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 날은 궐내의 단풍나무 중 반절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날이었다.
기연조가 그렇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그가 태후의 거처인 영안궁 옆을 지나가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영안궁은 사시사철 언제나 붉은 애기단풍 나무로 가득했기에, 늘상 그 주변에 있는 다른 보통의 단풍나무와 비교하게 되었다. 또한 영안궁을 지나가면서 기침을 두어 번 한다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춰서기도 했었다.
고뿔인가. 그리 생각하며 기연조는 장한궁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요새 밤잠을 설쳤더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야이다. 고뿔이 걸릴 만도 했다.......
“.......”
기연조는 어제부터 새벽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드물게 어제,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의논을 나누었다. ‘이미 귀비는 틀린 모양이네.’ 비밀스럽고 사적인 자리라 상대에 대한 존칭을 생략한 채 어르신들이 수군거렸다. ‘황후년이 무슨 수를 쓴 것이 틀림없어.’ 상스러운 표현도 서슴지 않고 흘러나와 기연조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던 것도 같았다. ‘연태위는 어쩌고 있는 것 같소?’
자리에서 주로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귀비, 황후, 연태위.
귀비에 대해 말할 때에는 안타까움과 혀를 차는 소리가 주로 이어졌고, 황후와 연태위에 대한 말이 오갈 대는 가끔 어르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은 쌍욕들까지도 쉬이 흘러나왔다.
또 가끔은, ‘요새 연위사 쪽은 되레 조용한 듯 하던데.’ 연태위의 장자인 연위사까지.
그 어디에서도 연서강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당연했다. 윗분들이 거기까지 어찌 알겠나. 연태위의 쓸모없었던 다섯 번째 자식까지.
어르신들은 모르고 계셨다. 이번에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고작 준비 단계에서 불발되고 만 것은 바로 그 연서강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늦봄에 변방에 가서 고생하고 돌아와 여름에 되어서야 겨우 비서랑 직에 임해진 젊은 청년을 그 누가 눈여겨봤을까 싶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
길을 걷던 기연조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역시나 고뿔이 들려는 모양이었다. 쉬는 시간에 영의전에 들려 간단한 약이라도 지어 달라 부탁을 해야겠다. 때가 때인 만큼 한심하게 고뿔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연조야. 너는 할 말이 없느냐.”
어젯밤 입을 다물고 어르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에게, 문득 어르신 한 분이 물었었다. 기연조의 백부되시는 승상 기능묵이었다. 그의 말에 자연스레 대화의 중심이 기연조로 넘어갔다.
사촌의 사돈되는 능연 어르신이 묻는다. ‘그러고 보니 그 연태위네 막내였던가, 하던 놈에게서는 별 말이 없더냐? 막내가 아니고 정확히는 오남(五男)이 되지만 기연조는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연서강이 연태위의 자식이라는 점이지, 몇 번째 자식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연조는 그저 웃음을 흘렸다. ‘글쎄요.’하고 말을 길게 끌자 기연조의 부친인 태중대부 기가우가 ‘물어보셔도 들을 것이 없을 겁니다. 무슨 정보를 얻었다면 저 아이가 먼저 말을 했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과연 부친은 부친이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아버님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아록 계신 듯 했다. 아버님께서 하셨던 말 그대로여서 기연조는 능연에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볼 살이 포동포동 붙은 능연이 코웃음을 치며 ‘흥, 연태위가 버렸다는 소문이 허다한 자식이라 그런지 영 쓸 데가 없군.’하고 말한다. 그때도 기연조는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허나 마음속으로는 쓸 데가 없는 것이 대체 누군가 싶었다. 모여서 술이나 퍼질러 마시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자는 게 전부인 어르신께서, 연서강 쪽이 저 돼지보다 열 배는 유능할 것이다.
-네가 장한궁을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쓸데없이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뭔가 눈치 챈 것이 있느냐?
이번에 물어본 사람도 기능묵이었다. 그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연조는 조심스런 태도로 대답을 했다.
-아직 무어라 말씀드릴 것은 못 되지만, 기이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기는 있습니다.
기연조가 장한궁을 찾아갔던 것은 장한궁의 식사를 누가 담당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기능묵의 물음에 대답한 뒤 기연조는 머릿속으로 이름이 민울이라던 낭중을 떠올렸다. 소부의 어르신이 허락하실 때까지 절대 식단을 공개할 수 없다던 그녀의 말도 함께 생각이 났다.
기능묵이 ‘네가 가져온 소식이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구나.’라 중얼거린다. 그에 기연조는 여전히 얌전하게 ‘흡족하실 만한 결과를 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능연 어르신과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도 티가 나지만, 기연조는 승상 기능묵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승상으로서 이룩한 일은 비록 연태위에 비해서는 미비하나 그럼에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 쌓은 인덕이 많았고 그 인격에 감화되어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연조는 그런 기능묵을 존경하여 그처럼 되기 위하여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허나 기울이는 노력에 비해 잘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연서강의 경우도 바로 그러했다.
“.......”
일전에 녹우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기연조는 살짝 인상을 썼다. 장한궁으로 향하는 걸음이 점차 속도가 떨어져갔다. 몇 번을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달리 먹어도 울부짖던 연서강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네야말로 내가 아는 그 기연조가 맞는가.
그리 물었던 연서강의 얼굴은 흡사 어린애와 같았다. 그것도 당장 자신을 내치려는 매정한 부모를 향해 아이가 짓는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기연조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었다. 그가 지었던 표정 때문인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자신이 박대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당장 자리를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하게 자신을 붙잡은 연서강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디찼었다.
-항상 올바르고, 곧고, 신의가 두터운 그 기연조가 맞는가?
“.......그러면 자네는?”
기연조는 기억 속의 목소리에게 나직하게 되물었다.
“자네야말로 당연히 나를 택해야 하지 않은가.”
녹우당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에 그런 그를 칭찬해주었었다. 한심하지 않다고도 말해 주었다. 맛난 것이 생기면 그를 제일 먼저 챙겨 주었고, 친구가 자신 하나뿐인 그를 위해 자주 녹우당을 찾아가주기까지 했었다. 연서강이 자신에게 감복할 만한 그 모든 짓을 했다고 기연조는 자신할 수가 있었다.
헌데도 어떻게 가족들의 편에 설 수가 있는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것들을 진심으로 자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했었던가. 내가 가족들을 배신하면 자네는 내 가족들 모두를 죽일 것이냐고 질문을 하는 것까지도 어리석었다. 그렇다면 그 역적 놈들을 그대로 살려두란 말인가, 뭐란 말인가.
기연조는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연서강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기능묵이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음씀씀이를 본받아 연서강에게도 똑같이 베풀었었다.
처음에 접근할 때는 분명 그런 마음도 있었다. 어른들이 시킨 일이기도 했고 ‘적’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상대주다가 원하는 것만 빼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역적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리 친하게 지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허나 연서강의 성격과 집안에서의 위치를 알아가면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용하고 버릴 생각을 품은 게 미안할 정도로 그는 순진했고 또 다른 연씨 집안사람들과 달리 너무도 여렸다. 그래서 그 후로 ‘그 이에게는 이용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어르신들께 말하고 순수한 호의로써 그를 찾아갔었던 것이다.
기연조는 기능묵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는 사람들처럼 연서강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 좋았다. 연서강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절로 자신이 기능묵과 같은 사람이 된 듯 해, 그에게 좀 더 다정해지고 상냥해질 수 있었다. 기연조는 진심으로 그를 아꼈다.
그랬기에 그가 변방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안궁으로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이 전부 외면하는 연서강이니 챙겨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신만이라도 그를 챙겨줘야만 했다. 기연조에게 그는 정말 소중한 친우였다. 당시 태상의 질문에 대답한 것들은 모두 거짓이 없는 진실들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계기야 어찌되었든 가문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은근한 연심을 품고 있는 연서강에게 기연조는 그 생각을 거듭 심장에 새겨놓았다. 세상 어느 누구가 적대 관계에 놓인 가문의 삶과 절친한 벗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누가 적대 가문의 사람에게서 은밀하게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단 말인가. 그것만 보아도 자신이 연서강에게 얼마나 많은 호의를 베풀었는지 알 수 있었다.
헌데도 어찌해서 그 어리석은 자는 내가 아니라 역적 놈들에 불과한 제 가족 편을 든단 말인가.
“.......”
문득 가슴속이 뻐근해져 기연조는 묵직한 숨을 내뱉었다. 녹우당에서 연서강이 마지막으로 ‘비켜주게.’라고 말했을 때 그의 가슴속이 참으로 저릿저릿했었다. 그때의 아픔이 가시처럼 콕 박혀 그 이후로도 종종 그를 괴롭혔다.
허나 기연조는 연서강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안 될 일이라 생각을 했다.
그 놈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도와준 벗보다 역적 집안을 택한 놈이었다. 과연 역적 집안의 핏줄이라선지 기연조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선택을 하였다고 볼 수 있었다. 스스로 범죄자로 남겠다고 자청했으니, 자신 역시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 둬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머저리 같군.”
기연조는 찡그린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기연조가 소부에서 가져온 위임장을 내미니 민울이란 낭중은 ‘어머, 정말 가져오셨네.’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부의 어르신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식단을 공개하지 못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말하며 기연조는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에 연둣빛 윗옷에 폭 넓은 분홍빛 치마를 차려입은 민울은 한 쪽 손을 볼에다 가져다대며 빤빤하게도 대꾸했다. ‘소인이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 수고스럽게 가져오실 줄은 몰랐다는 말이어요.’
민울의 그 말에 기연조는 놀림이라도 당한 느낌이 들어서 살짝 미간을 좁혔다. 허나 자신의 기분이 어찌되었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위임장은 처음 본다면서 요리조리 훑어보는 민울에게 기연조가 물었다.
“그럼 이제 식단을 보여주시는 겁니까?”
“높으신 분의 위임장씩이나 가지고 오셨는데, 한낱 낭중인 소인이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마지막으로 하는 말까지 살짝 얄미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전에도 그랬었지. 새삼 이전에 장한궁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연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에 찾아와서 ‘장한궁의 식단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오늘과 똑같은 표정으로 ‘어머나.’하고 놀랐다. 그녀가 ‘그런 것을 무슨 까닭으로 보려 하십니까?’라고 물어 기연조는 잠시 살펴볼 것이 있어 그러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민울은 시선을 모로 돌리며 ‘참으로 곤란한데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황자마마께오서 기체 미령하신지라.......’말했었다. ‘그래서 안 된다는 말입니까.’ 민울은 그 말에 다시 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닌 건 아닙니다만.’
기연조가 ‘그러하시다면?’하고 묻자, 잠시 고민을 하던 민울이 대답했다. ‘지금 황자마마께오서 병환 중이시라, 만약 식단에서 뭔가 문제가 발견이라도 되면 소부의 높으신 분들이 곤란하시답니다. 더욱이 귀비마마의 심기도 요새 불편하신 듯 하여서.’ 그러면서 그녀가 요구한 것은 소부의 높으신 분들의 허락이었다.
그녀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여겨져 기연조는 일부러 부친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소부의 어르신들을 만나 뵈었다. 그런 기연조가 염려가 되었는지 부친인 기가우가 한숨을 내쉬며 ‘연조야, 너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연씨 문중의 뒤를 캐는 것은 말리자 않겠다만, 너무 함부로 돌아다니지는 말거라.’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어찌 제 어미의 닮지 말란 점을 꼭 닮아서는.’ 걱정이 담뿍 담겨져 있는 부친의 어조에 기연조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걱정이 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개죽음 취급당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다 죽든, 그 일이 고귀하고 뜻이 높은 것이라면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저기,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만.......”
잠시 후, 기다려 달라며 어디론가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던 민울이 돌아와 입을 연다. 아무래도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인 듯 여전히 한 쪽 손을 볼에 갖다 댄 채인 그녀는, 온 세상 근심 걱정을 모두 짊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식단을 배오는 게 무리일 듯 해요.”
“위임장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민울의 말에 기연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이.’하고 민울이 말끝을 흐렸을 때, 마침 시기 적절하게 장한궁 안에서 ‘아악!’하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연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한궁 쪽을 바라보았고, 방금 들린 비명이 무슨 소리인지 아는 모양인 민울은 두 귀를 감싸 쥐고 ‘아아!’하고 탄식했다. ‘귀비마마께서 또.’
그 짧디 짧은 탄식만으로 기연조는 어째서 민울이 곤란하다고 말했었는지 바로 깨달았다. 함부로 원본을 외부인에게 주었다가는 분실할 위험이 있는 탓에, 필요할 때면 필히 따로 필사를 하여 그 필사본을 외부인에게 주어야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외부에서 피치 못한 사정으로 필사본을 분실하게 되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몇 시진 정도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현재 장한궁은 느긋하게 필사 따위를 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민울의 뒤로 여러 궁인들이 ‘귀비마마!’하고 외치며 황급히 어디론가 거의 달리다시피 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사정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기연조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허면 잠시만 이리로 가지고 나와 주시면 안 됩니까. 잠시만 볼 수 있다면 족합니다.”
민울이 그것도 곤란한지 얼굴을 찡그린다.
“그리 쉽게 말씀하실 것이 아니에요. 아주 잠깐이라도 원본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것은 제 권한을 넘는 일입니다. 아무리 위임장을 가져오셨다고 해도 말이죠.......”
민울이 꺼려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원본을 가지고 나왔다가 행여 실수로라도 그것을 분실하게 되면 민울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탓이다. 기연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식단을 보고는 싶었지만 괜히 죄 없는 낭중이 위험해질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식단을 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기능묵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리로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기연조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민울도 그때 마침 뭔가 뾰족한 수가 생각났는지 말을 꺼냈다.
“혹시 나중에, 저녁 때 즈음에 시간이 되시는지요? 요새 귀비마마께서는 해가 질 무렵이면 기력이 다 하셔서 그때면 장한궁도 조용해질 겁니다. 허니 그때 열심히 필사해서 저녁때에 넘겨드릴게요.”
기연조는 방금 전 민울을 보고 살짝 얄밉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하면 석음이 질 때 즈음해서 다시 장한궁으로 오면 되겠습니까?”
민울이 생긋 웃었다.
“아니요. 그것보다는 궐 밖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즈음이면 이미 귀가하신 상태가 아니십니까? 저도 마침 궐 밖 가게에서 물품을 살 일이 있으니, 적당한 장소를 정해서 거기서 만나는 게 어떨까요?”
당연히 기연조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기연조가 거승주를 만나기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래 된 일이었다. 연씨 문중, 정확히 말해서 연태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 나온 것도 제법 오래된 일이었다. 어르신들로부터 그 말을 들은 기연조는 연태위가 움직이면 당연히 그 수족과 마찬가지인 연위사 역시도 움직일 거라 생각하고 거승주에게 접근을 했다. 장수를 쏘려면 그 말부터 공략하라는 옛 말도 있지 않은가.
거승주를 표적으로 정하고 그에게 접근한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그가 황태후마마께서 추천한 무관이며, 연무강에게 돌연 대결을 신청한 적 있는 무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말을 듣자니 거승주는 연무강을 존경하고 있으며 연무강도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연무강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거승주가 연무강을 존경하고 있다는 말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황태후마마께서 추천한 무관이니만큼 어쩌면 연씨 문중보다 기씨 문중에게 더 호의적일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 자가 연무강에게 대결을 신청한 적이 있다지 않은가. 물론 순수하게 제 무위의 수준을 재어 볼 목적으로 대결을 신청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두 사람의 대결을 목도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연무강의 손에 늘씬하게 두드려 맞은 거승주가 그렇게도 억울하고 분한 표정을 지었었다지.
무엇보다 기연조에게는 연무강이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가 그리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연서강과 친하게 지내면서 본의 아니게 연씨 문중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무강이 여리고 약한 것도 모자라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동생인 연서강을 밥버러지 취급하며 내내 무시하고 박대했다는 것을 기연조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보고 있자면 인격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자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진실된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기연조의 신념과 연결되는 논리이기도 했다. 기연조의 생각에 다른 사람의 존경이란, 인격적인 수양이 완성을 이루어 진정한 성인군자가 되고 나서야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래, 바로 기능묵 어르신처럼.
허나 기연조는 그러면서도, 거승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을 했었다. 허나 아니었다. 거승주는 조금 부채질을 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쉽게 연무강을 배신하고 자신 쪽으로, 기씨 문중 쪽으로 돌아섰다. 겉으로는 정말 감사합니다, 웃으며 그의 결정을 칭찬해 주었지만 기연조는 속으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하는 편이 당연히 정의이니 거승주의 재빠른 판단은 칭찬해줄 만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승주는 연무강의 밑에서 몇 년이나 일한 부하가 아니던가. 반역자보다야 낫겠지만 변절자도 썩 좋은 게 아니었다. 기연조는 거승주와 악수를 나누면서 오래 써서는 안 될 자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의 신념에 의해 일하기보다는 순간의 감정에 휩싸이기 쉬운 자였다. 결코 신뢰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기연조는 거승주를 끌어들였다고 주변 어르신께 말씀 드리지 않았다. 거승주가 진실로 연무강을 배신한 것인지 그것도 시간을 두고 꼼꼼히 확인해야 했고, 또 어르신들께 소개하여 기씨 문중의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이기에는 인품과 신념도 모자란 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자가 나타나면 거승주는 연무강을 배신했듯이 자신 또한 배신할 것으로 보였다. 만약 진실로 거승주가 자신을 배신한다면 기씨 문중 전체와 황상 폐하께 오물이 튀기 전에 자신의 선에서 피해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연조는 어르신들께 거승주를 회유했다고 보고드릴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거승주가 태의령에게서 무언가 말을 듣고 자신에게 그 말을 전했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기연조는 거승주가 좀 더 많은 정보를 자신에게 흘릴 때까지 기다렸다. 허나 안타깝게도 충분한 정보를 얻기 전에 거승주가 배신자였다는 사실이 들킨 모양이었다. 거승주는 실종이 되었고, 그의 실종과 동시에 연씨 문중에서 어떤 ‘일’을 꾸몄는지에 대한 단서까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더욱이 기다렸다는 듯 황자마마께서 고열에 시달리기까지 하시니.......
황자가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며 죽어가자 기씨 문중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연씨 문중에서 뭔가 수를 쓴 게 틀림없다 확신하며 하나 둘 목소리를 높여 ‘이제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가!’하고 탄식했다.
그 대화를 들으며 기연조는 흐린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사태가 자신이 거승주에 대한 것을 어르신들께 말씀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터진 일로 보였다. 잘못 생각했다. 응당 거승주에 대해 어르신들께 말씀드리고 거승주가 자신에게 흘린 말들도 어르신들께 여쭈어 논의를 했어야 했다. 만일 그랬었다면 귀비 소생의 황자가 연씨 문중의 야비한 덫에 걸려 이리 앓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또 연서강을 만나 섣불리 혀를 놀린 것도.
“.......”
가던 길을 멈추고 기연조는 인상을 썼다. 거승주를 오래 사용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 계기가 연서강이 될 것이란 생각은 또 미처 하지 못했었다.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인 그가 거승주에 대해서 제일 먼저 눈치채다니.
변방으로 떠나기 전의 연서강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뒤로 돌아 도망치는 일이 더 잘 어울리는 이였다. 머리를 써서 진상을 파악하기 보다는 남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더 잘 했던 이였다.
그랬기에 ‘혹시나.’라는 생각조차 기연조는 하지 못했다. 그 연서강이 그러리라고는.
그간 기연조는 연서강이 그 잔악한 연씨 문중과 같은 성씨만을 쓰고 있을 뿐 확연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확실히 예전의 연서강은 그 무뢰배 역적 놈들과는 전연 달랐다. 그랬기에 기연조는 연서강이 영원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았던가. 그래, 참마로 그는 자신과 연씨 문중 사이의 일을 영원히 몰라도 되었다.......
해서 녹우당으로 도망치는 자신이 한심하지 않냐고 연서강이 물었을 때에도, 기연조는 반대하지 않았다. 녹우당으로 도망치게 되면 연서강은 본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완벽히 차단된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녹우당에 칩거함으로써 연서강이 연씨 문중에서 완전하게 고립되어 외톨이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녹우당으로 도망치게 되면 그와 친분을 유지할 명문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필시 자신이 연서강과 교류를 하는 것을 기씨 문중 어르신들은 곱게 보지 않으실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대려면 분명히 피곤해지겠지. 하지만, 기연조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연서강에게 자신밖에 남지 않게 된다면.
기연조는 연서강이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았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좋았다’. 연씨 문중에서 그런 연서강을 한심하게 여기고 이전보다 더욱 박대하며 그를 고립시키는 것을 알았지만 기연조는 모르는 척 했다. 어차피 그에게 가족은 필요 없지 않은가. 자신이 있으니까.
연서강에게도 그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정도 없는 가족들에게 휘말려 역적이 될 바에는 말이다.
때문에 그가 비서랑이 되었을 때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직(閑職)이든 뭐든 간에 일단 벼슬자리를 하나 꿰어 찼다는 소리는 그가 앞으로 궐내 사정도 알게 될 것이란 소리였다. 듣게 되는 정보의 양이 많든, 적든 녹우당에 있을 적보다야 더 빨리 더 많이 연서강이 연씨 문중과 기씨 문중의 사이를 알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 짐작대로 그는 역시 결국 얽히고설킨 궐내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을 안 기연조도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러나 귀비마마의 아이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했을 때만 해도 기연조는 연서강을 믿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자신이 일부러 그렇게 해달라고 회유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을 연모하고 있으니 연서강 스스로 자신을 도울 생각을 해낼 것이라 여겼다.
.......사실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편만 되어주면 될 일이었다. 소심한 그가 조금이라도 그런 뜻을 내비친다면, 기연조는 연씨 문중에서 연서강만이라도 빼올 작정이었다.
헌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기연조는 알 수 없었다. 연서강이 변방에 가서 공을 세우고 돌아와 비서랑이 된 것 외에는 하나도 잘못 되어가는 게 없어 보였었다. 거승주의 회유도 순조로웠고 그의 존재를 연무강 역시 모르고 있는 듯 했다. 태의령의 말을 토대로 거승주가 연무강을 조사하는 것도 진척이 느린 것을 제하면 제법 순조로웠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판도가 현재에 와서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연서강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아니, 배신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최 기연조는 연서강과 아무런 정보도 공유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연조는 더 놀라웠다. 혼자서는 소요하며 정원 가꾸기 밖에 하지 못했던 이가.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이가 거승주의 존재를 눈치 챈 것도 모자라 자신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짓밟아 놓기까지 했으니.
그 연서강이 진실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
기연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라도 연서강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 좋을 터인데.
그리 생각하다가 기연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다. 연조야.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 이가 완전히 변모해 자신을 그렇게 구박하고 막대하던 역적 가족 놈들의 편을 드는 것을. 어디 그 뿐인가. 그 핏줄이 어디에 가지 않는다고 아무 죄도 없는 저자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나.
다르기는 뭐가 다른가. 그 잔악한 연씨 문중 놈들과 연서강이 무어가 달라.
똑같았다. 똑같은 놈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처참하게 울며 자신에게 애원하며 매달려도 그 놈도 역시 연씨 문중 놈이었다. 어르신들의 말씀이 옳았다. 이용하지 않을 거면 왜 친절하게 대해주고 애써 친하게 지냈단 말인가. 그 집에서 연서강이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파멸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을. 어린 날, 연서강의 손을 잡아주지 말 것을 그랬다.
“.......정녕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까닭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따르고 믿었던 연서강이 저리 악독한 놈으로 변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되어 기연조를 괴롭혔다.
왜, 어째서?
“서강이,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그간 기연조는 연서강이 품은 연심을 알았지만 적당히 무시하며 모르는 척 했었다. 그러기만 해도 연서강이 스스로 마음을 접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에 품은 연심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자이니. 그래서 얼마나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던가. 사랑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솔직히 기연조에게 있어 그의 마음은 부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자신은 연서강을 많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연서강이 자신의 예상과 달리 가족을 선택하고 돌아서려고 했을 때, 기연조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해졌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을 했었다.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포기해야만 했던 안타까운 연심이 아니었던가. 허나 그 연심을 자신이 알아주고 나를 선택해주기만 한다면 나 또한 네게 사랑을 줄 수도 있다 말을 하였음에도 연서강은 기뻐하기는커녕 슬퍼했었다.
“나를 선택했어야지.......”
그랬더라면 자신이 좀 더,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가 품고 있는 연심에 답해줄 생각이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어린애 같은 생각이다.
기연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연남빛 하늘 귀퉁이가 붉은 연지를 물에 푼 듯 붉게 번져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는 시간이 된 듯 했다. 민울이란 낭중과의 약속 시간이 언제였더라, 생각하면서 기연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그러한지, 시간 가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반면에 또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게다가 요새 안팎으로 시끄럽고 분위기도 하 뒤숭숭하여 편히 쉬어본 날이 언젠가 싶기도 했다.
봄일 때가 좋았다. 아니, 연서강이 변방에서 막 돌아왔을 때까지 만이라도.
녹우당에 드나들면서 연서강과 조촐하게 술상을 차려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을 때가 요번 해에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좋았던 시기란 생각이 들었다. 여름 이후부터는 완전히 지옥 같았다.
기연조는 장한궁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던 귀비의 비명을 떠올렸다. 황자마마께서 이대로 정말 큰일이라도 당하시게 된다면, 그건 전부 생각을 잘못한 자신의 탓이리라. 그런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 혼자서.
혼자서라도 이 상황을 좋은 쪽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연조는 이제 완연히 붉은 빛으로 바뀐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높고 높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으나 그래도 답답하고 뻐근한 가슴 속은 해소되지 않았다.
-저자에서 북쪽으로 오시면 유명한 한약거리가 나온답니다. 아아! 이미 알고 계신가요? 아, 하기는 장안 거의 대부분의 한약이 그 거리에서 나오니 당연한가....... 아무튼 알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거기 지리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거든요. 아, 그렇죠, 그렇죠. 아시는구나. 길들이 많이 꼬여 있어서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도 힘들죠. 저도 자주 가지만 가끔 길을 잃고 빙빙 돌다 오기도 한답니다. 아, 맞아요. 꼭 그 기와집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그렇죠. 기와집들이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도 모자라 벽들도 전부 같은 색이잖아요. 그래요. 맞아요. 거기 다섯 번째 기와집 옆으로 길이 하나 나 있어요. 혹여 아실까 모르겠는데 그 길이 그 고명하신 약재상 자견의 한약방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랍니다. 자견을 몰라요? 그럼 꼭 한 번 들려보세요. 세상에.......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해괴망측한 약재들은 또 처음 봤네요. 아, 여하튼 제가 볼 일이 있는 곳이 거기인데, 아, 복고단을 혹시 가지고 계신가 여쭈러 가는 겁니다. 황자마마의 용태가 아무래도 복고단이 더 필요한 듯 보여서요. 황고에는 더 이상 없다고 하니 혹시 자견이라면 어찌 구할 방도가 있을까 하고....... 네, 맞아요. 거기서 뵙자는 말이에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민울이 기연조에게 필요한 말을 꺼냈다.
-그 시각에, 다섯 번째 기와집 옆으로 쭈욱 오시다 보면 제가 아마 아래로 내려가고 있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기연조의 대답에 민울이 방긋 웃었다.
-그럼 그때 뵈어요.
저자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한약거리가 나왔다. 평지에 있는 거리가 아니라 산기슭에 형성되어 있는 거리로, 걸치고 있는 산을 통해 수도를 대표하는 산인 주오산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때문에 심마니로부터 신선한 약재를 공급받을 수 있어 예로부터 그곳에는 많은 한약방이 어우러져 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한약방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 자연히 좋은 약재를 싼 값으로 살 수 있어서 궐 밖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궐내의 영의전에서도 가끔 거래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유명한 거리인지라 기연조도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을 따라서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허나 민울의 말처럼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거리마다 제멋대로 혼재하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그곳에서 몇 년을 산 사람조차도 꼬박 반나절을 헤매는 곳이기도 했다. 산기슭에 형성된 거리인지라 산의 지형에 따라 골목은 규칙도 없이 구불구불하게 꼬여 있었고, 그 골목마다 가득 들어찬 한약방들의 모습은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었다.
그리고 한약거리에서 북쪽으로 무작정 가다 보면 기와집이 여러 개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민울이 말하던 그 기와집이었다. 한약거리에 있는 모든 집들의 생김새가 다들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 흡사함을 따진다면 단연코 이 기와집들을 따라올 집은 없었다.
같은 사람이 동시에 지은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비슷한 집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채 늘어져 있어, 그 기와집이 이 기와집이 맞는지 처음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란스러워하며 꼭 이곳에서 길을 잃었다.
한약 거리에 몇 번 와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기연조도 거리 깊숙이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다. 차분하게, 예전의 기억을 토대로 기와집이 있는 곳까지 어찌 오기는 했지만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까지 오자 기연조는 자신도 모르게 ‘오호라.’하고 무릎을 쳤다. 여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가 길을 잃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마에 가득 맺힌 땀을 닦고 그는 침착하게 민울이 말한 대로 다섯 번째 집을 찾았다. 아, 그러나 이내 기연조는 ‘하하.’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다섯 번째라고 할 만한 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다섯 번째 집이라고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기와집이 차례로 있는 게 아니라 둥글게 무리지어 있어서, 서쪽에 있는 집이 첫 번째 집이라고 말하면 첫 번째 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동쪽에 있는 집이 첫 번째 집이라고 하면 그게 첫 번째 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기연조는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여기 다섯 번째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도 마침 길을 잃고 헤매던 와중이라 되레 기연조더러 여기가 어디며 어디로 가야 입구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기연조는 ‘허.......’하고 턱을 긁적이고 그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 사람은 고맙다는 말을 하며 부리나케 기연조가 가르쳐 준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연조를 보고 있던 노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가 ‘길을 찾는가?’하고 물어봤다. 반색하며 혹여 다섯 번째 집이 어디냐고 묻자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뭐 그리 헷갈리게 길을 가르쳐 주었누.’하고 민울을 욕했다.
노인이 빨고 있던 곰방대를 들어 한 기와집을 가리켰다. ‘저리 뒤쪽으로 가면 되우.’ 기연조는 노인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에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발을 옮겼다.
길을 찾는데도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처음 기와집들을 발견했을 때에는 머리 위에 하나둘 정도만 별이 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하늘은 온통 소금이라도 뿌려 놓은 듯 수많은 별들이 일제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러다 민울과 엇갈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기연조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허나 이상했다. 민울의 말로는 그 길을 걷다보면 분명 자견의 집이 나온다 하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집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집이 나오기는커녕 길은 점점 좁아지고 주변의 수풀은 점점 많아졌다. 나무의 크기고 점점 커지고 그 수도 많아졌다.
이 길은 마치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 같지 않은가.
잠깐 발을 멈춘 기연조는 인상을 쓰며 길 끝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가면 자견의 한약방이 나오는 게 과연 맞는가? 그런 의심도 잠깐, 기연조는 그때 저쪽 끝에서 번쩍이는 뭔가를 보았다. 불빛이었다.
아, 저곳에 바로 그 자견이라는 자의 한약방인가 보다.
기연조는 은근히 오르막길인 좁은 길을 부지런히 걸어 올라갔다. 저 불빛이 있는 곳으로부터 민울이 걸어 내려오기 바라며, 그러나 문득 기연조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저 한약방의 불빛이라고 여겼는데 걷다보니 한약방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불빛이 너무도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가서야 기연조는 불빛이 어째서 그렇게 컸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불빛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였다.
“.......”
애써 기연조는 납득하려 했다. 사람이 꼭 하나의 불빛에만 의지하고 살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이리 깊은 산속에 사니 불을 여러 개 켜놓고 살 수 있겠지.
게다가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이제껏 헤맨 시간도 아깝고, 또 다시 민울을 만날 뾰족한 방법이 없기도 했다. 자견의 한약방으로 가서 혹여 민울이란 낭중이 온 적 없냐고 물어보고, 돌아가는 길을 위해 초롱도 하나 빌려야겠다고 기연조는 생각했다.
헌데.
“.......누구신데 여기에 이리 모여 계십니까?”
자견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한 기연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견의 집에서 밝힌 불이라 생각했던 불이, 그 불이 아니라 집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견의 집이라 생각했던 곳은 집이 아니라 우물터였다. 기와지붕이 크고 높아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집으로 보였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다만 지붕과 그를 받치는 기둥만 있을 뿐이고, 그 아래에는 집이 아니라 오래된 우물만이 하나 있었다.
그 낡은 우물터에 험악한 얼굴을 한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복식을 보아하니 관아에서 일하는 관료들 같았다.
“이게 어찌 된.......”
기연조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거기에 모여 있던 남자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기연조, 너를 거승주를 살해한 범인으로 체포한다.”
“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한 말이 믿기지 않아 기연조는 외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남자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남자들은 기연조를 에워싸며 그를 바로 포박했다. ‘놓으십시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소!’ 기연조는 우악스런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허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건장한 사내들의 손에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설명이라?”
그런 기연조를,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이걸 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는가.”
그 자가 자신이 가리고 있었던 것을 기연조에게 보여주기 위해 횃불을 잡고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 자에게 가려져 있었던 우물이 마침내 기연조의 눈에도 들어왔다. 횃불을 우물 쪽으로 비추며 그 자가 ‘확실히 보시오.’라고 말했을 때, 기연조는 부당함에 저항하는 것도 잊고 숨을 흡 멈추고 말았다.
거기에는 우물에서 이제 막 끌어올렸는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남자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징그럽게 부풀어 오른 살덩어리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그 남자의 가족이 와도 가늠하지 못할 듯 했다.
허나 기연조는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그가 누군지.
“.......거승주?”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착용하고 있는 물건들을 통해서.
“이래도 모르겠소?”
기연조에게 시체를 보여준 자가 묻는다. 허나 기연조는 아직도 이게 어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기연조를 보고 혀를 쯧 찬 남자가, 마침내 기연조의 앞에 결정적인 단서라는 듯 서책을 하나 던져주었다.
툭, 자신의 앞에 힘없이 떨어지는 서책을 본 기연조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이게 어찌 여기에 있소?”
그것은 자신이 거승주와 연락책으로 사용했던 소설책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는 발뺌하더니, 책은 또 어찌 알아보겠소이까?”
비아냥거리며 남자가 횃불을 시체에서 거둬 기연조를 비추는데 사용하였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불꽃 때문에 기연조는 자신 주변의 공기가 뜨끈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정수리에서부터 몸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자견의 집은?”
현실감이 전연 느껴지지 않아 기연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민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다섯 번째 기와집의 옆에 있는 길이라고 가르쳐준 노인은?”
기연조의 말을 어찌 알아들은 남자가 하핫, 차게 웃는다. ‘다섯 번째 기와집이라.’ 그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기연조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발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서책을 툭툭 쳤다.
“다섯 번째 기와집의 옆으로 통하는 길이라니, 암호 한 번 잘 지으셨소이다.”
기연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암호?
“저 아래의 기와집들은 언뜻 보면 규칙 없이 혼재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오른쪽 손가락 끝을 한데 모았을 대의 모습을 본 따서 지은 것들이오. 그렇게 건물을 설계한 것은 바로 자견이라고 불리는 건축가이외다. 그래서 저 기와집들을 자견의 기와집이라고 불리지. 그것을 아는 자는 사실 잘 없기도 하오. 왜냐하면 이제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 자견은 원래 다섯 채의 기와집을 지었소이다. 그러나 한약 거리가 형성되면서 다섯 채의 기와집 옆으로 다른 기와집들이 붙어서 증축이 되었다오.”
거기까지 말하고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않소?’ 남자가 기연조에게 물었지만 기연조는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자견이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자견의 기와집이 몇 채인지 알 리도 없는 것이다. 허나 남자는 기연조가 그것을 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이 암호를 풀어낸다고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남자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을 잇는다.
“다섯 번째 기와집이라고 함은 원래 자견의 기와집들 중에서 새끼손가락에 해당되는 자리에 있는 기와집을 말함이었소. 오른쪽 손가락 끝을 한데 모았을 때, 새끼손가락이 있는 자리에 있는 기와집 말이오. 참으로 힘들었소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슨 말을.”
기연조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온 것뿐이었다. 자견의 한약방이 있다고 해서 거기를 찾으러 온 것 뿐이었다. 민울을 만나러.
“민울, 미, 민울을 불러주시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기연조가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 외쳤다.
“나, 나는 거승주를 죽이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기연조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저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이를 악 무는 것으로 막으며 기연조는 눈앞의 시체와 소설책을 번갈아 보았다. 머릿속에 번뜩 번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연서강.
뿌득, 이가 절로 갈렸다.
연서강이 한 짓이로구나.
연서강이 자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거승주를 죽인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조용한 숲속에서 오로지 횃불 타는 소리와 귀뚤귀뚤,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이 퍼졌다.
* *
거승주의 실종 사건이 해결되었다.
거승주는 한약거리 북쪽에 위치한 숲속 우물 속에 살해된 채 버려져 있었다. 거승주가 실종된 지 한참이 지난 뒤에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수사는 난항에 빠지는가 싶었다. 허나 의외로 단서는 가까운데 있었다.
거승주에 대해 조사하던 관아의 관료들은 그가 일터인 금륜관과 자택 외에도 평소에 세책점을 자주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과 휴식 또 일 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생활 방식이 지극히 단순했던 거승주였기에, 어쩌다 실종이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는 몹시 적었다. 해서 관료들은 헛짓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각오를 하고 평소 거승주가 자주 다녔던 세책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세책점 수사는 완벽한 헛짓거리로 끝나지는 않았다. 거승주가 특히나 한 세책점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심지어 그가 그 세책점에서 유난히 많이 빌렸던 소설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게 전부였다. 조사는 거기에서 그치는가 싶었다.
관료 중 하나가 ‘그 소설책은 정말 재미가 없는데 거승주란 자의 취향은 정말 독특하구먼.’이라고 의아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관료들은 세책점 주인에게 그 소설책을 누가 빌려갔는지 대여 기록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거승주가 그 책을 여러 번 대여했다는 사실과 그와 비슷한 횟수로 또 대여해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바로 기연조였다.
유일한 단서는 바로 이 소설책이 전부였다. 해서 관료들은 소설책을 가지고 가서 그 안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대여기록을 비교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연조와 거승주가 마치 대화라도 하듯이 감상을 주고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감상만 추출해 관료들은 거승주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혹여 있을까 조사했다.
감상들은 처음에는 그저 단조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냥 단순한 일상 기록인 것처럼 보였고 가끔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감상들도 있었다. 허나 중간부터 기연조가 몹시 격한 어조로 거승주에 대한 욕설을 적기 시작했다.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이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궐내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연조는 이 소설책을 유일하게 빌리는 다른 한 사람이 연무강의 충실한 부하라는 것을 깨닫고 적의를 드러낸 듯 보였다. 허나 거승주는 그런 그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소설책의 공백 전체가 기연조의 거승주를 향한 험한 말들로 도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적혀 있는 말은 그것이었다. ‘한약거리의 다섯 번째 기와집 옆으로 난 길 끝에 와라.’ 그 짧은 문장 아래에는 날짜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관료들은 그 날짜를 토대로 저자 사람들에게 탐문 수사를 벌였다. 혹여 거승주란 이를 보지 못하였는가. 또 혹시 기연조를 보지 못했는가.
그러다 어떤 한 여인이 거승주가 문씨 아저씨네 딸을 따라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허나 문씨네는 며칠 전 이사를 하다 도성 밖에서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한 가족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그들이 원하는 정보는 기연조와 거승주에 관한 것이지, 거승주가 사사로이 누구를 만났고 또 무슨 일을 했는지가 아니었다.
좀 더 조사하자 마침내 쓸 만한 정보가 나왔다. 이번에도, 거승주가 이미 죽고 없는 여자아이를 따라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거승주의 소식을 기연조가 캐물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금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고 여인은 말하였다. 심지어는 기연조가 거승주의 소식을 물어보는 것을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비단 그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기연조가 거승주의 뒤를 몰래 밟은 것이 틀림없다.
그리 결론을 내린 그들은 소설책의 마지막에 쓰인 단문이 대체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단문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들은 서둘러 그 장소로 사람들을 보내고 다시 기연조에 대해 수소문을 했다. 이번에는 궐내의 사람들에게도 수사를 해보았다.
과연 성과는 있었다. 장한궁의 민울이란 낭중이 ‘아, 들어봤어요.’라고 증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인도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인데, 그가 이틀 후에 한약거리로 가서 뭔가를 건진다고 하였어요. 저녁에 가야 한다고도 하던걸요.
민울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관들은 기연조를 잡을 덫을 놓았다. 마침 그 장소로 간 관료들이 우물 안에서 거승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시신은 미눙릐 말대로 이틀 후 저녁 즈음에 건지는 것으로 하였다. 그때, 기연조가 그 장소에 나타나면 증거를 보여주며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기연조는 과연 그 장소에, 그 시각에 나타났다.
그는 자견의 기와집을 알고 있었으며 그 우물이 다섯 번째 기와집 옆으로 난 길로 와야 도착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설책에 쓰인 그대로였다. 물론 기연조의 글씨체와 소설책 감상의 글씨체를 대조하는 작업은 벌써 끝난 지가 오래였다. 글씨의 생김새와 거의 직선에 가깝게 그린 곡선, 세로로 획을 그을 때 중간부터 힘을 주는 버릇까지. 그 감상들은 기연조가 쓴 것이 확실했다.
이렇게나 증거가 확연한데도 기연조는 발뺌했다. 자신은 민울이란 낭중에게서 약속 받은 물건을 받기 위해 자견의 한약방으로 찾아가던 중이었고, 다섯 번째 기와집을 안 것도 어떤 노인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관료들은 민울을 불러 기연조의 말이 사실이냐고 따져 물었고, 잔뜩 겁에 질린 민울은 ‘제, 제가 그의 이야기를 지나가다가 들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실은 그때 그가 제 얼굴을 보았거든요. 너무 무서워서 이야기를 못 했지만, 그가 저를 모함하려는 것이 틀림없어요! 아아, 두렵습니다. 이대로 그가 풀려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저 또한 거승주처럼 살해당할 겁니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으니까!’라 외쳤다.
그 말 또한 일리가 있었다. 온 몸이 새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떠는 민울의 말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관료들은 기연조가 말한 ‘노인’ 역시 찾지 못했다. 목격자를 찾는다며 벽에 커다란 대자보를 걸었지만 ‘노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그 ‘노인’을 본 사람조차도 없었다. 당신이 노인을 보았다던 그때, 당신 말고 그 노인을 본 사람이 없느냐고 수사관들은 기연조에게 물었다.
기연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제가 그때,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것은 기억이 나지만, .......정작 제게 길을 알려 주었던 그 노인을 본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라고 대답했다. 수사관들은 의심스런 얼굴로 기연조를 보았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자가 등장했다. 바로 기연조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연조의 얼굴을 보고 ‘네, 그가 가르쳐준 것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노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사관은 힐끗 기연조를 쳐다보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물었다.
-저 이가 한약거리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았습니까?
그 사람은 ‘그래 보여서 길을 물어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따라 입구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관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연조가 외쳤다.
-아니다! 거승주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야!
그 외침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허나 기연조에 대한 처리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 귀비 소생의 황자가 결국 내장이 모두 파열되어 절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참혹한 비극이 일어남으로 해서 나라 안 모든 죄인들의 판결은 뒤로 미루어졌다.
기연조의 처리 또한 기약 없이 두로 미루어졌다. 이에 기연조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를 두둔하던 기씨 문중 무리들도 자연스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 *
추적추적 가을비가 새벽부터 내려 늦은 오후까지 계속 되고 있었다.
옅은 물안개가 낀 궐내는 마치 무덤가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오가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다. 수확제 준비기간이라 늘 사람들이 바글거렸던 혜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가끔 지나가는 궁인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던 황자는 결국 쾌차하지 못하고 시월을 며칠 앞둔 시기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귀비는 그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으며 황후는 수안궁에서 그 소식을 듣고 유감을 표했다. ‘착한 아이였거늘.’ 그녀는 이어 귀비가 혼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빌어야 하겠구나.’ 그런 그녀의 말에, 그녀를 모시기 위해 곁에 시립하고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절을 하며 ‘마마의 말씀대로 거행하겠나이다.’라고 답하였다.
황자에 대한 예장(禮裝) 준비가 즉시 이루어졌다. 장례를 지내가 위해 특별히 그에 관련된 임시 관서인 예장도감이 설치되었고 각부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예장도감은 크게 국장(國葬), 빈전(殯殿), 산릉(山陵)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 하는 일이 달랐다. 국장부는 장례의 총괄과 국장 행렬을 맡았으며, 빈전부는 시신을 수습하고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산릉부에서는 장지(葬地)를 골라 거기에 묘소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대개 삼공(三公) 중 하나가 총호사로 임명되어 예장도감의 여러 가지 일들을 총괄했으며, 이하 담당 관리들이 따로 또 차출되었다.
이번에 총호사로 임명된 것은 민정 최고 대신인 승상 기능묵이었다. 기능묵은 황자의 죽음을 다른 누구보다 더 애도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씨 문중에서는 이미 태자로 정해진 황후의 소생 대신 귀비의 소생인 황자를 다음 대 황제로 세우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황자는 병사(病死)하였기 때문에 남긴 유언이 없었다. 또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축문에 올릴 만한 업적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황자를 위한 제문(祭文)은 대대로 젊은 나이에 급사한 젊은이의 명복을 비는 문장으로 작성되었다.
황자의 입과 코 사이에 고운 햇솜을 얹어 숨이 완전히 멎었음을 태의령이 확인하고 나서야 예장 의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예장도감에서 장례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는 3일 동안 황자의 시중을 들었던 낭중이 황자의 평상복을 가지고 궐 지붕으로 올라가 초혼(招魂)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로 황자의 시신을 깨끗하게 씻기고 청결한 의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 등을 채우는 반함(飯含) 의식을 치렀다.
그러는 3일 동안 수안궁에서는 초혼의식 때 사용되었던 평상복을 태우고 황자의 명복을 빌었다.
다음으로 황자의 시신을 옷과 이불로 마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斂)이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수안궁의 태상에게 황자의 넋이 아직 이승에 남아있지는 않는지 확인을 받았다. 그가 황자의 넋이 이승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승인하면 마침내 입관 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염습을 마친 시신은 재궁(梓宮: 관)에 넣어지고 다시 찬궁(?宮: 집모양의 구조물)에 안치하여 빈전이라 불리는 전각에 두었다. 그렇게 황자의 시신은 빈전에 모셔진 채 발인(發靷)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을 장지인 산릉까지 모시는 발인을 시작하는 날짜는 당연히 태상이 길일(吉日)을 잡아 그 날에 행해졌다. 그가 길일을 고를 때까지 황자의 시신은 계속 빈전에 모셔져 있는 상태였다.
발인 날짜는 곧 정해졌다.
‘그 날’은 발인까지 보름이 남은 날이었다. 궐내의 어두운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한 것인지 강수량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마치 장마철처럼 어두컴컴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때문에 아직 한낮임에도 하늘 아래의 모든 사물은 빛을 잃고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또, 기연조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황자가 숨을 거둔 이후 궐내는 물론이고 도성 안도 장례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판결 역시 뒤로 미루어져 있다가, 발인 날을 기다리는 동안 남은 시간을 이용해 범죄자에 대한 판결이 차례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웃으며 연서강은 우산을 접어 옆에 대기하고 있던 궁인에게 넘겨주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우산을 받아든 궁인은 곧바로 수통에 우산을 담아 그것을 들고 부리나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눈을 쫓으며 연서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홍이는 어디로 갔습니까?”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음에도 수안궁의 안은 다른 곳에 비해 그리 습기가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쓰인 목재의 종류가 다른 것일까. 습하고 물비린내가 심하게 났던 서서원을 떠올리며 연서강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쓰인 나무의 종류는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한데, 수안궁에서는 물비린내보다는 향냄새가 더 진하게 나는 듯 했다.
연서강의 거듭된 물음에도 상대방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탁자 위를 간헐적으로 두드리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신경질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연서강은 마침내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장 기간인지라 장례 예복으로 차려입은 제아겸이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는 탁자를 치고, 또 다른 손으로는 턱을 괴고 있었다. 대꾸가 없기에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
비난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연서강은 그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태상경.’하고 연서강이 그를 부르자 갑작스레 그가 탁자 위를 두 손으로 내리친다.
탕.
요란한 소리가 있은 후, 그와 연서강의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웃지 말게.”
약간의 틈을 두고 보기 드물게 차디찬 목소리로 태상이 말했다.
“연서 자네, 언제부터 내 앞에서 그리 거짓 웃음을 지었었나.”
“태상경.”
웃지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연서강은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가만했던 미소가 쓴웃음으로, 그 종류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 연서강을 제아겸은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자네, 분명히 공치식까지 기다린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랬습니다.”
연서강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상이 대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연서강은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그는 비에 젖은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흘렸다. 그가 자신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라고 화를 내며 따져 물어도 할 말이 참말로 없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둘러대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홍이는 어디로 갔습니까?”
하지만 묻지도 않은 말에 주저리주저리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에게도 그리 유쾌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홍이를 찾는 질문에 제아겸이 눈살을 찌푸린다. 연서강이 그 화제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연서강과 달리 제아겸은 어떻게든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작정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내게 거짓말을 한 것도, 거짓 웃음을 지은 것도.”
“태상경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에 전부 드러난다고. 해서 고친 것입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사는 게 정말 즐겁네, 느껴질 정도로 웃으라고 하신 것은 태상경이 아니셨습니까.”
그 말에 무언가 울컥 치솟는 감정이 있는지 드물게 태상이 큰 소리를 쳤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네!”
수안궁의 태상은 항상 물 흐르듯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들의 곁에 있던 여인들이 태상의 외침에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수안궁에서 지낸 지 오래 되었지만 그녀들은 단 한 번도 태상이 타인에게 소리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화를 낸 적도 별로 없었다.
“.......홍이를 만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만나기 그른 모양이니 다른 날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에 연서강은 태상에게 예를 취하고 몸을 돌렸다. 연서강이 수안궁을 나가는가 싶어, 아까 그의 우산을 챙겨 들고 갔던 궁인이 허둥지둥 다시 우산을 꽂아두었던 수통을 찾으러 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제아겸의 목소리가 먼저 퍼졌다.
“거기에 꼼짝 말고 서게.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연서, 자네는 평생 홍이를 못 볼 줄 알아.”
연서강의 몸이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요 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연서강은 고개를 돌려 제아겸을 응시했다. 꾹 입을 다물고 엄한 표정을 지은 제아겸이 연서강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로 오게.’
딱히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연서강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불쾌한 얼굴인 제아겸이 ‘연서, 자네.’하고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이윽고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허세를 내가 언제 내 앞에서 부리라고 했던가. 홍이의 앞에서 하란 소리였네. 연서는 정말 사람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군. 그러다 없던 친구도 다 없어지겠네.”
없던 친구도 다 없어지다니, 그게 아니라 있던 친구도 다 없어진다가 맞지 않은가. 연서강은 ‘그 말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하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연서강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은 기연조를 친구라 생각했지만 기연조 쪽에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태상경의 말씀이 옳을지도.......’ 하고 중얼거리는 연서강을 제아겸이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연서강을 보았을 때보다는 많이 유해진 얼굴이었다. 하여튼, 하고 제아겸은 혀를 쯧쯧 찼다.
어째 저리 세상사는 게 서툴까.
“혼내시려고 부르신 것 아닙니까?”
수안궁의 태상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릴 들었을 때, 연서강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태상이 적어도 공치식까지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 하기를 바랐다. 허나 이렇게 거하게 일을 터뜨렸는데 태상이 눈치를 못 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그는 기연조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을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 후로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그럴 겨를이 없었다 뿐이지.
허나 자신의 생각과 달리 태상의 반응은 그리 격하지 않았다. 다소 못마땅한 듯 보이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혼내면 자네가 들을 건가? 이제부터 나도 혼내서 가망이 있는 자를 혼내도록 하기로 했네. 말해도 도무지 알아들어먹지를 않으니. 혼내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이건 무슨 짐승 귀에 경 외는 것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하며 제아겸은 마치 노래를 하듯 말했다. 가벼운 목소리에 장난스러운 선율마저 섞여 있는 말이라지만, 그 내용까지 가볍고 장난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방금처럼 무서운 얼굴로 꾸중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연서강은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하고 말했다. 태상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나, 나를 속이려고 작정하려고 한 게.”
“태상께서 모르시길 바랐던 일이 처음 생긴 날을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이번 일을 태상께는 비밀로 해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던 날을 말씀하십니까.”
“둘 다.”
“.......아마도 여름이겠지요.”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지 태상이 미간을 좁힌다. ‘여름?’ 너무도 광범위한 대답이니 그런 게 당연했다. ‘죄송합니다.’하고 거듭 연서강은 사과했다. 연서강이 사과하는 이유가 미안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뜻이라는 것을 깨닫고 태상이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자네를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네.”
그리고 그는 손짓을 해 주변에 서있는 여인들에게 마실 것을 준비해 오라 명했다. 여인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앉게.’하고 이어 제아겸은 연서강에게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제아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고 있어. 모르고 있네.’ 그가 다시 탁자 위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쳤다.
“자네가 지금 저지른 일은 죽을 때까지 따라갈 것이네.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일세. 지금 현재에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영향이 앞으로도 주욱 이어질 걸세.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너무도 포괄적인 말이었지만 연서강은 알 듯도 했다. 바로 근래에 겪은 적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저지른 일들이 나중에 얼마나 참혹한 사태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지, 그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연서강은 ‘네.......’하고 마치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는 어린애처럼 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연조와는 대체 앞으로 어찌 할 작정인가.”
“.......”
“들었네. 그가 살인죄를 저지르고 옥에 갇혔다지. 오늘 그 죄에 대한 처결이 내려질 것이라 들었네. 그거 자네가 한 일인가? 기연조가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자네의 집안 어르신들이 한 짓인가?”
“둘 다입니다.”
자신이 거승주를 죽인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흉계를 꾸몄으며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 흉계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니 틀린 대답은 아니었다. 제아겸이 ‘그렇군.’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 틈을 두고 또 불쑥 제아겸이 묻는다.
“황자의 일은 또 어찌 된 것인가.”
“그것도 둘 다입니다.”
“.......”
연서강의 대답에 제아겸은 마침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면서 ‘아이고, 아이고.’, 경망스레 탄식을 했다. ‘아이고. 저 놈이 정녕 막 나가기로 작정을 했나 보구나.’ 그런 제아겸의 반응에 연서강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두 눈만 간헐적으로 깜박였다.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닌지 두 손으로 얼굴까지 쓱 쓸어내린 제아겸은 다섯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목을 졸랐을 거네.”
“제 부친께서는 잘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만.......”
그의 천진난만한 대답이 도저히 더 참고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제아겸이 결국 탁자 위에 엎드려 쾅쾅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움찔 어깨를 떨며 연서강은 그가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왜 이러시나.
그러는 와중에 마침 마실 거리를 들고 여인이 나타났다. 향기 좋은 차와 유밀과를 소반에 받쳐 들고 나타난 그녀는, 태상이 엎드려서 주먹으로 탁자를 쾅쾅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연서강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놀란 듯 연신 움찔거리는 그녀에게서 연서강은 차와 유밀과를 담은 소반을 건네받았다. 여인이 황망해하는 눈으로 태상의 모습을 힐끔거리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총총 걸어 사라졌다.
“.......자네를 보면 답답해 죽겠네.”
여인이 사라지자 마침내 탁자를 치는 것을 그만 두고 제아겸이 말을 불쑥 내뱉었다. ‘연서, 자네는 내가 이제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어설프고 안 된 자이네. 보고 있으면 아주 미치겠어.’ 이어진 말이 썩 좋은 평은 아니라 연서강은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로 웃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기연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이쪽이 낫지 않습니까.”
태상이 볼멘 목소리로 반박했다.
“나라면 차라리 함께 도망가자고 했을 거네, 처음부터.”
“그렇지만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래서 또 그러지 않았었나. 애초에 기연조가 살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내 행복을 찾아 룰루랄라 살겠다고.”
“기연조는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가 또 죽는 것을, 저는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공을 치고받는 것처럼 끝도 없이 계속되던 상대의 말에 대한 반박과 제반박은 마침내 연서강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말에는 딱히 할 만한 대꾸가 없었던지, 태상이 수그렸던 상체를 들고 다시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확제 준비로 바쁜 와중에 황자마마께서 편찮으시지를 않나, 또 황자마마께서 편찮으시니 황태후마마와 황후마마께오서 수안궁을 찾아와 신께 기도하겠다고 하시지를 않나, 간신히 기도가 끝나나 싶었더니 이제는 황자마마의 예장 준비로 바쁘지 않나.”
“그래도 수확제는 취소되지 않았습니까.”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말을 괜히 길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태상에게 연서강이 대꾸했다.
그랬다. 황자의 예장문제로 금번 수확제는 마침내 취소되고 말았다. 해서 거리의 장사꾼들도 사라지고 경천문 광장을 잔뜩 메웠던 마차들과 사람들도 사라졌으며 수확제를 준비하기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던 기구도 공중분해가 되고 말았다.
‘네 놈이 몰라도 뭘 한참 모르는구나.’하고 타박하는 눈길을 보내며 제아겸은 연서강의 코앞에 유밀과를 들이밀었다.
“수확제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하나도 취소되지 않았네.”
그리고 그는 유밀과 하나를 자신의 입속으로 넣었다. 제아겸과 자신의 앞에 있는 잔에 향 차를 따르고 있던 연서강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수확제가 취소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신께 감사하는 제사까지도 함께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나라 안에 비통한 일이 터졌으니 그저 흥겹게 놀고 즐기는 것들만 금해진 것뿐이었다. 태상이 주관하는 제천 행사는 그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유밀과를 씹어 삼킨 다음, 연서강이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제아겸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망할 뱀 신에게 제사는 왜 지내야 하는지.’
연서강이 그를 따라 차를 마시다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거 제가 선물한 차 아닙니까?”
뱀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 따위를 지내야 하는 자신의 고충은 들은 척 만 척 한 것이 분명한 연서강의 말에 제아겸이 잔을 내려놓고 심술궂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맛없어. 그때 방문 판매 하러 왔다던 상인을 매우 쳐야겠어.”
공으로 받으신 것이면서. 연서강은 괜히 트집을 잡는 태상을 흘끗 한 번 보고 차를 마저 마셨다. 맛이 없기는, 향과 맛만 좋았다. ‘연서, 자네 좀 빤빤해진 게 아닌가.’ 동요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만 마시고 있는 연서강을 보고 태상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리고, 공치식도 취소되었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공치식이 취소되었다는 말에 연서령은 경악했다. ‘우리 오라버니! 상복도 없지! 모처럼 의향 언니가 신경 써서 추천장을 써주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다고.’ 공치식에 별 다른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던 연서강이었기에 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본인이 받는 상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저리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서령은 주먹을 꽉 쥐고 연서강을 돌아보며 의욕에 불타는 얼굴로 외쳤다. ‘이렇게 된 이상, 봄을 노리는 거야! 봄이 되면 상춘연회 열리잖아? 그때 대대적으로 또 상을 내리니, 오라버니, 봄을 노리고 우리 변방에서 좀 더 고생할까요?’ 십대의 피가 끓는 열혈 동생의 그 의욕을 연서강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 사양하마.’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연서령이 ‘왜, 왜 욕심이 없어, 너라는 사람은!’하고 그의 등을 팡, 때렸다. 거기에 대고 연서강은 차마 ‘너는 왜 그렇게 남의 일이면서 그리 욕심이 많으냐.’하고 말하지 못했다. 또 맞고 싶지 않았다.
쓰게 웃으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공치식은 이제 됐습니다. ......더 이상 하고픈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을 테니까.”
“.......”
차를 마시고 있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차를 마시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모호한 태도로 제아겸이 잔을 입으로 가져다대었다. 그가 침묵하자 수안궁 안에는 밖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가끔씩 멀리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마침내 차를 다 마신 그가 여상하게 말을 잇는다. 그 말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연서강은 제아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아겸은 시선을 모로 돌리며 ‘사람 일이란 게 그렇게 맺고 끊음이 쉽게 된다면 오죽 좋겠냐.’하고 앞에 한 말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다만 후회할 짓은 하지 말게.”
마지막으로 제아겸이 말을 덧붙였다.
후회할 짓이 무어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연서강은 경천문 광장을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덕분인지 널따란 광장에는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토를 흙에 섞어 깔아 평소에는 짙은 황색을 띠는 광장 바닥이 비에 젖어 시꺼먼 색이 되어 있었다. 때문인지 마치 자신이 흙바닥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심해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비슷할지도 모른다.......
-.......기연조와는 대체 앞으로 어찌 할 작정인가.
연서강은 자신이 아직도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대충 태상께서도 자신이 기연조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을 아실 텐데, 못할 짓도 보통 못할 짓이 아니었다. 무려 살인죄를 뒤집어씌웠으니, 이제 기연조와 자신의 관계는 친구나 옛 친구 따위가 아니라 원한 관계라고 불려야 할 게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기연조와는 어찌 할 작정’이냐고 물으시다니. 앞으로 뭘 어찌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자신과 기연조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비틀어져 버렸다. 그저 기연조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 옳다, 잘 되었다. 자위하며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연서강은 우산을 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후회할 짓.
후회할 짓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회할 짓이 무어가 있을까. 무슨 수를 써도 결국엔 이리 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찌 어쩌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후회한단 말인가. 다른 선택지라도 주고 그런 말씀을 하셨으면 좋겠다. 같이 도망가거나, 잊고 산다는 종류의 것이 아닌.
.......하지만 어쩌면 태상의 말씀이 맞는지도 몰랐다. 이리 될 수밖에 없었다면 처음에 태상의 말씀대로 한 번 기연조에게 같이 도망치자고, 그렇게라도 말을 해볼 것을. 말해 볼 때를 한참을 놓친 후에야 비로소 드는 생각이었다.
참으로 어리석다.
“.......”
기연조가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는지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나러 갈 용기가 차마 생기지 않았다. 만나봤자 기연조는 녹우당에서 봤을 때보다 더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탓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그를 찾아가는 거은 바보짓이리라.
그래도.
“.......”
연서강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래도, 기연조가 잘 있는지 염려가 되었다. 그를 찾아가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분명히 생각을 하면서도 가시처럼 그가 마음에 걸려 심장이 따끔따끔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념이 깊은 자이다. 설사 지금은 아니더라도 ‘되돌아오기’ 전에는 자신을 구하러 위험한 곳까지 왔었던 자이지 않은가. 올곧고 똑바르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이이기도 했다. 헌데 자신의 흉계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버렸으니, 그가 받은 충격은 보통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제발 쓸데없는 생각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옥에 갇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자해를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르나,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찌 행동할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기연조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을까.
더욱이 자신은 한 번 궁지에 몰려 사람을 죽인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잔혹한 짓도 얼마나 쉬이 할 수 있는지 직접 체험한 적이 있는 것이다. 소년 병사의 얼굴을 돌로 으깨며 웃었던 ‘자신’이 지금도 자신의 속에 있을 것이란 생각에 연서강은 돌연 오싹해졌다.
그때에는 자신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었다. 그러니 기연조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미련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연서강은 그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자네, 정녕 나를 친우로 생각하는가?
과거에, 적어도 내가 변방으로 가기 전에, 아니,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나 내가 변방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자네는 나를 어찌 생각했었나.
수안궁의 태상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었다.
자네, 태상경께 나를 찾아 달라 부탁도 하였다면서. 아무도 나를, 심지어 가족들도 나를 찾지 않았는데 자네만 나를 찾았다고 들었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 이후 내가 변방에서 돌아와 여러 가지 험한 일들을 계획하기 전까지는 나를, 아무리 이용하려고 접근했었다지만, 나를.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대해준 적 있는가?
“.......”
자신이 준 마음만큼 상대방 역시 자신을 생각해줄 리가 없는 건 당연하다. 그게 당연하지만 저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는 법이었다. 연서강에게 있어 그 사람은 바로 기연조였다.
심지어 그 한 명은 연서강이 가족들에게조차 냉대를 받으며 살았던 때에도 유일하게 그를 아껴준 사람이었다. 그런 이의 애정이 사실은 가식일 뿐, 진실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 연서강은 모든 것이 허탈해지려 했다.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연서령이 자신과 즐거이 이야기 할 때도 ‘아마도 내가 구해주었기 때문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연의진이 자신을 염려해줄 때도 ‘내가 쓸모가 있어졌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연무진이 자신에게 방긋 웃어주어도 ‘내가 먼저 말을 걸었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안궁의 태상님 또한 ‘내가 되돌아온 자이기 때문에.’ 잘 대해주는 것이리라.
연서강은 가던 길을 멈추고 심해와 같은 경천문 광장을 보았다. 물안개까지 옅게 피어올라 더더욱 어두컴컴한 바다 속같이 느껴졌다. 아니, 연서강은 고요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우물 속’에 있어서일 테지. 그 ‘우물 속’에 홀로 갇혀 있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어도, 돌아서면 자신에 대한 마음이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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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녹우당에서 연무강에게 서책을 건네줄 때, 연서강은 필시 연무강이 자신을 이전처럼 억지로 취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연무의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강제로 옷을 벗기고 자신의 다리를 버릴 것이라 여겼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허나 연무강은 그러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에 접문(接吻)하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입술을 땐 그는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 따위를 정리해주고 바로 물러났다. 때문에 연서강은 황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 하는 건가?
경직되었던 몸이 그런 생각으로 살짝 풀어졌으나 끝까지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혹시 몰랐다. 그가 자신을 안심시켜놓고 후에 겁을 주고 협박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러나.
-바람이 차구나. 이만 들어가거라.
그렇게 말하며 연무강은 연서강의 머리를 토닥일 뿐이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만약 기연조의 처리를 맡았다면, 필시 그를 죽였을 테지. 기연조를 살리려면 네가 이 일을 맡는 게 옳구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자신은 왜 이런 말을 그에게서 듣고 있는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 이상.
묘한 감정에 형님, 하고 부르며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새까만 밤이었었다. 그 새까만 밤 아래에서 보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무섭고 두려운 얼굴과 똑같았다. 자신이 죽었었던 그 밤에 봤던 남자, 연후정에서 뭔가를 찾다가 들켰던 그 밤에 봤었던 남자, 그 이후로 본채에서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왔었던 밤들에 봤던 남자까지. 하나같이 싫고 끔찍하고 참혹한 기억들이었다.
그랬던 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전부 다 자신이 밉고 한심하고 싫어서 그런 것 아닌가. 연씨 문중에 행여 자신이 해악을 끼칠까봐.
그 말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
문득 찰박,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려 연서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린 궁아들이 비를 맞으며 광장을 뛰어서 가로지르고 있는 게 보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챙겨들고 오지 않았나보다. 저리 다 젖고 가면 상궁에게 혼이 날 터인데. 눈으로 궁아들의 움직임을 쫓으며 연서강은 일시에 뒤엉킨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비가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다만 후회할 짓은 하지 말게.
방금 수안궁에서 들었던 태상의 말도 크게 머릿속에서 울렸다. 후회할 짓.
후회해도 괜찮다면 사실 후회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허나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자신이 한 번이라도 게을리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있었던가. 더욱이 일어난 일들의 대부분이 또 달리 선택할 만한 해결방안이 딱히 없었기도 했다. 자신이 좀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모를까, 비루하고 모자란 자신으로서는 여기까지 오는 길이 가장 최선이었다.......
최선.
그렇기에 후회하면 안 된다.
하지만 연서강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있었다.
“......”
우울한 얼굴로 연서강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종일 비가 내린 탓에 내려다 본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웅덩이에 비친 말끔한 얼굴의 청년이 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연조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허심탄회하게 뭔가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연서강은 이제야 깨달았다. 마음의 문제든, 집안의 문제든, 다른 무엇이든, 기연조는 자신에게 항상 진실하지 못했다.
그리고 되돌아온 이후의 자신 역시.
* *
연무강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밖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집무실 안은 낮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그는 호롱불을 밝힐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팔 위를 두드렸다. 타닥, 타닥, 창틀에 빗물이 부딪혀 마치 기름이 튀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가끔은 바람이 불어와 덜컹덜컹 창을 흔들어 놓기도 하였다.
“.......내가 알면 안 될 사람, 이라.”
생각에 빠진 그의 눈동자가 짙은 검정색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