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황후는 간단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매는 걷어서 옥색 끈으로 묶었다. 머리 역시 평소와 달리 간단한 장식만 두어 개 했을 뿐이었다. 옆에서 궁인들이 오색찬란한 비단 옷들과 칠보 머리장식을 두 손에 들고 ‘마마, 이것이라도 더 걸치십시오.’, ‘그도 아니면 머리 장식이라도 하나 더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야단을 떨었다. 허나 황후는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일을 할 예정인데, 그런 것을 더 더해서 무얼 하자는 겐가. 다 쓸모없네.”
“하지만, 마마.”
개중에 나이 많은 상궁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장한궁 비씨는 화려 번쩍한 옷을 차려 입고 올 게 분명합니다. 마마께서 이리 수수한 차림을 하시면 마마를 모시는 저희들의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귀비가 마마의 모습을 보고 무어라 속으로 지껄여댈지 생각만하면 속상하여서.”
“되었네.”
그러나 황후의 뜻은 굳건하였다. 결국 상궁은 황후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궁인들에게 꺼내놓은 옷이며 머리장식을 모두 치우라 명하였다. 상궁의 명에 분주하고 궁인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오는 귀중한 손님을 대할 때나 혹은 황제가 방문할 때가 아니면 황후의 차림은 극히 간소해졌다. 여느 여인들 같으면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어여쁘다, 좋아하며 여러 가지 장신구들을 제 몸에 치장했다, 뺐다 할 터인데 황후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성격이 검소한 것인지, 소탈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허나 나리를 다스리는 권자가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 당연히 아랫것들에게 이익이 가고 자연히 아랫것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황후라는 자위를 염두에 둘 때, 그러한 점은 분명 황후의 장점이며 강점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후를 곁에서 아주 오랫동안 모셔왔던 상궁은 그런 황후가 못마땅하였다. 정확히는 황제가 귀비 비씨를 곁에 두기 시작한 후부터, 황후의 검소한 성격이 못마땅해진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극히 단순했다.
귀비 비씨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좆는 자로, 재화와 보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화장대 앞에 않아 자신을 치장하는 것과, 또 아름다운 옷감을 사들여 그것으로 만든 옷을 입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치장한 뒤 황상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운 목소리로 ‘폐하, 폐하, 신첩이 이번에 새로 맞춘 옷이어요. 이 머리 장식과 쌍으로 맞추었나이다. 정말 곱지 않습니까?’하고 이리저리 교태를 부리니, 황상께서 어찌 안 좋아 하실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아주 어린 나이부터 황태후의 등쌀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황제였다. 평생을 황태후의 그림자로 살아오시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는 꿈결 같은 여인을 만났으니 그 뒤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여인이란 이렇게 달콤한 존재였던가, 하며 황제는 그대로 귀비 비씨에게 빠져들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은 뒤 귀비 비씨의 기세는 아주 등등해졌다. 감히 군부인 황후의 앞에서 툭하면 방자하게 굴었으며, 황후가 눈앞에 있음에도 보란 듯이 황제에게 매달려 교태를 부렸다. 또 마음에 드는 장식품이나 옷감이 황후에게로 가 바쳐지면, 그대로 황제에게 달려가 ‘신첩이 갖고 싶은 게 있사온데.......’하고 또 사내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빼앗아 갔던 것이, 이제는 대놓고 ‘저것이 마음에 드는구나.’라고 말하며 빼앗아갔다. 황후가 너무 심하다 싶어 무어라 말하면 또 그녀는 쪼르르 황제에게 달려가 고해 바쳤다. ‘신첩이 암만 어리고 어리석다지만, 이리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을 줄이야. 황후마마에게 바쳐지는 선물들은 전부 아름답고 고운데, 신첩에게 바쳐지는 것들은 전부 돌멩이에 지푸라기 같사옵니다.’ 그 달콤함에 흠뻑 빠진 황제는 그대로 귀비의 말을 듣고 황후에게 명했다. ‘귀비에게도 그대가 받은 것을 나눠주게나.’
상궁은 그런 귀비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무릇 사내란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에게는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화려한 귀비의 미모에 홀려 진실한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는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해서 상궁은 황후가 귀비를 만날 때만이라도 제대로 치장하여 귀비가 깔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허나 역시 검소한 것인지, 소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후는 그런 것을 저어했다.
“나는 황상을 지아비로 두고 있는 여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 나라의 국모라네. 오로지 황상에게만 향해 있는 귀비의 차림과 달리 나는 백성들을 향해 있는 차림일세. 일하는 차림으로는 이것으로 되었네.”
“.......알겠사옵니다.”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상궁이 대답했다. 그런 그녀에게 황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다만, 귀비와 치졸한 자존심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그녀는 현재 귀비와 자존심 싸움을 할 때도 아니었다.
황후는 여린전을 나와 석류나무로 가득한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내 피었던 꽃이 모두 진 석류나무에는 석류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복주머니 같이 생긴 석류 열매는 잘 익어 쩍쩍 입이 벌어져 있다. 그 속에 든 열매는 정말이지 너무도 색이 곱게 물들어 그것을 본 황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리게 만들었다.
“올해도 잘 영글었구나.”
“마마께서 열심히 가꾸신 덕택입니다.”
손에 든 가지치기 가위로 황후는 낮은 가지에 달린 석류를 하난 뚝 따보았다. 겉이 매끈매끈한 열매는 그녀의 손 안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쩍 벌어져 있는 석류 알을 하나 꺼내어 입안에 넣으며 황후는 두 눈을 감았다.
처음에 지어질 당신의 여린전이 노각나무 꽃잎으로 만들어진 옥 무늬 집이라면, 자신이 현재 가꾸어가는 여린전은 석류나무의 집이 될 것이다. 새빨갛게 익은 열매의 속이 결국 참다못해 툭 터져 버리면, 그 안에서 오랫동안 알알이 영근 한과 탄식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산의 과일이라 불리는 석류였지만 황후는 그것을 달리 보았다.
석류는 오랜 시간동안 쭉 참아왔다가 마침내 툭 터져 버린 사람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과일이었다.
“난전에 참으로 어울리는 과일이 아니지 않은가.”
“옳은 말씀입니다.”
황후가 어떤 뜻에서 그리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상궁이 대답한다. 마침 그때, 황후의 곁으로 궁인 한 명이 접근했다. 그녀는 귀비가 마침내 여린전에 당도했음을 알리고 사라졌다. 귀비에게 여린전으로 오라고 기별을 넣은 지 세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황후는 난전으로 모습을 드러낸 귀비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귀비의 차림은 무척 화려했다. 색이 고운 옷에는 화려한 자수가 놓여 있었고, 틀어 올린 머리에는 칠보 장신구가 으리으리하게 꽂혀 있었다. 귀에도, 목에도, 손목에도, 하다못해 손가락에까지 보석으로 치장을 안 한 구석이 없었다.
“부르셨사옵니까, 마마.”
하고 말하며 귀비가 살작 고개를 숙인다.
“늦어서 참으로 송구하옵나이다. 소첩이 마침 바쁜 일이 생기어 그를 처리하느라 늦어지게 되었나이다.”
“바쁜 일이라, 무슨 일이었던가.”
황후의 물음에 귀비가 한 쪽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소첩의 하나 뿐인 자식이 자꾸만 온 몸에 무언가가 나고 열이 나서....... 별 일이 아닙니다만 계속 그러니 너무 걱정이 되옵니다.”
“그거 큰일일세.”
황후의 대꾸에 귀비가 살포시 웃는다.
“큰일이지요. 해서, 황자가 걱정이 되어 소첩은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괜찮으시지요?”
애초에 황후의 부름에 응할 생각이 없었으니 그리 화려한 옷을 입고 온 것일 터였다. 귀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 너무나 가소로워서 황후는 웃었다.
“그러시게.”
황후가 흔쾌히 허락하자 귀비가 ‘마마의 은혜에 감읍하옵니다.’하고 말하며 여린전을 나갔다. 귀비를 뒤따르는 궁인들이 줄줄이 그녀를 따라 가는 것을 바라보며 황후는 돌연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정말 걱정이 되겠지.......”
이윽고 귀비 측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다시 여린전은 고요해졌다. 황후가 고개를 돌려 궁인들을 보았다.
“안 되겠다. 석류를 따는 것은 우리들만 해야겠구나.”
궁인들은 이에 아무런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항상 이래왔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참고 참아 크게 부픈 것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안 되었다.
그러면 그 안에 든 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발 위를 덮을 것이니, 떨어진 것들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자신이 어디에까지 지쳐 떠내려 왔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황후도 그랬다.
“위사로부터 서찰이 도착하였나이다.”
금륜관에서 온 무관이 건네는 서신을 궁인이 받아서 황후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받아 그것을 뜯어보던 황후는 문득 제 손가락에 상처가 난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낮에 석류를 딸 때 입은 상처인 듯 했다. 피가 난 줄도 모르고 그 붉은 것을 따고 있었나 보다. 허긴 석류 알이 터졌을 때 나오는 즙의 색도 붉으니 모를 만도 했다.
“마마.”
황후의 손가락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상궁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 치료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되었네.”
그런 상궁을 저지하며 황후가 이어 말했다.
“이미 피도 그쳤으니, 무얼 더 치료할 게 남았는가. 이대로 두게.”
“허나.”
상궁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황후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웬만해선 고쳐먹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상궁의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을 받으며 황후는 편지를 마저 뜯었다. 익숙한 위사의 필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쓰인 글을 읽으면서 황후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배신자를 처단했단 말이지!”
구월 구일 내도록 불안한 마음이 가득이었는데, 일이 무사히 끝났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귀비의 아이도 순조롭게 아파하고 있다하니 계획이 아직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이었다. 정녕 다행이었다. 이제 귀비가 아이에게 복고단을 먹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그러나 다음 순간 황후는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기뻤던 마음도 일순일 분,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컴컴한 어둠이었다. 석류 껍질 속에 여름 내도록 갇혀 있었던 열매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도 같았다. 답답한 껍질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참고, 참아내도 결국 껍질이 찢어져 와르륵 쏟아져 버릴 때의 마음이란.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자신’이란 것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황후 역시 아이가 있기 때문에 귀비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을 잘 안다. 아이를 잃게 되면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가을이었다. 참고 인내하던 여름은 벌써 가고, 껍질이 찢어지는 가을이 된 것이다. 속에 든 것을 모두 훌훌 떨어뜨려 버리고 석류나무는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자신 역시 그럴 뿐이다.
내 아이를, 건들지 말았어야지.
모든 것을 참았다. 뒤로 몰래 욕을 해도 참았고, 폐위 상소를 받았어도 참았다. 귀비를 들이고 그녀를 총애했을 때도 참았으며, 귀비가 자신을 무시하며 조롱했을 때도 참았다.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 때도 참았다. 모든 것을 다 참을 수 있었다.
자신은 한 나라의 국모이지, 지아비만을 바라보는 여인이 아니었다.
허나, 허나.
자신의 아이만은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 한 번의 건드림이 그녀의 껍질을 찢어지게 만들어, 속에 든 한과 탄식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가을이었다.
“.......마마.”
상궁의 안쓰러운 부름이 그녀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녀는 주변에 서 있는 궁인들에게 안심하라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더더욱 그녀를 안쓰럽게 만들었다.
한 때는 참으로 영민하고, 아리땁고, 재주가 많았던 아이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었는데, 나 또한 영롱히 빛날 때가 있었건만, 그러나 지금은 여린전에서 귀비에게 밀려 음침하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 않나. 차게 웃으며 황후는 자신의 손에 든 편지를 접었다.
그때였다.
“한 장이 더 있구나?”
파라락. 그녀의 발밑으로 한 장의 종이가 떨어져 내린다. 상궁이 얼른 그것을 주어 황후에게 전달했다. 황후는 그 종이에 써진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종이에 써진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타인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하는 연무강의 편지였다.
* *
‘그것’은 구월 구일, 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다.
연무강이 거승주를 어찌 처리했는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바로 자신을 도와준 아이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돌아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던 거승주의 얼굴은 무어라 말 할 수 없이 참혹했다. ‘저 아저씨, 왜 그래?’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에 연서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거승주의 온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고 시선 또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아아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또 어떠한가. 모든 것이 끔찍했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자의 모든 것이.
연서강은 아이를 데리고 숲길을 빠져나왔다. 연무강이 이후 그를 어떻게 처리했을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거승주는 무사하지 못하리라. 차라리 깊은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나 그에게 물려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차마 그런 장면들을 보여줄 수 없어서 그는 ‘어서 가자, 어서.’하고 칭얼대는 아이를 재촉했다. ‘너무 다리가 아파요.’라고 하기에 연서강은 아이를 업고 숲길을 내려왔다.
얼른 숲길을 내려오길 잘한 것 같았다. 잠시 후, 날카로운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곧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삼켜 사라진다.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배신자의 최후였다.
결코 괜찮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 또한 저런 최후를 맞았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연서강은 그 ‘겨울’이 떠올라서 오싹했다. 자신도 저런 비명을 지르며 죽었던 것인가. 날카로운 금속이 자신의 몸을 베는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춥고 추웠다. 어서 빨리 이 장소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죽게 될 듯 했다.
아아.
연서강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연무강을 발견한 거승ㅈ의 얼굴은, 자신이 변방에서 봤던 소년병의 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자신의 생이 여기서 마감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얼굴이었다. 허옇게 질려 있었던, 그 까만 두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던,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절박하게 비명을 지르는 듯 했던 얼굴.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치듯 그 장소를 벗어나며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는 열흘 전에 만났었다. 이전부터 얼굴은 알고 있었으니 열흘 전에 만났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녀는 자신이 저잣거리로 나가면 곁으로 종종이 모여드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그 아이를 언젠가 이용해 먹어야겠다,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의 연서강은 저자에 나가 아이들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었고, 간혹 먹을 것을 갖고 나갔을 적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이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게 귀여웠었다. 아무런 흑심도 없었다.
그랬던 것이 분명한데, 사람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하고 비열한 것인가.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고 급하기만 하니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주변 사람들이었다. 저잣거리의 아이들이었다. 그네들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호의를 이용해 어떻게 해 볼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의 교유 관계는 너무나도 협소했다. 그렇다고 홍이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태상도 안 되고, 기연조는 당연히 안 되었다. 모씨 아줌마? 그녀도 안 된다. 하나씩 소거하다 보니 남은 선택지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신후를 넣어놓는 것은 성공했다. 후에 일이 들키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에 대해서는 자신 밖에 모른다. 연무강도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리라. 허니 자신만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아이는 무사했다. 틀림없었다.
-얘야.
겨우 저잣거리 근처까지 와서 연서강은 아이를 등에서 내려 주었다. 업고 오는 동안 발이 많이 괜찮아졌는지 아이가 폴짝, 연서강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그를 아무 의심도 없이, 악의도 없이 쳐다보는 것이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구나.
-쉬웠는데, 뭘.......
연서강의 칭찬에 아이가 몸을 비비꼬며 부끄러워했다. 정말 착한 아이고, 순진한 아이였다. 연서강은 흐린 얼굴로 이어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되면, 이제부터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절대 하면 안 된다.
-.......
일을 처음 시킬 적에도 아이에게 신신당부했던 말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인지라 아이는 조금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연서강은 안심이 되지 않아 한 번 더 힘을 줘 말을 했다.
-절대로, 절대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해선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지도 모른다.
그 말을 삼키며 연서강은 아이를 보았다. ‘대답해주겠니?’ 그제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았어. 절대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을게.’ 똑똑히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연서강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래. 말하지 마라. 말만 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온 힘을 다해 지켜줄 터이니. 나도 아무에게도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터이니, 너도 또한.
-만약 오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한다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다음에 내가 저자에 나올 적에, 너만 간식을 안 줄 것이다. 알았느냐?
-어, 그건 싫은데.......
연서강이 갖고 나오는 간식들은 전부 비싸고 맛난 것들이었다. 괜히 아이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연서강의 뒤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녹우당 도련님이기는 했지만 그에게 제공되는 음식들은 기본적으로 연씨 문중의 것이었다. 해서 저잣거리의 아이들은 잘 보지 못하는 군것질거리도 많았다. 그런 군것질거리는 오직 연서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기에, 아이들은 연서강에게 미움 받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
바로 울상이 되는 소녀에게 연서강이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렴.
이번에는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으로 되었다. 이만큼만 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였다. 어차피 아이에게 오늘 일은 그저 불쌍한 녹우당 도련님을 도와준 데에 그칠 것이 분명했다. 시일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말 일이기도 했다. 이대로 아이가 이 일에 대해 까맣게 잊어주면 끝이다.
아이에 대해서는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누가 아이를 찾아가 캐어물을 일도 없으리라.
자신만 잘 하면 된다.
연무강은 그런 자신의 말을 비웃었다. 너무 물렁한 대처라고 그는 말을 했었다. 후환이 없으려면 역시 죽이는 편이 낫다고 말까지 했었다. 허나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돈을 주고 사람을 구하든, 아니면 원래 알던 이를 이용하든 간에 연씨 문중에서는 그 사람을 무조건 죽여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누군가 하나가 죽는 수밖에 없는 계획이라니. 그것은 싫다. 자신이 개입된 일에 더 이상 사람이 죽는 것은.
자신이 죽던 날이 생각나 끔찍했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이 날 터였다.
거승주에 대해서는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고맙다.
연서강은 한 번 더 말하고 다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연서강의 손을 꽉 잡고 저잣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잡은 아이의 손이 따뜻하다. 괜히 연서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도 불안하고, 너무도 불확실하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앞날은 예전과 같은 앞날이건만 동시에 완전히 달랐다. 더욱이 이전에는 평탄하게 잘 이어져만 갔던 타인의 삶이 지금 자신으로 인해 크게 바뀌고 말았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연서강은 두려웠다.
더 이상 변하게 해선 안 돼.
상반된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이전과 같은 삶은 끔찍하고 형편없었다며 이전과 달리 가려는 마음과, 이전과 전혀 너무 달라 이질감을 느끼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것이었다.
자신은 이 앞에 있는 ‘겨울’에서 온 사람이 분명할진데, 해서 앞일을 미리 겪은 사람이 분명할진데 죽기 전보다 더욱 자신의 앞날이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허나, 끝났다.
이 ‘일’이 무사히 끝나고 나면 무언가 방향이 보일 것이다. 지금의 불안함은 더욱 좋은 앞날이 닥쳐오기 전 잠시 오는 몸살 같은 것일 터이다.
-그럼, 잘 가.
연서강은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두 손을 흔들며 웃었다.
-응. 녹우당 도련님도 잘 가.
그리고 그 날, 저녁이었다.
연씨 문중의 저택으로 한 남자가 남몰래 찾아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은 물었다. 연무의가 그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귀라도 먹었느냐? 네놈이 무사히 돌려보낸 그 아이의 부친이 찾아왔다. 그렇게 말을 하였다!”
그가 현재 있는 곳은 성헌당이었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성헌당으로 돌연 연서강은 부름을 받았었다. 하필이면 구월 구일에 부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며 성헌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연서강은 그 안의 얼어붙은 공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하고 부친께 인사를 올린 후 연서강은 성헌당 안을 몰래 돌아보았다. 연무의의 옆에는 연무강 또한 있었다. 진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연무의와 달리 연무강의 얼굴은 그저 무(無)였다.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연서강이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라고 묻자, 잠자코 있던 연무강이 대답했었다.
-그 아이의 부친이 여길 방문하였다. 녹우당 도련님, 즉 너를 찾더군.
“부친?”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일순 눈앞에 캄캄해지는 듯 했다.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 넘기며 연서강은 겨우 소리 내어 물었다.
“그 사람이.”
연무의가 발칵 역정을 냈다.
“다 알고 왔단 말이다, 서강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불안했던 예감이 들어맞았다.
연서강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부친이 찾아왔다고? 다 알고 왔다고? 어 저녁에? 그 아이는? 그 아이는.
.......그 아이가 나와의 약속을 깼구나.
“대체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이란 말이더냐.”
연무의가 소리치며 연무강을 돌아보았다.
“무강이. 너는 어째 이 중한 일을 서강이에게 맡겼느냐. 혹여 맡겼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를 진즉 산속에서 죽였어야지.”
“........”
연무의는 진노했고, 추궁을 받은 연무강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연서강은 얼어붙은 시선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 일을 어찌.......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이를 어쩌면, 정체된 생각은 자꾸만 똑같은 말만 반복하게 만들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그때, 돌연 연무의가 그를 쳐다보았다.
“연서강.”
“.......”
자신을 찢어죽일 듯이 쳐다보는 연무의의 눈빛에 연서강은 숨을 죽였다. 진정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몸이 절로 덜덜덜 떨렸다. 금방이라도 부친은 자신을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목을 졸라 버릴 것 같았다. 배를 차고 등을 찰 것만 같았다.
“네가, 네가 이럴 줄 알았지. 네가 하는 일 중 제대로 된 게 무어더냐!”
벼락같은 호통에 연서강은 순간 자신이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몸을 숙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하고 말하고 또 말했다. 애원을 했다. 왜 이럴까. 자신은 대체 왜 이렇게 못난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해내는 일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도대체 자신은 왜?!
.......그 아이는,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자신 때문에 죽으면, 자신 때문에 죽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부친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네, 네놈이.”
그가 쿵쿵 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아니, 실제로 무너지고 있었다. 연서강은 그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면 올수록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리가 와르륵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네놈이 결국 내 집과 가족을 망칠 줄 알았어!”
연무의가 발을 들었다.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아버님. 내일 황후마마께서 은인인 연서강을 무사히 입궐시키라 명하셨습니다.”
연무강의 조용한 목소리가 성헌당 안에 울려 퍼졌다. 막 발을 들어 올렸던 연무의가 연무강을 돌아본다. 그의 얼굴은 흡사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무강아. 네가 지금 무어라고 했느냐?”
연서강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런 연서강을 말없이 보던 연무강이 잠자코 품속에서 연분홍빛 서신을 하나 꺼내든다. 서신을 서궤 위에 두고 그는 선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있는 연무의를 올려다보았다.
연무의의 얼굴에는 여전히 노기가 가득했다. ‘마마께서?’ 그러나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의아함도 가득했다.
“마마께옵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신단 말이더냐? 연서강을 어찌 알고?”
“읽어보십시오.”
연무강의 말에 연무의는 서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그는 연무강이 서궤 위에 올려둔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어 나갔다. 시선이 아래로 향할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어갔다. 그의 입술이 경악으로 바르르 떨렸다.
“.......나를 속여?”
그가 중얼거린 말에 연서강이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한 말도 놀라웠지만, 부친의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에 언뜻 위험한 빛이 어렸던 것 같았기 떄문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연무강은 담담하기만 했다.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그 배신자가 기연조와 암통했고, 배신자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서강이 나서게 된 것입니다. 배신자 거승주에게 미끼와 마찬가지였던 그 ‘아이’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데에 연서강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버님, 또 이 계획을 꾸민 이도 연서강이었습니다.”
연무의는 여전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배신자를 잡고, 그 배신자가 기연조와 어떻게 암통했으며, 또 기연조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부득이하게 아버님을 속이게 되었습니다.”
그 위로 연무강의 목소리가 가차 없이 울렸다.
그만,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만.
더 이상 아버님을 화나게 만들지 마.
머릿속을 장악한 불길한 기운은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등에 가라앉은 냉기 또한 여전했다. 스윽, 스윽, 발밑에서 차가운 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연무의가 문득 미소 짓는다.
“.......마마께서, 나를 속이시고......., 저놈을 은인이라 부른다?”
스산한 미소였다.
연서강은 자신을 보는 부친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에 떠오른 것은 형형한 독기였다. 항상 자신에 대해 뭉근하게 보내던 적의와 악의가 지금에서는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미소를 보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연서강은 방금 자신을 발로 차려고 했던 때보다 연무의가 더 무서웠다.
그것은, 그래.
.......눈앞에 당장 보이는 승냥이가 아니라 풀숲에 몰래 숨은 독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독사는, 자신이 빈틈을 보이는 그 순간에 꽉 자신을 물고 상처로 맹독을 주입할 것만 같았다. 거칠게 물고 뜯고 도망가는 것을 추격하는 게 아니라, 단숨에 죽여 버리고 싶어 한다.
“허면 어쩔 수가 없지.”
독사가 쩝쩝 입을 다시며 자신을 느긋한 눈으로 응시한다.
“마마께서 연서강을 은인이라 생각하신다면야.......”
연서강은 여전히 오그라든 자신의 심장을 펼 수가 없었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있다.
목이 말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서, 당장 도망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어디로? 어디로 가야 눈앞에 있는 ‘뱀’을 떨쳐낼 수가 있는가. 멀리 변방에 있을 때도 자신을 따라왔던 ‘뱀’인데. 아니, 저건 그때의 백사가 아닌가. 아니, 그 뱀인가. 뱀은 뱀으로 모두 같은 것인가. 아니면, 아니면.
머릿속 생각들이 엉망진창으로 엉켜들어갔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자신이 숨 쉬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서 연서강은 긴장했다. 등은 벌써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서강아.”
흠칫.
연무의가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움찔 몸을 떨었다. 숨도 동시에 멈췄다. 시끄러운 호흡 소리는 사라졌으나, 이제는 가슴 속이 쥐어뜯기는 듯 고통스럽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뺨을 타고 흘러 턱에서 뚝 떨어졌다. 마주 잡은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얼굴은 열에 들뜬 것처럼 뜨거운데, 사지는 한겨울에 알몸으로 나온 사람처럼 차갑고 떨렸다.
“이 아비를 봐주련. 아비가 불렀는데, 얼굴도 보지 않을 셈이냐.”
당장 얼굴을 보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말한다.
연서강은 조심조심 고개를 들어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의 차가운 두 눈과. 싸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두 눈은, 세월에 의해 탁해져 있었지만 칼날과도 같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참으로 많이 애를 썼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기연조에게 정신이 팔려 이 집안을 마치려 든다 생각하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아버님. 아닙니다.”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연무의가 말을 이었다.
“헌데, 이제 이 일을 어찌 하겠느냐.”
사람 좋은 척 다정스레 이야기한다.
“그 아이의 아비가 사랑방에 와 계신다. 아이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구나. 녹우당 도련님을 찾으시고 계시구나. 저 이는 어쩔 셈이냐.”
“.......”
“저 이도 과자를 쥐어주고 돌려보낼 셈이냐?”
“.......”
“아니면,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사정을 해서 돌려보낼 셈이냐?”
“.......”
연서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연무의가 갑자기 발로 서궤를 탕! 쳤다. 서궤가 연무의의 거친 발길질에 저쪽 방구석으로 나가 떨어졌다. 연무의가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쩔 작정이란 말이더냐! 벙어리더냐? 언제는 시키지 않아도 잘만 나불거리더니, 오늘은 왜 못하는 것이냐!”
두려운 눈으로 연서강은 방구석에 나가떨어진 서궤를 훔쳐보았다. 꽤나 세게 부딪힌 듯 다리 부분이 덜렁거린다. 저 서궤의 신세가 바로 방금 자신이 될 뻔 했다는 사실을 연서강은 자각했다. 정말로 사람을 밟아 죽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까 전의 그는.
연서강은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든 죽일 작정이구나.
자신을 죽인 사람은 비단 연무강 뿐만이 아니었다. 연무강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연무의였다. 연무의였다. 연무의였던 것이다.
아버님이.
“그 사람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연무의의 말에 대답한 것은 연서강이 아니라 연무강이었다.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잠시 판단력이 흐려져 연서강에게 맡긴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무강의 말에 연서강은 아찔해졌다.
죽는 건가? 그 아이가? 자신 때문에?
자신이 괜한 일에 끌어들여서?
“아니, 무강아. 이건 서강이가 계획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어 연무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서강아.”
죽는 건가, 그 아이가? 자신 때문에?
연서강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연무의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다.
“네가 처리하여라.”
“아버님!”
연무의의 말에 연무강이 인상을 쓰며 그를 부른다. 그 얼굴을 보자 연서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좀 전의 큰 형님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나를 위한 것이었나. 연무강은 자신과 그 아이가 친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지나친 생각이었다. 연무강이 자신을 취해 그런 말을 해줄 리가 없다. 착각이다. 눈앞에 더 큰 맹수를 대하고 있어,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만 것이다.
“서강아.”
말없는 그를 연무의가 다시 불렀다.
“언제부터 네 일을 남에게 맡기었느냐. 나는 너를 결코 그리 키운 적이 없다.”
눈앞의 맹수는 자신을 괴롭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더러 일을 처리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저잣거리의 아이가 자신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저 맹수 또한 알고 있었다.
연무강이 처리하든 자신이 처리하든 결과는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헌데도 저리 다정하게 자신에게 일의 결정권을 줄 리가 없었다. 자신을 그 누구보다 못 믿는 자가 그가 아니었던가.
연무의의 검은 두 눈이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네가 생각해서 처리하렴.”
“.......”
연무의가 재촉한다.
“어쩔 작정이더냐.”
“.......”
뚝뚝, 식은땀이 떨어졌다. 연무의가 다시 재촉했다.
“저 인간이 입단속을 단단히 하지 않으면 배신자를 잡은 보람도 없이, 우리 모두 곧 큰일이 날 것이다.”
“.......”
연서강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어찌할 것이냐.”
“.......”
“결정하여라.”
“......”
“결정을 해.”
밖에서 방울벌레가 울었다. 찌르릉, 찌릉.
연서강은 오늘 오후에 봤던 아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응. 녹우당 도련님도 잘 가.’ 자신을 향해 두 손 모두 올려 흔들었었다. 자신의 부탁을 듣고 ‘녹우당 도련님, 곤란한 거야......., 그런 간식 열 개로 도와줄게.’라 말을 했었다. 오로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 작은 몸으로 혜문에서 경천문까지 열심히 걷고 또 숲길을 올랐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그 아이는 무사히 장성하여 성혼을 치루고 가정을 이뤘을 것이다. 자신이 죽던 겨울날, 그 아이는 분명 따뜻한 집안에서 가족들과 쿨쿨 자고 있었을 터인데, 앞으로도 분명 그래야 할 아이인데.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그래야 하는데.
“.......”
그 아이, 그 아이는.
그래야 할 아이를 자신이 죽인 것이다.
자신이, 그 아이를, 연서강의 얼굴이 잔뜩 흐려졌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듣고자 했던 대답을 들어서 그런지 연무의가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연서강은 차가워진 숨을 내뱉었다. 발작이라도 하는 듯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덜컥덜컥 걸렸다.
연서강을 보자마자 중년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높으신 분들이라 그런지 생각도 오래 하시는군요. 참말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렸다는 말은 정말인 듯 했다. 사랑방 안은 여러 먹을 것들과 마실 것들의 잔해로 엉망진창이었다. 남자가 사랑방 안을 온통 휘젓고 다니기라도 했는지 물건들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몇 달을 두고 어지른 듯한 사랑방 안을 휙휙 돌아보고 연서강은 남자의 앞에 앉았다.
“아버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남자가 낄낄낄 웃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제 때 깎지 않아 지저분한 머리, 음식 국물 등 여러 가지 오물들이 묻어있는 옷에서는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나는 냄새가 났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남자가 계속해서 웃고 있다. 침을 튀기면서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
“우리 딸애가 오늘 종일 안 보이기에 대체 어딜 갔다 왔냐고 물었습죠. 그랬더니 고 계집이 도통 말을 꺼내니 않지 않습니까. 해서 다그치고 때렸죠. 그랬더니 그 애가 울면서 털어놓았습니다. 녹우당 도련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남자의 웃음이 야비해졌다.
“.......우리 딸애를 어디에다 이용하셨습니까, 도련님?”
“.......”
“안 되지요, 안 돼. 궐내 마차에 뭔가를 넣었다면서요? 여기는 황후마마님네 집안이 아닙니까. 귀비마마와 사이가 안 좋으시다면서요. 헌데 그런 다툼에 우리 같은 백성들을 끼어들게 하면 안 되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뜨릴 일 있습니까?”
얄궂게 웃으며 남자는 연서강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일에 대해 알고 있다. 허니 너는 무엇을 내게 내놓겠느냐. 말하면서 은근슬쩍 그는 연서강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남자의 눈에는 눈곱이 껴있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이고. 말이 빨라 참으로 좋습니다.”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남자가 이어 경박하게 말했다.
“돈입니다, 돈.”
“.......”
“요새 돈으로 안 되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죠. 멀쩡한 사람을 벙어리로 만들어 주기도 하죠.”
결국은 돈이었다.
연서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밖의 하인들을 불러 남자가 원하는 대로 돈을 마련해 주었다. 하인들이 끙끙거리며 들고 온 궤짝에 남자의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돈을 본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뭔가를 더 생각하길 포기한 듯 했다. 이 돈으로 무얼 할까, 그런 꿈에 부푼 얼굴이었다.
똑똑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야비한 구석으로만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딸과 전연 달랐다.
“이 돈을 모두 드릴 터이니, 지금 당장 도성 밖으로 나가시오.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네를 없애도록 하겠소.”
“암요, 암요. 당연히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리 돈도 많은데.”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는 궤짝을 손으로 쓸며 ‘아이고 좋아라.’하고 연신 중얼거렸다. 돈에 눈이 멀었다고 밖에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연서강은 칙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말하러 온 것이더냐. 말하러 올 것이면 차라리 나를 몰래 불러 낼 것이지. 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냐. 연서강은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부친과 큰 형님 몰래 나만 따로 불러내어서 돈을 뜯어도 될 일이 아니었나.
말만, 꺼내지 않았다면. 나에게만 말 했다면 네 딸이 누구네 집 자식인지 아무도 몰랐을 터인데. 부친께서 내 입을 찢어도 말을 안 할 자신이 있었는데, 어째서 당당하게 이리로 찾아온 것이냐.
허나 다 미련이고 화풀이였으며 책임전가였다. 애초에 자신이 그 아이를 계획에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 아이의 부친이 이런 망나니인줄 알았다면 좀 더 숙고해봤을 일이었다. 자신이 좀 더 신중하게 따져보았더라면......, 그랬다면.
“감사합니다, 도련님. 허면 다음에도 꼭 제 딸을 이용해주십시오.”
남자가 궤짝을 들고 히히 웃었다. 남자의 누런 이에는 고춧가루가 껴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이었으나 연서강은 그러지 못했다. 경멸과 멸시도, 혐오도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혹독한 질책은 전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궤짝을 들고 사랑방을 나갔다. 무거워서 들 수 없다고 애원하기에 말도 빌려주었다. 궤짝에 담겨 있는 돈들을 두 개의 주머니로 나눠 말에 매다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어쩐지 고 계집애를 족치고 싶더라니.’ 끝까지 하는 말도 천박했다.
“.......”
남자가 집을 나가고 얼마 안 되어 그의 곁으로 복면을 쓴 남자가 둘 다가왔다. 둘 다 평소에는 성헌당을 지키고 있던 하인으로, 연무의의 직속 부하였다. ‘서강아, 네게 사람을 죽일 만한 담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내가 기꺼이 사람을 빌려주도록 하마.’ 그리 말하며 연무의가 딸려 보낸 사람들이었다.
허나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연무의가 결코 선심을 써서 이 사람들을 딸려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연무의는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로 이 둘을 딸려 보낸 것이다. 자신이 남자를 죽이는지 아니면 그냥 내보내기만 하는지 그들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연서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남자의 가족들이 도성 밖으로 나가면 처리하십시오.”
연서강이 조용히 명령을 내리자 이내 감시의 시선이 거두어진다. 복면을 쓴 자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남자의 뒤에 붙었다. 그 뒷모습을 연서강은 멍하니 응시했다.
모든 게 다 참혹했다.
자신이 죽었을 때의 ‘겨울’보다 더.
어떻게 그보다 참혹할 수 있겠냐고 생각을 했었는데, 있었던 것이다. 연서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자신의 몸을 주먹으로 마고 내리치고 머리를 뒤흔들며 그는 오열했다. ‘일’이 무사히 잘 끝난 것도 같은데 어째서 아직도 여태 가슴 속이 퍼렇게 물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퍼렁 빛이 더더욱 진해져 시꺼멓게 멍이 들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그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과연 자신과 기연조가, 연의진이나 모씨 아줌마가 모두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었나. 그는 절망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 밖에 수가 없어 보였다. 지금도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제 머리를 연서강은 원망했다.
예전에, 잘 못 해내고 좌절할 것 같냐는 자신의 질문에 태상이 침묵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에 자신이 했던 답이 무엇이었던가. 아직은 희망이 있었던 늦봄의 대답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가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해낼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진창이 되어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 대답했었다.
그때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자네가 생각하고 각오했던 진창은 대체 무엇이었냐고.
* *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때 이후로 연서강은 두려워서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아이의 가족들이 대체 어떻게 되었을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일’은 무사히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지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 들으려고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었다. ‘일’에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연무의도 황후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순간, 연무의에게 죽을 뻔한 자신을 연무강이 황후에게 어떤 수를 써서 막게 한 듯도 한데 모든 것이 흐릿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 생각, 생각! 그게 문제였다. 생각을 해서 자신과 연조가 살 길을 마련해야만 했지만,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게 아닌가.
연무강으로부터 ‘마마께서 몸이 좀 나으면 한 번 보자고 하시더군.’이란 말을 전해 들었지만, 연서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기를 쓰고 황후를 만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거승주가 처리되었으니 기연조가 ‘일’에 대해 알아차릴 리도 없게 되었다. ‘일’이 이미 행해졌기 때문에 ‘일’에 개입할 수도 없게 되었다. 기연조 스스로가 ‘증거’가 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이다. 기연조가 거승주의 소식이 끊긴 것에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더 수를 쓸 수도 있었지만, 지금 연서강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온 몸이 아팠다.
죽은 자의 영혼이 들러붙어 그를 땅 밑으로 끌고 가려는 것 같았다. 종종 꾸었던 변방의 꿈은 이제 매일 꾸게 되었다. 그는 매일 구덩이에 떨어졌고 절망하며 죽어갔으며 뱀을 만나 소생했다. 소생의 끝은 그거였다. 자신의 발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소년병과 아이, 남자, 남자의 얼굴도 모르는 가족들. 그리고 귀비마마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 죽어갔던 언양의 사람들.
이상하다.
연서강은 음울하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일’은 끝났고, 이대로 주욱 가만히만 있으면 겨울까지 자신도 기연조도 살 게 분명한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보람차지 않았다. 기연조가 자신의 가족들을 해칠 일도 없겠고 가족들이 기연조를 해칠 일도 없겠구나, 하고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나?
늦봄에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라면 이루어진 게 맞다고 할 수도 있었다.
헌데 왜 이렇게 처참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난 것 같단 말인가.
열심히 했다. 늦봄부터 지금까지 중간 여름에 남는 시일이 있어 수안궁과 영의전에 놀러 다녔던 것을 제외하면 자신은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이전의 녹우당 도련님이었던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자신은 기적과도 같았다.
황후가 자신을 은인이라 부르다니, 그 때문에 부친인 연무의가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니. 기분 탓인지 연무강의 괴롭힘 또한 사라진 것 같았다.
연의진은 자신을 걱정해주고 염려해주고 있으며, 벼슬자리도 하나 꿰어 찼다. 연의향은 자신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했었고 공치식에 자신을 추천해준다 하였다. 공치식이라니. 매 번 구경은 했었지만 감시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오를 줄은 상상도 못해봤다. 당연했다. 일자무식인 자가 과거에 급제할 정도의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오른다는 것은, 연서령 또한 가끔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며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현재’였다. 얼마나 꿈같은 상황인가. 자신이 어렸을 때 그토록 바랐던 상황이 아닌가.
그래. 꿈.
연서강은 그리 속으로 되뇌며 제 팔에 얼굴을 품었다. 가을이라 추워져서인지 온 몸이 계속해서 떨렸다. 몸살인 듯 싶구나, 하고 연의진이 왔다 간 듯도 했다. 제 때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이마를 짚은 듯도 했다. 서강아, 내일도 또 올 터이니 반드시 약을 챙겨 먹고 있어라. 그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간 것 같기도 했다.
허나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었다. 자신의 ‘현실’은 겨울에 죽었던 것이다.
죽었다, 죽었다고!
가족들의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처참하게 죽었던 게 자신이 ‘현실’이었다. 기연조가 자신을 구하러 와서 죽고 말았고,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러 땅바닥을 기었던 게 ‘현실’인 것이다.
아이와 아이의 가족이 죽은 것은 꿈은 아닐까. 사실은 이번 늦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다 꿈인 것이다. 자신에게 친절한 가족들이 있다니 말도 안 되지 않나. 그들에게 냉대 받았던 게 대체 몇 년인데, 단 몇 달 만에 이리 바뀌다니 말도 안 된다.
더욱이 큰 형님과 자신이 몸을 섞다니 그거야말로 진실로 거짓이다. 큰 형님께서는 자신을 죽일 정도로 싫어하지 않았나. 그랬던 사람이 분명한데 몸을 대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리 없지 않은가. 차라리 ‘일’이 끝나면 자진하는 것을 대가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면 또 모를까. 그 형님이 자신을 도와줄 리가 없는데.
돌연 연서강은 미소 지었다. 그래,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꿈이라서 그렇게.
그는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며 베개를 쓸었다. 참으로 현실 같은 꿈이 아닌가. 죽기 전 홍이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꿈인가. 그러다 그는 문득 침대 위에서 쿵, 떨어졌다. 바닥에 몸이 부딪혀 알싸하고 둔한 아픔이 머리에 전달되었다.
아프고 아팠다.
꿈이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이것도 자신의 ‘현실’인 것이다.
연서강은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렸다.
자신은 앞날을 좋게 바꾼 것인가? 과연? 정녕 이대로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게 이전의 삶보다 나았다고? 지금 이것이? 지금 이런 상황이 녹우당에서 소요하던 그때보다 낫다고?
“.......연조.”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친우의 이름을 읊조렸다.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 온 이후, 열심히 노력했던 원인이 된 사람이었다. 흠모하는 사람이었고 자랑스러운 친구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래, 기연조가 있었다.
지금이 과거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이가 바로 그인 것이다. 기연조가 아직 무사했다. ‘일’이 시행된 다음에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고, 때문에 연무의도 그를 굳이 해치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연조가 이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그는 분명히 ‘겨울’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연조를 만나서.”
확인을 해야겠다. 그이가 정녕 무사한지.
그의 무사한 모습을 보면 지금의 ‘현실’도 조금은 나아 보일 듯 했다. 일부지만 가족들에게 사랑도 받고 관직도 얻었으며 기연조도 무사하다. ‘겨울’에 죽었던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그때는 아무 걱정과 근심 없이 그저 녹우당에서 편히 노닐었지만 역시 ‘겨울’에 죽어버려서 안 되었다. 열심히 노력한 지금이 그때보다 응당 나아야 되지 않겠는가.
“녹우당.”
연서강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녹우당. 녹우당으로 돌아가자. 기연조를 만나려면 녹우당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녹우당에 생각이 미치자 연서강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솟아나왔다. 그리웠다. 녹우당이. 돌아가고 싶었다. 본채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녹우당으로 돌아가자.”
연서강은 그리 생각하며 열에 들뜬 몸을 움직였다. 관절이 모두 끊어질 듯 아프고 온 몸이 다 묵직했으나 그 아픔보다 녹우당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이제 ‘일’이 거의 끝났으니 녹우당으로 돌아가도 될 성 싶었다.
그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찾아온 녹우당의 모습이 연서강은 낯설었다. 그리 오랫동안 본채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앞마당이고 뒤뜰이고 구석구석 보고나서야 연서강은 어째서 그런 것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본채로 와 버렸기 때문이다.
죽기 이전의 자신은 녹우당을 어여삐 꾸미는데 열과 성의를 다 하고 있었다. 해서 매 번 잡초를 뽑아주고 알뿌리를 새로 심었으며 어여쁜 꽃이 있으면 녹우당으로 옮겨 심었었다. 매치되어 있는 암석의 위치도 가능하면 좋은 자리로 옮겼었다. 나무의 잎을 닦아 주었고 열매가 다 익으면 그것도 제 때 따서 반은 먹고 반은 내년을 위해 남겨 두었었다.
그랬던 것이 여름부터 자신이 녹우당을 비우는 바람에 하나도 하지 못한 것이다. 모씨 아줌마가 관리해준다고 해봤자 고작 시들지 않게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게 다여서 한계가 있었다. 자신이 낯설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 녹우당은, 자신이 죽기 전 가을의 녹우당이 아니었다.
자신이 방치해 모습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죽기 전 가을의 녹우당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이 녹우당은 처음 보는 것 같을 수밖에. 자신이 살았던 녹우당 같지가 않았다. 고작 해야 몇 달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남의 집처럼 썰렁했다.
아니야.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녹우당이 이래선 안 된다. 녹우당은 죽기 전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닌 곳이었던가. 녹우당이 자신에게 낯설어서는 안 된다.
가을의 찬바람이 불었다. 반쯤 물이 든 잎사귀가 그 바람에 툭,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볼품없는 가을 화초들이 초라한 꽃을 피웠다. 바닥은 매일매일 쓸어주지 않아 검게 말라붙은 잎들로 뒤덮여 있었고, 그 때문에 햇빛을 못 본 몇 몇 키 작은 화초들은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게 그간 자신의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고 자존심이었던 녹우당의 모습이었다. 연서강은 고개를 다시 저었다.
아니야. 이게 녹우당일 리가.
허나 맞았다. 죽기 전 봤던 그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녹우당은 이제 없었다. 죽고 나서 돌아온 지금이 그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연서강은 거부했다. 자신의 녹우당은 이렇지 않았다고 버릇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아니야. 때로는 고개를 저으며 그는 뒤뜰의 동백과 매화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무성하게 자란 매화나무의 잎 때문에 여름 내 햇빛을 잘 못 받았는지 동백의 크기가 죽기 전보다 조금 작았다. 매화나무 역시 가지가 여기저기 나 있어 볼품이 없다.
“.......여기서 내가 죽었는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연서강은 동백나무 아래의 흙을 쓸었다. 흙냄새만이 그대로였다.
“여기서, 내가.”
“거기서 자네가 어쨌는데, 강아.”
그런 그의 등 뒤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연조였다. 본채에서 이리로 오기 전 모씨 아줌마에게 부탁하여 녹우당으로 오게 만든 기연조였다.
“연조.”
얼마나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었던가. 연서강은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연조였다. 연조, 등 뒤에서 피를 내뿜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지 하나가 잘려 있는 연조도 아니었다. 멀쩡한 모습을 한 기연조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었다.
“연조, 자네가 무사해서.”
그러나 그의 말을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기연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사정없이 잘라먹었기 때문이었다.
“왜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였지, 연서강?”
그 질문이 비수처럼 연서강의 심장에 푸욱 꽂혔다. 그는 입을 벌린 채 마치 백치라도 된 것 마냥 기연조를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런 연서강의 모습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기연조가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연, 조.......”
신음처럼 상대의 이름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기연조의 출현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들이 이내 기연조의 말을 필두로 하여 사정없이 연서강의 가슴에 내리 꽂혔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꽂히는 ‘현실’들에 연서강은 겨우 허우적거리며 숨을 쉴 뿐, 더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지경에까지 왔는데, 여전히 자네는 내가 웃으며 여기를 올 줄 알았나.”
잠시 잊었었다. 지금의 자신은 기연조를 정답게 부를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 그렇지. 생각을 했었다. 자신은 기연조를 배신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둘의 관계는 이제 평탄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연서강은 ‘연조.’하고 상대방을 부르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연조야, 나는.
그러나 연서강은 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기연조가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연서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굳어 돌이 되어버리는 줄 알았다. 사실은 지금이 ‘겨울’이라, 이번에는 기연조가 자신을 죽인 게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로 가슴팍이 아팠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더듬어 보았지만 거기는 흙으로 더러워진 옷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피도 나지 않았고 검으로 인한 상흔도 없었다.
-진실로 추잡하군.
그 말이 이번에는 진실로 들린 것인가, 아니면 또 환청이었던가.
“강아.”
기연조가 그를 부른다. 부르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낯선 녹우당의 가을 전경이었다. 거기서 죽기 전과 다름없는 모습의 기연조가 자신을 향해 냉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거승주가 돌연 연락이 끊겨서 나 또한 거승주가 한 말을 통해 저잣거리를 조사해 보았다. 거승주의 생김새를 말하며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혹여 본 적 없냐고 일일이 물어보았단 말이다. 허니 나오더군. 낮에 거승주를 목격했던 여인이 있었단 말이다.”
여인.
연서강은 모르는 일이었다. 거승주가 따라오면 숲길로 유인하도록 미리 아이와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거승주를 보았다는 여인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기연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 여인이 내게 말하더라. 문씨 아저씨네 딸을 거승주가 쫓고 있었노라고. 해서 그녀가 말한 문씨네 집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더군.”
“.......”
“문씨네가 간밤에 야반도주를 했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더구나. 도성을 나가자마자 만난 강도에게 돈을 모두 빼앗기고 일가족 모두 죽었다고 하더군.”
“.......”
“헌데, 문씨네 대해 물어보니 사람들이 놀라운 말을 하더라. 저녁에 문씨가 녹우당 도련님을 만나러 간다고 술에 취해 말을 했었다고.”
“.......”
“자네가 죽였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모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죽인 게 맞았다.
“강아.”
“.......”
연서강은 다만 시선을 땅으로 둔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들면 기연조가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연조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그의 뼛속까지 사무쳤다.
그렇구나. 기연조가 알게 되었어.
간신히 납득한 사실 하나가 생선 가시처럼 턱, 목에 걸린다.
기연조가, 자신이, 그 아이를 죽인 걸 알고 있어.
“어떻게 그리 잔혹하단 말이냐. 자네, 정녕 내가 아는 연서강이 맞나? 어찌 아이를 이용하고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말하고 기연조가 말을 멈추었다. 잠시 후, 나직한 목소리로 기연조가 속삭인다.
“.......혹시 자네, 원래 그런 인간이었나?”
아니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다만 자네를 구하고 싶어서. .......그 말을 누가 믿을까. 자신이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또 어찌 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리 복잡한 방법으로 자네를 구할 생각을 했는지, 그것은 또 어떻게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기연조가 되묻는다. 연서강은 다만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연서강이 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기연조의 얼굴이 몹시 싸늘해졌다. 연서강으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빛도 처음이었다. 기연조는 늘 항상 자신을 볼 때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을 하였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래했는데.
그랬던 사람인데, 지금은 자신을 더 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자신을 봤던 사람은 연무의나 연무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기연조가 바로 그랬다.
“.......내가 위험에 빠지면 구해줄 거야?”
순간 툭 튀어나온 것은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질문이었다.
기연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어라?’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연서강은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가 절로 울먹여졌다. 그 질문의 대답이 절로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대답을 할 게 확실한데, 연서강은 애써 의식의 아래로 그 답을 밀어 넣었다. 모른 척 했다.
그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았나. 내가 만약 괴한에게 잡혀 있다면 자네는, 자네는 어쩔 텐가. 그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네.”
-당연히 구하러 가야지.
상대방의 대답은 안타깝게도 연서강이 애써 의식 아래로 쑤셔 넣었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쩡, 하고 연서강은 자신의 마음이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 뿐이다. 당연해. 당연하지. 필사적으로 생각들이 이어진다. 그때와 얼마나 상황이 달라졌는데. 그러니 기연조가 그리 대답하는 것도 당연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는데, 하물며 기연조라고 같을 수가 있나. 같을 수가 없다.
당연해, 당연한데, 당연하고 당연한 일인데!
순간, 연서강의 두 눈에서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데도, 어찌 해서 이리 비참한가.
“안 된다, 연조야.”
연서강의 말에 기연조가 인상을 쓴다.
“자네가 그리 대답해서는.”
아니야. 그리 대답할 만해. 지금의 자신은 기연조의 적이 아닌가.
냉정하게 굴러가는 머릿속과 달리 입술은 바들바들 떨며 멋대로 말을 내뱉는다.
“자네가 그리 대답하면, 나는.”
“연서강.”
툭, 연서강의 말을 자르며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지금 대체 무얼 하는 것이더냐?”
“.......”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나? 위협이나 협박이 아닌?”
자신이 왜 위협이나 협박을 하기 위해 기연조를 녹우당으로 부른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다. 무사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 일이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었다고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결코 기연조를 협박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연서강.”
가만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를 돌연 기연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다. 예전과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기연조가 주저앉은 자신과 시야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강이, 자네.’ 부르는 호칭도 예전과 똑같다.
연서강은 순간 이게 무엇인가 싶었다. 자신을 매도하던 기연조가 갑자기 자신을 예전처럼 부르다니? 무엇인가, 혹시나 기연조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연서강은 그것이 자신의 허튼 소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해 보게. 자네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분명히 자네의 큰 형님이나 부친에게 협박을 당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아니.”
“그럴 리가.”
기연조가 연서강의 손을 붙잡았다. 열에 들뜬 자신과 달리 몹시도 차가운 그 체온에 연서강은 순간 흠칫 놀랐다. 기연조가 연서강의 손을 꽉 잡고 그의 두 눈을 응시한다. ‘말해다오, 강아.’ 부드러이 유혹한다.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다 아는 사실이네. 필시 자네의 큰 형님이나 부친에게 협박을 당한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두려워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 맞지 않나.”
“.......”
“말해 주게. 자네가 한 짓을. 내게만.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어. 자네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착하고 다정하지. 저잣거리 사람들도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아이를 이용하고 죽이다니, 말도 안 되지.”
기연조가 이어 다른 한 손으로 연서강의 볼을 쓸었다. 그저 친우라 하기에는 너무도 친밀한 행동에 연서강은 몸을 떨었다. 볼에 와 닿은 기연조의 손이 차가운 것임에도 너무나 좋았다. 이제까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 한 구석이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동시에 연서강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기연조가 왜 이러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얄궂은 눈치였다. 이럴 때, 그냥 기연조가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준다고 순수하게 좋아하면 좀 어떻단 말인가.
허나 역시 상황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지금의 연서강은.
“.......배신을 하라고?”
울먹이며 연서강은 기연조에게 물었다.
“배신이 아니라네.”
파르르 떨고 있는 그를 기연조가 조용한 목소리로 달랬다.
“자네, 생각을 해보게. 그들이 얼마나 자네를 박해하고 괴롭혔던가. 큰 형님, 그래. 그 큰 형님은 자네의 목도 쉬이 졸랐던 인간이었네. 부친이란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집어넣지를 않나. 그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녹우당으로 도망친 게 아니었나?”
연서강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의 의미를 기연조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아는 연서강은 그런 인간이었으니.
“게다가 이런 무서운 일에까지 자네를 끼워놓다니. 귀비마마를 해치려고 하다니, 그게 얼마나 무섭고 또 불민한 일인가. 황상께서 국저를 바꾸려 결심을 하신들 그게 또 어떻단 말인가. 황상은 이 나라의 주인일세. 허니 암만 서글픈 마음이 들어도 황상의 뜻을 따라야 마땅하거늘. 어찌 귀비마마를 해칠 생각을 한단 말인가. 황후는 정녕 요물이로군.”
“.......”
기연조는 연서강의 턱밑에 매달린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강이, 자네.’ 그렇게 기연조가 이어 입을 열었을 때, 연서강이 돌연 말했다.
“그러하면 자네는?”
“.......나?”
“내가 자네의 말을 듣고 연씨 문중을 배반한다면, 자네는 어쩔 셈인가?”
갑작스런 질문에 기연조는 순간 당황했다.
“나는.”
연서강이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의진 형님이나, 서령이나, 의향 누님. 모씨 아줌마는 물론이고, 무진 형님과 안계영 형수님까지 모두 죽일 작정이 아닌가.”
“.......”
“자네의 말이 이상하네. 황후마마께서는 황상의 정실이시네. 정실 소생의 황자께서 국저가 되는 것이 이 나라의 법률이 아니던가. 국전(國典)에도 그리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을, 황상께서 여인에 눈이 멀어 총기를 잃으신 탓에 어기려 하신다면 그 신하된 자로서 응당 옳은 말로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기연조가 답이 없었다.
“황후마마를 음해하고, 황후마마를 옥죄이고, 자네야말로 내 가족들을 없애려고 하면서, 죄 없는 가족들까지 모두 죽이려고 하면서, 나보고는 죄 없는 그 아이를 죽였다고 비난을 하는 겐가? 정녕?”
“.......”
“자네야말로 내가 아는 그 기연조가 맞는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기연조의 손을 연서강이 바꿔 자신이 쥐었다. 기연조의 얼굴에 미미한 찡그림이 생겼다.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연서강은 울면서 입을 열었다.
“항상 올바르고, 곧고, 신의가 두터운 그 기연조가 맞는가?”
“.......”
“대답해주게, 제발!”
알 수 없다. 지금 혼란에 빠진 자신에게 부드러운 말로 가족들을 배신하라고 권하는 기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을 구하러 왔던 그 기연조가 맞는가? 그 전에 이미 기연조는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아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인가. 그 겨울날의 기연조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기연조나, 다 같은 기연조가 아닌가!
같다, 같은 사람이었다.
연서강은 절박하게 소리쳤다.
“대답해주게!”
“.......”
자신이 불러서 온 게 아니었다. 기연조도 자신이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던 것이다. 기연조가 오늘 자신의 부름에 응한 이유를 연서강은 확실히 알았다. 혹여 자신이 연씨 문중을 배신할까, 그것을 기대하며 온 것이었다. 흔들리고 있다면 더더욱 그 마음을 흔들어 자신에게 협력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바라고 기연조는 오늘 여기에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차갑게 대해 자신을 절망에 빠트리고, 후에 다정하게 대해 자신의 혼을 빼놓는 것이다. 안다, 알아. 기연조가 맞다. 기연조가 아니라면 이리 자신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연조의 부드러운 미소와 상냥한 말에 얼마나 약한지. 기연조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일인 것이다.
“나는.”
연서강은 기연조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연서강이 자신의 손을 놓자 기연조가 재빨리 제 손을 휙 빼낸다. 차가워도 사람의 체온이라, 사라진 빈자리에는 서늘한 허전함만이 남았다. 쓸쓸하고 고독하여 연서강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지금도 자네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일까.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 짚었기에 죽기 전의 가을과 되돌아온 가을이 이리도 달라진 것인가. 자신을 구하러 온 기연조는 그때 분명 진심이었다. 헌데 어디서부터?
“.......자네, 나를 흠모하지 않았었나?”
“!”
일순 연서강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기연조를 보았다. 자신을 보는 기연조의 얼굴이 굳어있다. ‘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기연조가 갑자기 생긋 웃는다.
“강이, 자네....... 나를 연모하고 있지 않았나.”
어딘지 비릿한 구석이 있는 미소였다. 갑자기 소름이 꽉 끼쳐 연서강은 상체를 뒤로 물렀다. 그러나 기연조가 그의 팔을 잡는 게 먼저였다. 화들짝 놀라 연서강은 얼어붙은 시선으로 기연조를 응시했다. ‘연조?’ 애써 태연하게 그를 불렀지만 기연조는 대답조차 없었다. 대신 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내가 자네를 사랑해준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어떻.......”
경악한 머릿속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사랑해 준다면, 내게 그 ‘일’에 대해 알려주겠는가?”
연서강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앞에 있는 게 기연조가 맞는가? 기연조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기연조가, 기연조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기연조가, 자신에게.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뒤늦게 무슨 말인지 깨달은 머리가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지? 큰 형님도 알아차린 사실이니 본인이 모를 리야 있겠는가. 하지만 죽기 전에는 그런 낌새라곤 하나도 없었다. 해서 누르고 누른 마음.......
그 마음을 기연조가 이용하려고 있다?
갑자기 새하얘진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비키게.”
다만 멈췄던 눈물이 다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 비켜주게.”
이런 사람을 위해서, ‘나’는 대체 무슨 짓까지 했던 것인가.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일교차가 큰 가을 날씨로 인해 일조량이 좋은 낮과 달리 밤은 서리가 내릴까말까 할 정도로 쌀쌀했다. 방에 있다가 걸친 것도 없이 막 나왔던 터라, 연서강의 옷은 얇은 실내복이었다. 옷깃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연서강은 그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불씨 하나 없는 녹우당에 새까만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허나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고 해도 연서강은 저쪽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발자국 소리와 체격으로 저절로 알게 되었다.
연서강이 피식 웃었다.
“아, 그렇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제가 녹우당으로 기연조를 불렀단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해서 이놈이 드디어 기연조와 작당하고 배신하는구나, 싶어서 오신 겁니까.”
“.......”
상대편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연서강의 웃음이 더더욱 짙어졌다.
“대화를 듣기는 들었습니까. 어디서부터 들었습니까? 전부 들었습니까, 아니면.”
“.......”
계속 아무 대답도 없는 상대방을 향해 연서강은 도연 얼굴을 구기고 소리쳤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배신을 하겠거니, 하고 오셨으면 응당 기연조를 집밖으로 내쫓으셔야했지 않습니까. 왜 그냥 두셨습니까. 대화가 퍽 듣기 좋으셨나요? 제가 기연조와 무어라 흉계를 짤까 두렵지는 않으셨습니까! 기연조를 쫓아내셨어야죠! 제가 변방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잘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연서강이 제 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멱살을 잡으시면서! 기연조를 잘만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연서강.”
상대방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하하, 연서강이 그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허탈한 미소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한참을 웃던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에 젖은 말을 토했다.
“형님께서 기연조를 쫓아내셨으면, 그 말들을 더 듣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상대방이 몸을 움직였다.
“서강아.”
땅바닥에 엎드린 채 연서강은 오열했다. 그런 연서강을 연무강이 두 손으로 잡았다. 연무강이 제 몸을 잡자 연서강이 ‘싫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허나 연무강은 연서강의 몸을 놓지 않았다. 그 역시 땅바닥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연서강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귀에 연서강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배신이요? 이제 들으셨으니까 아셨지요. 기연조와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형님.”
연서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너무도 재미있어서 죽겠다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게 무엇인가 싶은 허무하고 허탈한 웃음이었다.
“허나 당신 때문에 배신을 안 한 게 아닙니다. 절대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
“나는.......!”
미친 듯이 웃고 울부짖었던 것도 잠시였다. 순간 온 몸에서 훅 힘이 빠져나갔다. 이렇게 소리쳐서 무얼 하겠는가 싶었다. 허망했다.
자신이 실제로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연무강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라면 그도 당황할까. ‘일’이 끝날 무렵에 자신에게 그런 선물을 안겨줄 셈이었는데, 실패였다.
선물을 받기는커녕 고꾸라져 절명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었다.
“.......당신이.”
“.......”
나직한 목소리로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이다.
연서강을 꽉 안은 채, 연무가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해서 연서강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들고 있는 팔이 처음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변방에서 한 번 빠졌던 구덩이 속으로 다시 쑥 빠져들 것만 같은 자신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연서강은 그가 자신의 귓가에 ‘울지 마렴, 울지 마렴.’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연서강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 *
성헌당에서 연무의는 보기 드물게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담배가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알기에 항시 몸을 단련하는 무관들이 멀리하는 게 또 담배였다. 연무의도 젊었을 때 잠깐 피웠었지 그 이후로 금연하여 여태까지 입에 문 적이 없었던 곰방대였다.
“.......”
어찌해야 할까.
연무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고민했다.
무강이, 그 아이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변한 듯한데, 그것이 연서강 때문인 것 같아 연무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되지, 아니 되지, 무강아.
“그렇게 되면 서강이를 처리하지 못하지 않으냐.”
연무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연우비, 그 년은 끝까지 말썽이로군.”
자신과 친형제 간도 아니었으면서 이 집안에 끈질기게 붙어 집안을 위협한다. 고약한 년이었다. 연무의는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