緇墨
20.
보후전 건물의 벽 곳곳에 깊숙이 배어든 오래된 향냄새 위로 다시 또 새로운 향 연기가 더해졌다. 뱀 신이 새겨진 금향로에 막 꽂힌 침향에서는, 붉은 빛과 함께 새하얀 연기가 마치 천장으로 끌려 올라가듯 일(一)자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든 불빛을 꺼버린 탓에 어두컴컴한 제실 안은 제단 옆 벽면을 가득 메운 인등(引燈)으로 되레 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기까지 했다.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부서지는 벽 가운데 자리 잡은 뱀 신의 제단은 그야말로 어둠을 파하는 태양과도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양 방향에서 일렁이는 등불이 금으로 만들어진 신상을 먹구름 속의 번개처럼 번쩍이게 만들었고, 거대한 크기와 앞으로 쏠리는 듯한 신상의 모양새는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몸을 엎드린 신자들로 하여금 경의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여기에 보후전 특유의 적막하고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더해져 제실 안은 그야말로 더러운 속세에서 동떨어진 신의 마지막 휴식처로 보였다.
그 제단 앞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중년 여인 하나가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고 있었다. 등불이 공기에 스쳐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제실 안에서, 조심조심 옷깃 스치는 소리도 줄여가며 신께 기도를 올린 여인이 마침내 합장한 두 손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그녀가 하는 양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제아겸은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아겸의 그런 태도를 무엄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건만 정작 여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신심이 깊은 그녀에게 태상인 제아겸은 단순히 황제의 신자(臣子)가 아닌 뱀 신의 대리자였다. 때문에 그녀는 제아겸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흡사 신에게 제를 올리듯 언행을 조심하곤 하였다.
뱀 신께 예를 올리느라 흐트러진 자신의 옷을 재빨리 정리해주는 궁아를 힐끗 곁눈으로 본 뒤, 그녀가 제아겸을 다시 보고 입을 열었다.
“새로 만든 향의 향냄새가 좋습니다.”
하고 운을 뗀 여인이 잠시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금번에 라구나국에서 진상한 침향나무가 극품(極品)이라 하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라구나국 침향나무야말로 감히 지상에 난 천상의 보물이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라구나국 사신이 하는 말을 곁귀로 듣기는 했습니다만, 늘 하는 일언(逸言)이라 여겼었는데 이리 직접 접하여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하제국 남쪽에 위치한 라구나국에서 나는 침향은 원래도 그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거기에 백단과 생약을 첨가해 만든 향이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수안궁의 신도들도 입을 모아 ‘좋다.’라고 말했었기에 제아겸에게는 여인의 그런 칭찬이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었다. 허나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가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마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걸음으로 여인은 제아겸의 앞을 사뿐사뿐 지나쳐 제실을 빠져 나갔다. 여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떠나기가 무섭게 제아겸은 곧바로 미소를 지우고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러는 것도 잠시, 그는 곧 여인을 따르는 궁아들 뒤를 따라 제실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보후전에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곳인 객실에 당도하자, 여인이 궁아들을 대령한 교상(交牀: 의자)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는 그녀의 정리된 손톱 끝처럼 정갈하고 우아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은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지나치거나, 혹은 모자란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참빗으로 빗은 듯 가지런한 그 여인에게는 태생적으로 흘러나오는 기품과 품위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녀를 뭇사람들과는 차별화되는 고귀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제아겸은 주변의 여타 다른 이들처럼 눈앞의 여인을 마냥 곱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이한 이야기라니요.’, 그 시선을 능숙하게 숨기며 제아겸이 묻자 여인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태상께서 근래 궐 밖에서 웬 아이를 거두어들였다, 들었습니다. 해서 참으로 이상타, 수안궁에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고 생각했었지요.”
그리고 여인이 고개를 돌려 제아겸을 보았다.
“그 풍문이 진실입니까?”
실제 나이보다는 조금 젊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그 얼굴에는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오롯이 새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에는 그런 흔적들이 하나도 없었다. 흡사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옥돌을 닦아 만든 듯 청아한 여인의 얼굴은 투기도, 살의도, 적의도, 심지어는 타인에 대한 자그마한 미움조차도 한 번 품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마냥 선하고 청초해 보였다.
제아겸이 대답했다.
“제가 모르는 신도 중 한 명이 궐 밖에 있었나 봅니다. 그 신도가 낳은 아이인 듯 싶습니다. 물어보니 부모는 사별했다 하여, 수안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원래 수안궁에 있어야 하는 아이인지라.”
“.......그렇습니까.”
여인이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목소리에는 딱히 의심하는 기색이 서려 있지는 않았지만 제아겸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밖에서 고아로 떠돌다 험한 일이라도 당했었는지 발견했을 당시 몸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금년 겨울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여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저런, 딱한지고.’ 혀를 쯧쯧 차며 여인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엾게도 어린 나이에 벌써....... 그 아이가 이승을 뜰 때까지 고운 것만 보여주고 맛난 것만 먹이며 잘 대해주세요. 태상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너무도 아픕니다.”
그녀의 말에 제아겸은 속으로 ‘잘도.’란 무례한 생각을 했다. 여인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누가 봐도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할 아이를 가엽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제아겸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물론 여인에게 측은지심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측은함은 절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죽는다.’란 말에 여인은 아이에 대한 관심을 모조리 싹 거두어 들였다.
그에 대해 더 이상 자신의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듯.
올 겨울에 비명횡사를 당할 아이에 대해 변명한 뒤, 제아겸은 속으로 몰래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변명이기는 했으나 늘 그렇듯 ‘죽음’에 대한 화제는 입에 올리기 껄끄러웠다. 그것도 가깝게 지내는 이에 대해선 더더욱.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제아겸의 대답이 답지 않게 늦은 것에 여인이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제아겸을 보아왔던 자답게 이내 알겠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태상께서는, 유독 어린 아이에 약하셨지.......”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와 제아겸의 앞에 선 여인이 마치 자신이 태상의 어머니라도 된 듯, 자애로운 얼굴을 해 보이며 제아겸의 손을 잡았다. 평생 험한 일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여인의 손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으며 좋은 향기까지 나고 있었다.
“태상께서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그 아이는 무척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 슬퍼하지 마십시오. 태상, 보는 제 마음이 다 아픕니다. 나는 비록 내 배로 아이를 낳은 적은 한 번도 없으나 내가 마음으로 낳은 아이라 여기고 있는 이가 바로 황상과 태상이어요.”
다음 순간 여인이 꽉 그의 손을 힘을 줘서 잡았다.
“......., 황상과 태상은 내 보물이니.”
그 말에 제아겸은 다소 흐려진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자신의 마음에는 한 점 얼룩도 없다는 듯이 생긋 웃는다. 그런 그녀의 미소가 소름이 끼쳐 제아겸은 당장 그녀의 손을 떨쳐내고 싶었다. 허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제아겸은 희미하게 웃으며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태후마마.”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궁아들을 불렀다. ‘기도를 오래 드렸더니 목이 마르구나.’ 그녀가 그리 말하자 궁아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차를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마.’하고 대답했다. 태후가 좋다, 말갛게 웃으며 제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에 그녀는 제아겸을 돌아보며 ‘태상도 어서 오세요.’하고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제아겸은 간단히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다.
제실을 빠져나가는 태후의 등을 제아겸은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대로 가만히.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자신은. 암만 마음에 안 들고 저어되어도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 오랫동안 자신이 염원했던 바를 이룰 수가 있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과 다른 방법을 택한 한 청년을 떠올렸다. 아이처럼 크고 둥근 눈에 순진하고 선하게 생긴, 허나 지금은 갖은 고생을 겪어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은 마치 공기 중으로 푹, 하고 꺼져 들어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말하고 돌아간 뒤 남자는 그 후, 수안궁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연서강.”
바쁜 일이 있나보지, 라고 홍이에게 말하긴 했지만 말하기는 했지만 제아겸은 연서강이 일하는 서서원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변방에서 부상을 입은 연태위의 막내아들이 하는 일이다. 나라 안 관리들을 모아 한해 공과를 따져 상을 주는 가을 수확제가 열릴 때까지 축난 몸이나 추스르라고 주어진 일일 게 분명했다.
연서강이 ‘고작’ 비서랑이란 말을 쓰긴 했지만 실상 그가 얻은 수확이 ‘고작’ 비서랑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가을 수확제 때 비서랑을 역임하여 한가하게 지내던 명문 귀족 자제들이 대거 승진하는 것을 제아겸은 지금껏 여럿 보았다. 연서강이 한 일은 분명 헛되지 않았다. 수확제가 되면 분명 그의 부친인 연태위가 어떻게든 손을 써서 번듯한 곳에 그를 배정해주리라.
연태위가 비정하고 엄격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비겁하고 저열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과를 내면 그만큼 인정을 해주고 공정하게 상을 내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연서강이 비서랑에 봉해진 것도 그의 몸을 고려한 연태위가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쉬얼,.’란 의미로 손을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더 할 나위 없이 한가할 터.
제아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방법을 택하면 안 될 터인데.
성격이 소심하고 만사에 서투른 이이니 지금 이 순간도 좀체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답답하게 끙끙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허나 제아겸은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생각에 생각만 거듭하다가 지쳐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으면, 자신이 너무 무력하다 자책하며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내길.
그러다 ‘겨울’이 지나가게 되면 그도 자신의 앞일에 대해 새로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옆에서 누군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는 한, 의지가 약하고 겁이 많은 이이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망연자실할 때마다 적당히 달래주면 될 터이다.
제아겸은 연서강이 더 이상 노력하지 않길 바랐다.
고약한 뱀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꼬아버린 뱀 신을 원망하며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것.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뱀 신은 좋다고 손뼉을 치며 더더욱 발버둥 쳐보아라, 하고 더 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그를 밀어버릴 것이다. 그게 바로 이 하제국의 신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친구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분명 가을에- 늦어도 봄에 새로운 벼슬을 얻게 될 것이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또 어여쁜 여인을 배필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포기만 한다면, 내내 달콤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이니. 충분히 과거와 달리 제대로 된 생을 살 수 있을 터이니.”
어느 순간 제아겸의 중얼거림은 간절한 기도와도 같아졌다. 찡그린 얼굴로 그는 두 눈을 감았다.
“허니 제발, .......아무런 애도 쓰지 말아주게.”
제아무리 황금빛 제등으로 밝혀봤자 여전히 제실은 암굴처럼 어둔 곳이 대부분이었다. 제아겸은 혐오스럽다는 듯 제실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빛이 미치지 않는 캄캄한 구석에서 누군가 숨어 킬킬킬, 음침하게 웃는 듯도 했다.
* *
연무강은 머리를 움직여 침상에 널브러져 있는 연서강을 응시했다.
나신인 그는 모든 힘이 다한 듯 침상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엎드려 있는 탓에 훤히 드러난 하얀 등과 둔부, 팔다리 따위가 평소보다 푹 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연무강은 생각을 달리했다. 평소의 모습이라 해봐야 여러 겹의 옷으로 둘둘 싸여져 있는 모습이었고, 그런 모습조차 그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마주 하면 연서강은 벌벌 떨며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고 자신은 꽁지를 만 개만도 못한 그 작태에 분노하기 바빴다. 연서강의 실제 체격이 어떠한지 살펴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야윈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것도 모자라 그 이후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자신’ 또한 연서강에게는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고뇌들 중 하나겠지. 허나 괜찮다. 기연조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것보다야 자신과의 일 때문에 연서강이 고민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연무강은 돌연 상체를 연서강 쪽으로 숙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연서강.”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고함소리라도 들은 듯이 연서강의 등과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비명 소리를 삭이고 있는 것인지 베개를 쥔 연서강의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연무강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하던 행위 때문에 아무래도 몸에 남아있는 힘이 별로 없을 텐데. 정말 쓸데없는 곳에 힘을 낭비하고 있다. 자신을 거부하거나 불쾌감을 표시하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저번처럼 손을 깨무는 편이 나을 터인데,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우로다.
그렇지만 사실 연무강으로서는 연서강이 쓸데없는 일에 제 힘을 낭비하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다. 아니, 녀석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면 빠져나갈수록 자신을 거부하는 힘이 줄어들 터이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배 아래로 자신의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흠칫, 연서강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온기를 품은 배가 근육 하나 없이 말랑말랑했다. 잠시 그 감촉을 느끼던 그는 오른팔에 힘을 줘 연서강의 몸을 일으켰다.
축 쳐진 신체는 물을 먹은 듯 다소 무게감이 있었지만, 발버둥 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사지는 전보다 쉬이 들어 올려졌다. 침상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연무강의 팔에 허리가 감겨 쑥 몸이 들려지자 연서강이 기겁했다. ‘형님, 형님, 형님.’하고 그가 의미 모를 애원을 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이미 연서강은 탈진한 지 오래였다. 불과 십 여 분 전, 그의 둔부는 지금 그의 배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의해 우악스레 벌어져 그 사이의 밀지로 사내의 성기를 받아들였었다. 엎드린 채로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여야 하다니, 상당히 굴욕적인 자세였지만 당시 연서강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온 몸이 쪼개질 것 같은 아픔에 무작정 앞으로 기어 도망가려고 했고, 그런 그의 어깨와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 연무강은 계속해서 추삽질을 했었다.
사정없이 이어지는 행위에 연서강은 마침내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발버둥을 치는 것보다 차라리 숨을 죽이고 자신조차 죽인 채 가만히 행위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더 빨리 남자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쉴 새 없이 찍어 누르는 남자의 욕망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라며 그는 얼굴을 베개에 처박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자신의 몸 밑에 깔린 포단을 붙잡았다. 아, 아프, 아, 아프다는 말이 제대로 된 소리로 되지 못한 채 연서강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에 경험이 전무한 곳이었던 지라 연서강의 몸은 그 갑작스럽고 비정상적인 고통에 몹시 혼란스러워 했다. 고된 작업에 온 몸에 열이 올랐고 그 열이 머릿속 깊은 곳까지 침범했다. 그리고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침범한 열은 곧 짙은 탈력감과 패배감을 낳았다. 결국 연서강은 이를 악문 채 처절한 울음을 토해야 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아니, 그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반항과 저항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덮친 남자가 자신의 몸 안에서 파정한 감각도 연서강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질척한 무언가가 자신의 내벽을 사납게 두드렸다. 지금 내 몸이 현재 품은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안의 장벽을 타고 느리게 유영하듯 움직이는 ‘그것’의 느낌에 몸서리가 절로 처졌다. 뱃속을 날카롭게 긁어내려도 결코 시원해질 것 같지 않은 답답하면서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속에 퍼진 악몽의 잔여물이 주는 그 느낌은 지친 연서강을 더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연무강이 저번처럼 어서 빨리 방을, 자신의 곁을 떠나주기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연무강이 자신의 허리에 팔을 감아 들어 올렸을 때,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 이상 무언가 더 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힘이 들었다.
“.......형, 형님.”
조급하게 부르며 그는 연무강의 팔을 자신도 모르게 붙잡았다. 단단하게 자신의 배를 압박하고 있는 연무강의 팔은 마치 족쇄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같은 성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당연했다.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오랜 시간 동안 육체를 단련한 자였다, 상대방은. 무예의 기본도 배우지 못한 한량 나부랭이가 발버둥 쳐서 어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연서강은 절망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연무강의 팔에는 방금 자신이 긁어서 생긴 붉은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그 자국이 연서강에게 말하는 듯 했다. 너는 지금 계집애처럼 남자에게 안겨 있다고.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바로 앉은 자세가 되자마자 연서강이 바르르 떨리는 눈으로 연무강을 보았다. 혼란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는 눈이었다.
“왜 그러지?”
연무강은 그의 그런 눈빛을 무시하며 느긋하게 물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연서강의 손가락이 차디찼지만 별다른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힘을 줘서 어떻게 떨쳐 내볼까 하는 궁리도 완전히 포기한 듯 보였다.
“아......, 니요.”
경직된 목소리로 연서강이 이내 시선을 아래로 옮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연무강은 연서강이 동요한 이유를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 전 연서강의 몸 안에 사정한 것 때문일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의 허벅지에 닿아있는 연서강의 둔부가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바로 앉혀져 안에 든 것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밖으로 흘리는 것만은 막고자 하는 것 같았다.
속에 계속 품고 있으나, 밖으로 흘러나오나 둘 다 수치스럽기 매한가지지. 허나 연서강은 후자 쪽이 더 수치스럽다 여기는 모양이다.
그리 추측하면서 연무강은 웃음을 흘렸다. 당장에 녀석의 몸을 뒤집어 자신이 사정한 것이 연서강의 몸속에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랬다간 자신의 허벅지에 와 닿는 연서강의 애처로운 움직임을 더 즐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참았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 앞에서 배설하지 않으려는 본능적 행동이라지만, 그것이 연무강에게는 자신의 것을 뱃속에 품고 있으려 연서강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참으로 어여쁘게 여겨졌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허리에 감았던 손으로 그의 배를 주물럭거리다, 문득 그가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는 배를 주무르던 손을 아래로 내려 연서강의 성기로 가져다 대었다. 흠칫, 연서강이 놀라며 연무강의 팔을 다시 힘을 줘 잡는다. 그가 고개를 쳐들고 연무강을 보았다.
“끝.......,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말이라는 것이 그거다. 연무강은 웃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제 곧 끝나겠거니, 생각하며 언제 자신이 자리를 뜰지 시간을 재고 있었나 보다. 그저 지쳐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웃음을 삼키며 연무강은 연서강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 되지, 연서강. 혼자만 끝났다고 생각해선.”
“하, 하지만!”
연서강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서둘러 항변했다.
“이미 한 번 하지.......”
그러나 다음 순간 연서강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의 얼굴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생각과 항변이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연무강이 내건 조건에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황후를 만나게 해준다는 말 자체도 거짓일지 모른다.
그저 연무각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거기까지 연서강의 생각이 뻗쳐나갔을 때 연무강이 혀를 찼다. 연서강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느냐?”
하고 말하자 연서강이 황망한 얼굴로 연무강을 보았다. 연무강은 다른 쪽 손으로 그의 턱을 잡았다. 핏기가 가신 연서강의 얼굴은 마치 빳빳한 종이와 같았다. 힘을 줘서 세게 잡자, 사정없이 구겨졌다는 점에서.
“어쩔까, 이 어리석은 머리통을.”
연서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허나 연무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연서강의 턱을 잡고 휙휙 좌우로 흔들었다. ‘윽!’ 연서강이 짧게 소리 질렀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연무강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안심해도 좋을 게다. 나는 널 놓아줄 생각이 전연 없으니.“
놓아주면 그 망할 기연조에게로 폴폴 날아가려고.
순간 한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연무강은 연서강의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연서강이 ‘형님!’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몰라도 너는 아직 한 번도 끝나지 않았지 않으냐. 시작도 안 해 놓고선 끝났다고 생각해선 안 되지.”
연무강의 말에 연서강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연무강이 아래로 떨어지는 연서강의 고개를 우악스레 붙잡아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숨통이 조금 막혔는지 연서강이 잰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수치인지 분노인지 그의 얼굴에 열꽃이 피어 있었다. ‘연서강.’ 그런 그의 귓가에 연무강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심하게 굴지 마라.”
“.......”
“집안과 가족을 배신하고 기연조에게 붙어먹을 생각을 했던 놈이. 간도 크게 감히 그런 생각을 품었던 놈이 지금 와서 소심하게 굴어봤자 가증스럽기만 하다.”
연서강이 숨을 멈췄다.
연무강은 턱을 쥔 손에 힘을 풀고 그 검지고 연서강의 입술을 쓸었다. 땀과 타액으로 축축해져 있던 입술은 잠시잠깐의 휴식만으로도 금세 까슬까슬하게 말라 있었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매만지던 연무강은 다음 순간, 입술을 벌리고 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이내 굳게 닫힌 치아에 가로막혔다. 타액으로 미끄러워진 손가락으로 그는 연서강의 이를 가벼이 두드렸다.
자신의 팔에 갇힌 연서강이 잘게 호흡하고 있었다. 약한 떨림과 쿵쾅쿵쾅 온 몸을 두드리는 심장의 박동까지 접촉된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작고 어린 새를 한 손바닥에 꽉 쥔 듯 했다. 연서강의 모든 것을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연무강은 절로 즐거워졌다.
“끝나고 나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한 번이니, 뭐니 자잘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위해 좀 더 분발하는 게 어때.”
“.......”
“너무 싫어서 빨리 끝내고 싶다면, 그래.”
연무강이 낮게 웃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숨이 연서강의 목덜미에 닿았다.
“어서 나를 만족시켜 줘야지.”
그 말뜻을 아무리 멍청한 연서강이라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허나 연서강은 숨을 멈춘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무강은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는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응당 저절로 벌어지기 마련이다. 연서강 또한 그랬다.
“.......”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고집스레 닫혀 있던 연서강의 이가 천천히 벌어졌다. 아직도 망설이는 기색이 완연한, 답답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어차피 연무강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연서강을, 자신이 품속에 가둔 연서강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벌려진 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연무강은 연서강에게 짧게 명령했다.
“핥아라.”
느릿하게 연서강의 혀가 움직였다. 연무강의 손가락에 축축하지만 부드럽고 뜨거운 것이 얽혔다. 소극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좀 더 안달하게 되고 조급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무강은 웃으며 연서강의 성기를 쥔 손을 움직였다.
연서강이 다리를 들어 움츠렸지만 아까와 같은 거센 저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허벅지도 연무강의 손에 함께 마찰되었다. 민감한 허벅지 안 쪽 살이 비벼지자 간지러움이 피부를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는지 흣, 하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까의 행위에선 짓이긴 입술에 막혀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잠시 후, 무리한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자극된 사타구니 때문인지 힘이 부친 연서강은 결국 다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다. 다소 식어 있던 연서강의 몸에 열이 올랐다.
연무강은 소름이 돋은 연서강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냉소했다. 어수룩한 놈. 하지만 연서강이 그 어수룩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서강이 기연조를 마음속에 품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마음속으로만 품었을 뿐, 실제로는 그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긴 이 놈 성격으로 볼 때 기연조에게 연모하고 있다는 티를 내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분명 내색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되뇌며 괴로워했을 테지.
저절로 음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연조에 대한 순정을 고이고이 간직한다고 이 나이 먹도록 다른 이에게 눈길 한 번 안 주었을 텐데, 그 마음이 결국 엄한 놈에게 몸을 허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다니. 이 결과가 연무강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연서강의 성기를 흔드는 손의 움직임이 더 거칠고 집요하게 변했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목을 물어뜯었다.
“아, 그만. 그, 만......., 형님. 형님, 형........님.”
연서강이 억누른 소리로 말한다. 연무강의 품안에 잠자코 안겨 있던 그의 몸이 비틀어졌다. 입안에 머금었던 손가락은 빨지 않게 된 지 이미 오래다. 연서강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연무강은 연서강의 턱을 잡아 그가 다른 쪽으로 얼굴이 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연서강의 어깨가 들썩였다. ‘혀.......형......., 님.......’ 허덕이며 연서강이 두 손으로 자신의 턱을 쥔 연무강의 팔을 붙잡았다.
“놔, 놔 주십시, .......제발!”
다음 순간 연무강은 연서강을 침상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놀란 눈을 한 연서강의 한 쪽 발목을 붙잡고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훤히 드러나게 된 자신의 치부에 연서강이 ‘싫습니다!’하고 소리치며 엎드리려고 했다. 허나 연무강이 그의 둔부를 벌리는 게 더 빨랐다. 연무강은 둔부 사이의 밀지로 손가락을 넣었다. 속에 든 것을 배설하지 않기 위해 단단하게 오므려져 있는 밀지가 경고 업는 침입에 바르르 떨렸다.
그 속은 질척하고, 뜨거웠다.
연서강이 ‘하, 하아....... 하.......’ 경련과도 같은 숨을 내뱉었다. 아무소리도 없이 그저 연무강을 올려다보는 그 시선에는 극한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서강아.”
부드러이 연무강이 불렀지만 연서강의 표정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이대로라면 또 만족하지 못한단다.”
그러자 하아, 하아......., 여전히 가쁘던 숨소리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사그라진다. 연무강은 밀지에 넣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벽을 비볐다. 자신이 파정한 액으로 젖은 내벽은 무척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아까 조심스레 연서강이 혀로 자신의 손가락을 핥았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서, 어서 넣고 싶었다.
“서강아.”
다시 재촉하자 연서강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일제히 힘이 빠진 육체는 또 축 늘어졌다. 손가락을 빼내고 연무강은 어느새 단단하게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사정액이 다소 흘러나온 연서강의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막혀 있는 것을 뚫는 듯한 압박감도 잠시, 연서강이 비틀린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내던 것도 잠시, 그의 성기는 연서강의 몸속으로 쑥 들어갔다.
아까 전보다 훨씬 들어가기 수월했다. 안이 젖어 있던 덕이다. 기분 좋게 질척해진 내벽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며 연무강은 생각했다. 다음에는 목실유(木實油)라도 준비를 해올까. 안을 젖게 한 것만으로도 이리 좋아질 것이라면 진작 이럴 것을.
연서강의 몸을 품에 안은 자가 자신이 처음이란 사실에 흡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자신이 누군가의 몸에 욕정 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며 연무강은 연서강의 얼굴을 보았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연서강의 온 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을 깨문 채 그는 제 몸을 억누르고 쾌감을 취하는 남자를 견뎌내고 있었다.
.......웃어주면 좋으련만.
연무강은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에 물린 그 입술은 부풀어 있었다. 약간 머뭇거렸지만 연서강은 연무강의 혀가 꽉 문 이에 닿자 입을 살짝 벌렸다. 그 틈으로 혀를 넣으며 연무강은 연서강의 몸속으로 자신의 성기를 깊이 퍽, 묻었다.
악! 하고 연서강이 소리를 질렀다.
울부짖는 연서강의 입술은 무척 달았다.
모르겠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취- 기침이 나왔다. 기침 소리에 연무강이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흠칫 놀라 연서강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밤공기가 낮보다 서늘한 것은 사실이었다. 땀을 흘린 채 나신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 몸에 무리라도 줬나 보다. 근래에 건강이 부쩍 나빠진 그였다. 허약체질은 아니나 워낙 방치되어 지낸 탓에 몸이 튼튼하지는 못했다. 거기에 결국 요 여름에 있었던 일들이 치명타를 안겨줘 건강을 해치고 만 게 틀림없다.
기침을 하자 새삼 몸에 한기가 든다 여겨졌다. 해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모았다. 씻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으나 지금은 잠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호롱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자고 싶었다.
어서 이 ‘순간’을 끝내고 싶었다.
“.......연서강.”
그것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연무강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연서강은 긴장한 얼굴로 연무강을 보았다. 설마, 아직도 내게 볼 일이 남은 건가. 어서, 어서 빨리 자고 싶은데. 연서강은 벌벌 떨리는 손을 이불 속으로 숨기며 애써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형님.”
허나 연무강은 좀체 입을 다시 열지 않았다. 때문에 연서강은 숨을 죽인 채 속으로 겁에 질려 떨어야 했다.
무얼까, 옷까지 모두 챙겨 입었으니 이제 모두 끝난 것 아닌가.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조금만 지나면 가솔들이 일어나 움직일 시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속에 아직도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잡혔던 턱도, 발목도, 지나치게 벌어졌던 허벅지도 아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곳은 더 사정이 처참했다. 엉덩이를 침상에 제대로 대지도 못할 정도였다. 온 몸 구석수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감싼 열기가 고뿔 때문에 오른 열인지, 아니면 아까의 그 무리한 행위 때문에 생긴 열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간에 연서강은 의원에게 진찰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체 무어라 말하면서 이 몸을 보인단 말인가? 그러느니 차라리 이불을 두르고 혼자 끙끙 앓는 편이 나았다.
다행스럽게도, 적대적인 태도는 많이 사그라졌다지만 여전히 본채의 가솔들은 연서강에게 무심했다. 연서강이 아침을 먹지 않거나 심지어는 방밖으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아도 본채의 가솔들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녹우당에 있을 때였다면 모씨 아줌마와 홍이가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불렀겠지만, 여기는 본채다. 그러니 이런 일을 당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녹우당이 아니라 본채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 쪽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연무강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것을 본 연서강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사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연서강은 제 벌어진 옷깃을 꽉 쥐었다. 절로 손이 달달달달 떨렸다. 잘,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보았다.
자신에게서 돌아서 있는 탓에 그의 등 밖에 보이지 않았다. 넓고, 곧은 등. 그리고 위압적이고 오만하며 냉정함이 묻어나오는 등이었다.
대체....... 형님은 무얼 생각하고 계시지?
알 수 없다.
기연조를 연모하고 있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기연조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도 들키고 말았다. 더 나아가 집안을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들키고 말았다. 지금 와서는 애초의 계획과 조금 달라졌다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것을, 그 모든 것을 들켰는데, 어째서.......?
연무강이 한 말을 되뇌어 보면 더더욱 생각은 미궁 속에 빠졌다. ‘집안과 가족을 배신하고 기연조에게 붙어먹을 생각을 했던 놈이.’ 그래, 그 말.
그 ‘연무강’이 연씨 문중을 배신할 놈을 가만히 놔둘 위인이던가. 그것도 그토록 혐오하던 자신을? 그런데 왜 바로 아버지께 알리지 않고 오히려 나를 도와준다고 말한 거지? 배신할 걸 알고 있으면서 도와준다니, 그것도 그 대가가.......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연무강이 미치지 않은 이상 이럴 리가 없었다.
게다가 ‘좋은 것 같구나?’ 그 말은 대체, 좋아하니 못해줄 것도 없다니.
단순하게 그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뜻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허나 그럴 리가 없다. 연서강이 아는 연무강은, 더욱이 저 사람은 자신을 너무 싫어해서 제 손으로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 아니던가. 저 남자의 칼에 죽은 지 불과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죽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차가운 경멸 밖에 없었다. 그랬던 자가 갑자기 변할 리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다, 큰 형님은.
.......저 냉정하고 잔혹하며 인정 없는 사람이 고작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칠 리가 없다. 그러니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리라. 허나 부친의 명이라고 보기는 힘든 일이니 아마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일 테다. 그러니, 그러니.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하인에게 명해 해열제와 탕약을 준비하도록 하마.”
연무강의 말에 생각이 끊겼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자 다시 등이 보였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연무강은 말을 잇고 있었다.
“설마 그런 꼬락서니로 난전(蘭殿: 황후의 궁전) 마마를 배알할 작정은 아니겠지.”
“.......만나게는 해주시는 겁니까?”
허탈하게 웃으며 연서강은 물었다. 여차할 경우, 이 두 번의 관계를 이용해 그를 협박할 수는 없을까 궁리하면서.
앞일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래, 아무리 무섭고 경악스런 상황이라도 이젠 이 상황을 발판삼아 계속해서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그 발판이 단단한 철판일지 자신의 발목을 물 덫일지 아니면 썩어버린 나무판일지 이제 와서는 신중하게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길은 하나뿐이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연무강이 연서가의 말에 차갑게 웃었다.
“네놈이 무얼 할 작정으로 난전 마마를 배알하게 해 달라 했었는지 기대하도록 하지.”
그 여유로운 웃음과 목소리를 듣자 연서강은 왜 연무강이 자신을 돕는다 말을 꺼낼 수 있었는지, 약간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망치고 깨부수고 .......심지어 결정적인 증거를 들고 연씨 문중에게서 등을 돌리더라도 연무강은 그런 자신을 막고 저지할 자신이 있는 것이다.
뛰어봤자 벼룩이고, 굴러봐야 굼벵이이며, 아무리 머릴 써봤자 녹우당 한량 나부랭이, 연서강이 황후마마 앞에서 광인처럼 날뛰는 일이 일어나도 연무강은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그를 제압할 것이다. 능히 그럴 수 있는 남자였다.
“.......”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가 과거에 배신자를 눈치 채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배신자를 처단함은 물론, 배신자와 연결되어 있었던 유일한 ‘증거’마저 없앴던 자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 남자를 뛰어넘지 못하면 자신은 원하는 미래를 얻지 못한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든 자신은 거기에 맞춰 놀아나선 안 되었다.
이 남자의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
연서강은 연무강을 똑바로 바라보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기대하실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연무강이 조소했다. 그 조소를 맞받아치듯 연서강이 이어 말했다.
“걱정하셔야 할 것이니까요.”
연무강의 조소가 비릿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포함해서 기대하도록 하지.”
여전히 오만하고 여유로운, .......맹수와 같은 태도였다.
* *
연무강은 약속을 지켰다. 약속이라고 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선고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과 다른 점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분명 그는 ‘하인’에게 명해, 라고 말을 했었다. 허나 낮에 약을 들고 연서강을 찾아온 사람은 연무진이었다.
해서 그는 깨달았다. 큰 형님에게 있어 작은 형님은 ‘하인’에 불과했구나.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다. 연무진이 들으면 얼마나 서운해 할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의외로 연무진은 ‘형님이 그렇다니까.’하고 바로 인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그에게서 터져 나올 불평불만을 감당할 자신이 연서강에겐 없었다.
“어찌된 연유로 형님이 네 몸을 챙기시게 되었느냐?”
게다가 딱히 그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원래부터 연무진은 수다스런 사람이었다. 방에 들어와 약탕기와 조제한 약을 탁자에 내려놓자마자 그가 하는 말이 그거였다. 고작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연서강은 연무진이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간 일어난 일이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하며 연서강은 연무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버님의 명이 아니겠습니까.”
연무의를 핑계로 대면 연무진이 알아서 넘어간다는 것을 연서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연서강의 대답을 들은 연무진이 살짝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버님이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신데.’ 그러나 그는 곧 바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면을 바꾸어 밝게 웃으며 연서강에게 다가왔다.
“아버님께서 네가 어렸을 때 너를 박대한 걸 후회하고 계신가 보다.”
“........”
그 말에 연서강은 방금 연무진이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졌다. ‘아버님이 어디 그럴 위인이십니까.’ 철없을 때 했던 일이 양심에 찔려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잘 대해주는 사람은 이 집안에 연무진 하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 집안사람 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다 싶어서 연서강은 새삼 연무진을 다시 보았다. 아무리 그와 성격이 흡사한 연서령이 있다지만, 연서령도 연씨 문중 특유의 독기와 냉기가 서려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연서령의 성미는 연무진처럼 헐렁하다기보다는 치기어린 쪽에 가까웠다.
서령이......., 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서강은 비로소 여태 그녀의 편지에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이의 서신을 내가 어디에 두었더라. 그 애의 얕디얕은 이내심이 다하기 전에 짧게 적은 글이나마 써서 보내야 할 텐데. 서신을 받았던 당시 심정이 착잡하고 답답했던 탓에 서신도 어디 안 보이는 곳에 두었던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디인지 생각이 도통 나지 않았다. 열이 떨어지고 나면 좀 생각이 날까.
그때 약탕을 약사발에 따르며 연무진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형님이 네게 말을 전하라 하셨다. 열흘 뒤에 원하는 고운님을 만나게 해줄 터이니 그때까지 몸을 추스르라고 하더구나. 무어냐, 그 고운님이?”
“.......연모하는 분이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예?’하고 말할 뻔 했던 연서강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연모하는 분?!”
대답을 들은 연무진이 약을 따르는 것을 멈추고 연서가을 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라 연서강은 의아해졌다. 방금한 말 어디에 충격을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단 말인가. 허나 암만 요리조리 뜯어봐도 연무진의 얼굴은 여전히 ‘어떻게 이럴 수가!’란 얼굴이었다.
연무진이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네가 척애(隻愛: 짝사랑)하는 그 여인 일이라면 나도 도와준다 했거늘!”
아, 연무진의 반응이 어찌 저런지 연서강은 뒤늦게 깨닫고 ‘그것이.’하고 말을 이었다.
연무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약을 모두 따르고 그 사발을 연서강에게 건네며 중얼거렸다. ‘물론 나보다야 형님이 더 믿을 만한 사람이기는 하고, 또 내가 자랑하는 인맥도 전부 안사람의 인맥이기는 하지만, 또 결국 안사람도 형님의 아랫사람이니 내 안사람의 인맥도 내나 형님의 인맥이기는 한데.’ 그러나 그는 곧 연서강을 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너도 큰 형님에게는 털어놓기는 좀 그런 고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놓고선 나를 쏙 빼놓은 채 큰 형님과 쑥덕거려 벌써 그리 일을 진행시키다니.”
약탕을 받아들며 연서강이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형님을 서운하게 만들 생각은.”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다만 에둘러 사실을 숨길 목적으로, 마침 일전에 연무진과의 대화도 생각나서 내뱉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답에 연무진이 이리도 낙담할지 연서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변명으로 쓰지도 않았으리라.
잠시 고민하던 연서강은 재빨리 다시 말했다.
“그, ........그래서 열흘 뒤에 그 여인을 다시 만났을 때, 그때 줄 선물이 필요합니다. 괜찮으시다면 형님께서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당황한 나머지 연서강은 그만 말의 끝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그러나 말한 보람은 있었던지 낙담하던 연무진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것만큼은 형님도 손을 쓸 수 없었겠지. 암, 내게 맡기렴. 언제 사러 갈 예정이더냐. 함께 가자구나.”
잔뜩 들뜬 그의 목소리에 연서강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약을 마셨다. 적당히 식은 약에서는 종류도 알 수 없는 한약들이 서로 뒤엉킨 냄새가 났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얼굴에 쬐다보니 막혔던 숨이 다소 뚫리는 듯도 했다.
연서강이 약을 마시는 걸 가만히 보던 연무진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약 먹고 푹 쉬렴. 어찌 날이 갈수록 얼굴이 상하기만 하누.’ 혀를 쯧쯧 차는 소리에 연서강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이렇게 신경을 써 줄 수 있었다면, 어째서 더 일찍부터 해주지 않았을까.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본채에서 녹우당으로 아주 도망친 것은 자신이었으니, 녹우당으로 아주 도망쳐 본채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니 연무진과 마주칠 일도 드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자신이 녹우당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한들 연무진이 지금처럼 자신을 달리 대해주었을까는 의문이었다.
아니,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현재 연무진이 자신을 잘 대해주는 것이 전부.
“.......”
비로소 연서강은 제 입속에 머금은 약이 쓴 것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어야만, 타인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약을 두어 모금 마시고나자 더 마시기가 힘들었다. 해서 연서강은 연무진에게 ‘나중에 다시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의원이 아니기에 연무진은 흔쾌히 그러라고 말하며 연서강에게서 약사발을 받아 탁자에 올려 두었다.
탁자 위에는 연무진이 가져온 약 뿐만이 아니라 며칠 전 연의진이 두고 간 약들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연무진이 언덕을 이루고 있는 약들을 보며 ‘제대로 먹고 있는 게 맞느냐?’라고 묻는다.
몸이 좋지 않기는 좋지 않은 모양이다. 연후정에서 연무강을 맞닥뜨린 이후 계속 골골거리고 있으니. 모처럼 연의진이 영의전으로 놀러 오라, 패까지 챙겨주었는데 좀체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수안궁에도 전혀 걸음하지 못하고.
수안궁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서강은 불쑥 그리움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홍이, 홍이. 자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녹우당 도련님이라 해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잘만 따랐던 아이. 그 아이가 대가 없이 주었던 호의와 신뢰가 매우 그리웠다. 당장 수안궁으로 달려가 ‘홍아!’하고 부르고 싶었다. 아이가 자신의 부름에 놀라며, 그러나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달려 나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
허나 연서강은 참았다. 지금은 갈 수 없었다.
이제까지 참았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사정이 좋아지리라. 지금은 자신의 사정이 좋지 못해 연의진이나 태상이나 홍이를 보게 되면 얼굴 표정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가지 못하겠다. 그들 앞에서 설움에 북받쳐 한심하게 울음이라도 터뜨릴까 겁이 났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조금만 더 참아서 황후마마를 뵙게 되면.
연서강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불을 꽉 쥐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정은 필히 나아질 것이다. 그때는 그들을 만나도 웃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 *
황후가 기거하는 난전(蘭殿)인 여린전(麗璘殿)은 금수목이라고도 불리는 노각나무와 석류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격자무늬 꽃담 앞에 줄지어 선 노각나무는 나무껍질이 마치 황색이 깃든 붉은 비단처럼 보이는 데다, 크고 소담스런 하얀 꽃까지 피워내 여름이 오면 난전을 마치 때늦은 봄이 온 것 마냥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름 내내 난만한 하얀 노각나무 꽃은 난전에 순백의 눈가루를 뿌린 듯도 보였다. 꽃이 질 때는 어떠한가. 꽃이 질 때에 꽃잎들은 한 장씩 아래로 팔랑팔랑 떨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바로 이 여름 경치에서 여린전이란 이름이 비롯되었다.
일찍이 백의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각 부의 신료들은 군부(君婦)인 황후가 기거할 난전의 명칭을 무어라 할지 무척 고민하였다고 한다. 천도(遷都)하기 전 난전의 원래 명칭은 ‘교태전’이었다. 허나 당시의 황후였던 경의 황후는 백의궁에서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몹시 반대하였다. 하제국의 국모가 단순히 황제에게 교태를 부리는 여인에 그치는 것으로 비쳐 못마땅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난전의 명칭을 하제국의 격에 맞춰 개명해 주십사 부탁했다. 황후를 총애하던 황제는 그녀의 말이 옳다 하여 신료들에게 제국의 품격에 맞는 난전의 이름을 새로 짓도록 하명하였다. 그 명에 따라 신료들은 매일 머리를 맞대고 난전의 새 이름을 무어로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제국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제국을 보살피는 쌍두 뱀신은 다른 여느 신과 달리 남신과 여신이 적절히 조화된 신이었다. 그랬기에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다른 나라와 달리 하제국에서는 여성도 신의 일부를 당당히 구성하고 있음을 인정, 존중해주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다.
때문에 이례적인 존재인 황제를 제하면 비록 권문세족(權門勢族)이라 하여도 처첩을 동시에 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또 여인의 몸이라고 해도 능력만 있다면 정당하게 과시(科試)를 치르고 관리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한 사회였기에 당시의 황제도 대소신료들도 황후의 말이 옳다 생각하며 그 말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조정신료들이 서로 의논한 끝에 결정한 이름을 난전마마께오서 도통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도 여인이 거처할 집인데 이 이름은 너무 딱딱하지 않으냐, 혹은 군부의 집에 어울리는 멋과 운치가 없다 등등의 이유로 경의황후는 문무백관들이 올린 이름에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그것이 열 번이 되고 스무 번이 되자 대소신료들은 물론이요 그 과정을 지켜보던 황제 또한 지쳐 갔다. 참다못한 황제가 결국 황후에게 이제 그만 적당한 이름으로 고르라고 명하자 그 명에 경의황후는 이리 소박한 청조차 들어주지 않으시고 물리시는 것을 보니 폐하께서는 신첩에 대한 마음이 식으신 것이 분명하다며 울먹였다. 새 난전을 무엇으로 부를지 정하는 자리의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져만 갔다.
그때, 그간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 여인이 몸을 일으켜 예를 올리고는 감히 지존의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도록 하여 달라 청하였다. 그녀는 당시 하급 문관직에 있었던 여인으로, 그 자리에는 자신의 상관을 보좌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노각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여름, 소담하게 핀 꽃들 아래로 팔랑팔랑 수명을 다한 하얀 꽃잎들이, 바닥에 수북이 자란 초록색 이끼 위로 떨어져 있었다.
-가지 위에서 떨어진 하얀 꽃 조각이 어디서 붙어 왔을까. 푸른 이끼 위에 점점이 뿌려져서 옥무늬를 만들었네.
여인의 시에 영감을 얻은 황제가 황후에게 ‘그렇다면 여린전이 어떻겠느냐?’라고 물었다. 황후가 그제야 살포시 웃으며 ‘여린전! 고운 옥 빛깔의 집이라니, 제국의 군부가 거처할 곳의 이름으로 그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이옵니다.’라고 답했다. 그 이후 백의궁의 난전은 여린전이라 새겨진 현판을 달게 되었다. 당연히 후에 그 하급 여문관은 황제로부터 막대한 상을 받게 되었다.
허나 그리 들었던 말과 달리 지금 연서강이 본 난전은 온통 붉고 파랬다.
이름에서 연상되는 청자와 같은 흐린 녹색 빛깔은커녕 타는 듯 붉은 어린 셕류 열매와 그 나무에서 난 짙은 초록색 잎이 선명한 색상 대비를 이루어, 여름의 난전은 몹시 어지러우면서도 여름 햇빛과도 같은 강렬함이 서려있었다.
연서강이 일하는 서서원은 경천문 광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비서랑을 역임하고 있다 해도 백의궁 깊숙한 곳에 가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고작해야 정전 근처나 태화문 광장, 서서원과 그 상위 기관인 옥문각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경전을 지나면 나타나는 건허문(乾許門)을 보는 것도 연서강은 처음이었다.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을 가로지르는 건허문은 늘 경비가 삼엄했다. 그저 정전 앞을 지나기만 해도 이 이상은 출입패 없이는 입장을 불허한다며 경비병이 가로막곤 하는 곳이 바로 건허문 근처였던 것이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면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의 연서강은 능히 건허문 안을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와 함께하고 있었다. 건허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평소와 달리 연서강보다 두 어 걸음 앞서 걷고 있는 남자에게 예의를 표하며 바로 경계를 풀었다.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병사들에게 남자는 턱 끝만 약간 끄덕여 보인 후 성큼성큼 건허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오라는 채근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버려두고 가는 남자의 등을 보며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어서 남자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몸은 계속해서 주저하게 된다.
건허문.
이 문 안부터는 백의궁의 내궁, 즉 제국의 지존인 황제와 곤극(坤極)인 황후, 그리고 황실의 가장 큰 어르신인 태후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곳.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연서강은 그만 씁쓸히 웃고 말았다. 이미 자신이 한 번 죽었다 깨어난 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게다가 새삼 긴장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자신은 벌써 백의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수안궁에도 몇 번이고 다녀왔고, 수안궁의 주인인 태상과는 사사로이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황제나 황후와 마찬가지로 태상경 역시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만나 뵙기 힘든 자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리 생각하녀 황궁이라는 권위 앞에서 굳어버렸던 몸이 겨우 풀리는 것 같았다. 움직이자. 연서강은 멈춰 있던 발을 움직였다. 앞에 무엇이 있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은 걸어 나갈 수밖에 없다.
연서강은 방금의 남자가 했던 대로 자신 역시 성큼성큼 건허문 안으로 들어갔다.
건허문 안쪽에서부터는 상궁의 안내를 받아야만 했다.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듯, 나이 지극한 상궁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하고 말하며 일행의 앞에 섰다. 아까부터 연서강보다 앞서 걷고 있던 남자, 연무강은 익숙하게 상궁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건허궁을 지나 그들은 마침내 고운 옥빛을 담고 있다는 여린전에 당도했다.
그렇게 연서강은 제 눈으로 여름의 난전을 맞이하고 옥빛은 커니와 마치 산화와 비취로 빚어 놓은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허연 꽃을 층층이 달고 있을 노각나무는 간 데 없고, 그를 반긴 것은 빨간 석류 열매를 송송이 달고 있는 석류나무들이었다.
석류와 포도의 탐스럽고 많은 열매와 씨가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종 여인들이 머무는 거처에 많이 심는다는 말을 연서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또한 석류는 그 생김새 때문에 마당에 심어놓으면 제복과 행복이 온다는 속설도 있었다. 허나 설마 난전에서 자신을 반기는 것이 그 유명한 노각나무가 아닌 석류나무인 줄은 몰랐다.
별을 닮은 주홍빛 꽃봉오리들이 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바닥에 수북이 깔려 있었다. 저쪽 구석에서 나이 어린 궁인들이 싸리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었다. 개중에는 미처 여물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버린 열매를 들고 좋아하는 궁인도 있었다. 그러다 자신들을 안내하는 상궁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지레 깜짝 놀라 열매를 툭 떨어뜨린다. 상궁은 그것을 보며 혀를 쯧쯧 찼지만 무어라 혼을 내진 않았다.
연서강은 무심코 깨진 석류열매를 보았다. 나이 어린 궁인이 떨어뜨린 열매는 아직 속이 설익어 그 속이 하얀 유리 알갱이와 같았다.
“.......하나 알려주도록 하지.”
이제껏 아무런 말도 없이 앞서 걷기만 하던 연무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궁인이 떨어뜨려 박살이 난 석류 열매를 보며 어떤 생각에 잠겼었던 연서강이 그 목소리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후마마께서는 네놈의 모친, 연우비 고모님과 유독 친하게 지내셨지. 그러니 혹 네 모친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황후마마께 여쭤보아도 좋을 것이야.”
그 말이 일전에 자신의 부친이 시험 삼아 자신에게 던져보던 질문과 많이 닮았다. ‘내 소매(小妹)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랴.’라고 하던. 그 질문에 정답이 무엇이었더라. 이내 답을 기억해내고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제 모친에 관한 것이라면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으니 새삼 무어라 여쭈어 볼 것도 역시 없습니다.”
연무강이 자신을 도와 황후마마를 만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기댈 수 있는 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도와주기로 한 데에 대한 대가(代價) 역시, 꼬박꼬박 치루고 있고.......
그 생각을 하자 저절로 손이 상의로 올라가 필요 이상 꼼꼼하게 옷깃을 여민다. 더운 여름 날씨에 지나치도록 단단히 여민 옷깃이 갑갑하게 보일 지경이었지만 연서강은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헌데......., 왜 갑자기 그런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
그 질문에 연서강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돌연 걸음을 멈춘 자신 때문에 따라 걸음을 멈춘 상궁에게 갈 길을 재촉하라 눈짓을 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황후께서 자신의 모친인 연우비에 대해 잘 알고 있으시다는 말의 사실여부에 대해서 연서강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서서원에서 일하면서 숱하게 들었던 소문에 대한 진상뿐이었다. 다름 아닌 내전 마마의 성미나 생김새, 그리고 그 행적에 대한 소문들 말이다.
그 살갗은 설부(雪膚)요, 용모는 국향(國香)이고, 그 마음씨는 혜심(慧心)이라.
빼어난 용모에, 현숙하고 범절이 높으시며 또한 문무 양면에 뛰어나시다는 숱한 칭찬들이 과연 진실일까 싶었다. 소문이 좋지 못한 귀비 장한궁 비씨에 비교되어 다소 부풀어진 감이 없잖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황후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서강은 그녀가 세간에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다재다능한 가인(佳人)에 속하는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서강은 여린전의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린전 궁인은 연서강과 연무강을 여린전이 아닌 그 뒤쪽으로 안내해, 그 곳 후원에 자리 잡은 현현각(玄玄閣)이란 누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난전 후원에 들어서야 비로소 연서강은 그 유명한 노각나무를 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현현각이, 서쪽에는 교우헌이 있는 여린전의 후원은 마치 건물들로 폭 안겨 있는 것 같았는데, 그 후원에 노각나무들이 자유롭게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라 흐드러지게 핀 노각나무의 꽃은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어 청결해진 백(白)면포를 겹겹이 겹쳐 놓은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부드러워 보이는 이끼 위로 내려앉은 하얀 꽃잎들은 줄지어 이어져 고사(古史)에서 일컬었던 옥 무늬와 비슷했다.
황후는 현현각에 머물고 있었다.
현현각은 한 나라의 국모가 마땅히 지녀야 할 엄숙함과 위엄을 상징했다. 새까만 기와와 조촐한 단청, 그리고 흑송(黑松) 나무 기둥과 시커먼 주춧돌로 만들어진 누각이었다. 여기서 역대 황후들은 수학(受學)을 통해 진리를 깨우쳤으며,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으며 마음을 곧게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수양의 공간을 떠나서 현현각은 여린전 후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에 있어 한가로이 차를 마시거나 손님을 맞이하기에도 적합했다.
“어서 오시게.”
현현각에서 궁인들에게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접한 황후가 부드러이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여태껏 연서강을 안내했던 나이 많은 궁인이 자리를 떠나자 연무강이 황후를 향해 예를 차렸다. 서둘러 연서강도 고개를 숙였지만, 허나 어릴 적 글로만 배웠던 예법인지라 그 방법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연무강이 하는 양을 엉거주춤 따라하다 ‘손이 반대다, 연서강.’하는 연무강의 말에 손을 반대로 바꿨다.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기체후(氣體后) 일향(一向) 만강(萬康)하시옵니까, 마마.’ 간신히 인사말만은 무사히 마쳤지만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궐내의 예법이 어렵기는 하지. 그리 긴장할 것 없네. 나 또한 연소할 적에는 종종 혼뜨검을 받곤 했음이야.”
그 꼴을 보고도 황후는 조금도 비웃지 않으며 오히려 부드럽게 다독여주는 말을 꺼냈다. 어디 하나 뭉개지는 곳 없는 발음에 깊디깊은 호수처럼 흔들림이 전혀 없는 진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됨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고개를 들게나, 네 얼굴을 확인하고 싶구나.”
그 말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서른 초반 즈음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한 여인이 빛깔이 고운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연서강과 시선이 마주 치자 여인의 얼굴에 복사꽃처럼 고운 웃음꽃이 피었다.
“네가 연우비 고모님의 아이인 서강이더냐. 과연 연우비 고모님을 많이 닮았구나.”
그 얼굴 어디에도 연서강에 대한 못마땅함이나 연우비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반가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어 황후가 말했다.
“내게 있어 백부님은 백 번 절을 하며 감사해도 모자란 분인지라, 백부님이 너를 내게 보여주는 것을 꺼려하시는 데에 차마 싫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단다. 해서 네가 장성한 다음에야 겨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었구나. 야박하게 군 나를 용서해주렴.”
그 말과 표정에 연서강은 잠시 아연해졌다. 연서강이 알기로 현 황후는 자신의 모친인 연우비로 인해 여태까지 숱한 억지 모함을 당한 것도 모자라, 폐위 상소까지도 받았었다고 하였다. 그에 마음고생이 무척 심하였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지난날의 대부분을 시들하게, 우울하게 보냈다고도 했었다.
그렇기에 연서강은 황후가 당연히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그는 자신을 고깝게 볼 황후에게서 어떻게 호감을 얻을 것인가 그 방도도 강구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녀가 이리도 정답게 자신을 마주할 줄은 그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기인가, 진심인가. 연서강은 혼란스런 머리를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황후가 연서강의 옆에 말없이 서 있는 연무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이지 연위시가 금일 교회(交會)는 백부님께 비밀로 해 달라 청하더라니, 이 아이를 만나게 해주려고 그랬었군. 백부님께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불호령을 내리시겠는걸. 위사는 훗날 감당을 어찌 하려고 내 부탁을 들어주었는가.”
그 말이 연서강의 귀에 서늘하게 꽂혔다. ‘.......부탁?’ 저도 모르게 흘린 목소리에 황후가 듣고 살포시 웃으며 그를 보았다.
“변방에 가서 큰일이 났다 하지 않았느냐. 그 일을 전해 듣고 내가 백부님을 원망했었다. 고모님이 남기신 유일한 혈육을 내 한 번 보지도 못하고 보내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후에 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기쁘던지. 해서 백부님께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너를 보게 해 달라 청하였건만 백부님께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더구나. 너를 만나 보아야 세간의 시선만 더욱 사나워질 뿐이 아니겠느냐고.”
“그런.......”
당혹감으로 얼굴이 굳은 연서강은 차마 속에 담긴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다만 연무강을 돌아볼 뿐이었다.
황후마마께서 나를 보고 싶다, 아버님께 청을 했었다고?
이전이었다면 ‘그랬습니까?’하고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자신이 치룬 대가를 생각하면, .......도저히, 어떻게 이럴 수가. 황후마마의 하명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그런 대가를 치룰 필요가.
순간 그의 심장을 재빠르게 훔치고 지나간 것은 오싹한 전율이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었더라도 나는 조만간 황후마마를 알현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큰 형님과.
왜 저 끔찍한 사람과.......!
그러나 그때, 연무강이 딱 잘라 말했다.
“오늘 일은 일전에 마마께서 하셨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사옵니다.”
그 말은 황후가 아닌 연서강에게 들려주는 대답 같았다. 이어 연무강이 연서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얄팍한 가정(假晶)을 산산 조각내며 연무강의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처럼 연서강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마께오서 이 자를 만나지 않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부친의 뜻만이 아니라, 저 또한 그렇사옵니다. 이제 실제로 보셨으니 아실 터이지만 참으로 별 것 아닌 일이 아니옵니까. 헌데 이 보잘 것 없는 일 하나에 삿된 무리들이 그 천한 주둥아리로 감히 곤극(坤極)의 고화(高華)를 더럽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그리고 그가 힐끗 연서강을 쳐다봤다.
“소인이 금일 마마를 배알코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 녀석이 아버님 몰래 마마를 뵙고 싶다 간청했기 때문이옵니다. 헌데 어떤 연유에서 마마를 알현케 해 달라 청을 해온 것인지는 물어도 답을 하지 않아 소신도 궁금증이 일어 이리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연서강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은 마치 연서강을 향해 ‘어차피 네놈 생각하는 것이 뻔하지.’하고 말하는 듯 했다. 한순간이라도 혼란에 빠졌던 자신의 머릿속을 바로 연무강에게 간파당한 듯한 느낌에 연서강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허나 그와 동시에 연서강은 ‘그렇군.’하고 속으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연무강의 말과는 별개로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확신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이미 내디딘 걸음을 후회해봤자 무얼 하겠는가. 그렇게 이제껏 말만으로 되뇌었을 뿐 진정으로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채 지우지 못한 불안감과 조바심이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연무강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변방을 다녀온 일처럼 ‘헛수고’가 된다고 생각 하자 당장 아득해지는 머릿속이 그 증거였다.
그렇게 하자고, 그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변방에서 했었던 일처럼 헛수고로 끝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자. 이미 지나간 일을 되뇌어 생각해봤자 괜한 불안만 가중될 뿐 아무 소용도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쌓은 과거가 현재의 기회를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 아이가 나를 보고 싶어했다고?”
그래, 기회.
연서강은 의아해하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연무강과의 일이 어지 되었던 자신이 현재 황후와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눈앞에 자신이 그렇게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은 좀 더 대범해지고, 좀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앞’을 위해서.
“예, 마마.”
침착하게 대답하며 그는 황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색이 짙고 맑은 황후의 두 눈은 연서강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좀 전과 달리 연서강은 그 눈을 마주해도 마냥 어렵고 무섭지 않았다.
오늘 황후마마와의 교회는 분명히 다가올 ‘겨울’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치 고대하던 은인을 만난 양 그는 황후의 존재가 반가워졌다.
“.......마마를 꼭 뵙고 싶어 제가 큰형님께 부탁을 드렸사옵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황후가 물었다.
“그래, 어떤 연유로 나를 보고자 했는가?”
대화를 여는 말은 늘, 항상 상대방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서 무시 받지 않을 수가 있었다. 연무의나 연무강을 상대하면서 익힌 대화법이 바로 그거였다. 비루한 자신이 자신을 하찮게 보는 자들 앞에서 살아남는 대화법이었다.
마른 입술을 몰래 혀로 쓴 연서강은 차분한 태도를 가장하여 입을 열었다.
“마마께옵서는 혹 기연조라는 자를 아시는지요?”
“.......기씨 성을 지닌 연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황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옆에서 연무강이 연서강의 말에 설명을 보태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기가우의 자제를 말함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황후가 ‘어쩐지 들어본 듯도 한 이름이구나 싶었더니, 태중대부에게서 들어보았던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흔들림 하나 없이 여상하기만 해서 황후가 진실로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기억나지 않은 척 했던 것인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분명 황후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꼭꼭 담아두고 매일매일 증오해 마지않았을 이름 중 하나였을 터인데, 그러나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여름 밤, 녹우당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연서강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이 지난 밤 그 자에게서 괴이한 말을 들었기에 이리 생청을 부려 마마를 배알케 되었사옵니다.”
“괴이한 말.”
연서강이 한 말을 그대로 되뇌는 목소리에는 억양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황후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연무강을 보았다. 그러나 연무강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신도 아는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당연했다. 아직 연서강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말이니 제아무리 연무강이라고 해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그 기연조에게서 괴이한, 말이라.‘ 한 번 더 말을 되뇌던 황후가 돌연 주변에 시립하고 있던 궁인들에게 명했다.
“내 모처럼 만난 고종제(姑從弟: 고종사촌인 아우)와 사사로이 나눌 말이 있으니 그대들은 잠시 물러가 있으라.”
연서강이 앞으로 꺼낼 말이 심상치 않은 것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든 모양이었다. 사실 황후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나서 그리 해주십사 청할 예정이었기에, 연서강도 주변 궁인들이 모조리 물러나기 전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해서.”
이윽고 정말로 믿을만한 자들이 남고 모두 사라졌을 때,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순간 이채가 반짝였다. 그 빛은 방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을 하늘하늘 장식하고 있었던 상냥함과 부드러움을 단박에 지워냈다. 후에 거기에 남은 것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여인의 시선이었다.
“도대체 내게 어떤 말을 몰래 이르려 백부님에게까지 숨기고 나를 찾아왔더냐.”
기연조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기 위해 연무의 몰래 자신을 찾아왔다는 단편적인 말만 듣고도, 그녀는 아주 많은 사실을 유추해 낸 것 같았다.
“네가 하는 양을 보아 하니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중얼거리고서 그녀는 연무강에게 슥 시선을 주었다. 연무강은 여전히 아무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간단한 움직임으로 황후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헌데, 그러한 말까지 오고갈 정도로 네가 기연조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이 나는 더 놀랍구나.”
‘친분’이란 단어를 언급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차가워졌다. 곧바로 황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 그와 너와는 달리, 너와 나는 금일 처음으로 보는 사이일진데 그런 네 말을 내가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겠느냐?”
그런 황후의 말에는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이 훔쳐 듣게 되더라도 딱히 의심할 거리가 없는 말이었다. 연서강을 대하는 태도도 단지 얼굴 표정과 시선이 살짝 엄격해졌다는 것 외에 딱히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믿으셔도 됩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척 가정하며 자신을 경계하는 황후의 태도에 연서강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거짓을 말할 생각도, 눈앞의 여인을 속이려는 생각도 없었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 그래, 속이려는 것도 거짓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진실 중 몇 가지를 숨기고 말할 셈이었다.
“마마, 제 부친께서는 마마와 저를 대면치 못하도록 한 까닭은 다만 세간의 시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아마 부친께서는 제가 기연조에게 마마에 대한 어떤 말이라도 누설할까 염려하신 것일 테지요.”
연서강은 거기까지 말하고 망설였지만, 그것은 일순간이었다.
“저와 기연조는 친우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
다행스럽게도 그 말을 들은 황후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연서강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흡사 단단한 방패를 세운 듯 조심스러운 태도에 연서강은 이제껏 그녀가 이 황궐에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서?’라는 단순한 재촉마저도 그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입을 다문 것은 아닌 듯 했다.
몇 번 험한 일을 겪은 뒤 새가슴이 되어 바람 한 번 부는 것에도 벌벌 떨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이 기연조와 절친한 사이라는 말을 듣고도 바로 자신을 내치지 않은 것으로 연서강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을 다문 채 신중한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모습이 자신의 부친인 연무의와 닮아 있었다.
그녀도 결국 연씨 문중에 속한 몸으로, 그 피가 어디 달리 가지 않는 것이다.
황후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 탓에 그녀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이 말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니.
“지나날 밤, 그에게서 이듬해 장한궁 비씨 소생의 황자가 제국의 새 국저(國儲: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여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이 한 말이 눈앞의 여인에게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녔는지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결코 웃으며 흘려 들지 못할 성격과 입장이란 사실도. 연서강이 했던 말은 제국의 황후인 그녀의 존엄성을 크게 모욕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황후로서의 위엄은 물론이요, 제 자존심과 제 아이에 대한 애정까지 저버리는 일이었다.
과연 황후가 무섭도록 싸늘해진 목소리로 연서강을 추궁하였다.
“네가 방금 한 그 말이 대체 무엇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더냐?”
그리 말하며 황후는 연서강의 앞으로 한 발자국 발을 옮겼다. 아니, 그저 걸음을 옮긴 것뿐이 아니었다. 황후가 움직인 것과 동시에, 그녀의 곁으로 나이 지극한 지밀상궁이 미끄러지듯 다가가더니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황후에게 건네었다. 그것은 손잡이에 아무 장식도 없이 가죽만 감겨있는 직도(直道)였다.
그것을 능숙하게 받아 든 황후가 연서강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이 정도로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면 필히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어야 할 터!”
오랜 시간에 걸쳐 썼는지 손잡이에 감은 상어 가죽이 닳아 있었다. 다만 도신(刀身)만은 최근까지 사용한 듯 날이 제대로 서있어 햇빛에 반짝였다. 공기마저 가를 것 같이 날카로운 도신의 끝은 파르르 떨리지도 않는다.
“.......”
연서강은 자신에게 똑바로 겨눠진 직도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황후와 자신 사이의 간격은 불과 두어 발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황후가 마음먹고 검을 휘두른다면 충분히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거리였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검 날에서는 싸늘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문무양면으로 능통하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다. 검을 쥔 지법(地法)이 지금도 멀리 변방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을 연서령과 닮아 있었다. 비록 연서령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그녀 역시 상당한 무예를 익힌 것으로 보였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여기서 당장 네 목을 베더라도 너로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로다. 더욱이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내 사람들이다. 내가 여기서 네 목을 베더라도 모두 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 그런 사람들이지. 만일 백부님께서 알게 되시더라도 백부님 또한 나를 위하여 능히 입을 다물 것이니, 그러니 실로 당금의 네 목숨은 내 마음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늘한 검 날이 조금 움직여 정확히 연서강의 목에 가 닿았다. 긴장으로 생침이라도 삼켰다간 그대로 목젖이 칼에 베일 정도의 위치였다.
그러나 연서가은 당장 목에 닿는 도신보다 냉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복사꽃처럼 환히 웃던 여인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에는 예리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허니, 지금 내가 하는 하문(下問)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답하여라. 네 목숨보다도 지금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더 중하느냐? 그리 생각한다면 입을 열어도 좋다. 허나 내가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어찌 생각하고 또 어찌 행동할까, 그것도 함께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치고 황후는 연서강의 목 아래로 검 날을 내렸다. 말해도 좋다는 허락의 표시였다.
“네, 중합니다.”
목 근육을 움직이는 데에 자유로워지자마자 연서강이 단박에 대답했다. 자신의 경고에 연서강이 망설일 것이라 예상했었던지 황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중하다?’ 그녀의 혼잣말에 연서강이 얼른 대답했다.
“마마, 한 시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현재 제 말이 진실인지 덫인지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옵니다.”
“한 시가 급하다고?”
“그러합니다. 소신이 기연조와 절친한 사이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제 부친께서 꾸미신 일. 제 부친께서는 제가 아주 어릴 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저를 기연조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방심한 기연조가 제게 발설할지도 모르는 기밀들을 캐내기 위해서였지요. 소신이 어리석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을 깨달았사옵니다. 해서 신은 근래에야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의 관계 또한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기연조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이렇게 마마를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
황후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표정이 그녀가 느끼고 있는 미심쩍음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 해서 연서강은 말을 덧붙였다.
“제가 한 말이 사실이란 것은, 제 큰형님께서 증명해주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황후가 연무강을 보았다.
“위사가?”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연무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연서강에게 시선을 잠시 주었다가 가벼운 웃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나를 이용하시겠다.......’ 황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황후의 앞으로 나아가 연서강의 옆에 섰다.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황후도 오늘 처음 본 연우비의 아이인 연서강보다야 자신 쪽이 더 믿음직스러울 테니. 이치에 맞는 천 마디의 말보다 자신의 증언 한 마디가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녀에겐. 하지만 자신을 증인으로 이용할 생각을 다 하다니....... 이놈 봐라, 란 생각에 연무강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에 앞서 연서강을 다시 힐끗 보았을 때, 연무강은 의아한 심정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옆에서 본 연서강의 얼굴은 긴장으로 살짝 굳어져 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검을 든 황후의 앞에서는 그리도 능숙하게 말을 하더니, 자신을 끌어들이자마자 긴장하기 시작하다니.
곧 그는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황후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입니다, 마마. 아버님께서는 기연조를 통해 기가(家)놈들의 기밀을 빼어낼 생각을 하시고 소제(小弟)와 그가 친해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마치자마자 옆에서 연서강이 안심한 듯 긴 숨을 내뱉는다. 그 숨소리를 듣고 연무강은 비로소 연서강이 왜 새삼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증인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 연서강에게는 일종의 도박과도 같았던 모양이었다.
연무강은 눈썹을 구겼다. 간 크게 자신을 끌어들인다 싶더니, 본인도 기연미연(期然未然)했던 듯 했다. 불신했단 소리였다. 이유를 깨닫자 순식간에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연무강 잣니도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연서강으로서는 그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도.
.......그런 그의 귓가로 한층 여유를 되찾은 연서강의 말이 들려왔다.
“마마. 소인이 마마를 배알하기를 바란 것은 다만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의 사이가 험악한 것을 알고, 또 기연조에게 그런 충격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연무강의 증언에 다소의 의심은 풀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경계를 누그러뜨리지는 않은 채로 황후가 물었다.
“허면?”
“중요한 것은 소인이 기연조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무슨 까닭으로 기연조가 그런 중요한 말을 그때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저에게 늘어놓았을까, 입니다. 왜, 어째서.”
그 순간 황후가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왜.”
짧게 되뇌던 그녀가 돌연 이를 악물었다. 연서강의 말에서 그녀 또한 당시 연서강이 생각해서 도달했던 ‘부분’에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었다. ‘왜.’ 그녀가 다시 한 번 되뇌며 연서강을 보았다.
“.......네게 말하면 백부님께까지 말이 들어가겠구나.”
“네. 소인이 아버님께 그리 들었다 말을 하면 필히 아버님께서는 생각하시고 움직이기 시작하시겠지요.”
되었다. 연서강은 황후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들었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허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고뇌하기 시작한 황후를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마마, 그래서 제가 아버님께는 함구하고 곧장 마마를 찾아뵌 것입니다. 소인이 무지한 것은 사실이오나 제 아버님께서 무언가를 꾸미고 계신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거 큰일 났다, 싶어 바로 아버님께 말씀드릴까 했었지만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그만 두었습니다.”
“.......너는 그가 백부님께서 그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길 바란다고 생각한 모양이구나.”
그녀는 과연 영리했고 머리 회전도 빨랐다. 그녀가 더 이상 무언가를 떠올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해야 했다. 자신이 유리해질 수 있게, 그녀를 유인해야만 했다.
“기연조가 노리는 것이, 아버님이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시는 것이라면 허를 찔러 움직이지 않으시게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해서 곧장 형님께 부탁드려 마마를 찾아뵙게 된 것이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후가 비로소 직도를 거두었다. 연서강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자,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 검을 건넸던 궁인에게 자신의 검을 맡기며 입을 열었다.
“그리 생각해본다면.......”
거기까지 말하고 황후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낯빛이 방금과 달리 약간 파리해졌다. 그녀의 생각과 추측이 분명 끝에 달했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 말은 곧.”
하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말하지 않고 황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명백히 황후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결론은 내려졌다. 그러나 생각 끝에 자신이 낸 결론을 황후는 굳이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해서 연무강은 말했다.
“즉, 너는 기연조가 우리 쪽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군.”
그가 태연히 던진 말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우선 황후의 얼굴이 눈에 띠게 굳었다. ‘아떻게?’ 그녀가 혼란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었단 말이더냐?!”
하지만 그 질문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질문을 한 그녀부터가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마마.”
굳어버린 얼굴로 연무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연서강이 불렀다. 황후가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부른 것은 연서강이었는데 마치 용무는 그녀 쪽에서 있었다는 듯, 황후가 서둘러, 그러나 침착하게 물어왔다.
“정녕 그리 생각해서 곧장 내게 왔던 것이란 말이냐?”
연서강은 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벼슬을 얻어 궐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또 기씨 문중과 제 집안의 사이도 알게 된 ‘지금’ 굳이 그가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그는 제가 그대로 아버님께 들은 말을 전했을 거라,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제 말을 전해들은 아버님께서 화를 내며 ‘일’을 서둘러 진행할 거라 예상하겠지요.”
“.......”
황후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연서강이 꺼내는 말이 곧 자신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황후의 짙고 동그란 눈동자를 직시하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마마. 저는 기연조가 아버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고 있으며, 또 누군가가 그에게 ‘일’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후의 불안정한 호흡이 일순간 정지했다.
“누군가 배신을 했다.......”
완전히 충격에 휩싸인 황후에 비해 연무강은 여전히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과연 .......배신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듯도 해서 연서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연무강이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는 몹시 신경이 쓰였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황후가 연무강에게 묻는다.
“위사는 어찌 생각하느냐?”
그 물음에 연무강이 눈썹을 구긴 채 연서강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요, 배신을 했다면.......”
절로 연서강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제까지 했던 말 중에 거짓은 없으니 켕기는 구석은 없었지만, 연무강이 자신을 기연조를 위해 연씨 문중을 배신할 놈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연무강이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인지 그 이유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불안함은 더 했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자와의 거래라니, 이전 같았으면 생각할 수 없었을 무모한 시도였다. 그 수밖에 없어 연무강의 손을 잡긴 잡았으나, 그 ‘거래’는 자신에게 양날의 검과 마찬가지였다.
연무강이 지금이라도 말을 바꾸면 당장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하지만....... 연서강은 침을 꿀꺽 삼키고 연무강을 향해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라면 형님이 단연 이 아우보다 경험이 많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연무강이 굳이 ‘좋아한다.’란 농과 같은 말까지 써서 자신을 잡은 데에 필히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기연조를 빠트리기 위한 함정을 파기 위해서든, 자신을 살기 싫어질 정도로 괴롭히기 위해서든, 둘 중 어느 쪽이든 일단 계획한 것이 있다면 중간에 충동으로 일을 뒤집어엎을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연서강은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무강을 마주보았다.
그러니 형님은, 아직은 자신을 없애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연서강의 주장은 그 근거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한 번쯤은 은밀히 조사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
“.......”
어쩐지 언짢아하는 듯한 투의 대답이었지만 긍정의 대답인 것은 틀림없었다. 연서강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꽉 쥐었던 손의 힘을 풀었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맺힌 식은땀을 몰래 옷에 닦고 연서강은 황후를 보았다.
이제, 황후마마만.
황후는 섬세한 옥수(玉水) 끝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민하는 듯한 얼굴, 허나 이미 연무강이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으니 마마께서도 자신이 한 말을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으로 취급하지는 못할 것이다. 연서강은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해서, 마마. 소신이 생각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리 묻는 황후의 목소리는 경계가 다소 풀려 있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여전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밀(謹密)히 처리해야 할 일이란 자각에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지, 더 이상 연서강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한층 말하기 편하게 풀린 주변 공기를 연서강 또한 민감하게 느꼈다.
“이 일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흐름을 탄 말은 이어 술술 흘러나왔다. 마치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아버님께 말씀드려 기연조가 원하는 대로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 쪽 사람들 중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겠지요. 변하게 된 상황을 그 자는 반드시 기연조에게 알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배신자를 잡는다는 소리군.”
자신이 죽던 겨울 날, 그 날이 되기 전까지의 일이 어찌 돌아갔던 것인지 상상하며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원래 이 ‘배신자’는 연무강에게 배신한 사실을 들켜 기연조 몰래 처단을 당하게 된다. 또 이 ‘일’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가 된 기연조도 연무강은 처단하게 될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그리 되어선 안 된다.
“.......배신자를 잡는 것으로 끝을 내면 안 됩니다, 마마. 배신자를 처단해봤자 기연조가 우리 쪽 일을 알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앞일을, 자신이 비틀어야 했다.
연서강은 마치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것을 이야기하듯 황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기연조가 이 일에 대한 ‘증거’까지 갖고 있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배신자를 처단하게 되면 기연조가 일이 이상하게 되어간다는 것을 눈치 챌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를 자신보다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떠넘길 지도 모르지요.”
자신이 죽던 겨울날을 떠올려 볼 때, 그 ‘증거’는 ‘기연조’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허나 연서강은 마치 ‘증거’가 다른 ‘물건’이라도 되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또 그가 이미 ‘증거’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황후가 연서강의 말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자를 속여서 기연조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마마. 기연조가 만약 ‘증거’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저희 쪽으로 빼올 수 있도록.”
연무강이 기연조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미래라면, 자신이 기연조가 죽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기연조 밖에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기연조가 ‘증거’가 될 수 없게 만들면 되었다. 기연조가 스스로 ‘증거인’이 된 것은 절대로 자신 스스로 ‘증거’가 되는 쪽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닐 터. 그것은 아마 연무의와 연무강의 경계와 보안이 철저해 딱히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빼오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연서강은 참으로 철저하게 성헌당을 지키고 있었던 하인들의 모습과,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던 연후정을 생각했다. 제 밑의 병사들을 이용해 궐의 온갖 곳을 감시했었던 연무강의 능력도 새삼 떠올렸다. 연무진의 안사람인 안계영 또한 연무강의 명을 받고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 또한.
그 철통같은 보안과 날이 선 듯한 감시의 눈길 속에서, 기연조와 배신자는 아무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해서 기연조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일’을 겪고 경험하여 ‘증인’이 되자고.
능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사람이었다. 연서강이 아는 기연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무모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다면, 또 말을 전해주는 배신자의 증언만 없다면 기연조도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할 것입니다. 증거가 없으면 그저 숱한 모함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 될 테니 말입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을 흘려서 기연조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연씨 문중의 안전을 위해 그 ‘증거’를 파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연서강이 직접 ‘일’에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다른 누고도 아닌, 자신이 직접.
“.......”
황후는 잠깐 고민하는 눈치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조바심이 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도 않으면 이제 와서 의심이 든 것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연서강은 제발 최악만은 아니길 빌었다.
그녀는 연서강의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연무의와 그의 명을 받는 연무강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말이다. 또 ‘일’에 있어 연무의가 주축이 되는 것이 틀림없지만 황후 또한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도 틀림이 없었다. 연무의는 자신을 ‘일’에 끌어들일 만큼 신뢰하지 않고 있으니, 그녀라도 설득시켜야만 했다.
마침내 황후가 입을 열었다.
“해서, 네 말은 백부님을 속이자는 이야기더냐?”
“아버님뿐만이 아닙니다, 마마.”
황후가 입을 다물고 연서강을 가만히 응시했다. 혼란이 사라진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맑고 깨끗해, 마치 잘 닦은 거울과도 같았다.
“여기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전부입니다, 마마.”
“.......”
그 말은 곧 이 계획은 더 이상 밖으로 퍼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야 물밑에서 움직여 아군 속 배신자를 찾는 게 쉬워진다. 황후도 응당 그래야 한다고 동의하는 눈치였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제까지 믿고 따랐던 백부님을 속이자는 이야기가 곧 백부님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져 거리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도 망설여지는 게 있었다.
순간, 냉소를 머금으며 황후는 물었다.
“만약 이 속에서 배신자가 나온다면?”
그 말 한마디에 극락 같이 아름답던 후원의 공기가 써늘해졌다. 그러나 그 말은 지금 후원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의심의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황후가 연서강을 향해 살포시 웃음 지으며 이어 말했다.
“만약 이 속에서 배신자가 나온다면 그대 외에는 없을 텐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연서강 때문이었다.
과연 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내 사람’이라 칭한 사람다운 말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지금 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이질적이고 의심스런 사람은 바로 연서강이었다. 그녀의 말이 곧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서강은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연서강이 맹세하길 바라는 것이다.
“소인이 의심스럽다 하시면, 저를 감시하셔도 좋사옵니다. 그래서 제가 만일 수상한 짓을 한다 여겨지시면.”
“네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웃음기 섞인 냉랭한 목소리가 묻는다. 연서강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서강의 대답을 듣자마자 황후가 그 옆에 선 연무강을 보았다.
“위사는 듣거라.”
“네, 마마.”
“내 곰곰이 생각해보니 배신자를 축출할 이로 마땅한 자가 위사 밖에 생각나지 않는구나. 이 일은 위사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하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연서강에게도 말했다.
“또한 백부님께 태중대부의 자제가 한 말을 전하는 것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해서 연서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마마, 소신이 청하고 싶은 바가 하나 있사온데 들어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황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연서강은 이를 악물고 황후를 보았다. 이 말 한 마디. 그래, 이 한 마디를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그녀와 대화한 것이다. 진지한 목소리로 연서강은 말했다.
“배신자를 축출하는 일에 저도 가담하게 해주십시오.”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이 인상을 썼다. 연무강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연서강은 그가 뭐라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여기가 성헌당이고, 연무의의 앞이라면 그의 제지는 통할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는 궐 안이고 무엇보다 황후마마의 앞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연무의의 앞이 아니니, 유리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리하지도 않았다. 연서강은 바로 거기에 승부수를 띄울 생각이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자신에 대해 단편적으로 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
“위사가 하는 일을 돕게 해달라는 뜻인가, 그것은?”
“그렇습니다.”
연서강이 대답하자마자 날카롭게 연무강의 말이 끼어들었다.
“불허한다. 네놈의 무얼 믿고?”
연서강 또한 연무강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박했다.
“그것은 형님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마마의 앞이니 무례한 행도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연무강이 곧바로 황후에게 고했다.
“마마. 이놈은 기연조와 아주 어릴 적부터 친한 벗이었습니다. 지금에와서 마음을 바꾸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중대한 일을 맡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자는 아닙니다.”
그 말 또한 연서강이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연서강은 황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연무강과 연서강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 좀 더 두고 보고 결정을 할 생각인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신중한 성격이 연서강에게 있어서는 호기(好期)였다.
“마마, 제가 기연조와 친구 사이였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것도 맞습니다. 허나 그것은 저 뿐이었습니다, 마마. 저만 그리 생각했을 뿐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연서강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굴었다. 연서강이 갑자기 말하기 머뭇거리자 황후가 의아한 얼굴로 ‘그래서?’라고 묻는다. 그에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문 뒤 황후를 절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리 생각했었는데,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저를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아버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 또한 저에게서 연씨 문중에 대한 무언가를 듣기 위해 접근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기연조가 꾸미는 일은 제 가족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연서강은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저는 기연조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마마.”
“.......”
그의 말을 다 들은 황후가 찡그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이었다. 그녀가 허락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어차피 할 말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신중하게, 모쪼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뒤 그녀가 허락해주길 연서강은 바랐다. 혹여 연무의가 후에 알게 되었을 때 ‘왜 그러셨습니까!’하고 따져 묻더라도 그녀만의 주장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도록.
“배신자를 알아내는 데 형님의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배후의 기연조까지 처치했던, 아니, ‘할’ 형님이니 그 능력이야 오죽하겠는가. 허나 눈앞의 여인이 그 미래의 일까지 알 리는 만무했다.
연서강은 온 힘을 다해 황후를 뒤흔들어 놓기로 했다.
“하지만 마마도 아시다시피 형님은 기씨 문중의 경계를 받고 있는 인물이 아니옵니까? 그렇지만 저는 아닙니다. 집안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밖의 사람들까지도, 심지어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조차 제가 기연조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저이니 상대적으로 기씨 문중의 의심을 덜 받으며 기씨 문중과 얽힌 정보를 더 찾을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배신한 자 또한 저라면 경계를 덜 할지도 모릅니다.”
“.......”
“어쩌면 제가 형님께서 놓치실 어떤 것들을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중얼거렸다. 황후가 연서강에게 설득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연무강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마마. 허나 연서강까지 ‘일’에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기연조가 ‘일’에 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나온 이상, 더 이상 사람을 늘리는 것은.......”
거기까지 말하고 연무강이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하물며 기연조와 친했던 저 놈에까지 ‘일’에 대해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역시 연무강이었다. 어찌 보면 자만과 과시욕으로 가득 찬 말로 들릴 법도 한데 그가 하니 가감없이 참말로만 들렸다. 이래서 세간 사람들이 큰 형님더러 듬직하고 됨됨이가 믿을 만 하다고 평하는 것인가. 연서강은 생각했다. 부친인 연무의가 그를 신뢰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물론 황후마마도 부친만큼이나 그를 신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막대한 신뢰가 장애물이 될 때도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의 말에 황후가 일침을 가했다.
“그렇다 하면 위사가 그를 감시하면 되지 않는가.”
순간 연무강의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무어라 하시었나이까?”
간신히 그렇게 되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잘못 들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 이가 수상한 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위사가 감시하라고 하였느니. 제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저 이가 결백하다 하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터. 그러니 연위사가 그대의 소제를 감시하면서 일을 진행하다 믿을 수 없다 판단되면 처리하도록 하라.”
“........”
“설마 연위사 정도 되는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지 못한다 말하지는 않겠지?”
신뢰가 담뿍 담긴 목소리로 황후가 그에게 물었다. 그에 연무강은 얼굴을 찌푸릴 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연서강은 알 것 같았다. 언짢은 표정으로 연무강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듣는 건 시간문제다.
마침내 연무강이 쓴 것을 입에 담았다가 내뱉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랬다.
“.......왜, 웃지?”
서늘한 연무강의 물음에, 연서강은 입가에 미미하게 떠올랐던 미소를 곧바로 삼켜야했다. 미소를 삼키고 나서야 연서강은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실수였다. 기분이 언짢아져 있을 연무강의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풀어진 모습을 보이다니. 황후와 있었던 일이 잘 풀린 탓에 방심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둘러 대답하며 연무강의 얼굴을 몰래 살폈다. 다행히 목소리와 달리 연무강은 그리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못마땅한 듯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연서강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 난전을 빠져나온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건허문으로 통하는 길 중 하나였다. 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진 꽃담이 줄줄이 이어져 있고, 아름다운 수석(水石)과 현란하게 틀어진 수목, 그리고 우아한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는 화초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들어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앞에서는 나이 많은 상궁이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역시 내전으로 들어올 때처럼 연무강 뒤에서 걸으며, 연서강은 저도 모르게 난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평소에 무슨 일이든 잘 해내어 주변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큰 형님이라 그런지 역시 자신과 생각하는 게 다르다고. 이제껏 쌓인 신뢰와 무능하게 보이는 건 곧 죽어도 싫은 성격 때문에 오늘 연무강은 보기 드물게 곤혹을 겪었었다.
자신이었다면 차라리 ‘못 하겠다.’라고 말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낙담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연서강은 그런 대답을 하는 게 그다지 거북스럽지 않았따. 자신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연무강에게는 어렵다는 사실이 연서강은 우스웠다. 둘의 입장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만 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실제로 웃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궐내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는지 연무강은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충고할 뿐이었다.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감시 아래에 있게 된 것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군.”
“어차피 평소에도 형님께서는 절 감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이 수안궁을 드나들자, 그 수안궁까지 감시할 정도로 예전부터 자신을 깊이 불신하고 있었던 연무강이다. 새삼 그가 감시의 눈을 강화해봤자 이제까지와 무엇이 다른 게 있을까, 싶었다. 연서강이 너무도 태연하게 그리 대꾸하자 연무강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연서강도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연무강이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를 매일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두렵지 않은 모양인가 보군. 두 번씩이나 되니, 이제 제법 익숙해졌나보지?”
그 말에 연서강은 숨을 삼켰다. 아차, 하고 생각이 미친 순간 뒤늦게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황후마마를 뵈었으니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심장이 새까맣게 오그라드는 듯 했다. 황후마마를 뵙고 나면 그 거래 역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열흘 전의, 그 ‘시간’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그럴 리가.”
그런 연서강에게 비웃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연무강이 가벼이 대꾸했다.
“여전히 너는 내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은데.”
연무강의 말이 연서강의 복부를 깊숙하게 찔렀다. 협력. 그렇다. 황후마마를 만나게 해주랴, 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그가 무어라고 했던가. 내가 도와주랴, 연서강. 그래, 그렇게 말을 했었다. 황후마마를 만나고 어설프게나 ‘일’에 개입하게도 되었으니 이번 일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연무강의 도움이 깔려 있는 건 사실이었다.
연무강의 감시 아래에서 그를 도우라고 황후의 명이 떨어졌으나, 과연 연무강이 그 말대로 자신을 ‘일’에 개입시켜줄까 의문이었다. 그가 황후에게 거짓으로, 명령대로 행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고할 수도 있었다. 또 그가 황후의 명령대로 한다손 치더라도 무슨 중요한 일이 새로 터졌을 때 자신에게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리석기는, 진정한 자가당착에 빠진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
연서강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연무강이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내 착각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널 돕는 걸 그만 두도록 하지. 보아하니 너도 그걸 원하는 것 같으니.”
그는 연서강이 무엇을 선택하든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했다. 사정이 급한 것도, 매달려야 하는 것도 모두 연서강이었고, 연무강에게는 하등 아쉬울 게 없었다. 적어도 연서강에게 연무강은 그리 보였다.
차갑게 돌아선 연무강의 등을 보자 돌연 연서강은 초조해졌다.
이렇게 연무강을 보내면 그 끔찍한 경험은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연무강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원래 연서강은 연무강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면 질수록 안심하곤 했었다. 죽기 전에도 그랬고, 죽은 후 다시 돌아온 후에도 그랬었다. 그에게 연무강은 가까이 해서 좋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죽기 전에는 무섭고 두려워서, 죽은 후에는 자신의 목적에 반하는 존재라서.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또 한 걸음, 연무강이 멀어졌다.
연무강은 멈춘 그를 내버려 둔 채 따라오라고 말하지 조차 않았다. 연서강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황후마마를 알현하러 갈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연서강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제야 연서강은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거래’라는 말을 연무강이 먼저 입에 올린 탓에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거래하자고 말했었는지,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더 ‘절박’했던가, 그것이 중요했다.
그랬다. 자신은 저 남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때에도, 지금도.
연서강의 창백한 얼굴이 연무강의 뒷모습을 향했다. 점점 멀어진다. 잠깐의 착각 때문에 형님이, 아니 내 ‘기회’가 사라지려고 한다.
안돼.......!
“........혀, 형님.”
뻗은 손에 겨우 연무강의 팔이 닿았다. 그대로 그의 소매를 붙잡고 연서강은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는 연무강을 올려다보았다. ‘형님.’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연무강이 걸음을 멈추고 연서강을 보았다.
그리고 연서강은 그의 무심한 시선과 마주쳤다.
지극히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무기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녹우당에 기거할 적 얼마나 많이 보았던 시선이었던가. 그 눈과 마주 하자 연서강은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연무강이 내건 ‘거래’에 진실로 기뻐하며 응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도, 도와........”
어서 ‘말’해야 하는데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야 한다는 의지에 반해 그의 본능이 싫다,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연서강은 여기서 ‘말’하는 거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덫이었다. 자신은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덫에 빠진 것은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으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스스로 하지 못했다. 덫을 설치한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한 덫에 걸렸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자신은 그때, 그때, 그때!
연서강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앞을 나아가기 위해 했던 선택이었다. 이제 와서 그만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혀 위에서 미끄러져 흘러나오는 ‘말’에 소리를 입힐 수 있었다.
“.......도와, ........주십시오.”
그러자 연무강이 웃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그의 시선에도 색이 입혀졌다. 연무강이 손을 뻗는다. 그가 연서강의 두 팔을 붙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서강아.”
너만 내게로 와준다면 무얼 못 해줄까.
남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꼭 그 날 밤처럼 속삭이는 듯 했다. 즐거운 듯 보이는 남자의 검은 눈을 응시하며 연서강은 한 겨울에나 느낄 지독한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 *
-위사는 어찌 생각하는가?
연서강을 먼저 후원 밖으로 보낸 뒤, 황후가 은밀히 연무강을 불러 한 말이 바로 그거였다. 그 모든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연무강은 황후의 물음에 도리어 ‘마마께서는 무엇을 염려하시고 계시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 말에 황후가 연서강이 사라진 후원의 입구 쪽을 바라보다 두 눈을 깜박였다. 팔랑, 때마침 노각나무의 가지에서 하얀 꽃잎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하얀 색의 깃털 뭉치가 깊은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듯 천천히 가라앉는다.
-.......위사가 저 아이에게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말해 보아라.
-제가 마마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후가 연무강을 돌아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허면 백부님께서 가르쳐 주셨을까?
그 말이 옳기는 했다. 연무의의 연서강에 대한 불신은 보통 깊은 것이 아닌지라, 그는 허투로라도 황후에 대해 연서강에게 흘릴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무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연무진에게, 마마의 사정을 그 이에게 말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무진이가.
-허나 그것은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에 불과하였사옵니다. 기껏 해봐야 황상께서 귀비 비씨를 지나치게 총애하신다는 사실과,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국저 자리까지 좌지우지하고자 하신다는 이야기 정도지요. 허나 그 모든 것은 이미 황궐 안에 파다하게 퍼진 풍문이니 굳이 말해주지 않았어도 곧 알게 되었을 일이었사옵니다.
연무강의 대답에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 왜 그런 이야기를 저 아이에게 흘렸는지 추궁하는 것이 아닐세.
황제가 귀비 비씨를 총애하여 그녀 소생의 아이를 황태자로 삼고 싶어 한다는 말이 듣기 싫은 것도, 또 남들에게 그런 이야기가 널리 퍼지는 것이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썼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벌써 제 발로 황궐을 뛰쳐나갔거나, 정신이 이상해졌을 것이다.
-그러하시면?
연무강이 묻자 황후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내, 연위사를 믿으나....... 저 아이의 말을 듣고 생각하니 괴이하게 생각되는 구석이 있어 그러하네.
-괴상한 구석 말입니까?
그 말에 연무강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황후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저 아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저 아이가 꼭 ‘일’에 대해서 전부 아는 것처럼 들린다네. 물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스스로 그럴 것이다, 추측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위사가 말한 것으로는 거기까지 추측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연서강과 대화를 하는 중간 중간에 황후는 그리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이었다. 연서강의 말이 자신들의 ‘일’과 한 치 어긋남 없이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아는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황후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연무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연무진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연서강이 효기교위에 대해서 묻더라고.
-효기교위?
하지만 효기교위 문도학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가 연서강을 사적으로 만나본 것은 아닌 듯 싶었습니다. 효기교위가 저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아마 그 말은 사실인 듯 합니다.
다시 황후가 입을 다물었다. 연한 붉은 빛으로 칠해져 있는 입술은, 너무 힘을 주어 다문 탓에 살짝 모양이 뭉개져 있었다. ‘마마.’하고 연무강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그러자 황후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그 아이가 그 ‘일’에 대해 거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드는구나.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아이에게 누군가 ‘일’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존재한다면.......
황후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싸늘해졌다.
-그 사람도 역시 배신자. 그 사람을 찾아 위사가 처단하라.
-알겠습니다.
연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너무도 쉬이 연서강이 ‘일’에 개입하는 걸 허락한다 싶었더니 그녀는 연서강의 뒤에 서 있을 ‘누군가’를 잡아들일 생각으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앞에선 알겠다며 순순히 대답했지만, 사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뒤에 누가 있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연서강에게 ‘일’에 대해 알려준 이라고 하면 빤했다.
기연조다.
그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연서강에게 ‘일’에 대해 알려주고 연서가이 황후를 만나도록 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인맥 좁은 연서강이 어떻게 ‘일’에 대해 대강이나마 눈치를 챌 수 있으며, 왜 또 기를 쓰고 ‘일’에 개입하려고 노력을 한단 말인가.
물론 ‘배신자’가 있다는 말에는 연무강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만약 연서강 외에 또 다른 배신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기연조가 연서강을 이용해 파놓은 ‘함정’, 그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리 생각만 했을 뿐, 연무강은 황후에게 자신이 추측해 낸 사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부분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연서강이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으며, 또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자신의 품안에서 벗어날 일이 없을 놈이니 그 놈이 무얼 생각하고 꾸미든 모두 자신의 품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될 뿐이다.
이미 자신은 연서강이 어디를 가고, 누구와 대화를 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전부 전해들을 수 있도록 손을 써둔 후였다. 그 놈의 조그만 머리통 속에 든 생각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몸을 자신의 품에 가두었으니, 곧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간 문제였다.
분명 연서강은 어서 기연조가 시킨 일을 끝낸 뒤, 연씨 문중을 버리고 기연조에게로 돌아갈 생각만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놈이 연씨 문중을 배신하게 둘 수도 없고 기연조에게 돌아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절대로.
“.......도와 .......주십시오.”
그 때문에라도 연서강은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연무강은 자신의 모새를 붙잡고 애원하는 연서강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흘렸다. 상대도 ‘머리’란 물건을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상대할 때, 연무강은 제일 먼저 ‘약점을 보이지 마라.’라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딱히 교육받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연조를 연모하는 연서강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리 없으니 그에게 절대 ‘자신’이 품은 열망을 들켜선 안 되었다. 자신이 했었던 좋아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 때, 이 관계에서 자신에게 승산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연무강은 알았다.
일종의 힘겨루기와 비슷했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두 팔을 잡았다. 팔이 꽉 잡히자 연서강의 얼굴이 약간 파리해졌다. 허나 체념한 듯 그는 입술을 깨물고 연무강을 다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무강은 그 얼굴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서강아. 원하는 것을 줄 터이니 ‘여기’에 있어라. 내게서 원하는 것을 담뿍 취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여기’ 밖에 갈 곳이 없게 될 테니. 바로 ‘여기’다. 내가 네가 하는 모든 것을 도와줄 터이니 ‘여기’에 있어라.
연무강은 말했다.
“그래, 서강아.”
허나 이 상황이 결코 네게 유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와주마.”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연서강의 낯은 안심하는 빛이 떠오르기는커녕 더더욱 창백해졌다. 연무강이 원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부터 정확히 나흘 후.
연서강은 연무의를 찾아가 기연조에게 그러한 말을 들었노라고 전해주었다. 당연히 연무의는 그 말을 듣고 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