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연서강의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촉은 의원들의 손에 신속하게 제거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화살촉이 아니라 그 속에 포도처럼 들어차 있는 고름들이었다. 급한 대로 고름을 제거했지만 물렁해진데다 부패까지 시작한 환부의 상태는 여전했다. 그것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또 상처에 고름이 가득 들어차 통증과 고열이 날 것이 뻔했다. 확실하게 환부를 도려내지 않는 한 낫지 않을 상처였다.
허나 이미 연서강의 몸은 화살촉을 빼내는 것만으로도 잔뜩 지쳐있었다. 많은 양의 피가 난데다 줄곧 물을 섭취하지 못해 생긴 탈진 상태도 아직 여전했다. 더불어 체력도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환부를 도려내는 시술을 했다가는 힘들게 구해온 보람도 없이 시술 도중 죽게 될 판국이었다. 그의 어깨를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경이나 서회의 의료 시설로는 역부족이었다. 중앙, 그것도 수도로 가야만 했다.
어깨의 상처는 악조건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만큼 원래의 것보다 훨씬 지독한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하루 바삐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의경과 서회의 의원들은 빨리 치료를 해도 연서강이 어깨를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서강의 수도 귀환을 반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의경군은 당연하거니와 서회의 연의향도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하고 연서강의 수도 귀환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직 언양을 수복하지 못해 의경이 격전지인 것은 여전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연서강이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그가 어서 빠리 수도로 귀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일마저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연서강 본인이 수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화살촉을 제거하고 곧바로 혼절했던 그는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수도로 돌려보내기 위한 준비가 이미 마무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수도에 돌아가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못 간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연서강을 연서령과 연의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어깨에 난 상처는 몹시 심각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응당 어서 빨리 이 격전지를 떠나 평온하게 쉬면서 치료를 받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병사들이 변방에는 흔했다.
하지만 연서강의 뜻은 확고했다.
“못 갑니다.”
어깨에 붕대를 두르고 간이침대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낯은 아직 새파랬다. 어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청결한 곳에서 푹 쉬어서 몸 상태를 회복해야 하건만, 몸의 주인은 여전히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곁의 의원들은 그런 그의 고집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맸고, 연의향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집 부리지 마라, 연서강. 네 몸을 생각해.”
아무리 의경이 고립상태에서 헤어 나왔다고는 하나 완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의경이 예전과 같이 안정되려면 아무래도 언양을 수복하지 않고는 무리였다. 이 상황에서 연의향도 더 이상 변방의 전력이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더구나 연서강은 의경의 고립상태를 해결한 인재였다. 의경을 지휘한 사람은 연서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연서강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언양으로 통하는 계곡을 막은 사람이기도, 하니 앞으로 일어날 전투도 함께 하면 든든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리가 뒷전이 될 정도로 연의향은 현재 연서강의 몸 상태가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다 연서강은 부친인 연무의가 직접 여기까지 보내준 사람이 아닌가. 그때 부친의 속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연서강이 이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부친을 뵐 낯이 없게 된다.
“의경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아버지께는 잘 말씀 드릴 터이니 너는 이만 수도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여라.”
연의향은 고집을 부리는 남동생을 일단 달래보았다. 동생을 한 번도 좋은 소리로 달래 본 적이 없었던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절로 딱딱해졌다. 연서강 바로 위의 남동생인 연의진이야 연의향이 여러 말 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잘 했고, 여동생인 연서령은 연의향을 동경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앞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연의향에게 어린애 같은 생떼를 부린 것이 실로 현재의 연서강이 최초였다.
“........”
연의향의 말을 듣고도 연서강의 낯빛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의향이 성을 내려가다 연의상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화살촉을 빼내기는 했지만 완전히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닌지라, 연서강의 얼굴은 아직도 열이 올라 불그스름했다. 게다가 여태까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탓에 아무래도 말랐던 몸이 더 마른 꼴을 보니 불쑥, 없던 안쓰러움까지 생겼다.
“서강아.”
연의향이 다시 조용히 연서강을 얼렀다. 그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서령이 끼어들어 말했다.
“치료를 빨리 받아야 해. 의경은 이제 안전하다고! 언양도 의향 언니가 도와준 덕분에 현재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이고. 주변의 잔당도 거의 처리했어. 그러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은 이제 하나도 없어!”
연서강이 돌아오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역시나 연서령이었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 믿었던 사람의 귀환이었다. 차마 체면 때문에 그 자리에서 울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혼절한 연서강의 곁을 지켰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라는 안도가 서려 있었다.
연서령은 이제 더 이상 연서강이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녹우당에서 책만 읽던 놈을 자신의 실책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게 하다니. 그 사실이 연서령은 참으로 면목 없었다. 녹우당 도련님이라 불리는 저 놈은 그저 다시 녹우당으로 가서 책이나 읽고 있는 게 낫다. 연서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 연서강에게 어울렸다.
이곳 전쟁터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의경을 위기에서 구해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 뒤는 이제 우리들이 해도 충분히.”
돌연 연서강이 소리쳤다.
“싫어!”
그에 다급히 말을 잇던 연서령은 합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는 멀쩡한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감싸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목숨까지 위험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구해진 사람답지 않게 그는 여전히 초조해 보였다.
‘그래선 안 돼.’
“.......”
마치 뒤에 뭔가가 뒤쫓아 오는 듯이 말을 되뇌는 연서강을 연서령이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답지 않게 그런 연서강에게 그녀는 표독스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참지 못하고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하다는데 왜 그래? 네가 뭐라고!’하며 연서강을 비난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째서 지금 연서강이 안도감은커녕 오히려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지 왠지 연서령은 알 것 같았다. 저 이가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은 태도와 행동을 그녀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서도 본 적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을 위기를 겪고 난 병사가 저랬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으로 잠시 잠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이 사무쳐 연서령은 돌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보아하니 이대로는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가 않군.”
그때, 멀리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던 태상이 문득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태상경.......’, 연서령이 고개를 돌려 태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우울한 빛을 본 태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네. 자네들은 모두 나가서 이만 일을 보게나. 여기서 말다툼 따위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은가.”
“허나 태상경,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에 연의향이 송구스럽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 집안 문제로 태상을 수고롭게 할 수는 없었다. 연서강을 찾기 전에는 연서령이 그에게 폐를 끼쳤고, 연서강을 찾아다닐 때에는 태상이 직접 전쟁터를 돌아다니기까지 했었다. 이미 충분히 누를 끼친 후인 것이다. 그러나 태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여까지 온 것은 저 놈 때문이니, 자네들이 송구스러워 할 필요는 애최 없다네. 저 놈에게는 내가 한 번 잘 이야기 해보겠으니 자네들은 이만 나가보게.”
무려 태상경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연의향과 연서령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들은 결국 연서강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힐끗 한 번 보고, 태상을 향해 예를 차린 후에 방밖으로 나갔다.
방밖의 소란도 어느 정도 가시자 그제야 태상이 움직였다. 후우, 골치가 아프다는 듯 그가 내쉬는 긴 한숨 소리에 연서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상은 탁자 위에서 식어가고 있는 죽 그릇을 들고 연서강이 있는 간이침대로 다가갔다.
“먹게.”
그러나 연서강은 태상이 내민 죽 그릇을 말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식어 허연 막이 가라앉은 죽이 식욕은커녕 도리어 구역질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올라올 것 같은 감각을 참아내며 연서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진통제를 먹으려면 무엇이든 좀 먹어두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 말마따나 수도로 돌아가기 싫다면 진통제를 먹으면서 버텨야 할 텐데. 그조차 요원치 못하면 대체 어쩌란 말이야?”
태상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다. 납득한 연서강은 어쩔 수 없이 태상으로부터 죽 그릇을 받아 들어 죽을 한 수저 입에 넣었다. 비릿하고 걸쭉한 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촉이 끔찍했다. 결국 그는 죽을 쑤셔 넣은 보람도 없이 곧바로 욱, 하며 입안에 있는 죽을 뱉어내고 말았다. 연서강이 일순 바짝 얼어붙었다.
“죄, 죄송합니다.”
연서강은 새파래진 얼굴로 천을 가져와 자신이 뱉어낸 죽을 닦았다. 그저 손이 달달 떨렸다. 태상이 직접 권한 죽을 달게 먹기는 고사하고 토해버렸다. 당장 태상이 노여워하며 그를 벌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을 본 태상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이 가져온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어 그가 꺼낸 것은 노란색의 초였다. ‘어디 보자.’하고 태상은 주변을 휙휙 돌아보다니 이내 방 한 모서리에서 초롱불을 발견하고 초에 불을 붙였다. 확. 노란색 초에 불이 붙었다.
초는 타들어가면서 향긋한 꽃향내를 허공에 뿌렸다.
“우리 쪽에서 철마다 만드는 향초라네. 여러 가지 꽃향과 약초향, 나무향 따위를 섞어 만들지. 이건 일전에 향초를 만들 때 홍이가 만들었던 거야. 자네에게 전해 달라는군. 부디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
이윽고 향긋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초의 부드러운 향기는 언뜻 맡기에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상쾌하고 시원한 약초내를 품고 있어서 그 향을 가만히 맡고 있노라니 뒤틀렸던 속이 조금씩 안정되어갔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연서강이 자신이 토해낸 죽을 마저 닦은 다음 태상이 탁자 위에 둔 노란 향초를 응시했다. 그러다,
“홍이가.......”
하고 불현듯 연서강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이, 홍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니. 자네의 소식을 접하고 난 후에는 종일 우울해 하고 있네.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 아이를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태상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충분히 질책을 들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연서강은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태상이 미간을 좁힌 채로 연서강의 사과를 듣고 있다가 불쑥 명령했다.
“수도로 돌아가게.”
“안 됩니다.”
연서강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태상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그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고집 부려봐야 소용없네. 이곳 사람들 모두가 자네가 수도로 돌아가 치료받길 원하고 있어. 이미 수도로 떠날 차비도 끝난 상태야.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세.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하지 않았나. 그만하면 충분해.”
아니다.
태상의 타이름에 연서강은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아니다.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태상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고집을 부려봐야 소용없다는 그 말. 의향 누님도, 서령이도 모두 다 자신이 수도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봤자 결국은 수도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
연서강은 태상을 보았다. 태상은 수도에서 뵈었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를 보고, 촛불의 온기와 함께 방 안에 퍼지는 꽃내음을 맡으니 저절로 수도에 대한 향수가 간절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아직 없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다. 연서강은 말했다.
“소인을 도와주십시오, 태상경.”
“그게 무슨 소린가.”
연서강이 꺼낸 말에 태상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연서강은 끈질기게 고집을 부렸다.
“태상경이시라면 소인을 이곳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도록 손 써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꼭 언양을 수복하고 적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침을 삼켰다. 태상이 비꼬듯 연서강의 말을 반복했다. ‘그리 해야?’ 연서강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야, 아버지께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갑자기 숨이 목구멍 끝까지 솟구쳐 올라 연서강은 태상 몰래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연서강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태상은 여기까지 이루었으면 된 일이 아니냐고 말했지만 반대였다.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야 반을 완성했다. 조금만 더 힘쓰면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이제까지 했던 일이 모두 쓸모없게 될 것이다.
이번이 그가 연무의에게 인정을 받을 마지막 기회였다.
맨 처음 부친이 자신에게 전쟁터를 권했을 때의 말과 얼굴이 떠올랐다. 부친은 자신이 응당 전쟁터에 가는 것을 포기할 거라 생각했었고,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말했었다. 또 이 변방을 가리켜 겨우 잔챙이들을 없애는 것 뿐인데 ‘전쟁’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아깝다고도 했었다.
그러니 의경의 상황을 조금 호전시킨 것 정도로는 그 아버지의 눈에 차지 못할 것이 뻔했다. 더욱이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어깨에 부상을 입고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도로 돌아간다면.......
연서강은 그 후에 일어날 일에 눈앞에 캄캄해졌다. 부친은 그런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역시나, 하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이전으로 되돌릴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결코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지.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 그는 말했었다. 이대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태상경께서 명하시면 제 누이들도 어쩔 수 없이 그 명에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연서강은 침대 위에서 태상을 향해 엎드려 빌었다. 이곳에 더 머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이번에 부친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면 겨우 살아난 목숨도 가치가 없게 된다. 자신은 기연조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고, 기연조를 살리기 위해서는 꼭 부친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절대.
“.......”
그런 연서강을 태상은 마냥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자네 몸은 어쩌고?”
“태상께서는 이미 그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연서강이 곧바로 답했다.
화륵, 향초의 불꽃이 크게 일렁거렸다. 꽃내음은 이제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코가 향기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능만큼은 그대로인지, 초조했던 머릿속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연서강은 태상의 대답을 기다리며 한참 동안을 그렇게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 머리 위로 문득 무심한 목소리가 퍼졌다.
“자네 때문에 죽음을 당한 친구 때문에?”
“네.”
즉답.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연서강은 지금 태상이 자신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에게 어떠한 진실도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사정을 듣고 혹여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느끼고 자신을 도와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 친구. 혹시 기연조를 말하는가.”
그러나 곧바로 떨어진 태상의 말에는 연서강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태상을 보았다. 태상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연서강의 눈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어깨를 들썩해 보이며 말했다. ‘맞나 보군.’ 그 말에 잠시 망설였다가 곧 연서강도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몹시 놀라기는 했지만 그 또한 어차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할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태상은 중얼거렸다.
“자네 집안과 그 이의 집안은,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였던가.”
그 말에 울컥 서글픔이 치솟아 올랐다. 적대적인 두 가문. 자신과 절친했던 기연조. 그것이 빚어낸 비극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복받치는 감정에 연서강은 절로 입을 열었다.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저는. 제 목숨을 구해준 소중하고 귀한 친우인데, 저는, 저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목숨 바쳐 저를 구해준 친구였는데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너무 아는 게 없다. 어째서 자신의 친구가 죽어야 했는지, 왜 자신의 집안에서 그를 없애야만 했는지, 그를 구하고 싶은데 자신이 아는 것이라곤 고작 ‘황후마마’와 관련이 있을 거란 그것뿐이라니. 연무강이 그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자신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그것 하나뿐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그 답이 왜 나왔는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바짝바짝 타는 입술로 연서강이 이어 입을 열었따.
“.......저는.”
그러나 뒷말은 쉬이 이어지지 않았다. 돌연 눈에서 툭, 눈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구덩이에서의 경험이 생각났다. 그때 얼마나 절망했었던가. 살아서는 다시 기연조를 못 보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의 생에도 또 기연조가 죽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도 참담했었다. 그랬던 마음들이 몸이 안전해진 지금에서야 뒤늦게 눈물로써 터져 나왔다.
“도와주십시오, 태상. 의경의 고립을 해결한 것만으로는 제 부친이 절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인정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나태하게 지냈던 시간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방해를 할 줄이야. 제발 도와주십시오.”
“.......”
무서웠으면 무서웠던 만큼, 절망했으면 절망한 만큼 그것이 앞을 살아갈 추진력이 되었다.
죽음의 순간이고 몇 번이고 볼 바로 옆을 할퀴고 지나갔었다. 그때마다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 이유가 바로 기연조였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까지 죽였으니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못할 짓도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만 가지 일로 만 가지 감정이 일든 상관없다.
죄책감이든, 자괴감이든 뭐든.
“.......도와주면?”
“네?”
아무 말 없이 연서강의 말을 듣던 태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다. 연서강이 여태 울며 빈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태상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는 턱을 쓸며 거의 차갑게 들릴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와주면 자네는 내게 어떤 이득을 줄 텐가.”
“.......”
연서강은 멍하게 태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심코 두 눈을 깜박이자 차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두 번씩이나 말할 거리도 못 되지만, 나는 자네의 그 금박한 사정에 어울리기가 싫어. 지금이야 홍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다지만, 홍이를 위해서라면 자네를 억지로라도 수도로 끌고 가는 게 더 옳은 일이지. 나는 그럴 작정으로 여기까지 온 거네. 그런데 내가 무슨 연유로 자세를 여기에 머무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단 말인가.”
연서강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냉정한 반응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태상을 향해 아무런 아쉬운 마도 하지 못했다.
태상의 말이 옳았다. 태상이 일찍이 말한 적도 있지 않았나. 자신은 진흙탕에서 구르기 싫다고. 더구나 안타깝지만 태상과 자신은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홍이 때문에 만나게 되었고, 또 홍이 때문에 재차 이렇게 얼굴을 부딪치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 전쟁터까지 자신을 보러 왔다지만 이조차도 홍이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어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엾다 생각하고 도와줄 리 없는 것이다.
.......자신은 태상에게 있어 완벽한 ‘타인’이었다.
“.......”
해서 연서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한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입술만 바들바들 떨었다. 어떻게, 더 무슨 말로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다.
“내 참.”
연서강이 하는 꼴을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보던 태상이 문득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가 갑자기 척 팔짱을 끼고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름.”
“네?”
“자네 내 이름은 아나?”
“모, 모릅니다.”
여전히 황망한 얼굴로 연서강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통성(通姓)부터 하지. 내 이름은 제아겸이라고 하네. 높을 아(峨)자에 겸손할 겸(謙)자를 쓰지.”
“예.......”
“자네의 이름은 연서강이라고 들었네.”
예에, 하고 대꾸하면서도 연서강은 태상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새하얗게 표백된 채였고,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태상이 묻고 요구하는 대로 대답하는 일 뿐이었다. 흐음, 하고 심각한 얼굴로 태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연서강이라. 보아하니 자네와 친분이 있는 자들은 자네를 서강이, 혹은 강이 라고 부르더군.”
“네.”
역시 멍하게 대답하자 돌연 태상이 빙그레 웃었다.
“연서야.”
“네?”
연서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상이 다가와 연서강의 턱에 맺힌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여타 사람과 다른 존재니 달리 자네를 부르겠네. 허면 뭐라 부를까, 고민하였지. 그런데 자네 이름 앞 두 글자만 따보니 그 음이 무척 달콤하더군. 마음에 들었네.”
“그게 무슨.”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의아한 얼굴을 한 연서강을 응시하며 태상, 아니 제아겸이 또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연문(戀文)이라니. 어찌 안 달콤할 수가 있을까. 부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자네를 연서(連書)라 부르겠네.”
엇?! 순간 연서강은 놀라 혀를 깨물었다. 제 입을 손등으로 훔치며 연서강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잠, 잠깐.’ 그러나 연서강이 제대로 말을 하기도 전에 제아겸이 선수를 쳤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방금의 냉정했던 순간과 달리 몹시도 가벼워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는 듯 했다.
“허면 이제 자네는 나를 무어로 칭하면 좋을까. 제태상이나 태상경따위로 불리는 건 이제 신물이 나네.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군.”
하고 말하며 태상이 갈색 눈을 빛내며 제 쪽을 보았을 때, 연서강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태상이 말했다.
“겸 오라버니.”
“싫습니다.”
즉답. 연서강의 말에 제아겸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싫다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싫다는 대답이 돌아온 상황에 경악한 것 같았다. 연서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가 뻔뻔스럽게 이유를 묻는다. ‘어찌해서?’
“당,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경악한 것은 연서강 쪽도 만만치 않았다. 저 치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한 쪽은 연서(戀書)라 부르고 다른 쪽은 그에 겸 오라버니라니. 게다가 사내인 자신이 왜 그를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는지 쌀 한 톨만큼도 이해를 못하겠다.
“싫습니다.”
연서강이 다시금 부정하자 제아겸이 혀를 찼다.
“홍이에게서 태상님, 이라고 불리는 내 고충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얄미운 대답이로고. 그래, 홍이에게서 ‘오라버니’라 불리는 자네는 정말 좋겠군!”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
“상관이 있고말고. 나도 오라버니라 불리고 싶네.”
너무 당당한 제아겸의 태도에 연서강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실성. 아니 광증(狂症), 아아니, 변태적 심리, 아니.......’ 등등의. 별별 무례한 생각이 다 들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신분 차에 눌려 그 말은 차마 입에 올리지는 못하고 연서강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형님’이라든가.......”
제아겸이 또 혀를 찼다.
“딱딱하네. 자네는 또 형님이 많지 않은가.”
“그럼 역시 태상이.”
그의 말을 다시 제아겸이 중간에서 뚝 잘라먹었다.
“옳지. 겸이 형아라고 부르면 봐 주겠네.”
“.......”
제시한 것 전부 무리다. 연서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눈물은 전부 말라 버렸고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아겸이 진심으로 보여서 그는 긴장했다.
결국 제아겸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부르지 않는다면 나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네.”
엄연한 협박이었다.
“통성도 안 한 타인끼리 사정을 봐 줄 것이 뭐 있다고.”
갑자기 통성을 하자는 게 그런 연유였단 말인가. 갑자기 불거진 호칭 문제가 사실은 그 전에 자신이 했었던 부탁과 연결괴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연서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먼저 납죽 엎드려 빈 건 사실이지만 암만 해도 자청해서 놀림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서강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제아겸이 ‘어쩔 수 없군.’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번 한 번만.”
“네?”
“다음부턴 제태상이라고 불러도 좋으니, 이번 한 번만 ‘오라버니’라고 불러주게.”
끈질겼다. 차라리 홍이에게 그리 불러달라고 부탁할 것을, 그리 말해보자 연서강이 입을 달싹이니, 그가 ‘다른 건 절대 안 되네.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면 그리 해.’라고 엄포한다. 연서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몹시도 서글프고 절절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당혹스런 요구를 듣다니. 아무래도 무리라 생각했지만 제아겸은 더 이상 연서강을 봐주지 않았다.
“어서.”
또 얼마간 시간을 끌자 마침내 제아겸의 인내심이 다했는지 그가 이제는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다섯, 넷, 셋, 둘.’ 그 숫자가 다하면 어떻게 되는지 듣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었다. 허나,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 요구는 너무 하지 않나. 그러나 그렇게 외치는 이성 건너편에서는 제아겸이 마지막 숫자를 세고 나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불쑥불쑥 조바심이 치솟았다.
해서 연서강은.
“-겨, 겸.”
“그래, 그래.”
흐뭇하게 제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며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연서강이 결국 문제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겸. 오라, 버니.”
말하고 말하며 연서강은 침구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기연조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져도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어 비참해졌다.
반면 제아겸은 몹시도 만족했는지 ‘진작 그리 말하지 그랬나.’하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자네. 아무리 원하는 게 있더라도 잘 판단해서 그 대가를 치르게나.”
한결 안정된 마음으로 죽을 먹기 시작한 연서강에게 문득 제아겸이 말했다. 연서강이 잠깐 먹는 것을 멈추고 탁자 위의 향초를 응시하고 있는 제아겸을 바라보았다. 사뭇 진지한 그의 옆얼굴을 본 연서강은 차마 무슨 소리입니까, 하고 되묻지 못했다.
허나 곧 제아겸이 말을 이었다.
“어쩐지 자네는 말이야.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까지 함부로 굴릴 위인으로 보이거든. 지금도 충분히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듯한데, 몸까지 함부로 굴리면 어쩌려고. 말마따나 친우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친우가 자네의 희생을 알고 괴로워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친우, .......기연조에 생각이 미친 연서강이 바로 대답했다.
“그가 모르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저런.”
제아겸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자네, 전혀 내 말을 못 알아들었군.”
향초에서 시선을 돌려 연서강을 보며 그가 이어 말했다.
“나는 자네 친우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네의 신변을 걱정한 게야. 친우 핑계를 댄 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자네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라네.”
“.......”
“내 말 알아듣겠나?”
비로소 연서강은 제아겸이 자신을 걱정해준 것이란 걸 깨달았다.
하긴 홍이가 있었다. 그가 충고하면서 홍이가 만든 향초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연서강은 ‘그래서인가.’하고 납득했다. 홍이의 목숨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더없을 즐거움만 누리고 가도 모자라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제아겸은 아마도 그것을 염려한 것이리라.
그 아이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연서강도 이제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제아겸이 웃으며 ‘대답만은 늘 잘하지.’하고 말한다. 불쑥 억울해졌지만 연서강은 참았다. 간신히 제아겸의 마음을 돌려 변방에 남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말갛게 웃고 있는 제아겸을 보고 있던 연서강이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제대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출 된 직후에 바로 실신하고, 화살촉을 빼고 난 후에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이후에는 자신을 수도로 보내려고 하는 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아직까지 제아겸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가 어쨌건 제아겸은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수도에서 직접 행차하신, 무려 귀하디귀한 태상이였다. 그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은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자 싶어 연서강은 말했다.
“제태상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면 전 분명 죽었을 겁니다.”
그 말에 제아겸이 긴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되돌아 온 자라 천만다행이었지. 일반인이었다면 나도 찾아내지 못했을 거네. 그런 구덩이에 빠져선.”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는지 그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내가 찾을 때까지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네. 자네가 행방불명이 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죽었을 게 틀림없는 상황이긴 했지. 정말 천만다행이었네.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을 상황이었으니.”
연서강도 그때 자신의 상황이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상의 말대로 천만다행이었다. 연서강 자신도 자신이 어떻게 그 긴긴 시간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기적이라고 주변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의 기적이라고.
구사일생이란 말을 듣기만 들었지 자신이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그러나 곧 연서강은 구덩이에서 생겼던 그 기묘한 ‘일’을 떠올리고 잠시 얼굴을 굳혔다. 어쩌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 ‘신의 기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제태상께서는 신을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을?”
어찌해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얼굴이라 연서강은 덧붙여 설명했다.
“저어, 혹여 쌍두뱀 신이 하얀 뱀의 모습을 빌어 나타난다는......., 그런 말은 없습니까?”
하고 말하며 연서강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구덩이에서 봤던 그 백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기도 했지만 백사에게 물렸을 때의 아픔이 너무도 생생했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사에게 물렸던 손가락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정말로 꿈이었을까, 생시였을까. 둘 중 진실이 무엇이든 결국 살아났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그때 백사가 했던 말들이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하얀 뱀.”
하얀 뱀, 하얀 뱀이라. 기억을 뒤지는지 태상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젓는다.
“신의 화신인 하얀 뱀이라? 잘 모르겠네.”
“그렇습니까.......”
쌍두뱀 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태상이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속단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그 백사는 환각에 불과했던 것인가. ‘우물’같은 구덩이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니 태상에게서 들었던 말들을 토대로 자신의 머리가 멋대로 자아낸 환각, 정녕 그런 것이었던가.
태상이 이어 말했다.
“사실 이 나라는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신자들만 제외하면, 신의 화신은커녕 그 자취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네. 신의 말씀, 신의 계시, 내려오는 일화 또한 전혀 없지. 나 또한 태상직에 임하고 있지만 한 번도 신의 흔적을 느껴본 적 없어.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태상의 말을 듣고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환각이었나.’
환각. 혹은 꿈이나 환상.
그러나 그렇게 납득하고 나서도 연서강의 마음 속 한 구석을 차지한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제대로 잡고 그 부피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정녕 환각이었나.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뱀에게 물렸던 손가락을 문질렀다. 극심한 고생으로 거칠거칠해진 손끝은, 그러나 그 어떤 짐승에게도 물린 자국이 없이 매끈했다.
구덩이 속에서 백사가 자신을 향해 그리 말했었다.
-자네는 실로 오랜 만에 열리는 연회. 그러니 좀 더 춤추어라. 좀 더 노래해라. 좀 더 많이 나를 즐겁게 해주어라. 내게 끝없는 절망으로 젖은 광희난무(狂喜亂舞)를 보여주고, 비명과 악다구니가 섞인 애절비가(哀切悲歌)를 들려다오.
-너는 지금보다 좀 더, 절규할 수 있음이로다.
순간 그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 *
“이곳에 더 머무르기로 결정하였네.”
그 말을 들은 연의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머무르신다고 하셨습니까?’하고 당혹스러워 하는 연의향에게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제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암, 그러기로 했네.”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연의향의 얼굴이 당황과 곤란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날이 밝자마자 이 방을 찾으면서 그녀는 분명 태상에게 ‘우리는 수도로 귀환하겠네.’란 말을 들을 것이라고 판단, 미리 출발 준비를 지시했었던 것이다.
어제 태상이 연서강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무척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의 말보다야 태상의 말이 더 연서강에게 효력이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태상경의 말이라면 연서강도 못난 고집 그만 부리고 순순히 수도로 귀환하리라. 허나 그것은 그저 그녀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설마 태상이 연서강에게 설득당할 줄은 몰랐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태상경. 태상경만이시라도 예정대로 수도로 귀환하시는 게 올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며 그녀는 아직도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연서강을 흘깃 보았다. 그가 대체 지난 밤 어떤 말로 태상을 구워삶았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주로 변방을 지키는 임무에 파견되었던 그녀이지만 그런 그녀도 태상에 대한 소문은 두어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만백성의 정신적 지주이자 신과 연결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닳고 닳은 고관들조차도 그와 대화하는 것은 어려워한다고 들었었다. 그런 그를 어떻게 설득한 거지?
의원의 도움을 받아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던 연서강이 연의향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연의향 쪽을 보았다. 연의향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궐 안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연대장군이 이곳에 있는데 무엇이 위험할까.”
“하오나, 태상경.”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지.”
태상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더 무어라 말꼬리를 잡아봐야 자신의 자존심만 깎일 뿐이었다. 연의향은 그만 입을 닫고 다만 불쾌해진 숨만 몇 번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연의향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눈치 챈 연서강이 말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언양 수복에 저도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의경이 한 차례 위기를 넘긴 것은 확실하나 그래도 위험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의경의 고립무원을 해소한 데에 제가 도움이 되었다 판단하셨으면, 언양을 수복하는 데에도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연의향이 ‘그러나.’하고 입을 열었다.
“너는, 몸이.”
거기까지만 말하고 연의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랬다. 연서강이 언양을 수복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그녀도 기꺼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의경의 고립무원을 해소한 데에 직접적인 활약을 했던 그이니 그가 이쪽에 있는 것만으로도 군의 사기가 오를 것이다. 언양을 수복할 작전에 그가 참여했다고 해도 병사들이 그 작전을 무척 신뢰할 게 분명했다.
연서령에게 듣자하니 연서강은 이 주변의 지리와 생리에 무척 밝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 주변의 지형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적들에게 연서강보다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가, 그녀의 이기심이었다.
“.......못 들었느냐? 의원이 네 어깨가 심상치 않다 했다. 설사 치료가 잘 된다고 해도 네 어깨가 예전처럼 잘 움직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때문에 한시라도 바삐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곳에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너도 듣지 않았더냐? 어쩌면 어깨 한 쪽을 아주 못 쓰게 될지 모르는데 그 고집이 어떻게 나오느냐?”
대장군으로서 드는 그 이기심을 연의향은 속으로 삭였다.
연의향은 연서강의 상처가 몹시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여기 ‘의경’으로 연서강을 보내자 결정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아직도 그 판단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서강의 도움으로 의경이 고립무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하지만 그것은 대장군 연의향으로서의 생각일 뿐, 그 결정이 연서강이란 ‘개인’에게도 과연 잘 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연의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네 누이로서-....... 네가 수도로 돌아가길 바라는 거다.”
“.......!”
이어진 말에 연서강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반응하는 남동생의 얼굴에 연의향은 살짝 인상을 썼다. 오랫동안 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행동했었던 자신의 과거가 저 표정을 만든 것일 테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이는 서회에서도 가끔 자신이 이름으로 그를 부를 때마다 생소하다는 듯 반응하곤 했었다.
“.......네 누이로서 동생인 네 몸을 걱정하는 거야.”
그것을 떠올린 그녀의 목소리가 다소 나직해졌다. 자신이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남동생이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연서령과 의경을 구해냈다. 더욱이 저 어깨의 상처는 연서령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입은 상처였다.
솔직히 연의향은, 연서강이 자신과 연서령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건 아마 연서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구든 그렇지 않았겠는가. 십 수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이나 철저히 무시하고 냉정히 대했던 남동생이다. 사실 그 남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나 연서령을 포함한 ‘가족’이란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그런 존재일 텐데.
그럴 텐데도 그는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누이를 도와주고, 여동생을 구해주었다.
“알겠느냐.......”
다른 집 같았으면 큰누이의 처지로 남동생을 걱정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텐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 한마디를 하는 것조차 참으로 어렵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색함에 입술을 깨물면서 동시에 연의향은 연서강의 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연서강의 행동과 비교해 보면 이제까지 자신이 했던 행동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가. 밀랍처럼 창백한 남동생의 얼굴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동생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저는, 서령이가 아닙니다. 의향 누님.”
“알고 있다.”
그 말이 ‘누님께서 어여삐 여기는 동생이 아니니, 염려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란 것으로 들려 연의향은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뜨끔했다.
“그러니 한 쪽 어깨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인생이 어그러지지는 않습니다. 전 무인이 아닙니다. 책을 읽을 눈이 있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한 팔이라도 붙어 있고, 생활에 큰 불편만 없다면 제 어깨의 부상은 신경 쓸 게 안 됩니다.”
그러나 연서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자신이 입은 어깨의 부상이 무장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그리 중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연의향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게,’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장이 아니기에 어깨가 중하지 않다니. 그 말에 불쑥 반발심이 들었지만 무슨 말로 반박할지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연서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누이로서 제가 수도로 돌아가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
“그럼, 서회의 대장군으로서는 어떻습니까?”
연의향은 차가워진 머리로 연서강을 보았다.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곧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서회의 대장군인 연의향은-.
“네가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 간단한 대답에 연서강이 꼭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웃었다.
“이왕 다쳐버린 어깨입니다. 그러니 그런 보람이라도 있도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누님과 서령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거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태상을 보았다.
“언양을 수복하게 되면 곧바로 수도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제태상과도 약조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연서강을 연의향은 몹시도 복잡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이왕 다쳐버린 어깨이니 다친 보람이라도 있게, 라.
옛날, 연서강이 아직 어렸을 적 검술을 연습하다 크게 다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친인 연무의가 울고 있는 소년의 앞에서 끌끌 혀를 차던 모습도 함께였다. 눈앞의 아이를 걱정하기는커녕 어렸던 연서강은 크게 울다가도 흠칫 어깨를 떨며 목구멍 안으로 점점 울음소리를 죽였었다. 어떻게든 더 혼나는 것만은 피하고자 기를 쓰는 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랬던 아이인데.
“.......”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그가 그녀는 몹시도 낯설었다. 서회에서도 그리 느꼈었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연서강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와는 정말 많이 달랐다. 연의향, 그녀로서는 차라리 이전의 연서강이 더 이해가 되고 정감이 가는 판이었다.
자신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내치는 가족들을 피해 녹우당에 숨어버린, 소심하고 못난 그가.
“.......강해졌구나.”
연의향은 그리 말하며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긴 사람이란 것이 늘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연서강이 변했다면 자신 또한 그를 대함에 이전과 같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잠시 후 연의향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한 번 쓸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언양을 최대한 빨리 수복해야겠군.”
“감사합니다, 의향 누님.”
그 말에 턱 끝을 끄덕여 보이며 연의향은 부친께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연서강이 대단히 믿음이 가고 쓸모가 있어 조금 더 데리고 있겠노라.’ 하는 편지에 부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녀는 궁금했다.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라 치부할지, 아니면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라고 할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연무강, 자신의 첫째 오라버니는 무척 화를 낼 것이란 사실이었다.
급히 언양을 수복하기 위한 계획이 짜이기 시작했다. 서회의 연의향과 의경의 연서령, 그리고 연서강과 그 각각의 군사들, 또 주변 읍을 지휘하는 각 장군을 대신해 온 장군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때는 바야흐로 칠월 초이튿날이었다. 맥령을 넘기고 나서도 수확한 보리가 없어 여전히 풀뿌리를 물어뜯으며 연명하고 있을 적들은 지금쯤 굶주림이 최절정에 달했을 거라 그들은 예상했다. 언양에 구비되어 있었던 식량과 물이 적들의 갈증과 기아를 다소 달래주었을지 모르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했던 의경 포위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현재 국내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의 상황은 가히 참담했다.
회의 도중, 연서령이 계곡과 산에서 대치했던 잔당들과의 전투를 예를 들어 말하자 누군가 조심스럽게 ‘언양의 사람들은 무사할까요?’란 질문을 던져 방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무겁게 깔린 침묵 속에서 입을 연 사람은 연서강이었다. ‘만일 언양의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적들이 이미 그들을 인질삼아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았을까요.’ 연서강의 그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침묵했다. 적들이 여태껏 그런 요구를 해 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의향이 건조한 목소리로 ‘전멸했다, 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군.’이라 말했다. 그리고서 그녀가 덧붙인, ‘태상경께 언양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 달라 부탁해봐야겠다.’는 말을 끝으로 언양에 대한 언급은 끝을 맺었다.
언양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언양 사람들이 전멸했다는 결론을 내리자 작전을 짜기는 한결 쉬워졌다. 더 이상 언양에 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언양을 완전히 멸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언양은 주변이 산지로 뒤덮인 분지 지형이었다. 허나 의경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보다는 그 높이와 경사가 다소 완만한 것들이었다. 때문에 언양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통해 산세가 험한 의경의 주변까지 적들이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현재 그 계곡은 연서강이 파괴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용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몰래 도망가는 용도로는 좋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 한 연서강의 말에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곡을 파괴한 덕분에 적들도 계곡 아래에 공동(空洞)부분, -동굴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다른 바깥과 이어져 있다는 것도. 무너진 계곡 덕분에 지형이 보통 험준한 게 아니겠지만 그래도 도망을 친다면 주변의 낮은 산과 언양으로 통하는 길목보다야 이쪽이 훨씬 안전할 테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본다면 우리가 공격할 시 그들은 이쪽을 통해 도망갈 가능성이 크겠군.”
연의향이 손가락을 탁자 위에 있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계곡이다. 이 계곡만 지나면 의경이었다. 의경은 국경과 맞닿아 있어 어찌어찌 의경까지 도망가는데 성공한다면,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아마도 언양에 있는 적들은 ‘도망’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을 테니 계곡을 통해 빠져나갈 계획을 이미 짜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험준하다는 것은 적들이 도망가기 힘들다는 소리가 되겠지만, 또 우리 아군이 그들을 쫓기 힘들다는 소리도 됩니다. 그들은 아마 도망가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하고 올 테니까요, 계곡에서 한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연서령의 군사가 한 마디 말을 던졌다. 연의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되겠지.’ 중얼거렸다. 그녀가 잠자코 있다가 지도 위를 한 번 슥 훑어보았다.
“차라리 언양의 모든 적들을 이 계곡으로 몰아볼까.”
그 편이 전력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켜 적들을 일망타진하기에도 쉬울 것이다. 연의향의 말에 연서강이 적극 찬성했다. ‘그렇게 하면 주의도 분산되지 않아 더 효율적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공(火攻)을 씁시다.”
연서강이 주장했다. 연서령이 그 말에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화공이라.......”
“언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낮지만 바람이 강합니다. 꼭대기에서 땅으로 바람이 불 때를 이용해 언덕에 불을 놓으면 불길이 기세 좋게 언양으로 내려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오랜 가뭄으로 수목들이 딱 좋게 말라있기도 하니 잘 타오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언양은 불 울타리에 갇히게 되는 셈이다. 나올 길은 강이 있는 언양의 입구와 예의 그 계곡 쪽뿐이다. 연의향이 지도에 표시된 언양의 입구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여기만 지키고 있으면 되겠군.’ 중얼거렸다. 연서령도 냉큼 ‘알았어. 그렇다면 우리 의경군은 계곡을 지키고 있겠어요.’하고 말을 보탰다.
연의향이 서회에서 의경으로 지원을 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서회를 완전히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연의향이 의경에 데리고 온 병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강에서 우리가 대기하고 있다가 불을 놓으면 전투를 시작한다. 하지만 화약과 화살로 엄포만 놓겠다. 쳐들어가는 척만 하겠다는 거다.”
연의향이 연서령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하렴. 서령아.”
확실히 토벌대장 역할에는 연서령이 제격이었다. 연서령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허벅지 부상이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말을 모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어린 그녀에게는 힘든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연의향은 연서령의 기량을 믿었다. 그런 연서령의 얼굴을 잠깐 지켜보던 연의향이 이내 연서강을 돌아보며 부드러이 물었다.
“해서, 불은 언제 놓는 게 좋지?”
“.......늦은 밤입니다. 밤이 되면 산꼭대기가 땅바닥보다 더 기온이 내려갑니다. 바람은 찬 곳에서 불어오기 마련이니, 아마 그때가 되면 산꼭대기에서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산풍(山風)이라고 불렀다.
“좋아. 그러면 자시(子時: 오후 11시~오전 1시까지)에 작전을 결행하도록 한다.
연의향이 한 마지막 말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작전에 있어 크게 지시할 부분만 짚어주고 난 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밖을 빠져 나갔다. 연의향이 자리를 뜸으로 해서 회의가 파하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연의향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방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서령도 마찬가지였다. 계곡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 주변 산이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장소인지 그녀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연의향은 자신이 거기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기에 일부러 계곡을 자신에게 맡겼으리라. 연서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 실수를 저지른 곳이기에 두 번째 실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굳게 결심하며 그녀는 제 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계곡에서 당했던 수모를 언니가 갚을 기회를 준 것이다.
“서령아.”
어서 가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연서령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연서강이었다. 연서령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연서강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고 말았다.
“.......왜.”
연서령은 의향 언니에게서 연서강이 수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었다. 그때 연서령은 존경하는 제 언니이긴 했지만 그만 앙칼지게 따져 묻고 말았다. ‘사람의 어깨가 저 상태일진데, 어째 계속 이 전쟁터에 두기로 결심했소!’ 그리 따져 묻는 연서령에게 연의향은 언제나 그랬듯 냉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원했다.’ 이왕지사 전쟁이 막바지까지 다다랐으니 언양을 회복할 때까지만 있기로 했다고. 그러고 싶다고 그가 원했다고 한다.
연서령은 당연히 납득하지 못했다. 성격 같아서는 눈앞의 연서강을 당장 두들겨 패서라도 수도로 보내고 싶었다. 허나 이제 그녀는 연서강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연서령은 자꾸만 구겨지는 면상을 억지로 펴면서 연서강을 보았다.
“인질을 붙잡을 수 있겠니?”
분명 연서강 쪽도 자신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못할 것이리라. 연서령은 그리 가늠하고 있었지만, 예상 외로 연서강은 아주 태연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뜻밖의 물음에 연서령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질?”
“그래. 의향 누님이 계신 쪽으로 가는 적들은 군사적 요직에 있지 않은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계곡으로 갈 적들 중에 중직을 맡고 있는 자들이 있겠지. 그들을 사로잡아주렴.”
“.......생포는 힘들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았다지만 오랫동안 한결같이 유지해온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힘들었다. 지금도 당장 이유를 다그쳐 묻고 싶었지만 연서령은 꾹 참았다. ‘역시 그렇겠지.......’하고 연서강이 당장 생각에 빠지면서 중얼거린다. 그 태도에 이상하게 발끈한 연서령이 얼결에 내뱉었다.
“알았어. 해볼게. 한 사람이라도 괜찮은 거지?”
그 대답에 연서강이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제길, 연서령은 그 말에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싶었더니, 잠시 잊고 있었던 할 일 하나가 연서강의 대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연서령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수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 때문에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제 할 말을 모두 마쳤는지 연서강이 방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연서령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직 하지 못한 일.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고맙다는 말은 이쪽에서 해야지!”
연서강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주 죽을 맛이었다, 연서령은. 그녀는 꽉 주먹을 쥐고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연서강의 얼굴을 다시금 마주하니 또 습관처럼 짜증과 불쾌함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 짜증에는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연서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대신 화살을 맞은 거야?”
원래는 그것을 물어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 무심코 묻고 나서도 연서령은 ‘아, 진짜.’하고 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이런 일 하나도 말끔하게 말할 줄 모르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연서령의 그런 심정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태연한 태도로 연서강이 대꾸했다.
“너는 의향 누님을 따라 대장군이 되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가.”
“.......”
순간 연서령은 숨을 멈췄다.
그랬다. 자신이 늘 버릇처럼 하곤 했었던 말이기에 그 사실을 연서강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다. 허나, .......그것을 연서강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연서령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지 않으면 체면도 잊고, 이제까지의 관계도 모두 잊고 그에게 매달려 울 것만 같았다.
고맙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구해줘서, 고마워.”
연서령은 그제야 간신히 자신이 그에게 해야 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원래는 자신이 얻었어야 할 부상이다. 지금 연서강의 상태로 미루어 보건데, 만일 화살을 맞은 사람이 자신이었다고 해도 분명 중상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수도로 소환되어 그곳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을 테고, 또 치료를 받았어도 어깨가 예전처럼 움직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무인으로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였다. 특히나 ‘전술’이 아닌 ‘무예’로 뛰어난 평을 받는 그녀로서는 말이다.
“.......”
연서령의 말에 아직 연서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연서령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연서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가 자신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연서령은 문득 겁이 났다.
그리고 올려다 본 오빠의 모습은,
“.......빚이야.”
어째서인지 무미건조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딱딱한 목소리로 연서강이 말한다.
“빚?”
연서령이 머리를 기웃하며 말하자 연서강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그래.’하고 답했다.
“서령이, 넌 내게 빚을 졌으니-, 어떻게든 적 중 하나를 생포해주렴.”
자신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곧 연서강이 설명을 덧붙였다. 연서령은 꾹 입을 다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잠깐 흐려졌었던 그녀의 예기가 다시 번뜩였다.
그렇다. 이건 빚이다. 자신이 그에게 목숨 값을 빚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미안해하며 우울해하기 보다는 그 빚을 어떻게 하면 그에게 되갚아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 여기는 수도의 본가도 아니니.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연서령이 대답했다.
“인질이 필요한 거지? 네가 무얼 할 생각인지 몰라도, 꼭 생포해 보이겠어.”
그런 그녀를 연서강이 마른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서령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방을 나갔다. 다행이었다. 다시 본 연서강은 어제의 그 불안했던 모습의 그가 아니었다. 행방불명되기 전과 같았다. 연서강이 혹여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라면 어쩌나 고민했던 게 바보 같았다. 연서령은 주먹을 꽉 쥐고 ‘좋았어!’ 중얼거리며 실실 웃었다.
모두 나가 조용해진 방안에서 연서강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는 탁자 위를 손톱으로 툭툭 쳤다. ‘빚이라.......’ 중얼거리며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연서령을 구하기 위해 간 계곡에서 그는 뼈저리게 후회했었다. 그녀를 괜히 구하러 왔었다고, 그렇게 울음을 삼키며 들었던 후회가 연서령의 ‘고마워.’란 감사의 인사와 겹쳐졌다. 입 안이 써졌다.
이제 더 이상 사사로운 정에 따라 무모하게 행동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숨을 헛된 곳에 내다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끔찍한 경험 역시 다시 하고 싶지 않다. 가족이라 해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의 인사도, 연의향의 마음 씀씀이도 연서강은 애써 모른 척을 했다.
“.......”
일을 마치고 빨리 수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 *
언양을 수복하기 위해 의경군과 연합군이 움직였다.
과연 도주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지 적들이 포진하고 있는 언양은 그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할 뿐 별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았던 공격들도 잔당들이 모두 정리되자마자 사지가 모두 잘린 동물처럼 멈췄다. 적들이 지쳐가고 피폐해져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적들은 얼어붙은 대지에 쓰러져 딱딱하게 굳은 시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도 의경이 포위되었을 때 연의향이 적들의 협박에 못 이겨 여러 가지 물품을 건네주고 말았으면 없었을 침묵이었다. 적들이 그때 물품을 전해 받았다면 지금쯤 여전히 적들의 움직임은 활발했을 터이고, 그러면 예전과 똑같이 다방면에서 여러 공격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언양이 정복당한 상태이니 예전보다 더 심해졌을지 모른다.
전쟁이 있어 전환점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의경에서의 전투였다.
그 전환점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서진군과, 원하는 소득을 얻지도 못한 채 사면초가의 상황에 내몰린 적군. 그 중 어느 쪽이 이길 지는 전쟁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세 살배기 꼬마아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손실 없이 스스로, 빠른 시간 내에 고립된 상태를 헤어 나온 의경은 이 전투에서 그만큼 중요한 지표가 된 것이었다.
연의향의 연합군은 언양으로 통하는 길목에 진을 쳤다. 언양으로 통하는 길목은 큰 강이 둘러 흐르고 있고 너른 벌판이 펄쳐져 있었다. 그곳에 진을 친 연의향의 군대는 멀리서 봐도 그 규모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 연의향의 군대가 규모가 작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했을 법도 한데 그러나 언양의 적들은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규모가 작은 것도 함정이라 생각하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도망을 우선으로 하기에 공격을 하지 않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결론은 그거였다. 적들은 현재 도발을 할 정도로 여유가 없다는 것.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밤이 되었다. 작전대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사방팔방에서 불을 놓았다. 정상적인 때였다면 습기 많은 우기라 불이 제대로 붙지 않을 게 분명했다. 허나 지금 서방은 몇 달째 가뭄이 계속 되고 있어 대기는 뜨겁고 말라 있었다. 불이 화르륵 마른 땅에 붙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바람을 따라 언양으로 향했다. 언양을 둘러싼 산지는 금세 불구덩이가 되었다.
그제야 언양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불을 밝히고 분주한 움직임이 생겼다. 물을 뿌려 불을 끄는 움직임은 역시 없었다. 그들은 부대를 정비하지도 않고 무질서하게 도망쳤다. 사방이 불이기에 도망칠 곳은 오직 두 군데. 입구와 의경으로 통하는 계곡 밖에 없었다. 무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눠졌다.
입구로 질서를 갖추지도 못한 적군들의 무리가 나오자 연의향이 공격태세를 취했다. 입구로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적군들은 대부분이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마른 몸의 병사들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불지옥이 된 언양을 빠져 나왔다. 거기서 연의향이 공격을 지시했다.
상황은 계곡도 엇비슷했다. 언양이 불구덩이가 되자 계곡으로도 마침내 꾸물꾸물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다른 점은 언양의 입구 쪽에는 시간을 끌기 위한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다면, 계곡 쪽은 경국으로 도망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주요 인물들이 호위병들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마르고 딱딱한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사다리를 이용해 커다란 바위를 타고 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저 활로 겨냥해 쏘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연서령은 움직임을 최대한 죽이고 당분간의 상황을 살폈다. 연서강이 인질을 잡아 달라 요청했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이 원한 것은 군사적 요직에 위치한 주요인물일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맨 처음 바위를 넘는 것은 안전을 위해 제일 먼저 희생될 일개 병사일 게 분명했다. 이윽고 몇 놈이 사다리를 타고 넘자 그제야 무장을 단단히 한 몇 놈이 조심스레 사다리를 타고 바위를 넘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연서령은 조소했다. 언제 보아도 제 위험만 차리고 어린 연놈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반란군의 수장들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 게걸스런 놈들의 얼굴을 그제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구나!
연서령이 활을 들어 그들 중 한 놈을 겨누었다. 비록 어둠 속이었지만 휑한 계곡에는 찬란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고, 주변의 불난리 때문에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편이었다. 연서령은 까득 이를 갈며 놈의 어깨를 겨눴다. 활시위를 겨누고 있노라니 불현듯 연서강도 이리 당했겠지 싶어 울분이 차올랐다.
이건 보복이었다.
네놈이 연서강을, 아니- 오라버니를!
속으로 말을 되뇐 순간,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핑 허공을 날았다. 퍽! 조용하던 계곡이 일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화살을 맞은 적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연서령은 확인했다. 아직 멀었다. 한 놈 더! 한 놈 더. 연서강을 위해 생포하자! 그리 결심하며 연서령이 소리를 질렀다.
“가자!”
그 소리에 풀숲에 숨어있었던 의경군이 계곡으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때는 칠월 초사흗날.
하제국의 서쪽과 그에 맞닿아 있는 경국의 경계에서 지루하게 이어진 전투의 끝이었다.
이 전투에서 연의향이 지휘하는 서진군은 빼앗겼던 언양을 회복함은 물론, 경의 반란군 중 변방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한 몇 놈을 생포하였다. 언양을 완전히 수복하게 된 것은 그 하루 뒤인 칠월 초나흗날. 언양에서 도망친 잔당들을 다시 완전히 정리한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가까스로 되찾은 언양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적군이 보복 살인이라도 한 것인지 읍 곳곳에 잔인하게 살인된 서진군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개중에는 시신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된 사체들도 있었다.
승전을 하기는 했으되, 원래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을 빼앗겼다 되찾은 꼴이라 입 안이 씁쓸한 승전이었다.
그 소식은 곧 수도까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