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황자가 앓아누운 지도 벌써 열흘이나 되는 시간이 지났다.
그간 귀비는 황자에게 세 번 복고단을 복용시켰고, 그에 황자는 세 번 상태가 괜찮아졌다가 다시 또 아팠다. 열 감기를 닮은 고열은 어린 황자의 몸을 확실하게 갉아먹어가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황자가 울혈이 섞인 피를 토했다고 하였다. 그의 내장에 쌓인 열이 상당하다는 증거였다.
이대로 내장이 파열하여 내출혈로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황자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 몸단장을 하는 것조차 잊은 탓에 깊은 산속에 사는 늙은 귀신같은 꼴을 한 귀비가, 태의령의 그 말을 듣고는 그만 체통도 잊고 선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다! 저 사악한 놈이, 감히 내게 거짓부렁을 하는 것이야!’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귀비는 태의령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저지하려 주변 사람들이 귀비의 몸을 붙잡았으나 자식에게 닥친 비극에 반쯤 미쳐버린 귀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귀비는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어린 궁아의 왼쪽 귀를 물어뜯었고 자신의 손목을 잡은 경비병의 목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귀가 뜯긴 궁아의 찢어지는 비명이 장한궁의 하늘을 수놓았었다. 그리고 그 난리통에서 태의령은 간신히 엉금엉금 기어 나와 그대로 영의전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이후로 태의령은 영의전 밖으로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귀비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황자를 진찰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태의령은 제발 귀비에게서 황자를 떼어놓아 달라고 황제에게 사정했다.
아무리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황실 가족들의 진료를 맡은 어의가 황족을 진찰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태의령이라 할지라도 영의전에 소속된 어의인 이상, 제 목숨보다는 먼저 황실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야 마땅했다. 간혹 황족이 병사했을 경우 때에 따라서는 태의령이 책임을 지고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이번 태의령의 요구는 참으로 얼토당토 없고 제 분수를 넘다 못해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번이 손쓸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원인불명의 병이 원인이라고 해도, 몇 명 정도는 어의에서 파면당하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다들 태의령이 눈앞에서 귀비의 이빨에 귀가 떨어져 나가는 궁아를 목격하더니 미친 것이구나, 그렇게 여겼다.
허나 태의령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영의전에 연씨 문중의 아들인 연의진이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 태위인 연무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연의진을 황자를 진찰하는 데에 밀어 넣으려고 한 것이다.
태의령은 자신이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황자를 치료해봤자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물론이요, 단 한 번이라도 황자를 진찰한 적이 있는 어의들은 모두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네 아들 놈 모가지를 걸어 놓았는데도 설마 연태위가 어깃장을 부릴까. 제아무리 냉정한 연무의라지만 과연 제 자식이 벌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둘까 싶었다. 그래서 연의진을 황자에게 보낼 것이라고 협박하면, 적어도 연씨 문중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태의령은 계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의령의 그런 계산은 시도도 해보지 못 하고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의술만 뛰어났지, 하늘이 재능과 인격을 함께 내리지 않는다는 말의 산증인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태의령을 아끼는 자가 황실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황제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상대였다.
바로 황태후였다.
태의령과 연배가 얼추 비슷한 황태후는, 자신과 비슷한 세월을 궐에서 함께 보낸 태의령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나 추억의 물건이 하나둘 쯤 있어 그 물건이 아무리 낡고 쓸모가 없다 하더라도 귀이 여기는 것처럼, 황태후에게 있어서는 태의령이 바로 그러했다.
-내 일전에 장한궁 비씨를 찾아갔었는데 두 눈에 귀기가 형형한 것이 참으로 무섭더이다. 제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그 상황이 아무리 두렵다 하더라도 그리해서는 안 되지요. 이미 귀비는 장한궁 내에 악귀보다 더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더이다. 해서 이 어미는 태의령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오.
이미 귀비는 사람이 아닌 귀신에 가까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그러면서 황태후는 대다수의 고관들이 말도 안 된다고 여긴 태의령의 요구를 들어 달라 황제에게 요청했다. 물론 황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태후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이후 귀비 비씨는 장한궁에 갇혀 삼엄한 감시를 받으면서,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장한궁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이한 것은 그렇게나 귀비를 총애했었던 황제가 서럽게 울며 발치에 매달리는 귀비의 애원을 모르는 척 했다는 것이었다.
제발 아이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귀비를, 인자한 얼굴을 한 황제는 일으켜 세운 다음 위로했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소, 이만 몸을 추스르고 기력을 회복하시오.’ 그 다정한 말에 일시적으로 희망을 얻은 귀비를 곧바로 이어진 황제의 말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되지 않소. 짐은 귀비의 몸이 더 걱정이오.’
어찌 보면 그녀가 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또 어찌 보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질 만큼 오싹한 느낌을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귀비는 그렇게 말한 후 바로 몸을 돌려 장한궁을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근래 마귀와 다름없이 악에 받쳐 있었던 그녀의 얼굴이 넋을 잃은 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그때 주변에서 그 광경을 보았던 궁인이 다른 궁인에게 속삭였었다. 사실은 황제가 이번에 황태후마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그간 황제의 총애만을 믿고 오만불손하던 귀비에게 벌을 주기 위함은 아닌가 그런 소문까지 궐내에 떠돌았다.
덕분에 궐내의 분위기는 참으로 흉흉했다. 황자가 아파도 그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황제와, 황자가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며 패악을 떨다가 끝끝내 장한궁에 갇히게 된 귀비. 수안궁으로 황자의 완쾌를 빌러 다니고는 있지만 황자가 완쾌되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 바랄 황후. 또 무슨 생각이신지 도통 알 수 없는 황태후마마까지.
그 아래에 놓은 치자(治者)들의 생각들도 뒤엉키고 설키여, 궐내에는 축제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 거짓으로 느껴질 정도로 비리고 써늘한 바람이 불었다.
궐내의 이런 분위기는 담을 넘고 그 밖의 도성에까지 퍼졌다. 아무리 요망한 귀비를 욕하고 현숙한 황후를 지지하는 백성들이라 하지만, 죄도 없는 어린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빨리 죽어버려라.’란 악담을 내뱉지는 못했다.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축제인 수확제를 앞두고 터진 이 불운한 사고는 백성들에게 마치 이보다 더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전조처럼 느껴졌다.......
드물게도 참으로 스산한 가을이 되어 가고 있었다.
“.......”
오랜만에 저자를 걸으며 연서강은 그 변화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죽기 전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딴 판인 거리의 분위기였다. 늘 활기차게 사람들이 붐비었던 거리였는데, 오늘은 느릿느릿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정체되어 있었고 그 색조조차 참으로 칙칙했다.
봄과 여름에 비해 거리의 색깔들이 칙칙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나 가을도 가을만의 알록달록 낙엽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빛깔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붉고 노오란 빛깔들도 거리에 짙게 깔린 부정적인 기운에 짓눌려 제 빛깔들을 뽐내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전체적으로 잿빛 안개가 낀 듯한 거리를 연서강은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 깔린 마른 잎들 때문에 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기분 탓인지 주변의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
자신과 눈이 마주친 어린 여자 아이가 히끅, 숨을 급히 들이마시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황급히 저쪽으로 뛰어갔다. 그 뿐만 아니라 늘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해주었던 과일 집 아주머니도, 생선을 팔던 아저씨도 자신을 본체 만 체 했다.
거리를 걸은 지 한 시진이 다 되어가서야 연서강은 거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는 것을 깨달았다.
기연조와 함께 걸을 때면 아니었지만, 홀로 저자를 걸을 때면 연서강은 늘 사람들에게서 매우 과분한 동정을 받았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이가 아프다며 설탕 과자 봉투를 연서강에게 주기도 했고 어린 여자아이가 어디선가 들꽃을 꺾어와 그에게 주기도 했었다. 모두 다 연서강이 집안에서 구박을 받는다 잘못 생각하고 베푸는 온정이었지만, 확실히 이제까지 저자 사람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었었다.
그 거리가 오늘은 유독 연서강에게 뾰족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행동이, 머얼리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까지 모두 힐난에 가득 차 있었다.
녹우당에 틀어박히기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었다. 전에 거리를 걸었을 적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녹우당 도련님도 이제야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었구먼, 하고 제 일처럼 웃어주었던 것이다. 급여를 받으면 맛있는 것을 사 달라 했던 당돌한 사내아이도 있었다. 그랬었는데 잠시 틀어박혀 있었던 녹우당에서 나오니 이리도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생각하던 연서강은 돌연 깨달았다.
.......그렇구나.
절로 쓰디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야 깨닫다니 어리석기도 하지. 자신은 어쩌면 아직도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얼마 전에 기연조가 말해주지 않았었나. 그 아이의 아버지 되는 자가 녹우당 도련님께 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했었다고. 그 이후 일가족이 밤에 몰래 도성 밖을 빠져나가다 도적을 만나 몰살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그 말 뒤에 ‘자네가 한 일인가?’라며 기연조로부터 추궁을 들어놓고서는 이제야 깨닫다니 참으로 둔한 머리였다.
소문이 퍼졌었구나.......
마치 잔잔하던 수면 위로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번지듯 깨달음이 몸 구석구석에 퍼졌다. 참으로 싫은 감각이었다. 쓰리고 시린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멋대로 온 몸을 쓸고 지나간 자리에 시퍼런 우울감이 꽃을 피웠다. 피식피식 바람 새는 소리와 같은 웃음소리가 연서강의 입술 아이로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는 몇 발자국 앞으로 더 걸아가자 하하하하, 하는 폭소로 변했다. 돌연 폭소를 터뜨리는 그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왜 그러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전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뭘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태반이더니. 그저 혐오감 섞인 얼굴로 자신을 흘깃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연서강은 숨이 턱턱 막혀왔다.
걷는 걸음이 점점 빨라져 마침내 나중에는 달음박질로 바뀌었다.
저자 사람들이 내가 그 아이를 죽인 걸 알아.......
사람들의 비난과 혐오가 섞인 시선이 마치 화살이 되어 온 몸에 박히는 듯 했다. 그 시선들을 모두 맞으며 천천히 거리를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시선 하나하나를 모두 맞았다가는 정말로 자신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왜 높은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인지 알 듯 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골목에 이르러서야 연서강은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갑자기 뛰는 바람에 열로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쓸면서 연서강은 담장에 등을 기댔다. 헉헉, 거친 숨이 그의 입에서 사정없이 흘러나왔다.
돌아가고 싶다. 허나 청다관에서 효기교위 문도학이 기다리고 있으니 도중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돌아가려면 방금 뛰어왔던 거리를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 해서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연서강은 입술을 비틀어 겨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 아니었나, 저자의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의 처지를 멋대로 오해하고 동정을 표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 와서 돌아섰다고 하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또 그들이 자신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이 쓰렸다.
연서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궐내의 사람들이지, 궐 밖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
그러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등 뒤에 닿은 담의 온도가 차서인지 목덜미에 소름도 오싹 돋아 있었다.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스워 연서강은 또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꾸만 흐트러지려고 하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서 가야겠다.
무슨 말을 듣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대하든, 또 얼마만큼 죽기 전과 달라졌든, 그게 바로 자신의 현실이었으니. 조만간 곧 익숙해질 것이다. 자신을 좋아해준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등을 돌렸을 때의 그 차디찬 감각에, 벌써 두 번째가 아닌가. 벌써 두 번째 경험이니 세 번째가 되면 동요조차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세 번째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연서강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자신을 좋아해준 사람이 홍이를 제외하고 과연 세 명까지나 될까?
그럴 리가.
녹우당에서 소요하던 때를 떠올리며 연서강은 땀이 맺힌 이마를 쓸었다.
그럼 이로써 주변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돌아서는 모습을 더 이상 안 봐도 될 터이니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너무 조아서 웃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
연무강은 걷다 말고 서쪽으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높다란 꽃담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고 그 담 너머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상록수 몇 그루가 보였다. 담과 나무들이 겹겹이 겹쳐져 육안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수안궁의 입구가 나왔다. 우녕궁 화원을 지나고 긴 회랑을 거쳐야 나오는 곳이니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
갑자기 연무강이 걸음을 멈추자 그를 따라가던 부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차마 ‘왜 그러십니까?’하고 묻지는 못하고 그저 연무강의 얼굴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허나 한참이 지나도 연무강의 발과 시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못 박힌 듯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연무강에게 부관이 그제야 말을 붙였다.
“연위사님. 수안궁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면,”
사람을 불러 수안궁에 기별을 넣을까요. 그리 물으려고 했던 부관은 연무강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딱히 용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고 그저 변덕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연무강의 뒤를 따라가던 부관은 요새 위사님께서 변덕이 심하시네, 하고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가 아는 연무강은 결코 변덕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의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행동에 바로 옮기지 못 하고 마음을 바꾸었다가 다시 아쉬워하며 뒤를 돌아보는 행동을 자주 하였다. 물론 다들 중요한 용무는 아닌 듯 해 부관은 그에게 ‘무슨 일입니까?’하고 그 때마다 일일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수안궁이란 곳은 과연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곳인 모양이로군.”
‘자주 찾아가는 것을 보니.’ 우녕궁으로 통하는 길을 걷던 연무강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삼스레 무슨 소린가 싶어 부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안궁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인 태상경의 거처이자, 뱀 신님을 모시는 국교의 중심지이니 그 말이 당연하지 않은가.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당연한 이야기를 왜 새삼 꺼내는지 부관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지요.’하고 가장 무난한 대답을 골라 했다.
“.......”
딱히 동의를 구하고자 꺼낸 말은 아닌 듯 했다. 보관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또한 역시 요새 연무강이 잘 하는 기행 중 하나였다. 가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는 것.
혼잣말인지 아니면 주변에 동의를 얻고자 하는 말인지 혹은 의견을 구하고자 하는 말인지 파악할 수가 없는 점이 가장 고약했다. 덕분에 부관은 매 번 연무강이 이런 종류의 말을 할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가장 적절할까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정말 요사이 위사님이 왜 이러시지. 차라리 마음속에 있는 말을 속 시원하게 해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나 다음 순간 부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에게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털어놓는 연위사님이라니, 상상하니 갑자기 그보다 더한 악몽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릉벽 쪽에 경비가 허술하더군. 금천교 쪽으로 사람을 좀 더 보내고 남루와 북루에 비상물품은 충분한지 알아보도록 하라.”
그때 문득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에 부관은 바짝 정신을 차렸다.
“구릉벽 쪽으로는 당분간 인원을 충당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남는 인원이 없습니다. 귀비마마 처소를 지키는 경비병의 수라도 줄이면.”
순간 연무강이 차게 웃었다. ‘거기는 절대 경비병을 줄여선 안 되지.’
“아무래도 여기저기 사건사고가 많이 터져 혼란스러운 시기인데, 혹여라도 귀비마마께서 황명을 어기시고 밖으로 나오게 되면 참으로 큰일이 아닌가. 자신의 수발을 드는 어린 궁아의 귀도 물어뜯으신 분인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연무강과 어울려 귀비를 비난하기에는 겁이 나고, 또 귀비를 두둔하는 말을 하기에는 눈앞의 연무강이 무섭다. 어떻게든 적당한 대답을 해서 이 상황을 넘겨야 할 텐데, 하지만 그 대답이 자신이 귀비를 감싸는 것으로 들릴까봐 부관은 안절부절 못했다.
“혜문 쪽으로 너무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듯 한데, 거기서 충당하면 되겠군.”
다행스럽게도 연무강은 부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본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부관의 반응 따위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제가 바뀐 것에 응당 기뻐해야 할 부관에게서는 ‘혜문 말입니까.......’하고 망설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황자가 병환 중이라 궐내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었다곤 하지만 지금은 수확제 준비 기간이었다. 혜문은 수확제 준비 기간 내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중 하나였다. 병사를 갖다 부어도 모자랄 판에 거기서 다른 곳으로 병사를 보내라니, 말도 안 되었다.
‘허나.’하고 그리 생각한 부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연무강이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고 대꾸했다.
“아마도 곧 혜문 쪽은 다시 폐쇄하게 될 것이다. 선물을 가져오는 행렬도 차차 줄어들 터이니 걱정 말고 그리 하라.”
“.......알겠습니다.”
혜문 쪽을 곧 폐쇄하게 될 것이란 말에 부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혜문이 일반인에게도 개방이 되는 것은 수확제 준비 기간과 수확제 기간뿐이다. 그런 문이 곧 다시 폐쇄된다는 소리는 금번 수확제가 열리지 않게 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수확제가 취소가 될 정도의 사건은 지금 상황에서는 단 하나 뿐.
국상(國喪).
누구의 국상일지 그는 금방 추리할 수 있었다.
“.......”
어차피 높으신 분들의 일이다. 자신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뒤숭숭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부관은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팔랑팔랑, 때마침 고운 빛깔의 단풍잎이 가지에서 떨어져 부관의 신발 위로 내려왔다. 순간 신발에 흉한 벌레가 떨어진 듯 불길하게 여겨져 부관은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황태후마마께오서 참으로 좋아하시겠군.”
부관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 문득 단풍잎이 그새 여기저기 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연무강이 고개를 들어 주변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푸르른 상록수들을 제외한 활엽수들이 저마다의 곱게 물든 잎들을 자랑하며 유독 새파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 중 특히나 많은 종류가 붉은 물이 드는 단풍 종류였다.
아가 손을 닮은, 이 피 같이 붉은 단풍잎을 황태후는 참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당장 영안궁(: 태후의 처소)만 해도 사시사철 붉은 잎만 나는 아기 단풍나무들이 여린전의 석류나무만치 심어져 있었다. 태후전을 온통 붉게 꾸민 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황태후는 궐 다른 곳곳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단풍나무들을 황제에게 부탁해 심어놓았다. 때문에 단풍, 하면 황태후가 절로 떠올랐다.
연무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지독한 여인.
현재로서는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웃는 얼굴로 ‘나는 뒷방의 힘없는 늙은이요, 이미 저버린 꽃이라오.’하고 말하며 황제의 뒤를 지키고 있지만, 젊었을 적의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결코 그 태도에 속지 않았다. 야심이 하늘을 찔러 선대 황제는 물론이고 황귀비까지 독살시킨 여인이었다.
지금도 아닌 척 어리석은 황제를 뒤에서 조종하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하신지.
더욱 더 대단한 점은 그녀가 젊었을 적 자신이 독살시킨 황귀비의 자식을 제 아들 삼아 황위를 물러주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당금 황제가 황태후의 입맛대로 자라 그녀를 떠받들어 주니 지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지만, 만약 황제에게서 그녀 자신을 해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당장 처치할 요량으로 손수 거둬들인 게 틀림없었다.
아무 힘없는 늙은이라며 호호, 웃고 있어도 교활함에 있어서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지금 현재로서는 귀비의 처리가 더 급한 일이라 신경을 쓰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황후마마의 적으로써 정면에 등장할 것이 분명했다.
“.......”
허나 사실 연무강도 현재 황태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황후를 추천해준 것도 황태후였으며, 귀비를 추천해준 것도 황태후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거승주를 추천한 사람이지도 않은가. 이번에 태의령까지 두둔해준 것을 보면 그냥 생각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 제일인 사람은 단연코 연서강일 테지만.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연무강은 미간을 좁혔다.
놈은 정말로 기연조를 처리할 작정인가. 연서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친께 건너 건너로 듣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그를 만나 어찌할 적정인지 들은 적은 없었다. 갑작스레 부친께서 자신에게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잔뜩 맡기고 있는 탓이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의 것들이 집에서는 처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 자연스레 연무강은 궐 밖에서 연서강이 무얼 어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물어오는 사람인 안계영이 몸 상태를 문제 삼아 잠시 쉬고 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요새는 효기교위 문도학을 만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였다.
궐내에서의 연서강은 그저 그전과 마찬가지로 서서원으로 출근하는 듯 보였다. 가끔 수안궁에 들리기는 하나 번번이 태상을 만나는 데에 실패하고 홍월정에서 주웠다는 여자아이와 담소를 나누고 돌아오는 듯 했다. 그리고 심심함을 참지 못한 연서령이 서서원에 찾아가 그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위사님.”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무강은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그의 부관이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었다. 자신은 듣지 못했지만 이미 여러 번을 불렀었떤 모양이다.
“연장군께서 오셨습니다.”
연장군, 이 설마하니 연서령일 리는 없을 테고, 부관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연시나 연무진이 단풍나무 그늘 아래에 서있었다. ‘형님.’하고 그가 싱긋 웃으며 자신을 부르기에 연무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일에 치여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있는데 저 놈은 왜 항상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연무강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연무진이 질겁한 얼굴로 ‘왜 사람을 보지마자 그런 얼굴을 하시오.’하고 말한다. 그 태평한 소리에도 연무강은 짜증이 치밀었다. 아래에 있는 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니 자신이 이리도 극번(劇繁)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놈을 확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대신 성실한 의향이를 불러다 저 놈 자리에 앉혀놓고 싶었다.
“식사는 하셨소이까.”
“간단하게나마 하였다.”
과연 그것을 식사라고 해야 할지 사료라고 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배를 채우기는 채웠다.
‘그렇소이까.’, 연무강의 단호한 대답에 연무진이 무안한 얼굴을 하더니 다음 말로 바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 하는 말이라는 게, ‘시각이 이르니 벌써 점심을 들지는 않았을 것 같아 모처럼 함께 할까 하고 찾아왔는데.’다. 그 말을 들은 연무강은 미간을 좁혔다. 평소에 자신과 한 자리에도 있기 싫어하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가 싶었다.
“네 놈은 먹는 속도가 느려서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싫다.”
“내가 느린 것이 아니라 형님께서 너무 빠른 거요! 식사란 자고로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고 맛을 음미하면서.......”
“아랫것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내 몸이 좀 한가해지면 그리 해보도록 하지.”
싸늘하게 비아냥거렸더니 연무진이 바로 입을 다물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다가 간신히 변명이랍시고 꺼내는 말이 그거였다. ‘.......형님처럼 할 수 있는 이들이 어디에 있소?’
그 말에 딱히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연무강은 시선을 돌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부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먼저 가라는 표시였다. 부관이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연무진이 말끄러미 부관의 등을 바라본다.
“이제 듣는 귀도 없앴겠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것인지 말하여라.”
“.......하여간 형님을 속이려면 귀신이라도 되어야겠소.”
“너는 항상 필요할 때만 나를 찾지 않았더냐.”
자신의 선에서는 처리하지 못 할 일을 해결해 주십사, 하고 자신을 찾아오던 연무진의 근심 가득한 얼굴을 연무강은 이제까지 질릴 정도로 많이 봐 왔었다. 이번에도 그 비슷한 얼굴인지라 또 무진이 놈이 어디선가 일을 폭삭 망하게 하고 뒤늦게 자신을 찾아왔구나, 싶었다.
허나 연무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지, 연무강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린 그는 억울해하는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다. ‘내가 무슨, 언제 그랬다고 그러시오.’ 연무강은 대꾸하는 대신 연무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불편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양심에 찔렸는지 쫓기든 연무진이 다시 이어 입을 열었다.
“심부름 시킨다고 형님이 나를 부른 적도 있지 않소.”
그걸 지금 변명이랍시고.
“해서 무슨 일이지?”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봤자 백해무익하겠다 싶어, 연무강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무진이 휙 고개를 돌려 연무강의 시선을 피하며 ‘그것이.’하고 말을 아낀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일에 치여 정신없이 바쁜 사람을 느닷없이 찾아와 부탁을 하는 것도 민폐인 마당에, 그 부탁을 하는 것마저 질질 끌며 시간 낭비하기 만들다니.
“말하기 싫으면 이만 가도록 하지. 뭐가 아쉬워서 내가 다 큰 사내놈이 수줍어하는 꼴을 봐야 하지.......”
“수줍, ...그런 적 없소이다! 다만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이오.”
“그럼 어찌 꺼내야 할지 알게 되면 다시 찾아 오거라.”
그대로 몸을 휙 돌리는 연무강을 연무진이 ‘아이고 형님!’하고 꼭 어디의 가난한 아우가 부자 형님을 붙잡는 식으로 부른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연무강이 연무진을 돌아보았다. ‘연무진. 네놈의 시간이 아무리 저렴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시간까지 저렴하게 책정하지는 마라.’ 화가 난 것일까, 뜨끔한 연무진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너무하지 않소.”
겁에 질렸으면서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 연무진은 뭔가를 한참 잘못 주워 먹은 듯 했다. 연무강은 ‘그래, 어디 한 번 지껄여 보아라.’라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참고로 이번에도 실없는 소리를 하면 저 커다란 단풍나무에 연무진을 매달아 놓을 생각이었다. 나태하고 불성실한 무관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아마 아버님도 반대하지 않으시겠지.
“애최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도 아니란 말이오. 내가 무슨 서강이오? 내 일을 형님께 대신 해 주십사, 찾아오게.”
부탁을 하러 찾아온 게 아니라니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만, 그래도 연무진은 연무진인 모양인지 좋은 말 끝에 꼭 불쾌한 한 마디가 더 붙었다. 연무강은 연무진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꽉 힘을 주었다. ‘아야야! 아프오, 아프단 말이오!’ 그리 힘을 세게 주지도 않았는데 연무진이 엄살을 피웠다.
연무강은 휙 던져 버리듯 연무진의 머리를 놓고 내뱉었다.
“가만히 있는 서강이 놈은 왜 끌어들이느냐.”
“화난 게 그것 때문이오?”
참으로 형님은,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연무진이 입을 다물었다. 시뻘게졌던 얼굴에서 급속도록 핏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연무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놈이 또 왜 저러나 싶었다.
연무강이 아직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연무진이 손을 내저으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선다. ‘안 하오.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하오.’ 정말로 오늘따라 왜 이리 이놈이 헤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부탁하러 온 것도 아니면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온 거지?”
다시 연무진이 입을 다문다. 방금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아무래도 머리끝까지 나 있던 짜증이 마침내 한계치에 이르렀다. 연무강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아!’하며 연무진이 퍼뜩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보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형, 형님은 아버님 명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 있소?”
다급해진 마음에 비로소 그는 품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있게 되었다. ‘죽여?’ 연무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이 예상 외로 심상치 않은 것이었던 탓에 연무강은 굳은 얼굴로 연무진을 돌아보았다. 연무진이 ‘그것이.’하고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잇는다.
“형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버님 명을 받지 않았소, 그러니.”
“아버님 명으로 사람을 처음 죽인 것은 내가 열일곱 때의 일이었다, 연무진. 그때의 일에 대하여 묻는다면 너무 오래 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밖에 해줄 말이 없군.”
재빨리 대답한 다음에 연무강은 연무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열일곱?’ 연무강의 대답에 연무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님은, 그러면.’ 이어 뭐라 뭐라 더 말이 이어졌지만, 연무강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연무강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아버님께서 네게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을 내리셨느냐?”
“.......”
연무진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아 연무강은 절로 인상이 써졌다.
아버님께서 연무진에게 누군가를 죽이라 명하셨다? 이놈에게?
누군가를 처리하는 일은 항상 효기교위 문도학이나 자신이 도맡아 처리했었다. 물론 누군가를 처리하는 일을 자신이나 효기교위가 꼭 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연무진에게 맡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노망이 나셔서 판단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었다.
“.......”
그러나 연무강은 섣불리 연무진에게 ‘아버님께서 판단을 잘못하셨군. 네놈에게 그런 일을 맡기다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연무진의 반감만 살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연무강은 연무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제 형이 자신을 험악한 얼굴로 쳐다만 보는지 깨달은 연무진이 잽싸게 말했다.
“비밀이오. 아버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시었소. 아버님의 명이란 말이오.”
“.......그렇겠지.”
그 아버님인데 어련하시겠나. 정녕 아버님께서 명을 받은 것이라면 아마 연무진도 단단히 주의를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거라, 또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거라. 그래서 연무강도 바로 연무진에게 ‘누구를?’하고 물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연무강은 턱을 쓸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소리는 즉,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일......, 이란 말인가? 무엇을, ...무엇을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 죽이려는 상대를? 죽이는 이유를? 죽였다는 사실을?
그의 시선 끝에 단풍잎 하나가 팔랑팔랑 떨어지고 있었다. 단풍잎이 떨어진 곳은 이미 많은 수의 단풍잎들이 떨어져 수북이 쌓여 있는 땅이었다. 붉은 잎들이 모여 나무 아래에 피 웅덩이가 생긴 듯 보였다.
부친께서 왜 자신에게 비밀로 하신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연무진.”
그 말에 연무진이 퍼뜩 고개를 든다.
“아버님께서 네놈이 충분히 잘 해 낼 수 있으니 시키셨겠지, 그러니 걱정은 안 한다만.”
‘그러오?’하고 의외의 말을 들은 듯이 연무진이 눈을 깜박인다. 멍청한 놈. 연무강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에게 이미 말해 버렸으니 벌써 글러버린 일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허나 연무진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네가 자칫 일을 잘 못해내기라도 한다면 집안에 큰 화가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무진이 그 말에 무엇을 생각해냈는지 필요 이상으로 얼굴을 찌푸린다. ‘그건.’ 더듬더듬 긴장한 것이 역력한 목소리로 연무진이 입을 연다.
“잘 알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상관없겠지.”
딱 그렇게만 말하고서 다시 자리를 뜰 기색인 연무강을 보고 연무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무어라 말하며 붙잡아야 할지 헤매는 눈치였다.
“혀, 형님. 형님. 잠시만.......”
“왜 그러지?”
허나 물으니 또 입을 다문다. 연무강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오늘따라 연무진이 왜 이렇게 징그럽게 구는 것인지, 연무강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오.”
그러다니 또다시 저런 꼴이다. 덕분에 연무강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연무진이 어설피 웃더니 말했다. ‘그만 되었소, 이제.’ 그리고선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형님, 혹시 아버님께 들으셨소? 계영이가 내 아이를 가졌다오.”
그 말에 연무강이 인상을 썼다.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했어야 하지 않느냐?”
대체 왜 연무진이 자신을 다급하게 찾았던 것인지 정말 이해가 안 되었다. ‘그, 서강이한테는 형님이 전해주시오.’라고 뒤이어 하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서강과 요새 많이 친해졌으니 직접 가서 전해도 되지 않나, 허나 연무강은 거절하지 않았다. 좋은 핑계거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해가 기울고 떠오른 달이 벌써 중천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름달에서는 한참 모자라지만 초승달보다는 복스럽게 생긴 달의 모습이 점점 수확제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맑은 날이었기에 달빛을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얗게 빛이 나는 달 때문에 해가 진지는 한참이 지났지만 어렴풋이 사물을 분간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래봤자 나무와 건물, 담벼락 정도를 알아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매캐한 냄새가 가라앉은 방안의 공기가 그 안에 든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사리분별도 못 하게 만들었다. 해서 저녁부터 방안의 창문을 열어 두고 연서강은 하염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고 만들어진 어둠이 천천히 짙어져 마침내 모든 사물을 삼켜 방안의 호롱불을 밝히게 만들었다. 별빛을 닮은 호롱불에 이끌려 열어둔 창문으로 날벌레들이 들어왔다. 귀뚜라미 소리도 더 잘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끌시끌한 본채에서 침묵에 휩싸인 녹우당으로 불빛이 하나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너울너울 허공에서 선을 그으며 이리로 오는 불빛에 연서강은 살짝 모로 고개를 기울였다. 초롱에 감싸여 불투명하게 빛나는 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녹우당으로 오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초롱을 든 이가 녹우당 가까이로 다가오자 연서강은 마침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턱을 괸 채 창문턱에 몸을 기대어 사람의 손에서 어지러이 움직이는 초롱의 불빛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까지 읽고 있었던 책을 손에 들었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탈탈 옷을 털던 그는 소매의 끝자락에 묻은 먹물을 발견하고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먹물이 옷에 묻으면 지우기가 참으로 힘들 터인데,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며 손으로 먹물 자국을 문질러 보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삭힌 우유에 담근 뒤 비벼 빨면 그나마 쉬이 지워진다고 들었지만 옷을 빨 정도의 삭힌 우유를 어디서 구하나 싶었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당분간 어디로 나갈 일도 없는데다가 오늘 할 일은 이것으로 끝일 터이다. 옷에 붙은 먼지만 대충 털고 연서강은 밖으로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녹우당에서 똑같은 것은 다만 밤의 정경뿐이다.
홍월정으로 이어지는 길과 숲 쪽은 밤바다와 같이 완연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고, 정원을 비추는 것은 녹우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전부였으며, 가장 찬란하게 빛이 나는 곳은 본채 쪽이었다. 두 번째로 반짝이는 곳은 바로 머리 위의 하늘, 진청의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정경만은 똑같았다.
어둠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연서강은 초롱불을 들고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형님.”
여린전 앞에서 그다지 좋지 못하게 헤어졌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연무강이 자신을 참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볼 줄 알았다. 허나 의외로 초롱불에 비친 연무강의 얼굴은 그리 차갑고 매정해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심한 그 얼굴에 녹우당으로 오는 사람의 정체를 깨닫고 잠깐 어지러워졌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마침 잘 되었습니다. 혹여 효기교위를 만날 일이 있으시면 이걸 전해주시겠습니까.”
방안에서 들고 나온 서책을 그에게 내밀며 연서강은 다소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효기교위에게 책을 건네주기 위해서는 다시 그 저자로 나가야 했는데 저번 일 이후로 나가는 게 좀 저어되었다. 또한 그렇다고 이 귀중한 책을 효기교위에게 전해 달라 부탁할 만한 마땅한 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서령도, 연무진도, 모씨 아줌마도 안 되기에 연서강은 지금 연무강이 녹우당으로 찾아온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허나 연무강이 내밀어진 서책을 잡고 펼쳐보았을 때, 연서강은 ‘형님께서는 어인 일로?’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친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나, 무강 형님에게는 다른 시킬 일이 있다고. 그 바쁘다는 사람이 왜 이 시각에 여기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아, 혹시 벌써 아버님께 말씀을 듣고 오신 겁니까? 책을 가지러.......”
말을 하다 말고 연서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부친께서 무강 형님께 이 일에 대해 말해 놓는다고 하셨던가? 곧 의아해졌지만 부친께서 알고 계시는 일을 무강 형님께서 모르시겠나, 싶었다. 아마도 알고 오셨겠지.
그렇지만 다음 순간 연무강이 중얼거린 말에 연서강은 다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이런 식으로 뒤집어씌우겠다.......”
“아버님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연서강의 물음을 듣지 못한 것처럼 연무강이 서책을 탁, 덮었다. 그가 현재 갖고 있는 서책은 거승주가 기연조와의 연락책으로 사용했던 소설책이었다. 거승주가 행방불명이 된 이후 그 책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 되어 버렸다. 허나 책 속의 씌인 의미모를 감상들은 그때보다 더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기연조의 글씨체로.
“.......그래서 거승주의 시신을 어찌 처리했는지 아버님께서 내게 물어보셨던 것이구나. 그 서찰은 네놈이 필요해서 가져갔더냐?”
서찰이라 함은, 하고 잠깐 생각해보던 연서강의 머릿속으로 이내 그 파란 비단 끈이 매어져 있었던 서신이 스쳐지나갔다. 성헌당에서 부친이 ‘네가 필요하다던 그것이다.’하고 자신의 앞으로 던져주었던 서신이었다. 연무강이 말한 대로 그 서신에는 거승주의 시신이 어찌 처리되었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네, 아마도 저한테로 넘어온 듯 합니다.”
“그렇군.......”
몇 가지의 사실밖에 듣지 못했는데도 연무강은 바로 연서강이 무얼 꾸몄는지 단박에 알아챈 눈치였다.
서책을 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자신에게로 넘어오는 것을 느끼고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계획이 허술하다던가, 네놈이 생각한 게 참으로 빤하다던가, 그런 비난들이 당연하다는 듯 날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연서강도 이번에는 반박할 말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것은 연무의의 허락 하에 세워진 계획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부친께서 그대로 해 보라 허락을 해주셨으니 허술하지 않다고 주장할 셈이라니 그 얼마나 유치한 반박인가 싶었다. 하지만 연서강은 연무의를 내세우는 것 외에 연무강의 비난을 불식시킬 방법을 딱히 생각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기연조를 죽이면 끝이 날 일을 또 꼬아서 기연조를 살리는 쪽으로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 마음에 무척 걸렸다.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무강 형님은 바로 눈치를 챌 듯 했다.
이건 기연조를 살리기 위한 계획이라고.
그는 기연조를 향한 자신의 연심을 알고 있는데다가 녹우당에서 일어났던 일 또한 알고 있으니 그가 눈치를 채는 건 시간문제일 성 싶었다. 만약에 또 무강 형님이 자신을 의심하며 연무의를 찾아가 ‘이건 안 될 말입니다.’라고 말한 뒤, 역시 기연조를 자신이 죽이겠다고 나서면 어찌해야 하는가. 안 되는데.
서책을, .......드리지 말 것을.
그렇다면 눈치도 채지 못했을 텐데.
확실히 자신은 마무리가 허술한 모양이었다. 무강 형님이라면 안심하고 서책을 맡겨도 되겠지 싶어 마음을 놓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다 연서강은 흠칫,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무강 형님을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가, 방금?
놀라는 것도 잠시, 말끄러미 연서강을 보고 있던 연무강이 입을 연 탓에 생각이 끊어졌다.
“.......역시 아직 기연조를 연모하고 있었던 것이 맞았군.”
“!”
그 말이 섬뜩한 날붙이가 되어 연서강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역시나 그는 눈치를 챈 듯 보였다.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 기연조의 목숨만은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란 것을. 허나 여기까지 왔는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야 없다. 연서강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어차피 끝난 일이 아닙니까.”
긴장한 탓에 절로 연서강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무강의 얼굴에서 미끄러뜨렸던 시선을 끌어올려 다시 그에게 고정시켰다.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무강을 본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다름 아닌 형님께서 당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신 일이 아닙니까, 이미, 이미 모두 끝장난 일이라고. 저는 집안을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제가 기연조를 좋아하든 말든 형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마음이니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
연무강에게서는 아무 대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무심한 얼굴과 태도에서 연서강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자신이 무어라 소리를 쳐도 연무강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 된다. 이대로라면 그가 아버님께 사실을 말하러 갈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다급해진 연서강은 선수를 쳤다.
“아버님께 말씀드리려면 말씀 드리십시오.”
가만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닫고, 연서강은 입술을 비틀어 차게 웃었다.
“그래봤자 지금 상황이 이러한데, 아버님께서 제가 기연조를 좋아한다는 형님의 말을 믿으실까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방금 품었었던 마음이, 그 지난 겨울날 누구의 손에 자신이 죽은 것인지 그새 망각한 것도 아니고, 현재 자신이 가장 경계하고 의심해야 할 상대인 형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지금도 자신이 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자신을 몰아낼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지 않은가.
참으로 잘못 생각하였다. 죽기 이전과 눈곱만치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홍이 외에도 또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자신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자신의 몸을 취한 것도 모자라,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연씨 문중을 배신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는 이 남자.
“연서강.”
그 건조한 부름에 연서강은 차갑게 속을 가라앉히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런 보람도 없이 머리를 든 순간 시야로 가득 차는 어둠에 아찔해지고 말았다.
밤, 밤이었다.
연후정에서 미약한 불꽃을 품은 초롱을 든 채 이 남자를 맞닥뜨린 때도 깊은 밤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변방으로 가기 전 성헌당 앞에서 그를 봤을 때도 밤. 심지어 이 남자의 손에 죽었을 때도 깊은 밤이었다.
밤. 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푹 파묻혀 있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고 기억 속의 그것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연서강은 불현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남자와 그 밤의 기억들에 떠밀려 결국은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싫습니다.”
그 말에 연무강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그래도 그 모습이 예전만큼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목을 조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위기감도 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어찌 대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때리든, 발로 차든, 비난하든, 욕을 하든, .......아무 상관이.
아니, 차라리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그의 관계마저 죽기 전과 달라지는 것 보다는.
“내가 말했을 텐데, 연서강.”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연서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익숙한 어둠이 시야를 메웠다. 빛이 차단되어 만들어진 어둠의 공간 안에서 연무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던 그 목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연서강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자의 위압감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내리누르는 듯한 남자의 기백은 여전했다. 허나 그의 가까이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은 터라 익숙한 위압감을 느껴도 그 전과는 약간 다른 감상이 들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따를 만한 사람이긴 하구나, 싶어 그를 대단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 깐깐한 부친께서 큰 형님만큼은 믿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설사 다른 이를 연모한다고 하더라도.”
이 남자의 목소리가 비단 무섭고 두려운 것에만 그치지 않았던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사람의 복잡한 뇌리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 기연조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다른 의미로 사람의 마음을 정리시켜주기도 하였다.
“다른 남자? 기연조 말입니까?”
연서강은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 눈을 뜨니 여전히 ‘밤’ 아래에 예의 연무강이 서 있었다. 냉랭해진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자신을 찌를 듯 뾰족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연서강은 아무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흘렸다.
“아, 그러셨죠. 형님께서 저를 취하시는 동안에는 제가 형님만의 것이라 하셨습니까.”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 되도 환영한다는 듯 연서강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그저 밤하늘 아래에 서 계신 연씨 문중의 맏아들 연무강이신가. 아니면 밤마다 내려오시는 사신이신가.
그렇지도 않은면.......
“형님 진짜 미치셨습니까?”
남자를 올려다보다 문득 웃음을 터뜨린 연서강이 물었다.
“사람이 어찌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연서강의 등이 연이어 터지는 웃음에 크게 들썩였다. 하하하!
“기연조를 연모해서 이리 노력하는 저도 기연조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받고자 이리 노력해도 미움을 받는 세상입니다, 형님. 헌데 어찌 형님의 말씀대로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와 형님은 다만 계약에 맺어진 사이일 뿐입니다.”
“연서강!”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연무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자 연서강이 ‘가까이 오시면 안 되지요, 형님.’하며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너무 웃어서 아픈 배를 팔로 감싸 쥐며 그는 상체를 숙였다. ‘형님, 형님, 형님.’하고 눈앞의 남자를 애달프게 불렀다.
“황후마마를 이미 뵙고, 그 다음 일도 제 생각대로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이리 되었는데도 형님께서는 아직 단꿈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고 계시는군요. 일전에 황후마마를 함께 뵈었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까? 황후마마께옵서는 이제 저를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셨는데, 혹시 형님께서는 달리 보셨습니까.”
“.......”
“그러하다면 이제 계약은 이미 끝난 게 아닙니까. 가서 아버님께 말씀 드리려면 말씀 드리십시오. 형님께서 하시고픈 대로 하셔도 이제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형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형님과 저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헌데도 제가 아직 형님의 것입니까, 정녕?”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 마치 흐느낌처럼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구슬피 우는 귀뚜라미 소리가 어울려 훌륭한 이중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웃는 자와 우는 자. 하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소리에 실린 감정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님.”
미물이 죽기 전에 제 짝을 찾아 필사적으로 우는 것과 끝이 나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웃는 것이 절절함의 정도에 있어 무엇이 차이 날까. 아무 차이도 없다. 심지어 듣는 상대가 아무것도 아닌 소리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까지도.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버님께는 말씀 드리지 말아주세요.”
갑작스레 푹 꺼진 목소리로 애원하는 연서강을 보는 연무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천천히 일그러뜨렸다. 연서강은 ‘제발.’하고 소리 없이 입술만 오물거려 내뱉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정녕 마지막일 겁니다.”
“.......”
“연씨 문중에는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을 터이니, 제발 이번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형님도 이제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연씨 문중을 배신 할 마음이 없다는 것과, 또 기연조에게 붙을 생각도 전연 없다는 것을.’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연서강은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렸다. 말라붙은 풀들과 변색된 잎들이 뜰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너무도 시끄럽고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기연조를 살리고 싶습니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무강을 향해 연서강은 힘없이 웃었다. ‘안 됩니까?’
“이제 여름이 아니라서 이 아우를 괴롭히는 게 싫증이 나셨습니까?”
“.......”
“그렇지도 않으면 일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 이 아우가 미련하게 보이십니까?”
그렇지만, 하고 연서강은 흘러나오는 숨을 꾹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기연조가 죽는 건 싫습니다.”
여전히 연무강으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의 무응답이 결코 좋은 뜻으로 돌아왔던 적은 없었다. 해서 연서강은 다시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쳐다보았다. ‘형님.......’ 부름의 끝이 불분명한 발음이 되어 허공에 퍼졌다.
“저를 좋아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 말을 그가 무슨 목적으로 꺼낸 것인지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연서강은 뒤로 넘어갈 듯 물러나다 이내 등에 벽이 탁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뭔가가 자신을 지탱해주지 않으면 정마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벽에 기댄 채 그는 연무강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무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허나 그는 곧 발걸음을 옮겨 연서강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한 발자국씩 걸어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며 연서강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따.
이윽고 연서강의 앞에 연무강이 와 섰다. 연서강은 시선을 더더욱 아래로 내렸다. ‘연서강.’ 연무강이 그런 연서강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연서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강아.’ 두 번째 부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보지 못 하겠느냐.”
다음 순간, 연무강이 두 손으로 연서강의 얼굴을 감싸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남의 힘에 고개가 번쩍 들린 때문에 연서강은 하는 수 없이 연무강의 얼굴과 마주쳐야했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호롱불 빛에 비친 그 얼굴은 무어라 해야 할지. .......그러나 곧 연서강은 알맞은 표현을 찾아냈다. 잠시 헤맸던 이유는 그 ‘표현’이 눈앞의 남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생긴 이목구비 어느 부분도 무너지지 않은 채 여전히 가지런한 것이 연서강은 참으로 신기했다. 누구보다 무심한 얼굴로 남자는 조용히 비통해 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체 무엇 때문인지, 연서강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너는,’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이 입을 다물었다. 잔뜩 좁혀진 미간이 그가 지금 무척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연서강에게 알려 주었다.
왜?
알 수 없다. 진정으로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은 사실 형님이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서강의 얼굴을 감싸 쥔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여 연서강의 뺨과 목덜미로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값비싼 도자기를 만지는 듯 세삼하게 자신의 얼굴선과 목덜미를 매만지는 남자의 손가락은 무관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정중해서 연서강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 뒤로 펼쳐진 밤하늘보다 어둡고 깊었다. 이상했다. 연서강은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 떠도 연서강의 얼굴을 쥔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너만 내게로 온다면 무얼 안 해줄까, 하고.”
“.......”
그 말이 상냥함을 가장한 협박이라는 것을 연서강은 잘 알고 있었다. 연후정에서 한 번, 여린전 앞에서 또 한 번, 연무강이 했던 말이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이전과 똑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말은 몹시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안타깝다니, 그 역시 눈앞의 상대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형님.’하고 연서강은 상대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남자가 그에 대답했다.
“그러니 내 옆에 있어다오.”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겨울의 북풍이 오기 전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서늘한 추풍은 귀뚜라미의 소리와 단풍잎들을 싣고 저 멀리 높은 곳까지 흘러갔다. 북풍이 불고 지나갈 때, 녹우당에서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허나.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상대방의 차가워진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것을 느끼며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구하러 와 줄 것 같았다.
그와 자신의 관계가 죽기 전과 같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