름하지만 행복했던 과거를 들려주곤 했었다. 피아노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 돼 종이건반으로 연습을 하던 어린 시절,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근사한 남학생들이 창문에 빼곡히 붙어 구경했다던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대학에서 짧게 누렸던 숨 가쁜 행복.

그 끝에서, 그녀는 남자를 만났다. 그녀의 남은 생은 탐욕에 집어삼켜진 남자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 난우는 엄마한테 전부야.」

아름답지만 볼품없이 깡마른 어머니가 눈물 젖은 얼굴로 저를 쓰다듬고 있었다. 매일매일 남자가 그녀에게 건네는 말.  ‘내게는 당신뿐이야.’ 그 억척스런 올가미에 걸린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증오해 마지 않는 남자와 똑같은 말을, 제 아들에게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우리 난우가 전부야. 난우도 그렇지? 응?」

엄마…… 혹독했던 벼랑 끝에서 그녀를 밀어버린 건 정난우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원망할 권리가 제게는 없었다. 정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모두 죽였다. 블라인드를 투과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조명의 전부였다.

옷장에 걸어둔 크로스백 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바이올린을 꺼내 조율했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초연을 시작했다.

에녹은 객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매서운 바람에 설얼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내렸다. 고개를 내려 옷매무새도 살폈다. 파리에서 급작스레 쓸어 담았던 새 옷들과 패션소품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봐 주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벨을 누르려다 멈칫 했다. 아주 희미하게 바이올린 선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연습 중인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좋은 표정을 짓고 있을 정난우의 환영이 햇살처럼 눈앞에 비쳐 들었다.

에녹은 문득 기묘한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를 보고 싶은 건지, 그가 자신을 봐 줬으면 싶은 건지.

정확히 말하면 둘 다이지만, 지금은 전자 쪽이 더 강했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다이얼을 눌렀다.

《웬일이세요, 밀리건 씨?》

한태영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에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정난우 객실 앞입니다.”

《네. 내가 가르쳐 줬잖습니까. 그런데요?》

 “와서 방 좀 따요.”

《……네?》

 “방 좀 따 달라고. 키 있는 거 다 압니다.”

《…….》

상대편은 말을 잃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떼 액정을 바라보았다. 끊긴 건 아니었다. 안 들리는 거냐고 추궁할 찰나에, 엄청난 성량이 수화부에서 터져 나왔다.

《이젠 사생활 엿듣기도 모자라 무단침입까지! 아무리 밀리건 씨가 해충 박멸에 힘 써주셔도 그건 안 됩니다!》

에녹은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틀어 손목으로 귀를 콱콱 문질렀다. 귀청 나갈 뻔했다. 혀를 차며 한태영을 협박했다.

 “이봐요, 한. 고막 터지면 책임 질 겁니까? 나 비싼 몸이에요.”

《흥. 으름장 놔도 소용없습니다. 고막 터지면 진단서 떼세요.》

안 먹히네.

에녹은 빠른 포기를 아는 남자였다. 그는 금세 방법을 바꿨다.

 “방 안에서 바이올린 소리 나요. 연습 중인 것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문만 따 줘요.”

《…….》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자기가 말해 놓고 에녹은 슬쩍 눈썹을 모았다. 사실은 무슨 짓을 할지 자신도 몰랐다. 이건 때에 따라 거짓말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알았어요. 난우 씨 가끔 넋 놓으면 벨 소리도 어차피 못 들으니까. 기다려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기다렸다. 3분도 안 돼서 한태영이 나타났다. 그는 조금 까끌까끌한 시선으로 에녹을 흘겨보며 툴툴거렸다.

 “난우 씨 프라이버시가 이렇게 막 저급하게 취급 돼도 좋은 값이 아닌데.”

 “아 거, 나도 비싸다니까.”

한태영은 어련하시겠냐며 문을 땄다. 에녹은 벌려진 문 안으로 들어섰다. 한태영은 습하게 울리는 연주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듣는 음률이었다. 무심결에 소리를 따라 들어가려던 그를 에녹이 제지했다.

이제 가도 돼요.

작게 속삭이는 말에 한태영은 눈을 세모꼴로 떴다. 하지만 이내  ‘점심 근사한 데서 사 줄게요.’라고 말하는 에녹의 더 근사한 목소리에 화를 죽였다. 미련을 버린 한태영이 총총 사라졌다.

실내는 어둑했다. 혼자 있을 땐 불 끄고 사는 게 정난우의 일상이라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구두를 벗고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테이블에 올려 둔 랩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랩톱 액정에서는 화면보호기의 기하학적 무늬가 어지러이 떠돌았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이며 다가가던 에녹의 발이 점차 느려졌다. 그는 의아한 시선을 내렸다.

단단한 성벽도 뚫고 뻗어나갈 것 같은 선율은 침중하고 구슬프며 애처로웠다. 눅눅하게 젖은 비브라토가 세포를 두드렸다. 머리카락 한 올, 모세혈관 하나까지 빠짐없이 점령했다.

정열적이고 뜨겁게 연주하지만 음울하며 서늘했다. 영원 같은 찰나가 무수히 스쳤다. 바이올린 안의 울림통 안으로 한 맺힌 현의 울음이 떠돌았다.

그 모든 것이, 테이블 위에서 홀로 돌아가는 녹음기가 세차게 게워내고 있는 거였다. 에녹의 눈길이 바닥을 뒹구는 바이올린과 활에까지 닿았다. 정난우가 어느 순간에서고 소중하게 보관하는 악기였다. 저렇게 내팽개쳐지듯 방치해둘 리가 없었다.

심장이 통째로 바닥에 추락했다. 그는 날듯이 자리를 박차고 객실 내를 돌아다녔다. 침실과 욕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객실 곳곳을 뒤지다가 욕실 앞에서 액정 깜빡이는 정난우의 휴대폰을 찾았다. 심박동이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체온이 급격히 치솟았다.

에녹은 곧장 방향을 틀었다.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심장을 쥐어짰다. 한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초조하게 침실을 나섰다.

그 때였다. 객실 문의 잠금이 풀렸다. 거실을 막 내딛은 에녹의 발이 석상처럼 멎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열린 문 안으로 꽁꽁 언 정난우가 들어오고 있었다.

자동센서가 그제야 실내에 불을 밝혔다. 일순 현기증처럼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터졌다. 무심결에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거친 숨이 물 폭탄처럼 쏟아져 바닥에 고였다.

《네. 밀리건 씨 왜요?》

 “……아뇨. 아닙니다.”

에녹은 전화를 끊었다. 그 목소리에 흠칫 놀란 정난우가 고개를 반쯤 들어올렸다. 운동화를 벗다 만 얼굴이 파리했다. 벌어진 입술은 하얗게 부르텄다.

 “에녹…….”

울먹이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정난우가 벽에 기대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베이지색 면바지는 무릎이 찢어져 피가 살짝 비쳤다.

 “아, 미안해요. 도착하기 전에는 와 있으려고 했는데…….”

에녹은 불같은 숨을 집어삼켰다.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시리게 얼어붙은 눈동자가 잔 떨림에 흔들렸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얼른 달려가 저 다친 몸을 추슬러 안아줘야 했다. 그런데 몸이 박제된 마냥 굳었다. 애써 묻어 놓았던 면도날 같은 과거가 불쑥 솟아올라 가슴 안쪽을 난도질하는 거였다.

오래 전에도 그랬다.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녀석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에녹은 주저앉은 정난우에게서 오래 전의 그 앳된 모습을 겹쳐 보았다. 공기 속에서 하얀 입김이 바스러졌다. 휘청거리는 마음이 낙엽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가차 없는 발길질에 짓이겨져 여러 조각으로 팔랑거렸다.

「내가. 너무 늦었지?」

지금 타이밍에 제일 적합한 말은 그것밖에 안 떠올랐다. 기가 막힌 평행선을 타고 있는 거다. 비참하고도 난폭한 감정이 늑골을 으스러뜨렸다.

혈관을 따라 떠돌던 혼탁한 감정들이 단숨에 새까맣게 변이했다. 강도영에게서 느꼈던 불쾌감, 날아오듯 뛰어오던 구둣발에 점점이 끌려오던 설렘과 흥분,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뒤엉켜 진창에 나뒹굴었다.

폐에 돌덩이가 들어찬 듯 갑갑했다. 거칠게 머플러를 풀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외투를 벗어들고 빠르게 걸어갔다. 서늘한 바람에 흩어진 정난우의 체향 앞에서 무릎이 무너졌다.

 “씨발. 사람 미치게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에녹은 이를 갈듯 말하며 코트로 정난우를 둘러쌌다. 품에 안아들어 곧장 소파에 옮겨 앉혔다 흙탕물 묻은 운동화 한 짝이 아슬아슬하게 발에 걸려 있었다.

에녹은 떨리는 손으로 운동화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소파 아래 무릎만 굽혀 앉아 눈을 치켜떴다. 정난우의 까만 머리카락은 눈꽃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다. 원래도 혈색 옅었던 입술은 푸른 기마저 돌았다. 외투도 없이 한참을 헤맨 듯한 행색이었다.

 “너 지금 꼴이 왜 그런지 설명해.”

에녹의 목소리는 차분한 듯 고요하게 끓고 있었다. 그 근원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정난우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은 마치 잠에 취한 듯 몽롱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헤매고 있는 양 머릿속은 뭉근했다.

 “지…집에…….”

정난우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 어릴 때 살던 집이요…… 엄마가…… 자꾸 불러서, 엄마 아직 거기에 있다고…….”

에녹의 향기와 온기가 묻은 코트가 몸을 감싸왔다. 그 따뜻함에 설움이 북받치는데, 건조한 눈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다. 시각적 정보도, 뜨끈한 눈물도 맺혀 오질 않았다.

 “잘, 몰라요. 너무 어릴 때라. 그냥……무슨 동인지만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찾아다녔는데…… 그냥 예전에는 못 보던 아파트들뿐이고, 그래서, 여기저기…….”

 “왜 혼자 갔는데.”

차갑게 쉰 목소리가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불순물이 잔뜩 엉겨 붙은 까만 피가 뇌혈관까지 침투했다. 아찔하게 머리를 쪼개는 무언가가 이성을 끊어냈다.

 “잠깐이었잖아. 금방 오겠다고 했잖아. 왜 그 새를 못 기다려!”

에녹의 고함은 거센 풍랑을 맞는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넌 왜 자꾸 나한테 다친 모습만 보여. 이러면 잠깐이라도 내가 널 두고 어디를 갈 수가 없잖아!”

초조한 설움이 눈 꼬리를 태웠다. 정난우가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미안…해요. 걱정할까봐. 에녹이 오기 전에, 잠깐 다녀오려고…….”

 “나중에 알게 되는 게 더 아프다고 말했잖아. 날 기다리기가 힘들었으면 매니저라도 달고 나가든지!”

에녹이 상처받은 짐승처럼 목 안을 울렸다. 젖은 분노로 한껏 절여진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 실언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내가 늦었어?”

정난우는 흔들리는 시선을 꾸역꾸역 그러모아 그의 발치부터 더듬어 올라갔다.

 “말해 봐. 정난우. 오늘도 내가 늦었냐고.”

정난우의 그늘 진 미간으로 의아함이 몰렸다. 알 수 없는 말에 멀거니 메마른 눈만 깜짝거렸다.

 “수도 없이 후회했어. 그날 내가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몸만 제대로 가눌 수 있어서 그 미친 새끼 얼굴이라도 제대로 봐 뒀더라면, 그 차 번호판이라도 머리에 새겨 뒀더라면.”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초점 풀려 탁하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그의 와인색 니트 위를 방황했다.

 “정말 미친 듯이 찾아다녔어. 이틀 동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혹시라도 네가 그 사이에 끔찍한 일을 당하면 어쩌나,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에녹은 곪아 악취를 풍기는 말을 기어이 내뱉고 말았다.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 줬어. 우리 어머니조차도. 술 취해서 착각한 거라고. 그런데 나는 알잖아. 네가 트렁크에 갇혀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쳤는데. 내가…….”

 “…….”

 “물어봤잖아. 안에 사람 있냐고. 그리고 네가 안간힘을 다해서 움직였어. 네가 살려달라고 소리 없이 외친 걸 난 똑똑히 들었는데, 씨발. 아무도 안 믿었어.”

제가 가진 단서들은 너무나 빈약했다. 그랬으니 아무도 안 믿었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수만도 없었다. 에녹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거칠게 날뛰는 혈맥을 잠재우려 애썼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상스러운 욕설만 연이어 씹어 물었다. 토막토막 끊어지는 후회는 회상 속에서나 존재할 줄 알았다. 빌어먹을 열일곱 살. 영리하지 못했던 저주스러운 나이.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정체되어 썩어가던 과거의 후회가 현실마저 유린했다. 전신의 근육들이 성난 듯이 경련했다.

 “나 잠깐만 도망쳤다 올게. 오 분. 바로 이 문 앞에 있을 거야. 기다려.”

훤칠한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순간.

정난우의 입술이 움찔 벌어졌다. 뭉근하게 풀어져 있던 동공의 초점이 격변하듯 선명하게 돌아왔다. 물 샐 틈 없이 조인 시야는 그의 작아지는 등을 한가득 담았다. 혼란이 비처럼 쏟아져 온 몸이 젖어들었다.

멍하니 그의 질문을 되뇌었다.

「이번에도 내가 늦었어?」

문득 기묘한 기시감이 아찔하게 뇌리에서 분화했다. 구체적 영상 없는 막연한 기억들이 등 뒤에서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매몰되어 숨통이 짓눌리기 직전이었다.

마치 강제라도 받은 양 몸을 일으켰다. 꼿꼿하게 서기도 전에 떠밀리듯 그에게 달려갔다.

고작 몇 걸음이었다. 바닥을 나뒹굴었다 거세게 튕겨져 올라온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희미하게 허공에 녹아 있던 그의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기척을 느낀 그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정난우는 무너지듯이 에녹의 품에 뛰어들었다. 망설임도 없이 뻗은 팔이 그의 목덜미를 조였다.

단단하게 바닥을 지탱하고 선 남자의 몸이 아주 조금 휘청거리다 멎었다. 조금은 당황한 듯, 그의 손이 느리게 등허리를 감아 왔다. 그러나 곧 거세게 마주 안았다.

귓가에 그의 숨결이 파르르 녹아내렸다. 그의 향기로 가득 고인 폐가 불안정하게 젖어들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던 그의 향기.

 “우, 우리…….”

정난우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만…만난 적, 아, 아주 예전, 있…있어요?”

조각조각 부서진 단어들은 잘못 맞춘 퍼즐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도 자꾸만 경련하는 몸뚱이도 엉망이었다.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낯선 듯 낯익게 느껴졌던 목소리,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몸에 젖어 있던 그리운 냄새…….

몸을 부술 듯이 내리눌렀던 거대한 공포에서 저를 건져주었던 조각들이었다. 흩어져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그 조각들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 소년의 일부였다.

무던히도 후회했다. 그 얼굴을, 그 눈동자를, 쓸모없는 각막에 선명히 채워 놓았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끙끙 앓는 와중에서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랬더라면, 이렇게 바보처럼 그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마, 맞잖아. 그렇죠? 에녹. 당신, 맞죠?”

어머니의 환영은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손목을 그었던 그녀는 죽어가면서 원망했을 거다. 어리다는 무지를 무기처럼 휘둘러 그녀의 마지막 남은 생의 의미를 난도질했던 그의 아들을.

어린 정난우를, 전부라 여겼던 제 아들을.

 “소…손…… 잡아준 적…….”

에녹은 말없이 한 손을 들어 정난우의 머리카락 속에 찔러 넣었다. 깊이 옭아매 가볍게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올라온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얼룩진 회한이 그제야 장에물 없이 몰아닥쳤다.

에녹은 9년 넘게 곪아 있던 사과의 말을 씹어 뱉었다.

 “미안해. 나 진짜, 정말 노력했거든. 빨리 찾아내려고. 정말 그 일대를 다 뒤집고 다녔어. 비슷한 차만 보여도 트렁크부터 확인하고, 두드리고, 그러다가 신고 당하고. 우리 어머니 그 우아한 성품에 경찰서 들락거리면서 제발 좀 그만 하라고 통 사정을…….”

사과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말이었다. 에녹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말문을 닫았다.

 “정말 미안해. 오늘도 미안해. 나 오늘도 그렇게 늦었어?”

에녹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느리게 손끝을 움직였다. 청결하고 매끈한 머리카락에서 느껴질 리 없는 간질거리는 체온이 부드러운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그…… 아…내가, 바보 같이…….”

정난우는 안달하는 어린애처럼 발뒤꿈치를 연거푸 바닥 위에서 굴러댔다. 안타깝고 참담하지만 기쁘고 반갑기도 해서, 잔뜩 엉킨 감정들에 짓눌려 무너지지 않으려고 매달렸다.

에녹은 단단하게 그 몸을 지탱해 주며 재차 물었다.

 “이번에는 안 늦었냐고 물었잖아.”

 “…안, 안 늦었어요.”

 “그럼 됐어. 그 때처럼 가지 말라고 한마디만 하면 돼. 그럼 어디에도 안 갈 거니까.”

에녹의 목소리가 끈끈한 점성을 가지고 두 사람을 한 데 엮었다. 맞닿은 가슴이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둔중하게 울려댔다. 늑골을 터뜨릴 것처럼 속도를 울리는 그 심박동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살면서 갚아줄게. 이런 말 비겁하다는 거 알아. 그런데 나는 지금 너를 숨 가쁘게 사랑하고, 그걸로 갚아주고 싶어.”

에녹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달려들어 정면으로 충돌해 오는 조각들을 담담히 응시했다.

 “모르겠다. 그냥 다 개소리야. 사랑한다고, 정난우.”

헐벗은 감정들이 칼처럼 번득이며 어두운 공간을 부유했다. 갑옷 없는 몸뚱이를 기꺼이 제물로 내던져 주었다. 비 물리적 상흔들이 전신에 뜨겁게 요동쳤다.

 “왜, 왜 말, 안 했어요.”

정난우가 울부짖듯이 물었다. 에녹은 난감하게 입술을 비틀며 대꾸했다.

 “야. 나 기억력 좋아. 너 나랑 처음 술 마시던 날 내가 무심코 그 때 일 물었을 때, 너 완전 새파래졌어.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해.”

 “그런, 그런 게 어디 있어! 말해 줬어어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 찾고 싶었는데! 아무도 말 안 해 줘서. 나는……!”

 “찾긴 왜 찾아. 기껏 살려달라고 구조 요청 했는데 놓친 병신 같은 놈을.”

에녹은 제가 말하고도 가슴이 아렸다. 아랫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조직을 몇 번 씹어 발겼다. 정난우는 고개를 극렬하게 내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야. 알아요, 나 그거 기억해. 밖에서 에녹이 트렁크 두드렸어요. 여기 사람 있어? 하면서. 내가 발버둥 치는 걸로 대답했던 것도 알아요.”

 “…원망했어?”

정난우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올 거라고……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저 사람이라면 꼭 나중에 와줄 거라고…… 그래서 나 진짜 이 악물고 버렸어요. 우리 엄마 꼭 살아서 다시 봐야겠다고. 그 사람이 나 구해줄 거라고…….”

 “순진하네.”

그런데 진짜 와 줬어요. 밖에서 막, 뭐가 부서지는 소리 들리고……

그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 그 사람이 와 줬구나. 정말 나 구하러 찾아와 줬구나.”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알 수 없는 언쟁이 오고갔다. 그리고 뒤이어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도 들렸다. 이미 끝났다는 걸 예감했다. 그 사람이 정말 와 준 거라고, 이 지옥 같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잠시 뒤 트렁크가 열리고 시야가 트였다. 머리가 잔뜩 뭉치고 헝클어진 소년이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얼굴은 역광으로 온통 새카맸다.

 “정말 너무 무서웠는데. 힘들고 아프고 그랬는데…….”

정난우는 입술을 피 나도록 깨물었다 놓았다.

 “당신이 와 줄 거라고 생각해서……. 겨우 버텼단 말이야.”

에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기억은 제 멋대로 변하는 거다. 제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느꼈던 그 순간이, 이 녀석에게는 구원의 시작이었던 거다.

에녹은 별 수 없이 동여맨 팔에 힘을 줬다. 마른 등허리를 감싼 손 안에 떨림이 감겨들었다. 에녹은 툭 튀어나온 견갑골을 달래듯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잊고 싶었어.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못 알아봐서 잊었나 싶기도 했고.”

 “이…잊을 리가…….”

잊을 리가 없잖아요.

정난우의 몸을 뒤흔드는 경련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쉬, 괜찮아. 에녹은 발갛게 달아오른 귓바퀴에 제 목소리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

얼른 달래서 차분히 앉혀두고 따뜻한 뭐라도 먹이고 싶었다. 피로에 찌든 것 같은 눈꺼풀을 감겨 두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도 싶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이, 이 접촉이 에녹은 불안했다.

 “일단 좀 떨어져 봐.”

의도치 않게 거칠게 쏟아져 나온 어투에는 초조함이 녹아 있었다.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를 그러잡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정난우는 마치 젖먹이 애처럼 더 강하게 매달려 왔다.

에녹은 난처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음성이 둔탁하게 내리깔렸다.

 “넌 모르겠지만, 이거 좀 위험한 상황이야. 그러니까…….”

그 때였다. 에녹의 바람대로 정난우가 몸을 물렀다. 떨어지래 놓고 막상 품 안을 떠나니 빈 가슴이 허전했다. 그 묘한 상실감에 무심결에 혀를 찼다. 중증이군. 속으로 중얼거리던 때였다.

정난우의 떨리는 손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올라왔다. 굳은살이 가득 한 손마디가 주저하듯 턱 끝에 닿아왔다.

에녹의 몸이 굳었다. 전신에 자리한 크고 작은 근육들이 돌덩이처럼 수축했다. 멈춘 호흡은 폐 안 깊숙한 바닥에서만 맴돌았다. 접촉 때문이 아니었다. 그 손끝에 포개지는 시선 탓이었다.

수전증 환자처럼 경련하는 손가락은 턱에서 입술로, 뺨으로, 콧날로, 아주 느리게 더듬으며 올라왔다. 맹인의 각인을 위한 숭고한 의식이었다.

머리카락 그늘 아래 늘 숨어 다니던 그 까만 눈동자도 적막 속에 고요히 움직였다. 손끝이 지나가는 그 동선을 한 박자씩 늦게 따라붙고 있었다.

마침내 거칠게 못박인 손가락이 눈 꼬리에 닿았다. 에녹의 속눈썹이 그 떨림에 전염되어 파르르 흔들렸다.

거짓말처럼, 눈이 마주쳤다.

가늘게 흩어지던 정난우의 숨도 멎었다. 미세한 공기의 진동조차 자취를  감췄다. 둘은 화폭 속의 인물들처럼 정지한 채 열렬히 서로를 응시했다.

머물러 있던 시간은 짧았다. 불순물 없는 깨끗한 시선은 금세 도로 땅 바닥에 처박혔다.

정난우는 아주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주 무서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사람처럼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차게 굳은 긴장이 뒷목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에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꽉 내리누른 숨 역시 한 조각도 뱉어 내지 못했다. 하염없이 기다렸다.

불안정한 정난우의 호흡이 공기를 끊임없이 진동했다. 그 자잘한 여파가 비웃듯이 떨리는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정난우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숨을 깊이 끌어당기며 눈꺼풀을 세게 밀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눈이 제 시선을 낚아채 물었다. 도로 눈빛이 맞부딪친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 깊이 빨려 들어감을 느꼈다.

하늘색의 투명한 눈동자였다. 그 안에 어둡고 작은 동공이 빛을 받아 마시듯이 조금 크기를 늘렸다. 시원하게 트인 그의 눈매는 잘게 떨리다 멈추길 반복했다.

겨울바다처럼 시리고 아름다웠다. 냉담하게 날카로운 눈초리도, 풍성한 속눈썹도, 어디 한 군데 예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흐릿하게 번져 있던 기억 속의 소년이 이제야 완벽한 형상을 갖췄다.

키도 체구도 훌쩍 커 버렸지만, 눈에 젖은 달빛을 둥지고 손을 내밀어 주던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잊고 있었던 걸 나무라듯이 선명히 기억에 새겨지고 있었다.

 “여러 번…… 기억해 내려고, 떠올려 보려고 애썼는데…….”

많이 아팠어요, 오래 앓았는데, 그러는 동안 다 사라지고 말았어.

그렇게 정난우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할 때, 에녹은 막혔던 숨을 거칠게 개방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난우의 눈은 블랙홀이었다. 모든 걸 다 끌어들여 흔적도 남기지 않는 파괴의 공간이었다. 공기도 빛도 그 안에서는 모두 생명을 잃을 거다. 에녹의 혼 역시 통째로 빨려 들어가 산산이 부서졌다.

날뛰는 본능에 전신을 내맡겼다. 에녹은 정난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대로 끌어당겨 무력하게 벌어져 있는 그 입술을 삼키듯 물었다.

정난우의 눈시울이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럼에도 떨어져 나가는 법이 없었다.

난폭한 희열이 단전을 직격했다. 저릿하게 폭발한 섬광이 어설프게 완성되어 있던 퍼즐을 단번에 부셨다. 가루 되어 흩날리는 그 선명한 감정의 증거들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간 가랑잎처럼 흩뿌리고 다녔던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이 순간을 사랑이라고 정의내리는 순간, 이제껏 지나온 모든 것들은 이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거였다.

에녹은 신음 같은 탄식을 목 안으로 삼켰다. 단순히 속살을 마주 댄 이 행위가 모든 걸 명확하게 했다. 균열 가 있던 어설픈 자각의 완성은 먼지처럼 사라졌고, 그 대신 더욱더 또렷한 감정이 빛의 화살처럼 심장을 꿰뚫었다.

거대한 질량의 무언가가 심장에서 파생되어 발등으로 떨어졌다. 뜨끔한 통증이 말초신경을 타고 달궈진 육체를 점령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백지 된 뇌에는 이성이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개를 깊이 기울였다. 그 입술 안으로 갈급에 떠는 혀를 밀어 넣었다. 달아오른 인중이 뜨겁게 뭉개졌다.

반사적으로 도망가려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강하게 고정했다. 화끈한 온도로 절절 끓는 숨을 그 안에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입천장을 길게 핥으며 빈손으로 마른 허리를 꽉 조여 안았다.

가슴이 닿고, 복부가 닿고, 허리 아래가 닿았다. 에녹은 낮게 신음하며 잔뜩 숨은 채 굳어 있는 혀를 세게 내리눌렀다. 움찔 경련한 살덩이를 한 번에 잡아 채 휘어 감았다. 몇 번이고 부대끼고 마찰했다.

삽입하듯이 피스톤 운동을 하는 혀는 젖은 소리를 남겼다. 온 신경이 눅눅해져 이대로 흘러내릴 지도 몰랐다. 에녹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같은 욕구가 짙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난우의 몸을 바싹 당겨 안은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정난우는 떠밀리듯 뒷걸음질 치면서 정신을 못 차렸다.

 “에…에녹……!”

밀어내려는 손은 억세게 잡아채졌다. 모든 걸 약탈해 갈 듯 한 입술과 혀는 난폭한 듯 섬세하게 움직였다.

에녹의 축축한 혀가 입 안 곳곳에 제 혼적을 남겼다. 볼 안쪽의 말랑한 살에도, 폭신한 혀 아래도도, 치아 하나하나에도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두려움도 희열도 느낄 사이가 없었다. 정난우는 발뒤꿈치에 무언가가 닿자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잘 정돈되어 있던 침대 시트가 와락 구겨지며 두 사람의 무게를 떠받쳤다.

에녹은 덮치듯이 정난우의 다리 사이에 제 몸을 끼웠다. 한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붙들어 올렸다. 붕 뜬 상체에 우왕좌왕하는 혀를 끌어와 잇새에 씹었다.

정난우가 흐느끼듯 가늘게 신음했다. 젖은 입안이 그로 인해 미세하게 진동했다. 뒷머리가 날아갈 정도로 달콤한 소리였다.

에녹은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정신을 차려보자고 희미하게 떠올렸지만 충동에 감전된 머리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입술과 이로 문 혀를 정신없이 빨았다. 음란한 마찰음은 정액으로 흠뻑 젖은 비부를 드나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다.

헐떡이는 정난우의 눈가와 뺨은 불그스름했다. 늘 그늘에 잠겨 있던 단정한 얼굴이 혈색을 되찾은 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진탕 뒹굴고 나면 더 환장할 만한 얼굴을 할 거다.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아찔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 부르르 떨렸다. 성기와 고환 모두 딱딱하게 부풀어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미친 것처럼 빨아 마시고, 곧 다시 고개를 꺽어 아늑한 습지를 휘져었다. 거칠게 비벼대는 부위마다 타액이 흘렀다.

정난우의 목울대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제 일부를 삼키고 있는 거였다. 제 체액을 모두 쥐어짜 그 안에 퍼붓고 싶었다. 그 사나운 충동에 머리가 핑 돌았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금단에 시달리는 중독자처럼 떨리는 손이 빠르게 제 니트를 끌어올렸다.

학,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정난우가 턱을 젖혔다. 니트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에녹은 다시 키스했다. 고개를 기울여 완벽하게 맞물리고, 곧장 제일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꼴깍, 다시 넘어가는 타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에녹은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려갔다.

혀끝에 힘을 실어 그 달콤한 늪지를 낱낱이 핥았다. 진액까지 빨어먹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공간을 틈 없이 빨았다.

수도 없이 씹히고 빨라올려진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랐다. 물어뜯듯이 잇새에 넣고 뾰죡하게 혀를 세웠다. 말랑말랑한 살을 부대끼는 혀는 녹을 것처럼 흐물거렸다.

에녹은 풀어진 셔츠 앞섶을 젖혀 등 뒤로 벗어던졌다.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던 정난우의 손목을 낚아채 굳게 깍지를 꼈다. 억지로 끌어와 터질 듯이 울려대는 가슴 위에 얹었다. 미친놈처럼 날뛰는 에녹의 심장 고동이 얽힌 손가락에 진득하게 엉켜들었다.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도리질 쳤다. 에녹은 절제 잃은 징승처럼 밀어부였다. 맞물린 입술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정난우는 공기를 흡입하려 입술을 더 크게 벌렸고, 그럴수록 더 음탕하게 휘둘리고 말았다.

에녹의 한 손이 정난우의 셔츠를 들췄다. 딱딱한 손마디가 긴장한 배를 쓸어 올렸다. 그의 손목에 걸린 밑단은 정항도 없이 주르륵 밀려 올라갔다.

매근하게 손 안에 감기는 피부는 녹아내릴 정도로 감도가 좋았다. 낯선 감촉에 정난우의 눈꺼풀은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복잡한 생각이 잔뜩 뒤엉킨 듯도, 아니면 백지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듯도 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투명하게 다 들여다 보일 것만 같은데, 막상 샅샅이 긁어내리면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이상한 까만색이었다.

에녹은 거칠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몰어뜯듯이 정난우의 혀를 긁어 뱉어내며 짐승처럼 그러렁거렸다.

 “젠장,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미치잖아.”

잔뜩 쉰 신음을 쏟아내며 에녹은 정난우의 허벅지에 제 중심을 밀착했다. 탄력있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터뜨릴 듯 꽉 비틀어 쥐었다. 푸른 기가 말끔히 사라진 입술을 다시 빨았다.

그 때.

정난우가 몸무림치며 고개를 꺽어 올렸다. 길게 이어진 타액이 허공에서 끊어졌다.

정난우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구토감을 보이고 있었다. 눈동자도 확연히 흔들렸다.

 “으…윽……!”

괴롭게 고인 신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등줄기가 싸늘하게 굳어갔다.

뭔가 잘못됐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정난우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안아 일으켜서 등을 두드렸다. 까만 머리통이 정신없이 가로로 흔들렸다.

 “괜찮아. 토할 것 같으면 토해. 내가 치워줄게.”

에녹은 열기의 부스르기가 잔재하는 음성으로 도닥거렸다. 폭발하는 정염은 뜨거운 몸에만 머무를 분 머리까지 당도하지는 못했다.

정난우의 토기는 아주 완만한 곡선으로 내려앉았다. 혼이 빠진 것처럼 핏기 없는 얼굴을 보며 느리게 깨다음을 맞았다.

뭔가를 건드렸다. 무언가가, 정난우의 어둡고 깊은 곳에 자리한 음습한 기억을 떠올리는 기체가 된 거다.

토악질이 완전히 멈췄다. 모든 것이 정지한 가운데 정적만 고여 들었다. 숨소리조차 기척을 죽였다. 정난우는 또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망설였다. 까맣게 내려앉은 암흑을 동요케 하는 것은 분명 공포였다.

두려움, 혹은 슬픔, 어쩌면 절망까지도.

참담한 자괴감이 모든 열기를 난도질했다. 매트리스를 짚은 손가락들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금을 뚫을 기세로 힘을 줬다. 무지근한 통증이 그제야 흩어져 있는 이성을 하나 둘 주워 모았다.

몇 번이고 감았다 뜬 정난우의 눈동자가 망설이듯 위를 향했다. 에녹은 이를 악문 채 그걸 빤히 주시했다. 정말 겨우,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안도감이 탈력처럼 등허리에 내렸다. 칼처임 곤두섰던 신경이 차층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적어도 달아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당혹과 혼란 사이를 열심히 배회하고는 있지만, 달아나지만 않는 거였다. 그거면 됐다.

에녹은 조심히 팔을 뻗었다. 움찔하긴 해도 피하지 않는 정난우의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게 했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털씩 엉덩이를 붙였다.

정난우의 작은 우주는 고요했다. 방금 전에 깨질 듯이 물들였던 공포 같은 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에녹은 그 평온이 도리어 불안했다.

 “너희 나라에서는 잘못 한 애들한테 어떤 벌을 주지?”

정난우는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갑자기 건네진 질문을 해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녹은 반응 없는 정난우의 눈가를 툭툭 건드리며 대답을 채근했다.

정난우는 아주 느리게 그의 질문을 이해했다. 아, 하고 버벅거리며 제 입술을 몇 번 핥고 있었다. 그 별 거 아닌 시각자극에 에녹은 티 나지 않게 어금니를 사려 물어야 했다.

앞으로의 미래가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볼 때마다 물고 빨고 싶을 텐데, 벗겨서 모조리 다 만지고 싶을 텐데, 저 달짝지근해 보이는 몸 안에 제 것을 넣고 흔들고 흠뻑 싸고 싶어질 텐데.

정난우는 가만히 생각을 곱씹다가 주저하듯 대답했다.

 “제가 아기 때 잘못하면 무릎을 끓고 벌을 선 적은 있었는데요…… 요즘에는 잘…….”

에녹은 재빨리 정난우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었다. 놀란 눈시울이 크게 벌어졌다. 에녹은 바싹 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정난우의 한 손을 끌어왔다. 깊이 손가락을 얽었다.

에녹은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을 천천히 씹어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무서웠지?”

 “…….”

 “나 지금 벌 서는 중이야. 이게 약하면 여기서 뭐 더 할까?”

정난우는 물끄러미 그의 허벅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슬랙스 위로 평평한 근육들이 육감적인 곡선을 그렸다.

착실하게 끓은 무릎부터 시작해 생각 없이 눈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평소 무언가를 시각으로 인지해 기억에 담는 작업이 익숙하지 않아서, 모든 게 다 새삼스러웠다. 느린 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모든 걸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정말로 깊이 뇌리에 박아 놓을 심산이었다.

시선이 막 그의 불룩한 앞섶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에녹의 손이 턱을 잡아챘다.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의 차가운 눈이 뜨겁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게 어딜 보고, 모처김 반성 중인데 사람 미치게…….”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거친 목소리였다. 매끈한 미간에 사나운 주름이 칼처럼 패여 있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듯 몇 번 답싹이던 입술을 집끈 씹어 물었다.

정난우는 그의 잇새에 빨려들어가는 도톰한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 손을 올렸다. 붉은 혈색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짓놓린 그걸 손끝으로 가만히 잡아 빼 주었다. 에녹은 눈가를 무너뜨리며 그 손목을 잡아챘다.

 “하지 말라니까. 벌 서는 사람 고문이라도 하는…….”

갑자기 말 멈춘 에녹은 곧이어 젠장, 하고 욕설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는 꽉 틀어쥔 손목을 힘없이 놔주며 체념의 한숨을 흘렸다.

 “그래, 고문해라, 얼마든지 해. 난 당해도 싸지.”

씨발. 내가 이까짓 거 못 참을 것 같아?

에녹은 전투적으로 눈빛에 날을 세워 정난우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든지 만지라고 고개를 들이밀자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또 그 맹랑한 손끝이 얼굴 위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렇게 곧게 올려다보면서도, 정말 맹인처럼 이목구비를 덧그리고 있었다. 손톱만 한 공간도 여백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듯 집요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투박한 손가락은 입술에 오래도록 머물었다.

흠뻑 젖은 입술을 가만히 몇 번 꾹꾹 누르고, 선명한 입술 선을 매만졌다. 에녹은 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꽉 쥔 두 주먹이 무릎 끓은 다리 위에 놓인 채 파들파들 경련했다.

아마 고의는 아니었을 거다. 정난우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가지고 놀다 삐끗했다. 다물린 입술 사이로 아주 조금 밀고 들어왔다. 단단히 빗장을 채우던 치아가 그 순간 저절로 벌어졌다. 뜨겁게 내뱉어 버린 숨에 놀란 침입자는 가증스럽게 도로 빠져나갔다.

에녹은 제 얄팍한 인내를 저주하며 무너져 내렸다. 푸르게 맥동하는 정난우의 목에 알아눕듯 제 이마를 처박았다.

잔뜩 쉰 목소리로 대놓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와중에서도 몇 번이고 숨을 들이켰다. 독특한 체향은 마약처럼 뇌 주름 사이를 빼곡히 채웠다.

정난우는 숨만 쉬는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엿물처럼 살갖에 들러붙는 그의 숨길에 몸은 자꾸만 움츠려들려고 했다.

망설임이 있었다. 에녹이 제 입술을 물었을 때부터였다.

옛날 집을 찾아 헤매다가 호텔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미 예전에 눈물이 말라버린 눈을 망연히 깜빡이다 힘없이 결심했다.

서로가 더 깊이 빠지기 전에 그만 두자고, 이렇게 병들어버린 제게서 보내주자고, 제 과분한 욕심은 이쯤에서 추억으로만 간직해 두자고.

그런데도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지 못했다. 직전까지 수도 없이 되뇐 절심은 제 나약한 의지 탓에 허상으로 둔갑했다. 지금은 그저 생전 가져보지 못한 탐욕에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쯤은, 정말 딱 한 명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에녹은 그가 장담한 대로 육체도 정신도 건강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누군가를 나락에서 건져내 줬다는 사실보다, 조금 더 빨리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떠안은 채 살아왔을 정도로, 매력적인 껍대기만큼 그 속도 태양처럼 눈부신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난우 자신도 그 탐욕에 검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 순간을 후회 할 걸 막연히 예감하면서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딱 한 명만.

달콤한 유혹에 정난우는 녹아내렸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이 한 줌도 몸 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가를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움칫거리며 펴졌다 곱아졌다 하던 손을 용기 내서 들었다. 너 나한테 왜 이러냐며 알 수 없는 소리만 뇌까리는 그의 머리에 가만히 얹었다.

목 아래 비벼지던 열 섞인 숨결이 멎었다. 에녹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정난우는 불김한 예감을 떨어내려 애쓰며 겨우 평온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에녹.”

이름을 불렀다. 그가 조금 늦게 왜, 하고 반응했다. 잔뜩 잠겨 갈라진 음성이었다. 정난우는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여 에녹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당신이랑 떨어져 있는 동안,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눈앞에선 아직도, 은통 새빨갛게 피 칠갑되어 있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돌았다. 평생을 따라다닐 그녀의 망령은 여전히 두려웠다. 그러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어서, 처음으로 담담하게 마주보는 것 같았다.

 “나도, 나도 그래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

 “평생,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달 할게요. 정말 다 갚아 볼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웠어요.”

에녹의 떨리는 손이 한참 뒤에 등을 휘감았다. 그가 미심쩍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동안 연습했다는 건, 원래 정해진 대답이 그거였다는 거 맞지?”

 “네. 계속, 사진 보면서 눈 맞추는 연습도 하고, 당신이 돌아오면 사랑한다고 꼭 말해 주고 싶어서 또 몇 번을 연습하고 그랬어요.”

에녹은 길게 침묵했다. 귓가에 부서지는 숨결은 조금 더 느리고 거칠어졌다. 그가 말했다.

 “너 내가 이성 가진 짐승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안 그랬으면…….”

 “…….”

 “지금 당장 여기서 널 안았을 거야. 널 다 벗기고 밤새 울리고 네 몸 안에다 내 걸 쌌을 거라고.”

에녹은 지금 필사의 결의로 참고 있는 거였다. 내일과 모레. 정난우는 이틀 연속 공연이 있었다. 첫 섹스는 몸에 부담이 많이 가고, 특히나 이 지경인 자신을 상대하려면 지금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너 각오해. 수원 공연 끝나는 밤부터 침대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마.”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소름 돋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생각이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에녹의 상체를 꽉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그 순간, 에녹은 상처받은 짐승처런 목을 울렸다.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뛰긴 왜 뛰어? 잘 걷지도 못 하는 게.”

에녹은 구급상자를 닫으며 핀잔했다. 룸서비스로 식사를 주문할 때 함께 부탁한 거였다. 정난우는 무릎에 딱 붙은 반창고를 손가락 끝으로 비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냥 좀 정신이 없었어요.”

빤히 쳐다보자 에녹이 슬며시 마주친 시선을 빗겨 내렸다. 피부가 차갑게 변할 정도로 샤워를 하고 나온 그는, 식사를 할 때에도 그 이후에도 자꾸만 눈을 피했다.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염없이 보는 중이었다.

에녹은 구급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곁에 앉았다. 어깨가 나란해졌다. 따끈한 온기가 되살아난 손이 정수리를 덮어 왔다. 이끄는 대로 어깨 안쪽에 옆머리를 기댔다. 그가 말했다.

 “혼자 어디 가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악기는 바닥에서 나뒹굴지, 휴대폰도 두고 나갔지. 오만가지 불길한 생각 때문에 도는 줄 알았다고.”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음부터 안 그러면 돼.”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안쓰러운 마옴에 품에 푹 싸서 도닥여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오늘은 위험하니 참을 생각이었다.

 “아깐 갑자기 왜 그랬는데?”

 “어떤 거요?”

 “갑자기 토하려고 그랬잖아. 혹시 내가 너무 미친놈처럼 들이대서 그래? 아니면 섹스가 무서워?”

에녹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게 선행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저는 침대 위에서 아무 것도 못할 거다. 구토감이 솟구칠 정도의 뭔가가 있다면 그게 우선적으로 치료가 되어야 했다.

비록 그 과정이 제게는 지옥이 되겠지만, 공포에 떠는 녀석을 깔아두고는 서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다행이도 정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섹스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그런 게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게 아니면?”

에녹은 내심 안도하며 물었다. 정난우의 입술은 망설임을도 닫혀있었다. 부드업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기다렸다.

 “에녹이 했던 말이…….”

불쑥 튀어나온 대답에 에녹의 눈썹이 꿈틀 위로 치솟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되집어 보고 딱 결론을 긁어내기 직전에, 정난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

 “아빠가 늘 했던 말이랑 비슷했거든요, 네 눈이 날 미치게 했다, 네 탓이다. 저 감금했던 아저씨도 그랬고, 그래서 갑자기 그게 떠올라서…….”

에녹은 짙은 한숨을 삼키며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가 떴다. 그는 조금 뒤틀린 미소을 입가에 올렸다.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미안하다고말할 게 뻔한 입을 아예 한 손으로 미리 틀어막았다. 그리고 향긋한 머리카락 속에 입술을 묻었다.

 “네 눈뿐 아니라 모든 게 날 미치게 한다면 기절이라도 하려고?”

정난우가 빼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속으로만 않았다.

 “그래. 미치겠다, 아주 환장하겠어. 나 너랑 눈만 마주쳐도 몸이 끓어. 이렇게 그냥 안고만 있어도 돌 거 같아. 네 냄새만 맡아도 숨이 가빠져, 심지어 네 발가락만 봐도 발정 나. 이제 어쩔 거야?”

섬세하게 조각된 트라우마를 큰 바위로 꽝 짓눌렀다. 범위가 광대해지니 정난우는 당혹스럽게 눈만 굴렸다.

 “어쩐긴 뭘 어째. 너는 앞으로 그냥 이틀 이상 스케줄 비는 날에는 죽었다고 보면 되지.”

에녹은 뻔뻔하게 자문자답했다. 그리고 나긋하게 달랬다.

 “내가 전송하는 사랑을 네가 위협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아무 것도 못 해.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폭력이고 강간이지. 범죄라고.”

손 안에 감긴 정난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 떨림이 애잔하고 아팠다.  에녹은 정난우의 상체를 돌려 마주보게 했다. 얼굴을 양손으로 꽉 틀어쥐고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단어 하나하나에 강한 힘을 실어 말했다.

 “그건 병든 인간들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 피해자들을 세뇌시키는 변명의 정석이야. 네 탓이라고.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내가 분명 전에도 말했어. 그렇지?”

정난우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들이 나쁜 거야. 너는 어디에서건 피해자였고, 너는 보호 속에서 받아야 마땅해. 사랑받으면 더 좋고.”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간지러운 듯 아련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는 게 예뻐서 그 위에도 키스했다. 그러다 언뜻 뇌리를 수친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봐. 내가 준비한 게 있어.”

지쳐 보이는 정난우를 침대에 뉘이고 캐리어에서 낡은 케이스 하나를 꺼내 왔다. 정난우가 스물 이전에 썼다던 바이올린이었다.

익숙한 악기의 등장에 정난우가 모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제법 능숙하게 현을 조이고 활을 들었다. 원래는 달콤한 분귀기를 상상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연주할 건줄 알아?”

 “…작은 별?”

어릴 때 악기들을 다뤄본 적 있는 에녹은 집중력도 기억력도 좋아서 기본적인 연주법들을 비교적 빨리 되살려냈다. 그간 틈틈이 성실한 배움의 자세를 가졌던 그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G선상의 아리아.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처음 만나는 날 연주하는 곡.”

 “……네?”

정난우는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에녹이 힐긋 곁눈을 주더니 눈시울을 가늘게 접었다.

 “파리에서 연습 좀 했어.”

반짝 반짝 작은 별을 얼마 전에 겨우 마스터 했는데  벌써 G선상의 아리아라니.

정난우는 휘둥그레 뜬  눈에 잔뜩 기대감을 품었다. 에녹이 바이올린을 턱 아래 끼우며 멋지게 품을 잡았다. 정난우는 얼른 팔을 뻗었다.

 “힘 들어갔잖아요.”

경직된 왼쪽 어깨를 살살 두드리며 자세를 교정해 줬다. 에녹은 '아. 그렇지.’ 하며 슬슬 어깨를 돌린 다옴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현을 짚고, 첫 음을 길게 떨어냈다. 간드러진 현의 울림을 들으며 정난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진짜 엉망이었다. 음정은 맞는 것보다 틀리는 게 많았고 비브라토도 어설펐다. 그런대 참 희한하게도 표정이나 폼은 정말 그럴싸했다. 그 괴리감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짧은 연주를 끝낸 에녹은 곧장 바이올린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거만하게 턱을 기울여 보이며 물었다.

 “어때? 연주는 좀 더러워도 비주얼은 근사하지?”

정난우는 여전히 웃음기 남은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와중에서도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평가를 묻지 않아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에녹이 매트리스를 한 손으로 짚으며 스윽 상체를 기울였다. 좁혀진 거리에서 물끄러미 시선이 마주 닿았다. 늘 젖은 듯이 보이는 새카만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그게 혼이건 이성이건.

 “그것 봐. 나만 있으면 되지?”

에녹은 뽀얀 눈 믿을 엄지로 슬슬 문질렀다. 그러자 정난우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꺼풀을 늘어뜨렸다.

 “아플 일도 없고, 다칠 일도 없고. 이 한 몸 다 바쳐서 웃겨도 주고 사랑도 주고. 너 진짜 선택 잘 한 거야. 지구를 뒤집어서 탈탈 털어 봐라. 나보다 괜찮은 놈이 나오나.”

정난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에녹의 말들을 뇌리에서 천천히 굴려 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빙굿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능청스럽게 제 자랑을 하며 슬금슬금 뺨을 어루만지던 에녹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에녹은 재빨리 접촉을 끊어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해서 날뛰는 심장을 달랬다. 그리고 정난우의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앉았다.

지금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게 남아있는 거다. 이렇게 밑밥을 깔아둔 건 지금 쏘아 보낼 질문 때문이었다.

 “하나 물을게. 나한테 이거 진짜 중요한 문제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해야 돼.”

갑자기 진지하게 변한 분위기에 정난우는 얼굴에 웃음기를 거뒤냈다. 크게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에녹이 눈둥자 위에 묘한 열기를 덧씌우며 물었다.

 “크리스토퍼 강이 너한테 뭐야?”

정난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녹은 인자한 가면을 쓰고서 선택지를 좀 더 좁혀주었다

 “뭐, 예를 들면, 형제 같다거나, 아버지 같다거나, 선생님 같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 네가 그 새…, 그 남자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이미지 같은 거.”

이미지…….

정난우는 짙은 고뇌에 휩싸였다. 막막함에 쉽사리 입을 땔 수가 없었다. 강도영을 향한 제 감정이나 느낌 같은 것들은 풀어놓자면 끝도 없이 포괄적으로 번져가기 때문이었다.

 “형제, 아버지, 선생님, 친구. 그 모든 게 될 수 있는데요.”

결국 정난우는 애매한 대답을 흘린 수밖에 없었다.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빤히 주시하는 서늘한 시선에 정난우는 슬슬 눈치를 살폈다.

 “그 선택지 말고 다른 건 없어?”

마치 취조하는 분위기였다. 정난우는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제가 가진 어휘력의 밑바닥까지 긁어내 내뱉었다.

 “기둥, 같은 사람이에요.”

 “기둥?”

 “네. 그러니까…… 어떤 순간에서건 제 세계를 지탱해줄 수 있는 기둥이요.  너무 지치고 힘들면 사람들이 교회나 성당에 가잖아요. 신은 찾는 사람 곁에 있어 주니까. 저한테 크리스는 그런 사람이에요.”

눈치 없이 순진한 걸 기뻐해야 할지 울화통이 터져야 할지 에녹은 조금 헷갈렸다. 다만 지금은 분명 열이 뻗쳤다. 그것도 좀 맹렬하게.

 “너 나 사랑한다며. 원래 그 대답 해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며.”

 “…네.”

 “그런데 하루도 안 지나서 다른 남자가 네 기둥이라고 말해? 게다가 뭐? 신?”

에녹은 즉각적으로 분노를 쏟아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세먼지들을 태울 듯이 활활 일렁거리는 기류는 확연히 느껴졌다. 미세하게 거칠어진 목소리도 그 반중이었다. 그의 짙어진 눈빛이 도망갈 틈 없이 단단히 몸을 묶어 왔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나는 널 동반자로 생각하고 내 모든 걸 남김없이 보여주고 쏟아 붓겠다고 했는데, 너는 그런 날 받아주고도 애먼 놈한테 의지하겠다고?”

에녹은 높아지려는 어투를 일부러 숨죽여 깔았다. 너무 세게 얻어맞다 보니까 까딱 하면 정신을 놔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정난우는 잔뜩 기가 죽어 물었다. 에녹은 녹아내리려는 가슴에 단단히 빗장을 채웠다. 여기서 어설프게 오냐오냐 했다가는 일이 진창으로 얽힌 수도 있었다.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관계의 정립은 저나 정난우나 모두 확실해야 하는 거다.

 “그럼 나는 뭔데. 너한테.”

 “…….”

 “그 새끼가 너의 신이면, 나는 뭐냐고. 그저 연애하다 질리면 그냥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사이?”

당황에 흔들리는 눈으로 정난우는 고개들 빠르게 저었다. 에녹은 달래듯 귀밑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벨 것 같은 시선은 여전했다.

응? 하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떠밀려 정난우는 멈칫 입을 열었다.

 “에, 에녹은…….”

 “그래. 나는?”

다정함을 덧입힌 그의 추궁에 살갗이 떨렸다. 정난우는 마른 입에 혀로 꼼꼼히 축였다. 그와 섞여드는 많은 순간들이 여러 의미로 벅찼다. 에녹이 못 미덥다거나 싫은 게 아니라, 제가 가진 밑천이 너무 허름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야생짐승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남 것의 감정을 상대하려면 항상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자기가 소모할 수 있는 하루의 정량은 너무나 적었다. 요즘은 늘 그 한계치를 갱신해나가는 중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정난우는 제게 힘을 심어주는 그의 든든한 손을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깊이 얽었다. 꿈틀. 꽉 맞물린 그의 손이 일순 흔들렸다.

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구석으로 내몬 이에게 용기를 얻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서도 매달릴 건 그밖에 없었다. 정난우는 불순물처럼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를 간신히 펌프질해 올렸다.

 “태, 태양…….”

에녹의 미간이 찰나 간에 좁아들었다가 돌아왔다. 이번엔 그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정난우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불완전하게 나간 언어를 열심히 공사해 다시 뿌렸다.

 “에녹은, 저의 태양이에요. 아, 앞으로도…….”

이번엔 확연히 보였다.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표정과 동요로 물결치는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두 뼘 가량 앞에서 그의 느린 호흡은 점차 속력을 올렸다. 꽉 다문 입술도 간헐적으로 울렁거렸다. 짙푸른 안광은 파도처럼 연신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가 돌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명백히 시선을 피한 거다. 단단히 얽혀 있던 손이 빠져나가 그의 이마에 닿았다.

이번에도 제가 말을 잘못 한 걸까.

그 일순간의 회피에도 정난우의 눈빛은 흔들렸다. 불안하게 날뛰는 심장이 말초 감각을 흐렸다.

 “뭐야, 대체.”

에녹은 주리 틀리는 사람처럼 짓이긴 음성을 흘렸다.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됐다. 꽉 깨문 입술에선 하얗게 핏기가 빠졌다.

이마를 감싼 손차양 아래서 그는 몇 번이고 이를 갈았다. 거칠게 돋아난 숨결이 진동하는 공기 속에서 정난우는 숨죽인 채 기다렸다.

 “넌 어떻게 된 놈이, 사람을, …전장. 갖고 놀아도 정도가 있지.”

에녹이 봐 주지도 않는데 정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갖고 놀다니. 제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겨우 마주보며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쫓기는 사람처럼 어깨를 틀썩이고 있었다. 화난 사람처럼 사나웠다.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한계치를 둟은 용기를 또 그러모아 방출했다.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앞으로 쏠린 몸이 휘청 꺾어져 내렸다. 짧게 숨을 멈춘 그가 얼른 팔을 뻗어 무너지는 몸을 받아서 품었다.

무작정 매달렸다. 겁먹은 사지가 그의 몸을 억세게 옭아맸다. 멀리는 음성이 그의 경직된 어깻죽지 위를 타고 내렸다.

 “소…솔직하게 말하면, 에녹은 항상, 들어주잖아요. 이번에도…….”

귓가에서 그의 입술은 무생물처럼 호흡 한 줌 내뱉지 않았다. 석상처럼 굳은 그의 몸은 거의 모든 부위가 딱딱했다. 유일하게 부드러운 뺨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왜…왜 화가 났는지 말하면 노력할게요. 나,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말을 해야 사람들이 기뻐하는지, 그런 건 아무도 안 가르쳐 줘서…… 다들 이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그런 것만 알아서, 저는…….”

그 때였다. 굳어 있던 그의 팔이 등허리를 부서뜨릴 것처김 휘감았다.

꽉 조여진 그 힘에 물결치던 숨결이 기도를 역류했다.

 “어떤 새끼가 그래.”

그가 위협하듯 말했다. 낮고 뜨겁게 끓는 목소리였다.

 “네가 범법이라도 저질렀어?”

 “…아, 아니요.”

 “그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라도 어겼어?”

그건 잘 모르겠다. 워낙 안 되는 게 많아서 그 모든 걸 다 습득하고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망설이는 저 대신 그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지. 눈치 보느라 싫은 소리도 잘 못 하는 놈한테. 씨발, 어떤 새낀지 별 미친 소리를 잘도 싸질러 놨네.”

에녹은 정난우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 바싹 당겨 안았다. 머릿속이 뜨거운 상념으로 요동쳤다. 거칠 맥박 뛰는 음습한 희열을 선명히 자각했다. 그 미묘한 상대가 속이 울렁거릴 만큼 불편하게 느껴졌다.

작은 소음에도 깜짝 놀라 불안에 떠는 품 안의 정난우는, 이상했다. 자꾸 뭔가를 살살 건드리고 긁어댄다. 작금의 거북하고 꺼림칙한 감각은 그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거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그건 수컷이 가지는 특유의 정복욕일 수도, 군림의 본능일 수도 있었다. 무언가에 빠지면 오롯이 그것만 보는 정난우의 독특한 습성은 그 음험한 욕구를 한가득 채워 주기에 아주 위험했다.

잔인한 습격을 맞닥뜨리면 싸우거나 피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는 거다. 순교자처럼 다 받아내고 결국엔 깨진 상태로도 매달린다.

아프다고, 핥아 달라고,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다고.

만약 자신에게 어딘가 피폐하거나 나약한 구석이 있었더라면, 깨끗한 숭배를 보내는 정난우 앞에서 중심을 잃어갈 게 분명했다. 마치 하루하루 미량의 독약을 저도 모르게 복용하는 것처런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거다.

그 중독의 부작용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었다. 성 학대든 촉력이든, 어떤 세되든 간에 제가 한번 빠져들면 정난우는 그 모든 걸 견뎌낼 거니까. 사랑한다는 껍데기뿐인 말, 그 하나의 무기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에녹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들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는 허공을 찢을 듯이 쏘아보았다.

一그런데, 너의 크리스는 그런 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굳건한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어.

거칠어진 숨이 언뜻 드러난 창백한 쇄골 위에 고였다. 그 위에 이를 세웠다. 입술로 감쌌다.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세게 빨아들였다. 혀를 내밀어 살갖을 벗겨낼 듯이 문질렀다.

 “으……!”

정난우는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눈을 치떠서 집요하게 관찰했지만 역시 탈출의 의지는 없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옷을 찢어발기고 억지로 안는다면 정난우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기끼이 몸을 열어줄 거다.

내가, 원하니까.

난폭하게 치솟는 울분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목선을 길게 핥아 올라갔다. 떨리는 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시선이 타고 오른 길을 입술이 자연스레 따라갔다.

떨리는 눈꺼풀에 조심스레 키스했다. 부드럽게 그 몸을 매트리스 위에 뉘였다. 정난우는 혈기가 도는 뺨을 움찔거리며 헐떡거렸다. 진 빠진 사람처럼 힘없는 눈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녹은 덥게 열 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조심히 감쌌다. 작은 얼굴은 큰 손 안에 푹 싸였다. 깊이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너, 신이니 태양이니 뭐 그런 소리 했는데. 딱 잘라 물을게.”

그는 다시 심판자의 얼굴로 돌아왔다. 정난우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신이고 종교고 없어도 살아. 나는 무신론자인데도 잘 살고 있어. 그런데 태양 없이는 못 살아. 맞아, 아니야.”

 “…은유예요?”

 “그래. 은유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영원히 그 새끼를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면 지금처럼 가끔가다 한 번, 내가 꼭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건 이해할 수 있이. 나 여기에서 절대 더 양보 못해. 그렇게 할 거야. 안 할 거야.”

 “그럴게요.”

정난우는 두 번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인연을 끊으라는 것도 아니었다. 못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냉엄하게 움직였다.

 “나만 네 곁에 계속 있어주면 되는 거 맞지?”

 “네.”

에녹의 얼굴이 점차 온기를 되찾아갔다. 온기는 곧 열기로 탈바꿈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정난우의 입술을 깊이 삼켰다. 깊이 빨고 혀를 넣어 휘젓듯이 온 사방을 비벼댔다.

정난우는 아득하게 눈을 내리뜨며 그의 등을 안았다. 기분 좋은 리듬으로 숨이 가빠졌다. 키스는 그의 성정처럼 난폭한 듯 다정했다. 혀뿌리가 저릿할 만큼 빨리고 아랫입술이 물렸다.

그가 거친 숨을 느리게 쏟아냈다. 낮은 음성이 섞여들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아니, 어디에서건 비굴해지지 마. 나 그거 진짜 불쾌해. 난 한 순간도 너를 그렇게 대접해준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정난우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움찜 떨린 눈가가 조금 붉게 올라왔다. 에녹은 베개 밑에 손을 짚어 체중을 싣고는 다른 손으로 따끈한 뺨을 매만졌다.

 “나는 널 꽃처럼 대하는데 왜 너는 잡초가 되려고 그래.”

 “…꽃이요?”

 “그래, 꽃. 물도 주고 볕도 되어 주고 추운 남은 온실 안에도 들여놔 준다잖아. 그러니까 한동안은 나만 보고 내가 주는 것들을 받아 봐.”

 “…… “

 “사랑은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약자가 되면 결국 어그러지고 말아. 너는 날 코끝으로 부리는 데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에녹은 최종 선고를 내리듯이 엄숙하게 말했다.

 “네가 아무리 하찮게 몸을 낮취도 내 품안에서 너는 가장 고결한 사람으로 남을 거야. 지금까지 아무도 못 해 줬다면 내가 깨닫게 해 줄게.”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는 까만 우주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습윤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비해 눈가는 메말랐다. 그러고 보면 그 참혹한 감금에서 건져냈을 때도 정난우는 울지 않았었다.

못 견딜 만큼 아프거나 날아오를 듯이 기쁠 때 우는 법도 가르쳐줘야겠다. 참 가르칠 게 많았다. 얕은 한숨이 코끝에 머물렀다.

 “너 진짜 손 많이 간다. 내가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애를 키워.”

정난우가 움찔 입을 벌렸다. 에녹이 선수를 쳐서 그 입을 틀어막았다.

 “나름 키우는 재미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난 좀 농익은 관능미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거야 나랑 지내다 보면 조금씩 그렇게 변해갈 테니까 그 과정을 보는 것도 꽤 뿌듯하겠지.”

어차피 정난우는 못 알아들을 거다. 에녹은 말랑말랑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마음껏 음탕한 말음 내뱉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네 공연 처음 보던 날 반했나봐. 그 때 네 온 몸이 악기처럼 보였던 때가 있었거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저걸 연주해 보고 싶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역시 정난우는 맹한 반응만 보였다. 자신은 원래 소프트한 것부터 하드한 것까지 음담패설을 속삭이며 웃다가 자연히 살을 섞는 걸 좀 즐겼다. 그러나 상대가 까막귀니 결국 전신주 붙들고 혼자 레슬링을 하는 꼴이었다. 참 팔자도 사나웠다.

 “내 섹스 매너는 좀 거친 편이야.”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에녹은 평온하게 늘어뜨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열한 소리도 좀 지껄이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몰아븥이기도 하고. 나는 질펀하게 뒤엉켜서 짐승처럼 뛰어놀아야 만족이 돼. 난 거리낌 없이 널 창부처럼 대할 거야. 물론 네가 날 남창처럼 굴려먹는대도 기꺼이 봉사해 줄 거고.”

정난우의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다 얼어붙었다. 언어자극이 너무 심했나 싶지만, 미리 이해시켜두지 않으면 이 바보는 분명 착각할 거다. 이건 분명 필요한 선행학습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오해하지 말라는 소리야. 내 애정표현 방식이 그럴 뿐이지, 난잡하게 굴려진다고 해서 네가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고 오해하면 정말 곤란하다고.”

기초 지식이 부족한 정난우는 에녹의 말을 찰떡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이해력을 총 동원해서 겨우 여지만 붙들었다.

 “그러니까…섹스가 거칠어도 오해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에. 그렇게 길게 얘기했는데 결국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에녹은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잃었지만. 이내 마뜩찮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꼬마한테 미적분을 가르친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난 지금 그런 내 방식 모두를 너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네가 언제든 강하게  ‘싫다’고 하면 나는 기꺼이 굽혀줄 거니까.”

 “…져 주겠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네가 거만하게 발을 내밀면서 발등에 키스하라고 해도 나는 기꺼이 해 줄 거야. 네가 날 태양처럼 대하면 나는 마땅히 그 이상으로 너를 대우해 줘야 하는 거니까.”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정난우의 뺨에 천천히 열기가 올라왔다. 너도 누군가의 태양이 될 수 있다는 말 만큼은 알아들은 거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애 키워서 잡아먹기 정말 힘드네.”

에녹은 쓰러지듯 정난우의 몸 위에 제 몸을 겹치며 중얼거렸다. 목에 얼굴을 묻고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못 견디게 좋은 체향에 폐가 젖어갔다. 머리카락을 스윽스윽 헤집었다. 뭉텅이 진 걸 쓰다듬고 풀어내길 반복했다.

 “저기요, 에녹……..”

부드러운 손길에 한참 노글노글 풀어져 있던 정난우가 머뭇대듯 말을 걸었다. 왜, 잠긴 음성의 대꾸가 돌아갔다.

 “또 커졋는데요.”

정난우가 개미처럼 속삭였다. 에녹은 짧게 함숨 섞어 말했다. 욕구불만으로 의도치 않게 어투는 거칠었다.

 “네가 둔해서 모른 거지 이미 아까부터 그랬어.”

 “그냥 가만히 두면 돼요?”

 “가만히 안 있으면 그럼, 네가 풀어줄래? 안 그래도 죽겠으니까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꼼짝 말고 있어.”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허리를 붙들어 매느라 뻐근했다. 연속 이틀 공연에 하루 쉬고 대망의 수원 공연이 있으니, 이렇게 네 밤을 견뎌야 하는 거였다.

에녹은 흘러내리듯이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베개 옆에 팔꿈치를 짚어 머리를 괴었다. 힐긋 시선을 들어 벽시계를 보니 아직 10시도 전. 잠들기엔 이른 저녁이었다. 오리새끼처럼 계속 쫓아오는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오늘부터 며칠간은 따로 자. 내가 널 벗겨먹을 수 있는 날부터 다시 같이 자고.”

정난우의 눈시울이 살짝 벌어졌다. 젖은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재워 주고 난 내 객실로 건너갈게.”

 “…왜요?”

 “뭘 왜야. 맛있어 보이는 게 식지도 않고 눈앞을 알짱거리니까 피해있겠다는 거지.”

엄지와 검지로 뺨을 살짝 꼬집으며 대답했다. 잠깐 멀거니 눈만 깜빡이던 정난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았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다가와 품 안에 떨어졌다. 어라, 하며 한쪽 눈썹을 꺾어 올릴 때였다.

 “나 오늘 힘들었는데…….”

정난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게 다였다. 열심히 눈치를 살피며 몇 번이고 씹어 놓은 입술을 간간이 혀로 훔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뒤엉키는 시선은 많은 감정들을 싣고 있었다. 에녹은 그 모든 것들을 낱알 하나 남겨두지 않고 긁어내서 마옴에 들였다.

 “나 가지 마?”

약간의 텀을 두고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오며 별 수가 없었다.

에녹은 버림받은 베개를 끌어와 제 머리 아래 두었다. 고개 받치고 있던 손은 그 까만 머리 아래 끼워 넣었다. 다른 팔로 마른 허리를 감싸 끌어왔다. 안도에 낮아진 숨결이 목과 셔츠 사이에 젖어들었다.

 “그래. 말 잘했어.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내면 돼. 그럼 안 가.”

에녹은 어지러운 머리를 가만히 달래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정난우는 안락한 그의 품 안에서 눈가룰 허물며 미소를 지었다. 자장가 같은 그의 심장 소리가 아득하니 몸으로 스며들어왔다. 그의 앞에서 용기를 낸 보상은 이렇게 항상 달콤했다.

튕겨져 나오지 않는 마옴이, 정말 못 견디게 기뻤다.

<2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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