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거승주는 올해로 마흔 셋이 되는 사내였다. 태어난 곳은 하제국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가후(價厚)였다. 가치가 있는 땅이란 뜻의 가후는 그 뜻과는 달리 사람이 살기에 몹시도 척박한 곳이었다.
가후란 이름이 붙여질 당시 그 지방은 이름에 걸맞게 기름진 토양과 깨끗한 물과 공기를 지니고 있었다. 씨를 아무렇게나 뿌려도 풍년이 들었고 산과 들에는 과일 나무와 짐승들이 많아 한 해 내내 땅바닥에 떨어진 것만 주워서 먹고 살아도 배가 불렀던 곳이었다. 허나 그랬던 곳도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가후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을 끼고 있었는데, 바로 그 강이 상류에서 비옥한 흙들을 싣고 내려와 가후를 기름지게 만드는 큰 공신이었다. 강이 싣고 내려온 옥토는 가후와 만나 그 지방에 차곡차곡 쌓였고, 그 흙에서는 어김없이 줄기가 튼튼하고 열매가 튼실한 작물이 자라났다.
그러나 50여 년 전, 수도에서 행한 치수공사로 가후로 흘러드는 강의 물줄기가 마르게 되었다. 당시 가후를 다스리고 있던 관리는 몹시 탐욕스런 자였다. 그는 치수 공사로 강의 물줄기가 마를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공사를 주관하는 단체에서 주는 뇌물을 받고 공사를 승인해주었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가후 지방의 사람들이 이제까지 너무 풍족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고 온종일 기후가 따뜻했던 가후는 아무리 관리들이 무능하고 돈만 밝혀도 그 지방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관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관리가 무슨 짓ㄴ을 하던 이제까지와 변함이 없겠거니, 생각했던 것이 비극을 불러왔다.
물줄기가 마른 강에서는 더 이상 비옥한 흙이 흘러 들어오지 않았고, 심지어 치수 공사를 하던 중 우기(雨期)가 닥쳐 큰 홍수까지 일어났다. 그나마 있던 농작물들도 모두 빗물에 휩쓸려 내려간 뒤에 가후를 덮친 것은 각종 전염병이었다. 그 해 가을은 당연히 흉작이었고 난생 처음 흉작을 겪었던 가후 지방의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다.
겨우 나라에서 내려주는 구휼 작물로 그 해를 무사히 넘겼지만, 그때까지도 가후의 사람들은 앞일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치수 공사 중에 홍수야 두어 번 정도는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공사가 끝나면 다시 예전의 가후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가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비옥한 흙들은 모조리 바다로 휩쓸려 내려가 버렸고 새로운 옥토들은 더 이상 강을 타고 흘러오지 않았다. 물줄기가 마르니 강의 오염도 심해졌다. 더 이상 가후에서는 깨끗한 물을 볼 수 없었고 들판의 곡식들과 나무들은 말라만 갔다. 동물들도 살기 좋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렸다.
그제야 가후의 사람들은 탐관오리들을 원망했지만, 이미 그때 가후를 담당했던 관리들은 중앙으로 다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남아있는 것은 이제 막 가후로 발령 받은 새내기 관리와 황폐화 된 토지. 그게 전부였다.
가후는 점점 더 못 할게 되었으며 사람들도 점차 다른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한 때는 커다란 도시 못지않았던 가후의 경제 사정도 당연히 점점 나빠져만 갔다. 그저 몹쓸 땅이 되어 그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시골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중앙에서도 더 이상 가후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가후는 낙후되어만 갔다.
낙후된 가후 출신의 사람들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전에는 가후 출신이라는 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높은 점수를 쳐주는 요소였었지만, 지금은 그저 무시당하는 요소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나 평민들이 시험을 쳐서 관리가 되면 무시하는 정도가 더 심했다.
가후 출신인 거승주는 하제국의 수도인 백의주에서 시험을 쳐 정식 무관이 된 이후, 다른 지역과의 차별을 심하게 느꼈다.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지방 군사지휘관인 도위에 임명되었지만 지위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지방에서 도위로 지내면서 거승주는 다른 지역 출신의 무관들이 심심찮게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의 상관 또한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느꼈었다.
보통 도위로 지낸 지 5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담당구역을 재배치 받았었다. 처음에 배치 받은 곳보다 더 큰 도시로 가 도위로써의 경험을 쌓고, 마침내 도위에서 다른 직위로 진급이 되는 것이었다. 허나 같은 지역에서 7년이나 지내도 거승주는 다른 지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다른 새파랗게 젊은 놈들은 임관된 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상관의 추천을 받고 더 좋은 곳으로 가 버렸는데도.
거승주는 도위로 임관된 지 8년째가 되는 해에, 너무도 화가 나서 자신의 상관에서 따져 물었다. 어찌 하여 자신만이 이 시골에서 8년이나 썩어야 했냐고. 그리 따져 묻는 거승주에게 그의 상관이 귀찮다는 듯 이리 대꾸했다.
-가후 출신인 주제에 이 정도면 되었지, 더 이상 뭘 출세할 셈인가. 시험 점수가 좀 좋았다고 오만하게 굴지 말게.
부당하다. 너무 부당했다. 고작 태어난 지역 때문에 재능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출셋길이 가로막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자랐던 그였기 때문에 그의 목표는 죽을 때까지 부유하게, 주변을 호령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었다. 신분이 평면이었기 때문에 공을 세워 승진을 하지 못하면 제 목표를 이루기 힘들었다. 거승주는 자신의 상관이 자신을 추천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출세를 할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 생각의 결론이, 바로 출전(出戰)이었다.
마침내 그가 한 곳에서 도위로 지낸 지 10년째가 되었을 때 진정애 일어났다. 하제국의 동맹국 중 하나가 타국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동맹국은 하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제국은 전국에 병사를 모집한다는 공문을 내렸다. 거승주는 거기에 지원했다.
전쟁 없이 평화로운 하제국이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무관들 중 일부는 현재에 안주하며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심히 싫어했다. 거승주의 상관도 그런 부류의 무관이었다. ‘별 미친 놈을 다 봤군.’, 상관은 거승주의 결정에 코웃음을 치며 거승주의 지원서를 조정에 제출했다.
전쟁에 나간 거승주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열심히 한 보람은 과연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과 타국과의 전쟁은 마침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나고 거승주는 하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제국으로 돌아갈 때의 거승주는 상당히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그도 당연했다. 외국은 거승주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는 곳이었고, 하제국의 병사인 거승주의 도움을 무척 고맙게 여겼었다. 때문에 거승주가 활동하기에 아무 제약도 없었다. 제약이 있기는커녕 고마워하며 그를 적극 지원하고 따라주었다.
그 전쟁에서 거승주는 한 마리의 비호처럼 전장을 누비고 다녔고 그가 승리로 이끈 전쟁도 몇이나 되었다. 동맹국의 수장은 그런 거승주에게 상을 내리며 그를 다른 어떤 장수보다 우대해주었다. 그랬기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승주는 무척 우쭐해져 있었다.
이제 드디어 승진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이 가후 출신이라고 깔보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귀국한 뒤, 황태후의 칭찬을 아낌없이 들으며 무술교관에 임명되었다. 백의궁의 모든 무관들의 선생이 된 것이다. 무관 중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는데 그런 그들보다 잣니이 상관이라는 사실이 거승주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 행복은 안타깝지만, 삼 개월도 채 가지 않았다.
귀족 출신은 물론이고 그 귀족들의 편을 드는 일반 병사들까지, 또 거승주가 가후 출신이라는 것을 안 다른 병사들까지 .......그를 깔보고 무시했다.
그가 시키는 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를 조롱했으며 남들의 눈을 피해 그를 괴롭히기까지 했었다. 그를 괴롭히고 깔보는 무관들의 나이는 비단 그와 비슷한 또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수도인 백의주에서 나서 자란 젊은 놈부터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백의궁의 병사가 된 늙은 노인까지, 무척 다양했다.
따돌림과 괴롭힘 앞에서는 전쟁 영웅이란 빛나는 호칭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상관에게로 가 ‘이러이러하니 담당 부대를 바꿔주시오.’라고 부탁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처음 몇 번은 그 말을 듣고 담당 부대를 바꿔주었던 상관도, 어떤 부대에 가도 결국 적응하지 못했던 거승주를 한심하게 여기며 ‘결국 네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거승주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거승주는 절망했다. 너무 괴롭고 서글퍼 절규했다. 그런 거승주를 보며 어린 병사들은 히히 웃으며 ‘사람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서 무슨 놈의 교관이냐.’하고 조롱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거승주의 세상은 엉망진창이었다.
태위인 연무의가 그런 그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아들인 위사의 밑으로 밀어 넣어주지 않았더라면, 거승주는 자살이라도 했을지도 몰랐다. 연무강은 거승주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연무강의 동생이기는 하지만 거승주는 연서강에 대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지난번에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거승주는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연서강에게 손을 뻗쳤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괜찮습니다.”
거승주도 연서강이란 연무강의 다섯 번째 동생이 녹우당에 은거하면서 그저 하는 일 없이 집안 재산만 탕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누구에게 전해 듣지 않아도 저잣거리를 거닐다보면 두어 사람들이 ‘누구네 집 처녀가 누구 댁으로 시집갔다면서?’ 정도로 말하는 것이 바로 녹우당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녹우당 도련님이 어디로 행차하셨더라, 앵두를 그 분께 얻어먹었더라,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요새 벼슬자리를 하나 꿰차시더니 밖으로 나들이도 잘 나오시지 않더라. 그런 대화의 끝은 항상 이거였다.
-그래도 참으로 잘 되었어.
명문가 자제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한심한 구석이 없잖아 있는 자였기 때문에, 저잣거리 사람들은 그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값비싼 옷감을 온 몸에 두른 채, 거들먹거리면서 옥으로 만든 담뱃대를 물고 다니는 여느 귀족 자제들에 비한다면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늘 사람들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말을 걸면 어색해 하며 대답했고, 들고 있는 물건이나 음식들도 곧잘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연씨 문중이란 어마어마한 가문의 도련님이긴 하지만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 같았다.
-참으로 잘 되었어. 잘 되었지. 집의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게 되셨다니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남의 일, 그것도 평민들이 결코 걱정해주지 않아도 될 명문가 자제의 일이었다. 명문가의 도련님이니 집안의 망하지만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아갈 놈인 것이다.
그런 이에게 저잣거리 사람들이 괜한 걱정을 하고 또 분수 넘치게 안심하는 것이 거승주는 참으로 이해가 안 되었다.
연서강이란 자를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실제로 만나보고 난 뒤에야 거승주는 어째서 저잣거리 사람들이 특별히 그의 앞일에 대해 오지랖 넓게 걱정해주는 것인지 깨달았다.
참 안 되어 보이는 이.
그게 연서강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마르고 왜소한 몸도 그렇거니와 강한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두 눈도 그렇다. 거기에 이제껏 하는 일 없이 별당에서 소요하고 살아왔다는 배경 설명까지 더해져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하찮게까지 보였다. 그리고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위사님이 그리 자신들을 괴롭혔나, 싶어 기가 막히기까지 했었다.
그 후에는 더 했다. 상담할 것이 있다고 와 놓고 자꾸만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일부러 다른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더니 고민을 털어놓기는커녕 갑자기 허둥지둥 도망을 가버리고만 것이었다. 거승주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 날 저녁, 연무강이 거승주를 불러 이 일에 대해 이모조모 물어보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망을 쳐 버렸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자신의 보고를 듣고 생각에 빠진 연무강을 훔쳐보며 거승주는 이러한 생각을 했었다.
얼마나 걱정이 되면 뭇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연무강이 저렇게까지 할까.
오죽했으면, 했다.
명문 중의 명문인 연씨 문중 출신인 연무강은 말 그대로 일생을 승승장구해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과에 장두(狀頭: 장원)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것도 모자라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공도 여럿 세웠으며, 해마다 열리는 무술 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딱히 부친인 연무의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사람의 눈에 연서강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겠는가.
더욱이 그 때문에 저잣거리 사람들이 함부로 연씨 문중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다니기까지 하니 연무강이 그를 특별히 신경 쓰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변방에서 공을 세워 비서랑에 임해졌다고 하지만 거승주가 보기에 연서강은 여전히 연씨 문중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형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저도 모르게.”
그리 대답하는 연서강은 여전히 시선을 땅에 둔 채였다. 귀족 자제들 치고 평민 출신인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자신감 없이 눈도 못 마주치는 자는 거승주도 처음이었다.
그런 이로 보였다, 연서강은. 시험 삼아 주먹을 쥐고 때리는 시늉을 하면 깜짝 놀라 동리 밖까지 도망갈 소심한 자.
정말로 그 집 형제들과 닮은 구석이 없는 자였다.
“위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까?”
거승주의 질문에 연서강이 한참을 쩔쩔매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 제가, 할 일없이 노닐 때, 큰 형님께 이런저런 훈계를 많이 들었었습니다. 해서, 큰 형님을 대하기가 좀 많이 힘듭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형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너무나도 놀라서.”
“아, 위사님은 사실 저도 많이 대하기 힘듭니다.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도망쳤을 당시, 연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 도망갔다는 말은 진심인 듯 했다. .......정말로 한심했다.
“교관께서도 대하기 힘드십니까?”
거승주의 말에 연서강이 그제야 안심한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 물음에 거승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연무강을 대하기 힘들다는 것에 반대할 교관은 이 백의궁 안에 없을 것이다. 연무강은 그들에게 몹시도 무서운 상관이었다.
“위사님의 가장 무서운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저런 연유로 하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해도, 왜 그런 연유로 하지 못했느냐고 혼을 내시죠. 더더욱 무서운 것은, 같은 상황일 때 다른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은 위사님은 능히 다 해내신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들 같은 사람들이 대체 왜 못해내는지 이해하지 못하시죠, 자신은 할 수 있으니.”
거승주의 말에 연서강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그러시지요, 정말.’ 동감을 표하는 말에 거승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정말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내라고 하셨을 땐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분께서는 그 일정이 그리 빡빡하다고 생각지 못하셨겠지요.”
지난여름의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거승주는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연무진이 그때 나서주어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연무진도 결국 연무강에게 혼이 나고 말았지만.
“.......헌데,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십니까.”
한탄은 거기에서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 그리 묻자 이제까지 조용히 거승주의 말을 듣고 있던 연서강이 화들짝 놀랐다.
참으로 심약한 사람이로고. 저런데 어찌 그 연무강과 한 집에서 살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철이 들고 나서는 본채를 나와 내내 별당에서 살았다고 하더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상담 드리고 싶다고.......”
“아, 그러셨지요.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거승주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점심때이긴 하나 금륜관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어떠신지요? 아직 사람이 많은데, 말슴하실 수 있겠습니까. 보는 눈이 많아 이야기를 차마 못하시겠다면, 또 전에 갔던 그 창고 근처로 가도록 할까요?”
말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비웃는 말을 섞고 말았다. 헌데도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연서강이 웃으며 ‘감사합니다.’하고 말한다. 아무래도 주변에 사람이 많아 신경이 쓰였는데 거승주가 그리 먼저 말해주어 살았다는 투였다. 거승주는 그만 소리 내어 웃을 뻔 했다.
이런 게, 그 연무강의 동생이라니.
신이 사람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는 공평하게 내어놓는다더니 과연 그랬다. 못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연무강에게 이런 한심한 아우가 있을 줄이야. 거승주는 괜히 연서강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자, 그럼 가시죠.”
그렇다. 거승주에게 있어 연무강은 은인이었다. 그러나.
.......은인이라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은인이란 말은 은혜를 베푼 상대방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자각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단어였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해하고 그런 감사를 받고 상대방이 쑥스러워 하며 반응을 해야지, 은혜는 은혜로 남는 것이다.
연무강의 관할로 들어오게 된 이후부터 거승주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연무강은 교관에게 반항하는 병사들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사람이었기에, 조금이라도 거승주를 깔보는 무관들은 모조리 벌을 받았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거승주와 그를 깔본 무관을 대결시켰다. 물론 모두 거승주의 승리로 대결은 끝이 났다. 적어도 거승주를 이길 수 있게 된 다음에, 그런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연무강은 대결에서 패배한 자를 호되게 혼을 냈다.
그 후로 거승주의 주변 사람들은 점차로 변해 갔다.
활쏘기나 승마에 대해 조심스레 조언을 구하는 이가 늘어났고, 일개 병사에 불과했던 평민들은 거승주를 존경했다. 귀족들도 거승주를 교관으로 억지로 인정하고, 그가 명령하는 대로 연무강의 눈치를 보며 따랐다.
거승주는 연무강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곳으로 자신을 배정해준 연무의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문득 연무강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자는 생각을 했다. 무과에 합격한 이후, 연무강은 최초로 거승주를 아무 차별 없이 대한 이였었다.
거승주는 연무강을 찾아가 정말로 고마웠다고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랬었다.
그런 거승주를 연무강은 경멸과 멸시를 담은 눈으로 내려다보았었다.
-감사?
차가운 목소리에는 아무런 인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거승주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이 엄청난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님의 명령이었을 뿐이다.
거승주를 보는 연무강의 얼굴에 순간 냉소가 어리었다.
-자네는 남의 도움이 없으면 그 정도의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나?
거승주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연무강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게 정녕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나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이나 고쳐. 남한테 폐를 끼치지 말고.
어쩜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 순간 거승주의 마음에서 고개를 든 것은 무술 교관으로 있던 수 년 간의 생활로 짓밟혔던 자존심이었다. 외국의 전투에서 전장을 누비며 활을 쏘았던 자신의 용맹한 모습이었다. 동맹국의 수장조차도 자신에게 고맙다 말하며 손을 잡아 주었던 그 모습이었다. 하제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황태후가 자신을 보며 ‘정말로 훌륭한 장수로다!’ 손뼉을 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 모습이었다.
활과 승마에 대해서는 거승주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출신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10년 동안 도위로 있을 적에도 활과 승마로는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그 자부심이 도위로서 머물러야 했던 10년을 견디게 해주었으며,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외국으로 출전을 나가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나약하고 의존적인 사람이 아니다.
남에게 폐나 끼치는 사람도 아니다.
무참하게 자신을 짓밟는 연무강에게 기승주는 대결을 신청했다. 종목은 활과 승마였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거승주는 참패했다.
상대는 괴물이었다. 연무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길러낸 것이 분명했다. 땅바닥에 누운 채 거승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무강을 보았다. 사람이 아닌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연무강은 거승주를 보았고, 이내 ‘시간 낭비했군.’이란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거승주는 울었다.
연무강은 결코 은인이 아니었따.
그는 요괴였다. 평온한 마음속을 순식간에 암귀가 요동치는 지옥도로 변화시키는 요괴였다. 자신이 못 해내는 것이 없으니 어째서 다른 이들은 그렇게 못하느냐고.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이였다. 무참하게 꺾인 자존심과 자부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상대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자신보다 10년이나 어린 위사였다. 나라에서 첫째가는 명문가 출신에 태위인 부친을 두고 있었다. 승승장구한 인생이다. 자신에 비해, 또, 그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 잡지 못하는 비범한 재능 역시 가지고 있었다.
거승주는 웃었다.
그는 연무강에게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당신도 못 하는 것이 있었냐고 웃는 얼굴로 그를 조롱하고 싶었다.
그에게 기연조가 접근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는 거승주에게 접근해 ‘당신이 황태후 마마께옵서 그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거승주란 분이십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참으로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라 황태후마마께 들었었는데.......’그가 하는 말들은 하나 같이 다정하고 상냥했으며, 또 거승주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연무강의 ‘적’이었다.
* *
“거승주에게 말을 흘렸습니다.”
연서강의 말에 연무가은 힐끗 그 쪽을 보았다.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 무심하게 대답하는 연무강을 향해 연서강이 살짝 인상을 썼다. 여기서 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연무강은 정말로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말을 흘렸지? 그 자의 반응은 어떠했느냐. 그 자가 혹여 눈치 채지는 않았겠지?’라고 더 물어보았을 것이다.
“더, 궁금한 점이 없으십니까?”
“있지, 언제 네가 집무실을 나갈까.......”
연무강이 들고 있던 서류를 서궤 위로 던졌다.
“그게 궁금하다.”
연서강이 들어오자 또 부관이 말없이 자리를 비워, 집무실 안에는 연서강과 연무강 둘뿐이었다. 이틀 후면 구월 구일이 된다. 때문에 위사인 연무강의 할 일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쌓여 있었다. 한 시도 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무강은 무언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연서강을 보며 웃었다.
“아니면, 여기서 또 너를 안아주랴?”
연서강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아니요, 싫습니다.”
확고하게 대답하는 연서강을 향해 연무강은 다시 또 웃음을 흘렀다. 그냥 해본 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였다. 연무강이 다른 서류를 손에 잡자 연서강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연무강을 경계하면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한 일이니 어련히 잘 하지 않았을까.”
연무강이 문득 중얼거리는 말이 어찌된 일인지 자신에게 호의적이다. 연서강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에 연무강이 손가락으로 서궤 위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연서강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라 연서강은 연무강이 대체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게 맡긴 일이니 그리 생각해야하지 않겠느냐.”
지나가듯 연무강이 중얼거린다.
그가 다시 시선을 내려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거기 무엇이 적혀 있는지 그의 얼굴이 살짝 구겨진다.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완전히 일에 빠져든 연무강 때문에 연서강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찾아 왔을까, 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일을 끝냈으니 응당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온 것이었는데 이런 취급을 당할 줄은 몰랐다.
“........혹시 거승주란 자가 형님을 배신한 이유를 짐작이라도 하십니까.”
“배신을 하고 싶었으니, 배신을 하지 않았겠느냐. 이유가 중한 것이 아니다, 연서강. 배신을 했다는 행동 자체가 중한 것이지.”
“허나 거승주란 자에게 형님은 은인이지 않습니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러했다. ‘은혜를 베푼 이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연서강이 중얼거렸다. ‘형님께서는 그런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이어 묻는 말에 연무강이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은혜를 입은 이는 배신하지 말란 말이 책에라도 써져 있더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허면 너는 결코 기연조를 배신하지 않겠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서강은 말문이 막혔다. 연무강이 재차 따져 물었다.
“안 그러냐? 온 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우울하게 지낼 적, 기연조만 기꺼이 네 친구가 되어 줬으니 그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내 말이 틀렸느냐?”
“그건.......”
자신이 기연조를 배신한다?
그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지라 연서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기연조가 가족 모두를 죽이도록 놔 둘 수는 없었고, 가족들이 기연조를 죽이는 것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현재 그런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그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기연조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연서강의 대답을 무어라 생각했는지 연무강이 픽 웃었다. ‘그럴 테지.’ 그는 아마도 연서강이 기연조를 배신할 리가 없다는 말로 받아들인 듯 했다. 그 생각을 읽었지만 연서강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탓이었다.
.......정말로 이 ‘일’이 끝나면 자신과 기연조의 관계는 어찌 되는가.
“.......”
파국이 나도 좋으니, 기연조가 자신을 경멸하지만 않는다면 좋으련만.
연서강은 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그럼 나가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연무강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면서 연서강은 어째서인지 연무강의 기분이 오늘따라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 *
백의궁에서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거승주는 혜문 근처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있는 생각들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느려져만 갔다. 그 생각들은 모두 한 곳에 뒤엉켜 거승주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기회다, 기회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태의령을 살살 꼬여 내어 연씨 문중이 뒤가 구린 일을 꾸미고 있다 달은 이후, 그는 계속해서 연무강을 염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연무강은 자신이 꾸미고 있는 일조차 철벽같은 백의궁의 보안처럼 꽁꽁 감추어 그 꼬리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의 곁으로 접근해 말도 붙여 보고 술자리도 가져 보았지만 전부 실패했다. 연무강이 자신을 신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업무’상으로 신뢰하는 것일 뿐, 이런저런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털어놓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후 거승주는 연무강과의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한 번 찾아보았다. 자신이 그저 신뢰하는 부하 중 하나에 불과 하다면 그와 사사롭게 친밀한 자를 꼬여내어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면 되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사람을 찾아보려 해도 연무강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친분을 지닌 자는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상관 내지는 부하였으며, ‘필요’에 의해 만나고 ‘필요’하지 않으면 헤어지는 그런 관계들이었다. 심지어 흔한 친구나 정인조차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을 수가 있나.
연무강에 대해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절망감만 들었다. 새어나올 곳은 전혀 없는 철통 방비의 사내였다, 그는. 그렇게 그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는가 싶었다.
허나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암만 철통방비의 사내라고 해도 빈틈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자신을 찾아왔었던 연서강을 떠올리며 거승주는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교관님은 큰 형님을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지요.
-그렇습니다.
거승주의 말에 연서강이 안심이 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이런 처지이다 보니 제대로 된 친구는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지 못 하는지라.’ 그가 이어서 하는 말에 거승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지 거승주는 당시 가늠조차 되지 않았었다.
-무슨 이야기이시기에.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연서강이 말을 이었다.
-교관님께서 제 큰 형님을 좋게 생각해주시고, 직업상 형님을 자주 만나 뵈는 분이시니 저보다 훨씬 이런 것들에 잘 아시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서강이 망설여지는지 계속해서 머뭇거린다. 답답해져서 거승주는 ‘해서, 무슨 말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위사님은 제 은인입니다. 위사님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리 말하자 연서강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허면, 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각오을 굳힌 듯 연서강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말했다.
-형님께서 괴이한 일을 꾸미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연서강의 말은 거승주가 그렇게도 기다리고, 찾아 헤매었던 ‘정보’였다.
이럴 수가.
그의 말을 들으며 거승주는 절로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참고 참았다.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 알려지면 문중 전체가 위험해지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연서강을 보며 거승주는 ‘그에게도 있었구나, 의외의 빈틈이!’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멍청하고 한심한 남동생이 바로 그 빈틈이었다.
명문가에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 한심하게 녹우당으로 도망쳐 소요하던 그 남동생은 마침내 큰일을 치고 말았다.
-그거 이상하군요.
마침내 수상한 자가 집안을 드나든다는 말까지 털어놓는 연서강을 향해 거승주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승주의 말에 연서강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이상합니까.......’ 말끝을 흐리며 그는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허나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떨리는 목소리로 연서강이 중얼거린다.
여기에서 거승주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거승주는 연서강의 팔을 붙잡고 최대한 믿음직하게 보이게끔 말을 했다.
-제게 말해보십시오. 제가 들어보고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위사님께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위사님의 신뢰를 받고 있으니, 아우님의 말보다는 제 말에 더 귀를 기울여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요, 제 말은 듣지 않으실 테니.
흐려진 얼굴로 연서강이 중얼거린다. ‘허면, 교관님.’ 연서강이 고개를 들고 거승주를 보았다.
-제가 집에서 아버님과 큰 형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을 모두 들려드리겠습니다.
거승주는 속으로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 모두 털어놓아라.
-허니 제발 큰 형님께서 무서운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교관님께서 잘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큰 형님이 너무 무서워서.......
부르르 몸을 떠는 연서강을 보며 거승주는 ‘아무렴요, 꼭 그러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자신이 들어도 참으로 듬직한 대답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말에 연서강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고맙습니다.’ 그의 조그마한 인사에 거승주는 그제야 그렇게 짓고 싶었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눈앞의 사람은 멍청이였다.
제 집안을 망하게 할지도 모르는 바보였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참 안 되었다고 동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거승주가 봐도 연서강은 참으로 딱했다 연씨 문중이라는 거대한 방패막이가 사라지고 나면 이 못난 아우님은 대체 무얼 하며 살아갈지 막막하기도 할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기는 하는 것인가?
-그럼, 아우님, 말씀해 보십시오.
신은 참으로 공평하였다.
그 잘난 놈에게 이리 못난 동생을 붙여주다니. 이 못난 동생 덕분에 연무강은 죽을 것이다. 연무강이 연서강을 원망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연서강이 겨우 말을 꺼냈다.......
".......천하의 팔푼이 같으니라고.“
그때를 생각하면 거승주는 아직도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혜문을 바삐 빠져나오며 거승주는 웃고 또 웃었다.
높은 관직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의 그는 오직 연무강에 의해 잃어버린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만을 소망하고 있었다.
거승주는 세책점으로 바삐 발을 옮겼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 써놓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 *
가을이 되었는데도 성헌당은 여전히 은은한 백목단 향과 지필묵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연무의의 앞에 있는 홑탁자 위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를 손톱으로 두드리며 연무의가 물었다.
“.......신후를 마차에 넣을 자로 그 자를 하겠다고?”
그에 연무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황후마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 ‘돈’에 꾀여 배신할 걱정이 없는 자, 경비병들이 보게 되더라도 수상하다고 여기지 못할 자, 그 모든 조건에 그 ‘자’가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아버님.”
그러나 연무강의 대답을 듣고도 연무의는 흔쾌히 승낙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무강의 말을 들으며 하나하나 짚어보면 그 만큼 합당한 자도 또 없었다.
허나 불안했다. 그 ‘자’ 자체가 너무도 많은 불안함을 품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연무의가 신음처럼 ‘그러나.’하고 말을 내뱉는다. 연무강이 고개를 들어 연무의를 보았다.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님답지 않으십니다.”
연무강의 말에 연무의가 한 쪽 눈썹을 구겼다.
“답지 않다?”
“그 ‘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한 점을 갖고 있는 자인 것은 맞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은 미소 지었다.
“그만큼 뒤처리가 쉬운 자도 없습니다.”
“.......”
그 말이 맞았다.
“하긴, .......일이 설사 틀어진다 하더라도 그냥 없애버리면 될 자.”
연무의가 제 턱을 쓸며 다시 생각에 빠진다.
성헌당을 밝히는 호롱불이 한 번 흔들렸다. 밖에서 방울벌레가 우는 소리가 영롱하게 들려왔다. 여전히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지만 요즈음 밤은 제법 스산해진 편이었다. 구월에 들어와서부터 일교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쪽 지방에 서리가 내리고 나면 이쪽 백의주는 완연히 가을 날씨가 되리라. 마당 안의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끝부터 노란기가 보이고 있었다.
“.......헌데, 무강이 네가 어떻게 그 ‘자’를 생각해냈느냐? 너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자일 텐데. 나는 네가 그냥 돈으로 사람을 살 것이리라 생각했단다.”
“저도 그럴까, 생각했었습니다만....... 돈으로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이 끝난 다음에도 돈으로 좌우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들은 또한 그들만의 패거리가 형성되어 있어 한 명을 잘못 건드리면 그 패거리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주의를 하는 게 좋다 여겨졌습니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라도 수행하는 자들은 길거리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허나 걸인이든, 심부름꾼이든, 건달이든 그들은 그들 특유의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 명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패거리 전체가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패거리가 형성되어 있는 탓에 ‘어디 높으신 분이 어떤 마차에 뭔가를 넣으라고 시켰다.’는 증언을 할 자들이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시켜도 한 푼 한 푼의 돈에 움직이는 힘없고 비열한 놈들이 제 몸을 지킬 방도는 오로지 머릿수라, 그들이 암암리에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하루 종일 내도록 감시하지 않는 이상은.
“그렇기는 하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연무의가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재빨리 연무강은 연무의가 현재 궁금하게 여기는 점에 대해서 대답을 하기로 했다.
“사실은 연서강을 보고 생각을 한 것이긴 합니다.”
“서강이를?”
그 말에 놀란 듯 연무의가 미간을 좁힌다. 연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하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연서강을 보니 그 ‘자’로 해야겠다고, 언뜻 생각이 났었습니다.”
“하긴 그놈이.......”
연무의가 마침내 턱을 쓸던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연무강을 흘깃 쳐다보았다.
“허면 무강아.”
“네, 아버님.”
“그 뒤처리를 잘 부탁하마.”
일이 끝난 후에 잡음이 나지 않도록 잘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죽여도 괜찮다는 허락의 표시이기도 했다. 드문 일도 아니어서 연무강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시원스런 연무강의 대답에 연무의가 그제야 얼굴에서 흐린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연서강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연무강의 대답에 ‘연서강’이란 이름이 나오자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연무의가 묻는다.
“서서원이 한가하여 그런지 요새는 영의전이나 수안궁으로 놀러 다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요새 세책점에 들려 책도 읽는 듯 하더군요. 차를 마시러 다니는 듯도 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개운치 않는 목소리에 연무강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연무의가 ‘없을 리가 있겠느냐.’하고 답을 한다.
“기연조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내게 고하지 않았더냐.”
“네. 그 옆에 저도 있었습니다.”
연무의가 쯧쯧 혀를 찼다. 그 옆에 있어놓고서 어찌 자신이 마음 걸려 하는 일을 모를 수가 있냐는 뜻이었다.
“그런 말을 내게 고했는데, 그 이후로 그 놈이 조용히 있을 리가.”
“.......”
정말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연무강은 연무의를 말끄러미 응시하며 생각했다. 기연조에게 들은 말을 자신에게 알려 주었으니, 어찌 보면 연서강이 연무의의 편을 들어주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연무의는 아직까지도 연서강을 의심하고 있었다.
“.......무언가 수상한 짓을 하면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대답하자 연무의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덧붙여 명령했다.
“녀석이 어디로 가서 무얼 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꼭 반드시 보고 듣고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연무강은 이미 황후의 명을 받잡고 연서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연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다. 연무강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된 듯 연무의가 앞으로 바짝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조금 당겼다.
“이번 ‘일’로 마마께옵서도 마침내 마음을 놓으시겠지.......”
“.......”
과연 마음을 놓으실지, 아니면 더더욱 주변을 경계를 하실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입을 다문 채 연무강은 가만히 연무의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구월 구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보기 드물게 연무의의 사담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 생각났는지, 돌연 연무의가 허허 웃었다.
“그러고 보니, 향이가 내게 편지를 썼더구나.”
“변방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마도 연서령의 편으로 보낸 편지려니 생각하며 연무강은 생각했다 그 질문에 연무의의 입술에 조용한 미소가 걸린다. 기쁘고 즐거워서 짓는 미소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향이가 이번 공치식에 연서강을 추천한다고 적어놓았더구나.”
“공치식에 말입니까?”
수확제에 열리는 공치식은 태위인 연무의가 주관하는 행사였다. 논공행사가 그 주된 내용이었으며 일부 인사이동도 이루어지는 큰 행사였다. 그렇기에 이맘때쯤 되면 연무의에게는 수많은 뇌물이 도착하였다. 부디 자기 자식의 이름을 공치식 때 언급을 해 달라 부탁하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보내는 것이었다. 또는 좀 더 높은 지위로 승지하고 싶어서 연무의에게 아부하는 저열한 자들이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공치식 때, 한 번도 내 자식의 이름을 부른 적 없건만.”
공치식을 주관하는 것이 바로 태위인 연무의이니, 공치식에는 분명 연씨 문중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거론될 것이다, 그런 추측은 금물이었다.
공치식은 연무의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행사였다. 아무리 현재의 황제에게 반감이 있다 하더라도 맡은 일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 연무의의 지론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연무의는 공치식에 거론될 이름을 아주 엄격하게 심사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해서 오히려 공치식에서는 연씨 문중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이 덜 언급되는 편이었다. 특히나 연무의의 자식들은 단 한 번도 공치식에서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었다. 연무의는 자기 자식들이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때문에 공치식 때 편애로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능히 알아서 승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원래는 한 해 수고를 한 관리들에게 상을 내리기 위한 공치식이었지만, 나라가 커지고 나서는 그저 승진을 위한 편법이 된지 오래였다. 이제 막 개국을 한 나라도 아니고 안정이 된지도 오래된 제국이었다. 그러니 재야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자가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정말로 큰 공을 세웠다면 그때까지 승진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재야에 묻혀있는 재자가인이란 말도 아직 하제국 중앙의 힘이 미력하여 지방까지 닿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통해 거론될 이름을 정한다고 해도 결국 그 바닥의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했다. 승진이 간당간당한 사람들 중에 특별히 몇 명을 뽑아 본보기로 삼는 것일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연무의는 공치식에 제 자식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달갑지 않아했다.
물론 연의향으로서는 알 리가 없는 일이다.
“헌데, 연서강의 이름을 부르라......?”
연무의의 미소가 더더욱 비웃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연무강도 속으로 혀를 찼다. 향이, 그 아이는 좀 더 자신의 아버지란 사람을 잘 알 필요가 있었다. 제 아버지의 성격이 어떤지 알면 감히 연서강을 추천하지는 못했으리라. 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총명하게 처신을 잘 하더니, 집을 떠나 오랫동안 타지에 있더니 그 감도 많이 무뎌진 모양이었다.
연무의에게 있어 ‘연서강’이란 이름은 금기에 가까웠다.
“연의향이 변방에서의 일로 연서강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나 봅니다.”
연무강의 말에 연무의가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명? 이 아비가 미처 몰랐는데, 우리 향이는 참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구나.”
호의적인 말과 달리 연무강은 연무의의 마음에서 연의향이 한 발자국 멀어졌음을 느꼈다. 어리석은, 중앙으로 올 날이 멀지 않았는데 그 바로 앞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확실히 연의향이 변방에 오래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름을 못 부를 것도 없겠지. 없고말고.”
연무의가 이어 하는 말에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부르실 겁니까?”
“실제로 공을 세우지 않았더냐. 그 아이가 세운 공만 따지면 고작 비서랑에 머무는 게 아깝긴 하지. 아깝고말고.”
어투가 참으로 미묘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인가, 만다는 것인가.
허나 연무강은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부친이 공치식에서 연서강의 이름을 부르든, 안 부르든 연무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연무의가 연서강을 해치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거기에만 신경이 쓰였다. 해서 연무의와 단둘이 대화할 때에도 대답을 함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연무의가 연서강을 더 이상 의심스럽다 생각하지 않도록.
“.......그러면 소자는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연무강은 그리 말하며 연무의의 앞에서 물러났다. 연무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물러간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무강이 문을 닫기 전 ‘그러면 구일 날,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라.’란 말만 건넸을 뿐이었다. 연무강은 다시 고개를 숙여 그렇겠다, 대답한 뒤 문을 닫았다.
성헌당의 안이 정적에 휩싸인다. 바깥에서 사람이 걸어가는 소리만 자박자박 들릴 뿐이었다. 아들이 닫고 나간 문을 조용히 바라보며 연무의는 제 턱을 쓸었다. 이윽고 바깥에서도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연무의가 문득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공치식 이야기를 꺼내도 가만히 있다니.”
원래의 연무강이었다면, 그 놈이 거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면서 성을 냈을 것이다. 감히 연서강의 이름을 공치식에 추천한 연의향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며 그런 추천서 따위는 어서 태워버리라 닦달했을 성격이었다, 원래의 연무강은.
허나 연무강은 그러지 않았다.
.......답지 않은 게 대체 누군가. 자신이 아니라 연무강, 바로 그놈이 아니지 않나.
연무의는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서강, 이놈이.”
연무강이 그전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면, 그 이유는 그놈 밖에 없었다.
* *
금해, 수확제가 열리는 시기가 정해졌다.
수확제가 열리는 기간은 태상이 제사를 통해 하늘에게 묻고, 하늘에서 내려온 답을 해석하여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시일로 잡았다. 그리하여 금해, 수확제가 열리는 날은 시월 십이일, 노오란 국화가 한철이고, 나무에서는 다 익은 석류가 또옥 똑 가지에서 떨어지는 시기였다. 물론 들판에는 곡식들이, 산에는 과일들이 알맞게 익어 나라 전체가 풍요로울 때였다. 그때는 지나가는 들짐승조차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때였다.
수확제가 열리는 날을 전해들은 황제가 ‘참으로 좋을 때이다.’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고 하였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황후 역시 ‘여린전의 석류도 잘 익었을 때이니, 잘 익은 석류들을 모아서 그 즙을 내어 고생하시는 분들께 나눠드려야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한다. 그 말에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황후는 참으로 마음씨가 고우신 분이오.’
물론 정전(正殿)에 모여 그 상황을 본이들은 모두 한데 입을 모아 ‘가장’이며 ‘가식’이라 하였다. 황제가 귀비 비씨를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궐내의 나이 어린 궁아도 알고 있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황후와 황제의 사이에 있는 골이 그렇게까지 깊은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비록 가식이기는 하나, 황제는 황후를 예우해주었고 황후 역시 그런 황제에게 부드러이 대처하며 결코 투기심 따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황제에게서 독을 받았으며, 그 독으로 황후가 귀비 비씨의 아이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궐내에 단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해와 다를 바 없는 가을이었다.
-허면 명일, 구월 구일부터 수확제의 준비를 시행하도록.
황제의 말과 함께 정전 밖에 있는 대종이 울렸다. 대종이 댕, 댕 울림과 동시에 황제의 하명이 정전 밖, 경천문 광장에 서 있는 수많은 관료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구월 구일부터 준비를 하랍신다, 하랍신다, 그리 고하는 말이 거대한 광장을 가득 채우고 대종소리 역시 근엄하게 울려 퍼진다.
아홉 번의 종소리와 함께, 경천문 광장에 모여 있던 수많은 관료들이 황제에게 예우를 갖추며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궁인들이 이제부터 궐내로 들어올 많은 선물과 진귀한 물품들에 들떠 새처럼 지지배배 웃으며 회랑을 걸어갔다. 하늘에서 꽃종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 *
궐내의 치자들에게 보낼 선물이나 수확제 준비에 필요한 물자를 실은 마차의 줄이 혜문을 벗어나 멀리 두 개의 문과 문루까지 이어져 있었다. 문무백관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혜문의 안 쪽, 경천문과 경천문 광장에는 다양한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줄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마차 사이로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간단한 차와 먹을 것을 파는 아낙들이 종종 비쳤다.
일 년 중 백의궁이 가장 시끌시끌할 때가 바로 이때였다. 또 백의궁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병력들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때도 바로 이때였다.
평소에 밖에서 들어온 마차나 손님들을 맞이하여 안내하는 것은 궁인들이었다. 허나 이때는 궁인들도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바쁘기 때문에 바깥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궁에 갓 들어온 어린 궁아까지도 걸레며 옷감들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바깥일은 경비병 등, 궁내의 병사들이 떠맡게 되었다.
혜문에서 경천문까지 배치된 병사들은 마차들을 호위하며 그 안에 혹여 위험한 것은 없는지, 또 위험인물은 없는지 검사하고 또 물건이 도둑맞는 일이 없도록 감시해야만 했다. 경천문 광장의 병사들은 마차가 어디서 온 것인지, 어떤 용무인지, 미리 예약되어 있는 것은 맞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라 마차와 사람들을 안내해야만 했다.
확인 작업이란 것은 일일이 사람의 눈과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어서 당연히 경천문에서부터 마차와 사람들이 밀리게 되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이때의 백의궁은, 백보를 가는데 반나절이 걸린다는 말도 있었다. 다 복작복작한 백의궁 내를 비유한 말이었다.
궁으로 통하는 경천문이 이리 난리이니 문무백관들이 제대로 경천문과 혜문을 통해 입궐하고 퇴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때만큼은 평소에 굳게 잠겨 있던 동서 각루의 문이 열려 문무백관들은 거기를 통해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궁의 안전을 위해 단단히 잠겨 있던 각루의 문이 완전 개방이 되니, 거기에 또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대대로 나라를 뒤집어 놓았던 반역이 이때 가장 많이 일어났었다. 그렇기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는 모두 삼엄하게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엄준하게 지키고 섰다고 해도 가끔 구경하러 오는 일반백성들이 행렬에 섞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다 싶어, 병사의 눈을 피해 항렬에 섞이면 설혹 저잣거리 바닥이 제집인 걸인이라고 해도 백의궁 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혜문을 지나 경천문에 당도하게 되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과연 하제국 최고의 궁이로다.’하는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나들이도 경천문 광장에 당도하게 되면 대부분 강제로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경천문 광장에는 혜문에서 여기로 왔던 길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지나가는 궐내의 사람들 역시 많아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지나가는 궁인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때까지 날카로워져 조금만 수상한 자가 있으면 바로 경비병을 부르곤 했다.
그 가운데에는 길을 잃어버린 중요한 손님도 있었고, 행렬에 어렵게 숨어들어온 일반 백성들도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손님들은 바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광장의 서쪽, 영의전 옆에 있는 회랑에서 아는 사람이 올 때까지 대기하게 되었고 일반백성들은 혜문 너머로 쫓겨나게 되었다.
쫓겨나는 그들의 손에는 만두 하나씩이 쥐어져 있었다. 수확제를 준비하는 기간인 만큼 부정을 타면 안 된다 여겨져, 쫓아내는 대신 만두를 쥐어주는 것이었다.
해서 심심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들은 간혹 일부러 행렬에 모르는 척 끼기도 하였다. 고행과도 같은 몇 시간을 지난 뒤에 얻는 것이라곤 욕설과 만두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랏님이 사시는 백의궁을 근처에서 구경한 게 어디냐며 그들은 자기네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아, 죽겠다.......”
평소에 북루를 지키던 병사였던 화명운은 금일, 구월 구일부터 앞으로 보름간 경천문 광장을 지키게 되었다. 경천문 광장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든 그에게, 같이 북루를 지키던 동료 하나가 ‘넌 이제 죽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말 이 정도까지 힘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렇게 바쁠 수가 있을까.
첫날인데도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마차들로 혜문 밖은 복작복작했다. 이윽고 사시(巳時: 오전 아홉시부터 오전 열한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굳게 닫혀 있던 혜문이 열리자, 그때부터는 정말로 지옥 같은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마차와 사람이 바다와 산을 이루고, 그 바다의 산이 전부 자신에게로 다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몇 시진이나 지났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마차를 안내하고 사람을 안내했으며, 무어라 소리 지르는 궁인들의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자신은 그저 궁인들이 길을 잃은 사람이 있다 하여 그를 옥문각 근처까지 안내해주고 왔을 뿐인데, 광장으로 돌아오니 상관이 대체 이 바쁜 날에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잔소리를 해대었다.
종일 서 있었던 탓에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팠다. 그새 식사 시간이 되었는지 나이 어린 궁인들이 다가와 물병과 떡을 주고 사라졌다. 바짝바짝 말랐던 속에 물이 들어가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지만, 그런 그를 다음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떡을 넘길 시간조차 주지 않는 마차떼들이었다.
마차가 사라졌느니, 어쩌니 하며 어떤 마부가 울었다. 또한 자신이 저기 저 뒷줄에 서 있는데 선물로 갖고 온 진귀한 꽃이 다 말라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먼저 들어가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비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선물로 갖고 온 신기한 동물이 도망을 갔다고 난리였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화명운은 깨달은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바로 그거였다. 어떤 선물이든 많이 기다려야 할 때는 생물(生物)은 준비하지 말자.
제 차례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골병이 난 자도 있었고, 은근슬쩍 새치기를 하는 자도 있었다. 또 미처 예약을 하지 못하고 줄을 서 있다가 경천문을 코앞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자도 있었다. 성질을 내는 자도 있었고, 우는 자도 있었으며, 통곡을 하는 자도 있었고, 짜증을 내는 자도 있었다. 큰 소리를 내는 자도 물론 있었고, 조그마한 소리를 웅얼거려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자도 당연히 있었다.
천재(天災)도 재난이지만, 인재(人災)도 재난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어디 담이 무너지고, 창문이 깨졌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마차에 깔려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영의전의 의원은 물론이거니와, 목수들까지 나와서 모두 일을 하고 있었다. 화명운은 여기가 참말로 자신이 매일 보던 그 백의궁이 맞는가 싶었다.
경천문에서 사람이 치여, 일에 치여 화명운의 얼굴이 시꺼멓게 된 채 죽어가고 있노라니 그의 상관이 이러다 젊은 사람 잃겠다, 싶어 그를 구릉벽 쪽으로 보냈다. 손님들을 모셔가는 회랑 쪽과 달리 구릉벽 쪽은 각종 물품과 선물들을 실은 마차가 가는 쪽이었다. 수월하기로 친다면 당연 회랑 쪽이었으나, 구릉벽도 경천문이나 광장보다야 널널한 축에 속했다. 적어도 거기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사람에 치일 일은 없는 것이다.
상관의 말에 화명운은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잽싸게 구릉벽 쪽으로 왔다. 확실히 사람의 수가 덜하니 견디기가 좀 나았다.
허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화명운은 ‘아니야. 여기도 지옥이다.’라고 느꼈다. 마차는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옥, 작년과 달리 위사인 연무강이 꼼꼼하게 물품을 점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일은 배로 많았다. 목록을 들여다보며 다 거기서 거기인 마차들을 애써 구분하고, 또 그 안에 있는 물품들이 무엇인지 풀어보고 다시 포장하면서 화명운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수확제는 왜 열리는 것일까. 또, 이렇게 보름이라니 자신은 이제 어떻게 버텨야 할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노라니 ‘일 해.’하고 다른 동료들이 그의 등을 탁, 치고 지나간다. 웃음만 실없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더 일을 계속 했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전쟁터도 아니고 물품을 검사하고 분류하다가 쓰러지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인가.
해서 화명운은 살짝 동료들의 눈을 피해 구릉벽 아래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벽 옆에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숨어 잠시잠깐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아니 될 말이엤지만, 화명운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자신은 가장 바쁘다던 경천문에서 일하다 여기로 온 게 아닌가. 여기 동료들 보다는 당연히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은 쉬어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어, 잠깐.”
그때, 그의 눈에 한 인영(人影)이 들어왔다. 그가 있는 곳은 각종 선물을 실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여기서 모든 검사를 마친 마차는 곧 선물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배달될 예정이었다.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마차의 모양으로 볼 때, 이 마차가 갈 곳은 분명 황족의 일원이리라. 그런 사람에게 갈 물건 중 과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큰 벌이 내려올 것이 분명했다. 해서 그는 자신의 눈에 스쳐지나가듯 지나간 사람을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숨을 죽이고 그는 살금살금 마차의 옆으로 걸어갔다. 화명운으 눈앞에 있는 낯선 자는 화명운이 자신을 발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화명운은 그대로 걸어가서 낯선 자의 목덜미를 확 낚아챘다.
“요놈!”
“꺅!”
화명운에게 잡히자 낯선 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낯선 자의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며 화명운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낯선 자가 바들바들 떤다. 낯선 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였다. 양 옆으로 올린 머리가 귀여웠다. 행색으로 보아하니 어디 귀족 자제분은 아닌 듯 하고, 만두를 노리고 마차 행렬에 끼어든 평민 여자애인 듯 했다.
“요 앞에 저잣거리에서 사는 아이냐?”
겁이 나 새파랗게 질린 여자애를 바라보며 화명운이 물었다. 바들바들 떨던 여자애는 여전히 아무 말을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겁을 주면 펑펑 울 듯 해서 화명운은 살짝 머쓱해졌다. 아이는 그저 만두를 얻어먹을 요량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 텐데, 자신이 너무 겁을 주었나 싶었다.
게다가 더 말썽이 일어났다간 동료들이 여기로 몰려들 것이다. 그러면 몰래 쉬려했던 자신의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화명운은 한숨을 폭 내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을 내려던 게 아니라......, 옳지. 너 혹시 만두 먹으려고 왔더냐?”
만두, 란 말에 아이의 흐려진 낯이 살짝 맑아진다. ‘만두?’하고 아이가 화명운을 바라본다. ‘그래, 만두.’ 화명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착하지. 울지 마렴. 조용히 있으면 예쁜 언니가 만두를 주면서 널 밖으로 데려다 줄 터이다. 너는 요 앞 저잣거리에 사는 애가 맞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이를 자세히 보니 한 일고여덟 살 정도되어 보였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요 앞 저잣거리에서 사는 아이라면 잘 먹지 못해서 제 나이 또래만큼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또 뭐니?”
아이의 손을 잡고 궁인들이 있는 곳까지 나가려고 했던 화명운은, 아이가 무언가를 꼭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비단주머니였다. 달라고 손을 내미니 아이가 원래 제 것이 아니었던 양 쉬이 화명운으 손에 넘겨준다. 화명운은 비단 주머니를 꽁꽁 동여맨 색실을 풀고 안을 보았다.
“약? 복고단?”
약주머니로 보이는 하얀 쌈지가 보이고, 그 앞에 무어라 글이 써져 있는데 ‘복고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아하니 복고단이란 약인 듯 했다. 복고단, 이라....... 생각하던 화명운은 급히 품속에서 필첩을 꺼내들었다. 수많은 선물 목록들이 적혀 있는 필첩으로, 여기에 기록된 것들과 마차의 물품들을 비교 대조하는 것이었다.
화명운은 익숙하게 필첩을 넘겼다. ‘복고단, 복고단, 복고단.......’ 뭔가를 찾던 그가 비로소 ‘역시!’하고 소리친다.
“귀비마마께 가는 선물이었군.”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한 대 꽁, 때렸다. 울상이 된 아이가 맞은 자리를 쓰다듬는다.
“요놈,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해도 훔치면 안 돼. 너희 부모님이 그리 가르치시던?”
“.......”
울상인 아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잘못했다는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아이의 빤빤한 얼굴에 화명운은 한숨을 폭 쉬었다. 누가 부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애를 교육 잘 시켰다. 커서 도둑년으로 만들 일이 있나. ‘남의 것을 훔치면 안 되지.’ 한 번 더 아이에게 훈계한 다음, 화명운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필첩에 써져 있는 마차를 찾아 복고단을 그 안에 넣어두었다.
“큰일 날 뻔 했네!”
복고단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오며 화명운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자신이 쉬려고 이리로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저 아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필시 저 아이가 복고단을 훔쳐 달아났을 것이다.
귀하신 분에게 선물로 들어가는 약재가 없어지다니, 아니 될 말이었다. 만일 일이 그리 되었더라면 그와 그의 동료들은 분명히 밤늦도록 없어진 복고단을 찾아다닐 테고, 결국 찾지 못하고 귀비마마께 징계를 받게 될 테지.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써늘했다.
“너 때문에 몇 사람이나 곤란할 뻔 했어!”
화명운은 다시 아이를 다그쳤다. 울상이던 아이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되더니,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린다. 당황한 화명운은 아이를 달랬다.
“만두, 그래. 만두를 달라고 하자.”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삐 지나치는 궁인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화명운은 그 궁인에게 아이를 맡기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자칫하면 여럿의 인상을 말아먹을 뻔 했던 하루였었다.
* *
-해서, 저잣거리의 아이더러 무언가 시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거승주가 은밀히 물어보았다.
-아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바로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올리고 보라색 옷을 입은 여아라고 하였습니다.
거승주는 살금살금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머리를 양쪽으로 올리고 보라색옷을 입은 여아였다. 손에 커다란 만두를 들고 거리를 걷고 있는 아이는 거승주가 그 뒤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몇 발자국 걷다가 잠깐 서서 손에 든 만두를 우물거리고, 또 걷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아이는 몹시도 지쳐 보였다.
당연했다.
아이가 걸은 거리가 상당할 테니.
마차 행렬에 섞여서 궐내로 들어갔다고 봤을 때, 아이는 벌써 백의궁 문루에서 경천문까지 걸은 것이었다. 또 그 문루에서 연무강이 시킨 일을 하고 병사에 들켜 다시 나오게 되었으니 지금쯤이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도 지칠 때였다.
길거리에 앉아서 콩콩 다리를 두드리는 아이의 얼굴에는 땀이 그득하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 거승주는 아이에게 무어라 말을 걸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에게 먼저 접근하는 여인이 있어 거승주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너, 저어기 문씨 아저씨네 딸이 아니니? 예서 뭘 하누?”
“심부름 갖다 왔어요.”
아이의 대답에 여인이 웃으며 ‘어마! 부모님 심부름도 착실하게 잘 하고, 정말 착하다.’라고 아이를 칭찬했다. 아이가 만두를 들고 헤헤 웃는다. ‘부모님 심부름은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아이에게 여인이 ‘그럼 누구?’하고 물었다. 천진난만하게 아이는 ‘비밀이에요.’라고 답한다.
어린 아이들 간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던지 여인이 ‘비밀이라니, 어쩔 수 없네.’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옷고름으로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말한다.
“나중에 너희 어머니 보고 내가 방문한다고 전해다오.”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여인이 미소를 흘리며 종종 걸음을 걸어 아이를 지나친다. 지나가다가 거승주의 행색이 조금 수상했던지 여인의 힐끔, 거승주를 본다. 아직 교관복을 벗지 않은 그였기에 거승주는 여인의 시선에 당당하게 굴었다. 여인은 ‘그냥 지나친 의심이려니.’하고 생각했던지 거승주 또한 지나쳤다.
여인이 지나가는 동안, 아이가 또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여인도 있으니 거승주는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디 아이가 인적 드문 곳으로 가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힘들지도 않은지 아이가 계속해서 걸어간다.
아이의 등을 보며 거승주는 생각했다.
저 아이에게 물어보면 ‘일’의 전말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으리라.
들어가는 마차 행렬은 무수히 많아 모두 다 살펴보기 힘들지만, 궐내에서 쫓겨나는 일반 평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해서 거승주도 아이가 궐내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은 미처 보지 못하고 쫓겨났을 때에만 겨우 발견하여 미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가 궐내에 들어왔을 때부터 미행을 했더라면 아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좀 더 양질의 정보를 기연조에게 제공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거승주의 부하는 연무강의 부하이기도 했다. 연무강이 알게 모르게 일반 병사들 중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은 것을, 거승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심복들이 주로 하는 일이 바로 궐내에서 일어나는 이모저모에 관한 보고였다. 그 심복들을 통해 연무강은 궐내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내고 또, 그 움직임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후에 심복들을 공을 치하며 상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연무강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뛰어났다. 거승주도 연무강의 심복 중 몇 명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몇 푼의 돈에 홀려 자신의 상관인 연무강을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배신하지 않고 말을 잘 따랐을 때는 상당한 상을 받았지만, 혹여 배신을 했을 경우 얼마나 무자비하게 축출당하는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무강, 연무의, 연무진까지, 수도의 병권은 이들이 꽉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미움을 받은 일개 무관들의 삶이 어디까지 피폐해질 수 있는지는 상상조차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얼마나 말을 잘 해야 연무강의 심복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거승주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그런 재력도, 말재주도 없었다.
해서 거승주는 만일 자신이 그런 명령을 내리면 그 사실이 연무강의 귀에 들어 갈까봐 겁이 났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생각하게 될 것이고, 곧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기연조와 암통(暗通)을 했단 사실이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인정이 없고 자비도 없는 연무강은 분명 자신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
연무강이 원통해 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게 된다면 그게 무슨 비극인가.
“.......”
아이는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의 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외진 숲길이 나왔다. 굽이굽이 나무 사이로 나 잇는 길은 좁고도 길었다. 저잣거리에서 상당히 멀어진 모양이었다. 거승주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주변에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방금 거리의 여인이 자신을 수상하다는 듯 쳐다본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일만 잘 된다면 모두 해결될 일이기도 했다. 더욱이 자신은 수상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만 아이를 기연조에게 데리고 갈 작정일 뿐.
기연조가 아이를 통해 정보를 얻어 내어 연씨 문중을 치게 된다면 자신의 지위는 더더욱 상승할 것이고 더불어 연무강이 비통해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더욱이 황상 폐하의 총애를 받는 귀비 마마를 어찌 해할 생각을 하였다니, 연씨 문중 놈들이 단연코 악인들이었다.
악인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배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러운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멋대로 굴러갈지도 모르는 이 하제국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황상을 위한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모쪼록 힘을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연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거승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 이것은 이 나라를 위한 일.
“얘야.”
거승주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자신의 부름을 듣고 뒤를 돌아본다. 거승주는 차분한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다름이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단다.”
“아저씨는 누구죠?”
“아저씨는.......”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가 활짝 웃었다. 왜 갑자기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이지? 거승주는 당황했다. 자신의 얼굴에 무언가 괴이한 것이라도 묻었던가. 허나 얼굴을 더듬어 봐도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허면 옷차림이 이상한가. 옷도 이상이 없었다.
허면, 허면.
아이가 거승주를 향해 다가온다.
거승주는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으면서 다가오는데, 문득 두려워졌다.
그 아이의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사심 없이 웃는 얼굴이, 고통 없이 웃는 얼굴이, 즐거워서 웃는 얼굴이, .......반가워서 웃는 얼굴이!
거승주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녹우당 도련님!”
거승주는 얼어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거승주를 지나쳐 그대로 뛰어가, 거승주의 뒤를 따라온 청년에게 가 안긴다. 청년이 아이를 안으며 웃었다.
“고맙다.”
고맙단다, 무엇이?
거승주는 흐릿한 눈으로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녹우당 도련님이었다. 자신이 무시하고 깔보았던 그 청년이었다. 잘난 큰 형님에 못난 아우님이라며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그 남자였다. 마르고 왜소한 몸에 어딘가 안 되어 보였던 남자. 초라하고 볼 품 없고 하찮아 보이던 그 남자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아니,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때의 그 초라하고 볼 품 없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이지적인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한 남자가 그 눈으로 거승주를 보았다. 남자가 순간, 빙그레 웃었다.
“.......네 덕분에 나쁜 사람을 잡아내었다.”
남자의 말에 아이가 개구지게 웃었다. ‘저 잘 했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잘.’ 하고 대답했다.
“무술 교관 거승주.”
그리고 거승주는 남자의 뒤에 단단하게 버티어 선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저승사자를 보았다. 저승사자가 자신을 향해 이어 말한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고맙다고 인사하러 갔을 때처럼 차갑고 인정이 없이 딱딱했다.
“기가 놈과 작당을 해서 나를 배신하다니, 간도 크군.”
그가 자신의 앞으로 툭, 뭔가를 던졌다. 얼어붙은 얼굴로 거승주는 땅에 떨어진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책이었다.
소설책이었다.
연무강의 눈을 피해 기연조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연무강이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자네의 보은 방법인가.”
거승주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