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황태후 현씨의 집안은 그리 권력이 강한 집안이 아니었다. 수도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세도가가 아닌 지방 군수 출신의 고만고만한 귀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쪽 집안에서 가장 출세한 사람이니 할 말 다했다. 그런 그녀가 황후가 된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황후가 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궐내의 궁인으로 일하고 있던 그녀를 선대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해 승은을 입은 뒤, 그녀는 현 소의가 되었다. 현 소의가 된 그녀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래에 자신을 우러러 보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어제까지는 자신에게 반말을 하던 궁인들이 존대를 했던 것이다. 그 놀라운 경험이, 현 소의를 들뜨게 해 그녀는 더욱더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고픈 욕심에서였다.
선대 황제는 우유부단한 기질이 있어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기질을 가진 현 소의를 재미있어 하며 어여삐 대해 주었다. 그런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는 마침내 주변 고관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허나 고난은 거기서부터였다. 황후의 자리에 올라간 것은 좋았으나, 아이가 도통 생기지 않았다. 소의의 자리에 있을 때는 있었으면 좋은 정도로 끝났던 아이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가니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황제는 여전히 황후를 사랑하고 아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서 귀비 기씨가 들어오게 되었다. 귀비 기씨도 용종을 잉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황후와 달리 확실하게 아이를 가졌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궐내에 안도와 함께 기쁨을 가져왔다. 귀비가 아이를 낳은 후, 현 황후와 귀비의 대접은 완전히 달라졌다.
선량하고 순한 성격의 선대 황제는 자신의 아이를 너무도 어여삐 어겼고, 귀비의 처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 귀비 기씨는 현숙한 여인이었기에 황제는 곧 순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귀비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더욱 현 황후는 궐내에서 찬밥 신세가 되었다. ‘황후’라는 직위는 그저 직함의 이름일 뿐, 실상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의 사랑이 떨어져 나간 황후는 그저 거적만 남은 쌀자루와 같았다.
그러자 더더욱 현 황후는 궐내에서 찬밥 신세가 되었다. ‘황후’라는 직위는 그저 직함의 이름일 뿐, 실상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황제의 사랑이 떨어져 나간 황후는 그저 거적만 남은 쌀자루와 같았다.
마침내 평소에 황후를 고깝게 보던 자들이 귀비 기씨의 친정인 기씨 문중과 손을 잡고 황후를 폐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황후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가 세고 성격이 모나 제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황후와 황자를 생산하신데다 성격마저 황제와 비슷할 정도로 온순한 귀비. 부와 권력을 탐하는 고관대신들이 누구의 등을 밀어줄 지는 빤했다. 그래서 현 황후는 결국 폐위되었다.
그 날은 폐위되던 날이었던 것 같았다. 폐위를 거부하는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손을 피해 그녀는 수안궁으로 들어갔었다. 수안구이 폐쇄적인 구조에다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도망치기 쉬운 장소라 이리로 도망친 것은 맞지만, 그녀는 또한 한 가지 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다.
폐위라니 말도 안 되었다. 황제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주었는데, 그 사랑이 이리도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허나 모두 허망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자신을 소매 속에 놓은 꽃 마냥 어여쁘게 여길 적 그녀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이었따.
그것은 수안궁에 사는 뱀 신님의 신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은 당시에는 황제가 워낙에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한데다가 자신 역시 별로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하고 넘어갔던 이야기였다. 허나 지금은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었다.
황태후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바깥 풍경을 구경한다고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그새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쪽잠에 아주 긴 꿈을 꾸었었다. 이제는 너무도 오래 된 이야기였다. 황태후는 창밖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붉고 붉은 애기 단풍잎을 보았다.
작고 귀엽구나. 황태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황태후는 이 새빨갛고 작은 단풍잎이 마음에 들었다. 사시사철 붉은 것도 좋았고, 이름이 ‘애기’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아가들의 잘린 손목을 닮아서 참으로 좋았다.
처음 이 단풍잎을 봤을 때, 자신은 어찌나 희열을 느꼈는가. 아기, 아기, 아기, 아기. 고것이 자신을 망쳤었다. 그것이 승승장구 했던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황태후는 아이가 참으로 싫고 미웠다. 가끔씩은 진짜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 진실로 살의를 느낄 정도였다.
허나 이제는 괜찮다.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를 뻔 했는데, 이 단풍이 들어오고나서 마음이 아주 많이 진정되었다. 가지를 흔들면, 저렇게 수많은 아이들의 손목들이 떨어져 내리지 않는가. 붉고 붉은 피에 젖은 채.
황홀했다.
“마마.”
그때, 누군가가 상념에 빠진 그녀를 깨웠다. ‘무슨 일입니까?’ 조용하지만 위엄 있게 대꾸하며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황태후라는 지위까지 오르고 막대한 권력을 손에 넣은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해서 저절로 주변의 사람들을 친절히 대우하게 되었다. 예전에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을 때는 베풀지 못했던 관용이었다.
그녀를 부른 것은 그녀의 곁에서 항상 그녀를 모시던 상궁이었다. 그리고 그 상궁이 그녀를 부른 이유는 상궁의 옆에 서 있는 낭중이었다. 처음 보는 낭중이었다.
“어디서 왔느냐?”
“소부에 소속된 낭중 민울이라고 합니다. 장한궁에서 왔습니다.”
“장한궁.”
그녀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안되었지. 아이를 잃었다지 않나. 허나 잘 잃었다. 자신이 있지도 않은 것을 갖고 있었던 귀비였다. 귀비라는 지위까지 똑같아 귀비 비씨는 아타깝게도 자신에게 귀비 기씨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황후에 대적할 상대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안 되겠더라. 안 되겠어, 귀비란 품계는.
그런 속을 겉으로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그녀는 물었다. ‘아, 장한궁. 그래, 귀비는 요즘 어떠신가?’
민울이란 자가 무릎을 숙인 다음 ‘칩거 중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혀를 찼다. 귀비 비씨가 처한 신세가 정말 가엽고도 고소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귀비께서 황태후마마께 전하라 한 것이 있어 이렇게 마마를 찾아뵈었사옵니다.”
“전하라 한 것?”
그러자 민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황태후에게 보여주었다. 비단 보자기에 싸여져 있는 함. 그 뚜껑을 열었더니 마치 보석과 같은 붉은 알갱이들이 수북하고도 곱게 담겨져 있었다. 투명하고 붉은 석류 알과도 같았다. 안에는 새까맣고 검은 알갱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무엇인고?”
“저기 동쪽의 샤라국에서 온 공물입니다. 한 알에 집 한 채의 가치가 있는 과자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수확제 준비 기간에 들어온 공물 중에 있었사옵니다.”
“호오.”
샤라국이라면 그 신기한 물품들이 많던, 황태후는 관심을 보이며 함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맑고 투명한 적수정 같아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귀비께서는 지금 단 것은 입에다 댈 수 없는 상황인데, 마침 황태후마마께옵서 붉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 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셔서.’ 민울이란 낭중이 이어 길게 설명하는 것을 황태후가 손을 들어 중간에서 끊었다. 민울이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 앞에서 천것이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맛이 어떤가?”
귀비의 사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집 한 채의 가치가 있는 과자라니, 얼마나 입안에서 살살 녹을까.
민울이 다시 설명했다. ‘달고 부드럽고 혀에 닿자마자 스르륵 놀아 개운하게 넘길 수 있다 하옵니다.’ 그렇게 설명하고서 살짝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 설명을 들었으나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어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래?”
황태후가 웃으며 함 안에 든 것 중 한 알을 꺼내어 민울에게 주었다. 그것을 보고 민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후마마?’
“너부터 먹어보아라.”
머리가 돈 계집의 선물을 뭘 믿고?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그녀는 ‘어서.’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과자를 권했다. 원래 맛을 보는 궁인이 따로 있으나 굳이 그녀를 시키지 않아도 될 듯 했다. 민울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감사합니다. 황태후마마.’라고 답한다.
그녀는 황태후에게서 과자를 받아들고 입안에 넣었다. 붉은 알갱이가 그녀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황태후가 웃었다. ‘어떠냐? 살살 녹느냐?’ 과자를 꿀꺽 넘긴 민울이 ‘네, 마마. 살살 녹습니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한다.
“그래?”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웃으면서 민울을 쳐다보았는데 별 안색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 머리 돈 계집이 멀쩡한 선물을 보냈나 보군. 크게 만족하며 황태후는 자신도 과자를 입속에 넣어보았다. 민울의 말이 맞았다. 과자가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아 정말로 맛이 좋았다.
한 알에 집 한 채 값이라는 것은 과장된 김이 없잖아 있었지만, 충분히 고급 과자 같아 그녀의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다.
“맛이 좋구나.”
그러던 황태후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과자의 바깥 부분. 입안에 닿자마자 사르륵 녹아내리는 붉은 부분이 없어지고, 순간 그 단맛을 단박에 없애버릴 만큼 쓴 맛이 혀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웁!”
지독하게 쓴 맛 때문에 황후는 입안에 든 것을 바로 뱉었으나, 사르륵 잘 녹는 성질 때문에 이미 타액에 녹아 넘어간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무어냐!”
황태후는 놀라 민울을 보았다. 민울이 당황해하며 ‘어, 어떻게 된 거지? 왜 그러십니까, 황태후마마!’하고 말했다. 황태후가 바닥에 얼룩진 새까만 것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건 무엇이기에 이리 쓴 것이냐!”
“저, 저도 모르옵니다.”
‘이 년이 나에게 뭘 먹인 거냐!’하고 황태후가 민울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민울의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더니 ‘웁!’하고 구역질을 했다. ‘왜 그러느냐?’ 자신과 똑같은 것을 먹은 사람이 돌연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황태후의 얼굴이 굳었다. 민울이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화, 황태후, 마마.’하고 자신을 본다. 그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황태후는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우웁!”
민울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에 황태후는 깜짝 놀라 두어 발자국 더 물러났다. 어, 어찌 된 것이냐. 우당탕, 민울이 쓰러졌다. 꺄아아악! 주변 여인들이 소리를 지른다.
“독이옵니다!”
그것은 황태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황태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 아이와 자신이 똑같은 것을 먹지 않았던가.
그 순간, 황태후는 헛구역질을 느꼈다. ‘우웁!’ 게다가 배도 뜨거웠다. ‘황태후마마!’ 궁인들이 소리를 지른다. 몇몇 궁인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궁인들은 더더욱 공포에 질렸다.
“화, 황태후마마! 어서 영의전으로.”
“누가 영의전으로 가서 어의를 불러오너라!”
허나 당황스럽게도 영안궁은 황태후 주변의 궁인들만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경비병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영안궁이 개별적으로 두고 있는 어의조차 없었다. 사색이 된 황태후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갔다. 그녀의 옷과 장신구들이 마구 흐트러졌다.
“황태후마마! 어디로 가십니까!”
궁인들이 ‘고정하시옵소서!’라 외쳤지만 되레 황태후는 궁인들을 손톱을 세워 떼어내며 놓아라, 소리쳤다. 그 엄청난 소리에 놀라 궁인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귀찮은 것들을 떼어 놓고 황태후는 달리고 달렸다. 어서 빨리 가야 했다.
수안궁으로!
여기서 또 죽을 수는 없었다.
달리는 그녀를 보고 말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그 일대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녀는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수안궁에 도착한 황태후는 태상을 찾았다.
다행히 수안궁까지 오니 신자들이 몇 있었다. 수안궁 내부를 휩쓸다시피 돌아다니는 황태후를 발견한 신자들이 몰려와 ‘황태후마마, 어쩐 일이십니까?’하고 묻는다. 당황한 표정들에 황태후는 경멸을 느꼈다. 무능한 것들, ‘되돌아오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황태후는 식은땀이 뻘뻘 나고 배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헛구역질도 더욱 더 심해졌다. 아아, 아아! 죽어선 안 된다. 입에서 뭔가 울컥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피비린내가 났다.
수안궁 내를 돌아다니던 황태후는 마침내 탁자 위의 가위를 발견하였다. 누군가 바느질을 하다 놔두었는지 반짇고리함고 함께 놓여 있었다. 잘 되었다, 싶어 그녀는 가위를 들고 일단 가까이에 있는 여자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꺅!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너냐?!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자가!”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틀렸다. 수안궁에는 신자들만이 사는 게 아니었다. 수안궁 내부의 살림을 돕는 일반 사람들도 일부 출입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자라고 해서 모두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신자들이 생산한 아이들 중에서는 그 힘이 없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태상은 그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거둬서 수안궁에서 키우는 듯 했지만 황태후는 그게 너무도 싫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비상시에 사용해야 할 식량 창고 같은 곳인데 거기에 썩은 사과나 곰팡이가 핀 고기 따위가 들어있으면!
마음 같아서는 가득가득 ‘힘’이 있는 아이들로만 채워놓고 싶었다. 자신이 늙었을 때마다 한 번씩 사용할 수 있게. 불로불사도 꿈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한 번 사용한 아이는 또 사용을 하지 못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었다. 아직 열 몇 번이나 자신은 되돌아올 수 있지 않은가.
더 젊을 때로, 더 아름다울 때로, 더 좋았던 때로 돌아가 매 번 새로 시작할 수가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마침내 궁 안의 소란을 듣고 태상이 나타났다. 가위를 든 채 궁인의 머리를 휘어 감고 있는 황태후의 모습을 본 그는 경악한 듯 보였다.
“황태후마마?”
“어디 있느냐! 신자들은!”
“네?”
그 태연한 얼굴에 황태후는 발끈했다.
“내, 내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그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였다.
“아니요. 당신은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푹.
누군가 그녀를 등 뒤에서 단도를 꽂아 넣어 ‘진실로’ 죽였다.
황태후는 덜덜 떨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한 청년이 있었다. 죽는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헤매고 다녀 누군가 등 뒤로 접근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황태후는 청년의 얼굴을 보았다. 낯이 익었다. 어째서 낯이 익나 싶었더니, 전에 수안궁 앞에서 본 듯도 한 청년인 것 같았다.
“당신 때문에 대체 얼마나-!”
청년의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황태후의 몸은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단도가 박혔다 빠진 자리에 붉은 피가 철철철 흘러넘쳤다. 수안궁 내가 여인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으나, 워낙 폐쇄적인 곳에 위치해 그 소리는 바깥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곧 그 소리는 조용히 하라는 태상의 명에 사라졌다.
* *
태상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궁내의 여인들의 소란은 겨우 잠재웠으나, 자신의 앞에서 일어난 일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찌 된 건가.”
태상은 우선 황태후의 시체를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연서강을 보았다. 흰 옷에 피가 잔뜩 튀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꼴을 해도 연서강은 새파랗게 질린 태상에 비해 평소 모습에 가까웠다. 피가 잔뜩 묻은 단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그는 옷에다가 제 손을 슥 닦았다. 그러다 제 옷에 튄 피를 보고 한숨을 쉬더니 태상을 본다.
“태상경, 죄송합니다만 새 옷을 좀 주시겠습니까.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는 도망을 못 칠 것 같아 그럽니다.”
“연서, 자네.”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에 태상은 경악한 듯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뇨. 보면 모르십니까, 제태상.”
그리고 연서강이 방긋 웃었다.
“이 나라에 일어난 비극의 원흉을 처치하지 않았습니까.”
그 표정이 마치 어린애가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이라 제아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원흉?’ 그는 황태후의 시체를 바라보고 연서강을 올려다보았다. ‘네.’하고 연서강이 대답한다.
“태상경, 어찌 그리 무르십니까.”
그리고 그가 이어 태상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시꺼먼 머리에 눈, 새하얀 옷에 잔뜩 튄 피, 그리고 핏기가 가셔 유난히 하얀 얼굴까지 어우러져 태상은 그가 마치 여기에 실존하지 않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래, 꼭 그것 같았다.
연서강이 말하곤 했던 하얀 뱀.
하나하나 뜯어보면 아름답고 신비로운데,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는,
뱀 신.
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태상은 한 번도 ‘뱀 신’을 본 적이 없었다. 허나 만약 사람으로 화한다면 아마 눈앞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새하얗고 마르고 연약하고 청결하게 생겼지만 그 눈에는 광기를 품고 그 입에서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토해낸다. 소매 자락이 긴 흰 옷도 마치 뱀의 꼬리처럼 보였다.
“태상께서, 당금 황제에게 말을 하지 않으셔도 황태후마마는 당신과의 약조를 어길 겁니다.”
“.......”
태상은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태상은 일전에 연서강이 ‘약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자신에게 왔을 때, ‘태상께서, 당금 황제에게 말을 하지 않으셔도 황태후마마는.’란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태상은 그가 황명이 없더라도 신자를 사용해서 황태후를 없애야 하지 않냐고 말하려고 한 줄 알았다. 해서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헌데 오늘 비로소 그 말의 끝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태상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연서강이 서늘하게 미소 짓는다.
“이 사람이 태상과의 약속을 지킬 여인으로 보입니까? 자신이 죽는다 생각하자 과거와 똑같은 짓을 하는 이 여인이.”
갑자기 가위를 치켜들고 나타나 궁인의 머리를 휘어잡고 난동을 부리던 황태후의 모습을 제아겸은 떠올렸다. 그렇다, 갑자기 나타나 신자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나. 가위를 들고.
아, 제아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자를 내놓으라고?
“황태후는 태상과의 약조를 지킬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제아겸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킬 생각이 없다.......’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부리나케 수안궁으로 뛰어 들어온 여인이었다. 한 번을 해봤는데 두 번을 못 하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허나 자네는! 연서 자네가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어째서요?”
“이건 나와 황태후마마의 일이었네. 자네가 황태후마마를 죽일 필요가 없단 말일세.”
“아니지요, 제태상.”
연서강이 부드러이 웃었다.
“이 사람 때문에 황귀미마마가 죽었습니다. 선대 황제도 죽었습니다. 현 황제는 황위에 오르신 뒤 계속 목숨의 위험을 느껴 필사적으로 멍텅구리인 척 해야 했습니다.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았으며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의 사이도 좋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죽었고, 연조가 죽었고 또 되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되돌아온 제가 고생하며 알아낸 모든 사실이 이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 때문이지 않습니까?!”
말하던 연서강의 목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커졌다.
“이 여자 때문에! 이 여자 때문에 제가 죽어야 했고, 되돌아 와야 했고 그 모든 일들이! 부모님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무진 형님이 저를 죽이려고 했으며, 기연조가 저를 경멸했습니다. 제가 황자를 죽였고, 제가 그 여자아이를 죽였습니다, 이 여자 때문에!!”
크게 소리치는 연서강을 보며 제아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자 때문에!’ 연서강이 황태후의 시신을 밟았다. ‘이 여자 때문에!’ 그러다 그는 곧 힘이 빠졌는지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광분하던 그는 바로 다음 순간 모든 것을 빼앗긴 패잔병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가 속한 세상이 엉망진창입니다.’
“연서강.”
망가졌다.
신음처럼 제아겸이 그를 불렀다. 엉망진창인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 같았다. 어째서? 어제까지는 다소 멀쩡해 보이지 않았던가. 언제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름? 가을? 제아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갑자기 숨을 들이마시며 연서강이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맺혔다.
“제가 이 여자를 죽였으니 뱀 신님께서, 저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주실 겁니다.”
“뭐, 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아겸은 연서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연서강이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제태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기는 우물이지요. 우물입니다. 저기 하늘에서 뱀 신님이 내려다보시는 우물.”
희열에 젖은 미소가 연서강의 입가에 맺혔다.
“뱀 신님께서 약조를 깨면 다른 세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렴요.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뱀 신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훨씬 믿을 만 합니다. 뱀 신님은,”
미소 지은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린 그는 진정 비운의 뱀 신의 신자(臣子)였다.
“뱀 신님은, 돌아오기 전과 똑같이 않습니까!”
길을 벗어난 신자(信者)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신이 손수 점지한 사람이었다.
“연서강.”
제아겸의 부름에 연서강이 그를 돌아보았다.
“뱀 신님이 주시는 세상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뱀 신은 인간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 즐기는 간악한 신일세!”
그러자 연서강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신자를 이용해 되돌아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제아겸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연서강은 소리쳤다.
“저도 열심히 했습니다! 했지만, 안 됩니다. 아 됩니다. 안 되는 걸 어떡합니까! 이걸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가려면, 신자들이 죽지 않습니까!”
“.......”
“죽이기 싫어요. 제태상. 홍이가 또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안타까이 말하는 그에게 제아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쳐버린 인간에게, 사람의 말이 제대로 알아 먹힐 리가. 그저 그의 모습을 보며 부르르 떨 뿐이었다. 그가 망가진 것이, 제아겸은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자신이 황태후와 약조를 맺었기 때문에 뱀 신이 연서강을 이용한 듯 했다.
“연서강.......”
안타까이 불러보았자, 눈앞의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그른 것 같았다.
* *
수안궁에서 건네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연서강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어서 도망을 쳐야 했다.
형님의 도움으로 주변의 경비병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불러내어 일을 쉬이 처리하기는 했지만 곧 놀란 궁인들이 황태후가 어디 갔는지 찾을 것이고, 그러면 수안궁에서 죽어있는 황태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망가기 힘들어진다.
피가 묻은 옷과 칼은 수안궁에 놔두고 왔으니 이대로 사람의 눈을 피해 궐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도망을 칠 수 있으리라.
아, 왜 진작 이러지 않았을까.
연서강은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 그 여자 때문이 아닌가! 되돌아온 이 세상은 그 여자가 마음대로 주물거린 세상이니, 자신이 살 만한 곳이 못 되지 않은가. 이제 그 여자가 죽었으니 좋아질 지도 모른다. 황상과 황후마마께서 화해를 하시면 좋을 텐데. 어쩌면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도 사이고 좋아질 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죽었으니까!
“연서강.”
바삐 걷던 연서강을 누군가가 불렀다. 해서 연서강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님.”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있는 그를 보니 연서강은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서강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형님, 황태후를 죽였습니다.”
“그래.”
잘 했다, 하며 연무강이 연서강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멍청하게 연서강은 그것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잘 한 짓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삐죽 올라왔다.
“민울도 혼란스러운 틈을 봐서 영안궁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다행이네요. 민울이 먹은 약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저것, 썩은 것들.”
피는 가짜였다. 안계영과 친한 이인 낭중 민울은 눈치도 빠르지만 연기력도 뛰어났다. 거승주 살인죄를 기연조에게 뒤집어씌울 때도 유용했지만, 이번에도 참으로 유용했다. 뛰어난 능력은 물론 담대함까지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연무강이 연서강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어디 핏자국이 묻지는 않았나, 살펴보는 듯 했다. 이윽고 온 몸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그가 ‘단도는?’하고 물었다. ‘수안궁에 두고 왔습니다.’ 연무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연서강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도망치면 되겠구나.”
연서강은 연무강이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궐 밖으로 나가는 경천문 쪽이 아니었다. ‘형님, 어디로 가십니까?’ 머릿속이 계속 희뿌연 탓에 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여기에는 사람이 없지만 정문 쪽에 가면 사람이 많다, 연서강.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면 노출 될수록 위험하다. 비밀문이 이쪽에 있으니까, 이리로 가자꾸나.”
그의 말이 맞았다. 해서 연서강은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이윽고 우녕궁 화원에 도착했다. 화원을 가로질러 담쟁이덩굴이 감긴 담을 살펴보던 연무강이 연서강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쪽문이 벽과 똑같은 재질로 달려 있었다. 언뜻 보면 거기에 문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문은 열기가 무척 힘들었다. 끼긱, 돌과 돌이 서로 부딪혀 나는 마찰음이 여러 번 나고 연무강이 문을 몇 번 두들기고 나서야 겨우 열렸다. 이런 상태의 문을 비상시에 어찌 쓰려고 하는 걸까, 하고 연서강은 멍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연무강이 연서강에게 손을 뻗었다.
“가자.”
문이 열리고 바깥이 보이자 문득 연서강은 의문에 빠졌다. 그 여자를 죽였으니 자신은 곧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도망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멍청하게 서서 연서강이 문을 보고 있노라니 연무강이 ‘서강아.’하고 그를 재촉했다.
“형님.”
연서강이 연무강을 보았다.
“도망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
연무강이 입을 다물고 연서강을 보았다. 하지만, 하고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그 여자도 죽었으니 이제 모든 게 좋아지지 않나요? 형님도 저를 안 죽여도 되고 기연조도 죽지 않고, 또 황후마마께서도 신후를.”
“서강아.”
그런 그를 연무강이 조용히 불렀다. ‘네.’하고 대답했더니 돌연 연무강이 두 손으로 연서강의 뺨을 짝 때렸다. 가볍게 때렸지만 눈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그대로 연서강의 얼굴을 쥐고 연무강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정신 차리거라.”
연서강은 그의 얼굴을 마주 했다. 무심한 표정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가 연서강을 진지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과 마주하니 연서강은 마구 들떴던 가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형님.’ 그는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형님.’
아.
연서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안 좋은 꿈이라도 꾼 듯 물렁하고 질척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던 머리가 약간이나마 깨끗해졌다.
“네가 황태후마마를 왜 죽였어야 했는지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지금은 제발 도망쳐주렴.”
“.......”
연무강이 어두운 낯을 하고 연서강의 뺨에서 손을 뗐다.
“네가 죽는 것은 싫구나.”
그대로 방금의 타격으로 붉어진 연서강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지른 뒤 연무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다정해서 연서강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나가서 곧장 서쪽 오거리로 가거라.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조심하고, 오거리 느티나무아래에서 아마도 연서령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따라가.”
“.......서령이요?”
예상외의 이름에 연서강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하고 연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령과 도성 밖을 빠져나가렴. 아마 그 애가 잘 안내 해줄 것이다. 그대로 그 애를 따라가서 의향이가 있는 의경으로 가렴. 의향이가 아마 경국의 사신을 불러다놓았을 것이다. 그 사신을 따라 경국의 수도로 향하다 보면 중간에 ‘매영’이란 고을을 거쳐 갈 것이다. 매영에 내게 예전에 신세를 진 ‘여아혁’이란 남자가 있다. 그 남자를 따라가면 된다. 그 남자가.”
연무강은 연서강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너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데려다 줄 거다.”
“.......”
순간적으로 연서강은 ‘형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라고 물어볼 뻔 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무강의 말에서 자신이 혼자 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함께 가는 경로가 아니었다.
아, 그렇지.
연서강은 두연히 깨달았다. 형님이 왜 같이 간단 말인가. 아무리 형님이라고 해도 황태후마마를 살해한 사람과는 같이 가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허나 어디든 함께 가자고 한 것은 형님이 아니었던가. 불구덩이에 침봉이 덮인 길도 함께 가자고 하지 않았나. 그것마저도 거짓말이었던가.......
그때, 연무강이 피식 웃었다.
“역시 물어보지도 않는 건가?”
그 말에 연서강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긴 미운 사람과 함께 할 여행길은 아니지. 도망치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고통스러울 텐데, 굳이 나와 같이 가고 싶지는 않겠지.”
어?
연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그러나 서강아. 내가 이 일을 도와주었으니 나는 역시 너를 따라가야 하겠다. 일을 어떻게든 정리 시켜놓고 곧 따라가마. 만약 내가 따라가는 게 싫으면 ‘여아혁’이란 남자에게 원래 약속된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 달라 하면 된다. 그 남자는 아마 살기 좋은 곳을 여럿 알고 있을 거다. 그중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살렴.”
“.......”
“녹우당과 비슷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연무강이 연서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나 나는, 네가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구나.”
그의 입술이 연서강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이내 볼에 앉았다. 이상하지만 이전이라면 절로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싫었을 접촉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싫은 기분이 들지 않아 연서강은 아연해졌다. 그 다음에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았는데도.
다만 무어라 입술이 자꾸 달싹여졌다.
뭔가 물어보고 싶었다.
“.......형님, 형님은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연서강이 멍한 얼굴로 묻자, 연무강이 무엇을 새삼 물어보냐는 듯 대답했다.
“너를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느냐.”
그리고 그는 연서강을 작은 벽 문으로 밀어 넣었다. 점점 좁아지는 문 사이로 연서강은 연무강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슬프게 웃고 있었다.
* *
연무강의 말대로 곧장 서쪽 오거리에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더니 연서령이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소!’하고 연서령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에 연서강은 멍청하게 물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느냐?”
“무강 오라버니께서 서강 오라버니를 잠시 안전한 다른 데에 숨겨둔다 하지 않소. 그렇다면 내가 따라야지. 뭘 어쩌겠소? 서강 오라버니를 위해서라고 말하니, 뭐.......”
말끝을 흐리며 연서려이 입술을 삐죽인다. ‘하여튼 어서 출발합니다.’ 말하며 연서령이 미리 준비해둔 두건을 연서강의 머리 위에 푹 씌운다.
“나는 도성을 나가 의경으로 행해도 의심할 사람이 없다 하였소. 해서 내가 의경까지 서강 오라버니를 데려다 주기로 한 것이오. 어차피 수확제도 끝나서 의경으로 돌아가기는 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서령의 푸념이 끝이 없었다. 그러나 연서강의 귀에는 그런 그녀의 푸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가면서 연서강은 혼란에 빠졌다.
연서령이 있었다. 정말로.
무강 형님께서 정말로 연서령을 거기로 보내둔 것이었다. 사실은 여기로 오는 내내 계속해서 연서강은 의심했었다. 느티나무로 가면 정녕 연서령이 있는 것일까. 혹시나 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도 않으면 부친이 보낸 자객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허나 정말 느티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연서령을 보니 연서강은 숨이 턱턱 막혔다. 형님의 말씀은 사실이었다.
“.......의향누님께도 말씀드렸다는 게 정말이더냐?”
“아? 그렇소이다. 내가 전했으니 분명하오.”
앞서 가던 연서령이 살짝 인상을 썼다.
“헌데 서강 오라버니, 대체 왜 몸을 잠시 피해야 하오? 뭐, 상관없나. 변방에서 날 도와주었으니 나도 오라버니를 돕겠소이다.”
“돕다니?”
“나를 구해주지 않았소?”
새삼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연서령이 묻는다. 구해 주, .......거기까지 생각하던 연서강은 ‘그랬지.......’하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생각하든 말했다. 그렇지, 연서령을 구해주었었다. 변방에서. 변방에서는 결코 구덩이에 빠지거나, 소년병을 죽인 일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연서령의 목숨도 구해 주었었다.
점점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연서령이 연서강의 손을 꽉 잡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어차피 변방으로 갈 거면 경으로 바로 가지 말고 나랑 의경에서 좀 더 놀아주고 가시오. 솔직히 집에서는 자꾸 우울한 일만 터지고 서강 오라버니도 계속 아프지 않았소이까. 이번에 올 때 같이 놀려고 준비한 게 많았는데 결국은 하나도 못 하고.”
“안 돼.”
“왜?”
뒤를 돌아보며 연서령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황태후마마를 죽였거든.”
“악!”
그 말에 연서령이 걸음을 멈추었다. ‘악! 악! 악!’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갑자기 ‘아, 아니지. 조용히 해야지.’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여전히 경악한 얼굴로 연서강에게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설마 그 일 때문에 도피하는 것이오?”
“그래.”
“.......허.”
담담히 인정하니 연서령도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곧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렇게 허술하게 갈 일이 아니지 않소? 아, 진짜.”
연서강의 두건의 끈을 좀 더 단단히 매고 옷깃을 다시 매주며 연서령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조심해서 가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그제야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본다. 그런 그녀가 연서강은 참으로 신기했다.
“안 두고 가느냐?”
“내가 왜?”
“같이 있다가 붙잡히면 네 목숨도 위험할지 모르지 않으냐?”
그리 묻자 연서령이 ‘그야.’하며 눈을 굴렸다. 조금 굳은 얼굴에서 걱정하는 빛이 나타났다. ‘무강 오라버니께서 시킨 일이니 어찌 잘 되겠지.’
“게다가 안 들키면 되지 않아. 안 들키면. 그렇다고 붙잡히게 놔둘 수도 없잖아. 의경에 도착해서 바로 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일단 경에 도착하면 안심할 수 있겠군. 어서 의경으로 가야겠어. 경에 도착해도 조심해. 거기 나라 치안이 별로니까, 꼭 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이윽고 도성을 둘러싼 성벽에 도착했다. 커다란 성벽 문을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연서령이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봐.’하고 말하고는, 연서강을 건물 옆에 숨기고 경비병들이 있는 곳으로 척척 걸어간다. 아마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뭔가를 할 셈인 모양이었다.
연서강은 ‘그런가.’하고 있다가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무강 형님의 말이 진실이구나. 연서령도 기다리고 있었고, 의경으로 가는 것도 맞았으며, 경을 경유해서 다른 곳을 가는 것도 맞았다. 아버님이 보내신 자객이 있는 게 아니라, 진실로 자신을 도망치게 해줄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도.
연서강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까도 이상했었는데.
-역시 물어보지도 않는 건가? 하긴 미운 사람과 함께 할 여행길은 아니지. 도망치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고통스러울 텐데, 굳이 나와 같이 가고 싶지는 않겠지.
마치 연서강이 같이 가자고 말을 했으면 ‘그러자.’라고 할 듯 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던 연서강은 자신이 ‘형님께서 그때에 가서도 똑같은 대답을 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던 것을 떠올렸다.
똑같은 대답. 그래서 자신이 질문해주기를 기다린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하지 않았나.
-네가 죽는 것은 싫구나.
정말인가.
-그 남자가 너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데려다 줄 거다.
그 말도 진실인가.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곳, 하고 연서강은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형님께 그런 말도 들었었다. 형님께서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속, 이라니. 이런 세상은 싫다고 한 자신에게.
-내가 네가 너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주마.
그 말이 방금 그에게서 들은 말과 합쳐서 연서강은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곳. 찾아보면 녹우당과 비슷한 곳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이상하다. 무강 형님은 녹우당에서 소요하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나. 아니, 그렇다면 애초에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았겠지.
“.......”
확, 뭔가가 속에서 열리는 기분이었다. 안달이 났다.
형님께서 하신 말이 정말인가? 하지만 자신을 죽였던 사람이지 않나. 연후정에서도 자신을 괴롭히려고 꺼낸 말이고. 계속해서 자신이 연씨 문중을 배신할까 안달을 하지 않았었나. 그것은 어떻게 된 건가. 허세? 연모하는 이가 있는 상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데 허세를 부릴 수도 있지 않냐고 하시지 않으셨나.
배신.......은? 단어가 어지럽게 연서강의 머릿속에서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놈이 내 고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연조에게 갈까봐 그리하였다.
기연조에게로 갈까봐......? 자신이 배신을 할까 안 할까 그리 신경을 쓰셨던 것은, 비단 연씨 문중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기연조에게로 갈까 봐 그랬었던 것인가.
-.......그런 소문이 나면 네놈은 기연조에게 더 이상 얼굴도 들지 못하겠지?
정녕?
허나 되돌아오기 전에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나?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너를 죽였다고 한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그리 했다면....... 필시 죽이고 난 두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겠지.
자신을 죽이고 후회했을 것이라고? 그때 그렇게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죽여 놓고서는 후회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허나.
-네가 변방에서 소식이 끊기기 전에는 나도 몰랐던 마음이었으니.
연서강은 그 말까지 떠올리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변방에서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면 되돌아오기 전에도 자신을 죽이고 난 뒤, 무강 형님은 후회를 했을까.......
알 수 없다. 없지만.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너를 위해 못 할 일이 또 뭐가 있겠느냐.
연무강이 이제까지 해주었던 여러 말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전부 거짓과 조롱이라 생각했었던 말들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넘겼던 말들이 새삼 지금에 와서 연서강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진짜, 진실이라면.......
-너를 연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느냐.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그거였다.
“.......”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전부다 진짜라면.
형님은.
-좋아한다, 라 좋은 것 같구나.
연서강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약간의 이심만으로도 전부 못 믿고 넘길 말들이 이제 와서 느티나무 아래에 연서령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진실로 들리다니.
연서강은 두건을 꽉 쥐었다.
그럼 그는 내가 함께 도망치자고 하면 같이 가주는 것인가?
물어볼 것을.
불어볼 것을 그랬다.
아니. 하다못해 꼭 기다리겠다, 라고 말이라도.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못 보았지. 어떤 얼굴이었더라.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벽 문을 닫기 전 그 틈새로 보이는 얼굴이 전부였다. 얼굴을 보고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진실이신가요?
그렇다면.
“.......”
연서강은 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연서령이 경비병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성벽에서 나와서 집까지는 거리가 매우 길지만, 그래도 다녀온다면 몇 시진 만에 가능했다. 조금 늦게 출발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같이 가자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연서강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 *
두건을 쓴 채 연서강은 마냥 달렸다. 달리다 두건이 벗겨진 듯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면 괜찮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곳, 하니 절로 홍월정 뒤편에 있는 숲이 생각났다. 홍월정 뒤편에 있는 숲이 어디에 있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연서강은 계속해서 부지런히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당장 무강 형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 둑이 툭 터진 듯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자꾸만 마음이 흘러 넘쳤다.
형님, 형님, 형님.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그는 홍월정 뒤편에 있는 숲에 당도했다. 홍월정은 숲의 동쪽에 있었고, 연서강이 도착한 곳은 숲의 서쪽 입구였다. 이쪽 서쪽 입구에서 홍월정까지 가면 좀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는 거리를 걷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연서강은 망설이지 않고 숲속에 뛰어들었다.
우거져 있는 나무들의 잎들이 가을이라 그런지 죄다 울긋불긋 물이 들어 있었다. 바삐 간다고 나뭇가지에 손등이며 뺨이 긁혀 생채기가 생겼지만 연서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자. 어서, 어서 가자.
참으로 오랜만에 드는 벅찬 마음이었다. 되돌아온 이후 이런 마음이 들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움까지 느껴지는 마음에 연서강은 더더욱 빨리 걸음을 옮겼다.
무강 형님의 얼굴을 보면 이 마음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어찌 될까.
무엇이 되던 간에 이전보다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보다.
얼마나 뛰고 걸었을까. 마침내 연서강의 시선 끝에 홍월정과 연못이 보였다. 아, 하고 연서강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다 왔다. 연서강은 지친 다리를 채찍질하며 홍월정으로 다가갔다. 다 왔어.
홍월정으로 사람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여기서 무강 형님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내가.
“내.......”
그 순간, 연서강은 자신의 등에 뭔가 푹-, 박히는 것을 느꼈다.
“어?”
그것을 시작으로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등이 불에 덴 듯 뜨겁고 따가웠다.
그리고 시렸다.
뭐지?
연서강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로 올 줄 알았지.”
자신을 보고 ‘그’가 말한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연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연.......’
“.......연조.”
연서강이 부른 이름은 금세 힘이 사그라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기연조였다. 머리는 온통 산발이고 옷과 신발은 더럽고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그는 기연조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 더 험악한 꼴이었지만 기연조가 맞았다. ‘연조.’하고 연서강은 그를 불다 그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붉게 물든 단도가 들려 있었다.
“!”
경악으로 커다랗게 뜨여진 연서강의 눈에 비친 기연조가 킬킬 웃는다.
“나를 살인범으로 만들었겠다! 그렇다면, 정말 살인을 해 주마!”
“.......연조.”
그 소리에 연서강은 흐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눈앞에 있는 자가 기연조이되, 기연조가 아닌 듯 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허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서강은 피가 흘러나오는 부분을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감옥이 아니고 감시가 좀 허술한 초막으로 간다더니, 감시를 따돌리고 도망이라도 나왔나 보다. 허나 그러면 탈옥이 아닌가. 탈옥을 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면 저 이는 어찌 되는 것인가. 이미 살인 누명까지 쓰고 있는데.
“안 돼.”
피가 흐르는 자리를 꽉 손으로 쥐며 연서강은 도리질 쳤다.
“안 돼.”
안 된다, 연조야. 이리 돌아와서는. 간신히 모든 일의 원흉인 황태후를 죽였는데, 이제부터라도 조용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너도 나도 화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지도 모르는데.
연서강은 고꾸라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기연조가 하하, 하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마치 실성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
그 모습을 뒤로 하고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연조가 자신을 찔렀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어서 여기서, 기연조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연서강은 움직였다. 빨리 기연조에게서 멀어져야만 했다. 어서, 어서!
.......그렇지만!
연서강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형님, 형님, 무강 형님.
이상한 일이었다. 기연조를 범죄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마지막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그라니. 손가락 끝에서부터 자신의 생명이 모래처럼 부서져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지가 무겁고 머릿속이 멍했다.
무강 형님.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 실수했던 것일까. 그냥 무강 형님의 말씀을 들을 것을 그랬다. 그대로 서령이와 의향이의 도움을 받아 외국으로 도망이나 칠 것을. 무강 형님도 곧 뒤따라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그래서 그냥 딱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얼굴을 보고 두 손으로 그 얼굴을 만져본 다음, .......‘저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정말이십니까?’라고 물어보려고 했었다. 연서강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러자 후들거리는 다리가 이상하게 움직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숲속으로 마냥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걸음은 거리로 향했다. 흐르지 마.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칼이 꽂혀 피가 비어져 나오는 상처를 부여잡고 자신의 몸에게 애원하면서 거리로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에서 기연조가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 *
상처에서 피가 자꾸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연서강은 결국 거리 한 복판에서 주저앉고 말앗다. 자꾸 시야가 깜박거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이라도 의식이 날아가면 안 되었다. 단 한 번 정신을 잃는 그 순간, 자신은 그대로 세상과 이별을 할 것이니.
“상처를 입었어!”
“저 정도면 이미 틀린 것 아닌가?!”
“틀렸어, 틀렸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연서강의 귀에도 들렸다.
“저거 녹우당 그놈 아닌감?!”
누군가 연서강을 알아본 사람이 소리쳤다. 그에 ‘맞다, 맞네.’하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문씨네를 죽인 게 녹우당 저놈이라 안 했소?!”
“그렇지! 친하게 지내던 꼬맹이를 이용하고 죽인 놈!”
그의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일부러 사람들이 보라고 거리에 나온 것이니 많이 모여들면 좋았다. 어서, 어서. 사람들이 경악을 하고, 그 말들이 일파만파 퍼져 궐내까지 퍼져라. 무강 형님의 귀에 닿게.
허나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안 돼. 연서강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형님이 올 때까지만 버텨줘. 이를 너무 악물어서 턱에 감각이 없었다.
얼마나 버텼을까. 머얼리서 말을 타고 누군가 오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허나 연서강은 알아보았다. 제일 앞에 말을 타고 오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연서강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가 가까이 오면 마지막으로 얼굴만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퍽.
연서강의 머리를 뭔가 딱딱한 것이 세게 날아와 쳤다. 그와 동시에 연서강은 뜨끈뜨끈하고 붉은 것이 제 두 눈 앞을 가리는 것을 느꼈다. 피였다. 그의 머리를 친 것은 돌이었고, 그 돌을 던진 것은 몰려든 저잣거리 사람들 중 하나였다.
“죽어-!”
누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저 연서강을 둘러싼 채 수군거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저마다 소란스럽게 외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라!’ ‘어떻게 죄도 없는 어린애를 죽일 수가 있지?!’ ‘우리가 얼마나 잘 해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공을 세우고 벼슬을 얻더니 우리 같은 백성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더냐!’ ‘어찌 사람이 그리 끔찍하게 변할 수가 있나!’
사람들의 외침은 곧 분노와 함께 어차피 죽을 목숨인거 어찌 대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 않나, 란 이성이 마비된 군중 심리를 불러일으켰다.
돌멩아 하나가 더 날아와 연서강을 쳤다. 처음에는 하나, 두 번째에는 세 개가, 세 번째에는 이윽고 열 개나 되는 돌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날아왔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연서강을 향해 던졌다.
“죽어!”
피를 토하듯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과연 누구를 대변한 것일까. 연서강은 자신 때문에 죽어간 저잣거리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년병과 언양의 사람들까지도.
“죽어!”
날아오는 돌 때문에 사정없이 몸이 뒤흔들리다 푹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서 스러져도 날아오는 돌은 멈추지 않았다. 연서강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지에 피멍이 들고 생채기가 났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침내 연서강은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두 눈을 깜박였다. 허나 붉어진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서강!”
기다렸던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지만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어. 그래서 좀 더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그와 동시에 커다란 돌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퍽.
일시에 눈앞이 암전했다.
하얀 뱀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뱀이 자신에게 약조를 깨줘서 고맙다, 하고 속삭였다.
또 약속대로 죽음의 세상을 네게 주마, 하고 낄낄낄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연무강은 그 자리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연무강은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연무강이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자 개미떼처럼 시체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아까보다 더 확연히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참혹했다.
피 웅덩이에 사람이 짓이겨져 있는 듯 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수많은 돌들이 떨어져 있었다. 피가 묻은 돌들은 가을 햇빛을 받고 반짝였다. 채 식지 않은 피들이 돌 위에서 뚝뚝 떨어진다.
“.......서강아.”
연무강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궐에서 황태후마마가 살해되었다는 말이 퍼져 비상이 걸렸었다. 사람들이 수안궁으로 닥쳐와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수안궁의 태상이 사람들에게 ‘갑자기 황태후마마가 인질을 잡고 난동을 부렸소. 그래서.’ 그 뒤는 연무강이 말을 이었었다. ‘제가 죽였습니다.’ 태상이 놀라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무강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태상이 이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연위사에게 부탁했소!’ 태상까지 나와 그리 말하니 모인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태상도 위사도 황태후도 궐내에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일단 황제에게 보고해야겠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안궁 내에서 일종의 감금을 당하고 있던 그들의 귀에 그 소식이 들려온 것은.
연무강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뛰쳐나가는 자신을 사람들이 말리려고 잡았으나 모두 떨어뜨리고 그는 바로 말을 잡아타고 달렸다. 죄, 죄인이 도망친다! 외치는 소리에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말을 잡아 그의 뒤를 쫓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연서강이 칼에 찔린 채 거리에 나타나다니.
허나 말을 타고 그 장소에 도착한 연무강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아직까지도 그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누워있는 시신은 연서강이 맞았다. 돌에 맞아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연서강이 맞았다.
어째서?
연무강은 시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망치라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그를 무사히 도망치게 하려고 연서령과 연의향에게 말을 해두었는데, 어째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왜 길에서 이런 모습으로 발견되었단 말인가.
연무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가 없다. 이건 거짓말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그럴 듯하게 꾸며서 자신의 앞에 던져놓은 것이다. 분명했다.
연서강이 죽다니!
“서강아.......”
손을 뻗어 그는 연서강의 얼굴을 쓸었다. 이미 생명이 사라진 몸에는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차고, 딱딱하고, 굳어있었다. 연무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왜 내 말대로 하지를 않고!
연서강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만큼은 목숨이 달린 일이니 자신의 말대로 해주기를 바랐다. 이후에 자신이 그를 볼 수 있을까, 없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찾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것조차 안 되는 것인가.
자신이 따라오는 게 싫다면 여아혁에게 부탁해서 그와 약속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래도 자신은 그를 찾아 갈 것이지만.
그래서 그런 것인가. 어디를 가도 자신이 따라올 것을 알고, .......아예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인가.
“.......내가 그리 싫으냐.”
연무강의 눈에서 눈물이 툭 흘러나왔다.
“어째서 돌아왔느냐.”
이런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그 말이 그렇게도 싫었느냐.”
연무진의 말이 거짓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가 싫어하는 짓을 절대 하지 않으며 천천히 기다리며 신뢰를 회복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이미 차갑게 식은 육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연무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저 멀리서 말 두 필이 더 달려왔다. 제아겸과 제아겸을 감시하는 자였다.
“이럴 수가.”
말에서 내린 제아겸이 연서강과 연무강을 보며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터덜터덜 걸어와 연서강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서, 자네.......’ 제아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서, 자네.......’ 그는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신이시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아겸이 중얼거렸다. ‘이 빌어먹을 뱀 신이!’
어찌하여 이렇게 끝을 맞이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이것도 다 계획된 것이었나.
한참을 하늘을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제아겸은 돌연 연무강을 돌아보았다.
“자네.”
연서강을 끌어안은 채 연무강은 제아겸을 돌아보았다. 그 처참한 표정에 제아겸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네, 아직도 연서강이 죽길 바라나.”
고요한 질문에 연무강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제아겸이 우울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라면.’ 자네라면 연서강처럼 헤매지 아니하고 애써서 노력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얻을 수 있겠지.
제아겸은 연무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혹시 자네.”
쓰게 웃으며 제아겸이 가만히 물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가?”
연무강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시야에 갑자기 닥쳐오는 밝은 빛에 그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시끄러운 소리가 더 거세졌다.
뭐지?
그는 두 눈을 여러 번 깜박여 밝은 빛에 자신의 눈을 적응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눈에 풍경이 보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눈을 깜박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럴 수는. 이게 뭐지? 꿈?
연무강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거기에는 나무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넓은 탁자가 있었고, .......또 강보에 싸인 아기가 놓여 있었다.
연무강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럴 수가. 그는 천천히 아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강보에 살그머니 손을 가져다대었다.
그때였다.
“안 돼!”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연무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비명이 들려온 쪽을 보았다. 유모 서씨였다. 유모 서씨가 틀림없었다. 서씨의 비명에 아이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서씨가 그것을 아이가 무서워서 터뜨린 울음인 줄 곡해하고 다시 소리쳤다.
“안 돼!”
유모 서씨가 얼른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연무강을 시퍼래진 얼굴로 보았다.
“죽이면 안 됩니다, 도련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에 연무강은 느리게 시선을 옮겨 손안에 들린 검을 보았다. 유모 서씨가 다시 외쳤다.
“잘못 한 게 없지 않습니까! 불쌍한 생명입니다. 연우비 아씨의 아이예요. 도련님에겐 사촌아우구요! 제발 살려주세요, 도련님!”
“.......”
그래서 연무강은 ‘이번에는’ 손에 내린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모 서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고 있습니다.”
연무강이 소리 내어 말했다.
“저도 안아보게 해주세요.”
유모 서씨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 도련님.’하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연무강의 요구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유모 서씨가 천천히 강보에 싸인 아이를 연무강에게 건넸다. 연무강은 그것을 품에 안아 들고 아이의 얼굴을 가린 강보를 손가락으로 치웠다.
‘드디어’ 그는 볼 수 있게 되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연무강이 흐린 목소리로 불렀다.
“서강아.”
그 목소리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살짝 잦아든다. 연무강은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삭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웃어 다오.”
아이가 연무강을 보았다.
“제발.”
그때, 거짓말처럼 연서강이 방긋 웃었다.
그것을 보며 연무강은 눈물을 투둑 떨어뜨렸다. 그는 아이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래, 서강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절대 너를 죽게 하지 않겠다.”
날씨가 화창한 낮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우유와 장미
‘레이디’미스 에그니스 브림튼은 거의 성인(聖人)화된 사교계의 평판과는 달리 비교적 세속적인 물이 든 여자였다.
“혹시 들었어요, 시너? 지난 달 인도에서 발견된 118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플래너건 공(公)이 사들였대요.”
그 사실은 신을 발견하자마자 그녀가 인사보다 먼저 한 말은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미스 에그니스 브림튼의 그런 면을 천박하다기보다는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의 관용은 비단 미스 브림튼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큐빅, 글리터, 심지어는 펄이 잔뜩 들어간 아이섀도. 여자들이 환호와 키스를 보내는 온 세상의 ‘반짝이는 것’을 신은 경애했다.
118 캐럿짜리 반짝이는 것이라. 신의 귀가 쫑긋했다.
“어느 정도로 반짝입니까? 저 형광등보다 더 빛납니까?”
신이 무슨 비밀이라도 고백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그 말의 대답으로 신은 언제나처럼 미스 브림튼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자신의 약혼자 자랑을 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자랑은커녕 그녀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몰라요.”
“모른다고요?”
“네. 몰라요. 나도 소문만 들었거든요.”
“하지만 플래너건 공은 브림튼양의 약혼자 아닙니까?”
하고 묻고 말았지만 사실 저 미스 에그니스 브림튼은 플래너건 공에게 있어 단순한 약혼자가 아니었다. 가족이 없는 플래너건 공에게 있어 브림튼양은 그의 유일한 가족이면서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연인이었다.
“아, 혹시.”
골똘히 생각하던 신의 머리에 반짝 전구가 켜졌다. 우울해하고 있던 브림튼양도 뭔가 싶었는지 힐끔 눈만 들어 신 쪽을 바라보았다.
“반지를 만들려는 게 아닐까요.”
“반지요?”
“조만간 프로포즈를 하실 심산이 아니신지.”
미스 에그니스 브림튼과 칼데아 플래너건이 약혼한 지도 벌써 십오 년이 넘었다. 아무리 시간관념이 느린 플래너건 공이라지만 이 정도면 브림튼양에게 청혼을 해야겠다는 자각이 슬슬 들 때가 아니지 싶다.
“그런가요?”
그러나 브림튼양의 반응은 조금 회의적이었다. 앙증맞게도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한 그녀가 곧 신을 의식했는지 베시시 웃어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방금 전의 그녀처럼 신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탐탁지 않으신지요?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다만.......”
“다만?”
“플래너건 공께서 그러실 여유가 있을지.”
용(龍)이라는 족속은 여유가 차고 넘쳐 도무지 주체를 못 하는 종족 아니었던가.
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브림튼양이 진주처럼 뽀얀 손가락 끝을 옥 같은 볼에 대고 한숨을 폭 쉬었다. 부드러운 장밋빛 입술에서 새어나온 한숨은 마치 솜사탕처럼 달콤한 향기라도 날 것 같았다.
물론 개처럼 코가 좋은 신은 솜사탕 향기 대신 뿜어져 나온 진한 민트양 사이에서 송아지 스테이크와 랍스터 냄새를 귀신처럼 찾아냈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시너.”
“그리고 후식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와 와플..., 예?”
“플래너건 공을 도와주세요.”
분명 신이 자신이 먹은 점심 디저트를 맞췄을 텐데 그것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브림튼양은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이유였다.
“저기.”
한참 동안 침묵하던 신이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요즘 귀가 안 좋아서.......”
“플래너건 공의 호위를 맡기고 싶어요.”
요즘 안 좋아진 게 귀가 아니라 머리였나?
“시너. 당신에게는 초능령이 있잖아요.”
**
“초능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없습니다.”
남자는 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고, 신은 대뜸 저렇게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커다란 손바닥에 푹 얼굴을 묻은 남자가 그 손으로 긴 앞머리까지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쉰다.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건지 브림튼양이 서둘러 끼어들어 변명했다.
“아니에요. 시너에게는 특별한 힘이 분명이 있어요.”
그 말에 남자는 신을 힐끔 쳐다보았고 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브림튼양을 돌아보았다. 브림튼양이 주먹까지 쥐고 버럭 외쳤다.
“시너, 난 봤어요!”
“......뭘요?!”
“어제요! 코르노 교수님의 야간강의가 끝나고 나서요!”
신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설마?”
“그래요, 당신이 눈도 뜨지 않고 완벽하게 주차하는 것을 목격했다고요!”
“그것 참 대단한 재주군요, 브림튼양.”
그리 빈정거린 것은 남자였다. 그 말에 당황한 브림튼양이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플래너건 공, 그 외에도 많아요.”
“예를 들면?”
“혼자서 책 백 권을 옮긴다든가.......”
강의실 형광등을 일 초 만에 간다든가. 브림튼양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이마에 손을 짚은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골적으로 한심해하는 남자의 태도에 브림튼양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깊은 수심에 잠겼다.
그녀는 혹여 신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 눈알을 살짝 옆으로 굴렸다가, 신이 천장의 샹들이에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말해 보란 듯이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저는 몹시 불안해요, 플래너건 공.”
“뭐가 말입니까.”
“플래너건 공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목숨을?!”
브림튼양이 외친 말은 번쩍이는 수정 샹들리에에 혼을 팔고 있던 신이 퍼뜩 정신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놀라서 눈이 접시만 해진 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한 번 노려보고 남자가 브림튼양을 석득했다.
“브림튼양, 그건 피해만상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세계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어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말한 브림튼양이 신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여기 시너도 KDK단(非인간을 배척하는 인간 지상주의 비밀결사)일지도 모르죠.”
“아닌데요.”
“그 정도로 용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시너. 그리고 플래너건 공. 공은 아직 어리세요. 만약 과격분자들과 맞닥뜨리면 위험할 수 있어요.”
그 말에 플래너건 공은 몹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브림튼양은 신경 쓰지 않고 덧붙였다. ‘더구나 공께서는 정부에서 붙여 주겠다던 경호원도 모두 물리치셨잖아요.’
“낯선 사람은 싫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보호 받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그러시겠죠. 플래너건 공께서는 긍지 높은 용이시니까요.”
플래너건 공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칭찬하는 건가, 아니면 빈정거리는 건가? 신은 생각했다. 지금 너 욕하는 거야.
그러나 신이 플래너건 공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도 전에 브림튼양이 두 손에 폭 얼굴을 묻고 가련한 흐느낌 소리를 (아마도 일부러)내기 시작했다.
“저는 너무나 불안해요. 너무 불안해서 공부는 물론이고 잠도 못 잘 지경이에요. 플래너건 공, 공도 오늘 제 눈 밑이 까만 것을 보셨잖아요.”
거, 펜슬 아이라이너 번진 거 말하는 건가.
“낯선 사람에게 신변을 맡기는 것이 꺼려지시겠지만 제발 제 부탁을 들어 주세요. 공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시면 저는 정말로, 정말로 불안해서.......”
차마 말을 못 잇겠다는 듯이 브림튼양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던지며 말끝을 흐렸다. 뭉개진 말끝에 서러운 울음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도 했다. 들렸다, 가 아니라 들리는 ‘듯도’했다는 말이다.
저거 입으로 내는 소리 같은데, 라고 신은 판단했지만 남자의 판단을 달랐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자가 승낙했다.
‘플래너건 공!’당장 얼굴이 화색이 된 브림튼양이 플래너건 공의 목에 매달렸다.
눈앞에서 더러운 바퀴벌레 한 쌍의 염장질을 봤다는 것에 더 분노해야 할지, 아니면 플래너건 공과 브림튼양이 자신을 편의점 빵에 들어 있는 포켓몬 스티커 취급하고 있다는 것에 더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서 신은 고민했다.
그리고 신이 고민하는 사이 착착 플래너건 공과 브림튼양 사이에 대화가 오갔다.
그래서,
“당분간 부탁드리겠소.”
겨우 결론을 내린 신이 항의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마에 큼지막하게 ‘더러운 세상’이라고 써 놓은 듯한 남자가 신을 향해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
한 시간에 백 오십 달러.
제 쪽에서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신이 말한 순간 브림튼양이 재빨리 내뱉었다. 신의 머릿속에 촤르르륵 계산이 돌아갔다. 신의 취향에 대해서라면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는 브림튼양이 덧붙였다. ‘마놀라 다이아몬드 추가.’
자신을 보석귀신 취급하는 말투에 화가 난 신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콜.
아차, 실수로 흥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지조가 없군요.”
남자는 자신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상처 받기에는 너무도 많은 평지풍파를 헤쳐 나온 신은 남자에게 항의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글래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새삼 브림튼양이 저렇게 나오실 리가 없는데요.”
“내가 적이 많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성질이 이 모양 이 꼴이라서 그렇다고?”
“......거기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뭐가 이렇게 성격이 급해.
그런 마음을 담뿍 담아 물끄러미 쳐다봐주자 남자가 팍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긴 미간에 오골오골 주름이 잡혔다. 신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다 주름 생기겠네요. 아직 어린데 벌써 자국이.......”
“아, 주름 생기면 보톡스라도 맞을 테니까 신경 끄시오!”
신은 그러기로 했다. 돈이라면 금화 무더기에서 헤엄을 치던 스쿠루지 오리 아저씨 뺨 칠만큼 많을 사람이 바로 눈앞의 남자다. 주름 하나 둘 정도 없애는 건 저 남자한테는 일도 아니겠지.
신은 재빨리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습격이라거나, 아니면 사고라거나.”
“나는 주제도 모르고 끼어드는 당신 같은 인종이 세상에서 제일 싫습니다.”
“있었단 소리군요?”
“.......”
“그런데 딱히 언론에 알려진 사고 같은 건 없었는데..., 그럼 암살?”
정도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신의 망상을 막기 위해 남자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기르던 개가 독을 먹고 죽었습니다. 유난히 식욕이 없어서 내 저녁을 줬었는데 갑자기.”
“저런.”
개를 좋아하는 신은 마음 속 깊이 개의 명복을 빌어 준 다음 물었다.
“그 외에는요?”
“한밤중에 돌을 던져서 창문을 깬다거나. 재를 뿌린다거나 그 정도. 별 것 없습니다.”
내뱉듯이 말한 남자가 다음 순간, 갑자기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그 정도 위협은 늘 있어 왔던 일입니다.”
“용을 보존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저 남자, 칼데아 플래너건 공작은 용(龍)이었다. 아니, 동양용 명사인 용(龍)보다는 서양용 명사인 Dragon이라고 표현해야 옳으려나.
통합 공화국령 982년, 구(舊) 영국 체다 협곡에서 거대한 알이 발견되었다. 일반적인 조류나 파충류의 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크기였다.
그 알의 수는 모두 일곱. 통합 공화국 국립과학원에서는 최초 발견자로부터 알을 인수받아 일곱 중 다섯을 인공적으로 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알에서 태어난 것은 용(Dragon)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서수(瑞獸)의 처결을 두고 온 나라는 뜨겁게 들끓었다. 진귀한 짐승을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용은 불길한 짐승이니 나라에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결코 저거지 않았다.
더구나 반대파는 찬성파에 비해 몹시 과격했다. 격론 끝에 의회에서 용 보호법이 통과되자 격분한 반대파는 결국 무력행사를 감행했다.
반대파의 테러로 아직 어렸던 용 하나가 목숨을 잃었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국왕과 당시 통합 공화국 총리였던 빅토르 라파예트는 귀족원, 일반의회와 함께 흡혈귀, 짐승인간, 도깨비 등의 이종족(異種族) 대표를 불러들여 삼부회를 개최했다.
삼부회 회의 결과, 국왕은 용을 희귀 동물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신(新)종족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 하나에게 작위를 내렸다.
칼데아 플래너건 공작은 그 1세대 용들 사이에서 태어난 2세대였다.
“역시 당신도 KDK단...,”
“아니라니까요.”
당장 눈이 샐쭉해져서 자신을 노려보는 플래너건 공에게 신은 두 손을 저었다. 세간의 평판이나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과격파 종족 차별자로 오해 받는 건 사양이었다.
“그냥 전 사실을 말한 겁니다.”
“말하는 방식의 문제 아닙니까?”
플래너건 공이 뾰족하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
“같은 말이라도 방금과 같은 화법보다는 보다 듣는 사람을 고려하는 화법을 쓰는 쪽이 당신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생각이 어떠신지.”
“그러니까 상처 받으셨다는 말이죠?”
플래너건 공이 딱 입을 닫아버렸다.
어, 삐졌다.
어린 용의 파리한 피부에 보일 듯 말 듯 돌고 있는 홍조를 보고 신이 벅벅 뒷머리를 긁는데, 플래너건 공이 여정히 시선을 돌린 채로 툭 내뱉었다.
“마음에 안 듭니다.”
“세상이요?”
“당신 말이요, 당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대뜸 그러허게 범세계적으로 나가는 겁니까!”
“음.”
어떻게 반응해야 눈앞의 어린 용이 안정을 되찾을지 알 수가 없어서 신은 난감한 신음만 흘렸다. 그 틈을 타 플래너건 공이 폭언을 퍼부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요?”
“.......”
플래너건 공이 침묵했다.
처음에는 왜긴 왜야, 하고 적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러다가 꼬고 있던 다리까지 풀고 뭔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잠시 뒤에는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기까지 한다.
“너무 가벼워서?”
결국 내놓는 결론이라는 것도 어째 끝이 의문형이다.
“그렇게 치면 브림튼양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요. 저와 브림튼양이 대학 보석 카탈로그 수집 동호회에서 처음 만난 건 알고 계시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가 수집한 카탈로그가 자그마치 삼천,”
“당신은 지나칩니다. 브림튼양은 보석만 좋아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저 사실 유리병이랑 새 동전, 펄 아이섀도 팔레트도 수집 중인데. 공이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바비브라운 이번 홀리데이 팔레트 말인데요, 발색해 보면 펄이 자글자글,”
“남의 집 샹들이에를 그렇게 탐욕스런 눈을 보는 것은 실렙니다. 그리고 표정도 마음에 안 듭니다. 그 유리창 훔쳐 가기라도 할 겁니까? 도자기도 그만 좀 보십시오. 그런데 손은 왜 도자기에 가져가는 겁니까.”
“아, 깨진 도자기 절단면이 그냥 도자기보다 더 반짝거리는데 혹시 아시나 싶어서.”
보여 드릴까요?
“...당장 손 떼십시오.”
플래너건 공이 쌀쌀맞게 신의 손등을 쳤다.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떨려난 신이 별로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불쑥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브림튼양이 데려온 사람이라서는 아니고요?”
“예?”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재빨리 얼버무린 신이 곧바로 말했다.
“뭐,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 싫은데 이유가 없다는 사람도 널린 세상인데요. 더구나 공에게는 정당한 이유도 있고.”
“정당한 이유?”
“으음..., 말이 호위지, 감시잖습니까.”
라고 말하자 플래너건 공이 그런 거였냐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서 신은 웃어버렸다.
신이 미리 못을 박았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 두는 겁니다만, 전 초능력 같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연약해서 플래너건 공의 방패 역할 같은 것도 못해 드려요.”
“갑자기 왜 연약한 척 하고 그러는 겁니까, 역겹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브림튼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럽사 하셨던 거라고요.”
신이 소파에 푹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전 손해 보는 거 하나 없으니까요.”
“브림튼양에게는 함께 지내고 있다고 둘러 둘 테니까 그만 돌아가십시오.”
플래너건 공이 차갑게 말했지만, 그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돌아가는 척 일어나서 겉옷까지 주섬주섬 챙긴 신이 밖으로 나가는 대신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
화가 난 플래너건 공이 신의 팔뚝을 잡아 그를 확 잡아끌자, 신이 진지하게 말했다.
“공은 어떠실지 몰라도 저는 브림튼양을 속일 자신이 없습니다. 당신과는 달리 전 브림튼양과 매일 강의실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러는데, 전 어디서 지내면 되나요?
**
“메이드는 없습니까?”
“없어요. 내 둥지에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너도 썩 꺼져, 라는 뜻이었건만 신은 역시 용이라 그런지 단어 사용이 남다르다며 감탄했을 뿐이었다.
입주 고용인이 없다는 소리에 한층 더 나태한 자세가 된 신이 물었다.
“그럼 청소와 식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틀에 한 번씩 사람이 다녀갑니다. 정원사는 매일 출퇴근하고요.”
“정원이야 먹을 풀이 하나도 없던데 제가 알 바 아니고요, 그런데 식사는? 대답 안 하셨는데요.”
“아까 대답했잖습니까.”
“이틀에 한 번 다녀간다는 사람이 청소하는 사람이지 설마 식사준비를 맡은 사람이겠습니까.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용이 설마 하루 이틀씩 지난 음식을 먹을 리도 없는데.”
결국 플래너건 공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토했다.
“잘 안 먹습니다. 먹는 게 귀찮아요.”
“저런, 성장기에는 잘 먹어야 할 텐데요.”
“이보십시오.”
성 난 플래너건 공이 신을 찌릿 노려보았다.
“나는 용입니다. 인간들처럼 한 두 끼 정도 거른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지는 않아요.”
“인간도 한 두 끼 거른 정도로는 큰 일 안 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건 지속적인 영양 불균형과 불규칙한 식생활이죠. 그건 용이든 인간이든 마찬가지고요. 용이라고 해서 뼈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제대로 칼슘을 섭취해 두지 않으면 노년에 고생해요. 키도 안자라고요.”
“지금 당신이 내게 키 운운할 주제가 됩니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자존심을 지적 받았으면서도 신은 움츠려드는 기색 하나 없이 플래너건 공을 올려다보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신 앞에서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저 어린 용은 그 자신만만한 발언대로 키가 훌쩍 컸다.
그럼-,
신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더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골다공증 알아요?”
“적당히 좀 하십시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대체!”
듣다 못한 플래너건 공이 폭발하자 신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 봤는데, 호위는 물론이고 제가 감시도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요즘 좀 바바서요.”
“그래서 뭘 해서 돈을 받겠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썩 꺼질 때 꺼지지 왜 아직까지 남아서 내 복장을 뒤집어 놔?! 눈앞의 남자가 지껄인 말에 그냥 그럼 역시 꺼져요, 하고 받아쳤으면 됐을 텐데 벌컥 화가 앞섰다.
분명 브림튼양은 한 시간에 백 오십 달러,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언젠가 그녀의 생일에 자신이 선물했었던 마놀라 옐로우 다이아몬드까지 얹어서!
그런데 그만큼의 보수를 받으면서 태도가 뭐 저렇단 말인가? 저런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흔적도 없어져야 정상이 아닌가?!
“신은 대체 뭐하는 족속인지 모르겠군요!”
“자본주의를 만든 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죠.”
어린 용의 머릿속을 제 손바닥처럼 읽은 신이 매끄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뭐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제가 놀면서 보수만 받아가겠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도 양심이란 게 있어서요.”
“...있습니까?”
“있지 않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서 결국 뭘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은?”
“밥을 할까 하고.”
뇌가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 플래너건 공이 주춤했다.
“밥이요.”
그래서 신은 친절하게 다시 말해 주었다. 플래너건 공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웬 밥이요.”
“식사를 자주 거르신다면서요. 그리고 낯선 사람이 둥지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하신다고.”
“그건 그렇지만, 대체 그게 식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다.”
신이 단호하게 플래너건 공의 말허리를 잘랐다.
“저야 어차피 당분간은 공의 둥지에서 지내야 할 테니까 겸사겸사 식사 준비도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두루두루 다 좋잖아요?”
**
그러나 반강제로 둥지로 들어온 식모, 아니 식부(食父)는 반나절째 행방불명이었다. 그 딴 것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도 영양실조로 병원응급실로 실려간 용을 본 적이 있느니 없는니 하는 헛소리로 억지로 둥지에 들어앉은 주제에 말이다!
칼데아 플래너건은 탁탁탁탁 간헐적으로 구둣발로 바닥을 치면서 생각했다. 언제 들어오는 거지, 이 작자는 대체.
“?”
그 때 플래너건의 귀가 쫑긋했다. 나무에 물을 주는 소리와 가지를 다듬는 가위 소리만 들려야 할 정원 쪽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신 왜 거기 있습니까!”
창밖으로 내다보자 역시나 식부 놈이 정원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짜증이 솟구쳐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원사 폰드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플래너건 쪽을 쳐다보았다. 플래너건 공은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좀처럼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는 얌전한 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사 폰드와 플래너건 공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식부가 뻔뻔하게도 웃으면서 말했다.
“먹을 수 있는 풀을 심어 달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자리가 없다고 말씀 드렸는데, 자꾸....”
정원사가 난감해하며 말하자 신이 이미 봐뒀다는 듯이 척 한 자리를 가리켰다. 저걸 빼죠.
“잎 모양이 별롭니다.”
“하지만 손님, 꽃은 아름답습니다.”
“왠지 열대 분위기가 나서 싫습니다. 제가 타히티 섬에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었거든요.”
“그건 당신이 방정치 못한 게 원인이었겠지요. 트집 잡지 말고 들어오기나 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플래너건 공이었다.
신이 아직도 미련이 가시지 않은 듯 협죽도와 난초가 있는 자리를 힐끔거리다가, 플래너건 공의 재촉에 못 이겨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신이 들어오자마자 플래너건 공이 기다렸단 듯이 바가지를 긁었다.
“대체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 겁니까?”
“학교요.”
“학교!”
“예, 브림튼양이 늘 이 시간에 학교를 가지 않던가요? 오늘은 수업이 두 개 뿐이라 돌아오는 길에 식재료도 사왔습니다.”
신이 들고 있던 커다란 봉투를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 본 플래너건 공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프랑스 바게트, 대파, 오이, 가지.... 당신 대체 뭘 만들려는 겁니까.”
“봉투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있어야 보기에 그럴듯해 보여서요. 일부러 신경 써서 종이봉투에도 담아 왔죠.”
“그딴 식으로 살 겁니까, 진짜!”
“안 그래도 넘치는 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입니다. 다음에는 바게트나 대파 중 하나만....”
“미스터 시너!”
참다못한 플래너건 공이 성을 내자, 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그럽니까, 왜인지 뜨끔한 기분이 들어서 플래너건이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게 묻자 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미스터 시너, 아닙니까?”
성이면 충분했다. 그의 이름까지 알 생각은 없었다.
“시너는 브림튼양이 임의로 부르는 별명 같은 거고, 제 이름은 신입니다.”
“신?”
플래너건은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묘한 이름이었다. 그 생각을 읽은 건지 신이 대답했다. 구 한국계라서요.
“그럼 성은 뭡니까.”
“성은 없습니다. 그냥 신이라고 부르십시오. 발음이 힘들면 서너나 시나도 괜찮습니다.”
저 남자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는 않다는 일념으로 캐어물은 보람이 참으로 없었다. 최대한 저 작자 이름을 부르지 않는 쪽으로 해야겠다며 플래너건이 생각하는데, 신이 대뜸 팔을 걷어붙이는 게 보였다.
“거기, 뭐하려는 겁니까!”
“밥이요. 부엌이 어디지요? 둥지가 넓어서 인간 몸으로는 다 돌아보기가 힘드네요.”
“파와 바게트와 가지와 오이로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다른 것도 있습니다. 돼지고기나 양고기나 쇠고기나 닭고기나....”
플래너건이 짐승이냐, 라는 시선을 보내자 신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역시 용에게는 고기가 최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안한 예감이 플래너건의 뒤통수를 섬광처럼 스쳤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드시지요.”
어디서 주워 쓴 건지 기다란 요리사 모자까지 쓴 신이 플래너건의 앞에 접시를 내어 놓았다. 에피타이저도 없이 대뜸 메인 디쉬냐, 하고 접시 위를 꼴아본 플래너건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분노체 찬 플래너건이 식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이걸 요리라고 내놨습니까!”
“생후 24∼25년의 어린 용에게는 이게 딱입니다.”
“이건 생고기잖습니까!”
“양념은 아직 안 됩니다. 소금이나 후추, 계란 노른자는 자극이 강해서 생후 30년이 지난 후부터 섭취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권장이라니, 누가요?”
“용 사회에서는,”
“용 사회라니! 그런 헛소리는 또 처음 들어 보는군요!”
플래너건이 화를 내기도 지쳤는지 이제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 바봅니까? 종족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이 세계 용의 개체수가 적다는 것을 모릅니까? 나를 포함해서 일곱! 겨우 일곱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플래너건은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냈는데도 신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신이 다가가 플래너건의 접시 위에 갈은 무를 얹어 주었다.
“갈은 무도 소화에 좋습니다.”
“당신, 진짜,”
“어허.”
화를 내려던 플래너건이 신의 어허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마치 반찬 투정하는 손자를 혼내는 할아버지 같은 소리 아닌가.
“일단 들어요. 입에 안 맞으면 제가 군말 없이 둥지를 뜨겠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면 해볼 만하지요? 하고 말하듯이 신이 두 손바닥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런 신을 한 동안 노려보고만 있던 플래너건이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빈정은 상하지만 저 남자의 말마따나 자신이 손해 볼 것은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맛있죠?”
“...별롭니다.”
신은 대답하는 대신 접시를 들어 보였다. 사람 머리만한 접시 가득 쌓여 있던 생고기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플래너건은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어졌다. 신이 그런 그를 위로했다.
“원래 어릴 때는 다 그렇습니다. 식욕이 이성보다 강하죠. 눈 깜빡할 사이면 소 한마리를 먹어 치운다니까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리고 앞으로 배앓이를 할 일은 없을 걸요.”
플래너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신이 확인 사살했다.
“식사를 꺼리던 이유도 그거 때문 맞지요?”
플래너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대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사이 신이 얄밉게도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
브림튼양을 만난 것은 그 날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보모였습니까?”
에그니스 브림튼양은 오물거리던 입을 멈췄다.
“절 보모로 고용한 거였냐고 여쭸습니다.”
브림튼양이 하얀 볼을 볼록하게 만들고 있던 스콘을 꼴깍 삼켰다. 신은 찻잔을 내밀었다.
아직 뜨거운 홍차를 재주도 좋게 비운 브림튼양이 후아, 하고 커다란 숨을 내쉬더니 뒤늦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취침 시간은 새벽 네 시, 기상 시간은 여섯 시 반, 식사는 거르기가 일쑤. 24시간 중 17시간은 앉은 채로 보냄. 난시에 근시, 장이 약하고 간도 약함. 기관지도 약해서 한 달 전 걸린 기침감기가 아직까지 낫지 않고 있음. 하루 마시는 물은 고작 반 잔. 그에 반해 커피는 하루에도 기본이 넉 잔, 홍차는 잔을 셀 수도 없을 정도.”
이게 누구 게요? 하고 묻듯이 신이 고개를 갸웃해서 브림튼양도 마주 고개를 갸웃했다.
“플래너건 공 아닙니까, 칼데아 플래너건! 댁 약혼자!”
“어머, 전 제 이야기를 하시나 했어요.”
신이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천생연분이군요, 정말.”
“저희 둘을 엮어 준 것은 하늘 따위가 아니라 왕명(王命)이었답니다.”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이 투덜거렸다. 어린 용 공작이 다섯 살이 되던 날 국왕이 그의 ‘레이디’로 미스 에그니스 브림튼을 짝지어줬다는 사실은 진짜 다섯 살배기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플래너건 공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지금이야 어리, 젊어서 괜찮겠지만 좀 더 나이 들면 큰 일 날 정도지요.”
“하긴, 나도 스물 중반을 넘으니까 피부며 몸 상태가 확 꺾이는 것 같지 뭐예요.”
폭 한숨을 쉰 브림튼양이 그런데, 하고 신 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할 만 해요? 그 이, 성미가 꽤나 까다로운데.”
“애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 괜찮습니다.”
“하긴, 자기는 과외보다 베이비시터로 번 돈이 더 많았었죠.”
웃으며 말한 브림튼양이 덧붙이지 않았어도 좋을 말을 덧붙였다. 하긴, 그래서 내가 자기를 점찍은 거죠.
“역시 계획된 일이었군요.”
“어머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뭐, 됐습니다.”
능청을 떠는 브림튼양을 뒤로 하고 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브림튼양이 ‘시너!’하고 신을 붙잡았다.
“어디 가요? 약속 있어요? 자꾸 이렇게 동아리 활동 빠지면 혼나요.”
“제가 얼른 아가 도마뱀을 큰 용으로 키워 놔야 브림튼양도 결혼을 하시죠.”
“어머나, 약속이란 게 플래너건 공과 한 거였어요?”
집에 빨리 돌아가기로 했나봐, 하는 말에 신이 고개를 저었다.
“만나기로 했어요.”
“플래너건 공이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고요?”
“약속을 한 건 아니고....”
신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수업 마치는 시간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시너, 자기 뭐 한 거예요?”
“플래너건 공이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신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브림튼양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숙녀 된 도량으로 일단 대답해 주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전집 제 4권?”
“네, 그런데 제가 5, 6권을 들고 튀었거든요.”
신이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전집 제 5권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
“이게 신사 된 도리로 할 짓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상대로 플래너건 공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신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플래너건 공이 자신이 예상한 시간에, 자신이 예상한 장소에 서서 씩씩거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왈왈거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무어 있을까!
‘저를 신사라고 생각하고 계셨다니 영광입니다.’신이 플래너건 공의 비난을 환호로 받아치며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플래너건 공의 손에 인질(서질書質?)을 돌려주었다.
“이건 절돕니다!”
“어디로 가실래요?”
“뭐요?”
“박물관? 백화점 1층? 아니면,”
“잠깐 기다리십시오!”
신의 폭풍우 같은 화제전환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던 플래너건 공이 방금 전까지 자신이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두 손을 내저었다.
“어딜 간다는 겁니까?”
“모처럼 나왔으니까.”
“이봐요.”
플래너건 공이 정색을 했다.
“내가 낯선 사람을 싫어한다는 사실 잊었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아니, 생물이란 건 가끔 광합성을 해줘야 한답니다.”
“내가 잎사귑니까!”
“사람도 뭐 크게 다르진 않죠.... 아차, 또 사람 이랬네.”
플래너건 공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무시하고 신이 앞서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랬으면 그냥 무시하고 제 둥지로 돌아갔으면 게임 끝이었을 텐데, 저 완고한 용은 하던 말은 제대로 끝내자마자 아득바득 신의 뒤로 따라 붙었다.
“전 안 갑니다!”
“따라오고 계시면서.”
“하던 말을 마저 하기 위해섭니다, 말만 다 끝나면 내가....”
플래너건 공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신이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우(右) 백화점, 좌(左) 명품관이 화려하게 펼쳐진 탓이었다.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신이 마지막 주사위를 건넸다.
“백화점 1층, 보석 명품관, 아니면 박물관.”
“...박물관으로 가죠.”
그냥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됐을 것을.
역시 아이와 동물은 약간 멍청한 게 귀엽다. 신은 빙그레 웃으면서 생각했다. 브림튼양은 플래너건 공이 까다로운 성미라고 했지만 신의 기준에서 플래너건 공은 까다로운 애 축에도 속하지 못하는 순둥이였다.
답지 않게 빙그레 웃는 신을 보고 플래너건 공은 미간을 팍 구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이십 분 후, 플래너건 공은 또 화를 내야만 했다.
“마티스 미술전을 보는 거 아니었습니까?”
“전 그림은 안 반짝거려서 안 봅니다.”
베르메르나 램브란트라면 또 모를까. 그 말에 플래너건 공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아가들’에 혼이 나간 채였다.
달걀 모양의 커다란 스타 사파이어를 침이라도 흘릴 듯이 집요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신이 중얼거렸다. ‘예술이야, 저게 진짜 예술이지.’
“편식하면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 아니었습니까.”
온 세상의 미술학도가 들으면 화판을 들고 달려올 망언을 지껄인 신을 플래너건 공이 꾸짖었다. 물론 미술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사감이 섞인 발언이었다. 바로 어제, 안심보다는 등심이 좋다는 소견을 밝힌 자신에게 신이 편식은 안 된다고 비난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오, 루비다.”
그러나 신은 플래너건 공의 말을 귓등으로도 처듣지 않았다.
“이봐요.”
“와, 왕관이다. 성 에드워드 사파이어에 다랴에 뉘르....”
“당신, 사람 말 안 들립니까.”
“우와, 에메랄드다.”
“.......”
플래너건 공은 KDK단이 주장하는, ‘포악한 용의 특성’이 자기대에 와서 깨어나는 ㄴ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방금 불쑥, 주먹만한 에메랄드를 맴돌며 눈을 번쩍이는 신의 머리통을 확 깨물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 때였다.
“플래너건 공, 이리로 와 보십시오.”
아예 플래너건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던 신이 갑자기 손짓을 했다.
“뭡니까? 지금 와서.”
“이 카나리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라면 지금까지 실컷 봐놓고 왜 새삼...!”
“공의 눈 색깔과 똑같아서요.”
플래너건 공이 입을 딱 다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불쑥 내뱉어 놓고 플래너건 공이 한참을 우물거렸다.
“닮았습니까?”
그래놓고 결국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였다. 그냥 웃어넘기거나 놀릴 수도 있는 반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신도 그러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것에 한한 한 신은 언제나 진지했다.
신은 입사 지원자를 살피는 면접관과 같은 시선으로 옐로우 다이아몬드와 플래너건 공의 눈동자를 번갈아 살핀 후,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다시 보니 완전히 똑같지는 않군요.”
“...역시 그렇습니까.”
“공의 눈에는 동공 주변에 희미하게 녹색이 돌거든요. 공의 눈 색깔과 같은 보석이 있으면 좋을 텐데.”
컬렉션에 녹색이 도는 카나리 다이아몬드를 추가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신이 평소보다 훨씬 더 열정에 찬 태도로 말했다. 덕분에 그는 플래너건 공이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이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플래너건 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신이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자신이 왕국보석 전람회장을 열다섯 바퀴나 돌았건만 저 용이 아직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플래너건 공, 어디 아프십니까?”
돌아본 플래너건 공이 답지 않게 얌전하다는 것과, 그의 파리한 얼굴에 희미하지만 핏기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신이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러나 칼데아 플래너건 공은 얌전히(무려 얌전히!) 대답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하고.
그것에 신이 크게 당황했다.
“저, 제가 너무 무례했었지요.”
반성한 신이 사과했다.
“공과 동행한 주제에, 혼자서만 신이 나서..., 제가 배려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 도서관이나 서점에라도 들르시겠습니까. 지나친 장난에 토라진 강아지에게 육포를 내밀듯 신이 거래를 시도했다. 그러자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플래너건 공이 눈을 깜빡였다.
“도서관?”
“새 책을 사실 거라면 서점으로 가셔도 되고.”
“저, 그럼.”
말해 보란 듯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래너건이 망설이다가 주먹까지 꼭 쥐고 말했다.
“책장, 사도 됩니까?”
의외의 주문에, 신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신이 어이없어 한다고 생각한 건지 플래너건이 굳어진 얼굴로 변명했다. 서재에 책장이 가득 찼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신이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플래너건의 자기변명이 딱 그쳤다. 신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사셔도 됩니다. 새 책을 꽂으려면 새 책장도 필요하지요.”
그 말에 플래너건 공의 낮빛이 확 밝아졌다. 그래서 신은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 걸 왜 자신에게 허락을 받는 거냐고 말해서 플래너건 공을 좌절케 하는 것을 그만 뒀다는 뜻이다.
**
1. 양고기나 돼지고기보다는 쇠고기를 선호한다. 수프는 버섯이나 크림보다는 치킨 수프를 좋아함.
다음에는 채소와 달걀을 삶아 이유식을 만들어 먹여 봐야겠다. 면을 푹 삶아서 약하게 양념을 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밀가루도 잘 먹을까?
2. 근래에는 생활습관도 많이 개선됨.
일주일째 오후 11시에 취침, 기상은 오전 6시. 더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3. 하루에 커피는 최대 한 잔. 하루에 꼭 우유는 한 잔 이상. 홍차는 금지했다.
4. 도서관이나 서점이라면 거부감 없이 나가고 싶어 한다. 대신 사람이 없는 이른 오전을 선호하지만 취향 차일 테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듯.
억지로 데리고 외출하는 것보다는 역시 관심 분야부터 공략을 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덕분에 나는 반짝이는 것에 굶주려 간다. 백화점 1층....
꼼꼼히 수첩을 체크하던 신이 고개를 들었다. 수첩 위에 까만 그림자가 그리워졌기 때문이었다.
“플래너건 공?”
신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아, 간식 시간이군요. 간식은 커스타드 푸딩과 초콜릿 푸딩이 있는데 이 둘 중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신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준비해둔 게 그 두 가지 뿐이라 다른 간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안 되는데.
“저, 플래너건 공. 푸딩도 먹다 보면 나름의 풍미가....”
“그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플래너건 공의 말투가 조금 뾰족해졌다. 그것에 움찔한 신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푸딩을 강요하는 기색이 느껴졌나?) 그 틈을 타 프래너건 공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시선은 신 대신 신의 머리 위에 걸린 램브란트 진품을 향한 채였다.
“지금 한가하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신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닙니다.”
“? 예?”
지금 내가 한가해 보이나? 하지만 한 시간 째 필기를 하고 있는데?
“제가 취미로 수집한 예술품이 몇 점 있습니다. 그 중에 보석도 있는데.”
그러나 이어진 플래너건 공의 말에 신은 머릿속에 가득하던 의혹을 변기 물 내리듯 강제로 쓸어내려 버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짝이는 것! 보석! 무려 용공작 칼데아 플래너건의 수집품! 신의 눈이 번쩍거렸다.
“플래너건 공,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보시다시피 무척 한가한 관계로 무려! 무려, 무료 자원 봉사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일단 귀금속이 있는 개인 박물관을 먼저....”
“오늘 청소부가 다녀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차, 낮잠시간에 청소부가 왔다 갔었지. 신의 얼굴이 급속도로 시들었다.
“이봐요.”
시무룩해진 나머지 수첩도 어디론가 팩 던져버리고 소파 구석에 처박힌 신을 플래너건 공이 난감해하며 부르자 신이 고개만 들어 플래너건을 보았다.
별처럼 반짝이던 눈이 죽은 동태 눈깔로 변해 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변하나 싶어 플래너건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수집품 위치를 바꿔 볼까 하는데 괜찮다면, 아니, 그, 그러니까 당신이 아무래도 밥값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 양심이 있다면 당신이 좀.......”
“일하라고요?”
“바쁘다면 안 하고 그, 구경만 해도 나는 괜찮지만.”
“하겠습니다!”
신이 두 눈에 부릅 힘을 주고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심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플래너건이 말없이 앞장섰다.
신은 플래너건 공의 개인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이 꿈길 내지는 꽃길을 걷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플래너건은 신의 걸음걸이를 보고 생각했다. 심심한 비글만큼이나 촐랑거리는구나....
“크네요. 이 정도면 금화로 산을 쌓아 놓고 헤엄도 칠 수 있겠군요.”
공작가의 개인 박물관을 본 신이 말했다. 못 할 건 없지만 그러면 아플 텐데,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플래너건을 보고 신은 세대차를 느꼈다. 스크루지 오리 아저씨를 모르나.
“거기가 아닙니다.”
회랑 끝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신을 플래너건이 붙잡았다.
“보석관은 이쪽입니다.”
“보석관도 따로 있나요.”
이 정도면 개인 박물관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신이 혀를 내두르며 생각하다가 곧 그럴 만도 하다며 납득했다. 용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보석만 따로 내어 전시실을 만드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브림튼양이 좋아하셔서 몇 개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신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 말은 플래너건 자신은 보석을 모으는 취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고양이가 캣잎 실연 시키는 소리냐.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양이 상당한데요.”
“결혼 선물로 주려고 했었으니까.”
60캐럿짜리 분홍색 다이아몬드 앞에 붙어 서서 개처럼 헥헥거리고 있던 신이 움찔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마치 파혼이라도 한 것처럼 들리잖습니까.”
“곧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애써 웃으며 한 농담에도 묵직한 답이 돌아왔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어쩐지 이유도 없이 먹음직스러운 뼈다귀를 던져준다 싶었더니 이거였나!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전 용기 없습니다.”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은 사양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플래너건 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차, 그건 아니었나?
“요즘 브림튼양과 사이가 별로십니까?”
“특별히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닙니다.”
“그럼?”
“원래부터 사이가 좋고 말고 할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뜻밖의 말에 신이 물끄러미 플래너건 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는 안 보였습니다만.”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것도 그녀의 억지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에게는 빚이 있습니다.”
“빚이요? 이거 하나면 끝날 일 같은데.”
“마음의 빚이요.”
플래너건 공이 신의 손을 찌릿 노려보며 정정했다. 신이 슬그머니 다이아몬드에서 손을 치웠다.
“억지로 제 약혼자가 됐으니까요.”
‘팔려오다시피 했죠.’플래너건의 말에 신은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자면 플래너건의 말도 영 틀린 것은 아니다.
“브림튼양의 집안에는 빚이 있었습니다. 그 액수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갚을 수가 없을 정도라서, 브림튼경은 공작가에서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열 살 난 둘째딸을 제 약혼자로 내어 놓았습니다.”
레이디(lady)란 사실 현대에서는 사멸한 단어다. 그러나 현대에서 특정 여성이나 남성이 ‘레이디’라 불리는 경우가 몇 있는데, 미스 에그니스 브림튼의 경우가 그렇다.
직역하자면 현대에서 ‘레이디’란, 미혼용의 약혼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성숙한 용의 옆에 붙어서 평생 용의 사회화를 돕고, 만약의 경우 용의 첫 번째 희생물 역을 맡은 가정교사겸 희생양.
“그 후로 브림튼양은 자유와 미래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브림튼양의 희생으로 브림튼 가문은 재기에 성공했고, 그녀의 언니와 여동생은 모두 화려하게 날개를 폈지요. 벨스 브림튼과 메리 로스 브림튼이라는 이름은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벨스와 메리 로스라면 쥘리안 왕녀의 전속 디자이너와 케르폴 로펌의 스타 변호사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브림튼양의 여자 형제들이었군요.”
전혀 몰랐다며 신은 혀를 내둘렀다.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브림튼양은 가문과 인연을 끊었으니까요.”
“저라도 그러겠군요.”
라고 대답했다가 다음 순간 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잠깐만, 그럼.
“그럼 브림튼양은 어디에서 사는 겁니까?”
“랑리뱅 7번가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는데, 저도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한 번도 가보신 것이 없나요?”
그 말에 플래너건 공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콧잔등을 찡그린 신이 뒷머리를 긁으며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플래너건 공에 대한 브림튼양의 표현이나 말투가 퍽 친근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때는 예의를 차리려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곧, 브림튼양을 놓아줄까 합니다.”
“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머리 뒤에서 우르릉 쾅쾅 천둥이 쳤다. 엄마, 지금 쟤가 뭐래?
“파혼하겠습니다.”
“아니, 이 보석은요? 아니다, 이게 아니지, 그럼 빚은요?”
“브림튼가에 빌려준 돈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보석들은 위자료로 그녀에게....”
“당신 바봅니까?”
신이 버럭 화를 냈다.
“자선 사업을 하려면 차라리 나한테 돈을 줘요! 주식 투자로 화려하게 날려 줄 테니까!”
“아니, 당신이 주식투자에 실패한 걸 왜 내게.”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괜히 퍼주기만 하고 손해 보는 짓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플래너건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신이 어느 순간 푹 하고 한숨을 쉬었다.
“고집 세다는 말 많이 듣지 않습니까?”
“처음 듣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과 이렇게까지 어울린 건 당신이 처음이라서.”
그 순순한 대꾸에 신은 할 말을 잃고 허물어졌다.
다이아몬드를 덮은 유리관 위에 볼을 대고 으으으으, 이상한 신음만 흘리는 신의 등을 플래너건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툭툭 쳤다. 어디 아픕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방으로 가서 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다 보지도 못했는데.”
신이 순식간에 정색하고 대꾸했다. 그 기묘한 기세에 눌린 플래너건이 주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다이아몬드에 볼을 비비고 싶은 마음을 참고 유리관에 잔뜩 지문을 묻힌 신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사도닉스, 블러드스톤, 마노등의 옥수(玉髓)가 잔뜩 박힌 팔찌로 게걸음질 쳤다.
“전 서재에 가 있겠습니다.”
유리관 위에 눈을 거의 붙이다시피 하고 있는 신의 뒤에 계속 멀뚱하게 서 있는 것도 면구스러워서 플래너건이 말하자, 신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안 지키고 계시면 제가 공의 수집품을 모두 들고 튀어버릴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으십니까?”
“안 할 거잖습니까.”
그제야 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부정한 일은 싫어 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억지로 제게 빚을 지게 만들어서 보수로 보석을 요구했으면 요구했지. 플래너건이 덧붙인 말에 신이 씩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옥석(玉石)을 가려 드릴 테니까.”
신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이 보석은 당분간 여기를 떠날 일이 없을 겁니다.”
뭐? 뜻밖의 말에 플래너건이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
“폰드?”
신이 박물관, 정확히는 보석관에서 나온 것은 해가 진 다음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활과 같구나....... 신이 생각하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휘적휘적 걷고 있으려니 어두워진 정원에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정원사 폰드였다.
신은 반가운 낯을 하고 물었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예, 공작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아직?”
자신이 지금까지 보석관에 오븐 위의 떡처럼 눌러 붙어 있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망각한 신이 혀를 내둘렀다.
폰드가 겉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충고했다.
“그러다가 몸 상하실까봐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하긴.”
이만 가서 끌고 나와야겠다며 신이 두 팔을 걷어 붙였다. 배가 고픈 것을 보니 식사 시간이었다.
“플래너건 공.”
서재 문을 열어도 책에 코를 파묻다시피 한 플래너건 공은 눈치채지 못했다.
신은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제야 플래너건 공이 고개를 든다.
“다 보셨습니까?”
“구경은 초저녁에 끝냈습니다.”
침도 안 바른 입으로 신이 거짓부렁을 지껄였다.
“그런데 공은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날 때까지 뭐하시는 겁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시간을 보고 조금 놀란 플래너건 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린 겁니까? 미안합니다.”
“아니, 그렇게 서둘러서 가지 않아도 됩니다만.”
플래너건 공의 눈이 슥 가늘어졌다. 찔끔한 신이 눈동자를 또르르 옆으로 굴렸다.
“거짓말 했습니까?”
“식사 시간이 지난 건 사실입니다.”
“식사 준비를 해놓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공께서 직접 해보지 않으셔서 모르시나 본데 식사 준비는 금방됩니다, 금방.”
이 말을 보통 사람들이 어머니께 했으면 냄비로 머리를 맞았겠지만.
“그런데 당신은 대체 뭘 먹는 겁니까?”
두 사람이 복도로 막 나갔을 때 플래너건 공이 문득 생각났단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이슬을 먹고 산답니다.”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않는 주제에.”
플래너건 공이 비난했다. 신이 으음, 하고 난감한 듯 신음하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적당히 챙겨 먹습니다, 진짜요.”
“적당히는 뭡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플래너건이 파고들었다.
“그래 놓고, 제게는 잘도 참견을 했군요.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저도 끼니를 거르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누가 그런 말을 했다고!”
플래너건 공이 펄펄 날뛰었지만 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칼데아 플래너건과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고 뒹군 지가 무려 열흘, 이제 신은 플래너건 어(語)에 충분히 능숙해져 있었다.
“난 당신을 걱정한 게 아닙니다!”
“저녁은 쇠고기가 좋을까요, 아니면 닭이 좋을까요?”
“......소?”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는데 이렇게 금방 미끼를 물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역시 걱정한 것이 맞는 모양이다.
어째 좀 희한한 기분이군.
신은 어쩐지 가슴 속이 말랑말랑 간질간질해져서 괜히 귀 뒤를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신은 불현듯 자신이 플래너건에게 할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말을 꺼냈다.
“그렇데, 식사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때였다.
쾅!
“?!”
“위험합니다!”
신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졌다. 확 열기가 느껴졌다. 놀란 신이 발끝을 움찔한 그 순간. 플래너건이 달려들어 신을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윽! 플래너건의 몸에 깔린 신이 묵직한 무게감에 신음하며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가, 다음 순간 눈을 흡떴다.
신이 무심코 플래너건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서재가!”
서재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
“브림튼양께서 바로 보신 것이 맞군요.”
팔뚝에 감은 붕대를 마감한 신이 다음으로 등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플래너건은 아직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신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제게는 거짓말을 하셨군요, 플래너건 공.”
“......이 정도로 심한 테러는 없었습니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롤 플래너건이 대답했다. 그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신이 괜히 혀만 끌끌 찼다. 상처에 약을 다 바른 신이 일어났다.
“경찰에 신고해야겠습니다.”
“잠시만.”
“하지 말라고요?”
신이 팍 인상을 구겼다.
“서재가 저렇게 박살이 났는데도? 자그마치 폭탄까지 등장했는데 뭐가 잠시만입니까. ...사실은 개가 독을 먹고 죽었다고 했을 때 바로 신고를 했어야 했는데.”
“하고 싶지 않습니다.”
플래너건 공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신이 정색을 하고 노려봤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용은 웬만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가 막혀서. 그래서 둥지에 틀어박혀서 온갖 테러를 감수하겠다는 겁니까?”
“칼로 찔러도, 총을 쏴도 저는 죽지 않습니다. 아까 그 폭탄을 정면으로 맞았어도 아마.......”
“하지만 상처는 입습니다.”
신이 플래너건의 말허리를 잘랐다.
“당신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죽지 않았을 거라고요? 당장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다음은 저도 보장 못합니다. 당신 성격이라면 병원에도 가지 않고 둥지에서 끙끙거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잇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까지 미련하지는 않습니다.”
“잘도!”
신이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그런데, 그렇게 받아 치면서도 플래너건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플래너건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씩씩거리는 신을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관찰할 뿐이었다.
신이 불퉁하게 내뱉었다.
“뭐가 신기합니까?”
“저를 걱정해서 화를 내주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예?”
“사람들은 저를 미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둘 중 하나니까.”
신은 할 말을 잃었다. 서툴지만 순수한 호의가 느껴졌다. 때문에 저절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죄책감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신의 정수리를 플래너건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신의 어두운 낯빛을 본 플래너건의 얼굴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플래너건이 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일어났다. 신이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자 플래너건이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가까워지는 건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안 좋은 일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여기서 나가 주십시오.”
“플래너건 공!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압니다.”
대답한 플래너건이 잠시 후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습니까.”
**
-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
사실이다. 사실이지.
“시너? 얼굴이 왜 그래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빈정이 상할까.
“시너? 내 말 안 들려요?”
“아, 브림튼양. 언제 오셨습니까.”
신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브림튼양이 한숨을 쉬며 신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왠지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브림튼양이 어깨를 흔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브림튼양이 신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 못 잤어요? 자기 다크써클 생긴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못 잤습니다. 한 밤 중에 둥지에서 쫓겨나서.”
“둥지?”
브림튼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이 고쳐서 말했다. ‘공작 저택 말입니다.’그렇게 말하자 브림튼양이 픽 웃었다. ‘플래너건 공처럼 말하네요, 자기.’
“그런데 쫓겨낫다니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신은 대답하는 대신 한숨을 쉬며 주위를 살폈다. 눈치 빠른 브림튼양이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 수업 빠져도 괜찮은데, 나갈까요?’
모범생인 브림튼양과는 달리 아침잠이 많은 신은 F로의 길이 코앞까지 닥쳐 있었지만 선뜻 브림튼양을 따라 강의실을 나갔다. 그녀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의외네요. 플래너건 공이 뭔가 크게 잘못했나요?”
“아뇨, 쫓겨났다니까요.”
커피를 넘겨주던 브림튼양의 손이 움찔했다.
중간에서 멈춘 그녀의 손에서 커피를 빼오면서 신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하늘이 유난히 흐리다 했더니 역시나 나풀나풀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쫓아낸다고 쫓겨날 사람이에요?”
“그건 그런데, 너무 정색을 하니까 더 버틸 수도 없더군요.”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봐요.”
“테러가 있었죠. 서재가 다 불탔습니다. 불은 금방 껐지만. 폭탄이었어요.”
브린튼양이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테러?!’
“버, 범인은 잡았나요?”
그렇게 말하는 브림튼양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브림튼양이 갑자기 커피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지금 그 애를 혼자 두고 나왔다고요?! 미쳤어요, 당신?!”
“미쳤다니요. 말이 너무 심하시군요, 브림튼양.”
“근처에 아직 범인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브림튼양이 멈칫했다. 신의 태도가 너무 냉정했기 때문이었다. 낭패라는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기도하듯이 콱 두 손을 맞잡은 그녀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당신은, 걱정도 안 돼요?”
“제가 왜요? 그의 ‘레이디’인 당신도 그를 방치하고 있는데 생판 남인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일순 말문이 막힌 듯 브림튼양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응시하던 신이 불현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당신 속을 모르겠군요....... 그를 싫어한 것 아니었습니까?”
“싫어하다뇨?”
“그에게 들었습니다. 당신과 그의 사이가 어땠었는지.”
잠시 브림튼양은 말이 없었다. ‘그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유감이었습니다.’ 신이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집안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눈발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그 때였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헤어질 준비를 하고 계셨잖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깝지 않던 거리를 더더욱 벌리고, 당신 대신에 정 붙일 사람을 준비하고.”
그렇게 말하는 신의 눈매가 싸늘했다.
“그런데,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하고 대체품으로 밀어 붙여진 사람 입장에서는 참 불쾌하더군요.”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속였다는 겁니까?”
“아니요.”
브림튼양이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녀는 조금 지친 것처럼 보였다.
“내 속셈을 알아도 결국은 그 애에게 정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이 갑자기 웃었다.
“결국 제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이군요.”
“미안해요.”
“뼛속까지 귀족이군. 브림튼양, 당신이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었다고 해서 당신에게 남을 희생시킬 자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다신을 주춧돌 삼아 날아오른 가족들 날개나 잡아서 바닥에 패대기 쳐버려요.”
자신을 비난하는 말인데도 어투가 너무 익살스러워서 브림튼양은 푹 웃어버렸다. 덕분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말랑해졌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군. 신이 얇게 쌓인 눈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정정하지요. 아까 한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정말 걱정이 안 돼서 당신에게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제가 위험하다고 만류하니까, 그가 그러더군요. 너와는 상관없는 말 아니냐고.”
“그래서 욱해서 저택을 나왔다는 건가요?”
“약간은.......”
신이 인정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열심히 육아 수첩을 썼는데.’ 턱을 괴고 앉은 신이 푹 한숨을 쉬었다. ‘육아 수첩이요?’하고 묻는 브림튼양에게 신이 네모난 수첩을 내밀었다. 안을 대충 훑어본 브림튼양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건강에 심각하게 악영향이 갈 정도로 식생활이 엉망이더군요.”
“그래서 직접 식사 담당도 하셨다고요?”
‘뭐, 밥값도 할 겸 겸사겸사.’ 신이 진짜 이유는 숨기고 대충 둘러댔다. 수첩을 덮으며 브림튼양이 말했다. ‘그런데 용에 대해 잘 아시네요.’
그냥 흘리는 듯한 말인 것 같아서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용이라도 어리면 약한가 봐요.”
“사실 조미료나 카페인 정도로 금이 갈 정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도 용이니까.”
브림튼양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한 말이랑 조금 다른데, 싶었던 것이다. 그런 브림튼양을 신도 마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던 중, 먼저 물은 것은 브림튼양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신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수첩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봐야겠습니다.”
“갑자기 어디로요?”
“용공작님 둥지로요.”
“네?”
브림튼양은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신이 플래너건 공에게 가 준다면 자신으로서도 안심이기는 했지만 맥락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그 때 신이 불쑥 말했다.
“당신이 범인이 아닌 것을 확인 했으니까요.”
“범인?”
그 말에 브림튼양이 펄쩍 뛰어올랐다.
“날 의심했던 거예요, 자기?”
“네.”
신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정황상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브림튼양이었고요.”
“내가 왜요!”
“자유로워지려고요.”
브림튼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용의 약혼자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음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되지도 않는 이유로 저를 호위랍시고 플래너건 공에게 붙여 놓은 것도 이상했고.”
“하지만 전.......”
“압니다.”
신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당신, 감이 좋더군요. 헛소리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습니다.”
신이 치는 무성의한 박수 소리에 브림튼양이 퍼드득 몸을 떨면서 제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하며 신에게 달려들었다.
“시너! 그럼 용의자 중 나머지 한 명은 누구죠?”
“쉿.”
신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고 낮은 숨소리를 냈다. 브림튼양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왜인지 더 이상 참견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죽인 그녀를 보며 신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부터 포획해 올 테니 기다리십시오.”
**
칼데아 플래너건은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이래서 사람이 싫어. 평소보다 더 넓어 보이는 방을 둘러보고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내내 잠을 자지 못해서 머리가 멍하고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커피, 하고 무심코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커피는 벌써 한 잔 마셨다. 하루에 커피는 한 잔 이하로.......
“그게 아니잖아.”
플래너건은 짜증을 냈다. 뭐가 커피는 하루에 한 잔 이하냐. 이제 커피를 에스프레소 머신째로 씹어 먹어도 잔소리를 할 사람은 없는데.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 플래너건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할 일도 없이 응접실을 몇 번이고 서성거려 봐도 한 번 머리에 오른 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긴 이깟 게 무슨 기분 전환이 된다고, 자신의 행동에 빈정거리다가 곧바로 그가 시무룩해했다.
하지만 그는 탁자나 도자기 같이 둥그런 것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곤 한다고 했었다.......
“더 잘 해줄걸.......”
플래너건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화만 냈다. 그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버릇없이 빈정거리고, 그가 하는 말 한 마디에 따박따박 얄미운 말대답만 했다.
나 같은 놈, 싫었겠지, 그 사람.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진절머리가 났을 거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러니까.
날 싫어하겠지. 이제는 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이 눈동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상처를 입은 것이 조금은 기뻤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던 것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정말로 저질이다.
“나가자.”
플래너건은 결정했다. 둥지 안에 있으면 계속 그 생각이 나서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자 복도까지 싸락눈이 들어와 있었다. 바람이 거센 모양이었다. 눈발이 어느 정도로 굵은가 싶어 고개를 내밀자 싫어도 불에 탄 서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달라졌다. 그를 내보낸 것은 잘한 일이었다. 용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인간인 그가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위험했다.
“미스터 폰드.”
플래너건은 정원사 폰드를 불렀다.
“눈이 쌓일 것 같습니까?”
“밖으로 나가시겠습니까? 눈발이 굵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내리는 눈을 유심히 살펴본 후 폰드가 대답했다.
“어디로 갈까요?”
폰드의 물음에, 플래너건이 잠시 멈칫했다. 무작정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행선지 따위는 정하지도 않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플래너건은 말했다. ‘파르비스 도서관으로 가주십시오.’ 파르비스 도서관은 신과 자주 돌아다녔던 곳이라 찾아가기가 꺼려졌지만 서재가 불타는 바람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불타 한 번쯤은 찾아가 봐야 했다.
정원사 폰드가 곧 차를 준비했고, 플래너건은 능숙하게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원사 겸 운전사로 폰드를 고용한 것도 무색하게, 일 년에 두 어 번, 그것도 하는 수 없이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었는데 어느새 차를 타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것도 다 그 사람 때문이다.
“.......”
또인가.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해 놓고 또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가 플래너건은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날시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세상은 마치 잿물에 침수되어 버린 것 같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말도 없이 달릴 때였다.
“플래너건 공.”
불현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플래너건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차가 멈춰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미스터 폰드?”
무심코 주위를 돌아본 플래너건은 당황했다. 어느새 자신이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차를 세운 폰드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시퍼런 날이 선 칼과, 다른 한 손에는 정체 모를 가루가 든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폰드가 말했다.
“용을 죽이는 법을 아십니까? 목을 자르고 거기에 재를 뿌리면 됩니다.”
**
챙그랑!
자동차 앞 유리가 산산이 깨졌다. 그 조각을 고스란히 등으로 받은 폰드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플래너건 공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거의 저문 해를 등진 인영(人影)이 한 손에 무시무시한 흉기를 들고 있었다.
“신?!”
“서양협죽도, 델피니움, 대황, 서향, 금사슬나무, 월계수, 주목, 오크, 까마중, 흰독말풀, 투구꽁, 금낭화.”
신이 쇠파이프로 아직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유리를 툭툭쳤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가 떨어져 폰드의 등을 찔렀다.
“이게 뭔지 알지요, 폰드? 다 치명적인 독이 있거나 과량 섭취시 장기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입니다. 겉모습이 아름다워서 종종 관상수로 쓰는 식물이지만 한 정원에 이런 것들만 모여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벌컥. 자동차 문이 열렸다. 아니, 지그러져 있던 문이 뜯겨져 나갔다. 신이 쓰러져 있는 폰드를 억지로 끄집어내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 중 몇몇은 이 지방에서 보기도 힘들고, 재배도 힘들었을 텐데 고생 좀 했겠습니다.”
“무, 무슨 말을.”
“플래너건 공이 기르던 개를 죽인 것도 당신이죠? 처음에는 초콜릿인가 했는데, 초콜릿이 든 음식을 플래너건 공이 개가 먹게 둘 리가 없지요. 금낭홥니까, 로자리콩입니까? 아,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나?”
“시너!”
멀리서 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브림튼양이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혼자 두고 가면 어떻게 해요? 그녀가 신을 타박하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폰드?”
“이 사람이 범인입니다.”
“폰드가요?!”
깜짝 놀란 브림튼양이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플래너건 공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거든요. 어린 용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체에 비교했을 때 이야기고, 용의 신체는 인간에 비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플래너건 공은 건강이 몹시 상해있더란 말이지요. 아마 지속적으로 독을 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독이라니, 저는 그런 건.”
몇 년 간이나 공작가 정원을 가꿔 온 폰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신의 등장에 놀라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에그니스 브림튼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플래너건이 변명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양이었다면 당신이 독을 먹었을 리가 없지요.”
“그럼?”
“음식입니다. 그리고 차. 당신 정원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들 중 열매나 나무, 혹은 잎에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나무가 너무 많더군요. 그래서 당신 몸이 그렇게 망가지고, 공께서 기르시던 개도 죽은 겁니다.”
충격을 받은 플래너건 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신에게 얻어맞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폰드가 신음을 내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신에게서 멀어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신이 놓칠 리가 없었다. 신이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재를 뿌린 것도 당신이었지요? 당신 실수했습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이 일에 기어들 일은 없었을 텐데. 위협이랍시고 재를 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재라니요?”
브림튼양이 물었다.
“용 사냥꾼들이 용을 죽일 때 쓴 것이 재입니다. 즉, 재를 뿌렸다는 건 플래너건 주변에 있는 테러번이 용을 죽이는 방법을 어설프게나마 안다는 소리지요.”
“폭탄을 던진 건.”
“저를 내쫓기 위해서겠죠. 아니면 죽이거나. 저 때문에 플래너건 공의 식사에 독을 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못 박힌 채 서 있던 플래너건 공이 끼어든 것은 그 때였다.
“폭탄을 던진 것이 폰드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을 죽이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플래너건 공!”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신이 고함을 질렀다. 플래너건이 갑자기 자신의 손에서 폰드를 빼앗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기 때문이었다.
퍽!
“헉!”
“플래너건 공!”
브림튼양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플래너건 공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플래너건이 폰드의 뒤통수를 힘껏 짓밟았다.
폰드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에 플래너건 공의 눈이 더욱더 시뻘게졌다.
플래너건 공이 속삭였다.
“죽일까요?”
“하지 말아요. 플래너건 공! 곧 경찰이 올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손을 더럽히지 말아요!”
“왜 참아야 합니까?!”
브림튼양이 움찔해서 뒷걸음질 쳤다. 플래너건이 계속해서 노성을 질렀다.
“왜 제가 참아야 합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만이라면 어떻게든 감수하려고 했습니다! 다들 절 미워했으니까! 하지만 이자는 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려고 했어요! 이런데도, 이 자가 살아 있을 가치가 있습니까?!”
“용은 사악한 존재다!”
그 때 폰드가 소리쳤다.
“용은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야 해! 언젠가 용이 세상을 멸망시킬거야! 인간을 죽이고 먹을 거라고! 용은 그런 놈들이니까! 에그니스 브림튼! 당신은 어째서 저 용의 편을 드는 거지! 당신도 저 용 때문에 인생을 송두리째 희생당했잖아! 당신도 저 용을 죽이고 싶은 거 아냐? 그렇잖아!”
“무, 무슨.”
브림튼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것에 폰드는 확신을 얻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폭탄을 던진 것도, 재를 뿌린 것도 내가 맞아! 하지만 난 봤어! 돌을 던져서 창문을 깬 건 당신이었어!”
“맞습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신의 목소리가 폰드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당신과는 정 반대의 이유였었죠. 그녀는 플래너건 공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플래너건 공이 정부에 보호를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거짓말 하지 마라! 에그니스 브림튼은 플래너건을 싫어했어! 그녀가 공작가 저택에 제 발로 찾아오는 걸 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브림튼양이 싫어한 것은 플래너건 공 자체가 아니라 그의 약혼자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그것을 착각하면 곤란하죠, 폰드.”
딱 잘라 말한 신이, 플래너건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끌었다.
“자아, 플래너건 공. 놓으시지요.”
“싫습니다. 저 자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안 죽지 않았습니까. 그럼 된 거죠.”
“된 게 아닙니다!”
플래너건의 목소리가 커졌다. 신이 움찔했다. 플래너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나 혼자라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난 상관있는데요.”
신이 한숨을 쉬었다.
“난 당신이 죽고 다치는데 이의가 많습니다. 총알처럼 구해주러 왔더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시너.”
브림튼양이 속삭였다. ‘경찰이 와요.’
신이 움직이지 않는 플래너건의 팔을 당기는 대신,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콱 얽히는 기분에 플래너건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틈을 타 신이 그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당신이 과잉방어로 기소되는 것도 전 싫거든요.”
브림튼양이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여기예요, 형사님들! KDK단이 있어요!’
**
세 사람은 둥그런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플래너건 공은 딱딱한 의자가 몹시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브림튼과 플래너건, 그리고 신 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방은 깔끔하지만 대단히 좁고 허름했다. 새로 바른 듯한 벽지는 아직 새하얗고 방 여기저기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가리지 못한 가난의 냄새가 방 안에 떠도는 듯 했다.
이곳은 브림튼양의 집이었다.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방이죠. 방 하나에 화장실, 부엌이 딸린 곳이니까.”
“왜 이런 곳에 사시는 겁니까? 브림튼양이라면 공작가에서 충분히 원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거절했어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그녀가 플래너건 공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미안해요, 플래너건 공. 나는 처음부터 언젠가 때가 오면 당신과 파혼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늘 데면데면하게 대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정을 줘봐야 서로에게 좋을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잘못 생각했어요.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당신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브림튼양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좁은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브림튼양이 몸을 일으켰다.
“차라도 내올게요. 입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신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브림튼양. 내가 용(龍)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
“!”
브림튼양과 플래너건 공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용?’ 플래너건 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브림튼양이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용?’ 풀썩 주저앉아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림튼양을 보고 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당신 용이었어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인간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그 때, 플래너건 공에게 말했던 그 목격담은 과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냥 다른 이종족인 줄만,”
플래너건이 끼어들었다.
“용이라고요? 저와 같은? 당신이?”
“공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적당한 표현을 찾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당신은 서양용(Dragon)이고 저는 동양용(龍)이거든요. 왜, 예전에 한국계라고 했잖습니까. 음, 더 정확히는 수룡(水龍)이라고 해야 할까.... 서양용처럼 동양용도 종류가 있으니까요. 저를 처음 봤을 때 당신이 저를 보고 불쾌감을 느낀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서양용과 동양용은 상성이 안 좋거든요.”
“동양용? 그런데 왜 여기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려고 배낭여행을 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죠.”
브림튼양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용의 생태에 대해서 잘 알았던 거구나.
“서양용들은 예전에 멸종되었다가 마지막 남은 알이 인공 부화되어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동양용들은 아직도 꽤나 개체수가 남아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음, 아마 동양용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을 겁니다.”
“용이었다고.......”
신이 힐끔 플래너건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눈이 풀린 풀래너건 공이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은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일단, ...속여서 미안합니다. 일부러 속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걱정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는 편이 좋았을 텐데.”
“부성애였습니까?”
“네?”
“책에서, 용은 부성애가 강하다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부성애를 느꼈다고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신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가리키기까지 하면서 물었다.
‘그런 것 아닙니까?’플래너건이 반문했다. 그렇게 되묻는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꽉 쥐어서 시뻘겋게 변한 주먹과 반대로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얗게 변한 얼굴을 번갈아 보고 신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당신 쪽은 어떻습니까. 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어느 정도 저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브림튼양이 살그머니 방을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곧 방문이 닫혔다.
“저 말입니까?”
“네, 당신 말입니다. 사실 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아닌 것 같더군요. 아니, 오히려.”
“잠깐만.”
플래너건이 신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플래너건의 온 몸이 시뻘겋게 물든 것이 보였다. 신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글께, 어떻까.......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부성애는 확실히 아닙니다. 그리고 그 책은 서재에서 치우는 게 낫겠습니다. 동양용에게 부성애라니, 제가 근래에 들은 이야기 중 제일 웃긴 이야기군요.”
“아닙니까?”
“아닙니다. 동양용은 서양용과는 달리 처음부터 용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변태(變態)하는 거죠. 뱀이나, 도마뱀이나 붕어나, 혹은 가물치나 뭐 그런 종류가요. 그러니 어린 동양용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상상의 동물에게 어떻게 부성애를 가진단 말입니까.”
“그, 그럼 당신은 까마귀였습니까?”
신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건 용의 본능이고요.”
신이 이마를 손에 짚으며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것에 큰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플래너건은 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내게 부성애를 느끼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요. ...그런데 왜 웃습니까?”
플래너건이 깜짝 놀랐다. 제가 웃었다고 하셨습니까?
“웃었잖습니까. 입술이 이렇-게 올라갔었는데.”
플래너건을 놀려 먹으려는 의도로 신이 말했지만 플래너건은 더 이상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다짜고짜 플래너건이 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신이 펄쩍 뛰어 오를 정도로 놀랐다.
“뭡니까!”
“브림튼양과는 곧 파혼할 겁니다. 그녀도 원하고 저도 그것을 원합니다.”
“브림튼양을 좋아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브림튼양이 내 진짜 가족이 되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그녀에게 연정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
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말.......
“저를 좋아한다고요?!”
잠시 후 플래너건의 말뜻을 알아챈 신이 꽥 소리를 질렀다.
“당신 발정깁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신의 저렴한 언사에 플래너건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확 내고는 황급히 덧붙였다.
“사실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건지.”
“그럼 왜.”
“하지만 당신이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저 밖에 눈에 안 들어온다 그겁니까?”
조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더니 플래너건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먼저 빈정거린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플래너건이 너무 빨리 고개를 젓는 것에 신은 조금 마음이 상했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당신이 눈앞에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귓가가 확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 외에는 모든 것이 흐릿합니다. 당신 외에는 아무런 색도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 나중에 당신 밖에 눈에 안 들어오게 되면 그 때 다시 청혼하도록 하겠으니 그 때까지만 제 옆에 계셔 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 빌어먹을.......”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신이 신음했다. 머리를 감싼 손등이 붉은 물이 떨어질 것처럼 시뻘겋다.
“신.”
“.......”
“신. 일단은 동정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신이 고개도 들지 않고 우물거렸다.
“자존심도 없습니까? 이런 성격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예전이 좋으십니까. 그럼 일단 제 옆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나중에.”
보기 드물게 강한 어투에 플래너건이 일단 입을 다물었다. 신이 툭 내뱉었다.
“나중에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면 죽일 겁니다.”
플래너건의 눈이 커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대답.”
“절대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보석관에 있는 보석 중 두 어 개만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요청에 플래너건이 눈을 껌뻑거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 보석들은 이미 주인이 있었다.
“그 보석들은 브림튼양과 파혼한 후 위자료로 지급할 겁니다. 당신은 제게 피해를 모두 감수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건 제가 피해를 감수한 게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껏 웅크려 짓밟히기만 했으니, 자유를 되찾은 그녀에게 축복의 의미로 도약대를 마련해 주려는 겁니다.”
애정과는 다른 감정이지만, 제게 그녀가 그렇듯 그녀에게 있어 가족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저일 테니까요.
그렇게 기특한 말을 하는데 그래도 역시 아깝다며 배를 붙잡고 뒹굴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신이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는데, 플래너건이 어조를 바꾸어 입을 열었다. 진지한 것을 넘어서 거의 엄숙하기까지 하던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풋풋하고, 또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였다.
“대신, 당신께는 다른 보석을 드리겠습니다. 보석관의 모든 보석을 합쳐도 살 수 없는 보석을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퍼뜩 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인도에서 캔 118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예전에 제 눈 색깔과 같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
아. 신은 무릎을 쳤다. 그 다이아몬드, 카나리(Canary: 옐로우)다이아몬드였구나.
“그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나중에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저보고 새 레이디가 되어 달란 말입니까.”
남자 용에 남자 레이디에, 또 새 레이디가 인간이 아니라 용이라니, 국가 입장에서 보면 이거 완전 사기극이군.
그러나 그런 딴지를 걸기에는 플래너건의 눈이 너무나 반짝거렸다.
“좋습니다. 그런데.”
좋습니다, 하고 말한 순간 확 화색이 돈 플래너건의 얼굴이 곧바로 이어진 ‘그런데’에 다시 칙칙해졌다.
그런 플래너건의 이마를 톡톡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며 신이 말했다.
“그런데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사실 보석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보석을 먹거든요.”
식량? 플래너건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
“그런데 그것도 먹어도 되는 겁니까?”
잠시 생각한 플래너거너이 푹 한숨을 쉬었다.
“나눠서 연마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다 먹으면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신의 귀에 플래너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당신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때 쓸 보석에는 당신 이름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만, 원래는 어떤 동물이셨습니까?”
“......그냥 당신 이름을 붙이죠.”
차마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에 ‘개구리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을 붙일 엄두는 나지 않아서 신이 말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