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스포트라이트가 적막한 무대 위의 어둠을 관통했다. 빛 밝힌 곳에 드러난 것은 아름다운 화분과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없는 소박한 리사이틀(연주자 한 사람이나 가수 한 사람이 공연하는 음악회.)이었으니 널찍한 공간의 낭비는 흠이 되지 않았다.
관객들의 기대감이 초 단위로 높아져 마침내 그 절정에 이르렸을 때였다. 오늘의 무대를 장식할 솔리스트가 등장했다. 열렬한 박수가 파도처럼 떠밀려 객석을 메웠다.
그의 걸음걸이는 차분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까만 머리카락은 이마를 다 덮고도 모자라 눈꺼풀마저 가렸다. 축 늘어진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바닥을 더듬어 길을 찾았다. 마른 체구와 얼핏 주눅 들어 보이는 어깨는 반주를 해주는 피아니스트보다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내리 바닥만 보고 걷는 그를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조차 않았다. 관객들 중 그의 강박증을 모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리스트가 무대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더 열광적인 기운을 띠었다.
우리가 당신을 보러 왔어요…….
그들의 마음은 다정한 날갯짓으로 허공을 떠돌았다. 솔리스트는 희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혈색 흐린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솔리스트는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가볍게 허리를 숙이자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는 곧바로 바이올린을 왼쪽 어깨에 걸쳤다. 현을 점검하는 동안 장내는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자취를 감췄다.
프로그램 첫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의 리사이틀에 자주 등장하는 비탈리의 샤콘느였다. 데뷔 초기, 과거를 팔아 스타덤에 올랐다고 비아냥 거리던 몇몇 평론가들은 이 평범한 선곡에서조차 손끝에 칼을 세우기도 했다.
「절망과 비극에 허덕이는 연주자의 허울 좋은 빛을 주목하지 말라. 그의 어두운 심연은 모두를 그 늪으로 끌어들인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조차 음울하게 만드는 그는 반쪽짜리 세기의 비르투오소(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다.」
정난우는 자신을 겨냥한 첨예한 말들에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바이올린을 연주할 뿐이었다.
피아노 반주가 느리고 음울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정난우의 고개가 바람을 느끼듯이 그 음률을 따라 미동했다. 시든 들꽃처럼 맥없었던 그의 기백에 점차 불이 붙었다. 그를 감싼 공기가 꽉 조여들었다.
마르고 가느다란 손이 활을 들어올렸다. 팽팽하게 조여진 활이 현을 누르고, 곧바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첫 음부터 묵직하고 비장했다. 둔중한 음에 공기가 흔들리며 공명했다. 느리지만 강렬한 비브라토가 큰 무대를 장악하며 객석으로 뻗어나갔다. 점토 가면처럼 혈색 없는 얼굴에도 표정이 덧입혀졌다. 정난우는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고, 뜨거운 숨을 허공에 터뜨렸다.
관객들은 홀린 듯이 무대에 집중했다. 습윤한 도입부가 관객들을 옭아맸다. 점도 높은 물처럼 장내를 휘돌았다.
누가 뭐라 하건 간에, 그의 음악은 강렬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에 이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탄탄한 기교가 반석이 된 그의 예술 점수는 늘 후했다. 평론가들 대부분은 주저 없이 그를 가리켜 눈부신 재능과 탁월한 감성 표현을 가졌다며 갈채를 보내 왔다. 또한 그 평가가 부끄럽지 않게, 그의 재능은 현대 클래식계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클래식을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음악으로 인식하는 젊은 세대들올 공연장으로 끌어들이고, 빠져들게 했으며, 다시 발걸음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관객들이었다. 중년과 노년이 주를 이뤘던 클래식 공연장의 객석이 정난우의 공연에서는 그 유형을 달리했다. 2, 30대 젊은이들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거다.
그들은 스스로의 얕은 배경지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가요를 듣는 것처럼 그 음들을 느낄 뿐이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먼 과거 거장들의 감성이나 그 배경이 아닌, 정난우가 한 번 소화해서 해석해 내는 그 폭발적인 힘이었다.
장내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공간이 되었다. 활이 팽팽하게 당겨진 현을 켤 때마다 객석의 침묵은 물기를 띠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소음이었다.
그의 손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음의 파도는 객석을 순식간에 침수시켰다. 끈끈한 음률이 관객들의 머리 위에서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정난우의 샤콘느는 눈 쌓인 길 위의 처녀였다. 발목에서 치렁거리는 그녀의 치마가 세찬 바람에 나풀거렸다. 혹독한 눈밭에 피 같은 자국들을 찍어내는 그녀의 맨발은 푸르게 얼어 있었다. 외면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암흑 속을 걸어 왔으며, 또한 암흑 속으로 숨길 좋아하는 정난우의 활대가 힘 있게 움직였다. 무거운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찬란한 기교가 춤을 췄다. 아득하게 허공을 떠도는 미세먼지조차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갈 듯했다. 빠르게 치고 올라간 고음에서 다시 숨을 죽이다가, 그리고 극점을 향해 움직였다.
절정의 감각이 뜨겁게 분사됐다. 섬세하고 빠른 음의 이동이 노도처럼 객석을 덮쳤다. 격정적인 연주에 까만 셔츠 깃이 끊임없이 허공에 팅겼다. 작은 바이올린 통을 울리고 쏟아져 나온 소리는 울음처럼 들렸다. 관객들의 일부는 그 때부터 이미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고 있었다.
절망과 슬픔에 길 잃은 처녀가 빙판 위로 나뒹굴었다. 습한 광기가 해일처럼 공기를 떠밀었다. 무대에서 폭발한 에너지는 질주하듯 달려가 객석의 끝까지 당도했다.
늘어지는 선율이 마침내 그 끝을 보였을 때, 음울한 감동을 선사한 활대가 마지막으로 현을 그으며 위로 솟구쳤다.
완벽한 정적이 홀을 가득 채웠다. 연주도 반주도 숨소리조차 자취를 감춘 거다. 들릴 리 없는 정난우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관객들의 심장을 태웠다.
긴 여운 뒤에 활을 든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졌다. 정난우는 연주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조용한 객석으로 몸을 돌렸다.
은은한 스포트라이트의 조명에도 눈에 부신 듯, 가늘게 뜬 눈이 미미하게 경련하다 멈췄다. 흔들리던 동공도 점차 떨림이 멎었다. 시원하게 트인 눈시울이 제 모양을 되찾았다. 그의 눈에 초점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돌아왔다.
그의 곧고 깨끗한 시선이 조명 없이 어둑한 객석을 응시했다. 땀 맺힌 이마와 매끈한 뺨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창백하게 부서졌다.
정난우는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입술로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눅눅한 미소가 관객들을 늪에서 건져 올렸다. 그들은 뒤늦은 전을에 몸을 떨었다.
“브라보!”
관객들은 뜨겁게 기립했다. 첫 곡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정난우는 선글라스를 쓴 채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 된 커튼콜과 그 이후의 자잘한 일정들은 늘 진을 빼놨다. 오늘은 그나마 리셉션 장에서 진땀 흘릴 일이 없어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 좋게 밀려오는 피로감을 참고 있을 때, 컨시어지에 가 있던 한태영이 돌아왔다. 그의 발자국 소리, 스킨로션 향,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는 손길은 익숙했다.
“근처에 난우씨가 좋아하는 소불고기가 유명하답니다. 내일 점심은 거기서 먹어요.”
“네. 그래요.”
“난우 씨 단 거 안 좋아하니까 안 달게 하는 데로 집요하게 캐물어 왔습니다. 음식 평도 좋고 서비스도 친절하다고 하니 일단 가보고요, 맛없으면 곧바로 옮깁시다. 그 외에도 여러 군데 메모해 놨으니까.”
한태영의 어조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서 좀 민망했다.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신경 쓰는 거예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 말에 한태영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짙게 한숨지은 그가 머뭇머뭇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미안해요. 오랜만에 혼자 짐을 옮기다보니까 그만.”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뭘 그래요.”
한태영은 난처하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냥 가벼운 실수라 하기에는 그 대가가 제법 셌다. 캐리어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린 탓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었다.
몸값 비싼 바이올린이야 늘 곁에서 떨어뜨리질 않았지만, 캐리어가 사라졌대도 그건 심각한 문제였다. 빡빡하게 시간을 쪼개 쓰기 일쑤인 정난 우의 스케줄을 감안하고 보자면 분명 벌어져선 안 되는 사고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무대에 올라가는 솔리스트에게 냉장고 같은 슈트를 입힌다면 뒷감당이 무서운 거다. 그 극성맞은 정난우의 팬들에게 족히 몇 주는 들볶이고도 남을 일이었다.
쇼핑할 짬이 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말 눈썹이 휘날리도록 의상을 수배하느라 뛰어다녔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새 옷을 겨우 입힐 수 있어 냉장고 슈트의 참사는 면했다. 사라진 캐리어는 공연 도중 걸려온 전화에 의해 되찾았다.
“이건 제 실수니까 이럴 땐 뭐라고 하셔도 돼요.”
“고생한 것도 태영 씨잖아요. 결국엔 짐도 되찾았고요.”
정난우는 스스로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는 걸 선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한태영을 만나기 전 여러 번 매니저가 바뀌었다. 이전 매니저들은 제 강박덩어리 성격을 견디다 못해 모두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한태영은 달랐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활기차고 씩씩했다. 이전에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처럼 제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답답하면 혼내고, 성질나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차라리 그렇게 휩쓸려 다니니 편했다. 그가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감당하기 버거워 그의 그림자 안으로 웅크릴 때면, 그는 탓하지 않고 다음번에는 좀 더 쉬울 거라고 위로해 줬다.
이전에 관둔 놈들이 근성이 없는 거라고 비난하며 제법 오랫동안 제 곁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캐리어 하나 잃어버리는 것쯤 정말 아무 상관없었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무대 위를 올라도 괜찮았다.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해야 난우 씨가 화를 낼까요?”
한태영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난우의 어깨에 올린 팔을 내리며 물었다. 정난우는 흐린 웃음 섞어 대꾸했다.
“또 그 소리네요. 제가 화를 내는 걸 보고 싶으세요?”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보통 예술가들은 예민하거든요. 특히나 자기 활동 영역 내에서 꼭 갖춰져야 할 것이 준비되지 않으면 난리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괜히 예술가들 비위 맞추기 어렵단 소리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저도 되게 예민하다던데.”
“아, 어떤 시정잡배 놈들이 그래요?! 나 오기 전에 철새처럼 머물다 간 시부랄 놈들이 그럽디까? 이 새끼들 안 되겠네? 내가 당장 회사에 전화를 해서 이것들 요절을 내야一”
진짜 당장 엎을 기세였다. 말리느라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았다. 불길은 잡았지만 또 야단을 맞고 말았다.
“내가 말하는 예술가의 예민함은 난우 씨가 상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네? 캐리어. 그래요, 오늘 내가 잃어버렸던 그 캐리어,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당장 해고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어요. 특히 여자들은 드레스나 구두에 민감해서 난 뼈까지 발렸을지도 모른다고요. 캐리어가 다 뭡니까. 이상한 자기 징크스 같은 거 들면서 오늘 공연 망친 거 다 당신 때문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병시……름흠. 아무튼 좀 정신 나간 놈도 있었는데요.”
음악가 매니저만 줄곧 해온 주제에 ‘이래서 예술 한다는 작자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돼!’ 하는 편견에 똬리 틀려 있는 한태영이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정난우는 혼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태영 씨한테 나는 좋은 고용주인가요?”
“암요. 최고의 고용주죠.”
“그럼 나 은퇴할 때까지 같이 해요. 어디 다른 데 가지 말고요.”
정난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태영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런 말 말아요. 해고당하지 않는 이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
대답은 했으나 한태영은 문득 갑갑해져 왔다. 맥 빠진 한숨이 새 나왔다. 화려해 보이는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의 무대 뒤는 눅눅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정신과 전문의 앞에서도 담담하게 사실을 읊는 것 외의 속 깊은 이야기는 꺼내질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 강박증들은 호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더 견고해져만 가는 실정이었다.
한태영이 쓰게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툭.
줄곧 땅만 보고 있던 정난우는 어깨에 부딪친 묵직한 무게감에 살짝 중심을 잃었다. 한태영은 깜짝 놀라 팔을 내뻗었다. 그러나 정난우와 부딪친 남자 쪽이 더 빨랐다.
“아, 미안합니다.”
남자는 얼떨결에 정난우를 가슴에 안으며 곧바로 사과했다. 체온이 엉겨붙고 밀착된 호흡이 섞여들었다. 그 때.
어, 하고 남자가 한쪽 눈썹 끝을 밀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정난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괜찮습니다.”
정난우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굽어진 무릎에 힘을 줘서 세우며 바닥을 턱짓했다.
“뭐 떨어뜨리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남자는 대답했지만 줍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주 짧고 깊은 생각의 고랑에 빠진 듯이 그의 체온도 같은 데 머물러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 뒤로 그의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합니다. 잠깐 한눈을 팔았네요.”
“별 거 아닌데요, 뭘.”
좋은 목소리였다.
나른하고 낮은 울림의, 파헤쳐 보면 약간의 금속성도 녹아 있는 음성이었다. 어쩐지 귀에 조금 익은 듯도 했다. 어디에서 들어봤던가, 정난우는 기억 속을 뒤적여 봤다. 그러나 나오는 게 없는 걸 보니 음악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목소리만큼 남자에게서는 매혹적인 향기도 풍겼다. 펜할리곤스 앤디미온.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축은 아니었지만 정난우는 좋아하는 향수였다. 남자의 체향과 섞여서인지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 향은 조금 더 깊고 그윽하며 달큼했다.
“가죠, 난우 씨.”
한태영이 자연스레 정난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남자에게 살짝 눈인사를 했다. 남자의 손이 그제야 정난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한태영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을 해도 좋을 사이는 아니었다.
남자는 한태영의 눈인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정난우를 기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태영은 잠깐 의아했다. 혹시 저 남자가 정난우를 알아보는 건가 싶었지만, 그가 클래식 공연장에 출몰했다는 소문은 아직 들어본 적 없었다. 도리어 남자의 취향은 시끄럽고 술과 여자가 많은 클럽 쪽에 가까웠다.
한태영은 정난우를 이끌어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실었다. 정난우가 익숙하게 걸어가 한태영의 등 뒤에 섰을 때였다. 남자가 그의 동행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짧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
“어? 왜?”
“객실에 두고 온 게 있어.”
남자의 동행이 이상하다는 듯이 대꾸하고 있었다.
“뭘 놓고 왔다고?”
“아, 있어, 그런 게.”
“그래. 다녀와. 그라운드 층에서 기다릴 테니까.”
한태영은 남자가 다시 탈 것 같자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버튼에서 손을 뗐다.
남자는 정난우의 왼편에 섰다. 한태영은 56층을 누르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그 시선에 아차, 하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58층 버튼에 불을 밝혔다. 최상층이었다. 하긴, 그라면 그쯤은 돼야 했다. 한태영은 수긍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요하게 움직였다. 대여섯 명의 낯선 사람들 뒤쪽에 자리한 세 사람은 말없이 서 있었다. 이따금씩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한태영은 정난우를 방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 공간 안에서 이목을 끄는 사람은 분명 정난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밀도 높은 침묵이 짧은 순간 안에 꽉 들어찼다. 소리 없이 흩어지는 숨결들이 공기 중에서 하나로 섞여들었다.
암흑을 선물해 주는 고마운 선글라스 안에서 정난우는 속눈썹을 움직거렸다. 눈꺼풀 안의 눈동자도 이리저리 헤댔다. 예민한 청각이 침묵 속의 작은 소리 조각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중간 중간 서는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타고, 또 내리는 소리, 한태영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소리, 바이올린을 치켜 메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숨소리.
남자는 이따금씩 조용하고 느리게, 그러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럴때마다 아마도 남자의 가슴은 크게 오르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후각을 만족시키는 향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정난우는 떠올렸다. 자신 역시 오늘 그와 같은 향수를 뿌렸다.
옆에 선 남자 역시 미묘하게 다른 향을 느끼고 있을까.
자신은 늘 송진과 악기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향수를 뿌려도 그 본연의 향은 항시 어그러졌다. 공연 후 활 털에 송진도 발라 뒀으니 오늘은 더 심할 게 분명했다.
남자가 다시 나른하게 공기를 흡입했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그를 따라 큰 들숨으로 폐 속을 꽉꽉 눌러 채웠다. 이상했다. 마치 꿈을 꾸듯이 몽롱한 향기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 모든 상념은 고작 10초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뇌리를 점령한 것 들이었다. 잔가지를 치며 뻗어가던 생각들에 제동을 건 건, 한태영의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였다.
“아, 정말 웃겨요. 난우 씨는 차분함의아이콘인데 팔로워들은 왜 이렇게 죄 과격한 걸까요?”
한태영은 손에 쥔 휴대폰으로 정난우의 SNS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막 공연이 끝나는 날이면 팬서비스 차원에서 간단한 에피소드나 감상을 올려놓는 곳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글들은 매니저 대필이었다.
“이것 봐요. 난우 씨 . 오늘 공연 반응이 벌써부터 달리고 있거든요. 난우 씨더러 글쎄….”
한태영은 무심코 몸을 틀어 휴대폰을 보여주려다 아차 했다.
“난우 씨는 이따가 객실에 올라가서 보세요.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난린데요? 오랜만의 리사이틀이라 그런가?”
“…보기 무서운데.”
“어허, 그러면 안 된다고 했죠? 배우가 모니터링을 하듯이 예술가도 피드백을 해야 합니다. 다 보셔야 돼요.”
“네…….”
정난우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비속어가 난무하는 과격한 글들을 볼 생각에 아찔하긴 했지만, 덕분에 호흡은 한결 편해졌다. 기이한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거다.
“팬들의 성향을 보면서 느끼는 건데, 왠지 난우 씨는 아마 아주 저돌적이고 뜨거운 아가씨가 채갈 것 같네요. 아, 제발 빨리 좀 나타나지. 난우 씨 배필은 지금 어디서 뭘 하나 몰라.”
노총각한테 들을 말은 아니었지만 정난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난우 씨 닮은 아기라도 하나 딱 낳으면 내가 매일 선물 보따리를 안겨 줄 수 있는데.”
한태영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앞서 나가 망상을 꽃 피우고 있었다. 연애 같은 건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럴 시간조차 없다는 걸 그도 자신도 잘 알았다.
“저보다는 태영 씨부터…….”
좀 느리게 대꾸하려던 정난우의 얼굴이 일순 석상처럼 굳었다.
움찔.
심장박동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목덜미와 등허리를 소름 돋는 꼬챙이가 단번에 꿰뚫었다. 자연스레 늘어져 있던 손등 위로,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선 그 남자의 손끝이 닿아 온 탓이었다.
순간이나마 갑자기 멈춘 듯했던 맥박이 튕겨 오르듯이 거세게 달음박질쳤다. 정난우는 그대로 굳었고 남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낯선 접촉이 별 이상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무딘 성격일 게 분명했다.
정난우는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잇새로 물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은 아예 삼켜버렸다.
그 때 타이밍 좋게도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정난우는 한태영의 뒤에 바싹 붙어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달아났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틈을 벌리고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밀실에서는 해방됐지만 진탕으로 뒤엉킨 가슴은 좀체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그의 체온이 아직 손등에 남아있었다. 온 몸의 모든 열기가 그곳으로 몰렸다. 금방 불길에 덴 것처럼 뜨겁다 못해 아려 왔다.
당연히 우연이고 지나친 망상이 분명했다. 그러나 놀란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분탕질을 해댔다.
묘한 기시감이 덮쳐들었다. 제 악몽 같은 강박증을 생각하면 이 상황은 이상하다 못해 기괴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공포보다 먼저 말초를 자극했던 것은 어째서 안도감이었을까.
희미하게 솟은 의구심은, 가속도 붙어 점점 커져가는 당혹스러움에 곧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객실로 들어선 정난우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묻었다. 출렁이는 리듬은 안락했다. 보송보송하고 푹신한 이불의 감촉도 좋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오늘 공연이 평소보다 체력소모가 심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엘리베이터 안의 기묘한 접촉이 남아 있던 기력을 스펀지처럼 쭉 빨아 먹었다.
사이드테이블에 올려둔 재킷에서 소음이 번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었다. 호주머니 안쪽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였다.
꺼내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기다리는 전화는 아니었다. 매트리스 위에 방치해 진동은 곧 잦아들었다. 부재중 알림 램프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불빛을 잠재우려 화면을 켰다가 생각났다.
아, 맞다. SNS…… 꼭 봐야 되나.
정난우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한태영이 의무라고까지 강조하는 바람에 차마 어물쩍 넘기기가 그랬다.
결국 접속해 들어갔다. 한태영의 말대로 벌써 줄줄이 달려 있는 댓글들은 오늘도 당혹스러웠다.
『샤콘느 끝에 우리 난우 울고 있던데. 너무 몰입했나봐. 핥아주고 싶었어.』
오해였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맺혔을 뿐이었을 거다.
『열정’ 때 말이야. 이상하게 그거 연주할 때 우리 난우 너무 느끼는 것 같지 않아? 꼭 애무 당하는 것 같달까?』
이 사람은 제법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로 보였다. ‘당신께 드리는 헌정곡이에요. 원래 제목은 오르가즘이었습니다.’ 작곡가 닐 헨더슨이 능글맞게 웃으며 한 말이다. 우리 이제 앞으로 평생 보지 말자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그제야 그는 장난이었다고 둘러댔었다.
무서운 그림을 천천히 내려 보듯이 정난우는 댓글들을 확인해 나갔다. Fuck, Suck, Shit 등의 단어들은 자체 블라인드 처리해 버렸다. 처음에 기겁하면서 닫았던 때에 비하면 참 무궁한 발전이었다.
『난 오늘 처음 정난우 리사이틀 다녀왔어. 팬은 아니어서 그의 SNS는 처음 와 봤는데, 너희 되게 노골적이다. 상스러운데 웃겨. 평소에도 여기에서 이러고 노니?』
『원래 더 심했어. 우리 난우 기겁해서 한동안 SNS 끊었다고 했을 때 나름 정화된 거야. 예전에는 난우가 눈 가리고 무아지경일 때 표정이 너무 **서 쌀 뻔했다는 완전 미친 ***새끼도 있었는걸. 지금은 딱 이 정도 선이 유행이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기억하기로 그 팬이 시초였다. 그 이후로 자신의 SNS는 급격히 오염되기 시작했다. 순박한 촌구석 꼬마아이 놀리듯이 장난으로 시작해서 이젠 정난우 SNS 사용법의 정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였다.
『재밌다. 나도 팔로잉해서 너희와 같이 놀래 !』
정난우는 야트막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오늘 또 한 명이 오염의 바다에 몸을 담그셨다. 자신의 SNS 팔로워는 30만을 훌쩍 넘은 지 오래였다. 그 어마어마한 팔로워들은 알고 보면 이런 식으로 숫자를 증식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 중에는 진짜 자신의 팬들도 있겠지만 그 비율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대충 훑어본 뒤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무거운 상체를 일으켰다. 텅 빈 속이 허전했다. 응접실로 나가 룸서비스로 2인분의 요깃거리를 시키고 수화기를 내려놨을 때였다.
자기 객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한태영이 막 안으로 들어섰다. 정난우는 옅은 그의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룸서비스 시켰어요. 같이 먹을 거죠?”
“좋죠.”
빙긋 웃으며 다가오는 한태영은 빈손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의 벨벳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꽉 찬 손을 내밀었다.
“올 때가 됐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네요. 어떻게…… 보시겠어요? 아니면 패스?”
정난우는 께름칙하게 그것을 응시하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가 잡아 챈 건 묘령의 선물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카드였다.
『오늘은 가까이에서 당신을 지켜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당신의 성결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저도 보고 싶었지만…….』
“으아아아.”
그냥 눈이 부셔서 그런 거라니까요!
정난우는 감전된 듯이 몸을 떨었다. 그 뒤로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그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공연 후 종종 이렇게 선물을 보내오는 이다. 그 지극한 팬심에 고마운 마음 한량없으나 이 멘트가 문제였다, 멘트가.
장난이건 진심이건, 정갈한 필체에서 ‘정난우의 열혈 팔로워’ 기운이 한 없이 펄펄 끓었다. 질색하며 카드를 내던졌다. 바닥을 뒹구는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이 뱀허물 같았다.
“두 문장 만에 사람을 소름 돋게 하네요. 이 분 점점 레벨 업 하는 게 불안해요.”
정난우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한태영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하하하. 난우 씨 팬들이 다 그렇죠 뭐. 그래도 악질 스토킹은 안 하니 귀여운 수준 아닙니까. 이 선물은 어쩔까요?”
예의 상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시계였다. 브랜드 같은 건 봐도 모르지만 어쨌든 가격이 꽤 만만찮을 것이다. 정난우는 뚜껑을 닫으며 대꾸했다.
“기부해 주세요.”
정난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대로 욕실로 향하려다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느리게 몸을 틀었다. 한태영은 막 카드를 주워드는 참 이었다. 정난우는 그에게 다가가 카드를 도로 낚아챘다. 한태영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향기가…….”
정난우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카드 모서리를 쥐고 코끝에서 부채질 하듯이 몇 번 흔들었다. 미세하게 묻어 있는 향이 콧속의 예민한 점막에 들러붙었다. 정난우의 눈가가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이것도 앤디미온인가.”
아닐 수도 있다. 재만 남은 불씨처럼 미약한 잔향이었다. 또렷한 확신을 심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아. 그 향수. 난우 씨 팬이면 뿌릴 만하죠.”
한태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정난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가슴께를 응시했다. 왜요? 하고 묻자 한태영이 도리어 의아해했다.
“예전에 인터뷰 때 그랬잖아요. 제일 좋아하는 향수 그거라고. 잊었어요?”
“아…… 그랬지, 참.”
정난우는 표정을 풀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었다. 이게 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목소리 좋은 남자 때문이었다.
“씻고 나올 테니까 룸서비스 오면 먼저 드세요.”
“네네.”
한태영에게 다시 카드를 건네고 욕실로 들어갔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건식 욕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서며 막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가 던 때였다.
무심코 눈을 들었다. 통거울이 넓게 벽에 붙어 있었다. 매끈한 표면은 물기 하나 지문 하나 없이 차갑게 조명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 거울 안에 한 남자가 낱낱이 비췄다.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고의가 아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른 몸을 틀었다. 반사적으로 꿈틀거리는 입술을 한 손으로 짓눌렀다. 시력이 좋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목구비가, 특히나 그 침울하고 사연 많은 눈동자를 또렷이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득해질 때까지 숨을 멈추고 서 있었다. 긴장에 굳은 숨을 토막 내 뱉어내길 여러 번 반복했다.
스치듯 본 거울 속의 자신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인상이었다. 빛도 안 쬐고 사는 듯이 창백한 피부, 색소 엷은 입술, 눈가에 항상 투명하게 드리워져 있는 그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음지에서 꽃을 피우 는 식물처럼 어둡고 초라해 보였다.
정난우의 눈길이 바닥을 느리게 더듬어 다른 쪽 벽면의 통유리를 타고 올라갔다. 자신이 서 있는 세면대와 달리 어두운 조명이 허공을 메우는 곳이었다.
창문은 블라인드가 덮고 있었다. 가녀린 틈새마다 유혹하듯이 화려한 빛 가루가 연기처럼 뻗어 들어왔다.
무거운 발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끈을 잡아당겨 장애물을 걷어 올렸다.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 왔다. 급작스럽고 자극적인 시각 정보에 눈이 아려왔다.
욕조에 걸터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의 세상에서 무수한 빛이 튀었다. 가라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긴 시간 후에 다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맨해튼, 뉴욕이었다. 자신에게 빛을 되찾아 주고, 더 깊은 소리의 바다를 주었으며 , 더 큰 세상을 안겨주었던 꿈의 도시였다.
멀리 도시를 굽어 도는 허드슨 강이 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면이 밤하늘을 떠받치며 검게 일렁거렸다. 경쟁하듯 쌓아올린 고층건물들은 산맥처럼 이어져 있었다. 화려한 불빛이 굽어보는 아래엔 빛에 홀린 사람들이 빼곡하게 흔들렸다.
이런 걸 보통은 아름답다고 하는 거겠지…….
삼킨 독백이 성대 안을 긁어댔다.
드물게 별빛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강물에 반사된 빛이 낭만적으로 번진 채 흔들렸다. 부유한 사람들일 수록 하늘과 근접해 산다는 말 불현듯 떠올랐다.
그들은 내려다보는 풍경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내려다보는 자신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정난우는 그 둘 다에 조금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다. 블라인드를 도로 내렸다. 휘황한 도시의 야경이 사라졌다. 조명도 남김없이 꺼 버렸다. 사위를 메우는 암흑이 몰려왔다.
정난우는 그제야 안식과도 같은 안도를 느꼈다.
*
카네기홀을 마지막으로 리사이틀 투어는 화요일에 끝났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한숨 돌릴 새가 없었다. 곧바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 날 리허설부터 시작해 본 공연 일정까지 하루도 쉴 새가 없었다. 그러나 정난우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뉴욕 공연 직후 또 다시 뉴욕이라니, 이건 신의 안배가 있어야만 가능한 스케줄이었다.
정난우가 뉴욕 필과 정기 일정이 잡힐 때는 통상 네 번의 본 공연 무대가 잡혔다. 토요일 세 번째 연주를 마치자마자 정난우는 호텔에 틀어박혔다. 화요일 막 공연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다.
“매번 휴일마다 진짜 이럴 겁니까?”
정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신없이 연습에 빠져 있다 보니 한태영이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 언제 왔어요?”
“한 삼십분 이상 되겠네요.”
“말씀하시지.”
정난우는 멋쩍은 듯 바이올린 든 손을 늘어뜨렸다. 한태영은 침대 곁에 앉아 잔소리를 시작했다.
“난우 씨는 정말 바이올린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겠어요. 쉴 땐 좀 쉬고 그래야죠. 일주일에 두세 번 비행기 탈 때도 있는데 이럴 때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요. 난우 씨 몸도 일종의 악기예요. 지나치게 혹사시키면 고장 난다니까요.”
한태영의 핀잔에 정난우는 느릿느릿 바이올린과 활을 케이스에 집어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재충전이라…….
언제부턴가 연주 여행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특별한 휴식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정난우에게 휴식이란 단순히 호텔에 틀어박히는 거였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일상으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한태영이 물었다.
“오늘 할로윈 축제 있는 건 알아요?”
“사람들 분장하고 노는 날이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한태영은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온통 축제 분위기예요. 옷 갈아입어요. 한 한 시간만 바깥바람 좀 쐽시다.”
한태영은 이미 답을 정해두고 건너온 듯했다. 통보하듯 말하고 침실밖으로 휭 사라졌다.
별 수 없었다. 정난우는 면바지와 셔츠 위에 니트를 껴입었다. 선글라스와 얇은 머플러를 갖추는 걸로 외출복은 간단히 완성되었다. 거실로 나가자 한태영이 오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분장이라도 하는 게 낫겠네요. 오히려 눈에 너무 띄겠는데요?”
“평범한 동양인이 우중충한 차림으로 나와 있는 걸 누가 돌아보겠어요. 그리고 서양인들 눈에 동양인은 다 똑같이 보인다면서요?”
…평범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한태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타인의 눈을 안 보는 것도 모자라 거울마저 마주 보길 기피하는 정난우가 아니던가. 한태영은 그냥 혀만 찼다. 입맛이 쓰디썼다.
그리고 확실히, 정난우가 화려한 외양은 아니었다. 분명 저런 차림으로 거리를 걷는다면 그를 돌아볼 이는 몇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 속 진짜 알맹이를 늘 보고 사는 한태영은, 정난우가 그 자체로 얼마나 반짝 거리는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리란 법은 없을 거다.
한태영은 바이올린을 넣어둔 객실 금고를 재차 확인하고 정난우를 이끌었다. 호텔 밖으로 나가니 번쩍거리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정난우는 손끝에 한태영의 옷깃을 말아 쥐고서 느릿느릿 걸었다. 시선은 줄곧 땅바닥만 훑었다. 마주오던 사람과 부딪칠라 치면 한태영이 얼른 제 옆으로 당겨 줬다. 그가 투덜거렸다.
“이래서야 나온 보람이 없잖습니까. 사람은 그렇다 치고 풍경들은 무슨 죄가 있나요. 좀 봐 주시지. 볼거리도 많은데.”
정난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빙그레 웃었다.
“태영 씨가 설명해 주면 되잖아요. 어떤가요?”
“다들 즐거워 보입니다. 기상천외한 분장들도 많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맨해튼은 지금 온갖 괴물들과 슈퍼히어로와 만화 캐릭터 등등의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코스튬을 말하는 거죠?”
“네. 난리 났어요, 지금.”
정난우는 눈가를 허물었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축제의 들뜬 분위기가 전해져 왔다. 상상하는 건 즐거웠다.
물 흘러가듯 움직이던 정난우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태영의 의아한 시선이 뺨에 박혀 왔다. 정난우는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음악소리가 들리네요.”
한태영은 미간을 좁히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는 곧 정난우가 말한 소리의 근원을 발견하고 기가 찼다. 과장을 조금 보태 소실점처럼 보이는 거리였다. 정말 귀신 같이 밝은 귀였다. 특히나 음악 소리에서만큼은.
“거리 악사네요. 저리로 갈까요?”
정난우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걸어 구경 인파의 맨 뒷줄에 파묻혔다. 키보드. 드럼, 베이스, 기타의 조합이었다. 키보드를 치는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난우는 귀에 익숙한 가요의 멜로디를 혀 안에서 굴렸다. 리듬에 따라 고개를 까딱이는 그를, 한태영은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다 물었다.
“뭐 마실 거 사올까요?”
“네. 오렌지주스요.”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한태영은 편의점을 찾아 발을 재게 움직였다. 정난우는 네 가지 악기의 하모니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숙련된 연주 솜씨는 아니었다. 음정도 박자도 미묘하게 어긋나길 반복했다. 보컬도 거칠고 미성숙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다섯 살 바기 어린애가 연주하는 장난감 바이올린의 낑낑거리는 소리에도 사랑스러움은 있는 법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음의 풍랑에 전신을 내맡겼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왼손을 움직거렸다. 음률을 따라 투명한 현을 눌러 짚었다. 그의 머릿속엔 물처럼 흐르는 선율이 악사들의 음악과 공명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모퉁이에서 퍼레이드 인파가 나타났다. 정난우는 여전히 상상 속에서 악사들과 협주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흥분과 설렘으로 높게 떠도는 목소리들과 짙은 술 냄새를 감지했다. 휩쓸린 건 그 다음이었다.
낯선 사람들의 체온이 메뚜기 떼처럼 옷깃을 스쳤다. 악사를 구경하던 이들 몇이 얼떨결에 그 무리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기꺼이 그 파도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들은 퍼레이드 인파와 함께 환호하며 거리를 누볐다.
그 안에서 정난우만이 당황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심장박동이 드럼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밀집해 있는 군중은 술과 밤과 흥에 만취해 있었다. 어딘가로 피하고 싶었지만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긴장감이 금속 조각처럼 목덜미를 날카롭게 긁어내렸다.
불안함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정난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밀집한 군중들의 틈을 비집고 한 발 한 발 움직여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일단 이 무리에서 벗어나 한태영에게 전화를 걸면 되니까.
하지만 인간 물결은 빠르고 거셌다. 쉽게 벗어날 틈을 보이지 않았다, 제각각의 낯선 체취와 향기들에 숨이 막혔다. 늑골이 오그라들었다. 폐가 짓이겨지며 호흡이 가빠왔다. 손 안에 식은땀이 찼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난우는 팔꿈치에 강한 악력을 느꼈다. 그 체온은 팔팔 끓는 듯이 뜨거웠다. 배려 없이 가해지는 힘이 확 끌어당겼다. 정난우는 무심결에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한태영의 손은 이렇게 크지도, 이렇게 열화 같지도 않았다.
내팽개쳐진 남자가 제 손을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 지은 그가 갑자기 한 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굳은 뺨으로 그의 달콤한 숨이 스쳤다. 둔탁한 목소리가 귓바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빠져나가고 싶은 거 아니에요? 이리 와요.”
정난우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희미한 금속성이 녹아든 목소리. 낯익은 듯 낯선 향수 냄새. 뜨거운 체온.
정난우는 그를 알고 있었다. 리사이틀 마지막 공연 날 엘리베이터에서 부딪쳤던 남자였다.
“아, 글쎄. 안 잡아먹는다니까.”
그가 재차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발은 인파에 쓸려 어딘가로 흘러 가고 있었다. 정난우는 잠깐 망설이다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허락으로 알아듣고 정난우를 거의 감싸 안다시피 하며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훤칠한 남자였다. 족히 10센티 이상은 차이 나는 것 같았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며 손을 뻗었다. 그의 허리띠 안에서 드레스셔츠 끝자락을 빼내 손가락에 감아쥐었다. 그의 눈길이 그 손위에 잠깐 머무는 듯했다. 팔에 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불길 같은 체온은 옷가지들을 그대로 투과해 피부로 스며들었다.
얼마 안 가 낯선 이들의 무수한 신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남자가 몸을 뗐다.
정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막혀 있던 거친 숨을 다급히 몰아쉬었다. 낯선 향기에 꽉 막혀 있던 폐가 정신없이 신선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서늘한 공기에 목덜미가 싸하게 식었다. 한기가 달려들었다. 식은땀이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거였다.
정난우는 힘없는 상체를 세웠다. 좀 전부터 호주머니 안에서 몸살을 앓는 휴대폰올 꺼내들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도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액정에 뜬 이름은 한태영이었다. 정난우는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남자가 먼저 손을 뻗어 가로챘다. 갑자기 허전해진 손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고맙다는 말, 상대방의 눈 보고 하는 거 몰라요?”
정난우는 당혹감에 귓바퀴만 만지작거렸다. 시야에 자신의 휴대폰을 쥔 남자의 손이 보였다. 끈질긴 진동에 남자의 손도 덩달아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눈이 좀 불편해서…….”
“아예 안 보이는 거 아니잖아.”
“…….”
“그러니까 이번엔 내 눈 보고 똑바로 말해 봐요.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뭐가 됐든지 간에.”
남자의 무례한 손이 이번엔 선글라스를 벗겨냈다. 엇 하는 사이였다. 번개 같은 손놀림에 캄캄했던 시야가 어둑한 빛으로 가득 찼다. 냉한 기운이 심장을 갉아먹어 들어갔다.
정난우는 간신히 그의 턱 끝만 아슬아슬 스쳤다. 매끈한 도자기처럼 하얗고 반질반질한 피부였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시야 끝에 걸렸다. 그 위로는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름 같은 한기가 등가죽을 잡아당겼다. 정난우는 짓눌리듯이 몸을 움츠렸다. 가슴에 물이 찬 것처럼 호흡이 가팔라졌다. 과민한 반응에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분 나쁜데요? 누가 보면 내가 추행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차갑게 날 선 음성에 금속성이 짙어졌다. 정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달콤한 상냥함과 진득한 악의를 동시에 품는 묘한 목소리였다. 열정도 냉소도 숨기지 않고 직선적으로 드러내는, 정난우가 지극히 꺼리는 타입이었다.
“이러다 진짜 그쪽 나랑 스캔들 난다니까?”
남자가 예고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정난우는 숨을 멈추며 재빨리 시선을 땅에 처박았다. 얼핏 스친 그의 얼굴 반쪽이 뇌리에 강한 잔상을 남겼다. 새하얀 가면이 궤적을 남기듯이 눈을 스쳤다.
남자가 아, 하며 말했다.
“놀랐어요? 오페라의 유령 흉내 좀 냈습니다. 할로윈이잖아요. 얼굴도 가릴 겸.”
“…네. 잘어울리시네요.”
머릿속이 진창이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 속 빈 강정 같은 말을 남자도 믿지는 않는 듯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위로 올라가더니, 내려올 땐 그 하얀 가면을 쥐고 있었다.
“이번엔 좀 봅시다.”
남자는 가면을 쥔 손으로 턱을 붙잡아 강제로 들어올렸다.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눈을 꽉 감으며 그의 손을 쳐냈다. 철썩 , 하는 소리가 매섭게 공기를 갈랐다. 남자의 가면이 바닥을 뒹굴었다. 정난우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그러니까 사람 눈을 잘 못 봐서. 그게,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처음 보는 사람은 극도로 꺼리는…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정난우는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횡설수설했다. 남자는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그의 구두코에서부터 냉랭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날, 처음 본다고?”
“네?”
“방금 그랬잖아.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처음 봐서 그렇다고.”
정난우는 아……, 하며 잠시 멈칫거렸다.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말들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은 아니죠. 그 때 호텔에서 부딪쳤으니까…….”
외곽시야의 최상단쯤에서 남자의 도톰한 입술이 묘한 동선을 그렸다. 주름 없이 매끄럽고 붉은 입술이 뭔가 단단히 심사가 꼬인 것처럼 비틀렸다.
“사람 눈을 못 보는 게 아니네. 당신, 사실은 그 무엇도 안 보고, 기억에도 남겨두지 않는 거 아닌가?”
정답이었다. 통렬히 정곡을 찔린 정난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자는 읽을 수 없는 기색으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됐습니다. 전화 받아요.”
그의 어투는 등허리가 서늘해질 만큼 차가웠다. 남자는 한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과 선글라스를 정난우의 양 손에 각각 쥐어주었다. 그리고 가면을 도로 주워 쓰더니 작별의 말도 없이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밤거리를 뚫고 멀어져갔다.
정난우는 그의 모든 향기와 모든 소리가 완벽히 증발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스며들었다. 그의 손이 감쌌던 손만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진동은 그 때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
정난우의 기상시간은 굉장히 불규칙했다. 공항에 가야하는 날엔 4시쯤, 이동 없이 오전 리허설이 있는 날엔 6시쯤, 본 공연 날이나 모처럼 스케줄이 빈 날은 7시에서 8시쯤이었다.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찬물 한 잔, 우유를 한 잔 마시는 거다. 그 다음에는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을 든 채 침대에 눕는다. 그대로 스케일 연습을 대략 30분 정도 하고 있으면 어느새 매니저 두 명이 객실로 찾아온다.
스케줄 관리를 맡고 있는 한태영과 율리안 레우스였다. 율리안은 25살의 활기찬 독일 태생의 청년으로 한태영의 보조 매니저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태영이 캐리어를 잃어버렸던 건 율리안의 부재가 한몫 했던 거였다. 특별히 더 빡빡한 이동을 했던 탓이 더 크긴 했지만.
뉴욕 필과의 정기 연주회 마지막 날, 본가로 휴가를 다녀온 율리안이 한태영과 함께 밝은 얼굴로 객실에 들어왔다. 율리안은 어둑한 실내를 내버려두고 척척 걸어와 말했다.
“스케일 끝내셨으면 슬슬 식사하러 가죠 .”
“네, 그래요. 집엔 잘 다녀왔어요?”
정난우가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케이스에 바이올린과 활을 넣자 율리안이 받아들었다. 체구가 좋은 청년이라 케이스가 어린애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덕분에요. 부모님이 난우 씨 사인 앨범 가져다 드리니까 엄청 좋아하셨어요. 아들보다 난우 씨 앨범을 더 반기던 눈치더라고요.”
“기뻐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독일 공연 갈 때 집으로 초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기회 되면 생각해 주세요.”
낯선 사람들은 싫지만…….
정난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린 필 정기 연주회 스케줄 도중에 시간 낼 수 있는 날 알아보세요. 막 공연 날 아니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겹치는 일 없었던 것 갈으니까.”
“와. 진짜요?”
말은 꺼냈지만 정작 이렇게 구체적인 허락이 떨어질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금고 문을 열다 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에요? 진짜 괜찮겠어요?”
정난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발치를 보았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들이 양말 안에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 때,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던 한태영이 전화롤 끊더니 날아와 율리안의 등을 후려 찼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윽! 왜 때려요!”
“정기 연주 직후에 바로 유럽 투어 있는 거 알아 몰라? 너 본가 뮌헨이라며. 거기 왔다 갔다 할 새가 어딨어? 이건 스케줄 관리한다는 놈이 연주자 쉬게 해 줄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피로 적립할 생각을 다 하네?”
바로 전날, 모처럼 휴일에 할로윈 데이니까 좀 나가 놀라고 등 떠밀었던 한태영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정난우는 잠자코 있었다.
율리안이 투덜거렸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실장님이 난리셔.”
“웃기는 소리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난우 씨 잠 좀 더 재워. 안 그래도 햇볕도 잘 안 봐, 틈만 나면 바이올린만 끼고 사느라 잠도 잘 안 자. 그나마 바이올린 뺏어 놓으면 외국어 공부한다고 책만 파. 저 피부 좀 봐. 드라쿨라라고 해도 믿겠구만! 서양인도 아니고 동양인이 저 꼴이 뭐 냐고. 저게!”
정말 괜찮다고 율리안을 변호하려던 정난우는 뜨끔해서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야단을 맞은 건 율리안인데 어째 자신이 혼나는 기분이었다.
정난우는 슬쩍 고개를 비틀어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무대 밖의 관객처럼 발을 빼 있던 정난우를, 한태영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자, 난우 씨. 밥 먹으러 갑시다. 또 호텔에 틀어박혀서 오전 내내 연습하고 점심식사 전엔 피트니스 센터도 가려면 체력 보충이 필수죠. 아침부터 속 부대끼게 소갈비나 뜯으러 갑시다. 레퍼토리의 다양화가 건강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 난우 씨 아닙니까. 운동도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 한다는 정난우 씨 아닙니까. 아하하하하.”
…맞네. 나 방금 까인 거구나.
눈치가 영 꽝은 아닌 정난우는 슬금슬금 발을 옮기며 ‘금방 씻고 나올게요.’ 하고 욕실로 사라졌다. 한태영은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끄덕끄덕하다가 정난우가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율리안을 노려봤다.
“너 난우 씨한테 사적인 부탁 하지 마.”
“왜요? 난우 씨 친절한 사람이라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잖아요.”
“알아. 그래도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한태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내심이 그의 눈동자여 굳게 벽을 치고 있었다. 율리안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바이올린을 보관한 금고를 잠갔다.
한태영은 쓰게 혀를 차고는 굳게 닫힌 욕실 문을 응시했다. 안에서는 물소리가 차분하게 흘렸다. 거울을 외면하며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스킨로션을 바를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난우는 율리안의 말처럼 천절했다. 심하게 낯을 가려서 그렇지 남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싫은데도 감수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단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유형을 갖는다. 똑같이 세상을 향해 날 선 칼을 겨누거나, 어떻게든 미움받지 않으려고 행동하거나.
정난우는 후자였다. 한태영은 그게 마음이 아팠다. 정난우가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몇 없었다.
“하아. 깨닫고 보니 보모처럼 굴고 있네.”
한태영은 씁쓸하게 독백했다. 율리안이 네? 했지만 별 거 아니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그 때 촉촉한 얼굴로 정난우가 욕실에서 나왔다.
“저기. 태영 씨.”
“네. 왜요?”
정난우는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쭈뼛거리는 모양새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한태영의 정난우 더듬이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지 견적이 그냥 확 뽑혔다. 한태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농담이었어요. 소갈비는 점심에 먹죠.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간단히 해요. 됐죠?”
정난우는 밝은 얼굴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옷을 갈아입겟다며 방으로 사라지자 율리안은 실장님 최고라며 혀를 내둘렀다. 표정만 보고서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채다니 그로서는 신기한 게 당연하다.
정난우 보모 생활 3년이면 이 정도 독심술은 기본이지.
한태영이 속으로 신세한탄 비슷한 걸 하고 있는 사이 정난우가 방에서 나왔다. 청바지에 품이 좀 큰 면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의 외출 필수 아이템 선글라스도 당연히 빠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정난우는 접시를 집어 들고 천천히 뷔폐를 돌며 음식을 담았다. 크롸상 위에 사과잼을 얹고, 탱글탱글한 소시지도 두 개 담고, 베이컨과 스크램블드에그, 크림지즈 한 통을 담으니 따끈한 접여가 꽉 찼다.
정난우가 테이블에 돌아갔을 때, 한태영과 율리안은 이미 담아 온 음식의 절반을 이미 요절내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기위해 느릿느릿 걷다 보니 항상 있는 일이었다. 정난우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율리안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와. 난우 씨 며칠 전에 에녹 밀리건이랑 부딪혔다면서요?”
정난우는 크림치즈를 뜯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리건? 그게 누군데요?”
“엥? 그 유명한 사람을 몰라요? 이름도 못 들어 봤어요?”
정난우는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네, 모르겠는데요.”
율리안은 허허, 웃었다.
“이런. 그 대박사건을 본인은 정작 모르다니. 밀리건의 열렬한 아가씨 팬들이었다면 졸도했을 일인데.”
“대박사건? 졸도?”
정난우는 연신 머리만 갸우뚱갸우뚱했다. ‘난우 씨야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자식아.’ 율리안을 타박한 한태영이 정난우에게는 웃으며 일렀다.
“그 있잖습니까. 리사이틀 마지막 날 난우 씨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딪쳤던 남자. 그 남자 이름이 에녹 밀리건입니다.”
“아아, 그 분이요……?”
“영화배우고요. 현재 할리우드에서 최고로 뜨거운 남자죠.”
이어지는 율리안의 설명에 정난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좋은 목소리에 감정을 입혀 담아낸다면 분명 근사할 게 틀림없었다.
훤칠하고 단단해 보였던 체격이나 매끈했던 하관, 일그러지던 입술과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던 약간은 오만한 듯한 말투 등이 생명력을 가지고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기가 막힌 투로 날 정말 처음 보느냐고 재차 묻던 남자의 질문이 이제야 조금은 납득이 갔다.
자신의 유명세에 대단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핫하다는 영화배우는.
“예전에 아역으로 데뷔해서 순식간에 유명해진 애 있었어요. 예쁜 아이가 연기도 잘 하니까 여기저기서 데려가려고 난리였고. 그런데 그 후로 차기작을 안 찍어서 다들 배우는 안 하나보다 했거든요. 십 년 넘게 잠잠하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복귀작을 찍더라고요.”
율리안은 묻지도 않은 그의 데뷔작 이야기까지 척척 풀어놓았다. 그제 그 남자랑 길거리에서도 마주쳤다고 하면 더 난리를 떨겠지, 하고 생각한 정난우는 그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예쁜가요?”
“안타깝지만 스물여섯의 에녹 밀리건은 남자가 다 됐어요. 몸 관리도 엄청 한 모양인지 예전의 그 천사 같은 외형은 일 그램도 안 남았던데 요? 암튼 그 복귀작 하나로 엄청 화제가 되긴 했었는데, 그 뒤로는 얼굴 팔아먹고 산다는 말만 지겹게 듣고 있죠.”
“왜요?”
“영화들이 죄 흥행해서 후보에는 올랐는데 수상 실적은 없었거든요. 얼굴은 반반하지만 실력은 그에 좀 못 미치는 배우, 이런 평이 좀 우세해요.”
“아…… 정작 연기는 못 하나 봐요?”
“그게 좀 이상해요. 아역 데뷔작에서는 칸에서 남우주연상도 탔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하는 작품마다 인정을 못 받고 있으니.”
“그런데 사실 밀리건이 연기를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너무 화려한 외모가 눈을 끌어서 다른 게 다 죽어 보일 뿐이죠. 게다가 워낙 독선적이고 제멋대로라 여기저기 미운 털이 박힌 탓도 있고. 진짜 연기를 개떡 같이 했다면 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치진 못했을 거예요.”
한태영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율리안의 말을 반박했다.
“전 그 방면으로는 문외한이니 그 남자의 연기력을 날카롭게 비평할 능력은 안 되지만, 적어도 영화는 자연스러웠어요. 특별히 욕먹어야 할 정도로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거 괜히 꼬투리 잡아서 씹어대는 평론가들이 저는 솔직히 더 별롭니다.”
한태영의 말은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제 눈만 정확한 줄 아는 평론가들의 펜대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는 거였다. 정난우는 그가 에녹 밀리건을 변호해 주는 것이, 정난우 자신을 에둘러 감싸주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과거를 팔아 스타덤에 올랐다고 저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난우는, 그게 전부든 일부든 사실임을 알기에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매니지먼트사가 제 과거를 매스컴에 흘린 건 상업적 의도가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강압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전을을 부르는 실력 같은 거, 그게 뭔지도 잘 몰랐다. 정난우는 그저 손가락이 부르트고 바이올린 받치는 턱의 피부가 검게 변색될 정도로 열심히 했고, 음악을 사랑했다. 그것뿐이었다.
“뭐 어쨌든 실력이고 나발이고 중요한가요. 최근에 찍은 영화 개런티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그깟 비평쯤이야.”
율리안이 투덜대듯 내던진 말에 정난우가 얼만데요? 하고 물었다.
“정확히는 잘 모르는데, 아마 천만 불에 근접했다고 했었나?”
“우와. 천만이요?”
정난우는 진심으로 놀랐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다 말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까만 선글라스 안에서 두 눈도 둥그레졌다.
나이프와 베이글을 접시 위에 내려두고서, 정난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엄청난 금액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너무 큰돈이다 보니 단번에 피부에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난우는 수학엔 영 재능이 없었다. 아니,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에 영 꽝인 남자였다. 도대체 뭘 기준으로 뭘 계산하지, 정체 모를 산수에 힘 쏟고 있는 그를 율리안은 침울하게 응시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난우 씨는 한 십 년 동안 넝마가 되도록 굴러야 벌 수 있는 돈이란 겁니다. 일 년에 한 백이십 일 정도는 비행기 안에서 지내야 하고요.”
“끔찍…… 아니, 진짜 굉장하네요.”
“거기다 밀리건은 삼십 대 접어들 때 쯤 되면 출연료 톱을 찍을 전망이랍니다. 가만 있자. 지금 할리우드 톱 개런티가 얼마더라…….”
“삼천오백만불.”
“아! 삼천오백만……!”
율리안은 손가락을 딱 튕기다 멈칫 했다. 여전히 셈에 골몰하고 있던 정난우도, 태연히 식사 중이던 한태영도 다르지 않았다. 셋은 오붓하게 석상이 되었다. 솜털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그게 톱입니다 현재. 그리고 제 마지막 개런티는 천만에 근접한 게 아니라 천이백만이었고.”
목소리는 율리안의 바로 뒤에서 침입해 들어왔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좋아 보이지도 않는 어투였다. 그는 율리안과 원형 기둥 하나를 두고 등을 마주 댄 채 앉아 있었다. 지나다니는 손님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가 생각해도 서른 정도에는 개런티 톱을 찍을 것 같긴 합니다. 더 궁금한 거 있어요?”
옅은 금속성 섞인 목소리가 재차 배려 없이 정난우의 테이블 한가운데에 투하되었다. 정난우는 공연히 마른침을 삼켰다. 직전까지 과거의 필름을 들여다보듯 머릿속을 그려가던 그의 모든 것들이 급작스레 현실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묘한 긴장감과 더불어 민망해져 왔다. 마치 뒤에서 험담을 하다가 당사자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정난우나 한태영은 딱히 꿇릴 게 없지만, 찔리는 게 좀 있는 율리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끓어올랐다.
“아, 아니요.”
율리안은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한태영은 남자를 힐긋거리며, 쟤는 왜 바쁜 애가 이 호텔에 며칠씩 죽치고 있어서 우리를 뻘쭘하게 하는 거냐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정난우는 아빠 몰래 불량식품을 먹는 어린애처럼 신중한 손놀림으로 베이글을 야금야금 뜯어먹기 시작했다. 더 이상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극도로 소음을 제한하는 태도였다.
다행이 남자는 그 뒤로 자기 일행과의 식사에 몰두했다. 접시가 비면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가득 채운 새 접시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 ‘쉐인. 나 이거 안 먹는다니까.’ ‘그럼 네가 갖다 먹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그럼 주는 대로 먹든지 !’》
나름 대화가 이어지는 그들에 비해 정난우의 테이블은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괜히 찔려서 깨작거리는 정난우를 보다 못한 한태영이 소리칠 때까지 내내 그랬다.
“난우 씨 ! 많이 먹어요. 좀! 오늘 막 공연 후 리셉션에 만찬에 정신없을 거라는 거 알아요, 몰라요?”
“아…….”
“커넬 선생님이 쉽게 농땡이 치게 안 놔줄 겁니다. 오랜만에 만찬 자리니까 아마 죽자고 옆에 끼고 다니실 거예요.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어요? 당장 다 먹어요!”
급작스런 우울감이 정난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리셉션장은 정말 지옥과 같았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악수를 청해 오는 장소였다. 매끄러운 대화는커녕 눈을 마주 보지도 못하는 자신을, 그들은 분명 동정하듯 바라보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커리어가 쌓이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일 뿐이었다. 오케스트라 경영진, 단원들, 매니지먼트사, 레코드사 사람들. 이제는 낯선 이들보다 익숙한 이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리셉션 =공포 ‘의 공식은 변하지 않았다.
정난우는 대답 대신 베이글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우중충한 낯을 하고서도 열심히 씹어 먹고 있어서 한태영을 뿌듯하게도 착잡하게도 했다. 정말 말 잘 듣는 고용주였다.
“커넬 선생님?”
그 때, 또 다시 율리안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에녹 밀리건과 나란히 앉아 있던 동행인이었다.
그는 한태영의 ‘커넬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듯했다. 원형 기둥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어 뒤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좁힌 채 빤히 정난우를 응시하길 수 초, 그가 야트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아. 정난우 씨?”
정난우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정난우의 귀가 두어 번 쫑긋거렸다. 분명 낯선 사람인데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심지어 친숙하기까지 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느긋하고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반갑습니다. 루스 커넬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정난우의 곁에 서서 정중하게 악수를 청해 왔다. 정난우는 일순 숨을 멈췄다.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시선은 버릇처럼 상대의 가슴팍에 머물러 있었다.
“네, 반갑습니다. 정난우입니다.”
“오늘의 솔리스트가 정난우 씨였군요.”
“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흔치 않은 설렘이었다. 피가 은근히 달아올랐다. 소중하게 간직해 왔던 팬심이 요동을 치는 순간이었다.
정난우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아주 오래 전 공연장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그날 라디오에서 그의 음악을 들은 순간 정난우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신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바로 인간의 목소리라는 말이 있다. 그 진정한 의미를 그 때 온전히 깨달았다. 그 어떤 악기도 그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장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인터넷에서 그의 CD를 구입했다.
수도 없이 들었다. 그의 노래와, 끈끈한 멜로디와, 그 배경에 녹아들어 있던 악기들의 아름다운 하모니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음표들을 악보에 줄줄이 적어낼 수 있을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이야. 난우 씨 횡재했네요. 커넬 씨 팬이잖아요.”
율리안…….
정난우가 속으로 끄응 앓았다. 급격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태영이 율리안의 의자 다리를 퍽 걷어찼다. 아 왜요, 하며 돌아보는 율리안에게 한태영이 한심한 눈초리를 치뜨고 있었다.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니.
“패앤一?”
그 작은 소란에 에녹까지 합세했다. 에녹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어깨너머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성마르게 번득이는 시선 끝에 걸려 있는 정난우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아. …팬.
루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손 안에서 당혹으로 꼼지락거리는 정난우의 손을 느꼈다. 이내 루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좀 뜻밖이네요. 제가 음반 냈을 때겠죠? 영화는 안 보실 테니까.”
“아니에요. 영화는 안 봐도 OST음반은 사거든요. 둘 다 좋아해요.”
루스는 깊은 눈빛으로 정난우를 굽어보았다.
“영광이네요. 저도 팬입니다. 클래식은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 음반, DVD 발매된 건 다 가지고 있어요.”
“저도 커넬 씨 앨범들이랑, 감독하셨던 영화 OST들도 모두 가지고 있어요. 엄청나게 많이 들었어요.”
정난우의 어린아이 같은 직구에 루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0ST도 좋지만, 노래 들을 수 없게 돼서 아쉬워요, 많이.”
조용조용 제 할 말 다 하고 나서 정난우는 뒤늦게 아차 했다. 초면에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 싶었던 것이다.
정난우는 조심스레 그의 숨소리를 살폈다. 다행이 껄끄러워하는 기색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에게선 시종일관 차분하게 정제된 분위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딱히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CD에 사인 해 드리겠다고 하면 받으실 겁니까?”
루스는 물끄러미 정난우의 쫑긋거리는 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귓바퀴며 양 볼이며 선홍빛 물감을 살짝 덧칠해 놓은 듯했다. 알고 있는 대로 사람을 꺼려하는 이였다. 눈도 못 맞추고, 목소리도 차분하고, 수줍음 많은 남자였다.
정난우는 간질간질하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CD는 집에 있는데요. 가지고 다니면 자꾸 부서져서요. 보통 음원 사서 MP3에 넣고 다니는데…….”
“그럼 그냥 이따가 제가 한 장 가져가죠, 뭐.”
루스가 주저 없이 대꾸했다. 대체 이 손은 언제 빼야 하는 거지, 슬슬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정난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이따가요?”
“네. 리셉션장이요. 대신 저도 정난우 씨 음반 가져갈 테니까 사인해 주시면 돼요.”
루스의 말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근사한 매너가 짧은 대화 중에서도 느껴졌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분명 정중한 존댓말로 바꿔야 할 것 같은.
“리셉션장이라면…….”
“오늘 뉴욕 필 막 공연 후 리셉션 말입니다. 거기서 봐요.”
“거기 오시나요?”
“네, 뭐.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됐는데, 당신 덕분에 마음이 좀 가벼워졌네요.”
이 얼마나 달달하고 훈훈한 안구 정화의 순간인가 하며 잠자코 지켜보던 한태영은, 그 때 불현듯이 깨달음을 얻은 양 벌떡 일어섰다. 그는 곧바로 루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한가득 웃음이 퍼졌다.
“아! 커넬 선생님 아드님이셨군요? 맞죠? 막내 아드님.”
루스는 처음으로 멈칫 했다. 달갑지 않은 호칭이라도 들은 듯이 이내 쓰게 웃었다. 그는 그제야 정난우의 손을 놔 주고 곧바로 한태영과 악수하며 대답했다.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 성함만 듣고는 전혀 선생님과 연결 지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막내 아드님께서 영화 만들고 계셨군요. 늦었지만 수상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감독상 놓치신 게 너무 아쉬웠어요.”
“아직 그 정도 능력은 갖추질 못했습니다. 쟁쟁하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앞으로 기회가 더 있겠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커넬 선생님도 기뻐하시죠?”
“그다지요. 워낙에 클래식밖에 모르는 분이라.”
루스는 아버지 관련 화제를 기꺼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 결과로 한태영과의 악수도 대화도 매우 짧았다. 그런데도 시종 겸손한 미소는 잃지 않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기 전 다시 정난우에게 당부했다.
“이따 느긋이 얘기해요.”
정난우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대놓고 구경하던 에녹이 불쑥 물었다.
“오늘 공연 표 아직 판매합니까?”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무렇게나 앉아 삐딱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율리안이 얼른 대답했다.
“난우 씨 공연은 항상 매진입니다. 취소되는 표 구하려고 매표소 앞도 난리죠, 오픈 리허설도 늘 삼천 석이 꽉 찬답니다.”
그는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정난우는 쑥스러운 듯이 귓등만 긁적거렸다. 에녹이 코끝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 인기인이시군.”
너만하겠냐.
내심 속으로 ‘천만 불. 우리 난우 씨 십 년 굴려야 벌 수 있는 천만불.’을 뇌까리고 있던 한태영은 짐짓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VIP석에 초대해 드릴 수 있습니다.”
“VIP?”
에녹이 되물었다. 대답은 어느새 그의 옆으로 돌아간 루스가 했다.
“지휘자나 솔리스트 가족들만 앉는 자리. 왜, 가려고?”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해져서. 도도하신 분이 어디 가서 팬입네 영광입네 하는 꼴 처음 보니까.”
“들으면 뭘 알긴 알고?”
“뭘 알아야 듣나? 음악이라는 게 들어서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지, 에녹. 넌 연주자의 감성에 휩쓸릴 만큼 오픈되어 있지 않거든. 클래식만 들으면 졸잖아, 너.”
넌 글러 먹었다는 소리를 잘도 돌려 한다. 한태영은 애매하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어쨌든 생각 있으시면 두 분 같이 오십시오. 괜찮죠, 난우 씨?”
“네. 뉴욕이건 베를린이건 제 공연이 있는 곳엔 언제든 오셔도 좋아요. 영광입니다.”
정난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귀를 만지작만지작하는 그 손에, 루스와 에녹의 시선이 얽혔다. 루스는 살짝 눈을 휘었고, 에녹의 안광은 조금 날카로워졌다.
에녹이 정난우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티스트 정. 이제 내 이름 알아요?”
정난우는 멈칫 시선을 들었다. 의자 등받이에 아슬아슬 걸린 그의 팔꿈치가 보였다. 새하얀 셔츠가 주름져 있는 모양을 응시했다.
“알아요. 에녹 밀리건. 아역 데뷔작에서 칸에서 수상했고, 지금은 천만불 개런티를 받는 영화배우요.”
안 그래도 전날 못 알아본 게 미안했던 참이었다. 정난우는 입력해 놓은 그에 관한 정보를 막힘없이 읊어댔다. 물론 연기력 어쩌고는 당연히 통째로 뽑아버리고 좋은 점만 혀 위에 굴렸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성실한 대꾸에 에녹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뭔가 어그러져 있는 듯이 금속성 짙었던 목소리가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그가 나른하게 대꾸했다.
“좋네.”
에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팔에 걸쳤다. 그를 따라 루스도, 나머지 일행들도 겉옷을 들고 일어났다. 식사 생각은 더 없는 모양이었다.
에녹은 스쳐지나가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정난우의 어깨를 살짝 짚어 누르며 말했다. 그윽한 향기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천만이 아니라 천이백만이라니까요.”
정난우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에녹은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 어깨에 짚은 손끝을 살짝 움직여서 장난치듯 뺨을 콕 찌르자, 정난우는 뜰채에 잡힌 활어처럼 펄떡 뛰었다. 그가 나직이 웃음 섞어 말하며 곁을 스쳐지나갔다.
“아무튼 이따가 봐요. 공연 보러 갈 테니까.”
“…네.”
그들 무리가 사라지고 나서 정난우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뭔가 기력이 옴팡 빨린 기분이었다. 멍하게 앉아만 있는 정난우를 향해 한태영이 어서 마저 먹으라고 음식을 권했다. 고개를 끄덕인 정난우가 영혼 없이 식사를 재개했다.
한태영이 빈 접시를 막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갑자기 아, 하며 도로 앉아 입을 열었다.
“혹시 난우 씨도 기억해요? 그 왜, 그 놈은 내 자식도 아니라고 커넬 선생님께서 짜증 대박 내셨던 거. 하도 심하게 분노를 하셔서 얼마나 날라린가 했는데 웬걸, 엄청 매너 좋네. 그쵸?”
“아, 그 대판 싸우고 집 나갔다는…….”
정난우는 멍하니 대꾸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랬던 적이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했던 지휘자 앤드류 커넬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불현듯 응?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클래식 따위 개나 줘 버리라며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나갔다고 하지 않았나? 천하의 호로 새끼라고 선생님이 격분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베이컨과 오믈렛을 입 안에 넣고 씹으며 생각에 잠겼던 정난우는 에이,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은 성격이 원채 불같으시니까, 좀 과장하셨나 보다.
저 품위 있고 우아한 남자가 그럴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팬심으로 루스에게 실드를 친 정난우가 대단히 편협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때였다. 한태영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운명 참 얄궂네요. 선생님한테는 엄청난 골칫덩어리였던 막내가 음악 영화로 단박에 할리우드를 휩쓸었으니.”
맞는 말이었다. 정난우는 포크를 힘 있게 움켜쥐며 대꾸했다.
“커넬 씨는 정말 천재 같아요. 노래도 잘 하고, 영화도 잘 만들고.”
너도 그래요. 어떤 의미론 네가 더 그래요
한태영과 율리안은 정난우를 착잡하게 쳐다보며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에녹은 진심으로 졸렸다. 팔자에도 없는 클래식 공연장 VIP석에 앉아 있었다. 막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이 끝났다.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지루해서 죽을 뻔했다. 농담 아니고 이건 거의 고문이었다.
슈트를 멀끔히 빼 입은 에녹의 옆 좌석엔 루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 역시 첫 무대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예의를 차리듯이 진중하게 지켜봤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첫 무대가 끝나자 아쉬움 없이 팸플릿으로 눈을 돌렸다. 인쇄 된 정난우의 사진은 늘 그렇듯 멀리 찍힌 옆모습이었다. 에녹은 턱을 괴고 루스의 손에 들린 팸플릿을 함께 내려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상대방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주제에 이런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잘도 연주를 하나 보네.”
“정난우는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서면 완전히 변하니까.”
“어떻게?”
“반짝반짝하지. 보석처럼.”
오글거리는 대답을 이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서도 루스의 시선은 계속 팸플릿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 곧 정난우의 차례였다.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시벨리우스라…….
“자, 클래식 무식쟁이인 나에게 배경지식이라도 짧게 전해 주시죠. 뭐라도 알아야 그 공감이라는 걸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에녹이 상체를 숙여 루스의 시야를 침범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세계적으로 톱클래스에 드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있는 집안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고 자랐다지만, 루스는 어쨌든 본인이 인정하기 싫어해도 그 집안의 피가 흘렀다. 갈 길 자체는 달라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들은 대단했다.
루스는 에녹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클래식 같은 어렵고 딱딱한 음악은 질색이라던 놈이 뭐가 이리 적극적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지루해 죽겠다는 듯이 하품이나 해 대는 건 연주자에게는 모독이나 다름없으니까.
“어떤 곡이든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느낌은 변해. 정난우가 해석한 작곡가의 감정은 고통과 의지라고 보면 돼. 쫓긴다기 보다는 몸을 던져서 그걸 다 맞아. 열정적이고 음산하게, 독불장군처럼 . 극복에의 의지가 아니라 인내의 의지에 더 가깝고.”
“작곡가가 곡 쓸 때 상황이 안 좋았나? 보통 연주자들 그런 데에서 감 얻고 그러지 않아?”
“정난우의 해석에 필요한 건 악보뿐이야. 작곡가가 당시에 그리고자 했던 음표의 조합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초연을 해 본다고 해. 그럼 그 안에서 모든 게 다 보인다고. 나 같은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지. 완벽한 테크닉에 플러스로 엄청난 공감 능력올 타고 났어. 一너와는 달리.”
“가만 잘 있는 나는 왜 끌어들이고 난리.”
에녹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러나 강력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방금까지도 거멓게 밀려오는 잠의 그림자에 허우적대다 겨우 깨어난 참이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머릿속은 가스가 찬 것처럼 희뿌옜다. 에녹은 불리한 화제를 길게 끌고 갈 생각온 없었다.
“팬이 맞긴 맞나 보네, 그런 것까지 다 알고.”
루스는 매끄러운 슬랙스에 감싸인 허벅지 위에 팸플릿을 완전히 내려 두었다. 그러고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하나 둘 자리를 메우는 오케스트라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는 과거의 환영을 붙들고 있었다.
“난 여기 이 자리에서 정난우의 데뷔 무대를 지켜봤어. 이건 꼭 봐야하는 거라며 아버지한테 뒷덜미를 붙들려서 강제로 끌려왔지. 그때 난, 보란 듯이 연주자를 모독할 셈이었어. 아버지가 치를 떨며 다시는 나를 이 갑갑한 공연장으로 불러들일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나름 반항심이었지.”
과거를 깊이 짚어 올라가는 사람이 그러하듯 루스의 눈꺼풀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에녹의 눈도 덩달아 가늘어졌다.
“볼품없이 작고 여윈, 처음 선 무대에 적응조차 하지 못하고 헤매던 남자아이에게 큰 기대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도리어 관객들은 표가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정난우가 바이올린을 든 순간부터 화려한 반전이 시작됐어. 공연장은 금세 울음바다가 됐지.”
혼자서는 잘 걷지도 못하던 작은 소년. 소리만 가득한 암흑 속에서 그 아이는, 저러다가 혼절할까 걱정될 만큼 모든 에너지를 그 무대에 다 쏟아 부었다.
“충격 받았다, 진심으로. 마약한 사람이 환영을 보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게 보였으니까.”
“…설마 같이 울었냐.”
“맘속으로만, 그러나 아주 맹렬하게.”
에녹은 루스처럼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렸다. 검지 하나만 세워 턱을 괴고는 진지하게 루스를 시야에 담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면 이 콧대 높은 양반의 눈에 들었을까.
에녹이 갖고 있는 정난우의 이미지는 가엾고 유약하고 어수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였다. 잔뜩 주눅 든 분위기 때문에 존재감도 미미했다. 첫 만남에서야 워낙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재회하던 날 가까이서 빤히 쳐다보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었다. 반가움이라기엔 미묘하게 뒤틀린 이상한 감각이었다.
뭐랄까…… 조금 울렁거린다고 해야 하나.
그 외에는 딱히 묘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이 가늘고 갸름한 얼굴은 하얗다기보다는 창백했다. 머리도 눈썹도 속눈썹도 까만 그 얼굴에 입술만 희미하게 혈색이 돌았다. 내리 깐 속눈썹을 억지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춰보고 싶긴 했다.
그 때 느꼈던 기묘한 울렁거림.
에녹은 그 느낌의 정체가 궁금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방어벽이 너무 견고했다.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집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건 확실했다.
에녹의 집요한 시선을 눈치 첸 루스가 고개를 비틀어 올렸다.
“뭘 빤히 봐?”
“신기해서. 루스 커넬이 음악이 아닌 사람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게 그것도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라니.”
“내가 좋아하는 건 정난우의 바이올린이야. 장르 같은 건 의미가 없지. 뒤를 돌아 객석을 둘러 봐.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 안 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정난우의 매니저가 장담한 것처럼 객석이 꽉 차 있었다.
이상한 점이라, 그게 뭘까 하다가 에녹은 무심코 대답했다.
“젊은애들이 많네.”
“바로 그거야.”
역시 에녹은 관찰력 하나만큼은 훌륭한 녀석이었다. 좋은 배우의 요건이었다.
“스물여섯 살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 서른한 살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퍼 강과 서른네 살 지휘자 피에트로 그레코, 이 세 사람 공연의 특징이야. 항상 매진이고 항상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지 . 그 셋이 괜히 클래식의 미래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장르를 깨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거든.”
“오. 클래식의 미래.”
거창한 수식어에 에녹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꺾으며 감탄했다. 루스는 힐긋 그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넌 봐도 모르겠지만.”
루스는 에초에 에녹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오로지 제 감정에만 충실한 뜨거운 피의 청년이 에녹 밀리건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법을 모른다. 열정과 욕정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탐욕과 사랑의 경계 역시 불분명했다.
아름다운 것에 이끌려 불처럼 타오르지만 그 주기가 매우 짧았다. 저 녀석의 화려한 겉모습과 무섭도록 몰두하는 애정공세에 넘어갔다가 피폐해진 인간들이 셀 수도 없었다.
더 무서운 건, 에녹이 무언가에 집중할 때 그건 모두 진심이라는 거였다. 차라리 가지고 놀았다고 비난이나 퍼부을 수 있었더라면, 상대들이 그렇게 오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도 없으련만.
뭐. 결국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란 소리였다.
“나 지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지금 그 시선이 꼭 ‘내가 너 같은 망나니한테 뭘 바라겠냐.’ 하는 것 같거든?”
눈치도 참 귀신같았다. 루스는 나지막이 목 안으로 웃었다. 부정하지 않는 태도에 에녹은 어이없어 했다.
“나도 아름다운 걸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을 가진 남자라고. 이거 왜 이래?”
“맞아. 너는 거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거에서 느끼지. 그리고 감상하는 걸 넘어서 독점하려 들고.”
“탐나는 건 손 안에 넣고 나만 보고 싶어지는 건 인간의 본능이야.”
자신의 바람기를 저토록 당당히 합리화시키다니.
어떤 의미로 보자면 에녹이 참 난 놈은 난 놈이라고, 루스는 진지하게 생각하며 지적했다.
“손 안에 넣은 걸 책임지려 들지 않으니까 문제지.”
“그래. 내가 죽일 놈입니다.”
에녹은 나른하게 쏴 붙이는 걸로 흐름을 잘라냈다. 언쟁으로 루스를 이길 방도는 없었다. 애초에 말싸움 같은 걸로 이겨야 할 투쟁심 따위도 없었기에 이쯤에서 관두는 걸 택했다.
기다림이 슬슬 지루해져 가려던 때, 관객들의 힘찬 박수가 봇물 터지듯이 장내를 휘돌았다. 에녹도 얼결에 함께 박수를 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펫 깔린 계단으로 바이올린을 든 정난우가 내려오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없었지만 여전히 내리뜬 시선과 위축된 몸이었다. 확실히 협주의 솔리스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존재감이 없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초라하기까지 했다.
에녹은 척 다리를 꼬며 오만한 눈을 치떴다.
“어쨌든 마옴을 열고 봐 주지. 그 눈도 못 맞추는 겁쟁이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변할지 나도 엄청 궁금하니까 말이야.”
루스는 나직이 혀를 차며 무시해 버렸다. 결국 에녹은 ‘본다 ‘고 했다. 애초에 ‘들을 ‘ 마음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남자라는 짐승들이 시각적 자극에 약하다지만 에녹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가 만났던 여자 모두 육감적이고 화려한 미녀들뿐이었다.
저 꽉 닫힌 귀를 정난우가 열 수 있을까.
저 놈은 글렀어,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은 남겨두었다. 클래식과는 담을 쌓으리라 했던 자신의 결심을 부쉬 놓았던 정난우의 힘이라면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에녹의 배우로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감정에도 뛰어들어 흠뻑 젖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대에 선 정난우가 지휘자와 함께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환영의 박수는 그 때 절정을 이루고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소음처럼 들리는 기이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 쥐죽은 듯 조용한 침묵의 장막을, 정난우는 예고 없이 걷어냈다. 모두의 시선 집중 속에서 바이올린의 현을 점검하기 시작한 거였다. 까앙 까앙 리듬 없는 음들이 홀로 무대를 갈랐다.
독제자처럼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루스는 무심코 눈웃음을 지었다. 10여 년 전 무대 위에서 일일이 헬퍼의 조언을 받던 소년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한 눈, 연신 종긋거리는 귀, 놓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던 활…….
뭐 저런 애송이의 데뷔 무대가 뉴욕 필과의 협연이냐, 오만하게 기가 막혀했던 20대의 자신이 그 가까이에 있었다.
사실 그 당시의 감상이라는 건 매우 막연히 남아 있는 편린 중 하나일 뿐, 더 솔직하게 파고들자면 기억은 흐리멍덩했다. 그저 무언가 강렬하게 이끌렸었는데, 미치도록 그 선율에 매료되었었는데, 기억의 잔상들은 모조리 번진 수채화처럼 흐리고 불분명한 장면들뿐이었다.
연주가 끝난 뒤 엄청난 환호가 폭발하는 마그마처럼 장내를 장악했다. 그 무시무시한 소리 덩어리가 그 때의 자신을 겨우 현실로 끌어다 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이미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것만은 괴로울 만치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금까지도.
당시 자신을 사로잡았던 감정들은 너무나 격렬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주체 못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서야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온 몸의 통점을 송곳으로 찔린 양 아프고 두려웠다. 그러나 상반되게도 그만큼의 희열과 흥분 역시 존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는 깨달았다. 그건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볼품없고 초라하게만 보였던 그날의 주인공. 그 남자아이의 것이었다. 살면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할 완벽한 싱크로가 왔던 거다. 그 때의 자신 역시. 치기 어린 나이였기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함락됐던 거였다.
지금까지도 자신을 미치게 하는 것은 음악 하나뿐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그런 파괴적인 자아붕괴를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다른 그 누구도. 심지어 정난우의 다른 무대조차도 당시의 충격을 다시 주진 못했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그 때 자신이 여러모로 불안정한 시기였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정난우의 음악 역시 시간이 흐르며 무언가를 상실했던 탓일까.
루스가 그렇개 길게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정난우는 막 현 점검을 마치고 엔드류 커넬과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고양된 기대가 객석을 어둡게 메웠다. 이옥고 정난우가 객석으로 몸을 틀고서 눈을 감았다. 바이올린이 그의 턱과 어깨 사이에 완벽히 맞물렸다.
가느다란 선율이 1악장의 시작을 알렸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붙들린 정난우의 바이올린은 우아한 집시 여인이었다. 낡았지만 고풍스런 옷을 걸친 프리마돈나이기도 했다. 가녀림에도 힘 있는 성량이 독보적으로 허공을 뻗어나갔다.
모두의 시선집중 속에서 솔리스트의 독무, 카덴차가 이어졌다. 화려한 기교는 날카롭게 치솟으며 감성을 긁어댔다. 끊어질 듯한 비브라토가 밀도 높은 긴장을 퍼뜨렸다. 숨죽인 탄성이 관객들의 뇌리를 물고 늘어졌다.
멈춰 있던 지휘자의 봉이 카덴차의 끝에서 날카롭게 허공을 그었다. 침묵하던 오케스트라가 움직임을 재개했다. 그리고 그 때 쯤, 에녹은 눈썹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라…… 이게 뭐지? 원래 이런 건가?
분명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간간이 따라붙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귀에 들어오는 건 정난우의 바이올린 음뿐이었다. 솔리스트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협주곡이라 할지라도 이건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마음 같아서는 루스에게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루스는 이미 무대 위로 혼이 통째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살벌하게 집중한 그 모습에 말 한마디라도 걸었다가는 몇 년 원수 될 판국인지라, 에녹은 홀로 고민할 수밖며 없었다.
정난우의 활이 완전히 바이올린에서 떠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만 흐를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에녹은 정난우의 그 공백에서조차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실질적인 음파를 쏟아내는 오케스트라는 조연에 불과했다.
연주를 멈추고 흐느적거리는 그 모습, 뜨거울 것이 분명한 숨을 뱉어 내는 입술의 미미한 떨림마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허공을 응시하는 정난우의 까만 눈은 블랙홀처럼 조명을 빨아들였다.
정난우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수 천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아예 잊은 듯했다. 아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육식동물을 만난 토끼처럼 움츠러들어 떨던 그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실로 무서운 집중력과 몰입이었다.
뭐야, 이게.
정난우가 다시 활로 현을 긋기 시작하면서, 에녹은 반쯤 늘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바로 했다. 그는 인력에 끌리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의식적으로 숨죽인 입술 위를 검지와 중지로 눌러 짚었다.
다급히 치솟은 맥동이 입술의 얇은 표피를 뚫고 그 손가락에 엉겨붙었다. 뜨거운 호흡이 지문을 뭉겠다.
긴장감 속에 이어지는 음률은 끊어질 듯이 간드러지게 움직이다가도 역동적으로 구부러졌다. 깊고 풍부한 음이 홀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정난우는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서면 완전히 변하니까.」
에녹은 루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무대 위의 정난우는 연주자가 아닌 배우였다. 늘 바닥을 향하던 얼굴은 당당하게 연기에 녹아 있었다. 선연한 감성들이 표정에서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무대 밖의 정난우는 체념의 한숨에 언제라도 녹을 듯했다. 그러나 저 무대 위의 솔리스트는 차가운 도시의 인간들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독기 서린 호홉을 감추지도 않고 그대로 쏘아 보냈다.
에녹은 소름이 돋았다. 피부는 뜨거웠고 등허리에서 증발하는 땀은 서늘했다. 고난에 힘없이 굴복할 것처럼 보였던 정난우가, 지금은 고통조차 희열로 즐기는 악마처럼 보였다.
정난우는 그 자체로 악기가 되어 있는 듯했다. 유려하게 현 위를 미끄러져가는 손가락들, 활을 움직이는 손목은 물론이고 온 몸을 울려 소리를 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의미 없는 움직임이 없었다.
정난우는 암흑 속에 빛나는 단 하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1악장이 끝나고 정난우가 앤드류 커넬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을 때, 에녹은 미간을 찡그렸다. 매끈하게 정리된 눈썹이 칼처럼 치솟았다.
한순간 무대 위에는 그 둘만이 있는 듯했다. 60대에 접어든 노신사는 정난우를 불타는 눈으로 응시했다. 정난우의 끈끈한 신뢰의 눈동자도 그를 망설임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공감대가 그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끊어내고 싶다.
문득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뇌리를 스쳤다. 어디에서건 주인공이었던 자신의 치졸한 오만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진저리가 쳐질 만큼 격렬한 감상이 전신을 지배했다.
정적을 뛰어 넘어 2악장이 시작되었다. 에녹은 재차 빠져들었다. 찰나라도 놓칠 새라 집중했다. 그러던 도중 그는 문득 목이 갑갑해져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넥타이는 없었고, 언제 풀어헤졌는지 모를 셔츠 윗 단추만이 손가락 끝에 걸렸을 뿐이었다. 소득 없이 허무하게 떨어진 손이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허공에서 요동치는 까만 머리카락은 정난우 눈커풀의 반절을 덮었다. 감은 눈과 벌어진 입술, 그 표정은 놀랍도록 관능적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에서 맨발로 서 있는 듯이 처연하기도 했다.
음악은 고막을 관통했고, 악기와 함께 울림을 빚어내는 몸뚱이는 망막을 꿰뚫었다. 얇은 옷감에 감싸인 몸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환영처럼 어른거리던 눈보라는 어느새 뜨거운 불길로 바뀌었다. 정난우는 그 안에서 짦은 생애를 간직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불길에 뛰어드는 맨발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를 환영하듯 오케스트라가 웅장하게 기지개를 켰다. 정난우는 환희를 느끼듯이 활을 늘어뜨리고 그 과도에 몰음 말겼다.
정난우의 색소 옅은 입술이 허공을 메운 소리들을 한껏 빨아들였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안에서 한껏 팽창했을 폐 속에는 자신의 향기도 들어있을 것이다. 향기가 눌어붙은 입술을, 정낭우의 새빨간 혀가 핥아 올렸다.
에녹은 불투명한 희열을 느냈다. 첫 만남에서도. 그리고 교통사고처럼 불시에 닥친 재회의 날에서도 느껴지던 그의 독특한 체향을 떠올렸다.
재회 당시 곧바로 정난우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손가락에 잔재하던 그날의 뜨거운 향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괘씸하게도 정작 정난우는 자신을 잊은 듯했지만.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축였다.
마지막 코드가 울렸을 때, 관객들은 요란하게 환호하며 기립했다. 박수 갈채가 뒤에서부터 해일처럼 떠밀려왔다. 요동치는 그 물결이 모든 걸 휩쓸어갈 듯했다.
정난우는 엔드류 커넬과 깊은 시선을 교환했다. 아득한 거리에서 쏟아지는 정난우의 가쁜 숨소리가 에녹의 귓전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앤드류 커넬이 다가가 정난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정난우의 등을 팡팡 두드려대며, 귓가에서 웃는 얼굴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가려진 정난우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반짝반짝하지. 보석처럼.」
그랬다. 정난우는 별이었다. 그가 홀로 반짝이는 무대가 광막하고 아득한 우주처럼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치밀었다. 가슴 제일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불순한 잔재들이 소용돌이쳤다. 찬사와 감동의 박수가 북소리처럼 소용돌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저 무대의 주인공은 정난우와 앤드류 커넬이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존재감은 보잘 것 없이 방치된 ‘관객1 ‘에 불과했다.
이런 건 불공평했다. 에녹은 탐이 났다. 무엇이 그토록 탐이 나는 건지, 그는 그 감정을 몇 번이나 파헤치려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에녹의 눈은 집요하게 정난우만 따라다녔다. 정난우는 금세 수줍음을 타는 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몇 번의 커튼콜로 다시 무대로 등장하면서도 오만함이나 자랑스러움 같은 건 눈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에녹의 눈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 번 눈에 콩깍지가 쓰이니 심지어 내숭을 떠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단언컨대, 태어나 저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에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늦게 박수 부대에 합류했다. 그는 정난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어떤 기분이 들까?”
루스가 고개를 돌려 그롤 바라보며 뭐? 했다.
“저 사람과 똑바로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 말이야.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서.”
루스의 냉랭한 얼굴에 미묘한 실금이 갔다. 에녹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음을 어렴풋이 눈치 챈 탓이었다.
차가운 조각상 같은 미모에서 달궈진 열기가 바짝 서 있었다. 루스는 에녹의 그 비정상적인 열기가 불편했다.
“궁금하면 내 아버지한테 물어보든지 ”
에녹의 입술 위로 묘하게 농도 짙은 미소가 걸렸다.
『아, 커넬 선생님…… **. 우리 난우를 품에 안고 속닥이다니 이건 정말 용서할 수 없어.』
『이런 **. 그냥 네가 안고 싶었다고 왜 말을 못하니.』
『맞아. 사실은 내가 ** 안고 싶었어. 그 웃는 얼굴에 진심으로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었어 . 우리 난우, 나랑 뽀뽀 한 번만 하자. 응?』
『나도 한번만 올라타 보자! 이 몸 식스팩이 ** 끝내 주거든?』
에녹은 읽다 말고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평소 바른 말 고운 말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비속어들은 별표시 (**)로 걸러 보고 있었다. 얘들은 Fuck이 입에 뱄다. 찡그린 미간을 펴지도 않고 루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난우 SNS 왜 이래?”
루스는 와인 잔을 흔들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그래. 오래 됐지.”
“클래식 마니아들은 다 고상떨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예외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의 공연 보러 오는 젊은 팬들 중에는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에녹은 사람들 몇에 파묻혀 있는 정난우를 시선으로 낚아챘다. 성희롱이 남발하는 SNS를 가진 남자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금욕적으로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셔츠 깃은 순결한 흰색이었다. 아무래도 어이가 없어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오늘 공연장 갔다가 에녹 밀리건 봤다.』
대뜸 각막을 파고들어온 건 제 이름이었다. 으응? 하며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웬일이니! 대박! 초대박!』
그래. 이 반응이 정석이지. 한물 간 은퇴가수보다야 당연히 내가 먼저 눈에 들어와야지.
에녹 밀리건이 누구냐고 되묻던 정난우가 떠올랐다.
그런 주제에 루스한테는 팬이랍시고 빨개져가지고는 좋아해요 아쉬워요 아양을 떨어대고 말이지.
에녹은 한물 간 가수를 힐끗 일별하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박았다.
『에녹도 우리 난우 보러 왔나?』
『당연하지!』
『우리 난우는 한번 보면 계속 보고 싶으니까, 앞으로 에녹도 공연장에서 뻔질나게 목격될 것 같아. 하하하하. 역시 우리 난우 마성의 남자!』
…뭐야, 이 자신감은.
“와……, 진짜 극성이네.”
에녹은 단어를 질질 끌어 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 말로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보자보자 하니까 극성도 이런 극성이 없었다.
뭐, 한번 보면 계속 보고 싶어?
에녹의 차가운 눈동자가 인파를 헤쳤다. 파묻히다시피 한 정난우는 금세 시선에 걸려들었다. 멀리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게 훤히 보였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은 잘못 말린 가면처럼 어색했다. 바짝 내려 온 눈꺼풀과 혈색 옅은 입술, 가늘고 긴 목, 그 모든 게 낯선 향기들에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한 손으로 저 뒷덜미를 달랑 들어 건져주고 싶을 만치 가련한 모습이다. 그러나 에녹은 녹록히 속아 줄 생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 맨발로 망설임 없이 불길에 뛰어들던 대범함이 저 여린 껍데기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에녹은 여리지만 질긴 정난우의 피막을 뜯어내는 상상을 했다. 그 알맹이는 분명 혼을 잡아끌 만한 게 있을 텐데, 좀체 안 뜯어지는 걸 보니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극단의 이미지가 몽롱한 시야를 어지럽혔다. 짧게 골 안을 스친 어지러움에 에녹은 혀를 찼다.
인정한다. 분명 무대 위의 정난우는 독보적이었다.
“저거 내숭 아냐? 사실 알고 보면 저게 다 이미지 메이킹이라거나. 사람이 저렇게 지독하게 상대방을 안 볼 수가 있나? 시각에 제일 먼저 의지하는 게 인간의 본능인데.”
에녹은 정난우를 집요한 눈빛으로 포박하고 있었다. ‘한번 보면 다시 보고픈 정난우’ 설에 치를 떨어놓고 고스란히 답습해가는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막 잔을 입술에 가져가던 때였다.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혼잣말에, 루스가 작은 돌을 던져 파문을 만들었다.
“원래 맹인이었어.”
에녹은 멈칫했다. 끌어오다 멈춘 와인 잔 안에 핏빛 액체가 한 순간 격하게 일렁거렸다. 짧게 숨을 들이켠 에녹이 천천히 루스를 돌아보았다. 예상외의 직격타가 가져다 준 충격은 좀 셌다.
“맹인?”
루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에녹을 마주보았다. 에녹의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빈틈없이 자신을 조여 오고 있었다. 색감과는 정반대의, 태양처럼 숨 막히는 에너지가 분사되는 눈동자였다.
샤프한 선의 얼굴이었다. 잘 배치된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단순한 미남의 범주를 훨씬 웃돌았다. 배우로 타고난 천의 얼굴이었다. 무슨 색을 덧입혀도 완벽하게 잘 들어맞았다. 열정. 잔혹함. 순수함. 악랄함, 그 어떤 것도 어그러지는 법이 없었다.
루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에녹은 실제로도 그 자극적인 감정들을 마음껏 분출하며 사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가면을 씌워놔도 어색하지 않은 거다. 선한 역도, 악한 역도. 단점만 극복하면 정말 크게 될 놈이었다.
뒷말을 재촉하는 눈빛에 루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동반자살하려고 메탄올을 먹였다더군. 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지. 열여섯 살까지.”
“…이게 무슨 미친 막장 스토리야. 지 애한테 독극물을 먹였다고?”
연이은 충격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에녹의 얼굴은 확연히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만화의 한 장면으로 옮긴다면 거대한 느낌표 방망이가 그의 뒷머리를 후려치고 있을 거다. 루스는 그 역동적인 반응이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그래도 어려운 집안형편에 아버지가 정신을 좀 놓았던 모양이야. 알코올중독이 심각했다던데. 물론 그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만.”
“…당연히! 빼도 박도 못하게 미친 새끼지, 그게!”
“그렇지. 친척들 모두가 외면했다고 하니 하마터면 저 재능이 빛을 못 볼 수도 있었겠지 . 다행이 키워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 고아원에는 안 보내졌어. 그 이후로 좋은 기회를 만나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루스는 와인 잔의 목을 감싼 손가락을 슬쩍 뒤틀어 정난우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저 상태고.”
에녹은 미간을 찡그린 채 다시금 눈으로 정난우를 좇았다. 어쩐지 기묘한 울분이 치밀어 어금니를 딱 사려 물었다. 루스가 덧붙여 말했다.
“그 사방팔방 뿌려진 과거사 때문에 사람들은 정난우를 탓하지 않아. 고개를 들지 못해도, 사람들을 바로 보지 못해도.”
에녹은 뜨거운 속에 와인을 들이부었다. 그래도 열기는 식을 기미가 안 보였다.
첫인상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었다. 그 다음은 그저 숫기 없는 맹물처럼 보였다. 치한 취급하며 뒷걸음질 쳐서 열 받게도 했다. 그런데 그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 무대 위에 올라 얄팍히 누적된 이미지를 산산이 부쉈다. 헐벗은 매춘부보다 더 끈적거리는 발자국을 가슴에 남겼다. 그리고 이제는 음울한 과거를 가슴에 묻은 상처투성이 맨 몸으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몇 개의 얼굴을 더 보여줄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미지의 생물처럼 희귀한 종자였다.
“그래서 정난우 팬들이 더 극성인 건지도 모르지. 그냥 본능적으로 감싸주고 싶은 분위기랄까, 뭔가 아득히 먼데도 아슬아슬하달까. 열렬히 붙잡아 주지 않으면 그냥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릴 지도 모르는 느낌 그런 게 있잖아.”
루스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에녹은 가늘게 뜬 눈으로 루스를 흘겨보았다. 뉘앙스가 참 오묘한 말이었다.
“댁도 그렇다는 얘기 같소만.”
“뭐, 조금은.”
루스는 담담하게 긍정했다.
에녹의 해괴한 시선을 무시한 채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던 루스는, 불현 듯 한쪽 눈썹을 꿈틀 올렸다. 순간 백발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앤드류 커넬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가 자신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루스는 별 수 없이 목례를 해 보였다.
그가 정난우를 이끌고 다가왔다. 침울하게 고개 숙인 정난우를 에스코트하는 주름진 손은 놀랍도록 다정했다. 그는 재능 있는 이들을 제 자식보다 더 아끼는 남자였다.
에녹은 잔을 입술에 붙이며 정난우의 손끝을 주시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앤드류의 드레스셔츠 끝자락을 감아쥐고 있었다.
할로윈 축제로 휘황찬란했던 거리가 떠올랐다. 술과 흥에 흥청망청 흘러가던 사람들. 그 안에서 조난당한 사람처럼 쩔쩔 매던 정난우. 그 때도 정난우는 얌전히 품에 안겨 저렇게 셔츠 끝에 손가락을 감았더랬다.
“왔냐.”
“네. 잘지내셨습니까.”
“…….”
“…….”
부자의 대화가 맞나요…….
정난우는 침묵에 짓눌려 움츠러들었다. 오른손에 어색하게 들린 와인잔의 가느다란 목을 공연히 만지작거리기 바빴다. 그 때 싸늘히 굳은 침묵을 쪼개며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공연 잘 봤어요.”
목덜미를 긁는 묘한 목소리. 에녹 밀리건이었다. 주변에 누가 뭘 어쩌고 있건 간에 그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난우는 호되게 배운 매너대로 잔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으로 악수에 응했다.
“고맙습니다.”
“무대에서 아티스트 정밖에 안 보였어요. 사실 그 다음부터는 집중이 안 되더라고. 당신 연주 때엔 잠이 확 깼다가 그 다음부터는 또 졸음만 와서 곤란하더라니까.”
“넌 그 무식한 소리를 뻔뻔하게 잘도 하는구나.”
앤드류는 강한 어조로 에녹을 푹 찔렀다. 에녹은 철인처럼 흠집 하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난우의 손을 놓았다.
“아시잖습니까. 저 클래식이라면 일단 조는 거.”
“그래. 네 놈은 어릴 때부터 루스랑 짝짜꿍이 잘 맞아서 싹수가 아주 노랬지. 그런데 어쩐 일로 공연을 다 보러 와?”
덩달아 얻어맞은 루스는 태연히 침묵했다. 이런 식의 까칠한 냉대는 이제 익숙했다. 에녹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티스트 정이 초대해 줘서요.”
“…저.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정난우는 그 아티스트라는 직함에 괜히 민망해져서 말했다. 에녹은 깊이 상체를 수그렸다. 정난우의 고개는 그럴수록 더 침몰했다. 억척스럽게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쏟아진 앞머리가 교묘하게 동요에 흔들리고 있을 눈을 숨겼다.
걷어 버릴까 하다 관뒀다. 에녹은 나른하게 풀어진 눈동자에 날을 세워 그의 그늘을 비스듬히 찔러 올렸다.
“내 눈 보고 말하면 호칭 바꿔 줄게요, 아티스트 정, 그 전엔 안 돼.”
그러자 앤드류가 후려칠 듯 팔을 휘저으며 호통을 쳤다.
“고얀 놈. 어디서 수작질이야? 왜, 할리우드에는 더 상대가 없더냐?”
“저는 그저 항상 최선을 다해 사랑할 뿐입니다.”
“놀고 있네. 아주 양말 갈아 신듯이 갈아 치우더구먼.”
에녹은 그저 싱긋 웃으며 상체를 바로 할 뿐이었다. 앤드류는 꿈쩍도 안 하는 에녹을 내버려두고 다시 루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넌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에 본드 칠을 하고 섰어?”
“얘기할 때 끼어드는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저 놈만 보면 이상하게 울화가 치밀었다. 어릴 때부터 내도록 속 썩이던 막내는 무뚝뚝하기까지 했다. 정말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 내내 없는 자식 놈처럼 살더니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뭐고?” “오케스트라 매니저한테 줄 좀 대려고요.”
앤드류는 기가 막혀 잠깐 말을 잃었다.
“언제는제 아비 덕 보기 싫다며?”
“저 아버지 아들로 온 거 아닙니다. 영화감독으로 온 거죠. 그리고 저 이래 뵈도 솔리스트 초대 VIP인데요.”
냉랭한 기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난우는 힐끔 앤드류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세월이 할퀴고 간 얼굴에 노기가 스몄다. 그의 눈동자가 높은 온도로 팔팔 끓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뒤집어지게 화를 낼 징조였다. 정난우는 얼른 루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제가……!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태영 씨, 매니저 어딨죠?”
“아,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한 발자국 물러 떨어져 있던 한태영은 눈치껏 대답했다. 율리안에게는 짐을 먼저 실어 보낸 터라 한태영은 직접 오케스트라 매니저를 찾아 자리를 떴다.
한 숨 죽은 분위기에 정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차례였다.
“저기, 선생님.”
“응. 왜?”
정난우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앤드류의 키는 자신과 비슷했다. 칼 같이 정갈한 연미복을 주르륵 따라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눈이 마주쳤다. 정난우는 묘한 긴장감으로 땀 찬 손바닥을 손끝으로 꿈지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배고파요. 여기서 잠깐 두 분이랑 얘기 좀 나누면서 뭐 좀 먹고 있어도 될까요?”
앤드류의 주름 속에 고여 있던 불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피식 웃으며 정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미소엔 가식 한 자락 없는 애정이 충만했다.
“그래. 간단히 요기 좀 해라. 손님들은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네. 다녀오세요.”
정난우 역시 부드럽게 눈가를 허물었다. 앤드류는 까만 머리통을 톡톡 두드려주고는 곧장 뒤를 돌아 주빈들을 상대하러 갔다.
정난우는 긴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럴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앤드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손짓했다. 여긴 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정난우는 그제야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루스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근데 오케스트라 매니저는 왜 찾으세요?”
루스와 에녹은 고개 숙인 정난우의 깨끗한 정수리를 보고 있었다. 긴 앞머리가 검은 물결을 만들며 여지없이 그의 눈을 가렸다. 묘하게도 그 순간, 두 사람은 같은 걸 떠올리고 있었다.
주저 없이 앤드류를 보던 검은 눈동자를, 말이다.
“커넬 씨?”
묘한 침묵에 정난우가 머뭇거리며 루스를 불렀다. 루스는 정난우를 굽어보며 조금 늦게 대답했다.
“다음 영화에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고 싶거든요. 구체적인 접촉은 나중에 라인-프로듀서가 할 테지만 슬슬 미리 안면을 좀 터놓을까 해서요.”
“아아. 섭외요. 녹음이 아니고요?”
“네. 아예 촬영까지 좀 같이 할까 해서.”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비밀이시죠?”
“비밀이랄 건 없지만, 확실히 시놉시스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제일 먼저 알려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一아, 배고프다고.”
우리는 상관 말고 들라는 말에 정난우는 멋쩍게 웃었다.
“조금 그렇긴 한데, 선생님 화내실 것 같아서 한 말이에요. 제가 말 걸면 항상 웃어주시니까.”
이것 봐라,
한쪽 눈 꼬리만 살짝 허물어뜨리며, 에녹은 조금 허탈하게 웃고 알았다. 이러니까 저 말랑말랑한 껍데기에 호구처럼 속아줄 수가 없는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할 줄도 알고, 제법이잖아.
“아, 커넬 씨. 여기 이 분이 오케스트라 매니저 되세요.”
한태영이 돌아왔다. 루스는 아, 하며 정난우에게 양해를 구했다.
“기다려요. CD는 잠시 후에 교환하도록 하죠.”
“네. 말씀 나누세요.”
루스는 오케스트라 매니저와 악수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조용한 곳으로 사라졌다. 때마침 한태영도 전화가 울려 자리를 비웠다.
에녹과 둘만 남고 말았다. 정난우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도 없이 만지작거린 잔은 미지근하다 못해 뜨끈뜨끈해져 버렸다.
상들리에의 빛 가루가 머리 위를 부유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가 가녀린 춤사위로 사람들 사이를 굽이돌았다.
“자요.”
정난우는 얼굴 아래 디밀어진 접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각 케이크가 담긴 유백색 접시가 조명에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먹어요. 사람들 상대하느라 진 빠졌을 텐데.”
정난우는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조심스럽지만 제법 빠르게 포크를 놀려 케이크를 먹었다.
에녹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요. 누가 쫓아 와?”
정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빈 접시를 내려두고 얼른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아뇨. 뭐 먹고 있을 때 누가 인사해 오면 안 되거든요.”
“왜요?”
“솔리스트는 그래야 돼요.”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납득은 했다. 에녹은 입 꼬리를 살짝 휘었다.
“뭐, 그건 그렇고. 이봐요. 아티스트 정.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뭔데요?”
“사람 눈을 보는 기준이 뭐예요?”
정난우는 멈칫했다. 펀치 같이 날아온 질문에 케이크가 위에서 얹히는 기분이었다. 에녹은 한 손을 슬랙스 주머니에 꽂아 넣고, 다른 손으로는 우아하게 잔을 들고 있었다. 와인을 마시며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렸다. 미적거리며 되물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하신데요?”
“왜긴. 나도 보고 싶으니까 그 기준 좀 알자는 거지.”
순간 정난우의 눈초리가 얼어붙었다. 이 남자는 정말 말 한마디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무서울 만치 거침이 없었다. 에둘러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직선적인 혀였다. 피부를 발라낼 것 같은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정난우는 그의 잔속에 물결치는 와인을 아슬아슬하게 응시했다. 피처럼 붉은 빛깔이 그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뜨거운 빛깔에 차가운 온도였다. 이런 사람은 버거웠다.
누군가 구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른 때는 이렇게 가만 서 있으면 잘만 다가오던 사람들이 코빼기도 안 비쳤다. 이 남자가 빚어내는 화려하고 강열한 공기가 다른 이들의 접근을 은연중에 막고 있는게 분명했다.
정난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작은 아이들은 괜찮아요. 그 외에는 어쩔 수 없을 때나…….”
“이를 테면?”
“지휘자 선생님처럼 서로 교감이 반드시 필요한 상대요.”
“그럼 그 어쩔 수 없을 때一를 제외하면?”
집요한 남자였다. 왜 그렇게 눈맞춤에 집착하는 걸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그는 인내와 어울이지 않아 보였다. 말로 더 채근하지 않음에도 뜬금없이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난우 씨!”
한태영이 빠르게 다가왔다. 정난우는 반가운 침입자에게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태영은 얼른 손아귀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머니예요. 받아 보세요.”
정난우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가 곧 환해졌다. 그는 얼른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고목나무처럼 생기 없고 주름 진 얼굴이 화면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양모에게서 걸려온 영상 전화였다.
《난우야, 엄마야.》
〔응, 엄마.〕
정난우는 녹을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차가운 액정 속에 갇힌 어머니는 침침한 눈에 초점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에게 얼굴이 더 잘보이도록 정난우는 카메라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전화 받기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엄마, 왜 며칠 전화 안 했어?〕
《우리 아들 바쁠까 봐 그랬지.》
〔공연시간만 아니면 된다고 했잖아. 자주 전화해.〕
《그래. 알았어.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없어. 엄마는?〕
에녹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천천히 팔짱을 꼈다. 흉흉한 심사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덧씌워졌다. 막 대답을 들으려던 참에 방해를 받았다. 기다렸다는 듯 달아난 정난우는 휴대폰 속으로 아예 빨려 들어갈 듯 했다.
또, 밀려났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정난우는 전혀 알아듣지 못할 언어마저 쓰고 있었다. 불쾌함은 더 깊어졌다.
그는 한태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정난우가 자꾸만 ‘엄마’라고 하는데 그게 ‘mom을 말하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한태영은 정난우의 어감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mommy’라고 약간의 정정을 해 주었다. 에녹은 불순물 같은 감정도 날려버리고 괴이쩍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mommy? 애도 아니고.
“통역 좀 해 줘 봐요.”
에녹은 뻔뻔하게 턱을 기울이며 요구했다. 한태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프라이버시가 어쩌고저쩌고 했다. 에녹은 당신만 듣고 나는 못 듣는 게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한태영이 나는 들리는 거고 당신은 훔쳐 듣겠다는 거 아니냐고 반박했다.
하여간 옥신각신하며 잘 버티던 한태영은,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섹시 여배우 사인을 받아다 주겠다는 유혹에서 그만 함락되고 말았다. 버티던 게 무색하게 프라이버시를 줄줄 읊어댔다.
“삼주일 뒤에 일정이 비어서 한국에서 한 사흘 있다 오려고 했는데 중간에 자선공연이 잡혀서 못 가게 됐다고 하네요. 열흘 쯤 뒤에 중국 공연이 곧 있으니까 그 때 시간 내서 들르겠다고. 어머니가 ‘보약’ 지어 놓으셨나 봐요. 기뻐하네요.”
“보약? 그게 뭡니까?”
“음. 허한 체력을 보충해 주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한태영은 약간 난감해졌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내리 살았다. 한국말은 엄격하게 배웠지만 한약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정난우가 한국에 들르면 가져오는 약 봉지 뭉치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게 어디에 좋으냐고 묻자 정난우는 피로가 덜 하다고 했었다. 한태영은 고심하다가 입을 뗐다.
“한국식 에너지 드링크? 난우 씨 한국 가면 가끔 두세 박스씩 챙겨오는 거 있습니다. 일단 손에 들어오면 하루에 세 팩씩 꼬박꼬박 드시죠.”
에너지 드링크? 두세 박스?
에녹은 고개를 비틀었다. 그는 정난우를 새삼스레 쳐다봤다.
그거 나름 부작용 많은 건데 두세 박스씩 챙겨 온다니. 게다가 하루에 세 개씩이나? 그 정도면 중독 수준인데.
옆에서 무슨 엄청난 오해가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채, 정난우는 휴대폰에만 집중했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어느새 루스가 다가와 구경꾼 대열에 합류해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모두가 정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보고 싶어, 엄마.〕
정난우는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