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수안궁의 후원에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신비스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다 한창인 여름까지 맞이해 꽃과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궐내의 정원이 아니라 어디 깊은 산 속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돈 된 듯, 정돈되지 않은 수안궁 후원은 거기서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며 모습까지 모두 삼켜버려 무(無)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역설적이게도 연서강은 여기 후원에 있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녹우당에 콕 박혀 살았던 지난날 때문일지도 모른다. 녹우당도 또한 여기 후원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홀로 뚝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버려진 홍월정에 묻혀 영원히 세상 밖에 공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아득한 느낌이 수안궁 후원에도 존재했다.
자신을 여기까지 안내해준 궁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어딘지 불퉁한 구석이 있는 남자의 얼굴에 연서강은 의아해하며 인사를 올렸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더니 남자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린다.
“연서는 참으로 엉덩이가 무거운 모양인가 보군.”
‘연서’라는 상대의 말에 연서강은 움찔 등을 떨었다. 역시 저 이름으로 계속 부르는 건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회복이 늦어져서.......’라고 연서강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닌 참말이었다. 저번 연무진이 우악스럽게 움켜쥔 어깨가 역시나 탈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상처가 덧난 바람에 늦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밤늦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싶어 해열제를 먹고 잠에 들었더니, 다음 날 아침 연의진이 자신을 약초다발로 후려쳤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연의진이 가리키는 자리를 돌아보니 침상이 작게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연의진은 술 냄새도 난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술을 마시러 갔던 적은 있지만 마신 적은 없었던 연서강은 그에 ‘아닙니다. 마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다. 연의진이 웃는 얼굴로 약초가지를 뚜둑 반으로 꺾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느냐?
잔소리꾼이라던 연무진의 말이 사실이었다.
연의진은 연서강에게 끝도 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덧난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이리도 피가 났는데 곰 같이 누워 잤단 말이냐?’하고 묻는 말에 연서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변명하면 더 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없어 침상 위에서 애꿎은 이불을 주물거리고 있노라니, 연의진이 두통이 온 듯 제 이마를 쓸면서 한탄했다.
-어제 무진 형님께서 본가에 들렀다가 늦게 귀가했다는 말을 허투루 흘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어 속사포처럼 ‘형님은 대체 어쩌자고 아픈 애를 데리고 주루에를 가셨단 말이냐? 나는 그 사람이 당최 생각이란 것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등등의 말이 터져 나왔다.
연의진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이미 연무진과 진탕 술을 마신 것으로 도장이 찍혀 있는 것 같아서 연서강은 몹시 억울해졌다. 진탕 마시고 취하기는커녕 술로 입술조차 축이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누명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을 해소시키기 위해 연서강이 ‘저어, 의진 형님.’하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허나 너도 그렇다. 무진 형님께서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지. 왜 그걸 다 받아주고 있었단 말이냐? 몸도 아픈 애가.......!
돌연 연의진이 돌아보고 하는 말에 불쑥 솟구쳐 올랐던 억울함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열었었던 입을 다시 다물며 연서강은 뒤로 상체를 당겼다. 무진 형님에게 자신이 먼저 접근했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연서강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그 꼴을 본 연의진이 긴 한숨을 쉬었다.
-되었다. 내가 말을 잘못 했어. 그 무진 형님이 그러시는데 네가 어찌 싫다고 말할 수 있었겠느냐....... 싫다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어렸을 때 진작 싫다고 했었겠지.
연서강은 여전히 우물쭈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과거의 전적도 화려하니, 연의진은 자신이 연무진의 제안을 두려워 뿌리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이번에 누명을 쓴 건 연무진이었으나 앞과 달리 연서강은 별달리 변호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짚고 끙, 앓는 소리를 낸 연의진이 연서강을 향해 손짓했다. 그 손에 여전히 부러진 약초 가지가 들려 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잠시 망설였다. 또 때리는 게 아닌가, 싶어 우물거리는데 연의진이 툭 내뱉는다. ‘안 때려. 일 와 봐라.’ 해서 그는 슬금슬금 연의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연의진은 다만 연서강의 이마에 제 손을 얹고, ‘다행히도 열은 그다지 심하지 않구나.’하고 말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이마와 뺨에 와 닿은 그의 손이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괜히 때렸다. 나는 다만 네가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 같아 혼을 낸 거다. 일부러 때리려고 한 게 아니라.’ 가만한 연의진의 목소리가 정말 후회하는 듯 했다.
-.......
그렇게 말하고 마실 것을 준비하러 가는 연의진의 뒷모습을 연서강은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버려진 강아지처럼 연의진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연서강은 곧 시선을 거두었다. 뱃속에서부터 뭉클거리는 감각이 흘러나왔으나 연서강은 그것을 애써 모른 척했다.
옛날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에게 ‘그것’은 독과 같은 감정이었다. 저 사람들은 지금은 이럴지 몰라도 옛날에는 자신이 죽게 내버려둔 사람들이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연의진이 ‘뭔가 마시지 않겠니?’하고 물었을 때,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절대로 마음을 풀지 않겠다고, 사사로운 정에 시달리지 않겠다고 자신은 이미 결심했었다.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더욱 간절해지는 얼굴이 있어 연서강은 주변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그는 태상의 곁에 당연히 있겠거니 생각했었던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데, 홍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희한타. 연서 자네는 어깨가 다치니 눈도 따라 침침해지는 모양이로군. 이제야 홍이를 찾는 걸 보니.”
연거푸 들어도 ‘연서’라는 호칭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애매하게 웃으며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 제아겸을 보았다.
제아겸의 옷은 오늘도 여전히 화려하고 또 눈에 심하게 띄었다. 꽃분홍 바탕에 보랏빛 나비가 떼 지어 날아가고 있으니 오죽하랴. 한창 화사한 옷을 좋아할 나이의 처녀도 옷을 보고 움찔, 떨며 입기 저어할 꽃분홍 빛깔이었다. 무의식중에 연서강은 ‘이 분은 정말 열대우림 한가운데에 던져놓아도 걱정이 없겠다. 바위 위에서 한 번만 훑어봐도 금세 발견되겠는걸.’하고 생각하고 말았따.
꼬리를 잇는 그의 쓸데없는 생각을 제아겸의 목소리가 툭 끊어놓았다.
“홍이는 보후전 안에 있네.”
“자나요?”
간다고 전갈을 넣고 방문하기는 했지만 아이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전갈을 넣은 것이 아니라 예의상 전한 전갈이기 때문이었다. 제아겸에게 그렇게 물은 후에, 연서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중천에 완전히 자리 잡은 시간이었지만 홍이는 녹우당에 기거하고 있을 대에도 종종 늦잠을 자곤 했었다. 그러니 아직 자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약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중이라면 자신이 왔다고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이를 어쩐다. 아예 해가 저문 뒤에야 방문할 것을 그랬나, 연서강이 고민하다가 자신의 물음에 대답이 없는 제아겸을 힐끗 바라보았다. 특별한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역시 홍이는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론을 내린 연서강이 바로 태상에게 예를 갖추고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그때 제아겸이 연서강의 옷자락을 텁, 하고 잡았다.
“잠깐, 잠깐.”
“예?”
의아한 얼굴로 연서강이 제아겸을 돌아보았다. 연서강과 시선이 마주치자 제아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와 표정 전부에 퉁명스런 기색이 서려있었다.
“이거 너무 하지 않나. 내가 딱히 자네를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수안궁에 오는 목적이 홍이 하나뿐인가?”
“그거 외에 다른 것이 또 있습니까?”
바로 대답하자 제아겸이 긴 한숨을 쉬었다.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연서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이가 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 외에 자신이 수안궁을 방문하는데 또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변방으로 가기 전 연무강이 수안궁을 들먹인 적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목적으로 찾아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오로지, 단지, 홍이가 있어서, 목적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아겸이 마지못해 다시 말했다.
“내가 정말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일세.”
“네.”
“사람 간에는 교류라는 것이 있지 않나. 교류라는 것을 하다 보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제아겸이 버럭 성을 냈다.
“통성명까지 한 사이인데 이러긴가! 어찌 인사만 딱 하고 돌아설 수가 있는가. 연서 자네에게는 보기와 달리 매정한 구석이 있군.”
“.......”
통성명....... 변방에서도 느꼈지만, 저 사람은 통성명에 무언가 신묘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그리 ‘통성명’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서강은 ‘하지만 제태상.’하고 입을 열었다.
“저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은 태상이 아니십니까?”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연서강도 이제 더 이상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홍이를 맡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변방ㄲㆍ지 자신을 찾으러 와 준 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히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리도 세상사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변방의 전쟁터까지 그가 오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자칫 잘못 해서 자신 때문에 연무강이나 연무의가 수안궁 쪽에 관심을 가지면 큰일이었다. 궐내에 계신 분이시니 그들이 함부로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그 질색하는 ‘진흙탕’에 태상이 휘말려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연서강이 생각했을 때 제아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손 쳐도 어찌 그리 칼 같이 확 물러날 수가 있는가! 내가 자네 침상 옆에서 ‘물고기 꼬리는 꿈틀꿈틀’ 노래를 불러주기까지 했었거늘. 자네는 내게 아무 볼 일이 없어도 내가 무언가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몸은 어떤지, 어깨는 좀 괜찮아졌는지, 상처가 덧났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지. 게다가 자네 비서랑에 임해졌다지. 연태위가 그러더군, 달리 좋은 자리를 추천해줬는데 그것을 마다했다고. 경내에 사모하는 이가 있다고 그랬다던가? 그게 정말인가?”
상대방의 길고 긴 말에 연서강은 순간 멍해졌다. 어찌 수안궁 안에만 있는 어르신이 그런 사소한 소식들까지 시시콜콜 다 알고 계신지 알 수가 없다. 부친께 직접 물어보신 건가? 연무강이 ‘수안궁’ 운운했던 게 기억에 남아 있던 참에. 태상께서 직접 자신의 부친에게 소식을 물어보신 건가 싶어 연서강은 이거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그 이야기는 어떻게 듣게 되셨습니까? 설마 제 큰 형님이나 부친께 물어보신 것은 아니시지요? 제 큰 형님이 제가 일전에 수안궁을 다녀온 것을 크게 신경 쓰는 눈치였습니다. 무언가 나쁜 일은 없으셨습니까? 큰 형님이 ‘홍이’때문이라고 대답해도 믿지 않으셔서, 수안궁에 별 일이 있으면.”
“그 잘난 큰 형님이라면 벌써 수안궁에 왔다 가셨네.”
툭, 제아겸이 말을 뱉자, 연서강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
“자네가 없는 사이에 연위사가 수안궁을 감시했었단 말일세. 이미 그런 후이니 신경 써도 이미 늦었, .......아니지. 아니야. 그러니까 자네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단 말이었네.”
‘감시.......’ 제아겸의 말을 되뇌다가 연서강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다면 더 큰일이지 않습니까?! 홍이에게 전해주십시오. 나중에 다시,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요.”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이 쏟아낸 말에 제아겸의 얼굴이 구겨졌다. 말하다 보니 어째 이상한 쪽으로 대화의 방향이 흘러간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아겸이 말했다.
“내가 왜 자네를 만나는데 연위사 눈치를 봐야 하는가?”
연서강이 제 부친과 맏형 눈치를 보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제아무리 나라 안팎으로 권세를 누리는 연씨 문중이라고 해도 신의 영역에 속해 있는 자신에게까지는 손을 뻗칠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모를까, 마땅히 육체가 있는 인간이라면 신의 영역을 더럽히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는 나를 너무 쉬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 해.”
제아겸은 역시 첫 단추(첫 만남)를 잘못 끼워 저런 건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어떻게 저리 자신을 하찮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여전히 맹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서강에게 제아겸이 다시 말했다.
“나는, 연위사나 연태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란 말일세. 영역이 다르고 격이 달라.”
“.......”
“.......알겠는가?”
순간, 자기 자랑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는 걸 깨달은 제아겸은 바로 말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어째 이 구도가 몹시도 익숙했다. ‘사이비’라는 단어와 함께 별로 좋지 못한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겨우 잊고 있었건만. 제아겸은 혀를 찼다. 왜 자꾸 이놈 앞에서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지, 사실 이유는 명확했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연서강이 너무 몰라주니 자꾸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네.”
멍청한 얼굴로 있던 연서강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얄밉게 비쳐 제아겸은 ‘그 웃음은 대체 뭔가?’하고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자 연서강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니요.’하고 대답했다.
“제태상께서 무척 상냥하신 분이라 여겨져서 웃었습니다.”
그 말에 제아겸은 미간을 좁혔다. 또, 또 연서강이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무어라 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윽고 연서강이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제태상, 그러시다면 천천히 머물다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을 하자 다시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음대로 하게.”
제아겸은 생각했다. ‘소문을 듣고 소문의 장본인에게 사정을 들으려했던 것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군.’ 변방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정하던 그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그냥 그간의 소식만 조금 들을까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더욱이 돌아서는 그를 애초애 잡으려고 했던 건.
길게 한숨 쉬며 제아겸은 입을 열었다.
“보후전으로 들어가세. 홍이가 안에 있어.”
“예? 잠을 자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하고 묻는 연서강의 면전 제아겸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따.
“내가 언제 자고 있따고 한 적 있었나. 안에 있다고 했었지.”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제아겸은 가벼운 목소리로 연서강을 조롱했다.
“연서는 참으로 오해를 잘~ 하는군.”
과연 ‘연서’라고 부른 보람이 있게 연서강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었다.
사실은 이렇게 된 일이었다.
연서강이 보낸 시선을 본 제아겸은 ‘참으로 빨리도 오는군.’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읽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연서강의 편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기는 하지만 한 시도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속내는 표정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 제아겸은 자신도 모르게 ‘무심한 연서도 연서(戀書)인지라.’하고 중얼거렸다.
자신의 말을 들은 홍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연서가 무엇인가요?’ 그 물음에 태상은 괜히 쓴웃음만 지었다. 뜻을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쓸데없이 어린 아이의 마음에 괜한 파문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태상은 홍이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홍이는 연서강이 좋으냐?’하고 물었다. 아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때리지 않았어요. 밥도 줬고, 머리도 땋아주고, 또 .......아무 말도 없이 있게 해주고.’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길고 긴 대답에 제아겸은 다시 웃었다.
그는 홍이의 등을 두드리며 탁자 위에 편지를 두었다. ‘자, 그러면 예쁘게 입고 연서를 기다리자꾸나.’ 홍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놀라게 해주자. 고 맹한 놈은 네가 예쁘게 차려 입고만 있어도 놀라자빠질걸.’ 그 말에 홍이가 빠르게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넘어지는 건 싫어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제아겸은 ‘얄미운 놈.’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럴 것을 그랬다.
홍이가 죽을 때까지 연서강을 수안궁 안에 잡아다 놓을 것을. 그러면 아이도 기뻐하고 그 광경을 보는 자신도 흐뭇한 것을. 허나 그러지 않은 것은 얼굴이 밝지 않을 연서강을 보고 아이 또한 결국 우울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여하튼 처음의 의도는 그러했다. 해서 홍이는 곱게 치장한 채 보후전 안에서 기다리고, 제아겸이 먼저 밖에 나가 연서강을 만나보았던 것이다. 연서강이 ‘홍이는요?’하고 묻는다면 제아겸은 ‘보후전 안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대답하고 그를 보후전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모호한 태도에 서슴없이 돌아서는 그를 제아겸이 당황해하며 붙잡았던 것이다. 결단코 이렇게 그와 대화를 길게 이어나갈 생각은-더더군다나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었다.
“.......자고 있네요?”
그러나 겨우 보후전 안으로 들어선 연서강과 제아겸을 제일 처음 맞이한 것은,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손에는 연서강이 보낸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내용도 알 수 없는 그것을 보고 또 보며 두 사람을 기다리던 아이가 지쳐 그만 잠이 들고 만 것이었다.
“돌아갈 건가?”
이대로 연서강이 돌아가면 홍이가 무척 섭섭해 할 것이라 생각하며 제아겸은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연서강이 그렇게 대답하며 홍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예쁘게도 차려 입었네. 제태상께서 꾸며주신 겁니까? 저는 솜씨가 없어 꾸며주고 싶어도 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솜씨 있는 사람이 낫네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홍이의 옆 의자를 빼서 앉은 연서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홍이를 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본 소녀는 홍월정과 녹우당에 있었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머슴, 혹은 야생에서 살아가는 아이 같았던 그녀가 이렇게 예쁜 옷과 머리로 새치름하게 치장하고 있으니 어디 명문가의 따님처럼도 보였다. 녹우당에 있을 때 연서강도 홍이에게 이것저것 사다 입히고 머리도 땋아주었지만, 이렇게까지 고운 태는 나지 않았었다.
“참.”
옆자리에 앉아 가만히 소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연서강은, 불현듯 자신이 그녀에게 줄 선물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서강이 오색 색실과 은박 물린 비단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를 품에서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자 제아겸이 ‘뭔가?’하고 묻는다.
“선물입니다 홍이에게 주려고 샀던 건데.......”
하고 대답하던 연서강이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제아겸 쪽을 보았다.
“이 선물 때문에 아마도 제게 사모하는 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또......, 그 이전에 제 부친께서 저를 남쪽의 주(州)로 파견시키려는 것을 거절했었는데, 그 이유가 경내에 사모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었거든요. 아마도 그런 말들 때문에.”
제아겸이 후원에서 이래저래 물었었던 것들이 생각나 연서강은 하나씩 차분하게 대답을 해나갔다.
“그리고 제 어깨는, .......의경에서 들었던 바와 같았습니다.”
거기까지만 말하고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웃었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데에 그다지 불편할 게 없고, 목숨 값 치고는 저렴하게 먹혔다는 생각도 들어 괜찮습니다.”
그리고 연서강은 자신을 찌푸린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제아겸을 향해 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말은 홍이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할 마음이 없다네.”
딱딱하게 대꾸하는 제아겸에게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태상이라면 자신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래 줄 것만 같았다. 제아겸이 이런 사람이라 새삼 연서강은 마음이 놓였다. 그는 아마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홍이만큼은 지켜 부리라.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그는 좀 더 자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부친께서 남쪽의 주(州)로 내년 봄까지 가 있으라 하셨지만, 안되지요. 안 될 말씀입니다. 이번 가을과 겨울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경내에 연조만 두고 갈 수 없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연조의 신변에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면 그 때가 될 터인데, 저만 빠져나올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래서 거절했더니, 비서랑에 임해진 것입니다.”
연서강은 가만히 진푸른 비단에 싸인 선물 상자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덕분에 변방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말의 본뜻을 제아겸이 과연 제대로 이해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가 제대로 깨닫지 못했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연서강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로 하면서 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일들은 변방에서 있었던 것들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는 그와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헛수고라.......”
흠, 하고 숨을 내쉰 제아겸이 연서강의 반대편에 가서 앉았다. 연서강이 그를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해서 다른 좋은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그 ‘방법’은 이미 생각해두었지만 차마 제아겸에게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수안궁에 의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홍이가 있고, 일방적으로 신세만 진 제아겸도 있었다. 무엇보다 수안궁은 자신이 죽음을 당했었던 과거와 전연 관계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가급적이면 이곳만큼은 늘 그랬듯 끝까지 조용하게 있어 주었으면 했다.
“자네.”
제아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썼다.
“설마 또 저번처럼 목숨이 위험할 짓을.”
“안 합니다.”
더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연서강이 딱 잘라 대답했다.
“태상의 말씀은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홍이가 죽을 때까지는 저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한 번이 괜찮았다고 다음에도 괜찮을 리가 없으니까. 몸을 생각하고, 뒤를 생각하고 행동할 생각이니 더 이상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렇게까지 말하니 제아겸도 무어라 더 끼어들 수가 없었다. 또 연서강이 생각해낸 방법이 무엇이든 전번처럼 목숨이 위험할 짓만 아니라면 자신과는 큰 상관이 없을 것 같긴 했다. 홍이가 더 이상 몹쓸 것을 보거나 듣지 않는다면야 그도 연서강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허나.
그의 대답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제아겸은 마냥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홍이가 죽을 때까지......., 라 하였지. 그렇다면 홍이가 죽고 난 다음에는? 물론 연서강은 별 생각 없이 한 대답이겠지만, 제아겸은 그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제아겸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썼다.
“자네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무엇이 말입니까?”
“그리도 그 친우를 구하고 싶다면, 그래. 나라면 차라리 그 자를 납치해서 어딘가 도망을 가버리겠네. 아니면 잠시잠깐 기연조를 가둬 두어도 되지 않겠는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군.”
연서강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웃음 지었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옮겨 오른쪽 벽을 쳐다보았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뱀 조각상들이 한 쪽 벽면을 우글우글 메우고 있었다. 한 데 뒤엉킨 뱀들은 역시 신상(神像)이라고 하기보다는 흉물스런 괴물 조각에 가까웠다. 저게 우리의 신, 홀린 듯 그 조각들을 바라보던 연서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태상께서는 혹여 제 친우를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연조 그 자라면 본 적 있다마다, 일로 한두 번 수안궁을 방문한 적 있었네. 그리고 또.......”
거기까지 말하고 제아겸은 입을 다물었다. 이걸 말해도 될까, 가만히 고민하던 그는 이내 턱을 쓸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또, 자네가 행방불명되었단 소식에 나를 찾아왔었지.”
연서강이 그 말에 놀란 듯 제아겸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 서린 것이 꼭 어린애의 것처럼 순수한 ‘기쁨’이라 제아겸은 착잡해졌다. 기연조를 가리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던 홍이의 중얼거림이 저절로 떠올랐다.
“.......변방에 가게 되면 자네 소식을 알려달라고 하더군.”
어떤 얼굴로 친우가 이곳을 찾았을지 상상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연서강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숨기며 좋아하는 그 얼굴에 제아겸은 슬쩍 인상을 썼다. 그러는 동안, 연서강의 얼굴에 잔잔하게 번졌던 기쁨의 미소는 곧 애달픈 것으로 그 성질이 변하였다.
연서강이 말했다.
“그렇다면 연조에게 제가 태상경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을 하게 된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짐작이 가시지 않습니까?”
“.......”
순간 제아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연서강이 걱정 되어 수안궁을 방문하기는 했으되, 자신은 변방으로 직접 갈 사정은 안 된다 말하던 기연조의 얼굴이었다. 그때 그의 얼굴은 지금 연서강의 것과는 달리 ‘책임’을 아는 얼굴이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인 것인지 임 다 ‘정리’한 얼굴이었다.
비록 ‘나중’으로 미룬 것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어 달려온 얼굴이었다. 상대를 걱정하고 아낀다는 점에서 그와 연서강의 감정은 닮았을지도 모르지만 연서강과 그는 본질적으로 많이 달랐다.
많이 달랐다.
“그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다시 뱀 조각상들로 시선을 돌리며 연서강이 조그맣게 웃었다.
“제가 아는 기연조는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여길 이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를 납치하거나 가두는 것으로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자네의 상황은?”
절로 그 질문이 제아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외의 물음이었던지, 아니면 제아겸의 물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지 연서강이 반문했다.
“예?”
“자네는.......”
하고 다시 말하려던 제아겸이, 다음 순간 입을 딱 다물고 손을 내저었다. ‘되었어.’ 굳이 물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연서강이 무어라 대답할지 그의 이제껏 행동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갑하기 그지없었따. 그러나 이 갑갑한 것이 연서강인지, 지금의 상황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동인지 제아겸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참 마음이 편합니다.”
돌연 연서강이 중얼거린다.
“홍이도 그대로고, 제태상께서는 이전의 삶에서는 뵙지 못했었던 사람이며 수안궁의 풍경 또한 생소하고 낯설어서 안심이 됩니다.”
“무슨 소린가?”
제아겸이 되묻자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여름을, 저는 한 번 더 겪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되돌아온 저는 이 ‘여름’이 죽었던 ‘겨울’의 연장선상일 뿐입니다. 허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 ‘겨울’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니, .......죽 이어지지 않지 않습니까.”
되돌아온 연서강에 있어 여기 수안궁은 유일하게 ‘과거’와 동떨어져 있는 섬과 같았다. 수안궁과 태상의 존재에 한해서는 비교할 ‘과거’가 없었다. 해서 따로 생각할 것도 전혀 없었다. 홍이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홍이도 연서강과 마찬가지로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게 곤란한가?”
하고 묻는 말에 연서강이 언뜻 제아겸을 돌아보았따. 자신의 말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아니요.’ 웃으며 연서강은 말했다.
“조금 성가실 뿐입니다.”
곤란하냐고 묻는다면 전연 아니라고 연서강은 대답할 수 있었다. 이미 결심했던 일이었다. 그 ‘가족’들은 자신을 죽게 내버려둔 ‘겨울’의 가족들과 동일인물이니, 망설이지도 흔들리지도 않겠다고.
사람의 성정은 쉬이 변하지 않으니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 중 어느 사람이 자신을 어떤 말과 태도로 대하든 간에, 이미 그 ‘겨울’의 기억이 있으니 결국은 그 사람을 매정하게 떼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어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자꾸 드는 이 미묘한 느낌을.
“제가 알고 있었던 것들과 달라서,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오로지 적이라고만 생각했었던 이들이었다. 차갑고 매정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가족들이라 생각했었다. 한 가족인데도 어쩌면 이리도 나에게 독하게 굴까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러나 그 인상들이 조금씩 수정되어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차갑고 매정하고 잔혹하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은-.
“앞으로 더 많이 다른 부분을 알게 될까봐 무섭습니다.”
무엇을 더 알게 되었든 그들이 ‘적’이라는 건 여전했다. 기연조를 구해야 한다는 것도 여전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연서강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것이었다. 기연조만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것.
앞으로 상황이 어찌 변하든, 자신이 무얼 하든 기연조 만큼은 ‘죽기 전’과 같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기연조는 변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기연조를 보면 이제 마냥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죽기 전’과 똑같이 곱고 다정하며 착한 이였다. 연조만큼은 그대로인 것이다.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연서강은 고개를 숙였다. ‘겨울’ 이후는 자신이 죽고 난 뒤니 어떤 앞날이 펼쳐질지 그도 잘 몰랐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안다면 편할 것 같다, 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기연조와 나눴던 대화로 언제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지금은 차라리 앞일을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겨울’이 지나가고 연조도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이 다급하고 치열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고 이어 화평의 시기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겨울이 지나가면, 아마도 모두 끝이 날 테니까.”
“.......”
거기에 제아겸은 가만히 입을 입을 다물었다. 안타깝지만 제아겸은 현재 연서강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되돌아 온 자가 아니기에 올해 여름을 두 번이나 겪지도 않았음은 물론, 올해 겨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지도 못했으니까. 다만, 그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허나 제아겸은 굳이 입을 열어 그 사실을 연서강에게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지금 가르쳐 주어도 연서강은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백에 하나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아겸은 입을 다문 채, 자고 있는 홍이를 응시했다.
홍이가 죽어도, 겨울이 지나가도 진정한 ‘끝’은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
성헌당 안을 비추고 있는 호롱불의 밝기가 유난히 강했다. 심지를 새로 갈아 넣었거나, 혹은 어디선가 깨끗하고 좋은 기름을 구해 오셨든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연서강은 눈앞의 부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별 일은 아니다만.”
묵묵히 책을 읽던 연무의가 그렇게 말문을 열머 연서강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연서강이 두 손을 내밀어 받아들고 보니 그것은 한 첩의 서신이었다. 도백색(桃白色) 끈으로 봉해진 편지는 편지를 묶은 고운 색실이 무색하게도 먼 길을 달려온 듯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편지라, 누구의?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말을 멈췄던 연무의가, 연서강이 편지를 받아 드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령이에게서 편지가 왔구나, 읽고 답장이라도 해주련.”
“.......서령이한테서 말입니까?”
대답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아 연서강은 되물었다. 자신은 놀라 물은 것인데도 연무의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는 ‘오후에 하인이 널 찾아다녔지만, 방에도 녹우당에서 없다더구나.’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후라면, 연서강이 잠깐 수안궁에 갔었던 때였다. 서둘러 다른 말로 변명해봤자 연무의의 귀에는 이미 자신이 어딜 갔을지 들어갔을 것만 같았다. 해서 연서강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잠시 수안궁에 갔다가 왔습니다.”
“별일이구나, 수안궁에?”
“예. 태상께서 변방까지 저를 걱정해 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감사인사를 잠시 하러 갔다 왔습니다.”
연서강이 순순히 대답했으나 연무의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듯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네가 태상을 사사로이 아는 게 신기하구나. 어찌 알게 되었느냐?”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지만 동시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던 물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나 보다....... 연서강은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아 수안궁 사람들까지 곤란해지는 것은 원치 않는 관계로 솔지갛게 대답하기로 했다.
“제가 홍월정에서 주웠던 여자아이를 기억하십니까, 아버님.”
“기억하다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거짓에 진실을 약간 섞기로 했다. 연서강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아이가 실은 수안궁 내 어떤 여인의 아이였다고 합니다. 헌데 모종의 일로 그 여인이 궁을 나간 뒤에 완전히 소식이 끊겨 태상께서 내도록 찾으러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가까스로 행방을 찾게 되었지만 이미 여인은 죽고 없고, 그 아이만 제가 마침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렇군. 그런 인연이었구나. 참으로 기이한지고. 어찌 그리 연결되었을까.”
마지막 말이 비꼬는 것인지, 진실로 탄복하는 것인지 진의는 알 수 없다. 연서강은 슬쩍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저도 참으로 놀랐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연무의가 ‘그래, 그렇게 되었었나.’하고 중얼거렸다.
연서강은 이럴 때면 제 부친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가 싶으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중얼거리는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 몹시 답답했다. 하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싶어서 연서강은 한 마디 더 얹어 말했다.
“예전에 무강 형님이 괴이하게 여기셔서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만, 도통 믿지 않으셔서.”
“그랬지. 무강이가 그런 말도 했었지. 들은 것도 같구나.”
태연하게 대꾸하는 말에 연서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들은 것도 같다, 라니. 연무강을 시켜 수안궁을 감시하게 시킨 장본인이 들은 것도 같다고 말을 하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허나 모르는 척 하며 연서강은 ‘네, 그랬습니다.’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여전히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태상과 연서강이 안면을 트게 된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한 수 접은 듯한 연무의가 말했다.
“허면 되었다. 서령이가 네 소식을 무척 궁금해 하는 듯 하더구나. 그러니 읽고 간단하게 답장이라도 해주렴.”
“.......알겠습니다.”
연서강은 내키지 않는 듯 편지를 품안에 넣었다. 서신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연서령은 철부지 여동생이면서, 예전에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았던 가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형상에 무엇을 더 더하고도 빼고도 싶지 않은 게 현재 그의 마음이었다. 굳이 하나 연서령에 대해서 더할 것이 있다면 ‘무예가 대단히 출중함.’, 그것뿐이었다.
“또, 서강아.”
“네, 아버님. 말씀하십시오.”
연무의가 읽던 책을 덮고 그를 보았다. 잔뜩 긴장하며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리 자신을 성헌당으로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연서령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결단코 아닐 테니, 방금의 수안궁에 대한 물음이 그 목적인가 싶었다. 허나 다시 입을 여는 부친에 연서강은 어찌된 일일까 고민했다.
“이만 슬슬 기가 놈과 교류를 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자신을 성헌당으로 부른 목적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대답이 가장 합당할까 생각하던 연서강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만나지 않으려 하면 그가 수상하다 여길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뒤의 물음을 덧붙여 연서강은 당장 연무의가 만나지 말라, 라고 말만 한다면 기연조를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정말로 당장 기연조를 만나지 말라고 연무의가 말할까 싶어, 그는 ‘수상하다 여길까’란 말도 집어넣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그리 말한 보람이 있게 연무의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가 수상하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만 교류를 이어 나가거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해준 연무의의 마음이 혹시나 변할까봐, 연서강은 얼른 대답했다.
역시나 마지막 말이 연무의가 그를 부른 본 용건이었는지, 그 대답을 끝으로 연서강은 성헌당을 나올 수가 있었다.
연무진의 방으로 돌아온 연서강은 침상(寢牀) 위에 걸터앉았다. 이것저것 제 물품을 옮겨 꾸며놓기는 했지만, 역시 원래 자신의 방이 아니라 그런지 좀체 방 안 풍경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녹우당에서 가져온 자신의 물건들마저 때때로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그는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들었다. 변방에서부터 온 편지라 그런지 서찰 겉면이 조금 상해있었다. 편지를 봉하고 있는 도백색 끈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서찰을 만지고 있으니, 불현듯 변방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새빨간 화염이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와 그 위로 떨어지는 병사들,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사람들과 부상을 입어 죽어가던 사람들. 붙잡혀 고문당했던 적들과 돌무더기에 깔려 있었던 적들. 그리고 자신이 방치하고 죽였던 많은 사람들까지.
“.......”
묵직해지는 속을 애써 무시하고 그는 짐짓 태연한 척 편지의 끈을 풀었다. 낯선 글씨체가 말린 종이 위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편지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았다. 내용 또한 특별할 게 없었다. 상처는 다 나았는지, 가족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또 여기 변방은 어떻다든지. 어째서 이런 별 내용 없는 편지를 자신에게 썼는지 연서령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글을 쓰는 도중 그녀가 많이 고뇌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행간 사이사이에 떨어진 먹물이며 윗줄에 이어 바로 적지 못하고 조금 시간을 들인 탓에 약간 달라진 글씨 모양 따위가 그 증거였다. 내용이 어떠하든 연서령이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이 한 장의 편지를 완성시켰다는 것을 연서강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연서강은 바로 편지를 접어 일부러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가까이 두고 즐겨 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편지를 읽고 답장이라도 해달라는 부친의 말이 생각나 그는 서랍 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녹우당에서 가져온 붓과 먹, 벼루도 꺼냈다. 하지만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든 후 그걸 붓에 축이기는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종이에 붓을 대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순백의 공간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무엇을 적어야 한단 말인가.
연서강은 결국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붓을 내려놓고 말았다. 서걱서걱, 자꾸만 뭔가가 메마른 가슴 속을 갉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본채에 있는 날이 오래 되니 그 느낌은 더더욱 심해져만 갔다.
멍하게 있던 그는 둔하게 ‘아, 이제부터 연조를 만나는 횟수도 줄여나가야 하겠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그나마 수안궁과 홍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부친도 자신의 대답에는 어느 정도 납득한 듯하니 수안궁에는 종종 찾아가도 무어라 의심을 받지 않을 듯 했다.
청개구리 같이 연서강은 문득 기연조가 그리워졌다.
* *
왕실 도서관은 크게 경서나 장서 등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은 옥문각과, 여러 가지 잡서나 서적, 각종 보고서들을 보관하는 서서원으로 나뉘는데 그 중 연서강이 일하게 된 곳은 후자인 서서원이었다. 서서원에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여러 정보를 담고 있어서, 서서원의 관원들은 매 번 새로운 내용으로 문서를 수정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업무였다.
그 중 연서강이 해야 할 일은 이번 변방에서 날아온 사관의 보고서를 토대로 서쪽 변방, 즉 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들에 관한 정보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낡은 정보는 뜯어내어 버리고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새 종이에 기록해두어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연서강만이 하는 일은 아니었다. 지도를 그리기 위한 도화사 등 책을 수정, 편집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사람들과도 함께 하는 일이었다. 딱히 정해진 기한 없이, 다른 집무를 같이 처리하면서 ‘가을’까지만 처리해 달라 들었기 때문에 일은 상당히 한가한 편이었다.
원래 이리 한가한 일이냐고 다른 이에게 물어 보았더니 ‘부친께서 연태위님인 걸 다행이라 여기시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즉, 부친이 그런 사람이라 내려오는 잡무 또한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줄이 좋기는 좋았다. 이른 오후면 일이 대부분 끝이 나 상당 시간이 자유 시간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시간을 흥청망청 놀러 다니는 데에 쓰거나, 혹은 다른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연줄을 대 친분을 쌓기도 했었다.
허나 연서강은 사람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연무의가 ‘이 어르신을 찾아가 네 얼굴을 익히게 하렴.’하고 다른 관직의 사람들에게 연서강을 소개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그 시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휴시(休時)로 남았다.
때문에 고스란히 비게 된 그 시간을 연서강은 궐 안팎을 탐방하는 데 썼다. 서서원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비서랑이라 그런지 통행이 금지된 곳이 궐내에 상당수 많았다. 또 자신의 부친이 연태위라는 것이 은근히 멀리까지 퍼졌는지, 자신과 말을 섞으려고 드는 자들도 적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걸 몰래 듣던가, 은연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리하여 연서강도 알게 된 사실이 몇 개 있었다. 우선 궐내, 대충의 권력 구도였다. 연서강이 우려했던 대로 현재 궐내는 크게 두 분파로 권력이 나눠져 있었다. 한 쪽은 당연히 연서강의 부친인 연무의가 주인으로 있는 연씨 문중이 중심인 황후 쪽 세력이었고, 나머지 한 쪽은 현황제의 생모인 황귀비 기씨로부터 발족된 기씨 문중의 세력이었다.
처음에 기연조를 해한 세력이 현 황태후 쪽이라 추측했던 연서강의 생각은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현 황태후의 세력이 전 세대에 이어 여전히 강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대부분이 현 황제와 유착되어 기씨 문중 쪽과 이어져 있었다. 즉, 현 황태후는 기이하게도 황귀비 기시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는 와중에도 기씨 문중 쪽에 속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세력 구도가 아닌가 싶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진데 기연조를 눈엣가시로 여길 만한 곳은 역시 연서강도 속한 연씨 문중, 황후마마 쪽 세력 밖에 없었다.
‘녹우당 도련님’에서 ‘한가한 비서랑’으로 진화해 소요(逍遙)하면서 연서강은 또 한 가지 더 알아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여태 ‘녹우당 도련님’이라 불리며 저잣거리 사람들의 애정을 받아온 덕택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일찍이 변방으로 가기 전 연서강이 미행을 시켰었던 아이들, 미행을 시키고 도중에 태상을 만나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잊어버리고 말았던 그 아이들 중 하나가 기특하게도 아직 연서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행을 시켰던 아이의 얼굴을 잊어버려 이를 어찌할까 연서강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이가 스스로 연서강에게 다가왔었다. 그것은 비서랑으로 일하고 보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오후에 연무진과의 약속이 잡혀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연서강은 그 아이와 저잣거리 중앙에 있는 큰 나무 아래서 마주쳤었다.
“녹우당 도련님아.”
처음에 연서강은 왜 그 아이가 자신을 대뜸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이제껏 홀로 저잣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아무 때나 자신을 불러 대화를 나누곤 했었기 때문에, 그는 예사로이 생각하며 자신을 부른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는 그를 불러놓고도 한참을 우물쭈물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아이다운 치기로 명랑하게 제 용건을 말한다.
“전에 시킨 것. 아직 받을 수 있어?”
연서강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뭐?’라고 물었다. 역시 안 되나, 싶었던지 아이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전에, 누군가 따라가라고 나한테 시켰었잖아........”
그제야 연서강도 ‘아!’ 싶었다. 자신은 만나지 못하고 제태상만 만나 이야기를 들려준 그 아이였던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모자라 이미 제태상에게 말을 전한 후라, 그 미행은 이제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나 연서강의 얼굴을 보니 아이는 제태상에게 말한 것을 무효라 치고, 연서강에게서 또 새로 보상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모르는 척 하고 연서강은 웃으며 ‘그래. 내가 깜박했었네.’하고 말을 이었다. 연서강의 호의적인 태도에 힘을 얻었는지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상!’하고 말한다. 연서강은 그 손바닥 위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알맞은 때에 나타난 아이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 그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내게 말해주련? 그때, 내가 얼마를 더 준다고 했었지?”
자기가 ‘얼마’를 주기로 했었는지도 기억 못하겠다는 연서강에 아이가 더 좋아 죽으려고 했다. 배시시 웃으며 아이가 열 손가락을 모두 펴서 연서강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아는 최대한의 수가 바로 그거였다. 흔쾌히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가 작은 손으로 연서강의 손을 붙잡고 신나서 이끌었다. 연서강은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아이를 따라 발을 옮겼다. 아이가 연서강을 이끌고 간 곳은 남서쪽 대로에 위치한 한 저택이었다. 연서강이 머무는 연씨 문중의 본가에 비하면 그 크기는 작았지만 보통의 여가(閭家)에 비한다면 단연 큰 쪽에 속했다. 아이에게 열 냥의 돈을 쥐어주고 돌려보낸 뒤에 연서강은 밖에 걸린 문패를 읽었다.
문도학.
근위기병단의 단장직인 효기교위의 이름이었다.
“문도학?”
“네, 무진 형님. 형님이라면 능히 아실만 한 자가 아닌가 싶어서 여쭙습니다.”
연서강의 말에 연무진이 흐음, 하고 신음을 흘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정말로 누구인지 떠올리기 위해 머릿속을 더듬는 것인지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해서 생각하는 척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다마다. 효기교위가 아니더냐. 그런데 왜 그 사람에 대해서 묻느냐?”
오늘 만나자는 약속은 연무진이 먼저 요청한 것이었다. 비서랑이 된 것도 축하하고, 가끔은 이렇게 마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그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물론 연서강은 괜찮았다. 저번의 일로 다소 연무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연무진이 아주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군의 사방장군 중 하나인 남장군을 역임하고 있는 연무진이니 무관들에 대해서 빠듯하게 알고 있고도 남았다. 이런 시시콜콜한 정보를 얻기에는 연무진 만큼 좋은 사람도 없는 것이다.
연무진이 만나자고 한 곳은 예의 저번의 그 주루였다. 여전히 내부에 손님이 별로 없고 자리가 칸칸이 막혀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문득 연서강은 일전에 제태상과 함께 갔었던 ‘청다관’을 떠올렸다. 그 찻집도 역시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딱 좋았었다.
연서강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희 집을 드나드는 그를 보았습니다.”
허언은 아니었다.
그에 연무진이 ‘이런.......’ 소리를 내며 팍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보았단 말이냐.’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 약간이라도 뭔가 알고 있는 듯해 연서강은 최대한 천진한 얼굴로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연무진이 연서강의 얼굴을 잠깐 살피더니 ‘아니, 뭐 잘못된 것은 아니다만.......’하고 중얼거렸다. 이제껏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동생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줘도 될까, 하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곧 연무진은 이 정도는 괜찮겠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황후마마의 외가 쪽 친척되시는 분이다. 가끔 무강 형님과 마찬가지로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을 돕는 듯 하더구나.”
“그렇군요. 낯선 사람이 대뜸 집안을 돌아다니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뭐, 별일은 아닐 거다.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 해.......”
저번에 함께 술을 마신 이후, 연무진은 연서강을 대하는 게 한결 편해진 모양이었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는 ‘자네, 자네.’하며 사이가 섭섭한 티를 내더니 두 번째 만남에서는 ‘너’로 호칭이 고정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듯한 대답에 연서강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나, 해서 그는 손안에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최대한 여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군요. 이번 일에 무진 형님은 동참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너!”
듣자마자 연무진이 반응했다. 그가 자리에서 튀어오를 듯 놀라 입을 열었다가 이내 상체를 낮추고 소리르 줄여 연서강에게 속삭였다.
“네가 어찌 그걸 아느냐?”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연서강은 대답했다. 연서강이 보기에 셋째 형인 연의진과는 달리, 연무진은 부친의 권위 앞에서 무척 약해지는 사람으로 보였다. ‘부친’이란 말을 들먹이면 그가 무어라 더 의심하지 않고 넘어갈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무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아버님이 네게 말을 했다고?’ 그거 참 의외구나, 그런 말조차 없었다.
잘 되었다, 하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말소리를 낮추어 연무진에게 물었다.
“허나 아버님께서 모두 말씀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간단한 심부름 정도에만 저를 쓰실 것 같습니다. 해서 모르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너는 아직 어리고 고작 비서랑을 맡고 있으니.”
“.......그렇지요.”
고작 비서랑, 이란 대목에서 연서강은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높은 관직에 올라야 했었던 것이다. 허나 이미 다 끝난 일이었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 해도 경내에 있을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이내 목소리를 달리 하여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헌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어냐?”
아직까지 연무진은 아무 의심이 없어 보였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의 이유입니다. ‘왜’ 아버님께서는 그런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그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연서강은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힐끗 연무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래 ‘왜?’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 기연조를, 아니, 기씨 문중과 적대 관계가 되었는지. 그저 단순한 권력 다툼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혹여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게 된다면 이 ‘일’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그 ‘일’이 무엇인지를 가장 알고 싶었지만, 상대로부터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이미 ‘일’이 무엇인지 안다 했으니 그것만큼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으면 연무진이 입을 열지 않았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문에 최대한 ‘일’이 무엇인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게 연서강은 우선 정보를 모을 셈이었다.
“왜, 라니.......”
연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너는 이제야 궐에 들어갔으니 모를 수도 있겠구나. 다들 쉬쉬하고 있는 이야기이니.”
그가 어렵게 입을 연다. ‘대놓고 말할 거리는 못 되지, 아무래도.’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하고 묻자 연무진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마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연무진이 말한다. 황후마마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연서강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연서강은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연무진을 응시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혹여 권력욕이라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황상과 난전(蘭殿: 황후의 궁전, 황후)께서는 현재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시다.”
처음에는 말을 꺼내는 것을 몹시 어려워했던 것에 비해 그 뒷말은 비교적 수월하게 나왔다. 그런 연무진의 태도에 연서강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 이 사람의 성격 탓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연무진이 꺼내는 말이 더 신경이 쓰였다.
“현재 황상께서는 장한궁(長閑宮) 비씨에게 푹 빠져 계시지.”
“.......장한궁이라면, 귀비 비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현 황제에게는 역대 황제가 대부분 그랬듯이 곁에 다양한 여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가 황후를 맞이하여 성혼한 것은 황제가 열두 살 때의 일로, 아직 황태후의 섭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황후의 나이는 황제보다 네 살 연상인 십육 세로 이미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문무(文武)와 방태(芳態)를 모두 겸비한 팔방미인이었다. 그 이후, 관례(冠禮)를 올리고 어엿한 성인이 된 황제는 곧 여러 여인을 비로 맞이했다. 그 중 귀비 비씨는 승상의 외가 친척으로 황제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다.
허나 연서강이 궐내에서 듣기로는 장한궁 비씨는 얼굴이 아름답기만 할뿐, 그리 현명하지도 못했고 또 성격도 어질지 못하다고 했었다. 설마 자신이 알아내야 하는 것과 큰 관련이 있겠나 싶어 흘려들으려고 했지만, 궁인들이 난전 마마와 귀비 비씨를 비교해 수군거리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에 들어온 정보였다. 변덕이 얼마나 죽 끓듯 하는지, 기분이 좋아 깔깔거리다가도 다음 순간 바로 돌변해서 신경질을 내서 시중을 드는 궁인들이 늘 고생이라고 했었다.
“해서, 황후마마께서는 늘 마음이 편치 못하시다. 그럴 만도 하지. 심지어 이전에는, 황상께서 장한궁 비씨의 장자를 황태자로 새로이 세우고 싶다 말씀하신 적도 있으시었으니.”
“예?”
말을 들은 순간 연서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정후인 황후께서 생산하신 황자가 버젓이 버티고 있거늘, 고작 빈잉에 불과한 귀비에게서 본 황자를 황태자로 삼겠다니. 그렇다고 현재 국저(國儲: 황태자)로 세워진 황자에게 무언가 신체적,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적자를 두고 귀비의 아들을 황태자로 봉하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황제의 속뜻을 연서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곧바로 연서강은 아니....... 하고 고쳐 생각했다.
연무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귀비의 미모와 교태에 넘어가신 게지.”
아니, 사실 그 속뜻은 매우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태후 마마의 섭정에서 벗어난 지가 오래이나, 여전히 황태후 마마의 치마폭에 폭 싸여 계시는 폐하이시다. 아무리 황상께서 황태후 마마의 손에서 크셨다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황태후 마마께서는 황상의 생모되시는 황귀비 마마의 원수이기도 한 분이 아니더냐. 마냥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정황상 근거가 너무도 확실해서 보통 사람 같으면 어찌할 수 없이 꺼려질 터인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황태후 마마께 따르고 순종하시더니.”
“.......”
“성정이 아직도 어리신 게지.”
연무진의 말이 황제에 대한 모욕인 걸 알았지만 연서강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언뜻 저잣거리에서 들었던 기연조의 말이 떠올랐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영안궁 마마를 모후로서 지극히 공경하고 계시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라면 황귀비님의 소생인 황상폐하께서 영안궁 마마를 이리도 잘 따르시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 기연조와 연무진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허나 심적으로 연서강은 연무진의 의견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그도 처음에 괜히 황태후 마마를 의심한 게 아니었다. 확실한 물적 증거는 없다고 하지만 정황 증거상 황태후가 황귀비 기씨와 전 황제를 독살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나 연무진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보는 게 당연했다.
연무진이 탄식했다.
“서강이 네가 생각해도 참마로 말도 안 되는 말씀이 아니냐. 아무리 장한궁 비씨를 총애하신다지만 후궁을 귀애하는 것과 국사(國事)는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야 하는 일이거늘, 더더군다나 저군(儲君: 황태자)께서는 장한궁에게서 본 황자보다 연치도 높으시다. 무엇보다 국모(國母)께서 낳으신 적자이신데, 귀비의 말에 홀려 그와 같은 망언을 하시다니.”
당시 너무도 답답하게 생각하며 넘겼던 기연조의 말과 달리 연무진의 말은 귀에 너무도 잘 들어왔다. 마치 이게 진짜, 진언(眞言)처럼 들렸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정실이 낳은 적자를 두고 후궁인 귀비에게서 본 황자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정상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황상께서는 장한궁을 황후 마마의 침소보다 더 자주 찾으시지. 심지어는 황후마마와 얼굴을 마주하시는 것도 중요한 나라 행사 때가 아니면 전연 하지 않으신다고 들었다. 우리 황후마마만 가엾으시지. 어린 생각을 가지신 폐하 때문에 황후마마께서 그런 수모를 당하시고, 나아가 적자이신 황태자 마마까지도 폐위 되실 뻔 했었다니.”
“폐위되실 뻔 했습니까?”
연서강이 놀라 묻자, 연무진이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더 작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황상께옵서 국저를 새로 세우고 싶다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그것이 그저 무심코 흘린 망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 황태자를 새로 책봉하자고 조례에서 정식으로 말을 꺼내셨단다. 황태후 마마와 기씨 문중은 찬성했고 당연히 우리 연씨 문중과 다른 이들은 반대했다. 황후마마께옵서도 황망해 하시며 이유를 따져 물으셨지. 그에 폐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럴 듯한 명분도 없는 데다 다수의 고관들이 말도 안 된다, 항의하여 겨우 폐하가 포기하셨다.”
“.......”
“허나 이후로 귀비 마마에게 좋지 않은 무리들이 붙기 시작하였다. 세력을 키운 그들은 기씨 문중과 손을 잡고, 다음 해에 또 폐하께 황태자를 다시 새로 책봉하자고 건의를 할 생각인 모양이더구나. 문제는 그것들이 황태후 마마께 어떤 수를 썼는지 몰라도 황태후 마마께서 그것을 묵인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황궐의 큰 어르신이라면 마땅히 궐내의 질서를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거늘.”
쯧쯧, 혀를 차는 연무진의 말에 연서강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연무진의 말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기에 그랬다. 그러다 연서강이 간신히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고는 신음과 비슷한 중얼거림이 전부였다.
“허면.”
머릿속이 새하얗다.
“.......허면.”
황후마마 쪽이 나쁜 게 아니란 말인가?
황제가 여태까지 황태후 마마의 치마폭에 폭 싸여있든 말든 연서강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황제가 귀비 마마를 총애하든 말든 역시 상관없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 기연조에 대한 것뿐이었다. 현재 권세를 누리고 있는 연씨 문중에서 기연조를 죽였고, 그건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거였다.
연서강이 알기에 기연조는 대쪽 같은 성미를 지닌 이라 절대 나라에 위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는 선량했으며 또 신의가 깊었다. 기연조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연서강은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를 살해한 연씨 문중이 당연히 악한 쪽일 거라, 연서강은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도덕적이고 충의가 깊은 기연조를 연씨 문중에서 눈엣가시라 보고 처치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가 기연조를 살리는 일에 박차를 가한 것도 맞았다. 연씨 문중에서, 황후마마 쪽에서 가을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 윤곽도 확실치 않았지만 그건 마땅히 도덕적 잣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좋지 못한 일이라 그는 확실시하고 있었다.......
헌데.
“아버님께서는 그런 황후마마를 돕고자 하시는 거다.”
그런 그의 귓가에 연무진의 말이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황후마마를 도와 그릇된 일이 일어나는 건 막고 싶으신 게지.”
.......어느 쪽이 정당하지?
연서강은 떨리는 눈으로 연무진을 응시했다.
대체 어느 쪽이, 부정한가.
“.......”
숨이 막힌다.
연무진이 탁자 위를 탁탁,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해서 서강아, 아버님께 들었는데 너도 기연조가 어찌 하여 네게 접근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비겁한 자들이다.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가만히 계시는 황후마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황귀비 기씨를 독사했다는 혐의가 있는 황태후 마마와 아랑곳 하지 않고 손을 잡는,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야.”
연무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말로 더럽고 비겁한 놀량패들을 보는 듯 그의 시선이 차가워져 있었다. 저 시선은 진심이었다.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연무진이 교활하게 작전을 짜고 사람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던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건, 진실이었다.
“이제 와서라도 네가 기연조의 그 더러운 뜻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연무진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언뜻 연서강은 기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기연조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날의 기억이었다. 가을에 열렸던 연회, 단풍 연회. 기껏해야 관상용인 나무를 왜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워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던 기연조. 그에 자신이 무어라 대답을 했더라.
그래, ‘태후전’에서 좋아하신다고.
생각났다.
그 연회는 태후마마의 명으로 열렸던 연회였었다.
날도 좋고 바람도 좋으니 태후마마께서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열고 싶다고 하였다. 마침 태후전 앞의 정원에 단풍도 곱게 물들었으니, 조정대신들을 모아 그들의 공을 치하하고 노고를 풀어주고 싶다고. 황제는 흔쾌히 승낙했고, 이후 각 조정대신들의 집에 공문이 날아왔었다. 그 공문을 아버지 연무의가 찌푸린 얼굴로 읽은 후에 내뱉었었다.
-분명 또, 황후마마를 욕되게 할 속셈이시겠지.
.......그 연회에서 기연조를 처음 보았다, 연서강은.
“.......”
또 기억나는 게 하나 있었다.
깨어진 도자기 파편 같았던 기억들이 갑자기 손 안으로 모여들어 커다란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끼워 맞춰진 기억은 연무강에 관련된 것이었다. 연서강이 기연조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무강이 그에게 몹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생각 없이 사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차갑게 나무라는 그 말을 연서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의아한 얼굴로 연무강을 보자, 연무강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나중에라도 사실을 깨닫고 잔혹하다 생각하지 마라. 네놈이 멍청해서 화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니.
그랬었다.
어째서 연무강이 자신더러 그런 경고를 했었는지 연서강은 이제야 깨달았다. 잔혹하다는 그 표현을, 연서강은 단지 기연조가 연씨 문중과 적대 관계에 놓여있는 기씨 문중 사람이기 때문에 연무강이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자신이 자초했다는 그 ‘화’란 바로 자신이 맞이한 ‘죽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무강의 그 말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잔인한 경고였던 것이다.
“.......”
기연조가 나쁜 놈이라고?
아무리 세상사는 이치를 나 몰라라 하며 녹우당에 기거했던 연서강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어느 쪽이 부당하고, 어느 쪽이 좀 더 공명정대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머릿속은 그리 딱 잘라 결론을 내렸지만 어째서인지 연서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환히 웃고 있는 기연조의 얼굴이 그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가, 나쁘다고?
연서강은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서강아.”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서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연무진이 그를 걱정스레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속이 안 좋으냐? 그렇지 않아도 의진이 그놈이 널 끌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던데.’ 그 말을 듣고 연서강은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깨는 다 나았습니다.’
그러니, 하고 말을 이으려던 연서강은 다음 순간 울컥 치솟아 오르는 감정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연무진의 이러한 말, 연의진의 그러한 행동들. 연서령의 편지와 연의향의 염려들.
딱 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기연조에 대한 의심이 단단하게 다져놓은 그의 마음에 균열을 만들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뭔가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가족’들은 사실 음모나 흉계 따위를 꾸몄던 것이 아니라 잘못 되어가는 정세를 바로 잡고자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그 한 순간.
그 한 순간의 빈틈.
한 줄기의 의심이 그 빈틈을 헤집고 거미줄처럼 수십 개의 금을 만들었다. 쩍,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그 틈새로, 지금껏 가까스로 안에 눌러두었었던 감정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기연조’가 틀리고, ‘가족’들이 올바르다고? 순식간에 반전되어 버린 생각과 함께 흘러나온 감정들이 서로 섞여 엉망으로 범벅이 되었다.
버려져 있다 간신히 사람의 손에 주워진 강아지마냥 그는 본채에 머물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제야 겨우 자신을 인식하고 챙겨주기 시작한 가족들의 관심과 호의가 성가시고 거치적거렸지만, 그래. 솔직해지자. 그것이 연서강은 내심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그들에 대해서 결코 좋은 인상을 갖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고 배척 받아온 기억이 길었던 탓에 ‘가족’들이 잔혹하고 매정하다는 생각은 아직도 여전하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뒀던 사람들이기에 아무리 해도 가족들에게 허심탄회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것이 연서강은 싫지가 않았다. 당연했다. 어느 누가 ‘가족’에게서 미움 받고 배척 받길 바라겠는가. 미움을 받는 것과 사랑받는 것.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누군가 자신에게 말한다면 자신도 당연히 후자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 ‘여름’은 저번과 확실히 다른 ‘여름’이었다. 연서강은 이제까지 ‘가족’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고, 얼굴을 오래 마주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겨울’에 기연조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버렸던 사람들이다. 기연조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가 죽은 기억도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자신이 연무강의 칼에 죽었었던 기억도 새긴 것처럼 선명했다.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친구를 살리고 싶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고 여전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말이 맞았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둔 ‘가족’들이기는 하나, 그 친구의 ‘말’이 틀릴 수도 있었다. 정말로 그 친구가 ‘잘못’ 된 것이라면, 그런 거라면.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무엇을 우선해야하지?
문득 연서강은 답장을 여태 보내지 못한 연서령의 편지가 기억났다. 연의향이 ‘내 동생’ 운운하며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말도 덩달아 생각났다. 그리고 연의진이 상처가 덧났을 때 해주었던 말들도.
또.
“서강아, 괜찮으냐?”
걱정스레 건네는 말에 연서강은 겨우 눈을 뜨고 연무진을 바라보았다. 연무진이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가 괜한 말로 네 머리를 어지럽게 한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연무진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다. 그 목소리에 연서강은 턱 숨이 막혔다.
또, .......연무진이 자신과 어떻게든 잘 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들도.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보이는 건 보이고, 들리는 건 들렸다. 모른 척 외면하고 억누르고 쓸모없는 것이라 치부하고 다짐해도, 느껴지는 건 있었다.
연무진과 헤어져 연서강은 바로 녹우당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는 모씨 아줌마를 시켜 기연조에게 연통을 넣었다. 지금 당장 녹우당으로 와달라고. 할 말이 너무나도 많다고. 연무의가 기연조를 만나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한지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여 후에 사실을 알게 된 연무의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호통을 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알고 싶었다.
기연조에게, 자신이 연무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정녕 사실인지.
궐내에서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자신은 연무진이 들은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든 생각이 그거였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기연조에게도 물어보자. 연서강은 간절히 기도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연조에게도 물어보고 난 후에 연무진이 한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파악해보자. 그렇게 하면, 어쩌면 다른 길이 나올 수도 있었다.
연통을 넣은 지 얼마 안 되어 기연조가 녹우당에 도착했다.
이미 주변에는 완연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더운 여름밤의 공기는 꿉꿉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달콤한 꽃향기까지 어울려 공기는 더더욱 숨쉬기 부담스러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평소라면 좋은 향기에 어울리는 즐거운 순간이라 생각하며 좋아했을 텐데, 이때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너무 짙은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키고 머릿속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연서강은 어둠 속에서 기연조의 모습을 보았다. 멀리서 자신을 발견한 기연조가 반가운 듯 ‘갑자기 웬일인가?’하고 물으며 다가온다. 웃으며 자신에게 오는 사람인데도 연서강은 차마 그를 따라 웃지 못했다. 폐 속에 한기가 그득했다.
“들어가서.......”
“대답해주게.”
연서강은 기연조의 소매를 붙잡았다. 여름용이라 까끌까끌한 소재의 옷감이 그의 손가락을 긁었다. 사람의 온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재질에, 연서강은 어째서인지 뱃속에 수 천 개의 수포가 버글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말에 기연조가 당황하며 ‘갑자기 왜 이러나.’하고 연서강을 달랬다.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연서강은 주춤하지도 않고 곧바로 캐물었다. 한 순간이라도 망설였다가는 영원히 기연조에게 묻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자네, 아니, 아니. 황상께서 황태자를 다시 새로이 책봉하고 싶다 밝히셨다는 말이 사실인가?”
연서강의 질문에 기연조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나.’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와 태도에 연서강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기연조가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연서강의 손등을 쓸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자네 비서랑으로 일하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듣는 소리가 많은가 보군.”
상대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기연조가 대답했다.
“사실이네. 헌데, 그걸 왜 물어보는가?”
“.......”
연무진의 말 중 하나가 진실이 되었다. 그러자 연서강의 다음 말로 옮기기가 너무도 두려워졌다. ‘그러면.’하고 입을 열었던 연서강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던질 다음 질문에 기연조가 무어라 대답할지 벌써부터 겁이 났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연서강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기연조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마 내년에 장한궁 마마 소생의 황자께서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실 걸세.”
“.......”
아니, 어쩌면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었던가.
말문이 막힌 채로 연서강은 기연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기연조는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기연조는 ‘여기’가 연무의의 자택 안이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는 ‘녹우당’이긴 하나 엄연히 연씨 문중에게 소속된 곳이거늘. 그것도 아니면 기연조가 자신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나, 시험을 해보는 것이라든가.
“.......그.”
연서강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대답에 기연조가 생긋 웃었다.
“말 그대로의 뜻이다, 강아.”
기연조의 단려한 이목구비가 녹우당 불빛에 비쳐 겨우 연서강의 눈에 들어왔다. 기연조는 아무 동요도 없이 연서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요, 여전히 자신을 향한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말 곱고 좋은 이인데, .......어째서인지 연서강은 무서워졌다.
“.......황상께서 장한궁 마마의 미모에 홀려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신다는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연서강은 변명과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그 말에 기연조가 한숨을 내쉬고 ‘그래, 그래서 우리들이'하고 무언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면 되었다. 그렇기만 하면 한 번 죽음을 맞기 전의 기연조가 이 ’여름‘의 기연조와 같은 사람이라고 연서강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강아.”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황상께서는 모든 일을 제대로 보고 계신다.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그러나 차갑고 냉랭한 말투였다.
연서강은 숨을 삼켰다. 미소 짓고 있던 기연조의 얼굴이, 어느새 조금 굳어 있다는 것을 연서강은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운 밤이었다. 변방에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덥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덥고 끈끈한 바람은 연서강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끈적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폐하께오서.”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부들부들 떨었다.
“폐하께오서 황태후 마마의 치마폭에 여태 싸여있다는 말은.”
그 말에 기연조가 설핏 인상을 썼다. ‘강아.’하고 그가 연서강을 부른다. 그 목소리와 호칭, 전부 옛날과 같았다. 그러나 같지 않았다. 되돌아오기 전의 그와 판이하게 달랐다. 모두 달랐다. 연서강은 이를 악물고 기연조를 응시했다.
그때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황태후 마마께서 황귀비 마마를 독살하셨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오더니, 이제는 그런 말이냐. 짓궂구나, 네 곁의 사람들도.”
“.......”
“이전에도 말했지만 황상께서는 황태후 마마를 모후로서 지극히 공경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황상께서 황태후 마마의 치마폭에서 여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니. 그것은 못난 사람들이 황상을 모함하는 말이다. 당장에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불경한 소리를, 자네는 대체 어디서 그렇게 듣고 오는가.”
맞다면 맞고, 틀리다면 틀리다고 볼 수 있는 소리였다. 당연히 연서강은 기연조의 말이 옳고 연무진의 말이 틀리다고 여겨야 했었다. 이제까지 그는 죽 그래왔었다. 기연조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리로 받아들였었던 것이다.
허나 지금 연서강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당혹스러워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주춤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강아.”
기연조가 자신이 물러선 만큼 한 발자국 자신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 쪽을 보라는 뜻이 묻어나왔지만 연서강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자꾸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흔들렸다.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웠다. 기연조는 죽기 ‘전’과 다르지 않는 것 아니었나. 바뀌지 않는 것 아니었나. 기연조를, 자신은, 그래서.
“내가 자네를 언제 한심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짙은 꽃향기처럼 달콤하게 연서강의 귀에 맴돌다 떨어졌다. 연서강의 팔을 기연조가 붙잡았다. 흠칫, 몸을 떨었지만 연서강은 차마 상대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그는 기연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녹우당에서 소요하며 지내는 자네만으로 충분하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었나.”
그랬었다. 마치 잘못을 저질러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연서강은 입술을 달달 떨었다.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기연조의 손힘이 점점 강해졌다. 이윽고 절로 신음이 나올 만큼 잡힌 자리가 아파왔지만 아프다는 소리조차도 연서강은 내지 못했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랬는데.’, 기연조가 아릿하게 되뇌는 말이 비수가 되어 연서강의 심장을 찔렀다.
“.......왜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 강아?”
말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공기 중에 퍼져 있었던 불안감이 파문처럼 번져 술렁거렸다. 자신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연서강은 기연조를 응시하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연서강은 일전 기연조의 ‘위로’가 그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네가 열심히 했다는 걸 알아.
자신은 그 말을 듣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노력해도 되네.
-이만 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 그만 예전처럼 돌아가 평온한 삶을 누리도록 하게나.
그 모든 말이 사실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연서강은 기연조가 당시 했던 말이 진실로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연조는, 기연조는.
“.......”
바라본 기연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연서강의 얼굴에서 모든 대답을 읽은 듯 했다. 늘 기연조는 그랬다. 연서강이 말로 감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제나 어렵잖게 잡아내어 안심시켜주곤 했었다. 다정하게 위로해주었고, 따뜻한 말로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주었었다. 그랬으니 이번도 기연조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연조의 얼굴은 어쩐지 슬퍼보였다.
“녹우당에 틀어 박혀 언제까지고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오지 말지 그랬어.”
그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달콤한 공기가 무겁다. 여름이었다. 아아, 두 번째이긴 하지만 처음인 ‘여름’이었다. 연서강은 멍하게 기연조의 얼굴을 응시했다. 하나도 아름답지 않고 모든 것이 엉망인 ‘여름’이었다.
연서강은 이대로 ‘기연조’를 위해 ‘가족’들을 희생시켜도 좋을지 처음으로, 망설였다.
* *
“시키는 대로 했소.”
연무강은 집무실로 들어와 툭 말을 내던지는 연무진에게 흘깃 시선을 주었다. 점검해야 할 마지막 보고서까지 모두 본 뒤 그는 부관에게 그것을 넘겼다. ‘이대로 처리해.’ 짤막한 명령에 부관이 재빨리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연무강이 딱히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옆에서 모신지 오래된 부관은 지금 연무강이 자신이 빨리 사라지길 바란다는 것을 어렵잖게 파악했다.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부리나케 나가는 그를 보던 연무진이 이내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가르쳐 줘도 괜찮소?”
“아버님께서 시키신 일이라 하지 않았나.”
못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낯빛이 어둑어둑한 연무진을 향해 연무강은 툭 던지듯 대답했다. ‘허나.’, 연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다가 곧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설사 부친 연무의가 시킨 일이라고 연무강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해도 자신은 군소리 없이 그의 말을 이행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친 연무의도 연무강을 신뢰하고 있어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푹 연무진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충격을, 받은 듯 했는데.”
“역시.”
여전히 연무강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 태도에 연무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인정머리 없기는.’
연무진이 연서강을 만나 ‘명령’을 들은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때 연무강은 이미 연무진이 연서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을 알고 있었다. 연무강과 연무진이 서로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형제 사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무진에 비해 치밀한 연무강이 자신의 직함을 이용해 많은 곳에 자신의 눈과 귀가 될 만한 이들을 뿌려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무진의 부인인 안계영 역시 연무강에게 고용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연무진과 연서강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연무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서로를 피하던 연무진과 연서강이 갑자기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새 소식에 깜깜한 연의진조차도 아는 정보였다.
연무강은 연무진을 불러 연서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간단히 물어 보았다. 연무진도 연서강이 집안에서 그간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적과 친한 집안의 천덕꾸러기. 지금에 와서는 부친에게서 인정을 받아 달리 취급되고 있을지 몰라도, 과거의 잔재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연무진은 그래서 연무강이 자신을 불러 연서강과 나눴던 대화를 시시콜콜하게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연무강의 말은 곧 연무의의 말이었고, 연무진은 아버지의 일에 깊숙이 발을 들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거들고는 있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연서강과 그 날 나눴던 대화는 거리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연무진은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어느 정도 지난 후, 연무강이 연무진을 불러 돌연 ‘명령’한 것이었다. 형제 사이였지만 연무진은 그것을 부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의 내용은 이랬다.
-조만간 연서강이 네게 무언가 물어볼 텐데, 특히나 황후마마의 사정을 잘 말해 주어라. 네가 아는 대로 숨김없이.
적당히 숨겨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잘 말해 주어라, 라니 연무진은 의아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연무강에게 물었다. ‘혹, 아버님께서 시키셨소?’ 연무강은 그 물음에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
연서강에게 있어 ‘황후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는 것은 집안에서 금기시 되어 있었다. 연서강이 연우비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기연조와 어울려 지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기연조를 믿고 따라야 기연조도 방심하지 않겠느냐. 때문에 연무의는 연서강의 귀에 결코 황후마마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니 기연조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도 ‘침묵’해라. 연무의는 연서강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있기에 연서강이 기연조와 친해지는 것을 막지 않다니. 아이는 늘 항상 자랄 때, 무언가를 의지해서 자라기 마련이었다. 연서강은 ‘가족’이 빠진 빈자리를 기연조로 채울 것이 분명했다. 기연조를 믿으며 그가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며 따르겠지.......
그리고 기연조도 그런 그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리라.
-서강이가......, 알게 되면 충격 받을 텐데.
그에 연무강의 대답은 이랬다.
-기연조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고 해도 여전히 사이좋게 지내는 어리석은 놈이다. 허니,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것을 깨달았다면, 바로 잠에서 깰 수 있게 마땅히 도와줘야지.
그렇게 대답하는 연무강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마 아버님이 서강이에게도 조만간 명령하실 것이다. 기연조와 떨어지라고. 녹우당에서 본채로 돌아오길 마음먹었다면 아예 돌아올 수 있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때와 비슷한 목소리로 연무강이 말한다. 연무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기는 했다. 연무의는 연서강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 보였다. 그를 본채에 들이기로 했다면 이제 더 이상 그가 기연조와 노니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되었다. 앞으로를 위해서도 그가 기연조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었다.
“허나, 천천히 해도 되지 않소.”
연무진은 가까스로 입을 다시 열 수 있었다. 연서강도 기연조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 시간을 주면 그도 서서히 기연조에 대한 마음을 끊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막역지우(莫逆之友)였던 인연을 단 시간에 아무래도 단번에 끊기 힘들 테니까. 또 단번에 교류를 끊었다가는 기연조 쪽에서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연무진의 그 말에 연무강이 차게 웃었다. ‘천천히?’
연무진은 무심코 몸을 뒤로 물렸다. 요사이 연무진은 제 맏형인 연무강이 조금 무서웠다. 이제까지 봐 왔던 것과 다른 모습이 종종 보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연무강이 그런 연무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지?”
“.......”
연무진은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연서강을 미워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 맏형이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연무강이 연무의로부터 말을 들은 것은 연서강이 성헌당을 다녀간 지 이틀 뒤가 되는 날이었다.
연서강이 깨물었던 그의 손바닥은 이미 나은지 오래였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길고 오래 남아 있어도 괜찮다 싶었지만, 잔소리꾼인 연의진이 연서강의 상처를 돌보는 겸 연무강의 상처 또한 봐 주었기 때문에 상처는 금세 나아버렸다.
이걸로 되었소, 하고 연의진이 마지막으로 상처를 보러 왔을 때 말을 했다. 치료가 끝났지만 연의진은 연무강에게 무어라 할 말이라도 있는지 좀체 방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느냐, 묻자 역시나 예상이 맞았는지 연의진이 바로 대답했다. ‘서강이가 무어라 말하지 않았소?’
그 말뜻을 연무강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연서강,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무강은 참으로 간만에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연서강이 쓰러진 이후, 정확히는 그가 연무진의 방에서 연의진에게 치료를 받게 된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던 탓에 연무강의 귀에 그의 이름이 들릴 일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홀로 생각은 자주했었던 이름이기도 했다.......
‘놈이 무어라고 했더냐?’라고 연무강이 묻자 연의진이 살짝 얼굴을 구겼다. 그러더니 그가, ‘서강이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면 되었어.’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더 이상 무언가 연무강이 눈치 챘다간 사달이 나겠거니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무강은 연의진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난 후, 곧바로 연의진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연의진에게서 자신이 내 손을 물었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이놈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구나.
무뚝뚝하게 말하고 행동해도 연의진은 기본적으로 조화를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사람을 살리고 돌보는 일에 뜻을 두고 그 쪽 길을 선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또 집안에서 무언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도, 자신은 그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밝히기까지 한 그였다. 연무의의 앞에서 연의진이 ‘저는 태의령 밑에서 공부만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연무강도 바로 옆에서 보았었다.
그러니 필시 내색하지는 않아도 그는 자신과 연서강의 험악한 사이를 신경 쓰고 있으리라.
좋다. 어차피 연무강은, 연서강이 연의진에게서 그때 있었던 일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사과하러 올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놈이 쓰러진 원인자체가 자신에게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서강으로서는 마땅히 ‘무시’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죽 자신을 ‘회피’하는 것만은 안 된다.
그러던 와중에 들린 성헌당이었다. 자신의 부친인 연무의는 막간을 이용한 대화로, 그간 연서강과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요새 연무의는 연서강에게 막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 중 연무강의 심기를 심히 건드리는 게 하나 있었다.
-사모하는 이?
연무강이 되묻자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부친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단 말이다, 무강아.’ 그는 이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절대 경성 밖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더구나, 그 아이가. 이유가 경내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렇다니, 참 우습지 않으냐. 허참. 나라면 당장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이겠거늘. 하긴 사랑에 미쳐 온갖 부귀영화를 마다할 나이이기는 하지.
어리고 어리석도다. 혀를 끌끌 차며 연무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연무의는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연서강의 일이다. 벼슬자리를 추천해 달라 했던 것도 연서강. 경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싶다 좋은 자리를 마다한 것도 연서강이니 연무의로서는 그가 어찌 행동하든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저 그가 ‘기연조’와 얽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허나 연무강은 달랐다.
-사모하는 이가 있다고, 놈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 소리에 연무강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자신은 연서강을 어찌 하고 싶은 것인가. 요새 연무강은 그 ‘말’만을 하염없이 되풀이 해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가. 헝클어진 머릿속을 좀 정리하고 나면 무어라 떠오르는 해답이 보이겠거니,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죽어버리고 없는 유모 서씨의 무덤을 찾아 부관참시(剖棺斬尸)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리하고자 한다면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응어리진 분이 조금 풀리는 것이 고작일까, 허나 자신이 바라는 것. 원하는 것. 소망하는 것.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원하니?’
그것이 이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연무강은 자신이 대체 연서강에게서 더 어떤 것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있다손 치더라도 연서강이 자신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있으니 어떻게 더 해야 할지 오리무중에 빠진 상태였다.
‘녹우당’을 아예 부숴버릴 것을 그랬다. 그 놈이 녹우당에서 기연조나 다른 이와 정답게 지냈다는 생각만 하면 짜증이 났다. 그러나 ‘녹우당’을 부숴버리게 된다면 연서강이 더더욱 먼 곳으로 도망쳤을 테니,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무얼 해야 하는가.
그것만을 생각했었기에 연무강은 연무의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그렇다.
연무강은 입을 꾹 다물며 침묵했다. 그 연서강이 누군가를 사모해? 누구를? 연서강의 인간관계는 결코 넓지 않았다.
우선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사람은 홍월정에서 주웠다는 꼬마 계집애. 허나 그 계집애는 너무도 어렸다. 아무리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여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살았다지만 그렇게 어린 계집애에게 손을 뻗칠 만큼 변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계집애를 ‘연서령’으로 대신해 돌봐주는 것 같아, 그 아이만큼은 아닐 거라고 연무강은 주억거렸다.
허면.
그 다음에 떠오른 사람은 녹우당 살림을 총괄하는 모씨였다. 그러나 곧 연무강은 그녀도 아닐 것이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연서강에게 있어 그녀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모씨 또한 연서강을 어찌 해서 신분 상승을 해보겠다는 고약한 마음을 품을 만한 여인이 못되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연무강은 바로 막막해졌다. 연서강 곁의 여인들은 그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경내라니. 변방에서 만난 인연이라면 연무강도 모를 수 있었다. 하지만 경내라니. 녹우당에 처박혀 있다 가끔 밖을 나가는 것이 고작인 그에게? 밖에 나간다고 해도 기연조와 놀러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때때로 홀로 나와 소요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를 일정한 횟수로 만난다거나, 어디 잘 가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침내 괴이한 곳으로 미칠까, 싶었을 때.
연무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기연조.
-예?
놀란 연무강이 퍼뜩 머리를 들고 물었다. 연무의가 말을 이었다.
-기연조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기연조.
연무강은 그 이름에 이를 으득 갈았다. 기연조. 아직도 녹우당에서 연서강과 함께 있었던 그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그 놈도 충분히 나쁘거늘 어째서 자신은 안 되고 그는 된단 말인가. 연서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만 연무강은 그 옆에 기연조가 태연하게 있다는 게 너무나도 불쾌했다.
연서강이 연모하는 이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에 그 이름을 들은 것도 연무강은 짜증이 났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서강이 사모하는 이가 기연조라고 들었던 것이다. 미친 생각이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연무강은 바로 성헌당을 빠져나왔다. 아주 기분이 더러운 밤이었다. 연서강이 누군가를 좋아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는 것도 성이 났고 연서강이 감히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지, 대체? 그놈이 마음에 들어 한 놈이.
허나 그 불쾌한 기분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다. 연무진과의 만남에서도 그는 연무의에게서 들었던 말을 듣고 만 것이었다. 연서강이 ‘사모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라고. 연무진을 만나서 연서강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나오는 대답이 그것이었다.
-사모하는 이?
연무강의 말에 연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해서, 팔찌를 사러 갔소이다.’ 이어 나오는 말은 간단히 무시하면서 연무강은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들었을 때는 대체 놈이 사모한다는 이가 ‘누구’냐에 초점이 맞춰져 성만 났었지만, 두 번째 들으니 한 번 들어본 것도 들어본 것이라고 첫 번째 보다는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반응을 할 수 있었다.
사모하는 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여전히 연무강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앞에서 얼어붙은 채 쭈뼛쭈뼛 어떻게든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는 연서강의 모습이 지나갔다. 아니, 그건 이제 옛말이었다. 요새의 연서강은 건방지게도 자신과 똑바로 눈이 마주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요사이.......
무득 연무강은 기가 찼다. 요새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싶었건만 그래서였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근래에 그 놈이 수상하게 굴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참으로 이상타 생각했건만, 과연. 고 머리통 속에 ‘믿는 놈’이 있어 그리 당당하게 굴었던 것인가. 갑작스레 싹 튼 애정의 싹이 그로 하여금 용기와 책임감을 품게 했을지도 모른다.
짜증이 났다.
그 연모하는 이 때문에 연서강이 변한 게 틀림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아직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태인데, 그놈은 제멋대로 허락도 없이 감히 ‘사모하는 이’따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를 위하여 경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극정성인, 또 선물을 사다주고 싶을 정도로 지극정성인,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 때문에 행동에 변화를 가져올 만큼의 누군가가, 연서강에게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결코 아니었다. 깨달은 사실에 연무강은 차게 웃었다.
허면 좋다. 이 고약한 사실을 연무강은 좋게 웃어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연서강의 주변은 늘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런 것들에게 연서강은 쉬이 마음을 주곤 했었다. 유모 서씨도, 녹우당도, 기연조도, 홍월정의 계집도.
그 ‘사모하는 이’ 또한 그것고 마찬가지.
절대 연서강에게 있어 자신이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연무강은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글러먹은 일이었다. 그것은, 그러니 자신은 연서강에게 ‘사모하는 이’가 생기든 말든 새삼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연무진, 네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연서강의 마음에도 안 들까. 제아무리 연서강이라고 할지라도 연서강에게는 자신의 마음에 든 것을 곁에 둘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사모하고 그 옆에 머무르고 싶어 할 자유가 있었다.
그 자유를, 연무강은 인정했다.
자신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예정이었니.
-그렇게 하란 말이오?
자신의 말에 연무진이 얼굴을 구겼다. 반면 연무강은 즐거웠다.
부친인 연무의의 말이 맞았다.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가 덫인 걸 알면서도 오게 만들까, 궁리하는 게 무척이나, 자신을 매우 ‘싫어하는’ 생물이니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야 할지 알 수 없었따. 사냥을 하듯 조심조심히 연무강은 길을 만들었다.
여기로, 여기로.
자신이 싫어하는 주변의 것들을 모두 다 내버려두고 연서강이 여기로 떨어지길.
우선 맨 처음은 기연조였다.
원하는 건 일단, 그것 하나만으로 족했다.
곁에 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