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4
신년전야 음악회는 세계 톱클래스를 자랑하는 베를린 필의 성대한 축제였다. 클래식 애호가라면 빈 필 신년음악회와 함께 놓칠 수 없는 공연이기도 했다. 녹화와 중계를 위한 취재진들도 빠질 수 없었다.
이 날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와 객원 연주자 정난우, 가 되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광은 다른 남자에게 돌아갔다.
정난우의 껌 딱지로 위장취업 중인 에녹이었다. 공연장 바깥에 진을 치고 있던 연예부 기자들의 먹잇감은 처음부터 그로 낙점돼 있었다.
에녹은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짜증을 냈다. 몰려드는 기자들과 카메라를 철저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얼굴은 평소보다 더 수상하게 가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도 건지지 못하게 했다.
에녹은 번개처럼 인파의 틈을 찾아내 달아나는 솜씨를 뽐냈다. 그 방면에서 그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베테랑의 향기를 흘렸다.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대어를 놓친 취재진들은 이를 갈았다. 그들의 관심이 에녹의 동행인에게 쏠린 건 당연한 결과였다. 언제 봐도 놀랄 만한 에녹의 도주 실력에 막연하게 감탄하고 있던 정난우는 그 역풍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습격하듯 몰려드는 질문에 정난우는 하얗게 질렸다. 예민한 고막이 흥분한 인간들의 목소리에 멀미하듯 떨려 왔다. 질문들도 평소와 달랐다. 다 에녹에 관한 추궁이었다.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조금도 없었다.
취조당하는 정난우는 얼어붙어 아무 말도 못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한태영과 율리안이 어쩔 수 없이 취재진들을 막으려 할 때였다.
마이크와 렌즈들, 시끄럽게 목소리 높이는 기자들이 일순 사라졌다. 정난우는 땅바닥에 처박힌 눈을 겨우 들었다. 매끈한 슬랙스와 도톰한 캐시미어 하프코트가 제 앞을 가리고 있었다.
훤칠한 등은 낯선 듯 익숙했다. 이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제게서 돌아선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귀신같은 동선으로 렌즈를 피해 달아났던 에녹이 돌아와 있었다.
난잡하게 뒤엉킨 향기들 속에 그의 것만 유독 코를 찔렀다. 불안하게 달음박질치던 가슴이 급격히 잦아들었다. 기이할 정도의 안도가 밀려왔다.
에녹은 머플러를 풀어헤치며 결 거친 목소리를 깔았다.
“왜들 이러실까. 다 알 만 하신 분들이. 나 여기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공들 피해주지 말고 오 분 안에 끝냅시다.”
기자들이 열성적으로 환호했다. 여기저기서 섬광 같은 플래시가 터졌다. 에녹은 끓는 속을 능숙하게 갈무리하며 잠깐 한 손을 들어보였다.
“여기 뒤에 정난우 씨가 눈이 안 좋아요. 이 사람 가고 찍어요.”
기자들은 신기할 만큼 착하게 말을 들었다. 에녹은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정난우는 멍하니 제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불투명했지만 그 정도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프코트 아래를 비집고 들어온 손은 어느새 셔츠자락을 감았다. 인공적인 웃음만 띄워 놓은 얼굴에 절로 온기가 스몄다. 어느 순간이고 의지해 오는 그 작은 표식은 모든 짜증을 단번에 날리는 파워를 지녔다.
“그린 룸(배우나 연주자들이 공연 전후에 잡담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방.)으로 가 있어요.”
눈은 정난우에게 고정하고서 손짓은 한태영에게 했다. 한태영은 정난우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길은 율리안이 뚫었다. 아무도 따라붙지 않았다.
에스코트를 따라가며 정난우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기꺼이 제물이 되어 준 에녹이 능숙하게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번번이 들키면서도 꽁꽁 싸매는 이유요?」
언젠가 에녹이 픽 웃으며 했던 말이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멋지게 찍혀 봐야 그거 그 파파라치 놈들 주머니 불려주는 거니까. 내가 그래서 일반 톱스타들보다 따라붙는 애들이 없어. 제대로 얼굴 나온 사진을 건질 일이 별로 없거든. 뭐, 파티 같은 데 가면 어쩔 수 없지만.」
一괜찮아요? 나 때문에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정난우는 초조한 마음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리고 그 때, 에녹이 마치 들은 듯이 고개를 돌렸다. 유독 훤칠한 그의 시선이 기자들의 머리 위를 유유히 날았다. 빛처럼 충돌해오는 무언가가 정난우로 하여금 피하지 못 하게 했다.
불투명한 선글라스 너머, 눈이 마주쳤다. 정난우의 시력으로는 에녹의 표정조차 담을 수 없는 거리였다. 에녹에게도 새까만 장막을 투시할 초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짧은 순간, 확연하고 강렬하게 서로를 인식했다.
모든 배경이 흑백으로 퇴색했다. 잡음들이 썰물처럼 떠밀려 사라졌다.
흡반 같은 인력이 서로를 강하게 옭아맸다. 물리적 거리는 이 순간 의미를 잃었다.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의 거리는 착실하고 느리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내 주술 걸린 사람처럼 에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찬바람이 그의 코트 끝자락을 크게 흔들었다. 펄럭이는 움직임은 위치 알리는 깃발처럼 세찼다. 저도 모르게 움찔 입술이 벌어졌다. 딱히 떠오르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지만, 그랬다.
텅 빈 망설임이 그에게 가 닿았다. 어떻게 해석을 한 건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제 앞섶을 열어보였다. 닿을 리 없는 그의 체온이 달려들어 뜨겁게 피부를 물어뜯었다. 형태 없는 발열 벌레들이 솜털을 갉아먹고 있었다.
눈이 오던 크리스마스, 그가 건넨 허언 같은 약속. 그것은 둘만 아는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다른 의미로는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웃음 섞인 그의 저음이 뇌리를 진동하는 듯했다
—좋을 대로 해. 여기가 더 좋아?
정신이 확 들었다. 감각 잃었던 얼굴에 겨울바람이 일깨우듯 몰아쳤다.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환청 같은 말을 담은 귀가 화끈거렸다. 한태영을 열심히 따라가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목으로 문댔다.
걸음마, 걸음마 하더니 자신이 정말 앤 줄 아는 걸까. 그게 아니면 그의 모션을 멋대로 풀이한 제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도망치듯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잘 닦인 로비 위에서 다급한 걸음은 점점 제 리듬을 되찾아갔다. 훈훈하고 안정된 공기가 목덜미에 미끄러졌다. 그제야 비정상적으로 날뛰던 심박 박동을 자각했다.
이상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 쥔 손으로 애먼 늑골만 두드렸다.
진정해. 진정해…….
폭력은 간신히 고동을 정상궤도에 돌려놨다. 자꾸만 환청을 반복하는 귓바퀴도 열심히 털어냈다. 수많은 심호흡 끝에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난우는 지휘자 그린 룸부터 찾아갔다. 세계 톱클래스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하는 노장은 늘 그랬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벌떡 일어나 흔쾌히 악수부터 청하는 주름진 손을 공손히 두 손으로 감쌌다.
〔오랜만에 봬요, 선생님. 또 함께 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무슨 그런 겸손한 소리를.〕
노신사는 껄껄 웃으며 정난우의 등을 팡팡 두드려댔다. 일상적인 몇 마디를 나눴고, 그는 독일어 발음이 더 좋아졌다고 칭찬했다. 정난우는 쑥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지휘자와 인사를 끝내고 난 뒤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차례였다. 베를린 필은 단원 개개인이 유명 솔리스트와 견주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그만큼 자부심도 자존심도 대단했다. 콧대 높은 그들의 텃세 빗장을 푸는 건 오로지 실력뿐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벌써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때였기에 차가운 침묵은 오히려 익숙했다.
그 땐 사실 여기저기 들리는 낯선 언어에 정신이 없었다. 늘 그랬듯 연주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음악가들 사이에 언어의 장벽이라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들은 첫 리허설 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칭찬도 격려도 모두 가슴에 들어왔다. 그들은 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달아나는 저를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오, 난우! 어서 와!〕
수염 기른 악장이 제일 먼저 반겼다. 그 뒤를 따라 수석 단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우르르 다가왔다. 정난우는 얼른 악수에 응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가 거칠게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우리 또 실내악 깜짝 콘서트 해야지? 응?〕
수석 단원들이 맞장구를 치며 웃어댔다. 작년 가을의 충동적인 공연을 기억하는 이들의 표정은 뜨거웠다.
〔맞아. 우리 그 때 완전 굉장했지! 시즌 브로슈어에도 없는데 입석까지 꽉 차고 말이야. 온 베를린이 다 들썩거렸잖아.〕
〔내일도 우리의 파워를 보여주자고, 난우.〕
맘 같아선 저도 그러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실내악도 콘서트도 레코딩도, 즐거울 뿐 아니라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정난우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동행이 있어서요. 다음에 정기연주회 때 꼭 해요.〕
그들은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고 아쉬워했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약속만 굳건히 했을 뿐이었다.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나서 정난우는 제 그린 룸에 틀어박혔다. 바이올린을 꺼내 손가락부터 풀었다. 오전에 연습을 충분히 해 둬서 감이 좋았다. 곧바로 공연 연주곡을 들어가려는데, 유독 바쁘게 전화를 받던 한태영이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오늘 각오하셔야겠네요.”
“왜요?”
정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활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한태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우 씨 재계약 시기 다가온다고 소문 다 났대요. 각국 매니지먼트사 회장님 임원들 여럿 오실 듯해요. 공연 뒤 그린 룸이나 리셉션 자리에서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자꾸 연락이 와요 ”
“…소속사 옮길 생각 없는데.”
“일단 그렇게 말은 해 뒀습니다. 아, 맞다 오정수 이사님도 전화 달라고 하셨는데 깜빡 할 뻔했네요.”
안 그래도 베를린 필 신년전야음악회면 리셉션 자리는 거의 지옥이라봐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매니지먼트사 임원들까지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정난우는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은 길게 가지 않고 곧 끊어졌다. 유쾌한 목소리가 훌쩍 넘어왔다.
《아유, 우리 아깽이. 밥은 먹었어요?》
〔…….〕
잠깐 잊고 있었다. 저를 애 취급하는 일인자가 그였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매일 아깽이, 아깽이 했다. 원래는 아기고양이라는데 그가 부르는 별명은 아기토깽이의 줄임말이었다. 맹인 시절 귀를 쫑긋거리는 모양이 참으로 닮았다고.
정난우는 한숨을 삼키며 인사를 받았다.
〔네, 아저씨. 식사하셨어요?〕
《식사는 아까 했고 지금은 술 마실 시간이지. 뉴욕은 한밤이에요. 어린이들 코 잘 시간.》
〔……네에. 그런데 안 주무시고 전화는 왜…….〕
《나쁜 어른들이 사탕 흔들면서 꼬셔갈까 봐 미리 약 좀 치려고 전화 했지요. 아무도 따라가면 안 돼? 공연 끝나면 에디가 계약서 그린 룸으로 배달할 거야. 불안해서 미리 도장 찍어야지 안 되겠어.》
〔그냥 지금 와서 받아 가셔도 되는데요.〕
《그 놈 아직 입국도 못했어. 시간이 빡빡했거든.》
그나마 리셉션 전에 온다니 다행이었다. 이미 재계약 끝났다고 하면 아무도 더 길게 얘기를 안 할 거다. 가만히 희망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오정수가 아깽아, 하고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음…… 아저씨가 뭐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야.》
조심스레 내깔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한 번 갸우뜽하고 말았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뭔데요?〕
《너 스토커 신고한 거, 도영이한테는 얘기 안 했지?》
아아, 하며 정난우는 눈가를 좁혔다. 그러고 보니 거의 잊고 있었다. CCTV 확인 결과 그날 선물과 카드는 심부름 업체에서 배달된 걸로 나왔다. 현금 결제를 했던 터라 업체 측으로서는 의뢰인 정보를 줄 게 없다고 했었다. 특별한 위협은 없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고 결론이 난 상태였다.
〔네, 안 했어요. 별 거 아닌 일인데 괜히 말해서 뭐해요. 형까지 걱정하게…….〕
《그래. 잘 했다.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그럴게요.〕
9년 전 팬에 의한 납치 감금 사건은 모두에게 상처였다. 강도영 뿐만 아니라 오정연과 오정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정수는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알아야겠지만, 강도영에게까지 당시의 일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래. 에디 만나서 도장 꼭 찍고, 다음에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 게. 뉴욕 오면 연락해. 알았지?》
네. 대답하는 걸로 통화는 끊겼다. 화면을 끄려다가 무심코 시각을 확인했다. 공연장으로 들어온 지도 30분 가까이 흐른 듯했다.
이맘때쯤이면 곁에서 빤히 연습을 지켜보거나 말을 걸어 올 에녹이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텅 빈 시선이 허전했다. 혹시 아직도 기자들한테 붙들려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무렵이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 대신 진동이 울렸다.
『내가 가면 또 복잡해질지도 몰라서 그냥 바로 들어왔어요. 오늘은 객석에 있을게요.』
제 그린 룸은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이 잠깐씩 다녀간 것 외에는 조용한 편이었다. 공연 전에는 연주자들이 예민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핑계로 매니저들은 중요한 손님이 아니면 공연 전 그린 룸 출입을 제지하는 편이었다. 더 깊이 파고들자면 제가 사람들을 꺼리는 탓이었지만 어쨌든 대외용 이유는 그랬다. 특히 기자들은 절대 출입금지였다.
와도 괜찮은데요, 무심코 그렇게 썼던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 도로 지워냈다. 천천히 사라져 가는 활자들을 멍하니 방관하며 깨달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예측 못했던 내심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한숨 같은 신음이 나왔다. 작은 변화였다. 그럼에도 충분히 불길한 신호였다.
차갑게 굳은 손 안에서 작은 기기가 재차 요동쳤다. 잡생각을 애써 물리치며 확인했다.
『아까 나 조금 실망했어요. 달려와 폭삭 안기지는 못할망정 진짜 매정하게 돌아서더라. 아아. 버림받은 기분. 나 울 뻔했어.』
짓궂은 농담에 미간으로 희미한 열기가 몰렸다. 획일화된 필체는 자동으로 음성지원을 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의 탁한 음성이 목덜미를 긁어내렸다. 솜털이 일어난 목을 문지르다가 느릿느릿 답장을 찍었다.
『인터뷰, 나 때문에 억지로 한 거면 다음부터 안 그래도 돼요.』
그러자 빛처럼 빠르게 반응이 왔다.
『너 때문에 한 건 맞아.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전제거든. 그것만 충족되면 사실 내가 억지로 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말 돌리는 솜씨가 제법이네. 한 번은 속아 주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냥 글자만 주고받을 뿐인데 눈치 빠른 남자를 속이는 건 참 어려웠다. 요령 없는 스스로가 조금 안타까웠다.
그 이후로도 그는 제 공허를 메워주기라도 하려는 양 간간이 메시지를 날려 왔다. 연습에 방해될까봐 안 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문자 공세였다. 마지막 악장 마지막 코드가 끝나는 순간 가장 먼저 브라보를 외치겠다 는 둥, 기다리기 지루해 죽겠다는 둥, 화제는 두서없이 이리저러 튀었다.
『오늘은 파가니니 협주곡이네요. 카프리스 기억나요. 아, 그 때 취해서 기억 안 나려나? 내 집에서 맥주 마시고 어린이 됐던 날 카프리스 연주했었어요. 그 왜, 중간에 손가락으로 땅땅 튕기던 거 있잖아.』
『기억은 안 나는데 태영 씨한테 듣긴 들었어요.』
취했던 순간들은 말끔히 도려낸 양 기억에 없었다. 제 술버릇이 독특하다는 건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거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런데요. 도대체 정확한 주사의 정체가 뭐예요? 어린애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데. 프라하에서는 내 이름 부르던데 꼬마 정난우는 나를 모르잖아. 그런 거랑은 상관없나?』
아아, 하며 정난우는 입을 벌렸다.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터치 방식의 버튼을 세심히 눌러 대답을 적어 보냈다.
『무조건 어린애가 되는 건 아닐 거예요. 보통은 그렇지만요.』
『뭐가 그리 복잡해? 술버릇에도 조건이 붙어?』
『전 잘 모르겠는데, 듣기로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가만히 생각을 해 봤는데 , 아마도 취하는 순간에 가장 강렬히 기억하는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프라하에서 제가 에녹의 이름을 불렀다면, 그 광장의 연주를 기억하는 제가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걸 거예요.』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잠잠한 휴대폰을 오래 바라보다 한태영에게 건넸다. 순서가 될 때까지 바이올린만 붙들고 있었다. 연습만이 모든 잡념을 말살시킬 수 있었다.
스태프가 입장 준비를 알렸다. 정난우는 차분하게 그린 룸을 나섰다. 자꾸만 한태영의 호주머니로 향하려는 제 눈길을 붙드는 게 힘들었다.
기다림, 그것은 이별 직전에 오는 통과의례였다. 서글픈 생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눈빛을 단단히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기 전, 한태영에게 고민하던 바를 차분히 정리해 내뱉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야겠어요. 가장 빠른 비행길로, 스케줄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시간 충분해요.”
눈치 빠른 한태영이 곧장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난우가 스케줄 조정까지 해 가며 미국 자택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정신과 상담을 위해서일 거다.
늘 정해진 일과 수행하듯 일정주기로 들르는 병원이었다. 이 느닷없는 적극성은 정난우의 내면에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불안해하고 있는 건지 희망을 얻은 건지 한태영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매니저로서 할 수 있는 걸 해줄 수밖에.
“오늘 리셉션 끝나기 전까지 표 끊어둘게요. 걱정 말고 평소처럼 멋진 연주해요. 알죠? 늘 응원하는 거.”
따뜻한 격려에 정난우는 슬쩍 눈가를 허물었다.
“고마워요, 늘. 태영 씨가 제 매니저로 있어서 정말 행운이에요.”
“별 말씀을 다 하네. 세기를 장식할 예술가 곁에 있는 제가 오히려 로또 맞은 거죠. 또 압니까? 몇 백 년 후 난우 씨 위인전이라도 나오면 그 안에 이름이라도 같이 실릴지. 가문의 영광이죠.”
한태영이 호탕하게 웃으며 정난우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그 훈훈한 분위기에 끼지 못한 율리안이 불만인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우 씨. 저는요! 저도 궂은 일 엄청 해요!”
정난우는 그의 발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율리안도 고마워요. 그럼, 다녀올게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입장했다. 오늘의 유일한 솔리스트를 반기는 박수가 쏟아졌다. 빈자리 없이 빼곡히 메운 관중들이 모두 저를 바라보았다. 300여 년간 존재하며 숱한 이들의 고통과 환희를 기억하는 손 안의 바이올린이 공기의 떨림에 공명했다.
차분하게 무대에 올랐다. 자신을 기다리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로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손짓했다. 협주곡 속의 프리마돈나, 그녀의 긴 치맛자락이 펄럭거렸다. 조명 쬐는 황금빛 무대는 정난우의 검은 눈동자 위에서 핏빛으로 비쳤다.
오케스트라의 긴 전주 후 정난우의 카덴차가 서막을 올렸다. 파가니니의 명성답게 화려한 기교의 음표들은 정난우의 섬세한 손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생명력을 얻었다.
『Paganini, Violin Concerto No.1』
에녹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했다. 귀에 들어오는 건 현란한 테크닉뿐이었다. 연주자의 감성은 한 줌도 가슴에 스미지 못했다. 공감도가 제로를 기는 거였다. 귓구멍에도 뇌 주름에도 잿빛 먼지뭉치만 한 가득이었다.
반쯤 내리감긴 눈꺼풀을 완전히 닫았다. 코끝에 포기의 한숨이 흩어졌다. 도저히 무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난우가 마지막에 보내 온 문자 메시지만 머릿속에서 무한궤도를 그렸다.
그 순간 강렬히 기억하는 행복한 순간, 이라고 했다. 한태영은 의심도 없이 정난우의 술버릇을 유아퇴행이라고 단정 지었다. 한태영이 목격했던 순간들에서 정난우는 늘 맹인 꼬마였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네가 행복했던 순간이라는 건, 늘 그 때였다는 거지.
차라리 눈이 안 보이던 그 때가. 까마득히 많은 이들의 숭배 같은 찬사도 없었던 그 때가…….
에녹은 팔걸이에 놓아둔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따뜻한 양모의 품에 안겨 콜콜 잠들었을 정난우가 선연하게 그려졌다.
속이 쓰려 왔지만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현재의 최선책은 미래를 위한 반석을 깔아두는 것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프라하의 추억이 행복했다니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에녹, 그렇게 부르던 정난우의 흐린 목소리가 기억났다. 아주 오랫동안 그 부름이 뇌리를 맴돌았다.
코트 안주머니 쪽을 턱턱 더듬어 확인했다. 모서리 둥근 직사각형 기기가 제 존재를 알렸다. 루스에게 추천받은 고성능 녹음기였다. 휴대폰 녹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녀석이었다. 다음번에는 이 안에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담아 둘 거다.
긴 시간 뒤 천천히 눈을 떴다.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손을 놓고 있었다. 솔리스트의 카덴차가 유난히 긴 곡이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만이 정신없이 현 위를 날아다녔다.
수천 쌍의 눈이 정난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찬탄과 갈채를 준비하는 그들의 속내가 장내를 꽉 메웠다.
그 뜨거운 주목 속에서 정난우는 외로워보였다. 버림받은 사람처럼 홀로 서 있는 거였다. 그 누구에게도 손을 뻗지 않는 고집이 날카로운 기교에 녹아 있었다.
에녹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다. 미세하게 당겨진 신경이 뒷덜미를 자극했다. 뒤늦게 눈이 트인 거였다.
여리면서도 단단한 알맹이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녹음기의 형태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정난우가 취하는 순간마다 제 이름을 부르게 해 주겠다고.
과거로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정난우가 암흑 속으로 돌아가 헤매는 시간은 1분 1초도 아까웠다. 맹인 꼬마였던 때가 제일 행복했었다는 소리 따위, 감히 제 앞에서 못하게 할 거다.
카덴차가 막바지를 보였다. 장엄한 끝이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긴 생각 끝에 늘어져 있던 몸에 힘을 불어 넣었다.
마지막 코드가 울렸다. 에녹은 약속대로 자리에서 제일 먼저 기립하며 외쳤다. 단전부터 깊이 끌어올린 목소리가 거대한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브라보一!”
브라보를 외치려던 관객들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놀란 사람들이 에녹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아랑곳 않고 한 번 더 외쳤다. 브라보.
정난우를 뒤덮으려던 젖은 여운이 단박에 달아났다. 움찔 놀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표정도 울렁거리듯 흔들렸다. 에녹은 악당처럼 웃으며 더 크게 환호했다. 거의 괴성에 가까웠다.
정난우가 한 손으로 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만 좀 해요, 환청처럼 그 목소리가 귓전에서 어른거렸다. 당황한 나머지 바이올린 든 채 무대 위를 우왕좌왕하는 게 생 초보처럼 어설펐다.
에녹은 당신이 최고라고 소리쳤다. 주변 시선 개의치 않는 목청은 허공을 깨뜨릴 듯 우렁찼다. 박수만 치던 관객들도 즐거워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열광적인 환호 릴레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말 선동하는 에너지는 타고난 남자였다.
정난우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갈채 쏟아지는 객석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하기 바빴다. 한 시도 제대로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얼른 그린 룸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커튼콜은 몇 번이고 이어졌다. 그 동안에도 에녹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브라보. 당신이 최고야.
에녹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정난우는 물론 알 리가 없었다. 고대하던 퇴장 길을 밟아가며 윗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갈피를 못 잡았다.
곧장 그린 룸에 들어가 몸을 늘어뜨렸다. 송진을 발라둘 여력조차 없었다. 연주보다 커튼콜이 기력을 더 빨아먹었다.
화장대 유리 위에 지친 얼굴을 묻었다. 몸이 축 늘어졌다. 매끈한 유리의 서늘한 온도가 차츰 뺨의 열기를 식혔다.
인터미션 타임이었다. 에녹이 깨부순 여운이 뒤늦게 습한 피부에 엉겨 붙어왔다. 느리게 숨을 뱉을 때마다 유리 위에 희미한 흔적이 남았다. 뿌옇고 불확실한 유령의 잔상 같았다.
늘어지는 눈꺼풀을 꽉 닫았다. 형태 없는 무게감이 어깨를 내리눌리 왔다. 무대 위에서 홀로 노래하던 외로운 프리마돈나가 엎어진 몸을 감싸 안아오는 거였다.
차갑고 선득한 숨결이 뒷덜미에 맺혀왔다. 그녀가 허밍을 불었다. 늘상 비음만 흘리더니, 오늘은 노랫말을 곡조 위에 태웠다,
잘했어. 난우야. 네가 최고야. 내 아들…….
정난우는 젖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에녹이 그녀마저 물들인 모양이었다. 대단한 전염성이었다.
연체동물처럼 짓누르는 덩어리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물 냄새 섞인 피 냄새였다. 속이 조금 메숙거려 미간을 좁혔다.
벌컥.
문 열리는 소리에도 정난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인터미션 중에 그린 룸 문을 열어젖힐 사람들이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줘요.”
익숙한 음성이 예상을 빗겨갔다.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열린 문 안으로 에녹이 들어와 있었다. 시야에 그의 매끈한 구둣발이 들어찼다.
그 강렬한 존재감이 비린내를 일거에 몰아냈다.
매니저들과 간식을 날라 오던 스태프가 멀뚱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단단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십 분만. 둘이 할 얘기 있어서 그러니까.”
“……뭐. 그래요.”
고개를 갸웃한 한태영이 선선히 허락했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고 둘만 남았다. 에녹이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문고리 잠기는 소리가 침묵 속에 울렸다.
허공에 흩어지는 그의 숨결이 조금 거칠었다. 희미한 조급함이 그의 가슴을 오르내렸다. 정난우는 의아하게 눈만 굴렸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히 달려온 거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시야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발치 끝에 닿았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 바보냐? 내가 어디 국경 너머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안 불러? 딱 오 분 기다리다 튀어왔어.”
기다렸어. 거침없이 내뱉은 에녹의 말이 내장을 헤집는 듯했다. 나도 기다렸어요.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제가 그의 말대로 참 바보 같았다.
에녹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볍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내버려둔 그가 턱짓했다.
“휴대폰 들어 봐.”
머뭇대다 그의 말대로 했다.
“내 이름 찾아서 누르고, 메시지를 적어. 간단히 한 마디면 돼.”
“…….”
“와 달라고. 해 봐.”
망설임이 말초신경을 태웠다. 새까맣게 그을린 손끝은 심장과 닮은 색깔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누군가에게 한 번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에녹의 무시무시한 안광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정수리를 꽉꽉 찍어 내리는 시선에 몸이 까라질 것 같았다. 묘하게 굳은 손끝을 겨우 움직여 강요를 따랐다. 몇 발자국 건너에 있는 그에게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불밝힌 액정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래, 왔어. 부르기 전에 이미 와 있었지만.”
에녹은 풀어헤쳐 놓은 코트 앞섶을 열었다. 와인색과 흰색이 교차로 들어간 줄무늬 니트가 백열등 아래 드러났다. 위엣 단추 풀린 셔츠 깃 위로는 남자다운 목선이 곧게 뻗었다.
“이젠 이리 들어오면 돼.”
에녹은 멍하게 숨만 쉬는 정난우를 빤히 주시했다. 은은한 광택의 검정색 셔츠가 창백한 얼굴을 더 부각시켰다. 실핏줄마저 훤히 보일 것 같았다. 미세하게 부르튼 윗입술이 보였다. 몇 번이고 씹어 물었을 게 뻔했다.
에녹은 신음처럼 한숨을 터뜨렸다. 혼자 삭이는 게 일상으로 굳어졌으니 저 다리도 함께 뻣뻣해진 거다. 걸음마도 아직 못 떴을 텐데 너무 조급했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바싹 다가서 멈추며 말했다.
“자. 팔이라도 벌려.”
누군가 늑골 안쪽을 꽉 비틀었다. 정난우는 홀린 사람처럼 두 팔을 들었다. 옳지, 칭찬하는 그의 입술이 희미한 곡선을 그렸다. 어정쩡하게 들린 팔 밑으로 뜨거운 체온이 스쳤다.
강제로 일으켜진 몸은 곧장 그의 외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따끈한 체온이 몸을 절였다. 익숙한 향기가 나른하게 혈관을 내달렸다.
등 뒤로 그가 앞섶을 여몄다. 매끈한 핏의 옷은 두 사람을 한 번에 담기엔 턱도 없이 모자랐다. 대신 그 빈공간은 그의 단단한 팔이 메웠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 거야. 하나도 안 아프잖아. 나만 있으면 되겠다 싶고. 그렇지?”
그가 귓전에서 낮게 속삭였다. 녹아내릴 만큼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 막히는 압박감이 등허리를 쥐어짰다. 뼈 마디를 짓이기는 한 줌 고통은 곧장 안도로 탈바꿈했다. 모르는 새 메스 꺼웠던 속도 깨끗하게 정돈되었다.
머릿속은 백지처럼 새하얬다. 얼어붙은 뇌가 간신히 명령을 내렸다. 쭈뼛거리는 두 손이 나무토막처럼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코트 안을 타고 올라갔다. 탄력적인 등의 곡선이 손 안에 휘감겼다.
에녹의 몸이 멈칫 굳었다. 섬세한 근육들이 꽉 수축했다가 천천히 풀어졌다. 그가 짧게 실소했다.
“좋네, 이거. 콜 비야 뭐야.”
에녹이 목 안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깊이 얽었다. 마사지하듯이 손끝에 리듬을 실어 매만졌다. 안긴 몸뚱이에서 서서히 경직이 빠져나갔다. 살짝 튀어나온 견갑골 위를 살살 도닥이며 당부했다.
“앞으로는 오늘처럼 와 달라고 해. 첫 딱지 끊었으니 두 번째는 그리 안 어려울 거야.”
대답 대신 정난우의 손바닥이 따끈하게 등을 눌렀다.
“내가 어디 멀리 가 있으면, 한 오 분만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 그러다 정 혼자 못 견디겠으면 말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아와 줄 테니 .”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 그건 정말 폐 끼치는 거고.”
“너 혼자 끙끙대고 있었던 걸 내가 나중에 아는 게 더 폐라는 생각은 안 해? 잔말 말고 그렇게 해.”
에녹은 잠깐 사나워졌던 어투를 침착하게 다듬었다. 정제된 숨을 몇 번 내뱉고 나서 팔을 느슨하게 했다.
상체를 뒤로 조금 무르며 시선을 내렸다. 정난우의 얇은 눈꺼풀이 다급히 아래로 쏟아졌다. 등 감싼 손은 아직까지 어정찡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빠졌다.
“기다리는 동안 검색해 봤어. 지구 반 바퀴를 비행기로 횡단하려면 한 서른 시간 정도 걸린대.”
짧게 깎인 손톱이 정난우의 부푼 윗입술을 눌렀다. 얼마나 씹어댔는지 윗입술만 빨갛게 올라왔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 가지런한 이가 얼핏 드러났다. 에녹의 눈빛이 묽게 내려앉았다.
“아무리 길어도 그 정도만 참으면 된다는 거야.”
에녹은 정난우의 입술을 누른 제 손가락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공수표 아냐. 네가 정말 힘들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불러. 와 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약속한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미련하게 혼자아프다가내 내 눈에 들키기만 해. 그 땐 진짜 화낸다.”
손가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탁한 속삭임이 흩어졌다.
리셉션장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에녹은 음악이 바뀔 때마다 정난우에게 말 붙이길 즐겼다.
몇 번 들어도 작곡가고 곡 제목이고 헷갈리게 마련이이서 중복되는 대답들도 간혹 돌아왔다. 그래도 정난우는 귀찮아하는 법이 없었다. 성심성의껏 제가 아는 것들을 풀어놓곤 했다.
지금은 독일의 자랑인 베토벤의 교향곡이 흐르고 있었다.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딱 좋은 볼륨이었다.
평소라면 베토벤에 관해서건 교향곡 자체에 관해서건 열심히 묻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차분하게 깔리는 작은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고개를 숙여줬을 거다. 그러나 현재 에녹은 그럴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당연히 기분이 매우 저조했다.
에녹은 눈만 고요히 내리뜨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주기는커녕 비딱하게 쳐든 채였다. 차가운 시선은 내내 정난우의 뒤통수만 따라다녔다. 말 붙일 틈바구니가 없었다. 만찬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구도는 거의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껏 함께 했던 리셉션 중에 오늘이 제일 북적북적했다. 그 안에서 정난우는 정말 미친 듯이 바빴다. 어디어디 매니지먼트라고 얘기하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이었다.
이미 떠난 배를 붙들고 애태우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정난우를 계속 훔쳐가고 있었다. 맥없이 뺏겨야 하는 제 처지가 짜증났다. 당장이라도 업어서 튀고 싶은 걸 참느라 창자가 끊어질 지경이었다.
“이봐요, 한.”
에녹의 나지막한 부름에 한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하는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여전히 클래식 무식쟁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아티스트 정 바이올린 파트에서뿐만 아니라 클래식계 전체에서 원 톱입니까?”
“뭐, 순위를 매기는 건 무의미하지만 현재 가장 잘 팔리는 것도, 가장 화제가 되는 것도 난우 씨이긴 하죠. 예매 경쟁도 가장 치열하고, 암표도 제일 비싸게 팔리고요.”
진짜 슈퍼스타였네. 그것도 원 톱이라 이거지.
이제야 비로소 체감한 기분이었다. 역시 무식하면 까막눈이 되는 거다. 클래식만 들으면 졸기부터 했던 제 무딘 혼을 무대 위로 강탈해갈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에녹은 뜬금없이 일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반드시 서른 전에 개런티 톱을 찍으리라 다짐했다. 수입의 격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어느 분야건 최고가 아니면 무의미했다. 그날이 오면, 좋은 바이올린을 사서 리본 묶어 선물해 주는 걸로 기념식을 하는 거다.
좋은 바이올린…….
에녹은 문득 이틀 전의 첫 레슨을 떠올렸다. 정난우의 10대를 기억하는 요물 바이올린으로 기초를 배우던 날이었다. 만 불짜리와 천만 불짜리 차이가 뭐냐부터 시작된 화제는 길게 이어졌다.
「통곡 같은 과르네리, 아리아 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한 번 쯤은 이 둘을 양 어깨에 메는 꿈을 꾼다고 해요. 두 악기가 미세한 음색이나 매력이 다르거든요.」
「너는? 너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어?」
「음…… 글쎄요. 저는 애초에 가능성 없는 일에는 기대를 걸지 않는 편이라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꼬마 정난우는 미래에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는 꿈을 꾸며 연주했나?」
「아뇨. 저는 그냥 음악이 좋아서…….」
「그런 거야. 너무 큰 꿈은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네 능력이 쫓아갈 수 있는 한계쯤은 바라봐도 돼.」
「…저 남들보다 많이 벌긴 하지만 그렇게 큰돈은 없는데요. 대여라도 받으면 또 모를까.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는 최소 수백만 불 이상을 호가하니까요.」
「얘가 나를 무슨 쭉정이 취급하네? 내가 이렇게 버젓이 옆에 있는데 돈 얘기가 왜 나와?」
그 때 처음으로 악기를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난우가 지금 대여해 쓴다는 바이올린은 과르네리였다. 그러니까 제가 리본 묶어 선물 해 줄 건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두 놈이 한 번에 패키지로 묶여서 경매에 나온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물론 그런 기적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에녹이 그렇게 삼천포의 늪에서 열심히 김칫국을 마시고있을 때였다. 정난우가 혈색 나쁜 얼굴로 걸음을 질질 끌며 돌아왔다. 입술 색이 거의 피부색에 근접해 있었다.
에녹은 재빨리 작은 유리그릇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작은 과일들이 한입 크기로 조각나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파인애플을 하나 찍어 입술 위에 대 주었다.
“먹어요. 당분.”
괜찮다고 거절할 힘도 없는지 정난우는 잠자코 받아먹었다. 오물거리며 씹는 힘도 축축 늘어졌다. 그늘진 얼굴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게 없으니 애가 탔다.
파인애플을 다 씹어 넘기는 걸 확인하고 얼른 다른 걸 먹여주려던 때였다. 정난우의 등 뒤에서 낯선 듯 조금은 익숙한 언어가 넘어왔다. 한국어였다.
〔실례합니다. 정난우 씨.〕
또 불청객이 등장했다. 이러다 사람 잡겠다 싶었다. 에녹은 화가 치밀었다. 작작 좀 하라고 뒤집어엎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차분히 돌아서는 정난우의 등이 그걸 막았다.
그도 애써 견디고 있는 거였다. 또다시 남겨진 에녹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만 헝클어놓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운영하는 박채호라고니다.〕
정난우는 꾸벅 머리를 숙이며 그의 명함을 받았다. 로드 엔터테인먼트, 처음 듣는 회사였다. 낯설어도 무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말로 대꾸했다.
〔반갑습니다. 정난우입니다.〕
〔네,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희 회사 이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박채호는 회사 소개부터 했다. 로드 엔터테인먼트는 한국에서 제법 큰 음반 회사였다. 최근 독일의 한 클래식 매니지먼트 회사의 지분을 과반수 이상 인수하면서 클래식 공연 분야에 진출할 이심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했다. 본격적인 유럽 시장으로의 사업 확장 이전에 자신을 영입할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
로드에 인수된 독일 회사는 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제법 실속있는 음악가들이 많은 걸로 기억했다. 베를린 필 단원 중 한두 명 정도는 그에 소속되어 있을 거다.
박채호 역시 다른 이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재계약은 어떻게 됐는지, 혹시 소속사를 옮길 생각은 없는지, 다음 재계약 시기는 언제인지.
그래서 정난우는 내내 반복했던 얘기를 또 해야 했다. 박채호는 안타까워하며 눈가를 좁혔다.
〔아, 역시 그렇군요.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재계약 시기 얘기 듣자마자 달려온 겁니다, 물론 다들 그랬을 테지만요.〕
〔네…… 제가 회사를 딱히 옮길 생각이 없어서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업계 톱이라고 불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수 없는 회사니까요.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약간은 희망을 걸었는데 아쉽네요.〕
박채호는 풍부한 울림의 목소리를 가졌다. 나이 대는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마흔은 안 넘었지 싶었다.
〔아 참.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계약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여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요새 우리나라에선 꽤 주목받고 있는 앱니다. 이번에 줄리아드 예비 음악학교에 합격도 했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인사라도 한 번 해주시겠습니까?〕
박채호가 자연스레 뒤에 서 있던 학생을 끌어오며 물었다. 거절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 것럼 반짝이는 광택의 구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남학생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정난우는 얼떨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숫기가 없는 편인지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만 느껴졌다. 정난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학교 입학한 거 축하해요. 쇼팽 국제 피아노콩쿠르 준비도 하겠네요.〕
〔네. 일단 목표로는…… 아, 제 이름은 이정운이에요.〕
통성명 뒤에는 나눌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뒤를 따랐다. 쭈뼛거리는 저를 보다 못한 박채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정운의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우리 정운 학생이 제일 존경하는 음악가가 난우 씨람니다. 원래는 회사에서 독일로 유학을 보낼까 했는데 굳이 난우 씨 후배 되겠다고 줄리아드 문 두드린 거고요.〕
〔아…… 고마워요. 제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닌데. 피아노 전공자면 저보다는 크리스토퍼 강이 더 롤 모델로 좋을 텐데요.〕
〔그런 게 중요한가요. 저는 음반이나 만들 줄 알지만 그럼에도 베토벤을 충분히 존경합니다. 아, 물론 우리 정난우 씨도.〕
박채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정운이 차분하게 맞장구쳤다.
〔네. 저는 정난우 씨…… 아니, 그 쪽 죄송해요. 뭐라고 불러야 돼요?〕
호칭에 버벅거리던 이정운이 멋쩍게 물었다. 정난우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 단순히 생각했다. 제가 강도영을 부르는 호칭.
〔그냥, 형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럴게요. 이정운이 냉큼 수용했다. 그리고 좀 전에 장애 걸린 말을 곧바로 이어 붙였다.
〔형 데뷔했을 때 저 여덟 살이었어요. 그냥 엄마 따라 피아노 치며 놀던 꼬마였는데 형이 레코딩한 첫 음반 듣고 나서부터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진심이에요.〕
〔아…….〕
머릿속에 새하얀 페인트가 투하됐다. 등으로는 식은땀이 흐를지도 모르겠다. 엮어 이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였다. 나른하고 탁한 음성이 귓전을 스쳤다.
“어이, 학생. 영어 할 줄 알아?”
어깨동무 한 긴 팔이 제 가슴 앞에 늘어졌다. 내내 뒤에서 서성거리던 에녹이었다. 정난우는 멀거니 눈만 깜빡거렸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이정운이 대답했다.
“네. 회화정도는 할 줄 알아요.”
“내가 우리 아티스트 정 동행인인데 같이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영어로 좀 하자. 통역 듣는 거 이제 지겹거든.”
에녹은 눈웃음치며 이정운을 응시했다. 반쯤 묻힌 하늘색 눈동자는 서늘한 돋보기처럼 움직였다.
단정한 머리스타일과 차분한 표정의 이정운이 고요히 마주봐 왔다. 젊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어린 얼굴이었다. 키만 훌쩍 컸지 솜털이 보송보송 했다. 녀석은 차분히 대꾸했다.
“그럴게요, 예의가 아니었나보네요. 제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죄송합니다.”
흐음, 에녹이 엷은 비음을 흘렸다.
“아냐, 나도 여기 관계자도 아니고 솔리스트 VIP일뿐이지, 그냥 이 친구가 하도 나만 쏙 빼놓고 돌아다녀서 외로워서 그래. 일 얘기는 다 끝난 것 같고 해서 나도 좀 놀아달라고.”
제가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 어린놈은 이쯤에서 떼어내야 했다.
기분 나쁜 놈이었다. 고개 숙인 정난우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 눈이 거슬렸다. 열렬한 우상을 보듯 애틋한 눈빛이었다. 한태영에게 열심히 훔쳐 들은 대화내용도 마옴에 안 들었다.
“이런, 저희가 정난우 씨 시간을 많이 뺏은 모양이군요.”
박채호가 조금 미안해하며 말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정난우는 기꺼이 악수에 응했다. 그가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다옴에 또 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계약서와 도장 들고서라면 더 좋겠지만요.”
“저도 반가웠습니다. 사업 잘 번창하길 바랄게요.”
“고습니다. 아, 정운아. 너도 인사해야지.”
박채호가 어깨를 두드리며 사인을 줬다. 이정운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빈 숨만 내뱉는 게 다였다.
주저하듯 움직이는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초조한 망설임이 구두코에 묻어 있었다. 이 학생도 저만큼 말주변이 없는지도 몰랐다. 먼저 인사를 해주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이정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을까요?”
과연 다음에 마주칠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살아가는 제가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과 만날 인연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건 이 학생이 훌륭한 연주자로 성공해도 변하지 않는 거였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난우는 한 박자 늦게 그래요, 했다. 이정운이 꾸벅 허리를 굽히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박채호가 이정운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르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음산한 목소리가 채웠다.
“너 나 좀 봐.”
정난우는 에녹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귓바퀴 안을 흘러들어오는 음성이 비점 직전에서 아슬아슬 물결쳤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뒤에서 한태영이 어디 가냐고 추궁하며 따라붙었다.
“따라붙지 마요. 우리 아티스트 정 정신교육 좀 시켜야 돼. 둘만 있게 해 줘요.”
“무슨 말입니까? 무슨 교육이요?”
“스토커 대비 교육!”
한태영이 혀를 차며 그 자리에 멈췄다. 정난우는 에녹의 셔츠자락을 손가락 사이에 꼭 감고서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늘 배려 깊게 걸음 늦추던 그의 이동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에녹이 테라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겨울밤의 서늘함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잘 깎인 정원수들은 인공조명 불빛에 창백하게 흔들렸다. 나뭇가지 부대끼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불길한 분위기에 심장이 꽉 비틀렸다. 북소리 같은 고동이 목까지 솟아올랐다.
에녹 특유의 열기가 진동했다. 그는 화를 내려는 것 같았다. 정면에 선 그가 짓이긴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시 보자고 약속하면 어쩌자는 거야?”
정난우는 더듬더듬 귓바퀴를 문질렀다. 슬슬 눈치를 살피며 변명을 어물거렸다.
“그럼 뭐라고 해요…… 다시 보자는 사람한테 싫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냥 인사 같은 거고…….”
“그냥 인사가 아니잖아. 쟤 눈을 보면 딱…….”
에녹은 날카롭게 치솟은 말미를 가까스로 삼켰다. 화가 치민 나머지 깜빡했다. 정난우가 상대의 눈을 볼 리가 없었다. 길게 숨을 내불며 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최대한 달래듯 목소리를 낮췄다.
“잘 들어 . 팬은 팬으로 남겨둘 때가 제일 좋은 거야. 항상 대답을 할 때에도 적당한 거리감을 줘야 돼. 안 그러면 상대가 착각할 수 있어. 넌 예의 상 내뱉은 말이지만 쟤는 제멋대로 해석해서 ‘약속’이라고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고. 너 같은 성격은 쟤가 그 익속을 빌미로 다시 찾아오면 또 만나주고, 그대로 또 얘기를 나누고, 또 다음을 기약하겠지.”
찾아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난우의 눈이 울렁거리며 흔들렸다.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녹의 목에는 퍼런 핏줄이 섰다.
“그런 스타와 팬의 관계는 절대로 좋은 게 아니야! 팬은 스타와 가까워 질수록 더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싶어 해. 남들은 모르는 거, 나만 아는 거,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그 무언가, 모두 너한테 독이 되는 거야. 그 애들이 뭔가 삐끗하면 더 환장할 만한 일들이 생기게 되는 거고!”
아직까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 잊지 못해 생 고문을 당하고 살면서, 넌 왜 아직도…….
에녹은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잊었어? 너 스토커 신고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어.”
정난우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했다.
거절하지 못하는 제 한심한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속에 갇혀 있음을 뒤늦게 떠을렸다.
어머니. 강도영, 오정연, 오정수…….
그 따뜻한 사람들이 저 때문에 멍든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는 거였다.
뼈아픈 깨달음이 머리를 짓뭉겠다. 9년 전에서 자신은 조금도 크지 못 한 거다. 자신은 그의 힐난 아닌 힐난에 서러워 할 자격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떨려왔다. 옅게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겨울 냉기에 바스러졌다. 흔들리는 눈빛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아, 알아요. …맞아요. 내 잘못이에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토막 났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깊이 마주 얽어 고정했다. 뺨 맞은 사람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에녹의 눈썹이 사납게 솟아올라갔다.
“뭐?”
“다, 다 제가 어수룩해서……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닌데, 제가 다 그렇게 만들어서…… 고, 고치려고 노력도 안 하고, 계속 똑같은 실수만…….”
“듣자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진짜!”
샅샅이 듣고 집요하게 관찰하던 에녹이 울컥 고함을 내질렀다. 불덩이가 치밀어 성대를 달궜다. 움찔 놀란 정난우의 시선이 가슴팍을 정처 없이 헤맸다. 그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도 끓는 속이 진정이 안 됐다. 에녹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내 말 똑바로 해석 안 할래?!”
살벌한 호통에 후려 맞은 정난우가 입을 꾹 닫았다. 에녹의 전신에서 고압전류 같은 분노가 흘렀다.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억센 힘이 턱을 으스러뜨릴 듯이 잡아 쥐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감았다. 뒤따를 혹독함을 기다렸다.
“그딴 논리가 왜 나와, 지금! 네 말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범죄 피해자는 다 자기 잘못이냐? 도둑질 당한 놈은 더 좋은 잠금장치 못한 제 잘못! 사기 당한 놈은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제 잘못! 성폭행 당한 여자는 짧은 치마 입고 밤길 돌아다닌 제 잘못! 넌 이제껏 그런 병신 같은 생각을, 그런 개 같은……!”
에녹의 분노에 급제동이 걸렸다. 손 안에 휘감긴 희미한 떨림이 그를 일깨운 거였다. 뜨겁게 뒤로 넘어갔던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장난우의 낯빛은 기절할 듯했다. 창백하다 못해 유령처럼 푸른 한기마저 깃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뺨과 턱은 금방이라도 조각 날 것 같았다.
에녹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욕설을 씹어 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떨림의 잔향이 남은 손바닥이 불에 지진 듯 화끈거렸다. 나머지 한 손으로 열 오른 이마를 감쌌다.
“빌어먹을.”
에녹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욕설을 깨물었다. 두개골 안쪽으로 증기 같은 스팀이 끓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둣발을 뗐다. 그대로 반대편 테라스 구석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흰색의 장식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얼음 같은 한기가 손바닥을 마찰했다. 부술 듯이 몇 번을 내리쳤다. 쾅쾅, 살벌한 음향효과가 어둠을 갈랐다.
에녹은 고개 숙인 채 불덩이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꽉 수축한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진정하려 애썼다. 윽박지른다고 천지가 뒤집힐 일은 없었다.
정난우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동료로 만나는 이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지만 모두가 스치듯 헤어지고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시력장애로 친구를 갖지 못했고, 불세출의 재능으로 제 일상의 대부분을 잃었다.
연애는 커녕 제대로 된 우정 하나 나눠본 적 없는 거다. 제 언행의 평범성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 낼 분별력마저 제로에 수렴했다. 정난우의 순수는 무지에 가까운 거였다.
에녹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씨발. 어린애에서 머물 거면 영악하게 떼쓰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심도 좀 가지고 있을 것이지. 왜 온순하고 예쁘기만 하고 지랄이야. 에녹은 입술만 씹었다 놓길 반복하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난간을 부러뜨릴 듯 쥐고 있는 손바닥은 얼얼하니 감각도 한껏 무뎌졌다.
호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받을 기분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뒀다. 그러자 한참 뒤 또 울렸다.
아, 이런 순간에 어떤 새끼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치민 성질이 손끝에 고스란히 묻었다. 몇 번이고 액정 위에서 손가락이 헛짓을 했다. 그리고 겨우 메시지를 띄웠을 때, 에녹은 제 눈을 의심했다.
『5분 고민했는데요,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기다리고 있는데요.』
바람이 헝큰 머리가 허공에 나부꼈다. 차갑게 식은 눈가가 찰나 간 뜨겁게 경련하다 멈췄다.
발신자는 정난우였다. 에녹은 할 말을 잃고서 활자들을 각막에 새겼다. 고민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곧바로 돌아섰다.
정난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발도 못 움직이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였다. 그 애처로운 모습이 모든 분노를 증발시켰다.
기가 막힌데 웃음은 안 나왔다.
진짜, 확실히 쟤는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뭐가 있긴 있어.
가슴은 착잡하고 머리는 돌 것 같았다. 예민하게 돋은 시력에 불그스름한 손가락의 떨림이 가시처럼 걸려들었다. 들뜨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이상한 한숨이 심장을 쓸어내렸다.
에녹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재킷을 벗어들었다. 얇은 셔츠 속으로 파고든 칼바람은 뜨거운 체온을 만나 곧바로 부서졌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정난우의 앞에 섰다. 가늘게 떨리다 멈췄다 하는 두 손을 차곡차곡 모아 재킷으로 감쌌다. 뜨끈한 열기를 간직한 안감으로 언 손을 푹 싸맸다. 칭칭 돌려 감으며 물었다.
“너 나 조련해?”
거칠게 내뱉은 말에 정난우는 또 움츠러들었다. 그늘에 잠긴 얼굴이 영문 모를 빛을 띠었다. 눈치 살피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눈꺼풀을, 에녹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막 쉬워? 은근슬쩍 예쁜 짓 한 번 하면 내가 그냥 한 방에 녹아 내릴 것 같고, 만만하고 막 그래?”
정난우의 표정은 더 미궁으로 빠졌다. 에녹의 말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모든 생각들이 엉망진창이었다.
흔들리는 시선을 가까스로 그의 가슴에 고정했다. 그의 손길은 거친 듯이 다정했다. 정말로 돌아와 준 거였다. 밑바닥까지 쥐어짠 스스로의 용기가 대견했다.
에녹은 처음이 어렵다고 했었다. 그 말을 믿었다. 부르면 언제든 와 주겠다고, 그렇게 말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아무리 변덕 심한 사람이라도 하루도 안 넘긴 말을 번복할 리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으스러진 음성을 숨결에 실어 내보냈다.
“아니에요. 쉽고, 만만하고 그런 건…….”
“맞아.”
어설픈 변명이 단호한 벽에 가로막혔다. 딱 잘라낸 에녹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을 등에 업었다.
“나 방금 짜증날 정도로 쉽게 녹아버렸어. 나도 몰랐는데 내가 그런 거에 약한가 봐. 해달라는 대로 안 해주고는 못 배길 만큼.”
희미한 안도가 밀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이가 딱딱 부딪쳤다. 뒤늦게 오한이 몸을 후려치는 거였다. 그 소리가 그에게 건너갈까 봐 얼음 같은 입술을 몇 번이고 깨물었다.
그의 단정한 손끝이 허락도 없이 다가왔다. 잇새에 붙들린 살덩이를 빼내고 떨어져나갔다.
“씹지 마. 아깝게 왜 자꾸 그래.”
이대로 어깨에 짊어지고 따뜻한 객실에 옮겨주면 오죽 좋을까 싶었다.
이불로 둘둘 말아 품에 안아주면 또 귀 잡힌 토끼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어물댈 거다. 에녹은 오늘도 레슨을 핑계로 같이 놀다가 함께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
에녹은 재키으로 감싼 손을 콱콱 주무르며 말했다. 정난우는 할 말을 잃고서 잠자코 있었다. 따듯해져 가는 제 손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또 이해가 안 갔다.
그가 하얀 숨을 내뿜었다.
“네 잘못 아니야. 나쁜 놈들이 나쁜 거야. 진짜 엿같은게 뭐냐면, 그런 놈들이 너 같은 순둥이를 잘 알아본다는 거고.”
“…….”
“내가 삼백육십오 일 이십사 시간 널 업고 다닐 수가 없잖아. 그런 자식들 눈에 안 띄게라도 해야지. 내가 너한테 잔소리한 건 그것 때문이야.”
부싯돌 비비듯이 세차게 비빈 다음에 구겨진 옷을 거둬들였다. 손등을 대 보니 온기가 조금은 되살아나 있었다.
“그런데 그건 네 생각이야, 뭐야.”
“어떤 거요?”
“네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그거 네 머리에서 나온 결론이냐고.”
생각에 잠기듯 정난우의 고개가 삐걱댔다. 반듯한 미간에도 희미한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기를 반복했다. 쉽사리 말문을 못 떼는 그 모습에 에녹은 쓰게 혀를 찼다. 대답 기다리는 사이 몸이 꽁꽁 얼고도 남을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고통이 피해자의 몫으로 남는 경우는 많아. 더러운 현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어.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고, 억울해도 속으로 삭여야 되지.”
에녹은 내뱉는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실었다.
“아프고 괴로운 건 나 같은 놈이 열심히 핥아주면 낫는 건데, 그 이상한 죄의식은 너 스스로도 노력해야 돼.”
“…….”
“걱정 마. 너 혼자 하라고 안 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창백한 얼굴에 혼란이 얼룩졌다. 그 모양을 차분히 내려다보는 에녹의 속은 불순한 잡념으로 복잡했다. 도대체 저 작은 머리통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다.
그 개 같은 망상은 누가 심어 놓은 걸까.
호흡기를 얼얼하게 만드는 냉기에서 쓴맛이 돌았다. 안쓰러움에 무심코 뻗어나간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제 뺨으로 가져와 대 보니 혀를 내두르게 차가웠다.
“일단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다.”
에녹은 재킷을 한쪽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쳐 두고서 정난우의 어깨를 감쌌다. 꽉 닫힌 테라스 문을 열며 말했다.
“뜬금없지만. 너 좀 대단한 것 같아.”
“……왜요?”
“나처럼 완벽한 남자의 약점을 계발시켰잖아. 그거 이제껏 아무도 못했던 거거든.”
에녹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난우는 대꾸 없이 에녹의 셔츠자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그 모양을 힐끔 내려다본 에녹이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머리에 잘 새겨두고 잘 활용해 봐.”
“활용이요……?”
그가 턱을 까딱해 보였다. 긁혀 생채기 난 듯한 묘한 음성이 돌아왔다.
“거창할 거 없어. 아까처럼 조금만 용기내면 돼.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해 줄 거거든.”
에녹은 램프의 요정처럼 꿈같은 말을 읊고 있었다. 현실감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것도 공수표 아니다. 미심쩍으면 공증이라도 받든지.”
혼탁하게 뒤엉킨 의심과 희망이 그의 눈에 읽힌 모양이었다. 커다란 손이 정수리를 덮어왔다. 찬바람에 매질 당한 에녹의 온기는 평소보다 많이 낮아져 있었다.
리셉션장은 여전히 고고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변함없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 삼매경이었다. 브람스의 왈츠가 샹들리에 빛 가루에 녹아 흘렀다. 실내의 난방은 옷을 녹이고, 그의 서늘한 체온은 몸을 녹였다.
균열 없이 완벽한 그림 속에 자신이 서 있는 거다. 지나치게 달콤해서 선뜻 삼킬 수조차 없는 이 순간의 정체가 못내 의심이 갔다.
희망은 늘 절망과 종잇장 너머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늘 희망을 보기보다는 절망을 바라보았다. 결국 다가올 것을 맞닥뜨리려면 마음에 단단히 얼음벽을 쳐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 남자의 손끝이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처럼 환한 그 벽 너머를.
이게 정말 꿈이 아니라면, 잔악한 겨울밤을 가까스로 횡단한 데 대한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다만 이것은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됐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드는 게 이상한 건 아닐 거다.
*
기다리는 기분은 초조했다. 창 밖 먼 곳에 힘껏 시선을 던져 봐도 헛수고였다. 절제 잃은 눈은 정난우가 들어간 상담실 문에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궤도는 불규칙해도 종착역은 한군데인 거였다. 결국 깨끗하게 포기하고 꽉 닫힌 문만 한없이 바라보았다.
저 안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물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알 자격도 없었다. 무릎 위에 맞잡고 있는 손을 뒤틀어 힐끗 손목시계를 일별했다.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
무서운 주사실에 애 혼자만 들여보낸 느낌이었다. 그 기괴한 생각에 실소가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고개를 뒤로 한껏 꺾으며 모자챙을 깊이 내렸다 콧등까지 덮은 마스크를 인중까지 끌어내렸다. 그늘 아래 잠긴 머리가 매캐하게 뒤엉켰다.
신년전야음악회 리셉션 후, 결심했던 대로 이불에 돌돌 말아 뒀던 정난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모레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됐다고.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어딜 가건 따라갈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오로지 정신과 상담을 위해서였다는 건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뇌리로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얽히고설켰다. 병원에 오는 내내 무심함을 가장하고서 끊임없이 관찰했다.
정난우의 얼굴은 평소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툭툭 건네는 말에도 평범하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달칵.
열리는 문소리에 늘어진 몸은 힘을 되찾았다. 정난우가 선글라스를 끼며 상담실을 나오고 있었다. 마스크와 모자를 고쳐 쓰고 빠르게 다가가 얼굴부터 살폈다. 어딘지 모르게 멍한 표정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안도감이 딱딱한 어깨를 이완시켰다.
점퍼 한쪽을 열어주었다. 익숙한 손짓이 셔츠 끝자락을 빼내서 감아갔다. 에녹은 한 팔로 정난우의 어깨를 감싸 익숙하게 에스코트했다.
평소보다 걸음 속도는 한참 죽이고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난우를 먼저 보조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올랐다. 이런 자리에 매니저들이 굳이 낄 이유가 없어서 운전을 자청했고, 그들은 별 말 없이 수긍했다. 운전석이 달라 불편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정난우가 습관처럼 끌어당기던 안전벨트를 에녹이 막았다. 정난우는 의아하게 왜요? 하며 돌아보았다. 에녹은 마스크와 모자와 점퍼를 벗어 뒷좌석에 던졌다. 보조석으로 완전히 돌아앉으며 나머지 한 팔도 벌렸다.
“수고했다고. 한 번 안아줄게. 이리 와 봐.”
“…그냥 얘기만 한 건데. 수고랄 것까지는 없고요.”
누가 보면 대수술 마치고 퇴원하는 줄 알겠다. 민망해하며 슬그머니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이럴 때의 에녹은 늘 무신경한 척 굴었다. 팔이 잡히고 이젠 낯설지도 않은 품에 얼굴이 파묻혔다.
어정쩡하게 구부러진 자세로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정수리 위로 그의 나른한 숨결이 몇 번 흩어졌다.
짧고 담백한 포옹 뒤 에녹은 안전벨트를 매 줬다. 제 것도 끌어당겨 잠그고는 시동을 걸었다. 저절로 재생된 음악이 잠시 고여 있던 적막을 밀어냈다.
“꼭 이렇게 급하게 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어?”
정난우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코끝으로 한 줌 숨을 내뱉은 에녹이 힐끗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일단 선글라스부터 쓰고.”
정난우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했다. 에녹이 한 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뒤로 몸을 틀었다. 능숙하게 차를 빼내 주차장을 나섰다
곧 환한 태양광이 전면유리를 뚫고 쏟아졌다. 눈이 멀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까만 유리알이 고스란히 튕겨내는 그 굴절마저도 눈이 부셨다.
차도로 들어설 때였다. 에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은 쪽으로 멍한 거야, 나쁜 쪽으로 멍한 거야?”
“제가 멍해요?”
에녹은 기가 막혀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울이라도 보지 그래?”
정난우는 당연히 거울을 보는 대신 제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물론 그런다고 표정이 생생히 뇌리에 그려지는 건 아니었다. 멋쩍게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도 긍정적인 변화라고 하셨고.”
“아, 그럼 물어 봐도 되나 보네. 그 변화라는 게 포인트?”
정난우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녹의 다음 질문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떤 변환데?”
역시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고리 지어 엮어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치의와의 상담은 페르마타나 피네와 짝짓지 못한 다카포(악보의 처음으로 돌아가 Fine(피네)나 ????(페르마타)가 붙은 겹세로줄에서 연주를 끝내라는 기호. D.C.로 표기함.)가 홀로 존재하는 악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9년 동안 제 일상은 늘 일정 동선만을 걸었다. 제가 가진 건 동사하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들뿐이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려던 주치의도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눈치였다. 아마 5년 전쯤이었을 거다. 그가 처음으로 체념의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그냥 편안히 아무 얘기나 해 봐요.’ 그렇게 말해 주니 차라리 고마웠다.
얼어 있는 과거를 구태여 부쉬서 끄집어 올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그냥 묻어두고 싶은데 사람들은 자꾸만 밖으로 뱉어내라고 했다. 그건 제게 있어서 온 몸이 조각 날 것 같은 되새김의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걸 뜻했다.
그럼에도 불평하지 못했던 건 오정수 때문이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늘 병원 정기상담 출석을 빼먹지 않고 확인했다. 말만 애 대하듯 하는 게 아니라 만나면 더했다. 항상 병약한 친아들 조우한 것처럼 애지중지했다.
「우리 아깽이, 아저씨도 도영이도 아직 포기 안 했어. 힘들어도 낫는 과정이니까 조금만 더 견디자, 응? 넌 분명히 괜찮아 질 거야.」
그렇게 9년 동안이나 희망을 놓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미안하고 죄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깍지 낀 손을 공연히 비벼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것저것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간단히 설명하기가 좀…….”
오늘 주치의는 처음으로 얼떨떨해 했다. 굳어진 코스만 돌던 롤러코스터가 갑자기 하늘을 날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 병원을 들러야겠다고 결심한 건 친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의 부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을 하다 보니 에녹에 관한 이야기만 줄줄 늘어 놓고 있었다.
「요즘 들어 친해진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자꾸만 그 사람이 저를 이상하게 만들어요.」
에녹의 실명만 빼고는 모두 다 털어놓았다. 거침없이 침범해 들어와서는 녹을 것처럼 어루만져주는 그의 기행들을 낱낱이 고발했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치의는 마지막에 짧게 실소를 뱉어냈다.
「난우 씨, 꼭 금단의 사랑에 두려워하는 소년 같이 말하네요.」
암초처럼 툭 튀어나온 예상외의 비평이었다. 일순 머리가 굳어버렸다.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느리게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난우 씨 그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 있었다고 저한테 털어놓은 적 있어요. 기억 안 나요?」
무슨 얘기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란이 미간에 주름을 팠다. 그의 흰 가운 깃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불온한 평화, 태양 같이 빛나는 에녹, 그리고 나의 유일한 별.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도 못하고서 가까스로 물었다.
「도영이 형……이요?」
그러자 주치의는 가볍게 웃었다. ‘기억하네요.’ 하며.
“일단 하나만 확실히 하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괴롭다는 거야?”
에녹이 건성인 듯 사려 깊게 물었다. 정난우의 머릿속에는 녹슨 톱니바퀴만 삐걱삐걱 맞물려 돌아갔다. 정체된 사고는 계속 주지의의 상담실을 헤매고 있었다. 뒤엉켜 제멋대로 눌어붙은 혼란의 조각들이 괴로웠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리도 수습도 못하고 묵묵히 있던 그 때, 코끝에서 소리가 터졌다.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긴 거였다. 신묘한 주문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정난우는 고개를 돌렸다. 풀어진 눈길이 그의 어깨에 가 닿았다. 시야 위쪽을 차단하는 머리카락 경계선에 그의 조각해 놓은 듯한 하관이 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나른한 곡선을 그렸다.
“옹알이하는 애한테 웅변시킬 생각 없으니까 그만 생각해.”
에녹은 일부러 정난우의 머릿속을 흐트러뜨렸다.
“기다려줄 테니까. 그게 언제든, 네가 내킬 때까지.”
기다려줄게, 에녹은 힘을 실어 뇌까렸다. 밀어붙일 타이밍도 살살 끌어 줄 타이밍도 배워서 체득한 건 아니었다. 그저 관찰하다 보면 자연히 느끼는 것뿐이었다. 지금의 정난우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 앞에 마주앉아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눈에 띄는 균열들에는 정성스레 혀를 대고 핥아주면서.
“고마워요.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
때마침 신호에 걸렸다. 에녹은 힐긋 옆으로 눈길을 옮겼다. 뭔가 한참 혼자 심각했던 정난우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듯 두 손은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늑골이 말랑말랑 녹아내렸다. 기가 찬데 쓴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이제는 넋 빠진 놈 마냥 뭐든 다 예뻐 보이나 참 큰일이었다.
신호가 바뀌자 에녹은 크게 핸들을 돌렸다. 급작스런 선회에 기우뚱 기운 몸을 받쳐주며 말했다.
“일 번 국도 탈 거니까 한한테 전화해 둬요. 나랑 일박 이일 놀다가 들어갈 거니까 식사들 하고 푹 자라고.”
“네? 어디 가시게요?”
“LA. 내 집.”
에녹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기세에 휘말려 네에, 고개를 끄덕이던 정난우가 일순 멈칫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곰곰이 관자놀이를 긁다가 뒤늦게야 숨을 멈췄다.
1번 국도…… LA…….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찢어질 만큼 벌어졌다.
“L……LA? 로스앤젤레스의 그 LA를 말하는 건 아니죠?”
“왜 아니야? 미국에 LA가 또 있어?”
“……말도 안 돼요!”
정난우는 이제껏 들은 것 중에 가장 뜨거운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말미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에녹은 시원시원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정난우는 기겁하며 뜯어말렸다.
“에, 에녹? 일번 국도 타고 LA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다섯 시간 이상 운전만 해야 하는…….”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가자는 거야. 태평양 끼고 달리는 죽음의 드라이브를 내가 보여줄게.”
“……주, 죽음의 드라이브?”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에녹은 싱긋 웃으며 의연하게 대꾸했다.
“아, 몰랐어? 빅서 구간을 중심으로 죽음의 코스가 있어. 밤에 달리면 등허리가 진짜 축축하게 젖고 말 정도로.”
“왜…요?”
“가드레일 없는 산 속 꼬부랑길을 각오해야 하거든. 정말 삐끗하다가는 그냥 바다 속에 수장되는 거야. 지금은 한낮이니까 괜찮아.”
농담이 아니다. 이 남자 진심이었다. 정난우는 하얗게 질렸다. 두 손에 쥔 안전벨트를 잡아 뜯듯이 비틀며 미약한 반항을 해 보았다.
“비행기는 이럴 때 타라고 있는 건데…….”
“넌 비행기 지겹지도 않아? 너 눈 약한 거 자꾸 아무것도 안 보려고 해서 그런 거야. 사람의 눈은 원래 다양한 거리, 다양한 색. 다양한 밝기를 봐야 건강해져.”
자동차도 지겨운데요…….
정난우는 속으로만 반박했다. 이 와중에도 차는 빠르게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건물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체감 상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망연자실 차창 밖을 응시했다. 드라이브 광이나 할 법한 1번 국도 탐험을 제가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에녹은 카 오디오 볼륨을 줄이며 물었다.
“난 널 옆에 끼고서 달리고 싶은데, 너는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
“……먼저 다 정하고 묻는 거 반칙 아니에요?”
정난우가 뚱하게 되물었다. 차창에 흐리게 비친 그가 녹을 듯이 미소지었다.
“내가 정중하게 청하지 않았단 건 인정해. 그런데 난 네가 정말 싫다고 한다면 안 해. 나는 지금 너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 거고, 너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는 거야.”
데이트?
굳은살 박인 손끝으로 안전벨트를 긁어내렸다. 죽음의 코스 운운해 놓고서 데이트랑 연결을 짓다니 정말 희한한 남자였다.
“응? 싫어?”
“…….”
“차돌릴까?”
그가 부드럽게 대답을 종용했다. 가시처럼 돋은 당혹을 녹아내리게 하는 근사한 목소리였다. 심장이 물렁해졌다.
“비겁해요.”
정난우는 불퉁하게 대꾸하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에녹은 황당한 표정으로 실소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정난우의 뺨을 쿡 찔렀다.
“얘가 이젠 생사람 잡아. 내가 뭘 어쨌는데.”
“……몰라요. 그냥 그래요.”
황망한 웃음이 그의 목 안에서 찰랑거렸다. 정난우는 느리게 액정을 밝혀 번호를 찾아 눌렀다. 한태영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에녹이 일번 국도 타고 LA까지 드라이브를 하자는데요…….’ 무겁게 운을 뗐다. 그러자 그는 별 추궁도 없이 실컷 놀다 오시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의 태도에 넋이 또 나가버렸다.
왜 안 말리는 거지?
자신이 이상한 건가 의심이 갔다. 원래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15시간 이상 논스톱 드라이브가 일상인지 헷갈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끊긴 전화를 호주머니에 다시 넣었을 때, 에녹이 기어를 잡은 손을 까딱해 보이며 말했다.
“손.”
뜬금없는 말에 정난우의 시선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에녹이 다시금 손가락을 까딱하며 턱짓을 추가했다.
“손잡아 보라고.”
“왜요?”
“싫어?”
또다. 별 것도 아닌 선택의 기로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위로 쭉 기지개를 켰다. 내려갈 땐 서로의 손가락이 사이사이 꽉 맞물렸다.
“잘 하고 있어. 내가 손을 내밀고, 너는 붙잡고.”
그의 말이 어쩐지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섣불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따뜻하게 포개진 손을 물끄러미 보는 걸로 대신 했다. 그가 왜 갑자기 드라이브를 하자는 건지 영문을 알 리는 없었다.
다만 이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부드러운 침묵 속에 말없이 달렸다. 한참 후에야 에녹이 원했던 해안 도로에 들어섰다. 멍하니 전면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아득한 빛이 부서졌다. 광막히 펼쳐진 바다가 하늘과 닿아 있었다.
정난우는 선글라스를 벗어 콘솔박스에 넣어두었다. 모처럼 전경을 감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에녹의 시선도 같은 지점을 응시했다. 그가 낮게 운을 띄웠다.
“한 이 년 전이었을 거야. LA에서 샌프란시스코 북부까지 혼자서 일번 국도 타고 와본 적 있어.”
“…그 때도 드라이브 때문이었어요? 오래 운전하는 거 힘들잖아요.”
에녹의 시선이 유려하게 정난우의 입술을 스치고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색감의 달콤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냥 그날은 눈 떴는데 갑자기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랬지.”
“아무 이유 없이요?”
“꼭 이유가 필요해? 너무 보고 싶은 거, 너무 하고 싶은 거, 너무 먹고 싶은 거, 그건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지.”
핸들 쥔 손이 오디오 음악을 따라 리듬을 탔다.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충동이라는 건 내게 정말 보석 같은 거야. 그래서 아침 먹자마자 간단히 짐 챙겨서 밟았어. 원래는 한 번에 끝까지 쏘는 게 목표였는데 중간에 한 번 나가떨어진 게 좀 아쉽긴 했지만. 저녁 되니까 교통체증이 심해졌거든.”
어쩐지 그답다는 감상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뛰어들고, 열렬히 타오르다가, 그리고 어느 순간 훌쩍 가버리는.
“이런 내가 이상해? 우리 아티스트 정도 뭇 사람들처럼 나를 너무 불꽃처럼 산다고 잔소리를 할까?”
그가 장난처럼 가볍게 물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뇨. 근사해요.”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삼킨 뒷말이 목구멍에 맺혔다. 그 느낌은 조금 쓰라린 것도 같았다.
막연히 알고 있고, 또 각오하고 있기도 했다. 불꽃처럼 사는 에녹의 관심은 결국 금세 까만 재로 사라질 거다. 미풍에 흔들리는 성냥불을 붙잡아 둘 방도는 없었다. 에녹이 태양처럼 빛난다고 해서 정말 태양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했다.
제 밤하늘을 유일하고 영원하게 밝혀줄 것 같았던 별도 추락했다. 에녹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을 거다. 방금 전에 애써 봉인해 뒀던 아픈 기억이 목덜미를 짓눌렀다.
강도영이 무너져 빈 바닥만 움켜쥐던 그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되살릴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널 이 지경으로 망가뜨릴 때까지, 왜 의심 한 번을 안 했어. 나는 신도 뭣도 아닌 형편없는 쓰레기였을 뿐인데. 왜 너는 아직도 그런 눈으로 나를…….」
그런 눈…… 그런 눈으로.
그 말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그 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절망만 제 눈에 읽혔다. 저로 인해 누군가가 망가졌다는 사실만이 지독할 정도로 가슴에 사무쳐 왔다.
제가 어리석었던 거다. 왜 몰랐을까. 그 역시 스물두 살. 상처받고 망가지기 쉬운 어린 청년이었음을.
당신이 있어서 나는 내 밤하늘이 두렵지 않았는데, 결국 내가 당신도 부서뜨렸구나. 사랑했던 내 친어머니, 친아버지도 모자라서, 내가 신처럼 생각했던 당신마저도…….
그랬다. 그를 포함해 제가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니, 어머니. 지금의 어머니가 남아 있었다.
아니다. 이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노안이 심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사랑을 전송해도 어머니는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모두 다, 심지어 제가 열일곱 살에 잠시 떠밀리듯 정을 나눠 주었던 그 중년의 아저씨까지도.
불현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녹이 의아한 기색으로 얼핏 시선을 흘렸다. 그의 눈길이 닿는 자리가 화끈거렸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표정을 숨기며 굳은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감정의 격류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의 말들을 끌어올렸다.
“진심이에요. 에녹 말이 맞아요. 돈이라든지 시간이라든지, 혹은 건강이나 의지, 용기라든지, 필요한 요건은 많은데 모두 그걸 갖추고 있지는 않잖아요. 에녹은 그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네요. 그 특권을 누릴 줄 아는 에녹이 참 멋지고, 부럽다고 생각해요.”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빠르게 내뱉은 탓에 그리 티는 나지 않았을 거다. 초조한 마음으로 눈치를 살폈다. 운전 중인 그는 전방을 주시하느라 바빴다. 다행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일 때였다.
살얼음 같은 안도를 그의 서늘한 음성이 깨부쉈다.
“왜 떨어?”
그가 따갑게 의표를 찔러왔다.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황급히 눈을 내려 포개진 손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자학하고 싶을 정도로 확연한 떨림이 시야를 흔들고 있었다.
“왜 떠냐고, 묻잖아.”
그가 재차 물었다. 어투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 녹은 한기는 뚜렷한 결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무 대답을 못한 채 얼어붙었다. 굳어버린 입술사이에선 불안정한 숨만 흘러나왔다.
순간 핸들이 거칠게 돌았다. 타이어가 시멘트바닥에 사납게 갈렸다. 갓 길에 급히 멈춘 차 안에서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신속하게 가슴을 받친 그의 손이 곧장 턱을 움켜쥐었다. 강제로 돌려지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너 방금 무슨 생각 했어.”
에녹은 치뜬 눈으로 정난우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건 아무래도 유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지금의 정난우는 꽉 조여서 취조해이하는 거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머릿속에 무언가 어처구니없이 잘못된 관념 하나가 돌처럼 굳어질 거다. 제 감이 그렇게 말했다.
“이건 못 기다려. 당장 대답해. 무슨 생각 했는데.”
정난우의 눅눅한 숨이 턱 감싼 손바닥을 미끄러져 팔뚝까지 흘렀다. 손목에 푸르게 돋아난 혈관이 음산하게 맥박을 올렸다.
맥없이 벌어진 정난우의 입술은 두려운 듯 떨리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새빨간 혀가 잠자는 미지의 영역은 새된 숨결만 가쁘게 펌프질해 올릴 뿐이었다.
에녹의 목소리가 점차 험악해졌다.
“대답 안 해?”
솟구치는 화를 가까스로 찍어 눌렀다. 정난우의 안색은 시체처럼 파리했다. 소리 지르지 말자, 에녹은 몇 번이고 제게 다짐시켰다. 움찔거리는 새빨간 혀를 뜨겁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그 굳어 있는 혀. 내가 씹어 주면 좀 풀리겠어?”
반응은 한 박자 느렸다. 놀란 듯이 더 벌어지는 입술이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녹은 비린 웃음을 코끝으로 흘렸다. 이 순간에서조차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스스로가 기가 찼다.
“내 말이 농담 같아?”
칼날 같은 눈길은 꽉 감긴 눈꺼풀로 올라갔다. 그 안에 숨은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에녹은 예고 없이 움직였다. 뜨거운 입술이 그 가느다란 결을 머금었다. 정난우는 숨을 들이키며 몸을 뺐다. 턱을 옥죈 손에 자연히 힘이 더 들어갔다.
아, 짧은 비명이 울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해 두고서 속눈썹을 길게 핥아 올렸다. 독니에 물린 것처럼 정난우는 얼어버렸다. 떨림조차 증발했다.
에녹의 입술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혈색 옅은 입술 한 조각을 가만히 잇새에 물었다. 혀끝을 세워 건드려도 정난우는 반응하지 못했다.
“아직도 농담 같아?”
벌어진 입술 사이에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해 서로의 목구멍에 넘어가는 타액처럼 느껴질 거다.
느리게 혀를 내밀어 치열을 쓸었다.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언제든 그 안을 폭격해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기다림을 길게 끌지 않았다. 에녹은 고개를 기울여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가볍게 빨자 달콤한 숨이 혀를 절였다. 궁지에 몰린 정난우가 있는 힘껏 턱을 비틀었다.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정난우가 그제야 다급히 성대를 울렸다.
“무, 무서워서요!”
내뱉고 나서 정난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구토하는 사람처럼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녹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러 한 뼘 간격을 유지했다.
“그래, 뭐가?”
방금 전까지 협박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한 채근이었다. 정난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뒤집어진 것처럼 울렁거렸다.
“에, 에녹은…… 정말 불꽃처럼, 사, 사니까…….”
“그래서.”
정난우는 온 신경이 얼굴에 몰려옴을 느꼈다. 그가 쓰다듬는 턱, 그의 숨이 흩어지는 입술, 그의 눈길이 지나가는 모든 자리에서 불길이 일어 살갗이 벗겨지는 듯했다.
“지금은 제가 궁금하고, 관심이, 관심이 있으니까 저한테 잘해 주시는 건데 저는…….”
적당히 은폐할 생각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망가졌다고, 어쩌면 당신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차마 그 이야기를 뱉어낼 수 가 없었다. 그가 사라질까 두렵지만, 그보다 더 겁이 나는 건…….
이 사람은 그에 겁먹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얼마든지 해 보라고 오만한 미소를 지어줄 것 같았다.
매달리고 싶어지겠지. 그리고 제 안에 각인된 피의 증거들이 그의 발목을 자를 거다. 온전히 머무르지도 날아가지도 못한 채로 만들고 말 거다.
강도영, 가엾은 나의 신처럼.
“그 따뜻함에 익숙해질까 무서운 것 같아요. 당신은, 바람처럼 왔듯이, 그렇게 가버릴 테고, 또 어딘가에서 제게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공을 들일 거고…….”
어설픈 변명들을 정신없이 내뱉었다. 입술 주변을 치덕치덕 바르던 그의 숨이 어느 순간부터 멎어 있었다.
변명이라지만 결국 그것조차 진심에 가까웠다. 더 쏟아낼 수 없는 곪은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악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이제 남은 건 그의 판결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차내 공기가 빙점을 아슬아슬 밑돌았다. 숨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그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이, 멍청한 게.”
그리고 곧바로 코끝에 그의 향기가 밀착했다. 굳은 뺨에 그의 보드라운 카디건이 닿았다. 푹 파묻혔다. 그는 정말 애타는 사람처럼 그의 품안에 제 얼굴을 가두고 있었다.
“너, 날 무슨 형편없는 난봉꾼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에녹은 까만 머리카락 속으로 깊이 손가락을 얽었다. 가슴팍이 거친 호흡으로 물들었다. 정난우가 물에서 막 구조된 사람처럼 헐떡이고 있는 탓이었다. 머리카락 속에 파묻힌 제 손가락 틈에 입술을 묻었다.
“하늘에 맹세하는데,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라도 튀어와 주겠다고 한 것도, 내 코트 열어서 품어줬던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에녹은 이를 가는 것처럼 고백했다.
“네가 안 믿어도 사실이라고. 아무도 날 이 지경으로 만들지는 못했어.” 열정적으로 살았다. 누구와 만나건 간에 뜨겁게 사랑했다. 만나고 싶으면 무조건 밟아 찾아갔고, 살을 섞고 싶으면 그렇게 했다. 길 가다가 애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걸 찾으면 곧바로 카드를 꺼냈다. 망설임 같은 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다만, 정말 서른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면서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신 다쳐줄 테니까 넌 내 품안에서 안전하게 있으라고 다독여주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상대와 자신은 늘 원하는 게 같았다. 비록 끝에 가서는 뒤틀어져 상대가 아파할지언정, 떠나간 사랑에 붙들려 줄 남자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을 거다. 남겨진 이는 남몰래 아파했고, 끝까지 다정하게 달래주며 떠난 자신은 약간의 한숨만 씹었을 뿐이었다.
왜, 나는 한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 봐도 유추할 수 있는 답이 없었다. 적어도 상대방의 사랑이 먼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유지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전부였다.
이별의 끝에 남겨진 게 자신이었더라면, 고작 그런 생각이 제가 상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한계치였던 거다.
그런데 정난우, 이 애타게 안아주고 싶은 바보는.
“해 줄 말이 있어.”
에녹은 입술을 미끄러뜨려 단정한 이마를 눌렀다. 멍하게 변한 그 얼굴 곳곳에 끈끈한 입술자국을 남겼다. 가볍게 씹어 놓은 윗입술에도, 아랫입술에도, 모조리 키스했다.
그건 어떤 욕구의 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저 달래주고 싶고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이상하게 뒤엉켜 불처럼 타오르는 마음이 통제가 안됐다. 에녹은 미간을 좁히며 뺨을 맞댔다. 꺼질듯이 속삭였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불안해하지 말고.”
순간의 분위기에 휘말려 쏟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다 맞춰진 퍼즐에서 단 한 조각이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아주 결정적 그림을 완성을 그런 한 조각이.
아, 모르겠다.
고민하고 있지만 기실 그 정도의 부재 따위 상관없는 것도 같았다. 뭐가 됐든 자신은 정난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남은 건 이 열렬한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거였다.
“나도 준비가 필요해. 조금만…….”
에녹은 품 안의 몸을 더 깊이 안았다.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었던 프러포즈는 제게도 생경한 이벤트였다.
진심으로, 마음의 준비건 뭐건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