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연서강이 호언장담한 뒤, 의경에서 첫 번째 전투가 일어났다.
첫 번째 전투는 과연 화공(火攻)이었다. 연서강이 일찍이 말한 적 있듯이, 그리고 연서령이 예상했듯이 저장고를 노리고 북문에서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불이 붙은 화살이 비처럼 북문 저장고 위로 떨어졌다. 허나 그것은 병법서에 적힐 만큼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공격이었다.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어디로 공격할 것인지 이미 읽었다면 그것을 막는 것은 매우 간단했다.
연서령은 최전선인 의경의 지휘자답게 아주 능숙하게 공격에 대한 방어를 명령했고, 의경의 병사 또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일말의 실수 없이 적의 공격을 방어했다. 호전적인 무장은 그것도 모자라 방벽 밖에서 공격하는 적들을 역공해 그 수의 반을 없애는 성과까지 얻었다. 하지만 공격해온 적의 수가 워낙 소수였기 때문에, 그만큼의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수가 워낙 소수였기 때문에, 그만큼의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는 대승이라 불릴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연서령은 그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가장 수읽기가 쉬웠던 전투였던데다 첫 번째 전투이기까지 했으니 적들의 사기를 콱 눌러버리기에 가장 적당한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반수를 없애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섬멸했어야 했어, 하고 그녀는 작전 사령실에서 탁자까지 내리치며 아쉬워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그 누구도 연서강에 관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령실에서 연서령을 제외한 군사와 무사들은 벽에 기대 서 있는 연서강을 연신 훔쳐보고 있었지만, 연서령의 눈치를 보느라 그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연서강이 호언장담한 이후로 그녀와 연서강의 사이가 몹시도 험악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연서강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을 붙여 조언도 구하지 않았다. 연서강 또한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침묵했기 때문에, 사령실에는 연서령의 말소리만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승리를 했는데도 사령실 안의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들 중 아무도 연서강에게 묻는 이가 없었다.
어떻게 적이 그 시간에 딱 맞춰 공격해올 것을 알았냐고.
연서강을 계속 무시하고 있는 연서령이긴 했지만 그 사실까지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 대비하기 쉬웠던 적들의 첫 번째 공격은 연서강의 말대로 바로 그 시간에, 일각도 어긋남이 없이 시작되었다. 연서강이 수도에서 온, 그것도 연서령의 형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저자는 적들이 보낸 첩자가 분명해,’란 말들이 나돌 법도 할 정도로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물론 적들의 공격 시간을 예측한 병법가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화공이 달인이었던 위무공이 그랬고, 바다에서 특히나 뛰어난 전술을 발휘한 운손 장군도 그랬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적들의 공격을 예측할 정도로 신묘한 병법가들은 얼마든지 있어왔다. 허나 연서강처럼 정확한 시간을 제시한 병법가는 일찍이 없었다. 기껏해야 자시(子時)에 습격이 있을 터이니 대비하라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자신의 장군을 바라보며 군사는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장군이 저 연서강이 말한 대로 될 것 같다는, 그런 예감 말이다.
그 예감은 두 번째 전투가 일어나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전투는 첫 번째 전투가 일어난 지 만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일어났다. 여전히 연서령은 연서강의 말을 무시한 채 제 나름대로 적의 공격에 대비했고, 그 대비 또한 어찌어찌 통하여 의경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허나 그 승리에서는 연서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연서령이 있는 의경진지에서는 하루 걸려 일어난 적들의 공격이었지만, 적들에게는 아니었다. 적들은 의경을 지치게 만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언양을 정복했었던 것이다. 의경도 포위된 이후 적들의 공격에 대해 나름의 대책을 마련해 놓았지만 그 준비 기간은 적들에 비해 짧았다. 해서 하루걸러 연달아 일어난 공격에 의경은 잠깐 허를 찔렸다.
두 번째 전투는 작게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모두 성벽을 에워싼 전투였었다. 전투를 치르면서 연서령은 이 전투로 의경의 고립을 잠시나마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즉, 자신을 포함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발부대를 조직해 적들을 공격한 것이다. 잠깐 적이 주춤한 곳을 파고들어 그녀는 가능한 많은 수의 적을 격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들은 결코 의경을 섬멸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의경을 황폐화 시키고 그 안의 사람들의 마음을 걱정과 불안으로 좀먹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연서령이 포함된 선발대에 적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작전이 먹혔다고 생각했다. 적들은 의경을 공격하는 걸 아쉬워하며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로 뒤에 그녀는 의경의 성을 향해 퍼부어지는 불화살을 보았다. 적들은 성안에서 병사들이 나온 것을 보고 다시금 의경의 저장고를 노린 것이었다.
성안의 병사 수가 적어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벽의 방어를 위해 벽쪽으로 병사들이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북쪽 저장고에 쏟아질 공격에 반응하는 게 느려지게 되는 것이다. 양간이라도 의경의 식량, 물류 창고에 타격을 주는 것이 적들의 진짜 목적이었다.
푸른 하늘 위를 날아가는 불화살을 본 연서령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서둘러 말을 몰아 성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늦은 일, 연서령은 콱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히 창고 중 하나는 기위(旣爲) 화전(火箭)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군사가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병사들은 성벽을 방호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을 터이니 대비가 늦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불붙은 창고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미친 짓을 했어,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지만 후회해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로 생각이 방향을 억지로 돌렸다.
그런데.
.......연서령의 생각과는 달리 창고는 무사했다.
지붕 하나, 울타리 하나 타지 않은 채 창고는 다만 불이 꺼진 화살만이 잔뜩 꽂혀 있는 모습이었다. 물과 재 냄새가 어렴풋 났다. 또한 창고 위를 방비한다고 잠깐 설치하고 내렸던 지붕 덮개에서 나는 풀냄새도. 화공에 방비하기 위해 덮었던 풀로 엮은 덮개는 물에 푹 젖어 생성한 모습 가운데 거뭇거뭇 새까맣게 탄 곳도 있었다.......
연서령은 당연 이런 지시를 내린 적 없었다. 군사가 자신을 대신해서 명령을 했다 해도 그 대비가 늦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무사하단 말인가? 그 답은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즉시 연서령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서강.
피로 덮인 투구를 벗고 주변을 살피며 연서령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으로도 지금 연서령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기름에 튀겨진 새우마냥 튀어오를 것만 같은 그녀에게선 살기마저 일렁거렸다.
“.......연서강은?”
고요히 멀쩡한 창고를 응시하고 있던 연서령이 이를 부득 갈고 물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부관이 재빨리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지하로 저장 물품들을 옮겨 놓는 게 좋다 하셔서, 군사님과 함께 잠깐 지하 감옥으로.”
“.......누구 마음대로?!”
그 말에 연서령이 얼굴을 구기며 부관을 노려보았다. 잔뜩 날이 선 그녀의 눈빛에 놀란 부관이 힉, 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관이 말을 하길 꺼리자 전투 당시 방벽을 지켰던 보궁수(步弓手) 하나가 용기를 내어 부관이 하던 말을 이었다.
“허나 이미 창고의 위치는 적에게 들켰으니 보관할 만한 다른 장소가 있다면 그리로 물품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의견에는 군사님도 동의하셨기 때문에.......”
점점 흉흉해지는 연서령의 눈초리에 결국 보궁수마저 말끝을 흐렸다. 연서령은 다시 이를 갈았다. 보궁수의 말이 맞았다. 연서령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의경진지에 귀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연서강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연서령은 몹시 언짢았다. 더불어 자신의 편임이 분명한 군사가 간단히 연서강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도.
전쟁은 실전이다. 일이 일어난 순간 기본적으로 병사들은 상관의 명을 따른다. 허나 만약 상관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병사들이 상관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과 사. 무심코 내린 간단한 판단이 죽음으로 즉결될 수도 있는 곳에서는 좀 더 신뢰할 만한, 좀 더 살 만한 길을 제시하는 ‘누군가’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게 당연했다. 그것이 자신의 상관이면 좋고 아니라도 병사들에게는 관계없다.
덜 죽고 승리하기만 하면 전쟁에서는 모든 게 용서되니까.
게다가 연서강은 서회에서 보낸 구원자.
그의 명령이 신뢰할 만 하다고 느낀 순간 그의 명령을 듣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연의향 대장군이 보낸 자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가 ‘연서강’만 아니었더라면 연서령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참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서강이다.
“.......그건 연서강이라고.”
연서령은 차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안내해.’ 그녀의 명령에 보궁수가 화들짝 놀라며 ‘네!’하고 대답했다. 연서령은 허리춤에 맨 칼을 꽉 잡았다.
다행스럽게도 지하 감옥은 지상의 감옥보다 빈 곳이 많아 충분히 물건을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통풍이 용이치 않은 지하인지라 습기가 차면 안 되는 폭약 등의 물건은 보관이 쉽지 않을 듯 했다. 그래서 습기에 약한 물품들은 어쩔 수 없이 지상의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그 외 다른 물품들은 지하에 보관을 하는 게 좋겠다고 연서강이 말하니 군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물품을 지하로 보내 보관해야 할지 품목을 확인하며 연서강과 군사가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그들은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연서령과 마주쳤다.
군사는 서슬 푸른 연서령의 모습에 놀랐지만 연서강은 태연햇다. 더더군다나 그는 연서령의 몸을 위아래 살펴보고 ‘무사해서 다행이구나.’라는 말까지 건넸다. 평소에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연서령도 자신을 걱정해줬나 싶어 ‘아, 당연하지.’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꺼낸 이가 우선 연서강이었고 상황도 상황인지라, 연서령은 그가 자신을 조롱하는가 싶어 발끈 화가 났다.
“지금 무슨 짓이야?”
“앞으로의 일을 대비해 안전한 곳으로 저장 물품들을 옮기려고.”
여전히 태연한 연서강의 대답에 연서령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고함을 질렀다.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여기는 내 진지야! 내가 책임지는 곳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네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거니?!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 내가 네게 일말의 조언이라도 구했냐 말이다!”
흡사 미쳐 날뛰는 망아지와 같다-, 라고 일찍이 누군가 연서령을 보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연서령이 전장에 나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라 한다. 헌데 지금은 전장도 아닌데, 하물며 적의 목을 베는 중도 아닌데도 연서강은 그만 그 말을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참마로 지금의 연서령은 고삐 없이 날뛰는 망아지와 같았다. 자신이 저지른 실책을 못 견뎌 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성미가 현재 아주 고약하게 작동 중이었다.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연서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져서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이 무뢰배 같은 여동생은 아무래도 자신을 적으로 오인하기라도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래선 곤란했다. 벌써 두 번의 전투가 있지 않았나. 이만하면 지금 처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함께 모의해도 충분치 않은가. 여전히 태도가 바뀌지 않는 그녀에 연서강은 난감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세 번째 전투는 앞 전투들과 달리 비교적 늦게 일어날 거다. 첫 번째, 두 번째 전투에서 손실만 있었던 적들이니 세 번째는 더욱 악물고 덤벼들 거야. 물론 우리도 악물고 싸움에 임해야겠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어.”
조용히 타일러보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도리어 연서령은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왜 내 일에 참견을 하냐고 묻지 않았어?!”
그 질문에 대답한 건 연서강이 아니었다.
“연장군님.”
연서강의 옆에 서 있었던 군사였다. 서회에서 연의향의 곁을 보좌하던 군사가 다소 젊은 것에 비해, 연서령의 곁을 주로 지키는 군사는 초로 반백의 남자였다. 나이가 많은 군사는 언뜻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선생처럼도 보였다. 과연 이런 남자가 그 괄괄한 연서령의 보좌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연서강도 의문이었다.
허나 사실은 그런 연서령이기에 경험과 나이가 많은 군사가 배정된 것이었다. 연서령의 기백에 눌려 한 마디의 말을 꺼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그녀의 앞에 몸을 내밀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안정감을 주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였다.
“해서, 연장군님은 자신의 일을 충분히 잘 해내셨습니까?”
늙은 군사는 세상을 충분히 산 사람답게 연공서열을 초월해 연서령을 어린 병사 취급을 했다. 말만 공손했지 그 안에 담긴 뜻은 분명히 비난이었다. 말을 듣자마자 연서령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소인이 보기엔 오늘 의경의 창고가 무사했던 것이 죄다 옆에 계신 분의 덕택인 듯합니다. 해서 장군께 여쭙습니다. 연장군님께서는 의경을 지키기 위해 오신 것이 맞으시지요? 연장군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일.’ 그 자신의 일을 오늘 충분히 잘 해내셨습니까?”
그는 아무래도 이곳 의경을 오래 지켜오던 자인 듯 보였다.
군사는 장군을 보좌하는 자로 보통 두 명 정도가 붙는데, 한 명은 수도에서 장군이 데려온 자이고 또 하나는 그 지역 출신의 군사였다. 지역 출신의 군사를 붙이는 이유는 장군이 그 지방의 지형과 특색에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또 그와 더불어 그 지역 출신이 많은 병사들을 타 지역 출신인 장군이 통솔하기 쉽게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의경처럼 국경에 위치해 특별히 병사가 많이 필요한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사람들을 병사로 차출하기도 했다. 해서 의경군에 배치된 병사들 중 많은 수가 의경 혹은 서회에서 온 자들이었다.
“.......”
연서령은 아무 말 없이 초로의 군사를 노려보았다. 감히 내게 덤비느냐, 라는 식의 눈빛이었지만 군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장군님께서 의경을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신 것은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오늘의 이 행동도 과연 의경을 위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보기에는 장군님께서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대의를 놓치고 계신 걸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허니 부디, 모쪼록 다시금 생각하시어 바른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의경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였다. 성안에 있는 물품들이 모두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해진다. 물도, 식량도, 적들에게서 성을 지킬 무기들마저 없어진다면, 그 가정 뒤에 오는 끔찍한 상상이 바로 오늘 현실이 될 뻔 했던 것이다.
만약 오늘 창고가 조금이라도 불에 탔으면 연서강이 옴으로써 잠시 고무되었던 병사들의 사기가 삽시에 가라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적들이 원하는 바일 터.
“벌써 두 번째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그 두 번의 전투 모두.”
군사가 몸을 조금 비켰다. 연서강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에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서회에서 오신 분께서 적들이 공격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장군님께서도 모르지는 않으시겠지요? 더군다나 금일에는 장군님께서 미처 생각지 못하고 놓치신 창고까지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장군님께서 이 분의 공적을 백배치하(百拜致賀)하시기는커녕 왜 지금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아무리 해도 소인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소인은 앞으로도 이분께 조언을 구해 장차 어찌 해야 할지 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서령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엔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안한 눈으로 연서령과 연서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을 느끼며 연서령은 으득 이를 갈았다. 군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의경은 현재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 고립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면 조그마한 단서라도 저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연서령도 자신의 고집을 세울 때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연서강이 아니었다면 창고가 무사하지 않았을 거란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두 번째 전투 또한 연서강의 말한 시각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그 모두다.
하지만-.
그렇게 연서령이 숨을 들이켰을 때, 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현재 장군님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경군은 기본적으로 현재 연서령의 휘하에 놓인 군대이므로 지휘관인 연서령의 명을 듣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만, 이렇게 지역 출신의 군사와 연서령 간에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그 태도를 달리할 수도 있었다. 특히나 연서령이 누가 봐도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되어질 때는 말이다.
군사의 말에 병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현재 연서령의 모습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제 위치와 임무를 망가한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 적이 있다는 그 초조함만으로도 이성을 잃기 쉬운데 자신들을 이끌어야 할 장군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더더욱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령아.”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연서강이 그녀를 불렀다. 이대로 있다간 연서령도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 연승으로 간신히 키운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 부름을 들은 연서령이 여전히 이를 악문 채로 연서강을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집에 있을 적에 부렸던 고집과 생떼는 버려라. 여기는 전쟁터다. 네 손에 명줄이 쥐어진 사람들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야, 의경군 전체다.”
“.......”
“내가 못마땅하다고 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건 집에서만 하여라.”
연서강의 말에 칼집을 쥔 연서령의 손이 수치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연서령이 성이 나면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급한 성미를 지니기는 했지만, 상황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그러기만 했다면 여기 의경군을 다스리는 장군으로 파견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잠시 잠깐 연서강의 방문으로 심기가 틀어져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녀도 이제까지 훌륭하게 의경을 지킨 무장이었던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알았어.”
마치 사포로 쇠붙이의 녹을 닦는 것처럼 거칠고 정리 안 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이 상황을 인정하기 싫은 듯 한 차례 또 이를 악물던 그녀가 곧 목을 빳빳이 세우고 연서강을 응시했다.
연서강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매섭기 짝이 없었으나 노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없는 인내심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노성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다.
“.......다음의 전투가 있을 때까지 당신의 말을 좀 들어 보겠어.”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연서령은 그대로 휙 몸을 돌렸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조차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사람들이 허겁지겁 뒤따랐다. 연서강은 곧게 펴진 그녀의 등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에게 초로의 군사가 난감한 듯한 웃음을 보내며 말을 건넸다.
“고집 센 동생은 좀 골치 아프지 않습니까.”
좀, 이 아니다. 연서강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서강의 인사에 초로의 군사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대신 당신께서 하셨던 그 말, 꼭 지켜주십시오.”
그 말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고 연서령의 등을 응시했다. 그녀의 속은 여전히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조롱과 무시의 기색은 어느 정도 가신 것으로 보였다. 겨우, 이제야 겨우 그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옷에 닦으며 연서강은 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다행스럽게도 두 번의 공격 모두 연서강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들의 공격을 두 번씩이나 정확하게 예측해낸 연서강을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그가 창고를 무사히 지켜낸 데에 안심을 했다.
단 두 번에 불과했지만 두 전투가 하루걸러 일어난 전투였던지라 병사들에게는 실제보다 더 큰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어쩌면 연서강이 말한 대로 열흘 만에 의경이 포위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떠들어댔다.
제아무리 연서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연서령이라고 해도 의경의 그런 분위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연서강을 못마땅하기 여기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군사의 말과 연서강에게로 기울어진 의경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연서령은 연서강의 조언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연서강이 말을 할 때면 몹시도 험악한 얼굴로 다른 쪽으로 시선을 홱 돌리곤 했다. 때문에 연서강은 연서령이 일전에 자신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아직도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굳이 그것을 풀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 따위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억지로라도 연서령이 제 말을 따르게 하는 데에 있었다. 어차피 연서령에게 인정받고자 벌인 일도 아니었다. 의경의 병사들에게만 인정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리고 이대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부디 수도 내에 있는 자신의 부친에게 그 말이 가 닿기만 한다면.
아버지인 연무의만 인정해준다면야 나머지 가족들은 상관없다. 연서강에게 있어 그녀는 가족이되 가족이 아니었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런 일념으로 연서강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행했다. 집에서 책만 읽던 서생이라 전쟁터에서의 대처는 아직 미숙한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주변 군사와 병사들이 베푸는 도움이 그 틈을 메워 주었다. 물론 그 때마다 연서령이 빈정거리긴 했지만, 그는 이제 그런 연서령의 빈정거림따위는 쉬이 귓등으로 받아 넘길 수 있었다.
서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서강은 이대로 일이 잘 풀릴 줄만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곧 터졌다.
“.......뭐?”
연서강은 이제 막 들어온 병사의 보고에 당황했다. 단순히 연서강이 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병사가 다시 막힘없는 목소리로 연서강에게 말했다.
“서쪽으로 적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전에 모의한 대로 방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놀라서 연서강은 그만 손에 든 붓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붓이 연서강의 옷자락을 검게 물들이고 바닥에 이내 툭 떨어졌다. 시꺼먼 먹물이 그 주변에 튀었다. 그런 연서강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한 병사는 ‘그럼 작전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제 위치로 돌아갔다.
“.......”
연서강은 그런 병사의 등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들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에 회의실의 연서령과 각 부대의 대대장들이 바로 투구와 무기를 챙겨들고 출진했다. 모두들 연서강에게 어떻게 할까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연서강에게 들은 조언대로 이미 모두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전투 역시 일어날 줄 알았다는 식으로 태연하게 출전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들과 달리 연서강만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황망한 얼구롤 중얼거렸다.
“.......너무 빨라.”
예측한 대로 세 번째 전투가 일어났다. 일전의 두 번 있었던 공격처럼 세 번째 전투 또한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 대응은 매우 쉬웠다. 하지만 앞의 두 번과 이번 공격은 약간 달랐다.
세 번째 공격은 연서강이 말한 것보다 두어 시간 일찍 시작되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닌지 연서강은 재빨리 제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에 뭔가 착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부분은 전연 없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격상 이 중요한 일을 허투루 기억하고 그것을 믿어 대응책을 마련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은 온전했고 그에 대해 대책 또한 완전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고민하던 그는 곧 해답을 얻어냈다.
연서강이 앞 전투들을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들 모두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에게서 있어 의경의 고립무원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였다. 그 기억들을 더듬어 예측했고 책들을 뒤져서 본 것들을 조합해 공격의 대응책들을 뽑아낸 것이었다. 전투의 추이가 과거와 변함없을 거라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적들의 사정은 달랐다.
‘과거’의 적들에게 있어 의경에서의 두 번째 전투는 일승으로 현재와 전쟁의 결과가 달랐다.
‘과거’의 의경은 두 번째 전투에서 식량 창고의 3분의 1을 소실했었다. 이후에 연서령이 창고의 물품을 지하와 지상으로 나눠 보관하게 되지만, 중요한 식량을 3분의 1이나 소모하게 된 것은 타격이 무척 컸다. 그래서 그들은 식량을 아껴서 소모해야 했고, 그것은 곧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가져왔으며, 굶주림과 무력함을 가져오게 되었다. 의경은 차츰 황폐해져 갔다. 그 처참해진 의경의 상태가 서회까지 알려져 결국 연의향은 적들이 원하는 대로 식량을 그들에게 주고 만다.
그리하여 변경의 전투는 가을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것이다.
그랬던 ‘과거’가 지금은 의경이 연승을 거둔 새로운 ‘현재’로 바뀌었다. 적들은 연패란 결과에 당황했고 곧 그에 맞춰 새로운 전술을 짰다. 연서강이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손실 없는 승리로 이끈 것은 맞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과거’와 같을 거란 보장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에 연서강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앞으로는 다르다고?”
그가 아고 있던 ‘과거’와 ‘현재’가 달라진다. 묘한 이질감과 위기감에 연서강의 가슴속이 써늘해졌다. 이 이질감을 연서강은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저잣거리에서 있었던 난동, 불량배의 습격 말이다. 기연조가 불량배의 습격을 받았던 ‘과거’가 자신이 기연조를 붙잡음으로써 달라졌다.
이미 일어난 것이라,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일이 자신의 행동으로 바뀌는 그 감각.
연서강은 그 감각을 벌써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적들이 연서강이 알고 있는 ‘과거’와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음의 전투는 ‘과거’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적들은 이미 ‘과거’와 달리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이 세울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알지 못한다. 앞에 일어났던 두 전투와 그리고 현재 일어난 세 번째 전투와는 달리, 그 뒤에 일어날 전투는 적절히 대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연서강은 재빨리 회의실에서 나가 주변 상황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전투로 인한 소란과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부지런한 명령과 대답 소리 외에는 다른 것들이 없었다. 바깥은 바빴고 그들은 모두 훈련받은 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평소에 잘 훈련된 부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들이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쓸 데 없는 움직임이 사라진 부대는 철벽의 옹성보다 더 든든하게 보였다.......
연서강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지러웠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연서강을 향해 ‘왜 여기 계십니까?’하고 물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적의 공격을 받은 자 답지 않게 해사한 얼굴로 웃으며 ‘예상대로 모든 준비가 철저하게 완료되었습니다. 적들의 공격을 잘 방어하고 있습니다.’하고 덧붙여 말했다. 자신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이 어린 목소리에 연서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심장이 튀었다.
“.......달리 지시할 사항은.......”
연서강이 묻자 그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천만다행인 대답이었다.
비록 공격이 시작된 시간은 예측한 것과 달랐지만, 그에 사용된 작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해서 세 번째 전투 역시 의경은 아무 손실 없이 승리하게 되었다.
잇따른 연승의 기쁨으로 의경군 중 그 누구도 이번에는 ‘시간’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역시 또 들어맞은 연서강의 예측에 크게 놀라며 신묘하다고 감탄을 했다. 그리고 과연 서회에서 의경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보내준 사람답다고 칭송했다.
세 번째 전투에서 적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두 번째 전투까지 패하자 안달이 났는지 적들은 많은 인원을 동반해 규모가 제법 큰 공격을 해 왔고, 거기서 대패하고 말았다. 적들의 세 번째 전투는 이제까지와 달리 의경군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의경군의 수를 실제적으로 줄이기 위해 한 공격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의경군에게 상당히 노출되었고, 단단히 방비책을 강구한 의경군에게 아주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전투에 투여되었던 인원의 대부분이 의경군에게 당해 그들은 볼품없는 꼬락서니로 후퇴했다.
포위된 의경의 형편은 여전히 나아진 게 없었다. 허나 일이 잘 풀리자 의경은 제 형편도 잊고 때 아닌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 때는 언양처럼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포위된 상태에서도 적들을 말살시킬 수 있다는 호기로움이 부대 전체에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군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고, 그런 분위기가 연서령도 못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연서강에 대한 얄미운 감정은 남아 있어 그녀는 끝까지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요번엔 정확한 시각까지는 알 수 없었나 보네?”
“그렇지만 축시(丑時: 오전 1시부터 3시)에 공격이 시작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완연히 연서강의 편으로 돌아선 듯 보이는 초로의 군사가 냉큼 연서령의 말에 대꾸했다. 연서령이 얼굴을 찌푸리며 초로의 군사를 노려보았다. 군사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점잔을 뺐다. 더 이상의 말다툼은 자신에게 좋지 못하다는 것을 그녀는 일전에 깨달은 뒤였다. 그래서 별 말없이 그녀는 연서강을 향해 물었다.
“해서,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지?”
그 질문에 연서강의 두 어금니가 딱 부딪혔다. 그는 눈앞에 놓인 귀리죽과 말린 육포. 그리고 물 한 잔을 보며 탁자를 손가락을 두드렸다. 어떻게 하면 되지? 연서령의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또 한 번 흔들어 놓았다. 앞으로 어떻게?
“.......”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시라서 서회와 달리 의경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식사시간이랄 것도 없이 그들은 작전 화의와 함께 간단한 음식으로 허기를 떼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좀 더 훌륭한 식단이 나왔을지도 모르나 현재 의경은 고립된 상태였다. 식료품이나 구급품 등, 소모적인 물건은 최대한 절약해서 써야 하리 때문에 군사적 요직에 있는 사람들임에도 모두 군소리 없이 죽을 먹고 있었다.
화살의 양이 별로 없더라, 하고 누군가 옆에서 다른 이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막사 안은 지저분했고, 각종 보고로 소란스러웠으며, 탁자 위에 놓인 음식 냄새와 함께 진흙과 피 냄새가 섞여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연서강은 흐린 낯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잠깐, 작전을 다시 짜도록 하자.”
고작 ‘시간’만 어긋났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적들이 ‘과거’와 달리 움직이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모든 것들이 불안정해졌다. 일전에 세웠던 계획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연서강의 말에 연서령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남의 속도 모르고 그녀는 ‘뭐야, 시간도 정확하게 예측 못하더니 이제는 작전을 새로 짜자고? 뭔가 이상한데?’하고 중얼거린다. 초로의 군사가 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 병사들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 맞아 떨어진다 싶더니, 이제 감이 다 됐나봐?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 말 한 마디에 의경군의 안전이 걸려 있으니 쉽사리 말하지 않는 게 좋아.”
“.......”
연서강은 가벼이 말을 잇는 연서령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로서는 단순히 일전에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갚아 주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맞받아칠 뒷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제 턱을 손등으로 훔쳤다. 어느새 타고 흐른 땀이 턱 끝에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 날씨이긴 하지만 저녁이라 그리 덥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긴장으로 맺힌 땀인 듯 보였다.
내가 긴장했구나, 하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다. 할 수 있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잠깐 축이고 연서강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전투를 길게 끌어봤자 좋지 않은 것을 알기에 작전을 바꾸자고 하는 거다. 지금 우리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으니 저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깝지 않으냐.”
“호오.”
턱을 괴고 연서령이 맞은편에 앉은 연서강을 응시했다. 가늘어진 눈 속에 비릿한 장난기가 서린다. 막사 안에 일렁이는 횃불을 따라 그녀의 눈동자는 검은색으로도, 갈색으로도 보였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다가 두 번째 전투에서 내가 했던 것처럼 쪽박 차지 않길 바라오.”
“나는 네가 아니야, 연서령.”
그녀의 한결같은 조롱에 연서강은 불쑥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불안하고 초조하기 짝이 없건만 남의 속도 모르고 얄궂은 짓만 하는 그녀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앗다. 고작 반각(半刻)에도 사람의 생사가 수 없이 갈리는 전쟁터에서 ‘쪽박’이라는 단어로 결과를 희화화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날카로운 연서강의 대꾸에 연서령이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뒤로 뱄다. ‘뭐야, 사람이 무안해지게.’ 그 마지막 말까지도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쓸고 연서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작전은 연동해서 생각한다. 네 번째 전투 때 일부러 지는 척을 해서 다섯 번째에 총공격을 할 생각이야.”
“하지만 의경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은 언양의 계곡을 타고 온 적들이라 하지 않았어? 계유산을 정복한다고 해도 언양으로 통하는 계속을 막지 않는 이상 의경은 안전하지 못해. 언니가 언양을 수복한다면 몰라.......”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질문이다. 연서강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계곡을 없앨 거야.”
연서령이 ‘뭐?’하고 입을 딱 벌렸다. ‘계곡을 없앤다고?’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연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이해한 그 말이 맞다고. 연서령이 ‘허.......’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서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섯 번째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우리도 반격한다. 계곡은 그때 부술 거야. 물론 반격할 때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지. 계곡을 없앨 사람들은 적들이 네 번째 공격을 할 때 보낼 예정이야.”
“잠깐만!”
연서령이 탕, 탁자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쳤다. 탁자 위에 있는 그릇들이 그 충격에 바르르 떨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연서령이 연서강을 보았다. ‘제정신이야?’하고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서강은 ‘뭐가?’하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연서령이 이를 갈았다.
“지금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니까, 아무래도 계곡을 폭발시킬 것 같은데. 좋아! 좋고말고! 하지만 계곡을 폭발시킬 만큼 우리 쪽엔 폭약이 많이 없어. 네 번째에 요령 좋게 사람을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계곡이, 산이, 우리가 가진 폭약 양으로 어찌 될 것 같아?”
막무가내로 말을 던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연서령은 제 오라비가 드디어 미쳤구나, 여겼다. 갑자기 없던 신기가 생겨 전투를 예측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돌 거면 얌전히 돌 것이지 왜 이런 상황에 의경으로 와서 다 같이 죽는 수를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연서령이 재차 물었다.
“폭약을 모두 써버릴 거야?!”
화살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폭약까지 모두 떨어지면 앞으로 적의 공격을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한 번까지는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에는? 그 이상 가는 전투가 펼쳐진다면 또 어쩌란 말인가. 병사들은 의경이 금방이라도 해방될 것처럼 굴고 있지만 수많은 전투를 해 본 연서령은 그 소망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연서강의 말이 너무도 허무맹랑해 연서령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서령. 너는 여전히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미친 오라버니가 차갑게 말을 내뱉는다.
그 말에 섞인 ‘딱함’이 그녀는 언뜻 익숙했다. 바로 연서강이 열흘 만에 고립무원을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할 때 들었던 그것이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목소리. 연서령은 매서운 얼굴로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육식 동물이 공격하기 직전에 흘리는 으르렁거림처럼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의경이 처한 상황과 병사들의 사기, 뜻밖의 유용성으로 잠깐 그를 두고 보고는 있다만 그렇다고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는 연서강을 향한 분노를 다시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누그러들었을 뿐 본질은 여전한 연서령에게 연서강이 짜증스레 말했다.
“너는 대체 언제쯤이면 네 주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거냐. 벌써 세 번의 전투를 겪었는데도 너는 여전히 처음과 똑같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헛소리 말고 얌전히 듣기나 해.”
연서령은 기가 막혔다. ‘뭐?!’하고 그녀가 소리쳤지만, 옆에서 그런 그녀를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초로의 군사 역시 애원했다. ‘장군님, 제발 말을 조금만 더 들어봅시다.’
“.......”
연서령은 불쾌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성질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연서강을 막사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연서령은 이전에 있었던 전투들을 떠올리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 보면 그는 확실히 의경에 도움이 되었다. 병사들도, 군사도 그를 믿고 따르는 게 느껴졌다. 그로 하여금 의경의 상태가 많이 안정된 것도 사실이었다.
“제길, .......말해.”
기죽은 기색 없이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제 오라비를 보며 연서령은 마지못해 그렇게 말했다. 몹시도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자신의 앞에 있는 저 남자는 예전의 하찮고 쓸모없는 연서강이 아니었다. ‘가치’가 있었다.
그것도 이쪽에서 필요로 하는 ‘가치’가!
지금으로서는 저 남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몹시도 분해보이는 연서령의 얼굴을 응시한 채 연서강은 잠깐 침묵했다. 허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보다 더 낮아지고 신중해진 목소리였다.
“계유산과 그 주변 일대는 모두 석회암 지대야. 석회암 지반은 오랜 시간 물과 만나면 녹아 사라져 버린다. 계곡 아래에 흐르는 지하수가 석회암 지반을 만나면 석회질이 물에 녹아. 그러면 지하에 거대한 공동이 생기게 되지. 지하에 동굴이 생긴단 말이다.”
“동굴?”
연서령이 생소한 걸 듣는 다는 식으로 연서강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동굴. 그 동굴을 통해 지하수가 흐르게 되지.”
“.......그래서?”
연서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생소한 것은 비단 연서령 뿐만이 아니었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읽은 병법서에도 이런 말은 없었다. 군사와 병사들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연서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는 게 없어서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체 이 설명이 자신들의 전투에 무슨 도움이 될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고는 연서강은 다시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겠지만 .......가뭄이 오래 되면 계곡의 물은 물론이고 지하수까지도 전멸하게 되지. 지하수가 마르면 동굴에 공동(空洞)부분이 생겨. 땅 속에 텅 빈 부분이 생긴단 말이란다. .......그리고 그런 지반은.”
여기까지 말하고 연서강은 탁자를 손등을 톡, 가볍게 쳤다.
“매우 불안해.”
“.......”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주변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모두들 연서강의 손등과 탁자 위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약해지고 불안한 지반이라도 된 듯. 그리고 앞으로 싸워야 할 적이라도 되는 듯. 그 침묵 속에서 연서강은 말을 끝맺었다.
“거기를 터뜨린다.”
계유산에 근거지를 삼은 적들은 여전히 강에서 물을 조달받고 있었다. 계유산 주변의 물이 석회질이 함유되어 마시지 못하는 물이 되어 버려서긴 하지만, 이 주변에 흐르는 큰 강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물이 말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석회암지대는 다른 암반지대보다 특히나 지반이 약했다.
“그러면 적은 양의 폭약으로도 계곡을 메울 수 있어.”
그 텅 빈 부분에 폭약을 터뜨리면 폭삭 지대가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계곡은 물론이고 주변 지형까지도 휩쓸려 주저앉을 가능성도 있었다. 계곡이 크게 무너져 내릴수록 의경군에겐 좋으리라.
턱에 난 수염을 쓸던 초로의 군사가 입을 열었다.
“즉....... 네 번째로 적이 쳐들어올 때 혼란에 빠진 척, 지는 척 연기를 해서 적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린 다음 사람을 내보낸단 말씀이지요? 사람을 내보낸 다음, 다섯 번째로 적의 공격이 이어지면 반격과 동시에 계곡을 무너뜨린다....... 그 기세로 계유산의 근거지까지 쳐들어가는 겁니까.”
“네. 아마도 현재 적들은 지난 연패로 언양에게 사람을 더 보내 달라 요청했을 겁니다. 그리고 네 번째 공격 때, 희생 없이 나름의 큰 성과를 얻었다 여겨지면 더 이상 언양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테지요. 또한 이 기세를 몰아 전세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며 바로 또 공격을 시도할지도 모릅니다.”
연서강의 대답에 연서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째서 네 번째 공격 후, 바로 계곡을 무너뜨리고 적을 공격하지 않지? 적이 공격할 때까지 굳이 기다릴 필요 없지 않아? 이쪽에서 쳐들어가도.”
“적이 어째서 지금껏 이 변방에서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는지 생각해봐, 연서령. 바로 지형이다. 그들이 여기 의경을 공격하기 위해 산을 나올 때를 노리는 게 좋아. 산으로 숨어버리면 추적이 힘들어. 대부분의 병력을 의경에서 없애고 난 후에 잔당들을 숙청한다. 계곡이 무너지면 언양에서 더 이상 적이 유입될 가능성이 없어질 테니 서회에 연락해 주변과 함께 숙청해도 좋고.”
그 매끄러운 대답에 연서령이 다시금 침묵했다. 연서강은 두 눈을 감으며 예사롭게 말을 이었다.
“.......계곡으로 적들을 몰아 폭약을 터뜨리면 더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막사 안의 횃불이 다시 일렁였다.
탁자 위의 죽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고, 가끔 사람들이 물을 들이키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렸다. 사람들 모두 각각의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연서강은 목구멍이 바짝바짝 탔다.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서 어떤 평을 받을지 정말로 겁이 났다. 물을 마시고 싶었으나 지금 물을 마셨다간 사레가 들릴 것 같았다. 긴장의 시간이 또 얼마간 흘렀다.
긴 침묵을 끊고 처음 입을 연 자는 과연 이곳의 책임자인 중장군 연서령이었다.
“.......거짓이라도 지는 건 기분 나쁜데.”
다분히 연서령다운 의견이었다.
식사 겸 회의 시간이 모두 끝나고 모두들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다. 연서강의 말대로만 된다면 의경의 고립무원이 해결된다. 하지만 그만큼 중대한 일이기도 했다. 허투루 대비해서 성공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가 시급했다.
물론 우려의 소리도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계곡이 무너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그런 우려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논의 끝에 ‘현재 의경의 상황으로 봐선 하루바삐 고립 상태를 벗어나는 게 좋다.’란 결론이 났다.
‘적이 언제쯤 공격 해올까요?’라고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연서강에게 질문을 해왔다. 순간 연서강은 심장 구석이 써늘해졌으나 이내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아마도 이틀 후가 될 겁니다.’
대답을 들은 이는 연서강에게 그렇게 예상한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고 턱을 매만지며 ‘이틀 후라.’하고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일 덕에 그는 연서강의 예측에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연서강은 또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간까지 물어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아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또 손바닥에 맺힌 땀을 몰래 옷에 닦았다. 모두들 자신의 말만 믿고 생사를 걸지 않고 있나. 가슴을 조여 오는 듯한 긴박함과 부담감, 공포와 초조함 모두 사실은 처음부터 당연히 자신이 짊어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야 했던 것을 ‘과거’란 요행이 있어 잠깐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때였다.
순간 걸어오는 말에 연서강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하고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막사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서령이 수도에서 데리고 온 군사 한 명과 연서령,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구석에서 보고하는 사람도, 보고를 듣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 막사 안을 나가버린다.
막사 안은 조용했다.
연서령이 지나치게 놀라는 자신을 보고 슥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따라 진짜 이상한데.’하고 그녀는 턱을 쓸며 중얼거린다.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상할 것도 없어.’하고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현재 그녀와 얼굴을 마주 하고 담소를 나눌 정도로 연서강은 여유롭지 않았다.
“점심때도 거의 먹지 않았잖아.”
그녀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식어서 미지근하게 된 식사가 연서강에게 버림받고 널브러져 있었다. 누르스름한 죽과 시뻘건 육포, 그리고 차가운 물. 그것들이 시선 끝에 머물자 구역질이 일었다.
“.......입맛이 없어.”
하고 말하며 연서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자신의 처소로 가서 자신이 짠 작전에 실수는 없는지,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논리정연하게 작전을 가다듬고 싶기도 했다.
“잠깐.”
막사를 빠져 나가려는 연서강을 연서령이 불렀다.
“안 먹으며 나중에 힘들어져.”
“.......”
“나중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먹는 게 좋아.”
“.......”
해서 연서강은 억지로 죽을 먹었다. 그 모습을 연서령이 지켜보았다. 음식을 꾸역꾸역 모두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은 연서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억지로 먹은 음식들은 나중에 모두 게워냈다.
* *
네 번째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의경이 고립된 지 꼬박 닷새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격은 그 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북서쪽에서부터 시작된 공격은 이내 의경의 정문으로까지 번지고, 불화살과 투포환 공격으로 이어졌다. 방벽으로 기어오르기 위한 사다리가 걸쳐지고 벽 아래에서 폭약이 터졌다. ‘가거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라!’ 누각 위에서 연서령은 군대를 지휘하며 활로 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함성 소리와 비명 소리. 악다구니와 고함 소리. 불이 지나간 곳에는 재 냄새와 살이 탄 누린내가 났다. 네 번째 전투는 이전과 달리 몹시 치열했다. 아니, 의경이 조금 밀렸다. 의경은 서쪽 방벽이 크게 허물어졌으며 그 벽 위의 전각이 불에 탔다. 뒤늦게 불을 끄긴 했지만 이미 무너지고 부서진 벽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 악전고투 속에서 연서령의 무예는 크게 빛이 났다. 방벽이 무너진 서쪽으로 그녀는 직접 말을 몰아 밀어닥쳐오는 적들을 칼로 베고 활로 쐈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며 날고 긴다는 연서령이었지만 적들을 모두 쫓아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
장기전이 될 것 같았던 적들의 네 번째 공격이 모두 끝이 났다. 어둠이 깔리자 적들은 일단 후퇴했다. 연서령과 기마부대들이 그 뒤를 쫓았으나 그들도 얼마 안가 의경으로 귀환했다. 적들의 공격이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곧 부지런히 서쪽 방벽을 수리하고 전투에서 잃은 것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지는 건 너무 힘들어.”
유난히 많이 사용한 오른쪽 팔을 주무르며 연서령이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전각 위에서 활로 적장만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다가 오늘은 말을 타고 검을 많이 휘둘렀다. 휘두르는 것도 신경 써서 헛손질을 좀 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 그냥 전각 위에서 활로 지휘관을 쏴 죽이는 게 훨씬 전투에 효율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타고 서쪽에서 날뛴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혹한 척, 다급한 척, 큰일이 난 척 연기하느라 혹사당한 제 팔을 문질거리며 연서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불에 타서 거멓게 변해버린 서쪽 방벽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구나, 싶어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그렇게 힘들게 쌓은 것인데, 제 손으로 터뜨리니 참 아쉽더군요.”
그런 그녀의 옆에 초로의 군사가 섰다. ‘아아.’하고 연서령은 어둑한 얼굴을 하다 이내 히죽 웃었다.
“안에서 우리도 같이 방벽 허물기를 도운 것도 모르고 적들이 꽤나 좋아하더군!”
“좋아할 만도 하지요. 방벽이 무너졌는데.”
적들이 좋아하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가 웃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연서령의 가벼운 태도를 초로의 군사가 꼬집는다. 그러자 연서령이 미간을 좁히며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점잔을 빼며 군사가 그녀를 보았다. 태연하게 ‘왜 그러시죠?’ 묻는다. 그 두꺼운 낯짝을 보자 괜히 힘이 빠져서 연서령은 그냥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되었네.’하고 손목을 흔들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축시(丑時)에 소부대 하나가 동쪽으로 의경을 빠져 나갔다.
그들은 의경의 채약사들이 가르쳐준 대로 계곡 가까이에 있는 석회동굴을 찾아갔다. 석회암 지대에서 잘 큰다는 회양나무의 생김새도 숙지하고, 계곡과 기타 수로를 익혀 지하수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측한 지리서도 들고 갔다. 기본적으로 몸집이 작고 발이 빠르며 움직임이 민첩한 자들로 구성한 특별 소부대였다. 그 중 한 명은 실제로 계유산에 살았던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동굴을 본 적 있다는 그 사람과 채약사의 말로 미루어 연서강과 군사가 동굴의 규모와 길이를 추측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지하수의 양이 얼마 될 것인가. 그리고 계곡에 치명적인 공동(空洞) 부분은 얼마쯤 가야 될 것인가를 추측했다.
이왕이면 동굴 안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것이 좋겠지만, 동굴의 구조가 어찌 될지 몰라 지면에서도 확실히 타격을 줄 만한 장소도 파악해 지도에 기록해 두었다. 소부대는 모두 네 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무리는 혹여 지상의(지하의) 폭발이 미미하여 계곡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양 쪽 계곡의 상단도 터뜨릴 예정이었다.
적의 공격이 허물어진 서쪽 방벽으로 쏠린 덕분에 동쪽은 한산해졌다. 만약 이게 꾸며서 유인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군 또한 서쪽 방벽이 무너진 데에 당황해 동쪽을 신경 쓰지 못했으리라. 때문에 적들은 의경군이 서쪽이 아닌 다른 쪽을 설마 신경을 쓰고 있을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부대는 무사히 동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동쪽으로 나가게 되면 계유산으로 가기 위해서 크게 돌아가야 하겠지만 적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동쪽이 나았다. 하지만 그들이 무사히 계유산 위족에 위치한 언양으로 통하는 계곡까지 당도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굳이 계곡 근척까지 가지 않아도 계곡까지 통할 것으로 예측되는 큰 석회 동굴이 계유산에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측에 불과할 뿐, 그것이 정말로 계곡 아래의 지하수가 흐르던 동굴로 통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 동굴 안의 지하수가 오랜 가뭄으로 말랐다고는 하나 동굴 특유의 축축함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언제 계곡을 터뜨릴 수 있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적들이 공격해오는 것보다 늦을 것은 분명합니다.”
군사의 말을 들으며 연서령은 땀에 젖은 이마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렇겠지. 땀과 피로 온 몸이 젖어 불쾌하기 짝이 없으나 그녀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아직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를 꼬박 넘기는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진 방벽을 보며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허물어진 서쪽 방벽을 보니 무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막막함과 함께 두려움을 닮은 흥분이 머리를 적셨다. 이제는 ‘혹여.’라는 가정도 불가였다. 무조건 ‘반드시.’였다. 굳은 얼굴로 연서강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새벽, 그때 다시 공격해올 거야. 서쪽으로.”
그 말에 연서령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다.
“밤이 되어 물러난 건 우리를 안심시키고 방심시키려고 한 게 분명해. 그들은 분명 이 어둠을 놓치지 않을 거야. 가장 사람이 피로하고 지치는 새벽. 이슬이 떨어질 즈음이 되면 공격이 다시 시작된다.”
굳은 목소리로 말하는 연서강은 역시 연서령이 본가에서 봐왔던 그와는 좀 달랐다. 파리한 안색을 한 남자의 윤곽이 검은 빛을 띠기 시작한 노을빛을 받아 부드러운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찬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면 그럴 거야.”
그 말에 연서령은 의아한 표정을 해 보였다. ‘나라면?’ 그 물음에 연서강은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무너진 방벽을 응시했다.
서쪽의 방벽이 저녁에 무너졌다. 누구라도 이걸 보면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적이 공격해올 것인가. ‘여기’를 ‘이 때’ 공격하세요, 하고 알려주다시피 저지른 일이니 당연했다. ‘과거’가 달라져 자신이 더 이상 적들의 공격을 예측할 수가 없다면 적들이 그때, 그곳을 공격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된다.
문제는 그 후였다.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연서강은 연서령을 보았다.
“새벽부터 계곡이 터질 때까지 계속해서 전투다.”
오후 일찍 의경을 떠난 소부대들은 아마도 이른 아침에 계곡에 도착할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만 적들의 공격을 막으면 되지만, 어쩌면 소부대가 계곡에 도착하는 시간이 더 늦어질 지도 몰랐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되지만 모를 일이다. 적들이 계유산 본거지에 사람을 남겨놓고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소부대들은 적들의 눈을 피해 동굴을 찾는 게 힘들어진다.
계곡을 터뜨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연서강은 막중한 임무를 진 여동생을 응시했다.
“네 장군으로서의 기량을 좀 보자구나, 서령아.”
그 말에 연서령은 씩 웃음을 지었다. 땀과 피가 달라붙어 불쾌해졌던 기분이 어느새 싹 사라졌다. 적당한 운동으로 따끈따끈하게 달궈진 몸에 약동하는 심장이 그녀의 정신을 한없이 맑고 개운하게 만들었다. 연서령은 대답했다.
“보고 놀라지나 마.”
자신이 실책하게 되면 기가 죽고 감정적이 되는 그녀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기도 했었다. 연서령은 첫 번째 전투에서 있었던 자신의 실책을 생각하며 꾹 주먹을 쥐었다.
* *
새벽.
적들의 다섯 번째 공격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 *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나각(螺角) 소리가 의경의 하늘에 높게 퍼졌다. 동시에 무너진 서쪽 방벽 앞에 쌓아두었던 짚더미에 화륵 불이 피어올랐다. 이미 무너진 방벽은 수복할 수 없지만, 적들이 그곳을 통해 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한다면 방법이 있었다.
무너진 방벽 앞에 쌓아둔 짚더미에 불이 치솟자 기세 좋게 쳐들어오던 적들이 일순 주춤했다. 그러나 곧 ‘불을 꺼라! 짚더미가 모두 타면 끝이다!’라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함을 지른 것은 바로 적의 지휘관이었다.
일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핑, 턱.
공기를 찢는 듯한 짧은 소리와 함께 적장이 타고 있는 말이 두 앞발을 치켜들며 외마디 울음을 터뜨렸다. ‘!’, 당황한 적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시꺼먼 말머리에 파란 깃을 단 화살이 꽂혀 있었다. 커다란 말이 몸을 요동치며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화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쏴라!”
하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적들 중 하나가 들었다. 허나 결코 그가 있는 부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그가 아는 한 그 목소리를 가진 자는 한 명뿐이었다.
그 목소리를 신호로 의경의 방벽에서 화살이,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졌다.
아아악-!
쿠구구쿡! 땅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말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고 참혹한 비명소리였다. 방벽을 수호하는 불꽃으로 적이 붉은 피가 튀었다가 금세 증발했다.
적의 지휘관이 명령했다.
“가라! 이미 벽은 무너졌다!”
그에 코웃음 치듯 의경의 중장군 연서령이 전각 위에서 외쳤다. 앞서 전투를 알리는 나각 소리보다 우렁차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죽여라! 오랑캐 도적놈들에게 제국의 무서움을 가르쳐 줘라!”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경의 정문이 열리고 기마부대와 보병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기마병들은 말 위에서 창과 검을 휘둘렀고 보병은 말과 자신을 보호하며 창으로 적들을 찔렀다. 방벽 위에서는 궁수들이 구호에 맞춰 일제히 화살을 쏟아 부었다.
아낌없이 쏟아 부어지는 화살 비에 적들은 당황했다. 동시에 의경이 마지막 발악을 톡톡히 하는 구나, 싶었다. 고립된 상황에 화살 같은 소모품은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중 하나였다. 언제 포위 상태가 풀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화살을 이렇게 많이 쓰면 나중 전투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되리라. 적의 지휘관은 생각했다.
의경을 맡고 있는 장수가 어린 계집애라더니 과연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고립된 상황에서 이토록 화살을 많이 쏘아댈 줄은 몰라 처음에는 주춤했지만 이미 승기(勝氣)는 이쪽으로 넘어온 듯 보였다. 화살은 금방 동이 나겠지만 언양으로부터 흘러들어올 자신들의 동료는 아직 많았다. 이 길고 긴 싸움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적의 지휘관은 벌써부터 결론지었다.
“가라!‘
그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의경을 지키는 건 약관도 안 된 어린애다!”
적장의 말에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의경군을 향해 돌진했다.
“감히 이 몸을 약관도 안 된 어린애라 감히 그랬겠다? 나중이 기대되는군!”
누각 위에서 전투 상황을 살펴보며 연서령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미 출전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투구를 쓰고 전투가 한참인 바깥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공포보다는 호승심과 투쟁심으로 가득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좀 더 진중하게 행동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그녀와 함께 의경을 지키면서 그녀가 어떠한 성품을 지닌 이인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어렸지만 대대로 훌륭한 무장을 배출한 연씨 문중의 계녀(季女)답게 무예에 탁월한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수로서 뛰어난 기량 또한 갖고 있었다. 아직 덜 여문 육체는 제 오라버니와 같은 강인한 힘과 체력도, 제 언니와 같은 날카로움과 결정력을 지니지 못했지만 매우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각 무기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아서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무기를 구사하곤 했었다. 그런 그녀의 전투는 말 그대로 흥분한 말이 저잣거리에서 날뛰는 듯 했다.
“홀로 적을 향해 돌진하는 건 참아주십시오.”
그녀에게 활을 건네며 초로의 군사가 주의를 주었다. 그것은 싸움에 취해 그녀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했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그녀의 상태를 염려해 건넨 충언이었다. 하지만 이내 군사는 연서령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지레 생각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고조된 그녀는 흡사 귀는 있되 듣지 않는 어린애와 같았다.
“.......”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연서령은 군사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설마 긴장한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군사를 시야에서 흘리며 연서령은 제 몸의 반이나 되는 활을 꽉 잡았다. 그리고 군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연서강을 향해 말했다.
“내일 오후면 모두 끝날 테니 잠이나 푹 자고 있지?”
서쪽을 태우는 불길을 바라보며 연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이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짜낸 작전이다.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일신을 온전히 지킬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형장과 가까이 있는 편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재빨리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연서령과 그녀의 군사들, 대대장과 병사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작전’을 맨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서의 책임이 있었다.
어딘지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이제까지와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연서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대로 해.”
연서령은 날카롭게 대꾸하고 머리에 투구를 썼다. 쌩한 날파람이 지나가듯 그녀가 연서강의 곁을 지나쳤고, 그 뒤를 여태 출전하지 않은 몇 명의 대장이 따라갔다.
그 모습을 미처 다 볼 겨를도 없이 연서강은 다시 불에 타오르고 화살이 퍼붓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인 의경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그마한 인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복색과 투구, 창과 검의 모양으로 보면 아군일 게 분명한 자들이 하나씩 적의 검을 맞고 쓰러질 때마다 심장이 튀어 올랐다. 시끄러운 폭약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을 법도 한 아군의 외마디 비명이 귀에 들릴락 말락 했다.
연서령의 말이 맞았다.
‘전쟁’은 너무도 묵직했다. 이제까지 집안에 들어 앉아 책만 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자신에게는 너무도. 서회에서도 느낀 적 있었던 비리고 혹독한 냄새가 의경의 하늘에도 가득 찼다. 비참하고 처절하고 굴욕스런 감정들 말이다.
“.......아마도 걱정되어서 하는 말일 겁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와 옆을 돌아보니 의경에 파견된 사관(史官)이 있었다. 전투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진행되는지 빼곡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도 전각에 나와 있었다. 끊임없이 놀리던 세필(細筆)을 잠깐 놓고 사관은 찬찬히 연서강이 보던 광경을 살펴보았다.
“연중장군께서 요새 당신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 고 말한 적이 있었거든요.”
“.......”
“이어 집에서 밥만 축내며 놀던 서생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사관이 다시 세필을 들어 책의 빈 곳에 몇 글자를 적어놓았다. ‘중장군 연서령 출전.’ 그의 붓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저쪽에서 ‘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군들의 함성이다. 그 편으로 시선을 돌리니 연서령이 그곳에 있었다. 말을 탄 연서령이 활을 쏘아 누군가를 낙마(落馬)시킨 것이었다.
화살은 정확히 적 부지휘관의 이마를 맞췄다.
적들이 주춤하는 기색이 보이자 연서령이 검을 빼어들고 외쳤다. ‘가자!’ 의경이 이길 것을 확실시하는 강인한 목소리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고립된 며칠간의 상황, 연승으로 인해 고취된 사기, 중장군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과 적들 몰래 짠 ‘작전’의 존재까지 모든 상황이 병사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아군과 적군, 또 한 차례 생명의 덩어리들이 부딪히고 그 경계면에서부터 사그라졌다.
“괜찮습니다.”
방금 중장군 연서령이 적의 부지휘관을 활로써 쓰러뜨렸다, 라는 내용을 책에 기록한 사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도, 병사도, 의경의 모든 사람들도 당신의 ‘작전’을 믿고 행하고 있습니다.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의 ‘작전’이 제대로 먹힐 수 있도록 당신과 군사들도 충분히 심사숙고했지 않습니까?”
사관이 연서강을 보았다.
“잘 될 것입니다. 수많은 전투를 따라다니며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자의 말입니다.”
“.......”
허나 그 말에도 연서강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관의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뭔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게 처음 ‘큰일’을 맡아보아 생긴 긴장감인지, 아니면 전쟁터의 공기에 울렁거리는 속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 사람이 와 ‘괜찮다.’라고 말해도 상황이 종결될 때까지는 마음을 쉽사리 놓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연서강은 흠칫 놀라 의경의 방벽을 돌아보았다. 적들도 화살을 동원했나 보다. 방벽 위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화살을 맞고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는 불구덩이, 불꽃을 날름거리며 불은 인영을 삼켰다.
아.
그제야 연서강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이 자꾸만 덜 깎은 나무의 표면처럼 껄끄럽기만 한지 이유를 깨달았다. 서회에서 자신이 버리고 왔던 ‘언양’의 숱한 병사들. 한낱 지도 위, 종이 책에 쓰인 한 줄의 ‘사실’이라 무시했던 것들. 그게 생각났다.
생각은 번쩍 그가 언뜻 놓고 있었던 죄책감을 깨웠다. 언양은 원래 정복당하는 게 맞았다고 주억거리며 넘겼기에 생긴 죄책감 말이다. 적에게 패배한 언양의 상황이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광경을 토대로 머릿속에 제멋대로 그려진다. 방벽 위에서 떨어지는 병사들과 혀를 날름거리는 불구덩이. 적군에게 밀리는 아군. 점점 좁혀져 오는 진퇴양난의 상황. 강을 붉게 물들었던 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경에서 봤던 포로의 대우.
“.......”
연조.
해서 연서강은 이를 악 악물며 머릿속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도배했다. 연조, 연조, 연조. 이 모든 것이, 기연조를 구하기 위해서다. 연조, 내 하늘 같이 소중하고 땅 같이 믿음직한 친구. 내 꽃 같이 연모하는 사람. 그렇게 수 천 수 만 번을 반복한 뒤에야 겨우 가슴을 쥐어뜯던 언양의 잔혹한 상상이 사그라졌다. 거기에 쐬기를 박듯 연서강이 다시금 힘을 주어 스스로에게 약조하였다. 돌아가리라, 연조야. 내 반드시 승리해서 수도로 돌아가며, 꼭.
머릿속으로는 지금은 없는 친구에게 약조하며 연서강은 사관에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불안, 초조, 두려움, 죄책감. 만 가지의 감정을 그 말로써 억눌렀다.
연서령이 친히 이끄는 부대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기량이 뛰어나고 잽싼 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검과 활로 무장한 정예 부대는 마치 한줄기의 빛과 같이 소나기구름처럼 엉킨 사람들 사이를 꿰뚫었다.
무장이 눈앞에 있는 자들을 약점만 노려 벼락같이 베어버리면, 말은 쓰러진 시신을 발판 삼아 사람들 사이를 뛰어올랐다. 날아오는 화살을 베고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칼을 피해 적군을 넘어뜨리면, 무장의 곁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길쭉한 창으로 그를 찔렀다. 창이 단단하게 박힌 말발굽으로 보병을 밟고 날려버리며, 연서령과 그녀가 이끄는 부대들은 얽히고설킨 적진을 반으로 뚝 잘라냈다.
진이 와해된 적군들은 당황해 뒤로 후퇴했다. 보신(保身)을 위해 몸을 뒤로 뺐다는 것 자체가 적들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였다. 의경군은 연서령을 필두로 해 겁에 질린 적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의경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적들이었기에 그들은 의경의 끈질긴 저항에 놀랐다. 그것은 적들의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기동성이 뛰어났던 준마가 맨 처음 날아온 화살로 인해 죽은 뒤, 그보다 못한 말에 급히 옮겨 탄 그는 놀라 주춤하는 말의 고삐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황망한 얼굴로 지친 기색 없이 덤벼드는 의경군을 바라보았다.
“의, 의경은 방벽이 무너져 사기가 떨어진!”
그렇게 자신의 병사들을 다독여 보려 했지만 자신의 말이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저건 다 죽어가는, 패배하기 직전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화살까지 모두 써버려 이제 당연히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야 했는데.......?!
그러나 오히려 의경군은 승리를 향한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듯, 더더욱 거세게 적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냐?!”
마침내 지휘관은 당황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기는!”
그리고 그 앞에 흑색 준마를 탄 연서령이 나타났다.
열심히 적을 베며 바람같이 달린 그녀는 순식간에 적진의 중앙인 적의 지휘관에게까지 당도했다. 잘 짜놓은 진은 연서령이 이끄는 부대에 박살이 난지 오래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듯 날쌔고 빠른 그녀의 부대에 적군들은 질서를 잃고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대가 방황하는 적군들을 베고 있는 장면이 적의 지휘관의 눈에도 비쳤다.
“내가 이겼다는 거다!”
연서령은 검을 높이 들어 경악하는 지휘관을 향해 내려쳤다.
이제 완연히 날이 밝아 새파란 하늘 위로 시뻘건 선혈이 치솟아 올랐다. 선혈이 연서령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튀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보자 흥분한 맹수처럼 검을 고쳐 쥐고 팔을 뻗었다. 그녀가 거의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적장이 죽었다! 가라!”
지휘관을 베었다는 소리에 의경군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사기는 그들의 지친 발걸음도 가볍게 만들었다. ‘마지막이다!’하고 누군가 소리치자 또 어디선가 ‘이기자!’란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이기자-!”
소리는 의경을 뒤흔들고 그 너머 산까지 울려 퍼질 듯했다.
그 소리에 지휘관이 탔었던 말이 놀라 허겁지겁 도망가며 적군 몇 명을 짓밟았다. 허나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지휘관을 잃은 적들은 전의를 잃고 허둥지둥 말의 뒤를 따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말 등위에서 떨어진 지휘관의 시체를 밟고 미끄러진 자도 있었다. ‘으아아악! 살려줘!’하고 가지고 온 무기도 버리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내팽겨진 무기는 기울어져 가는 경의 것이라 그런지 모양새가 형편없었다. 몇 번 사람을 베었을 뿐일 텐데 날이 벌써 이가 빠져 있고 녹슨 곳도 있었다. 방어구 또한 그랬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도 있었고, 풀을 이어 만든 것들도 있었다. 시골 잡병들만큼 그들의 장비는 엉망진창이었다.
굶어 죽기 싫다는, 그 형형한 독기만이 그들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날선 무기였었다.
허나 그 독기도 눈앞에 당도한 죽음을 앞에 두고는 둔해졌다. 굶어죽기 싫지만 지금 당장 죽기는 더 싫다. 어떻게든 도망가 후에 다시 길을 도모하는 게 나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지 적군들은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주변 산지로 도망갔다.
“죽여라!”
그런 사람들의 등을 베어 넘기며 연서령이 다시 외쳤다.
“우리 하를 넘보는 자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연서령과 의경군은 하나라도 더 많은 적들을 없애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그 다음부터는 몹시 쉬웠다. 달려드는 의경군에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이 즈음하여 언양에서 적들의 지원군이 도착해야했다. 적들을 베느라 지친 의경군과 달리 언양에서 막 넘어와 기운이 넘치는 적군들이 의경군을 향해 덤벼들었어야 했다. 그것이 의경군이 적들에게 포위당한, 그리고 포위를 풀지 못한 이유였다.
허나.
-쾅!
어디선가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콰콰콰-쾅! 이어 들리는 소리.
대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부딪치고 깨지고 굴러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거운 어떤 것이 푹 내려앉는 소리였다.
연서령과 의경군, 심지어는 적군까지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거기는 계유산이 있는 곳으로 흙먼지가 거대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서령과 의경군이 ‘와아!’ 그것을 보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반면, 적들은 절망했다
계곡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언양으로부터 지원군이 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망가는 것도 잊은 채 멍한 얼굴을 한 어린 소년병의 등을 의경의 병사가 창으로 찔렀다.
참으로 민민답답했던 의경의 상황이 이번 전투에는 그 모양새가 좀 달라졌다. 아침이 완전히 밝은 사시(巳時: 오전 아홉시부터 열한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 *
“.......어디까지 간다고?”
바로 성으로 돌아와 다시 출전 준비를 하는 연서령에게 연서강이 놀라 물었다. 새벽부터 이어진 전투에 제아무리 연서령이라고 해도 지친 모양인지, 그녀는 거친 숨을 잠시잠깐 몰아쉰 뒤 말을 이었다.
“계곡까지 간다.”
그녀의 대답에 연서강이 ‘서령아.’하고 황급히 말했다.
“계유산까지면 충분해. 계곡까지라니! 지금은 욕심 부릴 때가 아니다. 계유산 근거지와 근처 잔당들을 없애는 게 급선무야.”
아니, 하고 연서강은 재차 말했다.
“적들이 혼란한 틈을 타 서회까지 길을 여는 게 중요해. 주변 읍에 연통을 넣어 도움을 요청한 뒤, 계유산과 근처 잔당을 정리한 뒤 계곡까지 가도!”
그때 연서령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만!”
수건으로 땀을 닦은 뒤 그녀는 다시 투구를 썼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연서강을 향했다.
“계곡이 먼저야.”
그렇게 말하는 연서령의 눈빛이 어딘지 초조해 보였다. 일전에 그런 적이 있는 것처럼 또 고집을 피우는 건가 싶었던 연서강의 표정이 그 눈빛을 보고 변했다.
“어째서?”
해서 그렇게 묻자 연서령이 눈썹을 구기며 제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대신해 곁의 젊은 군사가 입을 열었다.
“사실, .......계곡에 보낸 자들이 걱정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더 확실한 정보를 말해달라고 연서강은 젊은 군사 쪽을 보았다. 하지만 군사가 바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연서령이 ‘아, 진짜!’하고 건짜증을 냈다.
“왜 그래?! 우리가 잘못된 짓이라도 했나? 연서강 저 놈이 무슨 큰 어르신이라도 되냐고? 왜 꾸중 들을 거라 생각하는 애처럼 빌빌거려?”
짓을 했다, 라는 말이 불길하다. 연서강은 다시 연서령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웠던 연서령의 눈빛이, 연서강의 딱딱한 얼굴과 마주치자 기가 죽었는지 슬쩍 누그러들었다. 허나 이내 이를 악문 뒤 그녀가 연서강에게 말했다.
“계곡으로 보낸 부대에게 몰래 다른 명령을 내렸었어. 계곡 근처의 적들, 언양에서 넘어올 적들까지 계곡으로 유인한 다음 계곡을 터뜨리라고. 그들을 구하러 가야해. 계곡은 터졌지만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적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뭐라고?”
그 목소리에 섞인 감정이 못마땅했던지 연서령이 확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계곡으로 적을 유인한 다음 터뜨리면 더욱 좋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그 말끝에 젊은 군사의 변호가 안타까이 섞인다.
“연장군님께서 적들을 확실히 섬멸하고자 하여......, 계곡이 터졌으니 여기는 급박한 상황은 일단 지나지 않았습니까? 허나 계곡은 아직 급박한 상황일지 모릅니다. 계유산에 남아 있는 적들이 계곡으로 가 우리 부대를 섬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연장군님 말씀대로 계곡으로 가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젊은 군사의 변호 때문이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계곡으로 내보낸 부대들이 계곡을 터뜨리는 것도 모자라 적들을 계곡으로 유인하기까지 하는 중책을 맡았다고? 연서강은 한탄했다.
“서령아.......!”
그 부대가 누구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상당수가 일반 백성들이었다. 의경이 현재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미 병사가 된지 오래 되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본디 채약사나, 농민들이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부대를 지휘하는 자 또한, 동굴을 찾는 것이 부대의 목표였던 탓에 산을 잘 아는 일반 백성이었다.
계곡은 터졌다. 그러니 그들이 원래 목표로 했던 일은 잘 마무리 했으리라.
목표했던 일을 마친 후 그들은 바로 적들이 계곡에 당도하기 전에 그 자리를 떠야 했다. 그게 원래의 작전이었다. 그들이 적에 맞서 싸우는 건 무리였다. 전투를 위한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해서 연서강이 계곡을 터뜨릴 때 적을 유인해서 한꺼번에 처치하면 참 좋을 텐데, 란 생각을 실행에 못 옮긴 것이었다. 과욕이라 생각했다.
의경이 고립무원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지, 적들을 말살시키는 게 먼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서령은.......!
“넌 그들이.”
“그만! 지금 말 하고 있는 것도 시간 아까워. 난 가겠어!”
그러나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연서강의 손을 거칠게 치우며 연서령이 홱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채 말도 채 잇지 못한 채 연서강은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전투가 일어날 당시에는 이런저런 돌발 상황에 잘 대처 해야겠다 생각하며 한참 긴장했었는데, 전투가 다 끝날 무렵에서야 발생한 돌발 상황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런 종류의
다만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왜 계곡이 발파되는 일이 예상보다 늦어졌던 것인지, 그리고.
“어쩐지 전투가 생각보다 더 치열하지 않았다 싶었더니.......”
어째서 계유산 쪽에서 단 한 번도 원군이 오지 않았었는지.
그것은 연서령의 명을 받은 특수 부대 중 일부가 계유산에 들어가 적들을 유인, 미리 계곡에 당도해 있었던 또 다른 일부가 적들이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폭약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 공격해온 적의 규모가 작았었다. 계유산에서도 이쪽을 덜 신경 쓴다 싶었다. 연서령 또한 출전하기 전 묘하게 기분이 상기되어 있었다.......
“덕분에 이쪽은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끝냈지.”
연서강이 흘린 혼잣말에 연서령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연서강은 아찔해졌다.
어째서 내게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탓할 기력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연서령은 원래가 이런 성격이었다. 위에서 이러 해라, 저러 해라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제 생각에 가장 이익이 될 만한 일을 멋대로 저지르곤 했었다. 그녀의 판단은 때때로 그녀의 생각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잘 풀렸던 것은 아니었다.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감당해야 할 피해가 어마어마하니 연서강으로서는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격 차이에서 생기는 일인가 싶었다. 자신은 이 의경에 앉아 전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조마조마했거늘,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여동생은 과단성이 지나쳐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내리고 태연히 적장의 목을 베었다.
“.......가라.”
허나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서강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지 가라고 말했는데도 연서령은 눈썹을 구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연서령을 연서강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가서 반드시 그들을 구해 와.’ 이번의 말로 연서강이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연서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연서강은 그제야 연서령의 얼굴을 보았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그녀의 뺨에는 아직 적장을 베었을 때 묻은 피가 남아 있었다.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며 선두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연서령의 모습이 머릿속을 절로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묻는 건 또 무어냐.”
말하고 나니 정말 그랬다. 이미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 놓고 그 뒤처리를 하러 가는 주제에 이제야 ‘괜찮아?’라고 묻다니. 세상천지에 이런 말괄량이가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연서강은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연서령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연서령이 흠칫 놀라며 얼굴을 뒤로 뺐다. 연서강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확실히 이쪽 전투가 쉬워진 것은 사실이니까.”
어찌 보면 지금 의경이 대승을 거둔 것은 그녀가 미리 그러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지 모른다. 그것과는 별개로 연서령의 명령이 계곡에 보낸 부대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연서강은 그녀가 자신이 충분히 그 부대를 구할 수 있다 믿었기에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왈가왈부 떠들 바에야 차라리 연서령을 빨리 보내주는 것이 계곡에 있을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건 잘 했다. 그러니 어서 가거라. 가서 그들을 확실히 구해.”
“.......”
“그러지 못한다면 네 가슴은 죄책감으로 미어질 테니.”
연서강의 묵직한 말에 연서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한 듯 그녀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만연했다. ‘그, 래.’하고 잠시 후 그녀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답지 않게 그녀의 얼굴이 긴장으로 다소 굳어져 있었다.
“갔다 올게-.”
연서강의 소매가 닿았던 제 뺨을 문질거리며 연서령이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의경을 잘 부탁해.”
“.......”
이번엔 연서강이 의외라고 생각할 차례였다.
-괜찮아?
그 말이 빛바래 있던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그 말은 참으로 오래 전, 아직 연서령과 자신의 사이가 좋았을 무렵 그녀에게서 흔하게 들었었던 말이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들었었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나 많아서였다. 연서령이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른 뒤 자신이 그 일을 수습할 상황이 되면 늘 들었었던 말이니,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일들은 고작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위대관의 막내딸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연서령은 어렸을 때부터 웬만한 사내아이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왈가닥이었다. 금박 입힌 고운 세저(細苧) 치마를 두른 채 백 년이나 산 커다란 감나무를 원숭이처럼 타고 오르는 것도 모자라, 감을 던져 하늘을 나는 새를 맞춰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연서강은 늘 조마조마한 얼굴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리며 그런 여동생을 지켜보곤 했었다.
그러다 그녀가 순간 발이라도 잘못 디뎌 주루룩 나무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게 되면, 연서강은 낯이 시퍼레진 채 ‘서령아!’하며 떨어진 그녀를 제 몸으로 받아냈다. 아직 어렸던 연서령의 몸무게는 가벼웠지만, 어릴 때 유난히 말랐던 연서강의 덩치는 당시 그녀보다 아주 약간 큰 정도였기 때문에 연서강이 받은 타격은 무척 컸다. 연서강이 아픈 허리를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노라면 연서령이 안절부절 못하며 그 옆을 맴돌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던지는,
-괜찮아? 응? 괜찮아, 오라버니?
질문들.
그녀와 정답게 논 기억의 거의가 그러했다.
기억이 다시 파라락 종이 넘기는 소리를 내며 바뀌었다. 팔랑팔랑 붉은 단풍잎이 첫눈처럼 쏟아져 내리는 가을날의 기억이었다. 격자무늬 담 아래서 연서령은 떨어진 단풍잎을 보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연서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초로의 군사였다.
“서회와 주변 읍에 연락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달아나 숨어버린 적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 즈음이면 주변 읍에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화살과 화약을 아낌없이 썼으니, 최대한 빨리 주변 읍에서 전쟁비품을 지원받는 게 중요합니다. 가급적 빨리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산속으로 도망간 일부 잔당들을 숙청하기 위해 부대를 조직해 파견했습니다. 계유산으로도 부대장이 병사를 이끌고 갔습니다. 계유산에 남아있는 적들을 해치우고 나면 곧바로 계곡으로 가 연장군을 보조할 예정입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군사의 말을 들으며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서 들었던 말이 어린 날의 향수를 자극한 때문일까, 군사의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계곡 쪽 상황이 걱정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연서령의 모습을 자신의 보고 저 아이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어 그녀를 보낸 것이 아니었던가. 계곡 쪽 상황이 어찌 돌아가든 서생인 자신보다야 연서령이 훨씬 잘 대처할 것이 뻔했다.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고,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하며, 검은 휘두르지 않은 게 더 나은 자신보다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시선을 내리깐 연서강은 중지로 탁자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심장의 고동과 똑같은 속도로 손가락이 탁자를 다그쳤다. 그 고동이 어서, 어서 뭔가를 떠올리라고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자기 자신이.
의경은 일단 큰 보기를 넘겼다. 주변 읍의 도움을 받아 잔당을 숙철하고 언양의 적들이 어떤 다른 수를 쓰기 전에, 서회에 연통이 닿아 지원군이 도착한다면 의경의 고립무원도 끝날 것이다. 연서강이 호언장담했던 열흘보다 더 빨리 적들의 포위를 벗어난 것이다.
놀랄 만한 일이라고 군사가 말했고 병사들도 기뻐했다. 무너진 방벽을 있는 재료로 대충 보수하며 병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 서회에 연락이 닿으면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람은 더 많아지리라. 여기에서 자신이 언양 회복까지 해내게 된다면 수도에 계신 부친도 자신을 인정해주실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연서강은 현재 상황에 몹시 만족해했다.
허나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팔랑팔랑 날아와 바닥에 떨어지는 단풍잎의 환영과 겹쳐져 연서강의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현재 연서령이 향하고 있는 ‘계곡’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단풍잎과 연서령, 또 계곡.
단어를 늘어놓고 생각하던 연서강은 순간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적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바로 이 변방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해 놓았던 책에 있던 구절로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것이었다. 그 책을 떠올린 직후 그는 자신이 보았던 과거의 그 ‘책’
이 아까 전 성벽에서 보았던 사관(史官)이 적던 그 ‘책’이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좀 더 낡았지만 표지와 재질이 똑같았다.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양을 수복하던 중 적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팔랑팔랑 단풍잎이 날렸다. 격자무늬 꽃담아래에 연서령은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연습용 목도가 놓여 있다. 또, 뚝뚝 눈물을 흘렸던, 부상을 입어 집으로 요양을 온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무술 연습을 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가을날의 기억.
“.......제일 빠른 말이 뭡니까?”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예?’하고 군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제대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연서령은 지금도 계곡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군사를 향해 다시 말했다.
“제일 빠른 말에 말을 잘 모는 기마병 한 명을 준비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빨리!”
“그것은 왜.......”
아직 머뭇거리는 군사를 보며 연서가은 조급하게 외쳤다.
“계곡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도 연서령이 계곡에 도착하기 전에!
과거는 이제 더 이상 연서강이 기억하는 그때의 그 ‘과거’가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전의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허나, 그와 비슷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 번 일어난 적 있었던 일이라는 건 되돌아온 지금,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일이란 소리와 같았다.
책에 쓰여 있던 완전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계유산 근처 계곡에서 언양을 수복하던 중 적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연서령 중장군이 부상을 입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입은 부상은 ‘무장’으로서의 연서령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