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37)

 24.

 연서강은 느리게 손을 뻗어 머리맡에 떨어져 있는 작은 병을 주워들었다. 입구가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옥색 병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연서강은 밀봉되어 있는 입구를 뜯어 그 안에 있는 것의 냄새를 맡았다.

 곧 병에 든 것이 무엇인지 그는 깨달았다.

 “목실유였습니까.......”

 연서강의 중얼거림에 연무강이 흘깃 침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렇군. 목실유라서 그렇게.......’하고 연서강이 의미모를 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하고 연무강이 살짝 인상을 쓰고 물으니 연서강이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끈미끈해서.”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곧 깨닫고 ‘아니요.’하고 다음 말을 삼켰다. 아무리 멍하게 있더라도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뒷말을 삼키는 연서강을 본 연무강이 입을 열었다.

 “그걸 쓰니 네놈이 악쓰는 소린 안 들어서 좋더군.”

 이번에는 연서강이 인상을 쓸 차례였다.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너무도 아프고 무섭고 두려워 아픈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연후정 때를 떠올리면 비교가 되어 더더욱. 요새 들어서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기억이 날아가는 경우는 잘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딱히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아픔으로 정신이 휙 날아가야만 행위를 끝난 뒤에 기억이 안 나서 좋았다. 지금은 행위 중 중간, 중간의 기억이 선명하고, 또 그만큼 시간도 느리게 가는 것 같아서 정신만큼은 예전의 배는 힘이 들었다. 또 행위가 끝나고 나면 참혹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괴감에 심장이 푸르게 물이 드는 듯 했다.

 가슴속이 전부 시퍼렇게 물이 들면 그때의 자신은 어찌 될까.

 알 수 없다.

 “.......”

 병을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고 연서강은 연무강을 바라보았다. 연무강은 탁자 위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연서강은 그제야 자신도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위 중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온 몸이 끈적끈적한 데다 더운 공기까지 들러붙으니 불쾌함만 들었다.

 “마시겠느냐?”

 묻는 말에 그러나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연무강이 픽 웃는다.

 “어서 빨리 사라져줬으면 하느냐?”

 자신의 심중에 담긴 말을 그대로 연무강이 읊어도 이제는 별로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거 큰일 났다, 싶어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었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었다. 그런 경우가 여러 번 반복되면서 그만큼 익숙해졌다. 상대 또한 당연하게 그러겠지, 여기고 있어 더욱 그랬다.

 어서 빨리 나가줬으면, 하고 속으로 빈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습관처럼 빌었을 뿐이었다. 간절히 빌고 빌어서 그것이 실현이 된다하더라도, 다음이 또 있다는 것을 연서강은 이제 충분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알아차려도 감흥 없는 비밀이었고, 열없는 소망이었다.

 “.......저는 그렇다 치지만.”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해진 몸과 달리 뒷덜미가 서늘하다. 연서강은 괜히 제 뒷덜미를 손으로 쓸고는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원래 남자를 안는 취향이셨습니까?”

 물을 마시다 말고 연무강이 입을 다문다. 어쩐지 쳐다보는 눈빛이 냉랭해서 연서강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이 궁금해져서 물었던 것뿐인데 왠지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물거리며 연서강은 자신이 했던 질문을 수습했다.

 “아니......., 예전부터 계속 혼담이 들어왔는데도 아직 성혼을 하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진 형님께서는 이미 예전에 가정을 이루셨는데......., 해서, 그냥 여쭈어 본 것이니 크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형님이 남색(男色)을 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해 본 말이니.......”

 “.......”

 헌데 수습한답시고 말을 하다 보니 역시 이상하다 싶었다. 여인은커녕 내내 주변에 기연조 밖에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연무강은 장안에 이름이 난 미인들과 벌써 수번이나 혼담이 오가지 않았던가. 연무강은 지위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현재 그보다 잘난 낭재(郎材: 신랑감)는 없다는 것이 장안의 평판이니 혼담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연무강과 혼담이 오고 간 여인 중 그와 깊은 관계로 발전한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 번 의심하고 나니 더더욱 수상했다.

 “혹시 원래부터 여인에게 관심이.”

 “연서강.”

 거기까지 말하였을 때 연무강이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어라 말을 본격적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연서강은 지금 연무강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화났다. 왜인지 몰라도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쓸모없는 입 같으니라고. 연서강은 합 입을 다물고 연무강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연무강이 연서강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허면 나부터 묻자꾸나. 네놈은 어째서 기연조를 연모하는 것이냐.”

 “.......”

 차가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다.

 “기연조가 네게 무얼 해 주었느냐. 네게 별이라도 따주었느냐. 아니면 달이라도 따주었느냐. 밤하늘에 별과 달이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인 것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도 않으면 녹우당에 있는 꽃들을 모두 꺾어 네게 안겨주기라도 하였느냐. 아름다운 보석이 장식된 가락지라도 선물해 주었느냐.”

 더 듣지 않아도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연조......., 기껏 해봐야 몇 주나 지났을까. 헌데 연서강은 그 이름이 아주 오랜 옛날에 들었던 이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실제로 이제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아찔한 곳에 있는 이이기도 했다. 연서강은 그와 함께 있었던 옛일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시시콜콜하게 나누었던 이야기부터 기연조가 선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까지.

 “.......”

 연무강의 질문은 자신도 궁금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였다.

 그가 자신에게 대체 무엇을 해 주었기에 ‘친구’인 것도 모자라 연모의 마음까지 품었단 말인가. 그가 자신에게 해준 것들은 전부 ‘우애’의 범위에서였다.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을 여인이라 착각하고 대한 적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서강의 마음속에 어둑어둑하게 내려앉는 것은 핏방울과 같은 진한 애련이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상대에 대한 질투와 그런 상대를 잣ㄴ이 다 차지하고 싶은 독점욕과 그립고 그리운 연정이었다.

 그러니 외사랑이 된 것인가, 그렇게 자조하며 연서강은 대답했다.

 “.......아무것도요.”

 자신이 기연조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연무강이 알고 있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혹 형님께서도 연모하는 이가 생기게 되면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이 제게 딱히 아무것도 해 주지 않더라도, 그저 그 사람이라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좋다는 감정을.”

 내뱉고 연서강은 흐리게 웃었다.

 “그냥 좋습니다.”

 이전에는 홀로 끙끙거리고 벙어리 냉가슴처럼 품기만 했던 연정을 지금은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다. 말해봤자 자신이 품었던 애달픈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듣고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실체화되기는커녕 말조차 되지 못하고 그냥 가슴속으로 사라졌을 연정을 소리를 입혀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것만이 현재, 자신이 기연조를 좋아한다는 것을 유일하게 증명해주는 증거 같았다.

 “.......”

 말을 마치고 연서강은 당장 연무강으로부터 불호령이나 냉랭한 조롱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어찌된 연유인지 그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연서강은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었다. 입을 다문 연무강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연모하는 이, 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연무강이 그리 되뇌었다. 왜인지 그리 되뇌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여 있었다. 즐거워서 웃는 것과는 그 색이 달랐다. 연무강이 손을 들어 그것을 연서강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이 안에 기연조 밖에 없다 해도, 연서강.”

 그가 연서강의 이마를 가벼이 밀었다. 그 힘에 뒤로 몸이 쏠리자 그대로 그가 연서강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순식간에 침상 위에 몸을 눕히게 된 연서강은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연무강을 떨리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무강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자신을 바라보는 연무강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잇었다.

 “내 앞에서 그 놈에 대해 말하지 마라.”

 “.......”

 “내가 물어봐도 모르는 척 하거라.”

 그리고 연무강이 두 손으로 연서강의 목을 쥐었다.

 “내가 너를 취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너는 나만의 것이니, 아무 남자의 이름도 입에 올리지 말거라.”

 목을 쥔 연무강의 두 손에는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연서강은 그것이 쇠로 만들어진 무거운 족쇄라도 되듯 괴롭게 두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내가 널 어쩔지 모르겠구나.”

 일이 끝날 때까지는 무사해야 되지 않겠느냐, 귓가에 그가 그리 속삭였다. 귓불에서 맴돌던 남자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오고 이어 밖으로 드러난 어깨를 훔친다. 자신의 목을 쥐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제 허벅지를 잡았을 때에도 연서강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윽고 하체가 들리고 둔부 사이로 남자의 성기가 들이밀어졌다.

 “.......”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남자의 일부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 안으로 들어오는 살덩이에 내부가 눌리고 가득 차게 되자, 비틀린 연서강의 입술 사이로 절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서강은 두 손으로 제 밑에 깔린 이불을 꽉 쥐었다.

 창밖에서 여름의 매미가 울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곧 절명할 듯이.

               * *

 날이 흘러 비로소 구월에 접어들었다.

 구월이면 가을이 시작된다지만 여전히 햇볕은 따가워서 아직까지는 가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름에 더 가까운 날씨였다. 아마 점차로 하늘의 해가 높아지면서 공기도 점점 차가워져 시월로 넘어가면 비로소 완연한 가을이 되리라. 작년까지 주욱 그랬으니 올해도 다름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아직 가을이 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연서강은 마치 서리라도 맞은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제 마치시었소?”

 시간은 늦은 오후, 연서강이 서서원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고 퇴청(退廳)했을 때였다.

 요새 서서원은 바빴던 장마 때를 지나 다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은 연서강이 처음 서서원에 왔을 때보다 더더욱 없었고, 때문에 비서랑이라는 직위에 대한 보람 또한 땡볕의 풀떼기마냥 시들시들 해져가고 있었다. 장마 때에는 그래도 자신이 충실히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서서원을 다니는 것에 어느 정도 보람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서서원에 다닌단 말을 남에게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한가해졌다.

 심지어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구월 구일부터 시작되는 수확제 준비로 궐내의 웬만한 곳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나칠 때마다 슬쩍 들여다보면 걸을 여유도 없이 숫제 뛰다시피 하면서 일하고 있는 다른 관청 사람들과 비교가 되어서 대체 자신은 왜 꼬박꼬박 서서원으로 등청(登廳) 따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따.

 때문에 너무 늘어진 채로 지냈던 모양이다. 오늘부터 구월에 접어들었다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연서령.......”

 혜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가 자신이 나오자마자 그 앞을 가로막은 한 여인의 모습에 연서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올 여름 변방에서 보고 그 후부터는 전연 보지 못했던 여동생이 평복(平服)을 입고 떡 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문가 규수답지 않은 풍채와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연서강이 할 말을 잊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혜문을 지나가는 경비병 몇몇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언제 수도로 돌아오셨느냐며 인사를 건넨다. 그런 경비병들을 연서령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금은 바쁘니 닥치고 가라.’, 며 손만 휙휙 내저었다. 수도의 경비병들도 그녀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아는지 ‘아, 네.......’하고 연서강과 그녀를 번갈아 보며 자리를 떠난다.

 “.......”

 연서강은 그 떠나는 경비병을 붙잡고 살려 달라, 말하고 싶었다.

 눈앞의 연서령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시선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무슨 핑계라도 대고 수안궁으로 도망 칠 것을, 허나 후회해봤자 이미 만난 호랑이를 못 만났다고 하고 지나칠 순 없었다.

 “오, 오랜 만이구나.”

 “.......”

 일단 인사를 건네 보았지만 연서령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연서강은 일단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이제 어쩐담.’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르는 생각은 태상이 해준 말이었다.

 -가서 여동생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게. 허면 죽이지는 않을 걸세.

 연서강은 그때의 태상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정말입니까. 정말 진심을 담아 사과하면 죽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까. 헌데 지금 저 애 얼굴은 이제 와서 사과고 뭐고 일단 자신의 편지를 무시한 것은 맞지 않냐고 따지는 얼굴인데? 사과를 듣기 전에 일단 몇 대 맞고 시작하자는 얼굴인데?

 허나 사과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쪽이 훗날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기는 했다. 해서 연서강은 애써 입을 열었다. 사과를 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언, 언제 왔느냐?”

 이 물음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에. 도착하자마자 여기로 와서 당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지.”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춘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서서원으로 쳐들어갈 뻔 했어.”

 “.......”

 수안궁으로 안 피했길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자신이 수안궁으로 도망을 쳤더라면 애꿎은 서서원 동지들만 괜한 평지풍파를 당할 뻔 했다. 요사이 유독 유유한한(悠悠閑閑) 일정 때문에 평소보다 더 잠연(湛然)한 서서원인지라, 연서령 하나만 가서 난리를 피워도 서서원은 충분히 뒤집어지고도 남을 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동료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흉흉해지겠지.......

 “어, 그, .......허벅지는 다 나았느냐? 흉은.”

 “다친 지가 언젠데 여태까지 아프겠어.”

 “그렇기는 하지.”

 연서령의 냉랭한 대답에 연서강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저히 ‘답장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행여 ‘서신’이나 ‘답장’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가는 지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평화가 와장창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편지’에 대해 무어라 말만 하길 기다리고 있는 연서령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취(禿鷲: 독수리)와 닮아 있다.

 .......무섭다.

 “.......어, 그것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 상태로 혜문에서 대치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수 십분도 넘게 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자신들을, 혜문을 지나가는 관리며 병사들이 힐끗힐끗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수상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연서강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일에 혜문에서 연씨 문중 남매가 혈투를 벌였더라, 라는 헛소문이 퍼지고도 남으리라.

 연서강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바빴던 터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연서령의 뾰족한 말이 날아왔다.

 “호오, 바빴다? 변방보다 더 바빴단 말이오? 어디가? 서서원이?”

 “.......”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얼마나 바빴기에 종이 한 장에 글 한 자 적어 보내지도 못 하였소?”

 연서령이 제 허리에 두 손을 말아 올리며 연서강을 한껏 노려보았다. ‘어서 말해 보라니까.’ 닦달하는 그녀의 기세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는 그 말을 사정없이 쪼아 무참한 넝마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 의진 형님도 아실 것이다. 내가 바빴다는 것을.”

 이렇게 된 이상 장소라도 이동하자, 게다가 의진 형님이라면 이 가물치 같은 여동생을 어찌 중간에서 중계해주실 지도 모른다. 아니, 의진 형님이라면 능히 그러실 수 있을 터이다. 의진 형님이 다루는 귀중한 약재 중에는 말린 고래와 상어 이빨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고작 가물치 정도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연서강의 머릿속에서 쫓기듯 이어졌다.

 “진이 오라버니께서?”

 연서령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인상을 썼다. 연의진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먹힌다는 것을 깨닫고 연서강은 냉큼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연서령이 잠시 망설이는 티를 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것은 추풍(秋風)보다 더 스산한 목소리였다.

 “진이 오라버니께서 그걸 증명하지 못하시면 당신은, 이제 죽었어.”

 태상경, 태상.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연서강은 속으로 태상을 부르며 낯을 굳혔다. 연의진이 무어라 대답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대답이 현재 분노한 연서령을 진정 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서령이 꽉 연서강의 팔을 잡았다.

 “그럼 가지.”

 “.......”

 해서 그들은 영의전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갑작스레 영의전 밖으로 불려나와 연서령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연의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어라고?”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 ‘서령이, 너는 언제 왔느냐.’ 그리 말하고, 또 연서령에게 꽉 잡혀 있는 연서강을 보고는 ‘넌 또 왜 서령이에게 붙잡혀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연서강은 ‘의진 형님.......’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연서강이 연의진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며 연서령이 입을 열었다.

 “언제 왔는가 하면 오늘 왔어요.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오라버니.”

 “집에는 갔다 왔느냐? 아버님께는 인사드렸고?”

 그리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연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하고 답했다. 연서령의 시원한 대답에 연의진이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연서령과 연서강 두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헌데, .......서강이는 왜 끌고 왔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연서령이 입을 열었다.

 “내 의진 오라버니께 묻고 싶은 게 있소.”

 “무언데?”

 여전히 의아한 얼굴인 그를 보며 연서령이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따.

 “연서강이 정녕 바빴나요, 여름동안? 눈코 뜰 새 없이?”

 그녀의 질문에 연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서령아. 서강이는 네 오라버니인데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그런 것은 일단 내버려두고 대답부터 해주시오.”

 연서령이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대꾸한다.

 그녀는 빨리 연의진에게서 확답을 받고 연서강에게 무어라 소리를 치고 싶었다. 변방에서 고민, 고민하다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받고 연서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기뻐할까, 싫어할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편지를 버려 버릴까. 변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연서강이 자신의 편지를 받고 기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기뻐하지 않으면 싫을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싫어하지만 않았으면.......’하고 애달픈 것으로 변해 갔다.

 그녀는 연서강이 자신의 편지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했다. 해서 연서강이 무어라 답장할지 고대하며 그녀는 애타게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연서령은 ‘혹시 연서강이 자신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염려까지 들어 우울해했다.

 허나 그것도 딱 보름 동안 만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초조함과 우울함은 점차 짜증으로 바뀌었다. 답장 하나 보내는 것이 뭐가 힘들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점점 자라나 짜증은 분노가 되었다. 제까짓 것이 무엇이기에 남의 편지를 이렇게 생무시를 할 수 있나!

 분노는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상실된 이성은 말도 안 되는 쪽으로 그녀를 뻔뻔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고맙다고 했잖아! 여동생이 그렇게 말을 했으면 마음을 풀 것이지, 뭘 쩨쩨하게 꽁해가지고 자신의 편지를 무시한단 말인가!

 여기까지가 바로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의 생각이었다.

 허나 연의진은.

 “그런 것이라니. 이제 서강이도 본채로 돌아왔으니.”

 그녀의 답답한 속을 알아차려 주기는커녕, 여전히 연서령을 나무라고 있었다. ‘이 잔소리꾼!’ 연서령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변방에 가기 전에도 구구절절 잔소리가 심하더니 아직도 여전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연서강이 과연 자신에게 편지를 못 부칠 정도로 바빴나, 안 바빴나였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럴 때 자신이 괄괄하게 날뛰면 연의진의 잔소리도 한층 더 심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잔소리를 연서령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연의진은 연씨 형제들 중에서 가장 고집이 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 될 줄 알았기에 그녀는 영의전으로 오는 걸 잠시 망설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아! 알았소. 서강 오라버니께서, 정녕 바쁘셨소?!”

 이러다가 오늘 내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힘들겠다고 생각이 들어, 연서령은 일단 굽히고 들어가기로 했다. ‘오라버니’란 호칭을 붙여 주자 그제야 연의진이 ‘바빴냐고?’하고 그녀의 질문을 제대로 들어주었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연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서강이 바빴냐고 묻는다면.......”

 하고 말을 이으며 연의진은 연서강을 잠시 보았다.

 연의진과 눈이 마주 친 연서강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연의진이 요새 자신이 얼마나 한가한지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족족 수안궁과 영의전에 놀러간 턱이었다. 영의전도 요새 들어 좀 한가해져 연서강이 찾아가면 연의진은 그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밥도 여러 번 함께 먹었었다.

 그런 연의진이니.......

 “서강이, 너.......”

 무어라고 답할지 연서강은 당연 알 수 있었다.

 “요새 좀 한가.”

 “악! 어깨가!”

 해서 연서강은 제 어깨를 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연서령과 연의진이 놀란 눈을 했다.

 “연서강?!”

 “서강아, 왜 그러느냐?”

 여전히 어깨를 쥔 채 연서강은 소리쳤다.

 “어, 어깨가 아픕니다. 아파요!”

 그 소리에 연서령이 움찔해선 제가 잡은 연서강의 팔을 놓았다. 연의진이 연서령을 얼른 쳐다보고 추궁했다.

 “서령아, 너 서강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의심을 받은 연서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오 나, 나는 그냥 끌고만 왔소이다. 팔 잡고 끌고 오기만 했었는데.”

 어깨가! 어깨가! 그런 그들의 대화 위로 연서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의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팔을 너무 세게 잡아당긴 것은 아니냐? 아니면 팔을 당기면서 실수로라도 어깨를 친 것이 아니냐? 서강이가 변방에서 어깨를 다친 걸 알면서 왜 그랬느냐.”

 “정말 나는 팔을 잡고 끌고 오기만.......”

 연서령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듯 연의진이 연서령의 말을 무시하고, 상체를 숙여 연서강의 팔을 잡았다.

 “서강아, 괜찮으냐?”

 연의진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 걸 보니, 연서령도 이것 심상치 않다 여겨졌는지 얼굴빛이 흐려졌다. 연서령의 머릿속 생각들이 재빠르게 흘러간다.

 심하게 다쳐서 후유증이 남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일상생활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후유증이 남았는지는 미처 전해 듣지 못했다. 연서령은 점점 두려워졌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이라도 한 것인가. 기억은 안 나지만, 노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연서강을 만나자마자 어깨를 후려쳤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수도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는 연서강이 이리 아파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깟 편지, 그깟 답장 안 받으면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그새 연서강이 자신을 구해준 일을 잊었단 말인가. 연서강은 자신의 꿈을 알고 대신 다친 거였는데!

 “괜, 괜찮아? 내가 너무 세게 잡아 당겼던가? 어, 어찌 하면?”

 놀란 그녀는 연서강과 연의진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어찌 하면 되오? 진 오라버니,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연의진이 그런 그녀를 추궁했다.

 “그러기에 감정만 앞세워서 행동하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알았어, 그러니까!”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연의진이 영의전 안을 가리키며 말햇다.

 “가서 진통제 좀 달라 하렴.”

 “알, 알았어.”

 연서령이 허둥지둥 영의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연의진은 조용히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영의전 안으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자, 연의진은 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서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서령이한테 무슨 잘못을 한 거냐.”

 역시 의사이긴 했다. 그는 연서강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아픈 척을 한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하긴 눈치 채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었다. 연서령도 연의진이 호들갑을 떨지 않았더라면 곧 거짓이란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 말에 연서강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연의진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하기는 무엇이 감사할까. 그나저나 정녕 서령이한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 아이가 변방에서부터 씩씩거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더냐.”

 해서 연서강은 연의진에게 답장을 안 보내서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명을 듣고 난 뒤 연의진이 ‘그 아이도 참.......’하고 영의전을 돌아보며 웃는다. 그리고 ‘나중 서령이의 분노가 좀 가라앉으면 그때, 꼭 사과하렴.’하고 연서강에게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과만 하면 아마 금세 원망은 잊을 게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하고 대답했다. 한숨이 다시 또 절로 나왔다.

               * *

 연서령이 본가로 돌아왔다는 말이 언제 그리 멀리까지 퍼졌는지, 저녁 즈음에는 연무진이 본가에 얼굴을 내밀었따.

 이미 석반(夕飯)을 들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기 때문에, 본채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연무진 또한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해서 본채의 하인들은 부리나케 여러 가지 귀한 과일이며, 고기 안주 따위를 올린 주안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헌데 대체 어찌된 연유인지 연서령과 연무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서강이 머무는 방에 모여들었다. 주안상 역시 연서강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연무진이야 현재 자신이 쓰고 있는 방의 원래 주인이니 그렇다 치지만은 연서령까지 왜 이 방으로 들어왔는지 연서강은 도통 알 수 없었다.

 허나 ‘어째서?’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주안상은 방 한 가운데 차려지기 시작했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연무진과 연서령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리는 비워놓고, 방 한 구석에 멍하니 서 있는 연서강을 보고는 어서 안 오냐는 듯 응시하는 것이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연서강은 이불과 베개를 잡은 채 인상을 썼다. 연무진이 그런 그를 재촉했다.

 “어서 와 앉으렴.”

 “.......”

 혹시 자신이 저들과 오늘 술자리를 갖기로 약속을 했었나?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가 한 말을 다 기억하기는 힘드니, 혹시 자신이 몽유병이라도 있어 어젯밤에 그들을 방문하여 ‘몇 날 몇 시에 내 방에서 술자리를 가질 예정이니 꼭 참석하시오.’하고 말이라도 한 게 아닐까.

 하지만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무진이야 궐내에서도 만나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 그렇다 치지만, 연서령은 지금껏 죽 변방에 있다가 오늘에서야 수도에 도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생각을 채 정리하지도 못하고서 연서강은 조심스레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연서강이 자리에 앉자마자 연무진이 익숙하게 술병을 들어 각자의 잔에 술을 따른다. 연서강의 잔에 술을 따를 때에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따르더니, 연서령의 잔에 따를 때에는 특별히 무어라 말을 하였다.

 “자, 우리 막내. 변방에서 고생이 참 많았소이다.”

 그러자 연서령이 잔을 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생은 무얼, 향이 언니가 더 고생이 많았지.”

 이어 연서강을 보며 연서령이 말한다.

 “너도 고생이 많았어.”

 연서강이 가만히 있으니 옆에서 연무진이 그에게 잔을 들라고 속삭인다. 해서 연서강은 잔을 들었다. 잠시 맥이 끊어졌던 괴이한 술자리가 그로 인해 다시 이어졌다. 연서강이 잔을 들자 연서령과 연무진이 동시에 입을 연다.

 “먹고 마시고 죽자꾸나.”

 “그럽시다.”

 “예?”

 뭐, 뭐라고? 연서강은 어리둥절해하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을 마친 연서령과 연무진이 동시에 술잔을 비운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들이 또 동시에 ‘크윽.’ 소리를 내며 고기 안주를 하나씩 입에 넣었다. 연서강만 여전히 술잔을 두 손으로 든 채 멀뚱히 있을 뿐이었다. 연서령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한다.

 “너도 어서 마시지?”

 아무래도 방금 있었던 일은 연서령과 연무진이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하는 행동인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엇비슷하여 친하게 지냈더라지......., 과거의 일들을 새삼 추억하며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술잔을 비웠다.

 연서강이 잔을 단숨에 비우지 않자 연서령이 ‘그러면 안 되지.’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연무진이 거들었다.

 “형님이 준 술을 다 마시지 못하겠단 말이더냐?”

 “아, 아닙니다.”

 해서 결국 연서강도 잔을 모두 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잘했다며 연서령과 연무진이 박수를 친다. 이어 연서령이 술병을 들고 ‘그럼 이제 내가 따르오.’하고 말한 뒤 방금 연무진이 했던 대로 세 개의 술잔에 각각 술을 따른다.

 .......또?

 연서강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제 슬슬 어찌 굴러가는 술자리인지 깨닫기 시작한 탓이었다.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술을 채우고 단숨에 마시는 걸 반복하는 모양이구나. 빠른 속도로 급하게 술을 마시니, 술을 못 하는 사람은 결코 끼어들어선 안 될 자리였다.

 “자!”

 술을 모두 따른 연서령이 다시 잔을 들었다. 그것은 연무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직 잔을 들지 않은 연서강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무언의 압박에 의해 연서강 또한 결국 잔을 들고 말았다.

 “오늘은 저도 왔으니까 마음껏 마시십시오.”

 말을 마친 연서령이 또 단숨에 잔을 비웠다. 연무진도 역시 그러는 것을 보고 연서강은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얼마나 반복이 되는 것인가. 종종 기연조와 술자리를 갖기는 했지만, 술은 그저 흥취만 돋우는 수단일 뿐이었고 대화가 주가 되는 자리어서 연서강의 주량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연서강이 술을 마시지 않는 걸 본 연서령이 묻는다.

 “이 막내가 주는 술은 마시지 못하겠단 말이오?”

 “.......”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방금 전 연무진이 했던 말과 비슷한 말로 사람을 압박하는 연서령을 향해 연서강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또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연달아 술잔을 비운 탓에 핑, 취기가 돌았다. 따끈따끈해지는 뺨을 느끼며 연서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를 어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오늘 아주 작정하고 술을 마시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만 빼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며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그때, 연무진이 냉큼 먼저 연서강에게 말을 걸었다.

 “서강이는 이 형님께 술을 따라주지 않는 것인가?”

 “.......”

 연서강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연서령과 연무진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자신의 잔에도 역시 술을 따랐으나 가득 채우지는 않고 반 정도만 채웠다. 채우는 양은 별로 상관이 없는지 그것을 본 연무진과 연서령은 아무 타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또 잔을 들고 연서강을 보았다. 이제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인 연서강도 잔을 들었다.

 “.......”

 그러나 아까와 달리 그들은 바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계속해서 연서강을 볼 뿐이었다. 왜 그러지, 싶어 멀뚱히 눈알만 굴리고 있다가 이윽고 연서강은 지금과 방금 전이 무엇이 다른 지 깨달았다. 그것까지 해야 하나....... 망설여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연서강을 도와주지 않았다. 다시 또 한숨을 내쉬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거, 건강하십시오.”

 “암, 암, 서강이도 건강해야지.”

 “오라버니의 건강을 위해서.!”

 연서강의 말에 연서령과 연무진이 각각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또 단숨에 잔을 비운다.

 세 잔째가 되니까 순간 시야가 핑글 돌았다. 네 잔째는 정말 무리겠는데, 싶어 연서강은 다시 누군가 잔에 술을 부으면 그만 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허나 사람 수에 맞춰서 하는 것이었던지, 차례가 되어도 연무진은 술을 따르지 않았다.

 다만 연서령을 보며 이리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의향이는 역시 겨울이 되어야 올 수 있겠더냐?”

 연무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연서령이 ‘아마도 그럴 것 같으오.’라고 대답한다. 경국에서 온 사신도 돌아간 지 한참 되었다. 사신이 돌아간 후부터 지금까지의 날수를 계산해 보며 연서강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허면, 지금이 가장 바쁠 때가 아닌가?”

 사신이 돌아가고 경국에서 허락이 떨어졌을 테니, 변방에선 지금쯤 한창 국경에 불을 놓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니 의경을 지키는 연서령이 한가로이 수도를 방문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역시 수도에 앉아서는 변방의 사정을 헤아리기는 힘든 것인지 연서령이 고개를 젓는다.

 “불을 놓는 것이야, 몇 명만 있으면 될 일이니....... 그다지, 향이 언니께서 지금이 아니면 수도에 언제 들리겠느냐, 하고 말도 하셔서 이리 오게 되었어.”

 그 말에 연무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이 모두 끝나고 오면 될 일 아니더냐. 아니면 수확제에 맞춰서 오지 그랬어, 왜 이리 일찍 왔느냐? 수도에서 뭐 할 일이라도 있어?”

 연무진의 질문에 연서령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루었다. ‘그게.......’ 그리고 그녀는 연서강을 힐끔 보았다. ‘상처가 다 나았는지 어쨌는지 전혀 답이 없어서.’ 이어 중얼거리는 말에 연서강은 아차, 싶었다. 누가 어찌 되었는지 편지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변방에 있는 연의향과 연서령이 그 사정을 알 리가 전무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어 나오는 말이 연서가의 심장을 푸욱 찌른다.

 “답장을 못해서 미안하구나. 깜박하였다, 정말 미안해.”

 연서강의 사과에 연서령이 뾰족한 목소리로 묻는다.

 “허면 내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왜 답이 없었소?”

 “.......”

 거기에 차마 ‘무서워서.’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연서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연서령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순간 또 변방에서 답장을 기다리며 시꺼멓게 태웠던 속이 생각나, 울컥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허나 곧 영의전에 있었던 일도 함께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꾹 주먹을 쥐며 화를 삭인다.

 연무진이 ‘자자.’하고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염려해 연서령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연무진이 술을 따라주자 연서령이 마치 속에 일어난 불에 물을 끼얹듯 잔을 비웠다.

 “보다시피 서강이는 무사하단다. 아직 다친 어깨를 잘 쓰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무인의 길을 걸을 것도 아니니 본인도 개의치 않아하더라. 그러니 서령이 너도 그만 걱정하고 속을 풀렴.”

 “.......”

 어깨를 잘 쓰지 못한다는 연무진의 말에 연서령의 노기가 금세 푸시식 가라앉는다. ‘무인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도.......’ 무어라고 말할 작정이었는지 입을 연 그녀가 말하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입을 다시 다문다.

 그녀의 얼굴에 어둑어둑한 빛이 내려 앉아 있어, 연서강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해서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괜찮대도.’라고 말을 해주었다. 서글퍼 하지 말라고 한 말인데도 연서령의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침묵한 뒤 연서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향이 언니가 전하라고 준 것이 있어서 이리 빨리 오게 되었소. 원래는 수확제 기간에 오려고 했는데, 이것을 조정에 전하려면 좀 더 일찍 오는 게 좋아서.”

 그리고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청록색 비단으로 감싸인 서신이었다.

 “무어더냐?”

 연무진이 묻자 연서령이 연서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추천장이요.”

 “추천장? 아.......”

 연무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곧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어 그가 연서강을 보며 히죽 웃었다.

 “서강이, 너 좋겠구나.”

 “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어 연서강은 이맛살을 구겼다. 추천장이란 말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연서령이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향이 언니가 수확제에 있는 공치식에 너를 추천했어. 이건 그 추천장이지.”

 “공치식에 이름이 거론되면 틀림없이 승진이지, 암암.”

 모자란 부분을 연무진이 보충해준다. 승진이라....... 연서강은 ‘그렇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서령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연무진도 마찬가지였다.

 “기쁘지 않으냐?”

 “예?”

 연무진의 질문에 연서강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연서령이 연달아 묻는다.

 “승진하는 게 기쁘지 않소?”

 그들이 무얼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연서강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아니다. 기쁘다. 기쁘고말고.’ 서둘러 대답하고 나서 연서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뻤을 것이다. 변방에서 돌아온 직후였더라면, 승진하기만을 애타게 바랐던 그때였더라면, 하지만 지금은.

 곧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실감이 나지 않아서.......”

 얼마나 얄궂게 찾아온 때인가.

 이제 와서 승진을 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자신을 모든 것을 끝낸 뒤였다. 지금은 그저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변방에서 있었던 일들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며, 그 증거품을 내밀어 승진할 수 있다 말을 하면 자신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왜, 이제 와서?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모두 다 소용없었다. 지금은 승진이고 뭐고, 하다못해 얻어 놓은 벼슬자리 또한 모두 쓸모없는 게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그렇게 바랐던 일인데 시기를 잘못 타고 온 행운인지라, 그 빛을 잃고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무가치해졌다.

 이제 와서는 전부 쓸모없다.

 “.......좀 얼떨떨하구나.”

 그의 대답이 이해가 간다는 듯 연서령이 중얼거린다. ‘하긴 나도 처음 무과에 합격했다 들었을 때, 실감이 나지 않았다지......’ 그 말에 연무진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기는 하지.’ 곧 그가 연서강의 등을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공치식이 되면 그때는 좀 실감이 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연서강은 다만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연서강에게는 수확제며, 공치식도 머나먼 일로만 느껴졌다. 그에게는 수확제나 공치식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구월 구일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구월 구일이 지난 뒤의 일이 어찌될지는 연서강도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일이 잘 풀리느냐, 아니면 엉망진창이 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수확제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결정된다. 겨우 한 달 후의 일임에도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연서령이 다시 품에 서신을 넣으며 ‘해서.’하고 말을 시작했다.

 “수확제 전에 급히 와야 했어.”

 “하긴......, 심사는 공치식이 열리기 보름 전부터이니 지금 추천장을 갖다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리고 무얼 생각했는지 돌연 연무진이 술병을 들고 세 개의 잔에 술을 따른다.

 “자, 미리부터 축하하자꾸나. 연서강의 승진을 축하하며.”

 그렇게 말하고 연무진과 연서령이 술을 마신다. 연서강은 잔을 든 채 만 채하며 입을 다물었따. 축하, 란 말도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미 잔을 비운 연무진과 연서령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았을 때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감사합니다, 형님. 고맙다, 서령아.’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요사이 웃을 때마다 연서강은 자신이 빈틈없이 얼굴에 밀착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술자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두 시진 정도 지났을까, 밖에서 밤이 깊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연무진이 ‘아차.’하는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오늘은 빨리 집으로 들어간다고 약속했는데.’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탁치며 연무진이 침울한 얼굴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부인인 안계영이 무어라 잔소리를 할지 빤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무진이 말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힘들겠구먼.’하고 그 모습을 본 연서령이 명문가의 아가씨가 아니라 마치 저잣거리의 아저씨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연무진이 살짝 인상을 쓰며 연서령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네가 가정을 이뤘을 때 어찌하나 두고 보자.’ 연서령이 프흐흐흐, 괴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날 데리고 갈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하고 대꾸했다.

 하긴 언니인 연의향도 여태 성혼을 치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녀보다 더 어린 연서령이 성혼을 치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듯 했다. 하지만 연무진은 짓궂게 반박했다. ‘네가 향이보다 먼저 갈 거라고 내가 장담하지.’ 연서령이 입술을 삐죽였다.

 무어라 더 반박하고 싶은 듯 했지만 연무진이 그 말을 더 들어줄 상황이 아니란 것을 그녀는 아는 듯 했다. ‘어서 가. 어서 가란 말이오.’라고 말하며 연서령은 연무진의 겉옷을 챙겨주었다. 그녀에게서 겉옷을 받으며 연무진이 다급하게 ‘얼굴을 봐서 정말 좋았다, 서령아.’하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연서강에게도 ‘너도 마찬가지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라고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땡, 땡, 울리는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방밖을 나가는 연무진을 배웅하고 연서강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에는 연서령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의자에 앉아서 난초가 그려진 술병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깨는 정녕 괜찮은 거야?”

 “그래.”

 그녀와 얼굴을 마주 하고 어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니 여기가 본채의 방안이 아닌 변방의 막사 안처럼 느껴졌다.

 구월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후끈후끈한 밤공기가 거슬려서 연서강은 잠시 닫아놓았던 창문을 다시 열었다. 허나 달빛이 내려앉은 창밖의 정경이 눈에 익숙한 녹우당의 것이 아닌지라 연서강은 더 답답해졌다.

 “의향 누님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시더냐.”

 “그냥, .......똑같지. 늘 항상.”

 대충 대답을 하는 모양새가 무어라 딴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창밖을 내다보다 연서령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뭐, 따로 할 말이 있느냐?”

 “.......그렇다기보다는.”

 거기까지 말하고 또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데에 짜증이 치밀 수도 있겠지만 연서강은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말을 하려면 말을 하겠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자신에게 관심 없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귀를 기울여 들어도 지금의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싶었다. 연서강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의 녹색 잎들이 어둠에 잠겨 있으니 새까만 곤충의 날개처럼 보였다. 녹우당, 녹우당에서는 아직 꽃향기가 진동하고 있을 테지. 이 즈음되면 피는 꽃들이 무엇이었더라. 눈을 감아도 선한 광경임은 틀림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같이, 태상경을 뵙지 않겠소?”

 “태상?”

 문득 들리는 말에 연서강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연서령이 그런 연서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았어....... 변방에서, 계곡으로 가는 내게 그들을 구해내지 않으면 죄책감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이라고.”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무모함을 탓하면서, 그러나 일어난 일을 어떻게 돌릴 수 없음을 알고. 계곡으로 보낸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아서 생각하면 너무 답답하고 슬프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이름과 출생지와 나이를 적어왔어. 그러니.”

 “태상경께 공양이라도 해 달라 부탁하려고?”

 우물쭈물하며 그녀가 말을 잇는다.

 “태상경과 사적으로 알고 지낸다는 소릴 들어서.”

 “.......”

 그런 말까지 궐내에서 돌고 있나 보다. 오늘 막 수도에 도착한 연서령이 들었을 정도면.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태상이 자신을 찾기 위해 변방으로 왔었으니, 연서령이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기도 했다.

 제발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전자라면 혹여라도 수안궁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워졌다.

 연서강으로부터 아무 반응도 없자 연서령은 시무룩해졌다. ‘아니라면, 나 혼자 가겠소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연서강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같이 가자꾸나.”

 그 말에 연서령이 언제 시무룩해 했냐는 듯 고개를 번쩍 든다. ‘정말이오?’ 그리 묻기에 대답했다. ‘그래.’

 안 될 것도 없었다. 조금 더 날이 지나면 태상도 수확제 준비로 바빠진다고 하였다. 허니 그 전에 빨리 갔다 오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나도 널 따라 공양을 드려야 할 것 같으니.”

 연서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누구를?’

 “모른다.”

 적의 소년병이니,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나이도 몰랐다.

 뭔가를 눈치 챘는지 아니면 그냥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연서령은 ‘그래...?’하고 말 뿐, 더 이상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다. 또 다시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연서령이 어색함을 느끼는지 괜스레 술잔으로 술병을 두드린다. 짤랑짤랑, 도자기끼리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방울 소리와도 같았다. 이제 여름 매미는 모두 죽고 방울벌레가 나타나는 시기인지라 그 소리가 이 밤에 썩 잘 어울렸다.

 “.......허면, 명일(明日: 내일)은 어떨까?”

 순간 연서령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내일?’하고 연서강이 되묻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양을 드리러 가는 것, 명일 당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에 연서강이 딱 잘라서 대답했다.

 “안 돼.”

 “뭐, 왜?”

 연서강이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그녀의 얼굴 위로 의아함과 서운함이 드러났다. 열었던 창문을 닫고 소름이 돋아난 제 팔을 쓸며 연서강은 대답했다.

 “명일은 큰 형님께서 집으로 오시는 날이다.”

 “그게 왜?”

 이해하지 못하고 연서령이 거듭 묻는다.

 그 물음에 연서강은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왜 안 되냐고? ‘그걸’ 구구절절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한단 말인가? 큰 형님이 집으로 오는 날은 왜 안 되는지. 자신이 왜 집에서 그 큰 형님의 귀가를 기다려야 하는지. 지금 자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그녀는 상상이나 할까. 아니,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팔을 쓸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연서령이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설마 관계를 가지려고 할까. 하인들이야 명령만 내리면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지만, 연서령은 아니다. 관계를 가지던 중, 만약 연서령이 자신의 방을 찾아오면 어쩐단 말인가. 그렇게 된다면 또 소리는 어쩌고. 그리고 만에 하나 연서령에게 그런 꼴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결코 알지 못 할 것이다.

 불쑥 솟아오른 짜증을 애써 누르며 연서강은 연서령을 보았다. 연서령을 돌아볼 때, 연서강의 얼굴은 들끓어 오르는 속과 달리 매우 평온했다.

 “내 일을 마쳐야 함께 수안궁에 갈 수 있을 터인데, 그러면 만시(晩時: 늦은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 큰 형님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실 테니 그때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아버님께는 인사드렸어도, 아직 큰 형님은 뵙지 못하였지?”

 “그렇기는 하다만, 큰 오라버님이야 늦게 봐도 괜찮고.......”

 그녀가 망설이며 말한다.

 “안 돼.”

 연서강은 연서령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중에 형님께 무어라 듣긴 싫다.”

 “.......”

 연서령에게도 연무강은 무서운 오라비인지라 그녀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알았어.’ 그리 대답하고 그녀는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그럼 언제가 좋겠소?’하고 묻는다. 그런 그녀를 연서강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에게는 죽어도 연무강과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 혜문에서 평상복을 입고 서 있는 연서령을 보았을 때, 연서강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걱정되어 표정이 얼어붙었었다. 행여 자신과 형님과의 관계를 들켰을 때,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할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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