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
“쟤 좀 이상하지 않아?”
조명감독이 세트 디자이너에게 귓속말을 했다. 세트 디자이너는 조명 감독의 시선을 길게 따라갔다. 촬영 소품이었던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팔 다리 고개 모두 늘어뜨려 앉은 폼이 취객처럼 보였다.
오늘 잡지 화보 촬영의 주인공인 에녹이었다. 조명감독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의혹을 뿌렸다.
“술 냄새는 안 나던데…… 그보다는 약이라도 하나? 요새 뭐 소문 안 돌아?”
“웬 클래식 공연장만 지겹게 다닌다고는 하대요. 할리우드 톱 탕아가 개과천선했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거 못 들으셨어요?”
“아니. 그렇게 건전하게 살면 얼굴이 더 좋아져야지. 살 좀 빠진 것 같은데? 턱 선도 뭔가 조금 더 날카로워지고.”
“아까 매니저랑 얘기하는 거 지나가다 들었는데 천천히 감량 중인 것 같더라고요. 근육 부피를 좀 줄인다고. 얼굴선도 좀 날카롭게 다듬어야 된다던데요.”
조명감독이 못마땅하게 미간을 그었다.
“아니 왜! 저 얼굴로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뭐 저 정도 미남인데 살 좀 빠진다고 뭐가…….”
“그건 미친 짓이라고! 얼굴이 마르면 조명이 얼마나 안 받는데!”
세트 디자이너는 한숨을 쉬며 프로페셔널 조명감독을 일별했다. 슬슬 귀찮아지려던 참에 미술부 스태프들이 찾아서 그는 얼른 자리를 떴다. 조명감독은 에녹에게 뭐라 말이라도 붙일까 했지만 그 역시 금세 또 져서 관둬야 했다.
사실 조명감독의 의혹은 대부분이 느끼고 있는 거였다. 오늘 에녹은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웠다. 심각한 생각에 잠긴 것처럼 냉랭한 눈초리였다가, 이내 멍해졌다가, 하여간 이상했다. 촬영에 들어가면 물론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해서 다들 그냥 모른 척 해 줄 뿐이었다.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걸 까맣게 모른 채로, 에녹은 대기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이어폰이 밀착한 귓구멍 안에는 지겹게 반복해 들었던 음악이 무한정 돌고 있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정난우의 첫 번째 음반 중 한 곡이었다.
얼마 전 에녹은 유튜브에서 정난우의 연주 영상을 모조리 뒤졌다. 그 중에 딱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직 맹인이었던 열여섯의 그였다. 시기가 이 음반과 비슷해서 유심히 감상했었다.
오래 전 영상이라 화질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개진 건 아니었다. 허공을 보고 있으나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죽은 눈동자, 작은 소리에도 연신 쫑긋거리는 귀, 붉게 상기된 뺨, 그런건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클로즈업 된 마지막의 그 표정까지도.
영상의 끝에서 에녹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전을도 감동도 아닌 기이한 감상이 모든 신경을 끊어 먹었다. 재생 시간이 끝난 화면은 정지한 채 오래 머물렀다. 그저 백치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차가운 기계의 액정은 물거울처럼 반짝이며 너울거렸다. 그 위로 정난우의 마지막 모습만이 한없이 반복되었다.
연주 후 찬사의 물결 속에서 정난우는 경기하듯 온 몸을 떨어댔다. 습하게 땀 맺힌 얼굴 위로는 조명이 달려들어 몸을 부쉈다. 스왓컷으로 짧게 자른 까만 머리카락은 덜 말린 것처럼 촉촉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선 그를 헬퍼가 조심히 몸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정난우는 그 때, 갈채가 쏟아지던 객석을 향해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가 보고 있었을 암흑처럼 어둡고, 아주 깊은, 그리고 습한 불순물이 한가득 떠 있는.
너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감은 눈꺼풀은 열여섯의 정난우가 보았을 암흑을 가져왔다. 그 안으로 정난우의 퇴색된 음표들만 무겁게 떠돌고 있었다.
크게 올린 볼륨은 청각 외의 모든 기관을 무능하게 만들었다. 불필요한 감각들이 심해로 아득히 까라졌다. 에녹은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조차 잊었다.
『Pablo de Sarasate, Zigeunerweisen op. 20』
그제 저녁이었다. 식사 후 나란히 이불 위에 엎드려 함께 이 음악을 들었다. 사이좋게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서였다. 딱 두 번 듣고 난 뒤에 에녹은 곡 해석을 물었다. 정난우는 대답했다.
「광장 한복판이에요. 한 집시 여인이 관능적인 춤을 추고 있어요. 상처받은 얼굴을 냉랭한 표정 아래 감추고 있어요. 모두가 그녀의 춤에 매혹돼요. 거친 땅바닥을 맨발로 밟는 피투성이 발에는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아요.」
「왜 상처를 받았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순간 정난우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에야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냥 저절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라서…….」
에녹은 가늘게 눈을 떴다. 저절로. 나도 모르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반사작용에는 원인이 존재하는 거였다. 다만 자각할 수 없거나 스스로가 모른 척 할 뿐.
그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렸다. 유튜브 속 정난우의 이상하게 웃는 얼굴과 뒤엉켜 가슴 속이 진창이었다.
널어놓은 듯 벌어진 허벅지 위로 휴대폰 쥔 제 손이 보였다. 그 미끈거리는 액정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화면을 켜서 문자메시지를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했다.
직접적으로 고막을 뚫고 뇌까지 흐르는 선율은 지금 막 불꽃같은 춤을 추는 중이었다. 클라이막스였다.
그 뜨거움에 떠밀려 전송을 눌렀다.
『나 지금 사라사테의 지고 들어요. 당신은 집시 여인이 춤을 춘다고 하는데, 왜 난 자꾸 다른 게 보이는지 모르겠어.』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반대로 고개를 젖혀 올렸다. 그제야 먼지 날리는 현장을 자각했다. 세트 작업이 한창이었다. 신년 첫 달을 장식할 잡지 화보였다.
새삼 빠르게 지난 시간을 실감했다. 정난우 때문에 4분기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어찌나 바쁘게 이동을 하는지 여행 좋아하는 자신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천장을 바라보며 공연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때, 짧은 진동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가 조금 놀랐다.
정난우였다. 휴대폰을 왜 가지고 다니는지 가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웬일로 반응이 빨랐다. 확인을 누르자 장문의 메시지가 떴다.
『누구나 다 연주자의 해석에 동화되란 법은 없어요. 에녹의 눈에 다른 게 보인다면, 지금 당장 가장 강렬히 이끌리는 감성일 테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다음에 들으면 또 다른 생각이, 다른 느낌이 나타날 지도 모르고요.』
정난우는 음악에 관한 질문은 항상 성실하게 답변했다. 스스로는 말주변이 없다고 늘 미안해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한 뒤 한 박자 늦게 차분하게 단어를 늘어놓으면, 어느 순간 그 말소리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정난우가 전파를 통해 날려 보낸 활자를 한참이고 응시했다. 달팽이관 안에는 아직도 지고가 끊임없이 채워지는 중이었다. 정난우가 말한, 위험하고 뜨거운 춤으로 사람들을 홀린다는 집시 여인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실패했다.
정난우의 공백이 청각세포를 점령했다. 실제 음을 흩뿌리는 오케스트라가 떠밀리듯 아득해졌다. 이건 자연히 머리에 그려졌다. 바이올린을 턱에 끼운 채 활을 늘어뜨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을 그 얼굴이.
이것봐. 이상하다니까.
에녹은 에매하게 미소 지었다. 소파 등받이에 올린 손끝은 무의식중에서도 열심히 리듬을 따라갔다. 화려한 기교가 태풍처럼 몰아칠 땐 따라잡기 힘들었다. 음표 몇 개를 뭉개서 한 번에 손가락 끝에 실었다.
“집시 여인이라…….”
가만히 뇌까렸다. 그 순간 가장 강렬히 이끌리는 감성. 정난우의 악보는 그렇게 내내 만들어져 왔다고 했다. 이 지고이네르바이젠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클래식은 아직도 어려웠고, 뭘 느끼는 게 올바른 건지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보는 이 환상이 정난우의 과거에 실재했을 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볍게 흘려 넘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에녹은 그 아픈 허상을 구태여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그게 정난우의 깊게 곪은 상처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묻어 두면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말 거다. 그의 아픔을 기억해 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에녹 자신이었다.
조명을 확인하는 반사판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번짝 스치고 지나간 섬광 같은 불빛이 각막을 할퀴었다. 묘한 현상이 그 보이지 않는 상흔을 빠르게 뒤덮었다.
그 찰나의 빛 속에서도, 에녹은 정난우가 보였다.
밤새 눈이 내렸다.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화려한 빛 반사를 모두 삼킨 그 전경은 정난우의 마음에도 들었다.
스케일을 끝내고 뜨거운 물을 부은 볼에 보약을 데우고 있을 때였다. 정난우는 습격을 받았다.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화보 촬영이 끝나자마자 어제 바로 날아온 에녹이었다.
공연 스케줄이 끝난 터라 원래는 오전에 비행기를 타려고 했었다. 한태영도 율리안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난우 포함 세 명은 에녹에게 낭만도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폭언을 들어야 했다.
애초에 빠듯한 비행 일정이 아니기도 했기에, 결국 프라하에 이틀이나 더 머물게 되었다. 흡족해 한 사람은 물론 에녹 혼자뿐이었다. 그는 상쾌한 얼굴로 아침 댓바람부터 객실에 난입해 현재 인형놀이 중이었다.
“보자. 이 정도면 되려나?”
“…….”
“아니네. 이게 더 어울려. 어때요? 아티스트 정 맘에도 들지?”
정난우는 침울하게 전신거울 아래를 응시했다. 빨간색 털모자와 빨간색 벙어리장갑이 제 몸 위에 덧입혀 있었다. 도톰한 캐릭터 후드티와 흰색 파카도 함께 했다. 모두 새 거였다. 최종 코디가 맘에 들었는지 에녹은 막 제 목에 머플러를 칭칭 감아보고 있었다.
“이게 다 웬 거예요?”
정난우가 발치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에녹이 끌고 온 캐러어가 입벌린 채 제 대신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그 주위로는 온갖 옷과 의상 소품들이 폭탄 맞은 양 뒹굴었다. 저 중에 반은 오늘의 나들이를 위한 자신의 의상과 소품 후보들이었다.
“매번 웬 칙칙한 코트랑 헌 옷들만 걸치는 게 영 보기 그렇더라고 비행기 시간 전에 시간도 많이 남아서 백화점 한 번 돌았어요. 따뜻하게 차려 입고 오늘 하루 제대로 놀아야지. 프라하잖아. 프라하. 내가 엄청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한 군데라고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고 말 할 기회조차 없었다. 에녹이 제 셔츠위에 스웨터를 껴입으며 물었다.
“밖에 눈 온 건 봤어요?”
“네.”
에녹은 의외라는 듯이 날카로운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건데. 풍경 같은 거 관심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무채색 풍경은 그래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화려한 조명들은 눈이 너무 아프기도 하고요.”
대답하면서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찾아 들었다. 에녹이 재빨리 다가와 그 손목을 낚아챘다. 정난우는 멈칫 고개를 들었다. 외곽시야 끄트머리에 그의 붉은 입술이 묘하게 휘었다.
“아니지, 아니지. 이게 아니거든. 오늘 패션의 완성은 바로 이거거든.”
그는 늘 그랬듯 허락도 없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정난우는 의아해하며 끌려갔다. 에녹이 또다시 땅굴 파헤치듯 캐리어 안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안경 케이스 하나가 들려 나왔다.
“자. 써 봐요.”
정난우는 무심결에 받아들었다. 아무리 추리해 봐도 선글라스가 분명했다. 쉽사리 열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게 기우에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오픈의 영광은 에녹의 기다란 손이 대신했다,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내용물이 기다렸다는 듯 조명을 직선으로 튕겨냈다.
안경 케이스를 쥔 정난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게…… 뭐예요.”
하마터면 던질 뻔했다. 이런 격렬한 반발심은 ‘오르기즘’이 될 뻔했던 헌정곡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혹스런 상황에 정난우는 미간에 심각한 주름을 잡았다.
에녹이 목 안으로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긴, 선글라스지. 귀엽죠?”
선글라스는 무결점의 횐색 뿔테였다. 구석에 플라스틱 리본 장식도 있었다. 한참을 노려보다가 그 민망한 소품을 슬쩍 소파 위에 내려두었다.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이걸 제가 어떻게 써요.”
“왜 못 써?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보자마자 집어 왔는데.”
정난우는 침묵을 지켰다. 에녹 역시 불만으로 살짝 튀어나온 정난우의 입술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술에 머물렀던 웃음기가 차츰 증발했다.
이런 반응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다. 어차피 백화점을 돌면서 가장 염두에 둔 건 멋스러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놀리자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글라스를 도로 주워들며 느리게 운을 뗐다.
“내가 이번에, 아티스트 정이랑 떨어져 있는 내내 지고만 들었거든. 그 한 곡만 주 내내 반복해서.”
“…그런데요?”
역시 음악 얘기에는 금세 귀가 쫑긋거렸다. 귀마개도 사올 걸,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손이 제멋대로 나갔다. 귓바퀴를 가만히 쓸어내리고 떨어졌다. 움찔한 정난우의 눈꺼풀이 더 무겁게 아래로 향했다.
“우리 아티스트 정은 분명 상처받은 집시 여인이 광장에서 맨발로 춤추는 걸 연주했다는데, 난 자꾸 다른 게 보인다고 했잖아.”
“네. 기억해요.”
“그게 뭐일 것 같아요?”
정난우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리 짐작해 보려 해도 걸리는 게 없었다. 솔직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에녹은 선글라스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빤히 정난우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 허상이 시야를 그토록 장악했던 건지는 아직까지 모호했다. 그런데 그게 안 맞는 콘택트렌즈라도 낀 것처럼 종일 눈에 따끔하게 밟혔다. 이어폰을 빼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꿈에서도 나온것 같았다.
에녹은 고해하듯 거친 목소리를 낮췄다.
“자꾸 내 머리엔 당신이 돌아다녔어. 정말, 괴로울 만큼 계속.”
“…제가요?”
정난우가 놀란 듯이 눈을 키웠다. 에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광장도 아닌 무대더라고. 춤 대신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사람들을 홀리는 거지.”
정난우가 침묵했다. 에녹의 서늘한 안광 위로 짙은 이채가 스쳤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정말로 사람들 모두 당신 발을 안 보더라고. 그 광장의 넋 빠진 사람들처럼 말이야.”
“…….”
“나만 봤어. 검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당신의 맨발을.”
정난우의 표정은 멍했다. 꼬리를 물고 가는 정적은 일방적으로 정난우 자신에게만 무거웠다. 또다시 잔뜩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 위를 덮은 머리카락이 함께 공명해 몸을 떨었다.
에녹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까만 결의 끝을 엄지와 검지로 가만히 비볐다. 잘 갈린 가위로 한 번 스치면 부질없을 방어벽, 이건 정난우가 세상을 향해 친 최소한의 바리케이드였다. 열여섯의 그는, 스왓컷으로 짧게 자른 스타일이 참 잘 어울렸었다.
“난 왜 그런 걸 봤을까. 그냥 내가 미친놈이라서?”
정난우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에녹은 차갑게 끓는 시선으로 그 검은 장벽을 투시했다.
비록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죽은 눈동자였지만, 객석을 빤히 보던 어린 정난우가 그 위로 덧그려졌다.
뭔가, 가슴 한쪽 어딘가가 꽉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해한 통증을 해갈하려는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난우의 뺨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보송보송하게 감겨드는 온기가 움찔 경직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매만지다 끌어당겨 제 어깨 위에 기대게 했다. 정난우가 귓가에서 숨을 멈췄다. 맞닿은 고동이 온 신경을 늘어뜨렸다. 에녹은 정난우의 허리도 당겨 안았다. 그리고 열기를 실어 속삭였다.
“광장에 가자.”
정난우는 그의 체향에 푹 파묻힌 채, 느리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가 다른 세계를 보여 줄게.”
어설픈 떨림은 그의 향기와 음성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눈알을 짓씹듯 닫아버린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미간으로 열기가 모였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게 분명한 그였다. 그런데도 모두 아는 것처럼 굴었다. 자꾸만 정곡을 찔려 곪은 상처에서 상한 피가 흘러나왔다.
무례하게 후벼 파는 듯해도 결국에는 이렇게 따뜻하게 감싸오는 거다. 그런 그가 두려우면서도 이 뜨끈한 체온에 파묻히니 머릿속 헝클어진 잡념들이 용광로에 던져진 쇠처럼 흔적 없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흩어진 떨림이 뼛속으로 스며들고,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외출에 끌려나온 한태영과 율리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맛있는 음식에 넘어가 기꺼이 들러리를 섰다. 노천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바로 광장으로 이동했다.
눈 쌓인 거리로 보송한 볕이 깔렸다. 반짝반짝 부서지는 빛 가루가 두 남자의 선글라스 위에서 튕겨져 나갔다. 에녹은 어깨동무한 팔을 옮겨 간혹 정난우의 선글라스를 톡톡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정난우는 한숨을 쉬었고, 에녹은 녹을 듯이 눈가를 허물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거리악사들이 악기 케이스를 열어둔 채 연주를 했다. 노래하는 밴드도, 기념품을 파는 이들도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에녹은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다 그나마 인적 드문 곳으로 일행을 끌고 갔다. 어리둥절해 하는 정난우를 세워 두고 한태영에게 바이올린을 뺏어 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 꼭 챙기라고 한 거였다.
“뭐 하시려는 겁니까?”
한태영이 멀뚱멀뚱 물었다. 에녹은 지퍼를 열며 간단히 대답했다.
“여기서 우리 아티스트 정 콘서트 하려고.”
“아, 네. ……네에?!”
워낙 여상한 태도라 그대로 깜빡 넘어갈 뻔했다. 한태영이 한 박자 늦게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우리 난우 씨 몸값이 얼만데 이런 추운데서 연주를 시켜요! 손 얼어서 다치면 책임 질 겁니까?!”
에녹은 코끝으로도 안 듣고 제 할 일만 했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정난우에게 바이올린을 건넸다. 파카를 벗어 바닥에 던지고, 그 위에 빈 케이스의 입을 쩍 벌려 놨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것처럼 머릿속도 명료했다. 모든 상황은 이미 성공적인 시뮬레이션을 마친 뒤였다. 누군가 정난우를 알아본다면 그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자신도 발각될 거다. 유튜브며 SNS며 동네방네 영상이 떠돌 것도 각오했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조금 흠집 나는 것쯤, 조금 망가지는 것쯤은.
정난우는 어정쩡하게 바이올린을 든 채 서 있었다. 에녹은 그에게서 제가 끼워 준 벙어리장갑과 머플러를 차곡차곡 벗겨 손에 들었다. 목 끝까지 채워 줬던 지퍼 상단도 조금 내리며 청했다.
“신나는 곡으로 부탁해요. 춤 출 수 있는 거.”
“……춤이요?”
“그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한 십 분 정도짜리로. 한 곡이어도 좋고 여러 곡 합쳐도 좋으니 그건 알아서 하고. 그 뒤에는 곧바로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하는 거야.”
“지고를, 여기서요?”
벗겨든 걸 파카에 얹어 놓으며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모든 레퍼토리는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튀어나왔다. 지고이네르바이젠 이건 카르멘 판타지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긴 무대도, 사방이 막힌 호텔 객실도 아니었다. 공연도 연습도 아닌 거였다. 자연광이 조명의 전부였다. 저를 모르는 사람들의 낯선 눈알들이 한가득 떠돌고 있었다.
정난우는 이런 돌발 상황에 제대로 똑똑하게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머뭇거리며 한태영의 가슴팍에 시선을 던졌다. 한태영은 당연히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반대를 외쳤다.
“안 돼, 안 돼요! 언 손으로 현 누르면 잘못하다가는 상처 난다고!”
항의는 당연히 에녹의 철옹성 같은 벽에 막혀 기각됐다.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강하게 감싸 쥐며 상체를 숙였다. 아귀힘과는 달리 진득하게 속삭였다.
“아까 내가 말했지. 다른 세계를 보여 주겠다고. 안 궁금해요?”
정난우는 무심결에 손에 든 바이올린을 품에 안았다. 딱딱한 나무 재질이 굳은살 박인 손가락에 휘감겼다.
그 어느 것보다 익숙한 촉감이었다. 그러나 북적거리는 소음, 반짝이는 길거리, 여기저기 들려오는 가지각색의 음악들, 모두가 낯선 것들뿐이었다.
야외공연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름축제 시즌에 들어가면 날벌레들과 사투를 벌이고, 모기에게 헌혈을 하며 연주를 하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대가 아닌 곳에서의 공연은 정말 처음이었다.
무대…….
정난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물결쳤다. 반쯤 고개를 들어 에녹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했다.
파카를 벗어 던진 그는 셔츠와 스웨터 차림이었다. 춥지도 않은지 소매를 팔뚝 중간까지 걷어 올렸다. 남자다운 근육의 곡선이 태양광 아래 매끈하게 꿈틀거렸다. 격려하듯이 양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거였다.
에녹은 왜, 냐고 물었었다. 음악해석이란 원래 생각하고 풀어내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정난우 자신은 그랬다. 그저 머릿속에 흘러들어 오는 음표의 조합들이 알아서 말을 했다. 그 악보가 자연히 피사체를 떠올리게 했다. 에녹이 내내 들었을 그 지고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레코딩했던 음반이었다.
아직 무대가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그 시절.
찬사하며 기립해 박수치던 관객들, 선율의 울음에 전염되어 젖은 브라보를 외치던 그들, 그러나 그 때도 지금도,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의 삶에 결실의 희열 같은 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무대는 그저 도피처에 불과했다. 어머니에게 상속받은 유일한 자유의 공간,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정난우는 주저하다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연주하면…사람들이…….”
“응. 사람들이?”
금속성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내깔렸다.
“홀…이랑은 달라요. 여긴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요.”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관광객들과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정난우는 제 선율이 어떤 감성을 전달하는지 모를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너무 잘 알기에 두려움은 암흑보다 깊었다.
망가질지도 몰라요. 이 화려한 낭만의 도시가, 기쁨과 애정이 가득한 이들의 마음이, 햇살처럼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혀끝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짙은 피 비린내에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그리고 그 때, 에녹이 모든 상념을 깨부수며 단정 지었다.
“당연히 다르지. 내가 당신 무곡에 맞춰서 춤을 출 거거든. 그 집시 여인 대신.”
정난우는 걱정도 잊고서 당황했다.
“그, 아니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괜찮아.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안 했을까봐? 그러니까 그 머릿속으로 날 그려봐요. 나한테 어울릴 만한 그런 춤곡 없어요?”
당혹에 흐려졌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정난우는 바이올린을 더 세게 품으며 멍하니 대꾸했다.
“화려한 거요. 정열적이고 뜨거운…….”
“좋지, 그런 거.”
흔쾌히 손가락을 튕기는 그의 모습에 일말의 희망이 불씨를 세웠다. 두려움은 그대로였지만 빠르게 튀어 오르는 심장 박동이 다른 방향을 짚었다. 그건 어쩌면 설렘일지도 몰랐다.
에녹, 그의 에너지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정적으로 끌어들이는 늪 같은 제 소리를, 이 남자의 에너지가 상쇄시켜 줄 수도 있을 거라는.
—믿음. 그 허망한 조각이 가슴 한 구석에서 날을 세웠다.
정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을 더 망설이다 바이올린을 턱과 어깨 사이에 맞물렸다. 차갑게 식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관절을 풀었다. 묘한 긴장에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한태영이 정말 하려는 거냐며 눈을 뒤집었지만 이번에는 정난우마저 무시했다. 긴장에 굳은 입술을 혀로 훔치고 조율을 확인했다. 끼잉끼잉 울리는 그 소리가 행인들 몇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때 에녹이 제 허리춤을 가리켜 보이며 한태영에게 넌지시 언질을 줬다.
“애들 좀 모아 와요. 요만한 꼬마 애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며 한태영이 재차 화를 내려 했을 때였다. 정난우가 돌연 활을 현 위에 그었다.
묵직하게 눌린 현의 소리가 빛처럼 허공을 갈랐다. 순간, 왁자지껄했던 소음의 일부가 생명을 잃고 사그라졌다. 근처에서 제 갈 길, 제 할 일에 바빴던 행인들이 동시에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헝가리 무곡. 정난우 식의 바이올린 솔로가 막 시작되었다.
에녹은 지폐 한 장을 꺼내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었다. 그 꼴을 목도한 한태영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인간이 진짜! 세기의 비르투……인 우리 난……씨한테! ……아, 젠장. 아무튼 누군지 잘 아는 사람이 십 불이 뭡니까, 십 불이! 당장 더 넣지 못해요?!”
차마 누가 알아들을까 봐 겁났다. 말소리를 최대한 죽여서 따져 물었다. 제 예술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그로서는, 지금 이 모든 게 용서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에녹은 점잖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악문 잇새로 나지막이 한탄했다.
“이러지 맙시다. 나도 일 년에 수천만 불 버는 사람이에요.”
“그게 뭐요! 여기서 재주부리는 건 우리 난…씨 인데 무슨 상관입니까?”
“적어도 미친놈처럼 춤추는 나보다는 낫겠지.”
한태영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도 어이없는 소리라 헛것을 들었나 의심했다. 에녹이 말했다.
“애들 선동이나 잘 해 봐요. 우리 아티스트 정 그 섬세한 그늘에 볕 좀 쬐어 주자고.”
에녹은 비장하게 머플러로 제 얼굴을 더 단단히 동여맸다. 선글라스도 꽉 눌러 썼다. 결심의 마음을 심호흡으로 다진 뒤 그 선율의 홍수 속에 제 한 몸 기꺼이 투신했다.
한태영은 정말로 실행된 에녹의 기행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두 눈 뜨고서도 못 믿을 광경이었다.
수상한 차림의 에녹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몸값 비싸다는 할리우드 스타가 저러고 있는 걸 보게 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웬 생 쇼야…….”
정난우의 독주에서는 비어 있는 악기들의 틈을 느낄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 파트 외의 음표들도 최대한 긁어모아 현을 누르고 있었다. 하모니를 버린 대신 화려하게 공백을 채우는 건 솔로 변주였다.
그 압도적인 재능은 범인들의 귓속으로도 선명히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호기심 어린 눈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녹은 그런 정난우의 곁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제법 세련된 움직임이었다. 탭댄스 같기도, 그냥 막춤 같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게 영화배우들이었다. 이런저런 잡기에 능한 게 신기할 것만도 없었다. 다만 그걸 이런 데 쓰냐 싶어 한태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한태영이 딱히 뭘 할 것도 없었다. 주위는 사람들로 금세 북적였다. 화려한 선율에 매료된 아이들이 스스로 제 엄마 손을 끌고 다가왔다. 어른들도 정난우의 연주와 에녹의 춤에 박수를 치며 즐겁게 웃었다.
에녹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엉덩이를 덩실덩실 흔들던 꼬마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왔다. 꼬마숙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 주자 폴짝폴짝 뛰었다. 다른 손으로 사내아이의 어깨를 독려했다.
애들이 에녹을 따라 정난우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한바탕 난장판을 빙자한 축제 분위기가 인근을 가득 메웠다. 특이한 볼거리에 인파는 더 견고해져 갔다.
10분의 춤곡 약속시간이 얼추 끝났을 때 정난우의 변주들이 정지했다. 환호하던 이들이 일제히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바지를 붙들고 다른 걸 연주해 달라고 졸라댔다.
정난우는 에녹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중지 끝으로 눈썹위의 땀을 슥 훔쳐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해요? 지고 가라니까 ”
정난우는 멈칫하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막연한 두려움이 초조함을 불러왔다. 자신의 손끝에서 뻗어나가는 그 죽음의 무도를,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감염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망가지면 어떡하지. 망가지면…….
망설이는 정난우를 보다 못해 에녹이 ‘연주해, 연주해. 지一고, 지一고’하고 외쳤다. 단전부터 끌어올린 훌륭한 발성이 모두에게 닿았다.
구경꾼들은 뭣도 모르고 전염됐다. 목소리를 높여 그의 채근에 힘을 실어 주었다. 정난우의 바지를 꼭 쥐고 눈을 빛내던 꼬마 하나가, 똘똘하게 영어로 ‘Sir’ 하며 말을 붙였다.
“선생님! 지一고! 지一고!”
정난우의 눈에 아득한 미소가 어렸다. 그 귀여운 부탁에 모든 두려움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다시 활을 들었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그 강렬한 도입부에 발을 디뎠다.
예민한 감성은 어린아이들의 사랑스러움에 흠뻑 물들었다. 그 작고 여린 발자국들이 머릿속을 하얗게 찍어갔다.
정난우의 지고 속, 광장을 피의 매혹으로 물들이던 집시 여인의 치맛자락은 바람처럼 형태 없이 나부꼈다.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 상실을 채우는 것은 무곡을 밟던 에녹의 구둣발 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작은 발소리들이었다.
와아, 하고 낮은 탄성이 메아리처럼 사람들 사이를 굽이쳤다. 꼬마들은 앙증맞은 입을 뻐끔거리며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 벌어진 제 입에 침이 흘러도 알아채지 못했다.
제 역할을 무사히 마친 에톡은 무릎만 굽혀 앉아 있었다. 두 팔을 무릎 위에 길게 늘어뜨렸다.
눈꽃 실은 시린 바람이 스웨터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땀이 열화 같은 체온을 함께 앗아갔다.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난우 그 스스로는 느끼지 못할 지도 몰랐다. 아이들이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음울하게 늘어지던 선율은 훨씬 산뜻해졌다. 심금을 울리던 비브라토의 파장도 농익은 정열의 향기를 짙게 흘렸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정난우의 성품이라면.
어릴 때, 맹인 꼬마 정난우는 몇 번이고 벽을 더듬어 나갔다고 했었다. 바보라서 몰랐던 게 아니었을 거다. 또 다칠 걸 알면서도, 또 주저앉아 울 걸 알면서도, 반복해서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애들 땐 뭘 잘 모르니까요.」
단 한 번도 세상 속에 편견 없이 섞일 수가 없었음에도, 정난우는 제게 상처 입혔던 친구들을 미소로 용서했다.
그 심지 곧은 정난우가 마지막에 부서지던 순간, 제가 그 곁을 지켜줬더라면 어땠을까.
에녹은 덧없는 상상을 길게 씹지 않았다. 차갑게 뭉친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조금 높게 솟았던 호흡은 차분히 가라앉았지만, 고조된 맥동은 그 상태로 정체되어 있었다. 억지로 신긴 정난우의 새 운동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은 그저 한낮 단잠 속의 꿈처럼 잊힐지도 몰랐다. 무대 위로 돌아간 정난우는 또 다시 피투성이 발로 헤멜 거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해서 그럴 거였다.
그러나 어차피 한동안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작게 반짝이는 조각들을 저 깊은 어둠 안에 심어주면 될 거다. 에녹 밀리건은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남자’라고 뉴욕 한복판에서 피켓 들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남자였다.
바이올린 케이스에는 헌 지폐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이 가난한 연주의 주인공은 집시 정난우였다. 허름하고 낡은 옷 대신 유아 취향의 새 옷을 걸쳤다.
모든 게 제가 그린 이상적 그림에 딱 들어맞았다. 정난우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하얗게 어둠이 탈색된 음표들을 허공에 흩뿌렸다. 봄꽃처럼 살랑거리는 그 선율에 모두가 즐거운 얼굴을 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절규의 불꽃이 튀던 정난우의 지고를 기억했다. 정난우가 창조해 낸 집시 여인의 화려한 춤에 홀려 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피투성이 발, 이상한 얼굴로 웃던 정난우.
에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핏빛 환상을 가루 냈다. 망설임 없이 겨울바람에 흩날려 보냈다. 적어도 정난우가 다음에 연주할 지고는 이 순간을 기억할 거다. 집시 여인의 장례는 허밍으로 대신했다.
에녹의 목 안을 울리는 장송곡이 정난우의 무곡 위를 함께 비행했다.
하얀 어둠이 광명처럼 비쳤다. 솜털 같은 작은 눈송이들이 바람에 몸을 실었다. 오후 잠시 제 색을 찾는가 싶었던 프라하의 밤거리는 다시 뽀얗게 뒤덮이는 중이었다. 눈밭 위로는 수은등이 로맨틱한 치맛자락을 늘어뜨렸다.
흩날리는 눈이 더플코트에 간간이 들러붙고 있었다. 거리 공연 후 호텔에서 갈아입고 나온 거였다. 코트 안은 크림색 면바지와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앙고라 니트가 숨어 있었다. 선글라스는 야구모자로 대체했다. 이것도 모두 에녹의 코디였다.
처음에는 제 옷을 입겠다고도 해 봤다. 그러나 이번 역시 씨알도 안 먹혔다. 평소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가면 분명 또 누군가 알아볼 거라고 협박까지 해댔다. 그것 때문에 연주 직후 허둥지둥 판을 접고 도망 쳐야 했으니 반항할 명목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사건이었다. 설마, 에녹이 아닌 자신을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껏 공연 당일 홀 근처가 아니면 팬들도 저를 알아본 적이 없었다.
“자, 받아요.”
에녹 특유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정난우의 상념을 깼다. 턱 아래로 짙은 액체를 담은 종이컵이 있었다. 수면에서는 희미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올랐다. 반사적으로 두 손에 받아들며 고개를 들었다.
“난 개인적으로 프라하의 눈 오는 겨울을 좋아해. 이렇게 거리를 바라보면서 핫 와인 한 잔 할 때 정말 끝내주거든. 마셔본 적 있어요?”
그의 말대로 따뜻하게 데워진 온기가 장갑 안에 감겨 왔다. 다른 건 다 바뀌었는데 이 두툼한 벙어리장갑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다. 에녹 혼자도 모자라 매니저 두 명까지 손 보호하라고 난리를 쳐댔었다. 저항의 의지가 생길 리가 없었다.
정난우는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했던 반응에 에녹이 턱짓하며 권했다.
“마셔 봐요. 차가운 와인이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에녹 역시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였다. 머플러를 입술 아래로 끌어 내린 그가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서 굴렸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깊은 풍미 같은 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술의 맛은 함께 있는 사람과 주변의 풍경이 크게 좌우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에녹은 이 싸구려 와인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에 들었다.
정난우도 그를 따라 잔을 기울였다. 따뜻하고 달달한 맛이 미각을 휘어잡았다. 차게 설얼은 뺨이 차츰 녹아내렸다.
“와인 기다리면서 검색 좀 해 봤는데, 영상 하나가 뜨긴 떴더라.”
에녹이 대수롭지 않게 운을 뗐다. 정난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벌써요?”
“응. 근데 중간부터 찍었는지 나는 없었어. 아직 당신 극성팬들 귀엔 안 들어갔는지 SNS도 잠잠해. 그러니까 지레 걱정 말라고. 어차피 퍼질거 다 염두에 두고서 일 벌인 거니까. 알았어요?”
광장에서 호텔로 단숨에 도망치던 그 때, 사실 정난우는 걱정에 초조해했다. 에녹은 수많은 이들의 주목 속에 사는 스타였다. 길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나다녀도 괜찮은 저와는 엄연히 다른 처지였다. 요즘 제 또래 청년들은 신기한 장면만 보면 휴대폰을 들이대곤 했다. 낱낱이 찍힌 것들은 전파처럼 순식간에 퍼졌다. 흑시라도 그에게 뭔가 안 좋은 영향이라도 가는 건 아닐지, 뒤늦게 현실 밖으로 내동맹이쳐졌다.
하지만 그는, 그 때도 정면에 앉은 채 지금처럼 말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웠던 지폐를 머리 위에 마구 뿌려 대며 웃기만 했다. ‘이것 봐, 아티스트 정. 우리가 함께 번 돈이야.’하며.
“네, 그럴게요.”
“대답은 잘 하지. 얼굴은 다른 소리를 하네.”
에녹의 날카로운 눈빛이 옆얼굴에 직격했다. 정난우는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컵 안으로 쏟아져 들어갈 기세였다. 뻔히 보고 있는데 도망치는 걸 가만 놔 둘 에녹이 아니었다.
에녹은 가만히 턱을 당기며 눈을 치떴다. 정난우의 말랑말랑한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꼬집어 당겼다.
“읏……! 아, 아픈데요……!”
배려 없이 잡아당기는데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저절로 까치발을 서며 버둥거렸다. 진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팠다.
“아프라고 이러는 거지 그럼, 간지러우라고 이럴까?”
달콤한 향기를 품은 사나운 음성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정난우는 포획당한 초식동물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굳었다. 꽉 감은 속눈썹이 그의 목소리 파장에 몇 번이고 흔들렸다.
“내가 폼 잡는 거 좋아하긴 해도 그런 허세는 안 키웠어. 내가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 거라고. 내가 오늘 일 중에 후회하는 게 있다면, 혹시나 하고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거 딱 하나야.”
“무, 무슨 기대요?”
“처음부터 깨끗이 포기하고 얼굴이나 가리지 말 걸, 그럼 더 멋진 그림이 나왔을 텐데, 뭐 이런 병신 같은 생각 말고는 정말 없다고. 알아들었어?”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정말 이번엔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정난우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미심쩍게 한참을 노려보다 힘을 풀었다. 후다닥 떨어져 나간 정난우는 열심히 귀를 문질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뜯겨 나가는 줄 알았다.
“어디 봐요. 많이 아파?”
에녹은 정난우의 팔을 걷어내며 상체를 조금 수그렸다. 한쪽 귀가 정말 새빨겠다. 눈썹이 저절로 곡선 춤을 췄다. 하여간 이놈의 성질머리, 욱하면 대책이 없었다.
“그러게 왜 사람 눈치 보게 만들어?”
“……네?”
지금 누가 누구 눈치를 본다는 건지…….
정난우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에녹은 몸을 바로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 그런 거 잘 못해. 누구 눈치 보고, 억지로 비위 맞춰주고, 진짜 싫어한다고.”
한참 뒤에야 정난우는 미안해요, 하고 반응했다.
“미안하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그냥 내가 하는 말은 아 그렇구나 하고 그 복잡한 머릿속에 넣어두면 돼. 꼬지도 말고 뒤틀지도 말고 액면 그대로. 알겠어요?”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힐끗 시선을 빗겨내려 그 모양을 확인했다. 그제야 마뜩찮게 균형이 무너져 있던 얼굴이 제 모양을 되찾았다.
무심코 잔을 들어 마셨다가 혀를 찼다. 겨울 입김이 숱하게 뿌려진 와인은 벌써 미지근한 정도 아래를 맴돌았다. 남아있던 걸 단숨에 식도 아래로 들이부었다.
한 잔 더 사러 갈까. 아니면 자리를 옮길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티스트 정. 데뷔 이래 줄곧 그랬어요?”
“……뭘요?”
“공연 끝나면 바로 이동. 호텔에 처박혀서 연습하거나 공부하거나 운동 하거나. 그게 끝이냐고.”
“네, 보통은요.”
정난우의 담담한 수긍이 혀끝에 남은 와인을 쓰게 변질시켰다. 대화가 끊겼다. 에녹은 턱을 조금 젖혀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당당히 뻗어나간 시야 저 멀리 대형트리가 번쩍거렸다. 삽화처럼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껏 처박힌 이 구석엔 한 줌의 그늘이 떠돌았다. 행인들이 발산해 내는 소음도 다가오길 주저했다.
빗줄기보다 가는 눈발이 흐려 놓는 전경을 한동안 주시했다. 저 너머의 풍경이 이질적인 이유라면 고민해 볼 가치도 없었다. 옆에서 제 눈치를 열심히 살피고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에녹은 돌연 움직였다. 정난우의 정면으로 돌아가 마주섰다. 제 손의 빈 컵을 정난우가 들고 있던 컵 아래 끼우고는 통째로 뺏어들었다. 아직 반절이나 남아 있었다.
겹쳐진 종이컵을 잇새에 씹어 문 채 직선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정난우의 그늘 드리운 눈이 발치부터 더듬어 가슴팍에 고였다.
에녹은 천천히 두 손을 내밀었다. 컵을 물어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걸음마.”
“……네?”
정난우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맹하게 반응했다. 느리게 눈만 끔뻑거렸다. 에녹은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내민 손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손, 이리.”
정난우는 장갑 낀 제 손과 에녹의 손을 번갈아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내뱉은 불분명한 단어를 풀이할 방법이 없었다.
걸음마, 라고 한 건가?
생각은 정리되기도 전에 강탈당했다. 두 손도 마찬가지로 한 데 모여 그에게 쥐어졌다. 살짝 끌어당긴 힘에 다리가 저절로 움적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 눈밭이 제 운동화에 짓이겨졌다. 뿌득 울리는 소리는 마치 제 영역을 침범 당한 짐승이 이를 가는 것처럼 들렸다.
서너 발자국 끌려가고 나서야 그의 짧은 언어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그 어이없는 단어가 맞았던 거다.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거였다.
그는 정말 어린애 걸음마를 시키듯이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발치를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매 역시 극도로 진지할 게 분명했다.
당혹감에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눈송이가 닿자마자 녹아내릴 열기였다. “저, 저기요, 에녹?”
호명은 닿지도 못하고 부서졌다. 그는 제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유를 구속당한 혀로 낮게 카운트만 세고 있었다.
다섯, 여섯. 일곱…….
열까지 세고 나서야 멈췄다. 정난우는 풀려 난 손을 어정정하게 내렸다. 광장의 무도곡을 기억하는 손마디가 장갑 안에서 움찔거렸다.
하늘이 게워내는 토사물이 그와 자신의 모자 위를 덧입혔다. 그의 손이 다가와 하얗게 센 코트 위를 털었다. 물고 있던 종이컵은 제자리로 옮겨졌다. 그가 느리고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쉽잖아.”
정난우의 고막이 그의 낮은 목소리를 빨아들였다. 나머지 불필요한 것들은 알아서 튕겨져 나갔다. 소리의 홍수 속에 굳건히 떠 있는 단 하나의 배였다. 에녹의 돛은 태풍에도 끄떡없이 견고했다.
“별 거 아냐. 뭐든 처음이 어렵지.”
“…….”
외곽시야의 끝은 아슬아슬한 절벽이었다. 조금만 헛디디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경계선이었다. 늘 그랬다. 넘어가면 누군가가 반드시 부서졌다.
그 절망의 시작지점에서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 곡선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와인처럼 달콤한 향내를 풍기며 폐허의 분기점을 무색하게 했다.
“다음에는 한 스무 걸음 걸어 보자고.”
정난우는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였다. 눈발 섞인 바람이 뺨을 핥아 내렸다. 그 냉랭함은 모든 생각을 마모시켰다.
그가 옆으로 다가와 한 팔로 어깨를 감쌌다. 그 따뜻함이 순식간에 말초까지 내달렸다. 그가 제안했다.
“쉽게 그칠 눈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자리부터 옮겨요. 우리 아티스트 정 감기라도 걸리면 한이 날 갈아 마시려고 들까 무서워.”
정난우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 버릇처럼 손을 뻗었다가 멈칫 했다. 패딩 점퍼가 꼭꼭 잠겨 있었다.
목적지를 잃고 헤매는 손을 에녹이 기민하게 감지했다.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목을 잡아 그의 호주머니 안에 구겨 넣어 주었다.
멈칫 고개를 들었다. 시선 꽂힌 그의 목이 낮게 울렸다.
“지퍼 열어주고 싶은데 옷 축축한 건 좀 질색이라. 오늘은 이걸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요?
머뭇거리며 삼킨 말은 그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그는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며 머플러를 제 콧등까지 끌어올렸다.
“저녁도 일찍 먹었으니 따뜻한 안주에 맥주나 한 잔 더 합시다. 나 여기 줄줄 꿰거든. 현지인들만 알 법한 곳들 다 내 손 안에 있어요. 작고 허름하지만 훌륭한 가게들 말이야.”
“자주…… 오시나 봐요.”
“동유럽의 꽃이니까. 음악 벌레 아티스트 정에게는 오스트리아가 더 좋을 테지만.”
서늘한 공기를 가르는 얼굴 위로 물기가 엉겨붙어 왔다. 마치 에녹이라는 남자처럼 차갑게 다가와 뜨겁게 맺히고 있었다. 젖은 얼굴을 장갑으로 끊임없이 훔쳐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스쳐지나갔다. 낯선 향기들이 코끝에 무수한 찰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긴장이나 두려움은 이 순간 한없이 무력했다. 그 모든 게 빙점 높은 얼음 조각에 불과한 거였을지도 몰랐다. 날카로운 단면을 드러내기도 전에 에녹이 그걸 녹여버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촘촘하게 메운 그의 기행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뜬금없이 눈 꼬리가 짧게 경련했다. 명치 안쪽이 뻐근하게 당겨 왔다.
“저도 이 도시를 좋아해요.”
정난우는 충동적으로 입을 뗐다. 에녹이 음? 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사선으로 뺨에 꽂히는 시선이 더웠다. 움츠러들지 않는 제 어깨를 신기해하며 정난우가 말을 이었다. 매끄러운 변설 따위 바라본 적도 없는 제가, 이 순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거 알아요? 모차르트도 생전에 프라하를 굉장히 사랑했어요. 당시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의 평가가 크게 좋지만은 않았던 반면, 프라하의 청중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줬거든요. 온 거리에 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울려 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대요. 모차르트는 그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는 자신의 교향곡 삼십팔 번을 프라하에 헌정하기도 했어요.”
“아아. 나 에스테이트 극장은 알아. 거기 모차르트가 자기 오페라 초연한 데라도 들었어. 뭐였더라. 돈…돈…….”
“돈 조반니요.”
“그래, 돈 조반니.”
에녹은 정난우가 묻지도 않은 말을 길게 하는 게 신기했다. 작게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눈송이만큼이나 흐렸다. 그래서 그쪽으로 고개를 더 기울였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었다. 있는 지식 없는 지식 열심히 갖다 쥐어짜며 맞장구를 쳤다.
“모차르트가 실제로 연주했던 오르간도 있다며?”
“그건 성 미쿨라셰 성당에 있어요. 파이프오르간인데 매일 저녁 연주회도 열려요. 제가 갔을 때는 오보에랑 이중주를 했었는데, 사실 오르간 소리가 좀 많이 묻혀서 아쉬웠어요. 오르간이 굉장히 높은 곳에 있었거든요.”
바람이 불었다. 말문 트인 정난우의 숨결이 휘청거리듯 넘어 왔다. 오른쪽 뺨부터 목까지 눅눅하게 흘러내렸다 그 기묘한 감각을 자각하는 순간, 한동안 잦아들었던 울렁거림이 다시금 뇌수를 뒤흔들었다.
에녹은 정난우의 입술에 끈끈하게 눌어붙은 제 시선을 억지로 뜯어냈다. 전방을 노려보자 그제야 속이 잦아들었다.
울퉁불퉁한 지면을 구둣발로 꽉꽉 밟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쩐지 중심을 잃을 것 같았다. 괴이쩍은 생각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내일 나랑 한 번 더 가요. 내가 더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정난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접근이 안 되도록 되어 있어서…….”
에녹은 어깨동무한 팔을 접더니 정난우의 모자 위를 꾹 눌렀다.
“뭐든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마.”
그가 그렇게 나지막이 질책했다. 그리고 곧바로 엉뚱한 제안을 했다.
“내가 목마를 태워 줄게.”
“……뭐, 뭘요?”
“목마 몰라? 내 어깨를 타고 올라가 앉으라고. 몇 뼘이나 더 가까워지면 그만큼 더 잘 들릴 거잖아.”
정난우는 에녹이 말하는 논리를 완벽히 흡수해 낼 소화기관이 없었다. 어찌 들으면 맞는 말인데, 또 어찌 들으면 정말 얼토당토않기도 했다. 밉지 않은 궤변이었다.
불현듯 맹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여주는 세상은 너무 꿈결 같이 찬란했고, 그가 말하는 세상은 신기루처럼 아득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런 세상을 갈망해 본 적이 없었다. 달 하나 별 하나 뜨지 않는 암흑, 잡초조차 자라날 수 없는 데마른 그늘의 땅, 그 평온한 공간이 제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에녹은 아니었다. 그는 자주 제멋대로 굴긴 해도 허언을 내뱉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 쭉 그런 반짝거리는 세계에서 살아온 거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햇볕 냄새를 한가득 묻힌 채 나타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 어둠 속에 발자국을 찍어내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와 광장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찬란한 어둠이 여지없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리고 방금 전도…….
깨달음은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그가 말한 걸음마가 정확히 뭘 뜻했던 건지, 정난우는 뒤늦게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에녹은, 그가 사는 그 빛의 세계로 자신을 데려가려는 거였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운동화 코가 걸렸다. 풀썩 무릎이 꺾이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단단한 힘이 가슴을 받쳤다. 그래서 금방 다시 곧게 설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걸음마도 아직 못 뗐으면서.”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감싸인 어깨는 더 깊이 끌어 안겨졌다. 이동속도는 조금 전보다 더 느려졌다.
그의 시선이 간혹 바닥을 살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속한 낯선 세상으로 이끌어주며 발밑을 살펴주고 있는 거였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난우는 분명 맥주를 ‘섞어’ 마시면 취한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맥주인 필스너 우르켈을 마음 놓고 먹였다. 그리고 딱 세 잔째 나란히 비웠을 때, 에녹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후회하고 말았다.
“와인이 술이야? 그것도 고작 반 컵이잖아!”
고작 와인 반 컵도 그 유아퇴행의 촉매제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거다. 에녹은 취한 정난우를 들쳐 업고 가게를 나서야 했다. 얌전히 등에 업힌 정난우는 귓가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내내 생각을 해 봤는데요. 내 광장의 집시 여인은 우리 엄마일 지도 몰라요. 지금 엄마 말고, 이미 오래 전에 날아가 버린 제 친어머니요.〕
심지어 말이 안 통하는 애였다. 에녹은 퉁명스레 쏴 붙였다.
“시끄러워, 이 주정뱅이야.”
〔……네. 미안해요.〕
윽, 하며 에녹은 쓴물 삼킨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풀이 팍 죽은 목소리였다. 먼 나라 낯선 언어의 뜻이 고스란히 뇌에 직격했다.
“아냐. 꼬마 정난우, 너 안 시끄럽고 주정뱅이도 아니야. 그러니까 계속해.”
억지로 달래는 와중에도 발은 계속 재게 놀렸다. 눈발은 한껏 쪼그라들어 이제는 가루처럼 날렸다. 작은 결정들이 수은등 조명의 옷을 입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펄 가루 뿌린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깔깔한 아쉬움이 콧등을 베고 지나갔다. 정난우도 함께 나란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다.
〔에녹…… 그거 어떻게 봤어요?〕
힘 풀린 목소리가 뺨을 스치며 하얗게 부서졌다. 에녹은 무심결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비틀어 내려다보았다. 의아했다. 방금 확실히 제 이름을 불렀다.
예닐곱 살 정도로 회귀했을 정난우가 아니었나.
정난우 주사의 핵심을 짚지 못했던 한태영이 잘못 설파한 정보가 에녹을 혼란케 하고 있었다. 그러니 명쾌한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에녹은 고개만 한 번 갸우뚱하며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내가 보였다면서요. 내내 내가 보였다고…….〕
뭐라는 건지…….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너무 지치면, 너무 힘들면. 꼭 피아노 의자 앉아서 건반을 눌렀어요. 그럴 때만큼은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지 않았거든요. 피아노 의자요. 엄마가 유일하게 맘 편히 숨 쉴 수 있었던 곳은 넓은 집에서 그 좁디좁은 곳 하나뿐이던 거예요. 너무 어려서 내가 그걸 몰랐어요. 너무 나중에 깨달았어요. 난 왜 그렇게 어렸던 걸까요? 조금만 더 컸으면 그런 말, 절대 안 했을 텐데. 그냥 평소처럼 그 예쁜 얼굴 꼭 안아 줬을 건데…….〕
대답해 주는 대신 택시를 잡았다. 짧게 호텔 이름을 얘기하자 기사는 액셀을 밟았다. 흐물흐물대는 정난우가 무너지듯 어깨에 고개를 기대 왔다.
에녹은 지퍼 상단을 내리며 살짝 몸을 틀었다. 가만히 그 머리를 받쳐 들고 점퍼 안의 제 빗장뼈 위를 베도록 해 줬다.
“그래. 그랬는데?”
〔그냥…… 당신 덕분에, 나 정말 모처럼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응. 알았어.”
에녹은 그냥 영혼 없이 호응해 줄 생각이었다.
〔너무 기뻐서, 너무 고마워서, 아마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 말 안 해도 다 알아.”
호텔에 도착해 점퍼와 모자만 벗겨 침대에 눕히고 나서도 정난우는 계속 중얼거렸다. 이걸 어쩌나 난감하게 내려다보다 결국 그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빈 시트만 움켜쥐는 손 안에 제 손가락 하나를 물려주었다. 정난우는 매달리듯이 꽉 손을 오므렸다.
〔향기 좋아요. 예전에 열여덟 살 때였나…… 형이랑 면세점에 갔었거든요. 형이 아는 사람들 선물 산다고 향수 코너를 돌더라고요. 독한 향기가 워낙 진동을 해서 거의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요, 정말 신기하게 한 곳에서 발이 딱 멈췄어요.〕
정난우는 손에 힘을 줘 끌어당겼다. 에녹은 턱을 갸우뚱 기울이면서도 끌려가 줬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팔을 뻗어서 베개 밑을 짚으며 어정찡하게 기운 상체를 지탱했다.
편안히 눈 감은 정난우의 얼굴이 제 그림자로 뒤덮였다. 무심결에 시선을 굴렸다. 혈색 도는 뺨 위를 지나 살짝 벌어진 채 더운 숨을 흘리는 입술에 고정되었다.
정난우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근방의 공기가 그의 후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미약한 소용돌이에 저도 끌려들어갈 것 같았다.
에녹은 기묘한 위기감에 상체를 다시 세웠다.
〔맞아요. 이 향기였어요…….〕
정난우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가늘게 떨리다 멈추는 걸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르지 못하던 숨이 서서히 정돈되어 갔다. 힘 풀린 관절들은 시트 위에 푹 파묻혔다.
정직하게 움직이는 초침이 몇 번이고 정점을 찍었다. 정난우가 잠들기 직전까지 풀어 놓은 이야기보따리는 뭐였을까, 덧없는 아쉬움만 곱씹었다. 다음부터는 녹음이라도 해 둬야겠다고 결심을 다졌다.
“잘 자, 꼬마 정난우.”
에녹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그걸 잠결에도 들은 듯이. 정난우는 손가락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은 것도 같았다.
*
안 좋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에녹은 찌푸린 이맛살 위에 팔뚝을 걸쳐 두었다. 주위는 사물의 윤곽이 구분 안 될 암흑이었다. 팔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기계가 걸렸다. 그대로 집어 화면을 켰다.
12월 23일. 오전 3시 40분.
다시 눈을 감고 20분이라도 더 잠을 청 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헛수고였다. 이 묘령의 찝찝함이 달콤한 수면을 방해할 게 분명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곁에 앉았다. 가만히 숨만 쉬길 반복했다. 불순물처럼 머릿속을 떠도는 잠기운마저 아예 날려버리고 나서 몸음 세웠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물 온도는 약간 서늘하게 맞췄다. 알몸을 그 아래 내맡겼다. 뿌옇게 가라앉아 있던 머리가 그제야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머리로 생각에 잠겼다.
이 기묘한 불면증은 루스가 이삼 일에 한 번 씩 메일을 보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느린 대신 꼼꼼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간 작업 결과물들이 메일로 첨부되어 오는 거였다.
루스는 트리트먼트와 씬 카드(트리트먼트를 씬 단위로 세분화 하는 것. 씬의 일련번호. 실외와 실내 나눔, 낮과 밤을 설정함.)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그 이전부터 스토리보드 북을 채우기 시작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자기 말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강렬한 그림들을 잊기 전에 옮기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필름에 옮겨질 장면에서 루스는 굉장히 까다롭게 굴었다. 스태프들이 치를 떨며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가 분명 있었다.
그 세 작업을 내키는 대로 무식하게 해대고 있으니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였다. 지금 루스의 작업실은 폭탄 맞은 것처럼 온갖 문서들과 스케치들로 전쟁통을 방불케 할 게 분명했다. 이 시기가 딱 루스의 예민함이 극도로 치솟을 때였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칼 같이 순서를 지키며 진행이 빨랐다.
시놉시스는 이미 구체화 된 지 오래였고, 캐릭터 전기도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그건 구두 계약을 서로 간에 확실히 했을 즈음 이미 받아숙지 해뒀다. 요즘 루스가 보내주는 건 씬 카드와 장면 스케치였다.
그게 불면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잠들기 전 잠깐 뒤척이는 정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첨부파일울 확인할 때마다 그 정도는 중폭되어 갔다. 이 과민하게 날 선 기분이 점차 심화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문서 속 활자는 차가웠다. 냉랭한 시선으로 정난우의 알맹이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인터뷰 자료와 루스의 개인적 관찰로 품어낸 것들이었다. 그건 정말 사실에 가까울 거였다.
주인공은 숱한 절망을 맨발로 다 걸어왔다. 비록 수시로 초라하게 어둠으로 달아나기는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정직하고 깨끗하게 대했다. 저를 상처 입힌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음악 하나에 매달리는 인물이었다. 곪아 터진 슬픔은 무대 위에서만 장엄하게 폭발했다.
그 배역을 소화해야 할 자신 역시 그래야 했다. 기를 쓰고 이입해보려고 했지만 턱도 없는 시도였다. 그럴 때마다 속만 뒤집어졌다. 들끓는 울분이 피 대신 온 몸을 흐른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끝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뒷일을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억눌러온 것들이 모조리 사납게 터져나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왜 네가 사람들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정작 네게 무릎 꿇고 빌어야 할 놈들은 뻔뻔하게 잘만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정난우는, 아니, 주인공은 호수같이 잔잔한 수면 아래 그 탁하게 엉긴 불순물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다. 차가운 세상을 피해 정해진 동선만을 따라갔다. 단절된 그 안에서 불완전한 평온을 느끼는 거다.
주인공의 음악은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했다. 그 음울하고 축축한 독약은 청중들로 하여금 제가 받은 충격을 전을로 착각하게끔 했다. 늘 객석을 뜨겁게 채우는 찬사와 갈채는 관음증과도 닮아 있었다.
『정난우의 연주는 너무 자극적이다.』
예전에 봤던 존 레이만의 가시 돋친 비평이 떠올랐다.
그 비평 하나로 존 레이만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SNS가 그로기 될 때까지 테러 당했지만, 에녹 자신도 그에 한 기여하고 싶었지만, 지금에서야 그에 조금은 동의할 수 있었다.
그가 아주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배역을 결정한 이후 정난우를 집요하게 파헤쳐 얻은 결론이었다. 그 썩은 결실의 열매가, 에녹을 조금 아프게 했다.
거품 칠 한 몸을 씻어내고 나왔다. 브리프와 바지만 입은 채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 휴대폰 액정에 불을 밝혔다. 벌써 4시를 조금 넘긴 상태였다. 정난우는 지금쯤 침대 위에서 졸린 눈으로 약음기 낀 바이올린을 들고 있을 거다. 그대로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놔두려다가 멈칫했다.
마뜩찮은 얼굴로 한참 매만지다 결국 자리를 깔고 앉았다. 브라우저를 열어 구글에 ‘난우 에녹 프라하 광장’을 검색했다.
주르륵 뜨는 결과물들 숫자에 그만 어이없게 웃고 말았다. 자는 사이 또 엄청나게 알을 까버렸다. 바퀴벌레보다 더 심한 번식력이었다.
정난우 공식 SNS에 이 소식이 뜬 이후부터 내내 이랬다. 짧은 토막으로 돌아다니던 영상은 점차 긴 걸로 교체되었다.
정난우 극성팬들이 풀 영상이라고 마지막으로 못 박은 건 헝가리 무곡의 중반부터였다. 당연히 춤추는 자신도 선명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체는 하루도 안 돼서 탄로 났다.
『에녹 미쳤나봐 왜 저래. ㅋㅋㅋㅋㅋㅋ……(후략)』
정난우의 언어로 쓰였던 하나의 코멘트를 얼마나 오래 노려봤는지 모른다. 한태영에게 해석해 달라고 할까 말까 무던히 망설였다. 끝도 없이 두 줄 넘게 이어지던 ‘ㅋ’의 정체가 못내 불길했다. 알면 앓아누울지도 모른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그러나 결국 호기심에 졌다.
휴대폰을 들이밀며 이거 뭡니까, 하자마자 한태영이 배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한참을 눈물 빼며 그 짓을 하더니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방금 제가 한 그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는 법이었다. 그래도 앓아눕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틈이 없었다. 정난우가 우울하게 바닥만 보고 있어서 달래기 바빴다.
자꾸 그러면 정말 화낼 거라고 윽박지르고 나서야 정난우는 멈칫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가만히 셔츠 끝자락을 손가락에 감아 왔다. 그제야 모두가 평화로워졌다.
“하아…… 엉망이라니까.”
에녹은 나른하게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누구 맘 다칠까봐 전전긍긍했다고, 이러고 있는 꼴을 보니 좀 어이없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종국에 입술을 장식한 건 흐릿한 미소였다.
미련 없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뭔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정난우가 술 취해 꼭 붙들고 잤던 손가락이었다. 엄지를 오므려 가만히 그 위를 문질렀다. 지문의 굴곡마저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향기였어요.」
자신의 기억력은 가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술 취한 정난우가 흩뿌린 많은 조각들을 잃어버렸다. 낯선 언어에는 대책이 없었던 거다.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정말 세심하게 뇌리에 박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한태영에게 물었다. 그가 답했다.
「이 향기여서요? 이 향기였어요? 뭐 그런 것 같은데요?」
이 향기였어요…….
정난우의 그 속삭이는 듯한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에녹은 다리 하나를 끌어올려 무릎을 굽혔다. 그 위에 늘어뜨리듯 팔을 걸쳤다. 가만히 입술을 매만지며 애먼 허공만 노려보았다.
과민한 반응일 거다. 굳이 저를 끌어당겨 한껏 숨을 마시던 그 행동이 과거를 더듬은 거라 결론 내리기에는 너무 비약적이었다. 홀로 간직한 일방적 기억이 농락 질 해대는 게 분명했다.
정난우는 분명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후도 몇 번이나 마주치고, 내내 붙어 다니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그런 걸로…….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는 이유도 분명 존재했다. 프라하에서의 그 밤 끝을 장식했던 정난우와 저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건 가만히 떠올려 보면, 9년 전과 매우 흡사한 구도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거다.
그날은 갓난아기 주먹만 한 눈이 내렸었다. 그 애는 땀 젖은 옷을 입었었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잔뜩 웅크린 채 이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어 댔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추워 보였다. 후끈한 열기로 가득 했던 점퍼를 벗어 덮어줬다.
그 애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망설이다 내민 손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그 머리맡에 걸터앉아 곁을 지켜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 애는 몇 번이고 더운 숨을 들이마셨고, 자신은 그 애가 숨을 잘 쉬나 초조하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멍청하게. 한 번 안아주기라도 할 것을.
항상 이랬다. 떠올릴수록 후회는 늘어만 갔다. 그래서 반추하는 순간마다 더 혼탁하게 얼룩지고 말았다.
에녹은 입술을 씹으며 사납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통이 쑤셔대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꽉 짓눌렀다. 그 때였다.
드드득.
테이블에서 울리는 진동소리가 천둥처럼 등허리를 직격했다. 에녹은 무심결에 꽉 수축한 상체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손을 뻗어 액정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
《밀리건 씨. 룸서비스 시킬 건데 일어나셨죠?》
“아, 그래요. 곧 건너갑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옷을 마저 입고 짐을 챙겨서 정난우의 객실로 넘어갔다. 뒤얽혔던 상념 모두 물밑으로 처박아 두었다. 문 열어주는 한태영을 빠르게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정난우는 막 욕실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매끄럽게 발린 로션이 얼굴 위에서 반들거렸다. 그 희미한 빛 반사가 에녹의 가슴 한 구석에 미려한 이슬을 남겼다.
에녹의 발을 발견한 정난우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가슴 언저리를 시선으로 더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혈색 흐린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녹.”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끼는 반쪽짜리 영웅의 얼굴에도 별 수 없이 웃음이 서렸다.
“응. 좋은 아침.”
룸서비스가 오기까지의 시간은 늘 정난우의 연습을 지켜보는 걸로 채워졌다. 아침에 충분히 손가락을 풀어두지 않으면 하루 종일 불안하다고 했다. 술 취해 끓아떨어져도 저 작업만큼은 항상 칼 같이 지켜졌다.
평소와 같이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가 온 거였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한태영과 율리안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아, 내가 나갈게요.”
에녹은 태연하게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한태영은 그런 에녹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호텔 직원을 마주 봐야 하는데 얼굴도 안 가렸다. 이제 이 정도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SNS를 타고 점점 광역대로 퍼져 나가는 동영상 탓이 분명했다.
한태영은 정난우와 율리안을 이끌고 식탁에 가 앉아 기다렸다. 곧이어 호텔 직원이 트레이를 끌고 다가왔다. 차곡차곡 음식이 세팅되는 동안에도 에녹의 등장이 없었다.
한태영은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문 쪽으로 돌아나갔다. 에녹의 뒷모습이 정지해 있었다. 회색 니트와 연한 체크무늬 슬랙스 차림의 그는 잘 빚은 마네킹 같았다. 꽉 닫힌 문을 마주 선 그의 시선은 한참 아래로 기울어 있었다.
“밀리건 씨?”
호명에도 반응이 없었다. 한태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때, 그가 한없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 안에 늘 희미하게 녹아 있는 금속성이 살벌하게 끓고 있었다.
“이 새끼 누굽니까.”
다가가던 한태영이 본능적으로 흠칫 뒤로 물러났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크게 뜬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에녹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하늘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허공을 베었다. 궤적이 남을 만큼 광폭하게 번득이는 안광이었다. 그의 입술이 이질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질긴 고기 씹듯 어금니로 꽉꽉 씹어 내뱉었다.
“이 씹 새끼 누구냐고, 내가 묻잖아요, 한.”
그의 손에 반쯤 짓이겨진 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날 늦은 오후, 정난우는 모처럼 스케줄 때문에 고국 땅을 밟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예술의 전당에서 리사이틀 자선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모든 인터뷰는 공연 후로 미뤄 뒀다.
평창으로 가는 밴 안, 한태영은 룸미러를 힐끔거렸다. 창턱에 팔을 올려 제 머리카락 속 깊숙이 손을 꽂아 넣은 미남자가 보였다. 다 스러져가는 노을이 천연조명이 되어 그의 어두운 금발과 도자기처럼 흰 피부를 물들였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눈 꼬리와 뺨, 턱 선이 날카로운 선으로 떨어졌다. 적황색으로 젖은 속눈썹이 느리게 상하운동을 반복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태블릿 PC와 귀에 꽂은 이어폰에 쏠려 있었다.
태블릿 PC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영상은 바로 정난우의 세 번째 DVD였다. 발매 동시에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 명반이었다.
그는 정난우의 초창기 음악부터 질리도록 듣는 중이었다. 음악적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는 탓에, 정난우가 한 번 듣고 연주자의 감상을 해석하는 데에 비해서 그는 수백 배의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며칠 전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또 객실에 난입하더니, 이제부터 정난우가 돼야겠다고 확정적으로 선언했었다. 그 때만 해도 한태영은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코웃음 쳤더랬다. 미안합니다, 밀리건 씨. 내가 당신을 너무 얕잡아 봤나 봐.
한태영은 잠시지만 깊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요새 너무 자주 보다보니까 그가 누군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태영의 눈에 비친 에녹은 확실히 타고난 배우였다. 발성도 발음도 좋고, 외모도 눈빛도 강렬했다. 별 모양의 배역에 뼈와 살을 깍아 제 몸을 맞출 줄도 알았다.
그저 느낌 탓은 아닐 거다. 그의 깊숙이 들어간 눈꺼풀과 콧등과 입술에 음영이 보였다. 10여 년 전 데뷔 초창기 시절 맹인 소년 정난우가 겹겹이 두르고 있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한 빛깔이었다. 호수가 머금은 달그림자처럼 음울하고 죽죽했다.
배우란 사람들은 참 신기하다니까. 저렇게 다양한 얼굴이라니…….
못내 신기한 표정으로 관찰하던 때였다. 한태영은, 응? 하며 한쪽 눈만 조금 크게 떴다. 아슬아슬 흔들리던 까만 머리통이 룸미러 안으로 톡 끼어든 탓이었다. 정난우였다. 한태영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깨워야 하나 오늘도 고민했다. 정난우는 늘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게 맘처럼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사실 한태영은 아직도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비록 얼마 안 가 소스라치며 깨어나긴 하지만 저렇게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이게 내버려 두는 게 더 좋은 건지, 아니면 악몽의 초입에 들어서기 전 미리 깨워주는 게 더 좋은 건지.
오늘도 착잡한 상태에서 결론은 나지 않았다. 대신 음악에 몰두해 있던 에녹의 집중력이 먼저 부서져 내렸다. 맑은 빛을 되찾은 시린 눈동자가 스윽 굴러갔다. 그는 제 어깨에 기대있는 머리를 짧게 곁눈질했다.
그는 희미하게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불편하게 목을 꺾고 있는 정난우의 머리를 가볍게 받치더니 제 허벅지 위에 얹었다.
한태영은 뭔지 모르게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저리 자연스러워?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다, 그렇게 떠올린 한태영은 제풀에 피식 웃어버렸다. 참 괴이쩍은 상념이었지만, 광장 기행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이 더 친밀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그건 확실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정난우가 에녹에게 기대면 기댈수록 저 남자의 땅 속 뿌리는 더 굳건해 질 거라는 이상한 신뢰가 있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특출 난 건 아니었지만, 에녹이 단순히 단발적 흥미만으로 정난우 곁을 졸졸 따라다니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에녹이 정난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한태영의 미간에 심각한 그늘이 들이찼다. 오늘 새벽 일찍 호텔 직원이 에녹에게 전한 카드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 씹새끼 누구냐고, 내가 묻잖아요, 한.」
에녹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냉랭한 미소가 얼음처럼 굳은 가면이었다. 입술의 곡선 사이로 나지막이 흘러나온 음성은 듣기만 해도 오한이 들 정도였다. 그의 시퍼런 안광에 몸은 절로 마비가 왔다. 저대로 뛰쳐나가 누구 하나 잡아 죽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어만 있던 제게 에녹이 천천히 카드를 들어 보였다. 안에 적힌 글자들이 한태영에게 보이도록 펼쳤다. 간신히 눈만 굴려 읽어 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사랑한 겁니다. 그런데 나의 난우, 프라하 광장에서의 당신은 형편없이 행복해 보이더군요. 그건 당신 몫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왔다. 에녹의 질문에 대답해 줄 말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카드의 발신인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저 공연 후 가끔씩 정난우에게 카드와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이었다. 늘 같은 무늬의 카드만 쓰기 때문에 동일 인물인가보다 할뿐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그것조차 알 방법이 없었다.
한태영은 우물쭈물하며 그대로 전했다. 그 대가로 원 없이 폭언을 들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이렇게 주기적으로 제 흔적을 남기는 새끼를 보통 팬으로 생각했다고? 스케줄이며 머무는 호텔이며 훤히 꿰고서 제 돈 써서 선물까지 같이 보내는데 이건 뭘로 봐도 스토커잖아, 이 멍청한 작자야! 매니저라는 인간이 이런 것도 미리 커버 안 하고 뭐했어!」
에녹은 잔뜩 죽인 목소리를 칼처럼 휘둘렀다.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그냥 저항 없이 그 시퍼런 날을 다 몸으로 받았다. 죄인처럼 얼굴을 구긴 채 입술만 씹을 뿐이었다.
「이 새끼 당장 신고해요. 어차피 지문 안 남겼을 테지만 증거 넘기고 호텔 CCTV 따서 인상착의라도 그려내라고 해. 얼굴 안 남았을 거야. 신장, 성별, 체격 그 정도만이라도 알아내라고 하라고. 다음부터 묵을 호텔엔 반드시 누가 이딴 거 가져오면 붙잡아 두라고 미리 경고하고. 알겠습니까?」
한태영은 질린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식탁으로 돌아간 에녹은 배우답게 근사하게 연기를 했다.
당신 광팬이 또 선물 보냈더라. 카드가 있는데 좀 변태 같아서 안 보는 게 좋겠다. 스케줄 호텔 꿰는 거 보니까 신고는 해 두는 게 좋을 거 같다. 한태영이 할 거다.
동요 없는 목소리로 설득했다. 정난우는 신고까지 해야 하냐며 조금 걱정했지만 그럴 때의 에녹이 들어먹을 리가 없었다.
한태영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위협적인 협박 같은 건 없었지만 분명, 악의 같은 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었다. 이제껏 카드 보낼 때마다 실컷 헛소리만 해 대더니 뭐가 잔뜩 뒤틀린 모양이었다.
기우일 거다. 가끔 팬들은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우상을 키워 내고, 그에 벗어나는 행동을 보이면 날카롭게 굴기도 했다. 그건 예술가뿐 아니라 배우도 가수도 마찬가지였다. 에녹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제 조금씩 양지로 나오고 있는 정난우였다. 그 발걸음에 누군가가 소금을 뿌리는 일은 없어야만 하는 거다.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야 했다. 에녹의 손에 맘 놓고 정난우를 맡겨두고서, 한태영은 아름다운 풍경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에녹은 들리지 않는 한태영의 기대에 부응했다. 한쪽 이어폰을 떼고서 제 다리를 베고 누운 정난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는 평온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리쯤까지 흘러내린 코트를 끌어올려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코트 깃 위로 손 하나가 빼꼼 뻐져나와 있었다. 그 손바닥 안에 새끼손가락을 하나 물려주었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도 기다렸다.
조금 뒤 정난우는 가만히 손가락을 그러쥐어 왔다. 에녹은 물끄러미 그 모양을 응시했다. 정난우의 손바닥은 따끈하고 조금은 습한 열기를 띠었다.
기분 탓인지, 정난우는 그 상태로 평소보다 오래 잘 버텨 주었다.
더 달게 재우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급작스레 밭은 호흡을 내뱉정난우를 익숙하게 흔들어 깨웠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눈꺼풀이 움찔 경직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잘 잤어요?”
정난우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주며 에녹은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제가 사근사근하고 상냥한 성품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건 익숙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말없이 품어주는 쪽이 성미에 맞았다.
그러나 이런 순간들에서만큼은 제 천성을 모두 죽이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다른 배역의 탈을 기꺼이 뒤집어써 줄 심산이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정난우가 가장 먼저 맞닥뜨릴 감정이 걱정이나 슬픔이 아닌, 다정한 인사였으면 했다.
정난우는 옆으로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때마다 미세먼지가 붉은 춤을 췄다. 에녹은 아직도 꼭 쥐어진 제 손가락을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건데. 애도 아니고.”
“…아, 미안해요.”
정난우는 얼른 손에서 힘을 풀며 사과했다. 미안할 것까지야, 에녹이 퉁명스레 대꾸했을 때였다. 영어 내비게이션을 열심히 주시하며 운전에 몰두하던 율리안이 소리쳤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저기에서 우회전, 맞죠?”
“어. 그런 것 같네.”
한태영이 창밖을 유심히 살피며 맞장구 쳤다. 정난우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창문에 바싹 달라붙었다. 김 서린 차창을 손날로 지워냈다. 물 맺힌 유리에 익숙한 풍경이 움직였다.
“네, 맞아요.”
눈 쌓인 지붕들과 하얗게 머리가 샌 나무들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세련된 펜션의 간판들이 관광객들의 눈을 홀렸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은 추위도 잊고 제 갈 길에 바빴다.
“경치 좋네요.”
에녹이 휘파람을 불며 감상을 말했다. 정난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요.”
“펜션 인테리어에 직접 참여 했다고요?”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아니고요. 거의 업자 의견에 맞췄어요. 아주 조금 수정해 달란 부분만 빼고요.”
“그래도 기대 되네.”
정난우는 쑥스러운 듯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예쁘게 했어요. 어머니 볼 때마다 기분 좋으시라고.”
“관리는 어머니 혼자 해요?”
“아니요. 좀 크게 지어서 혼자 못 하세요. 돌아가신 이모 딸, 그러니까 친척누나 부부랑 같이 사시면서 관리해요. 그 외에 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한 분도 계시고.”
“누구? 친척?”
친척 얘기에 에녹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따뜻한 차내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정난우는 덩달아 움츠러들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 경멸증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곁눈으로 노려보듯 하는 시선에 직격 당한 뺨이 따끔거렸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친조카 되세요. 제가 어머니 혼자 계시게 할 수가 없어서 부탁해서 모셔온 거예요.”
“왜요? 고용인을 더 쓰면 되지.”
“아. 그게…… 어머니가 노안이 되게 일찍 오셔서 혼자 맘껏 돌아다니실 수가 없는 상태거든요. 간병인을 쓰자니 어머니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완강하시고, 그래서 누나한테 부탁드린 거예요. 어차피 누나도 매형이랑 아들 장가보내고 나서는 작은 텃밭이나 가꾸시며 살던 분들이라 월급도 필요 없다고 하셨던 분들이에요. 그냥 제가 막무가내로 돈 이체해 드리고 있는 중이에요.”
정난우가 그래도 양부모 복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에녹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 됐고. 여긴 그런 쓰레기들은 안 드나들어요?”
“뭐…….”
말끝을 흐리는 품새가 그렇다는 소리였다. 짜증이 달려와 이마를 들이 받았다. 골이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여러 모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참이었다. 그런 해충을 또 만나면 이번엔 좋게 말로 끝낼 자신이 없었다.
아주 가루가 되도록 짓밟아서 얼씬도 못 하게 해 줄 거다. 에녹은 하늘에 맹세코 장담했다.
“다 왔습니다아!”
율리안이 밴을 세우며 뿌듯하게 소리쳤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밖으로 내려서니 싸늘한 공기가 와락 달려들었다. 오늘도 에녹은 머플러와 모자로 수상하게 얼굴을 가린 채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넓은 부지였다. 숲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2층 높이의 별장 형 건물 10채 정도가 일정 거리를 두고서 배치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법한 예쁘고 세련된 건물들이었다. 각 건물마다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개별 테라스도 보였다. 바로 저편엔 여름에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계곡도 청량하게 흘렀다.
각자 짐을 들고 돌길 위를 걷고 있을 때였다. 건물들이 죽 이어진 끄트머리에, 누가 봐도 ‘주인 사는 집’ 같은 곳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중 한 명이 ‘난우야’ 불렀다. 정난우의 귀가 강아지처럼 쫑긋거렸다.
동시에 고개가 홱 들렸다. 망설임 없이 시선이 한 곳으로 쭉 날아갔다.
〔엄마!〕
정난우는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키는 5피트도 안되어 보였고 나이는 못해도 70은 됐지 싶었다. 그 뒤로 중년부부가 웬 꼬맹이를 안은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에녹은 한태영을 따라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태영은 넉살 좋게 정난우의 어머니 양명옥에게 넙죽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맑은 공기 드시니까 점점 회춘하시네요.〕
〔그래, 우리 태영이. 오느라 고생 많았어. 을리도 운전하느라 힘들었지?〕
양명옥은 율리안을 그냥 을리라고 불렀다. 덩치 큰 백인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지만 모두 다 그러려니 했다. 한태영은 열심히 통역했고 율리안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양명옥이 낯선 외국인을 보더니 침침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모자란 듯 한껏 다가와 코 아래에서 멈춰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총각이네? 왜 도적놈처럼 얼굴을 저리 꽁꽁 싸맸대?〕
한태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녹에게는 적당히 순화해서 말을 전했다. 에녹은 간단히 머플러를 풀어헤쳤다. 한태영이 그런 것처럼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에녹 밀리건입니다. 정난우 씨 친구입니다.”
〔아이고, 그래. 잘 왔어. 우리 난우 새 친구 생겼구나?〕
〔응, 엄마.〕
정난우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양명옥 역시 집 나갔다 돌아온 자식을 반기듯이 좋아했다. 다른 중년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정난우의 친척누나 최순애는 안고 있던 아이의 엉덩이를 통통 튀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해미 좋아하는 난우 삼촌 왔네? 인사해야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최순애의 손녀였다. 아들부부가 같이 강릉에서 횟집을 하느라 아이를 볼 수가 없어 어머니께 맡긴 것이다. 꼬마는 삼츈 삼츈 하며 팔을 뻗었다. 정난우는 건드리면 부서질 듯한 낙엽을 쥐는 것처럼 조심스레 아이를 건네받았다.
〔해미야, 삼촌 왔어. 삼촌 보고 싶었어?〕
〔보고 시퍼. 보고 시퍼. 삼츈.〕
정난우는 해미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눈을 따스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통통한 살굿빛 뺨에 입을 맞췄다.
〔삼촌도 우리 해미 많이 보고 싶었어. 그 조금 안 봤다고 그새 더 컸네. 기특해라.〕
이 얼마나 훈훈한 광경인가. 자고로 가족이란 이래야 하는 것이다.
감동해 있는 한태영의 옆구리를 에녹이 쿡 찔렀다. 그는 물끄러미 정난우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 해요, 통역 안 하고.”
이젠 설전도 귀찮았다. 한태영은 상황 설명부터 했다.
“저기 부부는 난우 씨 어머니의 조카딸 부부입니다. 저 꼬마는 부부의 손녀고요. 촌수가 좀 복잡한데 저 꼬마한테 난우 씨는 할아버지뻘인 거죠. 저 나이에 할아버지 소리 듣긴 좀 뭐하니까, 나중을 위해서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인사 중이고요. 삼촌 보고 싶었어. 삼촌도 우리 해미 보고 싶었어. 그새 더 컸네.”
“어머니가 자꾸 난우야, 난우야.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뭡니까? 애칭?”
“아, 애칭이라기보다…….”
한태영이 알기 쉽게 한국식 호칭에 대해 설명했다. 그 동안에도 에녹은 정난우의 머리카락 한 올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양 갈래의 짧은 머리를 한 아이는 정난우의 얼굴을 자그마한 손으로 붙들고 까르르 웃기 바빴다.
서슴없이 눈을 맞추고 행복하게 웃는 정난우가 낯익은 듯 낯설었다.
몇 번 보긴 했지만 모두 제 것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정난우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뜨거운 혈맥 안으로 콸콸 돌아다녔다. 기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펜션 지붕에 쌓인 눈에서 굴절된 석양이 모조리 정난우에게 달려드는 기분이 었다.
정난우는 빛을 싫어했지만, 빛은 정난우를 지독하게 짝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공평하게 대지를 비추는 태양도 정난우를 편애하는 거다. 심지어 달조차 그러지 않을까.
에녹은 문득 루스가 가진 씬 카드 중에 하나를 떠올렸다.
『이른 밤, 여주인공의 저택 안 인공호수.
오늘도 문전박대에 현관도 넘지 못한 주인공은 호수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 초점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주인공,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곪아가는 여자를 위해 낡은 케이스를 연다.
(연주곡 : 정난우의 ‘G선상의 아리아’)
2층 창문 커튼 뒤, 어둠에 깊이 숨어 내려다보는 여주인공의 시선을 대신해 카메라가 주인공을 줌 인.』
루스가 필름에 담을 그 장면은 스토리보드 스케치에도 있었다. 그 말은 곧 그의 머릿속에 그 순간의 장면이 매우 강렬하게 그려졌다는 소리였다.
루스는 음악영화로 할리우드를 뒤흔들었지만, 음악보다 더 높이 평가 받은 건 그 감각적인 영상이었다. 그 방면에서는 누구라도 그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루스 커넬이 원한 이상적인 컷이 마치 실제처럼 선명히 눈앞에 그려졌다.
아름다운 정원, 흐드러지게 날리는 은색의 달빛 가루, 물결치는 머리카락, 은은하게 반짝이는 정난우의 얼굴. 영원에 갇힌 영혼들조차 홀리게 만드는 마성의 선율.
에녹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몽롱하게 헤맸다. 양 쪽 어디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었다. 에녹은 정난우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대강 짐 정리를 마쳤을 때. 해는 산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차가운 어둠이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와 낮은 지대에 고여 들었다. 오랜 비행과 차량 이동으로 지친 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데나 널브러져 곯아 떨어졌다.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어보러 왔던 정난우의 어머니 양명옥은, 여기저기 빨래처럼 늘어져 있는 청년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바비큐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 한태영부터 깨웠다. 부스스한 머리를 헝클며 일어난 그에게 양명옥이 말했다.
〔애들 다 깨워서 나와. 밥 먹어야지.〕
잠기운이 더덕더덕 붙어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한태영이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좋죠! 오늘 메뉴는 뭐예요. 어머님?〕
〔횡성에서 한우 잡아 왔어. 양념 불고기랑 전골도 준비해 놨고, 싱싱한 새우랑 버섯들도 가득 있어. 텃밭에서 상추랑 깻잎이랑 고추도 잔뜩 따다 놓고, 사골 국물 넣고 밥도 안쳐 놓고, 묵은지 넣고 김치찌개도 한 솥 끓여 놨지.〕
〔이야. 오늘 먹고 배 터져도 여한이 없겠는데요?〕
〔그래. 많이 먹어야지. 애들 깨워서 건너 와. 알았지?〕
양명옥이 손자 대하듯 한태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천천히 나갔다. 한태영은 완벽한 하이 텐션을 자랑하며 모두를 깨워 밖으로 나갔다. 정난우는 가는 길에 주차장을 힐끔거렸다. 평일인데도 대목을 앞둔 터라 차가 제법 들어차 있었다. 자신은 괜찮은데 에녹이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에녹을 알아본다면 그가 제법 곤란해 질 것 갈아서였다.
하지만 다행이 손님들은 아직까지 각자 건물에 틀어박혀 있는 듯했다. 드문드문 개별 테라스에 나와 고기를 굽는 이들이 눈에 띄었지만 자기들끼리 노느라 바빴다. 대학생 무리인 듯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주인집 건물 앞에는 널찍한 바비큐장이 있었다. 특별한 꾸임없는 비닐하우스 형태로, 뼈대를 세우고 방수 천막으로 덮어 놓은 게 끝이었다. 두 세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올 때가 아니면 거의 비워져 있는 곳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양명옥과 최순애 부부가 그들을 맞았다.
곧 고기 굽는 냄새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은박지에 소금과 함께 감싼 싱싱한 새우들도 발갛게 익어갔다.
양명옥과 최순애 부부는 간단히 식사만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모두 더 계셔도 괜찮다고 말해도 젊은 애들끼리 놀아야 재밌다며 한사코 고집했다.
그들이 나가고 한태영과 율리안은 능숙하게 그릴 앞에 섰다. 고기를 굽다가 한 접시 가져와 어울리고, 찌개가 식으면 다시 불 위에 올려 두기도 했다.
음식들이 모두 맛있기도 했지만, 한창 에너지 넘칠 청년들은 우아한 자세로 빠르게 흡입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궤짝으로 주도 빈병이 줄을 이었다.
특히나 한 때의 격렬한 파티광 생활을 하다 최근 과거를 청상한 에녹은, 처음엔 비리다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도 연거푸 소주를 들이붓다시피 했다. 나중엔 소주를 온더락으로 마시는 기행을 펼치는 한태영을 촌스럽다고 구박하는 경지까지 갔다.
“뭡니까, 그게. 이건 올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라잖아요.”
“저한텐 너무 독합니다.”
에녹은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슬쩍 정난우를 곁눈질했다. 이미 예전에 주당 인증을 마친 그는 오늘도 홀짝홀짝 잘도 마시고 있었다. 그것도 내일 공연이 있으니 딱 두 병으로 저 혼자 제한을 두고 아껴 마시는 중이었다.
이제야 완전히 납득이 갔다. 첫 테이프를 러시아에서 끊은 데다, 고국에서 반주로 가끔 마시는 술이라는 게 이 모양 이 꼴이니 저런 괴물 탄생한 거였다. 혀를 차던 에녹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정난우의 곁에 바싹 붙어 앉으며 물었다.
“아티스트 정. 연습용 바이올린 하나 사야겠는데, 어디 거 사면 돼요?” “사시려고요?”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정난우가 되물었다. 불 곁에 앉은 정난우의 뺨이 조금 발그레했다. 사야지, 하고 대답하면서도. 에녹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독한 술은 이래서 문제였다.
왜 이렇게 다 고와 보이는지.
“아무리 남의 소리 덧입힌다지만 시늉은 해야 할 거 아냐. 너무 엉뚱하게 현을 짚으면 전공자들한테 엄청 까일 걸요. 그런 거 기분 나쁘잖아. 기왕 할 거면 단독 샷에서라도 제대로 해야죠. 어차피 본격적으로 촬영 들어갈 때까지 단타 스케줄 몇 개 제외하면 백수나 다름없는데 놀아서 뭐 하려고.”
정난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연습용이야 다 거기서 거기라 현만 갈아 끼우면 되지만… 서너 달 안에 모션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 어릴 때 한 일 년 정도 배운 적 있어요. 피아노도 한 이 년 쳤고. 어머니가 극성이셔 가지고. 악보 볼 줄도 알아요. 뭐 좀 배우면 완벽하게는 못해도 대충 음 근처 짚을 정도는 될 걸.”
“아. 그렇다면…… 잠깐만요.”
정난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쌩 사라지더니 잠시 후 웬 바이올린 케이스 하나를 가져왔다.
정난우는 에녹 앞에 서서 케이스를 통째로 건넸다.
“이거 제가 열여섯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연주하던 거예요.”
에녹은 얼떨결에 받아들며 물었다.
“그래서요?”
“이거 빌려드릴 테니까 써요. 어릴 때 배운 적도 있다고 했으니 굳이 연습용 하나 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예요.”
에녹은 빤히 정난우를 올려다보던 눈길을 떨어뜨렸다. 손 안에 든 악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지퍼를 여는 손이 기묘한 긴장으로 데워졌다. 케이스가 열리자 묵은 냄새가 찬바람으로 녹아들었다.
“육 년이나 묵혀뒀다면서 관리 잘 했네요. 깨끗하네.”
“한국 올 때마다 제 바이올린은 금고에 넣어 두고 이걸로 놀거든요. 그래서 현도 그렇고 활 털도 그렇고 교체할 거 없어요. 길도 잘 들여 놔서 이대로 쓰면 돼요.”
“그 유명한 뉴욕 필과의 데뷔 무대를 함께 했던 바이올린이라고 합니다. 이게.”
율리안이 아는 척하며 끼어들었다. 한태영도 보탰다.
“난우 씨 줄리아드 다닐 때도 거의 이거 쓰셨답니다. 객원 솔리스트로 공연할 때나 레코딩, 중요한 연습 때를 제외하면요.”
“아아. 줄리아드 다녔어요?”
에녹이 물었다. 정난우는 활 털을 손끝으로 가만히 문지르기만 했다. 한태영이 대신 대답했다.
“열일곱에 예비학교 들어갔었죠. 중간에 잠깐 휴학하는 바람에 얼마 못 다니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긴 했지만 맞죠, 난우 씨?”
활을 케이스 안에 다시 놓아두고, 정난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그 얼굴을 빤히 주시하다 화제를 틀어 주었다.
“이것도 스폰서가 준 겁니까?”
“네. 뉴욕 필 데뷔 직전에 한국 기업에서 광고 제안이 왔었어요. 그 때 개런티에 플러스로 주셨던 거예요.”
“광고도 찍었어?”
정난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에녹은 혀를 찼다. 알 만 했다. 온갖 역경 이겨낸 천재 소년의 감동 스토리 팔아먹겠다고 여기저기서 달려들었을 거다.
“지금 아티스트 정이 쓰는 건 뭐 천만 불 정도 한다고 했고, 그럼 이건 얼마짜리예요? 대여도 아니라 아예 준 거면 한 십만 정도 하나?”
한태영이 호쾌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야 우리 난우 씨 손때 탄 거니까 경매 내 놓으면 그 이상으로 낙찰되지 않을까요?”
정난우는 민망하게 뺨을 긁적이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이건 지금 악기상 시세로 한 만 불정도 할 거예요.”
“만 불이라…… 뭐, 그렇게 안 비싸네.”
에녹이 묘하게 중얼거리며 눈길을 내렸다. 정난우의 손길에 잘 길들여져 있는 바이올린을 물끄러미 살폈다. 열여섯부터 스무 살까지라면, 정난우가 광명을 되찾고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져 헤매던 시기라는 소리였다.
바이올린은 불규칙한 적황색었다. 군데군데 얼룩처럼 번진 색깔은 놈이 빨아먹은 정난우의 진액이었다. 걸음마에 실패해 완전히 주저앉게 된 정난우의 모든 걸 기억하는 놈일 거다. 바니시 발린 몸통이 백열전구 아래 요사스럽게 빛났다.
“이거 나 줘요.”
에녹은 담담하게 청했다. 세 쌍의 눈동자가 에녹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다들 어이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태영은 대놓고 이 미친놈은 어디서 튀어 나왔는가 하는 눈을 했다.
정난우는 얼빠진 목소리로 네? 했다. 내뱉은 어감을 약간 후회한 에녹이 조금 정정해서 다시 말했다.
“나 이거 갖고 싶어요. 나한테 팔아요.”
정난우는 멍한 상태에서 간신히 현실로 회귀했다.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더듬더듬 뒤엉킨 채 나뒹굴었다.
“그…아니, 그건 저한테 의미가 남다른…… 선물 주신 분의 성의도 있고…일부러 보관을…….”
“아니면 교환합시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거랑.”
“아니……저는 그런 건, 필요가 없…….”
정난우는 당황해서 두서없이 혀를 움직였다. 에녹은 연신 핥아대는 입술에 냉랭한 시선을 고정하며 대꾸했다.
“뭔지도 모르고 필요 없다고 할 겁니까?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면 나 상처 받아요.”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그냥 일단 조르고 보는 거였다. 협박으로 물건을 강탈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끈질기게 굴 심산이 아예 없지도 않을 거다. 정난우 자신도 어렴풋이 그걸 인지했다. 그러나 성대는 뻣뻣하게 경직됐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건…… 미안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제가 그냥 당황해서…….”
떨리는 음성이 서늘한 공기 속으로 창백하게 뿌려졌다. 무심결에 두 손을 모아 손가락 사이를 꽉 얽었다. 손끝에 머무는 초조한 떨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굳어가는 입술을 몇 번이고 이로 물어 풀어냈다.
그 이상반응에 에녹의 눈이 가늘어졌다. 관찰의 시선이 그 모든 걸 샅샅이 긁어내 머리에 새겼다. 뭔가 분명 이상했다.
잠깐의 공백을 두고 정난우가 말했다.
“가지세요. 줄게요.”
“……뭐?”
화끈한 허락이 떨어졌다. 에녹이 찬물 따귀라도 맞은 듯 눈을 크게 떴다. 한태영도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잃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연주자에게 과거를 함께한 악기의 의미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짐작이 가능했다. 숱한 순간들과 그 감동의 소리를 스크랩해 둔 결실의 결정체가 바로 악기였다.
〔삼츈!〕
그러나 누군가 반응하기도 전, 입구에서 할머니 손을 붙잡고 꼬맹이가 뒤뚱뒤뚱 걸어 들어왔다.
〔삼츈! 삼츈! 나, 나!〕
모두가 강제로 상념에서 끄집어져 나왔다. 정난우가 그 목소리에 반응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콩콩 뛰어왔다. 정난우가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으며 팔을 뻗었다. 해미는 그 품 안에 폭삭 안기면서도 바이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미 잘 시간 지났는데, 안 자?〕
〔바욜린, 해 줘. 해미 바욜린.〕
해미가 귀엽게 칭얼거렸다. 최순애가 난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미가 너 그거 가지고 나가는 거 보더니 이런다.〕
정난우는 자그마한 몸을 살짝 떼어냈다.
〔우리 해미, 삼촌 바이올린 듣고 싶어서 나왔어?〕
〔응! 듣고 잘 거야! 해 줘!〕
〔음…뭐 듣고 싶어? 삼촌이 다 해 줄게.〕
해미의 얼굴이 어른처럼 심각해졌다. 오통통한 얼굴에 근엄한 고뇌가 깃들었다. 어느새 정난우의 어머니 양명옥도 나와 흐뭇한 얼굴로 해미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난우는 아이가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 풀어둔 현을 조이고 활 털도 당기며 기다렸다. 송진을 미리 발라두길 잘했다.
해미는 제목이 생각이 안 나는지 직접 노래를 불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앉은 채로 곧바로 활을 들었다. 담백한 선율이 뻐끔뻐끔 입을 벌리는 아이 주위로 작은 요정들을 불러냈다. 파르르 날갯짓하는 요정들은 발랄한 음표들을 아이 위에 뿌리며 즐겁게 웃었다.
해미가 가사를 잊어버렸다. 정난우는 초롱초롱한 눈을 간간히 들여다보며 노랫말을 이어갔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무대도 청중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난우의 연주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산들거리며 무르익은 밤을 달궜다. 잔잔하게 절제된 비브라토가 정난우의 옅은 음성에 솜사탕처럼 녹아들었다.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떨어집니다아〜〕
까르르 웃은 해미는 곧이어 ‘엄마가 섬 그늘에〜’ 선창했다. 정난우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기꺼이 음을 따라갔다.
“우리끼리 듣기 아깝네요.”
에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얼굴에 깃든 표정은 없었다. 한태영은 아빠 미소를 짓고 있다가 동의했다.
“그렇죠. 난우 씨 팬들이 알면 부산에서도 총알처럼 밟아서 달려올 텐데.”
“동요?”
“네. 난우 씨가 해미를 위해서 동요들을 거의 다 섭렵했죠.”
수천 명 관객들의 갈채는 이 순간 힘을 잃었다. 저 한 아이의 작은 손이 그 모든 걸 무색케 할 거다. 정난우는 편안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프라하 광장에서 가난한 연주를 할 때보다 더.
근원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아예 진창에 떨어졌다. 정난우와 꼬마의 노래와 연주는 길게 이어졌다. 꼬마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즐겁게 입을 오물거렸다.
에녹의 눈동자가 그 광경을 내내 주시했다. 술은 이미 확 깼다. 정난우가 연주하고 있는 묵은 악기가 거스러미처럼 시야를 긁었다.
「가지세요. 줄게요.」
분명 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다. 이것저것 떠안기고 꼬드겨서라도 양도해 갈 생각인 건 분명했다. 그게 지금은 별 가치 없는 나무 덩어리건, 정난우의 과거를 물들인 실체 없는 고통이건.
하지만 갑자기 바뀐 정난우의 태도가 못내 꺼림칙했다. 그 창백한 얼굴에서 순식간에 달아나던 온기가 마음에 걸렸다. 불안한 듯 헤매던 눈동자와 손끝이, 분명 뭐가 있는 거였다.
에녹은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말없이 정난우를 지켜보는 그의 어머니가 보였다. 망설임 섞인 고민은 짧았다. 한태영의 팔꿈치를 붙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이리 좀 와 봐요.”
“에? 왜요?”
“통역 좀.”
펜션 일이 바쁠 때 가끔 도와준다는 아주머니마저 정난우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에녹은 그 흐름을 역류했다. 그는 한태영의 팔을 붙든 채 양명옥에게 말을 걸었다.
“정난우가 자란 환경이 궁금하다고 전해 줘요.”
한태영은 에녹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양명옥은 에녹을 흐린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훤칠한 청년의 시린 안광은 진지했다. 양명옥은 주름진 얼굴을 움직여 웃었다.
〔그런 건 요즘 젊은 애들 컴퓨터로 찾으면 다 나온다던데.〕
한태영은 그녀의 대답을 전한 뒤에 제 말을 덧붙였다.
“비밀일 것도 없어요. 인터뷰 기사들 다 찾아보면 난우 씨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겹게 나오니까요.”
에녹은 답답한 한숨을 삼켰다.
“한.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내가 인터넷 검색 못 해서 안 하는 거 아니라고.”
툭하면 ‘이해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하는 정난우였다. 이번에도 정난우에게 묻는다면 대답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대중들에게 뿌려진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거다. 객관성이라고는 핥아 봐도 한 방울도 안 나올 것 같은, 빌어먹을 정난우의 관대함을 에녹은 또 다시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뭘 말씀하시더라도 제가 오늘 들은 건 아드님 면전에서 다 고백할게요. 왜 그런 걸 캐묻고 다녔냐고 화내고 때리면 그냥 다 맞을게요. 그러니까 알려 주세요.”
양명옥은 마른 어깨를 늘어뜨리며 가만히 손을 뻗었다. 키가 작아 에녹의 머리까지 당도하지 못했다. 에녹은 깊이 상체를 수그려 주었다. 주름 진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우리 난우 걱정해 줘서.〕
그녀의 진심에 에녹은 조금 멋쩍어졌다. 손을 거둔 양명옥이 정난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젖은 시선을 에녹의 눈동자도 따라갔다.
양명옥은 그 상태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날을 되살리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도.
에녹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내 그녀가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난우 애기 때, 우리 옆집으로 애 아빠랑 이사를 왔어.〕
몇 주가 지나도 애 엄마가 안 보였다. 남자는 매일 폐인 같은 몰골로 술 냄새만 풍겼다. 애는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남자야 성인이니 제가 알아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지만, 눈에 밟히는 건 그 아이였다.
틈나는 대로 그 집에 들러 밥이랑 국이랑 가져다주게 되었다. 됐다고 하는 걸 늙은이 고집으로 밀고 들어가 넣어 주었다. 뭔가 더 해주고 싶어도 남자는 완강했다. 도리가 없었다. 그 때부터 노안이 이미 심했다. 구석에 있는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서 어떤 얼굴로 보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그렇게 몇 주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뜨끈한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돌아섰다. 남자는 그새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급한 발소리가 뒤에서 덮쳐들었다. 가볍디가벼운 몸이 굽은 허리를 꼭 감싸 안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가까이 앉아 들여다보았다.
며칠 동안 안 씻긴 건지 애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왜인지 머리는 죄 밀어 놨다. 한숨을 쉬며 욕실로 데려가 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 때, 그만 주책없이 눈물이 솟고 말았다. 그 작은 몸 여기저기에 멍이 가득했던 거다.
〔억장이 무너져서 내가 그 아빠 등짝을 후려 팼어. 언제까지 이리 살 거냐. 그만 정신 차리고 애 잘 키워야지 않겠냐. 저 이쁜 것 때릴 데가 어딨다고 손을 대냐.〕
애 아빠가 그 자리에서 통곡을 했다. 애가 울면서도 아무말을 안 한다고, 제 엄마 닮아 독하긴 더럽게 독하다고.
애 엄마도 그랬다고 했다. 아무리 때려도 비명 한 번 안 질렀다고.
애 엄마는 피아노 치던 대학생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너무 사랑해서 그냥 억지로 업어 왔다고 했다. 사랑해 주면 언젠가 마음을 열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손목을 그었다더라. 집에 돌아와 발견했을 때, 난우가…… 저 가엾은 것이 주저앉은 채 그걸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래.〕
이걸 그대로 전해도 될까. 한태영은 순간 망설였다. 이건 저 역시 처음 듣는 얘기였다. 물론 세간에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에녹의 싸늘한 눈이 멈칫해 있는 그의 입술을 찢을 듯이 압박했다. 떠밀리다시피 한태영이 그녀의 말을 전했다.
에녹의 눈동자가 일순 정지했다. 희미한 동요가 그 위를 덮었다. 낮게 내뱉던 숨은 한참을 멈춰 있다가 가늘게 뽑아져 나왔다. 그는 어금니를 꽉 사려 물며 정난우를 돌아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웃는 창백한 얼굴이 가슴을 할퀴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불어오고 있을 바다의 소금 바람이 붉게 벌어진 흉터 위에 끼얹어졌다.
폐가 잔뜩 조여 왔다. 현기증이 날 만큼 가슴이 갑갑했다.
내 안의 너는 도대체 얼마나 더 상처를 입어야 환하게 웃어줄까.
그 때. 필사적으로 내뻗던 손의 뜨겁고 습한 감촉이 되살아나, 에녹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작은 관절들이 하얗게 도드라져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듯했다.
눅눅하게 젖어드는 가슴이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또 다시 억지로 펌프질해 올렸다. 엉망으로 뒤섞이는 영상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고열을 앓는 와중에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모두가 말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고.
에녹 혼자만 인정하지 못했다. 멍청했던 내가 그 애에게 평생 잊지 못 할 지옥 같은 이틀을 더 안겨 줬다고.
열일곱의 정난우는 자신을 찾고 싶었을까, 아니면 잊고 싶었을까.
피해자에게 특별히 불리한 점이 발생하지 않는 한 제 신원은 철저히 감취 달라고 못을 박았었다. 신상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비밀로 부쳐달라고 했었다. 그건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뜻이기도 했지만, 제 뜻이기도 했다.
그냥 잊고 싶었다. 그 애도 잊었으면 했다.
그 때는 그게 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정난우가 저를 못 알아본다는 걸 알았을 때, 울컥 올라왔던 건 안도가 아닌 반발심이었다. 미성숙한 위선은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난 아직까지도 너를 이렇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어.
—휘황찬란했던 할로윈의 뒷골목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제가 있었다.
그저 자신이 잊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다. 그 애를 볼 낯이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을 그 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떳떳하지 못한 영웅으로 남느니 얼굴 없는 영웅으로 무대에서 퇴장하고 싶었던 거다.
그 비겁함의 채무가 이렇게 돌아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비린 바람이 상념을 쓸어갔다. 폐허처럼 텅 빈 그 공간에 뜨거움이 고여 들었다. 식도가 타들어가는 듯 했다.
문득 불길 같은 충동이 뇌리를 달궜다. 달려가 저 몸을 제 품안에 가두고 싶었다. 으스러뜨릴 듯이 끌어안아 푹 싸매주고 싶었다. 그의 혼을 부식시키는 독 섞인 풍파를 대신 맞아주고 싶었다.
「가, 가지 마세요…….」
열일곱의 정난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귓가에서 애처롭게 애원했다. 스물여섯의 에녹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돌려주고 싶었다.
一그래, 안 가, 아무데도, 곁에 있어줄 테니까…….
홀린 듯이 입 안으로 거듭 뇌까렸다.
一내가 지켜줄게. 절대로,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게.
에녹은 제가 무슨 생각올 하고 있는지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 순간, 모든 사고가 굳었다. 뒷머리가 날아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건 충격이 아닌 깨달음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발작하듯 뒤틀리는 감정이 명치 아래 뜨겁게 고였다. 심장 박동이 혈맥을 태울듯 질주했다.
까마득한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모호함이 불쑥 희미한 형태를 드러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그 어떤 죄책감도 동정도 들어맞지 않았다. 호기심이나 우정 따위도 아닐 거다. 그 모든 것들을 다 합해도 부족했다.
에녹은 무심결에 제 목을 한 손으로 감쌌다. 치솟은 심장이 거기에 걸려 있었다. 사납게 튀는 박동이 손안에 무섭도록 감겨들었다. 이런 건 알지 못했다. 한 번 겪어본 적도 없었다.
윤곽만 흐리게 드러낸 감정이 다시 까마득한 어둠에 매몰되었다. 파장 짧은 맥동은 손 안에서 내내 발버둥치고 있었다.
*
24일, 예술의 전당 자선공연이 끝나고 팬 사인회가 열렸다. 오랜만의 한국 스케줄이라 정난우의 팬들은 죄다 CD와 프로그램 북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줄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젊고 말 많은 팬들은 공연장에서의 특급스타 목격 사건에 몹시도 흥분해 있었다.
〔진짜! 정말 에녹 밀리건 온 거 맞아요?〕
정난우는 고맙다는 메시지를 펜으로 흘려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다 못해 어려보이는 여학생의 기세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어떡해, 난 못 봤는데! 지금은 어디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밴 몰고서 어딘가에 대피해 있을 거다. 말도 안 통하는 꼬마 해미를 비롯해 자신의 가족들과 어색하게 대면한 채.
그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한태영은 제 옆에 앉아 있었다. 율리안이 스탠딩 모드로 사인을 받기 위해 줄 선 이들을 통제할 동안, 한태영은 편히 앉아 말이 길어지는 이들을 부드럽게 잘라내고 있는 중이었다.
〔저 아까 직접 봤는데 진짜 기겁할 정도로 놀랐어요! 영화 홍보할 때도 내한 안 했던 비싼 남자잖아요!〕
공연장으로 들어가던 도중, 선글라스에 머플러로 완전무장을 해도 그는 금방 눈에 띄었다. 홀은 커녕 심지어 매표소조차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다.
정작 진짜 사람이 많은 호텔 같은 데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드문데, 공연장 관객들은 매의 눈을 자랑했다. 그건 정난우의 팬들이라면 사실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에녹이 요새 정난우와 함께 출몰한다더라, 하는 소문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에녹은 시끄러운 환대에 나지막이 욕설을 잇새로 씹어 물었다. 그 바로 곁에 있던 정난우는 똑똑히 들었다.
「이런 젠장. 변장한 보람이 없어, 보람이」
그는 요령 좋게 사람들 사이를 전광석화처럼 빠져 나갔다. 적당히 손을 들어 ‘나 한국말 못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가 한태영에게 가장 처음 배운 한국말은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이런 게 아니라 바로 그 ‘나 한국말 못해’였다. 뭔지 모르게 그다웠다.
그가 본의 아니게 길을 뚫어준 덕에 정난우는 대기실까지 매우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에녹은 여기까지 왜 온 거예요?〕
〔그게……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영화 이야기는 아직 보도 자료를 뿌리지 않았다. 그건 에녹의 기획사와 영화 제작사에서 진행해야 할 부분이라 정난우는 말을 아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제작기획서 작업까지 끝낸 후에 언론에 흘릴 거라고 했다. 당초 예상보다 길어진 팬 사인회가 겨우 끝났을 때, 밴으로 돌아간 정난우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머니랑 다 어디 가셨어요?”
“아. 해미가 집에 가자고 칭얼거려서 먼저 보내드렸습니다. 리무진 대여해서 편히 가셨으니까 염려 말아요.”
대답은 한태영이 했다. 사인회 도중 걸려온 전화를 받았지만 나중에 말해야지 하다가 이제야 생각이 난 거였다.
정난우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들어 어머니 양명옥과 짧게 통화를 했다. 양명옥은 호텔에서 푹 쉬다가 늦잠까지 자라고 당부했다.
펜션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창기, 정난우는 어떻게 알았는지 워크샵을 온 한 신문사 기자들 때문에 곤혹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정난우는 짬을 내고 입국할 때만 펜션에서 묵고 정작 공식 일정 때는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특히나 에녹이 정난우 곁에 껌 딱지처럼 붙어 있다는 것조차 비밀일 게 없으니, 모두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호텔 숙박이 맞았다.
다음 스케줄은 베를린 필 신년전야음악회였다. 리허설 전날에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 때까지는 이렇게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고, 밤에는 계속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배고프시죠. 우리 뭐 먹고 들어갈까요?”
정난우가 코트를 벗으며 물었다. 한태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사양했다.
“저는 딱히 배는 안 고픕니다. 팬들이 준 간식들을 너무 집어먹은 거 같아요.”
율리안도 그에 동의했다. 정난우 역시 팬들이 가져다 준 케이크나 쿠키를 좀 집어 먹은 터라 당장은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무심코 ‘저도 특 별히 생각은 없는데.’ 하고 말하려 할 때였다.
팔짱을 낀 에녹이 주위를 차례로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거저거 주워 먹은 매정한 인간들 둘이 내 굶주림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정난우는 뜨끔해서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혀끝까지 밀고 올라왔던 말도 얼른 삼켰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뱉어낼 뻔 했다. 순식간에 이마에 땀이 솟았다.
“에녹. 그럼 우리 식사하러 갈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에녹의 사나운 시선이 허공을 빙 둘러가다 정난우에게 당도했다. 맞은편에 앉은 정난우의 얼굴에 선글라스는 없었다. 지금 이 조합이 편안해졌다는 증거였다.
차창 밖 가로등이 어둠을 밝혔다. 불빛은 매끈한 정난우의 뺨위를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에녹의 눈꺼풀은 셔터처럼 개폐를 반복했다.
각막에 자꾸만 아프게 맺혀 오는 정난우가 쭈뼛쭈뼛 손을 내뻗었다. 무릎을 톡톡 건드려 오는 손끝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요. 화 풀어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싶으면서도, 사실 화가 난 것도 뭣도 아닌 에녹은 왠지 화가 난 것처럼 굴어야 하는 이 상황을 받아 들였다. 그는 배역에 충실한 성실한 배우였다.
못된 생각이지만, 끙끙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귀여워 조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에녹은 짐짓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 진짜 섭섭해요.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랑 한 차에 구겨 넣고 몇 시간 동안 모른 체 하고. 쫄쫄 굶고 있었는데 다들 배 안 고프다고 그러고.”
“아, 아니에요. 저도 되게 배고파요. 아, 그러니까 다들 괜찮다고 하니 쉬라고 호텔에 보내 드리고 저랑 둘이 먹을까요?”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에 기이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까지 간 보듯이 톡톡 무릎을 건드리는 정난우의 손을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길 수 초. 에녹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둘이요?”
“……싫으세요?”
정난우가 눈치를 세워 기류를 탐색하며 되물었다.
뭐야, 이건.
에녹은 눈동자를 탁탁 굴려서 맞은편의 한태영과 운전석의 율리안까지 차례로 살폈다. 차 안은 흠 없이 조용했다. 그들 모두 이 대화에 위화감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에녹은 순간 제가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지금 여기서 나만 미친놈이야?
외눈박이 물고기 세상에 뚝 떨어진 두눈박이 물고기가 말했다.
“이봐요, 아티스트 정. 오늘 몇 월 며칠인지는 알아요?”
뜬금없는 날짜 타령에 정난우는 멍한 표정만 지었다. 선뜻 대답 못하고 귓바퀴만 만지작댔다. 역시나 까맣게 모르는 거였다. 에녹은 창밖으로 시선을 내던지며 퉁명스레 사실을 전달했다.
“십이월 이십사일.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네. 이십사일, 그건 아는데요.”
설마 정말로 날짜가 중요했던 건가.
정난우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영혼이 표백된 맹한 대답을 되돌렸다. 고개를 바로 해 정난우를 빤히 응시하던 에녹은, 이내 황망한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아야 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모두가 태연했다.
에녹은 그제야 그들이 살고 있는 삭막한 세계를 실감했다. 이 인간들에게 로맨스를 말하는 건 개미떼에게 분리수거를 말하는 것과 같았던 거였다.
에녹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응고된 한숨을 느리게 뽑아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어차피 정난우와 단 둘이서 나눠야 될 이야기도 있었다.
에녹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정난우에게 청했다.
“좋아. 둘이 보내지, 뭐. 그런데 나는 감상적인 사람이라 이런 날에는 굉장히 반짝반짝 멋진 곳에를 가고 싶어. 어디 아는 데 있어요?”
자칭 세기의 로맨티스트는 심각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찌하여 이 가엾은 어린양들이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외면하는가에 대한 코멘트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크리스마스는 빨간 글씨의 공휴일 아니냐는 소리를 한다면 정말 제가 미친놈이 될 것 같았다.
정난우는 결연히 두 주먹을 쥐며 선언했다.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제가 무조건 맞춰 드릴게요.”
에녹의 대답은 막힘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눈꽃이 날리고, 반짝거리는 거대한 대형트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캐럴은 당연히 필수고, 전망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공간이었으면 좋겠는데, 식사 후엔 가볍게 야경을 내려다보며 와인이나 위스키도 한 잔 했으면 하고, 조명은 조금 어두운 듯 부드러운 곳에서.”
에녹은 로맨틱을 읊었지만 정난우는 석상처럼 굳었다. 말문이 탁 막혔다. 굳은 머리는 굴려 봐도 녹슨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가 말한 것 중에 제가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요건은 캐럴밖에 없었다.
눈꽃은 뭐며 대형트리는 뭐며, 무엇보다 전망이 아름다운 낭만적인 공간을 제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정난우는 얼핏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옆에 앉은 한태영의 옷깃을 조심히 끌어 오며 물었다.
“태영 씨는 그런 데……, 알아요?”
“지리도 모릅니다.”
한태영은 뚱하게 대꾸했다. 큰일 났다. 정난우는 난처하게 땅바닥에서 시선을 굴렸다. 어쩌지, 하고 고민하고 있는 그를 조금 불안하게 응시하던 에녹이 설마 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 뜬금없이 궁금한 거 있는데, 혹시 호텔 어디로 잡았어요?”
“…….”
“설마 이런 날, 잠만 자면 된다고 아무데나 잡은 건 아니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다들 말이 없었다. 대답은 물론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감성을 유린당한 에녹의 화가 기어이 터졌다.
에녹은 살면서 이렇게 돈지랄이 하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다.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죄다 5성급 이상 호텔 스위트룸에 처박아 넣을 생각이었다. 그 안에서 일을 하건 잠을 퍼자건 그것까지 제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열렬히 호구가 되어 주겠다는 에녹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장애는 많았다. 일단 한태영은 한사코 번거롭다며 거절했고, 율리안은 직속상사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했다. 강제로 실행하려 해도 크리스마스시즌에는 빈 객실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에녹은 당장 정난우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비행기라도 탈 기세를 흘렸다. 표가 없으면 동료배우의 전용기라도 빌려올 낌새였다, 그간 몇 번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겪은 바 있는 한태영은 심각한 위기를 느꼈다, 그는 곧바로 정난우의 얄팍한 인맥을 총동원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야 했다,
구원은 역시나 찾는 자의 것이었다. 호텔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는 모 그를의 나이 지긋한 회장님께서 그 구원의 동아줄을 내리셨다. 1~2년에 한 번씩 정난우의 차를 바꿔줄 정도로 열렬한 팬인 그는 통 크게 초호화 룸을 하나 내려주셨다.
율리안이 밴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태영은 정난우와 에녹을 달고서 체크인을 마쳤다. 도어맨에게 에녹의 캐리어만 맡기는 걸로 짐 운반도 끝냈다.
짧은 시간 동안 진땀을 빼서인지 한태영의 눈 밑에는 확연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는 혈기 넘치는 에녹에게서 1초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모처럼 즐겁게들 노세요.”
에녹은 정난우에게 한쪽 팔로 어깨동무를 걸었다. 한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 그의 얼굴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수고했어요, 한.”
“…내일 봐요, 태영 씨.”
에녹의 팔 안에 인질처럼 붙잡힌 정난우도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한태영은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걸음마 하는 애를 호숫가에 풀어놓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짧은 망설임을 떨어내고 푹 자라는 말만 남긴 채 뒤를 돌았다
객실이 중분히 넓으니 함께 묵자고 해도 한태영은 한사코 버텼다. 일단 그러려면 옮겨웠던 짐들을 도로 다 실어 와야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피로 곡선이 쭉쭉 솟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왠지 오늘은 에녹과 가까이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인지 뭔지 그게 왜 중요한지 아직까지 이해가 안 갔다. 그저 빨리 침대에 몸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이렇게 피곤한 존재일 줄, 그는 꿈에도 몰랐다.
“자, 그럼. 식사부터 해야죠.”
한태영이 사리지자 에녹의 얼굴은 꽃처럼 만개했다. 머플러가 콧등까지 덮은 위로 시원하고 날카로운 눈초리에 부드럽게 웃음이 매달렸다.
“네…… 저, 그런데 뭐 먹을까요?”
“한국 음식. 난 외국 가면 꼭 그 나라 본토 음식을 먹어요. 맛없더라도 그게 다 경험이고 추억이거든. 아는 데 있죠?”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를 건 채 걸음을 옮겼다. 정난우가 자연스레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한정식 잘 하는 데는 많이 알아요.”
에녹은 빈손을 들어 제 셔츠 밑을 빼서 정난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습관처럼 그 새하얀 드레스셔츠를 손가락에 휘감다가, 정난우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날씨 추운데, 코트 여미세요.”
정난우의 시선은 풀어헤쳐진 에녹의 코트 앞섶에 닿아 있었다. 셔츠 위에 니트를 입긴 했지만 한기를 다 막아주긴 역부족이었다. 걱정스런 목소리에 에녹은 목 안으로 낮게 웃었다.
“괜찮아. 나 체온 높은 편이라 겨울엔 강하거든. 여름에 죽어나지. 그리고 이거, 좋아요. 그러니까 신경 꺼.”
이거 말이야, 이거.
에녹이 검지 끝으로 톡톡, 제 셔츠를 꼭 휘감은 손등을 두드렸다. 그게 왜 좋다는 건지는 몰랐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그가 건드린 곳에서부터 은근한 열기가 올라와 가슴까지 다다랐다. 따끈하게 데워진 심장이 조금 박동을 올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가끔 스쳤다. 한 남자는 머플러로 얼굴의 반을 덮은 외국인, 또 한 남자는 해가 기운 뒤에도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낯선 이들의 시선은 매끈한 외형이 짐작되는 외국인 덕택에 평소보다 조금 길게 머물렀지만, 이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의 뇌리에는 장님 동행을 이끄는 친절한 외국인 정도로 인식됐을 거다.
호텔 앞에 정차해 있는 모범택시에 몸을 실었다. 에녹은 자리에 안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정난우가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가 출발하고 잠시, 에녹이 상체를 틀며 손 안의 것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 서울에 눈 올 확를 오십 퍼센트라네요. 우리 내기 하죠 “
“무슨 내기요?”
“나는 눈 온다에 걸 테니까, 너는 안 온다에 거는 거야. 진 사람이 이기는 사람 해 달라는 거 들어 주기. 간단하지?”
정난우는 고개만 한 번 갸우뚱했다. 뭔가 간단하긴 간단했다. 에녹의 말투가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요.”
“약속했다. 나중에 딴 말 하기 없어요.”
에녹은 답답한 머플러를 턱 아래로 잡아끌며 당부했다. 정난우는 늘 그랬듯 순하게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제 뜻대로 일이 흘러갔음에도 에녹은 차춤 착잡해졌다. 고민하듯 뚫어져라 쳐다만 보던 그가 이내 정난우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았다.
좌석 위로 굽혀 올린 무릎이 정난우의 허벅지 옆을 스쳤다. 그 접촉보다 사납게 출렁이는 기류가 더 냉랭했다. 에녹의 한 팔이 좌석 등받이 위에 걸쳐졌다. 단지 그것만으로 포위된 기분이었다. 정난우의 목이 코트안으로 기어들어갈 듯 했다.
“이보세요, 아티스트 정.”
“…네?”
“그런데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그렇게 덥석 물어?”
다정하게 다듬지 않으며 에녹은 음성은 대체로 거칠었다.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독극물 섞인 관능 같기도, 굴복을 원하는 오만함 같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정난우는 바닥에서 팽글팽글 도는 동전을 물끄하미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면이 위로 향할지 한참을 지켜봤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돌고 있었다. 다만, 그의 심기가 어쩐지 불편하다는 건 눈치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정난우는 불안하게 마른 입술을 핥으며 되물었다. 차갑게 굽은 손끝이 연신 움찔거렸다. 눈꺼풀 아래 숨긴 눈동자가 초조하게 바닥을 헤맸다.
자신을 답답해하고 꺼려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마 셀 수도 없을 거다. 막연히 포기하고 살아왔기에 이제 와 새삼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군중 속에 에녹만큼은 끼어 있지 않았으면 했다. 빼곡한 인과를 등지고 선 초라한 뒷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이 사라져 버릴 지도 몰랐다. 용기 내 손을 뻗었다. 좌석 위에 헐렁하게 올라와 있는 그의 무릎을 가만히 쥐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달달한 캐럴이 그의 숨소리에 까마득히 멀어져갔다. 주눅 든 목소리가풍랑처럼 흔들렸다.
“화났어요? 내가 화나게 했어요?”
“…내가 너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그런 거 아냐.”
무심결에 에녹은 물러터지게 반응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거냐고 단단히 야단을 치리라 생각했던 결심은 소금성에 불과했 다. 무릎에 내린 따뜻한 온기가 한 순간에 그 모든 걸 흔적도 없이 허물어뜨린 거다.
에녹은 한숨을 쉬며 정난우의 턱을 한 손으로 살짝 붙들었다. 안도에 풀어진 정난우의 몸에 도로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끌어왔다.
“얼굴 좀 봐요. 나만 볼 테니까 눈을 감든 깔든 그건 알아서 하고.”
정난우는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에녹은 눈꺼풀을 덮는 까만 앞머리를 다른 손으로 척척 걷어냈다. 긴장한 낯으로 잔뜩 굳은 얼굴이었지만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거리는 고작 한 뼘,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물었다.
“내가 이러는 거 싫지?”
부챗살처럼 촘촘한 속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눈두덩 안에서 눈동자도 뭔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정난우는 고집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뇨.”
“싫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긴장하지. 화내려는 거 아니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도 돼. 나는, 네가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 그게 알고 싶은 거니까.”
에녹의 숨결과 목소리는 달고 끈적끈적한 가루 같았다. 허공에 흐트러지는 법 없이 곧장 얼굴에 눌어붙어 왔다.
정난우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 안에 잡힌 게 그의 무릎이라는 걸 깨닫고 한 번 더 놀랐다. 화들짝 손을 떼며 이번에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어색해서…….”
어색하다……, 그 말을 몇 번 뇌까린 에녹이 애 달래듯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따라해 봐요.”
정난우는 뭘요? 하고 물었다. 에녹은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아주 단호하고 차갑게.
“나, 어색하니까, 이러지, 마.”
살짝 벌어진 정난우의 입술이 당황으로 꿈틀거렸다. 저도 모르게 그 위로 눈을 내렸다. 그 안에 잠긴 새빨간 혀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축축한 미지의 영역이 한 순간 선명하게 인지됐다. 일순 쪼그라든 심장을 누군가 발로 뻥 찼다. 시선이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동물적 반사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에녹의 차가운 눈동자가 다급히 허공을 그으며 올라갔다. 공연히 빈 공기만 노려보며 숨을 골라야 했다. 목울대가 몇 번이고 마른침으로 오르내렸다.
순간 느낀 위기의식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이런 적이 있었다. 역시, 이런 건 정말 이상했다. 거북하고 껄끄러운 것도 같았다.
무례하게 정난우의 어둠 안을 급습하길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끔, 지나치게 밀착된 어느 순간들에서 때로 무언가가 발목을 그러쥐었다. 본능적으로 한 번 멈칫하거나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 느낌은 어쨌든 못 견디게 불쾌했다. 에녹은 스스로를 잘 꿰고 있었다. 부딪쳐보기도 전에 지레 두려워 피하는 건 저답지 않았다. 이건 뭔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쌓여가는 누적수치는 점차 의심만 피워 올렸다. 찬찬히 끌어 모은 단서들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려 하는 중이었다.
에녹은 동요로 굳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안 따라하고 뭐 해요?”
결론이 어찌 됐건 피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언젠가 다가올 충돌의 날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지금은 그저 ,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법을. 더 나아가 좋아하는 걸 먼저 표현하는 버릇을 저 얌전한 입술 위에 찬찬히 수놓아 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라면…….
불안해서 어디 내 놓기야 하겠나 싶었다. 노림수 뻔히 보이는 이런 얄팍한 덫에도 너무 쉽게 걸려드니 큰 문제였다. 옆구리에서 떼 놓으면 걱정하다 앓아누울 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단타 스케줄만 제외하면 백수나 다름없어서 가드가 가능한 거다.
당장 몇 달 뒤면 배우 훈련이며 리허설이며 바빠지기 시작할 거다. 본격 촬영에 들어간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난우 매니저 둘에게만 이 청정 조류를 맡긴다는 건 무래도 불안했다. 게다가 지금은 망할 스토커까지 붙은 상태였다.
에녹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꽉 붙들어 잡았다.
“할 때까지 안 놔줄 건데 어디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티나 볼까?”
“…….”
침묵하는 정난우를 에녹은 툭툭 자극했다. 한 순간 헤맨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더 짓궂게 굴어 줄 거다.
턱 쥔 손을 살짝 움직여 엄지를 끌어왔다. 부드럽게 움직여 보았다. 촉감이 좋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둔탁하게 잠긴 음성을 흘려넣었다.
“피부 좋네요. 점 하나 없이 매끈한 게, 자외선을 얼마나 안 쐬었으면 이 지경으로 좋을까. 따뜻한 데 있어서인지 입술도 혈색이 졸고. 이런, 속눈썹도 꽤 기네.”
“…그만 하면 안 돼요?”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허물었다. 하지만 내색 않고 계속했다.
“아직도 이렇게 나를 몰라. 내가 한 번 뭐 한다고 했을 때 순순히 물러난 적 있었어요? 나 이런 병신 같은 소리 되게 잘 하는데. 한 십 절까지 확 뽑아줄 수도 있고. 어떻게, 이제껏 내가 내내 감상했으니까 이번엔 우리 아티스트 정이 내 헛소리 감상 좀 해 볼래요?”
나른한 웃음 밴 목소리는 이제껏 들은 것 중 제일 질이 나빴다. 그는 마치 순결한 처녀를 희롱하는 시정잡배처럼 굴었다. 뱉어내는 말과는 달리 녹일 듯이 얼굴 위를 돌아다니는 시선을 정난우는 물론 알아채지 못 했다.
정난우는 수도 없이 망설였고 에녹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기나긴 실랑이 끝에 이번에도 백기를 든 건 정난우였다.
“나…어색하니까…….”
“옳지.”
“이, 이러지 마.”
용기 내서 안 붙는 말을 혀끝에 실어 던졌다. 미션에 성공한 정난우가 맥 풀린 듯 숨을 몰아쉬었다. 에녹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싫은데. 내가 왜?”
인중에 흩어지던 날숨이 단박에 쏙 들어갔다. 잘못 들었나 싶어 정난우가 귀를 움찔거렸다.
“네?”
“나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
정난우는 단박에 울상이 되었다.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응? 난 말해 보라고 했지.들어준다고는 안 했는제?”
정난우는 억울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꽉 감은 눈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니 굳게 쥔 두 주먹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 얘를 어쩌면 좋아.
에녹은 진심으로 좀 더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럴 생각이엇따. 그런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난우는 지금 귀 잡힌 토끼처렇 대로대롱 매달려 있는 거였다. 물어뜯을 이빨도 없이 눈만 꼭 감은 채로.
어쩌지. 이건 너무…… 귀엽잖아. 젠장.
에녹은 피가 나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억누르다 새 버린 웃음이 한 번 터져 나갔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폭소를 방어하느라 그대로 무너졌다.
밀착된 온기가 모두 사라졌다. 정난우는 괴이쩍은 기류를 느꼈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슬쩍 실눈을 떠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녹은 어느새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아 있었다. 양 무릎 위에 각각 얹은 팔꿈치. 얼굴을 감싸 쥔 두 손. 깊이 구부러져 격졀하고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소리도 없이 숨넘어갈 것처럼 웃고 있는 거였다.
놀림 당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뭔가 욱 치밀어 올랐다. 정난우는 고개를 바로 하며 주먹 쥔 손으로 그의 어깨를 한 대 후려폈다. 때리는 것보다는 그냥 가볍게 내려친 수준이었지만, 제 풀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에녹은 상관하지 않았다. 손사래만 치며 맹렬히 웃는 데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정난우는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렸다. 당황에 물든 시선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미안.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에녹은 더듬더듬 말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뻗어와, 잠자코 있던 정난우의 무릎 위에 얹어졌다. 간질간질한 온기가 그곳에서부터 유려하게 뻗어 전신을 물들였다. 택시 안에 울려 퍼지는 캐럴과 그의 웃음은 두 가지 맛이 섞인 사탕 같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 스치는 혀 위가 아릴만큼 달았다. 확연히 다른 두 성분은 협주곡처럼 잘 맞물렸다.
차창에 비친 정난우의 입술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에녹의 웃음소리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조금 발끈하게 만들더니, 그 다음에는 많이 기쁘게 했다.
이 사람이 빼곡한 군중 속으로 사라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에녹은 식사에 만족했다. 나물 무침과 간이 강하지 않은 정갈한 찬들은 식이조절 중인 몸에 딱 맞았다. 한국식 수프들과 새빨간 김치는 별로였지만 다른 것들은 다 좋은 편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인근 술집을 슥 둘러본 에녹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고 저기고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아직 11시도 안 됐는데 관절을 상실한 취객들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거리였다.
흐물거리는 고성이 쓰레기 더미 위를 나뒹굴었다. 에녹은 시끄러운 클럽과 파티를 즐기긴 했지만 이성 잃은 싸구려 향락이 판을 치는 곳은 질색이었다.
“나 이런 데는 별로, 그냥 라운지로 갑시다.”
그러나 호텔 라운지도 그리 좋은 환경은 되지 못했다. 한껏 차려입은 남녀가 테이블을 빼곡하게 메웠다. 물론 동떨어진 룸 같은 건 꿈을 꿀 수도 없는 상태였다.
에녹은 카운터에서 룸서비스만 부탁했다. 메모지에 빼곡히 적어 내밀자 직원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망설임도 없이 정난우의 어깨를 감싸 객실로 향했다.
정난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술 마시고 싶다고 안 했어요?”
“왜 이래. 당연히 이런 날은 한 잔 안 하면 섭하지. 라운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룸서비스만 부탁하고 나온 거예요. 나 얼굴 까는 순간 저기는 지옥이 될 걸.”
정난우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 밀리건이 서울에 떴다고 제 열혈 팔로워들이 이미 한바탕 소동을 떨어댄 후였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그 소식을 분명 접했을 거다. 평소라면 닮은 외국인이네, 하고 넘길 것도 지금은 위험했다.
“작년 크리스마스엔 뭐 했어요?”
에녹이 묻는 말에 정난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파리에서 공연 했을 걸요.”
“재작년에는?”
“그 때는 도쿄……?”
말을 말아야겠다. 에녹은 한숨을 씹어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객실까지 도착하는 내내 대화는 단절되었다. 발자국 소리마저 카펫이 집어삼켜 조용했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간 에녹이 코트부터 벗어던졌다. 짧게 주위를 둘러본 그가 후한 평가를 내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네요.”
열심히 돈 좀 처발랐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였다. 복층 구조 객실이었다. 넓게 트인 1층에는 거실과 다이닝, 욕실은 물론 개인 미니 풀장까지 있었다. 침실은 2층에 있는 것 같았다.
에녹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부터 걷었다. 정난우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르다 갑자기 환해지는 조명에 걸음을 멈췄다. 쏟아지는 빛 가루들이 눈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감은 눈 속 붉은 장막 안에서 작은 낙뢰들이 번쩍거렸다.
“눈 아파요?”
에녹의 기척이 도로 가까워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꺼풀을 비비는데, 그 손목은 단호하게 낚아채졌다.
“비비지 마. 각막에 상처 날지도 모르니까.”
에녹은 한 손으로 정난우의 감은 눈 위를 살짝 덮어주었다. 조금씩 손가락 틈을 벌려 조명을 안으로 흘려줬다. 정난우는 어색한지 몸을 뒤틀며 미약한 반항을 했다.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요. 가만 좀 있어 봐.”
에녹은 요령 좋게 한 손으로 정난우의 코트를 벗겨 바닥에 떨어뜨렸다. 충분한 시간을 염두에 두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걷다 만 커튼 사이로 검게 잠긴 도시의 조각이 갇혀 있었다. 짧게 바깥풍경을 바라보던 에녹은 빈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몇 번 터치하자 MP3파일들이 주르륵 떴다. 그 중에 하나를 재생시켰다.
맑은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랄하고 통통 튀는 멜로디보다는 느리게 흐르는 성스러움이 더 어울리는 밤이었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가 평온하고 만물이 밝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노랫말이 리듬 위에 얹어졌다.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정난우의 귀가 반갑게 쫑긋거렸다.
눈가가 절로 허물어졌다. 에녹은 정난우의 등 뒤로 돌아가 섰다. 눈 가린 손은 내내 그 자리에 두었다. 휴대폰 쥔 손으로 마른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다.
에녹? 의아함 깃든 호명에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붉어진 귓바퀴 안에 낮은 음성을 흘려 넣었다.
“걸음마.”
“……네?”
또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는 정난우를 그대로 밀고 갔다 좁은 보폭으로 발을 옮기자 정난우는 떠밀리듯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장난인 듯 진지하게 시작했지만 재미가 들렸다. 에녹은 픽픽 웃으며 정난우를 창문 가까이 몰아갔다.
차르륵.
젖히다 만 커튼을 한껏 구겨 끄트머리에 처박았다. 캐롱은 여전히 허공에서 비눗방울처럼 터지고 있었다. 에녹은 휴대폰을 구석에 봐두고 창터에 앉았다. 안겨 있던 정난우도 자연스레 그의 다리 사이에 앉혀졋다. 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에녹……?”
이번엔 확연히 당황한 어투였다. 에녹은 대답 대신 눈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줬다. 짧은 캐럴은 곧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에녹은 손가락 끝으로 톡톡 창문을 두드리며 바깥을 향해 고갯짓했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작은 탄성이 성대를 울렸다. 이제야 에녹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불야성의 도시가 내뿜는 빛은 정열적이었다. 촘촘하게 달라붙어 있는 건물들은 밤을 잊었다. 밀집되어 있는 환락의 불빛들이 발광하는 미물들처럼 하느작거렸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새카만 밤. 정열의 도시가 젖어들고 있었다.
“눈 오는 거 좋아한다며.”
반짝이는 가루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밤의 치맛자락은 산란하는 눈의 결정들에게 제물처럼 던져졌다.
정난우는 느리게 한 손을 창문에 짚었다. 눈송이들은 초가 다르게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한 줌 재가 될 기세로 펄펄 끓던 향락들도 그 성스러운 순백의 앞에서는 무력했다.
에녹은 차가운 유리 위로 옆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메리크리스마스.”
그의 입술에서 약한 숨결이 굴러 나왔다. 그 따뜻함은 정난우의 짚은 손가락 사이에 한참 동안이나 고여 있었다.
정난우는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창문과 자신 사이에 울타리처럼 늘어져 있는 그의 다리가 보였다. 그의 한 손은 여전히 가볍게 허리를 감은 채였다. 이 친근한 스킨십이 이제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네…… 메리크리스마스, 에녹.”
정난우의 대꾸는 입에 붙지 않아 허공에 어색하게 떠돌았다. 에녹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정난우를 돌려 앉혔다. 똑 떨어지는 시선은 오늘도 에녹의 가슴팍에 고정되었다. 반쯤 들린 속눈썹과 앞머리가 부대꼈다.
저 머리만 좀 잘라도 위쪽 시야는 더 트일 텐데…….
물론 그게 싫어서 일부러 기르는 건 알고 있었다. 아쉬움을 눌러 놓고서 에녹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파티 했던 게 언제예요?”
정난우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잠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러다 약간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십 년 전쯤에…….”
“열여섯 살? 그게 마지막?”
정난우가 조금 헷갈리는 듯 애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녹은 여전히 창에 기댄 채로 느리게 팔짱을 꼈다. 시력을 되찾은 이후론 없었다는 말 같았다.
어쩐지 입 안이 쓰게 말랐다. 짐짓 무심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생각을 거듭하다 물었다.
“크리스토퍼 강이랑도 안 만났어요?”
“서로 바쁘다 보니까…….”
“매년?”
정난우가 과거를 되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이라면, 바쁘다는 건 결국 핑계야.”
무심한 어투가 날카롭게 정난우의 뺨을 베었다. 상처 난 것처럼 살짝 떨리는 그 창백한 뺨을 에녹의 손끝이 문질렀다.
“나 같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었더라도 날아왔을 거라고. 금방 다시 돌아가야 하더라도, 한 시간이는 십 분이든 뭐 어때. 안 보면 미치겠는데 잠깐만이라도 봐야지.”
생각을 거르지 않고 쏟아져 나간 말이었다. 그건 무엇보다 제 진심에 가까울 거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제 속마음이 그런 거라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 되었건 자신은 그렇게 할 거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언젠가 당신이 보고 싶어 애간장 타는 순간이 올 것 같아. 이런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느낀 바를 솔직히 내뱉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잠깐만요. 룸서비스 왔나 봐.”
에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정난우는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안 보면 미칠 것 같은 사람, 그 한 덩어리로 뭉친 단어의 조합들은 그와 참 잘 어울렸다.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그라면 그럴 만도 했다. 피치 못할 스케줄로 바쁜 와중에서도 반드시 틈을 만들어 튀어갈 거다. 애틋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뜨겁게 속삭일 게 분명했다.
그가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간 끝에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에녹이 말한 거였다. 좀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다고 하니까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상실에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누구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에녹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활어처럼 튀어 올랐다.
「바쁘다는 건 결국 핑계야.」
핑계…….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색, 제각각의 소리, 제각각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에녹이 유독 뜨겁게 반짝이는 사람일 뿐, 모든 사람을 그와 같은 위치의 비교선상에 놓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핑계라는 단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강도영은 종종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나도 보고 싶다는 말을 되돌렸다. 대화의 맥은 늘 그쯤에서 잠시 끊겼다. 절단되어 굳어가는 사이에는 늘 차가운 호흡만이 흘렀다. 스화부에서 길게 흘러 나오는 그의 숨결에서 정난우는 늘 고통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를 사로잡은 절망의 본질은 여전히 모호했다. 그의 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추출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늘 견고하게 반짝이던 서늘한 별이, 자신이 무너지던 그날 함께 추락했다는 거였다.
그 깊은 어둠의 뿌리는 자신이었다. 자신이, 그도 망가뜨린 거였다.
따악一
불쑥 눈앞에서 소리가 터졌다. 깊이 침장해 들어오던 어둑한 안개가 화들짝 물러갔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렀다 아랑곳 않고 커다란 손이 따라붙었다.
에녹이었다. 그가 다시금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나랑 같이 있으면서 딴 생각 하지 마.”
금속처럼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새삼스런 생각이 불쑥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에너지. 그에게는 항상 그런 뜨거운 향기가 났다고.
“내가 오늘 무시한 전화며 문자 메시지며 몇 갠지나 알아요? 그런 날 앞에 두고 딴 생각하면 못쓰지. 응?”
에녹은 아까처럼 맞은편에 앉았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무릎이 잡혔다. 그가 예고 없이 무릎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매끈한 나무 창턱 위로 엉덩이가 쭉 쓸리며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정난우는 어리벙벙하게 눈만 끔뻑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주 느리게 이해했다. 에녹이 벌려놓은 그 공간에 무언가가 놓였다.
“파티 합시다. 초라한 숫자지만 멤버는 나름 화려하네. 나 이런 거 좋아하거든. 소수정예.”
외곽시야에 걸린 그의 입술이 매혹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와 동시에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성냥불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유황 타는 냄새가 연기에 실려 허공에 흐드러졌다. 확 타오른 불꽃은 촛불의 심지를 단번에 감염시켰다.
케이크였다. 정중앙에 ‘Merry Christmas’라고 써진 판 초콜릿이 불빛 아래 일렁거렸다. 케이크 윗면은 딸기 마을이 슈가 파우더를 뒤집어썼다.
초콜릿으로 만든 산타와 루돌프도 있었다. 정난우는 멍하니 타들어가는 불꽃을 응시했다. 그 모양이 작은데도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더듬더듬 추리해 보다 깨달았다. 실내는 지금 인공조명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하나가 더 늘었다. 유리병 안의 향초였다. 와인이 등장하고 와인 잔이 그 뒤를 따랐다. 위스키는 왜 끼어 있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캐럴 위로 그의 풀어진 목소리가 부드럽게 덧입혀졌다. 허밍처럼 가사는 거의 뭉개져 있었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라요. 그리고 좋은 한 해 되세요.)
정난우는 망연히 탄복했다. 귀는 또 연신 쫑긋거렸다. 독특한 음색으로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는데도 기묘하게 고막은 충만히 젖어들었다. 긁는 듯이 간지럼 태우는, 무방비하게 일어난 솜털을 배려 없이 쓰다듬는, 그 거친 음성의 결이 목덜미를 또 움츠러들게 했다.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흠 하나 없는 건지 신기했다. 희미하게 고동을 울리는 가슴이 따뜻하게 물들어갔다. 연주여행이 일상화로 굳어진 지 오래라, 생일날에도 케이크를 보는 게 요원했다. 제 생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어서 누군가 먼저 기억해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었다. 아, 성경에 나오는 아기예수님의 생일이기는 했다. 신화나 전설 속 인물처럼 여겨지는 누군가의 생일을 함께 축하한다니, 그것도 이렇게 성심성의껏, 어찐지 조금 우습고 재밌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아기자기한 데코의 케이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눈앞의 남자가 내뿜는 찬란한 빛 때문일까.
정난우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움찔거려 제 목소리도 그의 노래 위에 포갰다.
Glad tidings we bring to you and your kin.
(당신과 당신의 친지들에게 덕담을 드려요 )
Glad tidings for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 위한 덕담이요.)
정난우가 멜로디를 따라가기 시작하자 에녹은 반대로 성대를 꽉 조였다. 그렇게 해야겠다고 맘먹은 게 아니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아기 천사들의 합창 속에 덧씌워진 정난우의 곡조, 그건 그를 안 이래로 가장 청명하고 밝았다.
무대 위의 정난우는 음울한 악마처럼 모두를 충격에 잠기게 했다. 많은 이들이 함께 절망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었다. 관객들은 늘 그 광기에 무참히 녹아 휘말렸다.
에녹은 그래서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작게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하는 정난우의 입술을 말없이 주시했다. 일렁이는 촛불의 입김이 그 근심없는 얼굴을 끊임없이 핥았다.
창백한 얼굴에 늘 드리워 있던 습한 장막이 제 가슴으로 전이되어 온 듯했다. 눅눅하게 고이는 이상한 감정의 물결이 가슴 밑바닥부터 천천히 차올랐다.
끈끈한 눈빛이 입술 위를 느리게 더듬어 올라갔다. 그럴수록 물길은 더 요동쳤다.
가늘게 접힌 눈과 살짝 올라온 뺨…….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거였다. 꼬마아이 앞에서 동요를 부르며 웃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녹의 눈썹이 슬쩍 내려앉았다. 위아래 어금니가 꽉 맞물렸다.
고작 이런 작은 이벤트에도 즐거워하는 너를, 왜 이제껏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았지.
어이없게도 에녹은 강도영마저 원망했다. 그리도 아껴줬다면서, 그렇게 애써서 밝은 곳으로 이끌어줬다면서, 이 말랑말랑한 알맹이를 왜 보듬어주지 않고 방치해 뒀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화마저 치미는 것도 같았다.
정작 매년 이 낭만적인 밤을 그와 함께 보냈다면 맹렬히 뜨거워졌을 거다. 그러나 그걸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문득, 에녹은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을 대면 흰 미소 가루가 묻어 나올 것만 같았다. 핥아 먹으면 마약보다 더 환상적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억눌러져야 하는 충동이었다. 건드리는 순간 허상처럼 사라질 걸 알고 있었다.
결점 없는 미소는 가느다란 케이크 초의 희생이 끝을 보일 때까지 이어졌다. 에녹의 머릿속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예전, 정난우의 무대를 처음 관람했던 당시의 감상이 새삼 생기를 되찾고 호흡했다. 제 눈에 비친 지금 이 순간의 정난우는, 밤하늘에 빛나는 단 하나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에녹은 미미하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봐요. 내가 어쩌면, 당신을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좋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당신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정말로 올 것 같아.
“기억하죠? 아까 내기했던 거.”
오늘도 먼저 취한 건 에녹이었다. 잔뜩 풀어진 발음으로 운을 뗐을 때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기억해요.”
알코올이 둔하게 만든 시신경은 초점을 조금씩 늦게 따라갔다. 미약한 지진이 일어나는 시야 안에서 정난우는 여전히 단정하게 앉아 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부탁할 게 있어요. 아니, 사실은 많은데, 내 욕심대로 하면 어처구니
없는 것도 막 들이댈 것 같은데 양심 상 그럴 수가 없네. 내가 어제 본의아니게 우리 아티스트 정한테 사과해야 할 일을 만들었거든.”
이어진 말에 정난우는 조금 더 눈을 들었다. 에녹은 위엣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채 아무렇게나 창문에 무게중심을 맡기고 있었다. 시선 끝에 걸린 그의 가슴팍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사과요?”
응, 대답하며 에녹은 잔을 들었다. 가볍게 내밀자 섬세하게 커팅 된 크리스털 잔이 가만히 부딪쳐 왔다.
“그래, 사과. 나 내기에서 이긴 거, 어제 일 용서해 주는 걸로 해요.”
정난우는 가만히 전날의 일을 머리에서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딱히 이거다 짚이는 게 없었다. 그는 제게 미안해 할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그에게는 늘 받기만 하는 처지였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일방적인 관계는 고마움보다 초조함을 더 크게 했다. 제 심각한 악습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통제할 방법은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자신은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 중에서 에녹이 원하는 건 뭐든 줄 생각이었다.
“그럴게요. 말해 보세요.”
에녹은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한 번 흐트러뜨렸다. 굽혀 올린 한쪽 무릎 위에 잔 든 손을 걸쳤다. 의미 없이 흔들 때마다 얼음이 물속에서 휘돌았다.
“내가 어제 당신 어머니께 물었거든. 정난우가 자라온 환경이 궁금하다고. 사실 그냥 여기저기 배설물처럼 흩어져 있는 당신 인터뷰 기록들,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는 있지. 그런데 그걸 봐서 뭐하나 싶더라고.”
에녹은 위스키 한 모금을 혀 위에서 굴렸다. 쓰디쓴 맛이 맴돌았다.
“난 당신 입에서 나온 회고가 궁금한 게 아니었거든요.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지난날을 듣고 싶었어.”
향초가 선사하는 한 줌 조명이 두 사람이 앉은 작은 공간만을 간신히 밝혔다. 창밖에는 그새 굵어진 눈발이 화려한 빛을 가렸다.
에녹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그러는 동안 정난우는 잔속에서 녹아내리는 얼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 숙인 눈동자는 쏟아진 앞머리 속에 완전히 가려 두었다.
에녹은 정난우 자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주 먼 과거를 입에 담았다. 어머니를 감금했던 아버지, 학대당한 어머니, 유혈이 낭자했던 욕실,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제 모습, 어머니에게서 제게 세습된 폭력까지도.
그걸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평온하게.
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몬 건 아버지였고, 그녀를 끝내 밀어버린 건 저 자신이었다. 어머니는 제가 처음으로 부서뜨린 사람이었다. 그 원죄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로 인해 파생된 모든 절망들,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니 이 침착함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증발해버린 죄책감이 불안했다.
정난우는 멍하니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스케줄 조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 낯선 상황을 객관적 눈을 가진 이에게 평가 받고 싶었다. 이것도 강박이라면 강박이었지만, 자신은 제 감정을 파헤치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이 얘기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내내 망설였어. 괜히 말을 꺼내서 애써 묻어둔 아픈 기억들 떠올리게 할까봐.”
“…….”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묻고 넘어가기엔 뭔가 엿들은 기분인 거야. 찜찜하고 미안하고, 그래도 당신 얘긴데 내가 구태여 캐물었으니까 응당 그 대가는 치러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묻겠는데 혹시 기분 나쁘 면…….”
한없이 늘어나는 엿가락처럼 그의 말미가 가늘게 이어졌다.
“벌 받을게.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도 돼.”
정난우는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술병을 들더니 두 개의 잔에 원액을 더 얹었다.
먼저 건배를 청하는 것도 처음이라 에녹은 얼떨결에 응하면서도 힐끔 기색을 살폈다. 가라앉은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에녹은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요.”
“뭐가?”
“저는 이제껏 저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거든요. 기자들이건 팬들이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건 아무렇지 않게 묻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상한 추측으로 루머를 양산해 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요.”
“그건 그 새끼들이 이상한 거야.”
에녹은 불쾌한 어투를 씹어 내뱉었다. 정난우는 흐리게 웃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요, 단 한 명도 저에게 미안하단 말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성공적인 데뷔 후 줄리아드 예비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협연은 자주 잡혔다. 신문에도 종종 실렸다. 그에 시기하는 사람들도, 흥미로워하는 사람들도 점차 불어났다. 갑작스런 잠적과 휴학에 온갖 괴소문이 떠돌았을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사실은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하려고 했었다. 강도영과 그의 모친 오정연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거다. 강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오정연은 줄리아드의 교수가 아니었더라도 틈틈이 많은 것을 가르쳐주던 고마운 은사였다. 그들의 말을 따라 휴학으로 결정을 내린 거였다.
어머니 곁에서 마음을 안정시킨 뒤 복학한 학교는 조용했다. 모두가 자신을 힐끔거리며 수군댈 줄 알았는데 그저 기우일 뿐이었다. 아무도 사적인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의 외톨이처럼 지내다가 졸업을 마쳤다. 모두 다 잊었나보다 했다. 하지만 늘 세상은 제 바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난우 씨 동문이 이상한 소리 하던데. 그거 사실이야?」
공연을 다니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아주 간혹 질 나쁜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들을 마주쳤다.
「자기 쫓아다니던 아저씨 팬 있었다며. 자기 휴학계 내기 전에 그 사람 신문에 실린 건 알고 있었어? 웬 학생 하나 납치해서 감금했다가 들켰대. 도주 도중에 사고 나서 즉사했고.」
그 말의 노골적인 뉘앙스를 감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 감 금됐다는 애가 너지?’ 하고 확신을 갖고 묻는 거였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 정도는 침묵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기이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라지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것조차 제가 견뎌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강도영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은 반응 없는 상대를 자극하는 것에 금방 질리고, 금방 잊어버리는 거였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 알아요. 당신의 호의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에녹.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전 늘 고마운 걸요.”
고마워요, 정말로.
정난우는 강조하듯이 한 번 더 뇌까렸다. 날카로운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음영이 흔들렸다.
예상대로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착잡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해서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만.”
에녹은 걸음을 끌며 사라졌다. 이내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바닥에 내팽개쳐둔 그의 코트가 들려 있었다. 그가 물었다.
“이게 뭔 줄 알아요?”
“…코트잖아요.”
“그냥 코트가 아니지. ‘내’코트, ‘내’옷.”
에녹은 물렁한 미소를 지으며 정난우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앉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정난우의 앞, 어깨 위로 코트를 둘러 끌어당겼다. 가슴에 닿는 뼈대가 곧았다. 안 움츠러들었다는 증거였다. 몸을 푹 감싸준 코트 위에 두 팔을 졸라매서 품 안에 넣었다.
“내 옷들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거든. 그게 뭔 줄 알아?”
“…글쎄요.”
“이 안에 있으면 안 다쳐. 마음 아플 일도 없을걸. 진짜 신기하지? 못 믿겠지만 사실이야.”
에녹은 나른한 어투로 사기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정난우는 의아하게 고개만 갸우뚱했다. 에녹은 하얀 어젯죽지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뭐 어디 아플 것 같다 싶으면 여기 찾아오면 된다고. 아무래도 다칠 것 같다 싶어도 여기로 들어오면 되고. 혹시 내가 깜빡하고 단추 잠가 놨으면 그냥 다 풀어내고 안으로 파고들면 돼.”
“저, 에녹……?”
갑작스런 살 접촉에 정난우가 당혹 섞인 부름을 했다. 에녹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탁한 음성을 흘렸다.
“잠깐 이렇게 있어요. 좀 안아주고 싶어서 그래.”
“…….”
“사실은 어제부터 그랬거든. 그냥 뜬금없이 품 안에 넣어주고 싶더라고. 코트 안에 쏙 넣고 그 위로 앞섶을 여며주면 어떨까, 뭐 그런 생각도 해 보고.”
“…왜요?”
정난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에녹의 미끈한 미간이 살짝 주름졌다. 보드라운 살결에 뺨을 비비며 대꾸했다.
“나도 그걸 조사 중이야. 확실해 지면 얘기해 줄게. 지금은 내가 정말 미친놈처럼 계속 오락가락하거든.”
자꾸 헷갈린단 말이지 .
내가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 거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네 옷을 벗기고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벌써 날뛰었을 놈이거든. 네 온 몸에 키스하고 네 발가락도 정성스레 핥고 밤새 울리고 싶어져야 정상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냥 안아주고 싶어. 다치지 않게 푹 싸매주고 싶어. 그게 다야. 이건 정말 이상해.”
따끈하게 들떠 있는 상태였다. 취기 어린 옅은 흥분도 분명 존재했으나 일정 수위를 넘지 않았다. 절제된 고양감은 한계치 아래를 기분 좋게 부유하기만 했다.
애매한 건 질색이었다. 뭘로 확인이 가능할까, 잠깐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에녹이 뜬금없이 물었다.
“오늘 즐거웠어?”
“네. 덕분에.”
정난우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칭찬해 줘야지. 왜 이렇게 뻣뻣해?”
어깨 위에 뺨을 붙인 채 비스듬히 눈만 올려 떴다. 정난우는 핵심을 짚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뭘 해 달라는 건지 고민에 잠기려는 것 같았다. 에녹은 픽 웃으며 정답을 말해 줬다.
“꼬마 해미가 예쁜 짓 하면 해 주는 거 있잖아.”
에녹은 둘러 안은 팔에 은근히 힘을 실었다. 정난우가 미적거리며 말을 받았다.
“해미는 아무 것도 안 해도 예쁜데…….”
“뭔 소린데. 난 안 예쁘다는 거냐?”
보지 않아도 날카로워지는 에녹의 눈초리가 상상됐다. 갑자기 얘기가 왜 그리로 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정난우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럼 뭐가 문제야. 그냥 애라고 생각해.”
에녹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난우의 고개가 도망치듯 비틀렸다. 개의치 않고 손가락 끝으로 뺨을 톡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한 번만.”
일단 가볍게 진도를 뽑아 볼 생각이었다. 타액 섞는 키스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 접촉이면 뭔가 조금 꽝 와 닿는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런 거 이상한 거 아니에요?”
잠시 뒤 정난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에녹은 멈칫한 반응을 능숙하게 숨기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닐 걸?”
정난우가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라고 그랬는데…… 기분만 좋으면 아무한테나 안기고 입술부터 들이미냐고 예전에 혼났거든요. 보통사람들은 안 그런다고.”
관절 녹은 사람처럼 풀어져 있던 몸에 서서히 심지가 돋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정난우의 머리카락 그늘을 꿰뚫었다. 고요히 날 선 신경을 애써 감추며 낮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정난우는 순진하게 사실을 말했다.
“내내 몰랐는데, 제가 스킨십에 되게 익숙한 편이더라고요.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엄마가 내내 목욕도 시켜주고, 끌어안고 뽀뽀하고 그런 거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런데 시력을 되찾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아무한테나 키스해서 혼났다? 그래서 나한테 하는 것도 좀 이상한 거 아니냐 이거야?”
에녹이 애써 웃으며 확인사살용 화살을 날렸다. 정난우 과녁이 정직하게 정중앙을 꿰뚫렸다.
“네.”
참 담백한 수긍이었다. 에녹은 일순 말을 잃었다.
와…… 얘가 사람 좀 돌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당연히 아무하고나 그러면 안 되는 건 맞아. 그건 아주 잘 혼났네. 그런데.”
빤히 노려보는 푸른 안광이 사납게 흩어졌다. 냉랭하게 조인 공기에 정난우가 움찔했다. 에녹은 싸늘하게 물었다.
“야. 내가 아무나야?”
에녹은 이상한 포인트에서 끓어오른 거였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데. 그런 말 내 앞에서 할래?”
당황한 정난우가 다급히 한 줌 숨을 들이켰다. 혹여 오해를 살까 봐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닌데요, 그런 건. 저한테도 에녹은 특별해요.”
“…….”
“진짜…예요. 저는 혹시나 제 행동이 남들한테 이상하게 보이는 건 아닌지 항상 걱정이 돼서…… 원래 이상한데 거기서 더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에녹은 저한테 아주 고맙고, 특별히 좋은 사람이에요.”
어설픈 단어 꿰맞추듯 정난우가 변명했다. 곤두선 신경은 점차 녹아내렸다. 내가 원래 이렇게 쉬운 놈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맥 빠진 웃음을 코끝에 걸고 말았다.
에녹은 제 얼굴로 정난우의 턱을 밀치며 채근했다.
“그럼 얼른 해봐. 나한테는 해도 돼. 말했잖아. 네 첫 번째가 돼 줄 거라고. 안 다치게 꽁꽁 싸매도 주고.”
“…….”
“아, 얼른.”
포기 않고 닦달했다. 잠시의 공백 뒤 뺨에 물기 어린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곧바로 홱 떨어져 나갔다. 멍한 시야에 눈치 살피는 쫑긋쫑긋 귀가 보였다.
천지가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단전 아래가 찌르르 울려 달려 들고픈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웃음만 났다. 에녹은 목 안을 울리며 정난우의 어깨에 얼굴을 내렸다.
“뭐야, 이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모르겠다.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런데 환장하게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이 상태로 침대 위를 뒹굴거려도 좋을 것 같았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더 크고 멋진 파티를 열어 줄게. 오늘처럼 급조해서 허접하게 말고, 진짜 제대로 된 파티로.”
에녹은 정난우의 체향을 흠뻑 마시며 약속을 구했다.
“그 땐 오늘보다 더 환하게 웃어 줬으면 좋겠다.
바느질 하듯 이어진 말에 정난우는 한 박자 늦게 네, 했다.
*
손목시계를 힐긋 살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만찬이 조금씩 지겨워졌다. 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크리스마스이브 콘서트 후의 리셉션 자리였다.
객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한껏 차려입은 남녀들의 분위기는 사교파티를 방불케 했다. 아직 미혼인 단원들이나 관계자들은 서로를 은밀히 탐색하기에 바빴다.
짐승우리에 있는 기분이었다. 품질 좋은 먹잇감을 찾는 눈들이 여기저기서 번들거렸다. 무료한 눈으로 주위를 짧게 둘러보다 몸을 틀었다.
“어디 가, 크리스?”
매니저 알렉스 그리브가 뒤를 따라붙었다. 강도영은 가까이에 선 서버에게 와인 잔을 건네며 짧게 대답했다.
“테라스. 바람 좀 쐬고 올게.”
“나가긴 어딜 나가? 밖에 눈 엄청 오는데.”
“외문 밖으로는 안 나가. 잠깐이면 돼. 머리 아파.”
귀찮다는 듯이 뒤로 손만 내저었다.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태도였다. 알텍스는 얼른 돌아오라고 못을 박고서야 떨어져나갔다.
샹들리에의 화려하고 우아한 조명을 밟으며 테라스 내문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막 힘을 주려 할 때였다.
“어머, 이거 정말 바이올리니스트 정? 웬일이니. 어쩜, 선글라스 좀 봐. 귀여워라.”
지체 없이 떨어지려던 발이 그대로 멈췄다. 강도영은 소리 난 방향으로 느리게 고개를 꺾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낭랑하게 웃고 있었다. 30대 미혼녀인 부악장이었다. 그녀의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그 주위를 두 명의 일행이 둘러쌌다.
“처음 봐요? 이거 요새 되게 유명한데?”
“이 옆에서 춤추는 게 진짜 에녹 밀리건이라고? 정말?”
프라하 길거리 콘서트 영상인 모양이었다. 별 다를 거 없는 얘기였다. 강도영은 그대로 문을 밀어 젖혔다. 외문이 바낄을 막고 있지만 싸늘한 공기는 곧바로 슈트를 꿰뚫었다.
“그렇다니까요. 요즘 둘이 아주 꼭 붙어 다니는 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팬들이 몰래 찍은 사진들 보면 에녹이 거의 여자 친구 에스코트 하듯이 정난우를 안고 가더라고요.”
강도영은 다시금 정지했다. 폭설 쏟아지는 테라스 전경이 차가운 눈매에 갇혔다. 예민하게 돋아난 청각 세포가 그쪽으로 쏠렸다.
“에이, 아니겠지 . 정은 원래 버릇이 옆 사람 옷깃 붙들고 걷는 거잖아. 눈 안 보였을 때처럼. 게다가 밀리건이 여자 좋아하는 건 전 세계가 다 아는데?”
부악장이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단단하게 닫힌 눈빛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죽였다.
“또 모르죠. 할리우드 애들 남녀 안 가리는 거 하루 이틀인가. 게다가 상대가 정난우잖아요.”
“정이 왜? 그 친구 동성애자라는 소리 못 들었는데?”
“정확히는 연애하는 걸 아무도 못 본거죠. 그런데 정이랑 줄리아드 함께 다녔던 세대들 사이에선 묘한 소문이 돌더라고요.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부악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동색의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린 그녀가 무슨 소문? 하고 되물었다.
“정난우가 휴학계 내기 직전에 잠적한 적이 있었대요. 리사이틀이었는지 협연이었는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그 공연도 평크가 나서 사람들이 막 찾아다니고 그랬다대요. 그리고 며칠 뒤 기사가 하나 났는데 이게 문제였죠. 정신이 좀 이상한 중년 남자가 웬 학생 하나 납치해서 닷새 동안 거의 물만 먹여 가면서 감금했다고. 근데 신문에 실린 그 남자를 학생들 몇이 알아 본 거예요. 정난우 팬이었다네. 학생들끼리 실내악 연주회 열었을 때 그 남자가 팬이라면서 꽃 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정확히 기억한다고요.”
강도영은 피식 웃었다. 놈의 목소리에서 악의가 철철 넘쳐흐르더니 결국 뻔한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화보다 먼저 웃음이 나온 거다. 설마 제가 공식적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주워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천천히 구둣발을 끌어 뒤로 물러섰다. 스르르 닫인 문이 다시금 바깥의 별세상을 차단했다. 따뜻한 공기가 파고드는 목의 단추를 하나 풀어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들을 향해 완전히 돌아섯다.
“얘가 미쳤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큰일 날 소리를! 그거 그냥 루머로……!”
부악장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 순간 무심결에 시선을 들었다가 강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목젖까지 밀고 올라왔던 말들도 순식간에 까라졌다. 강도영을 등지고 선 남자는 어두운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주둥이를 놀렸다.
“역시 부악장님도 들은 적 있으신가 보네요. 루머 아니고 진짜 확실하다니까요. 교수진들까지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소문 퍼뜨리지 말라고 주의 를 줬다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요. 그 뒤로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그냥 휴학하고 사라져버렸는데. 겉으로는 쉬쉬 해도 학생들은 다들 눈치 챘지.”
“저, 저기…… 그 얘긴 이제 그만…….”
얘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죽으려면 너나 죽지 왜 하필 여기에서 이래!
부악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침봉 위에 서 있는 듯 식은땀이 흘렀다.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는 척 시선을 빗겨 내렸다.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강도영의 안광을 받아내기 버거웠다.
그녀는 같은 음악가로서 강도영을 제법 신뢰하고 좋아했지만, 인간적인 호감은 조금도 없었다. 그건 이 바닥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거의 그럴 거다.
하지만 부악장의 만류에도 남자의 불붙은 혀는 꺼질 줄 몰랐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잖아요. 납치해서 데려다가 뭐 했겠어요. 아무리 숨겨도 뻔한…….”
그 때였다. 느긋한 음성이 그의 뒷말을 잘랐다.
“그래서 너, 무슨 상상을 하는데?”
남자가 말을 멈추고 움찔 굳었다. 그도 그제야 아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소리 난 곳으로 뒤돌아볼 수도 없었다. 경직된 어깨를 단단한 팔이 찍어 누르듯 감싸왔다.
“계속 해 봐.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랑은 좀 다른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나도 궁금하니까.”
싸늘한 침묵이 훈훈한 공기를 깨부쉈다. 강도영은 부악장의 굳은 눈을 빤히 노려보았다. 천천히 고갯짓을 하자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강도영은 비스듬히 눈을 내렸다.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땅바닥에 처박힌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인질처럼 붙잡힌 남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채근했다.
“왜 갑자기 입이 붙었을까? 얼굴 좀 펴. 누가 보면 내가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
“그…… 크리스 씨…….”
남자의 안면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강도영의 눈가에 웃음이 매달렸다. 그 안의 새카만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런. 난 내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니 기억에도 없는 얼굴이고…… 내가 기억에 없다는 건 네 실력이 별 볼 일 없다는 건데, 퀸스 단원이야? 무슨 악기 다뤄?”
남자의 얼굴이 모욕감에 붉어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강도영은 허락도 없이 남자의 손을 들어 유심히 살폈다.
“바이올린? 첼로?”
“바이올린을…….”
“아아. 난우가 석 달 쯤 전에 여기서 협연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너도 있었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만 하다는 듯이 강도영의 눈시울이 가늘어졌다.
“가엾게도, 그 때 절망했던 모양이네.”
“…….”
“함께 해 보니까 치가 떨리지? 네가 숨넘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발악해도 닿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끌어내리는 걸로 대신하려고? 그런데 난우를 끌어내리면 그 자리가 네 것이 되나?”
강도영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비수를 날렸다. 남자는 오기처럼 그런 거 아닙니다, 했다. 낯 색은 더 붉어졌다. 모멸감에 꽉쥔 두 주먹은 하얗게 질렸다. 강도영의 코끝에 넉넉한 비웃음이 스쳤다.
“애써 부정하지 않아도 돼. 격이 다르잖아, 격이. 나도 걔 처음 봤을 때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나 싶었거든. 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용납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강도영은 딱딱하게 굳은 그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우리 신입 단원이 소문에 관심이 많은 모양인데…… 그럼 내가 얼마나 연줄은 많고 모럴은 없는 개새낀지도 잘 알 거야? 정난우 데뷔시켜주고 열심히 싸고도는 게 나라는 것도 모를 리 없을 거고.”
남자의 얼굴은 붉은 색에서 흙빛으로 변이했다. 강도영은 혀를 차며 눈가를 좁혔다.
“간이 큰 거야, 멍청한 거야. 그 개새끼 있는 공간에서 해도 될 소리 안 될 소리 구분도 못해?”
나긋한 저음은 부드러운 만큼 더 소름끼쳤다. 남자의 몸이 똬리 틀린 먹잇감처럼 움츠러들었다. 강도영은 경멸의 눈초리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니면 연줄 파워 다 이길 만큼 네 실력에 자신이라도 있어? 난우 반 정도는 돼? 그럼 그렇게 간 크고 멍청해도 되긴 하는데. 어쨌든 이 바닥은 실력만 있으면 아무리 훼방을 놔도 무대는 설 수 있거든. 전혀 예상 못했던 일상들에서 좀 괴로워질 뿐이지.”
“전 그냥…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궁지에 물린 남자가 덫을 물었다. 강도영의 눈에 어두운 이채가 스쳤다. 고개를 더 기울였다. 그 초라한 그늘을 시선으로 더 깊이 찔러 올리며 점잖게 입 꼬리를 찢었다.
“그래. 너한테 그 씹 소리를 지껄인 줄리아드 출신 애새끼들이 누구라고?”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오르내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 비로소 간파한 표정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망설였다. 강도영은 달래 듯 굳은 어깨를 매만져주었다.
“혼자 독박 쓰면 힘들어. 죄는 같이 지었으니 벌도 나눠서 받아야 하잖아. 그러게 입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의 그 개 같은 망상은 집어치웠어지.”
강도영의 턱이 남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허공을 노려보는 눈에 온기는 한 가닥도 없었다. 그가 문득 한숨지었다.
“내 줄리아드 후배님들은 졸업 후에 서로 교류를 안 한다니? 동문 애들이 자꾸 시궁창에 처박히는 걸 봤으면 이제 좀 눈치 채고 뼈에 새길 때도 된 것 같은데.”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어깨에 걸었다. 가운 매듭을 조여 매며 소리 진원지로 발을 옮겼다.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외삼촌 오정수였다. 전화를 받았다.
《메리크리스마스, 크리스. 웬일로 전화를 다 하셨을까?》
오정수의 인사는 다분히 경박했다. 15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그도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섰다. 나잇값을 못하는 그의 어투에 강도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거 하지 말라니까요.〕
《하하하. 라임 살아 있잖아. Merry Christmas, Chris. 꼭 네 생일 같고. 안 그래?》
〔성모 마리아가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를 하시네요.〕
강도영은 코웃음 치며 말을 홀렸다. 그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악가 칼릭스 윌본, 첼리스트 그레이스 헤더웨이, 이 씨발 것들 밥줄 좀 끊어 줘요. 윌본 이 놈은 그냥저냥 공연하면서 돌아다니는 놈이니 이름은 알 테고, 헤더웨이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네.〕
《……아기 예수 오신 날에 꼭 이런 대화 해야겠냐?》
〔삼촌.〕
장난지지 말자는 듯 묵직한 부름을 던졌다.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수화부 멀리에서 긴 한숨이 흩어졌다.
《또 난우 일이야? 왜, 또 뒤에서 헛소리 씨부리고 다니든?》
〔뻔한 거 묻지 마요. 그 외에 뭐가 더 있다고.〕
강도영은 젖은 머리를 손끝으로 대강 쓸어 넘겼다. 게을러터진 놈 움직이게 하는 게 공연 아니면 그런 것밖에 더 있나. 새삼스러웠다.
《누나가 그렇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걔들은 지금까지 왜 그러냐. 불쌍한 애 성공한 게 그렇게 배가 아프대? 재능은 하늘이 점지해 주는 건데 왜 그걸 인정을 못해? 진짜 이래서 예술 한다는 것들은 이해를 할수가 없다니까.》
친누나는 저명한 줄리아드 음대 교수에, 친조카는 피아니스트, 오정수 본인은 공연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조여 봐요. 단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고. 그것들 대신 뛸 애들은 회사에 쌔고 쌨잖아. 내 스케줄 빈 데 있으면 꽂아 넣어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뭐, 일단 알아는 보겠지만…… 그냥 적당히 경고 정도로 끝내지 그래. 네 개차반 이미지는 신경 안 써?》
〔작정하고 흘려도 이 병신들이 못 알아 처먹으니까 내가 이러지, 오죽하면 내가 오늘 뒷덜미 잡은 새끼한테는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다른 데 가서 소문 좀 내라고 했어. 정난우 헛소문 잘못 씹다 걸리면 미친 새끼 하나가 눈 뒤집고 달려든다고.〕
강도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지뢰를 깔았다고 표지판을 세워 뒀는데도 멍청한 놈들이 그걸 자꾸 밟아 대는데 저도 어이가 없었다.
정난우가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다닐 때, 강도영 자신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납치 사건이야 충분히 유추할 만했지만 거기서 더해 웬 강간, 성적 학대에까지 엮고 들어가자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근거 없는 학생들의 입방정을 누차 경고했다. 경고도 모자라 대놓고 협박도 했다. 그 때도 지금도 외삼촌 오정수의 매니지먼트에는 세계 정상급의 연주자들 대부분이 속해 있었다. 그 영향력은 같은 전공자들이 더 잘 알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런 제 생각이 안이했던 건지도 몰랐다. 질시에 눈이 먼 놈들은 어이없게도 가끔 겁을 상실해 도를 넘었고, 자신은 그 꼴을 가만히 봐 주지 않았다.
초대형 매니지먼트의 강력 보이콧으로 강수를 뒀다. 물 밑을 떠도는 비난은 당연히 뒤따랐다. 개의치 않고 잔인하게 밀어붙였다. 자신이 그 배후임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싱거울 만큼 쉬웠다. 오정수에게는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해 주는 연주자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오정연에게도 졸업 앞둔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다.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인력들은 조직적 보이콧에 한없이 무력한 법이었다.
놈들에게는 그 횡포에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타고났더라면 정난우를 음해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결국 예술가를 가장 빈번히 파멸케 하는 건 그 재능이라는 덕목이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단 한 명, 그 태양처럼 아득한 존재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타락시키는 거였다.
《아휴. 내가 아주 잘난 조카 놈 하나 잘 둔 덕에 온갖 욕은 대리로 먹고.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너 언제까지 그러려고 그래?》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던 강도영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들 아나.〕
오정수가 징글징글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빈손으로 축축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프런트에 뜨거운 물을 부탁했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고 포트를 받아들었다. 넉넉한 팁을 찔러주고 돌아섰다.
캐리어에서 컵라면을 꺼내 물을 부었다. 익는 동안 위스키와 잔을 준비해 소파에 앉았다.
술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어설프게 취하는 건 더 위험했다. 쓸데없이 전화를 걸어 헛소리를 할 거다. 아예 뇌신경이 다 절여져서 운동신경까지 마비가 올 정도여야 했다.
반 병 정도를 컵라면과 함께 한 뒤 창가로 걸어갔다.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에 낮게 깔린 전경을 담았다.
퀸스에는 오늘 엄청난 눈이 내렸다. 몇 발자국 앞도 분간 못할 폭설이었다. 밤을 잊은 듬성듬성한 불빛들이 얼어붙을 위기에 빠진 도시에 열심히 생기를 불어넣는 중이었다. 그것마저도 까마득히 잠긴 것들이 여럿이었다.
눈 속에 푹푹 꺼지는 발에도 행인들은 있었다. 재앙 같은 눈도 즐길 수 있는 밤이었다.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시야에 휴대폰을 끼워 넣었다. 잠금을 풀고 화면을 몇 번 누르자 익숙한 페이지가 떴다. 정난우의 SNS였다. 가장 최근 글은 24일자, 예술의 전당 크리스마스이브 자선공연이었다. 시차를 계산해 보니 한국은 지금 아침 6시가 조금 안 됐다.
창밖의 눈 난장판 도시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대로 정난우에게 전송했다. 메시지도 적었다.
『형은 지금 유럽 투어 중에 퀸스에 스케줄이 있어서 잠깐 와 있어. 네가 좋아하는 눈이 엄청 쏟아진다. 좀 늦었지만, 메리크리스마스.』
전송을 끝내고 소파로 돌아갔다. 콜라를 안주 삼아 남은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눈앞이 슬슬 고열에 녹는 엿물처럼 풀어졌다. 기다리던 반가운 현상을 맞닥뜨린 그 쯤, 오정수의 마지막 물음이 뇌리를 맴돌았다.
「너 언제까지 그러려고 그래?」
술 젖은 입술이 피식 웃음을 담았다. 가끔은 저도 그걸 알고 싶을 때가 있었다.
위스키 한 잔을 기분 좋게 입 안에 털어 넣고 고개를 수그렸다. 흔들리는 시야는 한 박자 늦게 초점을 따라왔다. 알코올 농도 짙은 숨이 바닥으로 흘러 고였다.
어깨가 무거웠다. 채무의 무게가 짓누르는 거였다. 그 압력은 차라리 반가웠다. 무것도 할 게 없을 때보다, 오늘 같은 날이 나았다. 이 무게가 고통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정난우에게 변고가 생겼던 9년 전부터 그랬다.
「그 남자가 웬 학생 하나를 납치해서 닷새 동안 물만 먹여가면서 감금을 시켰는데…….」
기분이 순식간에 진창으로 처박혔다. 강도영은 어금니를 사려 물며 눈을 감았다. 떨어내지 못한 이 갈리는 과거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당시 열일곱 살 정난우는 강도영 자신의 뉴욕 본가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녀석이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합격하자 어머니는 아주 기뻐했고, 넓은 저택의 방 한 칸을 기꺼이 내주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자녀들의 독립성에 지긋지긋해했던 그녀는 예쁨 받을 행동만 하는 녀석을 진심으로 아꼈다.
그래서 녀석이 실종되었다 돌아오며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모친은 분통을 터뜨리며 경찰을 상대로 고소까지 준비했다. 실종신고를 한지 사흘 지난 시점에서 중요한 신고 하나가 들어왔던 게 자연히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제보자는 학생이었다. 금요일 저녁 친구들과의 탈선 파티로 술에 취한 상태였다. 용의자도 그 수상한 차량에 관한 것도 애매한 특징들뿐이었다. 정황증거도 어설프고 빈약했다. 범죄로 단정 지은 학생의 근거도 너무 뜬금없었다. 무엇보다, 경찰들은 만취한 미성년자의 애매모호한 말들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정난우를 찾아낸 건 그 제보자 본인이었다. 자신의 중언이 거의 묵살되었음을 깨달은 그 남학생이 이틀 동안 일대를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닌 끝에 겨우 구해낸 거였다.
만약 그 학생이 당시의 일을 취기가 가져온 착각으로 치부해 버렸거나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가볍게 잊어 넘겼더라면, 녀석은 영영 돌아오지 못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돌이킬 수 없이 부서진 녀석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 애를 망친 건 그 누구도 아닌 강도영 자신임을.
어리석었다. 잠깐 눈이 멀고 머리가 어떻게 됐던 거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녀석이 가진, 무지에 가까운 순수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지 못했다.
그 아이가 보내는 숭배의 눈길에만 잔뜩 취해 이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약물 중독자처럼 한심한 꼬락서니였다.
강도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엿 같은 과거는 아무리 곱씹어도 늘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얼마나 질긴지 찢어지지도 흐려지지도 않았다.
고개를 젖힌 채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무거운 눈을 기계적으로 깜빡이며 정해진 결론만 새삼 되뇌었다.
뭐가 됐든, 이제껏 살아온 대로 살아 주면 되는 거였다.
녀석이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주는 것. 폐허나마 지탱해 줄 견고한 뿌리, 절망의 끝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버팀목.
지상으로 추락하고 나서야 하늘이 보였다. 세상을 등진 태양은 이전보다 더 강렬히 빛났다. 슬프게도, 그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열기는 애초에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거였다.
필요이상으로 다가가는 순간 자신은 녹아 사라질 거다. 태양 역시 다시는 빛을 발할 수 없을 거다.
제 과오가 만들어 놓은 덫이었다. 그 안에 녀석도 자신도 갇혔다.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천장 조명이 느리게 점멸했다. 강도영은 소파에서 늘어져 잠기운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