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37)
  •  9.

     뒤로 적들이 다섯 여섯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연서강이 느낀 것을 말을 모는 사람이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요.’하고 전장을 한참 등지고 나서야 병사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병사의 목소리에도 달리는 말과 같이 힘든 숨소리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눈앞에 군사용으로 건축된 방벽과 함께 거대한 관문이 나타났다. 바로 의경의 방벽이었다. 동시에 뒤에서 바짝 따라붙던 적들이 주춤했다. 방벽 위에 누각형태로 지어진 건물에 의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의 말을 발견했는지 누각 위에 서 있던 인영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방벽 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들었다. 인영이 손을 내리자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연서강이 타고 있는 말 뒤를 향했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한 용도였는지 화살은 뒤의 적들에게 향하지 않고 사이의 땅 위에 타다닥, 꽂혔다. 땅 위에 내리 꽂힌 화살들은 적의 전진을 방해하는 목조 구조물처럼 보였다.

     마침내 적들이 추적을 포기했다. 적들이 물러가자 굳게 닫혀 있던 의경의 관문이 열렸다. 관문이 열리는 걸 보고나서야 연서강은 끝났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쉴 수 있엇다.

     허나, 사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누각 위에서 화살을 쏘라 명한 자가 바로 의경을 방비하는 중장군 연서령이었다. 관문이 닫히자 병사들이 연서강이 타고 있는 말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런 병사들 사이에서 연서령이 걸어 나왔다.

     붉은 술이 달린 잿빛 갑옷을 입은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몸집이 주변 병사들보다 눈에 뜨이게 작았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만큼은 결코 나이 어린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연서령의 얼굴에서는 중장군이란 직위에 걸맞은 냉엄함이 비쳤다.

     연서령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제까지 말을 몰았던 기마병이 말 등위에서 내렸다. 연서강 또한 그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갔다.

     “!”

     연서령이 연서강을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기에 있나, 놀라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와작 구겨졌다. 연서강이 어떻게 여이게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왜 여기에 있는지 그 불쾌함이 더 큰 듯 했다.

     “.......언니가 내게 급히 전할 것이라도 있나 싶었더니.”

     그 목소리에는 말을 타고 온 사람이 연서강이었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한 그녀의 심정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었다. 또 언니 연의향에 대한 서운함까지.

     서회에서 자신을 처음 봤을 대 연의향이 보인 반응과 썩 다르지 않아 연서강은 쓴웃음을 삼켰다. 하긴 이제까지 집안에서 연서령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다. 여동생이라지만, 위의 형님과 누님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어쩐 일이지?”

     연서령은 곧바로 여기까지 말을 몰고 온 기마병을 보며 물었다. 그 목소리가 벨 듯이 뾰족했다. 집에서도 그녀는 곧잘 그런 말투로 연서강에게 쏘아붙이곤 했다. 그래서 연서강은 여동생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서회에서 온 병사는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연서령의 기분이 혹여 불쾌한가 싶어, 기마병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장군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기마병이 그녀에게 보고했다. 연서령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일그러진다. ‘전령?’ 그리고 연서강을 흘깃 보았다. 그녀가 어째서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겼는지 연서강은 그 눈빛에서 이유를 찾았다.

     언니인, 연의향으로부터 온 전령이 연서강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의향 누님이 전하라 하시더구나.”

     얌전히 말하며 연서강은 품속에서 밀서를 꺼내 연서령에게 건넸다. 연서령이 밀서를 거칠게 낚아채며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이내 밀서를 봉한 비단 주머니를 풀었다.

     한 장의 편지가 주머니 속에서 나왔다. 적혀진 내용이 짧아 읽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는지 연서령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먹물로 쓰인 글들이 여러 번 본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다.

     “맙소사!”

     연서령이 결국 탄식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기가 막힌다며 그녀는 편지를 구겼다.

     “언니가 날 버리기로 작정했나 보구나!”

     “아무리 비꼬기 위해서라도 네 위치에. 그것도 이 상황에서는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서령아.”

     나직하게 타이르며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연서령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말 중 ‘버리기로 작정’이란 대목에서 병사들이 크게 술렁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 의경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휘하는 장군이 그런 말을 한탄하듯 내뱉으면 아래 병사들은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서회에 있는 대장군이 의경을 저버리기로 했다는 것으로. 연서령은 다만 ‘연서강’이 도움이 될 거라 의경으로 보낸 연의향의 전언을 ‘잘도!’하고 비꼰 것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연서강의 말에 연서령이 폭소를 터뜨렸다.

     “비꼬고 있다는 건 알아서 다행이네.”

     돌변해서 명랑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도통 상황을 알 수가 없는지 병사들이 의아한 시선만 서로 주고받았다. 나직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들은 연서강이 누구인지, 그가 연서령과 무슨 관련인지, 또 서회에서 왜 연서강을 보냈는지 아직 몰랐다. 그저 자신들 상관의 반응을 보며 어찌된 일인지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연서강과 연서령이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것인지 까지는 깨달은 사람이 없으리라.

     연서령이 경쾌하게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 저를 도와주러 수도에서 달려오신 오라버니?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하지.”

     저 ‘오라버니’라는 단어가 결코 존칭이 아님을 연서강은 알았다. 그녀는 연서강을 비웃을 때가 아니면 절대 연서강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물며 말을 높이지도 않았었다.

     연무의가 버릇없다, 어린 그녀를 타일렀을 때 그녀는 연서강을 노려보며 ‘존대할 구석이 있어야 존대하지!’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연서강은 그녀를 따라 가면서 어쩌면 연의향보다 다분히 감정적인 연서령 쪽이 자신의 말을 더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서령의 등을 보며 연서강은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 *

     “가뭄 때문이라? 어쩐지, 누각에서 지켜보았더니 강물을 계속 퍼가긴 하더군.”

     연서강의 설명을 모두 들은 연서령의 감상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녀는 곧바로 무심하게 되물었다. ‘헌데, 그래서?’ 그 아이의 머릿속을 알 수가 없어 연서강이 ‘무엇을’하고 되묻자 그제야 연서령이 말을 붙여 묻는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쩌라고?”

     그 도발적인 질문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연서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이 말을 이었다.

     “못 알아들었어? 지금 당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그걸 묻고 있는 거잖아.”

     “.......”

     “언니는 대체 왜 이런 걸 힘들게 보내줬담.”

     탄식하며 연서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입은 갑옷에서 차르륵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제 허리춤에 맨 칼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연서령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 혼자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걱정 마.”

     연서강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연서령이 다시금 강조했다.

     “언니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의 도움을 받을 바엔 차라리 적에게 항복하는 편이 낫겠어.”

     거듭 말하지만 장수의 그런 발언은 아래 병사들에게 좋지 않다. 하지만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을 뿐, 처음처럼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충고를 해봐야 그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인 이상 그 말을 연서령이 들어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방금 연서령의 태도로 확인한 탓이었다.

     연서령의 말이 맞기는 했다. 연서령은 후에 연의향의 부대가 의경으로 가는 길을 뚫을 때까지 의경을 잘 지켜냈다. 압박을 받아 의경의 생활이 매우 피폐해지긴 했으나 그래도 끝까지 버텨낸 것이다. 어린 나이치곤 그 상황에서 매우 냉철하게 판단해 성을 지켜냈다고 집안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던 걸로 연서강은 기억했다.

     비록 어깨에 화살을 맞기는 했지만. 

     “-서령아.”

     문득 머릿속을 스친 가을의 기억에 연서강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방을 나가려던 그녀가 연서강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한 번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식으로 불손하게 연서강을 쳐다보았다.

     연서강은 그 눈빛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 말을 좀 들어보지 않으련?”

     “싫어.”

     역시나 예상대로 연서령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녀는 실로 온몸으로 연서강을 거부하고 있었다. 연무강과는 또 달랐다. 연무강은 연서강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연서령은 연서강과 더 이상 맞부딪히기 싫어 거부하며 피하는 것이다.

     연서령이 연서강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대꾸했다.

     “난, 당신이 말하는 건 아무것도 듣지 않을 거야.”

     어린 나이에 중장군의 직위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성답지 않게 연서령은 매우 철없는 고집을 피웠다. 이우 없이 그저 반항하기 위해 부리는 고집만큼이나 꺾기 힘든 건 없다. 연씨 문중의 막내딸로 그이야 옥이야 예쁨 받으며 자라 기본적으로 고집이 센 연서령이었지만, 아무리 그런 그녀라 하더라도 다른 데서까지 이런 고집을 피우진 않았따. 그녀는 유독, 연서강만 얽히면 이성을 잃고 파드득 떨며 질색하며,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연서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실 어렸을 때만 해도 연서강과 연서령은 지금처럼 이렇게 사이가 험악하지 않았다. 연무강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야 처음부터 연서강이 연우비의 자식이란 것을 알아, 연서강을 마뜩찮게 여겼지만 연서령만은 달랐다. 연서강보다 두 살 어린 연서령은 연서강이 연무의의 아들이 아니란 걸 알지 못했다. 때문에 까마득하게 어릴 때에는 연서령이 연서강을 제 친 오라비로 알고 잘 따라다녔었던 것이다.

     연씨 문중의 자식들 중 첫째에서 넷째까지는 모두 어린 아이와 잘 놀아줄 만한 성미가 못 되었다. 모두 제 아비 연무의를 닮아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나마 서글서글한 성격의 둘째가 어린 연서령을 잘 대해주었지만, 문제는 그 둘의 성격은 판에 찍은 듯이 똑같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째 연무진과 연서령은 잘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한 번 싸우면 집안이 떠들썩할 만치 요란스럽게 다투곤 해서 관계의 기복이 매우 심했다.

     반면에 무던한 성격의 연서강은 어린 여동생이 고집을 부려도 그럭저럭 잘 받아주고, 놀아주기도 잘 놀아주었던 것이다. 어린 연서령에게 연서강은 차갑고 무뚝뚝한 형제들 사이에 오직 하나 있는 다정한 오라비였었다.

     그러던 게 어느 순간부터 사이가 비틀렸는지, 연서강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연서령이 시시각각 자신과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서는 연서령이 연서강만 보면 비웃고 아득바득 소리를 지르게까지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현재 연서강에게 중요한 것은 오랜만에 보는 누이동생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 아이를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나- 그것이었다. 연서령이 계속 이렇게 이유도 없이 고집을 피우면 병사들도, 연서강도 매우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연서강은 말했다.

     “연서령, 그래도 너는 의향 누님이 이끄는 서진군의 중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니냐. 집에서라면 몰라도 여기는 의경이야. 네가 그리 고집을 피워서 자칫 일이라도 잘못 되면 의향 누님에게도 누를 끼치게 된다.”

     연의향에게까지 피해가 가게 된다는 연서강의 말에 연서령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현재 연서령이 가장 잘 따르는 형제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연의향이었다. 연서령에게 연의향은 믿음직한 언니이자 동경하고 지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연의향을 따라 변방까지 온 것이다.

     막내이기 때문에 부친 연무의는 종종 연서령의 능력을 평가 절하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연무강과 연무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의향만은 연서령의 가능성을 믿고 그에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자신을 제대로 정당하게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기에 연서령은 연의향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것이다.

     현재 연서령은 연의향이 믿고 맡긴 의경이 고립되어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언양처럼 의경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연의향에게 미안하고,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이라도 할까봐 걱정이 태산이리라.

     연서강은 그 감정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연서령은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하기 때문에.

     “아까 밀서도 봤지 않느냐? 의향 누님이 너를 도와주라고 나를 의경으로 보냈다. 혹여 내 말을 듣지 않고 네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다 일이 좋지 않게 풀리면 의향 누님이 네게 큰 실망을 할 것이야.”

     “.......”

     꽉 연서령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힘을 줘 팽팽해진 입 주변 근육 때문에 연서령의 낯이 자연스럽게 험악해졌다. 칼 손잡이를 매만지던 손이 이내 손잡이를 꾹 잡는다. 그대로 수틀리면 칼을 뽑아들어 연서강을 베어버릴 것 같은 독기가 그녀의 시선에 어렸다.

     “그렇다면 증명해봐.”

     “증명.”

     연서강이 그녀의 말을 반복해서 말하자, 연서령이 차게 웃었다.

     “그래. 편지를 읽어보니 언니가 당신이 어쩌면 제법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적혀 있더군.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며? 아버지와 언니가 미쳤다고 당신을 여기까지 보냈으리라고. 그들을 어떻게 설득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것 아니야. 그러니 내게도 그들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설득 해봐. 당신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증명을 해 보이란 말이야.”

     연서령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중장군까지 오른 것은 비단 연무의의 입김 탓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오를 만큼의 실력도 출중했으며, 무엇보다 그녀에겐 무장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투쟁심과 호승심이 충만했다. 실력에 성격이 받쳐져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장을 누비며 작고 큰 무훈을 쌓았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성격이 승리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잘 넘기긴 했으나 목숨을 잃을 뻔한, 그런 아찔한 순간도 몇 몇 있었던 것이다. 특유의 기지와 순발력으로 잘 버텨오기는 했으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다.

     자신의 성격이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연서령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인 연무의가 끊임없이 그녀에게 주입시켰기 때문도 있지만, 언니인 연의향의 타이름이 더욱 컸다. 중장군이 되었으니 이제 혼자만 그 아찔한 순간에 처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네가 이끄는 부대도 함께라고 연의향이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네가 이끄는 부대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그 위기를 잘 헤쳐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까지.

     연서령은 토벌대에 어울리는 성격이다. 이렇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어찌 잘 버티고 적의 허를 찌르는 그런 치밀함과 세심함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는 단점이었다.

     “향이 언니가 올 때까지 의경이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방법.”

     연서령은 눈앞의 청년을 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걸 말해 봐.”

                   * *

     ‘의경은 인질이다.’

     별 것 아닌 사실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요했다. 그 말은 즉, 적들은 의경을 말살시켜 제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 없다는 말이 된다. 이 사실만 알아도 의경의 상황은 지금보다 비교적 나아진다.

     혹, 정말로 적들이 의경을 빼앗으려는 심산이었다면 몹시 큰일이었다. 의경도 큰 희생을 각오하고 적들과 맞붙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일인 것이 바로 ‘식수’였다. 의경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에서 용수를 공급받고 있었다. 만일 적들이 의경을 빼앗으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분명 강에 독부터 먼저 탔을 것이다.

     적에게 포위된 채 장기전.

     그 한 줄의 문장이 주는 불안과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몇 달간이나 아무 보급도 받지 못하고 적의 공격을 수없이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연서강 덕분에 적들의 목적을 알았지만, 그 전 의경의 병사들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상태에서의 기한 없는 장기전’이란 현실 자체가 그들의 이성을 마비되게 만들었다. 연서령은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우리는 잘 버틸 수 있다고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의 사기는 큰 비바람을 맞은 풀처럼 푹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경을 점령하는 것이 적들의 목적이 아니란 사실을 연서강에게서 들은 병사들은 다소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처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어딘가.

     연서강의 말은 위축되어 있었던 군의 사기를 크게 증진시켰고, 그것은 지금 의경의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치루는 전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무장인 연서령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연서강이 의경에 온 걸 달갑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연서령은 병사들의 사기가 증진된 것이 꼭 연서강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서강이 아닌 다른 사람이 왔어도 이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증명을 해 보이란 연서령의 말에 대답하기에 앞서, 연서강은 우선 각부의 사람들에게서 현재 의경의 상태가 어떠한지 보고를 받았다. 또 주변 지형도와 이제까지 벌어졌던 전투에 대한 기록도 보았다. 일단 의경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며, 어디까지 일이 진척이 되었는지 알아야 연서강도 다음의 추이를 생각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고를 통해 연서강은 연서령이 마냥 이름만 ‘중장군’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막 포위당해 혼란이 극대화 된 상황 속에서 연서령은 아주 냉철하게 앞으로 있을 장기전을 대비해 이것저것 중비하라 명해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강물의 오염을 걱정해 저장고에 당분간 마실 식수를 보관케 했으며 저장되어 있는 식료품 중 유통기한이 오래인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해 목록을 장성했다. 또 화살이나 의료품 등, 소비 용품들도 목록을 작성하여 나중에 비상시에 쓸 몫을 따로 챙겨두기까지 했다.

     실로 집에서의 연서령에게선 볼 수 없었던 꼼꼼함과 준비성이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하게 감탄하여 연서강이 ‘훌륭하군.’하고 중얼거리자 연서령이 ‘고작 그 정도에?’하고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적들이 의경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양의 물품을 저장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보고가 끝나자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연서강에게 물었다. 그 말에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장해둔 물품은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네가 오기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잖아?”

     연서령이 핀잔을 놓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연서강의 무능력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유난히 뾰족한 상관의 반응에 병사들과 군사들은 다만 의아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인질로 잡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마음을 마꿔 언양처럼 공격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서령아.”

     잠자코 듣고 있던 연서강이 반박하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서령이 비웃었다. ‘잘도.’

     “.......”

     잠시 침묵하던 연서강은 난감하게 생각했다. 연의향의 이름을 들먹여 가까스로 자신의 말을 들어보게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연서령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의 일에도 차질이 생긴다.

     어떻게든, 그리 생각하며 연서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아마도 북문에서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쪽에 저장고가 많은 건 알고 있겠지? 적들은 화살에 불을 붙여 저장고에 불을 지르려고 할 거야.”

     “뭐?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점술 공부라도 하셨어? 어찌 그리 잘 알아?”

     “그것이 적을 포위했을 때,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느냐. 저장해놓은 물품을 없애는 것. 병법은 너도 공부했을 텐데?”

     연서강이 묻자 연서령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알지.”

     일부러 물어보았다는 소리다.

     그녀는 옆에 서있는 부하들을 응시했다. ‘들었지? 대비하도록 하여라.’ 다소 가벼운 목소리로 그녀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연서강을 응시한다.

     “그리고? 설마 그 충고를 해주려고 이 의경까지 납신 건 아니지 않아?”

     “.......”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연서령을 보았다. 연서령이 히죽 얄미운 얼굴로 미소 지으며 ‘왜?’하고 반문한다. 거기다대고 연서강은 차마 ‘얄미워서.’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집에서도 그녀는 항상 늘 이런 식으로 연서강을 대했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그저 한숨을 쉬며 군사가 준 보고서를 뒤적일 뿐이었다.

     불현듯 그는 홍이가 보고 싶어졌다.

     연서령의 얄미운 짓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 연서강은 지형도를 보며 죽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주변에 빠진 지형들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적들이 주변 지형을 잘 아는 자들이라고 하니 그들보다 더 잘 알면 잘 알아야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연서령이 그가 있는 방에 들이닥쳤다. 대뜸 ‘가자!’하고 팔을 잡아끄는 연서령의 행동에 연서강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딜?’하고 물었더니 연서령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한다.

     “고문?”

     “뭐?”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나 연서령은 다시 대답해주는 대신 연서강의 팔을 붙잡고 끌었다. ‘가자!’하고 다시금 재촉하며, 연서강은 막무가내로 끌려갔다. 19살의 꽃다운 소녀란 말이 무색하게 연서령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순간 든 생각이 ‘이 아이와는 주먹다짐을 하면 안 되겠구나.’였다. 물론 연서강이 두 살 위의 사내이니 연서령에게 힘으로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밀리기라도 하면 어쩔까, 두려움이 생겼다.

     연서령이 연서강을 끌고 가는 곳은 제법 먼 곳 같았다. 한참을 걸어 그들이 도착한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벽돌 건물이었다. 문 앞에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그 옆에서 문을 지키던 병사 둘이 연서령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연서령이 익숙한 듯 인사를 받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를 따라온 연서강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말한다.

     딱딱하고 불길하게 생긴 건물에 연서강은 잠깐 주저했다. 저녁이라 건물은 칙칙한 색조에 물들어 있었고, 어둠을 살라먹는 횃불의 일렁거림에 따라 벽에 드리운 사람의 그림자도 들썩였다. 또, 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역한 냄새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벽돌의 붉은 빛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연서강의 망설임을 본 연서령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명백히 도발이었다. 그녀는 지금 연서강을 좋지 못한 장소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친한 사이처럼 팔을 잡고 당기더라니, 생각하며 연서강은 물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감옥.”

     이어 싸늘한 미소를 짓는다.

     “적들의 무덤이지요, 오라버니.”

     이어 또 말한다.

     “설마하니 전쟁터로 왔는데 시쳐 한 둘 못 본다고 다시 돌아가지 않겠지요? 그럴 거면 의경에도 오지 마셨어야 했죠. 이리 심약해서 어찌 앞으로 의경에서 버티려고.”

     이어 그녀가 다시 웃는다.

     “아까 오후에 오라버니의 뒤를 쫓는 적들 중 한 명을 생포했거든요. 이제부터 고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동참해주시라고요. 좋은 기회 아니에요.”

     연서령의 말투에서 연서강은 짙은 조롱을 읽었다. 그녀가 거듭 ‘오라버니’라고 연서강을 부르며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안에 그를 대경실색하게 만들 뭔가라도 준비되어 있는 듯 했다. 딱히 누군가 경고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별로 좋지 못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면 연서령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습게 보일 것이란 것도 알았다. 벌써부터 문을 지키는 병사들부터 연서강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연서강은 눈썹을 구겼다. 그리고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미 자신은 전쟁터에 있었다. 서회에서부터 느꼈다. 여기는 수도와 퍽 다른 곳이라는 것을, 살자고 남을 죽이는 곳인 것이다. 서회에도, 의경에도, 적어도 한 번쯤은 또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죽인 적이 있는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에 자신이 질겁하고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연서령의 말대로 녹우당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다.

     “가지.”

     연서강이 말하자 연서령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앞장서서 걸었다.

     어둔 곳을 겨우 비추는 초라한 불빛들이 이어졌다. 벽돌을 이용하면 튼튼한 건물을 지을 수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연서강은 감옥이기 때문에 일부러 벽돌로 지은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벽돌 특유의 묵직하고 단단한 질감 때문에 건물 안의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갑갑했다.

     후욱, 하고 한 걸음을 옮겨 연서령을 따라갈 때마다 연서강은 붉게 물든 강물에서 나던 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것이 아닌 지금 막, 생생하게 뿜어져 나오는 비린내였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연서강은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둔 복도의 양쪽에 늘어진 새까만 창살의 감옥이 보였다. 정식 감옥이 아닌 약식으로 지어진 감옥의 창살 너머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 같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미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부여잡고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혼절한 사람도 여럿 보였다. 몹시 곤궁한 상태일 것이라 예상과 맞게 사람들은 전부 메말라 있었다. 연서령과 병사들이야 익숙한 광경일지도 모르나 연서강에게는 아니었다. 의식하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얼굴이 절로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뭐라 반응할 수 없어 입만 다물고 있는 연서강에 연서령이 방긋이 웃는다. ‘왜 그러시죠, 오라버니?’하고 예의 조롱 섞인 목소리로. 연서강은 몹쓸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연서령이 자신에게 무슨 반응이 나오길 원하고, 무슨 말을 하기 원하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말도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채 그들은 건물의 중심부까지 왔다. ‘고문’이란 말이 어울리게 벽면에 누군가 한 명 매달려 있었다. 사람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의 색이 원래 그런 것인지, 피가 말라 붙어서 그런 것인지 붉었다.

     붙잡혀 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척 보기에도 어렸다. 많이 쳐줘도 연서령보다 어려보이는 용모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옆 나라가 많이 힘들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소년이 일개 병사로 국경을 넘나들며 싸우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읽기는 읽어 알고는 있었다. 책에서, 망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역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었다. 소년병이란 건.

     하지만.

     살이 찢긴 데다 불에 덴 상처까지, 더러워 너덜너덜해진 옷과 다 헤진 갑옷, 뼈만 남은 비루한 몸에 피부를 덮은 부스럼과 안으로 꺾인 발목까지. 고문을 당해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사지가 소년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얻어낸 것은?”

     그 광경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연서령이 고문하던 병사에게 물었다. 병사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래도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서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병사가 들고 있는 불쏘시개로 소년의 팔을 뚫었다.

     아악-!

     마치 가죽이 찢기는 듯 날카롭고 새된 비명을 소년이 질렀다.

     “서령아!”

     동시에 연서강도 소리쳤다. 연서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연서강을 힐끗 돌아보았다. ‘왜?’하고 그녀는 지극히 냉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설마 적을 동정하시는 건 아니지?”

     그녀의 말에 연서강은 얼굴을 찡그렸다.

     “의경을 공격하는 병사들의 나이는 다 이래. 상황이 기가 막히지. 아무리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들고 일어난 정의의 무리라고 하지만, 더럽고 위험한 일은 전부 일개 평민들의 차지지. 경의 높으신 분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면서 무슨 새로운 나라?”

     곧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연서강은 연서령을 보았다. 연서령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소년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피식, 웃는다.

     “뭐, 우리에게는 경이든 그들이든 단지 우리 땅을 침범한 적에 지나지 않지만.”

     연서령의 말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병사가 이어 횃불에 불쏘시개를 데운다. 뜨겁게 달군 불쏘시개가 생살을 뚫고 지나가 그 주변을 태우는 아픔이 절로 연상되어 연서강은 거기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연서강을 지켜보던 연서령이 병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인질로서 가치도 없어 보이니 그냥 죽여라.”

     주변에 서있던 병사들이 연서령의 명령에 벽에서 소년병을 끌어내었다. 소년병은 혼절한 듯 보였다.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소년병의 몸은 아무 미동도 없어 그저 꿰다놓은 자루포대와 같았다.

     이어 감옥의 한 구석에서 그 자루포대를 푹, 쑤시는 소리가 났다. 억, 소리도 없이 바닥에 붉은 피가 번진다.

     “.......”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연서강은 서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런 장면을 신이 나서 연서강에게 보여줬는지 추측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 의미 모를 분노가 치밀어 연서강은 연서령을 바라보았다.

     연서강과 시선이 마주치자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연서령이 입을 열었다.

     “적의 대부분이 이럴 진데, 집안에서 책이나 읽던 샌님이 가당키나 하겠어?”

     그 시선과 목소리에는 연서강을 무시하는 연서령의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주변 병사들도 절로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곁의 병사들도 느낄 정도의 멸시를, 당사자인 연서강이 못 느낄 리가 없다. 연서강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연서령을 바라보았다.

     연의향을 닮았지만 다소 장난기 어린 생김새의 젊은 여자가 연서강을 향해 비아냥거린다.

     “.......제 주제도 모르고 전쟁터에 오다니.”

     그 말에 연서강은 절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에도 그 비슷한 뜻의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리고 뇌리 속으로 번개같이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특유의 냉정하고 무감각한 눈빛 또한.

     마치 맹금류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를 갈가리 찢어서 삼켜 버리고 싶어 허적이는, 짙은 증오와 미움의 눈빛이었다. 새까만, 마치 오수의 소용돌이처럼 새까맣고 어두운 눈동자가 연서강까지 그가 품고 있는 짙은 감정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어째서인지 연서강은 눈앞의 연서령에 대한 감정보다 일순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튀어 올랐다. 모멸감을 양분 삼아 튀어 오르는 불꽃같은 감정이었다.

     연무강.

     이리로 오기 전에 연무강과 나눴던 대화들이 연서강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연서강은 이를 으득 갈았다. 살아남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연씨 문중 안에서 살아남아, 연조도 살리고 자신도 살아남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연서강은 뱃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차가운 숨을 입안에 머금고 연서령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서늘해진 연서강의 얼굴을 본 연서령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주제도 모르고 여기에 온 것일지도 모르지.”

     연서강의 말에 연서령이 차게 웃었다. ‘알아, 다행이네!’하고 그녀가 말한다. 그에 연서강도 웃었다.

     “그런데 정말 내 주제가 어떤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꾸나, 서령아.”

     “뭐?”

     얄궂다. 연서강은 그리 생각하며 연서령을 보았다.

     어찌 하나 있는 가족들이 이리도 자신을 냉정하고 차갑게 만드는가 싶었다. 기연조와는 전혀 달랐다. 따뜻하고 온유하게 감싸줘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이와 달리 이 가족들은 어찌도 이리 자신을 닦달하고 매도한단 말인가,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나도 변함이라고는 하나 없다.

     가슴 속 한 구석이 시렸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연서강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탄식을 대신해 자리 잡은 참혹한 미소였다.

     “.......네 말대로 정말 내가 주제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

     연서령이 와작 얼굴을 구겼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사실은 네가 내 주제가 어떤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지 못하고 연서령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입을 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연서강 쪽이 빨랐다.

     “증명.”

     “.......뭐?”

     허가 찌린 연서령이 일순 멍한 표정으로 연서강을 보았다. 연서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네가 증명을 해보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증명을 해보이겠다는 말이다.”

     기가 막힌다는 듯 연서령이 묻는다.

     “어떻게?”

     여전히 멸시의 빛이 묻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연서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것은 죽기 전의 연서강을 향한 멸시인 것이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미소 지으며 연서강이 대답했다.

     “열흘 만에 의경의 고립무원(孤立無援)을 해결토록 하마.” 

                   * *

     연서령은 탁자에 펼쳐진 지형도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연서강이 이제까지 전투의 추이를 알고 싶다 하여 가져다주었던 지형도였다. 지형도에는 이제까지 의경의 주변에서 일어난 전투가 시간 별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전투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는지와 어떻게 승리했는지까지 간단히 적혀 있었다. 의경을 방어한 전투 역시 또 다른 지도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가 할 말을 잃은 것은 비단 지금까지 일어난 전투들을 한 데 모아 보니 새삼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가 아니다. 이 지형도와 의경 성의 외곽과 내곽을 기록한 지도는 연서령, 그녀도 매일 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우 익숙했다. 동시에, 낯설었다.

     익숙한 것은 자신들의 전투가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것은 그걸 넘어서 또 다른 전투들도 기록이 되어 있어서였다. 모두 다섯 번의 전투가 그녀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주일 안에 일어나는 그 다섯 개의 전투는 발발하는 이유는 물론 그 시각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 전투가 무슨 이유로 일어나는지, 그 전투에서 적들이 쓸 작전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그 전투에서 어떻게 의경을 방어해야 하는지 까지도.

     일전에 연서령은 연서강을 향해 점술이라도 배웠냐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말한 연서강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립된 적들의 저장고를 노리는 것은, 연서강이 말한 바 있듯이 병법의 기초였다.

     하지만 이건.

     “이게 뭐지?”

     연서령이 경직된 목소리로 묻자 연서강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 일어날 전투를 예상한 것이다. 그리고 너의 의경군(軍)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지.”

     “.......”

     연서강은 충분한 답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의경의 가까이 흐르는 강에서 떨어진 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친절한 연서강의 답에 연서령이 다시 물었다.

     “정말, 신이라도 모시는 거야?”

     “.......”

     그 말에 겨우 연서강이 지도에서 눈을 떼고 연서령을 보았다. 일말의 곤란함,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막내 오라버니의 눈에 연서령은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쳐들어올 시각까지 정확히 알 수 있지? 대체 무슨 근거로?”

     막내 오라버니가 다시 시선을 지도로 내리며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번.”

     “......?”

     “한 번의 전투가 내 말대로 일어나면 혹시, 라고 생각하겠지. 두 번, 두 번의 전투가 내 말대로 또 일어나면 설마, 라고 생각하겠지. 세 번, 모두 세 번의 전투까지 내 말대로 일어나면.”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입을 다문 연서령을 응시했다.

     “.......그때는 내 말이 맞는 걸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막내 오라버니의 눈동자는 매우 차분한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매번 연서령을 보며 당황하여 어색해하는 그런 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투를 준비하자고 말은 하지 않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앞일을 대비 하여라.”

     “.......”

     마치 책을 읽는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연서강이 말을 이었다. 문득 연서령은 제 부친 연무의가 떠올랐다.

     제 할 말 다 하고 사는 연서령이긴 하지만, 딱 한 번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한 적이 있었다. 그 상대가 바로 부친인 연무의였었다. 눈앞의 사람이 연무의와 같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무 말도 못한다는 상황이 비슷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뭐라 말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게!

     연서령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연서강이 자신을 매우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내 말대로 전투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해야 해.”

     연서령이 기억하는 한, 그런 눈의 오라버니는 처음이었다.

     “알겠느냐?”

     “.......”

     연서강이 묻는 말에도 채 대답하지 못하고 연서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내가 왜?’라는 반발심이 울컥 자라났으나, 증명하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연서강이 마음대로 앞일을 대비해도 괜찮다고까지 하지 않았다. 단, 자신의 예상한 대로 전투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자고. 그것마저 ‘왜?’라고 따져 물어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만에 하나 그대로 일어났을 경우다.

     그리 생각하며 연서령은 마뜩찮은 목소리로 ‘그래.’하고 대답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앞으로 있을 전투 다섯 번을 추측해냈는지 모르지만, 그 근거가 딱히 탄탄할까 싶었다.

     저 오라버니가 말한 대로 일어날 리가 없다. 연서령은 그렇게 확신했다.

     연서령이 대답하자 연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필(細筆)을 들어 산 하나에 원(圓)을 그렸다. 연서령이 인상을 썼다.

     “.......다섯 번의 전투로 의경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의 사기와 세력을 없앤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기.”

     “계유산(契柳山)?”

     의경과 그 부근에 흐르는 강을 사이에 낀 여러 산들 중 하나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종전지(終戰地)에 연서령은 다소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뚱딴지같다고 생각하는 연서령에 반해 연서강은 확신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의경을 포위한 적들의 근거지는 아마 여기일 것이다.”

     “어째서?”

     거기에는 연서강이 제대로 된 답을 주었다.

     “언양에서 의경으로 통하는 계곡과 연결되어 있는 산인 것은 물론이고....... 이 일대의 암석에는 석회질과 같은 광물질이 많이 섞여있기 때문이지.”

     “석회질?”

     이상하다. 아까부터 자신은 바보같이 묻고만 있지 않나. 연서령은 미간을 좁히며 지형도를 내려다보았다. 바보같이 묻기만 하는 건 바로 눈앞에 있는 막내 오라버니의 특기이건만, 어째서 자신이?

     의아한 그녀의 물음에 연서강이 연서령을 보았다.

     “그들이 강에서 물을 퍼서 갔더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렇지만.”

     “아무리 맥령이라고 해도, 이 근처까지는 극심한 가뭄이지 않아. 신속에 숨어있다면 얼마든지 물을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의경 근처의 강에서 물을 퍼간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지.”

     “무슨 소리야?”

     그때, 연서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연서령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한숨에 ‘한심하다.’라는 빛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한심하다고 생각 들어 한숨 쉰 것도 연서령이 많이 하던 짓이었지, 상대방이 한 적은 없었다.

     연서령은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가 앙칼져졌다. 바보에게 바보 취급을 받은 것과 같아 엄청난 수치심이 들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서강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석회질이 포함된 물은 설사를 일으켜, 연서령. 그런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겠느냐?”

     이어 말했다.

     “병법과 무술은 몰라도 지리나 여타 지식에 관해서는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나 보구나.”

     “.......”

     “이런 간단한 것도 알지 못하다니.”

     “.......”

     연서령의 낯이 분노와 치욕으로 붉어졌지만 연서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형도로 다시 시선을 내리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물은 생각보다 무겁단다. 운반 거리는 짧을수록 좋지. 언양과의 관련성, 토질의 특수성, 강과의 거리를 미루어 봤을 때 여기가 가장 합당한 적의 근거지다.”

     연서령이 이를 부득 갈았다. 연서강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분노로 표독스러워진 그녀의 시선이었지만, 연서강의 마음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연서강은 저것보다 더 한, .......악독한 맹수와 같은 시선을 알고 있었다.

     연서령의 시선은 ‘그’보다 덜했으면 덜했지, 더 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연서강에게 하여금 묘한 여유를 갖게 만들었다. 연서강이 물었다.

     “네 의견은?”

     “.......”

     연서령은 꽉 두 주먹을 쥔 채 입을 한 일 자로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침묵이 연서강은 흡족했다. 그녀가 뭐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있을 턱이 있나. 병법이나 무술, 기마술은 자신이 그녀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더라도 지리나 생리(生理)만큼은 아니다. 그녀는 한 마디의 반박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연서강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없다면, 내일부터 한 번 두고 보자꾸나.”

     불꽃이 튀는 듯 따가운 연서령의 시선을 마주하며 짐짓 인자한 오라버니처럼 가장하여 연서강이 말했다.

     “과연 네가 내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맞는지.”

     방안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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