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37)

 5.

 현재 황실의 정궁(正宮) 쓰이는 백의궁(百依宮)은 약 200여 년 전에 현재 북경(北京)이라 불리는 주천(奏天)에서, 옛날 남경(南京)이라 일컬어졌던 백의주(百依州)로 천도(遷都)하면서 지어진 궁이었다. 무려 6백여 채 건물과 8천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백의궁은 완공 기간만 해도 무려 15년이나 될 만큼 크고 화려하게 건축되었다. 그리고 천도를 한 이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라 정치의 중심지이자 제국의 지존이신 황제의 거주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현재 백의궁이란 정식 명칭보다는 황궁이라고 불리는 빈도가 잦은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려 두 개의 거대한 문(門)과 하나의 문루(門樓)를 지나야만 했다. 거기에서 이어 나오는 마지막 문이 황궐의 정문인 혜문(慧門), 그곳을 지나서야 비로소 문무백관들은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높다란 성대 위에 다섯 개의 누각이 지어져 있는 혜문은 유사시 장군들의 출정식 및 제천행사 때 기념식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혜문을 지나면 그제야 정전의 입구이기도 한 경천문(景天門) 광장이 나왔다. 경천문 앞엔 황제가 있는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는 금천(金天)이 흐르고 그 위에는 다섯 개의 금천교(金天橋)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연서강은 금천교까지도 채 가지 못했다. 혜문의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가 연서강의 출입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 와본 것은 겨우 손에 꼽힐 정도지만 항상 부친인 연무의와 동행했었기 때문에 출입하는데 제지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아마 다른 형제들도 드나듦에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연서강은 가지고 온 옥패를 병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패는.”

 옥패를 보여주면 알아서 자신이 있는 곳까지 안내될 것이라던 남자의 말은 정말이었다. 옥패를 본 순간 병사의 얼굴이 살짝 굳더니 그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궁녀를 불러 무어라 말을 했다. 황궁 여관(女官)이 정복인 풍성한 수박색 비단 치마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궁녀는, 병사의 설명을 듣고 연서강을 힐끗 곁눈질로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연서강을 향해 다가왔다.

 “소녀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무의를 따라온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연서강도 경천문 광장, 그 이상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연서강과 달리 궁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고 건물을 잇는 익랑(翼廊)을 지난 후에 나타난 문을 통과했다.

 몇 개의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담과 작은 정원, 전각과 누각을 지나고 나서야 궁녀는 발을 멈추었다. 대충 광장에서 서문을 지나 두 개 가량의 내궁(內宮)을 지난 듯 보였다. 이쯤 되니 연서강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는지.

 깊숙한 곳으로 왔다는 생각은 비단 지나친 건물 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광장과 달리 이곳은 매우 인적이 드물었다.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기운까지 감도는 곳이었다. 괴이쩍다면 괴이쩍은 일이었다. 아무리 깊숙하고 외진 곳으로 왔다 해도 황궁의 안이다. 시중드는 사람만 해도 몇인데 이리도 인적이 없다니.

 해서 연서강은 제 눈앞에 존재하는 건물의 현판을 보았다.

 “수안궁(藪眼宮).”

 소리 내어 읽자 궁녀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말한 그녀는 연서강이 ‘잠깐.’이라는 말도 꺼내기도 전에 걸음을 재촉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결국 연서강은 건물 앞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여긴 어디지?

 가벼이 둘러보니 들리는 것은 새 소리와 멀리서 떠드는 사람의 목소리뿐이다. 기이할 정도로 적막하다 생각했을 때, 문득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많이 기다리셨는지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에 연서강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 여인이 공손하게 몸가짐을 하고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기를 안내했던 그 궁녀가 아니었다. 이번에 나타난 궁녀는 수박색 치마를 입은 아까의 궁인과는 달리 봄꽃 같은 연분홍 능라금의(綾羅錦衣)를 입고 있었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하고 말을 이으며 그녀는 다시 연서강에게 길을 안내했다.

 그녀는 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나오는 곳은 또 정원이었다. 궁의 후원인가, 싶어 연서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느 후원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였기 때문이었다.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사방에 네 개의 정자가 있었다. 기화요초는 물론이고 요상하게 뒤틀린 고목과 심상치 않은 모양의 괴암괴석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식물들이 우거져 있었다. 연서강은 순간 자신이 한 발짝 만에 뒷산에라도 올랐나 의심했다.

 그래도 여기는 좀 나았다. 동쪽에 있는 정자에 여인 두어 명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궁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공주라 보기엔 행색이 초라했다. 품계가 낮은 나인들인가? 하지만 연서강을 쫓는 그네들의 시선에는 궁에 들어온 손님을 보는 두려움은 없고 마치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과 흥미뿐이었다. 묘했다.

 “대체, 여긴.”

 하고 물으려 하자, 궁녀가 ‘쉿.’하며 검지를 입에 갖다 대었다. 조금 놀란 연서강을 향해 살풋 웃으며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연서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궁 후원은 수안궁과 또 한 건물을 연결 짓고 있었다. 새로이 나타난 건물의 현판을 연서강이 또 소리 내어 읽었다.

 “보후전(保後殿).”

 가운데 후(後)의 글자를 보고나서야 연서강은 깨달았다. 이곳이 어딘지.

 “수안궁(藪眼宮)과 보후전(保後殿). 수후교?”

 연분홍 옷을 입은 궁녀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연서강의 말이 사뭇 웃긴다는 투였다. 해서 연서강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알았나 생각했다.

 궁녀는 보후전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연서강을 안내했다. 그리고 건물 안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 내어 보고했다.

 “객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태상.”

 “태상?!”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보고를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연서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의궁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건물들이 수후교, 즉 국교와 관련된 건물이라는 것까지는 연서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보후전은 쌍두뱀 신에게 제례의식을 치루는 곳일 테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보후전의 안에선 짙은 선향 냄새가 났다.

 그 두 건물을 보면서 연서강은 전에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나라에서 일하는 신관 쪽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그래서 남들도 잘 모르는 쌍두뱀 신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설마 그가 황실과 중앙정권 업무를 주관하는 구경 중 한 명일 줄 까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태상(太常)이라면 종묘와 제사, 신관들, 나아가 연서강의 형인 연의진이 속해있는 의전(醫專)의 일까지 주관하고 있는 장관(將官) 중 하나였다. 그 직위는 황제를 보좌하는 삼공(三公)보다는 아래지만 종교와 제사에 관련해서는 정점에 서 있는 직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관련된 몇몇 분야에서는 삼공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기도 했다.

 “왔는가.”

 경악한 연서강을 향해 ‘태상’이라 불린 사람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 벽면 한 가득 메운 쌍두뱀 신의 조각이며 금상도 내버려두고, 연서강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태상’이란 사람의 화려한 복색이었다. 개나리도 거절할 샛노란 색에 깊은 바다색을 닮은 진청색의 옷을, 전의 그 남자가 입고 있었다.

 남자가 연서강에게 다가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이비 따위가 아니지? 나는 진짜라네.”

 해서 연서강이 소리쳤다.

 “국교가 사이비라니!”

 태상의 얼굴이 구겨졌다.

               * *

 “그놈의 사이비 타령.”

 어째서 남자가 ‘누구신지?’라고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하지 않았는지, 왜 굳이 이 구중궁궐 안까지 오라 시켰는지 그 불평에서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즉, 연서강의 ‘사이비’란 단어를 불식시키고자 일부러 그런 것이다. 더불어 연서강이 ‘굉장한 사람이었군요!’하고 감탄하면 더욱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따라서 현재 남자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연서강이 ‘사이비’란 단어를 지우지도, 자신의 지위에 감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어 ‘저런 남자가 우리나라의 태상이라니.’하고 충격에 빠진 듯한 연서강을 보고 더더욱 불쾌해진 듯 했다.

 차를 내올까요, 하고 묻는 연분홍색 치마의 궁녀를 손짓으로 바깥에 내보낸 다음부터 남자는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찰나의 경악으로 인해 속내를 그대로 노출시켜 남자를 불쾌하게 만들고 만 연서강은 그 옆에서 죄인의 심정으로 남자의 투덜거림을 들어줘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실수했습니다.’라고 계속해서 사과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옥패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연서강은 손에 쥐고 있던 옥패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연서강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내게 주면, 다음엔 어찌 예까지 들어오려고 그러시나.”

 “다음?”

 기이한 말을 들었다는 식으로 연서강이 고개를 들자 그제야 남자가 한층 풀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었지 않은가. 설매 내가 말하고 있었을 때 자고 있었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내게 친 맞장구는 모두 잠꼬대였다고.”

 “무슨 말슴이신지?”

 살짝 연서강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 반응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인지 남자가 비로소 씩 웃는다. 남자가 연서강을 가리키며 놀리듯 말했다.

 “못 들었나?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자네가 되돌아 왔다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네를 옥에 가둬라 명해야 할지 모르니까.”

 연서강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멋대로 쌍두뱀 신에 대한 기밀을 술술 풀어놓았던 것은 그쪽이 아니었던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깜박 졸 법도 했었던 지루한 이야기였다. 설마 그런 이야기가 국기기밀씩이나 될 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자신을 말끄러미 쳐다보며 웃는 남자 때문이었다.

 “이미 뭐라 불평해도 어쩔 수 없다네. 나도 자네 때문에 굉장히 놀랐어. 쌍두뱀 신의 권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건 현 황제만이, 그리고 다음 황제가 될 사람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라 그런 백주대낮에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돌아다닐 줄은.”

 정작 자신을 되돌려 보낸 사람은 너는 뱀 신의 사자가 아니냐고 자신이 묻자 코웃음을 쳤었다. 연서강은 이 이야기 또한 홍이가 들으면 유치하다 비난할까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걸 모르던데요.”

 연서강이 말하자 남자가 턱을 괴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짙은 선향 냄새와 잘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밖에서 나서 밖에서 자랐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녀라, 여자인가 보군?”

 순간 아차,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젠 들켜도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연서강은 솔직하게 ‘네. 어린애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남자가 정말로 태상이라면 홍이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의 행색만 보고 판단한다면 여전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고 마땅치 않은 구석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직위만 본다면야 더할 나위 없는 안전한 장소가 아닌가, 이곳은.

 “여자 아이.”

 연서강의 말을 따라하며 남자가 갈색 눈을 가느스름하게 만들었다. 살짝 그의 입매가 굳은 것을 보고 연서강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전에 만났을 때도 남자는 그랬다. 홍이를 모르면서도 그녀에게 애석함과 친애를 보여줬었다고. 해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여자 아이가 뭐 어떻다는 겁니까?”

 연서강의 질문에 남자가 살풋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연서강을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말하듯 미미한 배신감이 깃든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왜 자신이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연서강은 고민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답에 도달했다.

 기연조가 그러지 않았나. 녹우당에 여자애를 가두고 제가 원할 때마다 그 여자애를 취한다는 소문이 나돈다고.

 확실히 나이가 찬 남자와 힘없는 여자아이의 조합은 세간의 눈에 좋지 않게 비칠 듯 싶다. 그래서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저어, 그 여자애와 저는 아무런 일도.”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탁, 남자가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깜짝 놀라 연서강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한 말속의 숨겨진 뜻에 부끄러워진 그의 볼에 미미한 열이 감돌고 있었다.

 “.......”

 남자는 연서강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연서강이 못마땅해서 얼굴을 찌푸린 건 아닌 듯 했다.

 “.......이제야 알겠군. 자네는 ‘한 번만’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군. 어쩐지 말하는 내내 어딘가 이상하다.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알 수 없다. 어리둥절한 연서강에게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짧고 단호했다.

 “어쩌다 돌아왔나?”

 연서강의 답도 간단했다. 홍이가 되돌려 보낸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닌 듯 싶었다. 남자의 다홍색을 띤 갈색 눈을 보며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제가 죽어서, 홍이가.”

 “.......죽었다고?”

 그건 또 예상치 못했는지 남자가 얼굴을 다시 찌푸렸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연서강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제가 죽어가고 있는데 홍이가 함께 돌아가자고. 기르는 고양이가 죽어서 되돌아갈 생각이니 같이 가자고.”

 “.......”

 “한 번 밖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한 것도, 홍이가 가르쳐 줘서.”

 턱을 괸 남자의 눈이 다시 가느스름해졌다. 그의 하얗고 뾰족한 턱과 그 위를 덮은 길쭉한 손가락에 저절로 시선이 가서 연서강은 ‘그래서.’하고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화려한 옷이 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번에 눈에 들어온 건 남자의 수려하면서도 귀족적인 이목구비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머리칼이 남자의 고갯짓에 사르륵 움직였다.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를 두고 뭐라 할 게 아니라, 그 여자애더러 무슨 잔혹한 짓을 했냐고 물어야 했던 거였어.”

 “예?”

 잔혹한 짓?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이 홍이의 ‘제가 괜한 짓을 했나요?’란 질문과 맞물려 돌아갔다.

 연서강이 멍하니 두 눈만 깜박이고 있노라니 남자가 쓴 웃음을 지었다. 

 남자에게서, 아니 건물 자체에서 나는 선향 냄새와 뒤로 쌍두뱀 신의 조각을 두고 있으니, 연서강은 여기가 지상이 아니라 생과 사의 갈림길 중간에 있는 그 어떤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조용한 주변도, 선향 냄새도, 뒤에 있는 웅장한 신의 상도, 모두 다 연서강에게서 현실감을 빼앗았다.

 눈앞의 남자는 말할 것도 없다.

 “어제의 미진했던 설명을 덧붙이지. 자네도 이미 추측하고 있겠지만, .......여기는 황궁에 속해 있기는 하나 좀 동떨어진 곳이라네. 수안궁과 그 궁후원, 보후전은 모두 쌍두뱀 신을 모시는 곳이지. 일단 내가 지내는 곳이기도 하고, 그에 관련된 제사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며, 또.......”

 눈앞의 남자가 턱을 쓸며 씁쓰레 중얼거렸다.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신자들이 머무는 곳이지.”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신자들?”

 연서강의 순진한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다신교를 믿었던 거대한 나라가 붕괴되고 그 정치적 특색과 종교적 특색에 맞춰 크고 작은 몇몇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제정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아 나라의 이념이 곧 종교의 이념이 되었던 시기, 뱀 신은 고민에 빠졌다.

 왜 자신을 모시는 신전은 없는 것일까.

 붕괴된 거대한 나라가 차지했던 땅 위에 몇 백 개의 크고 작은 신생 국가가 생겼다. 각각의 나라는 수많은 신들 중 자신만의 유일신을 선택해 그것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고 그 신만 믿음으로서 국가의 안정도 도모했다. 그 가운데 땅바닥을 기고 흉물스러운 모습을 가졌던 뱀 신을 모시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강했던 호랑이, 용, 곰 신 등 여러 나라가 함께 모시기도 한 신도 있었으나 오직 뱀 신만이 없었다.

 뱀 신은 한탄했다. 그리고 주변 신들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그, 그리고 그녀는 자신만을 모시는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하나라의 시초였다. 하나라의 시황제는 쌍두뱀 신이 낳은 남자로서, 나라를 세운 다음 그 국교로 제 어머니인 쌍두뱀 신을 믿는 수후교로 지정했다. 쌍두뱀 신은 자신을 믿는 유일한 나라인 하나라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 그리고 그녀는 하나라가 결코 멸망하는 일 없이 순탄하게 발전해 나가길 기원하며 자신의 권능을 그 나라 국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눠준 권능이 바로 ‘되돌려 보내기’였다. 권능을 손에 쥔 사람들은 그 힘을 매우 현명하게 사용해 나갔다. 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 또는 제 나라를 위협하는 주변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권능을 타고 태어난 자의 수는 매우 적었지만 역대 황제들은 그 자들을 잘 이용하여 지금의 영화를 이룩해냈다.

 수안궁과 보후전은 그 권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현 황제와 앞으로 황제가 될 사람, 둘 뿐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간 악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건국 초기부터 내려오는 관습 중 하나였다. 황궁의 다른 사람들은 수안궁과 보후전을 그저 태상이 머무는 곳, 또는 국교인 수후교를 믿는 신자들이 사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제천행사나 여러 의례의식을 수안궁과 보후전에서 맡고 있기도 했다.

 “되돌려 보낼 수 있는 힘은 대부분 핏줄을 타고 전해지거든. 그래서 사실을 모르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엔 여기는 그저 대대로 신을 위해 제 몸 받쳐 봉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이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잠깐 남자가 침묵했다. 그는 연서강이 의아하게 생각할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영 탐탐치 않다는 목소리로.

 “.......하지만 뱀 신은 간악하고 교활한 신이다. 지혜의 신이긴 하지만, 그 지혜란 사람을 늪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그 뒤통수를 무는 간교함에 있지.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새로운 국가를 여는 데에 있어 그러한 신은 아무래도 거리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적 그 많은 신생국가 중에서 뱀 신을 모시는 신이 없었던 것이다. 모시는 신으로 확실히 강하고 용맹한 호랑이나, 인내심 있고 현명한 곰이 뱀보다 나았다.

 “게다가 이 나라는 뱀 신이 직접 자신을 모시라고 만들기까지 한 나라다. 뱀 신에게 있어 이 나라는 그저 자신을 숭배하고 즐겁게 해주는 유희에 지나지 않겠지.”

 아무래도 남자는 나라의 신인 쌍두뱀 신에 몹시 좋지 않은 감정이라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서강은 멍하게 ‘그래서요?’하고 물었다. 남자가 혀를 찼다.

 “열등감에 만든 나라가 제 성미에 찰 리가 있나. 그 나라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믿는다고 해도 제가 만든 나라이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말겠지. 그런 점에서 이 나라는 글러먹었어.”

 “.......”

 이 나라의 태상이 저리 말하니 그나마 있던 신앙심마저 달아나는 기분이다.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쓴 채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뱀 신에게 이 나라 사람들이란 그저 경연하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가끔 제 자존심을 깎아먹는 일이 생기면 두 팔 거두고 도와주겠지만, 그것뿐이다. 그저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즐거움을 얻고 싶어 하는 것뿐이라네.”

 연서강은 두 눈을 깜박였다. 여기다 자신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뱀 신에게 각별한 인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국교라, 그래서 믿었었던 것 아닌가.

 그의 주변에선 나랏일이면 나랏일, 경제, 연애,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면 모를까 신앙에 대해 열렬히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찍이 ‘태상’이란 존재가, 종교에 관련된 존재가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어 더욱 그랬다. 심지어 신벌이나 신의 축복이라 일컬어지는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권능을 나눠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의 축복, 하니 ‘홍이’가 생각나 연서강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람은 누구나 뭔가 큰일을 저질렀을 때 ‘그 때로 되돌아갔더라면.......’이란 후회를 하곤 한다.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후회와 잘못을 바로 잡게 도와주는 신의 축복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그 축복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는 콧방귀를 뀐다.

 “나눠줘?”

 그 반응에 연서강은 아차, 싶었다. 남자가 쌍두뱀 신에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생각한 게 방금이거늘, 그걸 잊고 가볍게 입에 올렸다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상다히 고까운 듯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듯 해서, 하물며 제 욕심 차려 되돌아온 게 아니라니 충고하지.”

 남자가 연서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갈색 눈에 연민 비슷한 빛이 떠올랐다.

 “되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나? 잘못과 후회를 다시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나? 기회라고 생각하나? 어림없는 소리. 쌍두뱀 신에게 있어 우리는 단지 경연하는 자라네. 그 신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권능을 나눠준 게 아니야.”

 엄중한 남자의 목소리에 연서강은 설핏 얼굴을 찌푸렸다.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당연했다. 자신이 바로 되돌아 온 자이고, 남자가 말한 대로 잘못과 후회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뱀 신은 지혜의 신이지. 그 지혜는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지는 지능이 아니야. 명석함도 똑똑함도 아니라네. 처세술이지. 교묘하게 살아남는 법이란 말이네. 뱀 신이 사랑하는 지혜란 그런 간교한 지혜를 말하지.”

 “.......그럼.”

 연서강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가 가벼운 한숨 소리와도 같은 웃음을 지었다.

 “.......뱀 신은 다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머리르 쓰고 고생하며 발버둥을 치는 지 두고 보며 즐기고 있을 뿐이라네.”

 “.......”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연서강은 불현듯 생각했다. 남자의 몸에서 나는 선향냄새, 그리고 오래된 지필묵에서 나는 습한 냄새가 토할 것 같이 역겹다고. 벽면에 자리 잡은 뱀 신의 조각이며 금상들이 전부 지옥의 악귀처럼 추악하고 무섭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사방팔방에서 뱀 떼들이 쏟아져 나와 연서강을 물어뜯고 잡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아찔한 현기증.

 “.......”

 연서강은 입술이 말라 자신도 모르게 혀로 쓸었다.

 얼마나 머리를 쓰고, 고생하며, 발버둥을 치는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남자가 ‘뭐.’하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잔뜩 얼어붙어 있던 연서강이 서둘러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뭐 때문에 죽었고,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지는 않겠네.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이상 자네 또한 ‘기필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바꾸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겠지.”

 “그야.”

 당연하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기연조도 그대로 둘 수 없지 않은가.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죽고 싶지도, 기연조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연서강이 말하자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겠지.’하고 대답했다. 연서강과 같은 존재를 하도 많이 만나봐 이제는 물어 듣는 대답이 모두 지긋지긋한 것처럼도 보였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나 그의 그 반응은 그랬다.

 “어쨌든 홍이라고 했던가. 그 여자애는 나라에서 .......아니, 내가 보호하도록 하지. 그녀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지낼 권리가 있어. 신에게 희생된 몸이니까.”

 다시 원래의 내용으로 돌아갔다.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홍이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런 연서강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자네가 좀 걱정이로군.”

 “네?”

 “나는 자네가 어떤 일을 벌이든 상관없네. 하지만 자네 같은 사람이 뱀 신에게 경연을 올리는 자가 되었다니, 염려되는군.”

 남자가 말하는 ‘경연’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연서강도 잘 알았다. 신에게 희생된 자는 홍이처럼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자이고, 경연을 올리는 자는 자신처럼 되돌려 보내진 자일 것이다. 경연(慶宴), 하고 연서강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신을 위해 펼쳐진 잔치와, 그 무대에서 신을 즐겁게 할 광대, 머리를 쓰며, 고생하며, 발버둥치는, 따라서 드는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연서강은 씁쓰레 웃으며 물었다.

 “잘 못 해내고 좌절할 것 같아서 말입니까?”

 “.......”

 그 질문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연서강은 생각했다. 자신도 과연 그 겨울이 올 때까지 기연조를 지켜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해내야 한다. 자신감이 없고, 용기가 없더라도 자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대신 할 사람도, 피할 방법도 없다.

 연서강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벽면을 메운 뱀 신의 조각을 보았다. 빽빽이 들어찬 조각들이 마치 자신을 향해 술렁거리는 것 같기도, 비소하며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먹을 가볍게 쥐며 연서강은 남자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가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해낼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진창이 되어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서강에게 남자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왠지 남자는 남에게 냉정한 듯 행동해도 괜한 오지랖은 넓은 인물로 보였다. ‘못된 놈에다 이용해먹기만 하는 놈이라면 이리도 찝찝하지 않지.’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더욱 그래 보였다.

 남자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정치나 이런 것에 하등 관심이 없어. 하지만 지금 딱 한 번 관여하도록 하지.”

 잠깐 침묵한 다음 남자가 말했다.

 “전에 자네가 미행한 인물. -자세히는 밝힐 수 없지만 황후 쪽 사람이야.”

 “......., 감사합니다.”

 연서강은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인물이 황후 쪽 관련 사람이란 데에 놀란 게 아니다. 남자가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 관여하기 싫다는 듯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싫으면 말을 말지, 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연서강을 힐끗 쳐다보고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텐데, 뭘 감사씩이나.’ 중얼거리는 말에 연서강은 가벼이 웃었다. 연서강의 부친인 연무의가 현 황후의 큰아버지이니 그 말도 당연했다.

               * *

 애초에 생각을 달리 했어야했다.

 기연조의 일만 생각하다보니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미처 다른 것과 연관 짓지 못했다. 워낙에 기씨 문중의 황귀비 기씨 일화가 유명한 탓도 있었다. 자신의 집안 연씨 문중을 고려하면 당연히 연씨 문중 출신의 현 황후도 이에 관련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연서강은 성헌당 건물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불빛이 땅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솔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아버지는 성헌당 안에서 서간을 읽고 계시는 중이었다. 마실 것으로 백목단차를 가져갔다는 것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서강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그런데 도련님께서 무슨 일로 주인님을 찾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연서강은 ‘잠깐 이야기 할 게 있어서 그러네.’하고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했다. 연서강이 그의 부친을 찾은 것은 아버지에게 어떤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본채로 돌아온 것도 이 부탁을 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본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내지 못한 것은 연서강에게 다소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연서강이 그의 부친에게 할 부탁은 본채로 돌아오고 싶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일이었다. 크게, .......정말 크게 자신의 삶을 바꿔버리겠지.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뭔가 때문에 잔뜩 긴장한 숨을 삼키며 연서강은 손바닥에 축축하게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어찌 이야기해야 할까. 그런 소소한 고민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걸 말해도 될까. 말까 그러한 망설임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방 안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온다. 부친을 보조하는 하인의 목소리란 것을 어렵잖게 연서강은 알 수 있었다. 서간을 읽고 계신다 하셨던가. 그러면 답장을 쓰기 위해 대필을 할 하인을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연서강은 부친인 연무의는 대단한 악필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편지는 종종 하인에게 대필을 시키곤 했다.

 이윽고 결심한 연서강은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아버님, 연서강입니다.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방 안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연서강은 아버지가 언제 들어오라 말을 할까 초조해하며 어둡게 변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름이 잔뜩 껴, 별이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이었다. 

 “들어오너라.”

 부친 연무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서강은 갑자기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에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각오했다고 해도 부친의 목소리는 그를 긴장케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네.’하고 조금하게 대답한 다음, 연서강은 성헌당 안채로 들어섰다.

 본래 사랑채가 따로 있기는 하나, 호쾌한 성미의 연무의는 기존에 있는 사랑채로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연무의의 직위 특성상 방문하는 손님도 많았다. 그래서 사랑채의 역할을 하는 건물을 따로 지은 것이 성헌당이었다. 딱히 손님이 없더라도 서책을 읽거나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연문의는 종종 성헌당에 머물렀다.

 부탁을 올리기 전에 하인은 내보내야겠다. 생각하며 문을 열었던 연서강은 안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고 잠깐 얼굴이 굳었다.

 “.......형님.”

 하나의 탁자를 두 사람이 쓰고 있었다. 한 명은 연무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연무강이었다. 두 사람의 옆에 서 있는 하인은 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를 용도별로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활짝 펼친 종이 위에 알 수 없는 뭔가를 기록하며 연무의가 연서강을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방안엔 수분을 먹은 지필묵 냄새와 백목단 향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향과 달리 방안에 흐르는 분위기는 매우 딱딱하고 차가웠다. 연무강이 연서강을 보았다. 그의 손에도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연무강을 보고 잠시 굳었던 연서강은 연무의가 고개를 들어 재차 ‘무슨 일이라 묻지 않았느냐?’라고 묻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버님,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때, 아무 말 없이 연서강을 바라보고 있던 연무강이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충고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랬는지 연무강의 말을 들은 연무의가 ‘.......그렇군.’하고 대꾸하며 종이에서 붓을 뗐다. 하인이 그 종이를 가져다가 돌돌 만 후에 호롱불에 태웠다. 새까맣게, 하얀 종이가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 종이를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던 연서강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시선이 자시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 말은 방에 들어올 때부터 하지 않았느냐.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들으니 지겹구나.” 탁. 연무의가 역증을 내며 붓을 내려놓았다. 그가 재촉했다. “이 아비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어서 용건을 말하지 못할까?”

 그 말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하인에 시선을 주었다. 눈치 빠른 하인이 연서강의 뜻을 알아차리고 ‘잠시 자리를 피할까요?’하고 연무의에게 여쭈었다. 그 말에,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고 생각한 듯 연무의가 설핏 인상을 썼다. 그 순간 연무강의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라고 하십시오. 무슨 말을 할 작정이기에 듣는 귀까지 줄이는지 퍽 궁금하니까요.”

 “.......그러자꾸나.”

 연무강까지 그렇게 나오자 자신의 고집만 내세우기 힘들기 된 연무의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연무의가 손짓으로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인이 연무의, 연무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서강까지 인사를 한 다음 방안에서 나갔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일렁일렁거리는 호롱불의 열기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연서강에게까지 전해졌다.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던 방안이 냉정한 긴장으로 타오르는 듯 했다.

 하인이 방을 나가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하는 두 쌍의 시선에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연무의가 말했다.

 “자, 원하는 대로 하였다. 어서 말해 보거라.”

 재촉하는 부친의 말에 연서강은 힐끗 연무강을 보았다. 그러나 연무강은 연서강의 시선에 담긴 뜻을 무시했다. 그는 되레 팔짱을 낀 채 과연 연서강이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는 얼굴로 연서강을 응시하고 했다. 연무의의 시선과 재촉 또한 연서강의 심장을 말려들어가게 했지만, 형님인 연무강의 것은 더 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 그러니까.......”

 어지럽게 시선을 돌리며 연서강은 겨우 입을 열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저를, 추천해주십시오.”

 “.......네 놈을 감히 어디로?”

 하고 되물은 것은 연무의가 아니었다. 연무강이었다. 연서강의 말을 들은 연무의는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단박에 연서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무의와 달리 연무강은 와작 얼굴을 구기며 연서강을 쳐다보았다. 연무강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연서강은 자신에게 겨눠져 있는 활을 보았다. 파르르, 활시위가 떨리고 있었다. 연무강의 시선에 그대로 격침당한 듯 연서강은 우뚝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삽시간에 파리해진 연서강을 보며 만족했는지 연무강이 슬쩍 웃음을 내비치며 가벼이 조롱했다.

 “설마 직위를 하나 달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라는 귀족 사회였다. 벼슬길에 진출할 수 있는 자들이 오직 귀족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고위 귀족에 한해선 몇 등급까지의 벼슬자리에 특정 누군가를 추천할 수 있는 추천제가 있었다.

 물론 추천받을 수 있는 벼슬자리에 한계가 있고 그 기간도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시험을 쳐서 관리에 등용되는 방법보단 쉬웠다. 업무기간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실제 업무를 한 경험을 크게 쳐 간단한 시험만 치루면 정식 관리로 발탁되기도 했다. 해서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이 추천제가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을 귀이 여기는 사회 풍조가 있어, 추천으로 관리가 되면 주변에서 그 인물을 한심하다 생각하며 하찮게 여기는 일이 잦았다. 물론 추천해주는 사람 또한 추천해준 인물이 얼마나 유눙한지, 무능한지에 따라 제 인상에도 타격을 받았다. 추천해준 인물이 무능하다 판정이 난다면 경우에 따라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 때문에 엄격하고 개개인의 능력을 무척 중시하는 연씨 문중에선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는 제도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종종 연무의와 친분이 있는 귀족이 놀고 있는 연서강이 딱하다 하여 추천을 해주겠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연무의는 ‘저 놈이 못난 놈이라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라고 답을 했다. 연무의는 남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조차도 수치스러워 하며 연서강을 타박했었다.

 “.......맞습니다.”

 그러한 연무의였기에, 연서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연무강이 조소(嘲笑)하며 중얼거렸다. ‘연씨 문중에 아주 먹칠을 하는군.’ 그 말에 ‘연우비의 자식주제에.’란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있음을 연서강은 알았다. 이전이었다면 그 말에 크게 위축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연서강은 연무의에게 자신이 연우비의 소생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알렸고, 또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아니, 물러서면 안 되었다.

 연서강은 연무강의 조롱에 이를 악물며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연무의. 자신의 부친. 아니, 실제로는 자신의 외숙(外叔), 그가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중요한 건 연무강의 반응이 아니라 연무의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부끄럽지도 않으냐?”

 라고, 연무의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확실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연서강은 매달리는 기분으로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네.”

 부끄럽다. 지금까지 놀다 쉬며 벼슬길이라곤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제사 부모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일자리를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하지만 ‘겨울’이란 기한을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다.

 연무의가 편지를 훑어보며 심상하게 대꾸했다.

 “차라리 가을에 있는 시험을 보는 게 낫지 않으냐?”

 “안됩니다.”

 단호한 연서강의 대답에 연무의가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그가 이어 물었지만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을은 너무 늦다. 연서강은 속으로 곱씹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늦어. 그때는.

 그 일은 겨울에 터진다. 아직 세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의 대립에 황후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아무 기대도 없고 신뢰도 없는 연무의가 무슨 연유냐고 물어본다. 한들, 새삼 대답해줄 리가 없다. 신뢰, 신뢰. 그래, 자신은 신뢰를 쌓아야 했다. 그것도 연무의와 황후에게서.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마치 뜬 구름잡듯 이 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또 그 겨울을 재래를 보게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지금 자신이 벼슬길로 나아가 연무의에게서 신뢰를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뢰를 쌓기 위해선 실적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일단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면 실적도 쌓을 수 없게 된다. 가을에 있는 시험을 봐서 합격해 관리가 되는 건 너무 늦다. 실적을 쌓는 시간도, 기연조가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는지 알아보는 데에도 너무 늦다.

 바로 지금이 아니면 모든 게 다 늦게 된다.

 해서, 연서강은 연무의를 향해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왜냐?”

 연무의가 연서강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옆에서 연무강이 인상을 쓴 채로 연무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마도 연무강은 부친인 연무의가 평소처럼 연서강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거절할 것이라 예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어째서 연무의가 연서강을 본채에 불러들이게 되었는지.

 실제로 연무의는 마치 탐색하는 눈으로 연서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탐색하려 하는지 연서강은 알고 있었다. 연무의는 연서강이 기연조에게서 ‘무언가’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들었는지, 그것이 과연 자신들에게 있어 쓸모가 있는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연조에게서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연서강은 잠깐 침묵하며 말을 아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서강아.”

 연무의가 재촉하자 비로소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한 후엔 제가 사정없이 이 집안에서 내쳐질까, 걱정이 되어 말 못 하겠습니다.”

 “.......”

 이번에는 연무의가 ‘어째서?’라고 묻지 못했다. 연서강은 그의 침묵에서 망설임을 얽어냈다. ‘아니라고 말씀은 안 하시는군요.’하고 연서강은 연무의의 망설임을 더더욱 부추겼다. 말(言)만큼 다루기 손쉬운 무기도 없었다. 잘못 고삐를 잡으면 날뛰는 말보다 온순했고, 자칫 잘못 다루면 피가 나고 다치는 어떤 무기보다 부드럽고 유연했다. 단 몇 마디의 말만으로 자신을 방비하는 게 가능했다.

 “제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쓸모가 있어야 이유를 듣고도 아버지께서 절 내치지 못하실 것 아닙니까.”

 자신의 말에 연무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떤 의미로 짓는 미소인지 연서강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그가 자신의 말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윽고 연무의가 말했다.

 “무강아, 잠시 자리를 피해다오.”

 연무강을 향한 말이었다. 뜻밖의 말에 연무강이 잠깐 당황했다.

 “아버님?”

 ‘이게 무슨?’하고 묻듯이 연무강은 연무의와 연서강을 번갈아 보았다. 연무의는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연무강은 당황한 동시에,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무의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그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방을 나서기 직전, 연무강은 잠자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연서강을 한 번 슥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사나웠다.

 연무강이 문을 닫고 나가자 연무의의 입에서 그제야 쓸모 있는 말이 흘러 나왔다.

 “친우라 생각했던 사람이 이용했다는 걸 알자마자 네 몸의 안전을 찾는 게냐.”

 연무의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연서강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연무의를 쳐다보았다. 연무의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 관심도 없는 척 손안에 든 편지를 검토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연서강은 그가 연무강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자신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서 연서강은 대답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걸 느끼긴 했습니다.”

 연무의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이한 일이구나. 나는 내 소매(小妹)에게서 그걸 느꼈거늘.”

 소매이라 함은 아마 자신의 친모인 연우비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연서강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사실 연우비. 라고 해봤자 연서강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였다. 비록 책임감은 없을지언정 열렬한 애정을 품고 있는 여자일 것 같기는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사랑하는 사람만 선택할 수는 없었을 테니.

 그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연서강은 ‘야반도주할 정도면 어째 행복하게 살지를 못하고.’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야반도주 하는 것조차도 부푼 꿈에 지나지 않아 드는 생각이 맞았다. 

 “설마 네 머리에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궁리가 나올 줄이야. 영락없이 연우비처럼 미련퉁이같이 굴 것만 같았는데.”

 “.......”

 “하지만 괘씸한지고. 아비가 필요하다면 자식된 도리로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 제 몸 안전을 생각하며 두 번씩이나 흥정을 하려하더니, 천하의 불효자가 따로 없군.”

 “.......죄송합니다.”

 “내가 지금 당장 네 놈의 목에 칼을 겨누고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 협박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여전히 가벼운 투의 대꾸에 간담이 서늘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에게서 말을 들은 그 짧은 순간 협박할 생각도 해보았던 것이다. 억지로 연서강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랬다면, 벙어리가 된 채 죽었겠죠.”

 실제로 연무의가 자신을 붙잡아 사지를 찢어놓는 고문이라도 하면 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말만이라도 연서강은 허세를 부렸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 겨울날을 어찌 버텨야 할지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허세를 부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연서강의 말을 들은 연무의가 한숨 쉬며 ‘고약한지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 녀석을 추천해줄 마음은 없다. 이제까지 네놈이 해온 짓을 보면 뭘 시켜도 성에 안 찰 것 같아. 네놈에게 실망하는 것도 이제 지겹구나.”

 거절에 가까운 대답에 연서강은 눈썹을 구겼다. 뭐라 더 말을 몇 마디 더해야 하나 싶어 그는 재빨리 궁리했다. 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붙잡을 뭔가를.

 그때였다.

 “그러니 우선 네가 보통은 된다는 증명을 보여다오.”

 “.......증명, 말입니까?”

 연서강은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연무의가 편지에서 눈을 떼고 연서강을 응시했다. 연무강을 닮은 듯 다른 그 눈에선 강한 기백과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엄중한 목소리로 연무의가 말했다.

 “향이가 그러더군. 잡일과 간호를 맡을 자를 한 명 보내달라고. 가급적이면 글자를 아는 사람으로 말이지. 무슨 일에 쓸지는 잘 모르겠다만, 거기에 한 번 가보련?”

 마지막에선 부드러이 물었지만 연서강은 잠깐 주춤했다. 연무의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룩, 그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향이는 분명 연의향을 의미할 것이다. 누님인 연의향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았다.

 변경의 전쟁터다.

 “.......전쟁터, 말입니까?”

 목구멍이 말라 연서강은 침을 삼켰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무의가 ‘그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짓 선심 쓰는 듯 연무의가 말을 덧붙였다.

 “전쟁터라는 비유는 좀 그렇구나. 오랑캐를 토벌한다고 해다오. 전쟁이라니, 무슨. 잔챙이들을 정리하는 것뿐인데.”

 그야 확실히 백전무장에겐 그렇겠지. 연서강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연무의가 싱긋 웃었다. 연서강의 조그만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뭐, 까딱하다간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지만.”

 “.......”

 전쟁.

 무턱대고 추천을 해주는 것보다야 내게 오는 위험부담이 적지 않겠느냐. 늙은 아비를 봐서라도 이해해다오. 거기엔 네 누이와 동생도 있으니 지내기도 썩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리 말하고 나니 정말로 온유한 아비라도 된 것 같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 보내면 고생할 게 뻔하니 제 피붙이가 있는 데로 보내다니.“

 연서강은 연무의의 웃는 낯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쟁. 말도 못타고 무기 하나 다루지 못하는데다 의학에 전문적인 지식조차 없는 사람을 거기로 보내고, 자신을 온유한 아비라 칭하며 웃고 있다. 화가 나기 보다는 연무의의 뒤에 있는 꿍꿍이가 보여 연서강은 입 안이 써졌다.

 연무의는 연서강이 여기서 그만 포기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연서강, 자신이 이만 질겁하고 뒤로 물러나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하고 서둘러 사과하길 바라는 것이다. 연무의의 머릿속에 든 자신이 고작 그런 놈에 지나지 않는 데서 연서강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로 자신이란 인간은 그런 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쟁.

 연서강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내기 썩 좋은 곳을 소개시켜줄 것이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연무의의 직위는 태위. 그가 아무리 추천을 해봤자 문관 쪽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니 무관 쪽 어디 잡일을 하는 곳으로 빠질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전쟁. 전쟁이라.

 머릿속으로 연의향과 연서령이 있었던 지역이 어땠지 생각하던 연서강이 결국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

 의외의 대답이었던지 연무의가 한 일자로 입을 꾹 다물며 연서강을 돌아보았다. 연무의와 시선이 부딪치자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무의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설마 연서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일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연무의의 패인은 연서강이 현재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연서강은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를 갔다 오면 제가 그래도 ‘보통’ 수준은 된다고 생각을 고쳐주시겠습니까?”

 “.......향이와 령이의 말도 들어봐야겠지만, 그렇게 해주겠다.”

 연무의가 혹시라도 말을 취소할까봐 재빨리 연서강은 대답했다.

 “여러 곳에 신의가 깊으신 아버지께서 약조해주신 것이니, .......믿겠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연서강이 말할 때 연무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추후에, 구체적으로 제가 언제 떠나면 좋을지 불러 가르쳐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며 연서강은 연무의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했다. 연무의는 찌푸린 얼굴로 탁자에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촉박하게 들리는 탁탁탁-, 소리가 지금 연무의의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연서강은 문을 닫고 나왔다.

 연서강이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고 섰다.

 고개를 드니 연무강이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느라 깊은 피로감에 잠겨 있었던 탓에 위기감조차 납으로 감싸인 듯 흐릿해졌다. 피하자, 가까운 곳에 아버지가 계시니 제 아무리 형님이라도 큰 일은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워서 연서강은 소리 없이 연무강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는 옆으로 비켜 발걸음을 옮겼다.

 연무강은 아무 말 없이도 연서강을 시선으로 쫓다가 불현듯 물었다.

 “무슨 생각이지?”

 되레 연서강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려 연무강을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연무강의 얼굴이 보였다. 거기서 연서강은 여느 대와똑같이 연무강의 자신에 대한 불쾌함을 읽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연서강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형님은 제가 연우비의 자식이라 그리 싫어하시는 것입니까?”

 거의 답이 정해진 것과 다름없는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그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연서강의 질문에 연무강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이어 으득, 하고 연서강은 그 고요한 밤중에 날카로운 잇소리를 들었다. 연구망의 표정이 위험한 것으로 변하자 연서강은 그제야 ‘아차.’ 했다.

 건들일 것이 따로 있지, 이건 미친 짓이었다. 부친인 연무의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지금 자신이 한 짓은 거의 자해와 다름없는 짓이었다. 이 자를 자극해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부상과 죽음? 묵직하게 잠겨있던 머리가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연서강은 어리석다고 자신을 욕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 한정으로 포악한 짐승이 되는 남자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낭패다 싶어 연서강은 시선을 재빨리 피했다. ‘괜한 말을 하여 죄송했습니다.’하고 사과한 뒤에 그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이 거의 달리는 것과 진배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목이 졸릴 지도 모른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거라!”

 그러나 연서강은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멈춰서고 말았다. 뒤에서 들린 불호령 때문이었다.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이미 연서강의 몸은 우뚝 멈춰 서고 있었다. 지척에서 들리는 듯한 연무강의 목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잠깐 고민하던 연서강은 그래도 연무강의 얼굴이 보이는 편이 보이지 않는 편보다 낫지 않나 싶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연무강과 시선을 마주했다.

 달빛도 구름에 먹힌 밤이었다. 검은 바둑알처럼 어두운 칠흑이 연서강과 연무강의 주변에 안개처럼 만연해 있었다. 그 가운데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오로지 성헌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뿐이었다.

 성헌당에 아직 아버지도 있고 또 목청껏 비명을 지르면 주변을 지나가던 하인 한 명은 튀어나오겠지, 하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형님의 질문이 정확하지 않아 대체 무엇을 듣고자 묻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동생을 위해 한 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봐주시면.......”

 “녹우당에 처박혀 있던 네놈이 갑자기 기어 나와 벼슬까지 얻겠다고 하는, 그 심보. 그 속셈에 대해 물었다.”

 자세하게 물어봐준 것은 맞으나 여전히 무슨 답을 원하고 묻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연서강은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연서강의 표정을 뭐라 해석했는지 연무강이 다시 이를 갈았다. ‘이, 버러지 같은.’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연서강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맞는다-.

 커다랗고 억세 보이는 커다란 손을 보며 연서강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러나 사정없이 휘둘러질 것 같았던 손은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 긴장한 연서강의 거친 숨소리만 그 자리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겁에 질린 채 그는 연무강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연무강은 연서강을 노려보며 잠깐 침묵했다.

 “.......”

 그러나 찰나의 평화였다. 곧 연무강이 연서강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땅 쪽으로 끌었다. ‘악!’ 소리와 함께 연서강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위에다 연무강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렇게 바닥을 뒹굴어. 아득아득 기어 나오지 말고.”

 연서강은 고개를 들고 연무강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시꺼먼 주변에 불빛이라곤 성헌당 불빛 밖에 없는 곳에 서 있는 연무강은 마치 칠흑의 옷을 입고 있는 듯 했다. 그 눈빛도 서늘하고 매섭다. 그때, 그 날의 겨울처럼.

 저 사람이 나를 죽였다.

 그 문장을 기억해내자마자 연서강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덜 떨렸다. 칠흑의 옷을 입고 있는 연무강이 금바이라도 칼을 꺼내 자신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다닥, 윗니와 아랫니가 사정없이 부디혔다.

 “.......”

 그런 연서강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연무강은 곧 몸을 돌려 성헌당 쪽으로 걸어갔다. 바들바들 떨며 연서강은 연무강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순간, 왜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는지 악에 북받쳐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그저 서럽고 서러워서 연서강은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비친 연무강이 서늘한 눈을 하고 연서강을 칼로 베었다. 칼에 베이는 특유의 섬뜩함이 번개같이 연서강의 심장을 훔치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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