緇墨
28.
태의령 현감호가 연무강을 찾아온 것은 구월 열닷새가 되던 날이었다.
지나간 세월이 만든 주름들이 무색하게 잔뜩 찌푸린 얼굴인 그는 유난히 처진 볼 때문인지, 흡사 때늦은 더위로 헉헉거리는 늙고 살찐 개와 같았다.
턱 밑에 달린 살을 푸들푸들 떨며 달려온 현감호는 ‘어, 어찌된 일인가!’하고 억눌린 소리로 연무강을 추궁했다. 새파랗게 질린 현감호의 이마에는 날이 덥지도 않은데 굵은 땀방울이 송송이 맺혀 있었다. 연무강이 바로 대답이 없자 혼자서 히익, 숨을 짧게 들이마신 현감호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다시 추궁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지 않았어!”
태의령이 이러는 것은 필시 ‘그것’ 때문이리라.
미리 짐작하고 있던 연무강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모르는 척 한 쪽 눈썹을 구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짓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현감호의 얼굴이 그런 그의 말에 사정없이 찡그러졌다.
한 동안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 있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현감호가 달달달 떨리고 있는 제 두 손을 꽉 붙잡고는 굳어 있는 제 얼굴을 억지로 움직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 예나 지금이나 태의령 현감호는 의술과 약재에만 뛰어난 소심한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 나와 관련 없는 게 분명하네. 그, 그렇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진위 여부를 따지기는커녕 제 안위만 살피는 현감호의 말을 들은 연무강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물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자신의 안전만을 신경 쓰다니, 이용하기에는 적당한, 그러나 깊이 끌어들이기에는 못 미더운 인물이란 부친의 평이 딱 알맞은 자였다.
요 근래 귀비의 아이가 자주 고통을 호소해 현감호가 장한궁(: 귀비의 처소)으로 부름을 몇 번이나 받은 것을 궐내에 모르는 자는 없었다. 지난밤 내도록 황자마마께서 고열에 시달리셨다고 하더라, 원인을 몰라 태의령께서도 난감해 하고 계시더라, 복고단이 역시나 이름값을 하긴 하더라, 귀비마마께서 복고단을 더 구해오라고 명을 내리셨더라. 그런 말들이 아랫것들의 입을 통해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원인 모를 고열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귀비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장한궁 비씨는 잠도 못 자고 바삐 일하는 궁아들과 의원들을 재촉하며 성질을 부렸다. 어린 궁아들에게 물건을 던지는 일은 예사였고 황자가 아픈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의원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했다. 그러는 상황이니 황자를 돌보는 상궁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아이가 잘못되기만 하면 네 년과 네 년 가족들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개밥으로 주겠다며 귀비는 나이 지극한 상궁을 향해서도 손톱을 세웠다.
심지어 귀비의 난폭한 행동은 황자의 쾌유를 바라며 장한궁을 방문한 황후에게까지 이어졌다. 해열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귀한 약재를 들고 나타난 황후를 본 장한궁 비씨는, 황후의 깊으신 곤덕(坤德)에 감읍해하기는커녕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네 년이 내 아들을 저주했지!’하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당시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다행히 그 이상의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날 귀비가 저지른 무례는 곧 조정의 고관대신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비록 총비(寵妃)라고는 하나 결국 한낱 후궁에 불과한 귀비가 군부(君婦)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패악을 부린 유례없는 사태에 모두는 경악실색(驚愕失色)했다.
평소에 장한궁 비씨를 곱게 보지 않았던 대신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귀비의 오만무례를 가만히 두고 보실 것이냐 황제에게 성토했다고 한다. 뒤로는 빗발치는 상소에, 앞으로는 대신들의 성토에 앞뒤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황제는 몹시도 곤란한 얼굴을 하시고 ‘황후에게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물어보도록 하지.’라고 대답하셨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황제에게서 ‘귀비가 저지른 실수에 부디 황후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오.’란 전갈을 전해 받은 바 있는 황후는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화답하기를.
-내 배가 아파도 참으며 낳은 어여쁜 아이가 잘못 되고 있는데, 어느 어미가 제정신을 유지하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신첩이 황자 곁을 맴도는 것을 귀비가 언짢게 여기는 듯 하니 황자가 쾌유할 때까지는 장한궁 가까이로 걸음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수안궁을 방문하여 황자의 쾌차를 빌어도 되겠는지요.
그런 그녀의 대답에 여린전에 소속된 궁인들은 ‘역시 우리 황후마마의 덕은 하늘처럼 높고 바다만큼 깊으시구나.’하고 감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찌하여 그런 마마님께서 이런 수모를 겪으셔야 하는 것인가.’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후는 귀비에게 머리를 모조리 뜯기게 되어도 정말로 괜찮았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들 몰래 은밀히 진심으로 즐거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아이가 잘못 되고 있는데, 어느 어미가 제정신을 유지하겠습니까.’
황후의 말속에 나오는 ‘아이’가 귀비 소생의 황자가 아님은 물론이요, 그 말 속의 ‘어미’ 또한 귀비가 아니란 것을 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들만이 알 수 있었다.
황자의 병이 위중하니 수확제를 위한 준비도 더뎌졌다. 어쩌면 이번 수확제는 초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자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단단히 입단속을 하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 태의령 현감호는 무엇을 예감했는지 귀비 비씨에게 더 이상 선물 받은 복고단을 투여해선 안 된다는 말을 꺼냈다가 뺨을 맞았다고 했다. ‘네놈은 능력도 없이 어찌 그 자리까지 올라왔느냐!’ 앙칼지게 소리치며 그를 발로 밟으려는 귀비를 궁인들이 막았다가 되레 불똥이 튀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궁인들이 매를 맞았다고도 들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연무강의 부친은 ‘부덕한 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모자란 여인이로구나. 도움인지 방해인지도 구별을 못하다니.’하고 비웃었다.
어찌되었든 그런 일이 있었으니 태의령 현감호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은 분명했다. 복고단으로 둔갑시킨 신후를 복용하는 걸 말렸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신후의 존재까지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허나 현감호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릴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신후를 한 번이라도 복용했다면 그것으로 모두 끝난 일이었다. 동방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명의가 온다 하더라도 이미 신후에 중독된 황자는 살릴 수 없으리라. 황자가 죽는다면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는 이는 황후마마 소생인 황태자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 황후의 흉악함을 고발할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안위였다. 그리고 안전한 미래에 대한 보장이었다.
“태의령께서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닙니까. 그 외에 따로 뭔 일을 한 게 있습니까.”
연무강의 대꾸에 현감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 그렇지! 그렇고 말고.’ 혀를 쯧 차고는 연무강은 이어 말했다.
“오히려 황자이 상태가 위급한 가운데 이리 헐레벌떡 저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다른 이가 괜한 의심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 그것은 괜찮네! 내가 나올 때 다른 이에게 복고단 선물이 온 게 없는가 확인하러 위사에게 다녀오겠다고 말을 했으니, 수상하다고 느끼는 자는 없을 것일세!”
“.......”
진실로 그 변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저 소심한 치 치고는 침착하게 처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해서 연무강은 현감호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잘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어차피 귀비를 지지하는 무리 중 하나가 현감호를 의심해 뒤를 캐봤자 그에게서 나올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제가 알기에 선물로 들어온 복고단은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 아, 그렇군. 알았네.”
느닷없는 연무강의 말에 현감호는 자신이 어떤 변명을 하고 그를 찾아왔는지 새삼 깨달은 듯 했다. ‘그렇군, 복고단은 그게 전부였군.’ 다른 누가 봐도 어색하다 생각할 만치 말을 이으며 현감호는 ‘알겠네. 그럼 가겠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용무-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는 이미 훌륭하게 마쳤기 때문에 그는 아무 미련 없이 연무강의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안에 잠시 침묵이 가라앉자, 연무강은 손가락으로 책상 끝을 두드렸다. 의외로군. 확실히 태의령 자리까지 오른 자답기는 했다. 황후마마 외에도 신후의 존재를 추리한 자가 있을 줄이야.
허나 이내 연무강은 태의령의 나이를 떠올리며 능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태의령이 아니었겠지만, 그는 황태후가 선대 황제를 독살시켰다는 의심을 받았던 때부터 궐내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누군가가 태의령을 의심해서 뒤를 캐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다만 이미 한 번 거승주에게 말을 흘린 전적이 있는 자라, 연무강은 신후의 존재 역시 그가 타인에게 실수로 말을 흘릴까 염려가 되었다.
.......어쩌면 연의진에게 협조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연의진에게 협조해 줄 것이냐 물어볼 의향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다른 엉뚱한 이유를 붙여 이용할 생각이었다. 속았다는 것을 안 연의진이 후에 무어라 항의를 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집안이 잘 되라고 한 일이니, 그도 그리 거세게 항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어린애도 아니니 집안이 화평해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순조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건 그러면 될 일이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무강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서늘한 손가락에 비해 이마는 뜨거웠다. 두통, 아니면 불면증 때문인지도.
요새 연무강은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수확제 준비에 신후 일까지 얽혀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앞서 떠올린 이유들이 변명처럼 느껴질 만치 불면의 이유는 확실했다.
-배신이요? 이제 들으셨으니까 아셨지요. 기연조와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형님.
웃음기 섞인 울음소리가 몇 날 며칠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로 직전에 들은 것 마냥 생생했다.
-허나 당신 때문에 배신을 안 한 게 아닙니다. 절대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그리 소리치는 연서강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앞에서 연서강이 저리 서러움을 토한 적은 없었기에, 연무강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었다.
그가 눈물을 보인 적은 몇 번인가 있었다. 무서워서, 혹은 싫어서, 그리 생각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연서강은 연무강을 처음 만났던 아기 때부터 크게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헌데.......
연무강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손의 깍지를 풀고 꾹 주먹을 쥐었다. 따스한 온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손바닥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리 참담한 기분이 드는 것인가. 마치 아주 오래 전에 홀로 이불을 덮고 자던 밤과 같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가슴속에 사무쳐서 어찌 할 줄 몰라 눈물만 뚝뚝 흘리며 잠을 청해야 했던 어린 날.
“.......”
연서강의 자신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은 쪽이 아니란 것을 연무강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놈이 좋아하는 사람은 기연조이지 자신이 아닌 것이다. 연서강도 그 사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부정을 표한 적 없으니 틀림없는 진실이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도 연서강이 기연조를 위하는 마음을 실컷 이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날, 연서강의 울부짖음은 기연조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무강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 대한 애달픈 마음으로 우는 연서강을 본 적이 없었다. 절망하는 그의 얼굴이 낯설게 보이기까지 했다. 연서강 같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연서강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보았다.
-배신이요? 이제 들으셨으니까 아셨지요. 기연조와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형님.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기연조와 아무 관련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말도 안 된다. 이제까지 네놈이 노력한 모든 일들이 기연조와 아무 관련이 없다면, 어째서 기연조의 말에 세상 끝날 듯이 군단 말인가. 기연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어째서 그리 상처입고 절망한단 말인가. 그러니 지금까지 저 놈이 행한 일들은 전부 기연조와 관련이 된 게 틀림없다.
지금도 기연조를 구하고 싶어 한다고 소리친 것을 분명 들었었다. 그러니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얼 위해 그 짓거리를 해왔단 말인가. 기연조를 돕고 싶어 자신의 제의에 응한 게 아니었던가. 배신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연무강은 연서강이 기연조를 향해 따져 묻는 소리 도한 들었다. 거승주에 대한 일은 정녕 기연조와 미리 공모한 일이 아니었단 말인가. 연모하는 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해 놓고서 기연조의 일을 훼방 놓을 것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놈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일인가.
머릿속이 어지러워 연무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에 보이던 것들은 사라졌지만 대신 자꾸만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토해내던 연서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연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쩔 작정으로 연서강이 지금까지 일을 벌였는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주변을 속이기 위해 연서강과 기연조가 연기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해보았지만 아니었다. 결코 거짓으로 내뱉는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누굴 위해?
허나 오열하는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런 의문조차도 싹 사라졌다. 무엇을 위하든, 누구를 위하든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연서강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기연조에 대한 연심이라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추측조차 안 가지만.......
울지 마렴.
울지 마렴. 다른 남자 때문에 울지 마라, 서강아.
자신이 유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그 자리를 피하든,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든, 그가 원하는 도움을 베풀어주든, 어떻게든 자신이 손을 쓸 수가 있었다. 허나 다른 남자에 대한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무강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감정 앞에서 연무강은 자신이 무력해짐을 느꼈다.
울지 마라. 다른 남자 때문에 울지 마. 자신이 알 수 없는 일로, 다른 남자와 주고받은 대화 때문에 절망하여 오열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자 속이 바짝바짝 탈만큼 불쾌했지만, 이상하게도 다그치고 협박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안아주고 얼러주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녕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연무강이 인생 최초로 느끼는 무력함이었다.
“.......”
역시나 연서강은 짜증나는 놈이었다. 모든 게 어긋나 아무것도 제대로 맞물리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늘 남의 일이나 뒤에서 모든 일을 움직였던 그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맡은 일을 명명백백(明明白白)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이번만큼은. 도대체 연서강이 왜 저러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자 완벽하다고 느껴졌던 자신의 계략들이 모두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다. 이제까지는 운 좋게 연서강의 생각과 맞아 떨어져 그가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연무강은 앞으로 ‘어떻게’ 연서강을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무강은 새삼 깨달았다. 그와 자신의 사이는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할 뿐, 그가 기연조나 다른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와는 달리 감정적인 것이 하나도 깃들지 않은 관계임을. 그럼, 연서강이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아 하며 더 이상 자신과 관련되는 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연서강의 머릿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이 과연 그의 다음 행동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까지처럼 연서강이 자신의 도움을 바라며 매달리게 할 수 있는가. 그러다, 그가.
.......훌쩍, 모습을 감춰버린다면.
아니, 아니, 아니다. 자신이 연서강에게 붙여 놓은 감시가 있는데, 어떻게 그 놈이 아무도 모르게 모습을 감출 수가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허나 연서강도 자신에게 감시가 붙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정한다면 무얼 못 하겠는가.
“.......똑똑한 놈이니.”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은 입을 다물었다. .......한심하고 어리석은 놈이라 입에 달고 살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 때가 언제인지조차 아득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절규에 연무강은 지금에서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절대 나 때문에 한 행동은 아니겠지.......”
싸늘하게 식은 손가락이 초조함 때문에 저절로 책상 위를 두드린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입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 다음의 말도 연무강은 추리해낼 수가 없었다. 당시 그가 할 수 있었던 행동은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진 연서강의 몸을 끌어안고 ‘울지 마렴. 울지 마렴.’하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상대방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흙냄새와 땀 냄새가 나는 상대방의 찬 몸이 마냥 애처롭고 가여워서 연무강은 그를 꽉 끌어안고 그 귓가에 속삭였다.
-죽이지 않으마. 절대로.
허나 이미 혼절한 상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연무강은 이어서 입을 열었었다. 한 번도 소리 내어 한 적 없는 말임에도 마치 이전에도 몇 번이나 한 적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죽게 하지는 않겠다.
이후로 연서강은 녹우당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본채로 돌아오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마치 이전에 ‘녹우당 도련님’이라 불리던 시절의 그로 돌아간 듯도 보였다. 가끔 본채로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오는 모씨를 통해 그가 요새 말라붙은 정원을 보며 멍하게 있다는 소식만을 전해들을 수만 있었다.
연서령도, 연무진도 심지어는 연의진조차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말에 연무강은 ‘서령이도 의진이도 만나기 싫어한다면, 행여 자신이 갔다가는 그놈의 숨통이 탁 막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자신의 곁에 억지로 두게 하기 위해 과감히 포기했던 게 바로 상대방의 ‘호감’이었다. 자신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몸을 맞대야 하는 상대방의 처지에 흡족해했었던 적도 있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이리 방해가 될 줄은 몰랐다.
얼굴이 보고 싶어도 금방이라도 절명할 듯이 오열하던 연서강의 모습이 생각나 녹우당으로 갈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상대가 타인에 대한 감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한다는 상황도 달갑지 않았다.
“.......”
어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
가을이 한창이라 뜰 안의 다른 나무는 울긋불긋 고운 빛이 잎사귀마다 들었거늘, 석류나무만은 여전히 생생한 녹색 잎을 달고 있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초록색 잎 사이에는 아직 덜 여물어 수확을 하지 못한 주홍빛 과실만 드문드문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여름 내내 바닥에 떨어진 석류꽃들을 쓸었던 궁아는 이젠 다른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낙엽들을 쓸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마마께옵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린전에 들어서자 미리 연무강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궁 하나가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곧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하는 상궁의 뒤를 따르며 연무강은 석류나무가 가득한 안뜰을 둘러싼 회랑을 소리 없이 걸었다.
느리지만 시간이 차곡차곡 날이 선 듯한 차가움을 품은 겨울로 나아가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예전에 그가 연서강과 함께 여린전을 방문했을 때는 별모양을 닮은 꽃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매 끝에 무언가 붙잡는 느낌이 들어 연무강은 괜히 한 쪽 팔에 힘을 주었다. 앞서 여린전을 나오면서 연서강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따라와 잡았던 쪽의 팔이었다.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절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연모하는 기연조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무슨 생각으로 그때 연서강이 자신에게 매달렸는지. 그때는 잘 알 수 있다고 여겼었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되레 알 수가 없어졌다. 작금의 상황이 과연 연서강이 원하는 상황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놈은 고통을 좋아하는 변태가 틀림없었다.
“어서 오시게.”
상궁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이미 손님맞이 준비가 끝나 있었다. 주칠을 한 나무 탁자 위에는 청화 백자 주병과 네 개의 잔, 청결해 보이는 그릇에 담긴 노란 유밀과가 놓여 있었는데 두 개의 잔은 벌써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무강은 일단 황후에게 예를 갖춘 다음, 황후의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아버님도 계셨습니까.”
그 말에 연무의가 자신의 몫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대며 싱긋 웃었다. ‘내가 있으면 아니 될 일이라도 있느냐.’ 물론 그런 일은 전혀 없다. 연무의는 이전부터 종종 황후의 백부로서 그녀의 말벗이 되어주곤 했었던 것이다. 근래에만 다른 일로 바빠 여린전 출입을 못 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허나 연무강은 괴이하게도 황후와 함께 자리한 연무의를 예사롭게 생각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껄끄러운 것이 하나 가시처럼 턱 머릿속에 걸렸다. 저자에 사는 소녀의 아비 되는 자가 찾아왔던 날의 밤이 생각나서였다.
“어인 일로 소자를 부르셨습니까?”
본능적으로 연무강은 자신을 이 자리로 부른 사람이 황후가 아니라 부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답을 연무의는 쉬이 해줄 생각이 없는지 잔을 내려놓고 빈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늙은 아비가 널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아프구나.’
그 말에 황후 역시 말을 거들었다. ‘위사, 우선 앉아서 이야기를 함세.’ 황후가 그리 말하니 아무리 이 자리가 꺼림칙하게 느껴져도 앉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연무강이 자리에 앉자 황후가 뒤에 선 궁아를 향해 손짓을 했다. ‘네. 마마.’하고 대답한 궁아가 다가와 청화 백자 주병을 들어 연무강의 앞에 놓인 잔을 따랐다. 안에서 붉고 투명한 술이 흘러나와 하얀 잔에 그득 담겼다.
“석류주라네. 원래는 수확제 준비를 위해 고생하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했으나.......”
거기까지 말하고 황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폐하께서 금하셨네.’ 그리 말하는 황후의 앞에 있는 잔에는 석류주가 아닌 노오란 국화차가 담겨져 있었다.
황자가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탓에 궐 안은 수확제를 주비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황자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니 흥을 돋우고 시름을 잊게 하는 주류를 황후가 앞장서서 나눠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고한 사람들에게 주는 감사의 선물이라고 해도 아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석류주를 담그는 작업은 당장 중지되었고 황후는 대신 수안궁으로 가서 황자의 쾌차를 빌며 고기와 술을 금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술이라는 것은 오래 익힐수록 맛과 향이 그윽해지는 법이니, 그대로 한 일 년은 묵혀두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마마.”
연무의의 말에 황후가 ‘그렇게 해도 괜찮겠지요.’하고 답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석류주 툭유의 새콤하면서도 알딸딸한 향기가 차의 그윽한 국화꽃향기와 어울려 탁자 주변은 마치 야외로 꽃놀이라도 나온 듯 풍성한 향긋함이 감돌았다.
일 년. 연무의가 설정한 가상의 기간을 곱씹으며 연무강은 그저 눈앞에 있는 청화 백자 술잔만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별 이변 없이 황자가 죽고 그 장례를 지낸 뒤, 궐내의 분위기가 안정될 때까지 연무의는 약 일 년 정도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길지 않나 싶지만 귀비의 폐위와 반대파의 숙청까지 생각한다면 일 년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문득 연무강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네 번째 잔이 들어왔다.
“.......누군가 더 오는 겁니까?”
묻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그의 목소리가 잠겼다. 황후가 미소를 짓는다.
“위사도 너무 하는군. 수고했다는 뜻으로 석류주를 대접할 만한 사람이 또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연무강은 황후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한 명 더?
그 한 명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서 불현 듯 가슴 속을 스친 답답함과 불쾌함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연무강은 자연스레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설마하니 연서강을 부른 것입니까?”
연무의가 능청을 떨며 대답한다.
“그 아이가 아니면 대체 누굴 불렀을꼬? 설마 내가 무진이를 불렀겠느냐.”
그 말에 연무강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이 연서강의 변호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입궐은 아직 무리지 않냐고 말을 하려고 했다니, 연의진이나 연서령도 아닌데 말이다.
“백부님과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무어라 결론을 내린 것이 있어 불렀단다. 마침 백부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아이 몸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더구나. 힘써 나를 도와준 아이이니 나도 얼른 얼굴을 보고 고맙다고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의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니 아무리 녹우당에서 두문분출하고 있다는 연서강이라 해도, 연무의와 황후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무의도 그것을 알기에 황후에게 말을 흘린 것일 테다.
허나 연무강은 그들이 연서강을 부른 것이 꼭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연무강은 ‘결론을 내린 것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하고 황후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대꾸는 하지 않고 황후가 빙그레 소리 없이 웃으며 연무의 쪽을 힐끗 쳐다본다. 연무강의 시선 역시 부친에게로 가 닿았다. 두 사람의 말없는 시선을 받고도 연무의는 태연하게 석류주만 홀짝일 뿐이었다.
불안했다.
‘마마?’하고 답지 않게 연무강은 황후를 재촉했다. 이상한 기류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 황후가 이내 웃음을 거두고 연무강을 바라보았다.
“내 그 아이를 못 믿는 것은 아니나, 백부님께서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네. 그 아이의 기지로 이번 일이 잘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이가 이전에 기연조라는 자와 절친한 벗이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 또한 나는 아직도 그 아이가 일 전반에 걸쳐 딱히 가르침 받은 적도 없는데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네. 마침 백부님께서 나를 만나러 오셨기에 그렇다고 말을 전하니 백부님께서도 신중하게 다시 확인해 보는 게 어떻냐고 말씀해 주셨네.”
“.......확인, 말씀이십니까.”
연무의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으냐.’ 그리고 아무 사심 없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 아이가 정녕 집안을 위해 이번에 기꺼이 움직인 것이라면 참마로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나 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느니라. 만약 누군가 그 아이에게 일 전반에 대해 가르쳐 준 이가 있다면 마땅히 찾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축하와 감사는 일이 확실히 끝난 후에 해도 괜찮다고 내가 마마께 말씀드렸다.”
연무강은 입을 한 일자로 꾹 다물었다. 아버님께서 또 뭔가 꾸미고 계시는구나.
“무얼 어떻게 확인하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연무강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상궁 하나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 연서강이 도착했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어서 오라고 하게.’라고 말하며 웃었다.
“무강아.”
연서강이 왔다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는 그를 본 연무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무강은 연무의를 쳐다보았다. 엄한 얼굴을 한 연무의가, 그러나 입술에는 얄궂은 미소를 띠우면서 속삭였다.
“너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
“또 저번처럼 중간에서 끼어들면 가만 두지 않겠다.”
부친이 일부러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연무강은 그 속삭임으로 깨달았다. 확인 작업이라는 것은 비단 연서강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무의가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무강은 ‘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몸도 좋지 못하다던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라는 황후의 말에 연서강이 살짝 웃으며 ‘황송한 말씀입니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습니다.’라 대답했다. 그리고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잠깐 몸을 움칠 떨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연무강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연무강으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 날 수를 따져보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유독 길게 보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그가 다시 녹우당으로 돌아가 지내기 시작한 이후, 그의 소식을 온전히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몸 상태가 많이 괜찮아졌다는 말은 정말인 듯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지독하게 열병을 앓고 난 이후에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지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허나 지금은 옷도 정갈히 갖춰 입고 안색도 그때에 비해 좋아 보였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지나치게 생기와 활기가 부족해 보이기는 했다.
모습이 푹 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연서강은 마치 옛날 녹우당에서 지내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달랐다. 예전에 그가 녹우당에서 소요하면서 지냈을 때는 심약하고 겁이 많아 숨을 죽이고 지낸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차라리 속이 텅텅 비어 고요해진 것에 가까웠다.
황후의 앞에서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연서강을 보며 연무강은 괜스레 탁자를 두어 번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지금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백만 대군을 이끌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을 진군하는 게 나았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더니, 딱 그 짝이다.
“자네 덕분에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내게 되었다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마마. 저야말로 마마께 도움이 될 수 있어 감읍할 따름입니다.”
연서강의 앞에 놓인 잔에도 붉디붉은 석류주가 따라졌다. ‘조금 달지도 모르겠네.’하고 황후가 웃으며 첨언했다. 그에 ‘감사합니다.’라고 매끈하게 답하는 연서강에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저번에 황후를 만나게 해주었을 때만 해도 연서강은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암만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어 익숙해졌다 하지만, 현재 그의 말과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하물며 부친인 연무의도 합석한 자리가 아닌가.
정신이 다른 곳에 있나 보군.
간단하게 옆 사람의 증상을 진단하며 연무강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원래 일하는 도중에 그는 결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막중한 업무가 있을 때에는 적당한 음주가 일의 능률을 돕는다고 하지만, 일을 할 때는 만군의 사령관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부친인 연무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언제나 깍듯하게 지켜온 부친의 말씀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속이 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하하호호 평화로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곧 깨어졌다.
“헌데, 일이 잘 풀렸다고 해도 아직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연무의가 그리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습니까.’하고 황후가 짐짓 걱정이 된다는 듯 한 쪽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중얼거린다. 연무의가 이어 말했다.
“보아하니 여전히 기연조란 놈이 의심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민울이란 아이가 며늘아기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를, 기연조가 장한궁의 식단을 알아보고 싶다고 자신에게 말을 했다 합니다. 민울이란 아이가 당시 영특하게도 소부의 높으신 분께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식단을 공개할 수는 없다 말을 해서 돌려보냈다고는 합니다만, 이후에 정말로 허락을 받고 다시 오면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민울이 두려워할 만도 하지요. 행여 황자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음식을 그간 몰래 섞어왔다는 사실이 귀비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사달이 날지 눈에 선하니까 말입니다.”
기연조, 란 이름이 연무의에게서 흘러나오니 움찔 연서강의 손가락이 떨렸다.
민울이란 낭중은 귀비의 식사를 책임지는 자 중 하나로 연무의가 말하는 며늘아기란 바로 연무진의 부인인 안계영을 말함이었다. 민울과 안계영이 외가 쪽 먼 친척이라는 것을 연서강도 연무강에서 들은 바 있었다. 아무리 녹우당에서 두문불출하며 세상일에 등을 돌리고 있다지만 그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예전에 듣고 겪었던 것들까지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서강이 순간 동요했다는 것을 모르는 척 하며 연무의가 다시 말을 꺼냈다.
“물론 사달이 날지 모르는 건 비단 민울 뿐만이 아니겠지요. 이대로 기가 놈이 계속해서 의심하며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위험할 듯 합니다, 마마.”
“백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허면 이 일을 어찌 해야 할까.......”
잠깐 고뇌하는 듯 했던 황후가 돌연 연서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기연조를 이대로 두는 것은 위험할 듯한데.”
분명 기연조를 절친한 벗으로 두었던 연서강을 떠보기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멍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연서강이 꺼낸 대답은 참으로 엉뚱한 것이었다.
“.......끝난 게 아니란 말입니까?”
“무슨 소리인가?”
아무 감정도 그려지지 않은 그 얼굴은 백치의 것처럼도 보였다. 무슨 소리인가 황후가 되묻자 그제야 아차, 싶었던지 연서강이 ‘아닙니다.’하고 재빨리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꾸욱 다문 입술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옆자리에서도 보였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소신은 벌써 끝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 한 말이 그거였다.
끝.
그 대답을 들으며 연무강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끝’이란 게 대체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 완전한 끝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뿐이다. 죽을 때까지 앞서 일어난 일에 대한 뒷수습은 계속되는 것이다.
“마무리가 안이한 것은 여전하구나, 서강아!”
연무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탄식했다. ‘전에도 그러더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연서강이 인상을 쓰며 입술을 꽉 깨문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냐, 라 말을 이으며 연무의가 턱을 쓸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언뜻 보면 인자한 미소로 볼 수도 있을 법한 웃음이 어려 있었으나 그의 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서강을 관찰하고 있었다. 연서강이 무어라 대답을 할지, 그리고 행동할지 철저하게 감시하는 시선이었다.
“기연조를 하루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마마. 민울은 그렇다 쳐도 그가 만약 태의령을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태의령의 혀는 그 몸뚱이의 안전만 보장되면 형편없이 가벼워졌다. 그것을 황후 또한 알고 있었다.
“뭔가 더 알아차리기 전에 그 끈질긴 놈을 처단하셔야 할 겝니다.”
‘처리’에서 더 극단적으로 바뀐 ‘처단’이란 단어에 연서강이 고개를 들어 제 아비를 보았다. 어깨를 조금 들었다 내린 연무의가 연서강을 향해 보드라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 그러냐, 서강아?’
결단코 연서강에게서 ‘네.’라는 대답을 들어야 하겠다는 듯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추궁도 깃들어져 있었다. 연서강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는 이미 이 자리가 예사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른다. 연무의가 자신을 그저 그런 일로 부르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려 그 ‘일’이 일어난 뒤인데.
“.......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연서강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처럼 어딘가 얼이 빠져 있는 것과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백치 같았던 얼굴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서늘하고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생기가 돌아온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본 연무강은 오히려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연무의가 연무강을 향해 물었다.
“무강이 네가 처리하겠느냐?”
연서강이 오기 전에 분명 저번처럼 중간에 끼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 말을 한 부친이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새삼 취소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묻는 연무의에 연무강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은 자신이 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친은 아마도 연서강에게 기연조의 처리를 맡기려는 심산일 것이다. 기연조에게 연서강이 정말로 미련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연서강이 만에 하나라도 연씨 문중을 배신하지 않을까 확인하는 것이며, 완연히 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허나 본능적으로 연무강은 연서강에게 이 ‘일’을 맡겨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님.”
그러나, 그보다 한 발 앞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연서강이었다.
연무강은 인상을 쓰고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연서강이 마치 황후의 앞에서 유려하게 말을 꺼냈던 일전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연무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기연조를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똑 부러진 목소리에는 아무 망설임도 없었다. 헌데 연무강은 어째서인지 연서강이 그 말을 함이 제 목을 조이는 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기연조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연서강을 죽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안 된다. 절대로 연서강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네놈의, 뭘 믿고?”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차디찬 말은 바로 그거였다. 연서강이 고개를 돌려 연무강을 보았다. 기연조와 결별한 이후 텅텅 비어 있었던 그의 속이 무섭도록 차갑고 냉랭한 것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딱딱하게 낮은 목소리로 연서강이 대꾸했다.
“여전히 형님께서는 제가 못 미더우신가 봅니다. 허나 기연조의 친구로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저이니, 단연 형님보다 기연조에 대해 아는 바가 많습니다.”
안다! 연모하는 이라는 것도 안다!
연무강은 그리 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눈앞에 있는 자의 목과 머리를 잡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 내가! 입으로는 기연조와 결별했다지만, 그때 네놈이 지었었던 표정을 네 놈이 알기나 하느냐! 그 날, 네놈이 무어라 말하고 울부짖었는지 아느냐! 속이 서늘하게, 그러나 새까맣게 타는 듯 했다.
그 느낌은 결코 석류주를 마셔서가 아니었다.
“연서강.”
힘주어 부르자 연서강이 대답했다.
“이 일에는 제가 더 적합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건 결코 연무강에게 들려주는 대답이 아니었다. 연무의가 껄껄 웃으며 ‘그렇게 하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서 흡족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황후도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이제 막 회복이 된 참인데 무리가 아니겠느냐.’라고 묻는다. 연서강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기연조의 꾐에 넘어가 배신한 자를 찾아낸 것도 연서강이었고, 그럼으로써 기연조의 계략을 모두 망쳐놓은 것도 연서강이었다. 또 기연조를 처리하는 일을 아무 망설임 없이 맡는다, 말을 하기까지 했다. 아직까지도 의심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아집일 뿐이다.
그와 별개로 연무강은 앞에 있는 자의 얼굴을 보며 침음했다.
“.......”
연무강은 아직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연서강의 시선에 깃든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불신’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너를 위해서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을 자의 얼굴이었다. .......바로 자신이 만든 얼굴이었다.
“무리가 아니니 염려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연서강이 고개를 돌려 황후를 부며 생긋 웃었다.
연무강은 앞서 걸어가는 연서강의 팔을 붙잡았다. ‘연서강!’ 겁을 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급함에 목소리가 험악하게 튀어나갔다.
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서강은 예전과 달리 연무강의 목소리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되레 연무강에게 잡힌 팔을 간 크게 확 떨쳐낸 그가 걸음을 멈추고 연무강을 돌아보았다.
“네, 형님.”
기분 탓인지 연서강의 목소리에서는 어딘지 조급한 구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는 연서강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연무강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바짝바짝 타고 있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초췌해지고 새파래진 상대방의 낯이 그에게서 더 이상 무어라 말을 꺼낼 의지를 앗아가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께서 염려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연무강이 자신을 왜 붙잡았는지 지레짐작한 연서강이 재빠르게 말을 내뱉는다. 성급함이 깃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연서강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형님께서도 이제 아셨지 않습니까. 제가 연씨 문중을 배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아니다.
자신을 결코 그것이 걱정되어, 저 놈이 과연 일을 잘 처리할 것인가 염려되어 뒤를 따라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무강은 맹렬하게 연서강의 뒤를 따라왔을 때와 달리 그저 침묵하며 연서강이 말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연서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새까만 그의 머리통만이 보였다. 혹여 몸이 떨리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인지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두 팔을 꽉 쥔 채였다.
흡사 그대로 얼어붙기라도 한 듯 미동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여린전 입구를 오가는 궁인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연조를, 사모한다는 네 마음은?”
그 시선들에 떠밀리듯 연무강이 간신히 꺼낸 말은 바로 그거였다.
기연조가 대체 무얼 해 주었기 때문에 그리 연모하냐는 자신의 질문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좋다는 대답을 했던 놈이, 그래서 자신의 기분을 한껏 가라앉게 만들었던 놈이 대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싶었다.
“기연조를 .......구해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
고개를 숙인 연서강으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 대답도 못한다는 것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보다 더 한 긍정의 표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구해내고 싶다고 한 입으로 해친다는 말이 나오더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상대방이 어떤 사고를 거쳐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그래, 백 번 양보해 부친의 앞에서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그렇게 해야 그들이 품고 있는 의심을 풀 수 있었을 테니. 허나 진실로 그리 행동할 필요는 연서강에게는 없지 않은가.
연무강은 꾹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어떤 말’이 입안에서 맴돌아서였다. 꺼내도 괜찮을까 싶은 말이, 하지만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그 ‘말’을 꺼내지 않으면 연서강을 말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해서 연무강은 낮은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발, 자신도 모르게 애원하며.
“이 ‘일’은 내가 대신 처리할 터이니, 너는 손을 떼도록 해라. 아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네가 그 상황에서 그 대답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아버님께서는 너에 대한 의심을 푸셨을 터이니.”
설사 부친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이 있더라고.
“.......내가 대신 처리하마.”
그러니 너는 녹우당이 아니라 본채로 돌아와 몸이나 제대로 추슬러라. 이어 연무강은 말을 하려고 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연서강이 돌연 고개를 들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말을 전혀 재고해볼 필요도 없다는 목소리에 연무강의 미간이 좁혀졌다.
연서강의 머루 같이 새까만 두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연무강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외부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비추기만 할 뿐 내부에 있는 것은 하나도 투영되지 않은 유리알 같은 눈이었다.
무감정한 상대의 시선이 그저 연무강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것은 비단 연서강이 자신의 제의를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도움을 원하지 않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형님께서는 형님이 하시는 일에 열중해주십시오. 요새 다망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연서강.”
“그러면 모자란 아우는 이만 가던 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서 연무강은 그가 이대로 귀가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어디엔가 들를 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디로? 궁금하면 부하들을 시켜 그를 따라가게 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것을 알았지만 자꾸만 행동과 말이 성급하게 흘러나왔다.
“연서강!”
이어 곧바로 몸을 돌리는 연서강을 본 연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그리하여 연서강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향하는 것에 그는 다소 안심했다. 하지만.
“.......게다가 형님께서는 제 마음이 어떻든 관심도 없지 않았습니까.”
상대방의 그 말에 연무강은 또 다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스르륵 힘이 빠져나가는 그의 손에서 연서강이 제 팔을 빼내었다.
‘그럼.’하고 연서강이 꾸벅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연무강은 인상을 쓴 채 응시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허나 한편으로는 가슴속이 너무도 시려와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연서강의 말이 맞았다. 연무강은 그의 마음이 어떻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옆에 연서강을 두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연무강은 꽉 두 손을 움켜쥐었다. 연서강이 기연조를 좋아하는 것은 자유다. 그 자유를 연무강은 일찍이 인정했었다. 연서강이 누구를 좋아하든 자신은 그 사람에게 연서강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다.
없지만, .......
“.......좋아하는 놈의 마음인데 관심이 없을 리가.”
분명 근래까지 놈에 대해서는 환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상대방의 행동은 앞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튈 것 같아 연무강은 초조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연서강의 움직임은 여린전에서 멀리 떨어지자 점차 속도가 떨어져갔다. 마침내 두어 발자국을 어린 아가가 걸음마를 배우는 듯 느리고 옮기고, 그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추었다. 여린전을 벗어난 이후로 줄곧 바닥을 보며 걸었기 때문에 목덜미로 가을 햇살이 가라앉아 따가웠다.
“.......”
평일이기는 하지만 수확제를 준비하는 기간이라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제법 되었다. 허나 작년의 이 시기를 생각하면 반에도 못 미치는 수였다. 아마도 황제가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린전으로 오기 전에 사람들이 ‘복고단은 역시 명약은 명약인가 보오.’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기에, 연서강은 귀비의 아이가 신수를 결국은 복용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 얼굴도 모르는 아이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귀비의 아이를 살해하는 계획이 성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내온 석류주는 달콤했지만 비릿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석류주를 마시던 연무의가 연서강은 끔찍하게 여겨졌다. 자신은 모른다. 아무 죄도 없을 게 분명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죽이고 그를 축하하며 술을 마시는 마음은.
하지만 어쩌면 그리 끔찍하게 생각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과 달리 부친이나 황후마마께서는 귀비에게 쌓인 원한이 깊으니, 그들로서는 이번 일이 마땅히 축하해야 마땅한 일인 것이다. 연서강에게 귀비의 아이는 그저 변방에서 만난 적군이나 저자의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지만 말이다.
“.......”
그러나 이리 말하는 자신도 적군의 손에서 살아남았을 때 기뻐서 웃지 않았던가. 너무나 기뻐서. 살아남았다는 과실이 너무나 달콤해서 웃었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들을 끔찍하게 여길 자격은 없다.
“!”
그렇게 생각한 순간, 깔깔깔 웃는 여인과 청년의 소리가 들려 연서강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변방의 구덩이에서 들었던 하얀 뱀의 웃음소리와 같았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함께 지닌 잔혹한 뱀 신님이 즐거워하며 웃는 소리와.
허나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 소리는 그저 궁녀와 병사 하나가 담소를 나누며 낸 것에 불과했다.
연서강은 이를 악 물었다. 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웃음소리란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머리 꼭대기에서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일까, 누군가 기대하며 자신을 어디선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감시받고 있는 느낌에 턱이 달달 떨렸다.
과연 뱀 신님이시다. 겨우 ‘일’이 끝났다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은 더 노력할 것도 없고 더 절망할 것도 없으며 더 슬퍼할 것도 없다 여겼었는데, 그러자마자 또 다시 장애물을 하나 점지해주시니 말이다. 뱀 신은 사람이 발버둥을 치는 걸 보고 즐기신다는 태상경의 말씀이 맞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이렇게도 기구하게 일이 자꾸 꼬일 수 있겠는가. 연서강은 배를 움켜쥐었다. 그의 걸음이 비틀했다. 머리통이 뜨겁고 눈앞이 어지러우며 속이 홧홧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움직여.”
그리고 생각해.
‘돌아온’ 자신의 일평생이 누군가의 유흥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언덕 아래로 구른 돌이 바닥으로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결코 멈출 수 없듯이, 연서강 또한 그랬다. 오히려 가속도가 붙어 스스로의 힘으로 멈추는 게 불가능해지는 곳까지 내려와 버렸다.
“.......기연조를 살려야.”
기연조의 처리를 절대 무강 형님에게 맡길 수는 없다. 아니, 무강 형님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무강 형님이나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는다면 필시 기연조를 죽이려고 할 터. 연씨 문중의 일에 기연조가 방해가 되어 문중의 누군가가 기연조를 살해한다면, 그건.
다음에 연서강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건 죽기 전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은 왜? 죽기 전과 똑같아진다면 자신은 왜 사람을 죽이고, 온갖 고생을 하고, 몸을 버리면서까지 무강 형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단 말인가. 무강 형님이 기연조를 죽이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기연조가 무사해야 자신이 지금껏 한 일이 헛수고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런다고 기연조와 자신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은 아니다. 기연조가 자신이 알던 그 다정하고 착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연조가 자신이 알고 지냈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엔 그와 자신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 추억이 전부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은, 기연조를.
하지만 기연조는, 기연조는.
녹우당에서의 절규가 생각나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
연서강은 흐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을 뜨고 바라본 하늘은 맑고 청명했지만 연서강은 사방이 막힌 듯 갑갑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우물이다. 뚫린 곳은 오로지 머리 꼭대기 한 군데 뿐이건만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움직여.”
설사 우물에 빠진 것이 맞아도, 거기서 발버둥 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 *
정원 안에 떨어진 단풍을 주워서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판판한 돌 위로 가져다 놓던 홍이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단풍 줍기에 너무 열중했던 모양이다. 언제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가까이에 왔음을 홍이가 눈치 챌 때까지 돌 옆에 가만히 서 있었던 여인이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웃음 짓는다.
낯선 얼굴은 아니다. ‘고기 산적을 준 언니.’라고 홍이가 그녀를 알아보고 중얼거리자, 여인의 입가에 맺혀있는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다 ‘홍아.’
“무얼 하는 게니? 세상에나, 벌써 이렇게 곱게 물든 단풍이, 홍이 네가 모은 거니? 정말 색이 곱다.”
여인이 홍이가 돌 위에 모아둔 단풍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감탄한다. 남에게 딱히 보여주려고 모은 것은 아니지만 곱다는 소릴 들으니 기분이 좋기는 한지, 홍이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한 발로 땅바닥을 툭툭 쳤다.
칭찬을 들었음에도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반응이었지만, 여인은 그 행동이 홍이가 쑥스러울 때마다 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웃으며 ‘심심하지 않니?’하고 물을 수 있는 것이다. 홍이가 도리질을 쳤다.
“여기 나비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어서 팔을 뻗더니 바위 위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녀가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여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홍이가 가리킨 곳에는 두 장의 단풍이 서로 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붉은 나비 한 접으로도 보였던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곧잘 이런 짓을 했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은 대답했다.
“홍이는 나비를 좋아하나 보구나. 가을이라 요새는 나비가 하나도 날아다니지 않지? 저기 우녕궁 화원에 나방인지 뭔지가 하나 날아다니는 걸 보기는 했는데.”
“아니요. 좋아하지 않아요.”
홍이가 바로 대꾸하는 말이 여인에게 의아함을 자아낸다. ‘그럼?’하고 여인이 묻자 홍이가 살짝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녹우당 오라버니가.......’ 녹우당 오라버니란 홍이가 여기 수안궁에 오기 전에 잠시 신세를 졌었던 집의 주인이라고 여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간식이나 차를 들고 수안궁으로 놀러 오기도 했었기에 그 이름은 여인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이름은 그녀가 홀로 노는 홍이를 찾으러 온 이유이기도 했다.
“오라버니가 봄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지나간 봄 타령을 매 번 했던 연서강을 떠올리며 홍이는 ‘봄에는 나비가 날아다니니까요.’하고 말을 덧붙였다. 홍이가 가끔 수안궁을 찾는 그 녹우당 오라버니를 고양이 아리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도 여인은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고개를 까닥인 후 여인은 슬슬 자신의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오라버니께서 찾아 오셨단다. 수안궁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셔.”
그 말에 홍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서강이 수안궁을 찾아 올 때면 늘 후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곤 했었다. 입구에서 홍이나 태상이 나오길 기다렸던 적도 있지만, 그것도 홍이가 여기로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태상도 곁에 없었다.
‘하지만 태상님.......’하고 홍이가 중얼거리자, 여인이 재빨리 ‘태상님께서는 바쁘시다 이미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 분 하시는 말씀이 태상님이 아니라 홍이를 보러 왔다고 하시더구나.’라고 대답한다.
“.......”
순간 평소 무감했던 소녀가 아닌 듯 홍이의 얼굴에 확연한 미소가 번졌다.
연서강이 자신을 보러 수안궁에 오는 것은 맞았으나, 가끔 자신을 보러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태상을 보러 오는 게 아닐까 홍이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잠을 잘 때라던가 다른 언니들과 놀러나가 수안궁에 없을 때, 연서강은 항상 태상의 얼굴만 보고 집으로 돌아갔었기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 깨우면 바로 벌떡 일어날 수 있고, 다른 언니들과 놀고 있다 하더라도 부르면 한 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데도 연서강은 그리 하지 않았다. 연서강이 자신을 배려해주기 위해서 그리하는 것이란 사실을 소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배려가 가끔 소녀는 서운하게 느껴졌었다.
그는 잘 모르고 있었다. 소녀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은 새로운 세계를 즐기는 것도, 단잠에 빠져 어여쁜 꿈을 꾸는 것도 아닌 그의 얼굴을 마주 할 때라는 것을.
홍이는 더 이상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행복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돌아올 겨울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소녀는 그저 기존에 좋아했던 사람을 더 자주, 많이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죽기 전 부모가 자식을 찾듯, 자식이 부모를 찾듯 그렇게.
그렇다고 수안궁에서의 생활과 수안궁에서 만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친다면 녹우당에서의 생활과 연서강이었다. 녹우당과 홍월정에서는 이제 더 이상 지낼 수 없다고 하니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듬뿍듬뿍 보고 싶었다.
“태상님은 안 봐도 된대요?”
그 연서강이 자신만 보러 왔단다.
‘빨리 갈래요.’하고 숨 가쁘게 말을 내뱉은 다음, 소녀는 바로 몸을 돌려 수안궁의 입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참.’하고 다시 되돌아와 바위 위에 만들어놓은 단풍 나비를 주워들었다. 연서강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내친 김에 아리도 함께 갈까, 싶어 ‘아리야. 아리야.’하고 불렀으나 아리는 어디 담 구석 아래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연서강의 얼굴 이모조모를 꼼꼼하게 살핀 다음, 홍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요번 여름이 끝날 무렵에 별나게 연서강이 수안궁에 자주 들린 것이지 그 전을 생각하면 그리 오랜만도 아니었다. 특히나 한 달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접하지 못했던 봄을 생각하며 이렇게 찾아와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나비요.”
하고 홍이는 쥐고 왔던 단풍잎 두 장을 연서강에게 건넸다. ‘나비?’하고 되묻기에 직접 두 잎을 붙여 ‘이렇게 하면 팔랑팔랑.’하고 나비가 나는 모습을 흉내 냈다. 처음에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와 종류가 다른 미소가 연서강의 얼굴에 맺혔다. ‘곱구나.’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던 연서강이 단풍을 말없이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단풍이 참으로 고와.”
그 말은 언니에게도 들었지만 그때와 연서강의 말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타는 듯 붉은 단풍잎이 정말 어여뻐서 그 감상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풍을 두고 뭔가 달리 생각이 드는 것이 있어 보였다. 홍이는 가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풍 싫어하시나요?”
싫어하면 하지 말 것을 그랬다. 그러나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 좋아해. 좋아하는데.’였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홍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좋아하시는데 왜 그런 얼굴이신가요. 그리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쩐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
미묘한 침묵이 연서강과 소녀 사이에 내려왔다. 평소라면 태상이 이 분위기를 우스갯소리로 쇄신시켜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여기에 없는 사람이었다.
홍이는 두 눈을 깜박이며 연서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까칠까칠했다. 확실히 평소와 다른 듯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던 소녀는 이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제 과자를 빼앗아갔던 사람이 무얼 했나요?”
홍이의 질문에 연서강의 두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곧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과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홍이는 재차 설명했다. ‘옛날에 제 과자를 빼앗아 갔던.’
그리고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허나 기억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요.”
결국 고민의 끝에 나온 호칭은 바로 그거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연서강이 알아들은 듯 했다. ‘.......연조?’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런 이름이었던 듯도 했다. ‘네.’
“.......”
연서강이 제 손 안에 있는 단풍을 꽉 쥐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잎이라 힘을 줘도 단풍은 바삭 부서지지 않았다. 다만 아기 손을 닮은 시뻘건 잎에 힘을 줘 새하얘진 연서강의 손의 색이 극명하게 대비될 뿐이었다. 단풍잎이 마치 연서강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홍이는 연조를 별로 안 좋아했지. 나쁜 사람이라고.”
안 좋아한다. 그건 과자를 빼앗아간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는 연서강의 입술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한 번 더 묻는다. 확실히 오늘의 연서강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홍이는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그를 나쁘다고 말해도 그는 단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되레 두둔하며 나섰으면 나섰었지.
나쁜 사람인 이유는 간단한다.
“오라버니를 아프게 할 것 같아서요....... 오라버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
냉큼 대답하는 소녀를 보자 가슴 한 구석이 시려져 연서강은 이를 사려 물었다. ‘.......그래? 그렇구나.’ 사람을 보는 눈이 어째서 저리 편파적일까. 역시 아이라 그래서 생각이 단순하구나.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은 전부 적이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절로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연서강이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아서 어어, 하고 홍이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서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이러다가 또 전처럼 울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는지 소녀는 연서강의 옷자락을 잡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가 가서 때려줄게요, 나쁜 사람.”
그제야 연서강은 작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웃었다.’ 그 소리에 반짝하고 소녀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홍이는 내가 좋은가 보구나.’ 그리 중얼거리는 연서강의 얼굴이 지독하게 우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심하지 않았니? 그 나이 먹도록 집에서 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할 일 없이 소요하는 내가 모자라 보이지 않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내가 왜 좋으냐?”
쓸모 있어진 지금이라면 몰라도.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연서강은 자신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에서야 확실히 알겠다. 어떤 이유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자신은 왜 기연조를 좋아했던 것일까. 그에게 품은 애정의 시발점은 역시나 애기단풍 잎이 만연했던 그 연회의 기억이었다. 당시 아무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호감을 기연조가 보였었다. 붉디붉어 쓰리고 애달픈 추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의 자신을 아껴주었던 존재다.
“지금은 또, 아주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마음조차 흔들리고 있는 얼간이인데.”
그때부터 죽고 난 뒤까지 이어진 연심인데, 상대의 태도가 변하자마자 거세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상대에게 받았던 애정을 의심하며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한심함으로 이어졌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팔푼이 같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했다. 그런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아껴줄 리가 없었는데.
하물며 가족들도 외면했던 자신이 아닌가.
“아무 이유 없이 다정하게 대해 줄 리가 없는데.”
옛날에 그래도 상관없다고 믿었던 것은 대체 어느 집안의 바보였단 말인가.
품었던 연심이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배반당하자 심장은 돌덩이가 되어 가슴 속 싶은 곳으로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기연조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이 이제껏 해왔던 것이 억울하여 억지로 버티려는 오기인지, 아니면 아직 마저 떨어지지 않고 늑골에 들러붙어 있는 연심의 찌꺼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따르며 행복해했던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지금, 어떻게 하면 기연조를 죽이지 않고 처리 할 수 있는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자신 또한.
“내가 지금까지 뭘 했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너도 나를 그리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홍이의 적색이 약간 감도는 까만 눈동자가 연서강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뱀 신의 어린 신도(信徒)를 연서강은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안궁 입구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홍이의 눈을 보며 연서강은 차게 웃었다.
하다못해 이제는 어린 아이에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추하다. 참으로 추했다. 자신은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홍아기 죽기 전까지 마냥 행복하기만을 바라지 않았던가. 봄에도, 여름에도 잘 참아놓고선 가을에 이르러 이러고 말다니. 이래서야 기연조와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었다.
‘미안하다.’라고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었던 연서강은, 그러나 곧 홍이의 매끄러운 목소리로 인해 다시 입이 닫히고 말았다.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워서.”
“.......그렇구나.”
너무도 솔직한 말에 허탈하게 웃으며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가 괜한 생각을 할 바에야 자신이 무안해지고 마는 게 백 번 나았다.
그러나 소녀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이가 연서강의 옷자락을 다시 당겼다.
“오라버니가 무얼 원하시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고 그녀는 스스로 열심히 생각하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 말은 ‘괜찮단다.’라고 말하려던 연서강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녹우당 오라버니는 저에게 닭다리를 줄 것 같아서.......”
“.......”
“그래서 좋아하면 안 되나요?”
“.......”
자신이 품은 호감에 아무 의심조차 없는 순수한 말에 연서강은 왈칵 감정이 홍수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말이 입술을 절로 달싹이게 만들었으나, 그 어느 것도 연서강은 말하지 못했다.
그저 그는 간신히 ‘홍아.’라는 아이의 이름만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뿐이었다. ‘네.’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아이가 두 눈을 깜박이며 연서강을 보았다.
어찌 끝맺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동화의 끝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찌 끝내야 할지 모르는. ‘홍아.’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들이 달큼하고 아릿하였으며 지독하게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홍아. 나도 그리 생각했었단다. 나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할 수가 있을 리 없다.
나도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기연조가 그대로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지 않은가. 애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지 않았던가.
눈앞의 소녀가 보이는 맹목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호의가 고맙고 어여뻐서 연서강은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반면에 매섭도록 냉정하고 차갑게 ‘그럴 리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그 또한 있었다.
나도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를 싫어할 수도 있고 너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수도 있으며 네게 아무 도움도 안 줄 수가 있다. 나도 나를 확신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남에 대해 어찌 확신하겠는가.
어설프게 기연조를 살리고 싶다고 나선 것이 잘못이었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연조를 믿고 마음을 주었던 게 잘못이었던가.
연서강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맙다.”
웃으며 그는 홍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웃으면 아이가 따라 미소 짓는다. 그런 것도 참으로 좋았다. 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지 눈에 빤히 보여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다. 연서강은 흘러내리는 가슴속 ‘말’들을 꾹꾹 내리누르며 계속해서 웃었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꼭 홍이에게 닭다리를 주어야겠구나.”
“.......아리도요.”
“그래. 아리에게도.”
아이의 머리카락이 부들거린다. 볏짚 같았던 머리카락이 언제 이리 고와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전 자신과 꼭 닮은 말을 하는 아이가 연서강은 참으로 애달프고 서글프고 아련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구르기 시작한 돌이 어디까지 굴러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은, 그래도 눈앞의 이 아이만큼은 자신처럼 배반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연서강은 자신의 일로 아이가 상처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힘내도록 하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연서강의 손을 붙잡은 채 홍이가 고개를 올렸다. 적색이 비치는 검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이 난다. 그간 상대해왔던 부친이나 황후마마, 큰 형님과 달리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눈이었다. 그 눈을 보자 자신 역시 과거 기연조를 이리 쳐다보았던 것일까 싶었다. 그래서 기연조가 어쩔 수 없이 잘 해 주었던 것일까.
이제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꼭, 행복해질 수 있도록.”
되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이 소녀는 자신의 행복을 바랐었다.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버린 소녀의 기원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되돌아온 이후 불행해지면 소녀는 분명 크게 상처입고 지금의 자신처럼 방황하게 될 것이다.
홍이마저 지금 자신이 있는 ‘우물’로 끌고 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현재 연서강에게 남아 있는 마음들 중 유일하게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은 마음이었다.
홍이가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약속이에요.’라고 덧붙여서 속삭이기까지 한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그러니 홍이 너도 나 때문에 속병은 앓지 말렴.’ 이어 중얼거리니 홍이가 약간 고민하는 얼굴로 대답을 뒤로 미룬다. ‘노력할게요.’
한참 뒤에 나오는 작은 대답은 여전히 소녀의 거짓 없이 진실한 대답이었다. 연서강은 살짝 웃음 지었다.
모르겠다.
대체 자신은 이제까지 무얼 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부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기연조와의 관계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바닷가처럼 넝마가 되어 버렸고, 자신의 상황 역시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체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일’은 끝나지 않았고, 큰 형님과의 관계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게 어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란 말인가.
이제 와서 그만 두기에는, .......자신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허나 기연조가 죽어버리면 자신이 그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행복해지기는커녕 슬퍼하고 우울해하며 기연조의 죽음을 곱씹고 또 곱씹게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자신은 아직 좀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홍이를 위해서도.
“그나저나 홍이야.”
연서강이 부르자 홍이가 고개를 올려 자신을 바라본다. 적색이 감도는 새까만 눈동자에 영리한 빛이 머무는 것을 보며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닭다리 하나로 좋아하는 사람을 결정하면 안 되지. 닭백숙 하시는 분을 남편으로 삼을 생각이더냐.”
그에 홍이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한다.
“아리가 닭백숙을 좋아하고......, 또 죽지 않는다면요.”
대답을 들으니 어째서 태성경께서 뱀 신을 그리 싫어하는지 연서강은 알 듯도 했다. 그의 말대로 되돌아오는 힘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당연하게 겨울 다음에 올 시간들을 없는 셈 치고 하는 어린 소녀의 대답이 연서강은 마냥 안타깝고 서글프기만 했다.
아직 이리도 어린데 그 미래가 전연 없다.
“.......설사 그 겨울에 그대로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네게 그 힘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 말에 역시나 예사로운 목소리로 홍이가 대꾸한다.
“그러면 아리가 혼자 죽잖아요.”
연서강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더더욱 짙어질 뿐 지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예 그 힘이 없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거란다, 홍아.”
힘이 있기에 당연히 쓸 생각을 한다. 힘을 쓰고 난 뒤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인다. 남들보다 ‘죽음’에 관련된 선택지가 하나 더 많은 셈이었다. 더욱이 그 선택지는 참으로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사람으로 나고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사람이 있을까.
되돌려 보내는 힘을 지닌 뱀 신님의 신자들은 참으로 가혹한 운명을 지닌 듯 했다.
“.......너 같은 사람이 또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연서강은 그것이 부질없는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상경에게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안에 우환이 발생하게 되면 황제가 내린 황명을 받잡고 우환을 없애줄 마땅한 인재와 함께 되돌아가 우환을 없애는 것이 뱀 신님의 신자들이 할 일이라고.
황제가 될 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알려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니. 아마 현 황제 또한 뱀 신님의 신자들이 가진 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비교적 태평한 시대를 지내고 있는 제국이지만 나라 안에 우환이 발생하게 되면 필시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 ‘희생자’는 이 저주를 사용해 필시 앞일을 바꿔 주리라는 믿음을 주는 이를 과거로 돌려보내주겠지.
사람이 꼭 한 명은 죽어야 이 땅에 강림하는 신의 축복이라니 얼마니 고약한가.
연서강은 홍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눈을 깜박거리며 홍이는 내밀어진 손을 구경만 했다. ‘잡거라.’ 부드러이 말하며 연서강은 쓴웃음이 아닌 상냥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칙칙한 이야기만 해서 미안하구나. 우녕궁 화원으로 산책이라도 가지 않겠느냐?”
“.......”
홍이가 처음 보는 것처럼 연서강의 손을 주시하다가 이내 조심히 거기에다 자신의 손을 겹쳤다. 작은 손을 마주 잡았더니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와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얄궂다.’
황명을 받들지 않고 멋대로 되돌아온(죽음을 선택한) 어린 신자와 아무 능력도 갖추지 않은 채 돌아왔지만 뱀 신님의 원하시는 대로 실컷 발버둥을 치고 있는 자신이라니. 정말로 홍이와 자신 같은 자는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