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기연조가 갇혀 있는 곳은 전옥관(典獄館)이라 불리는 수감시설이었다.
전옥관은 여러 사람이나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범죄나 파급력이 비교적 큰 사건 등을 일으킨 범죄자들이 수감되는 곳으로, 실제로 흉악한 범죄자들의 수는 별로 없고 정치범들이나 범죄를 저지른 귀족 자제들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다. 전옥관은 도성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그 주변은 깊고 울창한 숲인지라 도시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전옥관은 범죄자를 오래 수감하는 시설이 아니고, 다만 별도의 판결이 필요한 범죄자들이 판결문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열흘에서 보름 정도 갇혀 있다 나가는 중간 수감 시설이었다.
일단 궐내의 정위부나 지역 관청, 지방 군현의 관아 등에 설치되어 있는 별도의 옥에 갇혀 있다 전옥관으로 이동, 거기서 판결이 확정이 되면 다시 각 지방이나 도성 내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수감시설로 이동되었다.
일반 감옥들은 평당 7명 정도의 죄수를 수용하여 편안히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허나 전옥관은 수용되는 죄수들의 질이 일반 죄수들과는 현격히 달랐기 때문에 그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낫다고 해봤자 겨우 발 뻗고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기는 했지만 일단 1인실이었기 때문에 보통 감옥에 비하면 매우 넓은 축에 속했다.
위생 정도도 전옥관이 일반 감옥보다는 훨씬 좋았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각종 병균의 온상지인 일반 감옥과는 달리 전옥관에서는 죄수들을 위해 마실 물을 수시로 넣어주었으며, 씻을 수 있는 물도 따로 제공해주었다. 또한 겨울철에는 옥 안에 이불을 깔아주기도 했다. 옥졸에게 토색질을 당하는 경우도 다른 곳에 비해 적었고, 옥졸의 성격 역시 다른 데에 비해 점잖은 편에 속했다.
허나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었기 때문에, 귀족 집안 도련님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옥에 갇히게 된 기연조는 꽤나 고생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죄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피해자인 거승주의 숨통을 끊어 놓은 것이 분명한 검, 즉 살인에 이용된 흉기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기연조에게 내려진 처벌이 관직을 삭탈하고 지방의 수감시설로 이동시켜 삼 년의 옥살이를 하게 하는 것에서 그쳤다는 점이었다.
옥살이를 하던 와중에 흉기가 발견이 되면 다시 전옥관으로 올라와 더 중한 벌을 받게 될지 모르나, 일단은 그렇게 거승주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더구나 말이 삼 년의 옥살이지, 그의 부친인 태중태부 기가우와 친척인 승상 기능묵이 사정을 한 덕에 그가 옥살이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귀양 온 죄인이 기거하는 한 채의 초가집이었다.
물론 감시의 시선이 따라붙기는 하겠지만 원한다면 집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고, 음식도 고기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둥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도 자유였다. 말만 옥살이였지, 실상은 지방으로 좌천되어 자숙의 시간을 삼 년 가지는 것에 불과했다.
기연조의 무죄를 굳게 믿는 기가우와 기능묵은, 사정이 좀 더 괜찮아지면 기회를 봐서 다시 너를 중앙으로 부르겠다고 기연조에게 말해준 듯 했다. 그야말로 물렁하기 짝이 없는 처벌에 기씨 문중의 정적인 연씨 문중에서 불만이 나올 법도 했지만, 웬일인지 사사건건 승상 기능묵의 일에 참견을 하곤 했던 태위 연무의는 이번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기씨 문중에서는 잘됐다고 여기기는커녕 되레 분노하며 연씨 문중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들은 기연조가 간악한 연씨 문중이 파 놓은 덫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두서너 번 기씨 문중 사람들이 귀양을 간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연무의가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황자가 마침내 자신의 바람대로 사망하였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씨 문중은 더 이상 귀비에게 열을 올리는 기씨 문중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황태자의 지위를 반석에 올리기 위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귀비가 낳은 아이가 죽어 달리 황태자의 지위를 넘겨줄 아이가 없기에 당분간은 안전하겠지만, 언제 또 황제의 가슴속에 변덕이 일지 모를 일이었다. 달리 넘겨줄 아이가 없다하더라도 황제가 원하면 지금의 황태자를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입니다.”
앞서 가던 옥졸이 연서강에게 말하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손을 뻗었다. 벽에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횃불들이 줄을 지어 매달려, 어두운 계단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크게 타오르는 불빛에 비쳐 귀신처럼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저 아래 까마득한 계단 끝에 삼켜진다. 마치 지옥을 향한 길처럼 열려 있는 계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연서강은 대답하며 자신을 안내한 옥졸에게 작은 가죽 주머니를 주었다. 주머니를 흔들어 그 안에서 들려오는 금속성으로 대략의 은자 개수를 확인한 옥졸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약속대로, 반 시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옥졸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연서강은 이내 결심을 굳히고 어두운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갔다. 한 칸씩 한 칸씩, 그저 계단을 내려가는 것뿐인데 자신이 마치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했기 때문일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연서강은 중간부터 손바닥으로 돌 벽을 짚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가는 계단이라 어느 정도 어둡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위 분간은 가능할 텐데도 이상하게 연서강의 시야는 어둡고 아찔하기만 하였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는다.
그를 안내해준 옥졸이 말하기를, 지금 지하에는 오직 기연조만이 수감되어 있다고 하였다. 근래까지 수확제 준비 기간이었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이 바빴는지 여기 전옥관에 수감될 만한 죄수가 없었다는 말도 이어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왜 연씨 문중의 사람이 기연조를 찾는지 의아해 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대놓고 물어볼 담력은 없었는지 다행히 별다른 말은 없어서 연서강은 다소 안심했다.
기연조만 있다니, 마침 잘 되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편이 서로를 위하여 나았다. 또, 거기서 자신이 꺼낼 말들도 전부 심상치 않은 것이 될 게 분명하기에.......
마침내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잠깐 계단 위를 쳐다보았다가 연서강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창살로 굳게 닫힌 빈 감옥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연서강은 비로소 기연조가 갇혀 있는 감옥을 찾아냈다.
“연조.”
기연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옷과 머리가 모두 엉망이었다. 언제나 반듯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행색은 걸인과 크게 다름이 없어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비록 자신의 마음을 농락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연서강의 마음속에서 늘 빛나고 고운 이였었건만.
연조.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다시금 부르며 연서강은 창살 가까이로 다가갔다. 여기 오기 전에는 기연조를 보면 말은커녕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염려했었는데 바로 눈앞에 그가 초라한 행색을 한 채로 구속되어 있자 그런 생각이 전연 들지 않았다.
연서강은 창살을 쥐고 다시 기연조를 불렀다.
“연조, 나일세. 괜찮다면 고개를 좀 들어 보겠나.”
“.......”
여전히 옥 속의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연서강은 돌연 초조해졌다. 전옥관이 다른 감옥들에 비하면 처우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지 않은가. 옥졸에게 뭔가 심한 꼴을 당한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탈이라도 난 겐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디 잘못 맞아서 크게 다친 것은 아닌가.
그때였다.
“서강이, 자네인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심하게 쉰 목소리로 남자가 말한다.
“그렇다네, 고개를 좀 들어 보겠나. 어디 크게 다치기라도 했는가.”
연서강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크크크크, 그 웃음소리에 연서강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늘 반듯하고 올곧았던 기연조가 낼만 한 소리가 아니란 생각에서였다. 음험하고 저열한 웃음소리였다. 마치 거리의 왈패처럼.
기연조가 웃다가 쿨럭쿨럭 기침을 한다. ‘미치겠군.; 그리고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린다.
기연조가 고개를 들었다. 땅바닥을 뒹굴고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해 그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낯빛이 시꺼멓고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것도 모자라 피로와 고됨 때문인지 눈빛이 단정치 못하고 거칠었다.
그가 연서강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이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가 아닌가.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더니!”
연서강은 침을 삼키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 괜찮은가?”
몸의 상태는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허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기연조의 정신 건강이었다. 어딘가의 나사가 풀어진 듯 헐렁한 모습의 그가 연서강은 낯설었다. 역시나 살인자로 오인 받은 일이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모양이었다.
기연조가 대답 없이 천천히 제 몸을 일으켰다. 전옥관에서 제공해주는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지도 않았는지 기연조의 몸은 다소 말라있었다. 기력 없는 몸을 순전히 오기로 일으키고 있는지 그의 사지가 순간 크게 휘청했다.
‘연조!’ 그것을 본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연조가 그 부름에 고개를 들어 연서강을 보았다.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왜 왔나? 내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왔나? 몰랐는데 자네에게 참으로 고약한 취미가 있었나보군. 자신의 손으로 감옥에 처넣은 사람의 모습이 그리 보고 싶었나.”
“.......”
연서강이 아무 대답도 못하자 다시 기연조가 웃는다.
“게다가 ‘괜찮은가?’라고 물었나. 미치겠군. 자네, 정녕 제정신인가? 제정신인데도 그런 말이 나오던가? 자신이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낸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연서강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잿빛 바닥 위로 정체 모를 검은 곤충이 지나가고 있었다. 긴 더듬이를 움직이며 느릿하게 기어가던 곤충은 이내 기연조가 들어 있는 감옥 안으로 사라졌다.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네.”
더 이상 옛 친우의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대로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세운 계략에 휘말려 저리 된 친우이다. 보는 데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심장이 우그러드는 것 같았다.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연서강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연조 자네, 정녕 나를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나를 이용하려는 목적 외에, 다른 마음으로 내게 다정하게 대해준 적이 정말로 한 번도 없었는가? 내가 변방에서 행방불명되었을 때, 자네가 나를 찾아 달라 태상경을 찾아가 부탁 드렸었다고 들었었네. 그, 대는.”
거기까지 말한 연서강은 하던 말을 멈추고 꾹 입을 다물었다. 하지 못한 뒷말이 닫은 입 속을 맴돌았다. ‘그때는, 그때만큼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러나 도저히 그 말이 안 나왔다. 염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서 그는 ‘나는.’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자네를 진심으로 좋아했네.”
아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아아, 하지만 도대체 무어라 말을 시작해야 옳고 바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되돌아온 자라고 말을 할까. 허나 그것을 연조가 믿어주기는 할 것인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삿된 장난까지 치러 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허나 정말인데. 그것이 진실인데.
연서강은 창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를 구하려고 이런 것이네.”
“구하려고?”
바람이 새는 듯한 가벼운 코웃음 소리와 함께 기연조가 되묻는다. 그 말을 들으니 겨우겨우 끌어 모았던 용기마저도 스르륵 사라져서,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안 된다. 여기서 물러나면 애써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연서강은 마침내 결심하고 고개를 들어 기연조를 보았다.
감옥 안에서 기연조가 팔짱을 찐 채 자신에게 삐딱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큰형님과 아버님께서 자네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알게 되었었네. 그래서 나는 자네가 죽임을 당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네. 해서 그들이 왜 자네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아야만 했네, 해서.”
해서 변방으로 갔고, 공을 세웠다. 돌아와서 벼슬을 얻었으며 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자네는 거승주를 통해 그들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겠지만, 그들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네. 해서 자네를 죽이려고 한 걸세. 자네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자네가 죽는 것만은 막고자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런 수를 쓸 수밖에 없었네.”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말하고 나니 알겠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고자 마음을 먹었는지. 기연조에게 진실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그에게 하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자신에게 좀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를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았는지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큰형님의 손에 죽지도 않았겠지. 참으로 나태하게 살았었다, 이전의 자신은.
“.......정말로 미안하네.”
“.......”
기연조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서강은 그 침묵마저 아픔으로 느꼈다. 아린 심장을 담은 늑골이 써늘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극도의 긴장으로 인한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강아.”
그때, 기연조로부터 드디어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쉬어있어 거칠기는 했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많이 부드러워진 소리였다. 무엇보다 그가 언급한 ‘강아.’란 호칭에 연서강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그가 다시는 자신을 그렇게 다정한 호칭으로 불러주지 않을 것이라 연서강은 생각했었다. 영원히 그에게서 친근한 시선 하나 받지 못하리라.
허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연서강은 흐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연조.......”
그리고 눈앞의 정인을 보려고 했다.
그 순간, 덜컹 창살이 울렸다. 기연조의 팔이 창살 틈으로 쑥 빠져나와 연서강의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의 두 눈이 크게 커졌다. 연서강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쥔 기연조가 자신 쪽으로 연서강의 몸을 끌었다. 숨이 막혀 얼굴이 새하얘진 연서강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괴로워하며 몸을 비트는 연서강을 차게 쏘아보며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속을 것 같나.”
그리고 연서강의 얼굴에 침을 퉷 뱉었다.
“차라리 먼지를 모아 금탑을 세운다고 하여라.”
말을 마치고 기연조가 연서강의 멱살을 놓으며 그를 확 밀쳤다. 연서강은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보며 기연조가 낄낄거렸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자고 정신을 차린 연서강은 그런 기연조의 단정치 못한 모습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기연조가 뱉은 침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 바닥에 뚝 떨어졌지만, 그는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연서강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연조, 자네.......”
허나 놀랍고 경악스럽다는 말은 오히려 연서강보다 기연조가 더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차라리 가족들에게 미움 받다가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 그랬다고 하여라, 강아. 그게 더 설득력이 있겠구나.”
그리고 그는 팔짱을 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자네. 역적 집안의 핏줄은 어디로가도 과연 역적 집안의 핏줄인가 보군. 어찌 이리도 사람이 야비하고 더러울 수가. 자네를 동정하고 아껴주었던 내가 바보 같았네. 내가 병신이었지, 어찌 저런 놈을.”
다시 기연조가 바닥으로 퉤 침을 뱉었다. 연서강을 노려보는 기연조의 눈이 적의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히 내게 살인의 누명을 씌우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기연조가 이를 뿌득 갈았다. ‘어린 여자애를 죽이더니, 그때 인륜도 모두 저버렸나 보군.’
“.......”
자신을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는 기연조를 응시하는 연서강은 때때로 숨을 들이키기만 할 뿐, 내쉴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 나는, 하고 입이 열렸다가 이내 닫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연서강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기연조에게 증명할 자신이.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네. 진실이야, 나는.”
“그게 정녕 진실이라면 강아, 자네 정신병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너를 스무 해 넘도록 괴롭히기만 하던 역적 집안 쪽의 편을 들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자네 혹시 맞고 괴롭힘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변태였나? 형님들에게 맞으면서 너무도 좋았는데 내가 괜한 오지랖을 떨어 자네를 구해준 것인가? 그렇다면 내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어.”
기연조의 조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를 않나, 어리석다, 어리석어. 지금껏 녹우당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한 주제에,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한단 말인가. 무어라고? 자네 그때 나더러 무어라고 했나.”
“.......연조.”
“황상께서 여인에 눈이 멀어 총기를 잃으셨다고? 신하된 자로서 응당 옳은 길로 가시도록 말씀드려 고쳐야 한다고? 정말 웃기는군!”
기연조가 크게 웃었다. 강아, 강아, 강아! 그렇게 외치며 그가 핏발선 눈으로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강아! 황상께서는 모든 일을 제대로 보고 계신다고. 황상 폐하께서 황태후의 치마폭에 여태 싸여 계시다고? 뭣도 모르는 역적 집안 나부랭이 주제에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마라!”
그렇게 기연조가 말했던 것을 연서강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냥 의미심장하게만 들렸던 그때의 말 속에 숨겨진 진실을 기연조가 폭로했다.
“황상 폐하께서 연소(年少)하셨을 때부터 황태후는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그 분께서 생명을 부지하시려면 황태후가 하는 말을 모두 들으며 멍청한 척을 하셔야 했단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등신 주제에. 네까짓 놈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감히 그 분을 욕보인단 말이더냐! 황태후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하여 누구보다 영명(英明)하시면서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태후마마의 치마폭에 싸여 있는 척 구셔야 했던 그 분을!”
“.......뭐, 무어라고?”
연서강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자네 무어라고 하였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면서 연서강은 입술을 달싹였다. 죽을 위기? 어리석은 척? 그럼, 귀비의 애교에 총기를 잃으신 게 아니라고?
자신이 속해 있는 연씨 문중에서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연무진이 그러지 않았나. 황상께서는 성정이 아직 어리시다고. 귀비의 미모와 교태에 넘어가신 거라고. 황태후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비단 연무진 뿐만이 아니었다. 황후마마는 물론이고, 무강 형님도 그리 알고 계셨고, 하다못해 부친인 연무의까지도 그러했다.
“황귀비마마를 살해한 그 독사 같은 년과는 우리도 손을 잡기 싫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당금 황상께서는 황귀비마마의 유일한 혈육, 황태후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단 말이다. 해서 황태후와 손을 잡은 척 하고 그녀를 감시하려고 하였다. 그 년이 나이를 먹어 뒈진 후에야 황상께선 비로소 이 지옥에서 벗어나실 수 있겠지.”
그러나 연서강이 아예 생각지도 못한 진실은 또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라면 연무진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하다못해 온 세상 사람들도 아리송하게 생각했던 일이 아니었나. 선대 황제와 황귀비마마를 살해한 것이 분명한 황태후를, 지금의 황상께서 어째서 이토록 잘 따르는 것인지. 제 부모를 죽인 여자인데 살심도 들지 않았는지. 그 여자가 참으로 세뇌 한 번 잘 했다고. 또 그런 황제를 보고 어리석다고, 멍청하다고 말도 했었다.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모든 의혹과 모든 말들이 기연조의 폭로를 통해 한 번에 통째로 꿰어졌다.
.......그랬던 것이다.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연서강은 기연조를 보았다. 기연조도, 자신에게 영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황상께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고 계시며 황태후마마를 잘 모시고 계신다는, 그 말.
“나는, 몰랐.”
“당연하지 않으냐, 강아! 황태후가 혹여 알게 되면 무슨 나쁜 짓을 꾸밀지 모르니 말이다!”
허나 연서강도 할 말은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황후마마를 어찌 그리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귀비마마의 소생을 국저로 내세운다는 말은 또 어떻고. 그 때문에 황후마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녀에게.
“황후마마를 독살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임신한 그녀에게 신후를 보낸 것은 왜인가. 황제가 황후를 독살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의 사이가 이토록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비의 소생을 태자로 내세울 생각을 하셨다는 말도 그러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닌가. 기연조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황제께서는 결코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면, 다만 생사가 달린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은 척을 하고 계신다 한다. 하지만 그가 황후마마께 한 짓을 생각하면 또 그렇지 않았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에게 있어 황후를 독살하는 것은 실(失)이면 실이었지 결코 득(得)이 아니었다. 차라리 황후마마와 손을 잡고 황태후를 밀어낼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닌가!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연서강은 듣지 못했다. 얼굴을 찌푸린 기연조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하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군, 그건 또 무슨 모함이란 말인가.”
“모함이 아니네. 황후마마께오서 직접 말씀 하셨다네. 마마께서 지금의 태자 전하를 잉태하고 계시었을 때, 황상께서 여러 진귀한 약재들을 황후마마께 하사하셨다고. 그런데 그 약재에 은밀하게 독약이 섞여 있었다고 하셨네. 다행히 황후마마께옵서 잘 분별하시어 큰 사달은 막을 수 있었으나.”
그때, 버럭 기연조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미친 소릴!”
그 소리가 마치 벼락이 치는 소리와 같았다. 정말 벼락이 쳤는지, 기연조의 말이 끝나고 우르릉 구름이 우는 소리가 났다. 쾅, 하고 강렬한 빛이 하늘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와르륵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황후야말로 황상께 독약을 보내지 않았나!”
이야기를 연서강은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뭐라고?’ 간신히 되물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무어라 했단 말인가.
“자네의 말대로 황후에게 황상께오서 약을 하사하신 적이 있으시네. 물론 황상 폐하께서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약재를 고르셨지. 그것을 받은 황후가 고맙다는 표시로 황상께 동백 모양으로 빚은 화과자를 전하였네. 폐하께서는 단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으셨기에 다른 어린 궁아에게 그 화과자를 주었다네. 헌데, 그 화과자를 하사받고 몹시 기뻐하며 그것을 먹었던 궁아가 중독 증상을 보이며 쓰러졌단 말일세!”
“.......화과자?”
“그래, 화과자. 강아. 이래도 너희 연씨 문중이 역적 집안이 아니란 말이냐? 다행히 경미한 독이라 궁아는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났다지만, 그 화과자는 황후가 준 것이었네. 그럼에도 발뺌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 불여우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황상께서도 황후를 처음부터 경계하신 것은 아니었네. 처음에 황후의 총명함을 크게 사 황후마마를 필두로 한 연씨 문중과 손을 잡고, 황태후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셨단 말일세! 허나 먼저 황상을 배신한 것은 황후가 아닌가! 아무리 귀비가 부덕한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황후 년보다야 백 번 낫지! 해서, 장래를 위해서라도 황후의 소생인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 수는 없다고 황상께서 판단하신 것이다. 이래도 연씨 문중 편을 들 것인가, 자네는?”
“.......”
연서강은 한 쪽 입술을 끌어올린 채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보는 기연조를 마냥 쳐다만 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자신은 황후마마께 속은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연서강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신음처럼 흘러나온 부정에 기연조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라? 사실을 듣고도 자네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아니다.
아닐 것이다.
황후마마께서는 신후를 받고 너무도 놀랐다고 하지 않으셨나. 화과자를 빚어서 전해줄 정도로 정신이 있어 보이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황후마마께서 신후를 지니고 계셨던 게 가장 큰 증거가 아닌가.
신후가 어디서 흘러나온 독인가. 바로 황제가 아니었던가.
황태후마마께서 사용하고 남은 신후를 황상 폐하께오서 가지고 계시다가 황후에게 건네진 것이 아니었던가.
황태후마마.......?
“.......!”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숨을 멈추었다.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태후마마.
“연조, 연조, 연조!”
기는 기연조를 정신없이 불렀다. 어째서, 설마,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불현 듯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연서강을 못비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기연조가 쳐다보았다. 아직도 미망에 사로잡혀서 역적 집안의 편을 드는가, 하고 기연조가 묻는다. 허나 연서강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연서강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혹시 그때, 황상께서 약을 다른 이를 통해 전해주었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폐하께서 손수 들고 가셨겠나?”
연서강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누가 심부름을 갔었나!”
기연조가 대답했다.
“황태후가 자신의 시종을 시켜 보냈었네. 마침 고운 비단이 들어와 황후에게 보내고 싶었었는데, 마침 함께 보내면 좋겠다 하시면서.”
절로 다음 질문이 흘러나왔다.
“.......화과자는?”
“황태후마마의 시종이 전달했으니, 그 답례품 역시 황태후마마의 시조이 가져오는 게 당연하지 않나.”
쾅!
또 다시 땅 위로 벼락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광폭한 천둥소리에 가려졌다가 다시 원래의 위용을 자랑했다. 쏴아아. 땅을 향해 달려드는 빗방울 소리들이 마치 연서강은 자신의 심장소리처럼 느꼈다.
쿵, 쿵, 쿵, 쿵.
“.......”
어째서 한 번도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이번에 황자를 죽게 만든 것은 신후는 이전에 황제가 황후에게 보냈었던 것이 아니었나. 허면 황제가 신후의 증상에 대해서 몰랐을 리가 없다. 본인이 직접 준 것이었으니.
허나 현재 기연조의 반응은 어떤가. 신후의 증상은커녕 그것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황제가 한 짓인데 기연조가 모르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만약 황제가 신후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황자가 보인 증상을 보고 황후가 신후를 쓴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었더라면 당연히 그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조사를 했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게 했더라면, 어쩌면 황후마마를 폐위시킬 수도 있었을 터인데.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
모른다. 모르시는 것이 분명했다.
당금 황제께오서는 ‘신후’의 존재를 모르신다. 허니 ‘신후’를 황후에게 보낸 사람은 황제가 아니다. 또한 화과자를 황제에게 보낸 사람도 황후가 아니다.
중간에 끼어 있는 한 사람.
황태후.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연서강은 감옥 창살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기연조가 그런 연서강을 보고 인상을 썼다. 온 몸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려 연서강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두 팔을 꽉 움켜쥐었다.
하, 하하, 하하하, 이상한 일이다. 몸이 저절로 떨릴 만큼 공포에 절려있는데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웃음 소리였다. 이제야 알겠다. 이 모든 일이 어찌 되어 가는 것인지. 그것을 깨닫자 오싹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제야 알겠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허, 허허.
“맙소사.”
연서강은 이를 악물어다.
황태후, 황태후가 황제와 황후마마의 사이를 갈라놓으신 거다.
그것도 모르고 서로에 대해 오해하며 서로를 없애려고 안간힘을 쓴 나머지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연서강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째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있었나. 황태후의 계략에 자신을 포함한 궐내의 사람들 전부가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대 위에서 춤을 둔 것과 다름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나.
“연서강.”
기연조의 부름에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친우였던 자가 너무도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연조.”
신음처럼 연서강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연조는 연서강의 부름에 응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재 그와 자신의 사이라는 것을 연서강은 알았다.
이럴 수가.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가.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바로 깨달을 수 있었을 진실을, 어찌 여태껏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단 말인가.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장대비 때문에 지하 감옥에는 점점 더 써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달달달 사정없이 떨리는 자신의 몸을 연서강은 꽉 붙잡았다.
아, 알려드려야 한다.
번뜩 든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누구에게든 이 사실을 알려서 당장에 살살 깎아먹는 다툼을 그만 두게 해야 한다. 적은 황후도, 황제도 아니었다.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도 역시 적이 아니다.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공공의 적은 따로 있었다.
황태후.
그러나 다음 순간, 연서강은 왈칵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대체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아는 기연조 같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아닌 게 당연했다. 기연조는 이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고 그것은 연서강 또한 마찬가지였다. 되돌아온 이후, 자신이 잃은 또 하나의 것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의 다툼 역시 너무 오래되었다.
자신이 기연조와의 사이를 이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듯이 황제와 황후도,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도 그러했다. 귀비의 아이는 이미 죽어버렸으며 수확제는 중단되었다. 아아, 도대체 이번의 겨울에는 무슨 일이 생기려는 것인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연서강은 꽉 입술을 깨물었다.
“그 꼴은 또 대체 뭔가?”
전율하는 연서강과는 달리 기연조는 아주 싸늘했다. ‘이제는 눈물 작전인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그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릴 뿐이었다.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 역적 놈의 편을 드는 것인가?”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연서강을 보고 기연조가 차게 웃었다. ‘과연, 과연.’
“그래. 이제까지 냉대하던 가족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너를 사랑해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알만 하지, 알만 해.”
거지같은 놈. 기연조가 내뱉었다.
“정녕 비렁뱅이나 다름이 없구나. 네 가족들이 흘린 값싼 애정이나 주워 처먹고 그것도 좋다고 끝까지 역적 놈들 편을 드는 꼴을 보니.”
다음 기연조가 창살 밖으로 손을 뻗어 연서강의 손목을 잡았다. 기이하도록 차가운 그 손에 잡혀 연서강이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한 순간, 기연조는 비릿하게 웃었다.
“허나 강아, 넌 곧 그 역적 놈의 편을 든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냐, .......의.”
“.......!”
연서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모습을 보며 기연조가 킬킬 낮은 목소리가 웃었다. 그가 외쳤다. ‘자, 그럼에도 너는 역적 놈들의 편에 설 테냐? 정녕?’ 연서강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멈춘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충격 받은 그의 얼굴은 흡사 새하얀 탈을 쓴 것처럼도 보였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연씨 문중에 있겠다고 한다면, 네놈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쓰레기가 되는 거다. 인간쓰레기.”
거기까지 말하고 기연조가 다시 연서강에게 퉤, 침을 뱉었다.
우르르르르, 지상에서 구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 *
연서강은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길 위를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전옥관이 위치한 곳이 인적이 드문 숲속이었기에 그가 걷는 곳은 발에 차이는 돌만 없을 뿐이지 포장된 길이 아니라 흙길이었다. 그러다보니 바지 끝자락이 흙물이 들어 엉망이 되었다.
우산을 가져올 것을 그랬다.
그나마 지금 걷는 곳은 숲속이라 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수가 적지만, 언덕을 내려가면 이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늘이 우중충하기는 했지만 며칠 전에 비가 내렸으니 오늘 또 비가 내리지는 않겠지 싶어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가마를 불러 타고가도 되겠지만, 그것도 사람이 적당히 오가는 거리 위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외딴 곳인데다 감옥 근처다보니 오가는 사람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마치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홀로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쓸쓸하고, 외로웠다.
우산도 없이 전옥관을 나오려는 연서강에게 옥졸이 오래 올 비 같지는 않으니 잠시만 머물렀다 가라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연서강은 거절했다. 전옥관에서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도 더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서 떠나고 싶었다, 그곳을. 지하에 기연조가 있고, 기연조에게서 들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도저히 거기 있을 수가 없었다.
“.......”
연서강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마에서부터 턱 끝으로 줄줄 흐르는 빗물을 닦았다. 닦는다고 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모두 닦여 흐르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넘쳐흐르는 빗물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풍경조차 보이지 않았다.
“흐윽.......”
손등에 묻어나온 물은 온기를 띠고 있었다. 빗물이 그새 자신의 체온에 데워질 리는 없으니 이것은 분명 자신의 눈에서 흘러나온 것이리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비를 맞으며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으려니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 해 연서강은 더더욱 서러워졌다. 기연조도 만나기 전인 아득한 옛일이었다. 이렇게 달래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몰래 우는 것은.
옷 속으로 스며드는 빗방울들 때문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기가 스르륵 들고 젖은 사지가 무거워서 연서강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었다. 허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들은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았다. 새로 깨달은 것들도 역시 많았다.
새로 깨달은 것들은 이내 또 새로운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생각해.
연서강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해라.
지금은 자신의 어릴 적이나 생각하며 외로워하고 서글퍼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꾸준히 연씨 문중에서는 다음 목표를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고, 기씨 문중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모의 중일 것이다. 황자가 죽은 뒤에 과연 궐내는 어떻게 변할 거인가. 확실한 것은 이전보다 더 치열하면 치열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란 거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달이 일어나기 전에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 생긴 의문점을 해결해야 했다.
“.......”
황태후가 어쩌면 이 모든 정쟁(政爭)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자마자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찌하여 황제는 ‘되돌아갈 수 있는 신자’에게 황명을 내리지 않았던가.
사실은 태상경을 만나고 뱀 신님의 권능에 대해서 들었을 때부터 들었어야 했던 의문이었다. 왜 당금의 황제는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것이 틀림없는 황태후를 숙청하기 위해 ‘되돌아갈 수 있는 신자’들을 이용하지 않은 것인가.
잘만 하면 악마 같은 황태후를 없애고 양친이 살아계신 날을 새로이 맞이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태상경께 뱀 신님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을 적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었다. 당연했다. 그때 자신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지금의 황제가 신자들의 힘을 사용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녹우당 도련님은 벌써 그 겨울에 죽은 지 오래였다. 여기 서 있는 자는 그 한심한 한량 도련님이 아니라 궐내의 숨겨진 이야기들까지 알게 된 연서강이었던 것이다. 홍이의 목숨까지 등에 업고 있는 연서강이었다.
연서강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황상께서는 ‘되돌아가지’ 않으셨지?”
제국에 우환이 생길 때마다 수안궁에 황명을 내려 그 우환을 과거에서부터 바로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황태후가 선제와 황귀비를 독살한 것은 ‘우환’ 측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선제와 황귀비가 절명한 이후 황태후는 가히 손짓하나로 하늘까지 뒤흔들 수 있을만한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그녀의 압도적인 권력에 짓눌려 황제는 혼군(昏君)을 자처하며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연명해 왔다. 그런데도 왜 황제는 ‘되돌아가지’ 않았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모르시니까.”
신자의 능력을 모르시니까.
일찍이 들었었던 태상의 말이 연서강은 생각났다.
-쌍두뱀 신의 권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건 현 황제만이, 그리고 다음 황제가 될 사람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라 그런 백주대낮에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돌아다닐 줄은.
그러면 과연 현 황제는 선친에게서 신자의 능력에 대해서 무어라 귀띔을 받았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선대 황제께서 붕어하신 것은 지금의 황제 폐하가 아주 어렸을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
황상 폐하께서는 신자의 능력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선제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누구에게 신자의 능력을 가르쳐 주었을까.
알 것 같았지만, 연서강은 결론을 내리는 것을 미루었다. 수안궁. 수안궁으로 가서 태상경에게 물어본 뒤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현 세계는 아주 무서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랬다.
“수안궁으로 가야.”
허나 생각을 모두 마치고 다음 할 일까지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서강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의혹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기연조와의 일도 이 따위로 만들어 버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사지가 갑자기 흐물흐물한 해면체라도 된 것처럼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그의 몸에 사무친 것은 전옥관을 나올 당시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기연조가 내뱉은 독설이 빙글빙글 머릿속을 돌면서 연서강을 난도질했다.
-거지.
-쓰레기.
-구제할 수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무능력자 주제에!
“.......”
그리고.
연서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야가 새카매졌다. 그러나 그것이 눈을 감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절망하고 있기 때문인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기연조가 말했다.
-허나 강아. 넌 곧 그 역적 놈의 편을 든 걸 후회할 것이다.
날카로운 침이 목구멍에 박힌 듯 숨을 쉴 때마다 따끔따끔했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연서강에게 ‘너는 참으로 이제까지 잘못 살아왔다.’하고 충고한다.
-너는 네 부모님이 병사한 줄로 아느냐? 천만에, 네가 부친이라 믿고 있는 연무의.
연서강은 숨을 멈추고 기연조의 얼굴만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연무의가 죽였다.
‘네가 아직 어릴 적에.’ 부드러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옛날의 그처럼 다정했다.
-너마저 죽이려고 한 것을 그 자의 부인이 막았다고 하더구나.
눈물이 절로 나올 정도로.
“.......”
연서강은 두 눈을 떴다. 간신히 멈췄다고 생각했었는데 거짓말 같이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떨어지는 찬비와 섞여 얼굴 위로 흘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연서강은 거듭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하고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은 그저 과거로 되돌아와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겨울보다 더 오랫동안. 그리고 그런 자신의 옆에 기연조도 함께 있어주길 바란 것뿐이다.
그 바람이 이렇게도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는지.
연서강의 머릿속으로, 그가 어렸을 때 연무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배척받는 게 너의 길이다. 그러니 나도 모른다.’
그 말이 연서강은 단순히 핏줄의 문제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연서강은 연무의가 그 말을 다른 뜻으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안 된다.
연서강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마에 손을 댄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고 서 있은 탓에 몸에 열이 오르고 머릿속은 점차 멍해져만 갔다. 허나 심장을 찌르는 통증만은 모든 것이 둔한 와중에도 홀로 선명했다. 이마에 댄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닐 거다, 아닐 거야.”
자신의 친모인 연우비는 연무의의 여동생이었다. 그런 이를, 아무리 집안을 욕되게 했다 해도 직접 죽일 리는 없다.
기연조가 잘못 알았을 것이다. 아니면 마지막 발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봐라. 연서강. 너라면 집안을 욕되게 했다고 해서 연서령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기연조의 말은 어불성설이다.
허나 연서강은 이미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연조를 잘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그는 없는 말을 만들어낼 그런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
소녀의 아버지가 찾아왔던 날 밤. 성헌당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굴던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한 적의와 의심이 가득 했던 부친의 눈, 표정, 말, 얼굴, 그 모든 것의 이유가 따로 있었다면.
.......나는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내 부모님은, 또.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찌푸린 하늘을 보았다.
퍽.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리를 둔탁한 무언가 후려쳤다.
* *
“서강아, 미안하다. 미안해.”
길 위에 쓰러져 있는 동생의 어깨를 잡고 길가로 끌고 들어가며 연무진은 흐릿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사죄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살인이라 그런지 연무진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떠는 몸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하게 뭉개져 있었다. ‘미안하다.’
길 위에는 여전히 인적이 없었다. 쓰러져 있는 연서강과 깨어있는 연무진, 이렇게 두 명뿐이다. 물먹은 사람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무거워져 혼자 힘으로는 끌고 가기는 힘에 겨웠다. 허나 연무진은 기필코 숲속까지 기절한 연서강을 끌고 가야했다.
길 한복판에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연무진의 담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끌고 가는 내내 연무진은 행여나 연서강이 중간에 눈을 뜨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기절한 게 분명하니 당분간은 깨지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연무진은 자신이 어깨를 붙잡고 끌고 가는 연서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두 눈이 굳게, 그러나 금방이라도 열릴 듯 감겨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눈꺼풀이 열리고, 연서강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연무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연서강이 자신을 본다면, 그렇다면. 경악한 연서강의 눈과 마주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는 방망이로 연서강의 얼굴을 내리칠지도 모른다. 그 눈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연서강을 죽여야 하는 것은 맞으나 연서강이 자신이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으면 좋겠다. 다소 이기적인 생각이어도, 연무진은 그러기를 간절히 빌었다.
연무진은 사실 연서강을 별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부친의 명을 받잡기도 했고, 또 연서강을 살려두었다가는 앞으로 연씨 문중 전체가 위험에 빠지겠다 싶어 지금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솔직한 마음은 그랬다.
연씨 문중을 배신할 생각이 있다는 점을 제하고 보면, 연무진에게 있어 연서강은 참으로 어여쁜 동생이었다. 연무진의 아래에 있는 동생들 중에서 연서강이 가장 그를 예우해주었던 것이다. 헌재 자신을 가장 예우해주는 동생이 과거 자신이 가장 구박했던 동생이라니, 쓴웃음 나는 모순이지만 그랬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다른 동생들처럼 무시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고, 혹여 자신이 술을 먹자 청하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대신 선뜻 자신을 따라 나와 주었다. 아직 어린 연서령을 제하면 연서강은 형제들 중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졸이며 말을 건네지 않아도 되는 형제였다. 그런 연서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다. 진실로 연무진은 연서강이 좋았다.
그렇지만 연서강과 자신의 가족들을 견주어 본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는 자신의 가족들이 위였다. 안계영의 행복과, 이제 곧 태어날 아이의 행복이었다. 연씨 문중을 위해서 연서강이 꼭 죽어야 한다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연무진은 당연히 찬성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부친도 자신에게 이런 일을 맡긴 게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연무진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자신의 평소 체력을 생각하면 벌써 지칠 리가 없는데, 정신적인 부담 때문일까 체력이 벌써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처음에 비를 맞았을 때는 차갑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비가 참으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연서강을 끌고 숲속으로 들어가던 연무진은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기절 상태인 연서강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자신이 각도를 잘못 재어서 내려쳤는지, 연서강의 머리에서 피가 약간 흐르고 있었다.
그 피를 보고 연무진은 숨을 흡 들이마셨다.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허나.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서강아, 너도, 너도, 기연조를 만나러 가지 말았어야지.
얼굴이 온통 새파래진 연무진은 긴장과 두려움으로 이를 딱딱 부딪쳤다. 부친에게 명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지만 정말로 실행하려니 몹시 저어되었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 자신이.
연서강을 미행하던 연무진은 연서강이 향하는 곳이 전옥관이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제발 아니기를, 제발. 그렇게 빌고 또 빌었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결국 연서강은 전옥관으로 들어갔고 연무진은 그 앞에 서서 망연자실해했다.
전옥관에는 기연조가 있었다. 연서강이 그 안에서 기연조와 무슨 밀담을 나눌지 생각만 해도 연무진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설마 연씨 문중의 이모조모를 일러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연무진은 확증을 얻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연서강이 지하로 내려간 사이에 옥졸에게 동전을 한 닢 챙겨 주며 현재 연서강이 면회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옥졸은 연무진이 내민 동전 한 닢을 챙기기는 했지만 힐끗 연무진을 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가 왜 저러는지는 바로 눈치를 챘다. 연무진은 이번에는 은전 한 닢을 꺼내어 옥졸에게 주었다.
마침내 옥졸이 대답했다. ‘기연조라고 했소.’
아아. 그 대답을 듣고 연무진은 탄식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부친께서 서강이가 수상한 짓만 안 한다면 괜한 의심이라 했었거늘. 어찌해서, 왜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기연조를 찾아간 것인지 연무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배신이나 모의라는 말 외에는.
하늘에서 쿠르릉 잿빛 구름이 울더니 이내 한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연무진은 황망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 있던 그는 번쩍, 천둥번개가 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아버님 말대로 해야.
저 하늘이 연씨 문중과 가족들의 미래로 보였다. 위험요소는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 어차피 연서강은 십 년도 넘게 녹우당에 처박혀, 이제까지 가족들과 타인처럼 지내왔던 이 아닌가. 근래에 절친하게 지냈다고는 해도 고작 몇 달 간의 일이다. 그 짧은 시간을 어디 자신의 가족들에 비할까.
“.......”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연서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연무진이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기연조만,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아쉬운 생각이 자꾸만 들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엎질러진 물이었다.
연무진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과한 다음, 그는 칼을 쥔 손을 단숨에 내렸다.
삽시에 끝이 나 고통조차 없는 죽음. 그것만이 지금 자신이 동생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라고 그는 생각했다.
* *
“네가 정녕 돌은 것이구나, 연무진.”
그 말과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연무진의 뒷목덜미를 확 잡아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아! 옆으로 구르면서 연무진은 그만 손에 든 칼을 놓치고 말았으나, 그것은 결코 놓친 것이 아니었다. 빼앗긴 것이었다. 소리 없이 자신의 등 뒤로 접근한 괴인이 연무진의 목덜미를 잡고 당기면서 그의 손에 든 칼도 빼간 것이었다.
폭우로 질척질척해진 흙바닥 위로 연무진은 나뒹굴었다. 진흙이 여기저기에 묻은 데다가 팔과 옆구리가 땅에 부딪혀 극심한 고통을 소호했으나 그 고통을 솔직하게 느낄 여유가 연무진에게는 없었다.
연무진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달달 떨며 자신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칼까지 빼앗아 간 괴인을 올려다보았다.
괴인이 빼앗아 든 칼날을 연무진에게 겨누며 그를 싸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원래부터도 무심하고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그래 보였다. 그러나 무생물로 느껴질 만큼 감정 없는 표정 위로 박힌 검은 두 눈만큼은, 찌를 듯이 냉랭하고 날카로워서 연무진은 금방일도 그 괴인에게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항상 자신을 모자란 놈 취급하며 퉁명스럽게 쳐다보곤 했던 이였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만난 적에게조차 이런 살기를 내뿜은 적이 없었다, 그는. 연무진은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다 못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형, 형님.”
저절로 몸이 땅바닥에 달라붙으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내리 누르는 압박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연무진은 지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죽는다, 죽어.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스무 해도 넘게 한 집에서 부대끼고 산 자신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연무진은 그리 생각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혀, 형님. 살, 살려주시오.”
자신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도 잊고 연무진이 창백해진 얼굴로 빌었다. 연무강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 올까봐 그는 한 손으로 정면을 가리고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형님, 나, 나는, 나는 다만!”
연무진이 채 끝맺지 못한 말을 연무강이 대신 이어 주었다.
“다만 부친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고?”
‘저번에 네놈이 말해 주었지 않느냐.’라고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연무진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었다. 형님이 무서웠다. 늘 형님이 무섭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이제야 알겠다. 그것이 얼마나 배부른 투정이었는지.
너무나 무서웠다. 이대로 그가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형임, 혀, 형님.’하고 연무진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열심히 눈앞의 존재를 불렀다. 애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눈앞의 존재가 자신을 동생이라고 인시해주기를 간절히 바라서였다. 동생, 이오. 아무리 못난이라 하여도 나는 당신의 동생이오, 제발.
그렇게 빌고 부른 보람이 있었는지, 연무강이 연무진에게서 눈을 떼고 쓰러져 있는 연서강을 힐끗 보았다. 그 틈을 타 연무진이 차마 쉬지 못하고 있던 숨을 쉬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도망가지 마라, 연무진.”
연무강이 연서강을 살피고 있는 틈을 타 연무진이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는데, 연무강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연무진이 얼음처럼 굳었다.
연무강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연서강을 보았다. 처음보다는 조금 가늘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빗방울이 굵었다. 이런 폭우 속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오랜 시간 방치되면 저번처럼 또 크게 아플 터인데.
저절로 연무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멸시라고 오해한 연무진이 다시 ‘형님.’하고 연무강을 불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무강은 못 견디게 불쾌해졌다. ‘입 다물어라.’ 연무진을 향해 짧게 경고한 다음, 연무강은 살짝 무릎을 굽혀 연서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으로 친 거지?”
“그, 방, 방망이로 내리쳤소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머리 옆쪽이 찢어졌군.”
빗물로 계속 씻겨 내려가고는 있지만 왼쪽 이마 옆이 손가락 한 마디정도 찢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정도 출혈이라면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겠다 싶어 연무강은 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품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연서강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생각보다 몸 상태는 괜찮았지만, 비를 너무 많은 탓인지 체온이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다.
너무 늦게 왔어. 적절한 때에 연무진을 제지하고 연서강을 구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연무강은 만족하지 못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이런 상처도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연무진.”
“혀, 형님.”
다시 몸을 펴서 연무진을 바라보자 연무진이 움찔 몸을 떤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아우의 얼굴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연무강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형님이 맞으니 이제 그만 불러라. 화가 나려고 한다.”
합, 연무진의 입이 닫혔다.
“서강이를 업어라. 어서 비르 피하고 쉴 만한 곳을 찾아야겠다.”
그 말을 들은 연무진의 얼굴이 순간 아연해졌다. ‘나, 나를 죽이지 않으시오?’ 그리 물어보아 연무강은 차게 웃었다. ‘죽였으면 좋겠느냐?’ 묻자마자 바로 ‘아, 아니오! 아니오. 고맙소, 형님. 고맙소이다, 형님!’하고 대답한 연무진이 냅다 연서강에게 다가가 그를 업었다.
‘어, 어디로 갈까요?’ 멍청하게 묻기에 연무강은 말없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상가가 있는 곳으로 가야 쉴 곳도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연무진이 ‘알, 알았소이다!’ 말하며 부리나케 연서강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가며 연무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풀어져 있었던 그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연무진의 등에 업혀 있는 연서강에게로 향했다. 연무강은 이를 으득 갈았다.
“.......아버님.”
그의 눈에 맹수의 것을 닮은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