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빌어먹을 기가 놈.
연무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를 갈았다. 연서강이 변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녹우당으로 가서 기연조부터 만나본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긴 여행으로 몸이 피곤해 잠시 예의를 망각했었다는 대답이 말도 안 된다고 당시에도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던 것이다.
연서강은 살아서 돌아오자마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갔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제 부인과 아들을 찾고, 아들이 부모님을 찾아가며, 사내가 그 연인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도 당연하게 그랬던 것뿐이었다.
하나를 깨우치자마자 일시에 모든 의문들이 풀렸다.
연서강이 요새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도 모두 기연조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을 몹시 무서워해서 자신의 앞에서는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힘겨워 했었던 연서강이 갑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기 시작하고 무어라 소리까지 칠 수 있었던 것도 기연조를 믿고 있어서였다.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비밀을 하나 머릿속에 품은 듯 괴상 쩍은 행동을 했던 것도 모두 기연조 때문.
연무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
기가 놈을 간신히 떨쳐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참으로 사람을 안달 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는 아이가 아닌가 싶었다. 연서강 그 놈. 그 증거로 놈이 녹우당에서 본채로 옮겨 온 뒤부터 연무강의 마음은 한 시도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별다른 굴곡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걸어왔던 자신이거늘 연서강은 그런 그를 간단히 어릴 적 ‘그때’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울렁거리고 불쾌한 속, 복잡한 머리와 서늘한 가슴, 초조해지는 것은 물론이오, 모든 게 불만스러워지는 것이다.
기연조만 떨쳐내고 서서히 길을 만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거늘. 이리 되면 다음으로 수안궁의 태상을 떨쳐내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연무강은 탁,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
또 험악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연무강에 부관이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눈총이라도 한 번쯤 주었겠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그에게 눈길을 줄 여유조차 없었다. 탁, 탁, 탁, 계속 간헐적으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연무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도 아닌데, 점점 살기등등해지는 연무강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게 된 부관이 마침내 겁에 질려 연무강의 곁을 떴다. 그가 슬그머니 방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연무강은 방치했다. 마침 시야 끝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떨고 있던 그가 거슬리기 시작한 참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이어졌다.
“.......”
이걸......,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술렁거리는 마음이, 자신의 마음인데도 좀체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타일러 잘 행동해 오고 있다 생각했거늘 이제는 무리였다. 변방에서 연서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자신의 머릿속과 가슴속은 별개의 생물이 된 것 마냥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마치 꾹꾹 참고 있었던 모든 불만과 분노가 일시에 터져버린 듯 했다. 자제가 안 된다. 지금 자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찌 다스릴 수가 없었다.
연서강, 그놈에게 ‘연모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벌써 한참 전에 들어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그때는 정작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이, 왜 그 사람이 기연조라고 밝혀진 지금은 안 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연서강이 저지른 뜻 모를 행동들, 자신조차도 섬뜩하게 만들었던 말들,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무엇들이 전부 기연조 때문이었고, 기연조를 생각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죽여 버릴까.
일순 연무강의 시선에 몹시도 냉랭한 기운이 서렸다. 유모 서씨는 이미 늦었다지만 기연조는 아직 살아 있는 놈이었다. 연무의가 행하는 일에 방해도 될 놈이니 미리 싹을 잘라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친인 연무의에게는 놈이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없애버렸다고 말을 하면, 연무의도 충분히 납득......, 하기는 무얼 하겠나! 연무강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지금 기연조에게 손을 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릴 지도 모른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 간단히 죽여 버리자는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연무강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차가운 손과 달리 얼굴의 온도는 조금 높았다.
“이상해.”
문득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의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로 이상했다. 뭘 이리 조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놈이 기연조를 좋아하든 말든 역시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던가. 이미 자신은 결론을 냈었지 않나. 놈이 누구를 좋아하든 곁에 누굴 두든 누구를 즐겨 찾든 그 모든 것을 차례로 없애 버리고 결국에는 놈을 자신의 옆에 두겠다고. 연서강의 마음은 자유이니, 그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 또한 자유롭게 행동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허나 이상했다.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감정이 대체 무얼까.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것이었다. 성헌당에서 그는 연서강이 연모하는 이가 기연조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부친인 연무의에게 그것을 보고했어야 했다. 다른 이도 아닌 기연조였다. 그러니 연무강은 당연히 연무의에게 말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성헌당에서 연무의가 몇 번이나 왜 그러느냐며 캐어물었어도 연무강은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연무의가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의심을 받을지언정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고작 이번 일 한 번으로 자신이 연무의에게 쌓아 놓은 신뢰가 깎이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적인 생각마저도 했었다.
이상했다.
철이 든 이후부터 연무강은 내내 부친인 연무의의 든든한 수족으로서 움직였었다. 단 한 번도 연무의의 명령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단 한 번이라도 연씨 문중이 아닌 다른 것을 마음에 품고 행동한 적이 없었다.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명문 연씨 문중의 장자, 황후마마의 든든한 지지자. 그 어떤 의무도 연무강은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결코 앓는 소리 하지 않는 든든한 아들의 역할까지도.
연무진이라면 ‘질리지도 않소. 나는 못하겠소이다. 어찌 그리 사오.’하고 질색하며 물러날 일이었지만 연무강은 이제까지 자신이 연무의의 장자라는 것을 원망하거나 싫어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이니 행했을 뿐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랬던 것이, 처음으로 화가 나고 답답했다.
“.......”
자신이 ‘연무강’이 아니었더라면 유모 서씨는 자신을 보고 놀라지 않았을까. 허면 자신은 그대로 그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랬더라면 지금 연서강과 자신은 나름대로 잘 지내는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
그 벌레 같은 기연조 따위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를 고이 자신의 품에 품고 놔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
그 의문 때문에 사무치는 감정이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부친께 연서강 그 놈이 사모하는 이가 기연조라는 사실을 끝끝내 보고하지 않은 이유도.
철이 든 이후부터 연무강은 내내 연씨 문중을 위해 일해 왔다. 그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진 연무의의 자신에 대한 신뢰는 단박에 깨질 리 없는 강철 같은 것임이 틀림없다. 허나 연서강은 아니다. 최근에 와서야 간신히 믿을 만하다, 라고 연무의가 평을 내린 그이니, 자신이 새로이 안 사실을 알려주게 되면 연무의는 단박에 연서강을 내칠 것이다.
연무강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이 연씨 문중에 ‘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친인 연무의가 사실의 어디까지를 연서강에게 공개했는지 또 공개할 생각인지 그것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연서강은 놈이 들은 사실을 모조리 기연조에게 털어놓을 것이 확실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녹우당에서 살다시피 한 놈이니 마땅히 기연조를 위해 연씨 문중 전체를 ‘배신’할 법도 했다. 그것이 얼마나 연씨 문중과 황후마마에게 큰 해가 될지 연무강은 모르지 않았다.
일이 심각해지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
“.......”
그러나, 그런데도 연무강은 연무의에게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을 안 연무의가 연서강을 어떻게 할지, 이제까지 줄곧 그의 옆을 지켜온 만큼 눈에 선연했기 때문이었다. 부친은 연서강을 악독하게 이용해 먹은 뒤에 그의 주검만 홍월정 숲속 깊은 곳에 내던져 썩어가게 할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가 ‘실종’되었다고 말한 후에, 연서강의 ‘실종’이 기연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또 덧붙이실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연서강을 죽여 버릴 것이다, 그는.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연무강도 마땅히 그리 행동했을 것이었다. 가문의 해가 되는 연서강을 가문에게서 배제시키고, 죽임으로써 은폐시키되 그 죽음도 가문을 위해서. 부친이 어서 연서강을 그런 식으로 치워버리기를 그는 소망하고 소망했었다. 연무강은 입을 다문 채 바닥을 응시했다.
정말 괴이한 일이었다.
연씨 문중이, 나아가 황후마마까지 그 놈으로 말미암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놈 따위를 위하여 기꺼이 ‘침묵’하다니. 심지어는 연씨 문중과 황후마마께서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조차도 들지 않았다. 다만 현재 그를 불쾌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연서강이, 놈을, 기연조를 연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그 사실이 연무강을 아주 어둡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기연조를 눈앞에서 생매장시켜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연서강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다. 연서강이 울부짖으며 소리치면 마음이 조금 통쾌해질까도 싶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연무강은 이를 갈았다. 아니, 아니다. 그런다고 연서강이 기연조를 사모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원하니?’
파문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연무강의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무엇을 원하냐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연무강은 얼굴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연서강이 기연조 놈과 떨어졌으면 좋겠어.”
이리로, 이리로.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모두 놓고 연서강은 자신의 옆으로 와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기연조에 대한 연심은 모조리 자신이 박살내주리라. 그 놈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또 연씨 문중을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기연조 놈과 그 녀석을 떨어뜨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연무강은 당연히 밖으로 나가버린 부관일 거라 생각하고는 묻지도 않고 곧바로 ‘들어와.’, 하고 대답했다. 허나 문을 두드린 자는 심약한 그의 부관이 아니었다. 부관은 연무강을 피해 아주 멀리 가버렸던 모양이었다.
“연의진.”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바로 남동생인 연의진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연무강은 이제까지 연의진과 같은 궐내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사사로이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라에 행사나 축제, 제례의식이 있을 때 정도만 한 자리에서 마주쳐 눈인사를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본가에도 연의진이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연무강이 얼굴을 마주치는 빈도는 지극히 낮았다. 부상이라도 당하지 않으면 보기가 힘든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의진이 자신을 보러 불쑥 여기까지 들렸으니 놀랄 만도 했다. 무엇보다 연의진이 몸을 담고 있는 영의전은 여기와 제법 거리도 멀었다. 할 이야기가 없는 사이이기는 했지만, 굳이 전할 말이 있다면 본채에서 말을 나누었었다. 먼 거리를 걸어 상대를 찾을 만한 급한 일이 그들의 사이에서는 이제껏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 그가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지 연무강은 의아했다. 게다가 연의진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인지 얼굴 표저이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형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연의진의 말에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꼭 추궁하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라고 말도 없이 막무가내로 묻는 말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이?’하고 연무강은 연의진에게 물었다. 연의진이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연조가 연서강에게 접근한 이유 말입니다.”
“그 놈이 말해주었나 보군.”
그 한 마디 말만으로도 연무강은 무슨 이유로 연의진이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연의진은 연서강의 어깨 때문에 요사이 계속 본가에 머물고 있었다. 연서강의 어깨 상처가 여간 중한 것이 아니었던지라, 연의진이 본채에 온 이후로 시간도 제법 흘렀다. 얼굴을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둘의 사이가 친밀해진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연무강은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이유 아니더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정적(政敵) 연씨 문중의 아이인 연서강에게 접근한 기연조의 의도가 수상하다, 라고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제아무리 정세에 관심이 없는 연의진이라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막내인 연서령조차도 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의 말을 듣고 왜 새삼스레 저런 꼴을 하고 따지러 온 것인지 연무강은 연의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의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허면 말리지 그랬습니까?’ 그렇게 묻는 말이 너무도 상투적이다. 연무강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뒤지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버님의 명령이었다.”
“.......”
‘아버님’이란 말에 연의진이 입을 꾹 다무는 것이 보였다. 연무진은 물론이거니와, 연의향, 연의진, 연서령까지도 연씨 문중 형제들 전부는 연무의에게 약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위압적이기까지 한 연무의의 성격을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모친이 살아계실 적에는 다정하신 모친의 성격이 연무의의 모난 성격을 감싸 안아 주었었지만, 그 분께서 작고하신 이후에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연씨 형제들 모두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권위에 억눌러 살았던 터라 ‘연무의’란 이름만 들으면 쉽사리 반발할 수 없는 약점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연무강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약점이었다.
연무강은 돌이켜 어릴 적을 생각해봤자 그다지 연무의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가 무섭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반대로 그가 좋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연무강에게 그저 ‘아버지’였고, ‘상관’이었으며, ‘본보기’였다. 엄격하게 훈련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있으나 혼난 적은 없거니와 그의 기세에 억눌린 적도 물론 없었다.
다만 ‘부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형제들의 기가 살짝 눌리는 게 보여, 필요할 때 가끔 적절하게 사용할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기연조에 대해서 알게 된 연의진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도 그냥 방치해둘 수가 있었는가, 자신에게 따지기 위해서 온 듯 보였다. 연의진의 이런 점이 솔직히 연무강은 귀찮았다. 무관심할 것이면 끝까지 무관심할 것이지, 어찌 중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따지러 온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는 연서강에 대해서 무어라 연의진에게 설명하기가 싫었다. 그만 ‘부친’이 그랬다는 것만 알아듣고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드물게 연의진이 묻는다. 연무강은 흘깃 연의진을 보았다. 연의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형님께서는 아실 것 아닙니까? 왜 그냥 놔두었다고 합니까?”
“이용하기 위해서다.”
무성의한 연무강의 대답에 연의진이 ‘그런.’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조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수재답게, 연의진이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형님.’하고 연의진이 입을 다시 열었을 때, 연무강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서강일 변방에 보내고 본채에 부른 것입니까? 또 어디에 이용하시려고.”
“말이 많다, 연의진.”
답지 않게 왜 이러는 것인가. 대체.
험악해진 연무강의 목소리에 연의진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연무강이 사정 봐주지 않고 폭언을 퍼부었다.
“너야말로 왜 새삼 놈에게 관심을 주느냐? 어렸을 때는 나나 무진이가 눈앞에서 놈을 쥐어 팼어도 모른 척, 아무 말 없이 지나가지 않았느냐? 손발로 직접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나, 의향이가 한 것 같은 무관심 또한 형태만 다를 뿐 하나의 폭력이다. 그래 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참견을 하는 것이냐?”
“.......”
연무강의 폭언에 연의진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연무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차갑게 일침을 놓았다.
“관심을 거두어라.”
“.......”
이만 하면 연의진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법도 했다. 연무강은 책상 위에 정리 안 된 서류를 한 데 모으며 말했다. ‘나가.’ 그 말에 연의진이 숨을 들이켰다. 허나 연의진은 목석이라도 된 듯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연무강이 짜증스런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을 때, 연의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며 연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하고 연무강이 묻자 연의진이 말을 이었다.
“.......형님과 부친께서 꾀하시는 그 ‘일’에는 서강이를 끼어들게 하지 않겠다고. 황후마마를 뵙게 하지 않는다고, 변방에서 죽을 뻔 했다고도 하고, 이제는 어깨도 성치 않은 아이인데.”
그 말허리를 연무강이 무를 자르듯 썩둑 잘랐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
그 단호한 대답에 연의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습니다.”
기분이 상했는지 연의진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변했다. 연의진이 연무강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연무의라면 ‘원, 녀석. 성격하고는.’하고 혀를 쯧쯧 찰 법도 했었다. 집안에서 제일 얌전한 녀석이라 해도, 결국은 녀석도 연씨 문중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닫힌 문을 연무강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연의진이 무례한 행동을 보여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연무강의 기분은 무언가 ‘좋은 것’을 뜻밖에 발견한 사람과도 같았다.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문득 연무강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후마마를 뵙게 하지 않는다, 고?”
그 중얼거림은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사람의 것과도 같이, 음산하고 차가웠었다.
연무의의 장남인 연무강은 세간에서 연무의가 젊었을 때와 똑같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였다. 그의 성격은 연무의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고 권위적이었으며, 치밀하고 냉철했다. 계획을 짜고 행하는 데에 무심한 과단성이 단연 돋보이는 자였다. 마땅히 행해야 한다면 누구를 죽이는 데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연무강의 성격은 죽 ‘연씨 문중’을 위해서만 십분 발휘되었었다. 지금까지는.
* *
“홍아.”
부르는 소리에 홍이가 이리로 왔다.
연서강을 본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볼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녹우당 오라버니.’하고 답삭 와 안는 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똑같아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저번에 깜박 졸고 만 홍이는 연서강이 수안궁을 나갈 때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오자마자 간다는 말에 섭섭해 할만도 한데, 아이는 다만 두 눈을 깜박이고 연서강을 바라볼 뿐이었다. ‘간다, 홍이야?’ 하고 연서강이 말하자 멍하게 있던 아이가 순간 웃었다.
-또 오실 거죠.
연서강은 그때 처음, 홍이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잠에 취해 멍해 있었던 것도, 연서강이 오자마자 간다는 말에 섭섭해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른 건 전부 땅바닥에 내려놓고 아이는 다만 연서강이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만끽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니 오자마자 간다고 해도 홍이는 섭섭하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더라도 또 올 수 있다면 기꺼이 가도 좋았다.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다면 기꺼이.
그 사실에 연서강은 감격했다. ‘그래!’하고 그는 홍이의 두 손을 잡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이 아이에게 참으로 못할 짓을 했구나, 란 생각을 또 한 번 더했다.
-좀 더 자주 찾으마.
그리 말을 이으니 홍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미소에 연서강은 역시 살아있기를 잘 했다,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 무표정한 아이인 만큼 돌연 짓는 미소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아이의 어여쁜 미소는 연서강으로 하여금 기쁜 동시에 서글픔을 느끼게 했다. 이대로 무럭무럭 자라준다면 참으로 어여쁜 여인이 될 텐데, 그러나 아이의 미래는 이미 그 끝이 정해져 있다.......
녹우당에 있을 적에 홍이에게 좀 더 관심과 애정을 줄 것을 그랬다고 연서강은 후회했다. 아이는 고아였다. 그런 아이의 곁을 줄곧 지킨 것은 늙은 도둑고양이 ‘아리.’ 홍이가 아리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연서강은 충분히 이해했다. 홀로 길거리를 떠돌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힘들었던 때에 항상 옆에 있어주었던 고양이이니 홍이의 아리에 대한 마음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허나 고양이가 죽는다고 자신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너무도 슬펐다.
녹우당에 있을 때 자신이 고양이에 대한 홍이의 집착과 애정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면, 홍이가 올 ‘겨울’에 죽음을 맞이할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그는 우울해졌다. 그때, 자신이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홍이가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정말 그랬었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그 ‘겨울’에 죽었을 테지.
“.......여기.”
문득 홍이가 연서강의 소매자락을 당겼다. ‘왜?’하고 물으니 아이가 한 쪽 손을 번쩍 위로 든다. 내려간 소맷자락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정확히는 아이의 팔에서 반짝이는 게 보였다.
팔찌였다. 저번에 선물이라고 전하기만 하고 채워주지는 못했는데, 자신이 온다고 일부러 찬 모양이었따. 적산호로 조각한 꽃들이 어우러진 팔찌는 역시 아이의 팔에는 약간 컸다. 헐렁헐렁해서 팔목은커녕, 손을 들자 팔뚝까지 주루룩 내려오는 팔찌였다. 역시 무진 형님께 ‘아이’의 것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선물을 고를 것을 그랬다.
“.......마음에 드니?”
연서강이 묻자 홍이는 팔을 내리고 뒤로 주춤주춤 걷는다.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리, 안을 때는 조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더 들어보자. 아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다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서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무슨 뜻이니?’라고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그의 등을 누가 툭 쳤다.
“아하, 고양이를 안을 때만 빼고 전. 부. 마. 음. 에. 든. 다. 는. 말! 이. 구. 나!”
그리고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이제까지 연서강의 뒤에 서있었던 제아겸이었다. 그의 입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눈만은 ‘어떻게 그걸 못 알아들을 수가 있나.’하고 연서강을 질책하고 있었다. 제아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한 연서강은 재빨리 홍이를 보고 웃음 지었다.
“좋아하니 다행이다.”
홍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땅을 보았다. ‘홍이는 좋겠구나.’하고 제아겸이 홍이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연서강은 거기까지 보고나서야 ‘아, 아이가 지금 쑥스러워 하는구나.’하고 깨달았다. 과연 아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달랐다.
이어서 제아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러고 보니 먹이를 줄 시간인데 아리가 안 보이네.’하고 말하자, 홍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디 있는 줄 알아요.”
여전히 살갑게 웃으며 제아겸이 홍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우리 저 둔한 놈에게 아리가 얼마나 잘 먹고 푹 쉬어 예뻐졌는지 보여줄까?”
홍이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자에서 내려가 부리나케 어디론가 뛰어갔다. 연서강은 작아지는 아이의 등을 응시하며 감탄했다.
“아이를, 정말 잘 다루십니다.”
그 말에 제아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 만에 만나는데 잔뜩 침울한 얼굴로 하고 있는 자네보다야 당연히 잘 다루겠지.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홍이가 걱정하지 않나?”
그 말에 흠칫 놀란 연서강이 제 얼굴을 쓸었다. ‘티가 났습니까?’ 제아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지 아직 어린 아이가 다 큰 어른을 걱정할 때부터 알아봤다면서 제아겸이 중얼중얼 한탄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되돌아’ 온 이후에 녹우당에서 홍이의 위로를 받았던 적이 적잖이 있었던 터라, 연서강은 여러모로 속이 뜨끔했다.
“저는 그저, 홍이가 아리에게 덜 집착했으면 되돌아오지도 않았을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몹쓸 생각이네.”
제아겸이 딱 잘라 대답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이것저것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봤자 무얼 하겠나. 자네가 할 일은 오로지 홍이의 앞에서 웃는 것이네. 이것 참, 두 번째 삶을 사니 참으로 좋구나. 그런 느낌이 확확 느껴지는 얼굴로.”
“.......맞는 말씀입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연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올 적에는 그런 느낌(?)의 얼굴로 웃는 법을 좀 연습해서 와야겠다. 굳어있는 제 볼을 문질거리던 연서강은 괜히 입술을 양쪽으로 당겨 억지로 웃어보았다. ‘그런 괴상망측한 것 말고.’ 당장 제아겸의 질타가 날아왔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란 말인가? 연서강은 당장 웃는 것을 그만 두었다.
“참, 좋은 차를 샀습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연서강은 가지고 온 것을 꺼내어 제아겸에게 건네주었다. ‘차?’ 제아겸이 연서강이 건네는 상자를 받아들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보고 연서강은 ‘아, 잘못 골랐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태상께는 어떤 선물을 주는 게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혹여 제아겸이 마음에 안 들어 할까 싶어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동쪽에서 수입해 온 향차입니다. 복숭아와 매화향이 섞여 있는 백차죠. 씁쓰레한 맛은 하나도 없고 달달하고 향긋한 맛이 일품입니다. 좋은 차 잎에 동쪽의 명망 높은 장인이 만들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향이 전혀 날아가지 않습.”
상자를 든 제아겸이 웃는 얼구로 연서강의 말을 잘랐다.
“자네 여기 방문 판매하러 온 건가?”
들켰다. 이국에서 온 상인이 한 말을 그대로 외워 두었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무척 티가 잘 나는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연서강이 말을 멈추고 애매하게 웃자 제아겸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잘 마시겠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그간 잘 지냈는가?”
차를 옆에 선 여인에게 넘기며 제아겸이 입을 열었다. 차를 수납하러 가는지 정자에서 내려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서강이 대답했다.
“네.”
딱 부러지게 확실히 대답했건만 제아겸은 어째서인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연서강이 묻자 제아겸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잘 지냈다고 하면, 그런 것이겠지.......”
말 끝에 잔정이 묻어 있다. 이번에는 연서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할 차례였다. ‘걱정하시는 티가 납니다.’
“.......좋은 방법을 좀체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한가로이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그 말은 믿음직한 모양이었다.
그런 제아겸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연서강은 ‘다행이군.’하고 생각했다. 제아겸이 자신을 보자 연서강은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다행이었다. 제아겸의 말대로 ‘이것 참, 두 번째 삶을 사니 참으로 좋구나.’라는 식으로 웃지는 못해도 ‘별 일 없다.’란 느낌으로는 웃을 수 있어서.
연서강에게 있어 제아겸은 타인이었다. 딱 이 정도의 거리가 그와 자신의 적정선인 듯 했다. 아마도 자신은 앞으로 더욱 확실히 진흙탕에 빠질 듯하니 제아겸과 홍이를 거기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연서강이 보기에 제아겸은 말과 달리 무척 다정한 사람인 듯 했다. 매 번 매정하게 말하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연서강에게 대한 배려로 끝을 맺었다. 정말로 매정하게 군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아이 보기와는 달리 사람을 매정히 대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인 듯 해 연서강은 더더욱 자신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말 할 수가 없었다.
“.......”
언뜻 그런 그의 눈에 홍이가 들어왔다.
홍이가 보후전 뒤편에서부터 끙끙거리며 고양이를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제아겸이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보게.’하고 손가락으로 그 모습을 가리켰다.
“참으로 때깔이 좋아지지 않았나.”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원래도 덩치가 작은 홍이를 안고 다니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 크기의 고양이였었다. 그랬던 크기가 지금은 더더욱 불어 있었다. 털빛이 환해지고 윤이 나는 걸 보니 말끔하게 씻기도 했나 보다. 전보다는 더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늙은 고양이의 모습에 연서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찐 것 아닙니까.......?”
녹우당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배가 더 커 보인다. 가뜩이나 나이 많은 고양이인데 갑자기 저리 살이 쪄도 괜찮은 걸까. 저러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몸에 무리가 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연서강의 귀에 제아겸의 만족스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고양이는 몸이 동글동글하고 성미가 게을러야 제 맛이지.”
“.......”
진심으로 제아겸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홍이가 결국 정자 아래에 있는 돌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땀을 식혔다. 체온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아이는 그 틈을 타 제 품을 어슬렁어슬렁 빠져나가려는 아리를 두 눈을 크게 뜨고 잡았다. 허나 이제는 힘도 아리가 더 센 모양이었다. 아리가 엉덩이를 한 번 흔들자 홍이가 나가떨어진다. 아리가 근처 풀숲으로 마치 거대한 도마뱀처럼 천천히 이동한다. 그 뒤를 홍이가 또 따라갔다.
“되었다, 홍아.”
연서강이 결국 아이를 부르며 만류했다. 홍이가 ‘아리.......’하고 중얼거리며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연서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도 충분히 보인다. 아리의 풍채가 제법 좋아졌구나.”
“풍채가 무엇인가요?”
풍채, 란 어려운 단어를 못 알아듣고 아이가 묻는다. 연서강이 대답했다.
“예쁘다고.”
홍이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고왔다.
* *
어찌 해야 하나.
요 며칠간 연서강은 그것만을 생각했다. 가급적 부친 몰래 황후마마를 만나 뵙고 싶었지만 그것이 쉬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연무진에게 부탁했더니 연무진은 ‘안 된다. 그랬다간 내가 혼난다.’하고 말을 딱 끊었다. 전번에 묻는 말에는 술술 잘만 대답을 해주더니 이번은 또 차갑게 뿌리쳐서 연서강은 의아하다 생각했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연무진의 입장이라도 그렇겠다 싶었다. 말이야 들은 연서강만 입을 딱 다물면 그만이지만, 황후마마를 만나 뵙는 것은 그렇게 쉽게 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난전에 들고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고, 또 황후가 후에 연무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하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무진으로서는 쉽사리 호기로 들어줄 만한 요청이 아니다.
연의진에게는 이미 부탁을 해서 거절당한지 오래다. 연의향은 여태 변방에 있었고, 그것은 연서령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만나 뵐 수 없을까, 고민하며 황후께서 계신 궁 가까이까지 가봤지만 자신이 갈 수 있는 것은 그 문 앞까지 뿐, 그 너머는 대신들이나 난전에서 일하는 궁인들이 지니고 있는 출입패가 있어야만 갈 수 있었다. 출입은 바로 난전 앞을 지키는 근위병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잘 아는 궁인이 되어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황후마마를 만나 뵙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하면서 연서강은 여러 날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아서 날이 갈수록 고민은 막막한 속에 답답함을 더할 뿐이었다.
‘겨울’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 않나. 그렇게 자위하기에는 연서강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으니 무리였다. 이미 기연조가 녹우당으로 와서 황태자 책봉에 대한 말을 꺼낸 후인 것이다. 죽기 전 ‘여름’에는 그런 일이 전연 없었다. 그러니 ‘겨울’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약간의 일만 틀어져도 간단히 앞일이 바뀐다는 것을 연서강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그래도 가족들은 무사한 채로 끝이 났다. 허나 이번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었다. 자신은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그것을 기연조도 눈치를 챘다. 자신은 비서랑이 되었고 부친이 그것을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의향 누님이 올해 말에는 변방에서 아주 돌아와 버릴 것 같은데, 그 여파가 조정에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일이 사정없이 헝클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기연조가 앞으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모르겠고, 자신의 가족들- 특히 연무의가 기연조에 대해서 얼마만큼 눈치를 챘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누가 연씨 문중을 배신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할 게 너무도 많아서 늦은 밤이 되면 연서강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또 하루, 또 아무것도 못 한 채 하루를 넘겨버리고 말았다는 초자함에서였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지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본채로 돌아오면 녹우당에 있는 것보다는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겠지, 싶었지만 그만큼의 성과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연서강은 소요하며 지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일을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서서원으로 가서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오후가 되면 비로소 한가로워 진다지만 집으로 아주 돌아가 연무의가 머무는 성헌당을 감시하거나, 연후정에 혹여 또 다른 사람들이 얼신하지 않나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당장에 근무태만으로 신고가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무의가 자신을 부를 게 뻔했다.
아득했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허나 안 되었다. 그나마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태상이었는데, 태상만큼은 절대 안 되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이런 답답한 일이 생길 때면 기연조와 의논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로지 홀로, 연서강 혼자서 이 일을 생각하고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하게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 보아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이게 진정으로, 자신이 녹우당에서 세월을 허비하고 산 대가인 것이다.
아무런 능력도, 재력도 없고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신뢰 받지도 못해서 조만간 큰 일이 터질 걸 알면서도 혼자서 무기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 행동은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곰니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게 바로 그 대가였다.
밤이 깊어지자 연후정의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문후당 너머에 있는 작은 후원은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캄캄해지곤 했다. 그 후원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 연후정이니, 지금의 연후정은 흡사 새까만 빛에 삼켜진 것처럼도 보였다.
연후정 바로 옆에는 임의로 배치된 암석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나무들을 마구잡이로 배치해 놓고 있었다. 때문에 암석 옆으로 비켜난 나무 가지들이 마치 연후정을 두 손으로 감싸는 모양이라, 팔각정자임에도 능히 몸을 숨기는 게 가능했다. 본채에서도 연후정은 지붕과 몇 몇 기둥 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었다지만 그 용도와 달리 오고가는 것도 힘들었고, 그 고됨을 감당할 정도로 주변 경치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암석과 수목, 꽃담으로 감싸인 정자 안에서 그 손님들과 연무의가 무얼 하는지는 가솔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조차도 몰랐다. 가끔 연무강이나 연무진이 들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연무의가 그들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연후정은 사랑채 용도인 성헌당과는 엄연히 달랐다.
연후정은 철두철미하게 연무의를 위한 장소였다.
“.......”
그 연무의가 오늘은 궐에서 밤을 보낸다고 하였다. 가솔들이 떠드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오늘은 어르신께서 내내 궐내에 계신다 하십니다. 그러니 어르신께 무슨 용무가 있으시다면 궐로 사람을 보내십시오.’하고 하인이 연서강더러 직접 말을 하기도 했었다.
연무의가 집을 비우는 경우는 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성헌당에 머물고 있었고 손님들이 직접 그를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성헌당은 중요한 문서도 많고 함부로 그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연무의가 금지했기 때문에, 연무의가 부재중이라고 해도 함부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게 흠이었다. 성헌당 주변은 항상 하인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연무의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손님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후정은 달랐다. 연후정은 연무의만이 이용하는 장소였고, 정자는 주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거나 밀지를 건네는 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딱히 출입을 금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연무의만 이용하는 곳인지라 연무의가 집을 비우면 연후정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도 얼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연서강도 연후정에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무언가 보관하기도 가당찮은 팔각 정자 건물이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여태까지 그 장소에 남아있을 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그곳을 서성이다 뭔가 요긴한 물건이라도 줍길 바랐다.
연무의가 부재중일 시, 연후정은 철저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배제되었다. 덕분에 늦은 밤, 그곳을 향하는 연서강에게 집안사람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연서강은 편히 연후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름밤, 불빛 하나 없는 후원에서는 나무와 풀과 흙냄새만이 물씬 풍겼다. 향기로만 가득 배인 녹우당과 달리 이곳은 풋풋한 식물의 진액 냄새만 날뿐이었다.
눈이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연서강은 조심조심 연후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랑채에서 가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후원은 조용했다. 어둠이 가라앉은 덕에 윤곽이 확실히 보이지 않아 나무도 풀도 전부 폭신폭신한 덩어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간신히 정자 위로 올라간 그는, 나뭇잎이 풍성해서 본채에서는 보이지 않을 거라 여겨지는 쪽에서 가지고 왔던 초롱에 불을 밝혔다. 일부러 오래된 초를 골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불빛은 가늘고 힘이 없었다. 주변의 모습을 간신히 가늠할 정도의 약한 빛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초롱의 불빛에 의지해 연서강은 연후정 안을 둘러보았다.
“.......”
생각대로 연후정 안은 몹시도 깔끔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바닥은 초롱 불빛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수상한 점 또한 없었고, 기둥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혹여 먹물로 따로 낙서한 것은 없을까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그럼 그렇지,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이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에 연서강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녹우당에서 기연조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꺼내어 읽어보아도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성헌당이 아니면 득이 될 만한 것은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헌당으로 어찌 몰래 들어간단 말인가?
자신이 연무강이나 연무진 정도로 부친의 신뢰를 얻은 사람이면 모를까. 현재의 자신으로서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보초를 서는 하인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만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했으나, 그간 아무리 시도를 해 봐도 하인들은 인간 모양을 한 철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늘 두 명 정도는 성헌당을 지키고 있었고, 연무의의 명령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그들은 ‘그렇다고 해도 들일 수 없습니다.’하고 대꾸하기만 할 뿐이었다. 또한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들의 목이 달아납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로 성헌당으로 들어가는 건 역시 무리였다.
연서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축축한 수목의 진액 냄새가 몸속 깊숙이 들어왔다.
“.......”
어쩔 수 없구나.
결국 연서강은 다시 초롱의 불을 끄고 올라갈 때와 같은 방식으로 연후정에서 내려갔다. 방으로 들어가 차라리 효기교위라던 사내의 뒤를 캘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집안을 함부로 뒤지고 다녔다간 영락없이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리고 그가 후원과 서재 겸 강학재인 문후당을 가르는 꽃담에 가까이 왔을 때였다.
“연후정에 캘 만한 것이 없었나 보지?”
그 소리와 함께 연서강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담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연서강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로 볼 때 그것이 누구인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연무강이었다.
“.......형님.”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깜짝 놀라 순간 사색이 되었었지만,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연서강은 차분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짐짓 태연을 가장하여 말을 건넸다.
“형님도 밤 산책을 즐기시나 봅니다.”
연서강의 대답에 상대방이 차게 웃었다. ‘산책?’ 담 앞에 서있던 남자가 연서강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응시한 채로 연서강은 숨을 죽였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연후정까지 왔는지 연무강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들키다니, 낭패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연무강에게.
“불 꺼놓고 다니는 산책도 다 있나 보군.”
이윽고 연무강이 연서강의 앞에 와 섰다.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이미 엎지른 물이라고 해서 거기다 또 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빠져 나가야 했다. 연무강에게 들켰다는 것은 이어 이 사실이 연무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서 연서강은 필사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불빛이 주변에 너무 많으면 가끔 심란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불을 꺼놓고 홀로 있고 싶습니다. 형님은 없으신지요. 조용한 어둠 속에서 혼자 있고 싶은 적이.”
“쓸데없는 말 하지 말거라.”
그러나 역시 연무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바로 날아오는 냉랭한 목소리에 연서강은 손에 든 초롱을 꽉 쥐었다. 손안에 땀이 벌써 흥건히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시선을 모로 흘리며 연서강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형님께 사과도 제대로 미처 못 드렸습니다. 의진 형님이 제가 형님의 손바닥을 물었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제가 그간 너무 황망하게 시간을 보내 이리 늦게 사과드립니다.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들었던 말을 토대로 사과도 해보았다. 허나.
“지금 네놈에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역시 연무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연서강은 긴장으로 인해 등과 이마에 한기가 드는 걸 느꼈다. 스르륵, 부는 바람에 잎사귀가 떨리는 소리조차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두워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도 않으면 자신의 동요가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해졌을 것만 같았다. 그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기울이는 노력까지도.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서강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 몸을 물렸다. 한편으로는 연무강의 말마따나 정말 얻은 것도 없는데 저 사람이 자신을 무얼 어쩌겠냐는 대담한 생각도 들었다. 연무의에게 알릴 테면 아려라. 상관없다. 연무의가 자신을 불러 어찌 된 일이냐 물으면 자신은 연무강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읊으면 그만이었다. 그 변명을 연무의가 그대로 믿을 리는 없으니 당분간 활동에 어느 정도 제약은 생기겠지만 요사이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연무의가 자신을 곧바로 내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런데.
“사모하는 이.”
그 소리에 연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가 얄궂게 웃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아버님도 그렇고, 연무진도 그리 말하더구나.”
순간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대충 둘러댄 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연무강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것만은 싫었다. 그 말을 들은 연무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네까짓 게.’라며 비아냥거리고 냉소하겠지.
“.......그걸 조롱하기 위해 여기까지 친히 오신 겁니까?”
연서강은 몸을 돌려 연무강을 보았다.
“겨우 그러기 위해 제 뒤를 살금살금 따라오셨습니까?”
아무리, 차마 가족들을 배신하지는 못하겠다라는 제 진심을 깨달은 직후라지만 눈앞의 남자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이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가족’에 저 남자는 속해 있지 않았다. 만일 자신의 가족이 오직 연무강 뿐이었다면 자신은 기꺼이 가족을 배신했을 것이다.
“참으로 할 일도 없으십니다. 형님.”
하고 말하면서 연서강은 몇 대 정도는 호되게 얻어맞을 각오를 했다. 저번처럼 목이라도 조르려 든다면 손에 들고 있는 초롱으로 연무강을 내려치고 도망갈 생각도 했다.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본채로 도망가도 분명 자신을 도와줄 이가 몇쯤은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아보고 연무강을 말려줄 이가.
녹우당까지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연서강은 그를 노려보았다.
헌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자신의 건방진 말을 듣고도 연무강은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말에 심기가 불편한 내색도 하지 않는다. ‘그렇군.’하고 대답하며 웃는 목소리도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연서강은, 그 모습에 불쑥 불안해졌다.
“.......”
무언가, 발아래부터 스물스물 시꺼먼 기운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위기감. 그래, 새빨간 피가 눈앞에서 번뜩이는 것 같은 위기감. 서늘하고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심장을 쑤시는 것 같은 위기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초롱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익숙했다. 이 느낌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찰나에 느꼈던 그 서늘한 느낌이었다. ‘겨울’에도 느꼈고 변방에서도 느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와 팔목, 허벅지와 종아리를 쓸고 지나갔다.
“무엇입니까?”
긴장한 목소리로 연서강은 물었다.
상대방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즐거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마치 품평 당하는 소라도 된 듯 했다. 평을 받고 나면 당장 연무강이 백정처럼 자신을 도축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가을바람에 말라가는 잎사귀와 같은 소리를 냈다.
연무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몰랐다. 네가 사내를 좋아하는 그런 부류였을 줄은.”
“.......!”
쿵, 늑골 아래로 뭔가가 추락했다. 연서강은 숨을 멈추고 연무강을 보았다. 연무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무어라 할 말도, 숨기고 있는 꿍꿍이도 많은 얼굴,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안 걸까. 설마 자신이 기연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는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그저 도발인 것일까.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곧추세우며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지막 추측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형님.”
나오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농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제 주변에 여인이 없다고 하지만, 그 농은 지나치십니다.”
“.......”
그리고 한기가 배어나오는 숨을 몰아쉬고 나서 연서강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가 사내를 좋아한다는 판명이 나면 그야말로 가문의 수치 아닙니까? 아니면 그겁니까. 더럽다고 몰아붙여 저를 죽일 궁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날카롭게 제련된 자신의 말끝은 그런 보람도 없이 연무강을 비켜 나갔다. 연무강이 ‘그것도 그렇구나.’하고 심상하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의 주변을 천천히 맴돌며 연무강이 이어 입을 열었다.
“그 생각을 차마 못하였다. 네가 사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가문의 수치가 되겠지.......”
마치 생각지도 못한 것을 깨달았다는 듯한 말투에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생각은 차마 못했었다니. 그렇다면, 왜?
대체 연무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연서강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연무강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자신에게 불리한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추격하는 적군을 보는 것처럼 연서강은 연무강의 움직임을 불안한 시선으로 쫓았다.
무얼까. 대체.
형님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때, 연무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로지, 네가 연씨 문중을 배신을 하지 않을까 염려만 했었거든.”
연서강이 시선을 흔들렸다. 뭐라고? 황망한 얼굴을 하는 연서강을 보고 연무강이 입술을 비틀었다. ‘왜 그러느냐?’하고 그가 짐짓 모르는 척 말을 한다.
“네놈이 연모하는 이가 바로 기연조이니 내 의심은 정당하지 않으냐.”
“.......”
싸, 하고 바람이 지나갔다. 그 바람을 따라 연서강은 어둠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처럼 팔랑거리며 날아온 어둠이 자신의 어깨로 날아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차갑다. 그 서늘함에 붙잡혀 연서강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반사적으로 나온 말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싸늘한 얼굴로 연서강은 연이어 말을 쏟아냈다.
“형님.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버님께 이미 말씀 드렸었는데요. 저는 기연조가 제게 무언가를 캐내기 위해 접근한 것을 알아챘습니다. 미워하는 게 마땅해야 할 상대입니다. 그런 상대에게 연심이라니요?”
비소(誹笑)를 머금고 연서강은 연무강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지 말아야 했다. 물러서지 말아야 했다. 지금은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 눈앞에 당면한 위기를 마주 봐야 할 때였다.
“낭설이라고 해도 심히 불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해진다.
“당치 않은 말로 저를 모함하지 마십시오.”
연무강을 노려보며 연서강이 딱딱하게 말을 내뱉었다. ‘모함.’ 연무강이, 연서강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서강이 쏘아붙였다. 여전히 몸 위로 가라앉은 어둠이 차디찼다.
“모함이 아니면 무어란 말입니까? 형님께서 저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낭설을 믿고 저를 미행할 정도였다니....... 지나지십니다. 오히려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은 형님의 머리 아닙니까? 제가 같은 사내를, 그것도 하필이면 기연조를. 너무 기가 차서 무어라 반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연서강은 말을 하면서도 답답하다고 느꼈다. 뭐라도 보여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해서 연서강은 재빨리 말을 끝맺었다. ‘되었습니다.’ 그는 손에 든 초롱에다 불을 붙였다. ‘밤도 깊어졌고 더 이상 들을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드디어 초롱의 희미한 불빛이 살아났다. 그러니, 하고 말을 이으며 연서강은 초롱을 들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러니?”
연서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무강이 연서강의 말을 반복하며 되묻는다. 허나 연서강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초롱을 든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연무강이 그를 쫓아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연서강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왜 말을 하다 말지, 연서강?”
초롱의 불빛에 비쳐본 연무강은 연서강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 희미하고 여린 불빛에 비쳐진 그 얼굴을, .......연서강은 무어라고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냉담한 무표정이었다.
죽는다.
본능적으로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연서강은 초롱을 쥐고 몸을 돌렸다. 나중에 연무의에게 무어라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본채로, 어서 불빛이 만연한 저곳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아무나 붙잡고 살려 달라,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어둠이 만연한, 그 안에 유일하게 허락된 마지막 불빛이 꺼지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연무강에게.......!
그러나 연무강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도망가는 연서강의 팔을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억지로 몸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팔까지 붙잡았다. 연서강의 손에 들린 초롱이 땅 위로 떨어졌다. 훅, 하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연약한 촛불은 저절로 꺼지고 말았다. 그것을 연서강은 두려운 눈으로 응시했다.
촛불이 꺼진 후원은 다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야가 가린 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단단하게 붙들린 팔이 느끼는 아픔. 자신의 거친 숨소리. 등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땀방울.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목소리.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마치 축하라도 건네는 듯 상기된 목소리였다. 축하, 무엇을 축하하는 것일까. 연서강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무엇을?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바르작거렸지만 남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절망적인 완력 차에 연서강은 절망했다.
“네놈이 기연조를 어여삐 품고 있는 게 낭설이라고?”
연무강이 웃었다.
“그렇다 하면 어찌 연후정에 온 것이냐.”
“.......그것은.”
연서강의 말을 가로막으며 연무강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갑자기 관직을 추천해 달라 빈 것은 무어냐. 어째서 변방으로 갈 결심을 했지? 변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녹우당은 왜 간 것이며 본채에는 어떤 연유로 아주 돌아오겠다고 한 거지? 또.......”
“.......”
돌연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연서강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황후마마를 뵙고 싶은 거냐.”
낮고 은근한 목소리가 끈적거리며 그의 귀에 들러붙었다. 연서강은 숨을 멈추었다. 귓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 모든 게 기연조를 위한 게 아니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이지.......?”
“.......”
연무강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두 팔도 놓아주었지만 연서강은 방금과 달리 도망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연무강은 자신의 말을 변명으로 치부할 것이고, 지금 한 말을 토대로 연무의에게 이 일을 전할 것이다. 눈앞이 새까맸다. 이건 연후정을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느냐, 같은 그런 하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마냥 도망치더라도 내일 당장 눈앞에 드리운 이 어둠이 다시 강림할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당장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목덜미를 싸늘하게 지나치는 위기감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만 했다. 이곳을 피해봤자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버지, 아버지에게 말이 들어가는 것은 막아야.
오랜 시간 동안 신뢰를 쌓아 온 연무강의 말과 자신의 변명. 개중 연무의가 어느 것을 믿을지는 보지 않아도 쉬이 알 수 있었다.
“.......”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연서강의 시야에 문득 떨어진 초롱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아직 초롱을 불붙일 때 사용한 부싯돌을 가지고 있었다. 부싯돌, 로.......
죽일 수 있을까?
지나친 긴장으로 가슴속이 냉랭해졌다.
“연서강.”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로 있던 연서강은 상대의 부름에 움찔 몸을 떨었다. 죽일 수 있을까, 연무강을? 얼어붙은 시선으로 그는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보았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분 탓인지 눈앞의 연무강이 몹시도 크고 매섭게 보였다. 변방에서 자신이 살해한 그 소년병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그 소년은 야위고 초췌했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세고 강했다. 매 년 열리는 무술 대회에서도 우승을 다투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런 남자를 자신이, 죽을 수 있을까.
허나 안 될 말이다. 만일 여기서 그를 죽이는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숨길 수 있는가. 연서강. 자신이야 죽어 사라져도 별로 눈치 챌 이가 없다지만 그는 위사직을 임하고 있는 남자였다. 단 몇 시간만 사라져 있어도 금세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찾으러 다닐 것이다.
자신과 달리.
연서강의 심장이 더더욱 빨리 뛰었다.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된단 말인가?!
그때였다. 연무강이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연 건.
“.......내가 황후마마를 만나 뵙게 해주랴?”
“.......”
연서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라? 연서강이 동요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연무강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연서강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너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자신이 좋을 대로 환청이라도 들은 게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도와주랴?”
환청이 아닌 요물의 목소리였다.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서강이 ‘예?’하고 반문했다. 도와준다고? 돌연 연무강의 입에서 나온 달디 단 말을 연서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 와준다고? 방금까지 기연조를 위해서라느니, 배신을 할까 염려된다니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도와준다고? 무엇을? 내가 황후마마를 뵙는 것을?
왜?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인가......?’하는 마음도 있었다. 만약 연무강이 도와준다면 일은 몹시도 쉬이 풀릴 것이다. 그는 황후마마와의 독대를 청할 수 있을 만한 자였고, 그가 황후마마에게 귀띔을 해 준다면 연무의 몰래 그녀를 만나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성헌당에도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자였다.
“.......어째서?”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은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무강이라면 당장 집안을 위해서라며 자신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연무강이 손을 뻗었다. 흠칫 연서강은 뒤로 고개를 뺐지만 도망은 가지 못했다.
때문에 겨우, 연무강은 겨우 연서강에게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연무강은 차갑게 식은 연서강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소름이 오소소하게 돋은 목이, 그의 손바닥에 잡혔다. 엄지로 그는 천천히 연서강의 인후를 쓸었다.
볼록하게 나온 그것을 살짝 누르자, 연서강이 긴장했는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연무강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당장에라도 연서강을 낚아채서 어디라도 숨겨두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만질 수 있게 되자 더 욕심이 생겼다. 단순히 옆에 두고자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연무강은 알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비틀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자신의 손안에서 가만히 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도망갈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빨리. 그러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붙잡아야 했다.
연서강을.
자신 쪽으로.
어서.
그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서강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이 속삭였다.
“대신 널 탐하게 해다오.”
“.......!”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연서강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충격으로 그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듯 정지되었다. 연무강은 그의 어깨를 잡고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순간 몸을 굳혔지만 연서강은 반항하지 못하고 끌려왔다.
자.
연무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하는 것을 줄 터이니, 어서.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
연서가은 경직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형, 형님은 저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 탓에 자신이 지금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말을 듣자마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당연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과거에, 아니, 다가올 앞날에 자신을 죽였던 남자였다. 내내 자신을 미워해서 결국에는 목숨까지 앗은 남자였는데, 자신이 변방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남자였는데, 어째서?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것이었다. 연의진의 말.
-무강 형님이 대신 자신의 손을 물게 하셨어.
그때, 들었던 기괴한 예감이 지금 또 다시 들었다.
다시 되풀이 된 여름, 연무진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연의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연씨 문중이 제 나름대로는 정당한 이유로 기연조를 해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기연조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마냥 정의로운 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 여름이었다.
헌데 지금 아직도 멀었다, 하며 자신에게 이 여름의 무언가를 가르쳐주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은 채 눈앞의 남자가, 주변의 어둠이. 여름 특유의 끈적끈적한 공기가 연서강에게 무어라 속삭이고 있는 듯 했다.
기괴한 예감.
자신을 죽도록 괴롭혔던 연무강. 자신을 너무도 싫어해서 결국은 죽일 정도였던....... 그를 볼 때마다 매 번 자신을 향한 살의를 느꼈었다. 본채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얼마나 많은 윽박지름을 당했던가. 변방에서 죽었다가 돌아와도 그는 그대로였다. 자신의 멱살을 붙잡았고, 소리를 지르며....... 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목구멍이 말라갔다. 그 기괴한 예감을 몸을 털어 떨쳐내고 싶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단단히 잡고 있어서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다시 또,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연서강은 애써 웃음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 형님. 설마 절 좋아하십니까?”
눈앞에서 당장 자신을 치워버리고 싶어 했었던 그였다. 치우고 떨쳐내고 던지고 밟고, 그의 갖은 괴롭힘으로 인해 연서강은 마침내 집을 버리고 녹우당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었다. 원하는 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는데도 연무강의 박대와 냉대는 계속 되었다. 마침내는 자신을 기꺼이 없애버릴 정도로.
그런 그의 처사는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너무한 구석이 없잖아있었다. 그렇게도 자신이 거슬리고 짜증이 나냐고, 외친 적도 있었다. 자신이 무얼 하든 형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고도.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저는, 저는 사내입니다. 형님과 똑같은 사내자식이란 말입니다. 저를 도와주는 대가로 그런 걸 원한다고 하신 게 맞습니까? 술이라도 취하셨습니까? .......아니면 저를 괴롭히려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은 연신 말을 쏟아냈다. 당혹스럽고 무서웠다.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이 ‘진심인 것 같아.’ 무서웠다. 술에 취하기라도 했냐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상대의 눈에는 혼미한 기운도, 술에 취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은 마냥 새까맣고 깨끗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삼키려고 하는 듯한 눈이었다.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조롱이었으면 좋겠다.
“저를 괴롭히시려면, 차라리 같은 사내를 좋아하는 변태라면서 비웃으시는 게.”
“.......좋아한다고, 내가 너를?”
그때, 자신을 응시하던 연무강이 입을 열었다.
“.......좋아, 한다?”
그렇게 말하며 연무강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말과 웃음은 더 할 나위 없이 가볍고 냉정했지만, 안타깝게도 연서강이 그렇게 바란 ‘조롱’은 아니었다.
“좋아한다, 라. 나도 내가 네게서 무얼 원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네 눈에는 내가 네놈을 좋아하여 이런 말을 꺼내는 것으로 보이느냐?”
그 말에 연서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아니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아니요.’ 그러나 연무강은 연서강의 대답을 무시했다. 그는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연서강의 몸을 더 가까이 끌며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되었다.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다면 그 증거가 될까.”
“형님!”
연서강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억누르려는 듯 연무강이 속삭였다.
“혹시 모르지 않으냐. 내가 정말 너를 좋아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지도. 황후마마를 뵙지 않아도 괜찮으냐?”
“.......”
거짓말처럼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며 그는 연식 식은땀만 흘렸다. 공기가 더운 것 치고 그의 몸은 마치 추운 겨울에 내버려진 듯 달달 떨리고 있었다. ‘황후마마.’ 그렇다. 그랬다. 연서강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설움을 닮은 숨소리가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황후마마.
황후마마.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 ‘일’에 관여를 해야만 했다.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연조를 구할 수 있고, 가족들도 구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가 잘못되어 전부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자신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모든 것을 알아야만 했다.
무슨 짓이든 해서.......
“.......”
돌연 제태상의 말이 생각났다.
-.......자네, 아무리 원하는 게 있더라도 잘 판단해서 그 대가를 치르게나.
수안궁의 태상께서 신묘하다는 말이 있더니 과연 그랬다. 설마 이런 상황에 빠질 줄은 몰랐겠지만 그는 자신에게 매우 적절한 충고를 해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원하는 게 있더라도, 잘 판단해서. 그러나 다음 순간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잘 생각해도, 길이 없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 같다면?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겠느냐.”
연무강이 물었다.
어떻게 하겠냐고? 어떻게?
연서강의 머리는 한참도 전부터 제 기능을 안 한지가 오래였다. ‘황후마마.’하고 연서강이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연무강이 웃었다. ‘그래.’ 그가 대답했다.
“너만 내게로 온다면, 무얼 안 해줄까.”
해서 연서강은 연무강의 팔을 잡았다.
마침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너무도 어둡고 칙칙해서 연서강은 자신이 잡은 것이 사람인지, 마물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뜨거운 체온을 품은 손이 자신의 얼굴을 쓸고 만졌지만 그게 사람의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 *
자신이 기연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연서강은 이어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평생 외사랑만 하다 가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의 평범한 여인을 좋아하는 기연조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백할 용기가 없기도 했지만 만일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라도 하면 기연조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저절로 멀어질까, 연서강은 그것이 무서웠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속병을 앓으며 평생 기연조의 친구로서 그의 옆에 있는 편이 나았다. 그 외사랑이 언제쯤 끝나게 될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연서강은 기연조를 향해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원해봤자 허망하고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게 좋았다.
곧 어여쁜 여인이 그 옆자리에 서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혼담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소하게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냥 옆에 있기만을 바랐다.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그 바람이 깨지게 될 줄은 몰랐다.
“눈 감지 마라.”
차가운 목소리에 그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사방이 어두웠다. 나무와 풀 냄새는 여전했지만 그에 섞여 비린 냄새도 났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은 연서강은 흐린 얼굴을 해 보았다. 반사적으로 꾸물거리며 몸을 뒤로 뺐지만 등에 닿는 건 정자의 마룻바닥일 뿐이었다. 이미 누운 상황이라 무얼 더 물러날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벌써 세 번째 반복해서 깨닫고 있었다.
한여름의 문턱까지 왔을 터인데 여전히 정자 안은 싸늘하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연서강은 그저 정자의 천장, 새까만 소용돌이를 그리며 깊숙이 솟은 그 한 가운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추위에 덜덜 몸이 떨리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잡고 있는 어른 남자의 손이 낯설고 생소했다. 옷가지를 벗기고 남의 손이 이제까지 닿아본 적 없는 부위에 누군가가 닿는 게 두려웠다. 태어나서 연서강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경우’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남자의 손을 붙잡고 그만 하라고 힘을 주기가 수십 차례였다. 자신의 몸이 상대방에게 스칠 때마다 무언가에 맞은 듯 몸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때마다 달래고 어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부드러워서, 연서강은 그것이 자신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는 남자의 것이 맞기나 한 것인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었다. 남자는 다정하게 연서강을 협박했다.
“부친께서도 알게 되시면 좋겠구나.”
결코 긴 말이 아닌데도 고작 그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연서강은 바로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남자를 밀어내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도 않았지만, 연서강은 벌써 그 일이 일어난 듯 얼굴이 온통 창백해져 있었다. 남자의 차가운 손가락이 옷이 벗겨져 나신이 된 연서강의 피부 위를 일부러 힘을 줘 눌렀다. 얼마나 빨리 맥박이 뛰고 있는지, 또 살은 얼마나 따뜻한지 느끼려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남자의 손은 이내 연서강의 비부에까지 와 닿았다. 한 차례 허벅지를 쓸고 남자가 낮게 웃었다. 남에게 그런 부분까지 보이게 될 줄은 연서강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것도 형제인 자였던 사람에게, 더더군다나 자신을 툭하면 괴롭히고 못 살게 굴었던 남자에게 보이게 될 줄이야.
하아, 하아, 귓가에 울리는 거친 숨소리가 현재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연서강은 남자가 자신의 허벅지를 잡고 다리를 벌리려고 하는 것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싫었다.
“힘주지 마라, 연서강.”
그러자 바로 질시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저 목소리를 어기면 또 예의 상냥한 목소리의 위협이 날아올 것을 알았기에 연서강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에서 힘을 뺐다. 연서강이 다리에서 힘을 빼자 남자가 아주 쉽사리 자신의 다리를 벌렸다. 무어라 경고의 말도 없이 엉덩이 사이로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흠칫 연서강은 몸을 굳혔다. 다문 이 사이로 절로 싫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 그것을 생각하며 참았다.
그러나 손가락이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뜨겁고 굵은 것이 닿았을 때는 그도 흠칫 놀라 상체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헉, 헉, 숨소리를 내며 연서강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를 붙잡았다. 이가 저절로 부딪혀 딱딱 소리가 났다.
무서웠다. 지독하게 무서웠다. 남자를 붙잡은 연서강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형, 형님. 형님. 형님.”
처음 겪는 종류의 공포로 연서강은 이성을 잃고 상대 남자를 불렀다. 그는 연의진도, 기연조도 아니건만, 이성을 잃은 연서강은 자신이 열심히 애원하면 혹시나 남자가 자신의 애원을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착각을 했다.
“.......”
남자가 그런 연서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곧 남자가 냉소를 흘리며 허벅지를 누르고 있는 손을 떼어 그것으로 연서강의 얼굴을 쓸었다. 그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비단이라도 되는 듯 매만지고 턱을 잡았다. 그리고 그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괜찮다. 내가 널 죽이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 목소리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한 번 더, 달달 떨리고 있는 연서강의 아랫입술을 남자가 깨물었다. 따끔한 아픔에 연서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을 때, 남자가 삽입을 시도했다.
“아-악!”
아팠다. 긴장되어 꼼짝도 않고 굳어 있는 곳을 억지로 뜨거운 살이 갈라놓았다. 단단하게 틀어박힌 성기의 움직임이 그리 성급하지도 않은데,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파서 연서강은 자신의 위로 드리워진 남자의 몸과 옷을 잡았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아, 아, 아, 아파. 아파요. 아픕니다.”
그러나 붙잡고 애원해도 남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꾸물거리며 더 깊숙이 연서강의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원하는 듯 했다. 남자는 자신의 위에서 단단하게 박혀 움직이지 않은 채로 오히려 더 허리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 고통을 벗어나고자 몸을 비틀었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연서강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누워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형님, 혀, 형님, 아파요, 아픕니다. 아파, 아파요, 아파, 아파.”
마침내 그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자의 얼굴을 찾았다. 들어 올린 손끝에 남자의 입술이 닿았을 때, 연서강은 그만 설움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아파. 그, 그만. 그만. 형님, 제발. 제발, 그만, 형님.”
“.......그래, 서강아.”
자신의 얼굴에 만지는 그 손끝이 사랑스럽다는 듯 남자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만 더 참으렴.”
하고 말한 그가 연서강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 덕분에 빡빡하게 들어차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의 성기가 몸무게 때문에 더더욱 깊숙하게 들어왔다. 단숨에 안까지 들어와 버린 사내의 성기에 연서강이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 소리를 죽였다.
“아, 흑! 으흐흑, 흣.”
그리고 그는 정신없이 울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황망해 지금 자신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몸이 자신을 아프게 하는 남자의 것이라는 것도 연서강은 깨닫지 못했다. 어서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프다. 그만, 형님, 제발. 그 말만을 계속 울음소리에 섞여 내보내며 그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읏, 윽.”
남자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연서강은 그것을 견뎌냈다.
행위가 끝난 다음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지독한 상실감뿐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서강은 제 옷가지를 챙겼다.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을 정신머리도 없었다. 빨리 옷을 추슬러 대충 입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잘 한 짓인가? 이래도 괜찮은가?
그 의문은 너무도 쉽게 그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깨트렸다. 연서강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다 금방 푹 잘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빨리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
그런 그의 등 뒤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 연서강의 등이 떨렸다. 그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연무강을 돌아보았다.
“좋아한다, 라. 좋은 것 같구나.”
“.......”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말에 연서강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울며 소리를 지른 덕에 목이 꺼끌하고 눈이 뻑뻑했다. 좋은 것 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서 연서강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무어라 말을 할 힘조차 없었다.
연무강이 웃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너를 위해 뭘 못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말해보아라. 뭘 원하는지.”
저 말이 과연 진심일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연무강은 자신을 보고 ‘배신’할 셈이냐고 묻지 않았던가. 그제야 얼어붙어 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에게 무얼 원하냐고 물어보는 것은 즉, 그 자신도 연씨 문중을 배신하겠다는 말이 되지 않나. 저 큰 형님이?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연무강이 진심으로 저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자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한 발을 내딛고 말았으니 다음 발을 관성적으로 내디딜 뿐이었다, 연서강은.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연후정 주변은 여전히 지독스레 어두워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
아침이 되자, 방으로 연의진이 찾아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방안 풍경에 놀라고,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연서강을 보고 또 놀랐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그가 물었지만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연의진은 의아하게 생각할지언정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래.’하고 그는 심심하게 대답한 뒤 유일하게 멀쩡한 탁자 위에 자신이 가져온 짐들을 풀었다. 연서강에게 먹일 약들이었다.
따뜻한 물을 잔에 따르고 연의진은 종이에 포장된 약을 연서강에게 주었다. 연서강이 아무 말 없이 약만 받아들고 침묵했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연의진이 문득 손을 올려 연서강의 이마에 대었다.
“그!”
순간, 연서강이 확 뒤로 물러났다.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더 강하게 잡아당기며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린 그의 모습에 오히려 연의진이 더 놀랐다. ‘무어냐?’하고 연의진이 그에게 물었다. 입술을 깨문 채 연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대답이 짧다. 또 목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열이 높아. 감기에 걸린 것 아니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연서강의 상태가 연의진은 퍽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벌벌 떨고 있기까지 했다. 흡사 지난 밤 지옥의 문턱에 갔다 온 사람처럼 심하게 떨며 모든 걸 경계하는 그의 모습에 연의진은 침묵했다. 연유를 알 수 없다. 허나 더 캐어물을 수가 없었다.
연무강의 말이 맞았다.
연의진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갑자기 무어라고 연서가의 일에 참견할까. 몇 년 동안이나 방관한 주제에 새삼 관심을 가지고 묻는 것도 웃겼다. 연의진은 착잡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궐로 아주 돌아갈 생각이다.”
그 말에 연서강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가신다고요, 아주?’
“그래. 영의전 일이 많아, 언제까지 가족을 핑계로 놀 수는 없는 일이니 이만 돌아가 봐야지. 네 몸도 다 나아가고.......”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서강은 다만 연의진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의진은 이어 말을 꺼냈다.
“내가 며칠 약을 한꺼번에 가져왔다. 그러니 빠짐없이 먹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혀, 형님!”
그때였다. 연서강이 그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연의진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연서강이 흠칫 놀란다.
“서강아?”
“아, 아닙니다. 아니요. 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연서강이 몸을 뒤로 물렀다. 연의진은 그 모습에 다시 침묵했다. 이대로 가던 길을 가도 될까, 만일 그런다면 이번에는 연서강이 자신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연무강에게서 들은 말이 연의진의 뇌리를 스쳤다. 관심을 갖지 마라. 그러나 연의진은 그와 동시에 방금 연서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붙잡던 모습을 떠올렸다.
연의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제 품속에서 동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연서강의 손에 쥐어주었다. 연서강이 동패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 잠시 못 본 사이에 팍 상한 듯한 연서강의 얼굴을 보며 연의진이 말했다.
“영의전의 출입패다. 영의전에 와봤자 약초나, 재미없는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연의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이어 말을 꺼냈다.
“내키면 놀러 오렴.”
그에 연서강이 입을 열며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아서 연의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서강은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외에 아무도 없는 방안은 가라앉은 듯이 조용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서강은 이불 위에 놓인 동패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불현 듯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또, 멀리 두었던 연서령의 편지도 기억났다.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
어느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밤, 연서강의 말을 들은 연무강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었다.
-그러면 나중에 또 보자꾸나.
그 말에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이 그를 보았다. 연무강이 차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걸로 아주 끝인 줄 알았더냐?
“.......”
연서강은 동패를 꽉 쥐었다. 너무 힘을 줘 하얗게 변한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툭 부러질 것만 같았다. 연서강은 침대 위에 엎드려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