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서?”
태상의 물음에 입을 다문 연서령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시작한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쉼 없이 긴 말을 하느라 목이 바싹 말라 있었지만 물을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 다음 말을 꺼낼 생각을 하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허나, 해야 한다. 곧 연서령은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은 바닥으로 고정시킨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계곡은 엉망으로 벽파(劈破)되어 있었습니다. 땅은 꺼져 있고 그 너머로는 동산만큼 큰 돌덩어리가 계곡을 막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언양에서 적들이 넘어올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땅이 꺼지고 산사태로 쪼개진 돌덩이들이 떨어진 계곡에는 수많은 적군들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돌에 깔려 죽은 자에서부터 도망치다 추락사한 것처럼 보이는 자까지, 그곳은 완전히 생지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마른 식물 외에는 살아있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계곡에 도착한 연서령은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었다. 한 번 천지가 요동친 자리인지라 바닥에는 그때까지도 마른 흙냄새와 피비린내가 짙게 깔려 있었다. 천고(千古)의 세월을 지켜왔던 계곡이 산산조각 난 광경을 보자 괜히 뱃속 깊은 곳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연서령은 바로 병사 몇 명을 보내 주위를 둘러보게 한 후에 시체와 돌투성이인 계곡으로 직접 내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하를 찾지 않길 바라며.
“혹시 폭발에 휘말려 죽은 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연서강의 충고대로, 만일 그들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저 때문이 틀림없었습니다. 해서 소관(小官)은 그들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계곡을 수색했습니다.”
“찾았나?”
연서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 시체들 사이에는 없었습니다.’ 거의 변명으로 들릴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태상은 혀를 쯧쯧 찼다.
애초에 연서령이 내린 명령 자체가 무모했다. 이럴 경우에는 안타깝지만 부대가 전멸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또 계곡의 사체들 사이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곧바로 계곡을 빠져 나와, 바로 대열을 정비해 주변에 살아있는 적이 없는지 탐색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서령은 그러지 못했다. 죽어 버린 계곡, 폭파된 계곡의 사체(死體) 사이에 묻혀 있는 적군의 수많은 시체......., 그 기묘한 분위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숨쉬기를 멈춰 버린 듯한 그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압도되어 버렸다. 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 계곡은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태어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일어나는 일도 없이 모든 것이 끝. 그곳은 다만 전투의 종결지일 뿐이었다. 해서 그녀는.
“방심했습니다.”
“그때, 연서강이 계곡에 도착했군.”
“.......네.”
연서령은 이마를 짚으며 얌전히 대답했다. 어느새 아미에 흥건히 맺힌 식은땀을 그녀는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아, 그 찰나의 순간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당시의 자신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연속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어 집중력이 다소 떨어져 있었다고 변명하기에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제 기분에 따라 멋대로 움직였다가 단번에 상황을 악화시켜 버렸다.
“.......”
찬찬히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연서령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상의 얼굴은 대양(大洋)의 표면처럼 질책도, 위로의 감정마저도 없이 그저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표정에 용기를 내어 연서령이 말을 이었다.
“.......그때 오라버니가, 도착했습니다. 병사 하나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더군요. 계곡의 입구에서 말을 멈춘 그가 저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서 계곡을 벗어나야 한다고요. 저는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어째서 연서강이 여기까지 왔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화가 났었습니다.”
“.......”
“저는......., 그에게 의경을 부탁한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믿고 맡겼습니다. 그를 인정하고 의경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의경을 버리고 계곡까지 오다니. 저는 오라버니가 저를 못 믿어 계곡으로 온 줄 알았어요.”
담담하게 태상이 대꾸했다.
“화를 내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군.”
“네. 그러자 오라버니가 답답했는지 병사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말을 잘 타지도 못하면서 홀로 제 곁까지 오더니, 저에게 다가와서 다시 말했습니다.”
“무어라고?”
“위험하, 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연서령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연서강이 외치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짜랑짜랑 울렸다. 좀체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던 그가 자신에게 고함까지 질렀다. ‘여기는 위험해! 위험하니까 어서......!’ 그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러나 자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
연서령이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그가 의경을 버리고 계곡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저는 그가 어째서 그랬는지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무작정 그에게 화를 냈습니다. 지금 의경을 버리고 온 거냐고!”
그리고 일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서령아!
그가 소리쳤다. 그리고 거칠게 연서령의 말고삐를 잡아 뒤로 당겼다. 불시에 당한 일인지라 연서령도, 말도 그가 당기는 대로 따라갔다. 자신도 모르게 연서강의 앞으로 움직이게 된 연서령은 당장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녀는 발끈 화를 내며 순간적으로 젖혀졌던 고개를 치켜세웠다. ‘너 지금......!’ 하지만 연서령은 그 뒷말은 잇지 못했다.
-!!
연서령의 눈이 커졌다.
-화살!
연서강의 어깨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적군의 붉은 깃을 단 화살이! 연서령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지금 연서강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밀어내고서......!
-.......
너무 놀란 나머지 연서령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때문에 연서강이 화살을 맞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져 말 위에서 떨어질 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연서령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바닥에 쓰러진 연서강이 그때 소리를 쳤다.
-가!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슉-! 또 한 차례 화살이 날아와 연서령의 허벅지에 박혔다. 연서령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히힝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번쩍 들었지만 당시의 그녀로서는 그 움직임을 제어할 정신조차도 없었다.
-이건!
-장군님!
곳곳에서 부하들의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연서령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부대는 보았다. 시야 저 끝, 저편 하늘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의 비! 하늘을 온통 새카맣게 수놓는, 새까만 점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은 그들이 놓인 상황을 정확히 깨달았다. 적의 기습이었다!
-도망가!
연서강의 고함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거의 악을 쓰는 듯한 고함소리였다. 연서령이 자신에게로 머리를 돌리자, 연서강이 재차 말했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하, 하지.
-도망치라고, 서령아!
거의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연서강이, 연서령이 타고 있는 말을 채찍질했다. 짝! 하는 채찍질 소리와 함께 연서령의 말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져 나갔다. 그 뒤를 황급히 그녀의 부하들이 따라갔다. 연서강을 태우고 왔던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연서령의 머리는 새하얗게 표백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것은 본능 하나뿐이었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길러진 본능. 그래서 그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파파팍-!
연서령와 그녀의 부대원들이 탄 말 말발굽이 박차고 지나간 자리에, 날아온 화살들이 박혔다. 무서운 기세였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이성이 되살아났다. 연서령은 이를 갈았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자신의 부하들의 시신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을 죽인 적들이 시신을 숨기고 그 주변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째서 그것을 생각지 못했나 억울할 정도였다.
허나 이미 늦었다.
막 계곡을 벗어나면서 연서령은 뒤를 돌아보았다. 화살들을 피해 연서강이 커다란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화살이 사정없이 꽂혔다.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화살이 꽂히는 소리에 그가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연서강이 나를 구해줬어.
그 사실을 떠올리고 연서령은 숨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계곡 중앙에 홀로 버려진 연서강을 데리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화살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너져 내려 시야가 탁 트인 계곡만큼 화살을 쏘기 좋은 곳도 없었다.
화살들은 연서령들이 계곡을 벗어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계곡에 누군가-연서강-가 낙오된 것을 멀리서나마 확인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는 이미 암석 밑에 숨어 화살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적들은 화살을 퍼부었다. 이미 죽은 것이 확실한 시신들 위에도 화살들이 사정없이 퍼퍽, 꽂힌다.
그 모습은 마치 패배를 눈앞에 둔 자들의 마지막 발악처럼도 보였다.
어차피 패할 것이 분명하다면 자신들에게 있는 무기들을 모두 쓰고 죽자는, 단 한 명이라도 더 적을 죽여 자신들의 저승길 동료로 만들겠다는 흉흉한 독기가 어려 있는 공격이었다. 자신들을 이 정도까지 궁지에 몰아넣은 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공격이었다.
때문에 연서령은 결국 계곡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더욱이 적들은 ‘산’에 강했다. 이대로 ‘산’에 있다간 또다시 기습을 당할 지도 모른다고 여긴 병사가 다급하게 충고했다. 자신들이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적들이 여기를 중점적으로 기습할 것이란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가장 쉬이 죽게 되는 건 연서강이라고.
해서 연서령은 ‘산’에 있는 잔당을 재빨리 없애고 난 후에 계곡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게 만든 것은 연서강이었지만. 자신들이 연서강을 내버려두고 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계속해서 말을 몬 것은 적의 이목을 자신들 쪽으로 끌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계곡을 떠나면서 연서령은 얼굴을 엉망으로 구긴 채 소리를 질렀다. 연서강이 자신을 구해줬는데 자신은 그런 그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하러 온 그에게 자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했단 말인가!
연서령은 ‘젠장!’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었다.
‘산’으로 피한 적들은 너무도 끈질기고 의미 없는 공격을 해댔다. 연서령이 기억하는 한 그렇게 형편없는 전투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전투도 처음이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때때로 장난이라도 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맥락 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때문에 전투는 생각 외로 오래 이어졌다. 급한 불부터 끄고 안전해지면 연서강을 데리러 가려 했던 연서령은, 결국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계곡으로 갈 수 있었다.
연서령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태상은 그녀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약간이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없었습니다.”
그랬다. 연서령은 텅 빈 계곡을 보며 또 후회했다. 절망했다. 자신의 판단을 원망했다. 그때와 똑같은 어둑한 낯빛으로 연서령이 입을 열었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피맺힌 울분이 섞여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핏자국뿐이었습니다. 그 핏자국을 따라 갔지만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과 흙먼지 때문에 중간부터 핏자국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연서강은 적들이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올 것을 알고 숨어있던 장소를 떠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적들이 쫓아갔고.......”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마 적들에게 붙잡혀 죽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망설임 없이 내뱉었을 말, 하지만 연서령은 그 말을 결국 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면 정말로 연서강이 죽었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 연서령은 대신 이렇게 말했다.
“찾았어요. 그 주변을.”
샅샅이 계곡을 뒤지던 그녀는 연서강을 찾기 위해서인지. 혹은 그저 그곳을 지나던 중이었는지 모를 적들을 몇이나 베었다. 그들을 죽이기 전에 연서강이 어디 있는지 물었으나 그들은 실성한 것처럼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이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란 그들의 대답이었다.
연서령은 혼란에 사로잡혔다. 적에게 잡혀 간 것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적에게 잡혀 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의 손에 맥없이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또 이 얼마나 험한 산길인가. 큰 부상을 입고 헤매다가 그만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만 가지의 가능성이 전부 만 가지의 죽음으로 이어져 연서령을 괴롭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았지만, 그 생 전부를 통틀어 그녀가 이렇게까지 깊은 회한과 혼란에 빠졌던 적은 없었다. 연서령이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회에서 의향 언니가 왔습니다. 허나 그 이후에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줄곧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밀려 있는 일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그를 찾는 데에만 열중하고 싶지만 의경을 지키는 중장군인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 일이였군.”
연서령의 말이 모두 끝난 것을 알고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후에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입을 다문 채 한참 동안을 침묵했다. 그런 그를 해쓱해진 연서령이 절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다경(一茶頃) 쯤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 동안 말이 없던 태상이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며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가 말했던 그 계곡으로 가보지. 그래야 그가 어떻게 움직였을까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 *
........화살비가 멈췄다.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연서강은 화살에 맞은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팠다. 10살 때 칼에 찔린 이후, 실로 처음 겪는 부상이었다. 부상의 정도는 칼에 찔렸을 때가 더 심각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당시의 기억은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터라, 현재의 아픔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화살이 어깨에 박혔을 당시 화살촉의 그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딱딱한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차갑던 화살촉이 그의 몸에 박혀 점점 주변 살과 비슷할 정도의 온기를 띠기 시작하는 느낌에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철의 온기는, 이어 그 주변을 탈 것 같은 열기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몸에 열이 오르자 고통은 더더욱 심해졌다.
어서 피해야 한다.
상처부위에 열이 오르면 고인 피가 썩어 고름이 차기 시작한다. 고름이 차면 고통이 더더욱 심해져 결국은 신경을 마비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각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까지도 둔화되어 도망치기 힘들어 질 것이 분명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지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연서강은 일단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고민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일단 화살비가 멈추기는 했지만 지금 과연 안전할지.
만약 적들이 물러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 아래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연서강은 주변에 떨어진 수많은 화살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돌 아래서 나오기를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저 화살을 쏜 수 십 개의 활이 현재 자신만을 겨누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허나 여기서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온 잔당들과 결국은 맞부딪히게 될 것이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이 현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판단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내려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잡힌다. 집하면 죽게 된다. 하지만.
“도망쳤다가 다시 화살이 쏟아지면.”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고슴도치 신세가 될 테지.......
연서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온 몸에 열이 올라서인지 심장이 쿵쿵쿵쿵 대고(大鼓) 소리를 내며 뛰었다. 화살이 박힌 어깨에서부터 타는 듯한 열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그의 뒷머리를 따끈따끈하게 덥히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딱딱, 이를 부딪치며 연서강은 부들부들 떨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 어느 길을 선택해도 결국에는 ‘죽을 것’만 같아서 너무도 무서웠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어떡하지?’하고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것뿐이었다. 도망칠 작정이라면 가급적 빨리 도망치는 게 나았다. 그래야 뒤를 쫓는 적군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으리라. 초조하게 고민하던 연서강은 곧 결론을 내렸다.
도망가자.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살 가능성이 있는 곳에 매달리고 싶었다. 신중하게 연서강은 시험 삼아 제 겉옷을 찢어 돌에 두른 다음, 그것을 돌 그림자 밖으로 던져 보았다.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즉, 적들이 자신을 잡으러 계곡에 내려오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해.......!
연서강은 재빨리 바위 그림자 아래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계속해서 쿵쿵 뛰었다.
한참 도망을 치던 연서강은 어깨에 박힌 화살이 거치적거려 긴 화살대를 잡고 그것을 툭 부러뜨렸다. 화살대를 부러뜨리는 반동에 화살촉이 살 속에서 움직였다. 뾰족한 철이 상처를 헤집는 고통에 절로 ‘윽!’ 소리가 났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화살대가 떨어져 나가니 한결 움직이기가 쉬워진 듯 했다.
발발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이면서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열이 가득 들어찬 상체와 머리 때문에 이마와 등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반면 사지(四肢)와 입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깨가 뜨거운 물이라도 가득 들어찬 듯 무겁고 뜨거웠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떡해야!
필사적으로 생각하며 연서강은 계곡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타다다닥. 멀리서 누군가 걷는 소리가 들릴 때면 심장 한 구석이 써늘해졌다. 적이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무작정 걷다보니 나중에는 자신이 산속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서 의경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어느 쪽이 의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절망스러웠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탓인지 머리 위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도 했다. 그저 마른 나무와 흙바닥만이 끝도 없이 반복되었다.
후두둑, 무른 땅을 잘못 밟아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려는 몸을 팔을 뻗어 받친다는 것이 그만 화살을 맞은 팔을 뻗어버려서 연서강은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거친 땅에 턱이 쓸리고 손바닥이 쓸렸다. 하지만 불안함이 극에 달한 몸은 이제 그 정도의 아픔정도는 느끼지도 못했다. 연서강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헉헉.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러워서 연서강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내장이 전부 뒤틀려 확 찢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었다. 고통도, 멀리서 들리는 누군가의 기척도, 상실한지 오래인 방향감각조차도 그 모두가 연서강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일단 몸을 숨기자.
겨우 이성적으로 판단한 연서강은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한 다음 아군이 자신을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무작정 도망치다가는 체력이 바닥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지만....... 곧바로 연서강은 머리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그렇게 판단한 연서강은 필사적으로 몸을 숨길 곳을 찾는 데에 집중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아군이 자신을 찾아 줄 것이다. 그렇게 믿자.
그런데 그때,
“!”
연서강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어디선가 투둑, 하는 소리가 난 탓이었다. 누군가 방금의 연서강처럼 무른 땅을 밟고 넘어지는 소리였다.
적군이다! 적군이 가까이에 와 있다.
겨우 다잡은 이성이 완전히 증발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아, 연서강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악문 입술사이로 흐느끼는 소리 비슷한 것까지 흘러나왔다. 지나가는 중간에 나무와 풀에 긁히고 다리가 부딪쳤지만 그런 것 따윈느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다만, 무서웠다.
붙잡히면, 여기서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서워. 무서웠다. 더러운 감옥 안에서 맥없이 고문당하고 죽었던 소년병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저절로 연상되는 고통에 연서강은 바르르 떨었다. 상상할 수 있는 자만이 두려움을 안다고 했다. 이제는 자신이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조그만 희망조차도 들지 않았다. ‘나는, 꼼짝없이.’ 연서강이 두려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붙잡힐 거야. 적에게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분명히 죽게 될 거다!
그러나.
“싫어.......”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얕은 숨과 함께 꺼질 듯 흐린 절규가 흘러나왔다. 죽기 싫어. 아니, 나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안된단 말이다! 자신은 이러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지 않나. 연조도 또다시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이곳까지 와서 얼마나 힘들게.......!
“.......말 것을 그랬어.”
후회가 흘러나왔다. 연서령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도와주기 위하여 계곡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지만 않았으면 자신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았을 텐데.
왜, 대체 왜 난!
감정적으로 변한 머리와 가슴이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절규했다. 변명했다.
서령이의 ‘과거’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붉은 단풍이 떨어지는 그 볕 좋던 가을날. 무장으로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세상의 모든 행운과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린 짐승 같은 얼굴로 오도카니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을.
연서강은 눈물과 땀이 밴 얼굴로 절망했다.
정확히는 화살이 맞은 직후 ‘아차!’했었다. 하지만 화살이 연서령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의경에서 함께 싸우며 명령을 내렸던 몸이라 그런지 관성적으로 아군을 퇴각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동시에 맥없이 죽어갔을 언양의 병사들도 생각났다.
허나 그 정의감도 잠시. 바위 그림자 아래에 숨어 그 주변으로 쏟아지는 화살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돌무더기와 적군의 시신 위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화살들이 떨어지는 작두날같이 매서운 소리를 냈다. 귀를 막으며 그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여기를 벗어날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면서 왜 무작정.......!
연서령이 어깨에 화살을 맞아 ‘무장’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쓸데 없는 짓을 햇다. 언제나 씩씩하던 여동생이 눈물까지 흘리던 모습이 너무도 애달파, .......정말로 괜한 짓을 해버렸다.
“흐윽.”
그래, 어깨에 화살을 맞더라도 연서령은 결국은 거기서 살아나올 것이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맞아 그저 ‘저런.’하고 걱정스런 얼굴만 해줘도 되는 것이었다. 연서령이 어깨의 부상 때문에 더 이상 ‘무장’으로서 활약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의경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서회에서 연의향 누님이 올 것이니.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굳이 연서령의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여기 의경까지 온 것은 연서령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조를 구하러 온 것이었는데!
어쭙잖은 동정을 베풀었다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알량한 ‘가족애’ 따위는 진작 무강 형님이 자신을 죽였다는 걸 알았을 때 버려버린 것이 아니었나. 멍청했다. 그러나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잠시 숨이 막혀 연서강은 주변의 나무를 붙잡고 호흡을 골랐다. 정신없이 달린 덕택에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머리는 새하얗게 비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한 탓에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져만 갔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고 싶었다.
“.......안 돼.”
그러나 그는 이를 악 물었다. 연서강은 나무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그렇게 모질게 마음을 다지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틈이었다. 경사진 땅 위에 넓적한 바위 하나가 지붕처럼 삐죽 나와 만든 틈이었다. 바위 위엔 마른 이끼와 넝쿨들이 엉켜있었다. 그 옆에서 나무들이 우거져 틈을 잘 가리고 있었다. 겨우 사람 하나 몸을 구겨 옆으로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틈이었다.
저기로....... 저기서 누워 적군들의 눈을 피해 아군들을 기다려야겠다.
연서강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른 흙과 작은 돌이 납작 엎드리자 입속으로까지 들어왔다. 그 흙을 어금니로 넣어 뿌득 씹으며 연서강은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아서 돌아가야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깨의 통증이 이제 본격적으로 온 몸 전체에 퍼졌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몸에 열이 들어찼다. 가만히 엎드려만 있는데도 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땅을 적셨다. 온 몸에서 땀과 섞인 흙 알갱이가 굴러다녔다.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연서강은 현재 낮인지 저녁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생각만 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백지 마냥 하얘졌다. 한계에 다다른 몸이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이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을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의 몸이 작살 맞은 물고기마냥 크게 발작했다.
발소리가 났던 것이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연서강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다시 들어도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발소리였다. 잎과 나뭇가지에 스치며 돌과 흙 땅을 조심스레 디디는 그 소리는 분명히 발소리였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연서강은 숨을 멈췄다. 어떡하지? 잠깐 고통으로 흐려졌던 머릿속이 이내 무작정 숲 안을 헤매고 다녔을 때처럼 온갖 감정들로 바글바글해졌다.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지만 반면, 사고는 갈수록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어떡하지? 헝클어진 생각의 한 귀퉁이에서 머리가 본능적으로 외쳤다.
들키면 안 된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깨달아 갈수록 그의 숨이 점점 가빠져왔다 헉, 헉, 거친 숨이 흘러나왔지만 도저히 숨소리를 죽일 수가 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이 오자 심장은 더더욱 빨리 뛰었고, 숨소리 역시 더더욱 커졌다.
-타닥.
미처 생각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누군가 뛰어내리는 소리가 났다. 몸이 경직되었다. 연서강은 크게 뜬 두 눈으로 좁은 틈 밖을 응시했다. 그 틈으로 갑자기 적이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지 않을까 두려웠다. 혹은 ‘여기 있었구나!’하고 틈으로 불쑥 칼을 쑤셔 넣지 않을까 심장이 무서웠다.
그때였다. 두려움에 떠는 연서강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
연서강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덜덜 떨며 그는 틈 밖을 공포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틈으로, 발목이, 사람의 발목이 보였다.
언덕에 비죽이 나와 있는 돌 위에 누군가가 앉은 모양이었다. 햇볕에 탄 갈색의 발목이 돌 틈과 경사진 흙더미 사이로 보였다. 각질이 허옇게 일어나 있었고 뼈와 거죽만 앙상히 남아 있는 발목, 절대 아군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서강은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바로 자신의 위에, 앞에 적이 와 있었다.
틈으로 보이는 앙상한 발목이 피로에 지친 듯 몇 번 왔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듯도 했지만 연서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죽여야 된다.
다만,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한 말은 그것이었다.
죽여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야.
저 적이 언덕을 내려가게 되면 십중팔구 이 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다고 여기고 틈 안을 들여다 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러면, 그러면, 틈으로 칼날이 쑤셔 들어오고 무방비하게 자신은 그에 찔려서-.
죽음의 순간은 애써 상상하지 않아도 금방 생생하게 뇌리에 떠오른다. 제 몸을 내리긋는 날카로운 칼날, 그 상처로부터 비어져 나오는 붉은 피와 약하게 꺼져 들어가는 숨까지. 굳이 뒤늦은 춘설(春雪)이 내려앉아 열띤 몸을 식히지 않았어도 그의 몸은 급속도로 차가워져 갔었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찾아오는 ‘죽음’이란 고통에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숨은 차가운 대기에 빼앗겨 결국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심장이 멈추고 만다.
“.......”
발목의 주인은 아직도 자신이 찾아야 할 ‘적’과 이미 조우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자 냉정한 웃음이 돌연 연서강의 입술에 맺혔다. 상대가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자신이 여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생각이 바로 반전되었다.
틈으로 언제 적이 얼굴을 들이밀까 하는 두려움 대신 자신이 적을 습격할 생각으로 심장이 떨렸다. 연서강은 입을 막고 있던 손으로 침착하게 주위를 더듬었다. 돌멩이들이 만져졌다. 손끝으로 더듬어 그는 최대한 뾰족하고 거친 돌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눈앞의 사람을 죽여야 자신이 안전해진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상하게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고 있던 공포가 사라졌다. 초조함과 긴장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덜덜 떨면서 아프다고 울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기묘한 고양감이 그의 육체에 감돌았다.
비좁고 어두운 틈 속에서 연서강은 꽉 이를 악물었다.
“......”
틈 속에서 뱀처럼 조용히 발목을 향해 기어간 연서강은 잠깐 호흡을 멈추고 불시에 바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몸을 움츠렸다. 노리는 것은 저 얇은 발목이었다. 다음, 그는 재빨리 성하지 않은 어깨에 달린 손으로 발목을 움켜쥐고 옆으로 당겼다. ‘우악!’하고 발목의 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옆을 쓰러진다. 연서강은 바로 뛰쳐나가 그 위를 덮쳤다.
놀란 적군의 두 눈이 새까맣다.
뭐라고 비명을 지르기 위해 그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연서강은 바로 돌로 그의 입을 내리쳤다. 우지끈. 이와 잇몸이 사정없이 내려친 돌에 부러지고 뜯겨져 나갔다. 손등이 적의 이빨에 찍혀 살점이 떨어져 나갔지만 연서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커헉, 비린 피와 목구멍으로 삼키며 괴로워하는 적의 얼굴은 고통과 공포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아, 방금 전까지의 내 얼굴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연서강은 다시 돌로 적의 목을 내렸다. 그르르. 날카로운 돌에 찍힌 목이 막힌 듯 꿈틀거렸다. 다시 내려쳤다. 콰직. 목의 뼈가 부러졌다. 적이 두 손을 들어 연서강의 팔을 잡았다. 그 팔을 이빨로 물어뜯어 뿌리친 뒤 다시 돌을 내려쳤다.
퍽-!
막힌 구멍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적의 입술 사이에서 구에엑 흘러나온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짐승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짐승이 맞았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악하고 못된 짐승. 연서강은 다시 돌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눈, 또 한 번 더, 코, 다시 입, 인중 뼈가 부러졌다. 적군의 얼굴은 이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피가 튀고 무너지고 박히고 부서진 얼굴은 단지 고깃덩어리였다.
그것을 연서강은 환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죽였다는 공포는 없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기쁨만이 있었다.
돌이 툭, 힘없이 떨어져 붉은 잔흔을 남기며 옆으로 데구데굴 굴러갔다.
자신은, 살았다.
살 수 있다.
그 사실이 그를 흥분케 만들었다.
어둠에서 나와 밝은 곳에서 본 적은 역시나 어리고 어린 소년병이었다. 고작해야 홍이 보다 몇 살 정도 연상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리고 여린 골격과 작은 어깨, 뭉개진 얼굴이라도 앳된 기가 가시지 않았다. 목이 부러져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몸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연서강도 알 수 있었다. 곧 ‘죽음’이 이 소년의 몸에 내려앉을 것이란 걸.
자신이 느꼈던 무자비한 공포가 그의 몸에도 드리울 것이다.
그러나 눈.
“.......”
연서강은 순간 얼어붙기라도 한 듯 우뚝 소년병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새까만 눈.
곱고 아름다운 빛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은. 새까맣게만 빛나는 그 눈.
‘죽음’이 접한 몸은 곧 색깔 하나 없이 하얗게 밀랍처럼 변해만 갔다. 그 가운데에 오뚝하게 박힌 시꺼먼 빛. 사무치도록 공허하고 섬뜩하면서도 분노와 절망으로 뒤덮인 빛이었다. 돌을 처박아 그의 눈 또한 제대로 된 생김새를 잃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그대로였다.
새까만 빛이 똑바로 연서가을 향해 있었다.
“아.......”
연서강은 부르르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덥석, 말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소년병이 입에서 쉭쉭 기괴한 숨소리를 내며 연서강의 팔을 잡았다. 피로 축축하게 젖은 차가운 손이 연서강의 열에 들뜬 몸에 닿았다. 진저리치며 연서강은 그 손을 떨쳐냈다. 소년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져 나갔다. 툭. 소년의 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귀에 크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 온 몸을 뒤덮고 있던 기묘한 희열이 물에 씻은 듯 빠져나갔다.
모르겠다.
연서강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분명 살아남았다. 죽지 않았다. 죽을 뻔도 했었지만 이놈을 죽여 겨우 살아났다. 이로써 자신은 생에게로의 한 발자국을 디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나 이상했다.
소년병이 웃었던 것이다.
연서강의 묘하게 들뜬 체온을 느끼고, 얼굴을 보고, 어깨를 본 그가 얄궂게 웃으며 운명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고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는 소리를 지르며 주변에 아무 돌이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미 죽은 게 확실한 적의 시신을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살았어!”
소년의 그 미소는 연서강도 역시 곧 죽을 거란 것을 알고 지은, 그것이었다.
“살았다고!”
연서강이 돌로 내리칠 때마다 소년병의 시체가 덜그럭 움직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은 곧 사후경직이 이루어져 마치 각목을 엉망으로 이어붙인 인형처럼 보였다.
“아니라고!”
다만 그 시신에서 새까만 눈동자만이 연서강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죽을 당시 고통으로 잠깐 빛났던 검은색은 이제 완연히 죽어버려 탁한 돌처럼 변해버렸지만, 연서강은 그가 죽을 당시 잠깐 내뿜었던 그 섬뜩한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죽음’이 내던 그 빛!
“나는 죽지 않아!”
연서강이 흐느끼며 다시 돌로 시신을 내려쳤다.
엉망이 된 얼굴로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연서강은 멍한 시선으로 멀리, 저 멀리, 아마도 적군이 있을 그곳을 응시했다. 열에 들뜨고 고통에 절은 몸은 이제 탈진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허나 움직여야 했다. 여기에 있으면 죽고 말리라. 본연적인 공포에 연서강은 몸을 뒤로 물렀다. 소년의 미소가 생각났다.
죽지 않아. 안 죽어. 나는 안 죽는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그는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물러섰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물러나는 그의 발은 조심성이라곤 하나 없었다. 그대로 넘어져 구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움직임이었다. 연서강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연조야, 연조야, 연조야.
한계에 다다른 정신이 하염없이 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죽기 전 일생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다정히 대해주었던 그 사람의 이름은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다워서, 되뇌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눈물이 났다. 연조야, 연조야. 그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던 그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어디론가 떨어지고 말았다.
지하의 공동(空洞)부분을 터뜨려 무너진 곳은 비단 계곡뿐만이 아니었다. 폭발로 인해 생긴 진동으로 지반이 약해진 부분이 연속해서 무너져, 현재 산 곳곳에는 구멍이 뻐끔뻐끔 뚫려 있는 상태였다.
연서강이 떨어진 곳도, 역시 그런 함지(陷地)였다.
* *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속 습기 차고 더러운 곳을 뒹군 탓인지 어깨의 상처에는 결국 고름이 생긴 것 같았다. 상처가 곪은 곳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몇 시간이나 앓은 고열로 목은 바짝바짝 마른 생태였고, 땀을 너무 흘려 탈진 증상까지 나타났다. 그렇지만 연서강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 할 수 없었다.
하늘을 향해 뻐끔 고멍이 뚫린 지하는 마치 ‘우물’과도 같았다.
그 속에 갇혀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제멋대로 일어나곤 하던 경련도 이제는 완전히 멈추었고 세차게 뛰던 심장도 점차 느려져만 갔다. 똑, 똑, 똑, 생명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환청까지 들렸다. 채워지는 일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만 가는 제 생명의 물방울이 과연 언제 바닥날 지는 연서강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났다. 살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아 기연조를 구하고 싶었다.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는 그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기까지 왔었다. 주마등처럼, 되살아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서회, 그리고 의경.
이곳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긴장했었던가. 그 얼마나 힘들었었던가. 허나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자신이 충동적으로 계곡에 온 바람에 적이 쏜 화살에 맞았다. 말에서 떨어졌다. 적들이 자신을 잡으러 쫓아왔다. 뒤쫓아 온 적들을 피해 숨 막힐 정도로 걷고 뛰며 숲을 헤맸다. 또 숨었고, .......사람까지 죽이고 말았다.
살인.......
나는, 살인을 저질렀다.
마지막으로 봤던 소년병의 얼굴이 그대로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몇 번이고 내리친 돌에 맞아 엉망으로 뭉개진 소년의 얼굴은 원래의 생김새를 알아보기도 힘들만치 처참했었다. 이빨과 인중 뼈가 부러져 입 주변은 피투성이였고, 콧대도 푹 내려앉아 있었다. 오목했을 이마도, 한 쪽 눈도 패여 있었다. 얼굴과 목의 피부는 짓이겨져 몇 갈래로 찢어졌고 목뼈는 박살이 났다.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고작 홍이보다 두어 살 가량 많아 보이던 어린 소년이었는데 자신이 그리 만들어 놓았다.
뾰족한 돌을 든 자신을 본 소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연서강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칼을 든 연무강을 봤을 자신의 마음과 같았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 소년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연서강은 두 눈을 감았다. 살기위해서 그렇게까지 했건만,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결국 자신은 여기서 죽는 운명인 것이다. 또, 다시.
.......연조도 죽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신음 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역시 죽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 어두운 곳에서 자신은 또 죽어가고 있었다....... 모두 다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간 다시 흘렀다.
자신이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어떻게 쓰러져 있는지도 분간 할 수 없는 그 혼미함 속에서 그는 어느덧 혼절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서늘한 기운이 들어서 연서강은 눈을 떴다. 온 세상은 ‘죽음’이 내린 것처럼 시꺼멓고 차가웠다. 답답한 공기가 메마른 흙냄새를 품고 있어 숨 쉰느 것조차 힘들었다.
“.......”
열에 들떠 거뭇거뭇해진 그의 시야로, 언뜻 해야한 뭔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사실 환각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눈을 뜬 것도 착각이고, 자신이 느꼈던 서늘한 기운은 사실 익숙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기운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시야에 들어온 새하얀 덩어리가 꾸물거리며 앞으로 다가와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그것은, 뱀이었다.
.......-이것은 꿈인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무너진 땅 아래에서 새하얀 뱀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암만 생각해도 꿈, 그 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뱀은 이상하게 익숙하기까지 했다. 살면서 백사는 고사하고 흔한 청사나 구렁이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건만 그랬다. 기시감일까? 아니면? 기이한 일이었다. 뱀이라곤 오직 수안궁에서 그 조각상을 본 게 가장 최근의 일이건만. 쌍두뱀 신을 모시는 곳이기에 벽면 가득했던 뱀 조각들이 연서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죽음이 주는 환각인가.
두 번째로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과연 그랬던지 백사가 입을 열었다.
-심심하구나.
죽음이 보여주는 환각은 갑작스럽기 짝이 없었다. 환각임이 분명한 저 뱀이 혹시라도 말을 할 줄 안다면 분명 ‘너의 죄를 알라.’ 따위의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연서강은 허가 찔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백사를 보았다.
우윳빛 뱀 비늘은 마치 수주(水紬: 품질이 좋은 비단의 하나)처럼 반드르르 윤기가 흘렀고, 눈은 오석(烏石)을 박아 놓은 것처럼 새까맸다. 길고 탐스러운 몸 전체에는 귀티마저도 흘러서 이런 험한 산중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어느 귀한 집 황금 조롱 안에 들어 있으면 어울릴 듯 했다.
그때 백사가 이어서 말했다.
-그 망할 연놈들이 제멋대로 맺은 약속 때문에 근 스무 해가 넘도록 지루하였느니라.
뻐끔뻐끔 입을 열어 말하고는 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연서강은 뱀이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냥 ‘전해져’ 왔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여성의 것인지 남성의 것인지 불분명했다.
문득 그는 쌍두뱀 신의 신체(神體)를 떠올렸다. 이 나라의 신은 해와 달의 신. 해는 남신, 달은 여신으로 서로 성별이 다른 커다란 뱀이 한 몸에서 나와 뒤엉켜 있는 형상을 지녔다.
-대제국이 된 이래로 나라가 안정된 것은 퍽 기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심심하구나.
이어 떠오른 것은 일찍이 태상이 들려준 하 제국의 역사였다. 쌍두뱀 신이 교합해 낳은 아이가 하 제국의 시황제로 그는 쌍두뱀 신이 내린 은총. 신의 ‘힘’으로 하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쌍두뱀 신이 지녔던 ‘힘’은 다른 나라를 멸하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과거’로 되돌려 보내는 것.
-정말로 심심하구나.
뻐끔뻐끔 뱀이 입을 열었다. 문득 연서강은 위화감을 느꼈다. 뱀의 입속에는 뱀 특유의 날름거리는 혀도, 날카로운 독니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뻥 뚫린 것처럼 시꺼멓다. 그제야 연서강은 뱀의 머리가 두 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분명 하나였다. 머리가 하나 달린 멀쩡한 백사였던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의 몸에서 나온 두 개의 뱀 머리가 똑같이 입을 연다.
-자네는 실로 오랜 만에 열리는 연회.
되돌려 보낸 사람은 신에게 바쳐진 제물.
되돌아 온 사람은 신에게 연회를 올리는 자.
뱀 신은 지혜의 신이기도 하지만, 그 지혜란 사람을 늪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그 뒤통수를 무는 간교함에 있었다. 교묘하게 살아남는 법인 처세술이 바로 뱀 신이 추구하는 지혜였던 것이다. 때문에 뱀 신은 다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머리를 쓰고 고생하며 발버둥을 치는 지 두고 보며 즐긴다는 태상의 말이 생각났다.
어째서인지 오싹해졌다.
까맣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자 백사의 눈은 까만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空洞), 즉 뱀에게는 눈알이 없었다. 한 가지 사신을 깨닫고 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연이어 보였다. 백사? 아니다. 자신이 백사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그것’의 거죽일 뿐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백사의 껍질을 뒤집어 쓴 그 ‘무언가’였다.......!
당신은, 하고 연서강이 마지막 힘을 다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 다시 뱀들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좀 더 춤을 추거라. 좀 더 노래하여라.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연서강에게 요구했다. 움찔, 그 소리에 힘을 다한 것이 분명했던 육체가 저절로 움츠려들었다. 마치 왕에게서 죽을 것을 종용당한 불쌍했던 육체가 어린 백성처럼, 영원히 움직일 일 없을 것이 분명했던 육체가 그렇게 반응했다.
컥, 연서강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뱀들은 그런 연서강을 보며 계속 말했다.
-내게 끝없는 절망에 젖은 광희난무(狂喜亂舞)를 보여주고, 비명과 악다구니가 섞인 애절비가(哀切悲歌)를 들려다오.
그것은 저주였다. 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저주.
연서강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제발 그 잔인한 명령을 물러주길 바라며 그는 백사를 바라보았다. 허나 백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자시의 눈앞에 있는 것이 그저 한 번 쓰고 버릴 장기 말에 지나지 않다는 듯. 아무 감정도 없으니 그에 서린 감정도 없는 게 당연했다.
흑, 하고 연서강이 돌연 신음을 토했다.
-너는 지금보다 좀 더, 절규할 수 있음이로다!
깔깔깔 웃는 그 입안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백사는 연서강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이와 혀가 없는, 그저 거죽뿐인 뱀이라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아팠다. 연서강은 자시도 모르게 ‘악!’ 비명을 질렀다.
탈진한 몸이 아니었던가. 죽어가던 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 몸의 ‘주인’인 신 앞에서 연서강의 몸은 그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오듯, 구멍 난 독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힘도 들이지 않았는데 저절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 소리는 매우 컸고 또 인위적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몸속으로 기어들어와 대신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듯.
“헉!”
퍼뜩 연서강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주변이 환했다. 여전히 그는 꺼진 땅속에 처박혀 있었다. 밝은 하늘을 향해 구멍이 뚫린 땅은 떨어질 때 느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분명히 뒤로 떨어져 내려 바위에 처박혔던 몸이 아니었던가. 정신을 잃고 죽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러던 것 치고는 자신의 몸은 의외로 괜찮았다.
몸은 여전히 아팠고 열도 났다. 상처에 고인 고름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부서질 듯 쑤시고 아렸다. 퉁퉁 부은 어깨 때문에 등까지 부어 제대로 앉을 수도 누을 수도 없었다. 허나,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신이 ‘조금만 더 살아보라.’라고 손가락을 자신의 몸을 두드린 듯 했다.
“.......”
위에서 찬란히 떨어져 내리는 햇볕은 따뜻했고, 우물 같은 시야로 올려다본 창연한 하늘은 그 빛깔이 유난히도 고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연서강은 눈물을 쏟아냈다. 아아. 살았다는 기쁨과 함께 뱀 신의 끔찍한 예언대로 이루어질까 계속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참으로 모순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또 모든 것이 무서웠다.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천 가지, 만 가지 형상들이 모두 아름답고 끔찍했다.
.......그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 있었군.”
눈부신 해를 등지고 맑은 하늘빛을 뒤로 한 채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등을 타고 사라락 나비구름처럼 고운 소맷자락이 흘러내린다. 미풍에 흔들리는 꽃잎어철 나풀거리는 긴 소매를 본 연서강은 참혹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태상이었다.
그는 마치 신의 명령을 받고 그 자리에 강림한 듯 보였다. 다시 연서강은 눈물을 쏟았다.
진정으로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