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비서랑?”
연서강의 대답에 기연조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렇다네.’하고 연서강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비서랑이라면 웬만한 귀족 자제라면 제 부친이나 친족의 추천만으로도 충분히 들어찰 수 있는 직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딱히 특출한 특기나 장기가 없어도 연줄만으로도 임용 될 수 있는 자리였었다. 하기는, 하는 일이라곤 왕실도서관인 서서원에서 도서 및 문서를 관리하는 것뿐인 자리이니.
“허.......”
기연조는 상심해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무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렇게만 반응하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전쟁터에 가서 죽을 고생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그리 죽을 고생을 하고 왔건만 겨우 주어진 자리가 애초에 전쟁터에 갈 필요도 없이, 친족의 추천만으로도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낮은 직급의 자리라니.
“.......뭐, 어찌 되었든 이레 후면 자네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는군.”
내심 혀를 차던 기연조는, 친우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진 것을 보고 아차 싶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연서강의 찻잔이 빈 것을 보고 그 잔에 얼른 차(茶)를 채워주었다. 연서강은 아직 몸이 회복 단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연의진으로부터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기연조의 것만 술잔이었다.
“그런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연서강은 찻잔을 괜히 손 안에서 돌렸다. 잔 안의 찻물이 어지러이 뱅글뱅글 돈다. 찻잔 바닥에 그려진 푸른 잉어도 뱅글뱅글 돌았다. 온갖 꽃향기가 난만한 곳에 앉아 향기로운 꽃차를 즐기고 있으니, 눈으로 보기에는 이보다 더 운치 있는 광경은 없으리라 싶을 정도였지만 정작 연서강의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이럴 거면.”
하고 입을 열었던 연서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럴 거면 어째서 변방에 갔는지 알 수 없다. 왜 그 개고생을 했는지도!
자신이 거기서 했던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된 듯해서 연서강은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그런 연서강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기연조가 침묵했다. 그러더니 그가 흠, 하고 괜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다 싶더니, 입을 열다 말고 들고 있던 술잔만 단숨에 비웠다. 평소에는 그리도 말을 잘 하더니, 그런 그도 지금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를 모양이었다.
‘강아.’하고 기연조가 못내 안타까운지 연서강의 이름만 불렀다. 연서강은 긴 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 조심히 마셨다. 미적지근한 물이 속으로 들어가니 조금은 답답함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날숨에서 달짝지근한 매화 향이 났다.
그 모습을 말끄러미 쳐다보던 기연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리 되었네만 자네가 한 일은 결코 헛수고가 아니라네. 어찌되었든 변방에 있던 자네의 형제에게는 도움을 주었지 않나. 그리고 궐내에서도 자네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네. 저잣거리의 사람들도 자네를 아는 사람이면 제 일처럼 기뻐하더군. 또, 자네의 부친도 자네를 다시 보지 않았나.”
“.......”
“그리고, 나도 그런 자네가 자랑스럽네.”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빙긋,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기연조의 말이 가식이 아니라는 것은 연서강도 알고 있었다. 허나 기연조의 미소 짓는 얼굴을 마주하자 연서강의 속을 메운 것은 부드럽고 안온한 안도의 감정이 아닌 비릿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어찌 해야 하나. 눈앞이 깜깜해져서 연서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날에 성헌당에서 연무의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생각났다.
연서강이 성헌당을 들렸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연서강이 묵고 있는 방으로 하인이 찾아와 ‘도련님,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하고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몸이 여전히 편찮으시다면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인은 덧붙여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었다.
언제나 부친인 연무의의 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맨발로 헐레벌떡 뛰어나가기 바빴던 그였다. 그렇게 뛰어나가도 늘 항상 쯧쯧, 자신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었던 연무의였기 때문에 연서강은 하인의 말이 몹시도 놀라웠다.
어깨의 부상이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건만, 설사 다리를 다쳤다고 해도 부친이 부른다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가야했다. 이제까지의 그는 죽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태도도 그랬었고, 그런데 몸이 좋지 못하시다면 어르신께 가서 도련님께서 못 가신다 전하겠다니.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연서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면서 ‘성헌당으로 가서 말씀을 올릴까요?’라고 묻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서강이 ‘아니, 아니, 가겠네.’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성헌당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긴장되고 조심스러웠다. 허나 초롱을 들고 있는 하인을 앞세워 걸으면서 연서강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하인의 태도도, 성헌당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도. 그래서인지 성헌당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냄새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성헌당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부친 연무의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보였었다.
-몸은 좀 어떻더냐?
부드러이 묻는 말에 연서강은 순간 당황했다. 부친이 일전에 이런 목소리로 말했을 때는, 연서강에게 전쟁터에 가지 않겠냐고 권유할 때였었다. 짓궂은 의도가 섞인 농을 걸 때가 아니면 부친이 자신에게 이처럼 부드러운 말을 건넨 것은 처음이라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괜찮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사실 괜찮다고 표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의경의 군의관들에게, 또 연의진에게서 들었던 말처럼 자신의 어깨는 예전의 상태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자신이 무인이 아니라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이제는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할 만도 했지만, 연서강은 죽음을 담보로 한 것치고는 퍽 저렴하게 값이 치렀다 자위했다. 이만 하길 정말 다행이었다. 거기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수두룩했는데 어수룩한 자신이 이 정도에 그친 게 기적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연의진이 ‘생각보다 담대하구나.’하고 말하기도 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습니다.
조심스럽게 고쳐 말하는 대답을 들은 연무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슨 생각에서 나온 미소인지를 알 수가 없어 연서강은 살짝 긴장했다. 비록 자신의 부친이지만 연서강은 여전히 연무의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냥 쩔쩔매며 헤매지만은 않았다. 몇 번의 방문으로 이 의뭉스러운 분위기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연서강은 차분하게 입을 열어 여쭈었다.
-해서, 아버님. 저를 어떤 연유에서 부르셨습니까? 설마 소자의 상태를 보시려고 이곳까지 부르신 것은 아닐 터이고.......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음에도 살짝 떠보듯 물었다. 부친께서 자신을 부른 이유는 아마도 변방에서의 일, 그것일 터. 짐짓 모르는 척 입을 여는 연서강의 그 행동이 연무의를 어떤 연유에서인지 흡족하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몸이 어떤지 알려면 환자를 먼 곳까지 오라 가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진이를 불러 묻는 게 낫지.
연무의가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변방의 전투에 대해 적은 보고서를 보았다.
역시. 연서강은 튀어 오르는 흥분을 지그시 억누르며 ‘그렇습니까.’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혹여 얼굴에 자신이 품고 있는 기대와 설렘이 그대로 나타날까 연서강은 자신의 표정을 갈무리하는데 큰 고생을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무의가 다음으로 어떤 말을 꺼낼까에 온 신경이 다 쏠렸다. 부친께서는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자신을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다 느끼셨을까. 그 고생을 한 보람이 과연 있을까.
이윽고, 연무의가 입을 열었다.
-아주 잘 했더구나.
-.......!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연서강은 갑갑했던 속이 탁, 트이는 듯 했다. 그리고 기뻤다.
연무의의 앞이라 경박하게 웃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당장 녹우당으로 돌아가 기연조를 불러 그와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부친인지라 ‘겨우 그것 갖고 누구 코에 갖다 붙일꼬?’라고 하실까봐 참마로 걱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연무의가 마치 온화한 어른처럼 웃는다. 그러나 다음 말은 꺼내지 않았다.
-.......
무어라 더 이어질 말이 이어지지 않고 끊기자 연서강은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해서.’ 결국 먼저 조급히 입을 연건 그였다.
-이제 저를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과거로 되돌아오고 난 후, 처음 연무의와 성헌당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 당시 들었던 막연함도 초조함도 이제 끝일지 모른다. 그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일 년 열 두 달로 계산하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 모르지만, ‘겨울’이 한계점이라 생각하고 따진다면 벌써 3분의 1에 해당되는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 만큼의 시간을 투자한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 현재 연무의의 대답에 달려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연서강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연무의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암. 그렇고 말고! 내 향이의 편지를 받아보고 마음을 굳혔단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향이가 그렇게 오랜 시간 허비하며 변방에 처박혀 있어도 해결을 보지 못하던 일이었거늘. 그걸 네가 해결했어. 기특한지고, 향이가 네게 무척이나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여기서 ‘편지’란 연서강이 서회를 떠날 때 품고 왔었던 연의향의 편지를 말했다. 역시나 그 편지에는 연서강에 대한 고마움과 연서강이 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연의향의 의견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신하고 말아 후에 그 ‘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편지는 부친의 손에 무사히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리 가까이에 와 보렴.
연무의가 손짓을 했다. 거부할 이유도 없어 연서강은 조금 몸을 당겨 연무의의 앞으로 다가갔다. 연무의가 연서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무예 쪽에 재능이 없다면 학문 쪽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는데, 이 아비가 외곬수라 그런지 그 쪽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해서 오랜 시간 너를 내버려두고 말았구나.
-.......아, 아닙니다.
돌연 따뜻한 부정을 내보이는 연무의에 연서강은 황망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것도 그리 딱딱하고 냉정하게 굴었던 부친에게 말이다.
가슴 한 구석이 설렘이나 기쁨과 비슷한 감정으로 울렁거리는 동시에 연서강은 입 안이 써졌다. 아아. 아아. ‘내’가 쓸모가 있다는 걸 아니 이리도 대접이 달라지는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서글픔이 기쁨과 동시에 사무쳤다.
연무의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차라리 너를 내 아우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길 그랬다. 그 아이는 무예는 좀 떨어지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빨랐거든. 생각해보니 내 소매(小妹)도 그랬던 걸 잠시 잊고 있었구나.
소매....... 갑자기 언급된 자신의 어머니에 연서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의 모친이 어떤 사람인지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냥저냥 들은 일화로 이런 사람일 거란 짐작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부친이 누구인지도 자세히 몰랐다. 자신이 모친과 부친 중 어느 쪽을 더 닮았는지도 또한 모른다.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었던 유모 서씨가 말하기에는 자신은 모친 쪽을 더 닮았다 했지만, 그런 그녀도 연서강의 친아버지의 얼굴은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니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남아 있는 초상화도 없었다.
유모가 여태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연서강은 착잡해졌다. 그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진 걸 눈치 챈 연무의가 물었다.
-왜. 내 소매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랴?
-.......아닙니다.
허나 애틋함도 잠시였다. 지금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생모가 아니라 이번 겨울, 기연조의 생사여부였다.
모친이 언급될 때마다 궁금증은 들었지만, 현재 여기서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모친인 연우비의 이야기를 자신이 꺼내게 되면 분명 연무의의 마음이 돌아설 것이다. 아무리 자신에 대해 연무의가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도, 모친인 연우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음을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아버님, 허면 저를 관직에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판단은 역시 옳았다. 연서강의 질문에 연무의가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눈빛은 여전히 예리했다.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그가 연서강의 얼굴 요목조목을 뜯어보고 있었다. 연서강이 해난 일은 훌륭하고도 대견한 일. 허나 그것과 연서강을 ‘신뢰’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그렇게 연무의는 생각하는 듯 했다.
연서강은 순간 오싹해졌다. 자신을 뜯어보는 연무의의 눈은 뭔가 흠잡을 만한 것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내칠 것이 분명한 눈이었다. 흡사 면접관이나 판관과 같은 시선-.
불현듯, 연무의가 물었다.
-헌데, 좋은 자리에 너를 앉혀 준다면, 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 시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연서강은 순간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유,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연조를 이 집안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가을에 시험을 치는 것은 너무 늦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에 어허, 하고 연무의가 웃으며 혀를 찼다. 연무의의 눈이 슥 가늘어졌다.
-서강이, 네가 나와 말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못 본 사이에 퍽이나 담대해졌어. 허나.
그리 말하며 연무의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당겼다. 상처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계절 탓인지 그 순간 연서강은 방안의 공기가 살짝 덥고 끈덕지게 느껴졌다.
-때를 잘 가려야지, 강아. 예전에 분명 네 입으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유를 들으시면 사정없이 이 집안에서 내쳐질까, 걱정이 되어 말하지 않겠다고도 했었지.
-.......
그렇게 말하는 부친의 목소리도 걸쭉하게 갈린 먹물처럼 그의 몸에 치덕치덕 달라붙는 듯 했다. 더 이상 시침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연서강은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에도 바둑돌 같은 부친의 검은 눈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고 있노라니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연서강에게 몹시 익숙한 감각이었다. 위기감. 연서강은 예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약간의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그것으로 모두 끝-.
연무의가 살살 연서강을 꾀었다.
-자, 이 아비가 네게 관직을 약속하마. 제법 좋은 자리에 너를 추천해 앉혀 주겠다. 그래도 괜찮겠지. 암, 네가 변방에서 했다는 일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어떤 자리를 줘도 네가 잘 해낼 것 같다는 믿음과 신뢰가 생겼단 말이다. 그러니 서강아. 내쳐질까 걱정이 된다 했더냐? 이제 그 걱정일랑 훌훌 털고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가르쳐 주겠느냐? 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느냐?
-.......
-네놈 성격이라면 추천은커녕 가을에 있는 시험을 기다려도 이상하지 않건만 왜 그리 답지 않게 조급하게 굴었느냐?
끈질기게 묻는 말에 연서강은 혹여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속뜻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다. 자신이 되돌아온 사람이란 것을 벌써 다 알고 묻는 말이 아닐까. 자신이 연씨 문중이 아닌 기연조를 위해서 그리 행동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만 가지 의심과 공포를 연서강은 애써 없애 나갔다.
아니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속으로 되뇌며.
-혹여 ‘지금’이 안 된다는 건, 네가 아니라 기연조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냐?
연무의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연서강을 향해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자.’ 연무의가 나직히 흘린 말에 움찔 연서강은 등을 떨었다. 연무의가 이제 대답을 ‘요구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서강아. 아니면 이 아비가 괜한 의심만 늘 것 같구나.
-.......아버님.
-네가 갑자기 마음을 돌리게 된 이유가, 정녕 친우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보다 가까웠을 친우에게 마음이 넘어가서인지.
사실 부친께서는 그런 마음이셨나. 연서강은 긴장한 눈으로 연무의를 응시했다. 자신이 칠칠맞은 모습만 보여서가 아니라, 기연조 쪽으로 혹여 마음이 넘어간 게 아닌가 싶어 연무의는 자신이 못미더웠던 것이다. 이 의심을 풀지 못하면 연씨 문중 내에서 자신의 앞일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버님.’하고 부르며 연서강은 마른 제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게 마지막. 자신의 부친이 내는 시험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면 어설프게 대꾸해서 속을 들켜버리면 절대 안 된다. 연서강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을 믿어줄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왜 의향누님과 서령이를 그리 도왔겠습니까? 또, 변방에 의향 누님이 계속 처박혀 있길 바라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마음이 그 쪽으로 넘어갔다면 의향 누님이 변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방안을 제시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 멀었다, 하며 연무의가 운을 띠운다. 그는 연서강이 무슨 대답을 내놓을지 진실로 즐거워하는 듯 했다. 그의 입가에서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연서강은 그 미소를 보며 눈썹을 구겼다.
그가 무슨 대답을 내놓을지 기대한다면, 자신은 마땅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것은, 기연조가 아니라 황후마마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는 말을 뱉자, 그 말에 대한 반응이 금방 돌아왔다. ‘황후마마’란 말을 듣자마자 연무의의 얼굴이 살짝 굳었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의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무어라?’하고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연서강은 현재 최대한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말을 자아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저를 그리 의심하고 계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시기나 하시겠습니까? 기연조에게 현혹되어 그 쪽이 원하는 대로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 지금도 의심하시고 계시는 판에 제가 그에게 들은 것을 말하면 아버님께서 믿어주시겠습니까? 해서 아버님께 신의를 되찾고자 변방까지 간 것입니다. 물론 제 보신을 위해서도 맞습니다.
-해서?
되묻는 연무의의 말이 딱딱하다.
-그래서 소자는 가을에 있는 시험을 통하여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은 너무 늦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늦고말고요. 아버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연무의의 미간이 좁혀진다. 가슴 한 구석이 말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연서강은 애써 침착을 가장하여 말을 이었다.
-제가 연우비의 자식이라 제 존재가 황후마마께 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설사 황후마마의 흠이 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앞날이라 여겨져 보신을 위해 아버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 보신을 위해 가을에 있는 시험은 시기가 너무 늦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황후마마께 말씀드리기도 역시 늦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어라 이야기 했을 때 아버님께서 의심 없이 제 이야기를 믿어주신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님에게 신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변방으로 가도 괜찮았습니다. 나아가 제 말이 늦지 않고 황후마마께 닿는.
거기까지 말했는데 연무의가 ‘잠깐.’하고 그의 말을 끊어냈다.
-네놈, 무엇을 알고 있는 거냐?
연무의의 말에 연서강이 입을 다물었다. 연무의가 재차 물었다. ‘기연조 그 놈에게서 무엇을 들었느냐?!’하고, 다급해 보이는 그 목소리에 비로소 연서강이 웃었다.
-역시, 가을이 지나면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어라?
-황후마마와 관련된 일이, 조만간 있을 예정이라고 방금 아버님 자신께서 증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연서강은 상체를 꼿꼿이 하고 자세를 바로 해 연무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그 한 마디 말에 연무의가 얼굴을 와작 찌푸렸다. 당했다, 그 찰나의 반성이 그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소자가 아는 것은 황후마마와 관련된 사람들이 요사이 자주 이 집을 드나든다는 것과, 기연조가 제게 뭔가를 바라고 접근했다는 것입니다. 또 만약 황후마마의 신변에 흠 잡힐 일이 생기게 된다면 마마의 가장 큰 얼룩인 제가 위험해진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아버님, 제가 다급하게 아버님의 신의를 얻고자 노력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의심스러우십니까?
연무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연서강은 그런 연무의의 앞에 납죽 엎드리며 말을 이었다.
-돌연 목숨에 위험을 느끼고 살 방도를 찾기 위해 한 일입니다. 소자의 거짓말을 용서해주십시오. 지금 소자를 용서하여주신다면, 모자란 몸이지만 아버님과 연씨 문중을 위해 이 한 몸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
-부디 소자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여전히 연무의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연서강은 연무의에게서 허락을 얻을 때까지 엎드려 있을 작정이었다. 어깨의 상처가 쑤셔왔지만 저 깐깐하고 완고한 아버지에게 신의를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제발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리 속으로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래야만 했다.
후에 자신이 그를 배신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그는 자신을 믿어줘야만 했다.
이 대화로 확실히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가을일지 겨울일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연씨 문중에서, 아니 정확히는 황후마마 쪽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그 ‘일’에 틀림없이 기연조가 말려들 것이다. 시기로 보면 딱 맞았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연무의의 목소리가 연서강의 머리 위에서 퍼졌다.
-일어나라.
-.......
-일어나래도.
그제야 연서강은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건방지게 입을 놀려 정말로 죄송합니다.
말하자 연무의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우리 집에도 요런 여우같은 놈이 나올 줄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무슨 뜻한 말인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당장 불 같이 화를 내며 자신을 내쫓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불쾌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무의가 다시 입을 열자 그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말을 아주 줄줄 잘 하더구나. 그리 말 잘 하는 놈이 이제까지는 어찌 참았느냐?
-위기감을 느끼고 겨우 터진 입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연무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랬겠지.’ 그런 후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정말 요 사이 너에 대해서는 놀라기만 하는 구나.
-그건 좋은 의미......, 입니까?
경계하는 듯한 연서강의 질문에 연무의의 웃음이 짙어졌다. 비로소 오랜 시간 집안의 눈치만 살피고 살았던 아이다운 질문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은 의미다.
하고 대답하고 그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파란 띠가 둘러져 있는 서신이 들어 있었다. 익숙하게 편지를 펼쳐 탁자에 올려놓으면 연무의가 입을 열었다.
-마침 괜찮은 자리가 났더구나. 지리적 요건도 의경과 비슷하고, 상황도 단순한 도적떼라는 것만 제한다면 비슷하다. 가서 그냥저냥 있으면 내후년 봄에 다시 불러 네 공과를 평하도록 하겠다. 그때 상과 함께 좋은 자리에 배정해주도록 하마.
그 말을 듣고도 연서강이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만 하자 연무의가 그를 재촉했다. ‘읽어라.’ 해서 연서강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서신을 가져왔다. 그리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그 글을 읽었다.
-.......
연무의는 연서강이 글을 읽고 매우 흡족하게 여길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말한 그 ‘괜찮은 자리’는 남쪽에 위치한 한 주(州)의 방어사(防禦史)직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어사는 주의 방어를 맡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원래라면 무과에 정시 합격한 사람이 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허나 그곳의 도적떼가 들끓는 탓에 원래 방어사로 발령 난 사람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도적떼만 어떻게 처리할 요량으로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 연무의는 연서강을 추천했었다. 시험을 치지도 않았고, 경험도 없는 연서강이었지만 의경에서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추천할 수 있었다.
주의 정식 방어사가 따로 있기 때문에 연서강은 그곳에 가서 큰 부담 없이 그저 절도사에게 다소의 조언을 하고 주의 정식 방어사를 도와주면 된다. 만일 거기서 도적떼까지 처리하게 되면 공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골치 아픈 일도, 귀찮은 일도 적지만 일한 보람만큼은 확실한 자리였다.
-.......
그러나 연서강은 기꺼워하기는커녕 굳은 얼굴로 서신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뜻밖의 반응에 연무의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싫으냐? 허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가 있으려무나. 내년 봄에 다시 네 자리를 봐 주마.
연무의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야 연서강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도성 밖은, .......안 됩니다.
그랬다. 남쪽의 주(州)라니. 더구나 한 술 더 떠, 거기에 나가 잠자코 일을 보고 있으면 내년 ‘봄’에 다시 부르겠다니. 서신을 읽었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등잔불 밑처럼 어두웠던 자신의 머리를 탓했다.
너무 절박했었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했다. 공을 인정받아 연무의가 제대로 된 자리를 추천해준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게 꼭 수도 안에 있는 자리일리는 없는 것이다. 지방, 변방, 타국, 개척지, 벼슬자리는 어디에나 있었고, 연무의의 권세도 또한 어디에나 작용했었다.
-.......안 됩니다.
수도에서 나가게 되면 자신과 기연조는 자동적으로 헤어지게 된다. 기연조와 헤어지고 내년 봄이라니. 정작 일이 터졌을 때, 수도의 밖에 있게 되다니. 말도 안 된다. 내년 봄까지 도성 밖에 나가 있는 게 아니라, 내년 봄까지 자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여기 수도 안에 있어야 했다.
-어째서?
연무의의 여상한 질문에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무의를 보고 연서강은 암담한을 느꼈다. 자신이 내년 봄까지 꼭 수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순간 방금 써먹었던 ‘황후마마’에 대한 것이 떠올랐지만, 안 될 일이었다. 확실히 아는 것도 없어 위험부담이 큰데다가 자칫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오히려 기연조 놈과 결탁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다시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연무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리 고집을 피운단 말이냐. 서강아, 네가 공을 세운 건 전쟁터에서가 아니었느냐. 빛나는 무훈을 쌓았으니 당연히 그걸 인정해 그 쪽의 일을 소개해줄 수밖에 없지 않으냐. 허나 그 때 일과는 다를 것이다.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할 것이야.
아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도성 밖을 나가면, 자신은.......!
-아버님.
연서강은 대책 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자신이 세운 공을 세운 건 변방의 전쟁터, 그러니 그와 관련된 일을 부친이 추천해주는 게 당연했다. 아아, 그러니 변방이 아니면 다른 지방 쪽으로 빠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현재 수도는 전쟁도 없었고 전투는 없는 평온, 그 자체였다. 급박한 전세를 잃고 전술을 짜내는 지략가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데도!
그럼에도 그 사실을 거부하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말을 듣고 경악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변방에서 죽을 고생을 한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어깨까지 버려가면서 버텼던 건 대체 무엇 때문에?
‘헛수고?’
떠오른 단어에 연서강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연서강은 납죽 상체를 엎드렸다. 딱히 연무의에게 사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 이상 상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야가 어지럽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녕 쓸모없는 짓이었단 말인가? 그 생각과 함께 그의 입이 힘없이 열렸다.
-.......소자, 경, 경내에 사모하는 이가 있습니다.......
-오호라.
연무의가 그 말에 별 의심 없이 무릎을 쳤다. ‘어느 집 딸아이인고?’ 그가 묻는 ㅁ라이 연서가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아득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의 대답이 현재 연서강으로서는 사력을 다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는 그 이상 다른 말을 꾸며 말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래, 그랬던 거였군.
허나 다행스럽게도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연무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 했다. 연서강이 고백하고 부끄러워 그런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며 인자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서강아. 어쩔 수가 없구나. 네가 도성 밖을 나갈 수 없다면 지금으로서는 나도 기껏해야 비서랑 정도의 관직만 추천해줄 수 있단다. 서서원에서 국경의 정보를 새로 수정한다 하더구나. 그 일을 도와주렴.
-........
-후에 봄이 되면 내가 찬찬히 네가 일할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하마. 좀 더 좋고 아늑한 자리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자신이 무어라 대답 할 수 있겠는가.
연서가은 흐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연무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인자했다. 사랑에 빠져 좋은 자리도 마다하는 아들을 ‘허허, 어쩔 수 없구나.’하고 바라보는 아비의 얼굴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방에서 공을 세워 할 수 있는 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가을까지 어떻게든 기연조에 관련될 그 ‘일’에 대한 어떤 소실이라도 들을까 싶었다. 더 나아가 그 ‘일’에 자신이 개입할 수 있게 되어도 좋았다.
그랬던 그의 계획이 지금, 모두 와르륵 무너져 내렸다.
-.......
죽을 위기까지 겪었는데도 고작 여기까지인가?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말 죽을힘을 다했는데도 고작?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겨우 비서랑. 왕실도서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고?
부친의 신의는 얻었을지 몰라도, 이제 어떻게 해야 ‘황후마마’라는 아득히 먼 위쪽에 닿을 수 있을지 연서강은 암담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모의하는 무언가를 듣고, 그에 가담할 수 있을지.
마치 숲의 구덩이에 떨어질 때, 그때와 꼭 심정이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사방이 어둡고 막막했던 그때와, 힘도 빠지고 기력도 쇠해 자신의 몸이 어떻게 굴러가든 신경조차 쓰이지 않고 그저 절망스럽기만 했던 그때와.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또 그 구덩이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빈 찻잔에 다시 담뿍 차가 채워졌다. 솔솔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차향도 살살 일어 연서강의 코끝을 간질인다. 그러나 녹우당의 여름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든, 차 맛이 얼마나 훌륭하든 현재의 연서강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초조함. 그것이 전부였다. 대체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그 생각을 성헌당을 나오고부터 대체 몇 번이나, 또 몇 시간이나 했는지 모른다. 연서강은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느낌에 또 다시 차를 단숨에 마셨다. 차라리 생각을 할 이성까지 날아가 버렸으면. 하지만 마신 것이 술이 아니라 향긋한 차인 탓에 그의 사고는 흐려지기는커녕 더더욱 맑아지기만 했다.
“.......”
눈앞의 기연조를, 연서강은 멍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오늘따라 연서강이 그를 자주 쳐다본다는 것을 기연조 역시 느낀 듯했다. 그 물음에 연서강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예전에는 ‘지금’과 같은 시간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 번 죽기 직전의 마지막 여름은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기연조와 자신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가로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곤 했었다. 술상이나 다반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서로의 주변에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때때로 모씨 아줌마가 홍이에게 과자를 돌려 보내기도 했었다. 연서강이 활짝 핀 때찔레나 금등화 따위의 꽃을 따다가 홍이의 머리에 꽂아주고 어여쁘다 칭찬했었던 기억까지,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분명 그 여름과 지금은 똑같은 여름일 터인데. 지금의 자신은 한 쪽 어깨가 망가지고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으며 할 일이 너무도 많고 막막하여 초조했다. 하나도 그 여름과 똑같지 않은 여름이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네.”
툭 말을 내뱉으며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가로이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무늬까지도 죽기 전 마지막 여름과 똑같은데 어찌 자신의 상황은 이리도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몰랐던 때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죽음을 당했던 때가. 그때는 적어도 기연조와 함께 있는 순간을, 녹우당의 정취를 있는 그대로 함박 느끼고 즐거워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는 눈앞의 기연조를 다시 쳐다보았다. 부드럽고 청량한 분위기를 지닌 청년이 시선이 또 마주치자 무안한 듯 웃는다. 죽기 이전에는 그 미소를 마냥 달디 단 과일처럼 느꼈었다. 얼굴을 훔쳐 보다 상대에게 불시에 들키면 부끄럽기도 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
어쩌면 자신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르지. 연서강은 기연조의 얼굴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연무강의 속내는 모르지만, 일단 성헌당에서 본 연무의는 자신을 여차하면 쓰고 버릴 패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아마 이대로 겨울까지 난다면 자신은 살아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기연조는? 그 생각에, 그가, 자신에게 기연조가 여전히 좋고 달콤하고 그리운 사람임은 틀림없는데 더 이상 예전처럼 그저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팠다.
“어떡하면 좋을지.......”
말을 하는데 물기가 절로 섞여 나왔다. 그것을 눈치 챈 기연조가 놀랐는지 술잔을 들다 말고 ‘강이, 자네.’하고 중얼거린다.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연서강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벌써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고만 뒤였다. 이내 눈물이 눈매를 넘쳐흘러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눈물이 만들어내는 찻잔 속의 파문은 조그마한 잔의 평온을 일시에 깨트려 버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원망스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과거에 더더욱 열심히 해서 관직 하나라도 꿰차고 있을 것을 그랬다. 능력을 키우고 본채와 교류를 좀 할 것을 그랬다.
“녹우당으로 도망치지 말 것을.......”
연서강은 부서져 허공에 뱉어지는 숨을 간신히 한 데 끌어 모았다.
그때, 기연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되었다, 강아.”
연서강은 눈물 젖은 얼굴로 기연조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네가 이렇게 무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 몸이 무사하고, 그곳에서 훌륭한 무훈을 쌓고 온 것만으로도 좋네. 그것만으로도 나는 자네가 기특하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아. 그러니 좌절하지 말게. 더 이상 위험한 곳에도 가지 말고....... 정말, 자네가 죽은 줄만 알고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기연조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잠시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기연조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더니 연서강을 마주보며 웃었다. 참으로 어여쁜 미소였다.
“자네가 살아 돌아와서, 정말 기쁘다네.”
그 얼굴을 보고 연서강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상대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허나 이상하게도 말을 듣고도 어지럽게 헝클어진 가슴속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옛날에는 그랬다. 저 미소로 상냥한 위로를 들으면 그 날로 고민거리가 모두 사라졌었다. 그렇구나, 저 이가 저리 말하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 하며 모든 마음의 앙금이 허물없이 녹아 연서강도 그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슬플 뿐이었다.
마음이 더더욱 날카롭게 얼어붙어 연서강의 심장을 찔렀다. 아팠다. 고통스럽고 우울했다. 저 미소와 위로가 죽기 직전의 그것 같아서 너무도 시리고 애달팠다. 보기가 괴로워 연서강은 고개를 결국 숙이고 말았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거기까지 그가 생각했을 때, 기연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열심히 했다는 걸 알아.”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
기연조의 목소리는 여전히 귀찮은 기색 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다정함이 연서강을 더 달리도록 채찍질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노력해도 되네.”
그의 위로는 연서강에게 이제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다. 모순이지만, 기연조의 위로는 연서강의 귀에는 날카로운 채찍질처럼 들렸다. 그 다정한 위로를 자신의 머리가 걸러내 외쳤다. 협박했다. 더 노력해. 더 노력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찾아내.
“이만 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 그만 예전처럼 돌아가 평온한 삶을 누리도록 하게나.”
얼어붙었던 연서강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하게 뒤엉켰다.
기연조를 살리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은 어찌되더라도 .......그래, 설사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기연조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생각해라. 더 생각해. 연서강, 멍청하게 쳐 울고 있지 말고 당장 다른 방법을 강구해내. 벼슬,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
그리고 순간, 그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연서강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황후마마.
황후마마를 자신이 직접 만나 뵐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수를 써서라도 일단 그녀를 만난다면.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기연조를 보았다. 상대의 위안은 옛날과 달리 그의 마음에 어떤 따스함도 주지 못했다. 되레 연서강이 기연조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연서강은 자신의 볼과 턱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한 땅거미를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옛날과 똑같이 행동했다.
“고맙네.”
그렇게 말하며 생각했다. 어떤 비열한 수를 써서든 황후마마를 뵙고 그녀에게 자신을 각인시켜야겠다고.
* *
으악.
연무진의 표정을 한 마디의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딱, 그거였다. 연서강은 어찌해서 자신의 둘째 형이 자신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고 연무진을 피했으면 피했지, 절대 연무진 쪽에서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연무진이 아니었던가.
시험 삼아 연서강은 조심스레 ‘형님?’하고 그를 불러보았다. 과장되게 ‘어, 어! 그래!’하고 외친 연무진이 크흠, 목을 가다듬더니 연서강을 응시했다.
“그, 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구나.”
진실로 그는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일부러 성헌당에 들려 연무의에게 혹여 둘째 형님이 언제쯤 집에 들르는지를 물어봤었던 연서강은 속으로 ‘그러시기도 하겠지.’하고 생각했다.
힐끔힐끔 연서강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는 연무진은 아직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는 예전의 기억 때문에, 혹여 멀리서 연무진을 발견하더라도 연서강 쪽이 먼저 연무강을 피해 왔었으니. 그랬던 연서강이 불현듯 연무진에게 먼저 다가가 말까지 걸었으니 연무진이 놀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친 것 같은데....... 그러나 연서강은 곧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연무진이 놀란 이유 따위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이 말했다.
“형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래? 기다려? 아, 그렇지. 무슨 일이 있어 그랬느냐? 네가 나에게? 그것이 참.”
연무진이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봐도 둘째 형님이 자신의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연무진이 작은 목소리로 이어서 중얼거렸다.
“지난, 날과 관계가 있는 일이더냐?”
“.......”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연서강은 어째서 그가 자신의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깨달았다. 아무리 성장하고 나서는 그런 적 없다지만, 어린 날 동생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부끄럽고 피하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리 살갑게 말을 붙이는 게 어색하고 껄끄러운 것이리라. 연무강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연서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무진이 뭐라 혼자서 오해했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 저, 어렸을 때는 정말 내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이미 반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해코지는.”
순간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자신이 여전히 ‘녹우당 도련님’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던 상태에게 그를 만났다면, 연무진은 과연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인가. 답은 바로 나왔다. 죽기 전의 ‘과거’에 이미 연무진이 자신을 냉랭하게 대했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렇구나, 변방에서의 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었다.
‘과거’와 태도를 달리 취하는 연무진에 짜증을 느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연서강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연무진에게서 들을 것도 많으니 연무진이 자신에게 빚이 있다 생각하는 게 행동하기 쉬울 듯 했다. 한편으로는 무강 형님처럼 여전히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며 어찌 하나 싶었는데 참으로 잘 되었다.
원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만 있다면 상대방이 비열하든 치사하든 더럽든 알 게 뭔가.
“형님.”
연서강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무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는 연무강과 더불어 몹시도 두려워했던 이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릴 때의 일이라 피차 어리석기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저는 형님께 어릴 때의 일로 아무런 원한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날 찾아왔느냐,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연무진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연서강은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형수님께서 칠보 장신구를 만드는 공예가라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혼약을 맺으셨을 때, 제 마음이 어려 미처 축하드린다는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몹시 후회가 됩니다. 해서 이번에 선물용 머리꽂이를 살 겸, 형님과 형수님께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향 누님과 서령이는 아직 변방에 있었다. 의진 형님은 집안의 이런저런 대소사에 관심이 전연 없어 보였다. 조정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차라리 자신이 연의진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간 치료를 받으면서 문답을 해본 결과 그랬다.
허면 남은 사람은 셋.
부친인 연무의는 너무 벽이 높았다. 그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을 꺼내면 단박에 경계를 굳히고 자신을 내칠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연무강은? 무강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부친보다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그였다.
그렇게 제하다 보니 남은 사람이 둘째 형님인 연무진 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분가를 하여 집안에 좀체 드나들질 않는데다 어렸을 때의 일도 있어 껄끄럽지만, 그래도 앞의 두 명보다는 묻기가 나았다.
연서강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연무진을 쳐다보았다. 연무진은 아직도 자신이 께름칙한 모양인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연서강은 그가 더더욱 마음을 열 수 있게 다음 말을 꺼냈다.
“녹우당에서 본채로 돌아온 이후 가족이 그리워 줄곧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강 형님은 형님이 아시다시피 좀 무섭지 않습니까? 의진 형님도 궐에서 나오는 일이 없으시고, 그렇다고 제가 아버님과 담소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진 형님께서 본가에 들리시길 제가 얼마나 고대했는지 형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허....... 하긴 무강 형님과 담소를 나눌 수는 없지.”
연무강을 결코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무섭기는 연무진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해서, 누구에게 줄 장신구라고?”
“선물용 머리꽂이로, 여인의 것인데.......”
머릿속으로 홍이를 그리며 연서강은 대답했다. 늘 볼품없이 땋여있던 소녀의 머리가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더더군다나 이번에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다는데, 빈손으로 만나러 가기도 좀 미안했다.
연무진이 솔깃했던지 재차 묻는다.
“여인? 나이가 어떻기에?”
“좀 어립니다.”
하고 대답하자 순간 연무진이 혀를 찼다. 왜 연무진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어 연서강은 의아해졌다. ‘왜 그러시죠?’하고 묻자 연무진이 ‘아닐세, 아닐세. 그러면 안 되지.’하고 의미 모를 말을 한다.
“나이 어린 아가씨에게 머리꽂이를 선물했다가 무슨 소릴 듣고 싶어서 그러나?”
“예?”
“머리꽂이는 자고로 혼인한 여인네에게 건네는 선물이란 말일세. 그 아가씨가 대뜸 그런 선물을 건네는 자네를 어찌 생각하겠나.”
“.......아.”
연무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연서강은 뒤늦게 자각했다. 머리에 장신구를 꽂기 위해서는 올림머리를 해야 하는데, 올림머리를 하는 것은 주로 혼인을 한 여인네들이었던 것이다. 홍이처럼 땋은 머리에는 머리꽂이를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예쁜 수가 놓인 댕기를 사다주는 게 나았던 것이다.
그러니 졸지에 자신은 그 어린아이에게 ‘청혼’의 뜻을 전할 뻔했던 거였다.
확, 얼굴을 붉히며 연서강이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하고 말을 돌렸다. 그냥저냥 지나가는 여인을 보다가 막연하게 ‘아, 홍이에게도 저런 예쁜 머리 장신구가 어울리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꺼냈을 뿐인데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연무진이 그런 그에 다시 혀를 찼다.
“설사 자네에게 마음이 있는 여인이라고 해도 그걸 받아든 순간 자네를 발로 차고 도망가겠네.”
“아니, 제가 잘 몰라서....... 그럼 무엇이 좋을까요?”
과연 연무의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장가를 간 사람답게 연무진이 어깨를 으쓱으쓱하더니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 형님에게 맡기게.’ 그런 연무진을 연서강은 다소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네.’
그는 속으로 둘째 형님이 이런 성격이었던가 생각했다. 연서강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연무진은 제 일이 잘 안 풀리면 괜히 자신을 찾아와 화풀이를 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제 기분대로 행동하는 일이 잦았고, 다혈질에다 변덕이 죽 끓듯 하여서 비위를 맞추기가 몹시도 힘들었었다.
연무진이 연서강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속삭였다.
“헌데, 자네 마음을 빼앗은 그 여인이 누군가? 이 형님에게만 살짝 알려주면 내가 네 형수와 이야기해서 다리를 놔주마.”
“.......아, 아닙니다.”
진실로 그런 게 아니라 연서강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허나 단단히 오해한 듯한 연무진은 호쾌하게 웃으며 연서강의 손을 잡았다.
“진즉에 그리 이야기를 하지 그랬느냐. 그런 일이라면 확실히 무강 형님이나 의진이보다 내가 낫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껄끄러움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환이 된 듯 보였다. 의욕이 철철 넘치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연서강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린 아이에게 줄 선물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어째서 그 어린 아이에게 선물을 주느냐고 물을 게 분명해고, 그랬다간 또 괜한 이야기까지 해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쩐다. 고뇌에 잠긴 채로, 연서강은 연무진에게 질질 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생각하며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술을 마셔 살짝 취기가 돈 연무진이 ‘하하하!’ 웃으며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먹지 않을 것 같은 상태라, 연서강은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연무진이 본가에 오길 기다려 붙잡은 보람이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아우님도 드시게.’하고 자신의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는 연무진에게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술이 술잔을 콸콸 넘치자 연무진이 혀를 쯧쯧 찬다.
“이런, 아우님. 죽죽 드시지 않으시고 뭐하셨나. 술이란 술술 마셔야 술인 것을.”
연서강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지금 회복 기간 중이라 술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그 말을 하면 벌써 스무 번째.
하지만 연서강은 스무 번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해봐야 자기 입만 아플 것이 뻔했다. 자신이 안 된다며 거절할 때마다 연무진이 ‘에이, 잔소리꾼 연의진 녀석이 한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의진이가 뭐라고 하면 내가 혼쭐을 내주마.’하고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술을 먹지 말라고 한 사람이 의진 형님인 건 또 어찌 알고 그리 말하는지 연서강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의진 형님이 무진 형님에게 잔소리가 심하신가 보군. 겨우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사실 자신이 술을 마셨다고 해도 그간 봐온 의진 형님의 성격이라면 그냥저냥 ‘그랬어?’하고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불편한 자리에서 굳이 취하고 싶지 않아 그는 계속해서 연무진의 권주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미 제 흥에 겨웠는지 연무진은 연서강의 그런 행동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녹우당 도련님’인 자신도 몇 번이고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주루(酒樓)였다. 먼 타국에서 들여온 여러 가지 종류의 희귀한 술과 먹을거리 등을 파는 곳이라고 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저기 저 연무진의 머리 뒤로 보이는, 얼음이 가득 채워진 항아리 속에 든 것은 도수 높은 북국(北國)의 술이었고, 그 옆의 청자에 든 술은 서쪽 사막 건너에서 온 밀주, 또 저 멀리 있는 투명한 유리병에 든 술은 남쪽 밀림 지역에서 딴 과일로만 만들었다는 과실주였다.
화려하기보다는 단려(端麗)한 건물의 모양과 그 안을 꾸민 이국적인 조형물들, 그리고 한 쪽 벽면을 형형색색으로 채우고 있는 이국의 술 따위가 이곳을 여느 주루들과는 격이 다른 곳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거기다 주루 안을 오가며 시중을 드는 이들의 차림새와 태도도 어디하나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단정하면서 우아했고, 그와 격을 맞추기라도 하듯 이곳의 손님들 또한 조용히 품위를 유지하며 술과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주루, 하면 먼저 왁자지껄한 대화와 욕설이 오가는 시끄러운 장소를 상상했던 연서강에게는 의외의 장소였다.
하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저리 가라는 격으로 시끌벅적하니, 암만 내부가 조용해도 소용이 없긴 했다. 아직 손님이 없고 방마다 칸칸이 막혀 옆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구조라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빗발치는 항의에 벌써 연무진과 자신은 이 주루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더냐, 그 여인이?”
“........네?”
흥얼흥얼 혼자서 혼잣말인지 콧노랜지 모를 말을 하더니, 연무진이 갑자기 연서강에게 물었다. 차라리 얼른 쫓겨나는 편이 나을까, 고민하고 있던 연서강이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여인 말이다.’ 연무진이 덧붙여 하는 말에 그제야 연서강은 그것이 홍이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런 사이가 아닌데다가, 더욱이 상대는 아직 어린 여자아인데, 그리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쩐지 말해선 안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저도 잘 몰라서.”
연서강은 애매하게 둘러대며 방금 들었었던 칠보 장신구점을 떠올렸다. 그곳은 도성의 동남쪽에 위치한 오층짜리 누각 건물로 하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신구 판매점이기도 한 곳이었다. 또 외교통상을 맡아하는 대홍로의 손녀딸이자 연태위의 며느리인 안계영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연무진의 아내인 안계영은 이름난 칠보 공예 장인이었다. 칠보 공예로 유명한 안화국(安華國)에서 수학(受學)하고 그곳에서 가장 큰 공예 대회에서 상까지 수상했다는 실력 있는 유학파 장인이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칠보 공예는 재료의 본성을 살린 가공에 섬세하고도 화려한 장식들이 어우러져 아름답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도성 내의 여인들은 물론, 황궐 안의 지체 높은 여인들마저도 모두들 그녀의 장식품을 가지고 싶어 안달을 내곤 하였다.
오늘 처음으로 연서강은 아름답다, 신묘하다 말로만 들어본 그녀의 장신구들을 구경해보았다. 사내로 태어나 여인들의 장신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없었기에 생소하고 낯설긴 했지만, 무성한 소문만큼이나 어여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게 안은 일층에서부터 최상층인 오층까지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이라면 입구에서부터 탄성을 지르며 눈이 휙휙 돌아갈 만도 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주인 안계영은 부재중이었다. 해서 가게를 찾은 연서강과 연무진을 맞이한 것은 그곳의 점원들뿐이었다. 연무진은 ‘없어? 이런.......’하고 아쉬워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연서강을 끌고 삼층으로 올라갔다. 삼층으로 올라가니 일, 이층과는 또 다른 장신구들이 가득 층을 메우고 있었다.
연무진의 설명에 의하면 손님들 중 머리꽂이를 찾는 귀부인의 수가 많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일, 이층에는 머리 장신구 종류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해서 다른 것을 사려면 삼층부터 돌아보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여러 장신구들 중에서 연무진이 추천한 것은 팔찌 종류였다. ‘아마도 이게 제일 무난할 거야.’하고 말하며 연무진이 점원을 시켜 팔찌를 연서강에게 보여주도록 시켰다. 점원들이 요즘 인기가 있는 것들만 골라서 연서강의 앞에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것들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연서강은 대체 어떤 팔찌를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적색 산호와 비취, 호박이 어우러져 있는 팔찌를 골랐다. 송이가 작은 꽃과 깃이 화려한 새가 어우러진 귀여운 느낌의 팔찌였다. 이런 거라면 홍이도 좋아하겠지, 하고 골랐더니 옆에서 연무진이 ‘흠, 흠, 네가 사모하는 여인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은 좋아하나 보구나.’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싶어 연서강은 ‘아마도 그럴 겁니다.......’하고 대충 대꾸하고 말았다.
얼마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연무진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가 과장되게 웃으며 ‘뭐,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무슨 계산을 하나. 이 형님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잘 간직하게.’하고 말한다. 그 말에 연서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었다. 역시 과거 저질렀던 일들 때문에 그는 아직도 자신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도 값나가는 것을 오늘 처음 길게 이야기를 한 사이에 덥석덥석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무엇보다 연서강은 점주인 안계영이 없는 틈을 타 연무진이 슥삭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 불안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나 점원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연무진이 하는 일이니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자니 나중에 안계영이 알고 어떻게 행동할지가 뻔해서 그들은 하나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형님.’ 하고 연서강이 부르자 연무진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괜찮다고 해도.’하고 말한다. 연서강은 한숨을 폭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 형님이 사주시는 거면, 그녀는 형님에게서 선물을 받는 게 되지 않습니까?’ 그제야 연무진이 아차, 하는 얼굴로 연서강을 돌아본다. ‘그, 그렇게 되나?’ 당황한 그가 묻기에 연서강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다행스럽게도 그 말만으로 연무진은 공짜로 자신에게 팔찌를 넘기는 걸 포기했다. ‘역시 자기 돈으로 사주고 싶겠지.......’하고 그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아, 그럼 다음에는!’하고 말하기에 연서강은 역시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형수님이 계실 때 다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들은 연무진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 얼굴을 보며 연서강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형수님이 참 고생이 많으시겠군, 하고 생각했다.
거기서 산 팔찌는 아직 연서강의 품안에 잘 갈무리 되어 있었다.
“이름도 잘 모른다는 말이더냐! 척애(隻愛: 짝사랑)란 말이더냐!”
“.......”
자신의 대답 한 마디로 또 혼자서 천만리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지 연무진이 탄식했다. 연서강은 자신을 쳐다보는 연무진의 울망울망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입을 한 일자로 다문 채 시선을 모로 흘렀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마냥 무섭고 사납던 둘째 형님이 이런 성격의 소유자였을 지는.
.......물어봐도 알까.
문득 든 의심이 연서강의 한 쪽 가슴 귀퉁이를 새까맣게 태웠다. 저런 성격인데 과연 부친과 큰 형님이 연무진에게 터놓고 비밀을 이야기했을까 싶었다. 참으로 무례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저 모습을 보니 그에게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야 둘째 형님의 본 성격을 깨달았지만, 아버님과 무강 형님께서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둘째 형님이 저런 성격이란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과연 그 깐깐하고 용의주도한 부친이 연무진에게도 ‘황후마마’와 관련된 그 어떤 것을 털어놓으셨을까.
연서강은 의심스런 눈으로 연무진을 보았다. 연무진이 지나가는 점원을 불러 새로운 술을 시키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저쪽 북해에서 온 술을 마시자꾸나. 여기 술맛이 괜찮지 않으니?”
벌써 스물한 번째 생각한 것이지만 자신은 회복시간이라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애매하게 웃으며 연서강은 ‘네, 좋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연무진이 기뻐했다. ‘그렇지?’
“.......”
연무진을 만나서 한 번 캐물어보자고 했던 건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았다.
쓸데없이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연서강은 앞서 걸어가는 연무진의 등을 보았다. 시간 낭비하고 말았다. 몇 달이나 남은 시점에서 고작 하루지만, 앞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실은 암만 많은 날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오늘 연무진과 보낸 하루는 아까울 듯 했다. 연무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괜한 말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숨을 폭 내쉬니 앞에서 연무진이 ‘어서 오지 못할까.’하고 연서강을 불렀다. 이제 연무진의 얼굴 그 어디에도 연서강을 껄끄러워 하는 구석이 없었다. 연무진으로서는 선물도 해 주었겠다(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술도 대접해주었겠다(사실 연서강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이어 거리 구경까지 시켜주었으니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이만하면 연서강도 용서해주었겠지 싶은 모양이었다. 참으로 헐렁한 생각이 아니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연무진이 척 어깨동무를 했다. 윽, 아픈 어깨를 그의 팔이 스쳐지나가 연서강은 얼굴을 구겼다. 이어 연무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처음부터 이렇게 잘 지낼 것을 그랬다.”
“.......예?”
“그렇지 않으냐. 무강 형님은 매일 화만 내시고, 의진이는 날 무시하고, 의향이도 그렇고, 서령이는 나만 보면 귀찮다고 소릴 지르니, 얼마나 좋으냐. 네가 이리도 착하고 조용하고 잘 어울려주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친하게 지낼 것을.”
그렇습니까, 하고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연서강은 조심조심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술에 취한 사람의 걸음은 환자에게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걷노라면, 갈지자로 휘적휘적 걷는 그와 어깨가 틈만 나면 부딪혀 와서 아팠다. 술을 마시는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갈 의진 형님이라도 상처가 덧나는 것은 참지 않으시리라.
“.......미안하다, 서강아.”
그런 자신을 보고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연무진이 불현듯 툭 심각하게 말을 내뱉는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다 말고 연서강은 연무진을 바라보았다. 생전처음, 연서강은 연무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바로 옆에서 상대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사람을 가까이 했던 적은 기연조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 외에는 무강 형님이 자신의 멱살을 잡았을 때의 정도가 이 정도 거리였을까. 뜨뜻하고 축축한 타인의 숨결이 무겁게 축 가라앉은 채 밤거리에 섞여 들어간다.
“나는 더욱이 연우비 고모도 좋아했었는데.......”
하고 말하고 나서 연무진이 연서강을 보고 무안한 듯 웃었다. ‘고모가 맛난 걸 많이 줬었거든.’ 거기에다 자신이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연서강은 잠시 침묵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그렇군요.’란 간단한 대꾸조차 그는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연서강을 놓아주며 연무진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솔직히 말해. 오늘 네가 날 매도하고 때리고 화를 내도 나는 암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틀림없이 어렸을 적 일을 앙갚음하려고 접근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너무 얌전하게 나를 따라오고 내 말을 들어주고 어울려 주고 해서 내가 너무 창피하구나.”
“.......”
“네가 오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쪽에서는 전혀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었거늘. 그럴 염치도 없었고. 정말 미안했다.”
연서강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연무진이 쓰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 보아라. 배웅은 괜찮다.”
말을 마치고 연무진이 뒤를 돌아서서 걸어갔다. 방금까지 술에 취했니, 어쨌니 하면서 휘청거렸던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반듯하게 등을 펴고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연서강은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으면.
그랬다면 죽기 전의 ‘여름’과 같았을 거란 말인가. 그 ‘겨울’과도?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으면 사과도 뭐도 할 생각이 없었단 말인가. 자신의 둘째 형님이 저리도 용기 없고 소심한 사람일 줄도 몰랐다.
정녕 아무것도 몰랐다.
말을 걸기만 하면 끝이 나버릴 괴롭힘이었다는 것도.
“.......”
오늘은 단지 시간낭비만 한 날이다. 그렇게 연신 주억거리며 그는 연무진의 뒷모습에서 얼른 시선을 치웠다. 정말이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가슴속에 둔한 아픔이 퍼졌다. 안쓰럽고 애달팠다.
주변 자연 현상은 모두 똑같은데 일어나는 사건과 그 속에 사는 인물들이 죽기 이전과 같이 않아 어지러웠다. 그저 자신이 이제까지 품고 있었던 저 사람에 대한 인상이 실제와 일치하지 않아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연서강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