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버석하게 와 닿는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왔다. 볕에 바짝 말린 옷처럼 보송보송한 감촉이었다. 살갗에 밀착한 열기는 딱 기분 좋은 정도였다. 뜨끈하게 달아오를라치면 열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금방금방 핥아갔다.
에녹은 턱을 젖히고 앉은 채 오래도록 숨만 쉬었다. 전날 마신 술이 해독이 덜 됐다. 몽롱하고 나른하고 속은 불편했다. 식사를 하고 땀을 좀 빼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일단 그 전에 이 통화부터 종결을 지어야겠지만.
허벅지 위에 떨어뜨려 놓은 휴대폰에선 잔소리가 폭언처럼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네 망나니짓에 대신 창피해 해야 하는 거니? 잘난 아들놈 덕택에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어! 본격적으로 배우질 하겠답시고 집 나갔으면 배우나 할 것이지 허구한 날 계집애들이랑 붙어먹다가 파파라치에 걸리기나 하고! 계집질을 할 거면 몰래 하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당하게 찍혀? 너 나중에 섹스 상대 컬렉션 같은 걸로 자서전이라도 내려고 그러니?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미치겠다! 거래처 대표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너 때문에 !》
일단 시작하면 최소 5분이었다. 에녹은 이불을 젖히고 일어섰다. 오전 11시였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까치집처럼 뻗친 머리를 슥슥 빗어 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브리프 한 장 걸친 몸으로 집안을 활보해도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곳은 극락이었다. 그는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꺼끌하니 목이 탔다. 얼음 띄운 찬물이 절실했다.
마음은 급한데 걸음을 한참 옮겨야 했다. 극락 같은 집의 유일한 흠이었다. 아무래도 이 집은 혼자 살기 너무 넓었다. 사생활 보장 좀 받겠답시고 커다란 전원주택을 산 건 판단 미스였다. 처분하고 연립맨션 같은 데로 이사를 가야겠다.
오늘 당장 집을 내 놓자는 결론을 내렸을 때 드디어 냉장고가 보였다. 휴대폰을 슬쩍 귀에 갖다 대니 어머니는 아직까지 화를 내고 계셨다. 식탁에 살짝 놔두고 재빨리 글라스에 물을 받았다. 얼음을 채워 흔들다 단번에 비웠다. 입 안과 목 안쪽을 싸하게 조이는 시린 온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녹은 방치해 둔 휴대폰을 다시 한쪽 귀에 붙였다.
《너 그러다 병 걸려 ! 콘돔은 제대로 하니? 술 먹기 전에 속은 채워? 다음 날 운동해서 알코올은 제대로 빼고 있는 거야?》
드디어 끝이 보였다. 어머니의 전화는 늘 잔소리로 시작해 마지막은 결국 아들 걱정으로 끝났다. 에녹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밀리건 여사님. 내 지갑 속에 콘돔은 항상 대기 중이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두 시간씩 꼬박꼬박 운동도 해.”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걸 낳아서는. 이제 그냥 진득하니 한 여자랑 오래 연애할 생각은 없어?》
“생각은 항상 있어요. 마음이 안 따라 주는 거지 . 이래봬도 매번 난 진지한데 사람들은 왜 그걸 몰라주나 몰라.”
《큰일이다, 정말. 너 그러다 벌 받아. 사람 마음에 멍 들여 놓으면 나중에 그거 다 적립돼 있다가 한꺼번에 돌려받는 거야.》
에녹은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낀 채 하우스키퍼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냉장고 안에서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들, 사랑이 뭔지는 아니?》
잠깐 생각에 잠길 것도 없이, 에녹은 대답했다.
“뜨겁고 격렬한 거. 첫눈에 반해서 그대로 뼈와 살이 불타는…….”
《에라이, 잡놈아!》
어머니는 결국 진짜 폭언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에녹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렸다.
랩 포장을 뜯은 음식들을 하나하나 데우고 있을 때였다.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단열장갑을 끼며 고개를 힐끔 돌렸다. 짧게 울리고 마는 걸 보니 문자 메시지였다.
나중에 볼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전자레인지 문을 열다 말고 재빠르게 장갑을 벗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곧바로 확인했다.
「일주일 뒤에요. 그런데 왜요?』
한태영이었다. 하루 만에 온 답이었다. 전날 ‘아티스트 정 미국에 언제 옵니까?’ 문자로 물었던 데에 대한 대답이 지금에야 온 것이다.
에녹은 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액정을 엄지로 두어 번 쓸며 의아함을 곱씹었다.
그러게, 왜일까.
정난우의 공연을 관람했던 날, 에녹은 리셥센이 열린 호텔에서 묵었다. 정난우와 그 매니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녹은 헤어지기 전 정난우와 한태영, 그리고 율리안과도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다음에 또 봅시다, 하자 세 사람은 네, 하고 대답했다.
기약 없는 재회의 여지를 남겨둔 채 객실로 돌아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새벽이 되어 있었다. 호텔 측의 배려로 만찬이 늦게까지 이어진 탓이었다. 앤드류의 정난우 사랑이 대단히 지극한 나머지 빚어진 결과였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을 음미하며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피로가 몸을 매트리스로 짓눌렀다. 눈을 감고 의식을 혼몽함에 내맡겼다.
이상을 느낀 건 그 때부터였다.
명료한 이성을 마모시키는 어둠은 짙어졌지만 도리어 정신은 또렷해져만 가는 거다. 눈을 뜨면 시야가 어지러웠고 눈을 감으면 귀가 어지러웠다. 범람하는 온갖 소리들과 영상들이 부서진 유리조각들처럼 눈과 귀를 난도질했다.
정난우 때문이었다. 며칠 안에 너무나 많이 마주쳤고 너무나 많이 알아버린게 화근이었다.
스치듯 지나치고 끊어질 듯 겨우 이어지던 만남들 속에서, 정난우는 두려움에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움츠리다가,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무대위에서 번쩍이다가, 아득히 먼 과거의 상처투성이 소년이 되었다가, 양모에게 응석부리는 철부지 어린애처럼 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작위로 그냥 들이닥쳤다.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침입해 휘저어 놓는 통에 가수면 상태 근처에도 못 갔다. 몇 번이나 뒤척이며 욕설을 짓씹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술기운을 빌리지 못한다면 견뎌내지 못할 밤임을 인정했다.
객실 내 비치된 위스키 병을 따고 온더락 글라스에 콸콸 쏟아 부었다. 갈증에 타 들어가는 목을 연거푸 축였다. 한 손에는 양주병을, 다른 손으로는 잔을 들고서 창문에 바짝 다가섰다.
뭐야, 이게 도대체.
서늘한 유리에 이마를 붙이고 한참을 가만있다가 눈을 치켜떴다. 알코올이 흐트러뜨린 뉴욕의 야경은 아지랑이처럼 흐느적거렸다. 화려한 불빛이 물처럼 녹아 풀어졌다.
정난우는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다.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에녹은 후회했다.
이렇게 깊은 잔상을 남긴 채 이대로 단절시키는 건 무책임했다. 뭔가 더 이어져야 할 것 같았다. 꼬리를 끊고 달아난 도마뱀의 죽은 살덩이만 손 안에 쥔 기분이었다. 그 감촉은 불쾌할 만큼 미끈거렸다.
그 이후로 2주일이 더 지났지만 증세에 별 차도는 없었다. 도리어 흘려보냈던 장면들까지 뇌리에서 뜬금없이 재생되곤 했다.
“이상하게 깜빡 홀린 기분이라니까.”
에녹은 한 손으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클래식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정난우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들 역시 자신과 같았을까 싶다. 그의 악마 같은 선을이 귀에 맴돌고, 무대를 경계로 무시무시하게 변하는 두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우리 난우는 한번 보면 계속 보고 싶으니까.』
그 때, 뇌리를 스치는 문자들에 에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난우의 SNS에 찍혀 있던 극성팬의 발자국이었다. 문득 찝찝함이 몰려왔다.
잠깐, 이거 설마 세뇌 아냐? 루스고 팬들이고 너무 띄워주니까 뇌가 파업하고 그냥 질질 끌려가는 중인가?
일리 있는 가설이었다. 에녹은 다른 접시를 전자레인지에 처박고 버튼을 눌렀다. 데워지는 동안 정난우의 SNS를 접속했다. 지금은 또 영국 팬들이 난리였다.
『로열 페스티벌 홀 다녀왔어. 우리 난우 런던에 왔는데 이 몸이 봐줘야지. 엄청 앞에서 생생하게 봤어. 사랑해 난우!』
『난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티켓 예매하려고 하니까 이미 예전에 매진. 아. 이 **한 **!』
『그냥 한마디 하겠다. 아**…… 나 꼴렸다. 난우야………』
…뭐 이런 미친.
더 봤다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맛이 가면 곤란했다. 다신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여 팔로우 신청을 했다.
의지를 떠나 제멋대로 날뛰는 손을 탐탁찮게 노려봤다. 막 휴대폰과 강제이별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눈에 띄는 코멘트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너희들 존 레이만 SNS 봤어? 하하하하. 꼴좋더라. 이제야 좀 분이 풀리네.』
존 레이만?
낯선 이름에 에녹의 눈썹이 날카로운 동선을 움직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자 클래식 음악평론가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궁금해서 들어가 훑어보다 보니 대강 상황이 이해가 갔다.
『정난우의 모든 연주는 너무 자극적이다. 슬픔과 고통과 한이 광기 어린 기교로 둔갑해 청중들을 늪 아래로 끌어들인다.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차갑다. 정난우는 그 중간이 없다. 그가 세기의 비르투오소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는 좀 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굴 필요가 있다.』
자다가 번개 맞고 탭댄스 추는 개소리였다. 휴대폰 쥔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제가 느낀 순간적인 분노를 정난우의 팬들이라고 안 느꼈을 리 없었다. 그것을 입증하듯 존 레이만의 SNS는 이미 흠씬 폭격을 맞은 뒤였다.
아마 댓글 단 이의 실명이 뜨는 시스템이 아니었더라면 에녹 자신도 거기에 폭탄 하나쯤은 기꺼이 투척했을 거다.
내가 메스 가지고 가서 네 달팽이관 수술해 줄까?
그렇게 쏴 붙여주고도 남았다. 그리고 에녹은, 유려하게 흘러간 생각의 잔뜩 고인 그 분노를 자각하고 잠깐 멍해졌다.
연기력 운운하는 평론가들이 혀에 칼 물고 난도질해도 코끝으로 웃던 게 에녹,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몇 번 보지도 않은 그 괴이쩍은 생명체가 그 제물이 된 걸 못마땅해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다. ‘극성 정난우의 팬덤’ 대열에 제가 막 발을 들인 건 아닌가 불안감마저 샘솟았다.
진짜 세뇌야, 뭐야.
에녹은 천장을 노려보며 깊숙이 끓는 한숨을 뱉어냈다. 고민해 봐야 나올 답이 있을 턱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태영에게 재차 접선을 시도했다.
『정확히 어느 날 어느 도시 어디 호텔로 오는데요?』
다 데워진 음식을 식탁에 세팅했다. 또 다음 날이나 되어야 올 것 같았던 답 문자는 의외로 금방 왔다.
『화요일 저녁 여섯 시쯤. LA 월트 디즈니 홀 근처 옴니 호텔이요. 근데 왜 물으시냐니까요?』
LA라. 좋네. 조깅하다 들러도 되겠군.
『몇 호?』
『천사백이 호. …그러니까 왜!』
『그날 공연 초대도 해 줬으니 깜짝 답례 좀 할까 하고요. 맛있는 저녁이나 사 먹이게. 아티스트 정한테는 비밀이에요.』
잠잠해진 휴대폰을 놔두고 긴 숨을 뱉었다.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지금 제 행동이 정상은 아니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엉망진창이었다.
에녹은 파스타를 포크에 감아 입 안으로 가져갔다. 잔뜩 올린 치즈가 혀에 아늑하게 감겨들었다. 역시 술 마신 다음 날은 느끼한 게 최고였다. 고소하고 느끼한 맛을 씹으며 생각에 골몰했다.
도대체 다시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늘 마음 가는대로 발길도 움직였다. 언제나 목적은 분명했고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목적지의 모든 것이 밀도 높은 안개에 무참히 침몰되어 있었다.
“정난우.”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 이름을 몇 번 뇌까렸다. 잡념이 운동신경을 끊어먹어 몸은 일시정지 상태였다. 포슬포슬한 빵이 포타주 안에서 눅눅하게 풀어져 내렸다.
먼 길 끝의 소실점을 짓누르고 있는 안개를 들어내려면, 일단 그 희귀한 생물과 눈부터 맞춰야 했다. 그 눈을 마주보고, 평범하게 대화를 몇 마디 나누면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이 분명했다.
“일단 먹자. 먹어.”
에너지가 있어야 운동을 할 수 있다. 운동을 해야 체력이 붙는다. 체력이 있어야 팔색조 정난우의 깃털 하나라도 뽑아 볼 것 아닌가.
팔색조.
좋은 비유였다. 에녹은 뜬금없이 흡족해 하며 식사를 재개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정난우는 기절하듯 쓰러져 있었다. 2주 동안 체코, 중국, 영국 일정을 소화한 뒤 바로 LA로 날아와야 했다.
중간에 한국에까지 들렀으니 근래 들어 가장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정난우는 영국 공항에서부터 이미 혼절의 징후를 보였다. 비행기에서도 시름시름 앓다시피 했다. 칼날 같은 피로가 세포를 한 스푼씩 떼먹는 듯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정난우는 잠을 자지 못했다. 기절하듯 잠깐 졸다가 결국 흠칫하며 깨어나길 수도 없이 반복했다. 괴롭게 버텨내느라 입맛은 바닥을 기었다. 기내식도 도로 물렀다.
짊어져지다시피 옮겨진 정난우는 호텔과 조우하자 소박하게 감동했다. 집보다 익숙한 숙박업소들은 그냥 존재 자체로 축복이었다.
“어디 안나갈 거죠?”
객실에 짐을 모두 옮기고 나서 한태영이 물었다. 비행기 타기 전 확인차 에녹에게서 또 문자가 왔었다. 한태영은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정난우의 인간관계 폭이 넓어지는 건 대환영이었다. 그것도 영화배우라니, 맘 같아선 싫다고 해도 끌어다 엮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어딜 나가겠어요.”
“뭐라도 먹고 푹자요.”
“그럴게요.”
정난우는 멍하니 침대 곁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 내내 푹 단잠 잔 한태영은 소금 절인 배추마냥 늘어진 정난우의 모습에 입맛이 썼다. 다른 건 몰라도 잠과 체력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건데, 저렇게 이동할 때마다 파김치가 되니 마음이 쓰렸다.
“오늘은 연습 좀 건너뛰고 쉬어요. 一라고 말해도 하겠지만, 적당히 하고요. 피곤하다고 굶지 말고 꼭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고 자야 됩니다.”
어차피 에녹이 곧 도착할 테지만.
한태영은 내심 모르는 척 당부했다. 정난우는 또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태영과 율리안이 방을 나갔다. 작은 빵 한 조각으로 배를 채웠을 때 타이밍 좋게 별 보이가 뜨거운 물과 큰 볼을 가져왔다. 벨 보이는 후한 팁에 깊이 허리를 숙이고 객실을 나갔다.
볼에 보약 한 팩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볼을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냥 보약이 아니었다. 어머니 사랑의 진액을 고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평창에 계셨다. 1년 전 완공된 팬션 부지 내에 어머니와 이모 가족들을 위한 거처를 따로 지어 드렸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이모는 슬하에 50대 중반의 딸 하나가 있었다. 정난우에게 친척 누나가 되는 그녀는 남편과 작게 식당을 하다가 정난우의 권유로 어머니와 함께 팬션을 관리하며 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국에 집 한 채를 사서 모셔오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마음이 아팠다. 정난우 자신에게 미국은 1년에 거의 반을 연주하러 돌아다니는 익숙한 나라지만 어머니에게는 말벗도 없는 낯선 땅에 불과했다. 나이가 많으시니 연주 여행을 함께 할 수도 없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젊은 자신도 장시간의 비행은 힘에 부치곤 했으니까.
「나도 그냥 바이올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엄마랑 여기서 살까?」 했다가 등짝만 매섭게 후려 맞았다.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훨훨 날아 다니며 재능을 꽃 피우는 거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정난우는 보약 팩의 귀퉁이를 집어 올렸다. 살짝 잡아보니 알맞게 따뜻해져 있었다. 가위로 귀퉁이를 잘라내고 빨대를 꽂았을 때였다.
띵一동.
벨이 울렸다. 정난우는 의아함에 고개를 기우뚱했다. 룸서비스는 안 시켰으니 한태영인가 싶었다. 하지만 한태영은 늘 자신의 객실 카드키를 하나 더 신청해 소지하고 있었다. 꼼꼼한 그가 웬일로 깜빡한 모양이었다.
정난우는 빨대를 입에 문 채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깨끗한 캔버스 화가 제일 먼저 보였다. 주름 없는 면바지가 감싼 긴 다리를 더듬어 올라가던 시선이 벨트에 멈췄다. 브랜드라고는 거의 모르는 정난우였지만, 저게 어디 건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태영이나 율리안은 저런 비싼 벨트는 하지 않는다.
앞섶 풀린 트렌치코트 사이로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머플러가 보였다. 반쯤 머플러에 파묻힌 목의 실루엣이 참으로 근사한 남자였다.
의식하고 나니 낯선 듯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훅 스몄다. 당혹감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그가 특유의 금속성 섞인 나른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열어요? 놀래 줄려고 렌즈 구멍도 손으로 막고 있었一”
그리고 그 순간 정난우는, 도로 문을 쾅 닫아 버리고 말았다. 에녹의 뒷말은 당연히 딱 잘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쓰디쓴 빨대 끝만 이로 문 채 얼어 있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뛰었다. 폐도 잔뜩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황당하게 문을 노려보고 있을 그가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긴 적막이 자신의 무례함을 꾸짖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정난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참 후 벨 소리가 다시금 허공을 찢었다. 매우 신경질적인 리듬이었다. 당황에 머뭇거리는 손이 몇 번이나 문고리를 잡았다 놨다 했다.
벨 소리는 끈질겼다. 열지 않으면 부술 듯한 기세였다. 그는 매우 이상한 곳에서 집요해지는 습성이 있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심호흡 몇 번 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 사이로 몸의 절반만 내보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아시고…… 저 찾아오신 건가요?”
“장소는 다 알아낼 방법이 있고. 아티스트 정 찾아온 거 맞아요.”
에녹은 제가 사인 몇 장으로 한태영을 매수했다고 할 수 없어 그냥 어물쩍 넘어갔다. 정난우는 그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왜요?”
“몰라요.”
에녹은 입술을 비틀며 즉답했다. 빈정거리려는 건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어투가 거칠었다.
“알고 싶어 왔어요, 나도.”
에녹은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정난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피로가 묻은 창백한 얼굴이 각막을 아릿하게 긁었다.
왜일까요. 나는 왜 ‘정난우를 한 번 더 봐아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일단 들어가죠. 스캔들 나기 딱 좋은 구도인데.”
에녹은 빠끔 열린 문의 단면을 손아귀에 쥐며 말했다. 정난우는 스캔들이란 단어에 얼른 비켜섰다. 에녹은 문을 활짝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저녁 먹었어요?”
“아뇨, 아직.”
정난우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섰다. 반면 에녹은 제 집처럼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정난우의 손에 고정되었다.
“뭡니까, 그건?”
정난우는 손 안에 든 보약 팩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주신 거예요.”
“아, 그 에너지 드링크?”
웬 에너지 드링크?
정난우는 미묘한 오류를 정정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일단 마시던 거 마저 마셔요.”
에녹이 말했다. 정난우는 머뭇거리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찔끔찔끔 액체를 빨아 올렸다. 좀체 떠나지 않는 그의 시선이 얼굴 위를 기어 다녔다. 진한 한약의 냄새가 불편한 침묵과 함께 녹아내렸다.
에녹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등받이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노골적으로 정난우를 훑어보았다.
평상복 차림의 정난우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였다. 물 빠진 진에 올 굵은 크림색 니트가 잘 어울렸다. 오래 입어 약간 낡아 보이는 니트는 목이 살짝 늘어나 한쪽 쇄골이 원히 보였다. 핏기 없는 피부가 조명 아래서 매끈하게 빛을 받아마셨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떨어뜨렸다. 공연히 턱 괸 손을 옮겨와 도톰한 제 입술만 숙숙 문질렀다.
이건 또 왜 이래.
불장난 치다 들킨 어린애처럼 바닥에 처박힌 시선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예의 그 울렁거림이 다시금 덮쳐들었다.
알고 싶은 욕구는 더욱더 맹렬해졌다. 이 울렁거림의 정체를 까발리지 못하면 맘 편히 발 뻗고 잠을 못 잘 것이 분명했다.
리섭션에 참석했던 날 밤, 만약 정난우의 다음 날 스케줄을 몰랐더라면 에녹은 당장 그의 객실로 난입했을 거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다.
“술좀 마셔요?”
에녹은 다시 정난우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정난우는 제 객실에서 여전히 불청객처럼 서 있었다. 어느새 텅 빈 보약 팩을 손에 쥔 채였다. 정난우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실 줄은 알아요.”
“내일 스케줄은?”
“오후에 리허설 있어요.”
“그럼 됐네. 나가죠, 우리.”
정난우는 경직된 입술을 혀로 축였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왜요?’ 하고 있었다. 에녹은 피식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왜긴요. 같이 저녁도 먹고 술도 한 잔 하자는 거지.”
“그러니까 왜 저랑…….”
“오래 안 끌어요. 자꾸 울렁거려서 그래.”
에녹은 읽을 수 없는 시선으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옷 갈아입을래요? 그러고 나가도 상관은 없지만.”
“제가 술을 본격적으로 마셔본 적은 거의 없는데요. 게다가 방금 약도 먹어서,”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까요…….
정난우의 굳어버린 뇌는 기능을 상실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이런 식의 저돌적인 행동력을 갖춘 상대는 처음이었다. 요령 좋게 거절하는 법은 습득하지 못했다.
정난우가 그렇게 밍기적거리는 동안, 짧은 기다림에 에녹은 금세 지쳤다. 그는 한껏 턱을 젖혀 긴 한숨을 쏟아냈다. 그리고 늘어지는 발음으로 정난우의 발목을 옭아했다.
“왜 자꾸 버려. 내가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대꾸 없는 정난우는 방치해 뒀다. 한도 끝도 없이 저러고 있을 분위기 였다. 에녹은 벌떡 일어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대뜸 옷장을 뒤졌다. 두터운 정난우의 하프코트가 그의 손에 납치되었다.
그는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정난우의 어깨에 코트를 둘렀다. 의미 없이 꽉 쥐고 있던 빈 팩은 뺏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에녹은 그대로 정난우의 앞섶을 손으로 조이며 귓가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아티스트 정, 친구 없죠?”
정난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변명을 덧붙였다.
“그래도 여기저기 오케스트라 수석 단원들과는 친해요. 실내악 연주회도 곧장 열고요. 식사 초대도 해 주시고…….”
“그런 거 말고, 그냥 이유 없이 외롭거나 맘이 허한 날 스스럼없이 찾아가 속 얘기도 털어 놓고 같이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그런 친구요.”
“그건…….”
“없죠? 그러니까 나갑시다. 이럴 때 따라나서야 그런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그의 숨결과 목소리에 귓바퀴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살갗을 데우는 건 그의 체온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내뿜는 기이한 열기 탓이었다. 움츠러드는 어깨를 에녹이 감싸 안았다. 팔을 꿰어 넣을 새도 없었다.
에녹은 문을 박차듯이 그대로 끌고 나갔다. 복도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그가 정난우의 손을 끌어당겼다.
“셔츠 잡아야죠. 그거 버릇이잖아.”
친구.
정난우의 뇌리에는 그 낯선 단어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달콤한 독을 바른 사과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언감생심 꿈에서도 상상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릴 것이 분명한 인간관계였다.
“아, 팔부터 넣고.”
에녹은 어린에 옷 입히듯 정난우의 팔을 한쪽씩 차근차근 코트 소매에 구겨넣었다. 단추도 꼼꼼히 채워주는 그의 손을 내버려둔 채,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저, 밀리건 씨.”
“에녹이요. 이름 불러요.”
정난우는 멍하니 그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얌전히 그의 셔츠 끝자락을 빼내 손가락에 감으며 물었다.
“저 되게 재미없어요. 말도 잘 못하고, 할 줄 아는 건 바이올린 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에녹의 차가운 시선이 빤히 정난우의 눈꺼풀을 담았다. 까만 속눈섭이 촘촘하게 자리한 눈시울에서 미묘한 긴장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주눅이 든 건지도 모르겠다.
설마, 본인이 친구 사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에녹은 불쾌한 미소를 입술로 그렸다. 무심코 화가 나 생각했다.
당신이 어디가 어때서.
“봐서요. 아직 이 울렁거림을 정체를 모르거든.”
에녹은 이 묘한 감정의 밑바닥을 보고 싶었다. 마음 가는대로 퍼내다 보면 그 바닥에 쓰인 글씨도 얼마 안 가 분명 만천하에 드러날 거다.
이게 연애감정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닮긴 했으되 그 방향은 분명 완전히 엇나가 있었다.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오고 싶고,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그러나 뜨거운 숨결을 나누고 달궈진 육체를 겹치며 정신없이 탐하고 싶은 음험한 욕구가 거세된 이런 관계를, 에녹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모든 결론은 일단 눈맞춤 이후로 미뤄두기로 했다. 에녹은 머플러로 제 얼굴을 꽁꽁 싸매며 물었다.
“그러니까 남들 하는 것처럼 식사도 하고 술 한 잔 하면서 좀 두고 보자고. 일식 좋아해요?”
한참을 고민하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먹고 바로 이동한 곳은 동료 배우가 운영하는 바였다. 유명 인사들을 위한 프라이빗 룸이 따로 있어서 자주 찾는 곳이었다. 주로 몰래 데이트 장소로 유용했지만 오늘은 단지 조용한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소음도 없고 방해자도 없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녹은 예상외의 상황을 맞닥뜨리고 았었다.
아…… 얘 뭐야.
에녹은 손으로 이마를 눌러 짚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몇 번이고 끌어모아 삼켰다. 시야가 회전목마처럼 둥근 궤도를 돌았다. 창밖에서 번득이는 불빛들은 물 위에 풀어 놓은 물감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린 지 오래였다.
“저……취하셨어요?”
반면 정난우는 쌩쌩했다. 습관적인 긴장으로 뻣뻣하던 몸은 조금 풀어 진 듯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리깐 눈꺼풀도 단정한 말투도 그대로였다.
당신 술 못 마신다며. 따져 물었더니 정난우는 제대로 마신 적이 별로 없다고만 했는데요, 했다. 맞는 말이라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원래는 머리꼭지까지 술에 담근 다음 도둑질 하듯이 눈빛을 훔칠 요량 이었는데 이래서야 다 망했다. 이미 짙은 암운 속에 망조가 꽃 피고 있었다.
에녹은 쓰게 혀를 차며 반쯤 계획을 포기했다. 하지만 고집스레 눈을 치떴다. 고개를 든 건 그 다음이었다.
“안 취했어.”
부정은 했지만 뭉그러진 말투에 신빙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긋난 계획은 다음에 다른 방향으로 미뤄두더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알량한 남자의 자존심이래도 별 수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술과 밤은 자신의 또 다른 무기이기도 했다. 저 샌님을 상대로 이렇게 무참하게 깨지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녹은 빈 잔을 채우며 늘어지는 단어들을 나열했다.
“술 어디서 배웠어요?”
“성인되던 날 협연이 있었어요. 마침 다음 날 스케줄도 비고 해서 수석 단원 한 명 집에 초대돼서 갔는데, 거기서 배웠어요. 성인식 호되게 치렀죠. 그 뒤로도 그 분들이랑은 가끔 조금씩 마셔요.”
“어디 오케스트라요?”
“비르투오소 러시아 챔버 오케스트라요.”
“…하. 이런 빌어먹을.”
에녹은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하필 고르고 골라도 러시아 토박이한테 술을 배웠단다. 그러니까 기본기가 이렇게 탄탄한 거였다.
테이블에는 이미 도수 높은 양주 세 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빈 콜라 캔 여덟 개도 함께였다. 콜라는 정난우의 주 안주였다. 어떻게 된 게 정난우는 콜라만 무한리필 해 주면 끝도 없이 양주를 들이부을 수 있는 불사신이 되는 것 같았다.
과연 팔색조라 이름 붙일 만했다. 에녹은 상상 속에서 정난우의 몸통에 ‘무지막지한 술꾼’의 깃털 하나를 추가로 꽂았다. 이러다 정말 여덟 개 다 채울 기세였다.
“욕…할 줄 아시네요.”
에녹은 늘어져 있던 상체를 억지로 세웠다. 소파에 눌어붙어 있다 보면 의식도 함께 까라질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정난우의 얼굴을 풀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귀 진짜 밝네. 그런데 빌어먹을 정도는 욕 아니죠. 나 그보다 더한 말도 많이 해요. 왜요, 욕 하는 사람 싫어요?”
“싫다기보다는…… 그보다는 그냥 좀 의외라서.”
“뭐가요?”
“굉장히 좋은 목소리라 그냥 거친 말 안 할 것 같은 편견이 있었나봐요.”
“내 목소리 좋아요?”
정난우는 잔을 만지던 손을 멈칫했다. 어쩐지 그의 음성이 은근하고 낮아진 느낌이었다. 달짝지근한 물엿처럼 고막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네. 되게 좋아요.”
솔직한 답에 에녹은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고작 별 거 아닌 칭찬에다 여태 수두룩하게 들어온 말인데 새삼스레 가슴이 간질거렸다. 고양된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루스보다 더?”
……뭐냐, 이 유치한 말은.
에녹은 제가 토한 질문에 제가 즉각 비난을 쏟았다. 동요로 비틀리는 입술을 숨기려 잔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기왕 내뱉은 질문이니 대답을 기다렸다.
정난우는 난처한 듯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속눈썹의 그늘 아래 언뜻 보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두운 조명이 열은 홍조 번진 뺨 위로 굴러 떨어졌다.
에녹은 가늘고 긴 목과 쇄골을 핥듯이 응시했다. 유약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곱다는 감상이 더 우세했다.
“그…비슷해요. 두 분 다 엄청 좋아서 우위를 가릴 수가 없네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게 무승부예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우열을 가려야지.”
어쩐지 그다운 발언이었다. 정난우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에녹은 혀를 차며 이쯤에서 물러서 주기로 했다. 두 개의 빈 잔을 채웠다. 가볍게 잔을 들어 올려 내밀자 정난우는 성실하게 짠 부딪쳤다. 잔안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치고 있던 얼음들이 공간을 좁히며 달그락 하고 가라앉았다.
“근데 정말 친한 친구 없어요?”
잔에 얼을을 더 채웠다. 주량으로 이길 수 없다면 속도를 조절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에녹은 원래 끈질긴 남자였다. 애초의 계획은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라고 하긴 뭐 하지만, 그 비슷한 사람은 있어요.”
“누군데요?”
에녹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정난우의 예민한 감각은 그걸 감지했다. 정난우는 베일 듯한 뺨을 무심코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크리스토퍼 강. 피아니스트예요.”
에녹의 눈썹이 바깥으로 쭉 당겨졌다. 뭔가 어디서 한번은 들어본 이름 같은데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술기운 탓이었다. 가물가물한 눈을 힘 있게 깜빡이며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기억력과 관찰력은 뛰어난 편이라, 에녹은 금세 그 이름을 혼탁한 기억의 바다에서 끄집어 올릴 수 있었다.
“아아. 클래식의 미래.”
루스가 그랬다. 클래식의 미래라고 불리는 세 명이 있다고. 그 중에 그가 있었다. 에녹은 잔 안의 얼음 하나를 입 안에 머금었다. 그대로 어금니를 닫아 물어 바스러뜨렸다.
“얼마나 친해요?”
“어릴 때는 틈만 나면 서로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못 그래요. 크리스나 저나 공연 스케줄도 빡빡하고…… 인근 도시에서 스케줄이 스칠 때면 그냥 가끔씩…….”
“만나서 뭐 해요?”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면서 공연 얘기하고, 거리도 걷고. …위대한 음악가 생가가 근처에 있으면 같이 가기도 해요. 어쩌다 여유가 더 있으면 맥주도 한 잔 하고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꼭 데이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취조하듯 캐물었다.
“일 년에 몇 번 정도 만나는데?”
“글쎄요. 한 여덟 번 정도 보나, 올 해는 일곱 번……친구라고 하기에는 역시 부족한 거죠?”
정난우를 둘러싼 기압이 낮아졌다. 그를 사랑하는 조명도 어쩐지 어두침침해진 느낌이었다. 에녹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려는 자신의 혀에 굳건히 심지를 세웠다. 그리고 단칼에 말했다.
“친구라, 좀 그렇긴 하네요.”
정난우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희석된 술을 느리게 들이켰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상심한 마음은 에녹의 집요한 눈에 고스란히 읽혔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 점이 싫지 않았다.
정난우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에녹은 나른하지만 날카롭게 즉답했다. 잔을 내려놓은 정난우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그 시선이, 에녹 자신의 가슴팍에 꽂혔다.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꿰뚫린 기분을 느꼈다.
에녹은 무심결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 시선 끝에 닿은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서로 바쁘다면서 뭐 하러 그래요. 그냥 나랑 자주 보면 되죠.”
“…밀리건 씨랑요?”
“에녹이라니까. -아, 원한다면, 음. ……녹? 밀리? 에밀? 뭐 좋을 대로 불러도 되고.”
에녹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제 애칭을 순간적인 애드리브로 창조해 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정난우는 그 숨 가쁜 도약에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밀리건 씨에서 에밀까지의 거리는 너무 비약적이었다.
“에녹이라고 할게요.”
에녹의 눈썹이 꿈틀 꺾여 올라갔다.
“왜? 크리스토퍼 강은 크리스라고 부르잖아요. 나는 안 될 게 뭐지?”
“그건 저보다도 팬들이 부르는 애칭인데요. 제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한국식이고…… 그냥 좀 익숙해지다 보면.”
“내가 그 남자보다 뭐가 부족한데?”
알코올에 절은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후회는 즉각 찾아왔다. 어쩐지 ‘그 년이 그렇게 좋아? 나보다 예뻐?’ 묻는 질투의 여신으로 분한 느낌이었다. 에녹은 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혀를 깨물었다.
“아. 이건 진짜 실언. 그건 됐고, 그 사람이랑은 눈 잘 맞추겠네요?”
“네.”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에녹은 얼음 하나를 입 안에서 더 부쉈다. 잔속에 들어 있던 게 아니라 통에 들어 있던 거였다. 적당히 녹아씹기 좋은 크기가 됐다. 잘게 부순 알갱이를 혀와 입천장에 비비자 헐렁하게 풀어진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에녹은 테이블의 옆면을 손아귀에 붙들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리셉션장에서 들으려다 못들은 대답이에요. 난 못 보고 그 사람은 보고, 무슨 차인데?”
오늘의 하이라이트 질문을 날렸다. 에녹은 물 샐 틈 없는 시선으로 정난우를 포위했다. 그 시선의 그물 속에서 정난우는 쭈뼛거리며 몸로 물렀다.
발그레해진 귓바퀴를 주물거리는 모양이 참 뻔히 보였다. 회피의 전주였다. 에녹은 잔을 매만지고 있던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위협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어이, 어딜 도망가? 이리 와요.”
정난우는 망설이다가 이내 어설프게 어깨 한쪽만 앞으로 디밀었다. 그 엉성한 포즈에 에녹은 무심결에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얘는. 뭔 사내놈이 이렇게 귀여운 짓을 다 해.
에녹의 눈가에 걸린 미소는 녹을 듯이 달콤했지만 정난우는 물론 보지 못했다. 에녹은 가볍게 손짓하며 채근했다.
“더 와요. 가까이.”
“…….”
“더. 一더.”
에녹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정난우를 쭉쭉 끌어 당겼다. 정난우는 돛단배처럼 출렁출렁 끌려왔다.
확실히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경향을 보였다. 아무래도 저 버릇은 나중에 스파르타식으로 고쳐 줘야 할 것 같았다. 저 순진한 팔색조를 풀어 놓기에 세상은 너무 고약하니까.
“더 와요. 눈 마주보잔 말 안 할 테니 얼굴 좀 봅시다.”
에녹은 강하게 나가다가 달콤하게 타일렀다. 그는 자각은 못하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는 새에 상대를 유혹할 때 하던 버릇을 쓰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내뿜는 페로몬이 어두운 조명 속에서 산란했다.
정난우는 눈을 한껏 내리깔며 얼굴을 디밀었다. 두 뼘 남짓한 거리로 좁혀졌다. 모의작당을 속삭이듯 가까워지고 말았다.
에녹은 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지만, 물론 정난우는 태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묘한 긴장감에 모골이 타들어갔다. 테이블 아래 꽉 쥔 주먹 안으로 땀이 스몄다.
“자, 이제 말해 볼까요? 그 자…아니, 크리스토퍼 강과는 그렇게 스스럼없이 마주볼 수 있는 이유.”
그 자식, 하고 나갈 뻔했던 단어를 얼른 공사했다. 생면부지의 남인데도 불구하고 에녹은 그가 마뜩찮았다. 탐나는 정난우의 눈동자를 그는 언제든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난우는 뜸을 들였고 에녹은 인내를 붙들었다. 정난우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했지만 에녹은 도망갈 틈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정난우는 자신이 앞의 남자를 끝내 이길 수 없을 것임을 인정했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그걸 설명하려면 전주가 좀 필요한데…… 얘기가 좀 길어요. 구질구질하고 우중충할 수도 있고. 지루할 텐데. 그래도 들어 주실래요?”
정난우의 입술은 술기운에 평소보다 더 진하게 혈색이 돌았다. 그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 긴장한 숨결이 허공에 흩어졌다. 콜라의 달짝지근함과 알코올의 쌉싸름함이 에녹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무심결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며 그걸 받아마셨다.
“해 봐요. 당신에 대한 얘기는 뭐든 좋으니까.”
에녹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난우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저 십 년 전까지 장님으로 살았던 건 알고 있어요?”
“알아요.”
“네. 그래서 전 어릴 때부터 엄마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는 아이였어요. 또래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자신과 다른 저를 배척하고 조롱하기 일쑤였거든요. 몇 번 엄마 없을 때 용기 내서 벽을 더듬어서 나가 봤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제게 장님이라고 놀리면서 돌맹이를 던지더라고요. 엄마가 찾아내거나 동네 아주머니가 집에 데려다 주시기 전까지는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죠.”
“애새끼들…….”
에녹은 험하게 인상을 그었다. 정난우는 물안개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애들 땐 뭘 잘 모르니까요.”
“애들도 잘못된 건 본능적으로 알아요. 다만 어린 나이 뒤에 교활하게 숨어있을 뿐이죠. 아 어쨌든. 그래서요?”
“제 일상은 늘 똑같았어요.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서 바이올린이나 켜고, 들어주는 사람은 부모님뿐이고. 음악선생님 도움으로 청년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됐지만, 거기서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어요. 팀 단원들은 저에게 잘해줬지만 진심으로 친해질 수는 없었거든요. 난 장애인이었으니까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였고, 통하는 화젯거리가 있을 리도 없는데 원래 말 수도 없는 애니 말 다했죠. 그러다 만난 게 크리스예요.”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에녹의 안면은 더 구겨졌다. 정난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는 그 때 아시아 투어 중이었어요. 물론 내한 공연도 잡혀 있었고요. 크리스는 내한 공연이 있을 때마다 국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랑 앙코르 무대를 가져요. 그 때에도 몇 팀이 물망에 올라 있었고, 한 수녀원에서 후원하는 저희 팀에게 그 기회가 왔어요. 그렇게 우린 리허설에서 만났죠. 크리스는 수녀님이 재능 있는 아이라며 소개해 준 저에게 관심을 보였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몇 곡을 연주해 볼 것을 시켰고, 나중엔 본인이 연주를 하면 그에 맞춰 따라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고요. 늘 그렇게 연습해 왔거든요. 음악을 듣고, 내가 따라하고, 듣고, 따라하고, 변형시켜 보기도 하고…… 그렇게 이중주를 끝냈는데, 크리스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는 거예요. 따끔따끔한 시선만 느껴지고. 저는 뭘 잘못했나 싶어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그가 느닷없이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앙코르곡 두 개로 갑시다. 이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하나. 저 아이와 이중주 하나. 저 아이를 방송에 내보내요. 반드시.」
그의 말대로 되었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쳤고 정난우는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강도영과 정난우의 2중주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특히나 그것이 사전에 약속된 게 아니라 강도영의 즉흥 선곡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지자, 강도영의 뒤를 이을 소년 스타에 목말라 있던 방송국들은 정난우를 취재하기 위해 앞 다퉈 열을 올렸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어요. 왜 굳이 앙코르곡을 늘려서 날 방송에 내보내라고 할까? 즉흥연주라고 했지만 그 음을 따라가던 저는 알고 있었거든요. 크리스가 치고 있던 피아노는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자기 식으로 막 뒤섞은 거였어요. 내가 돋보일 수 있게. 나 혼자만 연습하던 것들을 맘껏 연주할 수 있게.”
신은 악보를 볼 수 없는 소년 정난우의 핸디캡을 뛰어난 귀로 보상했다. 어떤 곡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녹아있는 각각의 음표들. 정난우는 그걸 제 머릿속 악보에 실시간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강도영과 함께 한 이중주에서, 정난우는 강도영이 쏟아낸 음표를 깊이 삼켰다가 제 고유의 선을로 소화해 뱉어냈다. 가난한 부부의 피고름을 대가로 정난우가 계속 연주할 수 있었던 바이올린은 그 눈부신 재능을 담아내기 버거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방송 이후 정난우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다. 문화부 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린 것은 물론, 국내 프로 오케스트라 무대에도 초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년 쯤 뒤, 수녀회에 강도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항공우편으로 비행기 티켓 보낼 테니까 그 애를 뉴욕 에이버리 피셔 홀로 보내세요.』
그의 말대로 티켓이 왔고, 저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른 채로 맹인학교 영어선생님과 뉴욕으로 갔어요. 홀에서는 오픈 리허설이 진행중이었고 그 무대가 끝나고 저는 한 남자 앞에 섰어요. 엔드류 커넬 선생님이요. 그 때의 전 그냥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오디션이었던 거예요.”
들으면 들을수록 에녹은 기분이 저조해졌다.
“크리스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 역시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그냥 단짝 친구는 바이올린뿐인 시골 마을 맹인으로 살았을 거예요. 멋진 사람 아닌가요? 자신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랬다. 그 자식…아니, 그 남자가 정난우의 말대로 제법 멋진 놈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에녹은 스스로가 옹졸하다고 인정했지만, 긍정도 부정도 뭣도 아닌 답을 되돌려 주고 재빨리 화제를 틀었다.
“그럼 시력을 되찾은 것도 그 남자가 도와준 겁니까?”
“아…… 그건 아니에요. 그 부분에서 절 도와주신 건 커넬 선생님이세요. 루스 씨 아버님이요.”
앤드류 커넬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현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있는 남자였다. 그날 맹인 소년 정난우의 연주를 들은 그는 충격 받은 얼굴로 흥분을 이가지 못했다.
그는 정난우가 거의 홀로 익히다시피 한 래퍼토리들을 모조리 시켰다. 정난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 그는 미친듯이 화를 냈다.
너는 어디다 있다가 열다섯 살이나 먹어서야 나타난 거냐고, 너는 도대체 왜 눈이 보이지 않는 거냐고.
앤드류 커넬은 그 뒤로 정난우의 시력을 되찾아 줄 방도를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임상실험 단계인 줄기세포 시신경 복원술을 정난우에게 권했다. 정난우는 당연히 응했다. 되찾은 시력은 낮았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제가 시력을 되찾고 나서 얼마 뒤 짬을 내서 크리스가 절 보러 왔어요. 본다는 거에 익숙지 않았던 저는, 그가 제 곁에 앉자마자 버릇처럼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는데…….”
“잠깐. 더듬어?”
에녹의 목소리에 상주하는 금속성이 사납개 허공을 그었다. 정난우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왜요?”
“…아아. 아니에요. 일단 계속해 봐요.”
눈이 안 보이니 당연히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겠지.
에녹은 송진 가루 베인 정난우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한히 응시했다. 저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더듬했을 걸 떠올리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렁이가 붉은 심장 표면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매일 속으로 상상했던 그 얼굴이 보이는 게 선기해서 한참을 그러고 있는대…… 크리스가 제 손을 가만히 감싸 쥐고 떨어뜨리는 거예요. 한 번도 내 손을 밀어낸 적이 없었는데. 영문을 몰라서 쳐다보니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난우야. 이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이렇게 만지면 안 돼.’ 라고.”
에녹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뭔가 좀 이상한 어감이 아닌가 싶었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없을 때는 그래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에녹의 의혹을 알 리 없는 정난우가 설명을 계속했다.
“저를 지켜 주고 싶어 했어요. 사람들의 냉랭함이나 혹은 비열함으로부터. 저는 어느 날 갑자기 빛 속에 떨어진 늪 속 생물처럼 무지하고 무방비했으니까요.”
「이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그 중에는 너를 미워하는 사람, 헐뜯고 싶어 하는 사람, 너를 착취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들은 보통사람과 다른 행동을 하는 너에게 앞으로 더 욱 더 엄격해질 테고.」
정난우에게 강도영은 모든 것의 지표를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들의 경계선은 대부분 그가 그어준 것들이었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눈을 봐. 한국에서는 어른을 똑바로 올려다보면 안 되지만, 외국에서는 눈을 피하는 게 무례한 거니까 힘들어도 난우야. 그렇게 해 봐.」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피곤할 테니 좀 자 둬. 흘리듯 내뱉은 말에도 곧장 침대로 가 눈을 붙일 정도로 그의 말을 맹목적으로 지켰다. 정난우의 세계에서 그의 말은 곧 율법이나 다름없었다.
“노력했어요. 사람들의 눈을 보려고. 저는 사람들의 감정이 뜨겁게 분사되는 그 눈동자라는 게, 사실은 처음부터 버거웠거든요. 어린 시절 친부모님이 남긴 트라우마가 깊었기 때문에…… 하지만 무서워도 견뎌야 한다고 하니까 견뎠어요. 지쳐서 매달리면 크리스는 항상 위로해 줬어요. 괜찮다고,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하지만 한계는 금방 찾아와 버렸어요. 크리스는 학업이며 연주회며 바빴으니까요. 언제까지나 그 사람한테 의지해서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 한계의 지점에 뭐가 있었는데요?”
무심코 물었다. 정난우는 길게 침묵했다. 알코올이 살짝 꽃피운 혈색이 그 얼굴 위에서 순식간에 걷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속에 깊이 숨은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에녹은 제가 실수했음을 곧장 깨달았다. 아랫입술을 한 번 꽉 물었다 놓았다. 불길한 예감을 문득 뇌리를 스쳤다.
한참 뒤에, 정난우의 떨리는 음성이 허공에 흩어졌다.
“……대답, 안 해도一”
에녹은 재빨리 한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돼요. 남의 상처 쑤셔 헤집는 악취미 없으니 말하기 싫은 거 안 해도 돼. 그런데.”
네, 정난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잔뜩 낮춘 시야에 그의 손이 걸렸다. 위에서 덮어 누르듯 술잔을 쥐고 있었다. 밀착된 거리에서 그의 숨이 터져 나와 턱 끝에 매달렸다.
“그게 언제였는데?”
끈끈한 게 달라붙은 것처럼, 정난우는 턱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구 년 전, 열일곱 살 때였어요.”
순간, 에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지금만큼은 정난우의 테이블 위로 처박힌 시선이 고마웠다. 부분마취라도 당한 듯 뻣뻣하게 굳은 혀가 조금 뒤에 천천히 몸을 뒤틀었다.
“계절은?”
정난우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탁한 음성은 다듬어지지 않은 나뭇결처럼 거칠었다. 술잔 쥔 손등에 남자다운 푸른 핏줄이 떨리듯 꿈틀거렸다. 정난우는 스치는 의아함을 대답으로 흘려보냈다.
“겨울이요.”
열일곱. 겨울을 검게 물들였던 당시의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정난우 자신이 결국 불행을 불러오는 눈을 가진 아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생긴 참담한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시작된 고통과의 투쟁에서 자신은 무참히 패배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의 눈알들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리게 됐을 때, 강도영은 처음으로 조용히, 그러나 맹렬하게 분노했다.
정난우 자신이 아닌 강도영 그 스스로에게.
늘 침착하고 다정했던 그의 모습은 없었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그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만 계속해서 뇌까렸다.
「넌. 나 같은 놈을 왜 그렇게 맹신했니.」
그가 느꼈던 절망의 정체에 대해 정난우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 한 건, 그 뒤로 강도영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거다. 아무리 바빠도 늘 밝은 얼굴로 짬을 내서 찾아 와 놀아 주던 그가 저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런 걸로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다시 사람들의 시선에서 도망치기 바빠요. 진의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는 건 고문 같이 느껴져요. 숨 막히고, 어지럽고, 속이 뒤집어지고…….”
에녹은 연신 술을 들이켰다. 취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건 쓰디쓴 감정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렸다. 9년 전이면 자신 역시 열일곱 살이었다. 몇 번이고 돌이켜 볼 때마다 후회했던, 그 떫게 설익은 나이.
“애초에 그 남자는 모든 면에서 예외였다, 이거네요.”
에녹은 망령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감정들을 애써 밀어내며 말했다. 빤히 응시하자 정난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으니 이제 저에게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은 엄마랑 크리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되짚어 보니 저 혼자만 크티스를 특별하게 생각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강도영이 정말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거라면, 그랬다. 애초에 친구 같은 사이는 성립될 수 없는 거였다.
정난우의 웃는 얼굴은 빠르게 침식되어 갔다. 허름한 우울감이 그 눈밑에 무겁게 드리웠다. 그대로 두면 퍼석 부서질 듯이 아슬아슬한 모양새였다.
에녹은 허공에서 흔들던 잔을 완전히 내려두었다. 소리에 민감한 정난우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에녹은 그 예민한 귀를 한참 바라보다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거리를 더 좁혔다.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시야는 조금 느리게 따라붙었다. 급작스레 오른 취기가 신경을 둔하게 한 탓이었다.
곧바로 튀어나가려는 말을 묘한 감상이 뒤덮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 떠올리고 만 거다. 같은 향수였다고. 연습벌레의 몸에서 어그러져 있는 향내를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 머릿속이 묽고 헤프게 풀어졌다.
그랬다. 이 독특한 냄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묘한 추억에 젖어 몇 번이고 들이마셨던 그 공기의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지금도 그랬다. 정난우는 10년 넘게 하나만 고집해 온 제 향을 흠뻑 묻히고 있었다. 피 흐르는 혈맥이 은근히 달아올랐다. 마치 땀 젖은 몸을 겹친 채 농밀한 후희를 나누고 있는 기분인 거다. 이런 별 미친 생각을 다 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술이 좀 됐다.
정난우가 꽉 조인 공기의 압력을 못 이겨 막 어깨를 빼던 참에, 에녹은 잠깐 목 안으로 보류해 두었던 말을 느리게 내뱉었다.
“내가 돼 준다잖아.”
성큼 멀어진 몸을 손짓으로 다시 불렀다. 그러니 또 정난우는 미적미적 다가와 붙었다. 에녹은 테이블을 팔꿈치로 눌러 묵직하게 체중을 지탱했다. 알코올에 절은 혀가 미끈한 언어를 쏟아냈다.
“그 자리 나 달라고. 어머니랑 나, 이렇게 둘이 당신한테 특별한 사람이 되면 되겠네. 안 그래?”
“…….”
정난우는 약간의 혼란과 당혹 사이에서 헤엄쳤다. 아무리 인간관계에 무지해도 그게 한마디 말로 뚝딱 정립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녹은 정난우의 방황을 길게 두고 보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는 정난우의 오른손을 휙 낚아챘다.
퍼드득 놀라 잡아 빼려는 걸 강하게 끌어 왔다. 정난우의 상체가 휘청 앞으로 기울었다. 입술이 닿을 뻔했다. 정난우는 숨을 멈췄고 에녹은 무심결에 제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시작합시다.”
“예, 예? 뭐를…….”
“친구든 뭐든 되려면 일단 얼굴부터 익혀야지. 곧 죽어도 안 보겠다니 그 자식한테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익혀요.”
에녹은 이제 대놓고 강도영을 그 자식이라는 욕 대명사로 지칭했다. 정난우는 그걸 미처 인지할 정신도 없었다. 손목을 쥐고 있는 아귀힘이 엄청나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손끝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얼굴에 가 닿았다. 놀랍도록 매끄러운 피부였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떨림이 발끝까지 치달았다. 흐트러진 호흡은 흙탕물 아래를 유영하는 미꾸라지처럼 불규칙한 궤적을 남겼다.
“만져 봐요, 좀. 남들은 못 만져서 안달인 나름 비싼 얼굴이에요. 기억하죠? 천만, 아니, 천이백만 불짜리 영화배우.”
손 안에서 빠르게 리듬을 올리는 맥박이 에녹에게도 전염되어 갔다. 기분 좋은 박자감이 나른하게 전신에 뻗어 나갔다.
에녹은 집요하게 정난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에녹은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깍지를 낀 다음, 굳은살 박인 손끝을 제 입술 위로 가져왔다.
“얼굴 구석구석 다 익힐 때까지 안 놔 줘요. 나 집요한 거 이제는 좀 알지?”
정난우는 움찔움찔하면서도 도리 없이 그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매만져야 했다. 시력을 되찾고 누군가의 얼굴을 이렇게 익히는 건 처음이었다. 아득한 과거가 어제처럼 선명히 되살아났다. 그 느낌은 점차 이상한 설렘으로 변질되어 갔다.
무력하게 끌려 다니던 정난우의 손이, 어느 순간부터 강압적으로 끌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그제야 에녹은 꽉 틀어쥔 힘을 천천히 뺐다. 자유를 되찾았지만 거친 손끝은 여전히 속박된 것처럼 제 얼굴 위를 더듬고 있었다.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졌다. 취기가 또 현기증을 몰고 왔다. 에녹은 갑갑한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어헤쳤다. 그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난우는 성실하게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마, 눈썹. 눈꺼풀. 뺨, 코. 입술…….
정난우는 어디 한 군데 빼뜨리지 않고 에녹의 얼굴을 손끝에 새겼다. 지문을 문대고 흘러들어오는 건 색채 없는 선들 뿐이었다. 러프스케치처럼 불분명한 선들이 머릿속에서 하늘하늘 움직였다.
희미하게 형태를 잡은 에녹의 얼굴은 아주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
정난우의 LA 필 협연 기간 동안 에녹은 껌 딱지였다. 아예 정난우의 곁에 들러붙어 살다시피 했다. 낮에는 틈만 나면 정난우의 객실로 난입했고 저녁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공연장 VIP석에 들어앉았다. 비록 얼굴은 두꺼운 그였지만 베푸는 데 인색하게 굴지는 않았다. 영화 한 편에 천만이 넘는 개런티를 받아 챙기는 그는 오랜만에 맘껏 돈지랄을 뽐낼 수 있어 조금은 기뻤다.
에녹은 제가 껌 딱지로 사는 동안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의 모든 간식거리를 책임지리라 홀로 다짐했다. 그리고 물론 실행에도 옮겼다. 공연 후엔 항상 정난우를 옆구리에 끼고 식사도 하고 거리에도 끌고 나갔다. 온갖 맛집이란 맛집은 다 돌아다녔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뜬금없이 웬 클래식 관람이야?》
휴대폰에선 매니저 쉐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단타 방송 출연을 좋아하지 않는 에녹이라 휴식기엔 서로 자주 볼 일이 많지는 않았다.
“갑자기 좋아졌나 보지.”
《그래. 네 변덕이 하루 이틀이냐. 하긴 파티나 돌아다니면서 흐트러진 모습보다는 우아하게 클래식 공연장에서 찍힌 사진이 더 보기 좋긴 하더라. 시나리오 준 건 보긴 했어?》
에녹은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랩톱컴퓨터 화면에는 티켓 예매 페이지가 떠 있었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누를 때마다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도대체 이건 뭐야? 다 이런 거야. 얘만 이런 거야? 뭔 내년 공연까지 거의 다 매진 임박이야? 좋은 자리는 그냥 죄 회색이네.”
매번 VIP 들어앉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특별히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공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길거리 악사들의 연주에도 아낌없이 지폐를 지불하는데 정난우 공연을 VIP석에서 무료로 관람하려니 영 마뜩찮았다.
그래서 에녹은 한태영에게 정난우의 미국 공연 스케줄 표를 요청했다. 그는 또 ‘아. 왜요!’ 했지만 ‘왜긴. 예매하려고 그러죠.’ 하니까 몇 시간 뒤에 아예 3년 치를 안겨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 확정돼 있는 건 그 정도고 더 추가될 거예요. 아직 다음 시즌은 예매 안 뜨는 것 정도는 알죠? 올 시즌은 아마 싼 좌석 몇 개 말고는 구하기 힘들 테니까 기다렸다가 그냥 다음 시즌 거나 사세요. 난우씨 공연은 예매 경쟁 치열하니까 각 오케스트라 홈페이지에서 시즌 예매가 시작하자마자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좋은 자리는 표 구하기 힘들거든요. 그냥 VIP석 앉으시지 그래요? 어차피 난우 씨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올 일이 거의 없으니까.」
한태영의 말이 맞았다. 좀 뻥이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클래식계의 슈퍼스타를 몰라 본 자신의 미개함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에녹은 온통 회색으로 칠해져서 선택이 불가능한 좌석들을 눈앞에 두고서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정난우의 극성팬들은 소리만 요란한게 아니었다. 그들은 정난우의 가치를 엄청난 예매을로 충분히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에녹. 시나리오 봤냐니까?》
“아. 도대체 날 얼마나 더 굴리려고 벌써부터 이 난리냐? 영화내린 지 두 달 밖에 안 됐다. 그리고 보내준 건 다 봤어. 다 별로야. 껍데기 장사 패스하라고 했잖아. 잊었어?”
《너한테 들어오는 게 다 그런 것뿐인 걸 어쩌냐?》
“그럼 좀 더 쉬면 되지. 급하게 맘먹지 마. 이번엔 이거다 하는거 아니면 시작 안 해.”
까기 좋아하는 비평가들은 에녹 자신을 가리켜 아역 데뷔작에서 퇴화했다고 독설을 날렸지만. 에녹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비웃고 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려면 이제껏 해 왔던 것과 비슷한 유형들은 아까워도 날려 보내는 게 맞았다.
《일단 더 두고 보자. 괜찮은 거 나오면 전화하마. 여자 만날 거면 파파라치 좀 잘 피해 다니고.》
지금 여자가 문제야?
에녹은 끊어진 전화를 아무렇게나 침대 위로 던졌다. 여자고 나발이고 지금 그런 거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한참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남은 좌석들 중 제일 비싼 자리를 하나씩 예매해 나갔다. 한태영의 말처럼 그냥 VIP석에 앉더라도 표는 사 두는 거다.
어차피 지금 이 유희는 시한부였다. 차기작이 결정 나고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 끝이었다. 마옴이 그러고 싶다 한들, 비행기 타고 느긋이 공연 관람 여행이나 다닐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사둔 티켓은 주변사람들 한테 선물이라도 해 주면 될 거다.
스케줄 표를 보면서 예매 작업을 모두 마쳤다. 전원을 끄려던 손이 일순 멈칫했다. 흠, 하고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정지해 있던 그는 이내 구글을 열어 ‘크리스토퍼 강’을 검색했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심심찮게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물론, 에녹이 주목한 것은 그의 재능이 얼마나 잘 조각된 보석이냐가 아니었다.
에녹은 애꿎은 화면만 한참 쏘아보았다. 백열등 불빛이 긁고 지나간 차가운 눈동자의 균열 속으로 어둠이 번져 나갔다.
파인더를 당당히 응시하는 남자의 눈은 오만하고, 피아노에 기댄 몸은 어색함 없이 우아했다. 키도 크고 뼈대의 선이 좋았다. 늘씬한 몸을 감싼 슈트는 제 피부처럼 어울렸다.
에녹은 랩톱을 통째로 들고서 거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된 화면을 자신의 얼굴 옆에 대 보았다. 눈, 코, 입, 얼굴형과 턱선, 이목구비의 배치까지 샅샅이 비교를 마쳤다.
그제야 에녹은 만족스러워졌다. 승리자의 고양된 미소를 입술 끝에 걸었지만, 이내 그 표정은 딱딱하게 풀어지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랩톱을 정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괴이한 팔색조가 자꾸만 제 리듬을 깨고 있었다. 균형도 기준도 없는 그런 이상한 세계에서 살고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그게 싫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치 기분 좋은 난장판이었다.
에녹은 실소를 지으며 나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키는 데까지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았다. 기분 좋은 부유감이 옮겨 붙은 그의 롤스로이스 팬텀도 날듯이 도로를 달렸다.
발레파킹을 맡기고 곧장 정난우의 객실로 가 벨을 눌렀다. 곧 빼꼼 문이 열리고 동시에 차분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통화 중이었던 거다.
“네, 방에 있어요. 네. …네, 천사백이 호예요.”
에녹은 문틈을 벌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품이 넉넉한 흰색의 긴팔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정난우가 등을 보이며 먼저 들어가고 있었다. 귀에는 휴대폰을 붙인 채였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급하게 정차한 승용차처럼 바이올린이 비뚤게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헌 악보 여러 장이 삐뚤빼뚤 흩어져 있었다. 연습 벌레다운 풍경이었다.
에녹은 정난우가 전화를 끊자마자 취조했다.
“무슨 전화예요? 누가 오는데?”
“아……커넬 씨 전화예요.”
정난우는 테이블에 휴대폰을 소리 나지 않게 올려두고 돌아섰다. 그제야 뒤늦게 ‘어서 와요.’ 하고 있었다. 반겨주는 인사는 기뻤지만 제일 먼저 들은 소식은 급작스레 얼굴에 매연 맞은 기분이 들게 했다. 에녹의 얼굴에 거뭇한 냉기가 스쳤다.
“루스가 왜요?”
“글쎄요. 중요한 용건이 있다고 하시네요.”
“그게 뭔데?”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거니까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하셔서 일단 오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에녹은 무심결에 한쪽 눈썹을 가파르게 밀어 올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티스트 정. 여기 앉아 봐요.”
정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천천히 다가와 앉았다. 며칠 지겹게 들이댄 성과였다. 여전히 쭈뼛거리긴 했지만 낯설어하지는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그를 손짓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속삭여도 천둥처럼 들릴 법한 거리를 만들고 나서야 에녹은 엄격하게 말했다.
“혼자 사는 집이나 객실에 위험한 상대를 함부로 들이면 안돼요.”
“…커넬 씨가 위험해요?”
“당연하죠.”
“왜요?”
정난우는 진심으로 놀란 것처럼 눈시울을 키웠다.
그야 당신이 루스를 너무 좋아하니까. 냉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루스 역시 당신을 좋아하니까.
에녹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이 없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말을 했다.
“이 세상에 안 위험한 남자는 없어요.”
“하지만 에녹도 남자잖아요.”
그건 그랬다. 에녹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어지럽게 생각들이 뒤엉켰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이내 돌파구를 찾은 그가 나긋나긋 목소리를 낮췄다.
“난 괜찮아요. 말했잖아요, 어머니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이 되어 주겠다고. 그러니까 나는 믿어도 돼요.”
정난우는 벌어진 입술을 천천히 다물었다. 에녹의 풀어헤쳐진 코트 앞섶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이한 감상이 혀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요즘 자주 자신을 찾아왔다. 누군가 그렇게 저돌적으로 돌진해 오는 건 처음 겪어봤다. 어색하게 어물쩍거리다 보면 금세 그의 기세에 휘말리곤 했다.
이제 겨우 짧고 얄팍한 인연을 만든 그가, 믿으라고 하는 거다.
조각나 흩어진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간신히 엮고 있는 건 핏물 밴 상실감이었다. 안개에 침몰된 먼 과거의 어린 날부터 누적된 것들이었다.
제가 눈을 맞추며 사랑했던 이들이 죄 부서지거나 흙으로 돌아갔다. 새싹조차 틔우지 못할 죽은 땅에 묻혔다 정난우의 고개가 조금 더 허물어졌다. 희미하게 경련하는 눈가를 그늘 아래 감췄다. 뒤늦은 깨달음이 섬광처럼 뇌리를 가른 탓이었다.
그 안에서 살아남은 건 강도영 하나뿐이었다. 그가 제게 거리를 두고 있는 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모두를 늪 아래로 끌어들이는 제 죽음 같은 정적에 더 부서지지 않기 위해서…….
한도 끝도 없이 침묵에 젖은 정난우를, 에녹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정난우의 표정변화는 음울하면서도 다채로웠다. 그 끝을 장식한 어설픈 은폐는 차가운 눈에 모두 읽혔다.
이런 타입은 사실 질색이었다. 성대를 울려야만 흩어지는 고름이 있는 법이었다. 저 혈색 옅은 입술은 그걸 몰랐다. 말주변 없는 뻣뻣한 혀는 오늘도 잠잠했다. 평소 에녹이라면 얼음물 한 통 받아다가 정수리에 들이 부으며 윽박을 지르고도 남았다.
하지만 차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날카롭게 후려 패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다독여서 저 굳은 몸을 풀어주고 싶었다. 에녹은 천천히 등을 구부렸다. 쏟아져 있는 새카만 앞머리에 콧등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하는데?”
정난우는 이유도 없이, 갑작스레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렸다. 커튼처럼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의 콧날 아래가 선명한 색채로 망막에 맺혔다.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 애초에 마주치지도 않았던 눈을 피하며 미안해요, 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안 좋은 생각했지, 방금. 이를 테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하는.”
에녹은 밀접한 숨결에 달래듯 낮춘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폐 속에 꾸역꾸역 가둬 놓은 정난우의 호흡은, 그가 고개를 무르고 나서야 해방되었다.
“내가 당신한테 해를 끼칠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 것 같아요?”
괴이쩍은 질문에 정난우는 눈만 깜빡거렸다. 얼어붙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폐쇄되었다. 에녹이 다그쳤다.
“뭐 여러 가지가 있을 거 아냐.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네가 나한테 이런 짓 저런 짓 안 한다는 걸 어떻게 장담해. 이런 생각 했으니까 그런 얼굴을 하지. 말해 봐요. 그게 뭔데?”
정난우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강도…는 아닌 것 같고…….”
“당연하죠. 나 돈 잘 벌어요. 부모님도 잘 벌고요.”
“시기나 질투, 이런 것도 아닐 거고.”
“나 태어나서 부러운 사람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난 나 잘난 맛에 사는 놈이거든.”
“강간도 물론 아닐 테고요…….”
“…….”
에녹은 그쯤에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희미한 당혹이 담담한 얼굴에 실금 같은 균열을 낳았다.
아니, 그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데…….
아주 위험한 고정관념이었다. 요즘이 어떤 시댄데 저런 고리타분한 확정으로 세이프티 존에 있다고 안심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엄청난 착각을 정정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에녹은 짧은 순간 극렬히 갈등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였다. 지금은 정난우의 의심을 불식시켜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현실적 문제는 나중에 차츰 저 머리에 새겨 넣어 주어도 충분했다. 에녹은 결국 침묵을 택했다.
맞잡은 손가락을 한참이나 꿈지럭거리던 정난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외는 잘…….”
“생각 안 나죠? 막 떠올리려고 해 봐도 뭐가 없지?”
정난우는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없으니까 그래요. 내가 아티스트 정한테 얻고 싶은 건 딱하나니까. 여기 들어있는 거.”
에녹의 검지 끝이 정난우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정난우는 작게 소스라치며 턱을 끌어당겼다. 옷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닿은 부분에서 시작된 야릇한 간지러움은 순식간에 말초까지 뻗어 나갔다.
오소소 일어난 솜털의 느낌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한 손으로 다른 쪽의 위팔을 옷 위에서 슬슬 문지르며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건 루스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에녹은 또 한 번 시험에 들고 말았다. 실익과 의리가 빅뱅의 순간처럼 머릿속에서 장렬히 충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방황은 길지 않았다. “팬이라잖아요. 내가 직업이 이렇다 보니까 팬이 스토커 되고 스토가 한 순간에 눈 도는 거 여럿 봤거든. 진짜 안 그럴 것처럼 멀쩡히 생긴 사람들이 꼭 뒤통수치더라니까. 존 레논도 열성팬한테 총 맞아 유명을 달리 한 건 알죠? 제일 무서운 게 자칭 열혈 팬이라는 애들이야”
정난우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탈색되었다. 납득한 건지 충격 받은 건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녹은 그에 눈매를 가늘게 휘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20년 가까이의 우정에 구정물을 끼얹어 놓고, 멀껑한 사람을 잠재적인 흉악범으로 만든 에녹의 얼굴은 뻔뻔하기만 했다.
객실에 들어온 루스는 에녹을 발견하고 의아한 눈을 했다. 네가 왜여기 있냐는 표정이었다. 찔리는 게 있는 에녹은 딴청 피우며 창밖의 먼 산만 응시했다. 루스는 별 말 없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정난우와 마주 앉았다.
“연습에 방해될까 봐 굳이 객실로 온 건데, 애초에 방해꾼이 있는 줄 알았다면 식사나 하면서 얘기할 걸 그랬군요.”
정난우는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풀 바른 마냥 뻣뻣함에 루스는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 두 개를 테이블에 놓고 하나를 스 밀었다.
“놀랐죠? 갑자기 보자고 해서.”
“네. 조금. LA에 계셨던 거예요?”
“아뇨, 난우 씨 LA 필 협연 소식 알고 어제 뉴욕에서 비행기 탔습니다.”
정난우는 캔 뚜껑을 따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 만나시려고요? 뉴욕에서요?”
“중요한 용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6시간을 날아와야 했을까, 정난우는 괜스레 긴장이 됐다. 루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일단 마셔요. 따뜻한 거니까.”
정난우는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말대로 따끈따끈한 온기가 손 안에 감겨들었다.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넘겼을 때 루스가 운을 뗐다.
“전에 리셉션장에서 잠깐 언급했던 제 다음 영화 기억해요?”
“네. 오케스트라 섭외하신다고.”
“맞습니다. 직 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쓰지 않았지만 방향은 클래식 쪽으로 맞춘 지 오래예요. 그래서 말인데요.”
정난우는 귀를 쫑긋거리며 입술에 캔을 붙였다. 뭔가 탐탁지 않은 눈길로 상황을 주시하던 에녹이 늘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세웠다. 루스의 기세가 어쩐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보통은 속을 읽을 수 없는 그였지만, 에녹의 눈에는 그의 눈빛이 훤히 읽혔다.
루스가 뭔가 목표 지점에 미리 깃발을 꽂은 거다. 차분하고 매너 좋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했다가는 큰코다친다. 루스는 굉장히 열렬한 일부를 심장 한구석에 은닉해 놓은 인간이었다. 정점에 꽂은 깃발을 노려보며 질주 할 때의 루스는 지금껏 불패신화를 기록해 왔다.
에녹은 꼰 다리 위에 헐렁하게 한 팔을 늘어뜨렸다. 다른 손은 소파등받이에 걸쳐 두었다. 이제 본격적인 얘기가 나올 거다. 어쩐지 느낌이 여상치 않았다.
“허락을 해 주시면, 정난우 씨 이야기를 모태로 시나리오 작업을 해 볼까 해서요. 그게 제 용건입니다.”
쿨럭!
정난우는 목젖 뒤까지 넘어갔던 커피의 반절을 기침과 함께 뱉어냈다. 황급히 한 손으로 입술을 막았지만 일은 벌어진 뒤였다. 한 번 터진 기침은 연달아 몇 번이고 꼬리를 이었다.
기도로 넘어간 커피가 허공에 산발적으로 튀어 올랐다. 우왕좌왕 손으로 문대고 닦느라 정난우는 손이고 턱이고 금세 엉망이 됐다.
“괜찮아요?”
에녹이 혀를 차며 티슈를 숙슥 뽑았다. 젖은 손에 티슈를 두어 장 주어 주고서 한 뭉텅이를 더 뽑았다. 그리고 정난우의 입술과 턱에 치덕치덕 묻은 얼룩을 허락 없이 훔쳐냈다. 제가 하겠다고 밀어내는 손을 손등으로 가차 없이 내치며 타박했다.
“어디 봐요. 뭐 이리 간이 작아. 툭하면 깜짝깜짝 놀라고.”
에녹은 정난우의 턱을 한 손으로 붙들고서 샅샅이 닦아냈다. 갈색의 얼룩들은 창백한 얼굴에서 금세 자취를 감췄다.
정난우가 커피를 내뿜던 순간, 반사적으로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던 루스는 멈칫한 상태로 내내 정지해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불청객이 보모처럼 굴어대는 걸 고요한 눈으로 방치했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수많은 상념이 스쳤다.
루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난우도 에녹도, 이 그림에 몹시도 안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지 얼핏 이해가 가지않았다. 그는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을 쓸어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놀라셨군요.”
“…아, 네. 조금.”
별 거 아닌 소동에도 정난우는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라서…….”
“정난우 씨의 이야기를 모태로 하겠다는 거지 통으로 가져올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수정을 거칠 거예요. 당신이 원치 않는 내용은 당연히 뺄 거고요.”
“네.”
“혹시 기분 나쁘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하필 저를…….”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죠. 들으시면 이번에야말로 불쾌하실 수도 있다 싶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씀 드릴게요. 일단 첫째는 감동적인 스토리에 정난우 씨의 이야기가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역경 속에 꽃핀 재능과 성공을 좋아하니까요.”
정난우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루스는 커피로 목을 축이고 다시금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둘째로는 저 역시 정난우 씨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고, 셋째로는 난우 씨 열혈 팬들이 흥행에 직, 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 좀 속물 같죠?”
정난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응대했다.
“아니에요. 제작자 쪽으로서는 당연히 고려해야 할 부분이죠. 제 매니지먼트도 저와 계약할 때 그런 생각을 했을 거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네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정난우 씨와 스튜디오 녹음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정난우는 잠시 멍한 상태로 반응하지 못했다. 스튜디오 녹음이라면 이제껏 공식 클래식 음반 말고는 작업해 본 적이 없었다. 어렴풋한 의혹을 그대로 혀끝에 실어 물었다.
“영화에 삽입하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정난우 씨를 대신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없으니까요. 스토리뿐 아니라 최상의 음악 역시 필요합니다. 연주 장면뿐만 아나라 삽입곡의 일부도요. 굳이 뉴욕 필을 섭외하겠다는 것도 그런 이유께서입니다. 물론 OST 작업도 마찬가지고.”
정난우는 말문이 막힌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모든 판이 너무 갑작스럽게 세팅된 터라 따라가기 힘들었다. 머릿속은 버퍼링에 걸려 루스가 내 놓은 이야기를 뒤늦게. 아주 느리게 이해해가고 있었다.
“이건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제일 중요한 건 정난우 씨의 의사입니다. 허락이 떨어지면 매니지먼트사와 로열티 문제를 협의하는 거고요. 짜지 않게 계약 조건을 제시할 테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모든 계약이 무사히 성사되면 밀착취재도 허락해 주셔야 해요.”
“…밀착취재라면, 저를 따라다니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저는 잡 지식은 많아도 현장은 잘 모르니까요.”
정난우는 식어가는 캔 커피를 한없이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기구한 과거사야 따로 비밀일 것도 없지만, 그게 직접적인 영상물로 전 세계에 뿌려진다는 걸 가정해 보니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연기처럼 심장을 감싸는 묘한 감정은 두려움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기묘한 현기증이 일어 잠시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루스는 정난우를 무심히 굽어보는 시선 그대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이유.”
정난우의 눈꺼풀이 반쯤 열렸다. 화살처럼 가서 박히는 시선이 루스의 가슴에 고정되었다. 루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아픔과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이야기를 쓸 겁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주고, 비로소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할 거예요.”
“…….”
“내 눈앞에 앉은 정난우 씨도 그렇게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一”
에녹은 루스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했다. 밀도 높은 시선으로 루스의 눈동자와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러나 낱알 하나라도 털어내 보려고 긁어내도 좀체 나오는 게 없었다. 표정도 음성도 흐트러짐 없이 고요했다. 루스는 원래부터 속을 알기 어려운 남자였다.
“헌정 영화입니다, 제가 난우 씨에게 드리고 싶은.”
LA 필과의 협연 막 공연 날, VIP석에 에녹과 루스는 또다시 나란히 앉아있었다. 오늘도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루스는 차분하게 팸플릿을 보고 있었다.
에녹은 그를 향해 노골적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등받이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서 한참 동안 루스를 노려보았다. 결국 그 눈빛 어택에 백기를 든 루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네 눈빛에 내 얼굴이 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니까.”
“영화 말이야. 어떤 내용으로 갈 건데?”
내내 알짱거리더니만 결국 그거였군.
루스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른 질문이라고 생각 안 해? 정난우 씨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확답은 주지 않았어.”
“잔말 말고 갈 방향이나 말해 보라고.”
정난우는 분명 하겠다고 할 거다. 루스의 열혈 팬이시니 같이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을 거다. 정난우의 이름으로 발매 된 음반만 벌써 10개가 넘었다. 이제 와 스튜디오 녹음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루스는 팸플릿으로 허벅지 위를 톡톡 두드렸다. 특유의 감정 읽히지 않는 눈으로 에녹을 빤히 응시했다. 아직 무엇도 확정된 건 없었다. 제작사 측에 간결한 아이템만 놓고 내부검토 과정만 끝낸 참이었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정난우를 설득해 반드시 성사해낼 거였지만, 만약 파토가 난다면 기획 자체를 틀어야만 했다. 불확실한 덩어리를 날 것 그대로 누군가에게 드러낸다는 건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그러나 저렇게 끈질기게 굴면 또 이 놈도 황소고집이었다. 몇 날 며칠 들볶일 건 각오해야 했다. 불필요한 피로를 늘일 생각은 없었다. 루스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기본 시놉시스만 정난우 씨의 인생 흐름과 유사해.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은 더 극적이고 고난이 많게,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무대를 더 화려하게 날도록. 그게 전체 흐름이지.”
“아역 비중은?”
“이십 퍼센트 남짓.”
“너무 많아. 좀 더 낮추고 성인 역에 비중을 더 줘 봐. 회상 신에서만 등장해도 무리 없게 만들면 되잖아?”
팸플릿을 까딱거리던 루스의 손놀림이 돌연 멈췄다. 에녹은 차가운 시선으로 루스를 조였다.
박수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솔리스트가 등장한다는 신호였다. 그 열렬한 환호 속에서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만 차분하게 흘렀다.
잠시의 관찰 뒤 에녹의 의도를 이해한 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정난우 씨 연주에 주인공은 에녹 밀리건이라. 매력적인 조합이긴 한데, 네 개런티는 너무 비싸.”
에녹은 비웃듯이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개런티나 쫓아다닐 거 같았으면 진즉에 다음 영화 찍고 있었겠지. 안 그래도 잘 팔릴 때 뼛속까지 뽑아 먹으려고 회사에서 난린데. 잔말 말고 시나리오나 잘 뽑아서 줘 봐.”
각본상 수상 경력까지 있는 루스 커넬이라면 믿을 만 했다. 그의 전작을 본 결과 에녹은 확실히 그의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스는 흥행보다 작품성을 더 중시했다. 무명배우가 많았던 캐스팅으로 그 정도 성공을 거둔 건 이 바닥에서 분명 드문 일이었다. 시나리오는 탄탄했고, 영상과 음악은 수려하다고 봐도 좋았다.
에녹의 서늘한 눈매에 열기가 들끓었다. 긍정적 대답을 강요하는 눈길에도 루스는 한 번 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정난우를 연기하기에 넌 너무 화려해. 치명적인 관능은 이 영화에서 하등 쓸모없는 요소야. 네 껍데기가 모든 걸 재색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에녹은 가련하다는 듯이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거 뭐 그리 상상력이 없어, 창작한다는 작자가. 통으로 따 올 거 아니라며? 우리 촌스럽게 이러지 말자. 수난시대 겪은 주인공이 꼭 피죽도 못 먹은 멸치 대가리려야 해? 그거 진짜 고정관념이다? 정말 그림이 안 그려져? 나는 막…….”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겠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에녹의 두 손은 허공에 들린 채 공기를 몇 번이나 쥐어짰다.
“아, 막, 그냥 쫙 롱 숏(카메라를 피세체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두어 넓은 장면을 찍는 촬영 방법.)으로 전체 그림이 다 보이는데? 감독님, 진짜 당신 눈에는 안 보여?”
루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녹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에녹이 말한 상상의 폭에 인공적인 선을 놀려 그림을 그려 보았다.
역시. 조금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항간의 날 선 비평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에녹 스스로가 인정을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배우인 그에게 결핍된 부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영화배우 에녹의 팬인 루스로서도. 영화감독인 루스로서도 단언할 수 있었다.
에녹의 데뷔가 메가톤급으로 화제가 되었던 건,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화 속 아이는 자폐를 앓았는데, 물론 에녹이 그 병에 시달린 건 아니었지만 그 즘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넘치게 사랑받던 맞닥뜨린 최초의 비극이었다.
감독의 끈질긴 권유에 에녹의 어머니가 허락을 했던 이유는 슬픔에 잠긴 아이가 영화 속의 다른 사람이 되어 마음껏 제 마음의 응어리를 다 터뜨리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영화를 스케일 큰 사이코드라마 정도로만 인식을 했다.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남편과 사별했어도 유산은 충분했고. 그녀 역시 잘 풀리는 사업가였기에 금전적으로 걱정할 날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영화가 끝난 뒤 에녹은 이전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계속 배우를 하겠다는 아이를 그녀는 타일렀다. 적이도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라고 그 이후에도 배우를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고.
그녀는 현명했고 에녹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의 의견을 존종했다. 그렇게 에녹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러나 화려한 재기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단점은 점차 스크린에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녹은 유별날 정도로 공감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제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하는 타입이었고,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제가 다치는 것도 마다않고 돌진하는 성향을 가졌다.
제 속의 뜨거움을 가감 없이 분출해 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타오르는 탐욕이나 정염의 불길이 그 시린 눈동자에 일렁거려도, 사람들은 그를 꺼리기는커녕 그 뜨거운 맹목에 매혹되고 빨려 들어갔다.
그게 문제였다. 어느 자리에 서 있어도 좌중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껍데기와 사납게 전진해 제 마음을 부딪치는 그 열정.
스물여섯의 청년 에녹 밀리건은 가지고 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그는 스치듯 머물렀던 사랑마저 쟁취했다고 여기겠지만, 실상 적나라하게 들여다봤을 때 그의 삶에 투쟁의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음에 멍이 들어본 적 없는 에녹 밀리건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결핍을 앓는 중이었다. 아니,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걸 보니 어쩌면 본능적으로 감지는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영화배우라는 제 직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또한 그 판에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 다만 이제껏 늘 그래왔듯 쉽지 않을 뿐이었다.
비극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에녹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 그것에 기실 절망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가 느낄 수 있는 한도치의 슬픔과 그리움, 상실감 정도에 그쳤을 거다. 그러나 정난우의 인생은 절망을 놓고는 절대 논할 수가 없었다.
헌데 그런 에녹 밀리건이, 정난우를 연기한다? 온 몸이 부딪치고 마음은 넝마가 되어 산산조각 나기 직전이었던, 그 정난우를…….
“이건 거의 도박이군.”
루스는 무심결에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에녹은 그 말을 용케도 선명히 알아듣고 눈을 빛냈다.
“걱정 말래도 그러네. 커넬 감독님 커리어에 구정물 안 튀길 테니까 그 상상력 좋은 머리로 나를 좀 만들어 봐.”
에녹은 끈질겼다. 동물적 감각이 기회의 냄새를 강하게 감지한 탓이었다. 이건 놓치면 안 되는 거라고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배우로서도. 정난우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급물살을 몰고 올 것이다. 서핑만 제대로 한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일단 생각 좀 해 보자.”
루스는 한숨을 털어내며 여지를 남겼다. 에녹은 조용히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깍지 낀 손을 팔걸이 위에 걸쳤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희미한 흥분이 기분 좋게 혈관을 따라 전신을 휘돌았다. 앞으로의 일이 재밌게 흘러갈 것 같았다.
*
모처럼 일주일 가까이 일정이 텅 비었다. 정난우는 오랜만에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원래는 이 때 한국의 어머니 댁으로 다녀오려 했지만 휴일의 정중앙에 자선 공연이 잡히는 바람에 그 꿈은 무산되었다.
“섭섭하시겠네요. 십일월엔 딱 하루밖에 못 다녀왔으니.”
“괜찮아요. 그래서 중국 갔을 때 한국에 들른 거니까.”
한태영의 말에 정난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어머니도 기뻐하고 기특해 하셨다. 그랬으니 됐다.
“파운데이션 설립도 했다고요? 아티스트 정이? 이름이 뭔데요?”
한태영은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을 힐긋 쳐다보았다. 요 근래 정난우 껌 딱지로 변태한 남자는 샌프란시스코까지 따라 왔다. 얼굴의 반을 머플러로 꽁꽁 싸매도 그 미모가 가려지지 않아서 결국 행선지가 낱낱이 밝혀지고 마는 에녹 밀리건이었다.
“재단을 만들자고 한 건 크리스고 전 같이 참여만 한 거예요. 이름은 예수님의 비Christ ‘s rain고요. 어차피 돈 벌어도 바빠서 특별히 쓸 데도 없고, 저축이야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으니 좋은 일 하는거죠.”
또 그 자식이야.
에녹의 눈에 무딘 칼날 같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이상반응을 한태영은 조금 의아하게 주시했지만. 그건 착각처럼 단기 찰나같이 나타났다 사라졌을 뿐이었다.
에녹은 담담함을 가장해 말했다.
“예수의 비라. 그냥 이름만 들어도 기부 재단 티가 확확 나네요.”
“크리스가 모태신앙이 가톡릭이라서요.”
“주로 어떤 거 하는데요?”
“장애 아동이나 희귀병 환자들을 돕는 단체들이 여럿 얽혀 있어요. 재능은 있는데 형편 안 되는 아이들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요. 자선 공연도 하고. 광고 찍은 업체와 기부 계약을 하기도 하고 공연 수익금 중 적은 비율로 후원금을 주는 형식이에요.”
“훌륭하네. 난 기부는 해도 내가 뭘 나서서 하지는 않는데.”
“우리 난우 씨야 퍼주는 데는 도가 텄으니까요.”
훈훈한 분위기에 느닷없이 찬물이 투하됐다. 에녹은 그 범인 한태영에게 곁눈을 주었다. 정난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에녹은 묘한 기류를 느끼고 뭔가 더 캐물으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차가 멈췄다.
“다 왔습니다.”
대여한 리무진의 기사가 말했다. 한태영과 율리안이 짐들을 내리는 동안 정난우는 가방에서 키홀더를 찾아 들었다.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담한 주택의 외양을 뜯어보았다. 화려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역시나 집이 정난우를 닮았다. 수수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넓지 않아도 충분히 멋스러운 집이었다. 작은 정원과 테라스, 그리고 주차장 하나가 있을 크기였다.
“차는 뭐 타요?”
“전 한국 차 타요. 한국 기업에서 타고 다니라고 주셨거든요.”
정난우는 대문을 따며 대답했다. 열린 문틈으로 한태영이 짐을 나르며 율리안에게 말했다.
“넌 난우 씨 차 끌고 나가서 장 좀 봐 와. 리스트 적어둔 거 가지고 있지?”
“네. 키 주세요.”
오랜만에 느굿한 오후를 만끽하며 바비큐 파티를 할 예정이었기에 한태영도 율리안도 들떠 있었다. 정난우가 차키를 홀더에서 빼서 율리안에게 건냈다. 한태영이 케리어를 끌며 에녹에게 부탁했다.
“밀리건 씨. 슈트 커버만 좀 옳겨 주실래요?”
“줘요.”
에녹은 흔쾌히 받아 들었다. 정난우는 바이올린 케이스만 건네받고 조금 민망해 했으나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한태영도 에녹도 은연중에 정난우의 손을 찬물 한 방울 묻히기도 아까운 귀한 손으로 인식하고 있기 떼문이었다.
정난우가 현관문을 땄다. 그 때,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정난우의 어깨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던 에녹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혼자 산다고 안 했어요?”
정난우는 말없이 있었다. 우두커니 선 발 아래 크고 작은 신발들이 버려진 듯 나뒹굴고 있었다. 바쁜 일정 탓에 오래도록 비워두기 일쑤인 집은 온기가 가득했다. 낯선 향기와 음식 냄새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던 마음에 묵직한 추를 달았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다. 요 얼마간 전화를 자꾸 해 대는 걸 피했더니 아예 찾아온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섰다. 한태영은 아직도 그 자리에 붙박인 돗 선 채 신경질적으로 연겨푸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지막이 욕설까지 짓씹었다.
“아오 씨발. 짜증나.”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에녹이 힐긋 한태영을 돌아보았다. 항상 예의를 갖추던 그에게서 돌연 쌍욕이 터져 나오니 의아해지는 게 당연했다.
에녹은 뭔가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슬쩍 목소리를 낮춰 한태영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도둑이라도 든 거?”
“도둑보다 더 질이 나쁩니다. 이건 매번 신고도 못하니. 야, 율리안! 갈 필요 없어!”
한태영이 문 밖으로 소리쳤다. 율리안은 왜요? 하고 물었고 한태영은 금방 다시 나갈 거라고 대답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안 좋은 예감은 더 거뭇하게 짙어졌다. 에녹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의문을 해결해 줄 발소리가 들려 왔다.
2층으로 이어진 원목 계단에서 젊은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를 안고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난우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도련님 오셨어요?〕
〔네.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에녹은 한태영이 욕을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놀랐다. 그는 눈썹을 가파르게 꺾어 올리며 정난우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귀를 의심했다. 뭔 말인지는 몰라도 말투까지 구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뭐야. 방금 정난우가 말한 거 맞아?
〔난우 왔냐?〕
곧이어 한 남자도 나타났다. 당연히 예상한 등장이었지만 정난우는 엄청난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곧 다시 나갈 거예요. 태영 씨, 짐은 거실 한쪽에 놔 둬 주세요.〕
〔오랜만에 봤는데 왜 다시 나가? 차라도 같이 한 잔 해야지.〕
아주 지네 집이군.
한태영은 이를 갈았지만 묵묵히 짐만 옮겼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들어온 율리안에게 ‘차 시동이나 걸어 놔.’ 했다. 율리안은 실내를 휘휘 둘러보더니 곧바로 사태파악을 끝냈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에녹은 슈트 커버를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고 곧장 한태영에게 다가가 말했다.
“뭔데. 통역 좀 해 줘 봐요.”
또냐.
안 그래도 진창인 기분 탓에 한태영은 확연히 이맛살을 찌푸렸다. 성대를 조여 작게 말을 내뱉었다.
“프라이버시라니까요! 좋은 일도 아닌데 알아서 뭐 합니까?”
“좋은 일이 아니니까 알아야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돼야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냐.”
“뭘 어떻게 도와요?”
에녹은 별 이상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찌푸렸다. 눈꺼풀에 반쯤 짓눌린 하늘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을 반사시켰 다. 생명이 숨 쉬는 바다보다 시린 빙하에 더 가까웠다. 에녹은 느리지만 강하게 혀를 움직였다.
“그거야 들어 봐야 알 일이지 . 발 안 뺄 거니까 그건 걱정 말고.”
한태영은 에녹을 물끄러미 보던 시선을 옮겼다.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정난우의 어깨는 벌써부터 지친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발치만 보고 있었다.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속이 쓰렸다.
한태영은 구석에 세워 둔 캐리어에 걸터앉아 손짓했다. 에녹이 그 옆 캐리어에 앉자 귓속말을 시작했다.
“저 남자는 난우 씨 친척 형이에요. 난우 씨 친부 쪽 핏줄이죠. 여자랑 꼬마는 그 부인이랑 자식이고. 지금 상황은 그러니까, 저 막돼먹은 가족이 말도 없이 난우 씨 집에 죽치고 있었던 거고. 굳이 다시 나가겠다는 난우 씨 붙든 거 보면 또 돈 달라는 얘길 할 거고. 빤하죠, 뭐.”
“돈?”
에녹의 눈썹이 사나운 곡선을 그렸다.
“아니 그 전에, 여기 아티스트 정네 집이잖아. 나가면 저것들이 나가야지 왜 우리가 나갑니까?”
“어차피 호텔 비싸다고 안 나갈 게 빤하니까 차라리 난우 씨가 나가는거예요. 같이 있기엔 껄끄러우니까.”
이건 뭔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야.
에녹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제 상식이 부족하거나 잘못됐나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도저히 한태영의 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저 치들이 정난우에게 해로운 존재라는 거였다. 순둥이 오브 순둥이 정난우의 목소리를 싸늘하게 얼릴 만큼.
〔어머, 도련님 ! 혹시 저 사람 영화배우 아니에요? 에녹 맞죠?〕
용케 제 이름을 알아들은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시선을 피했다. 저승사자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우물쭈물하며 제 남편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에녹 자신은 지금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중이었고, 그걸 아주 효과적으로 뿜어내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말 한마디 안 나눠 본 사람 상대로 이렇게 적개심이 들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적나라하게 까자면 크리스토퍼 강 이후 처음이었다.
한태영이 ‘좋겠수다.’하며 빈정거리듯 에녹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신 알아봤나 보네요.”
“뭐 그건 관심 없고.”
에녹은 한 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로 제 입술을 가만히 문질렀다.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눈동자의 색감 탓인지, 그의 표정에서 한태영은 한기를 느꼈다. 소름 돋은 팔을 무심코 쓸어내리다가 불쑥 떠올렸다.
에녹 밀리건은 여러 모로 유명인사였지만 상당히 안 좋은 쪽으로도 특화된 유명세를 떨치기도 하는 남자였다.
“저 치들 영어 좀 해요?”
나지막이 깔리는 질문에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이 옆에 앉은 제가 파파라치나 그의 신경을 거슬린 상대였다면 긴장을 좀 해야 됐을 거다. 그러나 당연히 한태영은 꿀릴게 없었다.
“말하는 발음은 좀 안 좋지만 알아듣긴 하던데요. 왜요?”
“그거면 됐어요.”
뭐가 돼요? 그렇게 묻기도 전에 에녹은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에 정난우에게 다가가는 그의 기백은 고요하나 묘하게 거칠었다.
에녹은 부드럽게 정난우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정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주눅 든 사람마냥 내리깐 눈꺼풀을 내려다보는 에녹의 기분은 더 저조해졌다.
“아티스트 정, 이렇게 된 거 아예 LA로 다시 가죠. 내 집 좋아요. 해충 한 마리도 없고.”
한태영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으며 슬쩍 주위를 살폈지만 알아들은 건 자신뿐인 듯 했다.
해충 부부는 멀거니 눈만 깜빡거리며 에녹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에 한태영은 약간 실망했다. 눈치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복이었다.
“밀리건 씨 집에요? 하지만 태영 씨랑 율리안은…….”
“누가 그렇게 부르래.”
에녹이 스읍, 하며 눈빛에 칼을 세웠다. 따끔하게 뺨을 베고 가는 질책에 정난우는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에녹. 에녹 집에요.”
그제야 에녹의 눈가에 부드러운 온기가 돌아왔다.
“집 넓으니까 걱정 마요. 거실에서 애들 풀어놓고 야구 하라고 해도 돼. 파티는 거기서 하죠. 비행기 타기 전에 연락해 놓으면 준비 다 해 놓을 거예요.”
“아뇨, 그건 폐가…….”
“특별히 좋아하는 와인 있나? 비싸도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저장고에 없는 거면 사 놓으라고 할 테니까.”
“예. 아니. 전 와인 맛은 잘 모르는데. 그보다는…….”
“내가 알려 줄게요. 나 좋은 와인 맛보고 모으고 하는 거 좋아하거든. 아예 나랑 친한 배우들 다 모아다가 파티 해도 좋겠지만, 그건 우리 아티스트 정 취향은 아닐 것 같네. 그렇지?”
사람 많은 건 공연장 외에는 질색이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정난우는 ‘절대 아니에요.’ 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정난우의 손을 끌어왔다. 굳은살 가득해도 모양 예쁜 손가락들 사이에 허락도 없이 자산의 셔츠 끝자락을 감아 버렸다.
“아니면 하와이 갈까요? 우리 어머니 거기서 리조트 사업해요. 얼마전에 아티스트 정 얘기했더니 꼭 한 번 데려오라고 하시던데. 어머니는 나와 달리 클래식 공연 잘 다니시거든요. 당신 팬이시래. 갈래요?”
“아, 아뇨. 어차피 토요일에 뉴욕에서 자선 공연도 해야 되니까 하와이는 좀…….”
“그럼 LA로 결정됐네요. 한, 리무진 다시 불러요.”
에녹이 손가락을 튕기며 강제로 매듭을 지었다. 한태영은 잠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그는 에녹의 추진력이 경이롭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폐 끼치기 싫어하는 정난우가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정난우는 쏟아지는 질문에만 즉각 반응하느라 지금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였다.
자기 좋을 대로 상황을 이끌어 가는데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도 않는다. 그의 모든 말이 정난우를 향한 호감에 근원을 두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묘하게 박력이 느껴져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결과, 매번 볼 때마다 정난우를 멋대로 앉혀 두고 불쌍한 척 돈 얘기부터 꺼내던 부부가 오늘은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 해요. 리무진 부르라니까. 오래 걸리면 콜택시 부르고.”
에녹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한태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배빨리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며 대꾸했다.
“아, 그래요. 밀리건 씨 것까지 비행기 표도 끊어 놓을게요.”
밖으로 나가려는 한태영의 뒷덜미를 에녹의 음성이 가차 없이 잡아챘다.
“이봐요, 한. 어디 갑니까. 그런 건 율리안 시키고 당신은 여기 있어야지. 그거 있잖아, 그거. 해 줘야지.”
에녹은 허공에서 손으로 8자를 마구 그려 보였다. 정난우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한태영은 눈치 좋게 알아들었다. 통역 얘기였다. 한태영은 신이 나서 율리안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시 리무진 부르고 LA행 비행기 티켓 4장 끊어 놔.』
에녹은 정난우의 어깨 위로 친근하게 한 팔을 둘렀다. 그대로 그의 친척이라는 남자를 살벌하게 웃는 낯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리무진 올 때까지 그 할 말을 다 끝내 주실까요?”
한태영은 고개를 쭉 빼서 정난우를 힐끔거렸다. 정난우는 헤드폰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쾅쾅 울리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여기까지 들렸다.
한태영은 옆 자리에 앉은 율리안의 다리를 툭툭 두드려 에녹과 자리를 바꾸라고 했다. 그는 군소리 없이 일어나 에녹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
왜요. 눈으로 묻는 그에게 한태영은 말없이 손짓했다.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옆자리에 몸을 싣자마자 한태영은 고양된 목소리를 애써 낮추며 말했다.
“난우 씨 SNS글 거의 제가 올리는 거 알죠?”
“그래서요?”
“제가 평생 밀리건 씨 영화 난우 씨 SNS에 홍보해 드릴게요.”
에녹은 긴 다리를 꼬며 등을 늘어뜨렸다. 피식 웃은 그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맞팔이나 받아요. 그런데 갑자기 홍보는 왜?”
“그 인간들 한 방 먹인 거 고마워서요.”
“아, 그 버러지들?”
한태영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부로 에녹의 열혈 팬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조각 같이 미끈한 남자가 툭툭 내뱉는 폭언의 위력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오늘 몸소 체험했다.
그 한 장면으로 깨달았다. 에녹은 자기 품 안의 사람에게는 한없이 열정적이지만 그 외에는 가차 없는 유형이었다. 단지 친구가 되고싶어 졸졸 따라다니는 정난우에게도 저토록 살살 녹을 듯이 잘해 주는데, 그간 연애했던 여자들에게는 오죽 잘해 줬을까 싶었다. 그녀들은 분명 연애기간 내내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느끼고도 남았을 거다.
“아무도 안 믿어 주겠지만, 나 진짜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고. 그런데 작작 해야 봐 줄 거 아냐.”
에녹은 싸늘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때마침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음료를 권했고 에녹과 한태영은 정중히 사양했다. 도자기 인형처럼 한 치의 틈 없는 메이크업을 한 스튜어디스는 도 넘은 친절을 발휘하며 세 번째 다가온 참이었다. 그녀는 돌아가면서도 연신 에녹의 얼굴을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그래, 인정. 에녹 밀리건 만세. 네가 짱이다. 너 더럽게 멋지다!
뻔뻔한 부부가 제 집처럼 커피를 타 와 정난우를 소파에 앉혔을 때, 에녹은 당연하다는 듯 정난우의 옆자리를 꿰찼다. 지금과 같은 자세로 그들보다 더 뻔뻔하게 말했다.
「한, 통역해요.」
절세미남의 고압적인 태도에 한태영만 빼고 모두 얼어붙었다. 늘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정난우를 앞에 두면 이유 없이 당당해지던 형이라는 작자도 그 기에 꽉 짓눌렸다. 대신 여자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꽁알거렸다.
「하지만 가족끼리 대화하는 건데……」
한태영이 그대로 전했다. 에녹은 표정 하나 안 변했다.
「난 집주인 정식 손님인데, 불청객들이 날 따돌리면 쓰나. 아니면 나도 알아듣게 영어로 하든지.」
「저기, 에녹…….」
「왜요, 아티스트 정. 설마 나 쫓아내려고? 밖에 진짜 추워요. 나 여기 있을래.」
거죽 두꺼운 사람은 반팔을 입고 활보해도 될 날씨였다. 에녹은 얼굴에 철판을 깔며 정난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그대로 늘어졌다. 나가라고 떠밀어도 눌러앉을 기세였다. 그는 그렇게 정난우에게 친근하게 몸을 기댄 채, 티 테이블 아래 철 지난 잡지를 펴 들더니 한가로이 말했다.
「얘기해요. 별 거 없으면 난 착하게 있을 거니까.」
정난우는 에녹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칭얼대는 애처럼 어깨 위로 머리마저 비비적거리는데 밀어낼 주변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정난우는 곤혹스러움에 공연히 귀밑머리만 긁적거렸다. 결국 빨리 얘기를 끝내고 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용건을 물었다.
너도 알고 쟤도 알고 모두 아는 그 용건을 꺼내기까지 말은 돌고 돌았다. 정난우는 잠자코 듣고 있었고 한태영은 열심히 통역했다. 눈은 비록 잡지를 보고 있으나 온 신경이 다 귀에 몰린 에녹의 안면에는 점점 한파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난우야. 우리가 지금 이민을 준비 중인데 네가 좀 도와 줬으면 해서. 알다시피 우린 여기 지리도 잘 몰라서 어디에 집을 구해야 하는지부터 난관이거든. 우리 애 학교 문제도 잘 모르고.」
한태영은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 집이 거의 비었으니 우리가 쓰면 안 되겠니. 차도 차고에 박혀 있던데 그것도 우리가 쓰면 안 되겠니. 우리 애도 너처럼 바이올린을 가르쳐 줄까 하는데 우린 봐도 모르니 네가 악기상 가서 좋은 걸 골라 주면 안 되겠니. 가끔 연주 여행에 애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도 주고 현장학습도 시켜주면 안 되겠니. 어쩌고저쩌고 아주 농약 처먹은 듯이 지랄 염병…….
한태영은 확신했다. 이 작자들이 이번엔 아예 작정을 하고 여기에 죽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이대로 두면 정난우는 거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고야 말 거라고.
통역하는 한태영의 말에 점점 가속이 붙었다. 일개 매니저일 뿐 난우에게는 친구도 뭣도 아닌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자리였다. 반면 에녹은 최근 정난우와 그럴싸한 친구 사이를 형성했다.
좁디좁은 정난우의 인간관계 탓에, 에녹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 안에서 원톱을 꿰차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니까 그는 한태영 자신과는 다르게 조금쯤 간섭해도 되는 위치란 말이었다.
「너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식구가 있으면 좋지 않냐. 우리 와이프 음식 솜씨도 좋은데 식사도 잘 챙겨줄 거고.」
에녹의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인내는 그 식구라는 말에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다. 대화내용에는 관심 없는 척 잡지만 술렁술렁 넘기던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막말을 내뱉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길거리 매춘부들도 구걸은 안 하는데. 내가 아티스트 정네 집에서 웬 거지들을 다 보네. 불쌍한 사람들한테 기부하는 게 취미라더니 진짠가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경직된 두 쌍의 눈동자가 그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폭탄 던진 당사자 에녹의 시선은 연출인지 뭔지 여전히 잡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페이지가 넘어간 지는 물론 한참 전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에녹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한태영에게 물었다.
「내가 몰라서 그러는데요, 한. 한국 사람들은 원래 돈 잘 버는 친척 있으면 빌붙어 사는 걸 미덕으로 아는 건가?」
……응?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한태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의 울분이 치밀어 바득바득 고함을 쳤다.
「아니 지금 당신 제정신이에요? 우리나라를 뭘로 보는 겁니까! 쓰레기들은 내추럴 본은 있어도 국적은 없는 거 몰라요?!」
평소 애국심이라고는 한일전 때나 생기는 주제에 자기 나라 욕하니까 뭐가 갑자기 치밀어 오른 거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허공에 먼지처럼 부유했다. 잠깐 아차 싶긴 했지만 후회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에녹은 나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하도 당연한 듯이 얘기하니까 난 또 그런 줄 알고. 그런 거 있잖아요. 외국인들은 이해 못하는 그 나라 고유문화 같은 거.」
「우리나라, 안. 그래요.」
한태영도 사실 한국 문화는 잘 몰랐다. 그러나 일단 무턱대고 아니라고 우겼다. 원래 우기는 데 장사 없었다. 어차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에녹은 ‘그렇지. 그게 정상이지.’ 거듭 뇌까리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아니면 쟤들은 도대체 뭐지?」
「흥. 말했잖아요, 내추럴 본인가보지.」
시류에 기꺼이 편승한 한태영도 덩달아 톡 쐈다. 둘은 그 때만큼은 10년 지기 친구처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아, 내가 웬만해서는 정말 저런 씨발 놈들이랑 말 섞기 진짜 싫어하는데. 내가 저런 새끼들만 보면 좀 막나가는 경향이 있어서.」
늘어지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 녹은 금속성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그 스산하게 갈라진 결을 모두가 느꼈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얼른 에녹의 얼굴을 더듬었다. 터진 입을 막으려고 다가온 손을 에녹은 별 무리 없이 낚아챘다. 그리고 내내 뼈가 흐물거리는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뒀던 몸을 바로 했다.
탁.
들고 있던 잡지를 테이블 위에 던지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에녹은 잡아챘던 정난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괜찮다는 듯이, 가만가만 리듬을 실어 힘을 줬다. 정난우의 흔들리는 시선이 에녹의 턱 끝을 스쳤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에녹은 그런 정난우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손아귀에 무언을 실어 체온을 건넸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음성이 쏘아져 나갔다.
「능력이 없으면 자기 살던 땅에서 능력껏 살아야지. 왜 굳이 여기까지 기어와서 집 내놔라, 차 내놔라. 애 교육도 책임져 줘라 지랄들이야. 정난우한테 맡겨 놨어?」
그래도 수치는 아는 건지 부부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수치라기보다 는 분노에 가까운 표정이긴 했지만.
에녹은 부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폭발하는 난폭한 살기때문에 그들은 화를 참았던 건지도 모른다. 에녹은 빈손으로 정난우의 턱을 움켜쥐고 그들을 향해 들어 올려 보였다. 턱 밑 검게 변색된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깔이 있으면 이거 좀 봐. 뭐 느끼는 거 없어? 하도 연습을 해서 살이 검게 죽은 거야. 한 달에 몇 번씩이고 오대양 건너면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 하는 거라고. 너희도 그렇게 돈 벌어서 너회 살 집 구하고 차도 사고 너희 애 가르쳐.」
「저, 에녹. 그…….」
에녹은 끼어들려는 정난우의 입을 빈틈없이 봉쇄했다. 큰 손은 입술도 모자라 콧등까지 덮었다. 그대로 끌어당겨 가슴에 기대게 했다. 벌레들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것도 아까웠다.
「그리고 뭐가 어째? 바이올린을 좀 가르쳐 줘? 현장학습을 시켜 줘? 앤드류 커넬 같은 거장들도 애지중지하는 정난우가 무슨 동네 피아노학원 원장인 줄 알아,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씨발 개 같은 소리도 작작해야 들어주지!」
일류 배우의 숙련된 발성은 얼마나 훌륭한가.
쩌렁쩌렁 울리는 노호성에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하마터면 한태영도 감격해서 울 뻔했다. 그 와중에도 혹시라도 그들이 못 알아들을까 봐 열심히 한국어로 통역하는 걸 잊지 않았다. 십 년 묵은 체중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정난우는 다급하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에녹은 그 틈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정난우를 여기에 두면 결국 휩쓸려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꼴을 보느니 나중에 욕 좀 듣는 게 백 배 나았다.
에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이 나간 듯이 황망히 고개를 드는 정난우를 그대로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졌다. 오금과 허리에 단단히 한팔씩 두르고 그대로 나가려던 에녹이, 현관 앞에서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거칠게 정제되지 않은 숨을 몇 번이고 골랐다. 그러나 도저히 분이 안풀려 어깨너머 고개를 꺾었다. 하늘색 눈동자가 흉기처럼 번득거렸다. 냉랭한 눈빛은 직선을 그리며 단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는 끓는 울화를 고스란히 증폭시켜 씹어 내뱉었다.
「다섯 살 아기 정난우가 눈 먼 고아가 됐을 때, 네 부모는 뭘 했는지 가서 물어 봐. 네 놈 새끼들이 정난우에게 얻을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뿐이니까.」
그 때,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정난우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 아릿한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불에 지진 듯이 화끈거리며 접촉 부위마다 새겨 있었다.
한태영이 어두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다 외면했다고 들었어요. 눈까지 먼 애 어떻게 평생을 키우느냐고. 지금의 양어머니, 그리고 돌아가신 양아버지 안 계셨으면 우리 난우 씨 그대로 고아원 갈 뻔했죠. 아, 인터뷰 내용 찾아 보셨으려나?”
에녹과 한태영은 나란히 등받이를 기울인 비즈니스 석에 반쯤 누워 있었다.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던 에녹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봅니다, 그런 거. 활자로 읽는 흘러간 시간,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쏟아진 말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궁금한 건 내가 직접 묻고 답을 들을 겁니다. 그 상대가 정난우건 정난우 주변인이건. 하지만 친척들이 외면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루스한테 들었으니까.”
“아아. 그랬군요.”
에녹은 한숨 같은 말을 흘렸다.
“난 아티스트 정이 화낼 줄 알았어요. 그래도 가족이랍시고 내치지 못 하는 인간들인데 내가 홧김에 너무 심하게 굴어서.”
“말 안 해서 그렇지 고마워 할 거예요. 아니, 어쩌면 별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고. 오래 봐 왔는데도 그들에 대한 난우 씨의 감정을 명확히 모르겠거든요.”
“왜요?”
한태영은 슬그머니 정난우의 눈치를 살폈다. 늘 그렇듯 미간을 간간이 찌푸리고 있었지만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건재했다. 한태영이 소리 죽여 대답했다.
“끌려 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소름 끼칠 정도로 묘하게 냉정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가 있거든요. 그래도 오늘 만난 형이란 놈한테는 좀 약한 게 사실이에요. 그 꼬마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난우 씨 다리에 달랑달랑 매달리면 난우 씨 주변의 공기가 따뜻해지긴 합디다. 뭐, 잘못은 부모가 한 거지 애는 죄가 없으니까.”
“그 놈 말고도 더 있다는 소리예요?”
“그럼 없을까요. 난우 씨 친모는 애초에 고아였고, 친부 쪽은 거의 다 쓰레기라고 보면 됩니다.”
정난우의 유명세가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을 때, 일가친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난우를 만나자마자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부둥켜안으며 일단 요란하게 눈물부터 흩뿌려댔다.
비참하게 눈이 먼 어린 것을 그리도 매정하게 외면해 놓고, 단 한 번도 그 생사를 궁금해 하지도 않아 놓고서. 그들은 뻔뻔한 만큼 탐욕스러웠다.
정난우의 기억 속에 친척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친아버지는 친척은 커녕 친구조차도 현관 안에 들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후에 유전자검사까지 거치고 나서야 제게 가족이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정난우는 악어의 눈물 앞에서 움츠러들어 양부모만 바라보았다. 그를 키운 노부부는 그 감동의 무대에서 빛바랜 조연처럼 초라하고 볼품없이 늙어 있었다.
그 두렵고 낯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양부모는 이제라도 가족을 찾은 양아들이 비로소 행복해질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핏줄 통한 가족들의 품에 안긴 정난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눈물지었고, 정난우는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대책 없네.”
“그렇죠. 그런데도 싫은 소리 안 해요 난우 씨는 포용한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들어주는 건 사실이죠.”
“그럼 그동안 쭉 뜯기면서 산거예요? 어릴 때 데뷔했다면서요. 십 년 넘었다던데.”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될 뻔했었죠. 난우 씨 본격적으로 세계무대 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영 씨가 적당히 잘라내 줬다고 들었어요.”
“도영?”
“아, 크리스토퍼 강 한국이름이 강도영이에요.”
내가 여기에서까지 그 자식 이름을 들어야 돼?
에녹은 못마땅하게 인상을 그었다. 그래도 상황은 알아야 할 것 같아 그 방법을 물었다. 한태영은 한탄하듯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좋은 데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난우 씨 명의로 이것 저것 사는 거예요. 땅이며 집이며. 그걸 빚이라는 명목으로 난우 씨 수입을 묶어 두고 갚게 한 거죠. 그러다가 재작년인가, 강원도라고 한국의 대중적인 바다 여행지가 있는데 도영 씨가 그 쪽 주소 알려주면서 한번 가 보라고 하더라고요. 몇 년 전부터 거기에 부지를 야금야금 사 놨는데, 보고 괜찮으면 넘겨주겠다고. 거기에 펜션 같은 거 지어서 어머니랑 어머니 동생 가족들 소일거리 겸 관리하시게 하는 게 어떠냐고. 그 때 나도 같이 가서 봤는데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그 때부터 있던 것들 싹 갈아엎고, 그간 난우 씨 명의로 돼 있던 거 다 팔아치워서 자금 만들고 공사 들어갔죠. 작년에 완공 됐어요. 있던 재산 다 처분했는데도 모자라더라고요. 엄청 크게 지었거든요. 뭐 땜빵해서 넣은 자금은 또 도영 씨가 빌려주고…….”
“하, 참. 세기의 천재가 빚쟁이라니. 얼마나 더 갚아야 되는데요?”
한태영은 피식 웃었다.
“한 삼사 년 더 갚으면 될 거예요. 아, 조만간 재계약 시기 다가오니 금방 다 갚겠네요. 어쨌든 빚이라도 있으니 이 정도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한 번에 수십 만 달러까지 뜯어가려고 할 걸요. 그래서 난우 씨 친척들이 도영 씨 엄청 싫어해요, 무서워하기도 하고. 아까 그 부부는 특히 더 그래요. 걔네들 집 보증금을 난우 씨가 대 주고 난우 씨 명의로 해 놨었는데, 펜션 공사자금 만든다고 빼야 했었거든요. 그 때 그럼 우린 어디에 살라는 거냐면서 하도 당당하게 지랄을 해 대는 거야. 나 원 참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난우 씨가 결국 저건 그냥 놔두자 했는데 내가 울화통이 터져서 슬쩍 도영 씨한테 언질 좀 했죠. 그 사람도 화나면 장난 아니거든요. 덕분에 결국 무사히 보증금 빼고 깨끗이 정리됐어요.”
“어떻게 했는데요?”
“도영 씨가 전화 걸어서 한마디만 하면 돼요. ‘비행기 티켓 보내줄 테니까 와서 나 좀 봅시다.’ 이러면 그냥 상황 끝이야. 난우 씨 친척들, 절대 도영 씨랑 대면 안 해요. 몇 번 만날 때마다 옴팡 깨지더니 이제는 피 본다는 거 알거든. 그 버러지들 블랙리스트에 이젠 당신도 이름 올이겠네요. 아주 좋은 현상이야.”
그래. 좋은 일 해줬다는데 고깝게 보지 말자. 고깝게 보지 말자.
에녹은 눈을 감은 채 느리게 호흡했다. 암시를 거듭하며 자기수양의 길을 잠시 걸었다.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저 바보 같은 게 호구처럼만 살았을 테니까,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은근슬쩍 빚을 가져와도 되고.
에녹이 반짝 눈을 뜨며 물었다.
“얼마나 됐죠? 크리스토퍼 강이랑 아티스트 정이랑.”
“난우 씨가 열다섯 살 때부터니까…십일년 정도 됐네요.”
11년…… 오랜 시간이었다. 만남의 절대적 횟수만을 놓고 본다면 분명 앞설 자신이 있었지만, 흘러간 세월을 덮을 만큼의 막대한 누적치를 쌓으려면 아마 한참 걸릴 거였다.
자석처럼 눈동자가 어느 곳으로 굴러갔다. 에녹은 악몽 꾸듯 간헐적으로 뒤척이는 정난우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한태영도 율리안도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한.”
“네.”
“아티스트 정이 저렇게 매번 잠 못 자는 이유, 내가 저 사람에게 물어도 되는 겁니까?”
왜 못 자는 겁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한태영은 그 살짝 뒤틀린 질문에 에녹의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조금 아까는 그렇게 미친 듯이 화가 나서 쑥대밭을 만들던 사람이, 지금은 또 이렇게 사려 깊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한태영은 진심으로 이 남자가, 정난우의 곁에 오래오래 있어줬으면 했다. 강도영이 채워주지 못하는 나머지 습한 그늘에 이 남자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정난우를 지탱해 줬으면, 그런 강렬한 바람이 한태영의 가슴을 미미하게 끓게 했다.
“그건 아마 안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인터뷰 때도 그에 관한 얘기는 단 하나도 안 했거든요, 난우씨가.”
에녹의 시린 눈빛이 도로 한태영에게 옮겨 왔다. 한태영은 일그러진 입술을 움직여 애써 웃어 보였다.
“난우 씨가 왜 흔들리는 공간에서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지,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몇 없을 겁니다.”
그 때, 에녹의 눈꺼풀이 꿈틀 흔들렸다. 냉랭한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내깔렸다.
“뭐예요, 그건. 단순히 불면증 같은 게 아니었어요?”
한태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포인트는 ‘흔들리고 움직이는 공간’이에요. 그게 다 난우 씨 한테는 지옥이에요. 그 조건만 아니라면 어디에 데려다 놔도 머리만 대면 1분 안에 잠드는 체질이에요.”
단 한 번 비행 도중 MP3가 망가졌던 날이 있었다. 한태영은 혼이 다 나가 버렸었다. 창백하게 질린 정난우는 위아래 옷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려댔다. 온 몸은 경련하듯 떨어대고, 무슨 말을 걸어도 그 귀에 가 닿지 않았다.
이러다 사람 잡겠다 싶어 스튜어디스를 부르려는데, 정난우가 옷깃을 붙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등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면서.
「괜찮…괜아요. 심, 심리적인. 거라서…….」
그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뒤로 한태영은 여분의 MP3를 적어도 3개 이상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틈만 나면 고장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움직이는 공간…….”
으깨진 혼잣말을 내뱉는 에녹의 시선이 천장에 붙박였다. 멍하니 깜빡이는 눈에서는 평소의 태양처럼 강렬한 에너지가 씻은 듯 사라졌다.
에녹은 아랫입술 안쪽을 사납게 한 번 씹어 물었다. 으득하고 파열된 부드러운 조직의 틈에서 비릿한 피가 샘솟아 혀끝에 휘감겼다.
기이한 감정의 격류였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의 동요가 한태영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래서 한태영은 차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갑자기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녹이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씨발. 친부모란 새끼들은 왜 애를…….”
울컥 치솟은 불덩이를 차마 다 내리누르지 못해, 에녹은 무심결에 화를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뒷말은 결국 도로 쓰게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알고 있었다. 친부모가 흩뿌리고 간 재앙은 정난우가 겪은 절망들의 모든 밑거름이 되었지만, 열매를 맺기까지는 결국 다른 부수적인 양분이 필요했을 거다.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 차별과 조롱, 심지어 정난우의 보석 같은 재능마저 그 독 섞인 양분으로 작용했을 거다.
열일곱. 할 수만 있다면, 에녹은 불완전했던 저의 그 나이를 스스로의 생애에서 깔끔하게 도려내고 싶었다. 아이도 성인도 아니었던 그 어러석은 시간들을 정난우의 열일곱과 함께 완벽하게 들어낼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제 순간의 실수로 놓쳐버린 그 이틀만이라도.
그 이후 가만히 찾아온 침묵 속에 두 사람은 방치되었다. 에녹은 정난우가 그의 양모나 연주에 대한 일 외에서 뽀얗게 웃음을 터뜨렸던 일화를 묻고 싶었고, 한태영은 그런 일화를 줄줄이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에녹은 차마 묻지 못했고, 한태영은 해 줄 말이 없었다. 침묵의 틈 사이로 두 사람의 쓰라린 감정들이 고여 들었다.
바비큐 파티는 다음 날 저녁에 열렸다. 오후 4시부터 출장 서비스가 달려와 그릴이며 석쇠며 홈 바비큐 용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율리안과 한태영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머지 식료품을 장 봐 왔다.
파티 구성원은 네 명에서 다섯 명이 되었다. 늘어난 한 명은 아직 LA에 머물고 있던 루스였다. ‘영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습니까?’ 온 문자를 받자마자 정난우가 ‘우리 오늘 루스도 초대해요.’ 하는 바람에 에녹은 약간, 아주 약간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 망할 감정은 금세 휘발해 버렸다. ‘안 되나요?’ 하는 정난우의 얼굴이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인 탓이었다. 뜨끔한 에녹은 재빨리 외쳤다.
「돼요, 된다고!」
루스는 고급 와인을 한 상자나 들고 왔다. 블랙진에 심플한 면 셔츠, 그리고 지퍼가 사선으로 들어간 바이커 재킷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캐주얼 코디에 정난우는 멋지다고 칭찬했다. 루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석양이 물러갈 때 쯤 본격적인 식사는 끝이 났다. 예보보다 싸늘하게 느껴지는 기온이 물기처럼 피부에 엉겨 왔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실내로 빨려 들어갔다. 모두가 정난우의 컨디션 조절을 염두에 둔 거였지만 정작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다.
이사 온 이래 한 번도 써 본 적 없다는 페치카에 불을 넣고, 다섯 명은 아늑한 조명 아래서 와인 잔을 들었다. 생각보다 오고가는 얘기들도 길어지고 술자리도 함께 엿물처럼 늘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자정에 가까워졌다. 그 때 쯤 와인이 다 떨어지자 에녹은 쟁여 둔 캔 맥주를 박스 째 꺼내 왔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기적이 벌어졌다. 에녹 입장에서의 기적이었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라니까. 아니. 양주를 그렇게 들이 부어도 안 취하더니 맥주 두 캔에는 왜 맛이 가는 거지?”
얘는 진짜 뭐지?
어떻게든 취하게 하려고 꼼수 부린 과거가 떠올라 뭔가 허탈했다. 이렇게나 쉬운 걸 그 병신 짓을 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에녹은 정난우의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볕에 늘어진 병아리처럼 꼬물꼬물 눈을 깜빡이며 정난우는 그 손을 쿡 찔렀다. 나름 술주정이었다. 다이내믹한 걸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얌전하기만 했다.
“난우 씨 맥주 섞어 마시면 취해요. 모르셨나 보네.”
한태영이 피식 웃으며 빈 캔 하나를 구겼다. 에녹이 스윽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술버릇은 눈앞에 알짱거리는 거 콕콕 찌르는 거고?”
“아뇨. 정확히 말하자면 더듬는 거예요.”
“뭐라?”
에녹의 눈썹이 험악한 곡선을 그렸다. 한태영은 그새 새 캔을 하나 더 땄다. 정난우는 거의 박제동물 수준으로 정적인 고용주였다. 때문에 이렇게 놀 기회가 없었던 그는 한껏 분위기에 도취되어 재차 입을 열었다.
“눈이 안 보였을 때로 돌아간다는 얘기예요. 아무것도 안 보고 모든걸 손으로 더듬어서 분별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리고?”
“애가 되죠. 유아 퇴행 같은 거랄까?”
“이건 또 뭔…….”
에녹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 내뱉은 미묘한 그의 웃음소리에 훈훈한 기류가 출렁거렸다. 정난우의 정면에 자리 잡은 에녹은 한쪽 무릎만 세워 팔을 걸쳤다. 상체를 수그려 그 위에 옆얼굴을 푹 파묻었다.
빤히 올려다보았다. 거의 감긴 정난우의 까만 눈은 초점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이래서야 술독에 빠뜨려 훔쳐보자던 눈빛 도둑질 계략은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다.
취하면 맹인이 된다는 이상한 술버릇이라니. 정난우는 정말 좀 알겠다 싶을 때마다 색다른 면모를 보였다.
“애란 말이지.”
에녹은 나른한 시선으로 정난우를 음미했다. 타 들어가는 장작이 뿜어내는 가루 같은 불빛들이 그의 눈 속에서 반짝거렸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시력을 내려놓은 정난우는 그림자에 반응했다. 가만히 손을 올려 더듬더니, 느릿느릿 에녹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감싸 쥐었다. 꼭 쥐고, 놓지 않았다. 혈색 짙어진 입술이 빙그레 휘었다. 에녹도 덩달아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애잖아. 몇 살이야, 도대체.”
루스는 느긋이 맥주를 한 모금 넘기며 시선을 흘렸다. 양 무릎을 세운 정난우가 불 그림자에 젖어 일렁거렸다. 거의 감긴 눈꺼풀과 적당히 솟은 콧대, 그리고 차분히 다물린 도톰한 입술에 따뜻한 빛이 고여 들었다. 루스는 그 모습이 마치 파스텔로 그린 삽화 같다고 느꼈다.
〔바이올린 주세요.〕
불현듯 정난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지척에서 그 음성을 들은 에녹은 한태영을 돌아보았다.
“바이올린 어쩌고 하는 거 같은데?”
한태영이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정난우의 곁에 앉은 그가 정말 어린애 대하듯 억양을 늘어뜨렸다.
〔난우, 바이올린 줄까?〕
〔네, 주세요.〕
한태영은 정난우의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취기가 살짝 도는 와중에서도 단단히 주의를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이거 엄청 비싼 거야. 빌려온 거니까 조심히 써야 돼?〕
정난우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도 말 잘 들었을 꼬마 정난우를 믿고서 미친 가격의 악기를 기꺼이 건넸다.
정난우가 바이올린을 턱 아래에 끼고 현을 조여 음을 맞추는 동안, 에녹은 아예 자리를 깔았다. 비스듬히 누운 그가 세워 올린 팔에 머리를 받치며 입을 열었다.
“한태영 씨.”
“네?”
“통역해요, 방금 전에 한 말.”
“…….”
이젠 아예 당연하다는 투였다. 한태영은 기가 막혔다.
“아, 별 말 없었어요! 뭘 그렇게 시시콜콜 알려고 들어요?”
“그래도 해요. 나 알 권리 있잖아. 해충 퇴치도 해 줬는데 ”
“아, 그랬지 참…….”
한태영의 찡그려졌던 표정이 단번에 녹았다.
“그냥 바이올린 달래서 준 거고, 비싼 거니까 조심히 써야 된다고한 거예요. 대여한 거니까요.”
“대여를 해? 저거 아티스트 정 거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저 비싼 걸 어떻게 사요.”
“얼만데요?”
“지금 경매에 내 놓으면 천만 불은 족히 할 걸요.”
에녹은 뭔 나무 덩어리가 그리 비싸냐며 혀를 찼다.
“그럼 일 년에 얼마, 이렇게 돈 주고 빌리는 거예요?”
“아뇨. 보통 악기 주인이 연주자에게 무료로 빌려 줘요. 난우 씨 정도면 싫다고 해도 빌려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니까, 다행이 악기 없이 전전긍긍할 일은 없죠. 그래도 잃어버리면 난리 나겠지만.”
“일부러 사서 빌려주는 건 무슨 심리야, 도대체? 혹시 스폰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조율을 마친 정난우가 활을 들었다. 그 때 루스가 조금 더 가까이 당겨 앉았다. 활을 든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신청곡 있습니다.”
〔……뭔데요?〕
루스가 눈을 깜빡이며 돌아보자 한태영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난우 씨 취했을 때는 다 알아듣긴 하는데 대답은 한국말로 해요. 신청 곡 뭐냐고 묻네요.”
“나 정난우 씨 독주 좋아합니다. 그 중에 하나라면, 음……. 파가니니 카프리스?”
〔몇 번이요?〕
“몇 번이냐고 하는데요?”
“음…이십사 번?”
정난우는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카프리스 24번은 난해하고 화려한 기교가 난무하는 곡이었다. 박자도 음의 배치도 격렬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현란한 선을이 초라한 수의 청중들을 압도했다. 클래식 일자무식의 허물을 갓 벗은 에녹에게도 친숙한 곡이었다.
10여 분 동안 네 사람은 가만히 정난우의 연주를 감상했다. 의식이 유아로 퇴행했어도 그 실력은 건재했다.
에녹은 정신없이 현 위를 날아다니는 손가락에 머물었던 눈을 들었다. 연주에 몰입해 있는 정난우를 빤히 주시했다. 몇 번을 봐도 굉장했다. 그 순하고 차분한 공기가 진득한 어둠으로 대체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밀도 높은 광기가 물 샐 틈 없이 시야를 메웠다. 정난우와 광기라니,
이 지독한 언밸런스에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곡 익히는 처음에는 악보를 보고 머릿속에서 초연을 시뮬레이션 한다고 들었습니다.”
루스는 연주가 끝나자마자 녹음기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거의 취재 기자 열기였다. 물론 루스는 정난우가 정신이 들었을 때 싫어한다면 기꺼이 삭제할 생각이었다. 정난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루스가 이어서 물었다.
“그게 어떤 방식인지 설명할 수 있겠어요? 이를 테면 영화처럼 무슨 특정 장면이 떠오른다든지. 말소리가 들린다든지.”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쭉 읽어나가기만 해도 그 음이 머릿속에서 그려지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읽은 음표들이 머릿속에 이렇게 막 떠다니는데, 걔네들 한 음 한 음이 다 말을 하거든요.〕
한태영이 바닥에 늘어진 채 영혼 없는 목소리로 통역했다.
“그러데 모든 음악을 악보로 먼저 접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특별히 크리스토퍼 강과의 앙코르 무대 때는 귀로 듣고 곧바로 따라갔다는데, 그건 어떤 겁니까?”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그걸 소리로 듣는다기보다는 악보로 듣는 거라고 해야 하나. 감정이 실린 연주인데, 분명 그 모든 게 다 빠지고 까맣게 음만 찍는 음표들이요, 그런 게 머릿속에 그려져요. 난 그냥 그걸 연주하는 거고요.〕
에녹은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천재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했다. 듣는 소리가 어찌 표백되어 음표가 된다는 건데, 이해하는 놈이 도리어 이상한 거였다. 이론적으로나마 대강 알아들은 루스가 재차 질문했다.
“그럼 방금 전에 연주한 카프리스 이십사 번은 어땠습니까? 하이페츠 버전하고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군요.”
〔하이페츠는 카프리스건 샤콘느건 저에 비하면 훨씬 담백하죠. 제 연주가 무겁고 음울하다면 하이페츠는 보송보송하고 산뜻한 편이에요. 저는 그냥, 카프리스의 악보에서는 좀 더 무거운 광기를 느끼거든요. 실제로는 어땠을지 저도 모르지만, 파가니니가 악보에 음표를 적어 내려갈 때의 독 기랄까, 저에게는 그런 게 보였어요. 하지만 하이페츠 버전도 저는 좋아해요. 음악은 목소리 같은 거니까요. 같은 말을 해도 고유의 색과 감정이 묻어나는 것처럼…….〕
루스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충분히 이해가 갈 법한 해석이었다.
과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 그가 작곡한 카프리스는 당시 연주가 불가능한 악보라고 연주자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하는 곡들이었다. 그 악명대로 웬만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카프리스는 뭔가 어설펐다. 삐끗하는 경우도 많았다. “피치카토(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와 같은 현악기에서, 활을 사용하지 않고 현을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방법)가 완벽한데, 따로 연습을 해요?”
〔저 예전부터 기야금 뜯듯이 현 튕기면서 잘 놀았어요. 이렇게.〕
정난우는 바이을린을 바닥에 내려두고 퉁퉁 튕겨보였다. 따당 따당 울리는 곡조는 발랄한 동요였다. 루스는 가야금이 뭐냐 물었고 그 대답은 한태영이 했다.
루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어린이 정난우가 그러고 놀았을 것이 자연스럽게 연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정난우가 해맑은 어린이 버전으로 놀고 있을 때였다. 한태영의 몸이 물에 던져진 생선처럼 펄떡 튀어 올랐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간에 누구냐고 툴툴대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체온이 묻은 액정 위로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곧장 정난우 쪽으로 슬라이딩 했다. 마치 혼신의 패스를 하는 농구선수처럼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난우 씨, 전화! 도영 씨예요!〕
정난우는 아이처럼 웃었다. 현 튕기며 놀고 있던 바이올린을 얼른 저만치 밀며 손을 내밀었다.
아빠 미소를 짓고 있던 에녹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싸늘해졌다. 한태영의 대사 속에 칼날처럼 선명히 솟아 있었던 단어 하나를 기민하게 감지 한 탓이었다. 도영 , 그건 크리스토퍼 강이었다.
에녹은 모로 누웠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워 한 팔을 걸쳤다. 빈 공기 한 줌을 틀어쥔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정난우가 받아든 저 작은 기계를 부수고 싶어 몸살을 앓는 거였다.
〔형! 나야, 난우야!〕
상대방이 잠시 침묵했다. 정난우는 안 들리나, 하며 미간을 모았다. 송화부를 툭툭 치자 그제야 저편에서 반응이 왔다.
《맥주 마셨니. 난우?》
〔응 오늘 친구 집에서 파티 했어.〕
《친구? 누구?》
〔있어. 내가 나중에 소개 시켜 줄게. 지금 어디에 있어?〕
어김없이 에녹에게 뒷덜미를 잡힌 한태영이 통역을 시작하고 있었다.
《형 유럽 투어 중이야. 휴대폰에 문제가 생겨서 연락이 좀 늦었다.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 보고 바로 하는 거야. 무슨 일 있어?》
한태영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정난우의 말을 전했다.
“커넬 씨가 제안한 영화 작업을 도영 씨한테 상의하는 중이에요. 전화 달라고 했었나 봐요.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조금 무서울 뿐이라고 하네요.”
“그런 걸 왜 그 자식이랑 상의해요?”
에녹은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못마땅하게 물었다. 뭐라도 잡지 않으면 정말 저걸 부술 것 같았다. 술맛은 이미 뚝 떨어졌다.
한태영은 길쭉한 손가락 사이로 비죽비죽 솟은 그의 어두운 금발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사납게 치뜬 눈꺼풀 아래 차가운 눈동자는 정난우의 입술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성실히 대답해 줬다.
“난우 씨는 연주 외의 모든 일에 많이 어설퍼요. 본인도 그걸 자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이런 예상외의 일이 생기면 어머니나 도영 씨한테 상의를 하죠. 걱정은 말아요. 도영 씨는 난우 씨한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제니까.”
“사람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저기 천만 불짜리 바이을린도 도영 씨 아버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아버님 회사에서 공식 후원을 해 주는 중이죠. 오래 됐어요, 후원해 주신지.”
에녹의 입술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육감적인 굴곡 아래 짙은 음영으로 불순한 찌꺼기가 고여 들었다. 바닥을 쳤던 기분은 아예 지하로 쑥 말려 들어갔다.
루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난우 씨 바이올린 주인이라면 IT기업 미라클이겠네요.”
“네, 잘 아시네요. 거기 사주가 아버님이시고, 어머님은 줄리아드 교수시죠. 자제분들 중에 음악 하는 건 도영 씨뿐이에요. 형이랑 여동생은 사업 배우신다더라고요.”
에녹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듣는 듯이 했지만 결국 다 주워들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는 정난우의 앞에 불쑥 상체를 가져갔다.
짙어진 그림자에 정난우는 움찔 뒤로 몸을 뺐다. 상관하지 않았다. 에녹은 정난우의 빈손을 잡아챘다. 본능적으로 비트는 걸 억지로 끌어왔다. 제 셔츠 끝자락을 빼내 손끝에 감아 주었다. 멈칫거리던 손가락은 이내 그걸 꼭 말아 쥐었다.
그래. 당신 눈앞에 있는 건 나야.
에녹은 각질 없이 깨끗한 빛깔의 입술을 태울 듯이 노려보았다. 페치카를 등지고 앉은 에녹의 몸은 역광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에녹의 푸른 안광이 사납게 흩어졌다.
내가 그 놈을 밀어내고 당신의 첫 번째가 될 거야.
*
자선공연은 카네기 홀에서 열렸다. ‘Christ’ rain’에서 운영하는 한국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가 초청되어 무대에 섰다. 그들이 정난우와 협연한 곡은 비발디의 사계, 겨울이었다.
격정적이고 화려한 짧은 음표들의 향연이 정난우의 손끝에서 시작돼 홀 끝까지 뻗어 나갔다. 파랗게 언 손발을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의 환영이 관객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안락한 난로 곁에 그 소년이 몸을 녹일 때는 함께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고 구르기도 했지만, 이내 불어온 따뜻한 바람에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앙코르곡까지 공연이 전부 끝난 이후, 인근 뷔페에서 만찬이 열렸다. 비록 고급 호텔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초대 손님 덕에 한국의 취재진은 아주 경사가 났다.
〔루스 커넬 씨도 그렇지만 에녹 밀리건 씨와 친구 사이셨는지는 몰랐어요. 정난우 씨 인맥 굉장하네요! 우와, 할리우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 꿈같아요! 어찜 저렇게 생겼지?〕
한 신문사 여기자는 상기된 얼굴로 정난우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인기인이긴 인기인이구나, 하며 정난우는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요 근래 하도 가까이 있어서 실감이 안 났던 게 사실이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이 보는 에녹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렇게 잘생겼나요?〕
여기자는 성역을 침범당한 신도처럼 뜨겁게 반발했다.
〔어머,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한국에서도 밀리건 씨 영화장면 캡쳐한 것들 진짜 엄청 돌아다니는 걸요! 저번 영화에서 화면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데, 아아, 정말 영화관이 초토화 됐었어요. 여자관객들은 거의 다 격침당했죠.〕
정난우는 그녀가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몸과 실루엣은 그려지는데 얼굴은 당연히 흐리멍덩했다. 늘 외곽시야로만 보다 보니 흐릿한 선들뿐이었다.
여기자는 그 뒤로 한참 에녹을 찬양하다가 사라졌다. 전화를 붙들고 뭔가 빠르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정난우는 누군가 더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루스의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정난우는 루스의 어깨 너머로 에녹을 힐끔거렸다. 그는 한국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이돌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길쭉하고 단단한 뒷모습은 우아한 품위가 넘쳐흘렀다. 그 옆에는 열심히 통역 중인 한태영도 있었다. 기자들에게 그를 먹잇감 던져주듯 하고서 피신해 있자니 어쩐지 양심에 찔렸다.
“저기, 루스. 에녹 저런 거 안 싫어해요?”
정난우는 조심히 루스에게 물었다. 루스 역시 빤히 에녹을 응시하던 중이었다.
“아뇨. 경기 일으킬 만큼 싫어합니다. 정식 인터뷰 아니면 절대 안 하는 비싼 녀석이죠.”
단정적인 대답에 정난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그럼 구해 드려야 하는 걸까요?”
“그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니 걱정 말아요. 그보다는 전형적인 독재자 타입이죠. 정말 싫었다면 이미 예전에 판 뒤엎고 렌즈란 렌즈 다 부수고도 남았습니다.”
정난우는 자연히 납득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녹이 친척 형의 부부를 무참히 짓밟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루스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싫은데 왜 저러고 있죠?”
“저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네요.”
루스는 에녹을 깊은 눈으로 관찰했다.
거의 동물적으로 살아간다지만 에녹은 기본적으로 제법 영리한 녀석이었다. 그가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뛰어난 관찰력과 분석력, 두려움 없이 폭발시키는 감정 표현에 있었다. 비록 그것이 반쪽짜리로 녹아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필름 속의 에녹은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 배역이 되려고 했다. 편견 없이 소화해 제 식대로 끌어냈다. 어떻게 보면 정난우의 음악 해석 방식과 유사하다 할 수 있었다.
루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랬다. 공통점이다. 전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의 닮은 점이었다. 어쩌면 둘의 정신을 이루는 핵의 본질은 같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그래서 에녹이 본능적으로 끌렸던 건가.
에녹은 공식적인 자리 외에서 달라붙는 파인더는 모조리 작살내기로 유명했다. 저 녀석이 그 동안 부쉬버린 카메라 값만 해도 엄청났다. 그런 식으로 적립한 원한만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팬서비스를 해 주고 있다니, 이건 정말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딱 한 장만.’ 조건을 걸고서 사진도 찍어 줬다. 작은 나라에서 온, 공중파도 아니고 유력 신문사도 아닐 것 같은 이들에게.
루스는 정말로 궁금했다. 정난우와의 친분을 과시하자는 것까지는 알겠다. 허나 거기에서 에녹이 궁극적으로 추출해 내고자 하는 게 뭔지가 모호했다.
에녹은 하는 행동이 워낙 눈에 빤히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루스 자신이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 걸 보면 에녹 스스로도 제가 지금 뭔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별로 없다는 걸 뜻할 거다.
겉만 보자면 저건 딱, 새로 생긴 애인의 친구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 안달하는 팔불출의 모습인데…….
“저, 루스.”
정난우의 부름은 마술사의 불꽃이었다. 루스의 뒤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흔적 없이 태웠다. 루스는 샴페인 잔을 입에서 떼고 돌아보았다.
“네, 말해요.”
“저 그 영화 작업 같이 할게요. 시나리오 쓰셔도 돼요. 제가 도울수 있는 거 도울게요. 스튜디오 녹음이랑 OST작업도 같이 하고요, 취재하시는 것도 괜찮아요.”
루스는 정난우의 얼굴을 찬찬히 시선으로 쓸어내리며 물었다.
“크리스토퍼 씨가 그러라고 하던가요?”
정난우와 강도영이 통화할 때, 루스는 곁에 있었지만 그 대화 내용은 알지 못했다. 정난우는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만 내뱉었다. 통역하라고 협박하던 에녹이 돌연 정난우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바람에, 한태영이 그 귀찮은 작업을 도중에 관둬버렸기 때문이었다.
“크리스가 가장 먼저 물어본 건 이유였어요. 제 얘기를 영화화하려는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가 뭔지. 그래서 루스 씨가 해준 말 그대로 전달했어요. 그랬더니 하는 게 좋겠다고 하네요. 저도 애초에 딱히 싫었던건 아니었으니 이제 확답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언제까지나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 루스 씨도 바쁘신 분인데.”
정난우의 어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차분하게 정제된 단어를 짜 맞춰 내뱉는 입술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 닿았다. 그리고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투자자 필요하면 제작기획서 나왔을 때 미라클 사 (社)에도 접촉해 보라고 했어요. 꼭 성사된다는 법은 없지만 긍정적으로 미팅은 해 주실 거라고요.”
그 말은 곧, 사전에 부친에게 언질을 놔두겠다는 말이었다. 정난우를 향한 강도영의 각별한 애정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네. 수석 프로듀서에게 말해 두죠.”
투자 부분은 제 영역은 아니었다. 루스 자신이 수상 경력이 있어서 투자사를 찾는 데에 큰 난항은 없겠지만 제작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루스가 그렇게 차분히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그리고…….”
정난우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얼굴선으로 창백한 조명이 미끄러졌다. 빛이 스미는 뺨이 반들반들했다.
“고마웠어요.”
“뭐가요?”
“루스 씨가 주인공에게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그게 정말 제 것이었으면 한다고 했을 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잠깐이나마 루스 씨가 제 등에 정말로 날개를 달아준 기분이었거든요. 굉장히 기쁘고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루스의 마음이 잔잔하게 미동했다. 그의 입매가 희미하게 굳었다. 눈동자에 고인 빛은 깊고 짙어졌다.
“아…그래요.”
신기했다. 정난우는 도색 안 된 투명한 마음을 던질 줄 알았다. 상대방의 가슴에 강한 파문을 일게 했다. 그 작은 바이올린 하나만으로 상대방의 얼어붙은 심장마저도 녹였다.
실바람에도 부서질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태풍 속에서도 건재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 정난우라는 예술가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일 뿐이었다. 거창한 치장 없는 낡은 옷자락처럼 익숙하고 허름한 인사였다. 그런데도 루스 자신은 거뭇하게 그을렸다.
상대방에게 거짓 없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용기였다. 겁쟁이는 감정을 은폐하며 비열한 이는 진실을 외면하기에 급급하다.
이 용감한 사람이 어둠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그렇게 그를 궁지로 몰아간 모든 것들에 대해 급작스레 맹렬한 분노가 치밀어, 루스는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역시나 끌어내 주고 싶었다. 그가 갇힌 어둠 속에서. 빛을 가르며 은빛 날개를 활짝 펼치는 정난우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난우 씨. 내 쪽을 보시겠습니까?”
잠시의 침묵을 물고 있던 정난우가 왜요, 하면서도 몸을 틀었다. 실크처럼 윤이 나는 머리카락이 이마로 쏟아져 눈꺼풀을 덮었다.
“내 이름 다시 불러 볼래요?”
정난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그는 순순히 청을 받아들였다.
“루스.”
“한 번 더요.”
“……루스.”
정난우는 의아했다. 루스를 감싼 공기가 어쩐지 조금 묵직해진 것 같았다. 정수리부터 뜨뜻미지근한 열기가 흘러내렸다. 외곽시야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그의 입술 위로 언뜻 흐린 미소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보기 좋네요.”
정난우는 의아했다. 누군가가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을 때, 보통은 ‘듣기 좋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뭐가요, 라고 물으려던 정난우는,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루스의 말에 타이밍을 잃고 말았다.
“취재 시기는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트리트먼트(시나리오 초고를 쓰기 전, 전체 시나리오의 세부적 상황 묘사와 에피소드를 작성해 놓는 작업. 보통 씬의 일련번호나 대사는 없는 형태를 띤다.)까지 제작 해서 제작기획서 작업부터 끝내 놓고, 난우 씨 따라다니면서 시나리오에 첨삭을 하는 걸로 하죠.”
“네. 그렇게 하세요.”
“아. 그리고.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주인공은…….”
“나예요.”
에녹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정난우는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타이 없이 목 부근을 풀어헤친 셔츠가 보였다. 포인트 단추의 빛깔이 고왔다. 그리고 그보다 언뜻 드러낸 쇄골 뼈와 목선이 더 근사한 남자였다.
“예?”
정난우는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에녹이 스윽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을 뻗었다. 검지를 세워 정난우의 눈꺼풀을 덮은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내며 말했다.
“내가 영화 속의 정난우가 될 거라고요.”
“에녹이…… 주인공이요?”
“네. 루스가 개떡 같은 시나리오만 안 던져주면 그렇게 될 거예요.”
이건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정난우는 굉장히 당혹해 했다. 너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당신처럼 화려한 남자가 그런 역할에 어울릴 리가…….”
매끈한 에녹의 눈썹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그런 역할이라니, 아티스트 정. 너무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짠 거 아냐? 당신 클래식계의 보물이잖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요.”
정난우는 뭔가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이게 또 우긴다고 될 일인가 싶었다. 그처럼 화려한 남자가…… 당치도 않았다.
정난우의 눈은 도망치기 바빴다. 에녹은 나른하고 여유 있고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아무리 힘껏 도망쳐 봐야 결국 같은 범주만 맴돌 뿐이었다. 언젠가 성공할 포획을 떠올리자 낯이 절로 물렁해졌다.
기다림이라면 질색이지만, 손끝에서 감질나게 빠져나가기 바쁜 이 팔색조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쫓아갈 거다. 마주봐 줄 때까지.
루스 커넬의 영화가 정난우의 곁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다리를 놨다. 이건 신이 제 편이라는 증거였다. 초고도 아직 안 나온 상태에서 배우 훈련과 리허설까지의 공백이라면 최소 석 달은 잡아야 했다. 그 기간이라면 충분했다.
“그래서 루스와는 별개로 나도 당신 밀착연구 할 거예요. 악기도 사서 그럴싸하게 될 때까지 곁에서 보고 배워야지. 당신의 모든 걸 샅샅이 주시하고 훔쳐 와서 완벽히 필름에 들어갈 생각이거든요.”
음험한 내심을 흔적도 안 보이게 덮어둔 혀는 기름칠 한 것처럼 매끈하게 움직였다. 성실한 배우를 연기하는 제 모습이 제법 흡족했다.
“뭔 소린지 알죠? 한동안 아주 곁에 딱 붙어서 지겹게 지켜보고 지겹게 따라다닐 거라고.”
멤버가 감당치 못하게 화려해져 버렸다. 정난우는 그냥 망연히 말을 잃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