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여기가 어딘가, 생각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우선 어두컴컴한 땅과 벽, 그리고 우거져 있는 나무들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정녕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두 눈을 여러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럼에도 장소의 어느 곳도 눈에 익지 않았다.
저어멀리에 인가가 모여 있는지 작은 불빛들이 포도송이처럼 모여 뭉쳐있었다. 등줄기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절로 등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비를 맞고, 얻어맞고, 여관에서 눈을 뜬 이후 여기까지 올 때까지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게 기억났다.
여관에서 침상에 눕혀지기 전에 옷과 몸에 묻은 물을 대충이나마 닦아내고 새로운 천을 밑에 깔아준 것 같지만, 아예 새로 옷을 갈아입은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축축한 곳이 남아 있었다. 비가 온 다음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간 가을밤의 냉기가 등과 다리를 타고 스물스물 연서강의 몸을 오르고 있었다.
차가웠다.
허나 그만큼 몸 전체가 뜨거웠다. 비를 오래 맞아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자고 몸이 연서강의 정신에게 애원하고 있었지만, 연서강은 멍하게 있었다. 도통 몸을 움직일 의지가 들지 않았다.
그나마 전옥관에서 막 나올 때가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래도 새로 생긴 다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힘 정도는 남아 있었다. 허나 지금은 생각조차도 하기가 싫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되새김질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던 연서강은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갈만한 곳이 여기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연서강은 차가워진 제 팔목과 그에 이어진 팔을 쓸며 다시 무릎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팔과 팔목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어찌 해야 할까.
고뇌하니 참으로 막막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뭘 어찌 할 게 남아 있는가, 싶었다. 이제 ‘끝’이 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이 나고 자신은 이제 녹우당에서 지내면 될 일이 아닌가. ‘끝’이 났으니까. 이제 더 이상 힘을 내고 뭔가를 생각하고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나, 연서강은 물기어린 숨을 들이마셨다.
안 된다. 안 되는 것이다.
녹우당으로 돌아가 숨을 죽이고 있어도 아버님께서 나를 죽이실 것이다. 틀림없었다.
연서강은 자신을 차디차게 바라보았던 연무의를 떠올렸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그 눈이 연서강에게 묻고 있었다. 어찌하여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을 시작으로 연서강의 눈앞에 환영이 보였다. 새까만 땅 위로 연무의의 모습이 아로새겨졌다. 그는 턱을 쓸며 ‘어찌한다.’하고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어찌한다. 연서강이 변방에서 공을 세웠지 않은가. 비서랑에 오르지 않았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아로새겨놓더니, 이제는 황후마마께옵서도 연서강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 어찌한다. 연서강을 후에 처치하고도 뒤탈이 없으려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고뇌하는 연무의의 환영을 보며 연서강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버님을 죽여야 하나. 허나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니 그런 자신의 생각이 소름이 끼쳐 저어되었다. 새삼 연무의를 향한 애정이 싹튼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로 알고 있던 자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무서워서였다.
더욱이 아버님을 죽였을 때, 그 후탈을 자신이 어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벌린 일들 중에서 그 영향이 오지 않고 깔끔하게 끝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변방에서도, 비서랑을 맡으면서도, 연후정을 뒤졌을 때도, 계획을 짜고 아이를 이용해 거승주를 죽였을 때까지도.
연서강은 이제 더 이상 뭔가를 하는 게 두려웠다. 더 이상 뭔가를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기억해냈다. 황제와 황후, 황태후에 관련된 사실들로 그것은 자신이 속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도 엄청나고 묵직한 것들이었다. 자칫하면 하나둘의 목숨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궐내의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허면 이 엄청난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황태후가 진정한 흑막이라고. 알리지 않으면 더 많은 다툼이 황태후의 생각대로 일어날 것이고, 결국 황태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을 독살시키려고 했다는 오해를 껴안고 있는 다툼이었다. 언젠가 한 번 어느 한쪽이 크게 숙청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젠가 죽을 때까지 황제와 황후의 다툼에 연루되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지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연서강은 상상만으로 질렸다. 이번 늦봄에서부터 가을까지 일어난 일도 그에게는 충분히 괴로운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앞날이라니, 그런 앞날은 차라리 오지 않은 편이 나았다.
자신은 그런 미래를 위해서 이제까지 고군분투한 게 전혀 아니다. 더 아늑하고 평온해질 미래를 위해 힘쓴 것이지, 결코 지금처럼 같이 살고 싶어서 애쓴 게 아니다. 다만 목숨만 더 연장되었을 뿐인 미래는.
언제 어디서 일이 틀어지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주변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연서강이 발을 들이민 이곳 궐내는 변방보다 훨씬 더 한 전쟁터였다.
끝이 없다.
의진 형님의 말이 맞았다. 여기는 진흙탕이며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이밀어선 안 되었다. 한 번 발을 들이미니까 멈추는 일 없이 죽죽 진흙 속으로 몸이 서서히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많이 알면 아는 대로 그 쪽의 사정에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대체 자신은 어찌 해야 하는가.
생각은 다시 집안의 것으로 돌아왔다. 딱히 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당장 무진 형님의 손에 죽을 뻔 했었다. 무강 형님이라면 모를까, 그 무진 형님이. 함께 술도 나눠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자신의 앞에서 웃었던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해칠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란 걸 연서강은 알게 되었다. 비참한 깨달음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쓸모가 있어져서 사람들의 호의를 받아도, 자신보다 권위가 있고 강한 사람의 명령에 의해 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상념들이 빙글빙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았다.
전부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것이라 연서강은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달달달 몸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으나 연서강은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집으로도, 궐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도 ‘죽음’이 가까이 있는 곳으로 보여 안심이 되지 않았다.
비로소 연서강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도성을 에워싼 외곽 성벽이었다. 성문과는 제법 떨어진 구석진 곳이었으나 자신이 여관에서 여기까지 비틀거리며 걸어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무의식중에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았다.
지금은 밤이 깊어 문이 굳게 닫혀 있지만, 아침이 되면 굳게 잠긴 성벽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해 오고가겠지.......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 도망치고 싶은 건가, 나는.
옛날과 하나도 변한 구석이 없었다. 본채에서 더 이상 지내지 못하게 되자, 녹우당으로 도망간 것처럼 이제는 도성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인가. 실소가 절로 입가에 맺혔다.
도망만 치는 건가, 나는, 매일, 매번,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는 열심히 했다. 도망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정면에 서서 맞섰단 말이다. 헌데 도망쳤던 때에 비해서 더 좋아진 점이 무엇이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연서강.”
그때, 문득 연서강은 자신의 앞에 누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칫 몸을 떨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성벽 바로 아래 구석진 곳이라 사람들이 피워놓은 불빛은 연서강이 있는 곳까지 전혀 닿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에 떠오른 달과 별의 빛으로 간신히 눈앞의 사람을 분간했다.
연서강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형님.”
“그래, 나다.”
연서강이 소리를 내자 안심한 듯 그가 어깨에 힘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강은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닌 듯 그의 행색이 별로 좋지 못했다. 어찌 찾았습니까, 라는 말도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미행하라고 보낸 부하들에게 물어 보았겠지.
연서강은 그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를 가도 자신은 연무강의 감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었다. 도망치는 것만은 자유일 줄 알았는데, 도성 벽 밖으로 새로운 곳에 간다 한들, 눈앞의 남자는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이다.
대체 뱀 신님은 그저 되돌려 보내주시기만을 해주시고 자신에게서 뭘 더 빼앗아갈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되돌아오기 전에는 갖고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자유까지도 뱀 신님이 거두어 가지고 계셨다. 허탈한 웃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왜 그리 계속 웃는 거지.”
말하며 연무강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실은 밤을 비추는 달과 별빛이 미약하여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연서강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어조로 말할 때면 무강 형님이 그런 표정을 지으셨다. 상상할 뿐이다.
연서강은 아직도 입술에 남은 웃음기를 손등으로 지우며 ‘죄송합니다.’말했다. 연무강이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손을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하는 눈으로 연서강은 그 손을 쳐다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
집이라.......
집?
연서강은 내밀어진 손을 말그러미 내려다보다 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집으로? 어떻게 그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자신이 무얼 하든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는 사람이 버티고 있는 집안으로 어찌 다시 들어간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그 집안에 있는 것은 전부 부친의 것이었다. 녹우당도, 심지어는 다 허물어져 가는 홍월정까지도 전부 다 그 사람의 것이었던 것이다.
연서강은 벽을 등지고 그것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열이 들어찬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 집으로 제가 어찌 돌아갑니까?”
연서강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진실로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연서강.’하고 짧게 자신을 부르는 연무강을, 연서강은 표정이 흐릿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미처 눈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려 있던 눈물이 땅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버님께서 무진 형님을 시켜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데 어찌 돌아갑니까.”
그러고 보니 희한했다. 어찌 또 한밤중이란 말인가. 무강 형님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밤에 무강 형님의 눈동자만 윤기 있게 반질거려서 연서강은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까만 하늘에 거멓게 반짝이는 빛이라니.
“왜, 어째서 구해주셨습니까?”
손등으로 뺨에 맺힌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연서강은 훔쳤다. 갈증이 일어나 입술은 물론이고 목구멍까지도 바짝바짝 탔다.
“형님께서 절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되돌아오기 전에 자신을 죽인 사람이 이번에는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하니. 아무리 어찌 굴러갈지 모르는 인생이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얄궂다. 되돌아오기 전과 비슷한 관계임은 틀림이 없는데 이전에는 자신을 죽이고, 이번에는 자신을 살려주었다.
아, 기연조가 자신을 버려서인가? 그래서 기연조 대신에 이제는 형님이 자신을 구해주시는 건가. 잃은 만큼 얻어야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서강은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하지 않았느니.”
연무강이 내민 손을 거두고 꾹 주먹을 쥐었다.
“너를 좋아한다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서강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런 뜻으로 하신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연서강.”
“형님이 그때, 그 소리를 한 것은 저를 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거짓말은 이제 그만 하십시오. 형님이 하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모두 ‘끝’이 났는데!”
그렇다. 기연조도 이제야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는데.
“이제는 형님 차례가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연서강은 억지를 부렸다. 더 이상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모든 것들이 다 불투명하고 형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전부 모습을 달리 하며 제멋대로 변하고 만다.
자신을 포함해서.
“아버님이 무진 형님을 시켜서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기연조도 죽지 않았으니 이제 저는 더 이상 이 집안을 위해 할 일도 없습니다. 황자는 죽었고, 연씨 문중은 이제 축배를 들어도 되지 않습니까. 이 판국까지 왔는데, 여전히 왜 거짓말을 하십니까.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그리하지 않으셔도 저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말하셔도 알아서 의심하며 거짓이라 할 터이니, 일부러 속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것만 보고 싶었다.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아.
순간 연서강은 망연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홍아, 홍아.
“.......제발 형님은 되돌아오기 이전과 똑같다고 말씀해주세요.”
그의 눈에서 뚝뚝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맙소사, 연서강은 경악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는 ‘바꾸기 위해’ 되돌아온 것이 아니었었나. 모든 것들이 자신이 애쓴 만큼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사이에 ‘영원한 것’이 있길 바라다니, 그게 웬 망령된 소망인가 싶었다. 변하는 게 당연한데도, 변하라고 자신이 늦봄부터 부단히 노력했으면서.
더욱이 무강 형님이 변한 게 무어가 있을까. 똑같은데. 저 사람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되돌아오기 이전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연서강.”
순간 연서강의 상념을 가로지르며 엄격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뺨을 때려서라도 똑바로 차리게 만드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그대로다. 그럴 놈은 그러는 거고, 이럴 놈은 이러는 것이지. 네놈이 다만 그놈의 다른 면을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해 변한 것처럼 느껴질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
그것이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무강처럼 강한 자라야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허나 자신은 아니다. 연서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형님도, 형님도 이전에는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연무가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연서강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지만, 연서강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의 사람이 ‘되돌아온다.’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는 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싫어하고 미워해서 죽였으면서. 어찌 지금은 다른 소릴 할 수가 있습니까? 형님의 말대로라면 형님도 똑같아야 하지 않습니까?! 형님의 말대로 진정 똑같다면, 역시 형님의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저를 속이고 고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고 협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연서강은 웃음을 흘렸다.
“좋아한다? 좋아한다니!”
하하하하, 불빛 하나 없이 마냥 새까만 밤하늘 위로 한 청년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멀리 퍼졌다.
“말도 안 돼!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진심이다, 연서강.”
불을 넣은 화로처럼 달구어져 감정이 북받쳐 오른 청년에 비해 연무강은 몹시도 이지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연서강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아무리 동요를 시키려고 해도 연무강은 요지부동이었다. 흔들리지도 않고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다.
“허면 다른 이를 사모하고 있는 이에게 연모한다 고백을 하는데, 허세도 못 부리는 것이냐.”
“.......허세?”
그런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남자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와 연서강이 되묻자 연무강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놈이 내 고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연조에게 갈까봐 그리하였다.”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허세를 부렸다.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어서.”
“.......”
“내가 너를 죽였다고 한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그리 했다면.......”
연무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연서강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시 죽이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겠지.”
“.......”
“네가 변방에서 소식이 끊기기 전에는 나도 몰랐던 마음이었으니.”
그리 말하는 상대방에게 연서강은 무엇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것을.’하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음에도 그랬다. 시작한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을, 허세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당사자인 연서강이 무어라 할지 몰라 끝맺지 못한 말을 연무강이 대신 이어주었다.
“미안하구나.”
“.......”
연서강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연무강이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연서강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연무강이 사과를 안 하는 무례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를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부친 연무의 등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수직 관계였었다. 그가 업무를 행하는데 실수를 해서 사과해야 할 사람이 생긴 적도 없었고, 그가 잘못을 저질러 사과를 해야 할 사람도 생긴 적이 없었따.
그랬기에 거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연무강이 자신에게 이리 다정하게 대해준 적도 없었다. 아니, 그 누구도 연무강에게서 이런 다정함을 받아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다못해 다른 형제들도.
황망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
그런 자신에 연서강은 실소했다.
기연조에게도, 무진 형님에게도 그리 된통 당했으면서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렸나 싶었다. 알지 않는가. 이미 자신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기연조나 무진 형님보다 더한 악질이라는 것을. 내내 당해놓고서 따뜻하고 다정한 말 몇 마디를 들었다고 덥석 그를 믿으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혹시 형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차게 웃으며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제 친부모님을 죽였다는 것을요.”
“......!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의 반응에 연서강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것 보아라.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정녕 진실이라면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부친께서 자신의 부모님을 죽이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자신 또한 죽이려고 하는 판에, 좋아한다는 사람의 목숨이 위험한데 어찌 모르는 척 하며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단 말인가.
차라리 같이 도망가자고 해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가.
“기연조에게 들었습니다. 오늘 전옥관에서 그가 말해주더군요. 그러면서 저보고 여전히 연씨 문중의 편을 들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 집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연무강이 손을 뻗어 연서강의 팔을 잡았다.
“대체 무얼 할 작정인거냐?”
“.......”
연서강은 자신의 팔을 잡은 연무강의 손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런 것이었다. 지금 무강 형님의 언행을 보아도 충분히 알지 않은가. 자신이 행여 연씨 문중에 해악을 끼칠까봐 이리 반응하시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허세니, 좋아한다니, 그런 말들이 정녕 진실이란 말인가.
연서강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제가 무얼 할 작정일까요, 형님?”
“연서강!”
연서강의 팔을 잡은 연무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틀어서 그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단단히 잡혀서 끌려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서강은 연무강의 정면에 똑바로 서 있게 되었다. 어느새 그의 두 팔은 연무강에게 모두 잡혀 있었다.
“무얼 할 적정이냐?”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연씨 문중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몰아세우면 세울수록 더더욱 아무것도 말해주기가 싫었다. 삐딱한 마음이 들어 그의 말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앞으로 무얼 할까요? 또 제가 무얼 더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눈앞의 남자는 절대로 황태후마마에게 얽힌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그러자 난폭한 충동이 연서강의 마음속에 일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애가 가질만한 장난스런 간악함이었다.
“형님께서 한 번 맞춰 보시겠습니까? 제가 무얼 알고 있으며 앞으로 무얼 할 작정인지. 형님께서는 그런 것을 알아맞히는 게 특기지 않습니까.”
연서강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검은 빛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이었다. 혼란도, 동요도, 곤혹도 몰랐던 남자였다. 헌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눈동자에 그런 감정을 닮은 어지러운 빛이 서려 있었다. 그 빛을 담고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남자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어설프게 낯선 친절과 다정함을 베풀어줄 바에는 차라리 이런 것이 나았다. 의미도, 목적도, 정체도 불분명한 감정이 오직 자신을 향해서 쫓아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아는 연무강이란 사람이었다. 되돌아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오직 하나.
익숙하고 익숙한 집착이었다.
“여기는 내 세상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 따위 저는 모릅니다. 몰라요.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입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낯설었다. 자신이 몰랐던 일들뿐이었다.
허나 여기가 ‘진실’한 세상이었다. 자신의 눈을 가린 것이 모두 치워진 진정한 세상이었다. 호의(好意)와 적의(敵意)와 살의(殺意)와 선의(善意)와 악의(惡意)와 후의(厚意)가 모두 어우러져 바삐 돌아가는 복잡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녹우당에서 소요하며 그 작은 세상에서 살았던 자신은 진실로 눈 뜬 장님이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손톱만큼도 보지 못했던 병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게 세상이 자신에게 주는 자비였던 것이다.
연서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여기에 더는 있고 싶지 않습니다. 허나 제가 죽는 세상도 싫습니다. 어느 곳에도 있고 싶지 않습니다.”
허면 자신은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가. 앞으로 어찌 하면 되는가.
“어떻게 해야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절망스러웠다.
“열심히 했는데.”
잘 해 보겠다고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세상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단 말인가.
“......알았다.”
돌연 연무강이 입을 열었다. 우울한 얼굴로 다만 허공을 보고 있던 연서강은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너는 지금까지 정말로 열심히 잘해왔다. 그러니 이제 나를 믿고 쉬렴.”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참으로 달콤하게 들렸다.
“형님을 믿고 쉬면 무어가 어찌 됩니까.”
웃으며 연서강이 말하자 연무강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네게 너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주마.”
참으로 다정한 말이다. 그래서 연서강은 서글펐다.
다정한 말임에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돌아서면 똑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할 듯 했다.
* *
연서강은 연무강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집의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연서강은 제 등 뒤로 차가운 무언가가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오싹 소름이 끼쳐 그는 괜스레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 서늘한 감각을 연서강은 잘 알고 있었다.
칼에 베였을 때, 그 특유의 느낌이었다. 한 번 베인 적이 있어 익숙한 감각이었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애를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신을 꽉 쥔 연무강의 손을 연서강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손에 들었던 칼이 자신을 내리쳤었더라, 허나 지금은 어찌된 연유인지 그 손은 또 어디론가 가버릴까 자신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오래 익힌 무예로 그 손바닥 안은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어 단단했다. 같은 사람의 손바닥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손의 크기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길쭉하고 큰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어디 빈틈없이 잡고 있었다.
묘한 감상이 일어 연서강은 오랫동안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을 옮긴 것은 본채로 들어서자마자 연서령이 ‘연서강!’하고 외쳤을 때였다. 고개를 드니 과연 연서령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많이 걱정했다며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연무강을 보았다.
그녀가 왜 쳐다보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연무강은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주변에 있는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현재 연서강이 머물고 있는 방에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 이불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네.’라고 대답하고 사라지는 하인을 보던 연서령이 다시 그를 보았다. 연서령이 무어라 물었지만, 연서강은 잘 듣지 못했다. 이상했다.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잘 들리고 잘 대답할 수가 있었는데, 집에 오자마자 급속도로 힘이 빠져 무엇도 꼼짝 할 수 없었다.
어쩐지 멍해져서 연서강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저쪽 구석에서 칙칙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무진을 발견했다. 연무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서강은 아찔해졌다. 그러나 이를 악물어 참아내며 그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저 쪽에서 하인들의 소란으로 인해 밖을 나와 본 연무의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입에 곰방대를 문 연무의가 순간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잘 돌아왔다.
연무의는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연서강의 의식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곁에서 연서령이 비명을 질렀다.
그 날 밤, 감기와 몸살로 고열에 시달리며 연서강은 꿈을 꾸었다.
새하얀 뱀이 나오는 꿈이었다. 새하얀 뱀이 우물 안에 있는 연서강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속을 깨다오.
그 말로 연서강은 이 꿈이 저번에 꿨던 꿈의 연장선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무얼 해줄 것이오, 라고 연서강은 우물 속에서 외쳤다. 뱀이 비릿하게 웃는다.
-네게, 다른 세상을 주마.
여기는 싫지 않으냐, 하고 뱀이 연서강에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으며 연서강은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준 말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누구의 제안이 더 매력적인지 굳이 비교를 하지 않아도 빤했다.
연서강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뱀이 큰 소리로 웃었다.
* *
황자의 발인의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저번에 내린 비 이후로 날은 급속도로 써늘해져갔다. 궐내의 단풍나무들도 거의 물들어 바람이 불면 떨어지기 바빴다. 그것은 저잣거리도, 연씨 문중의 자택도 마찬가지였다. 나라 안 여기저기에도 완연한 가을이 물들어 있었지만, 작년처럼 풍성한 수확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별 없었다.
황자의 예장으로 인해 간단히 수안궁의 태상이 뱀 신님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만 제외하고 취소되어 버린 수확제의 부재를 사람들은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크게 와 닿는 일은 이맘 때 즈음이 되면 수확제로 전국 각자에서 올라온 사당패와 놀이패들로 길거리가 시끌시끌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게 전연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수확제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자의 예장이 발인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예인 무리들의 출입을 아예 금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과 귀로 즐기는 가장 큰 일이 사라지게 되니 사람들도 이번에 수확제가 사라졌구나, 하고 실감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연서강이 지루하게 앓던 감기를 마침내 툴툴 털고 일어난 다음 날이기도 했다.
그간 본채의 사람들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난 연서강이 당연 녹우당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슨 싫고 피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그리로 도망쳤던 전적이 있으니, 이번도 그러지 않겠나 했던 것이다.
허나 예상 밖에 연서강은 그러지 않고 예전에 자신이 본채에 머물 때 사용했던 연무진의 방을 계속 이용했다. 그것은 어디로 가나 ‘똑같다’는 것을 연서강이 깨달아서였다. 연무진이 연서강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그 연유를 알 일이었다.
연무진은 그 이후로 본채로의 출입을 싹 끊었다. 안계영의 몸을 자신이 옆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핑계로 대고 있지만 왜 어째서 그가 본채로 오지 못하고 있는지 연서강은 잘 알았다. 자신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는.
연서령만이 툴툴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변방에서 여동생이 찾아왔는데 어찌 이러오.’하고 연서령이 연서강을 병문안 핑계로 찾아와 그리 떠들다 갔었다.
병문안이라면 연의진도 왔다 갔었다. 병문안이라고 하기에는 그 성격이 약간 애매하기는 했으나, 일단 감기가 나아가는지 그 차도를 살펴보고 기분 전환을 시켜 주러 왔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영의전이 바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연서강이 말하니 연의진이 ‘바쁜 것은 윗선들 뿐, 나는 괜찮다.’라고 대답했다. 이십대인 연의진은 비록 연씨 문중의 자제이기는 했으나 영의전 의원들 중 젊은 축에 속했다. 황자가 사망한 이후, 태의령 및 황자를 진단한 몇 어의들에게 근신령을 받고 폄직(貶職)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이어 ‘너, 서서원을 얼마나 안 간 게냐, 낫거든 서서원에서 좀 충실하게 일하는 게 좋겠다. 서서원 사람들이 네 얼굴 안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내게 말을 하더라. 더 안 나오면 불성실을 이유로 면직시킨다고 무어라하던걸.’하고 연서강이 접하지 못했던 궐내의 소식도 가르쳐주었다.
요새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건강을 이유로 휴직했더니 서서원 동료들이 드디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연의진도 영의전에서 거의 막내 축에 속했지만, 서서원에서의 연서강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막내가 아니었지만 일한 경력으로 따진다면 새파랗게 어린 막내인 셈이었다. 자신이 가니 바쁠 때 자질구레한 일을 도울 인력이 생겼다, 좋아하던 서서원의 동료들이 생각나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의진은 그 이후에도 ‘이것도 잘 챙겨먹고, 몸은 따뜻하게 하고, 근육이 행여 아프거든 이렇게 하고......’등등 잔소리와 비슷한 충고를 여러 개 남기고 갔다. 의원이 왔다갔더니 남는 것은 또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약재들이었다.
다음으로 병문안을 왔던 연서령이 들어오다가 ‘뭐요, 이건. 누구 죽을병에 걸렸소?’하고 그것을 보고 놀랐다. ‘우와, 녹용! 으아, 이건 또 뭐야, 삼 아니오?’ 약재들을 뒤지며 그녀는 감탄에 감탄을 했다. 그 중 피부에 좋거나 몸보신에 좋은 약재들을 두엇 개 탐을 내어서 연서강은 그녀에게 주었다.
병문안을 왔는데 환자에게 무언가를 빼앗아가다니 이건 아니 될 일이라, 어설픈 저항(?)을 하기에 연서강은 다만 ‘원래 막내 여동생은 오라비에게 그래도 된다.’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억지로 약재를 안겼다. 그 말의 어디에 감동의 요소가 있었는지 몰라도 연서령은 올망한 눈으로 ‘고맙소! 서강 오라버니.’하고 예쁘게 대답한 뒤, 방을 나갔다.
이전에는 이 멧돼지 같이 전진만 있는 여동생이 참으로 부담되고 가끔은 또 무섭고 하더니만 요새는 그 행동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연서강에게 잘 보이고 싶은 눈치여서, 멧돼지 같은 면이 있는 사이사이로 은근히 드러나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참으로 어린 여동생다워 좋았다. 철없기는 했지만 그럴 만한 나이이기도 했기에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허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연서강은 그녀와 더 이상 친해질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병문안을 와서 자신을 걱정해주고, 제법 귀엽게 여겨지는 행동을 하더라도 뭔가 벽이 느껴졌다. 아마 자신 쪽의 문제라고 연서강은 생각을 했다. 비단 연서령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자신이 되돌아왔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시간과 인과가 가로축, 세로축을 만들어 형성되는 우물(井) 안이라는 비유가 참으로 적절했다. 자신이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친 만큼 인과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 마침내 되돌아온 자를 가두는 옥(獄)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우물에 빠진 사람이라 아마도 이러는 것이리라 싶었다.
“누구라고?”
묻는 말에 연서강은 다시 방금 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연서강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잠깐의 틈을 두었다.
“.......아버님.”
다시 또 성헌당의 안이 잠잠해졌다. 허나 그 침묵도 잠시, 어디 한번 이번에는 무슨 작심을 하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보자 싶었던지 연무의가 ‘들어오라.’하고 방문을 허락했다.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성헌당 문을 연서강은 태연하게 열고 들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나가던 하인과 하녀들이 보고 수군거렸다.
연서강은 그리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이전에 장장 10시간 넘게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다. 연서강의 행방이라면 귀신처럼 알아내곤 했던 연무강도 그때는 잠시 당혹해하며 사람을 풀어 샅샅이 뒤지라고 명했을 정도였다.
어디 갈 곳 없는 녹우당 도련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음에도 도통 발견이 되지 않더니만 새벽이 된지 한참이 지나서야 연무강의 눈에 발견되었었다. 무슨 일로 행방불명이 되었는지, 또 머리를 다쳐서 돌아왔는지 진상을 아는 이들이 입을 꾹 다무니 무슨 일인가 궁금해 죽겠는 아랫것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연무강과 연무의가 연서강에 대해서 서로 의견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바탕으로 아마 연무의가 연서강을 뭔가 부당하게 대우했고, 그 때문에 연서강이 충격을 받아 가출(?)한 것이라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추리는 일의 본질과 썩 다르지 않았기에 제법 설득력 있게 집안 가솔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집안 가솔들뿐만이 아니라 실상을 전해 듣지 못한 연서령이나 연의진 등도 또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연무의의 연서강에 대한 차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 크게 터질 문제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그랬기에 그들은 감기가 나은 다음, 연서강이 먼저 연무의를 찾아갔다는 점에 크게 놀라워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라 말하고 다툴 예정인가. 가솔들은 참으로 궁금해 하였지만 곧 성헌당 안에서 성헌당 주변에 사람을 얼씬시키지 말라는 명이 떨어져, 그들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집안 가솔들과는 이유는 다르지만 연무의 또한 연서강의 방문을 놀라워하고 있었다. 연무의는 연서강이 병이 낫자마자 바로 녹우당으로 갈 줄 알았다. 거기서 몸을 숨기고 벌벌 떨던가, 안면 자신과 연씨 문중을 향한 이를 갈면서 복수를 계획할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어떤 것도 연서강은 하지 않았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상체를 숙이고 문안인사를 먼저 올리는 연서강을 연무의는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 그도 연무진을 시켜 자신을 죽이라고 한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모두 다 알게 된 판에 새삼 연무의가 표정을 지어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지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다.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말하며 그는 불현듯 늦봄에 연서강이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홀로 찾아온,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금번과 비슷했지만 상황이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제가 아버님을 찾아뵙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태연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는 연서강에 연무의가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요놈 보거라, 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연무의가 손에 든 곰방대를 입에 물며 연서강을 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연서강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연무의를 응시했다. 잠깐의 침묵이 성헌당 안에 내려앉았다.
“해서 금번에는 또 무슨 연유로 나를 찾았느냐? 참으로 놀랍구나. 나는 네놈이 이렇게 담대한 녀석인 줄 몰랐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연서강이 빙그레 웃었다. 담다하다는 그 말이 우스웠다.
“아버님을 찾아 뵐 때면 늘 비슷한 마음으로 그 앞에 섰었습니다. 허니 담대하다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또 항상 저는 아버님께 원하는 바가 있어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금번도 그럴 뿐입니다.”
“허어.......”
차분한 말에 연무의가 미간을 좁혔다. 대체 눈앞의 놈이 왜 이런가 싶었다. 몸을 사리며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자신을 차자오다니. 이건 뱀 대가리에 개구리가 성큼성큼 들어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허나 다르기야 할 것이다....... 뱀이야 개구리를 그냥 한 입에 꿀꺽 삼키면 끝날 일이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연서강을 당장 해치우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연서강 또한 깨달은 바인지 그가 이어 말한다.
“게다가 아버님께서는 대의명분이 있으셔야 저를 해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 칼을 빼어들고 저를 죽인다 하시면 모를까, 그리 경황없고 어리석지 않은 분이신 것을 아니 제가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대낮에.’하고 마지막 말까지 충실하게 내뱉는다. 연무의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기야 하지.......’ 연무의에게 있어 연서강은 언젠가 해치워야 하는 골칫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아무 기대도 안 해서인지 이 골칫덩어리는 오랜 세월을 살아와 감정이 무뎌진 연무의에게 가끔 이렇게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솔직한 말로 슬하에 있는 그 어떤 자식들도 자신에게 이런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가끔 연무강이 줄까, 했지만 그는 대부분의 경우 연무의에게 복종을 했기 때문에 딱히 의견 대립이 생길 일이 없었다. 대립이 없으니 서로를 갉아먹는 대화도, 서로를 방심시키기 위한 대화도, 서로를 현혹시키는 대화도 하지 않았다.
허나 연서강은 달랐다.
처음 성헌당을 찾아왔던 날도 이랬었지, 생각하며 연무의는 다시 곰방대를 물었다.
연서강이 연무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엇이더냐.”
그것은 연무의도 참으로 궁금해 하던 것이었다.
“어찌해서 소자의 모친을 그리 증오하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허나 즐거움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연무의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하고 대꾸했다. 제 어미가 연우비이며, 그년이 대체 무얼 했는지 정녕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 그러나 여전히 연서강의 얼굴은 진지했다.
“소자의 모친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압니다. 소자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아버님께서 어쩌다 여동생을 죽일 마음까지 품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위입니다. 소자에게도 여동생이 근래 생겨서 보고 있다 보니 아버님의 처사가 너무 잔혹한 것이 아닌가 여겨져서 물어봅니다.”
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연서강이 연무의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물론 남의 일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객관적이고 무감정하며 무심한 말투라 남의 사정을 읊는데 입만 빌려준 형국이었다.
연서강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갈취하기 위해 자신을 상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한 적은 여러 번 되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라 연무의는 눈앞의 있는 연서강이 낯설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네놈 모친이 느닷없이 혼인날을 앞두고 예인과 놀아나 집을 나간 것은 알겠고, 그 일 대문에 황후마마께옵서 갖은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알지 않으냐. 집안의 위신 역시 추락했음을.”
“아닙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가 몹시도 차가워 연무의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연서강이 연무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서강에 연무의는 순간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곧 착각인가 싶었다. 아니면 고작 저런 놈한테 자신이 섬뜩함을 느꼈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님이 내세운 대의명분일 뿐, 실제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대체 누가 믿습니까? 아버님께서 개인적으로 제 모친께 원이 있으신 게 아니신지요?”
“그런 게 있을 리가.”
“허면 아버님, 만약 집안의 망신이라 그리 처단하셨다면 굳이 그렇게 제 모친을 찾아서 처단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비밀리에 죽인 것이 아닙니까. 대의명분을 이유로 들자면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제 모친을 죽일 이유가 전연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미 도망가서 살고 있는 제 모친을, 굳이 찾아내서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비밀리에 이루어진 이상 사람들은 그런 명분 아래서 제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까? 제 모친을 찾은 것은 대의명분 아래에서 행해진 일일지도 모르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벌하는 것도 아니고, 비밀리에 모두 죽였다는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말을 잠시 멈추고 연서강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버님의 개인적 원풀이가 아니신지요?”
순간 연무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아직 홍월정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 적이 일이었다. 아름다운 홍월정을 찾았던 수많은 예인(藝人)들, 또 그것을 흡족하게 생각하던 연무의의 부친 연호경의 모습까지. 덕망 높고 인망 높은 부모님과 녹우당과 홍월정의 미(美), 연회를 열면 갖가지 분야에서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그야말로 금색의 실로 반짝반짝 엮어 놓은 듯 꿈처럼 아름다운 때였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연무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개인적 원풀이라면 네가 뭐 어쩔 것이냐? 대의명분으로 죽였다고 하면 이해를 하고, 개인적 원풀이였다면 복수라도 할 것이냐? 왜 그런 것들을 물어보느냐, 서강아.”
다만 입만 웃고 있을 뿐, 그의 눈은 몹시도 차가웠다.
“네 모친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가르쳐 주랴?”
“.......”
여전히 흔들림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연서강을 향해 연무의가 다정스레 웃어주었다. 연서강은 참으로 슬하의 자식들과 닮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했다. 저것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연우비의 자식이었으니.
허나 그것을 내버려 두고서라도 연서강의 용모에는 연씨 문중 특유의 그 날카로운 맛이 없었다. 순둥이 같은 저 외모는 제 어미를 똑 닮아있었다. 정말이지, 연씨 문중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지 않은 놈이 아닌가.
“네 모친, .......연우비는 본디 여기 사람이 아니다.”
연서강의 미간이 좁혀진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무슨 소리긴! 모르는 척 하는 것이냐? 연씨 문중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연서강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나 얼굴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아서 연무의는 그가 현재 놀랐는지 그렇지도 않으면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어 놀랄 일도 없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연무의도 딱히 숨기고픈 일이 아니었다.
“나의 부모님, 그러니까 연서강 네게는 조부모님이 되겠구나. 내 부친과 모친께서 어느 고을에서 주워온 아이이지. 고아인데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참으로 가엽다며 양녀로 삼았었단다. 내 부모님께서는 두 분 모두 선하고 의로운 분이셨지만, 특히나 모친께서 많이 착하셨지. 마음이 여리고, 상냥하고, 봄바람 같으신 어여쁜 분이셨다. 연우비도 모친께서 가엽게 여겨 거둔 아이로 부친께서도 딱히 반대를 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의 연씨 문중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나. 녹우당도 어여쁘고, 홍월정도 어여뻤으며, 아이를 거둔 연씨 부부의 마음도 어여뻤다.
그것을 보고 연무의는 다소 마음이 복잡했지만 부모님께서 저리 좋아하시고 고아한 뜻에서 아이를 거둔 것이니 자신 역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었다.
“바지런히 기르셨다, 그 아이를. 주워온 아이라 말을 듣지 않고 잘 기르셨지. 원체 아이를 바르고 어여쁘게 잘 기르시는 모친이셨지만, 특히나 연우비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부어넣으셨다. 연우비가 혹시나 차별받는다 생각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기르셨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연무의는 회상하든 두 눈을 감았다.
“아주 고약한 아이가 되어서는.”
주워온 아이였지만 두 분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던 여자 아이는 두 분의 염려대로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전연 하지 않게 되었지만, 다소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만 할 줄 아는 여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연씨 문중의 핏줄이 아니고 주워 와서 그런지 발상과 사상도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행동 역시 수준이 떨어져 연무의는 참으로 탐탁지 않았었다. 뭔가 큰일이 나지 않나, 불안 불안했다.
허나 부친과 모친이 워낙에 좋은 사람이었고, 당시에 연우비를 거둬들인 일은 연씨 문중의 미담이었기 때문에 연무의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당연 일어났다.
“그렇게 두 분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으면 두 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으니. 헌데 네 모친은 그러지 않았다. 혼인을 한 달 앞두고 어찌 한낱 가인(歌人)과 야반도주를 할 수가 있단 말이더냐. 혼인할 예정이라도 없으면 모를까. 아주 두 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았지.”
그때부터였다. 황금실로 짠 듯 아름답고 보드라운 시간이 깨어진 것은.
기억을 반추하며 연무의는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자신은 그때 잃어버린 아름다고 보드라운 시간을 되찾고 싶었었는지도 모른다. 연씨 문중의 이름을 드높여 그때의 시간을 재생시켜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허나 역시 안 되었다. 그 두 분이 없는 것도 모자라 녹우당과 홍월정도 저 지경이 되었으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무의는 입에서 곰방대를 떼고 연서강을 차갑게 응시하였다. 역시나 연우비를 닮은 얼굴이었다. 너무나도 싫지 않은가. 그런 년의 자식이 자신의 연씨 문중의 안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니.
어서 저 놈을 없애버려야 속이 시원할 텐데.
“연우비가 집을 나간 후, 모친께서 충격을 받아 쓰러지셨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지. 모친이 돌아가시고 난 후, 부친께서도 종종 앓으시더구나. 결국은 모친의 뒤를 따라가셨지.”
“.......”
“내가 그래도 네 모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아직도 기억났다. 건강하고 어여뻤던 어머님이 점점 메말라가고 시들어가던 과정이. 그것을 지켜보는 아버님의 수심 가득한 얼굴도.
차라리 연우비를 찾아서 데리고 와 벌이라도 내리면 그 답답함이 가실까, 허나 알고 있었다. 연우비를 찾아서 데리고 오더라도 어머님은 아이를 부덕하게 기른 자신을 탓하며 계속 앓으실 것이라고.
사랑을 그렇게 많이 주었는데, 참으로 어여삐 키웠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어머니 담씨 부인이 그리 말하며 울먹였던 것도 연무의는 기억하고 있었다.
“연우비 때문에 그 고운 시간들이 모조리 깨져 버렸다.”
죽어버린 사람과 깨져버린 고운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연무의는 연우비를 찾아 찢어 죽이려고 했었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제 부모를 죽게 만든 년. 그리고 연우비를 찾았을 때, 그는 생각보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그 모습에 더 분노했다. 고생이라도 하고 있으면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어찌 잘 살 수 있겠냐고 조롱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들은 아이를 하나 낳고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끌고 왔다.
연우비의 남편이 된 그 가인(歌人)의 성대를 자르고 울부짖는 연우비를 끌고 와 광에 가두었다. 너 때문에 부모님께서, 부모님께서. 생각하며 연무의는 연우비 또한 같은 고통을 느끼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그 아이도 죽기를 바랐었다. 허나 광을 열었을 때, 연우비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죽어 있었고 아이만 젖이 안 나오는 가슴을 붙잡은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탈진하여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연무의는 밟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곧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신의 부인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부인은 아니가 너무 불쌍하니 거두자고 하였다. 자신의 아이로 키우자고 하였다.
부인의 반대로 아이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연무의는 그 아이가 내내 눈에 밟혔다. 그래도 어찌 잘 지내보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었다. 허나 안 되었다. 무얼 시키든 그 아이에게서 연우비의 얼굴이 보여 무리였다.
그 아이는 이제 완전히 장성하여 자신의 앞에 있었다. 연무의는 이를 으득 갈았다.
“네놈은 결국 내 집과 가족을 망칠 것이다, 연서강. 연우비처럼 연씨 문중에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것은 오랜 시간 걸쳐서 굳어진 아집이며 망집이었다. 차라리 노망이라도 났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른다. 허나 연무의는 현재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연무의가 연서강을 가리키며 차게 말했다.
“조심 하거라, 서강아. 내가 너를 꼭 죽이고 말 터이니.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항상 먹는 걸 조심하고 항상 어딜 나가는 걸 조심하며 항상 홀로 있게 되는 밤을 조심하여라.”
히죽 그가 웃는다. 웃는 모양으로 깊이 파인 주름이 그의 미소를 더 짙게 만들어 주었다. 그윽하고 다정하며 온화한 미소였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네가 연씨 문중에 해악을 끼치기 전에 반드시 제거할 것이다.”
“.......”
연서강은 그런 연무의의 저주와도 같은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소름끼쳐 하며 뛰쳐나갈 법도 한데, 괴이하게도 이 또한 벽이 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고요한 얼굴로 연무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엉망진창이다.
이게 내가 바란 세상인가.
* *
“무어라 하시었소?”
연서령은 의아한 얼굴로 연무강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잇는 곳은 궐내 구릉벽 근처였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팔랑팔랑 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다, 연서령.”
말을 정녕 못 들은 것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연무강은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나 못 들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연서령은 인상을 썼다. ‘허나.’하고 그녀가 망설이는 듯 말을 이었다. ‘허나, 그래서는.’
어쩐다, 싶은 게 얼굴에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녀에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저리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서 앞으로 어찌 해쳐 나갈 작정이란 말인가.
“무슨 연유로 나를 부르시나 싶었더니, 그런 일이었소.......”
여전히 고민을 하는 얼굴로 그녀가 말한다. 연무강이 ‘그러면 어떤 연유로 너를 부르겠느냐?’하고 질문했다. 그녀가 발끈 화를 냈다. ‘그러니까 말했지 않소! 대체 무슨 연유로 나를 부르시나....... 생각했었다고!’ 그런 그녀의 화를 차가운 시선으로 지그시 누르며 연무강은 대답을 재촉했다.
“해서, 어쩔 것이냐.”
“.......알겠소이다. 의향 누님께도 말해놓겠소, 오늘 당장.”
망설이는 기색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연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거절한 이유가 없으니 당연했다. 더욱이 지금 당장 그런다는 것도 아니고 만에 하나에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으니까. 연서령은 거듭 주억거렸다.
“.......고맙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두 눈을 토끼눈처럼 뜨고 연서령은 연무강을 보았다. ‘무, 무어라고 했소이까?’ 그러나 그는 역시 들었다 여겨지는 말은 다시 하지 않았다. 연서령만 방금의 말을 여러 번 되뇌며 ‘세상에!’하고 충격을 새삼 받을 뿐이었다. 쿵, 쿵, 쿵. 머릿속에서 누군가 무두질을 세 번 하는 듯 했다.
“큰 오라버니께서 그런 말을 할 줄 알다니.”
머리를 잡으며 여전히 충격을 받고 있는 연서령에 연무강이 팔짱을 꼈다. 연무강에게서 차가운 시선이 느껴진 그녀가 얼른 머리를 잡은 손을 내리고 ‘아, 아무 소리도 안 했소이다.’라고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다.
“여하튼 나는 향이 누님에게 전하고 오겠소이다.”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서둘러 빠지는 것이 참으로 능숙해 보였다. 얼른 벗어나기 위해 뛰어가는 연서령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연무강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그는 다음 사람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른 해야 했다. 연서령에게는 만에 하나, 라고 언급했지만 아마 그 날이 제법 빨리 올 것이다. 무슨 일이 터진 이후에 대비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제가 앞으로 무얼 할까요? 또 제가 무얼 더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모른다.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에 속으로 대답하며 연무강은 얼굴을 굳혔다. 모른다. 네가 무엇을 할지, 또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는 것이라고는 기연조를 사모한다는 것 뿐.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 뿐.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든 반드시 그를 살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다시 믿을 수만 있게 된다면야.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일단은 자신을 믿게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지만 않아 주었으면 했다. 자신에게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찌 할 작정인지 믿고 의논이라도 해 준다면. .......그렇게 된다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곁을 떠나지만 않았으면 했다.
* *
엉망진창이었다.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연서강은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 세상은 자신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인가?
기연조는 살렸으나 자신은 이제 어찌 해야 하나. 허나 기연조도 사실 무사한 것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몇 년 살다가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올 터이니 .......황제와 황후의 권력 싸움이 여전하다면 또 위험천만한 일이 휘말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도 다시 휘말리게 되겠지. 그러면 의진 형님이랑 서령이도 죽게 되는 것인가. 자신도?
어쩌지.......
자신이 이제까지 해왔던 게 정말 물거품, 헛수고다. 영구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여기서 애써도 다만 그때, 그때만 살아남게 될 뿐이었다.
아버님은 또 어찌 한단 말인가. 아아, 되돌아오기 전에는 그저 무강 형님만 경계했으면 될 일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찌해서 이 세상은 이런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이 이런 모습을 띠고 있으니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 역시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황제와 황후마마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번뜩 연서강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전옥관에서 막 나왔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래, 자신은 확인할 것도 있었다. 아버님도 아버님이지만, 황제와 황후도 그렇지만 또 확인해봐야 할 게 있지 않은가.
아아, 하지만 여기서 더 알게 된다면 괴로워지는 것 밖에 더하겠는가. 알면 알수록 괴로워졌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괴로워졌고,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그 뒷감당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했었다.
허나.
연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해결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다시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 황제, 황후, 황태후, 연무강, 연무진, 연서령, 연의진......., 여러 가지 이름과 그 이름에 얽힌 여러 가지 일들과 상념 때문에 연서강은 어지럼증까지 느껴졌다. 토기가 일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으니 자신이 혼자서라도 어떻게 해야 했다.
어디선가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자신을 따라오는 뱀 신님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