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연서강이 떠날 날을 3일 정도 남겨두고 기연조가 연서강을 찾아왔다.
그가 찾아왔을 때 연서강은 녹우당이 아니라 본채에 있었다. 해서 모씨 아줌마의 급한 전갈을 듣고 연서강은 서둘러 녹우당으로 향했다. 자신의 뒤를 따라 종종 뛰는 그녀에 연서강은 간단한 차와 간식을 부탁했다. ‘술상이 아니고요?’라고 놀라 묻는 그녀에게 연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술은 괜히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좋지 않다. 속에 있는 말, 없는 말, 해야 될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저도 모르게 말할 가능성이 있어서 안 된다.
연서강은 그녀에게 ‘차로 충부해요.’하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모씨 아줌마는 이해한 듯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강이 연의향과 연서령이 있는 변방 전쟁터로 간다는 소식을 접한 뒤 모씨 아줌마는 계속 저런 얼굴이었다.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기거한 후, 죽 녹우당의 살림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그녀는 연서강을 나름대로 아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서강이 전쟁터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비아냥거렸던 본채의 가솔들과 달리 슬피 울었다. 어둑어둑한 낯빛을 하곤 금방이라도 눈앞의 연서강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흐느꼈다.
제 형제들도 있고 그다지 위험한 곳이 아니라고 연서강이 말해도 그녀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 말씀하셔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 곳이 아닙니까, 그게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였다. 이어 연서강이 별도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녹우당은 제가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무사히 돌아오세요, 도련님.’하고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불현듯 연서강은 그녀가 맨 처음 녹우당으로 연서강을 따라 왔을 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가문의 천덕꾸러기인 연서강을, 그것도 폐가나 다름없는 녹우당에서 모셔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불만이었던지 그녀는 한 삼일 간을 연서강과 말도 섞지 않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 죽기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라 연서강은 마냥 신기했었다.
“-오라버니.”
연서강이 녹우당으로 들어서자 홍이가 달려 나와 그의 다리를 답삭 안았다. 홍이의 뒤로 잿빛 고양이 아리가 느릿느릿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 뒤로 기연조가 느린 고양이의 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다. 홍이와 기연조를 번갈아 쳐다보며 연서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이가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 나빠요.”
퉁명스레 나온 말에 기연조가 웃으며 연유를 밝혔다.
“내가 저애 간식을 모두 먹어치웠거든!”
“.......”
연서강이 녹우당에 기거하는 동안에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홍이의 끼니와 간식은 모씨 아줌마가 챙겨주고 있었다. 모씨 아줌마를 제외하고 가끔 녹우당의 일손을 돕는 어린 계집종들은 홍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해, 그네들에게 홍이를 맡기는 건 좀 걱정이라고 말했더니 모씨 아줌마가 그 아이는 걱정 말라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 말대로 그녀는 홍이의 간식까지 꼬박꼬박 잘 챙겨 주었다. 해서 사람‘들’을 가리는 홍이도 모씨 아줌마만큼은 꺼려하지 않았다.
기연조와는 그다지 친해지지 못한 모양이지만.
연서강이 어이없다는 듯 기연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먹을 것을 챙겨올 텐데 왜 어린애 것을 빼앗아 먹어.”
“저 사람, 나쁜 사람.”
홍이가 연서강의 말을 이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홍이의 말에 기연조가 슬쩍 눈썹을 구겼다. 고작 간식을 몇 개 빼앗아 먹었을 뿐인데 천하의 나쁜 놈이라도 되는 듯이 온갖 욕을 얻어먹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나 어른에겐 고작 간식이라고 해도 아이에게는 세상의 전부와도 같을 수 있는 간식이다. 간식 하나에 울고불고 서러워하며 분노하는 게 아이다.
한숨을 내쉬며 연서강은 홍이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나쁜 사람 아니야. 심술 맞을 뿐이지.’ 연서강의 말에 기연조의 표정이 더 미묘해졌다. 아직 연서강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홍이를 노려보다 기연조가 휙 시선을 모로 돌리며 투덜거렸다.
“속상해서 그러했다.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녹우당에 찾아오니 정작 그 주인은 없고, 그에 얹혀사는 계집애가 오독오독 색색의 과자를 씹으며 나를 바라보더구나. 인사도 없이 쳐다만 보기에 속이 상했어.”
어찌 하는 말이 홍이를 몹시 못마땅해 하는 어린 계집종들과 다르지 않다. 그네들도 홍이를 보며 어린 계집애가 버릇이 없느니, 사람을 봐도 인사를 안 하느니, 무얼 챙겨주어도 고마워하지 않느니, 하고 투덜거리며 싫어했었다. 연서강이 그를 듣고 홍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상대가 좋아한단다.’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다만 계집종을 향해 ‘나쁜 언니들.’이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몇몇의 사람을 제외하고 그녀는 인간 모두가 ‘나쁘다’는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자신은 그 영역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지, 연서강은 고민하며 홍이를 내려다보았다.
“홍이야, 저쪽에서 모씨 아줌마가 오실 거야. 아마 차와 간식을 갖고 오실 텐데, 오면 간식은 전부 널 줄 터이니.”
“내 간식은 안 줄 테다.”
연서강의 말을 가로막고 기연조가 여전히 심술이 가득한 목소리로 뾰족하게 중얼거렸다. 연서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도 있어 언제나 나이 어린 동생 돌보듯 자신을 돌봐 주더니, 정작 어린 여자애에게 이리 심술을 부리니 어지할까 싶었다.
결국 연서강은 ‘나쁜 오라버니다, 정말.’하고 중얼거렸다. 기연조가 눈썹을 구겼고 홍이가 웃었다. ‘나빠요.’하고 연서강의 말을 따라하며.
“.......나쁜 건, 자네야. 이 망할 친구, 연서강. 이 매정한 친구야.”
해서 연서강은 오늘따라 기연조가 왜 저리 기분이 상했는지 깨달았다.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기연조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기연조가 얼굴을 구긴 채 쓰게 중얼거렸다. ‘진짜, 요새 왜 그러는지.’하고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변방에서 연의향과 연서령의 편지가 날아왔다. 몹시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 편지였지만 결론은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이었다. 자식들의 작은 불만까지 신경 써서 일을 진행하는 연무의가 아니기에 그는 당연히 ‘그렇다면 연서강더러 준비하라고 하겠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연무의는 태위였기 때문에 별다른 방해 없이 제 가문 사람 하나 전쟁터에 보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병부에 들려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고 장부에 이름 하나 올려달라고 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소속을 밟아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한 다음, 연무의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은 연무의는 연서강을 따로 불러 유월 초십일(: 6월 10일)에 떠나기로 결정 되었으니 채비를 단단히 해두어라, 하고 일렀다. 그리고 그 즈음엔 연서강이 변방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녹우당 도련님이 드디어?’라는 눈치였고, 또는 ‘연태위가 아들 하나 보내버리려고 작정을 했군.’이라 수군거렸다. 여하튼 예전의 녹우당 도련님이라 불리며 무위도식했었던 때보단 연서강의 평판이 좀 나아진 듯 했다.
물론 연서강이 나들이를 나가면 아는 척을 했던 저잣거리 사람들은 몹시 연서강을 걱정했다. 괜찮냐며, 혹여 집안에서 따돌림을 당해 사지로 가는 것 아니냐며 연서강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었다. 그때마다 연서강은 연신 웃으며 ‘저도 뭔 일을 하곤 살아야죠. 걱정 마세요.’하고 대답했었다.
.......그 저잣거리 사람들을 대한 후라, 연서강은 어렵잖게 웃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냥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아. 백수에서 탈출 좀 해보려고 하네.”
기연조가 연서강을 보며 쓰게 중얼거렸다.
“변방 간다는 말이 정말이었군.”
이리로 오면서 혹시나 동명이인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했던 모야이었다. 연서강은 가볍게 ‘정말이야.’라고 대꾸해주었다.
그런 둘을 보며 홍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내 연서강의 얼굴을 한 번 훔쳐보더니 따로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연서강은 의외로 홍이는 주변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되레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가, 생각했다.
“.......차라리 올 가을에 열릴 과거를 보는 게 낫지 않겠나?”
기연조가 떠나는 홍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늦어.”
“늦다니.......”
말끝을 흐리며 기연조가 연서강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가 품고 있는 의아함과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연서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 술을 가져오라 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 예전에 한 번, 연서강은 이 남자의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기연조의 대답은 매우 따뜻하고 고마운 것이었지만 그에 반비례해 무척이나 서글픈 것이었다. 연서강은 애써 볼을 당겨 웃어 보였다.
“바야흐로 지금이 딱, 연시 문중의 권력이 절정에 달한 시점이 아닌가. 가문과 아버님의 권력을 이용해 편히 백수 생활을 종료해야지. 아니면 언제 쉬이 시험도 치지 않고 벼슬 한 자리 꿰어 차겠는가?”
“.......”
적절히 농을 섞어 대꾸해주었지만 기연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따로 숨겨진 속내가 있는 말인지 고민하고 있구나.
침묵하는 기연조를 말없이 응시하며 연서강은 생각했다. 뭔가 다른 일 때문에 영향을 받아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냐고. 기연조는 자신에게 그리 묻고 싶은 듯 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속을 드러낼 수 없어 기연조는 다만 걱정스러움과 탄식 섞인 표정밖에 짓지 못하는 것이다.
연서강은 조금 서글퍼졌다.
차라리 .......무강 형님처럼 미쳤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묻는 것이 나았다. 지금은 그리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냐고, 허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기연조에게 ‘실은.’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거짓말로.
사실 그래서 기연조는 무슨 연유에서 그러냐고 묻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유를 물어봤자 듣게 될 연서강의 대답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연서강의 대답을 들으면 더더욱 의심만 짙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 상대의 심중을 짚어보며 연서강은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좋지 않아? 잘 된 일이라고 축하해주지 않는 건가.”
“.......그야.”
기연조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멀쩡한 곳으로 간다면야, 나도 축하를 하겠지만.......’ 말끝을 흐린 기연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심 꺼낼 말을 고르고 있을 기연조를 보며 연서강은 쓰게 웃었다. 한쪽은 친구에게 거짓말만 할 생각만 하고 있고, 다른 쪽은 친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까봐 묻지 못하고 있다. 사실 다른 쪽은 친구를 내내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한쪽만이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챘을 뿐이다. 참으로 답답한 형국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 연서강은 최대한 예사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그 연유에 대해 묻지 않는 건가?”
“.......”
연서강을 응시하며 기연조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물으면 대답해줄 텐가? 전에 본채로 돌아갔을 때도 듣지 못했던, 이유도.”
안타깝게도 그때의 대답이라면 이미 기연조는 들었다. ‘자네가 변을 당하면 나도 역시 그럴 것이네.’하고 그때, 연서강은 솔직하게 대답했었다. 그가 변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이 움직인 것이란, 설명할 수 없는 대답을. 덧붙여 이번의 이유 또한 지난번과 같다. 다만 기연조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해서 연서강은 짧게 대꾸했다.
“아니.”
연서강의 대답에 기연조가 ‘그래.’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군.’ 씁쓸하게.
뭐라 말을 더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며, 기연조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저번의 방문 때보다 한층 더 초조해 보이는 그를 보며 연서강은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축하나 해주게. 이번 기회를 놓치면 꽤 오랫동안 못 볼수도 있으니.”
연서강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기연조도 연서강을 이용하고 있다고 먼저 밝히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게 이제까지의 친구 사이로 지냈던 자에 대한 기연조 나름의 예의인지, 아니면 되도록 자신과 가능한 오래오래 친구로 있고 싶다는 기연조의 마음은지 연서강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연조가 이 관계를 나름 소중히 대해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연조의 진심이 어느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서강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
“싫어요.”
연서강의 말에 홍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연서강은 곤란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걸 게을리 하는 그녀가 이렇게도 확연히 거절하니 더 권하기도 어려워졌다.
일전에 태상이란 사람이 했던 말을 연서강은 떠올렸다. 홍이가 보호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란 말에 연서강도 동의했다. 무엇보다 여기에 계속 나그네처럼 머무느니 차라리 궁에 들어가 보호받는 편이 홍이에게 나았다. 홍이가 남자아이라면 또 몰라도 아직 어린 여자아이니 더더욱 그 편이 좋았다. 그래서 어찌 홍이를 데리고 궁으로 가야 할 텐데, 말을 모두 들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홍이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많고 .......또, 또, 새로운 사람들이.”
“.......”
연서강은 그 말에 ‘그렇긴 해.’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태상이 잘 대해준다고 해도 거기는 홍이가 질색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새로운 장소와 사람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연서강은 당장 이달 초열흘날이 되면 집을, 아니 수도를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모씨 아줌마가 녹우당을 잘 돌본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어린 여자애를 홀로 놔두고 집을 비우기가 좀 그랬다. 게다가 이 집안은 모씨 아줌마를 제외하곤 홍이에겐 다소 적대적이지 않나.
고민하며 연서강은 어쩔 수 없지, 중얼거렸다.
* *
“.......자네는, 가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각할 필요가 있는 듯 한데.”
연서강의 부름으로 직접, 친히, 곁에 모시는 사람도 없이 녹우당을 방문한 태상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에 연서강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아이가 가기 싫다고 칭얼거리니 아이를 데리고 갈 사람이 직접 와 데리고 가는 수밖에. 한 사람이라도 낯을 익히면 새로운 곳에 대한 거부감도 좀 덜해지지 않을까. 덧붙여 아이의 상태가 어떠한지 직접 보면 그도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봉도가 생기지 않겠는가.
무턱대고 궁에 데려다 놓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급히 서간을 작성해 모씨 아줌마더러 옥패를 쥐어주고 심부름 보낸 게 잘못이었다. 또한 집안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 할 일이라 홍월정 뒤편에 있는 숲을 통해 녹우당까지 그를 오게 한 것도 잘못이었다.
오색빛깔 찬란한 옷을 입은 재상이 진흙투성이가 된 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찢어지기까지 한 옷자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척 보기에도 가격이 제법 나갈 것 같은 옷이 너덜너덜 걸레가 된 걸 보고 연서강은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했다. 태상이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손을 휙휙 내저었다.
“이미 망가진 옷과 내 신세....... 연태위의 권세가 아무리 높다한들 그 집 도련님이 나를 오라 가라 제 편의대로 부르다니. 불쌍하고 가엽기도 하지.”
“제, 제가 궁중 법도를 잘 모르다 보니.”
당황하여 부랴부랴 연서강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옷, 옷을 새로 마련해 드릴까요?’ 묻자 태상이 힐끗 연서강을 쳐다본다. 연서강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태상을 보았다. ‘돌아가실 땐 가마를 불러서.’ 거기까지 말하자 돌연 태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 옷을 장만해주는 것도 모자라, 꽃가마까지 태워 보낸다? 됐네. 내가 왔다간 것을 모르는 이들이 봤다간 자네가 어린애를 희롱하다 못해 남색까지 즐기게 됐다 믿겠어.”
“으.......”
태상의 핀잔에 연서강의 얼굴은 붉어졌다. 어린애를 희롱한다는 소문이 어느새 궁중에까지 퍼졌나 싶어서였다. 어물어물 ‘저는, 그런 짓은.......’하고 중얼거리니 태상이 웃다 말고 이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내가 매번 말하지만 좀 연태위의 자식답게 굴지 않겠나?”
아무래도 태상은 연서강이 연무의나 연무강처럼 야무지고 똘똘하지 않은 것이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그 말에 연서강은 ‘친 자식은 아닌데.......’하고 속으로 잠깐 중얼거렸다가 ‘.......그렇게나 다른가.’하며 서운해 했다.
“게다가 내가 손수 쥐어준 귀한 옥패를, 비록 내게 심부름을 보내기 위해서라지만 아무에게나 덥석덥석.”
이왕 시작한 것. 기회를 잡은 김에 단단히 놀려먹자고 생각했는지 운을 띄운 희롱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태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연서강은 ‘그것은.......’ 말끝을 흐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상대방이 진지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놀려먹고자 꺼낸 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심지어 태상의 농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핵심을 찌르는지 내뱉는 대로 쿡쿡 연서강의 심장이 마치 과녁이라도 된 듯 날아와 박혔다. 연서강은 연신 식은땀만 뚝뚝 흘렸다.
그런 연서강을 흘러보며 태상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해서, 아직도 나를 사이비라 칭할 텐가?”
연서강이 그 질문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기회다. 속이 상해버린 태상을 기쁘게 만들 기회였다. 연서강은 바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연서강의 말에 태상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어 연서강이 외쳤다.
“교주님이시죠!”
“.......”
웃는 낯, 그대로 태상의 얼굴이 굳었다.
연서강은 지금 몇 시간째 벌을 받는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뭄으로 말라가는 논바닥의 심정이 바로 이러한가 싶었다.
“교주님은 또 뭔가? 사이비도 모자라 이젠 나를 사이비 교주로 만들 셈인가?”
바로 눈앞에서 몇 시간째 투덜거리고 있는 태상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바깥에 세워둘 수 없는 인물인지라 안으로 들이긴 들였는데, 의자에 앉자마자 태상은 나불나불 한참 전에 운을 띄운 조롱을 끊지 않고 토해냈다. 교주라는 단어에 또 다시 단단하게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계속 사과만 하며 연서강은 침울한 얼굴을 했다. 슬펐다. 너무 미안해서 그 죄책감에 죽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연태위는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옷도 찢어져, 이 더운 날 숲을 헤매기까지.......”
“.......”
동시에 너무너무 괴로웠다. 상대의 끊이지 않는 비난과 조롱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꺼내는 말이란 걸 알아서 그는 더욱 괴로웠다. 미칠 것만 같다는 표현을 바로 여기에서 쓰는 듯 했다.
“그런데 자네, 지금 얼굴이 굉장히 불손한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태상은 귀신같이도 잘 눈치 챘다. 정말 신기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연서강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지만, 태상이 의심하며 물었다.
“하지만 지금 매우 불편하다는 표정이야. 내가 잘못 봤다는 건가?”
“그저 죄스러워 반성하고 있는 얼굴입니다. 정말입니다.”
연서강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무리해서 힘을 준 턱도 아파왔다. 낯에도,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연서강이 마치 흐느끼는 듯 사과하자 태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그 시선에 연서강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이다. 뱀이다. 누가 뱀 신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랄까봐. 진짜 눈초리가 뱀과 닮았다. 이제는 용서해달라고 흑흑흑, 여인처럼 흐느끼며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잘못했다, 홍이의 일이 급하다고 한들 이 사람을 함부로 불러선 안 됐는데.
연서강이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앞의 태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의아한 얼굴로 연서강이 고개를 들었다. 태상이 허공에다 손을 저으며, 다른 한 손으론 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 연태위나 연위사와는 다르군.”
“.......”
연서강이 멍하게 태상을 바라보았다. 탁자를 가볍게 손으로 내리친 다음,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몸가짐을 바로 했다.
“농을 치는 게 지루해졌네, 그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제야 끝이 난 것인가. 연서강의 생기 빠진 목소리에 태상이 ‘이제 나를 우습게보지 못하겠지?’하고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연서강은 그 질문이 최후의 구명줄이라도 되듯 무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물론입니다.’ 대답까지 하며. 그에 태상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래, 당연하지.’라고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피곤한 사람이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부친이나 연무강과는 다른 의미로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순간 이런 사람에게 홍이를 맡겨서 될 것인가, 그런 회의까지 들어 연서강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태상이 입을 열었다.
“들었네. 자네, 변방에 연씨 자매가 있는 곳으로 간다지? 오랜만에 제 형제를 만나겠군.”
쉼 없이 바로 들어가는 본론에 연서강은 잠깐 멍해져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화의 맥을 따라가지 못할 듯 싶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들은 것도 있고 하니, 어르신께 홍이를 맡기고 싶어서.”
“그건 편지로 봤네. 헌데 아이가 오길 싫어한다지?”
짐짓 곤란한 듯 태상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턱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연서강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가 자네를 무척 아끼나 보군.”
그 말에 연서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낀다? 동시에 자신이 그에게 홍이에 관련된 특이 사항을 설명하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연서강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홍이가 떠돌아 다녔던 때, 무슨 짓을 당하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을 좀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나 새로운 사람을 꺼려해서.”
태상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을 꺼린다? 자네를 정말 좋아하나 보군.”
연서강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말이 그렇게 되나?’라고 고민에 빠졌다. 홍이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그것만큼은 연서강도 자신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꺼려해 신을 신기기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땋아주는 데도 가만히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땋는 게 어설퍼 가끔 홍이의 머리칼을 훅 뽑아버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파요.’라고 한 마디만 할 뿐 연서강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연서강만 너무 미안해서-여자애 머리카락을 이리도 많이 뽑다니!- 홍이에게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연서강과 함께 밥 먹는 것도 그녀는 이제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먹음직스럽게 구운 닭다리를 하나 손에 쥐고 흔들며 ‘얘야, 이리 오련. 배고프지.’하고 유혹해야만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닭다리만 잽싸게 낚아채고 바로 홍월정으로 내빼곤 했었다.
.......그랬던 때도 있었으니 지금은 그때보다야 확실히 친해진 건 맞다. 하지만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연서강은 애매하다는 어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저냥 친절한 어른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태상이 입술을 삐죽였다. 연서강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 대신이라던가, 오라버니 대신이라던가.”
그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상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조금 둔한 구석이 있군.’,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연서강은 태상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꺼리지 않는 게 곧바로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 모습에 태상은 쯧쯧 혀만 찼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연서강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자연스레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어찌 되었든 만나보기로 하지. 자네가 변방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곳에 그 아이를 계속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를 만나서 설득해 보지, 내가.”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담담한 연서강의 말에 태상이 문득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간신히 두 번째 삶을 얻었는데, 제목숨을 좀 귀이 여기지 않겠나? 내가 자네라면 당장 건강을 챙기고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궁리를 하겠건만.”
“.......”
어리석다는 듯 중얼거리는 태상의 목소리엔 약간의 의아함도 깃들어 있었다. 태상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두 번째 삶인데 어째 목숨을 귀이 여기지 않는지, 아마도 사정을 안다면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럴 만한 기특한 이유라도 있는가?”
태상의 말에 연서강은 두 눈을 깜박였다. 다홍빛 섞인 태상의 갈색 눈동자가, 홍염에 젖은 대지처럼 어여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 한가운데 비친 자신의 상이 마치 붉은 노을빛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연서강은 쓴 웃음을 지었다.
기특한 이유야 당연히 있다.
“.......죽기 싫으니까요.”
가만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그의 대답에 힐끗 태상이 연서강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죽은 다음 돌아왔다고 했지.’ 예사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태상의 말에 이어 연서강이 여전히 가만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살해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랬었나, 여겨질 정도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삭둑.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연서강은 자신의 심장의 한 조각도 깔끔하게 칼에 베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결코 환상통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비슷한 아픔을 느꼈었다.
그는 태상이 침묵하는 동안 두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그리고 눈을 감고 뜨는 그 찰나에 번뜩이는 칼의 시린 빛을 보았다.
“.......”
다행히도 태상은 ‘누가?’라고 바로 되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 쪽 눈썹을 구긴 채 침묵했을 뿐이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설프게 동정하지도 않는 그를 보고 연서강은 묘하지만,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듯 온유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제 친구도 저를 구하려고 하다가, 그만 변을 당했습니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금 당장 나라가 벌컥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나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예감. 그것은 저 남자의 성격이 그만큼 대범하고 침착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 또한 홍이처럼 주변의 일에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타인의 사정에 이래저래 휘둘릴 위인이 아닌 것이다, 저 남자는.
물론 이건 예감뿐만이 아니다. 전에 청다관에서도 지겹게 듣지 않았나.
-자네가 반역을 하든 어떤 충신을 죽이든 나는 관심 없어. 아이를 시켜 미행을 시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게.
그 말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연서강에게 있어 이 나라의 태상이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래서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태상을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진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태상이 입술을 당겨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성격이 고약하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전에 내가 ‘자네 같은 사람이 돌아 와봤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라고 비웃어서 인가?”
“아니요. 그러니 제가 후에 혹시 잘못 되어도 홍이를 잘 부탁드린다는 말입니다.”
연서강의 말에 태상이 꾹 입을 다물었다.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태상의 시선이 연서강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태상에겐 어쩐지 제 속과 제 사정을 모두 들켜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너무도 중립적인 제 3의 위치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태상의 직위에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뱀 신에게 치성이라도 드리듯 연서강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제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
태상이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하고 제법 묵직한 신음을 내며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렸다가,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뭔가를 굉장히 고민하고 있는 듯 해서 연서강은 ‘태상?’하고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상은 연서강의 부름에는 반응하지 않고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태상이 돌연 연서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연서강은 순간 눈썹을 구겼다. 태상의 목소리가 너무도 딱딱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어 태상이 같은 목소리로 연서강에게 말했다.
“아니. 자네는 반드시 돌아와야 해.”
느닷없는 그의 말에 연서강은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저번에 자신과 말을 몇 번 섞은 후 자신을 향해 ‘정말 한심하군.’하고 평까지 내렸던 태상의 말이라 더욱 그러했다.
스스로의 한심함과 비루함을 연서강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반드시 무사히 돌아온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노력하기야 하겠지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안 되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공을 쌓아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그는 안고 있었다.
연서강은 순간 태상이 또 농이라도 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심각했다. 턱을 쓸며 태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줄곧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더욱이 그 여자아이가 자네를 좋아하는 듯도 해서 망설여지지만. 자네가 변방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을 높여주는 게 더 그 여자애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나 생각도 들고.”
“무슨?”
“자네의 각오가 그리 단단하다면. 정말로 이런 식으로 밖에 전진할 수 없다면, 등을 떠밀어주는 것은 이왕지사 많은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러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연서강이 조급하게 묻자 태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말해도 될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태상이 그런 연서강을 응시하며 딱딱한 투로 말했다.
“자네는 반드시 돌아와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이 아깝게 되니까.”
“그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서강은 말에 담긴 뜻보다 일의 관련성을 알 수 없어 얼굴을 와작 구겼다. 홍이의 목숨? 홍이의 목숨이 아깝다니?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하는 연서강에게 태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되돌아오는 건 한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던가?”
“네.”
태상에게서만이 아니라 홍이에게서도 들어본 말이다. 연서강은 그 간단한 문답에서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태상의 얼굴이 어둑어둑해졌다.
“왜 한 번밖에 안 되는지 .......알고 있나?”
“.......모르지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한숨을 푹 내쉬는 태상의 행동 또한 그런 기분에 박차를 가했다. 태상이 입을 여는 순간, 연서강은 손을 내밀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허나 충동과 별개로 두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꼼짝달싹도 못하고 그는 속수무책으로 태상의 말을 들었다.
“되돌려 보내는 자의 목숨이 하나이기 때문이라네.”
잔혹해도, 자신이 꼭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홍이는 홍월정에 있었다.
아침에 새로 입힌 고운 주홍빛 옷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뜩 먼지가 묻어 더러웠다. 홍월정의 다 떨어진 현판을 긴 나뭇가지로 툭툭 치면서, 그녀는 가사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정자의 계단에선 잿빛의 늙은 고양이가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주변 경관이 허물어지고 방치된 홍월정만 아니라면 무척 평화스러운 광경이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연서강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와작 얼굴을 구겼다.
눈물은 흘리지 못했다. 힘든 일을 겪은 사람도 그녀, 앞으로 겪을 사람도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소녀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사람의 기척을 느꼈는지 홍이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 연서강을 발견하고 ‘오라버니.’하고 부른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더러워진 연못 속으로 던진 다음 계단 위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잘 자고 있던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불만스럽게 야옹 울었다. 홍이가 무심한 얼굴로, 그러나 무척 잰 걸음으로 연서강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곁에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
“누구?”
그러나 그 경계도 오래가지 않았다. 연서강의 낯빛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홍이는 낯선 사람에게 계속 흘깃흘깃 시선을 주며 게걸음으로 연서강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홍이가 경계하는 것을 깨닫고 낯선 사람이 두 손을 앞으로 내보이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웃으며 ‘이 이상 가지 않을게.’라고 낯선 사람이 말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다만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연서강에게 걸어갔다.
“오라버니.”
연서강의 옷자락을 겨우 잡게 된 홍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연서강은 여전히 음울한 얼굴로 홍이를 보았다. ‘홍이야.’하고 연서강이 그녀를 불렀다. 마치 엄마에게 이름을 불린 토끼처럼 홍이가 ‘네.’하고 발돋움을 해 연서강을 본다.
연서강은 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왜, 왜, 내게 말을 안 했니.”
“.......”
뭔가를 직감했는지 홍이가 입술을 만다.
“왜, 겨울에 죽게 된다고 말을 안 했어?”
태상에게 들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째서 그가 일전에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사람-사제-들을 ‘신에게 희생된 자’라고 칭했었는지 연서강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희생이 맞았다. 어떤 거룩한 뜻이 있고 무슨 위대한 사명이 있더라도, 그것은 희생이었다. 어떠한 힘이든 그에 따른 대가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대가는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태상이 말했다.
-되돌려 보낸 자들은 시간이 흘러 자신이 사람을 되돌려 보냈던 시간을 맞이하면 죽게 되네.
무슨 원리와 이념으로 신이 그 목숨을 거둬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했다. 그랬기에 한 번밖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으며, 누군가와 함께 되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자신이 되돌아온 시간이 당도하면 죽는 걸 알기에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힘’을 이용할 수도 업는 건 당연지사다. ‘함께’ 되돌아갈 자를 고르는 것에도 자연스럽게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없는 게 나은 힘이 그런 것인가 싶었다.
자시이 아닌 철저히 남을 위해 쓸 수밖에 없는 힘.
-따라서 그 여자아이는 자네를 되돌려 보낸 그 날이 오면 심장이 마비되어 절명할 것이네.
그 겨울에 죽게 된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연서강에게 태상이 한 번 더 말했다.
-반드시.
‘힘’을 가진 자는 봉사하는 자였다. 신에게 경연하는 자를 바치고, 경연하는 자를 통해 나라의 흥망을 조정한다. 경연하는 자는 신의 즐거움을 위해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힘’을 가진 자는 때가 오면 ‘힘’을 사용한 대가로 반드시 죽었다.
연서강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돌아오고 난 뒤부터 계속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은 그 정도가 달랐다. 거의 넋이 나가다시피 한 연서강의 얼굴을 보던 태상이 쓴 웃음을 지으며 ‘자네는 정말 남과 관련된 일엔 민감하게 반응하는군.’하고 중얼거렸지만, 연서강은 듣지 못했다.
죽는다.
홍이가.
-홍이가.......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겨우 멍해져 있던 머리가 트였다. 그의 얼굴에서 싹 핏기가 빠져나갔다.
죽는다! 홍이가 죽는다! 말도 안 된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홍이가 죽는다니. 곧 그 아이가 죽는다니. 홍이는 아직 어려. 아직, 아직도 한참 어린 여자아이지 않나. 아직 어린 아이인데, 그렇게나 작은데, 키도, 손도, 발도 모두 그렇게나....... 그런데, 채 꽃도 피우기 전에 죽는게 정해저벼렸다니.
그걸, 바꿀 수도 없다니.......
“홍아.”
홍아.
연서강은 제 다리를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를 서글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시선에 원망이 어려 있었다. 연서강의 말로 어째서 그가 이리도 처참한 얼굴을 한 채로 홍월정까지 나왔는지 깨달은 홍이는 입을 합 다물고 있었다. 세게 이에 물린 입술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연서강이 중얼거렸다.
“.......왜?”
그제야 홍이가 조그만 입술을 조물조물 씹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리가 죽으면 나도 어떻게 있어야할지. 아리는 겨울에 죽으니까, 나도 아리랑 함께 죽어도 상관없다고.”
“왜 상관이 없어!”
연서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홍이의 가녀린 어깨가 화들짝 떨렸다. 늘 웃고 있는 저 녹우당 도련님이 자신의 앞에서 언성을 높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이는 멍하니 연서강을 올려다보았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으며 괴롭게 말했다.
“네가 갑자기 겨울에 죽어버리면 내가 얼마나 놀라고 슬퍼할까 생각한 적은 없어?”
홍이의 새까만 머루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연서강은 얼굴을 구겼다.
“왜, 말을 안 했니.”
혹여라도 또 고함을 지를까, 아니면 혹여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그것이 무서워 숨죽인 연서강의 질문에 아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제야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전에 방안에서 우셨잖아요. 제가 죽는 걸 알면 녹우당 오라버니가 더 울 것 같아서. 나는 단지, 돌아오는 김에 오라버니가 울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오라버니를 데리고 돌아온 건데. 그런데.......”
“.......오라버니가, 내가 죽는 것도 자기 탓이라고 괴로워할까 봐서요.”
아이는 ‘자책’이란 어려운 단어를 쓰지 못하고 그렇게 풀어 연서강에게 말했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연서강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되돌린 대가로 겨울에 죽게 된다는 것을 연서강이 알게 됐을 경우, 행여나 자책하며 그녀의 목숨 값을 벌기 위해 무리하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세울까봐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안 연서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꽉 이를 악문 채 홍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더더욱. 그 겨울날, 연서강은 홍이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그러면 안 된다.’하고 나무라야 했었다. 하지만 알지 못했다. 그때는 되돌아간다는 홍이의 말도, 되돌아가기 위해 그녀가 대가로 바쳐야 했던 것도.
연서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홍이가 연서강을 보며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검은 눈에서 펑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제가, 오라버니를 아프게 했나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겨울에 아리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니.”
그때,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태상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드는 목소리에 홍이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란다, 아이야. 그는 네가 자신 때문에 겨울에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만을 슬퍼하는 게 아니란다.”
연서강이 참혹한 얼굴을 한 채 태상을 보았다. 갈색 눈동자를 한 태상이 연서강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가 어린 나이에 죽어 혹여 찬란하게 빛났을지도 모를 너의 미래가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하고. 네가 죽어서 생길 고독감과 쓸쓸함에 서글픈 거다. 고양이가 죽었을 때, 너는 늙어 죽은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슬펐지? 그래서 되돌아오자고 마음먹은 게 아니냐.”
홍이가 눈물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느꼈던 슬픔을 그도 느끼고 있는 거다. 아끼던 존재가 .......죽어서, 아예 사라져 곁에 없게 되는 슬픔.”
태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홍이가 연서강의 다리에 매달려 펑펑 울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라고 말을 이으며. 연서강은 그런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은 작고 여렸다. 그게 너무도 그의 가슴속을 시리게 만들었다.
연서강은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나왔다.
* *
“정신이 번쩍 들지 않나?”
낡고 기울어진 정자 안에 앉아 느긋한 목소리로 태상이 연서강에게 물었다. 앉아 있는 태상의 옆엔 울다 지친 홍이가 누워 자고 있었다. 홍이의 머리맡은 잿빛 고양이가 지키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윤기 없이 남루한 털을 가진 잿빛 고양이는 무심한 얼굴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연서강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태상이 아이의 몸을 토닥이며 이어 물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어떤 변도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어떻게든 아이가 죽기 전까지는 무사하고, 또 무사해야겠다고.”
연서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는 얄궂은 데가 있으시네요.”
좀 전 태상이 연서강에게 ‘얄궂다.’라고 말한 것에 보복이라도 하듯 똑같이 말하는 그를 보며, 태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얄궂은 건 신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태상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한 목소리로 옛이야기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나는, 되돌아온 자를 ‘우물에 빠진 자’라고 생각하네.”
“우물?”
“아무렴. 우물이고말고. 가로는 인과, 세로는 시간이 만들어낸 우물(井)이지. 홀로 어둡고 축축한 우물 속에 빠져서 발버둥을 치게 된다는 소리야. 되돌아오게 되면.”
시간과 인과. 그 말이 썩 낯설지 않다. 생각하던 연서강은 부득이하게 보후전 벽면 가득히 메우고 있었던 쌍두뱀 신의 조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벽면에 빈틈없이 자리한 뒤엉키고 우글거리며, 하나같이 뾰족한 독니가 보이도록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뱀 떼들. 독사로만 엉켜있는 거대한 늪이 벽에 자리하고 있는 듯 했다.
태상이 두 눈을 뜨고 다 허물어져 가는 홍월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훑었다.
“물론 바뀌겠지. 바뀔 거야. 발버둥을 치면, 치는 만큼.”
이어 작게 실소한다. ‘그게 우리네 신의 잔혹한 점이지.’ 연서강은 아무 말 없이 태상을 바라보았다. 괴이한 분위기의 태사이라 생각했었다. 신에 가까운 자라서 그렇다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연서강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다만 보통 사람들 보다 신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뿐이다.
태상이 홍월정을 돌아보던 그 애정 어리고 서글픈 눈 그대로, 연서강을 응시했다. 허물어지고 망가진 홍월정의 정경 안에 연서강 또한 당연하게 포함된다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자네는 느끼게 되겠지.”
“.......”
“내가 지금 시간과 인과가 만들어낸 우물 속에 갇혀 있구나, 하고.”
“.......”
“마음 단단히 먹게나. 특히나 자네 같은 사람은.”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불현듯 연서강의 머리를 스친 것은 지난 밤, 녹우당을 찾아왔었던 연무강이었다. 연무강이 얼마나 녹우당과 홍월정, 그리고 자신까지 질색하는지 잘 알았던 그인지라 연무강의 등장에 연서강은 몹시 놀랐었다.
그리고 연무강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 놀랐었다.
물론 연무강은 ‘연씨 문중을 망신시키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한 말일 것이다. 연서강이 전쟁터에 가서 죽거나 다쳐 아군의 족쇄가 된다면 그것은 그대로 연씨 문중의 수치로, 연서강을 거기로 보내자고 한 연무의의 수치로 남게 될 것이니까.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일일 테다.
알면서도 연서강은 분노가 치밀었다. 괴이한 감정이었다.
저 사람이 나를 죽였어. 거기서부터 발로된 말이 되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를 죽인 사람 주제에 전쟁터에 나가는 걸 방해한다고? 나를 죽인 사람 주제에? 차라리 저쪽 입장에선 잘 된 일이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행여나 내가 죽기라도 하면 저쪽에선 풍악을 울릴 정도로 잘 된 일이 되지 않나. 집안의 흥망을 구실 삼아 죽일 날만 내내 고대하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 고름덩어리. 필요도 없는 비루하고 비굴한 놈을 치워버릴 천재일우의 기회이지 않나.
그런 주제에?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연무강은 제 손에 연서강이 죽은 걸 모른다.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만 있는 것인지 연무강은 아직 연서강을 죽인 게 아닌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언을 했다.
기연조 때는 술을 마셔 취하기라도 했었지. 이건 달랐다. 멀쩡한 정신으로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분노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음침한 조롱을 하고 만 것이다.
실언을 했다고 후에 퍼뜩 제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회한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경악한 듯 보이는 연무강의 얼굴에 통쾌하기까지 했다. 차마 말로 못하고 그저 강하게 열망하기만 했던 잔혹한 생각을 당사자에게 들켰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설사 들켰다고 하더라도 연서강이 적나라하게 말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연무강은.
.......하지만 이내 연서강은 우울해졌다.
그 겨울은 실제로 일어날 예정이긴 하지만 ‘현재’는 일어나지 않아 없는 일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겨울은 ‘현재’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비참하고 참혹한 날이었다. 기연조와도 그 기분을 공유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 혼자서만 감내하고 이겨내야 하며 곱씹어야만 하는 ‘겨울’이었다. 덧붙여 연무강에게도 ‘어째서? 그렇게 제가 미웠습니까?’하고 이유를 물을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을 아직 죽이지도 않은 자에게 왜 자신을 죽였냐고 묻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묘한 허무함이 연서강의 속을 뒤집고, 더 나아가 쓸쓸함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우물. 홀로 우물 속에 갇혀 있다는, 고독. 쓸쓸함.
“.......”
연서강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흡사 오래되고 버려진 우물 속으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텅, 하고 오로지 하늘만 뚫린 깊고도 어두운 우물 안에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물에 빠졌다.
“걱정 말게.”
그리고 연서강은 이어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태상이었다. 말간 얼굴의 태상이 연서강을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설사 우물에 빠졌다고 해도, 내가 대화 정도는 해주겠네. 자네가 쓸쓸하지 않게.”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홍이를 제외하고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연서강은 그 말을 들으니 순간 서늘했던 늑골밑이 간신히 체온을 되찾는 걸 느꼈다. 아직 홍이를 다독이고 있는 태상을 보며 연서강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상관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연서강은 태상이 말과 달리 자신을 매우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 태상은 연서강이 무슨 짓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지만, 때때로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염려가 섞여 있는 듯 했다.
그 말에 태상이 ‘음?’하고 언제 자신이 그랬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상관없지.’하고 중얼거린다. 연서강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태상이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솔직히 입을 열었다.
“사실 되돌아온 사람을 내가 처음 보네. 참 신기해.”
그 말엔 연서강도 조금 놀랐다. 태상이 되돌아온 자인 자신을 대하는 말과 행동에서 퍽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듯한 느낌이 묻어나왔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기는커녕, 너무도 많이 봐와 지긋지긋해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말의 진위 여부야 어쨌든 태상이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참견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그리고서는 자네 같은 사람을 별로 싫어하지도 않고 말이지, 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덧붙인다.
“그렇다고 내가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은 하지 말게나.”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 이라는 식으로 태상이 딱 잘라 말했다. 딱히 태상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그야.’하고 중얼거렸다. 태상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자네는 진창을 굴러도 상관없다고 했지?”
“.......”
“나는 싫네. 진흙탕에서 구르고 싶지 않아.”
연서강의 얼굴을 보며 태상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자조의 빛이 묻어나오는 미소에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나는 오래 살고 싶거든.”
그리 말하며 태상은 고개를 돌려 잠을 자고 있는 홍이를 보았다.
이후, 태상은 잠에서 깬 홍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태상에게서 들었던 말이 그녀의 마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기라도 했는지, 홍이는 처음과 달리 몹시 고분고분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홍이를 대하는 태상의 말과 행동도 매우 부드럽고 상냥했었다. 사람들에게 어쩌면 몹쓸 짓이라도 당한 게 아닌가, 란 연서강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는 홍이의 시선에 맞춰 다리를 굽히고 앉은 뒤 대화를 시도했다.
인사부터,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찾아오게 되었는지. 또 자신이 있는 곳에 홍이와 같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연서강은 보통 사람이라 알 수 없는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자’들 특유의 감각이라도 있는 듯했다. ‘너와 같은 자들이 많단다. 언니도, 오빠도, 동생도 있어.’라고 태상이 말하자 그녀가 놀란 얼굴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동질감과 안도감.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정리하면 그러했다.
어쩐지 연서강은 홍이를 싫어했었던 계집종들과 기연조가 떠올랐다. 자신은 둔한 사람이라 몰랐지만, 그 계집종과 기연조는 홍이에게서 뭔가 다른 것이라도 감지했던 것인가. 그래서 그녀를 좀 꺼려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연서강은 태상을 봤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홍이에게서도 약간이나마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은 비슷했다.
“부모님도, 형제도 없이 밖에서 버틴다고 고생이 아주 많았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꾸나. 겨울까지 네 고양이와 함께 너와 같은 자들과 함께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다.”
태상의 말에 그녀는 연서강을 보았다. 염려하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를 보고 연서강은 웃었다. ‘나는 괜찮단다.’라고 말하자 태상이 돌연 혀를 찼다. ‘저, 둔한 놈.’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연서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상이 홍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가벼이 입을 열었다.
“네가 가도 저 사람은 널 만나러 올 거다. 분명해.”
이어 연서강을 본다. ‘올 거지?’하고 물으며, 연서강은 ‘아,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홍이를 다시 보았다. ‘봤지?’ 홍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며 연서강은 곤란한 듯 웃었다. 그 옥패를 계속 가지게 될 거라던 태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생각하며.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홍이는 고민하는 얼굴로,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수안궁으로 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연서강이 떠나는 이달 초열흘날에 맞춰 녹우당을 떠나고 싶다, 조건을 덧붙였다. 홍이의 말을 들은 태상이 연서강을 보며 ‘저 둔한 놈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을까.’하고 연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서 연서강은 또 의아한 얼굴로 웃었다.
* *
그 날 밤 이후로 처음 마주치는 연무강이었다.
연무강이 녹우당을 방문했던 그 날 이후 연서강은 그를 좀체 집안에서 보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일이 바빠져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보이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일이 바빠 그를 집안에서 보지 못한다면 연서강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와 괜스레 마주쳐 또 큰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 날 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인지라 연서강은 또다시 그를 만나면 그가 어떤 말로 자신에게 송곳니를 드러낼지도 걱정이 되었다. 자신은 곧 연무의의 명령으로 변방에 가야할 몸이니 연무강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연무강이 연무의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하자가 생길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은 육체적인 폭력뿐만이 아니다. 때때로 말은 폭력 이상으로 사람을 상처 입게 만든다. 만약 연무강을 만나면 그가 대체 어떤 말로 자신을 조롱하고 혐오하며 상처 입힐지 연서강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연무강을 마주치지 않고 변방으로 떠날 수 있기를 연서강은 빌고 빌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사나흘이라고 해도, 한 집에 살면서 변방으로 떠나기 전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 같다. 더구나 연무강은 연무의의 일을 바로 옆에서 돕는 든든한 심복이었으니. 연무의가 연서강을 일러 이것저것 말하고자 한다면 언제 어떻게든 꼭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서 연서강은 자신의 앞에 선 큰 형님을 매우 곤혹스럽게 쳐다보았다. 빤히 쳐다보았다간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킬까봐 연서강은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연무강의 시선이 머무는 제 머리통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어떡할까, 고만할 해도 없이 피하고 싶은 의욕만 앞서 연서강은 ‘편히 주무십시오.’라 인사만 건네고 그를 지나쳤다.
부친인 연무의를 뵙고 성헌당을 나오는 길이었다. 성헌당에 부친인 연무의만 있을 뿐, 큰 형인 연무강이 없는 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나오는 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연무강과 딱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래서 무슨 일이든 끝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단 말이 있는 것이다. 연서강은 상대방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연서강.”
그때, 등 뒤로 딱딱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던 걸음을 딱 멈추고 연서강은 얼굴을 구겼다. 여전히 소름이 끼치도록 차갑고 매정한 목소리였다. 이대로 못 들은 척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몰라 연서강은 ‘네, 형님.’하고 고분고분하게 몸을 뒤로 돌렸다.
무표정한 연무강이 연서강을 냉랭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연서강은 절로 뱃속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이고 꿈속에서도 본, 자신을 죽였을 때의 그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서강은 그저 어금니를 악 물었을 뿐, 등줄기를 달리는 전율로 몸이 벌벌 떨리지는 않았다. 순간 든 생각 때문이었다.
저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갖 무서운 상상을 해봤자 끝은 고작 ‘살해’당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 끝을 자신은 이미 겪지 않았나. 저 사람이 자신에게 저지를 수 있는, 그 보다 더한 잔혹한 짓은 없다.
“.......네, 형님.”
해서 연서강은 고개를 똑바로 하고 연무강을 쳐다보았다. 연무의와 닮았지만 그보다 더 무뚝뚝하고 매서운 생김의 남자가 연서강의 앞에 서 있었다. 갖은 무술과 훈련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몸에 우뚝 선 큰 키. 그리고 탄탄한 어깨와 강렬한 냉기를 품은 눈빛까지. 딱 한 번 자신을 ‘죽음’으로서 영혼 채 삼켜버렸었던 남자였다.
한 번도 웃어본 적도, 울어본 적도 없이 늘 냉랭하고 무심한 표정의 남자다. 그랬던 남자가 연서강과 눈이 마주치자 비소(誹笑)를 머금는다.
“이제 떨지도 않나. 아버님을 구슬리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보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아주 죽을 생각을 하고 있어 보이는 게 없는 게냐.”
연서강은 꾹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남자의 기운에 온 몸이 소금을 만난 달팽이마냥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과연 자신이라면 질색을 하는 연무강답다, 싶어 연서강은 숨을 잠시 멈췄다.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한편으로, 이전에 한 번 표출했던 적이 있는 적대감과 분노가 속 깊은 곳에서 울렁거렸다.
“아버님께 들었다. 그 기씨 문중 놈이 네게 무슨 꿍꿍이로 접근했던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그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천지 둘도 없는 친구로 대했으니, 과연 사지(死地)로 스스로 기어들어갈 만큼 정신이 혼미하기도 하겠군.”
연무강의 날카로운 말은 연서강이 간신히 타일러 안정시킨 속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고작 이런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 세운 것인가. 연서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뭉근하지만 진한 아픔이 퍼졌지만 바르르 떨릴 바엔 아픈 것이 나았다.
하지만 이어 나온 말엔 연서강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수안궁의 태상을 만나서 또 무얼 할 생각이냐?”
연서강이 퍼뜩 고개를 들자 연무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왜? 내가 위사인 건 또 잊었나 보지?’ 그렇다. 연무강의 직위는 성과 황실의 경비를 담당하는 위사였다. 뒤늦게 깨닫고 연서강은 눈썹을 구겼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다만 녹우당을 비우게 될 듯하여, 녹우당에서 당분간 머물고 있었던 아이를 맡기기 위해 만났을 뿐입니다.”
“그래? 고작 아이 하나를 맡기기 위해 이 나라의 태상까지 찾아갔단 말이지.......”
상대방이 믿지 않던 간에 그건 진실이다. 연서강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자신이야 연씨 문중의 사람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찌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태상과 홍이는 달랐다. 앞으로 일어날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괜히 자신 때문에 그들에게까지 감시와 경계의 시선을 갈까 연서강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정말, 그들과는 아무 관련이!”
“말이 되는 소릴 해!”
다음 순간, 연서강은 벼락같은 노호성과 함께 상대에게 멱살이 잡혀들어 올려졌다. 크윽. 연서강의 채 다물지 못한 입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서강은 멱살을 잡은 연무강의 팔을 잡고 숨통이 막히는 곹오에 허덕였다.
고통으로 흐릿해진 시야로 와작 얼굴을 구긴 연무강이 들어왔다.
“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마라, 연서강.”
그렇게 말하며 연무강이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잠깐 잡혀 있었던 멱살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졸도의 위기까지 맛보았던 연서강은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제 목과 옷을 매만지며 연서강은 주저않지 않기 위해 벽에 등을 대었다. 하, 하아, 제 의도와 상관없이 거친 숨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연무강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죽어라. 차라리 죽어. 네 말대로 전쟁터로 가서 아예 죽어버려라, 연서강. 뭔가 허튼 짓을 꾸미고 있단 걸 들키기라도 하면 내가 너를 직접 죽여 버릴 테니.”
“.......”
이마에서부터 후두둑 떨어지는 땀을 느끼며 연서강은 고개를 들어 연무강을 보았다. 결코 부서지는 일 없는, 강철로 만들어진 상처럼 거기에 우뚝 연무강이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차갑고 매서운 눈빛에 연서강은 두려움을 느꼈다. 나아가 연무강이 한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란 사실도 알았기 때문에.
하지만.
연서강은 이를 으득 갈았다. 숨통이 트이자 든 생각은 ‘그래서?’란 표독스런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멱살을 잡혔던 곳을 제 손으로 꽉 틀어잡으며 연서강은 외쳤다.
“제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짓을 꾸미든 형님과 상관없지 않습니까! 연씨 문중에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될 일 아닙니까! 제가 연우비의 아들이라 기분 나쁘고 짜증난다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형님께서는 제가 하는 일에 이목조목 참견하며 분노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가 그 겨울, 자신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홍이가 죽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일도 없다. 순간 괜한 울화가 일어 연서강은 연무강을 노려보았다.
“죽일 테면 죽이십시오! 아무래도 형님은 어떤 이유를 대서든 저를 꼭 죽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냉정하고 딱딱했던 얼굴이 깨지면서 그 안에서 짙은 혐오감이 드러났다. 연무강이 소리 질렀다.
“네놈이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연서강은 흡, 숨을 들이켰다. 죽는다. 죽을 것이다. 그렇게 직감했다. 하지만 연무강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이를 갈 뿐, 다음 행동을 행하지 않았다. 그저 연서강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끈질기게 제 얼굴에 머무르는 걸 연서강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느끼기만 했다. 그 집요한 시선에, 그 호흡에, 그리고 자신을 가로막은 장벽 같은 매서운 남자의 모든 신경과 정신이 자신에게 꼴려있음에 연서강은 온 몸이 얼어붙었다. 연무강이 익히 전에 ‘죽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씹어 삼켜버렸듯이, 냉정한 시선과 싸늘한 기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파헤쳐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죽어라, 연서강.”
이어 흘러나오는 저주 같은 말에 연서강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연서강은 어금니를 악 물었다. 연무강이 연서강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죽어버려서,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내밀지 말길.”
나직한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심장이 싸늘해졌다. 그 말이 차라리 소리치고 고함을 지르는 것보다 더 무겁고 아팠다. 간신히 숨만 뱉으며 연서강은 더더욱 세게 제 옷자락을 붙잡았다. 연무강이 그런 연서강에게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어 연서강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발걸음을 옮겼다.
물건을 보는 듯한 무감한 시선에 연서강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바짝바짝 목구멍이 탔다.
연서강은 성헌당으로 들어가는 연무강의 등을 응시했다. 망설임 없는 등이, 마치 들러붙는 연서강의 시선을 털어버리는 듯 한 번 흔들리고 완연히 문 안으로 사라졌다.
“.......”
머엉하니 연서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내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싫어한다면 싫어하라지, 쫓아내고 싶다면 그러하라지. 그리 소요(逍遙)하며 중얼거렸던 그 때와는, 시선을 내리며 고개만 끄덕였던 그때와 달리 지금 연서강의 속을 새까맣게 물들인 것은 ‘반발심’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해도, .......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성헌당을 응시했다. 어둑어둑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안에 언뜻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래도 결국 끝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분노하고 화를 내도 자신은 그 앞에서 웃으며 살아남겠다.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