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부친의 말이 똑바로 와 꽂히지 않고 귀를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힘없이 자신을 지나친 ‘말’에 연무강은 잠깐 문서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부친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목구멍이 바짝바짝 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에 무심한 표정인 연무의가 종이 위로 붓을 놀리며 방금 했던 말을 똑같이 입에 올렸다.
“향이가 연서강을 의경으로 보냈다고 하더구나.”
“의경.”
연무강은 제법 익숙한 지명을 되뇌고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게 당연했다. 연의향이 있는 서회, 그리고 그 주변 읍인 황지, 지백 등, 그 읍 중에서도 최전선에 위치한 의경. 바로 막내 여동생인 연서령이 날뛰고 있다는 그 읍이었다.
자신이 날뛴다는 표현을 쓴 걸 알면 연서령이 또 아득바득 자신을 향해 뭐라 불평불만을 토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무강이 볼 때 연서령의 전투는 탁월한 기교도 하등의 전략도 없는 짐승의 싸움, 그 자체였다. 실로 야생동물이 제 뛰어난 육체적 기량을 무기로 날뛰는 전투였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표현이라 생각하는데도 연서령은 연무강이 자신을 비하하는 걸로 곡해하고 화를 냈었다.
“그렇습니까.......”
어째서 부친의 말이 제 귀를 지나쳐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는지 연무강은 알 것 같았다. 연서강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 연서강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이었다. 연서강이 서회에 간 것도 어이가 없건만, 최전선인 의경에 갔다? 그것도 냉철한 연의향의 명령이라니.
연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향이가 그 놈을 죽이려고 아예 작정한 모양입니다?”
연무의가 붓을 벼루에 올려놓고 잠깐 먹물이 마르길 기다렸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다. 향이도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하던데.”
“생각?”
부친의 반응이 조심스러워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연무의가 연무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름진 제 부친의 시선이 제 얼굴에 와 닿자 연무강은 급히 인상을 폈다. 연서강에 대한 불쾌감이 이루어 말할 수 없으나 그걸 부친의 면상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없었다. 일전에 형제 싸움도 적당히 하라, 명했던 것도 생각났다.
“서강이 향이에게 자신을 의경에 보내 달라 지원했다고 하더구나. 자신이라면 고립되어 있는 의경을 도울 수 있다고.”
“맙소사.”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무강은 황실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국경의 경비에 관련된 보고도 함께 듣고 있었다. 연무강의 여동생인 연의향과 연서령이 국경에 있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찾아 묻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오는 게 국경에 대한 소식이었다.
연의향이 이끄는 서진군이 오랑캐에게 언양을 빼앗겼다는 소식도 물론 접했다. 이어 의경이 고립이 되었다는 소식도 말이다.
국경에서 여기 수도까지의 거리가 제법 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빨리 전해봤자 일이 발생한지 나흘은 지나야 수도에 소식이 닿았다. 때문에 의경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이제 막 수도에 닿았다는 것은, 의경이 고립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났다는 말과 똑같았다.
지금쯤은 아마 연의향도 언양을 수복하기 위해, 연서령도 의경의 고립무원을 타파하기 위해 저마다의 전략을 짜서 한창 오랑캐와 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연서강이 의경으로 간지도, 고립된 의경의 외로운 전투에 휘말린 지도 벌써 나흘은 지났단 소리였다.
“.......”
갑자기 입 안이 써져서 연무강은 설핏 인상을 썼다. 입안에 쓴 맛이 도는 것과 달리 냉소가 자꾸 입가에 걸렸다. 잘 하고 있구나, 연서강. 아주 죽으려고 작정했어. 작정한 줄은 알았지만, 정말 몸뚱이 한 번 잘 굴리는군. 그런 생각이 연무강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놈에게 전쟁터라니, 역시 가당치도 않다-.
“그건 그렇다 치고, 태상 또한 이 소식을 접했겠지? 그 쪽의 움직임은 어떤 것 같으냐?”
부친의 질문에 연무강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서강이 저지른 바보짓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음습한 짜증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연못 속의 붕어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 보일 정도로 수안궁의 태상은 조용했다. 이제까지 밖에서 어떤 소식이 전해져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물 흐르듯 내버려두었던 사람다웠다. 하다못해 황제도 언양이 오랑캐에게 넘어갔다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는데, 태상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침묵하고 있다. 그 얼굴에는 아무 감정의 편린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무강의 보고에 연무의는 작게 웃었다. ‘그 남자가 원래 그렇기는 했지.’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책상 상단에 놓여있는 작은 서책을 집어 들었다.
“연서강과 태상이라. 너무 어처구니없는 조합이라 조금 경계를 했었는데 어쩌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일지도 모르겠구나.”
“아직은 잘 모르니, 계속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연무강에게 연무의가 대답했다. ‘네 성이 풀릴 때까지 감시하련.’ 그 말이 꼭 연무강이 감시를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어서 연무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연서강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지는 않나, 염려되어 신중을 기하는 것일 뿐이거늘.
그러나 연무의의 말대로 그저 기우일 뿐일지도 모른다. 연서강이 의경에 갔다고 하지 않았나. 야생동물이 날뛰는 것이나 다름없는 연서령의 전투 방식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절대 연서령의 부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연서령 또한 그를 아니꼽게 여기고 있으니 그를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을 것이다.
전장에서는 약간의 실수도 생과 사의 문제로 즉결된다. 그 한심한 놈의 평소 하는 행태를 보면, 의경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해서 제 목숨을 위험에 내놓고 있을지 직접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행여 어찌 간신히 목숨을 붙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몸도 허약한 놈이니 알아서 나자빠질 것이 분명했다.
연서강이 의경에서 죽어버리면, 태상과 무슨 작당을 했더라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구나.”
문득 들려오는 부친의 중얼거림에 연무강은 귀를 기울였다.
“무엇이 말입니까”
별로 숨기고 혼자 즐거워 할 생각이 없었는지 연무의가 쉬이 입을 열어 말한다.
“의향이 말에 따르면, 연서강이 언양이 적에게 넘어가고 의경이 고립될 것이라 미리 충고했다고 하더구나.”
현실감 없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연무강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수안궁의 태상이었다.
“신의 계시라도 받았답니까?”
연무강은 진지했다. 허나 연무의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껄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부친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연무강은 여전히 진지하게 ‘그래서 태상과 가까이 지냈던 것일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어째서 태상과 연서강이 만났는지에 대한 타당한 이유도 된다 싶어서.
웃음을 멈추고 연무의가 다시 말했다.
“차라리 신의 계시라면 나을까. 의향이도 무척 놀란 것 같더구나. 원 녀석도. 그래 봬도 명문가의 고명따님이신데, 글씨가 괴발개발 그게 무언지. 아무리 놀랐다고 하지만 내용을 알아보는 데 좀 시간이 걸리더구나.”
연무강은 눈썹을 구겼다. 신의 계시도 아니면 연서강이 미리 그 사태를 예측이라도 했단 말인가? 전장에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한 녀석이? 연무의의 말이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연무의의 말은 진담인 듯 했다. 연의향이 경악 했다는 말도 정말인 것 같았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연무강은 그저 침묵했다. 그의 귓가에 연무의가 ‘역시 벙어리가 입이라도 터진 듯 재미있구나.’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무강은 눈을 구겼다. 문득 연서강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 그의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죽을 테면 죽이십시오! 아무래도 형님은 어떤 이유를 대서든 저를 꼭 죽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삽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걸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그 놈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꼭 그 놈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자신은 다만 연서강이 연씨 문중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살아 있어 봤자 해가 되는 존재이니 연씨 문중을 위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놈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마치 그놈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 생각에 머릿속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불쑥 일어섰다. 12살의 어느 날. 연서강을 처음 봤을 때의 일이다. 악귀처럼 소리쳤던 유모 서씨와 자지러지게 울어댔던 연서강.
그리고 그 앞에서 멍하게 서 있었던 자신까지.
연무강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의식중에 그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 놈이, 먼저!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무강아.”
부친의 부름에 연무강은 과거의 상념에 벗어났다.
고개를 들어 부친 연무의를 보니 그가 모두 마른 종이를 고이 접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부른 것인지 깨달은 그는 급히 서랍에서 비단 주머니와 붉은 색실을 꺼냈다. 연무의는 곱게 접은 종이를 연무강에게 건넸다.
연무강은 그것을 비단주머니에 조심히 넣어 붉은 색실로 비단 천을 묶었다. 연무의가 그런 연무강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이 의경이 고립상태에서 헤어 나오게 되면 아주 재미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부친인 연무의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 연무강은 불쑥 중얼거렸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농을 치는 듯한 연무의의 가벼운 되물음에 연무강이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연입니다. 연서강, 그 놈에게 뭔가 능력이 있을 리가. 그저 하찮고 쓸모없는 한량일 뿐입니다, 그 놈은.”
그렇다. 그래서 연무강도 차라리 연씨 문중을 위해 죽는 편이 그 놈 인생에 낫다, 생각하는 것이다. 걸림돌이 되어 나자빠질 바에 차라리 연씨 문중의 명예로 남으라고.
적인 기연조를 친구로 두는 아둔함부터 시작하여 제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 전쟁터로 나가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한심하고 어리석은 짓만 가지가지 골라 하는지. 연무강은 연서강의 그 멍청한 얼굴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절로 갈렸다.
“아버님이 그놈에게 거시는 기대조차도 아깝습니다. 행여 나중에 실망하시지나 마십시오.”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연무강을 연무의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응시했다. ‘넌 정말 연서강을 싫어하는구나.’ 딱히 꾸짖고자 꺼낸 말이 아니라서 연무강은 ‘네. 싫습니다.’하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어 연무의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연서강에게 뭐라 실망한 것이라도 있었나 보지?”
그 말에 연무강은 와작 얼굴을 구겼다.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래, 없다.
연무강은 속으로 그리 주억거렸다. 그 놈은 원래부터 그렇게 한심하고 멍청한 놈이었다. 놈이 그러한데 자신이 뭐 그놈에게 기대를 걸 게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없는 게 당연했다. 연무강은 제 손안에 있는 비단 주머니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 *
그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변방에서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이른 아침에 서회에서 온 파발꾼이 집에 들이닥쳤다. 부친인 연무의가 아직 숙면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근무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깨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연무강이 파발꾼을 맞이하게 되었다.
파발마에서 내린 파발꾼은 연무강에게 변방에서부터 급한 공문이라고 연무강에게 전했다. 공문을 전하는 파발꾼이, 황궐이나 관청도 아닌 사택에 오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연무강은 변방이란 말에 연의향이 뭔가 급히 전할 것이라도 있어 제 권력을 이용해 파발꾼을 이용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나중에 제 사적인 용무로 정말 급한 일에만 써야 할 파발꾼을 이용한 걸 훈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파발꾼이 전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편지는 연의향이 아닌 연서령이 전하는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한 줄로 매우 간략했다.
언젠가 부친이 ‘향이가 어찌나 놀랐는지 글씨가 괴발개발이더라.’라고 말한 적 있듯이, 누가 자매가 아니랄까봐 놀라면 글씨가 엉망이 되는 것까지 똑 닮아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연서강 오라버니께서 전장에서 적이 쏜 화살에 맞은 뒤 실종되셨습니다.
연무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을 편지를 응시했다.
* *
의경이 근 이레 만에 고립무원 상태에서 헤어 나왔다는 소식이 황궐에 전해졌다. 적으로부터의 고립에서 벗어나자마자 의경의 연서령은 황궐과 집으로 각각 파발꾼을 보냈다.
황궐에는 의경이 고립무원 상태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위해서, 집에는 연서강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연서강 오라버니께서 전장에서 적이 쏜 화살에 맞은 뒤 실종되셨습니다.
꽤나 악필로 써진 간단한 내용의 편지를 보고 연무의는 혀를 쯧쯧 찼다. ‘틀렸구나, 틀렸어.’하고 연무의가 이어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연무강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연서강은 죽었을 것이다.
연무의는 아예 죽었다고 확정을 한 듯 보였다. 놀라 급하게 편지를 쓴 연서령이 이어 다음날, 짧게 ‘찾고 있습니다.’하고 추가로 편지를 보내왔지만 연무의는 소용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무리도 아니다.
적이 쏜 화살을 맞은 것도 모자라 전장에서 실종되다니. 보통의 경우 그럴 때에는 사망으로 처리가 된다. 사망이 아니더라도 아직 아군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보니 적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어찌 되었든 죽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이다.
중장군의 직위까지 오른 그녀이기에 그걸 모릴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부질없게 ‘찾고 있습니다.’라고 집에 알린 것이다. 여전히 그녀의 필체는 정리정돈 되지 않은 채였다.
연무의는 두 번째 편지 역시 호롱불에 태우며 연무강더러 ‘네 말대로 괜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구나.’하고 말했다.
.......그 말을 연무강은 전혀 듣지 못했다.
이어 연무의가 ‘그나저나 령이, 이 아이는 좀 더 자세히 전투의 추이를 보고하지 않고 쓸모없이 이런 소식만 전하다니.’하고 또 혀를 찼으나, 역시 연무강은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괴이했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변고를 맨 처음 접하고 ‘역시.’라고 생각했었다. 죽으러 간 전쟁에서 정말 잘도 죽었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음 순간, .......연무강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이어 억지로 한 생각은 그거였다. 한심하게도 적이 쏜 화살을 맞고 죽다니. 연씨 문중의 이름에 먹칠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훌륭한 무장을 수 없이 배출한 문중에 이놈은 끝까지 흙탕물을 튀기고 가는구나.
그 생각을 끝으로 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이상했다. 연무강은 자신이 생각보다 즐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었다.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 연서강이. 뭔가 더 생각할 것이 떠오르지 않아 연무강은 습관대로 근무에 임하고 부친의 일을 도왔다.
평소와 달라진 게 하나 없는 평온한 하루였다. 다만 자신의 부관이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눈치만 살폈을 뿐이었다. 아마도 연서강의 변고가 황궐에도 퍼졌기 때문이리라, 연무강은 예상했다.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연무강은 자신의 부관에게 그만 눈치를 살피라고 충고했다. 부관이 ‘죄, 죄송합니다!’하고 소리치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다만, 그저,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아서.’ 그 말에 연무강은 결정적으로 화가 나 버렸다.
심기가 불편한 것이 또 뭐가 있겠나!
그래, 있기는 있다!
연서강이 연씨 문중에 끝까지 도움이 안 되고 먹칠만 하다 간 것이 불편했다. 그래, 그 사실이 내심 자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것이다. 그 도움도 안 되는 놈이 끝까지 연씨 문중의 이름을!
연무강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잘 되었다. 아주 잘 된 일이다. 안 그랬으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을 게 뻔 했다. 연씨 문중의 이름에 먹칠한 것은 불쾌하나, 자신의 손에 그 놈의 피를 안 묻힌 것만 해도 어디인가, 아주 잘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는 그렇게 배고픈 사람이 고기를 물어뜯듯이 무아지경으로 생각을 씹고 씹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머릿속이 또 12살의 그때처럼 멍하게, 새하얗게 비어버릴 것만 같았다.
실망할 것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는데 실망을 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실망한 것은 아니라고 연무강은 여겼다.
그때도 그랬던 것이다. 살려달라고 비는 유모 서씨의 절규와 어린 연서강의 요란한 울음소리, 악몽과도 같았던 그때 이후, 연무강은 한 번 더 어린 연서강과 마주했었다.
아이는 혼자서 마당을 걷고 있었다. 서툰 걸음으로 열심히 아장아장 걸어가던 아이가 뭔가 문득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었다. 아마도 개미 떼라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연의향과 연의진도 어렸을 때 마당 위에서 개미 떼를 한 번 발견하면 그것을 몇 시간이고 바라봤었다고 어린 연무강은 기억하고 있었다.
딱히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나치는 길이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걸 생각도 없었다. 연무강은 다만 그때, 유모 서씨가 피를 토하듯 내질렀던 소리가 거슬렸었고 그 소리를 다시 또 듣고 싶지 않다 여겼을 뿐이었다.
아이가 눈에 걸렸던 것은 단지 그 이유에서였다.
문득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서 있는 연무강을 발견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해져, 연무강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순진하기만 한 새까만 아이의 눈동자가 마치 보석과도 같이 빛이 났었다.
연무강과 눈이 마주친 아이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연무강의 얼굴을 보자마자 유모 서씨의 비명 같은 외침이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연무강의 얼굴이 낯설어서 경계했던 것인지 이유는 모른다.
아이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져 마침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변했다.
-.......
순간, 어떤 생각에 연무강은 기분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곧 성큼성큼 아이에게 걸어가 아이의 뺨을 때렸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힘없는 아이가 땅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하얗던 아이의 볼이 금방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픈 제 뺨을 부여잡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아이의 눈물을 보며 연무강은 그제야 안심했다.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무섭고 싫어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다. 자신이 때렸기 때문에 아파서 우는 것이다. 자신이 갑자기 뺨을 때려 겁에 질려서 우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생각하며 연무강은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투명한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유모 서씨도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유모 서씨는 ‘그 때’처럼 아이를 끌어안고 연무강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하고 호들갑스럽게 자신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도련님! 제발!’
그것을 연무강은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다. 연무강은 이를 악물며 얼굴이 절로 구겨지는 걸 참았다.
하지만, 하지만.
-.......
하지만 너는 처음에 나를 보고 웃으려고 하지 않았나.
어린 연무강은 유모 서씨도, 아이도 원망스러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후에도 아이가 연무강을 보고 웃음을 지으려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이가 겁에 질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먼저 연무강이 아이를 발로 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연서강과 자신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하다. 실망할 것도 없는 게, .......또 당연한 것이다. 연무강은 지금까지도 그 기억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태상께서 자신을 의경으로 보내달라고 폐하께 간청하셨다 합니다.”
병사의 보고에 연무강은 턱을 괴었다. 연무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눈치를 살피던 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허락을 받고, 내일 떠나실 예정이랍니다.”
“.......”
보고를 들으며 연무강은 생각했다. 또 괴이한 일이다, 하고.
연서강이 죽은 게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의 확정된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여전히, 아직도 자신은 수안궁의 태상을 감시하고 있었다. 연서강이 죽었다면 더 이상 수안궁의 태상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연무강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병사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병사가 그에 얼굴에 화색을 띠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연무강은 여전히 턱을 괸 채 ‘그렇단 말이지.’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태상이 의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게 연서강과 아예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무강은 실소했다.
시체라도 찾으려고?
연서강 때문에 태상이 의경으로 떠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서령으로부터 편지도 오지 않고 있었다. ‘찾고 있습니다.’라는 짧은 내용의 편지가 마지막 편지였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어쩌면 아직까지 연서강을 찾고 있을 연서령. 그리고 내일이면 그 버러지 같은 놈을 찾기 위해 태상이 한 명 더 더해질지도 모른다. 열심히 찾아봤자 허무해질 것을, 왜 그렇게 열심인가. 그것도 그 한심한 놈을 위해.
연무강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체,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린 다음 순간 연무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체라도 찾아서 무얼 하게? 차게 빈정거리며 연무강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놈의 시체를 찾아서 다들 무얼 하고 싶어서!
순간,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과 분노에 연무강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연무강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끝까지, 짜증나는 놈 같으니라고.”
그는 자신을 보고 처음, 울상을 지었던 연서강을 떠올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만나는 사람, 열이면 열 모두에게 악담을 퍼붓고 칼을 휘둘러도 편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불쾌했다.
緇墨
수안궁 후원은 여타 후원들과 비교하여도 지나치다 싶을 만치 폐쇄적인 곳이었다.
수안궁 후원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자란 듯한 각종 수목(樹木)과 화초, 또 후원 곳곳에 암암리 솟아 있는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참으로 기이하고도 우미(優美)한 정경을 이루고 있어, 수안궁 후원을 찾은 방문자는 대부분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하였다. 타고난 풍광만 해도 그토록 홍진(紅塵)과 격리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후원 사방에 자리 잡은 정자며 그 주변을 수호하듯 심어 놓은 커다란 고목, 그리고 온갖 덩굴 식물들이 엉킨 높은 화문(花紋)담은 후원 안과 바깥을 뚜렷하게 갈라놓고 있기까지 했다.
때문에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괴리되어 있는 듯한 이 비경(秘境)에 탄성을 지르는 사람도 다수 있는 반면, 그와는 정반대로 수안궁 후원을 소름끼치도록 으스스한 곳이라 말하며 그 근처에 머무는 것조차 꺼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중 전자(前者)는 주로 나이 어린 궁아(宮娥)들이나 임관된 지 오래지 않아 아직도 궐 안을 구경하기 바쁜 풋내 나는 하급 관리 등이었고, 후자(後者)는 고위 관직에 있는 관리들이나 품계가 높은 궁녀들, 즉 황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이들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이 과연 이 경우에도 적절할까 싶기는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황궁 내 생활과 관련이 있는 관공직에 제법 오랫동안 종사한 사람들은 과연 그 말이 옳다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수안궁부터 시작하여 세상과 격리해 놓은 듯한 구조의 그 후원, 그리고 보후전까지 그 안을 떠도는 기기묘묘한 기운들. 거기다 쌍두뱀 신을 모시는 신자들과 제단에 늘 항상 피워놓는 짙은 선향냄새까지. 세상의 이치가 보일 법한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결코 인계(人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법도 했다.
.......라고, 기연조는 생각했다.
“.......”
그는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수적색(水赤色: 연분홍빛) 능라금의(綾羅錦衣)의 궁인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지금껏 하던 생각 탓인지, 그녀의 단정한 입가에 머금어져 있던 미소도 여타 궁인들의 미소와는 그 종류가 다르게 느껴졌다. 부드러우나 그 안에 단단한 밀의(密意)를 머금은 듯 결코 예사롭지 않게 보이던 그 미소에 과연 수안궁에 소속된 궁인답다고 기연조는 생각했었다.
수안궁에는 제문을 새로 편찬할 때마다 태상께 감수를 받고자 과거에 몇 번 들린 적이 있지만, 수안궁 후원까지 깊숙이 들어온 적은 그도 처음이었다. 수안궁의 본전인 보후전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수안궁 전각인 옥헌전(玉獻殿)에서도 충분히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궁의 주인인 태상 또한 구태여 타인을 안쪽까지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당시에는 그저 정무를 보고 사람을 맞이하기에는 옥헌전이 편해 그런가 싶었다. 허나 지금 이렇게 후원에 들어서고 나니 기연조는 비로소 태상의 그런 조치가 후원과 보후전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뭇사람이 즐겨 드나들었다가 그 기척이 묻기라도 한다면, 금방이라도 이 신비스럽고 폐쇄적인 공간은 깨져버릴 것이다.
“.......”
사방 정자 중 한 곳인 상춘정(想春亭)에 앉아 옅은 물안개가 서린 중앙 연못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곧 기연조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보얀 진주색 상의에 금가루가 뿌려진 듯 빛에 따라 금빛으로 반짝이는 진청 빛깔 옷을 걸친 사람이었다. 그 위에 곱게 수놓아진 수적색 매화를 보며 기연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봐도 기기묘묘한 차림새다. 이전에 뵈었을 때는 계집아이나 입을만한 꽃분홍색 옷을 입고 나타나시어서 기연조는 물론이요, 오래 뵈어 그 분의 차림새에는 어느 정도 익숙할 법도 한 기연조의 상관의 얼굴까지 굳어지게 만들었었다. 볼 때마다 이해가 가지 않은 복색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불현듯 오랜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화려한 옷일수록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설마 이 분도 그럴까, 생각하며 기연조는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태상이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랜만일세. 그래, 내게 무슨 용무지?”
인사는 됐고 어서 빨리 용건이나 말하라는 식의 행동에 기연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는 이 후원에 바깥사람들을 들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안궁에서 만나 뵐 것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사람의 이목이 적은 곳에서 그를 만나보기로 청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태상이 그리 말하는 기연조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하고 그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안궁에는 요사이 엿듣길 좋아하는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온 참이라. 그곳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자제하고 있다네.”
“비둘기, 말입니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기연조는 퍼뜩 깨달았다. 태상이 말한 ‘비둘기’는 단순히 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허나 그에 이어 떠오른 생각은 ‘왜?’였다. 수안궁을 주시하고 있는 자가 누군가인가를 떠나 그 자가 무슨 까닭으로 태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기연조가 알기로 태상과 그가 거취하고 있는 수안궁은 정치에 관해서 어떠한 입장도 취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안이한 생각일지 몰라도 수안궁은 굳이 감시해야 할 정도로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수안궁을 주시하고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변방에 나가 있는 ‘누군가’였기 때문이었다. 기연조는 마른 제 입술을 한 번 혀로 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습니다.”
기연조는 자신의 얼굴에 와 닿은 태상의 시선을 느꼈다. 사실 태상이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기연조 또한 현재 여유가 없는 상태인지라 용건이 아닌 다른 말을 더할 수도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당장에 변방으로 뛰쳐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기연조는 그 비보를 들었을 때의 처참한 기분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강아, 강아.
“의경에 가신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랜 전투에 시달린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또 적에게 언양을 빼앗겨 바닥에 떨어졌을 군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친히 행차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태상의 갈색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여기까지만 말했는데도 그는 이미 자신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다 알아챈 듯 했다. 여느 여인에도 뒤지지 않을 만치 곱디고운 피부에 그린 것처럼 수려한 용모를 지닌 남자가 그 우미(優美)한 생김에 어룰리지 않게 건조무미한 목소리를 되물었다.
“그래서?”
“.......”
기연조는 초조함을 느꼈다. 똑같은 질문이라 해도 다른 타인이 했다면 그도 이리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태상이 질문은 미묘하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을 닮은 그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그래서-.”
첩첩 심산유곡(深山幽谷)과 같은 수안궁 깊숙이 앉아 있으면서도 태상은 그 밖 세상 돌아가는 모든 모양을 알고 있다. 그런 괴담과도 같은 농담이 문득 생각났다. 맹수굴 같은 정계에서 수십 년을 굴러 너구리처럼 교활해진 노관(老官)들조차도 수안궁의 태상과는 시선을 마주치기는 꺼려했다. 맹랑하다, 꺼림칙하다, 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와 어찌 눈을 마주칠 수 있겠는가, 등등 그 이유와 변명은 무척 다양했지만 진실은 오직 하나였다.
갈색 눈.
그 갈색 눈으로 수안궁의 태상은 사람이 제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바깥에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본심과 진심을 모두 꿰뚫어 보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사람의 속사정을 모두 훤히 내려다보는 ‘사람’이라니.
그가 신과 가장 가깝다는 ‘태상’의 직책을 맡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그에 반발하는 정적이 여럿 생겼을 것이다. 별로 정치에 몸을 담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꼬마 계집애도 그랬었지. 꼭 네가 그 얄팍한 겉껍질아래 무엇을 품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 생각한 뒤, 기연조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태상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느덧 바싹 말라버린 기연조의 입술이 달싹였다.
“의경에 가시게 되면 한 사람의 소식을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누구의?”
“연태위님의 오남(五男)인 연서강입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기연조는 또 여기가 ‘비둘기’가 있다는 수안궁이 아닌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어디서 온 ‘비둘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이로울 게 없는 짐승일 게 분명했다. 특히나 자신의 이런 발언은 기씨 문중에 알려지면 안 되었다.
“연태위의?”
어금니를 악 문 다음, 기연조는 단숨에 말을 내뱉었다.
“소인의 절친한 친우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내온, 내 몸과도 같은 친우입니다. 이번에 변고를 당해 행방불며이 되었다고, 말이 나돈 그이입니다. 부디 의경에 가시게 되면 꼭 좀.”
한 번 입이 터지자 말은 물줄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잠시 말을 멈추게나.”
“......!”
그런 기연조의 말을 태상이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태상의 갑작스런 저지에 순간적으로 흠칫 놀란 기연조가, 다음 순간 콱 이를 악물고 시선을 내리깔고 흙바닥에 고정시켰다. 이끼 낀 흙 위로 배가 통통한 까만 개미가 여유롭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공연히 속이 탔다. 자신도 저 것과 매한가지로 똑같이 다리 달려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짐승이건만, 어째서 여기 이곳에 붙잡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마음 위로 태상의 서늘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연태위와 자네의 기씨 문중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소문이 자자하던데.”
태상을 배알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당연히 들을 거라 예상했던 질문이 비로소 날아와서 기연조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뿐, 그의 입은 곧바로 열렸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데 계기야 어쨌든 가문의 사이 따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질지도 모를 말이지만, 이게 바로 진실이었다.
너무도 당연하고 정의로운 말이라 어찌 들으면 우습고 가소로이 들리기까지 하는 진실이었다. 기연조의 그 말을 들은 여타사람은 코웃음을 쳤으며, 일가친척들은 모두 말에 담긴 속마음이 말과 반대되는 것이라 확신하고 웃음을 터뜨렸었다. 제정신이 박힌 기가(家)의 도련님이라면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연조 또한 잘 알았다.
하지만-.
이미 친해져 버린 것을 어찌 하겠는가.
“.......걱정.”
기연조의 말을 태상이 한가로이 따라 말했다.
자신이 하는 말에는 관심 한 터럭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비꼬는 듯한 말투인지라 기연조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무얼 생각하고 있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듯도 했기 때문이었다. 곧 태상이 꺼낸 말로 기연조는 제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 걱정이 된다면 차라리 나와 함께 가세. 나는 연서강이란 이가 누구인지 참말로 모르겠으니, 폐하께 여쭈어 나와 함께 의경으로 가지 않겠나. 마침 제문 편집도 모두 마쳤고, 가을이 오기 전까지 자네도 한가할 테니 나와 함께 가지.”
“.......”
그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암담해져서 기연조는 낯빛을 흐렸다. 그 와중에도 태상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게다가 연서강이란 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나보다는 친우라는 자네 쪽이 그 이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이 좀 더 낫지 않겠는가? 또 만약 그 연서강이란 자가 여태 살아있어 자네를 보게 된다면 그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자신을 걱정해서 변방까지 와 준 것이 너무 기쁘고 흐뭇하여 펑펑 울지도 모르지 않나. 내가 그 연서강이라면 매우 감격하여 없던 힘도 솟아나겠네.”
태상의 말에서 절로 그러할 연서강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기연조는 입술을 말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아마도 태상의 말대로 눈물을 글썽이겠지, 무척 기뻐하면서. 태상의 말대로 여태 살아있다면 말이다.
사실은 자신도 태상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제문 편집도, 감수도 모두 끝이 났다. 이번 분기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이 났으니 당분간은 자신 한 몸이 없다 해도 그리 바쁠 일은 없을 것이다. 휴일도 없이 일을 했으니 친우의 생사 여부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특별 휴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허나.
기연조는 바짝바짝 마르는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놓고는 간신히 대답했다.
“.......저는 아직 남은 일이 많아.”
“아아.”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태상이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소리를 흘리며 몸을 휙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예의 그 화려한 수가 새겨진 소매를 흔들며 예사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차가운 질책처럼도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자네는 언제나 ‘일’이 많았었지.”
그 한 마디의 말이 기연조는 진심으로 섬뜩했다. 대체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모르고 하는 말인지. 그의 심중에 담긴 게 정녕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기연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다만 눈앞의 남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당연히- 그 연서강이란 자보다 더 중할 테고.”
이어진 또 한 마디의 말이 기연조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여전히 기연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상의 말이 모두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처럼 무어라 둘러댈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어설픈 변명을 했다간 더 심하고 얄궂은 말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았다.
해서 기연조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기방을 제 집 드나들 법한, 한낱 파락호 같은 남자라고 백관들이 폄하하면서도 그들이 정작 태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점 때문일 터. 기연조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소중한 친우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기연조를 빤히 쳐다보던 태상은 이내 가벼운 숨을 내뱉었다. ‘그렇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가 이내 혀를 차며 방금보다 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그 놈은 어찌된 영문인지.’하고 시작된 말은 기연조로선 사사롭게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의경에 가면 소식 좀 알려 달라 부탁하는 이가 단 한 명뿐이라니, 평소에 인간관계가 어땠는지 안 봐도 눈에 선하구만.”
“.......예?”
그 말은 분명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해서 기연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분은 분명 연서강이란 자를 알지 못한다 말씀하지 않으셨나. 허나 방금 전의 그 말씀은-. 기연조는 생각 끝에 답을 찾아냈다.
“혹여 태상께서는......, 연서강을 알고 계십니까?”
태상이 비릿한 미소를 띠우며 기연조를 보았다.
“고 날카로운 고목 같은 연태위도, 서슬 푸른 호랑이 같은 연위사도, 말 많은 왜가리 같은 연장군과도 닮은 구석 하나 없는 맹한 연서강이라면 알다마다.”
그리고 심각한 척 슬쩍 한 쪽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 아래에 있는 자식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역시 닮지 않았을 듯 하고.’ 그 뒤에도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고 하는 태상의 말 중간에 무례하게도 기연조가 끼어들었다. ‘잠, 잠시 끼어들어 여쭈겠습니다.’
“연서강을 아신다고 하셨습니까?”
“알다마다.”
“허나 아까는.......”
기연조의 말에 태상이 미간을 슬쩍 찡그리고 보란 듯 제 머리를 손톱 끝으로 두어 번 톡톡 두드려 보았다.
“지금 생각났네.”
그 빤빤한 태도를 보자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가 제 입으로 한 말 그대로 ‘잠시 잊고’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리라, 그저.......
‘나를 시험한 것인가.’
연서강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잡아떼면 자신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태상을 바로 볼 낯이 없어지고, 수치심에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허나 그것도 잠시, 기연조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태상께서는, 하며 겨우 말을 꺼내자 태상이 음?, 하고 대꾸하기라도 하듯이 턱 끝을 조금 들었다. 기연조가 말을 이었다.
“연서강 그 이와는 어찌 아는 사이십니까?”
그 물음에 태상이 눈썹을 구기고 팔짱을 끼더니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말로 일일이 하자면 무척 긴데.’하고 그가 중얼거리더니 기연조를 곁눈으로 힐끗 보았다.
평소 같으면 난감해하는 윗사람에게 굳이 캐어물을 정도로 기연조는 무례한 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마음속에 짐작 가는 일 하나가 있어 그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 저잣거리에서 처음 연서강을 만나 보셨는지요?”
일전에 연서강이 자신에게 말한 것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연두색과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사이비를 만나 한참을 붙들려 있다 힘들게 빠져 나왔었다고. 그런데 그 사이비의 눈이 갈색이었다고.
그 말을 듣고 기연조는 불길함을 느꼈었다. 그가 말한 인상착의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똑 닮았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태상일까. 궐 밖으로 자주 외출하신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연서강이 태상과 만났을까 싶었다. 게다가 사이비라고 칭하지도 않았던가. 태상이 무슨 용무로 연서강을 붙잡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서 묻어두고 있었던 예감이었다.
허나 그 설마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 연서강이 네게 그 일을 뭐라고 하며 털어놓던가?”
기연조의 말에 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이비’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서로 좋은 꼴은 못 볼 것을 직감한 기연조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갈색 눈을 한 사람을 만났다고.’
그러나 그런 기연조의 말을 태상은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기연조를 훑어보던 그가 ‘그래, 별 말 하지 않았겠지. 고작 해야 사이비가 아니겠는가.’하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기연조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반응을 보니 태상이 연서강을 안다는 말은 정말인 듯 보였다. 어째서, 좀 전 태상이 한 말-자네가 이런 변방까지 와 준 게 너무 좋아서 펑펑 울지도 모르지-에서 가감 없이 딱 연서강의 모습이 연상되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태상의 감이 좋아서가 아니라 태상도 만나 보았던 사람이기에 그리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연조는 잠깐 멍해있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의경으로 가시는 것도.”
“전쟁터에 나자빠져 있을 고 맹한 놈을 주우러 간다네.”
태상의 즉답에 기연조의 입이 딱, 벌어졌다. 태상의 대답이 기가 막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태, 태상경(太常卿)께오선 연서강이 .......살아있다고 믿으십니까?”
황궐에는 이미 연태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연서강이 죽었을 거라는 말이 퍼진지 오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연태위에게 일어난 비극인지라 궐 어디에 가도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궐에 다니는 사람의 수만큼 많고 많은 말들이 기연조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말들은 죄다 부정적이고 단정적이었으며, 회의적이었다. 공연히 자식만 죽였구나, 자신의 상관이 그리 혀를 차며 말했을 때 기연조는 차마 얼굴을 펴지 못했다.
슬펐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말만 해서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는 걸 말렸건만, 하는 원망마저 들었을 무렵 그는 태상이 의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하다못해 시신이라도, 그렇지 못한다면 시신의 조각만이라도, 또 그것도 여의치 못하다면 그의 옷가지만이라도 건져 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마도 연씨 무중에선 그를 찾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터이니.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연서강이.......”
기연조는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태상이 입을 열었다. 이미 죽었다고 소식이 파다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사람답지 않게, 태상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물론이지. 살아있는 게 당연하네. 그러니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분명히 어디 자빠져 있는 걸 찾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마지막 말을 하며 태상은 제 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하고 덧붙이는 말에는 의구심과 확신이 함께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찌해서 그런 목소리가 말하는지 기연조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그리 말하는 자가 ‘태상’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말을 해도 뭇사람들이 하는 위로와는 무게가 달랐다. ‘신’과 가장 가깝다 여겨지는 자의 말이라 그런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기연조는 그 말에 무작정 매달리고 싶었다. 그것이 현재의 그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태상께서 그리 예감하신다면, 소인이 그 말을 믿겠습니다.”
이러니 인간에게는 ‘신’도 ‘종교’도 필요한 것이리라.
연서강이 살아있다고 두 눈으로 확인을 한 것도 아니건만, 그의 마음은 수안궁에 들어오기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뭇사람의 백 마디의 말이 남긴 생채기가 태상이 심드렁하게 던진 한 마디 말에 모조리 부드러이 뒤덮이는 듯 했다.
더욱이 태상이 연서강을 개인적으로 안다고까지 하지 않았나. 그와 어찌 알게 된 사이인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의경에 있다는 연서강의 여자 형제보다는 차라리 태상 쪽이 연서강을 더 열심히 찾아 줄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연서강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기연조는 그 연씨 문중이 온 힘을 다해 연서강을 찾고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씨 문중이 연서강을 어떻게 대했는지 어렸을 때부터 두 눈으로 확인한 덕택이었다.
기연조의 말을 들은 갈색 눈의 태상이 싱긋 웃어 보였다.
“예감이 아니라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제 머리 옆을 톡톡 쳤다.
“느낌이지.”
“.......”
그 대답은 차라리 안 하는 편이 기연조의 신앙심에 좋을 뻔 했다.
“저 사람, 나빠요.”
그 말에 태상은 처음에 방문했을 때와 똑같이 궁인의 안내를 받아 후원을 나가는 남자-기연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후원에 있는 사방 정자는 2층 전각과 그 높이가 엇비슷해, 정자에 들어 앉아 있으면 정원과 그 입구를 내려다보는 게 가능했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연못과 정원의 정경들이 고목나무가 우거진 사방과 어울려 썩 재미나는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지금은 한가로이 노닐 때에만 사용되는 이 사방 정자가 건국 초기에는 귀족들이 ‘신자’들을 바닥에 주루룩 세워놓은 뒤, 사방에서 겁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랬기에 수안궁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사용하는 것일 테지만.
“그러냐?”
하고 웃으며 태상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홍이라고 했다. 얼빠진 듯 보이는 순진한 어떤 놈이 홍월정이란 곳에서 주워 그리 부른다 말을 전해 주었다. 어리고 고운 여자애에게 붙이는 이름 치고는 참 별 생각 없이 막 지었다, 하고 태상은 여겼다. 자신이라면 작명서를 산처럼 쌓아놓고 보름 내도록 고민하고 고민해서 지어줄 터인데.
허나 여자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예쁘든, 예쁘지 않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이 불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기에 그런 것일 테지. 그것을 생각하면 우울해져서 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종종 땋아져 있는 여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는 홍이가 불쑥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녹우당 오라버니를 슬프게 만들 테니까.”
홍이의 말에 태상은 차마 웃지 못해 ‘그럴 테지.’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홍이의 말이 맞았다. 아마도 그는 그럴 것이다. 저 치는 사람 자체가 악인인 것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연서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가치관이 비록 올곧고 발라 여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하더라도, 연서강 개인에게는 불행이고 참극이 일어날 씨앗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에 연서강에게서 들었던 말들을 찬찬히 되새김질 하며 태상은 실소했다. ‘어쩌면 그렇게 신에게 경연을 올리는 자로 딱 알맞은지.’ 신이 진실로 어여삐 여겨 특별히 신경 써서 연서강을 되돌려 보낸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태상이 알고 있는 신이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현재 연서강이 놓여 있는 위치를 둘러보면 그랬다. 주변이 온통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저 사람이더냐, 연서강을 살리고자 목숨을 바친 기특한 친우가.”
옆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태상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참으로 형편없는 인간관계다. 절로 끌끌 혀가 차졌다. 스무 해가 넘도록 친구라곤 오직 한 명뿐이고, 그 가족들은 비보(悲報)를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다니.
사망 확정과 다름없는 소식을 듣고 울어주는 존재가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두 사람 뿐이다. 홍이와 기연조. 한 사람은 함께 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애이고, 또 한 사람은 함께 한 시간은 오래 되었으나 원수와 다름없는 가문의 남자. 참으로 기이한 인연들로만 가득 찬 인간관계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지.”
태상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미묘한 행동을 취했던 사람 한 명이 더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며칠째 수안궁에 듣길 좋아하는 ‘비둘기’를 풀어놓은 장본인이었다. ‘비둘기’는 요새 강화된 수안궁 경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수다스럽고 끼어들기 잘 하는 궁인들이나 낭관들이라면 모를까, 경비 쪽으로 수를 쓸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수안궁을 주시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태상은 그 이유가 연서강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안개가 덮인 연못 위의 수련을 바라보며 그는 잠깐 침묵했다.
사실 그는 어제 저녁 해시(亥時: 밤 아홉시부터 열한 시)에 ‘비줄기’를 푼 그 장본인을 만났었다.
“.......”
연서강의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하등 관심 없다는 듯 잠잠했던 연씨 문중이었지만, 태상이라는 존재가 몸소 나서서 의경으로 나간다고 하니 그 때만큼은 잠자코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따. 아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나 가문의 체면만은 중했던지, 가주인 연무의가 작성한 서신을 그 첫째 아들인 연무강이 태상에게 직접 전해주러 수안궁을 방문했었던 것이다.
편지를 건네받으며 태상은 넌지시 모르는 척 연무강에게 물어 보았었다.
-요새 수안궁에 비둘기가 참으로 많은데 위사께서 해결해주지 않겠나?
그에 연무강은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비둘기가 많다 해도 수안궁에 해를 끼치는 게 없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으니 내버려 두면 비둘기도 곧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뻔뻔한 그의 대답에 태상은 한 쪽 눈썹을 구기며 미소를 지었엇다.
연태위를 똑 닮은 연무강은 여전히 독기어린 호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호랑이처럼 몸채가 우락부락하거나 눈이 크고 둥글며 그 빛이 형형하여 그렇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적이고 사람을 휘어잡을 듯 묵직하고 매서운 기운이 네발 맹수의 그것과 꼭 닮았다는 것이다.
실력이 뛰어난 무장이라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되어질지도 모르나 태상의 의견은 달랐다. 그것은 숱한 무장들이 그러하듯 혹독한 훈련과 잔혹한 경험으로 절로 지니게 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완성된 것처럼 연무강은 원래 그랬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주어진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연무강은 아마도 ‘지금’과 똑같은 인간이 될 것이다. 태상은 연무강이 아직 어렸을 때 그를 처음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타고 나기를 인간이 아닌 맹수 새끼로 타고 났다고.
연무강이 전해준 연무의의 서신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변방에 자신의 자식들이 있으니 태상께서 자신의 모자란 자식들을 잘 좀 다독여주면 감사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연서강에 대한 이야기가 약간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부친의 잔잔한 애정을 보여주기는커녕 그저 의례적인 인사치레로만 가득한 편지였던지라, 태상은 서간을 모두 읽고 끌끌 혀를 찼다.
그리고 편지를 배달해준 연무강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었다.
-동생이 전쟁터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자네도 마음이 꽤 심란하겠군.
그것은 제 피붙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아무 동요가 없어 보였던 연씨 문중을 비꼬는 말이었다. 또 눈앞의 남자를 겨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랫동안 한 지붕 밑에서 살았을 식구인데, 서신을 전하는 연무강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돌로 깎아 만든 게 아니냐고 소름끼쳐 할만도 했다.
그러나 말을 덧붙이면서도 태상은 눈앞의 남자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제 부친이 그랬던 것 마냥 ‘어찌 심란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제 자식의 일인데. 다만 제가 집안의 큰 어른인지라. 식솔들의 동요를 생각하여 경거망동을 자제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 같은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연무강이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지만 않았더라면.
-심란.......?
그 목소리에 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음?’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굳은 돌바닥에 단단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몇 겹이나 되는 회반죽이라도 바른 듯 견고하고 딱딱해 보이는 남자에게서 ‘퐁’ 파문이 인 게 느껴져서였다.
태상이 아는 연무강은 그러했다. 차갑고 냉정하며 무심했다. 제 부친이 연무의가 아니랄까봐 항상 그는 엄격했고, 타인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지독한 성격이었다. 형제인 연무진도 제 형이 부른다는 소리를 들으면 죽을상을 지으며 가급적 멀리 길을 돌아간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냉혹하고 무참하기 그지없어 주변 사람들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겠다 혀를 차며 말하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괜히 저 남자가 위사직을 맡은 뒤 백의궁이 철벽방비를 자랑하게 된 게 아니라고.
해서 방금 전의 느낌은 착각이었나 싶어 태상은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전쟁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
태상은 순간 자신이 실언이라도 했나 싶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연무강이 자신을 조용히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주위가 서늘해져 태상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연무강의 눈은 완연한 검정색으로 어떤 빛도, 동요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감정도 없었다.
허나 그 눈에서 태상은 사납고 난폭한 충동을 읽어냈다. 금방이라도 그가 허리춤에 맨 검을 빼어들고 자신을 찌를 것만 같았다. 상대방에 대한 동정은커녕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지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살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연무강이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을 질겅질겅 씹어 내뱉는 듯 차가운 대답이었다.
-명줄을 재촉한 건 바로 그 녀석입니다. 심란할 것도 없습니다. 태상경.
방금 전까지 자신을 ‘무생물’ 취급을 해놓고선 금세 넉살 좋게 ‘경’을 붙여 예우해주는 그를 보며 태상은 서늘하게 웃었다. 연태위는 잘도 이런 걸 아들이랍시고 데리고 있나 보군. 차라리 변덕 심하고 마음이 옹졸한 간신배를 아래에 두는 것이 연무강의 충성을 받는 것 보다 안심이 되겠다 싶었다. 간혹 사람들이 연태위의 막내 여동생더러 ‘짐승’같다고 일컬었지만 오히려 짐승은 이쪽이었다.
이어 연무강이 말했다.
-그리고 태상의 말씀처럼 죽은 게 확실한 놈이니, 괜히 태상께서 의경에 가셔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
자신이 의경에 가는 이유가 ‘연서강’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자신이 의경에 가는 것이 연서강 때문이라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나 최근 수안궁에 ‘비둘기’가 들락날락한 것은 연서강과 관련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태상은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이 어둡고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언뜻 ‘내가 왜 이런 놈을 상대하고 있나.’하는 무례한 생각까지 비춰지고 있어서 태상을 고소를 머금었다. 그 무례함을 꾸짖고 싶어져 그는 돌연 입을 열었다.
-해서, ‘비둘기’가 사라진다고 했나 보군. 연서강 때문에 수안궁에 날아든 ‘비둘기’라. 그가 죽었으니 사라지는 건가?
남자의 낯이 미미하게 굳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수안궁에 ‘비둘기’가 있는 건가? 자네는 이미 연서강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진작 ‘비둘기’는 사라졌어야 되지 않은가?
-.......
태상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심자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정말 연서강이 죽었으면 좋겠는가?
“태상님.......”
문득,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기척이 느껴져 태상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돌아보니 홍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매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작은 손이 허옇게 변색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떠오른 칙칙한 음울함이 소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태상은 홍이와 눈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괜찮다. 괜찮고말고. 내가 꼭 그 놈을 찾아 네 앞에 데려다주마. 백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천 번이고 죽지 않았다 이야기 해주마.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꼭, 꼭 살아서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네게 약조하지 않았느냐. 사람과의 약속을 하찮게 여길 위인이더냐, 그놈이. 그러니 걱정 마렴.”
그 말에 홍이가 입술을 말았다. 초조한 기색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렸고, 그것은 뒤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궐 안의 흉흉한 소문에 요새 내도록 우울한 제 ‘가족’이 걱정되는 것은 짐승도 마찬가지라, 울음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니 과연 고양이 아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아리야, 아리.’하고 아이가 부르자 평소와 달리 고양이는 답삭 그 조그만 품에 안겼다.
“.......내가 꼭 그를 데리고 오마.”
아이가 말끄러미 태상을 응시했다. 믿지 못하는 듯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낯이지만, 믿을 구석이 또 다른 데가 없어 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은 홍이의 마음이 여전히 묵직한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살아 숨 쉴 날이 몇 날인가 세면 셀 수도 있는 불쌍한 생명이건만, 그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지 못하고 걱정만 끼치는 그 놈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만나자마자 그토록 당부했거늘 어째 홍이를 걱정시키느냐고 한 대 패고 싶었다.
.......패도 될 상태라면 말이다.
아리를 쓰다듬으며 제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는 홍이를 보며 태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게 된 지 이제야 하루 지났다. 생각 같아선 홍이를 데리고 의경까지 가고 싶지만, 그 곳에서 그녀가 무슨 흉한 것을 보게 될지 몰라 수안궁에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연서강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살아 있고말고.”
뭇사람이 들으면 망령된 소망이라 치부할 말을 태상은 태연히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게 당연하다. 홍이와 같은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자’는 몰라도, ‘되돌아 온자’에 한해서는 알 수 있었다. 본디 ‘태상’이란 자의 임무는 ‘경연에 올리는 자’가 경연을 올바로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이었으니까. 따라서 ‘태상’은 경연을 올리는 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태상은 연서강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가 무슨 몰골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멀쩡한 꼴로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그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서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하고 기가 약해 보이는 청년이 해사하게 웃으며 자신만 믿겠다고 말했던.
태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의 가지가 우거져 나뭇잎 사이로 겨우 손바닥만 한 하늘이 보였다. 그 푸른 옹달샘 같은 하늘이 너무도 깊고도 그윽하여 그 뜻을 미루어 추측할 수 없었다. 태상은 탄식했다.
“.......뱀 신은 정말로 신나겠구나, ‘마지막’으로 하필 그런 놈이 뽑혀서.”
질문을 들은 연무강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안을 밝히는 호롱불이 일렁였다. 벽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불빛에 따라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그 그림자만큼, 연무강의 검은 눈동자도 흔들렸다.
언제까지고 꾹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놈은....... 연씨 문중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러나 마지막 말은 확실히 맺지 못했다.
* *
위급한 전시(戰時)에 맞지 않게 의경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그래봤자 한창 전투 중에 있었기 때문에, 또 고립무원 상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타 다른 곳처럼 성대한 잔치는 열리지 않았다. 손님을 맞이할 거리를 꽃과 비단으로 단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예를 갖춰 병사들은 평소에 자주 쓰던 궂고 험한 말을 하지 않았고, 무장들은 복장을 바로 갖추고 주변 경비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리고 귀한 손님을 위한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맛난 식사를 준비하게 하인들에게 시켰다.
사실 그 외에 더 신경 쓸 정신머리가 의경의 책임자인 연서령에게는 없었다.
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뒤로 수습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 동안 소비된 군량미나 폭약 등을 주변 읍에서부터 조달받아야 했고, 서회에서 온 연의향에게 현재 상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도 해야 했다. 이어 아직도 적들의 손에 있는 언양을 수복할 작전도 짜야 했다. 그리고 짬짬이-실은 이 일만 하고 싶었다- 행방불명된 제 오라비인 연서강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세심함과 참을성이 부족한 연서령에게는 무척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따. 거기다 한 번에 하나를 제대로 해치울 시간마저도 부족했다. 하나의 일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일이 그녀를 찾아왔고, 그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는 뒤에는 언제나 행방불명된 연서강에 대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여기가 의경이 아니라 본가의 제 방이었다면 연서령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불에 파묻힌 채 엉엉 울고만 싶었다. 어린 나이에 벼슬에 오르고 그 뒤, 한 번도 안 한 짓이긴 하지만 고향의 이불이 현재 연서령에게는 무척 절실했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불고 할 시간에 오라버니가 죽을 지도 모른다.
“.......”
초조해하고 안달해 하는 그녀를 연의향이 수차례나 타이르고 위로했지만, 연의향이 사라지고 나면 여전한 걱정과 조바심이 그녀를 덮쳤다. 차가운 손이 덜덜 떨리고 눈앞은 제대로 보이는 게 없어졌다. 줄곧 그런 상태를 일만은 똑바로,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내고 있었다.
해서 태상이 이곳 의경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연서령은 그저 입술만 깨물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어떻게 그를 맞이해 예를 갖춰야 할지 기본적인 사항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보고 외웠던 예법일 텐데. 이제는 벼슬에 오른 지 꽤 되어 식사하는 방법만큼 익숙한 그것일 텐데.
그런 그녀를 나무라며 연의향은 자신이 태상을 맞이하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태상이 도착할 때까지 그 바들바들 떠는 머릿속이라도 좀 정리하라고 일침 했다. 허나 아무리 날카롭게 쏘아붙이려 해도 결국 연의향에게 있어 연서령은 한없이 모자란 동생이라,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상이 오시면 연서강에 대해 여쭤보도록 하자.’라 연서령을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서령은 연의향의 그 말을 떠올리자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렇지만 여쭤본다고 해서 어찌할 방도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그녀는 회의실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지도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연서강이 행방불명된 장소를 원심(圓心)삼아 붉은 색으로 커다랗게 원이 그러져 있었다. 행방불명된 연서강이 있을 만하다고 예상된 곳으로, 시간이 없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찾아본 곳이었다. 벌써 며칠 째 찾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보통은 행방불명 된지 이틀 후면 사망했다고 보기 때문에, 일부러 날짜를 세고 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인데- 제아무리 ‘태상’이라도 별 도리가 있을 리가.
고개를 숙이니 그녀의 눈에 붕대가 감긴 자신의 허벅지가 들어왔다. 연서강을 잃어버릴 당시에 화살에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다행스럽게도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흉은 남게 될 것이라고 군의관에게 들었다. 흉이 남게 될 것을 걱정했으면 애초에 무장의 길을 걷지도 않았을 것이다. 흉이 남든 말든 상관없었다. 다시 제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연서강의 어깨에 박혔던 화살은.
연서령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원래는, ....... 거기까지 생각하며 그녀는 붕대가 감긴 자리를 쥐었다. 세게 움켜쥐자 얇은 천이 투둑, 소리 내며 끊어졌다. 붕대에 피가 배어나와 생긴 갈색 자국을 응시하며 연서령은 이를 으득 갈았다.
원래는 내가 맞을 화살이었는데......!
제 부친도 그리 경고했고, 언니인 연의향도 똑같은 말로 타일렀었다. 서령이, 너는 충분히 빠져 나올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해도 네 부대, 네 부하들까지 그 순간을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기량이 되는 건 아니라고. 네가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똑같이 네 부대 또한 그런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귀에 박히도록 들어서 이제는 충분히 알겠다고 느낀 말이건만, 어째서 그때 당시에는 까맣게 잊고 그런 경솔한 짓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인 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서강은 연서령이 맞았어야 할 화살을 대신 어깨에 맞고 전쟁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무리 자책해봤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연서강이 죽어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란 사실이었다.
의경의 중장군이 이런 상태에 놓이니 자연히 언양 탈환도 늦어지게 되었다.
의경이 적들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서회의 연의향이 부대를 끌고 의경에 당도했다. 그녀는 연서령의 부상을 걱정하며 의경군을 정상적으로 하루 빨리 운영해 주변 잔당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연서령에게 말했다. 그러나 혼란과 경악에 빠진 연서령은 먼저 연서강부터 찾겠노라 말썽을 부렸다.
그런 연서령에게 연의향은 주변 잔당들을 먼저 뿌리 뽑아야 연서강도 안전할 수 있지 않겠냐고 소리쳤었다. 연서강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몸을 피하기 쉽게 주변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라고. 그리고 후에 찾아봐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연서령도 그에 동의하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부상은? 어깨에 맞은 화살이 자신의 허벅지와 달리 큰 상처라면 어찌 되는가. 그리고 이미 적들에게 발견된 후라면?
연의향의 말을 들어도 걱정과 불안이 가시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언양 탈환이 늦어지고 있는 것도, 연의향이 의경의 상태까지도 살피며 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연서령은 어떻게 해야 자신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좀체 알 수 없었다.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래, 연중장군께서 시름이 너무도 깊으시다고?”
어느덧 태상 일행이 도착했는지 바깥이 말소리와 신발소리로 시끄러웠다. 그것도 잠시,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바로 연의향과 군사들, 호위 무사들과 몇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연서령은 어둑하고 침울한 낯을 들어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고운 황접(黃蝶)이 옷에 내려앉은 듯 화려한 나비 문양이 새겨진 황색 옷을 입은 사람이 거기 있었다. 수도에서부터 의경까지 길고 긴 여행길에 올랐던 사람답지 않게 그는 몹시도 맑고 해사한 낯을 하고 있었다. 연서령도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낯이 익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나, 출정식 때 봤음직한 얼굴이었다.
“태상경.”
연서령은 금세 그를 알아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가 시선을 내려 연서령의 허벅지를 보며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되었네.’하고 손을 내저었다. 연의향도 곧바로 태상의 시선이 머문 곳을 보고 ‘서령아.’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붕대엔 벌어진 상처에서 벌건 선혈이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 쯧, 혀를 차며 연의향은 사람을 불러 연서령의 붕대를 다시 새로 매도록 시켰다.
“.......해서.”
연서령의 붕대가 새 것으로 갈아지는 것을 보며 태상은 연의향이 준비해준 자리에 앉았다. 그가 팔짱을 끼고 연서령을 응시했다.
“폐하께는 축문을 읊어준다, 하늘에 제를 올려준다, 환자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준다, 착하고 귀여운 말을 이렇게 저렇게 써서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별안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연의향이 의아한 눈으로 태상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상은 말을 이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연서령에게 가 꽂혀있었다. 마치 이곳에 그녀 밖에 없다는 식으로. 연서령 또한 의아하기는 매한 가지라 그년느 여전히 흐린 낯으로 태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태상이 돌연 싱긋 웃었다.
“사실 모든 게 핑계에 불과하다네.”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연의향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연서령이야 잠깐 얼이 빠져 있으니 여전히 태상이 하는 말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하지만, 연의향은 달랐다. 빠르게 말뜻을 파악한 그녀는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태상을 향해 입을 물었다.
“그 말씀은, 여기 의경에 오신 데에는 그 외 다른 뜻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연의향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연서령도 태상의 말뜻을 깨달았다. 태상이 한가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뭐 그렇게 되었네.’하고 대답했다. 연의향은 ‘그럼 대체?’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녀로서는 태상이 이곳으로 올 만한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만 연서령만이 ‘설마.’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녀는 태상의 갈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이 방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태상은 자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이유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만약에 이유가 있어 저렇게 자신을 본 거라면, 들어올 때 ‘연중장군’의 시름이 깊은 이유를 들었다면, 그렇다면 저 ‘다른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연서령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연서강.”
예사롭게 태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단한 대답에 연서령의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반짝, 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잠겼던 오만 가지의 생각이 한꺼번에 터져 나왓따.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서강을.”
허벅지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라 잠깐 자세가 흔들렸지만 무장답게 그녀는 곧 중심을 잡았다. 아직 채 다 여미지 못한 붕대가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그 붕대의 끝을 부여잡으며 ‘장군님!’하고 군의원이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연서령은 듣지 못했다.
“연서강을 찾으러.......”
이상했다.
자신이 요 며칠 간 한계에 몰려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본디 불가사의한 힘을 믿지 않았고, 국교인 수후교도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 응당 자신도 그래야 하나 보다 여겼을 뿐 한 번도 진심으로 신께 뭔가를 기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신이란 것은 이럴 때 비로소 찾는 것이라는 것을.
한 번도 신에게 기도해본 적이 없어서 기도 할 때가 되어도 깨닫지 못했다. 하물며 언니인 연의향이 ‘태상’운운 했을 때조차도. 아무리 태상이라지만 그가 뭘 할 수 있을가, 회의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연서령은 태상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령아?’하고 옆에서 연의향이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그에 아무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태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태상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태상이 여전히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연서령을 보고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임을 연서령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라면 연서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망령된 믿음이 갑자기 들었다.
연서령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연서강을 찾아주십시오, 태상경.”
무뚝뚝한 그 목소리에는 한 번도 신께 빌어본 적 없는 인간의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태상이 그녀의 서투른 기도에 응답했다.
“그래. 그러려고 왔으니까.”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내게 알려다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말이다.”
그제야 연서령은 연의향에게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던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