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37)

 25.

 -저를 얼마나 더 취하시면 제가 부탁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자신과 배짱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때에는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문제였던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뚱이를 배를 가를 칼과 함께 그라는 제단(祭壇)에 올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 말하기 직전 연서강은 생각했다.

 이리 말하면 들어주실 것이다. 사실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형님께서는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단순한 증오인지, 적의를 갖고 있어서인지, 타기(唾棄)에서인지, 조롱을 위한 희롱을 하기 위해서인지, 간악한 흥미에서인지, 순수하게 혐오해서인지, 어떤 목적을 가진 책략에서인지, 이 전부가 해당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보면 그는 죽기 전에도, 죽고 돌아온 직후에도 자신에게만 유독 지나치게 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자신이 연우비의 자식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연서강 하나만 두고 봐도 참으로 못나고 못난 놈인데, 연씨 집안에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주었던 연우비의 자식이기까지 하니 그 증오란 오죽하겠는가. 연씨 문중에 제 혼을 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연무강이니 그럴 만도 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의 행동은 너무 지나쳤다.

 아무리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자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에 대한 증오가 약간은 무뎌지지 않나. 하지만 연무강에게는 그런 것이 전연 없었다. 녹우당에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거해 가족들 대부분에게 잊혀진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오로지 연무강만이 계속해서 미워하고 억압했으니, 그것은 몇 년 동안 눈앞에 없는 자신을 연무강만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이를 갈았단 소리도 되었다.

 자신조차 눈앞에 그가 없으면, 그를 잊고 지냈었는데.

 무술 교관 거승주의 말도 생각이 났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변방에 간 내도록 연무강이 자신을 생각하였다는 것만은 맞으리라. 그의 심기가 불편했든 좋았든 어느 쪽이었든 간에, 자신은 숨 막히게 돌아가는 변방의 사정에 눈이 돌아가 수도의 일은 모두 잊고 있었는데 연무강만은 자신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면 자신은 그것을 이용해 주리라. 어디 딴 데 갈 곳도 없는 몸이고, 줄 이도 없는 몸이었다. 자신에게 집착해 그가 자신을 굳이 제 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하겠다면 그렇게 하라 모두 줘 버리고 말리라. 고작 그것으로 그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저를 얼마나 더 취하시면 제가 부탁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서, 연무강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연서강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번에는 결코 나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호롱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가 얇고 가는 탓에 호롱불은 방안의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파르르 불안하게 떨렸다. 불만 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밝기조차 심지가 두꺼운 것과 차이가 났다. 불을 켰는데도 방안 구석구석 빛이 미치지 않음은 물론 빛도 흐릿하여 불 가까이서가 아니면 책에 있는 글씨를 읽기 힘들었다.

 연서강이 머물고 있는 방이라서 이런 질 나쁜 호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몇 년간 주인이 없던 연무진의 방이었다고는 해도, 하인에게 말하면 새 것으로 얼른 교체가 되기도 했고 또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직접 가져온 호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연서강에게는 호롱불의 밝기만큼 중요한 것도 또 없어서 그는 누구나 감탄해 마지않을 좋은 호롱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책을 읽을 필요도, 더욱이 불을 오래 피우고 있을 필요도 없어 일부러 이런 불을 골라 켜놓은 것이었다. 방안이 쓸데없이 밝아 행여 밖에 지나가는 사람이 오해를 할까 그런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오해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장지문 종이에 비추는 그림자가 보여주는 그대로의 뜻일 테니.

 “.......서령이는 보셨습니까?”

 연서강의 질문에 연무강이 관심이 없다는 목소리로 ‘보았지.’하고 대꾸했다.

 “여전히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 같더군.”

 이번엔 망아진가. 연서강이 들은 것에 한해서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멀쩡히 인간에 비유된 적이 없는 연서령이었다. 어찌해서 그 아이의 평판은 죄다 그러한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알 듯도 했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니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은 아이일까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그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

 침대에 앉은 연서강은 마른 목구멍 밑으로 침을 밀어 넣었다.

 이제까지 본채에 다른 사람이 묵었던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밖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본채에 있는 가족은 늘 항상 부친인 연무의와 연무강, 그리고 얼마 전부터 머물게 된 자신이 전부였다. 가끔 연무진이나 연의진이 온다 하더라도 정말 가끔이었고, 연의향과 연서령은 변방에 간 지 오래라 수도로 돌아오는 일도 드물었다.

 헌데 오늘은 연서령이 한 집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부친인 연무의도 성헌당에 계시기는 했으나, 성헌당은 어디까지나 연무의가 손님을 맞이할 용도로 따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본채나 안채, 형제들의 방이 있는 건물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연무의가 성헌당이 아닌 다른 방에서 잠을 잔 적은 일 년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서 실제로 본채를 쓰는 가족은 이제까지 연무강과 연서강 뿐이었었다.

 “서령이가 신경 쓰이나 보지?”

 연서강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연무강이 조소하며 묻는다. 그렇게 묻는 상대방은 연서령이 있다는 것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해서 연서강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연서령이 있는 본채와 그 연서령을 신경 쓰지 않는 연무강이라, 그런 둘의 조합은 연서강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패였다.

 연서강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서늘해진 이마를 한 손으로 쓸고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허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허세를 부려봤자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것도 상황에 따라 통할 수도 있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글쎄.”

 오늘은 아마도 통하지 않는 날인 듯 했다.

 연서강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연무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를 연서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의 관계를 연서령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경을 치는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안에서는, 그래. 연무의라면 자신만을 탓할 지도 모른다. 요망하니, 배은망덕하니, 더럽다느니 하는 온갖 폭언을 퍼부으며 자신이 연무강을 망쳐놓았다고 생각하겠지. 허나 아무리 집안에서 자신만을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 하더라도 연무강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서령이에게 들키게 되면, .......형님도 곤란하실 텐데요.”

 아주 조심스럽게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동생 놈과 붙어먹은, 그런 놈이라고 소문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이제껏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연서강의 말을 귓등으로 받아 넘기고 있던 연무강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허나 연서강의 가정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가 흘깃 연서강 쪽으로 시선을 주며 희미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하고 되묻는 투도 가볍게 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연서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방금 전과 같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편이 나았다. 저런 얼굴로 연무강이 자신을 볼 때면 어김없이 그 후에 좋지 못한 일을 당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니.......’하고 연서강은 할 말을 잃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슴 한 구석에서 꾸물꾸물 옅은 패배감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연무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연서강의 걱정스런 시선이 연무강을 ㄸㆍ라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다.

 “나는 말이다, 서강아.”

 요새 들어 연무강은 곧잘 자신을 ‘서강아.’라고 불렀다. 성씨까지 붙여 차갑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꼭 친한 이를 부르듯이 말이다. 주로 ‘밤’에 그리 불리기 때문에 연서강은 연무강이 그럴 때마다 조바심을 느꼈다. 서강아,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눈앞의 남자와 맨 살을 마주하고 있을 때가 절로 생각났다. 열 오른 자신의 몸과 그런 몸을 부드럽게, 그러나 강하게 끌어 가두던 손의 촉감이 몸 위로 떠올라 인상을 쓰게 된다.

 연무강이 연서강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곤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허면.”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서강의 입술을, 연무강은 눈으로 쫓았다. 연무강은 손가락을 들어 연서강의 윗입술을 살짝 눌렀다. 처음에는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더니, 지금은 그저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한다.

 얼마나 더 자신을 취하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냐고, 그렇게 말한 뒤부터 연서강은 자잘한 반항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머뭇거리기는 해도 결코 거부는 하지 않았다.

 연무강은 조소하며 입을 열었다.

 “절박한 네 마음을 믿는 것이지.”

 “.......”

 “서령이에게 들킬까봐 염려가 된다면 들키지 않도록 네가 소리를 죽이면 되지 않겠느냐. 나는 네게만 속삭이듯 말할 터이니, 너 또한 달밤에 몰래 정인을 만나는 규수처럼 숨죽이고 내 귓가에서만 신음하면 될 일 아니더냐.”

 그 말을 듣는데 연서강은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누가 더 절박한가.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연서강, 자신 쪽이었다. 절박한 사람 쪽이 알아서 하라는 듯 무심하고 냉정한 연무강의 태도가 연서강의 손가락 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 렇지요.”

 마지못해 연서강은 대답했다. 제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손가락 끝에서 허옇게 물이 빠졌다.

 “.......”

 저절로 아래로 추락하는 시선을 연서강은 애써 다잡았다 괜찮다. 자신의 소원대로 ‘일’에 개입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러니 괜찮았다.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나고 나면, 그러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이 단도로 후벼 파이는 듯한 가슴 속도, 목덜미 위로 가라앉은 차가움도, 전부.

 ‘.......허면.’하고 한 번 이를 악 문 다음,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에 연무강이 빙긋이 웃는다. ‘그렇겠지.’하며 연무강은 여전히 남 일인 것처럼 대꾸했다.

 아니, 남 일이 맞을 것이다. 그로서는 상대바이 무얼 생각하고 있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 당연히 상관이 없겠지....... 다만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자신이 연씨 문중을 배신할까, 하지 않을까 그 여부 뿐. 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것 정도일 터이다. 그리 생각하며 연서강은 옷자락을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오롯이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게지.”

 헌데, 돌연 그리 말하며 연무강이 서랍장 가까이로 걸어가 그 위를 덮은 격자무늬 천을 잡았다. 장식용이기 때문에 그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천이었다. 연무강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서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뒤로 돌아보겠느냐? 천으로 입을 막으면 좀 덜할지도 모르지.”

 “.......”

 순간 연서강은 저 사람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허나 연무강이 천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니 거짓으로 말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연무강이 천을 들고 자신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어서.’하고 재촉한다. 절대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아서 연서강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전까지 그래왔듯이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일’이 끝나면 모두 끝날 일.

 그때까지는 연무강에게 자신의 몸을 얼마든지 내어주자고 하지 않았던가.

 자포자기의 심정이 컸다. 해서 연서강은 연무강에게서 등을 둘렸다. 연서령이 본채에 있다는 말로도 연무강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얼른 관계를 끝내는 것이 능사였다.

 말을 주고받는 시간도 아까웠다.

 “.......”

 연서강이 등을 돌리자 연무강이 천으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연무강의 팔이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식이 되자 연서강은 미미한 불안감에 미간을 좁혔다.

 “잠.”

 그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연무강이 그의 입이 아닌 그의 눈에 대고 천을 미리 뒤로 묶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가로막혀 연서강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치우기 위해 손을 올렸다. 허나 바로 제지당했다. 연무강이 그의 두 손을 잡아 등 뒤로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관절이 꺾인 것은 아니기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두 손이 모두 잡힌 채 등 뒤로 가 있어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시야는 가려져 있지 않나. 연무강이 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바로 앞으로 고꾸라질 형국이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연서강은 추궁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엇일까.”

 연서강의 질문에 연무강이 즐거운 듯 되묻는다. 연서강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연무강이 이어 연서강의 두 손목을 한 데 겹친 상태로 그것을 뭔가로 묶었다. 아무래도 눈을 가린 천 이외에도 다른 천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서강의 두 손을 꽉 묶은 다음, 연무강이 그의 등을 밀었다.

 “잠, 잠깐!”

 몸이 사정없이 기울어지는 느낌에 위기감을 느끼고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허나 곧 상체는 폭신한 이불 위에 닿는다.

 연무강이 와상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자신이 와상의 어디 즈음에 엎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리에 베개로 짐작되는 물건이 없으니 와상 중간 즈음인가,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와상의 어디에 누워 있느냐가 아니었다.

 새까매.

 눈꺼풀을 깜박일 수 없을 정도로 압박된 탓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소리만이 그의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르쳐주는 척도였다. 그리고 무게가 실리는 쪽으로 쏠리는 이불들.

 무엇도 가늠할 수 없는 새카만 허공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따. 힘겹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봤지만 손가락에는 손목을 묶은 빳빳한 천만이 만져질 뿐, 그 사이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형, 님.”

 불안해하며 불러도 상대방으로부터 아무 대답이 없다. 다만 옷과 옷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날 뿐이다. 어디에 그가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호롱불이라도 밝게 피워놓을 것을! 그렇다면 시야가 이리 어둡지도 않았을 터인데.

 허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분명 밖의 눈을 염려해 최대한 어두운 호롱을 밝혀놓을 것이 분명했다. 이 방안에서 자신과 연무강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아는 이상은.

 “서강아.”

 그때, 그의 귓가로 연무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귀 옆이다. 흠칫, 어깨를 떨며 연서강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부터 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곧 어깨가 잡히고 팔이 잡혀 끌려간다. 곧 상대방의 품속에 안겼다.

 “또, 사실은....... 나는 서령이에게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자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연서강의 가슴 속에 내려앉았다. ‘사, 상관 없다고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서강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허나 그래서 더욱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관이 없다고?

 왜? 연서강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순간에도 연무강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생 놈과 붙어먹은 놈이라 소문이 나면 어쩌겠느냐고?”

 연무강이 돌연 연서강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후 음산한 중얼거림이 연서강의 귓가에 흐리게 스쳤다.

 “.......그런 소문이 나면 네놈은 기연조에게 더 이상 얼굴도 들지 못하겠지.”

 숨이 멈췄다.

 연서강은 자신의 몸을 쥐어 터뜨릴 듯 감싸 안고 있는 남자에게서 진득한 악의를 느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올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말은 그래서 계속 연무강만이 했다. 여전히 조용한 가운데 파문처럼 번지는 속살거림이었다.

 “.......아니면 그런 소문이 나도 기연조에게 갈 수 있을 만큼 뻔뻔한 놈이더냐, 네놈은?”

 “.......”

 여전히 어떠한 대답도 연서강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아니다. 대답은 두 가지 뿐, 그러나 어떤 대답도 택할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가정할 수 없었다. 연서령에게 들킨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졌는데 기연조에게 들킨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연조가 자신을 경멸하며 더럽게 여긴다? 같은 사내와, 그것도 제 형과 붙어 먹은 놈이라 욕하며 침을 뱉는다?

 .......그랬다간, 자신은 죽을 지도 모른다.

 “혀, 형님.”

 남자는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꺼낸 말이 분명한데도,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있지 않은 말이 분명한데도 연서강은 한기가 들었다. 정말로 지금 이 순간,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러 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무강’이라면 절대 할 리가 없는 짓이었다. 집안과 자신의 위신을 첫째로 생각하는 그라면 절대 할 리가 없는 짓인데도, 등 뒤의 ‘남자’는 응당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물을 판별하는 눈이 가려진 것뿐인데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눈까지 가려진 것인가.

 자신을 잡고 있는 남자가 사실은 ‘연무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오래된 나무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남자가 정말 ‘연무강’은 맞는 것인가. 아니, ‘연무강’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머리를 얻어맞아 중간에 비는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남자는 연무강이 맞는 것이다.

 허면, 허면, 허면 이 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지. 그럴 리가, 기가 놈이 제 마음을 눈치챌까봐-.”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남자가 연서강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거죽을 잡힌 것뿐인데 펄떡펄떡 뛰는 염통까지 남자의 손아귀에 잡혀버린 것 같아 연서강은 헐떡였다.

 “이제까지 필사적으로 마음을 숨겨 왔던 놈이 아니냐. 허니 그런 소문이 나면 기가 놈에게 얼굴을 내비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어조는 이제는 연서강에게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기연조가 혹시나 내게 욕설이나 내뱉지 않을까, 멸시의 눈으로 보지 않을까 겁이 나서 그의 앞에 서지도 못하겠지.”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말은 연서강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가정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남자가 다시 연서강의 머리며 뺨을 제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기이한 열기를 띤 타인의 손이 차갑게 얼어붙은 제 얼굴을 스치자,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연서강은 그 부분이 따갑게 느껴졌다. 매섭게 타오르는 상대방의 열망이 오로지 자신에게 와 닿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소문이 나면 녹우당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홍월정 깊은 숲속에 숨어서 훌쩍이기라도 할 셈이냐.”

 ‘아, 아닙니다.’란 대답은 남자가 자신의 옷섶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마자 사라졌다. 남자의 손은 옷에 싸여 있는 연서강의 살을 부드러이 손가락으로 짚고 짚다가, 유실을 만나 그것을 꽉 쥐었다. ‘흑!’하고 갑작스런 통증에 연서강이 소리를 냈다.

 남자가 낮게 웃었다.

 “안 되지, 서강아. 소리를 내면. 소리를 듣고 연서령이 수상하다, 여기며 이리로 올지도 모르지 않으냐?”

 정말 큰일이지, 하며 남자가 속삭인다.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오싹해져 등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 기연조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앞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연서강의 감각은 유난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남자의 체온이 기이하게 뜨거운 것도, 남자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쓸고 매만지는 것도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귓가에 속살거리는 남자의 목소리 또한 축축한 물처럼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남자의 물건 또한.

 처음에는 말랑했던 그것이, 자신의 몸에 비벼지면서 점점 커지고 딱딱해지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몸에 발정하고 있다.

 “.......혀, 형님.”

 익숙해졌다면 익숙해졌을 느낌들인데도 생경하게 다가왔다.

 “연, 조와 못, 만나게, 하려, 고.”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무강이 그의 유실을 본격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찌르르한 고통과도 같은 감각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흘렀다. 상체가 저절로 앞으로 숙여졌다.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를 뱉었다가 연서강은 숨을 삼켰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누군가 들으면 큰일이지 않으냐.”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연무강이 그리 중얼거린다. 허나 그런 말과는 달리 그는 연서강이 좀 더 소리를 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서강은 더더욱 입술을 깨물었다. 연무강이 어찌해서 이러는 것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절박한 사람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자신은 기를 쓰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안간힘을 쓰며 참는 자신을 우습다 내려다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니 현재 연무강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전부 거짓이고 허언일 것이다. 모두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지어낸 말들이다.

 “나로서는 차라리 누군가 듣고 소문을 내었으면 좋겠다만.”

 거짓이다.

 소문이 나면 당신도 곤란하지 않은가. 당신은 물론이요, 당신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가문의 체면까지 말이 아니게 될 텐데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일 수 밖에다. 당신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으로 이리 꾸며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연씨 문중을 배신하고 기연조에게 갈까봐!

 “안 그러냐.”

 돌연 연무강이 연서강의 몸을 밀었다. 채 중심을 잡지 못한 연서강이 억눌린 비명을 삼키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조금 전에 쓰러졌을 때 와 달리 그의 이마는 바로 이불에 닿지 않고, 폭신한 무언가에 닿았다.

 베개다.

 깨닫자마자 연서강은 베개에 제 얼굴을 비볐다. 눈에 감겨 있던 천이 베개와 마찰되면서 점차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이 눈썹 위에까지 올라갈 때까지 베개와 제 얼굴을 비비자, 그제야 막혀 있던 시야가 조금씩 아래쪽부터 환해지기 시작했다. 잘게 이어지는 호흡으로 코끝과 베개가 젖자 천은 더더욱 잘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을 가렸던 천이 마침내 벗겨지는가 싶었다.

 “안 되지.”

 시야가 새하얗게 빛나던 것도 잠시, 연무강의 차디찬 목소리가 떨어지는 것과 함께 갑자기 또 시야가 어둡게 가려졌다. 연무강이 손으로 연서강의 눈을 가린 것이었다. 아, 하고 연서강이 좌절이 섞인 소리를 냈다.

 한 손으로는 연서강의 눈을 가린 채 연무강은 다른 손을 연서강의 겨드랑이 사이에 넣었다. 팔을 당기자 얼굴과 함께 그의 상체가 들어 올려졌다. 머리 위에 걸쳐있다시피 했던 천이 그 바람에 와상 위로 떨어졌다.

 연서강이 묶여 있는 손이라도 풀기 위해 몸을 바르작거렸다. 허나 눈과 달리 손을 묶은 천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런 연서강의 귓가에 연무강이 여유롭게 속삭였다.

 “남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너와 남에게 들켰으면 하는 나, 둘 중에서 누가 더 절박할까.”

 “형님.”

 숨을 죽은 목소리로 연서강이 연무강을 불렀다. 자신의 눈을 가린 연무강의 손은 좀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하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행위는 평소와 거의 비슷한 수순을 밟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불안했다. 이것은 연서령이 본채에 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제발 눈을, 눈을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

 연서강의 청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하의를 벗기고 그의 둔부 사이로 목실유를 듬뿍 바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방금 연서강이 베개에 얼굴을 비빌 때, 그 장면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바른 것이었다. 바닥에는 텅 빈 목실유 병이 떨어져 있었다.

 “헉!”

 내부로 침투하는 미끄러운 손가락을 느낀 연서강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무강은 열이 차오른 얼굴 때문인지 연서강의 눈을 가린 자신의 손바닥은 물론이고, 연서강의 얼굴에도 땀이 흠뻑 배여 있음을 깨달았다. 축축해진 피부에 밤공기가 닿아 추위를 느낄 법도 한데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비문 사이로 들어간 손가락으로 그 내부를 살짝 문질렀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내벽의 감촉이 그대로 손가락으로 전해져왔다. ‘읏!’ 입술을 깨문 연서강이 소리를 삼킨다. 앞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그의 몸은 평소보다 더 잘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계속된 자신과의 교합으로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목실유의 덕분인지 요새 연서강은 삽입을 해도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있었다. 허나 고통스럽지 않다고 해서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픔이 덜 하니 앞을 만져주면 발기하고 사정하는 것은 가능했다. 연무강은 근래에는 거의 그런 식으로 연서강을 잠자리에서 달래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연무강이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연서강이 흥분을 하거나 사정을 할 시에는 그의 몸 근육도 순간, 수축하여 몸속에 삽입된 연무강의 성기를 조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의 느낌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또한, 그에 이어 연서강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는 걸 보면 무척이나 마음이 즐거워졌다.

 연무강은 좀 더 그가 느끼는 표정을 보고 싶었다. 사정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서 이성이 무너져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자신의 것으로 연서강이 오롯이 흥분하고 사정을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켜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그는 했다.

 만방에 자신과 연서강의 관계가 드러난다고 해도 비단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그래.

 그렇게 된다면 연서강은 기연조는 고사하고 다른 누구와도 만나기를 거부하며 홍월정 깊숙한 곳에 처박힐 것이다. 그러면, 그런 그를 자신이 매일 찾아가 들여다보고 매만지곤 하면 퍽 마음이 흡족할 터이다. 그래, 오롯이 자신만이.

 그런 어이없는 망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강아.”

 하고 부르자 연서강이 부르르 목을 떤다. 연무강은 웃었다. 연서강이 목을 떤 것은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막 그의 둔부 사이로 두 번째 손가락도 집어넣은 탓이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연서강의 내부를 휘저었다. 보드라운 내벽을 실컷 매만지면서 연무강은 조금씩 더 깊숙한 곳으로 손가락을 뻗어나갔다. ‘무슨, 짓을.’하고 연서강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짓이라고 묻는다면 별 짓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늘 하던 것의 연장선상일 뿐이니까. 시간이 지났으니 좀 더 진도를 나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연서강으로서는 반길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형님.......’하고 울렁이는 불안감에 연서강이 몸을 비튼다.

 “.......읏!”

 그러다 문득 약속이라도 한 듯 연서강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앞으로 확 쏠리는 그의 몸을 연무강은 고쳐 안았다. 원래도 열이 오른 몸이었지만 방금은 달랐다. 발간색을 푼 것처럼 연서강의 몸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형, 님?”

 방금의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듯 연서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무강을 부른다. 들썩이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대답 대신 연무강은 방금 연서강이 반응을 했던 부분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손가락을 더듬었다.

 “형님!”

 날카로운 목소리.

 순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목소리를 연서강이 곧 정신을 차리고 삼켰지만, 이미 입 밖으로 뱉은 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연서강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것과 동시에 숨소리가 조용히 가라앉는다.

 “괜찮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연서강의 신경이 방 밖에 쏠려 있는 것을 알고 연무강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리가 그리 크진 않았으니.”

 그 말은 정말이었다.

 “하지만 이후는 모르지.”

 그 말도 진심이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네가 흠칫하며 숨을 삼킬 때가 있었는데 그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삽입 후의 일을 말함이었다.

 “네 이성은 용케도 참아낸 것 같지만 네 몸속은 전혀 그러지 못했단다, 서강아.”

 꿀꺽 연서강이 마른침을 삼켰다. 바짝 마른 입술이 연무강의 눈에 들어왔다. 별 볼 일 없는 남자의 입술이었지만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싶은 욕망이 이는 입술이기도 했다. 연무강은 그 입술을 탐욕스레 바라보며 그의 몸속에서 느리게 손가락을 빼내었다. 목실유로 연서강의 내부와 둔부는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서강아.”

 연무강은 극도의 긴장으로 호흡이 거칠어진 남자의 귓가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두 눈이 손으로 가려져 코와 입만 보이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섭지 않을 거다.”

 “.......”

 “혹 무서우면 내게 매달리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연무강이 연서강의 몸을 침대 위로 눕혔다. 악,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연서강이 몸을 뒤틀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연무강과의 관계가 이전과 다를 거라는 예감에서 오는 절실한 도주였다.

 아무리 약질(弱質)이라고는 해도 연서강은 자신과 같은 사내이니 그가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저항하면 제아무리 연무강이라 해도 쉬이 제압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 연무강은 한참도 전에 미리 연서강의 두 손을 묶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 방 안에서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방안에서 들리는 것은 두 남자가 거칠게 움직이는 소리뿐이었다. 팔이 잡혀 억눌리는 소리였다. 얼굴이 베개 위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마침내 밝은 시야를 되찾은 두 눈동자가 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안타깝게도 두 손이 묶인 남자에게는 너무도 불리한 소리였다.

 “아, 으흑!”

 연서강이 베개를 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몸이 붙잡혀 삽입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벌려진 둔부 사이로 뜨거운 상대방의 성기가 살을 가르는 순간, 연서강이 느낀 것은 절망이었다. 목실유로 흠뻑 젖어 있던 내부는 연무강의 성기를 깊숙한 곳까지 무리 없이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똑같았다, 이제까지와.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하, 흐읏, 읏! 혀, 님!”

 몸속으로 들어온 상대방의 성기가 거침없이 좀 전 연서강이 느꼈던 부분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래가 녹아났다. 연무강의 성기를 품고 있는 그 부분이 통째로 비릿한 쾌감으로 젖어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서 몸이 전율하고 출렁거렸다.

 “아! 아, 앗! 싫.”

 사정을 할 때, 그 엇비슷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으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후에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는 것과 달리 몸이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이상했다. 이상해! 연서강은 결국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베개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 눈물인지 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는 엉덩이를 들어 올린 채 연무강이 주는 쾌감을 견뎌내야 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몸은 꼭 자신의 것이 아닌 것 마냥 바르르 떨며 전율했다. 자신의 몸인데도 몸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허나 사지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멍청이처럼 허우적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허벅지는 물론이고 허리까지 나른하게 울려 부들부들 떨렸다.

 이상해, 그래서 무서웠다.

 “이상, 으흣!”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괜찮다, 서강아.”

 흐느끼며 몸부림치는 그의 귓가에 연무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짐승 같은 추삽질과 달리 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이상해져도, 괜찮아.’ 아, 앗, 아! 흘러나오는 소리를 베개로 틀어막아 억누르는 연서강의 귓가에 연무강이 이어 말했다.

 “이상한 건, .......나도 마찬가지이니.”

 그 말을 들으며 연서강은 사정했다. 앞을 만지지 않고 사정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연무강으로부터 진실로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것도 그게 처음이었다.

 흐으, 흐느낌 소리가 절로 그의 비틀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흐느낌조차 상대방이 몇 번 자신의 몸을 쳐올리자 곧 당혹스런 울먹임으로 변했다.

 사정을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끔찍하고 비릿한 쾌락으로 요동친다. 근질근질하고 애타며 초조한 감각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좀 더, 몸이 바라고 있다. 도망치고 싶은 가운데 계속해서 그 초조함을 원한다. 계속해서 느끼게 해 달라고 몸이 조른다.

 “으, 흐읏!”

 이건 자신이 아니다.

 허나 자신이 맞았다.

 -진실로 추잡하군.

 순간 연서강은 기연조가 그리 차갑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환청이었다.

 미어지는 가슴에 연서강은 울며 두 눈을 흐리게 떴다. 열락으로 인한 땀과 처참한 눈물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소리를 막기 위해 입 안 가득 쑤셔 넣었던 베개의 일부가 타액으로 범벅이 된 채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부옇게 얼룩진 자국이 음란했다.

 “아, 앗!”

 더럽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다시 그 위로 연서강은 얼굴을 비비며 온 몸을 비틀어야 했다. 허벅지와 배가 자신이 사정한 액과 목실유로 질척거렸다. 상의도, 하의도 모두 심하게 구겨진 채로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옷도 흠뻑 젖어 청결하던 색 위로는 진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진실로 추잡하다. 그러나 변명하듯 연서강은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만큼은 연무강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

 아무도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설사 연무강이라고 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시이 속에 품은 뜻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연무강에게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준다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다.

 아무리 자신에게 집착해도 연무강은 알아내지 못한다.

               * *

 시ㄲ?ㅁㅤㅕㄴ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하늘로 길게 이어졌다.

 죽은 자의 여러 가지 물품들을 정화하고 죽은 자에게 돌려주는 성화(聖火)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약간 건조한 날씨였기 때문에 새빨간 불꽃은 잘만 타 올랐다. 그 앞에서 연서령이 굳은 얼굴로 자신이 들고 있는 물품들을 하나씩 불 속으로 던져 놓고 있었다. 옷가지나 피기구, 사용하던 생활 도구 등 죽은 자가 즐겨 이용했다던 물건들이었다.

 마치 연기가 죽은 자의 나라로 가는 길목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멀리, 높이 길게 나폴나폴 피어오르는 연기를 서글픈 눈으로 응시했다.

 백의궁 내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인이 필요했다. 인재라고도 할 수 있는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게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백의궁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불을 피울 때마다 일일이 관리의 승인을 받고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 즉 밥을 짓고 방을 데우는 데에도 불이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해서 담당자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불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이 백의궁에는 몇 군데 존재했는데 그 대부분은 주거공간으로 생활 속에서 쓰이는 불을 피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딱 한 군데, 그것과 용도가 다른 불을 마음대로 피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수안궁이었다. 수안궁에서는 수시로 향을 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의 넋을 공양하기 위해, 또는 신께 제사를 지내기 전에 앞서 정화의 불을 피우기 때문에 수안궁의 주인인 태상의 허락만 있으면 불을 피울 수가 있었다.

 지금 연서령의 앞에 있는 성화도 그런 종류였다.

 “.......이제 확실히 알겠네.”

 멀찍이 떨어진 채 불에 물건을 던지는 연서령을 응시하고 있던 제아겸이 팔짱을 끼며 돌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마찬가지로 연서령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연서강이 제아겸을 돌아보며 ‘예?’하고 물었다.

 그 또한 연서령처럼 죽은 자를 공양하기 위해 왔으나 지니고 있는 물품이 없어, 그저 죽은 자가 편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돌아본 제아겸의 얼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자네가 나를 얼마나 쉬이 대하고 있는지.”

 퉁명스레 대꾸하며 제아겸은 인상을 썼다. 언제나 화려하고 고운 빛깔의 옷을 즐겨 입는 그였으나, 오늘만큼은 죽은 자를 공양하기 위해서인지 농람(濃藍: 짙은 남색)빛 정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띠가 둘러진 얌전하고 단정한 옷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유독 태상의 심기가 가라앉아 보인다.

 늘 항상 그의 주변에는 꽃과 빛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오늘의 그는 비 내리기 직전의 하늘처럼 어둡고 엄격해보였다.

 “한 나라의 태상을 사사로이 불러다 이름도 모를 이를 갑자기 공양해 달라 부탁하다니, 뻔뻔함이 보통이 아니군, 자네.”

 허나 역시 옷차림이 바뀐다고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전히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가 그리 말하자 연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네.’하고 스스로 그가 그리 말했던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또 홍월정의 숲으로 돌아서 녹우당에 오다가 옷이 찢어져 그가 투덜거렸던 늦봄의 기억도.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의 말은 했으나, 자신이 부탁하자 태상이 흔쾌히 승낙했던 기억이 있는 탓에 연서강은 의아한 기분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태상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이 맞겠지. ‘제가 기분을 많이 상하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이어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그간 자신이 수안궁을 많이 방문하기는 한 듯 했다. 새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이 나라의 태상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연서강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태상이라 하면 황후마마나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수장인 자신의 부친 만큼이나 백의궁의 내로라하는 권력자 중 하나였다. 헌데 그런 분을, 너무 자주 오고 봐 익숙해진 탓인지 자신이 그간 너무 격식 없이 대한 듯 했다.

 홍이와 함께 잇어서 더더욱.

 “앞으로.”

 하고 연서강이 말을 이으려고 했을 때, 제아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말은, 연서야.”

 “네, 말씀하십시오.”

 평소라면 ‘연서’란 말에 눈썹을 구겼을 테지만, 또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을 자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 수 있을만한 위치였다. 해서 연서강은 깍듯하게 대답할 뿐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제아겸이 시선을 연서령의 등으로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동생은, 그래. 자신이 공양하고픈 이들에 대해 무어라 내게 말을 하지 않았나.”

 그리고 다시 연서강을 쳐다보며 이어 말한다.

 “헌데 자네는 대뜸 고양하고픈 이가 있으니 해달라니.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밝히지 않으면 나도 진심으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기가 힘들다네. 내게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가 암만 저어되어도 그렇지. 그 정도 기본적인 것은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어야 되지 않겠나. 공양정도야 자네 부탁이고 하니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겠다면.”

 그 말이 연서강은 놀라웠다.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제 부탁이니, 공양은 언제든 괜찮다고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 반응에 태상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 표정은 무어야. 자네 내가 당연히 ‘내 부탁은 들어주시겠거니.’, 하고 온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고 온 것이었던가? 설마하니 이거 내가 거절해야 했던 부탁이었었나?”

 “아, 아닙니다.”

 서둘러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태상의 말이 맞았다. 태상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연서강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진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깨닫고 연서강은 화끈 얼굴이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태상경.’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한 부분에는 감동해서 어쩔 줄 몰랐다. ‘고맙습니다. 제태상.’

 연서강이 쩔쩔매며 그리 말하자 태상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죄송하면 죄송한 것이고, 고마우면 고마운 것이지. 둘 다 함께 말하는 것은, 또.”

 “그것이.”

 연서강은 제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어쩐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기뻐서 가슴 속이 녹아났다.

 “저, 저도 모르게 태상경께서 제 부탁을 응당 들어주시겠거니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태상의 말씀이 진정 옳습니다. 제가 이제껏 태상경을 너무 무례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송구합니다.”

 “그럼 고마운 것은?”

 장난치듯 묻는 말에 연서강은 더더욱 쩔쩔맸다.

 “.......태상께서 제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태상께서 자신을 그리 가깝게 여기고 있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무리도 아니었다. 홍이 때문에 만나기는 했지만 마음 속 깊숙한 이야기도 몇 번 나누었고, 또 변방으로 자신을 차장와 주시기도 않았던가. 홍이를 생각해서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었겠지만 그 또한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사람인 것이다.

 기연조처럼.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태상경께서 만일 제게 부탁하실 게 있으시다면, 저도 당연히.’

 연서강의 말에 제아겸이 한 쪽 눈썹을 구기며 입을 연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을 왜 하는가. 명령하면 그만인 것을.”

 “.......그, 그렇네요.”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자신이 또 무례한 말을 한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며 연서강은 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더 이상 뭐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사람을 많이 만나보고 이야기도 나누어 볼 것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가 극히 한정되어 있던 탓에 연서강은 기본적인 화술도, 사교술도 극히 평군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제아겸이었다.

 “허면 내가 연서에게 하나 청을 해도 될까.”

 “예?”

 이 직전에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거리가 무어 있겠냐는 듯이 이야기 해놓고 바로 청을 해도 되겠냐는 말을 하니 연서강은 자연히 의아해졌다. 허나 연서강은 내색치 않으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네, 하십시오.’

 그러자 제아겸이 새삼스런 눈으로 연서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아무것도 노력하지 말아주게.”

 청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목소리와 어조는 마치 명령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에 놀라 연서강이 쳐다보자, 태상은 방금까지의 장난스런 기색은 씻은 듯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연서강을 보고 있었다.

 다색(茶色) 눈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연서강은 일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볼 수 없도록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둔 참과 거짓까지도 바로 간파해 낼 듯한 영묘(靈妙)한 눈이었다.

 “.......그게 무슨.”

 그의 말뜻이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연서강은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했었지만, 역시 제아겸은 오늘따라 그 분위기가 평소와 너무 달랐다. 엄숙하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경건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도 모자라,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큰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위기감마저 들었다.

 물론 평소에도 제아겸은 언뜻 언뜻 이런 면모를 연서강에게 내비치고는 했었다. 때때로 그가 묵직한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질 때마다 연서강의 가슴속은 크게 요동치곤 했었던 것이다. 경외심이었다, 그 때 연서강이 느끼던 감정은.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한 발을 들이고 있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 경외심이 오늘의 제아겸을 보고 있자니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

 제아겸이 공기 중에 흐리게 번져가는 잿빛 연기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목소리보다는 비교적 가벼워진 목소리였으나 여전히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좀 더 나은 날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네. 하지만 연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 자네는 ‘되돌아온’ 자가 아닌가. 되돌아온 자는 뱀 신의 권능을 직접 체험한 자이기에 응당 일반인보다는 뱀 신에게 가까이 접해 잇는 사람이 되지. 내가 말한 적이 있었지. .......혹 그 말을 기억하는가. 뱀 신은 그저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되돌려주는 것뿐이라고.”

 그렇다.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연서강은 아랫입술을 꽉 다물었다. 제아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것은 그저 뱀 신님 앞에서 재롱 잔치를 벌이는 것에 불과하다네.”

 “.......”

 “뱀 신에게 놀아나지 말게나.”

 과연 그런 것인가.

 연서강은 흐린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좌우로 일렁이는 것이 꼭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정해진 수순도 규칙도 없이 다만 정신없이 휘청거리며 곧 사라질 듯 맹렬하게 불타며 춤을 춘다.

 지금 자신을 뱀 신님이 보시면 꼭 저런 꼴일까.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사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광란의 춤을 추는 것 같을까. 신의 의중이야 보통 사람인 자신이 알 리 만무하지만 어쩌면 재미나게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꼭 얼뜨기의 춤사위 같지 아니할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멍텅구리가 아득바득 악을 쓰면서 용케도 여기까지 기어 왔으니.

 “.......오늘 제가 공양을 드린 이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적의 소년병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멍하니, 춤추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던 연서강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소년병?”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아겸이 묻는다. 연서강이 적군을 사사로이 만났다면 ‘그때’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행방불명되었을 그 당시 말이다. 그때를 제하면 연서강은 줄곧 의경 안에서 지시만 내렸을 뿐이고, 결코 밖으로 출전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따.

 “제가 아는 것은 그가 죽었을 때 지었었던 기묘한 미소뿐입니다.”

 그리고 바짝 말라 있었던 발목.

 그 발목을 낚아채어 자신이 그의 얼굴을 돌로 내리찍었다. 해서 그 소년의 원래 얼굴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내리친 돌에 맞아 엉망으로 부서지고 일그러진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런 소년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소년의 얼굴에 다시 돌을 내리친다. 그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미친 사람 같은 웃음.

 그리고 사방팔방에 튀는 피. 소리도 없는 절규.

 “가끔 그에 대한 꿈을 꾸고 있어요.”

 “.......”

 제아겸이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은 애써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서령이에게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들어봐야 적을 왜 공양하느냐면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지는 못하겠습니다. 해서 오늘 서령이와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제아겸이 불쑥 물었다.

 “.......자네가 죽였나?”

 “네.”

 제아겸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기서 연서강은 태상의 상냥함을 느꼈다.

 아니면 오히려 더 이상 묻기가 께름칙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뱀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태상경이니, 아무리 적이라고는 해도 한 생명이 그토록 무참하게 사라진 것을 가벼이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소년병은 타국의 병사이니, 뱀 신을 모시는 자도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그 소년을 죽이고 간신히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땅속으로 떨어졌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었지요. 남을 죽이고 살아남으려고 했으니 어쩌면 뱀 신께서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태상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정말 그대로 되었겠지요.”

 구덩이 속에 떨어져 꾼 꿈은 길었다. 그리고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자신은 그 구덩이 속에서 오열했고 절망했다. 그때 사람을 죽인 충격이 더 컸던가, 아니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충격이 더 컸던가. 대체 무엇 때문에 더 절망했고 무엇 때문에 더 오열했던가. 답은 금세 나왔다.

 후자였다.

 그때 자신은 이대로 죽게 된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기껏 되돌아왔는데 여기서 끝이라고. 숨 가쁘게 뇌까렸던 생각의 대부분이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꿈꾸고 일어났을 때, 그때의 기분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너저분하고 징그러웠으며 끔찍했다.

 ‘자신’같지 않았다.

 “그런 경험, 또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쓰게 웃으며 연서강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연의향과 연서령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생과 사가 한 순간순간마다 교차하는 그곳에서 어찌 몇 년이나 버틸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개인의 야망을 위해서인가. 어느 쪽이든 자신이라면 그곳에서 미쳐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태상께서는 그때,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무엇을?”

 “제가 막 구해졌을 당시에 했던 말입니다. 쌍두뱀 신이 하얀 뱀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 적은 없는지 여쭤보지 않았습니까.”

 제아겸이 살짝 인상을 썼다. ‘뱀. 그랬지.’하고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느낌의 어투에 연서강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하다마다.’하고 여전히 인상을 쓴 채 그가 중얼거린다. ‘다름 아닌 뱀이었으니까.’

 “자네가 뱀 이야기를 해서 불길하게 여겼었다네.”

 태상의 목소리에 짙은 적의가 깃들여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신임에도 그 신을 증오하는 태도에 연서강은 그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그에게 뱀 신이란 어떤 존재인 것인가. 자신이 깊숙하게 관여된 것이니 차마 완연히 떨치지는 못하고, 그저 미워하며 꺼리고 의심하고 불신하는 존재인 것인가? 거역하지 못하고 순종하며 따라야 마땅한 존재를 저리 취급할 리는 없었다.

 태상에게 뱀 신이란, 혹여 자신에게 있어 연무강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연서강은 이어 말을 했다.

 “.......구덩이에 떨어져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뱀이 나왔었습니다.”

 변방에서의 꿈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거기서 진짜로 꿨던 꿈을 강제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치 그때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 누가 경고하는 것도 같았다. 이제는 변방이 아니기에 안심해도 좋을 터인데 연서강은 그때 봤던 뱀이 불쑥 어딘가에서 나타나 자신을 노려볼 것만 같았다.

 언젠가 또 자신의 앞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뱀이었다.

 “하얗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연서강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매끈한 손가락에는 여전히 아무 흉터도 없었다. 변방에서 생겼던 상처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뱀이 제 손가락을 깨무는 꿈을 꿨습니다. 그래서 번쩍 눈을 떴지요. 그 후 바로 태상경께서 나타나셔서, 저는 뱀 신이 태상을 보내주신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더 살아보라고 제게 말한 듯 느껴졌습니다.”

 “.......”

 제아겸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는 다만 얼굴을 굳힌 채로 연서강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서, 자네.”

 그러다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떠오른 빛이 몹시도 초조하고 불안하게 보였다.

 그것을 본 연서강은 의아해졌다. 왜 태상경께서 저런 표정을 짓고 계신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런 표정을 보자 계속해서 말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계속해서 말해 봐야 태상의 낯빛만 더 좋지 않아 질 것 같았다.

 “해서.”

 허나 말을 재촉한 것은 다름 아닌 제아겸이었다. ‘무어라고 했지, 그 뱀이?’ 마치 그 뱀이 그냥 그렇게 사라질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그 뱀이, 제게 자신을 좀 더 즐겁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더욱 더 절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

 연서강의 예상은 적중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제아겸은 다시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충격을 받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도 많은 말과 생각으로 그는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실로 제아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태상?’하고 연서강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제아겸의 입에서 돌연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만 두게!”

 “예?”

 제아겸이 연서강의 팔을 붙잡았다. 팔을 쥔 손의 힘이 상당해서 연서강은 흠칫 놀랐다. 제아겸이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런 말까지 들었다면서, 어째서? 어째서, 자네는.”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떠올라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목소리에서도,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도 제아겸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 연서강은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 뱀은 역시 ‘신’이었다고, 태상께서도 생각하십니까.”

 이내 제아겸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전에 제아겸은 이리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태상이지만 신의 흔적조차 느껴본 적이 없다고. 뱀 신의 유일한 흔적이라고는 홍이처럼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자들의 존재가 전부라고. 그러니 그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녕 신이었는지.

 다만 그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의문에 대한 답뿐이었다.

 ‘자네는 역시 그때, 한 번 죽었던 것인가?’

 변방에서 되돌아온 자 특유의 느낌이 끊겼을 때, 자네는 정녕 그때 죽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런 자네를 뱀 신이 되살려준 겐가. 뱀 신이 그런 자네더러 더욱 더 절규할 수 있다고, 자신을 즐겁게 해 달라 하며 살려주었다고?

 뱀 신이 특별히 살려준 인간이라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아겸은 잘 알았다.

 죽을 때까지, 발버둥을 친다는 소리였다. 치열하게, 단 한 번도 마음의 평온을 갖지 못한 채 고민하고, 번뇌하고, 좌절하고, 절망을 하다 희망을 얻고, 노력하며 애를 쓰고, 울며 소리치고, .......또 다시 절망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는 의미였다.

 가혹했다.

 “.......”

 그러한 자신의 말이 연서강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제아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연서강이 ‘아무것도 하지 말게.’란 자신의 부탁을 듣고 대뜸 왜 변방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구덩이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는지.

 그런 말을 듣고 살아났어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 나는 자네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아.”

 제아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기꺼이 그 신의 놀음에 응해준단 말인가.”

 “.......”

 “그런 말을 들었다면, 분해서라도 나는 그러지 않을 걸세. 나는 정녕 이해가 가지 않아.”

 연서강은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분은 사실, 되돌아온 자들을 수없이 많이 본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리 말할 리가 없었다. 되돌아온 자는 자신이 처음이라 하면서, ‘되돌아온 것’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한다. 되돌아온 자가 노력하는 짓은 다만 뱀 신에게 놀아나는 것이니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직감이 들었다. 이 사람은 되돌아온 자를 본 게 사실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지 않을까.

 그럼, -내게 거짓말을 하신 건가.

 “.......”

 허나 연서강은 태상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거짓말을 했든, 아니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든 지금 현재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따스하게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태상경.’ 그가 부르자 제아겸이 침울한 얼굴로 연서강을 보았다. 연서강은 그 얼굴을 마주 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찍이 태상경께서 말씀해주신 바처럼,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조금이지만 이전과 달라지는 게 눈에 보여서가 아닐까요.”

 “.......”

 “괜찮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깨달아서일까, 순간 상대방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어도, 묘하게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지금으로선 저도 별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자신 역시 그에게 거짓말을 할 적정이었기에.

 태연한 척하는 웃음은 이제 짓기가 힘들지 않았다. 속에 비수를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을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는 감정을 숨기는데 너무 서툴러 태상에게 무어라 지적도 받았는데, 깨닫고 보니 감정을 숨기는 것은 아무 기술도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니 너무도 쉬운 것이 그것이었다.

 제 몸이 그저 뒤집어쓴 한낱 거죽과도 같이 느껴져 마음에서 철저히 유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수확제에 열릴 공치식에 의향누님이 저를 추천을 한다 합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아마 지위가 높아지겠지요.”

 속인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속여서라도 상대방을 지킬 수 있다면 거짓말도, 거짓 표정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을 수 있었다.

 “그때면 뾰족한 수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

 제아겸이 어둑어둑한 낯으로 자신을 본다. 연서강은 빙긋이 웃으며 ‘그러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을 겁니다.’라고 말을 끝맺었다.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던 제아겸이 연서강의 대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 대한 염려의 끈을 놓지 않는 제아겸을 보며 연서강은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참으로 좋으신 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허니, 그는 모르고 있는 편이 나았다.

 .......이리 말을 해 놓으면, 이제 이 뿐께서는 공치식이 열릴 때까지 자신이 무슨 다른 수를 스리라고는 생각하시지 못할 것이다. 공치식이 열리기 한참도 전에 일어날 ‘일’이다. 저 분이 무언가 눈치 채셨을 때에는 아마 모든 것이 끝이 나 있으리라.

 “.......”

 연서령이 물품을 모두 태우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춤추는 불꽃에서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가 마치 한 마리의 길게 늘어진 뱀처럼 보였다. 연기가 꿈틀거리며 불꽃이 춤추며 모든 것을 태우고 사그라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 *

 신후를 마차에 갖다놓는 자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첫째로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일을 행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하며, 둘째로 신뢰할 수 있는 자여야 했다. 또 셋째로, ‘황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여야기도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차를 검사하는 경비병들이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한 자이기도 해야 했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자를 알고 있다고 연서강이 말했을 때, 연무강은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연서강의 인맥이란 것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녹우당에 틀어박혀 있던 시절보다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넓어졌다는 인간관계는 고작해야 수안궁 태상과 놈이 밖에서 주워온 계집아이, 그리고 비서랑을 역임하면서 만나게 된 직장 동료에 그치고 있었다. 거기다 가족인 연무진과 연의진을 더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망설여지는 정도였다.

 그런 이가, 자기가 적당한 자를 알고 있다고 말을 했으니 믿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허나 연서강이 그 ‘자’를 데리고 왔을 때는 연무강도 ‘과연.......’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어째서 연서강이 그 ‘자’의 후처리를 자신에게만 맡겨 달라 했었는지 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무강 자신이었다면 일이 끝난 후에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그냥 으슥한 곳에서 처리했을지도 모를 ‘자’였기 때문이었다. 연서강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자의 뒤처리를 자신에게만 맡겨 달라 한 것이었다.

 그 ‘자’에게 절대 손대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연서강을 보며 연무강은 조소했다. 그 ‘자’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는 자신의 말에 연서강은 잠시 입을 다물었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대답에 연무강은 일처리가 미흡하여 안심할 수 없다고 말을 했다. 역시나 죽여 버리는 편이 후환이 가장 없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에 연서강이 얼굴을 굳히며 ‘절대’ 형님은 끼어들지 말라고 말을 한다. 연무강은 ‘물론이지.’하고 경계하는 연서강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연서강이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만 알고 있다면야.

 -절대, 나는 끼어들지 않으마. 그 ‘자’에 대한 처리는 전적으로 모두 네게 맡기기로 미리 정하지 않았느냐. 아버님도 그 ‘자’에 대해 손을 댈 수 없게 하겠다. 네 말대로 하겠으니 네놈이아말로 후처리를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연무강이 그렇게까지 말해도 연서강의 얼굴에 안심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안심을 하지 못할 사람은 자신이나 황후마마지 결코 저 놈이 아니었다. 불신도 상황을 봐 가며 해야 할 일이다.

 가장 의심스런 놈이 저러니 웃기지도 않았다.

 연무강은 방금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네가 그 ‘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황후마마는 물론이고, 연씨 문중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만약 일이 잘못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전부 네 탓이 될 테니, 그에 대한 각오도 하는 것이 좋을 게다.

 그 말에 연서강이 입을 꾹 다물며 침묵한다. 연무강은 굳어진 연서강의 얼굴을 응시하며 차갑게 웃었다.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다, 서강아. 연씨 문중이 위험해지면 내가 이성을 잃고 기연조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않으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연서강이 그 협박에 담담하게 대꾸했다. ‘절대로.’ 태연한 척 하는 목소리에 비장함이 다소 섞여 있었다. 연무강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제아무리 연서강이 ‘그렇다.’고 말을 해도 연무강은 그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기연조를 운운할 때의 말만이 겨우 신뢰할 가치가 있을까 말까 했다.

 물론 부탁을 모두 들어주기로 약조를 했으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모두 들어주고 있었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 연무강은 경계의 끈도 역시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연서강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려는 기색이 보인다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그 뒤를 수습할 만반의 준비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연서강 때문에 연씨 문중이 위험해질 바에는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하고 모든 증거를 없애 버리는 편이 나았다. 부친 연무의가 안타깝게 여기고 분노하며 자신을 꾸짖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아예 잘라버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연무강은 잘 알고 있었다. 

 수포로 돌아간 ‘일’은 다시 새로 계획하면 그만이었다.

 -잘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시 침묵하고 있는 연서강에게 연무강이 말했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영영 너를 불신하며 녹우당에 가둬버릴지도 모르지.

 부친인 연무의는 지금도 연서강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서강이 수상한 짓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는 당장 연서강을 내칠 것이다. 이제껏 그가 본채로 돌아오기 위해 한 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는 집안의 배신자로서 배척받으며 살아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러자 연서강이 돌연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농담이 심하십니다.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라 정말 유쾌해서 웃는 것 같아,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농담이라고?’ 그의 물음에 연서강이 ‘네. 농담이고말고요.’하고 대답한다. 그리고서 연서강은 연무강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만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한다.

 -저 때문에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아버님은 절 죽이실 겁니다.

 연서강의 검은 두 눈에 기묘한 이채가 어렸다.

 -아버님께서 저를 녹우당에 그저 가둬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형님.

 -.......

 그 말이 맞았다. 현재의 연무의라면 능히 그럴 만 했다.

 연서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잇는다. ‘형님께서도 물론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테고.’ 그러나 그 말에는 연무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이 실패로 돌아간 후 연무의가 만약 연서강을 죽이려고 한다면, 이란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탓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연서강이 연무강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전연 없으니까요.

 그 말도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흠칫 놀라 인상을 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연무의가 연서강을 죽이려고 한다는 가정에 순간 자신이 긴장을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그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없었고, 또 그런 그를 당황하게 만든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사 연무의나 연무진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리라. 형제들 중에 누구 하나가 연씨 문중을 해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해도 마찬가지였다. 연무의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연무강은 그 배신자를 마땅히 처치할 작정이었다.

 그 누구도 연서강처럼 대하지 못할 것이다.

 -.......

 순간, 연무강의 머릿속을 스친 기억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무진더러 연서강에게 탕약을 가져가라고 명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어차피 네놈은 한가할 테니 연의진에게로 가 감기에 좋은 약재들을 받아 탕약을 달여 연서강에게 가져가라고, 연무강이 연무진에게 말을 했다. 그때 연무진은 ‘형님,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 않소.’라고 투덜거렸었다. 그리고 이어 ‘형님은 서강이 일만 되면 유독 유난을 떠는 것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연무강은 인상을 쓰며 ‘유난?’이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연무진이 겁을 먹었는지 ‘아, 아니오. 아무 말도 안 했소이다. 가면 되지 않소?’ 말하고는 급하게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유난을 ㄸ?ㄴ다는 말에 연무강이 화가 났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 연무강은 연무진의 생각과 달리 화가 나지 않았었다.

 다만 인상을 썼던 것은 자신이 그랬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진이 나가버렸으니 확인도 못할 말이었다. 그렇다고 연무진을 다시 불러 대화를 시도할 만큼의 정성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때의 대화는 그냥 소소하게 지나가버린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허면, 이틀 뒤에 거승주에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때까지 모쪼록 형님께서도 준비를 모두 끝낼 수 있길 빌겠습니다.

 건조하게 말을 잇는 연서강을 연무강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일’에 관한 말일 뿐인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어째서인지 연무강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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