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연무강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인 줄 알았더니 제법 지루하게 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해갈의 시원함이 있는 여름의 비와 달리 지금 내리는 빗방울에는 저기 북산 능선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냉기가 어려 있었다. 이 비가 내리면 본격적으로 써늘해지겠군, 판단하며 연무강은 팔짱을 꼈다.
“혀, 형님.”
그때 연무진이 안절부절 못하며 그를 자그마한 목소리로 부른다. 기가 팍 죽은 것이 마치 어릴 적 함께 공부하던 때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연무강이 힐끗 그를 쳐다보자 연무진이 ‘나, 나는.’하고 어렵게 말문을 연다.
여관 주인이 몸을 차게 두면 안 된다며 준 수건이 있었지만, 연무진은 그것을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비에 홀딱 젖은 몸이었고, 바닥에 뚝뚝 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짧게 되묻자 연무진이 화들짝 놀란다. 연무강이 쯧 혀를 찼다.
“나는 어쩌면 좋겠소, 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
연무강이 그리 물었지만 연무진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형이 ‘소리’로 옮긴 것을 듣자 자신이 하려던 질문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깊숙이 와 닿은 탓이었다.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형에게 그것을 제지당했다. 마치 나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님의 명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연서강을 칼로 내려치기 직전까지도 연무진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저지가 되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리 되자 퍼뜩 드는 생각은 ‘연무의’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분이 아니신가. 망설이며 고민하다가 일을 그르친 것을 알게 되면 아버님이 자신을 또 어찌 볼지. 상상만 해도 연무진은 아찔했다. 게다가 연서강은 또 어찌 되는 것인지.
“아, 아버님께서 서강이가 한 번이라도 기연조를 찾아가면 후탈이 없게 없애라고 하셨소. 아버님께서는 서강이가 기연조와 모의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눈치더이다. 해서.”
연무진이 다시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해서 내게, 혹시 서강이가 수상한 짓을 하면 처리하라고.”
“.......”
연무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연무진은 서둘러 그를 설득하려 했다.
“허나 서강이도 수상하지 않소이까. 형, 형님께서는 서강이가 한 번도 의심스럽지 않았소? 갑자기 늦봄에 변방에 보내 달라 하더니 비서랑이 되고, 또 지나치게 집안이 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아지지 않았소. 내게도 물어보았소. ‘일’에 대해서 혹시 아느냐고. 부친께서 이미 가르쳐주셔서 알고 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내게 ‘일’에 대해 캐물으려고 했단 말이오. 이전까지 서강이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았소이까.”
여전히 조용한 큰형의 눈치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연무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께서는 한 번도 연서강이 수상했던 적이 없소?”
많았다. 연무진이 의심하기 전부터 연무강은 연서강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무진이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연무강은 잘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래서 최근까지만 해도 서강이 놈과 둘도 없는 형제인 척 하며 지내던 놈이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서강이를 죽이려 했다? 네가 그리 공과 사가 분명한 아인 줄은 몰랐군. 부친께서 그리 명하신 것은 둘째 치고, 네가 내가 아는 연무진이 맞기는 하느냐?”
그 말에 연무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는지 아시오?!”
갑자기 흥분해서 외치는 그를, 연무강은 입을 다문 채로 쳐다보았다.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연무진이 이제 그 무서운 형 앞이든 뭐든 아무 상관없다는 듯 다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나도 아버님께 그리 명령을 받고 고민을 했소이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아시오?! 허나, 성혼도 하지 않은 형님은 모르시겠지만, 나에게는 아내도 있고 이젠 아이까지 있소이다. 책임질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오! 연서강이 좋은 동생인 것은 사실이요. 내가 그걸 어찌 모를까? 녀석과 어울려 다니면서 내, 형제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편했었소.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요. 만약 서강이가 연씨 문중을 배신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나는 과감히 서강이를 내칠 거요. 이번처럼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할 거란 말이오!”
‘계영이는, 계영이와 아이는.’하고 감정이 북받친 연무진이 갑자기 숨을 죽이며 흐느꼈다. ‘내가 지킬 거요. 절대 연씨 문중은 잘못되면 안 되오. 잘못되면 내 계영이와 아이는, 내가 지킬 것이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연무진이 이를 악물었다. ‘설사 서강이를 죽이고 괴로워지더라도, 나는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오.’
그것을 연무강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큰형이 서늘한 얼굴로 아무 감흥도 없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자, 연무진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얼른 제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냈다. 허나 이미 흠뻑 젖은 옷이라 닦아도 닦이는 게 아니었다.
연무강이 혀를 차며 옆에 있는 수건을 하나 집어 들어 연무진에게 던졌다. 연무진이 그것을 받아들고 재빨리 제 붉어진 얼굴을 문댔다. ‘떨어지는 물도 닦거라. 여관 주인이 싫어한다.’ 얼굴만 박박 문대고 있는 연무진에게 연무강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방금 전 울부짖은 것으로 모든 기력을 상실한 연무진은 조용히 그가 시키는 대로 손과 옷을 닦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여관 안에 미묘한 침묵이 쌓였다.
“.......네놈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무진. 내게도 소중한 사람 정도는 있다.”
“.......”
“그래서......, 네가 그리 시끄럽게 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하니, 그리 추태를 보이지 말아라, 보기 싫다.”
그 말에 연무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해가 된다고 하였소?’ 몹시 괴이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팔짱을 끼며 연무강이 ‘그래.’하고 대꾸했다. 그러더니 이어서 ‘다른 사내놈의 울부짖음이란 것은 원래 이렇게 귀찮고 짜증나는 것이었군.’이라 의미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연무진이 툭 말을 뱉었다.
“.......형님 오늘따라 좀 이상하신 것 같소.”
미간을 좁히며 연무강이 그를 쳐다보았다. 뭔 시답지 않은 소리냐, 묻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것이.’하고 연무진은 반사적으로 꼬리를 만 개처럼 전의를 상실하고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에 연무강이 짜증을 냈다. ‘말을 하다 말 거면 아예 꺼내지를 마라, 연무진.’ 그 모습에 또 반사적으로 연무진이 ‘그, 그게!’하고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오늘 형님에게 죽, 죽는 줄만 알았소이다. 또 혀, 형님이 서강이를 구하러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고.”
“나한테 말하러 온 게 ‘나 좀 말려주시오.’가 아니었나?”
“어? 그, 그리 보였소이까.......”
“그래 보였다.”
“그건.......”
연무진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았다. 괜스레 형님을 찾아가 부친이 사람을 죽이라 자신에게 시켰다고 말하고, 그러면서 누구를 죽이라고 했는지는 비밀이라고 연무강의 속을 긁고,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이해 못할 행동이었다.
“아버님께서 시킨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면 내게도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형님 말씀이 옳소.”
자기 능력으로 처치 못할 일이 생기면 항상 연무진은 연무강에게 달려오곤 했다. ‘형님, 이건 어떻게 하면!’하고, 어릴 적에는 그런 빈도가 잦았지만 나이가 든 이후에는 덜해졌다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여전히 달려가곤 했는데 도와 달라, 말을 직접 하지 않아 요새는 안 그런다고 착각한 것뿐이었다.
“.......아버님께는 내가 들러 말씀드릴 터이니 네놈은 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 그래주겠소?”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죽여 연무진이 묻자 연무강은 인상을 썼다. 딸린 식구들도 여럿 생겼는데 어쩌면 저렇게 변함이 없을까. 안계영과 짝을 지어줄 때에는 안계영이 똑똑하고 차분하니 저 팔푼이 같은 놈을 잘 건사해주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판단을 잘못 한 듯 했다. 연무진은 안계영과 함께 살면서 더욱 철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래. 아마 아버님께서는 내게 하고픈 말씀이 아주 많으실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할 말이 아주 많다. 연무강은 입을 다시 아물며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무진의 성격이 저 모양 저 꼴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문도학이나, 평소 연무의의 명령을 자주 수행하는 다른 이에게 이 일을 시켰다면 연서강이 죽는 것도 모를 뻔 하였다.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뒤늦게 그 장소에 도착을 했다던가.
.......생각만 해도 몹시 불쾌해져서 연무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굳이 연무진을 시켜서 서강이를 해치려고 한 아버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연무강은 알아차렸다. 정녕 연서강이 위험해서 그랬을까. 그랬다면 달리 일을 더 잘 할 만한 사람을 시켰을 것이다. 항상 어려운 일만 생기면 자신에게 달려오는 연무진이 아니라.
그리고 살짝 연무진을 통해 정보를 흘린 다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려는 것이었겠지. 틀림없었다.
그래서 더욱 연무강은 가슴속이 써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연무의가 연서강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바로 곁에 서서,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 자신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어렸을 때 자신이 연서강을 어찌 대했었는지 생각만 해봐도 알 일이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성격은 연무의의 엄격한 훈육으로 형성된 것이니.
허나 지금에 와서 아버님이 연서강을 싫어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의심이 되어 수차례 시험까지 해 보고 확인도 받아보지 않았던가. 그랬으면서 계속 연서강을 의심하고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연서강이 무얼 하든 마음에 들지 않고 싫으시다, 라. 그래서 자신이 연서강을 두둔하기 시작한 것을 곱게 보지 않으시는 것인가.
연서강에 대해서 자신의 태도가 호의인지 적의인지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 아버님이 연무진을 이용하셔 이번 일을 계획하신 것이 틀림없었다. 또, 그가 노리는 것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리라.
“.......연무진.”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무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서강이 깨어나면 절대 네놈이 습격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마라. 네 놈은 그냥 이 여관에서 서강이가 쓰러져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데리러 온 것이야. 절대로 네가 서강이를 공격한 흉수라는 이야기는 하지 마.”
“굳이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런데 왜 그래야 하오?”
연무강이 그 천진난만한 질문에 진심으로 싫증을 느꼈다.
“형제가 제 목숨을 노렸다는데 즐거워 할 이가 어디 있겠느냐. 그것도 자신에게 호의로 대했던 네놈이, 서강이가 연씨 문중을 배신할 마음을 품는 게 두려우면, 나중에 서강이가 일어났을 때 그때 처신을 잘 하란 말이다.”
차가운 형님의 말에 연무진이 ‘아, 알았소이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간신히 기연조와 틀어져 연씨 문중의 안으로 안착한 녀석이었다. 연무진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면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연무강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또한 아버님이 세운 계략의 일부분이리라. 형제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서 연서강을 고립시키는 것. 고립된 연서강이 허튼 마음을 품을지, 아니면 다시 녹우당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있는 둥 없는 둥 소요하며 살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무의는 그 어느 걸 선택해도 흡족해 할 것이다. 연서강을 알게 모르게 해치워도 될 터이니.
그렇기에 그는 형제들과 연서강이 가까워지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특히 자신과. 다른 형제들이야, 적당히 사고사나 다른 핑계를 들어 속이면 되겠지만 자신은 그런 핑계를 들어 속여 넘길 수 없는 상대가 아니었다.
연무강은 다시 이를 으득 갈았다.
연무강의 표정이 험악해진 것을 깨닫고 연무진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런 연무진에게 연무강은 못을 박듯 반복해서 말했다.
“잘 부탁한다.”
“.......”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
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연무진이 순간 넋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연무강은 몸을 돌려 방 안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연무진이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홀로 남겨진 연무진이 무어라 생각하든 자신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연무의를 봐야 했다. 그것도 연서강이 깨어나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야무진 연의진도 아니고, 칠칠맞은 연무진에게 연서강을 맡기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왔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자신이 여관을 빠져 나간 뒤에 망연자실하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고뇌에 빠질 연무진이야 연무강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 *
꿈속인 듯 했다.
연서강이 그리 자각한 것은 비단 현실에 비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갑고 답답한 대기가 그를 찍어 누르는 듯 했다. 공기가 무거워서 숨을 죽인 채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앉아 있노라니 저어기 멀리서 하얗고 긴 것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연서강은 ‘꿈이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얗고 긴 것이 연서강을 향해 기어왔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스륵스륵 기어와 마침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발치까지 왔다. 우윳빛 비늘은 여전히 윤기가 흐르고 새까만 눈동자 역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뱀 신님.
연서강은 그것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허나 꿈이라서 그런지 소리는 허망하게 공기 중으로 흐트러져 사라지고 말았다. 뱀 신님. 그렇지만 역시 꿈속이기에 연서강은 부지런히 하얀 뱀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는 전연 없고 부른다는 의식만이 있었지만 뱀 신이 그것을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흑요석과도 같은 눈이 연서강을 응시했다.
-심심하구나.
꿈속의 흰 뱀은 늘 연서강에게 그리 말했다.
-심심하구나.
연서강은 두 눈을 깜박였다. 심심하십니까. 자신이 한 생각을 들었는지 뱀이 입을 다물고 연서강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보며 연서강은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심심하십니까.
허나 저는 전연 심심하지 않습니다.
뱀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찌 해서, 라고 진심으로 묻는 듯 해 연서강은 허탈하게 웃었다. 뱀 신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으시군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또 뱀이 똑같이 묻는다. 어찌 해서?
-그 망할 연놈들이 제멋대로 맺은 약속 때문에 근 스무 해가 넘도록 지루하였도다.
연서강은 뱀 신님이 전하는 바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대제국이 된 이래로 나라가 안정된 것은 퍽 기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심심하구나.
그럼 얼마나 제가 발버둥을 치고 악다구니를 써야 뱀 신님께서 심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연서강이 묻자 뱀이 연서강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와 쭉 머리를 내민다. 둥근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그 안에 독니와 날름거리는 혀가 보였다.
-자네는 실로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
연서강은 그것을 멍하게 보았다. 뱀이 다시 입을 빠끔거린다. 그의 머릿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그러니 약속을 깨다오.
“!”
연서강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헉헉, 거친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달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허나 그는 곧 자신의 몸에 열이 있기 때문에 그리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에 땀이 그득해 달라붙는 이불과 옷이 거북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던 그는 문득 손등에 까슬까슬한 천이 닿는 것을 느꼈다. 붕대였다.
붕대의 감촉을 느끼자마자 기억이 확 되살아났다. 자신이 이전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기억을 반추하는 연서강의 귓가에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습격을 당했던 것인가.
“일어났느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순간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이내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는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직되었던 몸이 한 순간에 스르륵 풀렸다. 말을 건 것은 연무진이었다.
“형님.”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기에 아는 얼굴을 보자 반가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방안이었다. ‘여관방이다.’ 그리 말하며 연무진이 주전자를 들어 잔에 물을 따랐다. ‘너는 줄곧 정신을 잃고 있었어.’ 연무진이 물을 담은 잔을 연서강에게 내밀었따. 연서강은 조심조심 상체를 일으켜 잔을 받았다.
받아든 잔이 따뜻해서 연서강은 잠시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지난 듯 했는데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여전히 그가 길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절로 스산해지는 몸을, 잔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방금과 달리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연서강은 가만히 잔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다가 이내 물을 마셨다. 곡물을 넣고 끓인 모양인지 물맛이 참으로 구수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물음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신 다음 연서강은 침상 옆에 서서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연무진에게 물었다. 어쩐지 맹하게 있던 연무진이 ‘어? 어!’하고 당황하며 연서강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무어라고 했느냐?’ 듣지 못한 것처럼 되묻는 말에 연서강은 의아해졌다. 연서강은 이마에 감긴 붕대를 만졌다.
“보아하니 전옥관 근처에 있는 여관인 듯 한데, .......제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형님은 또 어쩐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연무진이 크흠, 목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아니, 갑자기 이곳 여관에서 집으로 연락이 오는 게 아니냐. 네가 길에서 쓰러진 것을 이곳 여관 주인이 발견하고 여관으로 데리고 왔다고 하더구나. 해서 내가 오게 되었다. 강도라도 당한 게 아닌가, 하더구나.
그러시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연서강이 문득 미간을 좁히며 묻는다.
“연락이 무진 형님네로 간 겁니까?”
“아, 아니다! 본가로 갔었다. 내가 마침 서령이에게 볼 일이 있어서 본가에 갔었는데, .......아무도 집에 없더구나. 해서 내가 오게 되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아무 하인이나 보내셨어도 됐었는데.”
그 소리에 연무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아니다. 동생이 다쳤다는데, 내가 와야지.......’ 목소리의 크기가 뒤로 갈수록 작아지더니 결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연서강이 살짝 웃으며 연무진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 이번에 연무진은 꾹 입을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연무진의 반응이 이상해서 연서강은 ‘형님?’하고 그를 불렀다. 연무진이 고개를 퍼뜩 들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과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 뿐이고 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낯빛이 보통 어두운 게 아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어찌나 험악하게 굴렀는지 사지에 온통 생채기가 생겨 있었다. 그 상처들을 둘러보며 연서강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머리를 얻어맞던 그 찰나의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죽을 뻔 했다. .......죽는 줄 알았다. 죽는 줄.
싫어-!
“.......”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연서강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괜찮아. 괜찮다. 이제 자신은 안전하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한 번 차가워진 손은 좀체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서 연서강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손에 들었다.
허나 좀 전과 달리 따뜻한 잔을 손에 쥐고 있어도 한 번 들쑤셔진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를 얻어맞았을 때의 소름끼치던 감각도 감긴 붕대 아래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강도를 만날 줄은 미처 몰랐네요. 멍하게 걷고 있었더니, 낯선 곳에서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이리 값비싸게 치를 줄이야.”
애써 웃으며 연서강은 연무진에게 말을 건넸다. 연무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무서운 일을 당했던 사람이 필사적으로 주변 사람을 붙잡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서강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연서강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연무진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데리러 오게 만든 것도 미안한데, 자신이 그를 붙잡고 달달 떨기라도 하면 그가 얼마나 당황할까 싶었다. 그래서 그저 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홀로 감내하고 삭여야 하는 공포였다.
“.......그래도 그 강도가 그냥 가서 다행입니다.”
“.......”
연무진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되면 늘 입을 먼저 여는 것은 연무진이었다. 새로운 화제로 휙휙 잘도 바꿔서 이야기를 하는 연무진이었기에 연서강이 딱히 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대화는 무척 시끌시끌하게 이어졌었다.
그런 연무진이 입을 다물고 있노라니 연서강도 금방 대화 거리가 떨어져, 두 사람 사이에는 금방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제 무슨 말을 또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연서강은 퍼뜩 머리에 반짝이는 생각이 있어 ‘아!’하고 이불을 걷었다.
“뭐하는 게냐?”
“아니요. 여관 주인이 저를 발견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요. 모자라겠지만 사례금도 드리고 싶은데, 그러니 돈이.”
하고 대답하며 연서강은 침상에 내려와 제 허리춤을 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연서강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연무진이 ‘그, 그건!’하고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건 안 해도 될 듯 하구나. 내가 이미 하였으니.’ 연무진이 거기서 더 뭐라뭐라 말을 했지만 연서강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품 안에 돈주머니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손으로 만지니 묵직한 것이 처음 집을 나설 때와 별반 차이도 없어 보였다
강도가, ......돈은 손도 대지 않았네?
의아하게 생각한 순간, 연서강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머리를 쳤던 사람이 돈을 노린 강도가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상하게 섬뜩한 기분이 들어 연서강은 고개를 들고 연무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연무진은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돈도 이미 내가 드렸다. 우리는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단다. 그래, 가기만! 인사도 할 필요가 없단다.’ 그러다 연무진은 연서강이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연서강이 돈주머니를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아.’하는 소리를 냈다.
“.......돈은 안 잃어버려서 다행이네요.”
묘한 공기가 방 안을 떠돌았다.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져서 연서강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연무진이 대꾸하는 대신 꾹 입을 다물자, 또 그렇게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 연서강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대신 해주셨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형님이 고생이시군요.’라고 말하며 방안의 공기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연무진이 도와주지 않는다. 연무진은 안절부절 못하며 연서강을 수시로 힐끗 힐끗 볼 뿐이었다.
“형님?”
“.......서강이, 너......., 무강 형님을 어찌 생각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연서강이 멍청한 표정을 짓다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믿음직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그리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연서강의 말에서 별다른 위화감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연무진이 ‘그러냐.’하고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하고 그가 무어라 계속 웅얼거린다.
“무강 형님이, 사실 어릴 적에 너를 그다지 곱게 대해주지는 않지 않았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연서강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연무진을 보았다 여전히 흐린 낯인 연무진은 연서강을 힐끗 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허나 나는 그런 무강 형님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왜냐하면......., 무강 형님은 옛날부터 주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 아버님이 시키는 일만 재깍 해내고 남는 시간에도 부지런지 무예 연습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그러셨다. 어렸을 적 나는 무강 형님이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버님이 도술로 만든 인형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 무미건조하게 저리 살아갈 수 있냐 싶었지.......”
“그러셨습니까.”
여전히 의미도 의도도 파악할 수 없는 말인지라 연서강으로서는 그저 적당히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따.
“집착하시는 것도 없으시고, 욕심 부리는 것도 없으시고, 딱히 갖고 싶어 하시는 것도 없으시고, 좋아하시는 것도 없으셨다. .......계영이도 실은 내가 아니라 무강 형님께 중신이 갔던 사람인데, 내가 보고 반해서 중간에 가로막은 것이고......., 참으로 좋은 조건의 사람이었는데도, 무강 형님께서는 계영이 얼굴도 안 보고 나보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지.”
“.......”
“그런 사람이었는데, 너한테는 유독 이것저것 신경을 쓰시기에.”
연서강은 애써 웃음 지었다. ‘제가 유독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그러자 연무진이 ‘아니다, 아니야.’하고 부정을 표했다. 그게 아니고 무어가 있단 말인가.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입에 담긴 힘든 말이라도 하려는지 연무진은 어느새 제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런 것과는 좀 다르다. 너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형님은 아주 옛날부터 아버님에게서 유독 엄격한 훈육을 받으셨다. 아버님께서는 형님을 연씨 문중의 장자로서 흔들림 없이 굳센 이로 키우시고 싶으셔서 그러신 것이겠지만, 나는 형님께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연씨 문중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해치고, 누구라도 속이고, 누구라도 이용하실 분이지. 그 상대가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친동기라 할지라도 형님은 능히 그러실 분이다. 형님께서는 아마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연 적이 없으시겠지, 그런 것도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니. .......누구를 믿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역시 없으셨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연서강을 연무진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연서강이 묻자 연무진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따.
“......그런 분이신지라, 나는 형님께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실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가정을 만들 생각이 없는 분이지만, 혹여 가정을 만들게 되면 부인과 자식 될 사람들이 참으로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였다.”
모르겠다, 대체 연무진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리 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내놓는지. 연서강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침묵했다. 그것을 따라하기라도 하듯이 연무진도 다시 침묵했다. 조용해진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빗소리뿐이었다.
“서강아.”
돌연, 연무진이 고개를 들고 연서강을 보았다. ‘네.’하고 연서강은 대답했다. 다음 순간, 연무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다.’하고 속삭이며,
‘네?’하고 연서강이 되묻자 그가 다시 ‘미안하다, 미안하구나.’하고 계속해서 사과했다. 무슨 소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연서강은 ‘형님.’하고 당황해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연무진이 푹 고개를 숙이고 고백했다.
“내가 너를 죽이려고 했다.”
“.......네?”
거듭 연무진이 말했다.
“아까 전옥관이 있는 숲속에서 내가 너를 습격했다는 말이다. 강도가 아니다. 내가 너를 죽일 작정으로 습격했었다. 네가 전옥관을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밟았단 말이다.”
연서강은 애매한 얼굴로 연신 웃으며 ‘무슨 소립니까, 형님.’하고 고개를 저었다.
“형님께서 왜 저를 죽인단 말입니까? 제가 무얼 했기에,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형님.”
장난이라도 치고 계신 건가, 연서강은 갑자기 연무진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농이시겠지, 설마. 연서강은 그런 의미로 연무진을 불렀다. ‘형님.’
허나 그리 연무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조급함과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연무진은 아무 말 없이 일그러진 눈으로 바닥을 보고 있고, 방안에는 빗소리가 또 가득 채워졌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점점 길어지는 침묵은 상대방이 했던 말이 진실이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
연서강은 침상에 걸터앉은 채 신음을 흘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찻잔이, 손에 들어간 힘이 약해진 틈을 타고 떨어져 또르륵 이불 위를 굴렀다. 따뜻한 물이 쏟아져 이불을 적셨다. 그러나 연서강은 그것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진 형님이 나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이 여관까지 데리고 왔다고?
“.......거, 짓말이시죠? 형님.”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묻는 연서강을 본 연무진의 낯이 더욱더 칙칙해졌다. 연서강의 낯도 점점 흐려졌다. 연서강은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지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는 동시에 발밑에서 슬금슬금 차가운 기운이 올라와, 연서강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가슴속이 시렸다.
무진 형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죽이려고.
연서강의 뇌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머리를 얻어맞을 때의 그 순간의 기억들이었다. 그 찰나에 들었던 절망스런 감정들까지, 죽는다. 라고 생각했던 위기감까지.
“어째서,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연무진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명령하신 거였다. 네가 수상하니 기연조와 혹여 결탁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처리하라고 하셨다. 나는, .......거기에 동의했고.”
“.......아버님이.”
대답을 들은 연서강은 숨을 멈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버님이 무진 형님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왜, 어째서?
여린전에서 연무의가 자신을 못미더워해, 일부러 기연조의 처리를 자신에게 어찌 할까 물어봤다는 걸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한다고 하지 않았나. 더욱이 기연조를 처리할 계획을 연무의에게 말했을 때도 그는 딱히 연서강이 세운 계획을 허술하다고 반대하는 눈치도 아니었었다.
헌데 어째서?
그럼, 자신이 기연조를 적대시하든 말든, 연씨 문중을 배신하든 말든 아버님은 자신을 진작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비로소 연서강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아니, 실은 깨어난 직후부터 그의 몸은 계속 겁에 질린 채였다. 애써 진정하려고,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한 노력 때문에 몰랐을 뿐이었다.
연서강은 급히 침상에서 일어섰다. 순간 아찔해서 눈앞이 새까맣게 물이 들었다. 크게 흔들리며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하는 연서강을 연무진이 ‘서강아!’ 부르며 잡았다.
탁.
연서강은 그 손을 뿌리쳤다. 연서강에게 맞은 손을 잡고 연무진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죄책감을 보았지만 연서강은 그에게 더 이상 다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눈앞의 남자가.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의 앞에 있는 자는 더 이상 무진 형님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타인이 될 뿐이었다.
“가겠습니다.”
후들거리는 몸을 겨우 움직여 걸으며 연서강은 차게 말을 내뱉었다. 연무진이 크게 당황했는지 연서강의 뒤에 따라 붙으며 ‘서강아!’하고 외쳤다. 시끄럽다, 시끄러웠다. 연서강은 귀를 막았다. 그럼에도 옆에서 연무진이 말하는 소리가 여전히 귓속으로 들어왔다.
“서강아,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연서강은 걸음을 멈추고 연무진을 돌아보았다. 써늘한 아우의 얼굴에 연무진이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아직도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까?”
“.......”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어붙은 연무진의 얼굴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연서강은 몸을 돌렸다. ‘서강아!’ 연무진이 다시 그를 애타게 불렀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서강아.’라고 부르다니! 부르지 마. 그 목소리에 연서강은 몸서리가 쳐졌다.
그때.
“형님께서 너를 구해주신 거다!”
등 뒤에서 연무진이 외쳤다. 그 말에 연서강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연무진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께서, 너를 구해 주셨다. 무강 형님께서, .......너를 구하러 오셨다. 너를 죽이려는 나를 막아주셨어. 해서 네가 무사한 거다.”
“.......”
그러나 그 자리에 멈췄던 것도 잠시, 연서강의 몸이 이내 느릿하게 움직였다.
처음에 발을 옮겼을 때보다 현격히 늦어진 움직임이었지만, 연무진은 그를 차마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강 형님이 자신에게 연서강을 잘 보살피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등을 돌리기 전에 자신을 보던 연서강의 얼굴은 자신이 손을 댄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정도의 거부감이 드러나 있었다.
-형제가 제 목숨을 노렸다는데 즐거워 할 이가 어디 있느냐. 그것도 자신에게 호의로 대했던 네놈이.
“.......”
기억 속의 목소리에 연무진은 이를 악물었다. 무강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을 괜히 고백했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허나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서강이 자신을 앞으로 어찌 대하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자신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않나. 더 이상 한심해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
연무진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자신의 형님이 그리 말하는 것도 연무진은 처음 들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러나 연서강에게는 계속 내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슬부슬 차가운 비가 내려 자신의 온몸에 퍼져 있는 온기를 모조리 앗아가는 듯 했다.
하하.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걷던 그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하.
진실로 유쾌한 듯 웃는 그를 지나가는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버님께서 명령하신 거였다. 네가 수상하니 기연조와 혹여 결탁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처리하라고 하셨다. 나는, .......거기에 동의했고.
연무진의 고백이 마치 저주처럼 그의 몸을 옭아매는 듯 했다. 가시덤불에 걸린 동물마냥 그 말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면할수록 연서강의 마음은 상처받았다. 생채기가 나고 피가 났다. 허나 처참한 사실은 이리 아프고 아픈데, 단 한 발자국도 그 가시덤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시가 상처 난 곳을 찔러대어 상처는 더욱 크게 벌어지고 찢어졌다.
더욱이.
-너는 네 부모님이 병사한 줄로 아느냐? 천만에, 네가 부친이라 믿고 있는 연무의.
지금 그의 머릿속에 퍼지는 목소리는 되돌아온 그가 오로지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소중한 이의 것이었다. 얼마나 소중했던 이인가 하면 그를 위하여 한 때 집안을 배신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연무의가 죽였다. 네가 아직 어릴 적에.
크게 터졌던 웃음은 연서강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자 점점 그 소리가 작아졌다. 나중에는 ‘하, 하, 하.......’ 웃음도 거친 숨소리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되었다. 연서강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이마에 붕대의 까슬ㄲㆍ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너마저 죽이려고 한 것을 그 자의 부인이 막았다고 하더구나.
이어 생각난 것은 연무의였다.
-왜, 내 소매(小妹)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랴?
그 질문을 태연히 자신에게 했던 부친 되는 자의 얼굴과 목소리였다. 그때, 자신이 알려 달라 대답했으면 부친은 대체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자신이 부모님의 죽음에 의문을 품을까 경계하며 자신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려고 했을까, 아니면.......
“.......무슨 소릴.”
연서강은 다시 차게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부친께서는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든 결국은 자신을 주깅려고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이 달리 대답을 해서 부친의 마음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은 자신이 무얼 하든 한결같이 똑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성헌당에서 무섭게 자신을 몰아세우며 호통을 쳤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웃는 소리가 이어지다 곧 우는 소리가 되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연서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가렸다.
무진 형님이 나를 죽이려고 했어. 그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더 이상 좋아했던 이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었다. 허나 아니었다. 딱히 마음을 주고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가슴에 상처가 나 연서강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을 알고자 되돌아 온 후, 고군붙투했던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열매는 너무도 쓰고 시고 독했다.
* *
갑작스레 연무강이 성헌당을 찾아왔지만 연무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무강이, 네놈은 이 낮에 무슨 일인고?’하고 태연히 물어보는 그는, 조만간 연무강이 성헌당을 찾아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호롱불이 켜져 있는 성헌당의 안은 우중충한 밖에 비해 한결 밝았다. 심심풀이로 책을 읽고 있었는지, 연무의의 손에는 읽다 중단한 옛 시인들의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연무강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무의는 한 장씩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성헌당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 있는 연무강을 흘깃 쳐다보았다.
“뭐하누? 내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게 아니더냐? 헌데 왜 그리 서있어. 그리 뻣뻣하게 서 있으니 내 목이 다 아프구나. 어서 앉아서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왔는지 말해 다오.”
하는 말과 달리 그는 연무강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항상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떠는 부친이었지만, 연무강은 그런 부친의 태도가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런 부친을 내내 상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아버님.’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선 채로 연무강이 입을 열었다.
“연무진에게 서강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연무의가 한 쪽 눈썹을 올리며 ‘무진이가 그리 말하든?’하고 묻는다. 그러더니 그는 이내 다시 책장을 넘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이한 일이구나. 나는 무진이에게 그리 명하지 않았다. 그냥 서강이가 연씨 문중을 배신할 것 같으면 처리하라고 했을 뿐이지....... 내가 언제 그냥 죽이라고 했더냐. 무진이 이놈도 안 되겠구나. 비밀로 하라는 일을 그새 제 형님께 쪼르륵 가서 이르다니.”
혀를 쯧쯧 차며 연무의는 짐짓 서글픈 듯이 중얼거렸다.
“이 아비의 말은 우습고 제 형님만이 무서운가 보구나. 어릴 적부터 제 형님 말이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따르더니.”
그리고 연무의가 다시 힐긋 연무강을 본다.
“헌데 너도 이 아비의 말이 우습더냐. 자리에 앉으라 한지가 언젠데 그리 서 있어?”
건조한 눈빛으로 자신의 부친을 바로보며 연무강이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금방 나갈 터이니 서 있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야기가 아주 길어질 것 같구나.”
히죽 웃으며 연무의가 대꾸했다.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탁 덮어 서탁 위에 올려두고 연무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연무강을 향해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그래, 무진이가 서강이를 죽이려고 했느냐? 그런데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무진이가 너에게 ‘형님, 저 이제 서강이를 죽입니다.’라고 말하고 서강이를 죽이러 갔느냐?”
“무진이 놈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누군가를 죽이라 명하셨다고 하더군요. 무진이가 한 말은 그것뿐입니다.”
연무의가 서탁 위를 탕, 손으로 쳤다. ‘그것 참 기이한 일이구나!’ 그가 그대로 서탁 위에 손을 올린 다음 상체를 앞으로 쭉 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네가 어떻게 사실을 알게 되었을꼬? 정녕 무진이가 그 말 밖에 안 했다면.”
여전히 다 알면서 태연히 묻는 연무의는 흡사 연무강이 그간 얼마나 잘 행동했는지 평가라도 하는 듯 보였다. 연무강이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대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사건의 추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면, 부친께서 모르는 척 하며 넘어가실 거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굳이 자신의 입에서 듣고 싶으시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주리라.
“이제까지 제게 집안일에 대해서 숨김이 없으셨던 아버님께서 비밀로하고 무진이에게만 누군가를 죽이라 명하셨다면, 그건 제가 그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허나 그것만으로 어찌 서강이라는 것을 알았누.”
연무강이 서늘한 눈으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제 부친을 응시했다.
“아버님께서 누군가를 죽이려 하신다면 현재 제가 반대할만한 사람은 연서강, 하나뿐이니 그렇습니다.”
“.......”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연무강의 대답을 듣고 있던 연무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죽이는 걸 반대할 유일한 한 사람이란 말이더냐?’ 확인차 묻는 목소리가 혈육에게 하는 것치고는굉장히 사무적이다. 이번에도 연무강은 태연한 목소리로 ‘그렇습니다, 아버님.’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 서늘하게 웃었다.
“아버님도 그리 생각하셔서 연무진에게 시키신 것 아닙니까?”
연무의가 상체를 뒤로 물리며 ‘그럴 리가.......’하고 중얼거린다.
“네놈이 연서강을 근래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기는 했다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 암, 암, 그렇단 말이더냐.”
연무의의 질문은 계속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찌 하였느냐.”
“연무진 놈에게 사람을 붙이고 있던 차에......, 연서강이 전옥관을 향했단 소리를 듣고 급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연무진 역시 전옥고나으로 향하는 연서강을 따라갓다고 말을 이어 전해 들어서, 이놈이 전옥관에서 일을 치겠구나 생각을 하였습니다.”
“전옥관에? 서강이가 왜 전옥관에 갔을꼬.”
그 이유를 연무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연무강이 답하지 않자 역시나 연무의가 ‘그러고 보니 기연조가 거기에 갇혀 있다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꺼낸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연무강은 부친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어찌해서 서강이가 그리로 갔을꼬. 무슨 이유로? 더욱이 기연조를 거기에 넣은 것은 서강이가 아니지 않으냐. 서강이가 왜 그리로 갔을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무강이 차갑게 말했다.
“아버님.”
“왜 부르느냐.”
그가 한 발자국 부친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를 연무의가 의아하게,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쳐다본다. 서로 양보하지 않는 연무의와 연무강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왜 그리 서강이를 가만 두지 못해 안달이십니까?”
직접적으로 묻자 연무의가 ‘무어......, 서강이가 수상한 짓을 한 것은 틀림없지 않으냐.’하고 대꾸한다.
“내가 언제 아무 이유도 없이 서강이를 의심하더냐?”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은 소자도 알겠습니다.”
연무의가 피식 웃었다. ‘트집?’
“네가 그런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누구보다도 연서강을 싫어하고 미워해서 옛날부터 갖은 트집을 잡았던 것은 너이지 않으냐. 헌데 지금 나더러 연서강에게 트집을 잡고 있다라....... 네가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아비는 우습구나.”
연무강도 바로 대꾸했다.
“허면 소자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연서강은 황후마마를 도와 이번 일을 성공시켰으며 기연조를 처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연의향과 연서령을 도와 고립되었던 의경이 풀려나는 데에도 한 몫 하지 않았습니까. 그간 있어왔던 일들로 소자는 연서강이 연씨 문중에 도움이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전과 달리 생각하게 디었다는 소리입니다. 헌데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생각을 달리 하고 있지 않으시니 제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길게 이어진 말은 겉보기에는 참으로 타당하게 보였다. 연무의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저 연무강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무강은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서강이를 가만히 놔두십시오.”
“.......”
침묵하고 있던 연무의가 돌연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무강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그리 있던 연무의가 ‘무강아.’하고 그를 묵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아버님.’
“내가 너를 왜 신뢰했는지 아느냐.”
갑자기 꺼낸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너라면 이 연씨 문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아비도 처리할 수 있다 여겨져 그랬던 것이다. 황후마마와 이 집안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희생시킬 수 있는 인간이라 여겨져 그런 것이었단 말이다.”
그간 연무강은 진실로 그러했다. 황후마마와 연씨 문중을 위해서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용하고, 죽이고, 속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연무의의 손에 키워졌기 때문이었다. 연무강. 스스로도 자신이 그러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가문이 아닌 다른 것을 귀히 여긴 적이 없었다.
“너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또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지 않았느냐.”
그랬었다.
연무의가 돌연 날카로운 눈빛을 하며 연무강을 노려보았다.
“그런 너를 연서강이 다 망쳐놓고 있구나.”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싹 가신 채 진지함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런 데도 연서강에게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이더냐? 무강이, 네 스스로를 잘 돌아 보거라. 예전의 너와 판이하게 다르지 않으냐. 연서강이 본채로 돌아온 이후부터 줄곧 안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구나. 대체 원래의 너로 되돌리려면 내가 어찌 해야 하누.”
진심으로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연무의의 얼굴에 근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허나 연무강은 속지 않았다. 자신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무강 스스로도 연서강에 관련된 일에는 자신이 전혀 평소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무의가 연서강을 자꾸만 위협하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하는 말 또한 그저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연서강을 해치기 위한 당위성.
연무진에게도 아마 비슷한 화법을 구사했을 것이다. 연무진이 자신에게 했던 말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안계영’이나 ‘아이’를 들먹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연무의가 잘 쓰는 방법이엇다. 대의를 위해 움직인다고 믿게 하는 것. 또는 잘못된 것을 옳게 고치는 것이라 믿게 하는 것.
연무진이나 다른 이라면 모를까, 아버님의 곁에서 그를 보필한 게 몇 년인데 자신이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갈까. 되레 그는 확신했다. 연무의가 연서강에게 각별한 증오를 품고 있다는 것을. 연무강은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허면 지금 제가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소자가 생각하기에 현재 연씨 문중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아버님이신 것 같습니다. 벼슬한 자리를 달라는 이를 도발하여 전쟁터로 보낸 사람도 아버님이시고, 그럼으로써 변방에서 그 치가 공을 세우게 만든 사람도 아버님이십니다. 돌아온 그 놈을 벼슬자리에 올려놓고서도 계속해서 의심하여, 진심으로 이 문중을 도우려는 그 놈의 뜻을 곡해해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해치려고 하시다니.”
차게 웃으며 그는 부친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버님의 아집 덕분에 연서강도 이제 미련 없이 이 집안을 등질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는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자를 등 뒤에서 칼을 휘둘러 이제 적군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존재가 연씨 문중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
연무강의 말을 듣는 연무의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갔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을 상대함으로써 단련이 되어 저절로 얼굴을 가장했던 ‘표정’이 사라지자 그의 얼굴에서 나타난 것은 노골적인 불쾌함이오, 누를 수 없는 못마땅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부친의 숨겨져 있던 진실된 표정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대체 이제까지 연서강의 무엇을 보고 계셨단 말입니까.”
자신에게도 전달되었던 연서강의 절박함이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단 말인가. 부친께서 설마 연서강이 기연조를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만무하고, 그러시다면 응당 황후마마나 다른 가족들처럼 ‘신뢰할 만하다.’라고 평을 내려주셔야 하지 않은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순간 연무의가 피식, 가벼운 숨소리를 닮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을 보고 있다라. 그가 한 번 더 중얼거리며 서탁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당연하지 않으냐.’ 그가 말하며 연무강을 바라본다.
“그 아이의 앞날이다.”
“앞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와 연무강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과거란 말이 응당 나올 줄 알았는데 앞날이라니 의외였다. 연무의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반드시 연씨 문중을 배신하게 된다. 반드시, 이건 틀림없음이야.”
“.......어째서입니까.”
마치 망령의 저주처럼 그리 읊는 연무의에 연무강이 설핏 인상을 썼다. 연무의가 다시 시집을 들어 파라락, 책장을 넘긴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담은 일기장을 넘기듯이.
“그야 연서강의 부모를 내가 죽였으니 그렇지.”
“.......”
그의 검은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번뜩이는 것을 연무강은 보았다. ‘죽였다고 하셨습니까?’ 되묻자 연무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다.
“아무렴. 부친은 연우비 년을 끌고 올 때 죽였고, 연우비....... 그년은광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
“아이, 그래, 아이가 있더구나. 가문을 더럽힌 주제에 어디를 가서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꾸린단 말이더냐. 해서 아이와 함께 광에 가두었더니 그 년이 사정을 하더구나. 아이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그래도 무시하였다. 홍월정 뒤 쪽 숲에 말이다. 무강아, 광이 하나 있단다. 그 광에 가두고 집안사람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였지. 때문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아는 사람들도 전부 밖으로 내쫓았거나, 나이가 많아 죽었으니 .......이제 집안에 내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겠구나.”
말을 마치고 힐긋 연무의가 연무강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기억이 나누?’ 연무진이야 그 당시에 8살 꼬꼬마였으니 모를 가증성이 높았다. 허나 연무강은 그때, 12살이었으니 어쩌면 알 수도 있었다.
“몰랐던 일입니다.”
그저 그는 연우비가 갑자기 임신을 한 상태로 찾아와 아이를 낳고 죽었다고 들었었다.
“그렇겠지. 너는 당시에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닦았던 모범생이었으니까. 이 아비도 한눈 안 팔고 제 할 일에만 열중하는 네놈이 어찌나 기특했는지.”
홍월정에 갔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부모님이 시킨 일을 한다고 간 게 전부였고, 그것도 아주 가끔이었다. 그래서 연우비가 광에 갇혀 있는 기간 동안 자신이 홍월정을 들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12살이었던 그때는 아버님께서 간단한 심부름 정도야 시켰지만, 아직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 전모에 대해서는 쉬쉬하셨던 때이기도 했다. 별달리 할 말이 없어 연무강은 입을 다물었다.
“고것이, 한 열흘을 버텼을까. 어쩜 더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어찌 되었든 광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나기에 사람을 시켜 한 번 열어보았더니 연우비 년은 죽고 아이만 살아있더구나. 아이를 죽이려고 하자 어디서 네 어미가 듣고 나타나 아이는 살려 달라 사정사정하였지. 네 어미가 보통 착한 사람이어야지.”
그리하여 연서강이 갑자기 본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다만 본채에 들어와서 병으로 죽었다, 밖에서 죽었다, 등등 말만 무성했던 연우비였다. 그렇게 말만 무성했던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연서강이 제 부모를 내가 죽였다는 걸 알게 되면 어찌 나오겠누? 빤하지 않으냐. 핍박받은 것도 억울한데, 부모까지 살해한 나를 가만 두겠느냐? 아마도 연씨 문중에 커다란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연무강이 연무의를 보았다. 연무강과 시선이 마주치자, 연무의가 한 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는다. 그의 얼굴을 가장하는 ‘표정’이 다시 생성되었다.
“그 앞날. 그것을 보고 있다, 나는.”
“.......”
“무강아 잘 생각하여라. 그 놈을 살려두고 있으면 그놈이 필히 연씨 문중에 해악을 가져올 것이야. 그래도 내가 서강이 놈에게서 괜한 트집을 잡는 게냐? 아니면 내가 그럴 만 하더냐.”
연무의의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그 목소리에는 실제로 거짓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아마도 부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터. 허나.
“아니, 모르겠습니다. 역시 저로서는 괜한 트집을 잡는 것 같습니다.”
“.......무어라?”
연무의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묻는다. 마치 연무강이 이리 반응할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연무강은 ‘죄송합니다만, 아버님.’하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아버님께서 지레 겁을 먹으시고 갖은 핑계를 대어 연서강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아버님의 의견이 다른 듯 합니다. 아버님은 역시 연서강에 대해서 아무런 것도 보고 계시지 않으시군요.”
하지만 그것은 연무강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에게.
“키워준 부모와 낳아준 부모가 응당 모두 소중하기는 합니다만, 연서강은 키워준 부모와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낳아준 부모를 살해했다고 해도 복수할 만한 재목은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악독한 성격은 못 되었다.
“오히려 집을 나갔거나 전번처럼 녹우당에 틀어 박혀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녹우당으로 도망쳤으며, 간신히 본채로 돌아오니 부친께서 형제를 시켜 자신을 살해시키려고 한 작금의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연무강은 다시 표정이 사라진 연무의를 보았다.
“지금은, 아버님의 말씀대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서강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니 연서강도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는 한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집안에서는 이미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고, 밖으로 내쫓은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말을 흘려 그것을 연서강이 듣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
-배신이요? 이제 들으셨으니까 아셨지요. 기연조와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형님.
그때의 외침 또한 정녕 어찌된단 말인가.
-허나 당신 때문에 배신을 안 한 게 아닙니다. 절대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가족들에 대한 감상을 연서강에게서 들은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또 유일했다. 그때까지의 연서강은 가족들 중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나름 애착이 생겨난 듯 보였다. 연의진이나 연서령이나 그런 형제들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 그리고. ......연무진은, 연무진을 생각하며 연무강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놈이, 연무진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몰라야 하는데.
“.......아버님이 어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아버님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연서강을 위협하는 것은 그만 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이상 연서강을 자극시키는 것은 아버님 말씀대로 연씨 문중에 안 좋은 일만 가져올 것입니다.”
말하며 연무강은 부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의 부친이었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돌아가서 연서강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봐야 할 듯 싶었다. 그 놈이야 자신이 싫으니 자신의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을지언정.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무강은 연무의를 향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모쪼록 아집에서 벗어나 현명하게 판단하시어 제가 존경해마지 않는 아버님으로 다시 돌아오셨으면 합니다.”
허나 연무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집요하며 어찌나 고집스러운지. 그래서 연무의가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말을 수긍하듯 듣고 있다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고 입 안이 썼다.
어쩌면 연서강이 아니라 자신이 연씨 문중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연 들었다.
* *
성헌당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시끌시끌했다. 성헌당 안에는 연무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는 떠들지 아니 하고 멀찍이서 떨어져 수군거려 성헌당 안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음이었다. 그 말은 즉, 연무의의 귀에 이 소란이 들어가는 것을 꺼려한다는 말도 되었다. 문득 연무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마침 부리나케 지나가는 여종 하나가 있기에 불러 물었더니 여종이 연무강의 얼굴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큰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그 목소리만 들으면 여간 큰일이 아닌 듯 했지만 연무강은 일단 차분하게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연무강을 발견하고 ‘혀, 형님!’하고 연무진이 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연서령과도 함께 있었다. 연서령의 얼굴표정도 좋지 못해 연무강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서령이 외쳤다.
“큰 오라버니! 연서강이, 서강 오라버니께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오.”
“뭐?”
어째서 지금 연서강의 이름이, 하다 연무강은 연무진이 여기 본채에 와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도성 밖에 위치한 여관에서 연무진에게 연서강을 잘 부탁한다고 나왔었는데, 헌데 연무진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연무진, 너.”
연무강이 자신을 쳐다보자 연무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쩐지 말하기를 주저하는 그를 내버려두고 연서령은 연무강의 옷을 잡았다. 평소에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큰 오라버니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달랐다.
“무진 오라버니가 연서강을 놓치셨답니다. 서강 오라버니께서 많이 다치셨다고 하는데, 집으로 와야 정상인데 오지 않으셨다고 하오. 다친 몸으로 어디로 가신 걸가요, 대체!”
그녀의 말은 혼란에 빠져서 그런지 연서강에 대한 호칭이 제멋대로였다. 연무강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연서령의 뒤에 숨으려고 하는 연무진을 노려보았다.
“연무진!”
험악한 목소리로 부르자 연무진이 이실직고하였다.
“서, 서강이가 먼저 여관을 나왔소이다. 그냥 나는 집으로 갔겠거니, 하고.”
“이........”
거기까지 입을 열었다가 연무강은 주변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치솟는 말을 꾹 눌렀다. 대신 그는 연무진의 뒷덜미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갔다. ‘아, 형님! 제가 갈 수 있소! 제발.’하고 연무진이 소리치는 것은 전부 무시했다.
“어찌 된 일이냐!”
간신히 사람들의 이목을 따돌리고 연무강이 연무진에게 물었다. 그제야 연무진이 희미한 목소리로 실토했다.
“형, 형님이 구해준 거라 말했소이다.”
연무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 연무진이 에라 모르겠다, 싶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버님의 명을 받잡고 너를 해치려는 찰나에 형님께서 구해주셨다고, 서강이에게 말하였소! 말하였단 말이오.”
“연무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연무강은 연무진의 뒷덜미를 놓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무어라 했느냐. 절대 밝히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허, 허나.”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멱살을 잡힌 연무강이 시퍼래진 얼구롤 입을 열었다.
“형, 형님의 진의를 알아주기를 바랐소. 나는, 서강이가 형님을.”
거기까지 들어주는 게 한계였다. 연무강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연무진을 확 밀쳤다. 거세게 밀쳐진 연무진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멀리서 자신들이 하는 양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연무강은 더 이상 연무진을 어찌 하지 못하였다. ‘미안하오, 형님. 미안하오.’ 연무진이 연무강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달리 심장 한 구석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욱이 여기서 연무진을 더 상대할 시간도 없었다. 이미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다.
“연서령.”
부르자 연서령이 멀리서 대답하며 재빨리 연무강의 곁에 와 섰다.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연무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네가 연서강이랑 다녔던 곳이 있지 않으냐. 거길 중심으로 해서 저잣거리를 뒤져 보아라.”
“알, 알겠소.”
연무강의 말에 연서령이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갔다. 연서려이 사람들 다섯 여섯을 이끌고 저잣거리로 향했다. 연무강이 연무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의 수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는 눈이 많기는 했다. 연무강의 눈에 서린 빛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는지 연무진이 ‘형, 형님.’하고 그를 희미한 소리로 불렀다.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은 잠시 틈을 두었다. 그리고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였다.
“너는 궐 근처를 찾아 보거라. 입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궐 근처와 서강이가 갈 만한 곳을 찾아.”
“알, 알았소.”
자신이 실수한 만큼 재깍 대답하며 연무진이 자리에서 흙을 털고 일어났다. 재빨리 모습을 감추며 사라지는 연무진을 보며 연무강은 뜨거워진 이마를 짚었다.
연무진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에 더 바빴기 때문에, 연서강의 감시를 소홀히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미행을 하라 붙인 부하도 아마 연무진에게 더 무게를 두고 따라갔을 것이다. 허나 무턱대고 찾는 것보다는 나아 보여 그는 우선 부하를 불러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본 데가 어디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치겠군.
어쩌면 일이 이리 꼬이는가 싶었다. 마치 누군가 질 나쁜 장난이라도 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