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른다.”
딱 잘라 연의진은 대답했다.
“내가 태의령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건 맞으나, 한 번도 황후마마를 뵌 적은 없으니, 황후마마를 진맥하는 의원은 따로 있다. 이전에 부친께서 나를 그 자리에 추천해주시기도 했고, 황후마마 또한 다른 사람보다는 친족이 마음이 놓인다 말씀은 하셨지만 나는 거기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연의진답지 않게 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서강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 딱 잘라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연의진은 아무것도 모른다. 또한 황후마마를 뵌 적도 없다. 또.
“해서 황후마마를 만나 뵙게 해 달라 내게 부탁해도 소용이 없어.”
소용이 없다.
연서강은 허리를 숙여 ‘곤란한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하고 말했다. 사실 그도 연의진에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척 봐도 정세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고, 정치와 얽히는 것을 피할 수만 있다면 가급적 멀리 피하고 싶어 했었다. 그러니 자신이 어찌 부탁드린다고 해서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좀 더 그와 자신이 친밀했으면 가능했을까......., 그러나 곧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서강아. 허튼 짓 생각 말고 너도 멀찍이 떨어지는 게 좋을 것이다. 거기는 진흙탕이야. 휘말리면 다 더러워진다.”
그래도 그는 이런 말을 하며 만류했을 게 분명하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말에 연서강은 연의진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형님.’하고 대답은 했지만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연의진도 눈치 챘는지 그가 미간을 좁힌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연의진이 두 팔을 걷고 본격적으로 말릴 정도로 그와 연서강은 충분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가족’이긴 했으나 그래봤자 ‘타인’보다 조금 나은 관계일 뿐이었다. 요 근래 어깨의 상처 때문에 비약적으로 친밀해졌다고 하나 그것은 예전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와 연의진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대화를 트고 지내는 지인 정도에 불과했다. 연의진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 연서강의 어깨가 완치되면 연의진은 궐로 돌아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둘은 또 예전처럼 서먹한 관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연서강은 돌연 먹먹해졌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인가. 어깨를 치료하면서 연의진과 나눴던 무미건조한 대화까지도 새삼스럽게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원래대로.
“.......”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연의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연서강이 황후마마를 만나보고 싶다는 몹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연의진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그 얼굴이 단지 꺼리는 화제로 대화를 시도한 연서강이 못마땅해서 일지도 모르나, 연서강은 자신을 걱정해서 연의진이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소박하게 기원하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형님이 의술에 뜻을 두신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앞의 형님들은 물론이고, 의향 누님까지 무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저는 의진 형님도 그럴 거라 무의식중에 생각했었거든요.”
“나는 원래 무관이 되는 걸 꺼려했었다.......”
간단한 대답에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이번에는 연의진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형제들에게 따돌림 당해 그런 당연한 이야기도 미처 공유하지 못한 연서강이었던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해서.’하고 연서강이 이어 입을 열었다.
“의진 형님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생각을 한 적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너무도 무서워서 무예도, 검술도 익히기 싫다고 이야기도 못 꺼냈었거든요. 하기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에만 급급해서 다른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숨어서 몰래 한 거였다. 시험도 아버님 모르게 쳤었고, 결과가 나온 뒤 아버님께 통보한 것이다. 또 원래 무관들이 몸을 험하게 다루니 다치는 일이 많지 않으냐. 별달리 반대할 이유 또한 없으셨을 것이다.”
연의진의 말에 연서강이 ‘그러시군요.’하고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잠깐 둘 사이의 말이 끊겼다 석반(夕飯) 후의 집은 매우 조용했다. 활활 타오르는 호롱불 소리마저도 들려올 듯 했다. 밖에서 수다를 떠는 하인들 몇이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또, 어느 방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떨어뜨렸는지 와르륵 단단한 것이 쏟아지는 소리도. 하인들이 머물고 있는 문간채야 아직 할 일이 많아 움직임이 분주하겠지만, 본채는 이제 서서히 고요한 밤이 시간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서령이도 참 잘 싸우더군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연서강이었다. ‘그래.’하고 묵묵히 연의진이 대답했다.
“그 아이가 싸우는 모습은 한 마리의 가물치가 날뛰는 것과 같지.”
심각한 얼굴로 하는 말이 그거다. 연서강은 절로 땅바닥에서 펄떡이는 가물치가 떠올라 가볍게 웃고 말았다. 참으로 몸을 잘 놀린다, 감탄을 했었는데 연의진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의 날랜 움직임이 한 마리의 펄떡이는 가물치처럼도 느껴졌다.
“무진 형님은 집안이 화평하십니까?”
“형님이 밖을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만 뺀다면.”
여전히 연의진의 대답은 간단했다.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아마 연의진이 아는 전부일 것이다. 일로 바쁜 연의진은 본채로 돌아오는 날이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집안일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연서강은 ‘그렇습니까.’하고 중얼거렸다.
“.......”
그리고 그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부터 꺼낼 말 때문이었다.
“.......형님께선, 기연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서강이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지 연의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연서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말씀은, 어쩌면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습니까. 형님께서는 기씨 문중을 어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연서강이 하는 마지막 확인 작업이었다. 정말 끈질기구나, 연서강. 그런 생각이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십년 가까이 지속된 믿음이 자꾸 자신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혹여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필요했다. 확실하게 판단 내려줄 만한 무언가가.
“.......그렇구나. 기연조.”
연의진이 그리 중얼거리며 시선을 모로 흘렸다.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연조.’하고 한 번 더 그가 무심하게 되뇐다.
“알고 계시는 것만이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자꾸만 말을 아끼려는 연의진에게 연서강이 담담하게 청을 넣었다. 연의진 또한 연서강이 기연조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꾸 말하길 주저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 연서강이 상처받을 것이라고 연의진은 생각하는 듯 했다. 해서 연서강은 자신이 먼저 밝히기로 했다.
“기연조가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제게 접근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
그 말에 연의진이 입을 다물고 연서강을 보았다. 곧 그가 미간을 좁히며 희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전혀 몰랐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는 연의진의 얼굴이 충격이라도 받은 듯 어리벙벙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가 다시 한 번, ‘그랬더냐?’하고 묻는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딱딱한 목소리였다.
이걸로 연서강은 확실하게 결론을 내렸다.
연의진은 그 ‘겨울’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깨달은 사실이 너무도 기뻐서 연서강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겨울’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의 반응으로 보건데 만약 연의진이 ‘겨울’의 일을 알게 되면 적어도 부친이 연서강에게 너무 했다고는 생각 해 줄 것만 같았다. 그게 너무도 기뻤다.
생각은 계속 이어져 나갔다. 아마 의향 누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향 누님은 그때까지 변방에 붙잡혀 있었으니, ‘겨울’에 일어난 일을 아예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 또한 ‘겨울’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것이다.
허면 연서령은 어떠한가. 연서령은, 서령이는 .......어깨를 크게 다쳐 요양을 왔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요양을 온 시기가 가을이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겨울’의 일에 개입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연서령의 성격이나 집안에서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그녀도 연의진처럼 아예 일 자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연서령은 자신이 연우비의 자식이라는 것조차도 알고 있지 못했다.
“.......기연조는.”
연의진이 혼란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서강은 그런 연의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연서강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벌써 셋.
적어도 그 세 명은 자신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가족 전부가 자신을 아주 버리기로 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자마자 돌연 연서강은 먹먹해졌다. 가슴이 둔하게 울리며 고통을 진하게 남겼다.
연서강은 연의진을 바라보았다. 연의진은 여전히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연서강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충분히 생각하고 내놓은 말을 듣고 싶었다. 이 집안에서 그래도 연의진이 그나마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단지 연의진의 성격일 뿐이고 자신이 환자라 잘 대해준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씨 문중은.”
한참의 시간을 끈 뒤 연의진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연서강은 여전히 말없이 연의진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의진이 입 안에 쓴 것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씨 문중은, 아무것도 모르는 황상에게 들러붙어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들었다.”
“.......”
“기연조에, 대한 것은 .......나도 모른다.”
그 마지막 말은 연서강에 대한 연의진의 배려였다. 연의진이 일하고 있는 곳에서 기씨 문중과 관련하여 기연조에 대해서 어떤 말이 오갔을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그러시군요.’하고 방금의 가족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연서강은 건조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역시 ‘가족’을 희생시킬 수 없다......., 라고.
* *
사면초가(四面楚歌).
오리무중(五里霧中).
연서강의 본래 목적은 그러했다. 배신.
기연조를 죽이는 길을 선택할 정도로 연씨 문중이 다급해졌었다는 것은, 기연조가 연씨 문중(혹은 황후마마)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기연조가 조정에 나가 그 ‘무언가’에 대해 황제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연씨 문중(혹은 황후마마)이 완전히 사멸할 지경에 이르게 되는 그런 치명적인 약점.
그러니 연무의가 핏줄인 자신을 죽이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연조를 없앨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일 것이다. 연씨 문중 전체, 그리고 황후마마를 구할 수만 있다면 부친인 연무의는 가족 중 한 명 정도는 기꺼이 희생시킬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서강은 기연조가 앞으로 쥐게 될 ‘무언가’가 연씨 문중에서 꾸미는 ‘일’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일’이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연서강은 당시 녹우당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녹우당에 틀어박혀 있었던 자신이라도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났다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집에서 계획한 일, 경성 내에서 생긴 일이다. 저잣거리에서 일어난 소란도 연서강은 모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가을, 겨울은 몹시도 조용하게 지나갔었다. 심지어 기연조조차도. 가을에 열리는 수확제 준비로 바빠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기연조에게 큰일이 생겼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일’ 자체가 불발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을이 지나간 것이리라. 때문에 연씨 문중에 아무런 위해도 없었고, 기씨 문중에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기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왜 불발이 되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들켰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연서강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이 ‘일’을 알아차리면 안 되는 사람. 혹은 이 ‘일’이 터지면 불이익이 갈 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에게 들켰기에 ‘일’이 급작스럽게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
연서강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기연조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기연조, 기연조. 기연조가 그 ‘일’을 알아차려 ‘증거’를 잡은 것이라면? 이마에 식은땀이 절로 맺혔다. 아아. 생각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뻗쳐나갔다. 허나 이 추리가 맞는 것 같아서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황후마마를 위한 것이다.
연무진의 말이 귀에 아른거린다. 황후마마.
연무의가 계획한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황후마마를 위한 일이고......., 황후마마를 위한 것이라면.
-장한궁 마마의,
드문드문 들리는 연무진의 말에 기연조의 목소리가 섞였다.
-아마 내년에 장한궁 마마 소생의 황자께서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실 걸세.
황후마마를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내년에 일어날 일을 막기 위함일 터.......!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이를 사려 물었다. 그렇구나. 기연조가 쥔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잘만 이용한다면 연씨 문중과 황후마마를 동시에 없애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임은 틀림이 없었다. 아마도 아버님께서는 ‘장한궁 비씨’나 그녀 소생의 황자마마를.
“.......”
장한궁 비씨를 몹시도 귀애하시는 황제 폐하이시니 그런 ‘일’을 꾸몄다는 게 발각되기만 한다면 확실히 ‘끝’이었다.
연씨 문중도, 황후마마도.
“.......”
사실은 연서강은 그럴 작정이었다. 기연조가 연씨 문중에서 꾸미는 어떤 ‘일’로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그 ‘일’에 어떻게든 자신 또한 관여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일’인지 알아낸 후에는-.
배신.
기연조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그 ‘일’을 파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해서 기연조에게, 혹은 믿을 수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 ‘일’에 대해서 밝힐 생각이었다. 그게 원래의 목적이었다.
배신.
가족들 따위야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나아가 기연조가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때때로 약해지려는 마음을, 저 사람들은 자신을 이용하고 죽인 사람들이다. 악한 일을 행하려고 저 선한 연조마저 죽인 사람들이다 그렇게 채찍질하며 변방을 다녀왔었다. 연무진에게 접근을 하고, 미행을 했었다.
헌데.
“.......”
연서강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다시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직전까지 하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다. 그것은, ‘겨울’의 기억이었다. 차갑게 내리던 백설(白雪) 아래로 차가운 주검이 되어 쓰러졌었던 자신에 대한 생각이었다. 또 자신을 구하러 와준 목숨을 잃은 기연조에 대한 생각이었다.
기연조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공명정대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온 그 ‘사실’마저도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눈 내리는 날,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까지 걸고 왔었다. 그리고 연씨 문중이 파 놓은 위험에 빠졌고 또 죽음을 당했었다. 그리고 죽기 전의 가을까지 기연조는 얼마나 자신을 ‘가족’ 대신 아껴주고 상냥하게 대해주었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자신이 그를 ‘연모할 수’도 없었을 것이리라.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죽기 전의 그는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 그토록 배척당하고 따돌림 당하면서도 자신이 폐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그였다. 그는 은인이었다. 연모하는 이였다. 자신이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곁에 있고 싶어 집착한 이가 바로 그이였다.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의지하고, 사랑한 이였다.
“.......죽게 할 수 없어.”
연서강은 가만히 중얼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또 생각을 달리해 보았다. 그러면 ‘가족’들은 어떠한가. 기연조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정녕 배신할 수 있는가. ‘가족’들 모두를 버릴 수 있는가, 자신은.
생각하자마자 연서가의 입술을 비집고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그럴 수 없다. 못하겠다.
자신이 ‘배신’하게 되면 가족들 모두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연무진도, 연의진도, 연의향도, 연서령도 마찬가지다. 기연조가 하는 일이 당연히 옳다는 대의명분까지 사라진 상태였다. 단지 기연조만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 자신이 이제야 인정을 받고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가족들도 있었다. 그런데.
허나 그렇다면 기연조는?
가족들은?
연서강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툭, 흘러 떨어졌다. 가슴 속은 뜨거운 반면 사지는 긴장으로 차가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란 익숙하고도 지독한 병 같은 의문이 질리지도 않고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양분된 생각들이 치열하게 싸워 정신이 혼미했다.
당장이레도 미칠 것 같았다.
“.......”
그러나 다음 순간, 연서강은 이를 악물고 툭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심장의 고통을 참아냈다. 답답하고 황망하기 그지없지만 마냥 이렇게 있는 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쿵쿵 퀴어 오르는 것 같은 맥박을 따라 머릿속의 생각들도 새하얗게 점멸되어 튀어 올랐으나, 어떻게든 차분히 생각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끝없는 의문을 연서강은 얼굴을 찡그리며 일시에 지웠다. 아니, 생각을 또 달리 해보자. 연서강은 앞서 죽 사고했었던 ‘일’로 다시 돌아갔다. 일단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연서강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죽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연조. 그래, 기연조가 연씨 문중이 벌이려던 ‘일’에 대한 ‘증거’를 잡아서 ‘일’ 자체가 무산되었다고....... 자신은 그렇게 추리했었다. 그렇다면 일단, 기연조가 연씨 문중이 벌이려는 그 ‘일’에 대한 ‘증거’를 잡았다고 치자.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바로 그 ‘증거’를 황제폐하께 아뢰지 않았을까.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기연조는 우연히 ‘일’에 대한 증거를 잡았을 것이고, 그 때문에 ‘일’ 자체가 무산이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겨울’이 되기 한참 전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기연조가 죽은 것은 겨울의 끄트머리, 봄의 시작이었다.
“.......”
순간, 잠깐 다른 생각이 그의 상념에 끼어들었다. 기연조가 잡은 ‘증거’가 폐하께 들어가면 연씨 문중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허면 그 화를 연씨 문중의 일원인 자신 또한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연조는, ........‘내’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그만!”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의심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쾅. 주먹으로 탁자 위를 내려쳤다. 손이 욱신욱신 아팠지만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이 날아갔다. 하지 마. 더 이상의 의심과 삿된 새앆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생각을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체된 생각은 의심과 망령스러움만 더해져 비틀리게 될 뿐이다.
기연조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겨울’에 자신을 구하러 오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문득 드는 생각에 연서강은 숨을 멈췄다.
“구하러 왔다고?”
그는 멍청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그제야 했다.
‘구하러 왔다.’
그가 누구에게 속았든 간에,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오는데 기연조가 그 ‘증거’를 품에 안고 올 리는 없었다. 연서강이 아는 기연조는 그랬다. 아니, 딱히 기연조가 아니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기연조가 아닌 자신이었더라도 그런 중요한 ‘증거’가 있다면 그것을 품고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맡겼거나, 다른 장소에 숨겼을 게 분명했다.
.......헌데도 연무강은 ‘그’를 죽였다. 더 이상 ‘말 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죽여 버렸단 말이다. ‘증거’를 얻는 데에 하등 관심을 두지 않고 기연조를 ‘죽이는 데에’ 정성을 기울였다고. 그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데에.
“.......물건이 아니구나.”
증거는 물증(物證), 서증(書證), 인증(人證), 정황 증거 등 다양했다. 보통 증거라고 하면 물증이나 서증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잠시 길을 잃고 말았었다. 하지만 증거는, 물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증거 또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왜, 그 ‘겨울’에?
기연조를 죽이려고 했으면 ‘일’ 자체가 무산된 바로 그 다음에 죽여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왜 ‘겨울’의 끄트머리까지 그를 살려둔 거지? 허나 그것은 연서강만의 생각일지도 몰랐다. ‘일’이 언제 일어날 예정이고, 언제 무산이 된 것인지조차 연서강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의문은 가져봤자 헛일인 의문일 수도 있었다.
‘일’자체가 무산 된 게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늦어졌다.......”
연서강은 고뇌를 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떨어뜨렸던 머리를 다시 들었다. 무언가 덜컥 생각났다.
“그래......., 그 ‘일’자체가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랬기에 ‘겨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에 확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일. 중간에 그만두기만 해도 ‘실패’로 돌아가는 일. 장한궁 비씨와 그녀가 낳은 황자. 내년에 황태자를 다시 책봉해야 한다고 폐하께 고할 사람들. 황후마마를 위하여 그것을 막고자 한다는 부친 연무의.
불현듯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황태후 마마와 황귀비 기씨의 일화. 또, 황귀비 기씨가 죽은 후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하신 전 황제. 남겨진 황귀비 마마의 아이. 섭정.
황태후마마가 그 둘을 독살(毒殺)했다는 소문.
“.......”
기분 탓일까.
연서강은 벌려놓은 자신의 생각들이 너무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귀비 마마. 황자. 독살. 그리고 기연조. 물증이 아닌 증거. 그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불안한 것은 비단 그 ‘일’이 무엇인지 대충의 형태가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한 발자국.
그래, 딱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잡힐 듯도 했는데 가물가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해라, 계속 생각해. 연서강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톱 위로 차가운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어째서 기연조‘만은’ 꼭 죽일 필요가 있었다.
“.......기연조가, 증거인가?”
괴상한 그림이 완성되려고 하고 있었다. 춘설(春雪)이 내리는 밤이 그려진 그림으로 그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죽어 있었다. 청매화와 적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사람이 죽어 있는 겨울밤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 얽힌 사정.
“.......!”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연서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방을 뛰쳐나갔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한 시가 바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부친은 아직 잠자리에 드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헌당 불이 형형하게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한 연서강은 순간 안심했다. 연서강은 성헌당 앞을 지키고 있는 하인에게 말해 부친께 자신이 온 걸 알렸다. 들어오라는 연무의의 목소리에 연서강은 긴장했다.
문이 열리고 연서강은 그 안에 있는 연무의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더냐? 이 밤중에.”
연무의는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했다. 연서강은 바짝바짝 마르는 목구멍으로 침을 한 번 밀어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
연무의가 연서강이 한 말을 따라 하더니 피식,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서강이 네가 그런 말을 꺼내면 조금 두려워 지더구나.”
그러나 말과 달리 그렇게 말하는 연무의의 목소리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러는 아버님께서는 제가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늘 기대하시는 눈으로 절 보십니다, 그렇게 대답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부친에 대한 반발감보다는 이 일이 우선이었다.
“.......”
그러나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연서강은, 다음 순간 갑자기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의 혀와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숨마저 동결이 되어버린 듯 했다.
“왜 그러느냐?”
당장 무어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던 아이가 돌연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연무의가 이상하게 생각했던지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연서강은 연무의의 재촉에도 여전히 벙어리처럼 아무 말을 하지도 못했다. 생각을 너무 했던 탓인지, 정교하게 쌓아올렸던 추측의 탑이 그 한 순간 번뜩인 ‘예지’로 와르륵 무너져 버렸다. 연무의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아버, 님.”
이대로 있다간 괜한 의심을 받는 게 아닌가 염려되어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하고 연무의가 대답한다. 허나 그 이후로도 연서강의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연서강은 혼란스러웠다. 그 춘설이 내리던 날까지 대체 ‘조용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일까. 기연조도 조용했고, 연씨 문중도 조용했으며, 본채도 조용했었다. 물론 궐 안도 조용했다. 허나 궐 안은 성벽과 수많은 사람으로 가려져 있으니, 조용했다기보다는 정확히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 밖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말 쪽이 맞았다. 어쩌면 가을, 겨울 성안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기연조.”
간신히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기연조가.”
연서강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 기연조가 그렇게 ‘아무 준비’없이 홍월정 근처 숲으로 올 수 있었을까. 홍월정이 아무리 버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 주변에는 녹우당이 있고 연무의의 자택이 있었다. 연무의와 황후마마가 어떤 ‘일’을 벌였고, 그 ‘일’에 대한 증거를 기연조가 잡았다면 그가 그리 무턱대고 올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적어도 무어라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말하고, 증명하고 왔을 것이다. 연무의의 자택이 곁에 있었으니 이건 함정이다, 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함정, 함정인 줄 기연조가 과연 알았을까, .......그랬을까.
목소리가 떨렸다. 연서강의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기연조가, 어떻단 말이더냐?”
연무의가 날카롭게 추궁했다. 본래 연무의는 자식을 대함에 있어 인내심을 길게 발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혀를 쯧쯧 차는 부친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간신히 숨을 삼켰다.
기연조를 꼭 죽여야 했다.
기연조는 함정인 줄 몰랐다.
.......기연조만을 꼭 죽였어야 했다.
‘조용히’ 쌓여져만 갔던 춘설. ‘조용히’ 흘러만 갔던 집안과 궐, 저잣거리 .......그리고 기씨 문중.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기연조를, 앞으로 만나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무어라?’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부친이 보였다. 연서강은 다시 반복해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기연조를 더 만나서 좋을 것 하나 없는데, 제가 그를 만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의심을 사더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연서강은 제 마른 입술을 손으로 살짝 쓸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본채로, 완전히 돌아오겠습니다.”
함정.
그것은 누구를 위해 누가 놓은 함정인가.
그것은 바로 .......둘 다였다.
기연조가 말하지 않았나. ‘아마 내년에 장한궁 마마 소생의 황자께서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실 걸세.’ 그 말이 자신에게서 누구의 귀로 들어갈지 뻔할 뻔자 아닌가. 바로 연무의였다. 아무리 녹우당이라고 해도 연무의의 자택에 속한 곳이었다. 녹우당은 연씨 문중의 안중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리 말을 했었다.
어째서 기연조가 그 말을 대뜸 자신에게 했는지 연서강은 깨달았다. 기연조는 그가 당연히 자신의 말을 연무의에게 전하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말을 연무의에게 전하면 분명 연무의는 화를 내며 계획했던 ‘일’을 서둘러 진행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진행되고 있는 와중일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기연조의 말이 ‘일’을 속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거였다. 기연조는 이미 ‘일’을 알고 있었다.......
함정.
누군가 먼저 연씨 문중을 ‘배신’한 사람이 있다.
연서강은 그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제 부친을 바라보았다. 연무의는 여전히 연서강을 보고 있었다. 그 면전에다 연서강은 차마 ‘아버님, 누군가 배신을 했습니다. 계획하고 계신 일은 중단하십시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이제 앞으로 다가올 나날에서 온 거라 그렇기도 했다.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근거도 미약하고, 더군다나 자신은 기연조와 며칠 전까지도 친근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부친이 믿어주면 다행이지만, 그보다는 기연조를 염려해서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간신히 돌아온 본채에서 자신은 또 잔인하게 내쳐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진실’이라 부친이 믿어줘도 곤란했다. 현재 기연조는 ‘일’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말은 또 다시 그 ‘겨울’을 재현하게 만들 것이다.
기연조가, 함정에 빠져 죽는다.
가을과 겨울에 걸쳐 연서강은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연조가 황후마마를 몰락하게 만들기 위해 함정을 팠고, 그 함정에 연씨 문중이 걸려들었다. 도중에 연씨 문중은 자신들을 ‘배신’한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기연조가 이 함정을 파 놓은 것을 또 알게 된 것이다.
연무의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연무강이 생각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연씨 문중은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척 ‘일’을 해 나갔고, 그 도중에 기연조를 함정에 빠트려 처치했다. ‘일’이 중단되었는지 계속 되었는지는 연서강도 알 수 없다.
자신은 그때 죽어서 ‘되돌아오고’ 말았기에.
“.......녹우당을 나오겠습니다.”
연무의가 건조한 눈으로 연서강을 응시했다. 그 말속에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입을 열어 허락했다.
“마음대로 하렴.”
“감사합니다.......”
과연 어느 것이 우선인가. 가족인가, 기연조인가.
아직도 연서강은 결정할 수 없었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이 ‘겨울’을 마쳤을 때, 기연조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가족들-연의향과 연의진, 마지막으로 연서령이 무사하기를.
양쪽이 모두 살 수 있기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에 자신이 개입해야만 했다. ‘함정’이라 이야기 해주면 기연조가 죽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연씨 문중이 위험해졌다. 최악의 경우로는 그 ‘겨울’을 다시금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든 ‘일’에 개입해야만 했다.
그래야 둘 다 무사할 수 있었다.
* *
“황후마마를 말입니까.”
자신의 질문에 연무의가 ‘그렇다.’하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연서강이 갑자기 ‘황후마마’까지 생각이 튄 계기는 자신도 알 것 같았다. 다름 아닌 자신이 연무진에게 명령했던 것이니 당연했다. 허나 무턱대고 연무의에게 ‘황후마마’를 만나 뵙고 싶다고 말한 건 의외였다. 어째서 그런 부탁을 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아버님께서는 무어라 대답해주셨습니까?”
연무강의 물음에 연무의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생뚱맞다고 생각한 것은 부친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요 근래에 들어 연서강이 목적도 알 수 없는 부탁을 참으로 많이 해오고 있어 연무의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그런 부친에게 연무강이 이어서 물었다.
“섦, 마마를 배알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건 안 되지.”
방금까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 질문에 대해서는 연무의가 딱 잘라 대답했다. 연무의가 딱딱한 얼굴로 연무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그리 부탁하는데, 내가 들어줄 리가 없지 않으냐.”
그리고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고놈이 이유라도 조금 말해주었으면 모를까.......”
거짓말이다. 연무강은 그런 부친의 말에 속으로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황후마마를 배알코자 하는 ‘이유’를 들어도 연무의는 결코 연서강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유를 말하지 않는 쪽이 더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부친은 성정이 원래부터 신중하고 음흉한 사람인지라, 연서강이 제 모든 것을 까발려 보였다가는 그 순간 연무의는 이제 단 물은 다 빨아 먹었다는 식으로 그를 성헌당에서 내쫓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은 연서강치고는 참으로 잘 내린 결단이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니 부친은 줄곧 ‘그 아이가 어째서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인가.’하고 고민을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시 그를 불러 이야기를 찬찬히 나누시겠지. 거기서부터 다시 자웅을 겨뤄야 한다. 부친이 그를 성헌당으로 다시 불렀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이유’를 몹시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니, 거기서 잘만 말하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아무 이유도 짐작이 안 되십니까?”
허나 그 ‘이유’는 연무강 또한 궁금했다.
연무강의 물음에 연무의가 다시 침묵했다.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 싶더라니 그것을 생각하고 있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연무강은 부친이 한층 더 쉬이 생각할 수 있게 입을 열었따.
“소자가 얼마 전 무진이를 통해 연서강에게 황후마마와 기씨 문중의 사이를 털어 놓으라 시켰었습니다.”
“과연.”
연무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 막내아들이 ‘황후마마’를 입에 올렸는지 그 실마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무진이의 말로는 연서강이 몹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못난 놈. 기연조가 ‘적’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그 정도쯤은 어렵잖게 눈치를 챘어야지. 비서랑은 허투루 임했더냐.”
혀를 쯧쯧 차며 연무의가 턱을 괴었다. 녀석이 녹우당에서 얼마나 태만하게 지냈는지 충분히 알겠구나. 그가 말을 이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연무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딱히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태만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궐에서 오래 일하지 않은 자는 알아차리기 힘든 곳의 일이었다.
그 증거로 연서령은 실제로 정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가족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가족이 피하면 피하고, 가족이 좋아하면 좋아하고, 연의진 또한 대충이라면 모를까 자세히는 알고 있지 않은 것이다.
“궐내에서는 입조심 하는 자들이 많으니,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는 헌데.......”
말끝을 흐리며 연무의가 흘깃 연무강을 보았다. 연무의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닿자 연무강은 고개를 들어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다. 물끄러미 연무강을 쳐다보던 연무의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네가 연서강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는 건 실로 처음이라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녹우당에 처박혀 있을 때는 쓰레기니 뭐니 궂은 말만 하더니, 변방에 갔다 돌아온 이후부터는 대접이 좀 좋아졌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어 연무강은 ‘죽었다가 돌아왔으니.’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멈추었다. 이제는 ‘죽었다.’는 말 따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연서강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확 기분이 나빠졌다. 두 번 다시 그때의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께름칙하고 초조하며 무얼 어떻게 하든 풀리지 않았던 더럽고 질척한 기분.
연무강은 연서강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연무의는 연무강의 태도가 변한 것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연무강의 말을 듣다말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뭐, 네 태도가 옛날 그대로여도 곤란하지. 그 녀석이 본채로 아주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매일같이 집안이 시끄러우면 이 아비가 괴로울 것 같구나.”
연무의가 무심코 흘린 말에 연무강이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보았다. 성헌당 안의 호롱불이 화륵,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밖에서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났다. 연무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본채로 아주 돌아온다고 말했다 하셨습니까?”
“아무렴. 갑자기 성헌당에 오더니 갑자기 하는 말이 그거였다. 기연조와 만나지 않겠다는 말 뒤에 이어 하는 말이 그거였다.”
그리고 연무의가 흘깃 연무강을 보았다.
“기연조를 잘도 떼어놓았구나.”
“.......그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하고 대답하며 연서강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연서강이 본채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의외였다. 기연조와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잘 되었다. 그것까지는 연무강도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이렇게 급작스럽게는 아니었지만, 서서히 멀어져 결국 만나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허나 연무강은 그 후 연서강이 좌절하며 녹우당에 깊숙이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채로 돌아온다고?
“아버님, 그것은 무슨 연유에서랍니까?”
그 물음에 연무의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핀잔을 주었다.
“당연하지 않으냐. 기연조와 만날 생각이 없으니 녹우당에 있을 필요도 없지.”
“아니, 그것은.”
아니다. 연서강이 애초에 녹우당으로 들어간 이유는, .......본채의 눈과 입을 피해 기연조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집안에 있기 껄끄럽고 어색해서 그놈이 멋대로 도망간 것이다. 자신을 마주하면 마주하는 족족 시퍼렇게 질려 안절부절 못했던 연서강의 모습을 연무강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녹우당으로 도망간 것이었다. 본채에 있기 싫어서.
다름 아닌 자신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으니 결코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
방금까지 괜찮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연서강이 본채에 돌아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었다. 이참에 그 거지같은 녹우당을 아예 폐쇄해버리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홍월정과 함께 폐쇄해버리고 다시는 연서강이 녹우당으로 도망 못 가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기연조를 더 이상 안 볼 요량으로 본채에 돌아온다는 것은 안 되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피해 도망간 녹우당이니, 본채로 돌아오는 것도 ‘자신’이 이유가 되어야 했다. 그놈이 행동하고 말하는 데에는 ‘자신’이.......
순간 연무강은 최근에 이 더러운 기분을 또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
그때였다. 연서강에게 달리 ‘연모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을 때.
연서강이 더 이상 자신의 앞에서 떨지 않도록 만들어준 사람. 변방에 가면 추천을 해주겠다는 부친 연무의의 말을 고집스럽게 듣도록 한 사람. 연서강이 품고 있는 소중한 이. 좋은 관직을 포기하면서도 곁에 머물기를 원했던 사람. 홍월정에서 주운 어린 계집애도, 모씨도 아닌 제 삼의 어떤 여인.
연서강의 이 돌발적인 행동도 역시 그 ‘여인’때문인가, 연무강은 언뜻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아버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나. ‘기연조’때문이라고. 그러니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 본채로 돌아오는 것은 ‘기연조’때문.......
생각을 끝내려던 연무강은 돌연 찾아온 생각의 정적으로 우뚝 숨을 멈추었다.
“.......기연조?”
연무강이 차갑게 내뱉은 말에 연무의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느냐. 무강아.”
그러나 연무강은 연무의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이 사모하는 이. 연모하는 여인.
연서강의 주변 인간관계는 협소하기 짝이 없다.
요 근래 연무강은 연서강이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무엇을 했는지 캐묻고 다녔다.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면 가족들에게 무얼 했는지 물었었고, 궐내에서는 그의 뒤를 밟으라고 부하에게 미행을 명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연무강은 연서강이 요 근래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다녀왔는지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수안궁을 들릴 때와 기연조를 만났을 때만 제하고.
“.......”
그렇구나.
연무강은 생각의 정적 속에서 돌연히 깨달았다.
“기연조였군.”
여인일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