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날씨가 유독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는 오로지 눈부신 빛을 내뿜는 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마치 꺼질 줄 모르는 해의 휘광에 나머지 모든 것들이 패배를 인정하고 하늘에서 깨끗이 그 자취를 지운 것처럼 보였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나비 등만이 창공에 묻은 한 점의 얼룩이었다.
다른 해(年)보다 유독 마른 나날이 많은 여름이었다. 장마 기간도 다른 해보다 짧았고 소낙비가 내리는 횟수도 적었다.
그래도 어제는 종일 그리 궂은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이 되자마자 언제 그랬다는 듯 반짝, 하고 하늘이 개고 말았다. 어제 종일 내린 비가 적신 땅바닥은 단 몇 시간 만에 바싹 말라, 정오가 다 되어선 비록 그늘이라고 해도 물에 젖은 땅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참으로 더운 여름이었다.
그리고 이 여름은 홍이가 마지막으로 보내는 여름이었다.
봄은 그저 떠나보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저것 일어난 일이 많아 연서강으로서는 도저히 따로 뭔가를 신경 쓸 만한 사정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되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에 그는 혼란스러웠고, 그런 와중에 태상을 만나 홍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또 변방에 갔다가 온갖 고생을 겪고 돌아왔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봄이라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역시 그렇게 떠나 보내버린 것이 후회가 되긴 되었다. 연서강의 이야기가 아니다, 홍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홍이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봄이었는데, 연서강이 변방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봄을 그녀는 내내 우울하게 보내야만 했다.
계절이 흐르니 시간의 흐름 또한 사무치도록 느껴져, 연서강은 참으로 홍이에게 미안해졌다.
“괜찮은데.......”
느낀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홍이가 그리 대답한다.
“그리고 저 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그거였다.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건지, 연서강은 서투른 아이의 위로에 그저 웃고 말았다.
갖은 수목으로 둘러싸인 수안궁이라 그런지 여름 또한 궐의 다른 곳에 비해 유별나게 파릇파릇했다. 질그릇 안에서 자란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자란 나무와 화초들을 본 연서강은 질린 얼굴을 해 보였다. 우녕궁과 그 화원, 영의전까지는 참으로 화려하고 어여쁜 정경이더니만 수안궁 후원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불어나는 나무들에 흡사 포획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거 가지치기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하고 연서강이 제아겸에게 물으니 그가 ‘전부 살아있는 생명인데 무슨 부귀공명을 누릴 거라고 잘라내나.’하고 대꾸한다. 한낱 식물에게도 온정적인 대답이 과연 신의 살아있는 대리자라 할 만 했다. 허나 그런 그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구석이 있었다. ‘가지를 친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텐데요? 오히려 잘 자라.......’ 거기까지 연서강이 말했을 때, 제아겸이 그제야 딱 잘라 진실을 밝혔다. ‘귀찮다네.’ 뱀 신의 유일한 대리자라고 불리는 남자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오늘은 고운 하늘빛 옷을 입은 제아겸이 하늘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좋은 점도 있다네. 비가 와도 절대 비에 맞지 않아. 우산이 필요 없어.”
“비가 와도 아리가 바깥 산책을 할 수 있어요.”
어느새 제아겸의 옆에 와서 선 홍이가 제아겸의 말을 거든다. 도대체 언제 둘이 그리 죽이 맞게 되었는지, 제아겸을 편드는 말을 하는 게 참으로 능숙해 보였다. 둘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연서강도 더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하지만.......’하고 중얼거리며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수도의 한 가운데 있는 백의궁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란 말인가.
나무와 그 나무를 감은 덩굴 식물들, 비정상적으로 길게 자란 화초들 때문에 전혀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가장 햇볕이 강렬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글거리는 햇빛은 지면에 닿기는커녕 그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이 분명한데도 수안궁 후원은 몹시 서늘하여 춥기까지 했다. 봄 때만 해도 참 꽃과 나무들이 많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여름이 되자마자 그 수목과 화초들이 이렇게 짐승처럼 죽죽 자라날 줄은 몰랐다.
여기가 저 남쪽 어딘가에 있다는 늪지대도 아니고.
연서강이 다시 제아겸을 쳐다보았다.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래도 명색이 백의궁에 속한 후원인데. 연서강의 시선을 받은 제아겸이, 연서강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빤히 보인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름에 시원한 곳만큼 명당이 어디 있다고.”
그건 사실이지만, 그러자 옆에서 홍이가 연서강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모기도 많아요.”
“홍아. 그건 말하지 않은 편이 나은 것 같은데.”
제아겸이 말하기가 무섭게 냉큼 또 그의 편을 들어 주는 홍이의 행동에 연서강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래서야 듣지 않아도 자신이 오지 않던 동안 둘이 얼마나 가까이 지냈는지 충분히 알만 했다. 하긴 태상께서는 아이를 좋아하고 또 잘 다루기도 하셨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닭다리로 꾀었던 자신과는 달리, 그런 것을 생각하면 사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어디로 나들이라도 가볼까요.”
정작 수안궁에 사는 사람들도 이대로도 좋다 하니 타인인 자신이 더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안궁의 환경에 대한 염려는 일단 접기로 하고, 연서강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용건을 꺼냈다.
요 근래 날씨가 계속해서 좋았다.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라고 저잣거리에 나갈 때마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입을 모야 말을 했었다. 심지어는 연무진까지 와서 근래 날씨가 좋으니 네가 마음에 둔 여인과 바깥나들이라도 가지 그러느냐, 부추겨대니 왜인지는 몰라도 정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들이?”
연서강의 말이 의외라는 듯 제아겸이 묻는다. ‘네.’하고 웃으며 연서강은 홍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홍이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흥미와 미미한 기대가 귀여워서 연서강은 무릎을 굽히고 홍이와 눈을 맞추었다.
“봄은 이미 보내버리고 말아 무리지만, 여름부터라도 나와 놀라가지 않겠느냐?”
“바쁘시지 않나요?”
해서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는 한가해.’ 그 말은 참말이었다.
“한창 바쁜 듯 하더니 요새는 또 한가한가 보군.”
제아겸의 말에 연서강은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연서강은 마치 후원에 있는 사람을 위협이라도 하듯 삐죽삐죽하게 자란 나뭇가지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느라 말하는 속도가 자연히 느릿해졌다.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피는 책도 있고, 형태가 변형되는 책도 있어서 그동안 조금 바쁘긴 했습니다. 책꽂이 하나가 통째로 책벌레에 당해서 필사한다고 고생 좀 했지요. 허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장마도 끝이 났거니와, 가을까지 이대로 쾌청한 날씨를 유지할 것 같으니 큰 고비는 넘겼다 제 상관이 말하더군요.”
연서강의 말에 제아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일하는 서서원, 책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맞나? 자네 말을 들어 보니 거기 환경이 책을 보관하기에 안 좋은 것 같은데.”
후원을 돌아보던 연서강이, 제아겸의 말에 그가 있는 편을 돌아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뭐, 여기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보다 좋은 곳은 궐내에 얼마든지 있다네. 금륜관이나 우녕궁 화원도 여기보다는 책을 보관하기 좋을 것일세.”
연서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무관들이 훈련하는 금륜관과 아예 야외인 우녕궁 화원보다 서서원이 못할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간 서서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또 자신 있게 주장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흘만 비가 줄줄 내려도 우글우글 휘어지는 책들이 대체 몇 권이던가. 비가 내린지 나흘째가 되면 종이류를 갉아먹는 벌레가 대량 발생해 펼치는 곳마다 허연 실지렁이 같은 것이 기어 다녔다. 나중에는 벽지에 새까만 곰팡이까지 펴서 연서강은 질겁했다. 차라리 녹우당에 책을 보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천 번은 했던 것 같다.
서서원이 지상에서 솟아오른 지하실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실 서서원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냥 매 년 보관 중인 책을 새롭게 필사하고 편집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으음, 하고 연서강이 고뇌하자 제아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설마 금륜관이나 우녕궁 화원보다 못한가?”
해서 연서강은 말갛게 웃었다.
“.......설마 하니 그럴 리가요.”
제아겸도 웃었다.
“그래, 설마 하니 백의궁 시설이 그렇게 안 좋을까. 그럼 그렇지.”
허나 그 웃음 뒤에 두 사람은 동시에 침묵했다. 홍이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놀러 안 가나요?’ 그리 물으며 홍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물음에 두 사람이 동시에 ‘가야지.’하고 대답을 했다.
“허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홍이는 어디로 가는 게 좋으냐?”
홍이가 그 질문에 지나치게 인상을 쓰며 고민을 했다. 아는 곳이 없어 대답할 거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 음, 음.......,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고민을 하는 홍이에게 태상이 ‘가까이, 우녕궁 화원은 어떻겠느냐? 간밤에 내린 비로 새로 핀 꽃들이 예쁠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사실 이 구성원으로는 멀리 나가는 것도 무리이기는 했다. 홍이가 웃으며 ‘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나들이를 간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나들이를 갈 장소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오마.”
꼭 오겠다는 표시로 연서강은 홍이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요새의 홍이는 처음과 달리 많이 그 또래 아이다워졌다.
수안궁을 나와 우녕궁과 그 화원, 영의전을 지나쳐 경천문 광장까지 다다라서야 겨우 연서강은 제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거둘 수 있었다. 버릇처럼 웃고, 의식적으로 부드러운 표정을 짓느라 두 볼이 다 얼얼했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며 연서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상께서 눈치를 채셨을까, 못 채셨을까.
눈치가 퍽 빠른 이이니 눈치를 챘을 것 같았다. 허나 홍이 때문에라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아준 것이 아닐까. 그가 눈치를 못 챘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수안궁을 나올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시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연서강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르는 척 그에 어울려 주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앞에서 우울한 표정 짓지 말고, 있는 힘껏 행복하다고 웃으라던 태상의 말이 떠올랐다.
놀러가자는 자신의 말에 홍이가 기뻐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연서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쩍이는 해만이 자리 잡은 하늘이 왠지 야속하게 보였다. 땅 위로 지나가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경천문 광장은 말 그대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어, 그 위를 걷다보자 삽시간에 머리가 아찔해지곤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바로 걸음이 꼬여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아찔함도 답답한 속을 이기지 못했다.
해서 연서강은 두 눈을 감고 다시금 놀러가자는 말에 환하게 웃었던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는 여전히 무한한 호의와 믿음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하자 체증을 닮은 가슴 속 답답함이 다소 해소가 되는 듯 했다.
“.......”
사실 연서강은 오늘 홍이를 만나보고 깜짝 놀랐다.
녹우당에 있을 적의 홍이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무척 서툴러 주변 사람들에게 무뚝뚝하고 건방지다는 인상까지 주곤 했었다. 허나 오늘의 홍이는 태상의 말에 편을 들어 주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했었다. 불안한 듯 보이지 않는 고양이만 온종일 찾아다녔던 예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달랐다.
원래부터 그런 성격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주변 환경 때문에 그런 성격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것도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이 죽기 전의 그 겨울까지도 홍이는 계속 무뚝뚝하고 잘 웃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제 또래 아이다워진 것은 분명 태상의 영향이 크리라. 그런 태상이 연서강은 진실로 고마웠다. 자신이 그녀에게 갚아야 할 은혜를 태상이 대신 갚아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더더욱 그랬다.
그런 태상에게도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역시 수안궁에 갈 때마다 얼굴 표정을 새로이 단장하고 기분도 새로 다잡는 것이 좋을 듯 했다. 태상의 근심스러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는 말과 달리 사실은 무척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식으로 겨울까지인가.
연서강은 까무룩 생각에 잠기며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 겨울이 되면 기연조와 자신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녹우당에서 본채로 아주 돌아온 이후로 연서강은 단 한 번도 기연조를 부르지 못했다. 이쪽에서 찾아가거나, 저쪽에서 오지 않으면 엮일 리 없는 인연인지라 자연히 얼굴 볼 일도 사라졌다. 같은 궐내에서 일하니 우연이라도 한 번쯤은 마주 칠 법도 한데 그 쪽에서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궐내에서는 아는 사람을 마주 하기가 힘든 것인지 그런 적조차 없었다.
작년과는 완전히 반대인 상황이라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은 연의진의 얼굴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었다. 어디 연의진 뿐일까. 연무의도, 연무강도, 연무진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지금은 그런 그들보다 기연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드물었다. 변방에서 막 돌아와 그와 술잔을 기울였던 밤이 너무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현재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중인가, 그와 자신의 사이는.
그 날 밤, 녹우당에서 이미 끝난 사이가 되고 만 것인지 아니면 때가 올 때까지 기연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워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은 기연조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무리인 듯 했다. 녹우당에서 기연조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던 때를 연서강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이 그와 자신의 마지막인 것이다.
그 기억이 마지막인가.......
깨닫자 갑자기 쑥, 두 어깨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허탈했다. 이제까지의 세월이. 그냥 이렇게 끝나 버릴 거라면 그에게 품었던 마음이나 숨기지 말고 내색이라도 해 볼 것을. 화기애애한 사이가 깨질까 두려워 하고픈 말을 삼키지도 말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음으로 넘기지도 말아 볼 것을. 허나 다시 연서강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래 봤자 ‘지금’ 상황이 바뀔 리도 없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말고 말한다 해도 기연조가 그 마음에 응해 연씨 문중을 해할 마음을 버릴 리도 없거니와, 자신이 연무강과의 거래에 응하지 않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미련인 것이다.
-.......괜찮아.
연서강은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똑, 하고 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괜찮아, 괜찮다.
연씨 문중에게서 기연조를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기연조에게서 연씨 문중을 살릴 수 있다면.
어차피 자신은 녹우당에 숨어 시간만 죽이고 살았던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런 자신이 앞으로 다가올 ‘겨울’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값진 인생이 될 것인가. 그 ‘겨울’을 바꾼다면 분명 인생에서 이뤄야 할 일을 모두 이룬 사람처럼 후련하고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냥 죽어버렸던 이전보다야 훨씬 나은 삶이 될 게 분명했다.
.......아마도.
“.......혹여 성함이 연서강이 되십니까?”
경천문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는 연서강의 곁으로 한 남자가 접근했다. 보장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금륜관 쪽에서 온 이가 아닌가 싶었다. 연서강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말했다.
“방문하고 싶다 위사님께 사람을 보내셨었지요? 위사님께서 이제야 짬이 났다 하십니다.”
“.......”
그리 말하는 남자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연서강은 다시 속으로 뇌까렸다. 괜찮아.
기연조와의 사이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예전에 이미 예감하지 않았던가. 새삼 심란해할 필요는 없었다. 한 번 더 그의 얼굴을 보고 제대로 대화를 나눠야 되지 않겠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현재 해야 할 일이 변하는 것도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연서강은 대답했다.
어차피 ‘되돌아왔다는 것’조차도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 그것을 아는 둘 중 하나는 어린 아이이고, 또 나머지 하나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태상인 것이다. 또, 그런 태상조차도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알게 되면 기겁을 하고 말릴 것 같았다.
.......이해하지 못하시겠지. 하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았다. 어차피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시작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
왜 쓸쓸해지는 것인지, 연서강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 *
“나를 보고자 했다지.”
집무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문서를 정리한 뒤, 연무강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연서강을 바라보았다. 나가보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이제껏 옆에서 일을 돕던 연무강의 부관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익숙하게 자리를 피하는 부관의 뒷모습을 흘깃 보며 연서강이 ‘네.’하고 성의 없게 대답했다.
마침내 탁, 집무실 문이 닫혔다. 연서강도 연무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님께 볼일이 있습니다.”
연서강의 대답에 연무강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볼일이라. 그 볼일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군.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올 정도면 여간 급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두 손을 벌리며 말한다. ‘자, 그게 무엇이더냐.’
무척 오만하게 들렸지만 연서강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연무강의 저런 태도가 한두 번도 아니거니와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해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조급하냐 하면 이상하게도 그것은 또 아니었다. 그저 속이 텅 비어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었다.
연서강은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머리와는 별개로 연서강의 몸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잘도 움직였다. 연서강이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서궤(書?) 위에 올려두었다.
“.......형님께 하나 검증 받고 싶은 게 있어 왔습니다.”
“검증?”
연무강은 연서강이 서궤 위에 둔 책을 들어 펼쳐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책을 펼친 것도 잠시, 그의 얼굴에 금세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뭔가 중요한 문서라도 되는가 싶었는데, 그러기는커녕 잡서 중에 잡서라고 할 수 있는 소설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딱딱한 목소리로 연무강이 묻자 연서강은 돌연 ‘형님.’하고 그를 불렀다.
“그 안에 써 있는 감상을 좀 읽어 봐주시겠습니까.”
연무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갑자기 이런 잡서를 집무실까지 들고 들어와서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허나 멸시감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가슴속 한 구석에서는 의구심이 머리를 들었다.
연무강은 책을 손에 들고 연서강을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온 연서강의 얼굴은 차분했다. 순간 ‘한 번 해보라는 대로 해 보자.’라는 마음이 든 것은, 연무강의 본래 성격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연서강을 신뢰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이가 이러는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도 명색이 머리라는 것이 달린 놈인데 설마 이런 상황에 정말 실없이 저딴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다.
“.......”
문득 연무강이 떠올린 것은 연의향의 서신이었다. 연서강을 의경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던 편지. 그 서신을 보고 연의향이 연서강을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실소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사실은 그때 연의향도 이런 기분에서 연서강을 의경에 보낸 것이었던가.
연무강은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연서강을 보았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물처럼 잔잔히 가라앉은 그의 얼굴은 차분하다 못해 푹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한 번 보도록 하지.”
그 얼굴을 마주 보자 저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연무강은 시선을 내려 연서강이 시킨 대로 소설책의 여백에 쓰인 타인의 감상을 읽어보았다.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은 책이다.’, ‘19일 날, 몸이 아팠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몰래 숨어서 보았습니다.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었습니다.’, ‘떠오르는 감정은 무척 많지만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등등 필사본이란 특색에 맞게 책 여백에는 여러 사람이 책을 읽다 첨삭해 놓은 글들이 조그맣게 써져 있었다.
책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는지 감상을 적어놓은 것이 보통의 여백에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참으로 많았다. 책 자체에 대한 감상보다는 이 책을 읽었던 상황을 묘사한 듯한 일기(日記) 같은 문구가 주로 써져 있었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죄다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군. 연무강은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글을 보다 문득 미간을 좁혔다.
뭔가 기묘한 점을 하나 발견해서였다.
“.......이어지는군.”
언뜻 보면 감상들이 제멋대로 흩어진 것처럼 보였다. 책의 본문까지 함께 읽다보면 분명 그런 생각만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만을 뽑아 한꺼번에 읽어보니 몇몇 감상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을 연무강은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걸 감상이랍시고 남겨놓았을까, 싶은 글들이 특히 그랬다.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은 책이다.’
‘떠오르는 감정은 무척 많지만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언뜻 보면 각기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감상인 듯 했지만, 둘을 연이어 읽어보면 은근히 말이 되었다. ‘할 이야기가 무척 많아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감상을 이으면 이러한 뜻으로 통했다.
“.......잠깐.”
연무강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다시 앞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주의 깊게 여백에 쓰인 글들을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글씨체가 동일한 걸 보니, .......한 사람이 쓴 것인가?”
“정확히는 두 사람입니다.”
해서 연무강은 자신이 보다 말았던 뒷장까지 모두 넘겨보았다.
과연 연서강의 말이 맞았다. 책 여백에 적힌 감상 중 내용이 이어지는 것들의 대부분이, 동일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두 사람 다 모두 중구난방 식으로 짧게 감상을 남겨 놓고 있었는데 그 감상들 중 몇몇이 내용상 이어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이게 뭐지?”
연무강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연서강에게 물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일단 미루어두고 연서강은 새로 다른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형님, 그 두 명의 감상 중 하나가 혹여 거승주라는 자와 필체가 닮았습니까?”
“거승주?”
“부디 확인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고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연서강을 날카로운 눈으로 한 번 보고 연무강도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연무강은 서궤 서랍을 뒤져 편지 봉투를 두어 개를 꺼냈다. 바로 거승주가 보낸 서신들이었다.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어도 그에게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킨 것은 몇 번 되었는데, 그때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의 일부였다.
연무강은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책의 여백에 쓰여 있는 글들과 필체를 비교해 보았다. 여백에 쓰인 글들은 크기가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금세 그는 깨닫게 되었다.
“.......비슷하군.”
그 대답이 떨어지자 연서강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다. ‘그렇군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어딘지 툭 놓아버리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 반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연무강은 그가 어째서 이 소설책을 자신에게 주었는지 알아 차렸다.
“나머지 하나는 기연조의 것인가 보지?”
“.......”
영의전, 금륜관, 그리고 세책점.
지난날에 연서가이 어째서 그런 경로를 밟게 되었는지, 또 어떤 생각의 경위를 거쳤는지 연무강은 이제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연의진과 거승주, 그리고 기연조라고 생각해서 연서강이 무얼 궁리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연서강이 영의전에 찾아간 진짜 이유는 연의진이 아니었다. 태의령이었던 것이다. 연의진과 점심을 함께 한 것은 다만 그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 아니라, 필시 연의진에게서 근래 태의령이 출타한 곳이 어디어디였는지를 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연무강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서궤 위를 두드렸다.
“태의령. 그 영감이 입을 가벼이 놀렸나 보군.”
그리고 거승주가 그걸 듣고 기연조에게 말한 것이다.
아마도 연서강이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이거겠지, 싶어 연무강은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그런 것인지 연서강은 연무강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묘하게 담담한 그 얼굴을 보며 연무강은 ‘이거였나.’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이거였던가. 저 놈이 갑자기 세책점에서 책을 잔뜩 빌려 왔던 것이. 저 녀석은 다름이 아니라 ‘배신자’를 찾기 위해 책을 빌려와, 그 늦은 시간까지 모든 책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
여전히 서궤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연무강은 입을 더 굳게 다물었다.
괴이하군.
괴이했다. 연서강이 자신과 함께 ‘배신자’를 찾을 수 있게 해 달라 황후마마에게 부탁드리는 것을 연무강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황후마마께 그 부탁을 하기 위해 연후정에서의 자신과의 거래를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 연서강이 얼마나 절박했던 것인지 연무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무강은 연서강이 진심으로 ‘배신자’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배신자’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 기연조가 시키는 대로 함정을 파는 것이라고. 그랬기에 놈이 그리 절절하게 황후마마를 만나기를 원했었다고 믿었다. 연서강은 연씨 문중을 위해 움직일 놈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황후도 연서강이 의심스럽다며 자신이 옆에서 그를 감시했으면 좋겠다, 말을 했었다. 연무강도 역시 황후가 그리 말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 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부친인 연무의 또한 그가 암만 변방에서 공적을 쌓고 돌아왔다 해도 아직까지 그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연서강이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연서강은 기연조를 연모했으며, 그를 위해 대담하게 연후정까지 뒤졌던 놈이었다. 그 고생을 하며 변방에 다녀온 것도 기연조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그 증거로 변방에서 다녀온 직후 녹우당에서 기연조 놈을 가장 먼저 만나 그 해후를 나누기도 했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현재 연서강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의 저변에는 기연조가 깔려있는 게 분명했다.
헌데.
“.......”
헌데 기연조와 내통하고 있는 ‘배신자’를 저 놈이 왜 이리 열심히 찾았단 말인가?
거승주가 배신자였다는 사실보다 연무강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물론 거승주가 기연조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은 연무강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거승주가 기연조와 내통을 하든 말든 사실 연무강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연무강은 기본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집안을 위하여 일하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버릇이 된지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큰 ‘일’을 꾸미는 시점에서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더더욱 날카롭게 세우는 것은 다연한 일이었다.
또한 거승주가 간 크게 그 기가 놈과 내통했다고는 해도 크게 염려할 것은 없었다. 기연조와 거승주 그 두 놈은 그 ‘일’에 관해서는 손톱만큼의 정보조차도 얻어내지 못했으리라.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태의령.”
연서강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연무강이 중얼거렸다. 문제가 되는 것은 태의령 그 영감이 거승주에게 입을 나불거렸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자신이 도망갈 구석부터 챙기던 노인네다웠다. 사실 연무의가 태의령을 이용해하고자 처음 뜻을 밝혔을 때, 연무강은 태의령의 그 소심한데다 교활하기까지 한 성격을 근거로 반대를 표했었다. 그러면서 태의령을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의진을 설득해 그를 이용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연무의는 ‘연의진이 설득당할 것 같으냐.’라고 대꾸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의진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연무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무언가를 볼모로 잡고 협박을 하며 그 놈이 말을 안 듣고 배길 손가. 고집이 세긴 해도 마음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하니, 어찌 잘 협박하고 어르면 차라리 연무진보다 쓸만한 놈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연무의가 끝까지 반대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협박이라니 말이 되느냐. 타인이라면 또 모를까.’라는 거시 이유였다.
해서, 어쩔 수 없이 끌어들였던 노인네였거늘.......
허나 곧 연무강은 마음을 다잡았다. 태의령이 괘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자의 입에서 빠져나간 이야기라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거승주가 태의령을 어떻게 구슬려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 몰라도, 태의령은 신후의 존재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에게서 배낼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일부일 뿐이고,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정보 중 현재 증거를 남겨 놓은 것은 없다. 태의령이 거승주에게 무얼 이야기를 했던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은 ‘일’ 자체를 망칠 거리는 되지 못한다.
더욱이 지금에 와서는 거승주가 ‘배신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를 축출하기만 하면, 거승주를 없애버리면 끝날 걱정이었다. 효기교위 문도학이 그런 쪽으로는 도가 텄으니 그에게 시켜 거승주를 없애버릴 작정이었다.
“그래? 거승주가 배신자였다......., 네 말대로 배신자가 과연 존재했긴 했나 보군.”
마치 식량이나 무기의 잔량에 대한 보고를 듣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였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연무강을 본 연서강이 기이한 것이라도 본 듯이 인상을 썼다.
“.......놀라시지 않으셨습니까? 혹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연무강에게 있어 거승주가 배신했다는 사실보다 놀라운 것은 오히려 서강의 이런 행동이었다.
연무강은 눈앞에 있는 자의 심중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연서강을 응시하였다. 그래, 거승주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놀랄 것도 없다. 허나 저 이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은 연서강에게는 흥미가 있었다. 저 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찌 움직일 것인지.
기연조를 위하여 결국은 배신을 할 생각을 하고 있을 놈이니 그의 앞으로의 행보에 관하여 염려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연무강은 생각했다.
허나 동시에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황후마마께 거승주가 배신자였다고 내가 고자질하면 되는 것이냐? 너를 두둔하면서?”
혹시나 이놈의 꿍꿍이는 마마의 신뢰를 얻는 게 아닐까. 그런 추측을 하면서 연무강은 연서강의 얼굴을 보았다. ‘배신자’를 잡아 황후마마의 환심을 산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일을 꾸밀 작정이었던가. 무어, 그런 방법도 나쁘지는 않았다. 부친인 연무의의 신용을 얻기는 힘들 테니 말 대신 장수, 즉 황후마마를 먼저 공략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제법 머리를 쓰지 않았나, 연무강은 조롱 섞인 칭찬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닙니다, 형님.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연서강이 고개를 저었다.
“바라지 않는다고?”
정말로 괴이했다. 연무강은 눈썹을 구긴 채 연서강을 보았다. 연서강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저는 형님께서 ‘일’을 행동으로 옮길 때까지 거승주를 모른 척 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승주는 반드시 잡을 테니. 다만 지금 당장이 아닌 나중에 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대체 무엇인가. 저 놈이 원하는 것이. 연무강은 일순 혼란에 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놈이 기연조를 위해 무얼 할 작정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배신자를 찾아내고, 그 배신자를 모른 척하며, 그러나 결국 그 배신자를 잡을 것이라고?
“부디 거승주가 ‘일’에 대해 알고 행동했을 때, 그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모르겠다, 대체 저 놈이 머릿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꾸미며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인가. 소설책에 중구난방으로 써져 있는 감상들마큼이나 연서강의 말과 행동은 일관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목적’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가.
해서 연무강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체 무얼 바라는 것이냐, 연서강.”
연서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다가왔다. 늘 소심하고 기가 약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순간 연무강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과연 그렇게 생긴 것이 맞았는지 의심했다. 살이 빠져서 흐릿한 이목구비가 약간 뚜렷해진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그 얼굴이 주는 느낌은 녹우당에서 소요하던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아니, 그가 달라진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요번 봄, 감히 변방으로 가겠다며 부친인 연무의에게 대답한 그 즈음 때부터 연서강은 달라져 있었다.
연무강은 변방으로 가기 전, 연서강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소리를 질렀던 일을 생각해냈다. 카랑카랑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자신을 쳐다보던 놈의 두 눈은 또 어떠했는가, 표정도, 행동도, 공기보다 더 조용히 녹우당에서 푹 꺼져 지냈던 놈이 어디서 그런 성질을 부릴만한 용기를 얻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무강 형님께선 제가 죽는 걸 바라지 않으셨던가요?
그 은밀하면서도 얄궂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꼭 그때처럼 섬뜩해졌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과연 연서강이 맞는가? 녹우당에 콕 박혀 본채에 얼씬도 하지 못하던, 가끔 가다 눈이 마주치면 두려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연서강.......”
연무강은 신음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들은 이가 대답한다. ‘네.’ 제 이름이 그것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허나 연무강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이가 정녕 그 연서강이라고?
연서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입니다.”
“.......”
“형님의 도움.”
똑바로 연무강을 보며 이어 말한다.
“그것을 원합니다.”
원한다. 그 대답을 들으니 돌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고 있었던 그 질문이 떠올랐다.
-무얼 원하니?
다정한 모친의 목소리 위로 연서강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얼마나 더 대가를 치루면, 그걸 얻을 수 있습니까.”
연무강은 너무도 담담해 시체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연서강의 얼굴을 응시했다.
원하는 것을 가진 게 분명한 데도, 어릴 적 유모 서씨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아 다시 되찾고 싶은 것인지 연무강은 알 수 없었다.
너무도 어린 날의, 덜 자라 서투르기 그지없던 날의 열망이었다.
“얼마나 더 저를 취하시면 제가 부탁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다만 눈앞의 인간을 갖고 싶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자꾸 주저앉으려는 연서강의 몸을 연무강은 허리를 잡아 들어올렸다. 흣, 하고 연서강의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대와 같은 편한 자리가 아니라 그런지 연서강은 자꾸만 힘에 부쳐했고, 그런 연서강의 몸을 붙잡고 끌어올리면서 연무강은 추삽질을 했다.
서궤를 잡고 있는 연서강의 손과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 서궤를 잡고 엎드린 형태였던 몸이 들썩들썩 움직이면서 그 형태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연서강이 바닥에 주저앉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연무강은 아래에서 위로 몸을 움직였다. 땀과 타액, 정액으로 젖은 연서강의 엉덩이가 아래로 내려오다 연무강의 허벅지에 부딪혀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하, 앗, 앗.”
그리고 그 움직임이 반복될 때마다 연서강의 입에선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몸을 쳐올릴 때마다 속이 흔들리는지 반사적으로 나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손으로 막거나 제 살을 깨물어 틀어막더니, 이제는 그럴 힘도 없는지 한 번 벌어진 입술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다만 연서강이 중간 중간에 ‘소리, 앗, 가, 안!’하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연서강을 연무강은 뒤에서 깊이 껴안았다. 괜찮다. 아무도 듣지 않을 테니, 괜찮아. 그리 귓가에 속삭이며 연무강은 땀에 젖은 연서강의 몸을 더듬었다. 자신보다 마르고 왜소한 몸이었다. 힘을 줘서 안으면 어디 뼈가 하나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허나 그 걱정은 다만 생각일 뿐, 그의 몸은 그러지 못했다.
연서강의 몸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는 아쉽고 안타까웠다. 좀 더 깊이. 상대방의 깊숙한 안쪽으로 몸을 묻고 싶었다. 상대로부터 자신의 몸이 아예 푹 빠져 떨어질 수 없도록, 그런 욕망이 그로 하여금 점점 더 상대의 몸을 옭아매도록 만들었다.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엉덩이를 벌리고 그 안으로 깊숙이 성기를 찔러 넣게 만들었다.
허나 마음속에 들어찬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를 붙잡고 안고, 그 안으로 들어가도 부족했다. 모자랐다. 무리한 행위로 연서강이 힘들어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흐......., 읏, 아, 앗!”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연서강의 몸은 자꾸만 휘청거렸다. 때문에 그의 엉덩이 사이로 성기가 빠져나오자 마음이 조급해진 연무강은 서궤 위에 있는 것들을 모두 치우고 그 위로 연서강을 눕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짧게 호흡하며 연서강이 연무강을 보았다. 두려움이 반, 안달하는 것이 반인 눈이었다. 연무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서강의 발목을 잡고 올려 다시 삽입했을 뿐이었다. 한결 편해진 자세로 여유를 조금 되찾았는지 연서강이 다시 입술을 깨물며 흘러나오는 소리를 삼켰다.
한 손으로는 연서강의 허벅지를 껴안아 자세를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꾸만 옆으로 젖혀지는 연서강이 얼굴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한 뒤 연무강은 허리를 놀렸다.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하체와 달리 연서강의 상체는 연무강이 깊이 성기를 찔러 넣을 때마다 요동쳤다. 다만 그의 얼굴만은 고정된 채 꼼짝없이 연무강을 봐야 했다. 자신의 몸에 추삽질을 하고 있는 상대의 눈과 강제로 마주 해야 했다.
연서강이 결국 두 눈을 감았다.
* *
“일”을 언제 벌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졌다.
9월 9일.
10월에 있는 수확제를 대비하여 궐내로 여러 종류의 사람과 다양한 물건들이 드나들 수 있는 그 첫날이었다. 10월에 있는 수확제는 하제국에서 열리는 제천 행사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추수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하여 풍성한 수확에 신께 감사드리고, 또 모진 기후인 여름 내도록 고생이 많았던 관리와 백성들을 위로하는 게 그 주된 목적이었다. 이 수확제는 보통 보름동안 계속 되었다.
‘수확’이라는 말과 어울리게 10월 수확제에는 한 해를 돌이켜보아 그 성과를 따지는 행사가 많이 열렸는데, 태위인 연무의가 주축이 되어서 진행되는 공치식(功致式)도 그 중 하나였다.
공치식이라는 것은 온 나라 안 관리들의 한 해 공적을 논해 특별히 상을 주는 행사로 이때 많은 수의 관리들이 승직을 함은 물론, 관리가 아닌 사람이더라도 그 한 해 많은 공적을 쌓았다면 특별히 관직을 주기도 했다. 또 제야에 묻혀 있는 재자가인들을 불러다 그들의 높은 덕망과 우수한 재능을 치하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에서는 여러 가지 민간 행사를 진행하여 백성들에게 다양한 상과 곡식, 재물을 베풀었다. 경과(慶科)도 특별히 행해져 많은 사람들을 새 관리로 등용시켰다. 한 해 관리의 공을 논하는 것은 비단 태위인 연무의만이 아니었다. 지방에서도 따로 평민을 대상으로 우수한 관리를 뽑았고, 그 관리는 당연히 중앙에서 내려오는 막대한 상을 받았다.
수확제가 열리는 보름동안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신을 숭배하고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규모가 여간 작지 않은 행사였기 때문에, 그 준비는 한 달여 전부터 시작되었다. 보통은 구월 초순부터 수확제를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이번 년에는 9월 9일이 그 시작 날짜였다. 따라서 9월 9일부터는 상인들과 예술가 등 일반 평민들에게도 백의궁의 일부 구간이 개방되었따.
또 전국 각지로부터 황제나 황태후, 또 황후와 방비(傍妃: 후궁) 등, 궐내의 권자들에게 보내는 선물들이 몰려들어와 그 넓은 경천문 광장 전체가 온갖 마차와 수레로 복작보작해질 예정이었다.
일 년 내내 삼엄하기 그지없는 백의궁의 경비도 이때만큼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사인 연무강이 아무리 신경을 써서 경비를 세운다 하더라도 백의궁을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워낙에 많아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연무강으로서는 저주해 마땅할 기간이었지만 무언가 ‘일’을 꾸미기에는 가장 적절한 기간이기도 했다. 특히나 궐내의 권자들에게 줄 선물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9월 9일, 성문이 개방되는 첫날은 경천문 광장 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선물을 가득 실은 수레로 가득 차는 날이었다.
연무의는 바로 그런 점을 노리기로 했다. 평소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백의궁 내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면 바로 위사인 연무강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허나 이 날만큼은 제아무리 연무강이라고 해도 넓은 궐 구석구석을 완벽히 감시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혹시 ‘일’이 잘못되어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하더라도 연무강이 큰 추궁을 듣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 잘못 되어 ‘일’이 세간에 알려졌을 경우, 연무강이 덜 의심받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그때가 좋았다. 평소에 철벽같은 수비를 자랑하던 백의궁인 만큼, 만일 궐내에서 문제가 터지게 된다면 연무강이 그것을 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피할 수는 없다. 허나 성문이 개방되는 첫 날만큼은 문제가 터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 그런 의심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9월 9일이 ‘일’을 행한 날로 가장 적당하다고 연무의는 생각하는 듯 했다. 그 생각에는 연무강도, 황후도 동의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우선 연무강의 명을 받든 경비병들이 짐을 실은 여러 마차들 중 귀비의 처소로 가는 마차들만 광장의 한쪽에 모아둔다. 그리고 역시 보안을 명목 삼아 그 짐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또 그 안에 든 물품들은 무엇인지 철저하게 조사를 하는 것이다.
작년에는 그저 품목들을 적어놓은 간단한 서류만 제출하면 되었는데, 왜 올해에는 이리도 철저하게 검사를 하느냐고 마부들과 심부름꾼들이 불만을 토해내는 것 따위는 드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는 개중 귀중한 약재와 의료품들이 있는 마차를 찾아내어 거기에 잘 포장된 신후를 던져놓기만 하면 되었다.
신후를 마차에 가져다놓는 자는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일을 행해야 함은 물론, 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이가 되는 것이기에 꼭 신뢰할 수 있는 자야 했다. 또 혹여 누가 보더라도 ‘황후’ 쪽에서 손을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도록, ‘황후’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자여야만 했다. 신후를 마차에 넣는 이를 돈을 주고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돈으로 꾄 자는 돈으로 또 배신을 하기 마련이었다.
일을 실행하는 이는 그러한 동시에 연무강의 명을 받고 마차를 검사하는 경비병들이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만한 자여야만 했다. 마차를 검사하는 경비병들에게 일일이 계획에 대해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경비병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인물로 뽑아야 나중 문제가 커지지 않을 것이다.
이 조건들을 갖춘 자만 무사히 구하면, 그 이후 일은 일사천리였다. 연무강이 마차들의 주인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신후를 가져다 놓은 마차의 물품 목록을 수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신후가 뒤집어쓸 가짜 이름은 바로 ‘복고단(福古團)’이었다.
복고단은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니 금속 등에게서 오는 여러 거부 반응과 병폐를 없애고, 위장과 간장의 소화기 계통 질병에도 효과적이며, 약간의 불면증에도 좋은 약이었다. 형개(荊芥), 연교(連翹), 방풍(防風), 당귀(當歸), 천궁(川芎), 작약(芍藥), 백지(白芷), 시호(柴胡), 황금(黃芩), 길경(桔梗), 괄루근(括樓根), 감초(甘草), 포공영(蒲公英), 금은화(金銀花) 등 예순여덟 가지나 되는 생약재를 조합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복고단은 그 가격이 엄청난데다 만들기가 까다로워 국내에서 제작되는 곳이 몇 안 되었다. 복고단의 생김새가 신후와 그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는데다가, 귀비의 측근 중에는 약재에 박식한 사람 또한 없으니 그녀를 속이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연무강은 민울이란 낭중에게 편지를 써 귀비의 아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음식을 중심으로 식단을 짜라고 명할 생각이었다. 물론 민울이란 자는 그저 태의령께서 시키신 일로 알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명령할 그럴 듯한 근거도 있었다. 귀비 비씨의 아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음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리해, 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조리법을 찾으라고 편지에 적을 셈이었다. 그녀는 이 또한 태의령께서 의미가 있어 시키는 것으로 믿을 것이다.
귀비는 자신의 아이가 아프고 열이 나면 들어온 선물 중 복고단이란 물건이 있음을 기억 해내고 자연스레 그것을 아이에게 복용시킬 것이다. 그러면 모두 다 끝난 일이었다. 아이는 증상이 완화되겠지만 결국 완치된 것은 아닐 터. 가까운 시일에 귀비의 아이는 또 아플 것이고, 귀비는 다시 약을 먹일 것이다. 그러면 또 증상이 완화될 것이고 귀비는 뭣도 모르고 기뻐하며 과연 복고단이란 약의 효능이 굉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한 번 먹이고 난 뒤라면, 그 뒤에는 태의령을 불러도 소용이 없다. 음용한 신후를 해독할 방법은 아직 이 세상에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후를 먹인 것이라 귀비가 뒤늦게 깨달아도 소용이 없었다. 귀비의 아이는 필히 독살된다.
그리고 누가 독살했는지 그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독살된다고 해도 귀비는 자신의 아이가 독살되었는지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세가 증세인 만큼 그저 열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귀비 비씨가 아이의 진짜 사인(死因)을 알게 될지 끝까지 모를지는 순전히 태의령이 귀비의 아이가 ‘신후’를 먹은 것을 깨달았을 때 할 말에 달려 있다.
그 소심한 영감이,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몸에 독살의 어떤 증상도 남기지 않는 신후를 귀비에게 무어라고 말할지 연무강은 참으로 기대가 되었다. 솔직하게 말할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챙기며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 말하며 괜한 민울이란 낭중을 추궁할지.
일을 계획하던 도중, 연무강은 비밀리에 황후의 부름을 받았다. 명을 받고 연무강이 그녀를 배알하자 그녀는 연서강과 대화할 때와 똑같이 사람들을 나가라 이르고 입을 열었다.
-배신자에 대한 처리는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해서 연무강은 대답했다.
-일을 실행할 때, 몰래 ‘말’을 흘릴 작정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분명히 배신자가 움직일 터이니 그때 움직임이 수상한 자를 잡으면 될 일입니다.
처음에 연서강이 말한 바가, 계획했던 바가 그렇기는 했었다.
-.......
황후는 여전히 근심어린 표정이었으나 딱히 연무강의 계획에 훈수를 두지는 않았다. 이제껏 한 번도 자신으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는 연무강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늘 자신을 위해주시는 백부님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은 여전히 황후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이제까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연무의와 논의하곤 했었던 그녀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저 종제(從弟: 사촌 아우)의 능력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과연 백부님을 빼놓고 저 아이에게만 맡겨 두어도 될 것인가.......
-마마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연무강이 그녀의 불안을 읽고 먼저 말했다.
-신후를 마차에 넣는 역을 할 자로 아주 적당한 자를 골랐습니다. 또 그 자는 보기 좋게 배신자를 함정으로 빠트릴 수도 있는 자입니다. 허니 걱정 마시고 제게 모든 걸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위사를 믿겠네.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헌데 적당한 자를 골랐다니? 내가 알고 있는 자인가?
연무의와 몇 차례에 걸쳐 논의를 했음에도 그 일을 할 마땅한 자를 정하지 못한 차였다. 그런데 이미 적당한 자를 골랐단? 혹시 자신이 백부님과의 대화 중 놓친 부분이 있었나 싶어 황후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연무의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었다.
황후의 질문에 연무강이 대답했다.
-아직 마음으로 정하기만 정하였고 부친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부친께는 좀 더 그 자에 대해 조사한 뒤, 역시 모든 조건이 맞다 판단되어질 때 말씀드릴 예정이었습니다. 물론 마마께서는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것이었군.
그 설명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강의 신중한 태도에 불안했던 마음이 비로소 조금이나마 놓였다.
-.......그에 대해서는 후에 백부님을 통해 듣도록 하겠다. 그리고, 위사.
-네, 마마.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들 중 남아있는 ‘하나’에 대해서 물었다.
-연서강, 그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역시 마지막으로 연무강이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수상한 움직임이 없사옵니다.
그녀는 모른다. 마차에 신후를 넣기에 적당하다는 자가, 바로 그 연서강이 추천한 자라는 것을. 그리고 후에 연무의와 황후에게는 연서강이 아닌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꾸며 말을 할 것이라는 것도.
황후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해서 감시하도록 하여라.
연무강은 대답하며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연서강이 연무강에게 원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부러 ‘말’을 흘려, 그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거승주를 잡아내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기연조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달리 갖고 있는 ‘증거’는 없는지 알아내는 것. 마지막으로 신후를 옮긴 자에 대한 뒤처리를 자신에게 맡겨줄 것.
연무강으로서는 도저히 그 의도가 짐작되지 않는 요구들이었다.
기연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또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기연조의 편을 들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찾아낸 ‘배신자’를 그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또한 왜 일부러 ‘말’을 흘려서 이미 알고 있는 ‘배신자’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허나, .......연무강은 이미 그것들을 전부 들어주기로 한 상태였다.
* *
“자네 근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태상의 말에 연서강은 ‘예?’하고 고개를 슥 들었다. 저 멀리서 홍이가 춤추듯 고양이 아리와 뛰놀고 있었다. 너른 벌판에 아이가 구김살 없이 즐거이 뛰노는 장면은 따가운 햇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보기가 참 좋았다.
우녕궁 화원에 이어 혜문과 문현당을 지나면 있는 예산원(刈山園)이었다. 실제로 있는 산을 깎아 만들어진 정원인 예산원은 널따란 벌판과 커다란 기암괴석이 장관인 곳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 상쾌한 바람이 시원스레 달리는 곳이기는 했으나, 나무나 화초가 별로 없어 몸을 피할 그늘은 몇 없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여름 불볕더위 아래의 예산원에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어린애인 홍이야 밖으로 나오는 게 마냥 좋았겠지만 태상이 맨 처음 예산원으로 가자, 말을 했을 때 솔직히 연서강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무척 더울 것 같은데요.’란 말에도 태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그늘이 있을 지도 모르네.’ 태상이 그런 말을 했지만 연서강은 믿지 않았다. 그도 매일 같이 일하기 위해 서서원으로 가면서 지나치는 곳이 예산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간지 얼마 안 되어 곧 불볕더위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태상의 말대로 키가 작은 꽃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는 있었으나 성인 두 사람이 몸을 맡기기에는 그 면적이 참으로 비루했다. 해서 두 사람의 몸 중 반은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홍이만 신이 났다.
연서강이 우울한 목소리로 ‘궁인들에게 일산(日傘)이라도 가져오라고 하지 그러셨습니까.’하고 중얼거리자, 태상은 ‘사람은 햇빛을 좀 받고 살아야 낙관적으로 변한다네.’란 말도 안 되는 말로 연서강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아, 하고 연서강은 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 연서강의 행동에 태상이 잠깐 침묵하다 돌연 질문을 던진 것이 바로 방금의 그 말이었다. 근래 무슨 일이 있느냐는.
“.......뭔가를 계속 고민하던 사람이 갑자기 뚝,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연서, 자네 요새 뭔가 또 일을 벌인 것은 아니겠지?”
생각지도 못한 화제 전한에 연서강은 잠시 침묵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날아온 새총에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시중을 들 만한 사람도 하나 없이 인적 없는 곳으로 굳이 가려하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사실 진짜 목적은 ‘나들이’가 아니라 딴 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나 홍이는 몰라도 아직까지 태상을 속이는 건 무리였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서강은 ‘뭐.......’하고 말끝을 흐렸다. 둘러댈 말을 생각하는 머리 한 구석에서는 ‘아직 연서라고 부르는 것인가.’란 생각도 불쑥 솟아올랐다.
“큰일이 일어났기는 났습니다만.”
난감한 표정을 지은 다음 연서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기는 하지요. .......여동생이 화가 났거든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제아겸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여동생?’하고 되묻는다. ‘네.’하고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의 여동생이라면, 그 변방에서 야생마처럼 날뛰던 그 처녀를 말하는가? 연장군의 동생말일세.”
“연서령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요번 구월에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더군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지 제아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어쨌단 말이지?”
“그게.......”
어색하게 웃으며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자신의 말이 진실하게 들리도록 며칠 전에 받아 보았던 편지를 떠올리며 말이다. 그 편지를 받고 ‘아차.’싶었던 마음도 함께 생각해냈다.
“전에 그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할 것이 많아서요. 생각할 게 사라져 몸이 한가해졌을 때에는 편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해서 그냥 넘겨 버렸었습니다. 헌데.”
설마 답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연서령에게서 또 편지가 나라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달랑 한 장뿐인 그 편지는 온통 먹물 얼룩과 억세게 눌린 붓 자국 투성이었는데, 내용을 보지 않아도 ‘나 화났소. 그래서 글을 예쁘게 쓸 여유가 없소. 내가 화가 많이 났는데 지금 글자를 또박또박 적게 생겼소?’란 기세가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분노로 붓을 휘갈긴 탓에 엉망이 된 옥판지(玉板紙)를 보니 연서강은 그 내용을 읽기가 참으로 두려워졌다. 허나 읽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다 그는 결국 조심스레 편지에 써진 글을 읽어나갔다. 편지에 짧게 써진 내용은 대충 ‘돌아오는 구월 첫 번째 날에 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소. 감히 내 편지를 씹다니, 당신은 이제 죽었어.’였다.
편지를 든 손이 저절로 떨려와 연서강은 그만 편지를 떨어뜨릴 뻔 했었다.
“서령이가 정말 저를 죽일까요?”
떠올리다 보니 정말로 가슴 속이 자괴감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버린 연서강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면서 물었다.
설마 진짜 죽이기야 하겠나, 싶겠지만....... 그래, 죽이지는 않겠지, ‘죽이지는’. 허나 연서령 그 아이의 성미에 결코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변방에서 연서령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그 걱정은 더 심해졌지, 도통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서 연서강은 요즘 시간이 가는 게 두려웠다.
“.......연서, 자네 왜 그랬나.”
연서강의 말을 모두 들은 제아겸이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제아겸의 생각에도 연서령이란 그 처자가 연서강을 가만히 둘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제아겸의 말을 들은 연서강은 더더욱 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말을 안 하고 산지도 벌써 몇 해나 되는데, 고작 편지에 답장을 써주지 않았다고 그리 화를 낼 줄은 몰랐습니다. 편지를 받았을 당시에도 ‘왜 이 아이가 이런 편지를 내게 보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 딴에는 큰마음 먹고 보냈던 것이었나 봅니다.”
“큰마음 먹고 보낸 편지를 자네가 무시했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뭐, 좋은 기분은 들지 않았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구월 일일에는 집에 있지 않는 편이 좋을가. 지금껏 한 번도 가출을 꿈꾼 적은 없었는데, 연서령이 온다고 하니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들이닥칠까 두려워 절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미리 말해두지만, 수안궁으로 도망 올 생각은 하지도 말게.”
연서강이 하는 생각이 뻔하다는 식으로 제아겸이 딱 잘라 말했다. ‘너무하십니다.’하고 연서강은 절망스런 얼굴로 제아겸을 보았다. 그러자 제아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그 벌을 응당 받아야지.’라고 몹시도 냉정하게 말을 한다.
“게다가 도망치면 자네 동생은 더욱 분노할 것일세.”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태상의 말이 옳았다. 확실히 가출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봐야 당장의 화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연서령의 화는 더 불타오르기만 할 뿐이니, 가출은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나았다.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집에 있는 편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좋지 않은가.”
돌연 제아겸이 빙그레 웃었다.
“여동생이 자네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생각해 주었다는 것이고, 자네가 답장을 안 줘서 그만큼 서운했다는 뜻도 되니. 그녀가 자네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나.”
“.......”
뭐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던 연서강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연서강의 모습을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보면서 제아겸이 말을 이었다.
“연서가 가족에게 하나 둘씩 사랑 받기 시작한 것 같아, 내가 기분이 다 좋으이.”
“.......왜 태상께서 기분이 좋으십니까.”
그러자 제아겸이 벌판에 있는 홍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연히 연서강 또한 홍이를 보게 되었다. 아리가 또 홍이를 내버려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아이가 ‘아리야, 아리.’하고 부르며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더운 날씨에 신나게 벌판을 뛰어다니기에는 아리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더욱이 요새는 수안궁에서 잘 먹고 잘 잔 덕에 뒤룩뒤룩 살까지 찌지 않았던가. 풍채가 썩 좋아지긴 했으나 역시 활발하게 움직이기에는 힘들어 보이는 몸이었다.
결국 하얀 꽃이 핀 작은 수풀 그늘 아래에서 아리를 찾아낸 홍이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리야, 아리야.’하고 고양이를 부른다.
“연서는 홍이가 연서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나?”
언제였더라, 기억을 떠올리던 연서강은 이내 ‘네.’하고 대답했다.
닭다리를 들고 흔든 것도 모자라 다른 한 손에는 빙사탕(氷紗糖: 얼음사탕)을 쥐고 있었던가, 그랬었다. ‘얘야, 얘야. 맛난 것 먹자. 그냥 여기에 두고 갈 테니, 먹기라도 하렴.’ 그리 말하고 연서강은 홍월정 섬돌 위에 먹을 것을 내려두고 멀찍이 떨어져 나왔다. 홍월정 숲에 몸을 숨긴 채 아이는 연서강이 홍월정에서 멀리 떨어져도 결코 나오지 않았었다.
아이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리의 도움이었다. 배가 고팠던 것인지 고양이가 기어 나와 연서강이 두고 간 닭다리를 물어뜯은 것이다. 그것을 본 아이가 ‘아리야, 아리!’하고 숨을 죽인 비명을 질렀다. 허나 곧 아리가 닭을 물어뜯어도 연서강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자 아이도 조심스레 그늘 안에서 나와 빙사탕을 입에 물었었다.
아이가 먹는 걸 구경하며 연서강이 작은 목소리로 ‘맛있지?’하고 물었다. 아이가 흠칫 놀라며 연서강을 보았다. 그렇게 한 십여 분을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더.......’
뒷말은 입속으로 모두 씹어 삼켰지만 연서강은 충분히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래.’하고 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었다.
그때의 기쁜 마음을, 연서강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라네.”
제아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 비유하니 알 듯도 했지만 여전히 태상이 자신에게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는 의문이었다. 태상께서는 자신을 홍이처럼 안 되고 가여운 존재로 생각하고 계신가. .......역시 알 듯 말 듯 했다.
“가서 여동생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게. 허면 죽이지는 않을 걸세.”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잇는 말이 연서강에게는 썩 와 닿지 않는다.
연서령이 과연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자신이 말할 시간은 줄 것인가. 어렸을 때야 신체 능력이 서로 비슷비슷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인의 몸이지만 자신의 팔을 붙잡고 제가 가고 싶은 대로 이끄는데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 듯 했던 연서령의 모습을 떠올리니 더더욱 시름만 깊어갔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하며 연서강은 먼 곳으로 간 홍이를 보았다.
“정말.......”
태상에게 둘러대기 위해서 꺼내기 시작한 말이었지만 ‘정말’ 지금 자신의 근심거리가 연서령,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상과 홍이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둘로 분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태상과 홍이와 함께 있을 때면 되도록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일’로부터 유리된 자신이 웃으며 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속으로 숨은 ‘일’에 관련된 자신이 구경하는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이들과 함께 노니는 자신을, 속에 숨은 자신이 진심으로 부러워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연서강은 태상과 홍이와 대화를 나누며 웃는 자신이 질투가 나서 미워질 때도 있었다. 비록 아주 가끔이었지만.
“.......이제 여름도 다 지나가는군요.”
문득 연서강이 중얼거린 말에 태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곧 금추(今秋: 올가을)가 오겠군.”
가을이 오면 온 몸에 열병처럼 들러붙은 연무강의 입술과 손의 감촉도 조금은 서늘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몸 안을 들쑤셨던 그의 일부까지도.
“금추(今秋: 가을)가 되면 수확제로 극번(劇繁: 몹시 바쁨)해져 싫거늘.......”
태상의 투정에 연서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태상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아, 또다.
또 연서강은 태상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자신을 질투했다. 참으로 시리고 끔찍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