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아!
하고 저쪽에서 기연조가 소리쳤다. 그러자 연무진이 얼굴을 구기며 연서강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거의 내팽개치는 듯한 행동에 밀린 연서강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연무진이 그런 연서강을 한 번 힐끗 보고, 또 굳은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연조를 번갈아 본 뒤에 거칠게 중얼거린다.
-잘 하는 짓이다, 연서강.
그 소리에 연서강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연무진은 연서강과 몸싸움을 한 바람에 흙먼지가 묻은 제 옷을 몇 번 턴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도 기연조의 얼굴을 한 번 노려봐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허나 기연조는 연무진의 매서운 눈빛에도 절대 주춤거리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으로 연무진을 마주 노려보던 그가 이내 연서강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아?
그 말에 연서강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새삼스레 괜찮지 않을 것도 없었다. 연무진이 연서강을 괴롭히던 것도 그가 한참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이를 하나둘 먹자 연무진은 어느 순간 여덟 살이나 아래인 동생을 괴롭히는 것이 점잖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자각했는지, 요새는 연서강을 괴롭히는 일을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아주 기분이 나쁠 때나, 순간적으로 욱해서 시비를 걸 때만은 예외였다.
바로 지금 같은 때 말이다.
-아버지께 혼났나봐.
연서강의 대답에 기연조가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잘못해서 혼난 걸 왜 죄 없는 동생에게 화풀이야?
이어 흘러나오는 불평불만에 연서강이 ‘그런가.’하고 열없이 동의했다. 아래에 여동생 하나를 두고 있는 기연조는 나이가 열일곱 살이나 되어서도 여덟 살이나 어린 동생을 괴롭히는 연무진을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와서 다행이다. 아니면 한 대 맞을 뻔 했어.
연서강의 말에 기연조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달파하는 것도 같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가여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정확히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연서강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기연조와 친해진 이후로 연서강은 상대방이 비록 동정에서라도 자신에게 신경써주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자신의 처지를 불쌍하게 만들어 상대의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럴 때마다 기연조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애정을 쏟아주는 게 좋기는 했다.
기연조가 어렵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연서강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어온다.
-.......어디 놀러 갈까?
-어디로?
-음, 어디더라, 요 근처에 풍물 시장이 열린 것 같던데.
후에 신경을 써준답시고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것도 좋았다. 이럴 때의 기연조는 다른 무엇보다, 누구보다 자신을 우선해주곤 했다. 집안, 용모, 성격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기연조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때문에 기연조가 먼저 연서강을 만나러 오지 않는 한, 연서강은 기연조를 만날 수 없었다. 기연조는 항상 바빴고 또 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연서강은 기연조가 특별히 자신에게만 친절하고 상냥한 것이 아니란 걸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그래.
연서강은 기연조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연조가 자신만을 신경써주고 우선해준다면 연서강은 형들이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혀도 좋을 것 같았다. 행여 그것 때문에 자신의 다리라도 부러지기라도 하면 기연조가 매일 같이 문병하러 올지도 모른다. 다리 하나 부러지는 고통에 적어도 2주일은 행복하겠지. 재빠르게 머릿속을 스치는 계산이 매우 간악했다. 연서강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안되겠지. 그러면 안 돼.
기연조가 연서강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좋아, 그럼 가자.’하고 말하는 그를 보며 연서강은 따라 웃었다.
또, 그런 일도 있었다.
연서강이 기연조와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큰 형 연무강이 연서강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생각 없이 사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연서강과 얼굴을 맞닥뜨린 연무강이 대뜸 인사도 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예? 무슨.......
대체 형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짐작되는 일이 없어 연서강은 다만 의아한 얼굴로 연무강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을 본 연무강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제 아무리 아는 것이 없는 어린아이라 하지만 어떻게 이리도 어리석게 굴 수가 있느냐고, 연무강이 재차 꾸짖었지만 여전히 연서강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연무강이 그런 연서강을 노려보며 차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라도 사실을 깨닫고 잔혹하다 생각하지 마라. 네놈이 멍청해서 화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니.
춤추듯 기억들이 장미 꽃잎처럼 생각의 바닥에 깔렸다. 고이 깔린 기억들은 연서강을 더 깊은 상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 이런 일도 있었더랬다.
-.......녹우당으로 도망쳐 버릴까.
연서강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기연조가 잠깐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도망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충고해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는 자신의 말이 너무 엄격했다 싶었던지 ‘너무 힘들면 도망을 칠 수도 있겠지.’, 하고 웃으며 연서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
부드럽게 말하는 그를 향해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밝은 밤이었다. 화단에는 만개한 홍매화가 가득 피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결을 따라 떨어진 붉은 꽃잎이 팔랑팔랑 춤추며 달빛에 젖은 흙바닥 위로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연서강이, 문득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자네 같은 사람이 내 친구인 게 가끔 믿기지 않아. 이상하다네.
-그래?
술잔에 술을 따르며 기연조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
가벼이 대꾸하는 기연조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연서강이 입을 다물었다. 새파란 달빛에 비친 그의 잘생긴 얼굴이 천상에나 산다는 신선처럼 고결해보여 괜히 마음이 애잔하였다. 금방이라도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연서강은 두 손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홍매화 꽃잎들이 보였다. 홍매화 붉은 꽃잎들이 떨어진 자리가 흙바닥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가슴 속인 듯, 불현듯 가슴속이 서글퍼져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언제였던가, 그래, 맞다. 기연조에게서 ‘선’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였다. ‘선’ 이야기로 불안과 초조로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거절했다.’는 이야기로 빵, 하고 터졌다.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잡음들이 삽시에 고요해졌으나 그 소란들이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연서강은 계속 목이 말랐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연회에서 내게 왜 말을 걸었나?
-그야....... 약과 쾌유 기원 주머니를 건네주려고?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기연조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서강은 입술의 양끝을 볼 쪽으로 당겼다.
웃는 것도 아니고 굳게 입을 다문 것도 아닌 상태인 연서강이 이상했는지 기연조가 연서강 쪽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하려는지 그가 입을 조금 연다. 그러나 입술을 열었던 것도 잠시, 곧 연서강이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기연조는 입을 다시 닫고 연서강이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그것에 겨우 용기를 얻어 물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자네는, .......내가 좀 한심하지 않나?
말을 내뱉고 나자, 말을 하기 전 보다는 더 초조해졌다. 초조해진 연서강은 짧은 손톱으로 연신 손에 든 술잔의 표면을 긁었다. 차가운 술잔의 표면에 발라진 유약 때문에 자꾸만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 위로 기연조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한 어조와 목소리다.
-강아.
기연조가 술잔을 긁는 연서강의 손등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서늘한 자신의 체온과 달리 상대방의 손가락 끝은 희미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연서강은 마치 딸꾹질을 하듯 몸을 떨었다.
-내가 언제 너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봤던 적이 있던가?
-아니.
경직된 연서강의 대답에 기연조가 조그맣게 웃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런 말이 나올까.
-.......
연서강은 슬그머니 기연조의 손가락에서 제 손을 빼냈다. ‘나는.’하고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었다. 연서강은 기연조에게 이 말을 해도 될지 고민했다. 말을 꺼냈다가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도 무서웠다. 계속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꾹 다문 입으로 봉하며 연서강은 흐린 눈으로 기연조를 보았다.
이 말을 해도 되는가, 아니면 안 되는가.
-나는?
기연조가 뒷말을 재촉한다. 연서강은 기연조와 시선이 부딪히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어디선가 은은한 매화 향이 났다. 달큰한 향기가 술 향기와 섞여 어지러이 연서강의 곁을 맴돌았다.
나는. .......나는, 자네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
기연조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 달라 요구한 적은 없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이 의문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연서강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내게서 뭔가 얻어갈 것이 있는가? 나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가? 아니면, 즐겁지도 않은데....... 터져 나올 것 같은 의문은 거기까지다.
-강아.
그때 기연조가 연서강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연서강이 자신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자, 기연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를 한심하다고 느낀 적 없네. 다만 자네를....... 답답하다고 느낀 적은 몇 번 있어. 허나 그것보다는 자네의 형제들에 대한 노염이 더 크다네.
-.......
-나는 자네 주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너무 급박하지도 않고, 어떤 위기감도 없는 그 분위기가. 호수처럼 온유하며 시내처럼 다정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좋구나. 나는 자네 곁에 있으면 내 몸과 마음까지 다 청결해지는 것 같아 편하고 안심이 되어.
거기까지 말하고 그가 연서강을 바라보았다. 연서강은 희미한 미소를 띤 기연조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온유하고 다정한 얼굴로 연서강에게 말했다.
-그런 자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
-.......
연서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연조의 얼굴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고마움과 벅찬 감동과 별개로 서글픔은 더 커졌다. 어린 시절처럼 그를 껴안고 싶었다. 손가락 끝으로만 그 체온을 느낄 게 아니라 몸 전체로 느끼고 싶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뱅글뱅글 ‘선’ 이야기와 ‘연무강’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기연조의 곁에 서 있게 될 묘령의 여인, 그리고 형제들의 경고.
단풍나무가 아름다웠던 연회의 기억.
연서강의 머릿속에서 ‘기연조’와 관련된 부분은 무척 많았다.
어릴 때부터 만나온 사람인 탓도 있지만, 그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동시에 연모하는 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기연조는 연서강이 죽을 때 가장 강하게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확실히 그러기는 했다.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과 기연조와 자신의 사이가 아무 관련이 없을 리가 없다. 두 집안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을 때, 연서강은 단박에 눈치를 챘어야 했다.
아니, 정말 자신은 눈치가 없고 둔해서 알지 못했던 것인가. 부친과 형제들의 반응에서 정녕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인가.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기억 속의 제 감정이, 이제 와서 생각한다고 생생하게 떠오를 리가 없다. 연서강이 잘 갈무리한 꽃잎 같이 고운 기억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직 상대방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뿐이었다. 그 밑에 깔린 상대에 대한 부러움과 상대를 향한 고약한 독점욕, 욕심, 이기심, .......그리고 어둑어둑한 집착.
벌써 오월의 막바지였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오월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연서강은 자신이 상대방에 대한 애틋함과 애정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묻어버렸던 것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기연조는 자신이 못 미더워서 의지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어째서 그 겨울날이 올 때까지 기연조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나. 자신은 왜 그 겨울날이 올 때까지 친우에게 일어난 비극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나. 왜 그렇게 완벽하게 기연조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연서강에게 숨겼나.
당연했다.
기연조와 연서강은 친구이긴 했지만, 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
연서강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는 본채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소식은 연무의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집안 전체에 알려졌다.
연서강의 방은 이미 그가 녹우당으로 옮겨간 시점에서 사라지고, 대신 연무의가 수집한 여러 가지 그림이나 훌륭한 글씨, 그리고 문구, 바둑판 등을 전시해놓은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미 전시실로 자리를 잡은 자신의 방을 새삼 다시 되찾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 연서강은 현재 비어있는 빈 방, 즉 둘째 형인 연무진의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이미 아리따운 여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아이도 하나 두고 있는 연무진은, 본가 가까이로 분가하여 다른 집에서 살림을 차린 지가 오래였다. 그래서 그는 가끔 제사를 지낼 때나, 혹은 부친의 생신 등 볼 일이 있을 때에만 본가에 들르곤 했다. 그가 본가에 들를 때면 때때로 예전의 제 방에 묵기도했기 때문에 연무진의 방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손님방처럼 되어 버린 연무진의 방을 연서강은 아주 약간만 자신의 방처럼 꾸몄다. 잘 보는 서책을 갖다 놓고 즐겨 쓰는 찻잔과 필기구를 갖다 놓았다.
연서강이 자신의 방을 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무진은 다소 떨떠름해 하기는 했지만 크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반대를 할 마음이 있다 했더라도 그 소식을 전한 이가 다름 아닌 가문의 주인인 연무의이기 때문에 그는 뭐라 반대의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그런 것보다 연무진은 연서강이 녹우당을 나왔다는 소식에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평생 거기 틀어박혀 살 줄 알았는데, 하고 후에 연무진이 중얼거린 말을 전해 듣고 연서강은 대답을 해 줄 사람도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저도 그럴 줄 알았죠.’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연무진의 감상과 자신의 감상이 완벽히 일치했던 탓이었다.
연서강이 본채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의 또 다른 형인 연의진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의사인 연의진은 현재 집보다는 성안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가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참고할 서책을 찾으러 잠시 집에 들렀을 때였다. 소식을 들은 연의진은 연서강을 위,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오랜만이네.’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무강 형님이 또 날뛰시겠군.’ 중얼거리며 연서강을 지나쳤다.
연서강의 누나인 연의향과 여동생인 연서령은 서간으로만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변방 오랑캐들을 소탕 중인 연의향과 그녀의 부관인 연서령은 지금 한창 바쁜 시기였다. 연서강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연의향과 연서령이 있는 부대는 앞으로 더더욱 바빠질 것이다. 그쪽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닥쳐 국경을 넘어 도적질을 하는 오랑캐들이 대대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름의 끝날 무렵이 돼서야 그녀들은 오랑캐들을 모두 소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전투에서 연서령이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본가로 요양을 오게 된다는 것까지가 연서강이 미리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그 무훈이 인정받아 가을에 열리는 제천행사 때, 그녀들이 큰 상도 받게 된다는 것 까지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왔다간 사람은 큰 형인 연무강이었다.
연무강은 역시나 그 사실을 접하고 크게 노했다. 그러나 연무의가 친히 허락한 일이라는 걸 들었기 때문인지, 연의진의 말대로 길길이 날뛰진 못했다. 그가 자신을 보면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연서강도 알 수 있었다.
해서 연서강은 최대한 연무강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 집안에서 연무강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연무강은 연서강을 매섭게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무강이 연서강의 귀환을 납득한 것은 또 아니었다. 잠시 부친의 경고-형제 사이에 말썽이 생기는 건 자제하라-를 따라 분을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연서강이 아무 생각 없이 집안을 거닐다 복도에서 연무강과 딱 마주친 적이 있었다.
-!
지나가는 이도 거의 없는 늦은 저녁이었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연서강이 연무강의 험악한 시선을 느끼고 시선을 황급히 아래로 내렸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해. 연서강이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편.......
‘편히 주무십시오.’하고 연서강이 겨우 말했다. 그러나 연서강의 말에 연무강은 이를 으득, 갈기만 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그의 눈길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해. 그대로 그와 마주하고 서 있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 같아 연서강은 이 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사도 했으니 트집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결심한 연서강이 조심스럽게 연무강의 옆을 지나쳤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연무강이 손등에 손가락이 스쳤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저지른 실수였다.
탁, 하고 연서강의 손가락에 상대의 차가운 손등에 닿았을 때,
쾅!
바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연무강이 그대로 연서강의 목을 낚아채 조른 것이다.
-헉.......
퍽! 상대의 우악스런 힘에 밀린 연서강은 목이 잡힌 채 복도의 벽에 부딪혔다. 학, 하고 연서강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등과 목 양쪽에서 무시무시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등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옅어지고 목의 고통이 예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똑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연서강은 제 목을 한 손에 쥔 남자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목이, 자신의 형에게 목이 졸리고 있었다.
-혀, 형님.
연서강의 목을 꽉 짓누른 채로 연무강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서강의 벌벌 떨리는 시선을 만끽하던 연무강이 어느 순간 희미하게 웃었다. 입가에 어린 웃음이 진해질수록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살려......, 연서강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조이는 고통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
연무강은 그대로 연서강의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손에 힘을 풀고 연서강을 놓아주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연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연서강은 허겁지겁 그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로 연무강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연서강은 연무강이 자신이 도망치는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 방에 도착하여 급하게 문을 잠그면서 연서강은 연신 제 목을 주물렀다. 마치 호랑이의 앞발에 눌러졌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토끼가 된 것만 같았다. 그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무서웠다.
자신의 목을 조르며 연무강이 지었던 그 희미한 미소, 미소, 미소. 미소는 손아귀의 힘이 강해질수록 짙어졌다. 연서강은 연무강의 얼굴에서 은밀한 희열을 읽었다. 무서웠다. 사지가 절로 덜덜 떨리고 온 몸의 맥박이 심장 고동처럼 강하게 뛰었다.
당장 녹우당으로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갈 수 없다. 가면 안 된다.
-.......
연서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차갑게 굳어버린 제 얼굴을 매만졌다.
도망치면 안 된다.
연신 다짐하며 연서강은 손가락으로 입 근육을 잡아당겨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차가운 손가락 끝에 아직도 잘게 경련하고 있는 입술이 만져졌다. 연서강은 음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잘 피해야지. 그리 마음먹자 비로소 손가락 끝에 온기가 돌아왔다.
연무강과의 일만 제외하면 의외로 본채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아마도 형제들이 어릴 때와 달리 거의 집에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
“그 여자애는?”
기연조의 말에 연서강이 대답했다.
“여자애? 아, 홍이.”
고개를 모로 갸웃거리던 연서강이 곧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 말게. 녹우당을 아예 비운 건 아니라네. 본채에 가 있는 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니까. 게다가 모씨 아줌마에게 말해 끼니를 챙겨달라고 부탁했어. 홍이에게도 말해 양해를 구했고.”
기연조가 설핏 인상을 쓰며 ‘홍이?’하고 되묻는다. 그 반응에 연서강은 자신이 아직 기연조에게는 여자아이를 홍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기연조가 홍이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라, 연서강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름을 못 들어서, .......홍이라고 부르고 있거든. 홍월정에서 처음 봤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기연조의 얼굴빛이 썩 좋지 못하다. 연서강은 어째서 그가 이리도 홍이를 꺼려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이유를 묻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그는 또 소문을 들먹이며 연서강을 질타할 것이 분명했다. ‘이름까지 지어주다니.......’하고 기연조가 한탄스레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역시 묻지 않길 잘했다고 연서강은 생각했다.
연서강이 녹우당에 갔을 때도, 다시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본채로 돌아오게 되었을 대도 연무의는 굳이 아랫사람들의 입을 단속하지 않았다. 때문에 사정을 알아챈 아랫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이내 저잣거리에까지 퍼졌고 이내 수도의 웬만한 곳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렇게 연서강이 본채로 돌아갔다는 말은 기연조에게까지도 전해졌다.
그래서 연서강은 아무런 기별 없이 기연조가 녹우당에 들렀어도 놀라지 않았다. 소문을 들었다면 언젠가 한 번은 기연조가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연조는 자신이 왜 본채로 돌아갔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각오하고 마주 한 얼굴임에도 예상 외로 기연조는 바로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주 데리고 있을 작정인가 보네. 개나 고양이도 아니건만.”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차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연서강은 쓰게 웃었다.
때는 늦은 오후였다. 기연조가 녹우당에 들린 시간을 보아하니 근무를 마치자마자 바로 녹우당으로 온 듯 했다. 원래대로라면 저잣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려 이것저것 사서 들고 왔을 테지만, 그런 여유조차 없었나 보다. 게다가 그는 모씨 아줌마에게 들러 따로 주안상을 거창하게 안 차려도 된다 말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모씨 아줌마가 소반 가득이 술과 안주를 차려 가지고 왔다. 기연조가 그 상을 보고 ‘이런.......’하며 혀를 찼다. 평소와 달리 주변을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던 연서강은 문득 저 초조함의 이유는 대체 뭘까, 궁금해졌다.
탁자 위를 가득 메운 술과 안주를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기연조가 이내 묻는 말이 또 홍이에 관련된 것이었다. 대답을 해주긴 했으나 역시 그의 모습이 평소완 조금 다르다고 연서강은 생각했다.
“개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더욱 내치기가 힘든 거지.”
연서강의 대꾸에도 기연조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런가. 하는 대답도 없었다. 연서강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내가 본채로 돌아가서 별로 마음이 좋지 못한가?”
기연조가 ‘아니.’하고 단박에 대답했다. 이윽고 자신의 대답이 너무도 딱딱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한 번 ‘그런 게 아니네.’하고 중얼거렸다. 기연조는 제 턱을 쓸며 ‘그저.......’하고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저, 나는 자네가 다시 본채로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어서.”
어쩌나. 그가 한 말이 자신의 부친인 연무의가 했던 말과 똑같아서 연서강은 그만 웃고 말았다. 그렇게나 자신이 의외의 행동을 했나 싶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죽기 이전의 연서강이었다면 결코 본채에 돌아갈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 의외라고 하긴 하더군.”
“그래. 놀랐네. 아니, 이건 강이, 네가 겁쟁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채 어물거리는 기연조를 보며 연서강이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알아.’ 말하며 그는 이어 말했다.
“연서강이 할 짓이 아니긴 하지.”
기연조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즐거워져서 연서강은 기연조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역시 기연조는 평소와 달리 좀 여유가 없어보였다. 평소라면 연서강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다가 ‘자작은 좋지 않아.’라고 말하며 대신 술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연조의 초조함이 더해질수록 묘하게도 연서강은 점점 차분해졌다.
“.......어쩐 일이야?”
기연조가 비로소 그 연유를 물어왔다. 연서강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자코 술을 마셨다. 잔을 완전히 비우고 나니 얼큰한 취기가 올랐다. 미미한 흥취에 연서강은 미소 지으며 기연조를 바라보았다.
기연조는 정말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도 자신이 본채로 돌아간 게 큰일이란 말인가. 그 큰일은 기연조에게만 해당되는 일인가, 기씨 문중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일인가. 자신이 녹우당으로 갈 적에 기연조가 한 말은 정녕 진심이었던가. 사실은 그래도 본채에 있는 편이 자신에겐 도움이 되니 녹우당에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지는 않았나. 들뜬 흥취는 이어 연서강의 가슴속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의심과 의문을 두드렸다.
연서강은 두 눈을 감고 부드러이 입을 열었다.
“자네, 혹여 내가 일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
“만약 힘든 일이 있다면 내게도 말해 달라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연서강은 두 눈을 뜨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한 쪽 눈썹을 찌푸린 채인 기연조가 이제는 의아함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서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네는......., 그러고 보니 늘 나를 도와줬었지.”
기연조의 얼굴에 서린 의아함이 한층 짙어졌다. 연서강의 몸속에서 일렁거리는 취기가 이내 상대방을 현실감 없는, 꿈같은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랬던가.’하고 기연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대답에 연서강은 입술이 말랐다.
“.......만약에 내가 괴한에게 잡혀 있다면 자네는 어쩔 텐가?”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가 대답했다.
“당연히 구하러 가야지.”
“.......”
그 말이 빈 말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연서강은 일전의 경험으로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행동으로 이미 확인해놓고 듣는 진심이라니. 절로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져서 연서강은 이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예전 그때처럼 매끄러운 술잔 표면을 긁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랬지, 그럴 거야, 자네는.”
기연조는 자신을 구하러 왔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준 최초의 계기야 어쨌든 기연조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가 변을 당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 .......진실이었다. 기씨 문중의 일이 어떻든 상관없이 기연조는 자신을 구하러 왔었다.
그래서 연서강도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럴 거네.”
기연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연서강은 한 번 더 힘을 줘 말했다.
“자네가 변을 당하면 나도 구하러 갈 거야.”
미어지는 가슴을 참아내며 간신히 말한 것인데도 기연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이유를 물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냐, 강아.”
일백 번을 고쳐 생각해봐도 연서강에게 있어 기연조는 역시 소중한 사람이었다.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살리고픈 사람이었고 부디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기연조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자신을 대하는지도 역시, 연서강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저 사람이 어찌 되었으면 좋겠는지.
자신에게는 그것만 중요했다.
연서강은 손을 뻗어 기연조를 끌어안았다. 반상이 중간에 있는 탓에 겨우 기연조의 얼굴만 이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연서강의 오른쪽 귀와 턱, 목까지 기연조의 체온이 느껴졌다. 상대의 체온을 몸 전체로 느낄 수 없다면 이렇게 부분만이라도 족했다. 부분이나마 자신에게 허락되어 다행이었다.
부분만이라도 상대방이 따뜻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으니.
강아?, 하고 의아해하는 상대의 귀에다, 연서강은 서글픈 숨을 힘겹게 삼키며 대신 간절한 소망을 털어 놓았다.
“내 벗, 내 친우, 연조야. 나는 자네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네.”
“.......강아.”
영문을 몰라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기연조가 이내 연서강의 등 뒤로 자신의 팔을 둘렀다. 그리고 연서강의 목 뒤를 토닥여주었다. 웃음기 섞인 기연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서로 안아주는 것,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이네.”
이제야 기억나는 일도 있었다.
연서강이 걷다가 갑자기 고꾸라져 데굴데굴 구른 적이 있었다. 평지에서, 그것도 사람도 없고 돌멩이도 없는 곳에서 그럴 줄은 몰랐는지 기연조도 멍청하게 연서강이 굴러가는 것을 보기만 했다. 뒤늦게 기연조가 ‘아차!’ 소리를 지르며 ‘강아, 괜찮아?’하고 엎어져 있는 연서강에게 뛰어갔다. 화려하게 구른 탓에 상처도 화려하게 남았다. 두 팔은 물론이요 턱과 두 다리 모두에 상흔이 남았다. 바닥에 어린애 키만큼이나 길게 핏자국까지 남았으니 할 말 다한 셈이다.
기연조가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주어서 연서강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걸을 수 있냐는 문제는 또 부차적인 것이었다.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걷는 연서강을 보고 기연조가 ‘에구.’하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연서강의 앞에서 다리를 굽히고 앉아서 말했다.
-업혀, 집까지 데려다 줄게.
연서강은 잠깐 망설였다. 어찌할까, 고민하는 그를 기연조가 재촉했다. ‘어서!’ 남이 윽박지르면 절로 몸이 움츠려들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기연조의 등에 업혔다. 기연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째 너는 내 어린 여동생보다 더 손이 많이 가니.......
혀를 끌끌 차는 기연조에게 연서강은 낙담한 목소리로 ‘미안.’하고 중얼거렸다. ‘바보야.’하고 기연조가 이어 대꾸했다. ‘좀 조심하란 이야기야.’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기연조가 작게 웃었다.
-대체 널 누가 데리고 가겠니.
또 나오는 말이 그것이다. 마치 자신이 연서강의 부모님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기연조를 향해 연서강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연서강이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뒤에 자신이 뭐라 반박한 듯도 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사소한 기억, 왜 머릿속에 아직 남아있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한 별 것 아닌 일이다.
그러나 그 별 것 아닌 일은 현재 끊임없이 회자되면서 씁쓸하고, 안타깝고, 그러면서도 아주 진한 그리움을 일으키는 일이 되었다.
* *
연서강이 ‘그’를 두 번째 본 것은 흰 옷을 입은 사람을 두 번째로 미행하고자 마음먹었을 때였다. 첫 번째도 그렇게 만났었는데 두 번째도 영락없이 같았다.
아니, 조금 달랐다.
처음에 ‘그’는 슬그머니 접근해 연서강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었다. 하지만 두 번째에 ‘그’는 이제 더 이상 연서강이 달아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그’는, 대문 밖으로 나오는 연서강을 붙잡았다. ‘엇!’하고 놀란 쪽은 연서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흰 옷을 입은 사람을 미행하고자 나온 바깥이었다.
그간 오랫동안 바깥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정확히는 집 대문 밖을-그는 바깥에서 자신과 관련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저번 미행을 생각하며 아쉬운 얼굴을 하고 이제 더 이상 저번 같이 미련하게 굴지 않겠다, 생각하며 돈을 좀 두둑이 챙겨들었을 뿐이었다. 기다렸다가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집밖으로 나오면 거기서부터 미리 돈을 챙겨준 아이들에게 미행을 시킬 심사였다. 물론 저번처럼 아이가 돌아오길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도 정할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라고 연서강은 굳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시도에 연서강은 또 그 ‘사이비’를, 심지어는 처음부터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아. 결심하고 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자 뒤에서 들리는 말이.
“드디어 나왔군!”
이었다.
“!?”
이게 무슨 소리지 싶어 연서강이 뒤로 돌아봤을 때, 그의 시야 한 가득 아름답고 고운 보랏빛 나비 떼들이 화라락 펼쳐졌다. 동시에 선향냄새, 그리고 뒤를 잇는 고운 붉은 빛 꽃무늬들. ‘엇?!’했을 땐 이미 늦었다. 자신의 팔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단단히 붙잡힌 후였던 것이다.
누구지? 연서강은 자신을 잡은 사람이 누군가 싶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방금 자신의 눈앞에 지나갔던 아름다운 나비 떼며 꽃들이, 전부 한 사람이 옷 문양인 걸 깨닫게 되었다.
“사이비?”
연서강이 멍하게 중얼거리자 그의 팔을 잡은 남자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또, 사이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한탄하며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틈을 타 연서강은 남자의 모습을 훑었다. 남자는 여전히 화려한 무늬와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옷이었으나 연서강은 오히려 더 마뜩찮은 얼굴로 ‘어, 저기.’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남자의 손에서 제 팔을 빼오려고 했으나.
“.......”
남자는 보기보다 힘이 좋은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서강은 휘익 주변을 한 번 돌아본 다음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대문 앞에서 제법 오래 기다린 모양인지 지금 막 지나가는 몇몇 사람만이 남자와 연서강 쪽을 힐끗 바라 볼 뿐, 나머지 사람들은 태연했다. 그리도 이 남자와 엮이고 싶지는 않아 연서강은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놔 주시는 게.”
집 앞까지 따라오다니 정말 믿음이 충실한 사이비로구나. 그리 생각하며.
척 보기에도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 보이는 남자는 연서강을 이제야 잡게 된 게 기쁜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연태위의 다섯 번째 자식이라지?”
망했다. 연서강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저어, .......맞기는 한데 .......실례지만, 저희 집에 돈이 많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자식들한테도 돈을 두둑이 쓰시는 인물이 아닌지라, .......그만 놓아 주시는 게.”
저번에 돈을 줘서 돌려보낸 게 화근이었나. 아니면 사람 부탁 거절 못하게 생긴 게 문제인가.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에 잡힌 제 팔을 당기며 연서강은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어쩐다. 이 사이비 때문에 오늘도 미행이 실패할 판이다.
“아니, 잠시만 내 말 좀 들어보게. 사이비가 아니라니까. 잠시만 내게 시간을 내주면 오해를 풀고,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마음이 급한 건 상대 남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연서강의 표정이 푸르죽죽해지자 ‘아차, 이렇게 말하면 더 사이비 같나?’하고 중얼거렸다. 남자가 연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이비가 아니란 걸 밝힐 수 있겠나?”
“모, 모르지요. 저, 저는.”
절박하게 물어오는 그에게 연서강은 그냥 도리질만 쳤다. 이 남자가 무슨 용건으로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자였으면 남자가 팔을 잡았을 때부터 ‘꺅!’ 비명을 지르며 ‘살려주세요! 수상한 사람이 절 따라왔어요!’라고 소리쳤을 지도 모른다. 남자를 봤을 때 ‘흐억!’ 소리를 안 지른 것만으로도 연서강으로선 훌륭한 대처였던 것이다.
입을 다문 남자가 턱을 쓸었다. 그는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연서강은 그저 그가 자신의 팔만이라도 놔 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남자가 뭘 떠올렸는지 활짝 웃었다. ‘옳지!’하고 탄성을 지르는 그에 연서강은 질색하는 얼굴을 지었다. 또 뭐가 옳아.
“애초에 그냥 여기서 용건을 말하면 되잖아.”
“그,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연서강이 동의하고 나서야 남자가 겨우 연서강의 팔을 놓았다. 마치 썰물이 빠지듯이 연서강은 재빨리 뒤로 몸을 당겼다. ‘그럼.’, 하며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연서강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 모습이 꼭 어딘가의 교주와 닮아서 연서강은 얼굴을 찡그렸다.
연서강은 고민했다. 도망갈까. 모처럼 몸도 자유로워졌는데 허점을 노려서 이대로....... 하지만 저 사람 내 집을 알고 있는데. 아니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는 것보다는 일단 도망쳐서,
그때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 되돌아 왔지?”
“!”
막 도망치려던 연서강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질겁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연서강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하고 남자가 한 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봤을 때, 연서강은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뱀 신은 지혜를 가진 신이다.
여기서 지혜란 영민함과는 조금 다르다. 뱀 신이 지닌 지혜는 오래살아서 나오는 지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발휘되는 융통성, 치열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정점에 설 수 있는 간교함에 있었다. 즉, 자연적으로 타고 나는 지능과는 다른 것이다.
뱀 신이 가진 권능은 마치 뱀, 그 자체와 같았다. 사지 없이 납작 바닥에 엎드려 축축한 곳을 기어 다니다 어느 하나 올라갈 구석이 있으면 꼭대기까지 올라가 적의 뒤통수를 무는 뱀. 수풀 속에서 숨까지 죽여 기회를 노리는 뱀. 그리고 사냥한 희생물을 뼈까지 삼켜버리는 뱀. 그러한 뱀이기에 약소국에서 출발했음에도 주변 어떤 나라에 밀리지 않고 제국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뱀 같은 제국이었다.
남의 발밑을 기어 다니며 업신여김을 당했던 나라는 한 순간 거대한 땅덩어리를 통째로 꿀꺽 집어 삼켰다. 그리고 분명 제 거대해진 몸뚱어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멸할 거다는 예상한 주변국의 생각과 달리 천천히 그 땅덩어리를 소화시켰다. 그리고 현재는 소소한 변경의 국경 분쟁 논란만 있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것이 연서강이 태어난 나라인 ‘하’나라였다.
500여 년이란 긴 세월을 내려오면서도 ‘하’나라의 국교는 한 번도 바뀐 적 없었다. 처음부터 현재까지 하제국의 국교는 커다란 하나의 몸에서 나와 뒤엉켜 있는 쌍두뱀을 믿는 수후(隨後)교였다. 수후교의 쌍두뱀 신은 서로 성별이 다른 머리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머리가 해(남자)와 달(여자)을 상징했다. 한 몸이되, 다른 인격과 성별을 가진 뱀 신이 서로 교합해 낳은 아이가 바로 ‘하’나라의 시황제로 이야기고 내려져 오고 있었다.
이 수후교의 수후는 신의 뒤를 따른다는 뜻이지만, 제국의 주변국에서는 그 뒤에 뱀 ‘사(蛇)’자를 붙이고 글자를 달리하여 수후사(隨後蛇)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목덜미를 무는 뱀이라고, 이는 제국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두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별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막대한 경제력을 비유하는 말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초창기에 하나 같이 이 뱀 신에게 뒷덜미를 물렸거든.”
“.......”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가 신이 나서 하는 말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직까지도 그는 눈앞의 남자가 ‘사이비’라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연서강과 남자가 잠시간의 대화를 위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외곽의 청다관(請茶館)이었다. 가끔 재담가나 만담꾼이 와서 여는 공연 등을 보면서 쉬는 다점(茶店)과는 달리 전문적인 제다사(製茶師)가 있어 궁중이나 고급 다원(茶園)에서 마시는 차도 접할 수 있는 전문 찻집이었다. 2층 누각 구조로 되어 있는 그곳은 평일이라 그런지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적었다. 게다가 탁자 간의 거리도 제법 멀어서 소리를 낮춘다면 얼마든지 비밀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장소로 보였다. 외곽에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이곳을 방문해 본 적은 연서강도 처음이었다.
차와 함께 나온 유밀과를 먹으며 연서강은 ‘이게 아닌데.’란 생각을 했다. 잠깐만, 정말 잠시간만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는데, 상대방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이 대화를 본격적으로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빈하고 고아한 운치가 있어 쉬기 좋은 곳인 데다 차 맛도 다과 맛도 훌륭했지만, 좀체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연서강은 찻잔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그래서요?”
지금 여기에 교양을 쌓을 때가 아닌데, 싶어 연서강은 상대의 말을 재촉했다. 생각해 보니 연서강은 상대방의 이름도 아직 몰랐다. 영락없는 사이비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섞어보니 남을 하대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워 도대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건방지고 무례한 사이비라든가. 힐끗 훔쳐본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의 옷감이 또 훌륭하여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뱀에게 물린 건 주변국가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가 하여.
“모두들 수후교의 쌍두뱀 신의 권능에 모두 당한 거라네. 시간과 인과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에 말일세. 자네도 아는 내용이겠지?”
“그야.......”
어린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책들의 거의가 다 그런 내용이었다. 초학 입문서에도 그러한 내용이, 하고 답변을 하려던 연서강이 멈칫하더니 벌린 입을 다시 다물었다. 진지하게 답할 가치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연서강은 찌푸린 얼굴로 ‘저기.’하고 상대를 불렀다. 갈색 눈을 가진 남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연서강을 보았다. 긴 이야기를 하느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처음엔 그랬다. 남자의 말에 연서강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우습게도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긴장까지 했었다. ‘되돌아왔다.’ 남자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자신이 아는 바와 과연 일치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속을 들킨 듯 움츠러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점 상관없는 것으로 길어지자 움츠려드는 대신 초조함이 일었다. 정말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더 이상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마냥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당신이 했던, 되돌아왔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연서강이 단도직입으로 묻자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다시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연서강은 남자가 자신이 초조해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취미! 와작 연서강의 얼굴이 구겨졌을 때, 비로소 남자가 ‘자!’하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는 정확히 이 쌍두뱀 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왜 뱀 신을 모욕한 주변국들이 멸망했는지도.”
연서강은 발끈했다.
“그러니까!”
순간 남자가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연서강의 찻잔이 흔들렸다. 출렁거리는 수면이 결국 잔 너머로 넘쳐흘렀다. 그것에 이상할 정도로 놀란 연서강이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두 손을 탁자에 올린 채로 그런 연서강을 쳐다보며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볼 때도 기이하다고 생각한 남자의 엷은 갈색 눈동자가 지금은 다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능력이란 말일세.’
“사람을 과거로 되돌려 보내는 힘이지.”
“.......”
그리고 이 한 마디의 말로 주도권은 완벽하게 남자에게로 넘어갔다. 연서강은 더 이상 남자의 발언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놀라움으로 얼굴이 굳은 그를 보며 남자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로 넘친 찻물을 훔쳤다. 길게, 유성처럼 찻물이 너무 탁자 위를 굴렀다. 늘어진 찻물 자국은 마치 한 마리의 뱀과 같았다.
“그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 몇 명을 돌려보내면 그 나라는 간단히 멸망한다네. 누가 성군이 될지, 누가 반란을 일으킬지, 누가 왕을 유혹해 폭군으로 만들지, 누가 훌륭한 발명품을 내놓을지, 누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누가 전쟁에서 이길지, 앞일이 정해져 있다면 흩트려 놓는 것도 매우 쉽겠지.”
“.......무슨 말을.”
연서강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남자가 연서강을 바라보았다. 그 갈색 눈엔 더할 나위 없는 친애가 깃들어 있으나 연서강은 어쩐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마치 자신의 뒤통수를 사나운 뱀이 노란 눈을 빛내며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눈이었다. 마냥 냉정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흥미로운 것을 앞두고 저것이 앞으로 어찌될까, 궁금해 하는 시선이다.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남자는 대화에 능했다. 연서강의 상태를 단박에 알아본 그는 이어 아무 방해도 없이 유려하게 제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만 사용한다면 매우 유용한 힘이지.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데에 이보다 좋은 힘도 없을 걸세. 나라를 흥하게 하는 요소를 미리부터 제거해 멸하게 할 수 있다는 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요소들도 미리부터 제거해 흥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
“자네는 어째서 이 나라가 500여 년이 되는 오랜 세월동안 죽 발전만 해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굴곡도 없이 죽, 변함없이 발전만을, 썩은 내가 풀풀 날리는 곳도, 크게 곯은 곳도 없이 말이야.”
그야 정치하는 자들이 훌륭하고 국민들의 성정도 올곧으며 재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을 수백 번 읽기만 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정해진 대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허나 정말 그러한가, 연서강은 그제야 책을 여러 번 읽어 얻은 해답에 의문을 던졌다. 제 부친이나 기연조, 그리고 자신이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과 되돌아온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한 지금에도 그게 정녕 유일한 해답이란 생각이 드는가. 연서강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
그런 연서강을 남자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머리빛이 검은 대부분의 사람들 틈에서 색소가 옅은 남자의 존재는 확연히 눈에 띠었다. 부드럽고 기묘한 인상도 그러하거니와 용모도 수려했다. 가벼운 성정을 지닌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묘한 묵직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과 조화를 연서강은 이전에 영묘하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대화가 끊긴지 오래지만 남자는 방금의 연서강과 달리 재촉하지 않았다. 남을 하대하는 게 자연스럽듯이 그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에도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명을 받아야만 행동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시간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었다.
남자는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차를 한 잔 더 시켰고, 새 차가 나오길 기다리며 유밀과를 잘랐다. 잘려진 유밀과의 단면에서 꿀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연서강의 질문에 남자가 얼굴에 의아함을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이어 남자가 유밀과를 입속에 넣으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말 안했던가?’ 연서강은 꽉 주먹을 쥔 다음 ‘안했습니다.’하고 딱딱하게 대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내 얼굴을 보고 사이비라며 도망쳤었지?’라고 한가로이 남자가 중얼거린다.
역시나.
그 중얼거림에서 연서강은 확신했다. 남자는 주변에다 굳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이어 떠오른 생각은 기연조의 중얼거림이었다.
-아니, 화려한 색상이 옷, 하니 말인데,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서. 무슨 공작새도 아니고 다양한 색의 옷을 즐겨 입고 다니지.
그때는 세상엔 의외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연서강은 찻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이미 식은 차라 잔은 미미한 온기만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기연조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기씨 문중 사람 혹은 기연조가 일하는 곳인 궁에 있는 사람들이다. 연쇄적으로 어째서 눈앞의 사람이 남을 하대하는 데에 익숙하고, 남을 기다리는 배려를 갖추고 있는 지 연서강은 깨달았다 이 남자가 궁에서 왔다면 어쩌면 까마득하게 신분이 높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가. 연서강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요?”
연서강의 눈에서 경계와 의심을 읽은 남자가 ‘흐음.’하고 입술을 당겼다.
“자네, 정말 그 호랑이 같은 연태위의 아들이 맞는가? 어째 그리 사람이 맹한가.”
남자의 말에 연서강은 눈썹을 구겼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되돌아왔다.’라는 말에 휩쓸려 아무 의심 없이 그저 그 뜻이 무언가 싶어 종종 남자의 뒤를 따라오다니! 어리석었다. 남자가 말하지 않았나. 되돌아온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에 흩트려 놓을 수도, 또는 흩트려 놓는 요소를 제거할 수도 있다고. 그리고 그 권능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고.
국가 기밀이다.
방금 자신이 지루하해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엄청난 것이었다는 걸 연서강은 직감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야기를 연서강에게 늘어놓은 것은, 다름 아닌!
그 순간, 남자가 혀를 찼다. 연서강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시퍼래진 연서강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남자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자네라면 우선 어떻게 내 집을 찾아왔는지 묻겠네.”
연서강이 놀라 찻잔을 손가락으로 툭 치고 말았다.
“아.”
“이제사 물어 뭐할까. 자네가 허겁지겁 도망간 뒤에 그냥 멍하게 있으니 한 아이가 와서 자네를 못 봤냐고 묻던걸.”
“그.”
“그래서 자네가 예의 그 ‘녹우당 도련님’이란 것도 알게 되었고, 연태위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연서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남자가 연서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가 그 아이에게 뭘 시켰는지까지도.”
“읏!”
입술을 깨문 연서강을 보며 남자가 차갑게 명령했다.
“앉게. 나는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게 참 싫어. 내려다보는 건 좋아하지만.”
벌벌 떨며 연서강은 남자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앉으라고 명한다고 또 앉다니.’하고 혀를 또 끌끌 찼다. 이어 ‘어째서 이런 심약한 남자를 되돌려 보냈는지.’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서강은 경직된 얼굴로 남자가 하는 양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딱 뱀 앞의 쥐 꼴이었다.
이대로는 더 이상 대화하는 게 불가능하다 여겨졌는지 남자가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장 풀게. 내가 언제 자네를 위험인자로 분류하고 잡아 죽인다고 하던가?”
“.......”
남자는 한숨 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뭘 하든 하등 관심이 없어.”
남자의 말에 연서강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모습에 남자가 다시 혀를 찼다. ‘뭐 이래 쉽게 믿는지.’ 그 중얼거림이 탄식에 가까워 연서강은 다시 얼굴을 와작 구겼다. 그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 챈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관심 없다는 말은 진실일세.’ 여전히 의심에 찬 눈초리인 연서강에 남자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자네가 반역을 하든 어떤 충신을 죽이든 나는 관심 없어. 아이를 시켜 미행을 시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게.”
그리고 연서강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보아하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어도 사람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면상이기도 하고.’ 그 말이 제 흉을 보는 것같이 들려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연서강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안다고 해서 별 일 일어나겠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뻔한 목소리였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알겠어. 자네는 역사를 움직일 만큼 큰 인물이 아니란 걸.”
역시 맞았다. 이어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엔 노골적으로 한심해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연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되돌아와서 할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뭐가 있겠나싶고.”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심했다.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일어날 일이 아직 그의 눈에 선연했다. 해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자르듯 대꾸했다.
“당신에겐 고작일지 몰라도 저에겐 중요한 일입니다.”
“.......”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마땅치 않은 눈으로 남자는 시선을 모로 돌렸다.
“.......그렇겠지. 아니, 그래야겠지. 아니면 애써 자네를 되돌려 보낸 자가 억울하지 않겠나.”
되돌려 보낸 자-.
연서강은 자연스레 홍이를 떠올렸다. 늙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그 겨울날, 자신의 고양이가 죽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살아있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다고 이야기했던 여자아이. 그 김에 연서강도 함께 데리고 왔다고 했던 여자아이. 홍이를 생각하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져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괜히 데리고 왔나요, 묻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자꾸 이야기가 딴 데로 새는 것 같네. 여하튼 자네가 뭘 어찌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관심 있는 건 자네를 되돌려 보낸 자야.”
마침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연서강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
“.......왜 그런 걸 묻습니까?”
경계어린 연서강의 질문에 남자가 슬쩍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마치 연서강의 질문이 의외라는 듯. 그러나 이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이 나라가 쌍두뱀 신의 은총을 받은 나라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되돌려 보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진 건 아닐세. 그 힘을 타고난 사람은 몇몇 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내 일이거든. 누군가의 사리사욕에 이용되면 안 될 사람들이니까.”
‘일’이란 말에 연서강은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궁 밖에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낭패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애석함이 함께 묻어나왔다. 방금 연서강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달리 매우 온정적인 태도였다.
“되돌아오는 것도 한 번 밖에 가능하지 않아. 두 번은 안 돼. 그건 들었나?”
연서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건 알고 있다라.......’하고 혼잣말을 했다. 자신이 물어보고 확인해 보는 투라 연서강은 대체 남자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의문이었다.
찌푸린 얼굴을 묵직한 한숨과 함께 없애며 남자가 다시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 자네에겐 이제 필요 없지 않나, 그 사람. 허면 내게 보여주시게. 어쩌다 궁 밖을 나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중히 보호되어야 할 사람이니까. 나는 ‘되돌아 온 자’는 구별할 수 있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구별할 수 없거든.”
“.......”
“이미 한 번 되돌아 왔으니 더 이상 이용가치도 없다네. 그래서 내가 데려가겠다는 걸세. 자네 곁에 있는 것보다 내가 데리고 있는 편이 그 사람에게도 좋을 테니까.”
어쩐지 타이르는 듯한 남자의 말본새가 곱지 않게 느껴져 연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연서강이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 말에 남자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내가 궁에서 온 사람인 건 이미 눈치 챈 듯 하고, 내가 왜 자네를 잡았는지도 이야기했네. 방금도 말했지만 나는 되돌아 온자만 느낄 수 있어. 되돌려 보낸 자는 찾을 수 없다고도 이야기했네. 그리고 되돌려 보낸 자를 보호하고 싶다고도 이야기했고. 자네도 방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나. 두 번은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걸 안다고. 그렇다면.”
“아니요.”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왜 방금 말본새가 곱지 않다고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남자가 사람을, .......홍이를 보호한다고 말한 입으로 ‘이용가치’란 말로 써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사용했으니 필요 없지 않냐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게 저 사람의 위치에선 당연한 표현일지 몰라도, 연서강에겐 아니었다.
“당신이 궁에서 왔다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뭘 믿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가 이제껏 넌지시 에둘러 말했을 뿐, 한 번도 단도직입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서강의 눈에 어린 불신이 한층 더 깊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꺼려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정마로 자신의 신분이 정정당당하고, 그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다면 .......잘 됐네요. 저희 집도 알고 계시니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오십시오. 신분을 밝히고, 제 부친이 맞다고 확인해야 당신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의외의 말을 들은 듯, 다소 멍한 얼굴이었다.
긴 말을 마치고 연서강은 차를 마셨다. 차가워진 차가 매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미 식은 차에서는 혀에 거슬리는 맛이 났지만 그저 타는 목을 축이려는 의도였으니 차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연서강은 상대가 뭐라 반격을 해올 것을 각오하고 얕은 숨을 잠깐 내쉬었다. 그리고 숨을 깊이 가슴 속, 안으로 끌어당기며 남자를 보았다.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면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해서 남자도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실소를 흘렸다.
“.......웃긴 사람이로군, 자네. 자신과 관련 있다고 생각할 땐 별 의심 없이 내 말을 모두 믿는 눈치이더만, 남과 관련되니 내 말을 의심하고 경계하며 확연한 증거까지 요구한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말하며 남자는 품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탁. 딱딱한 물건인지 탁자에 올려놓자마자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 연서강은 남자가 탁자 위에 올린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패였다.
“신분패.”
아니.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연서강의 생각과 달리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패는 아니다. 허나 좋은 옥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보아 중요한 패인 것은 확실했다. 해서 연서강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걸 들고 궁으로 찾아오게. 누구든 상관없어. 궁에서 본 사람을 아무나 붙잡아 이 패를 보여주면 그가 자네를 내게로 데려 올 거야. 목숨이 경각에 달한 정도로 바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싱긋 웃으며 남자가 패를 연서강 쪽으로 밀었다. 연서강이 남자를 보았다.
“나는 누가 ‘누가냐?’라고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하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하네. 더구나, 내가 말을 한다고 자네가 바로 믿을 수나 있겠나? 그러니 자네가 직접 찾아와 확인하게나. 그리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보고. 그런 다음에 확신이 들면 자네를 되돌려 보낸 사람을 내게 보여주시게. .......당연히 그러겠지?”
남자는 연서강이 귀찮더라도 꼭 그리 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서강은 다시 탁자 위에 있는 패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 패라는 건 알겠다. 어떤 곳에 출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임도 알았다. 하지만 그 형태나 색이 자신의 부친이나 형님들이 지니고 있는 것들과는 달라서 연서강은 조금 고민했다. 무엇보다 그 패들은 이것처럼 옥으로 만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연서강은 손을 뻗어 패를 잡았다. 옥으로 만들어진 패는 둔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패에선 연한 선향 냄새도 났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저 남자를 봤을 대도 이 선향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 지금은 진한 차향에 가려져 맡을 수 없지만.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인 연서강을 보며 남자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내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 이렇게 시간을 들여 설득하는 거라네.”
“.......”
연서강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아니었다면 이 청다관을 나가자마자 끌고 가 고문을 했겠지. 그러기 위해 사람의 이목이 별로 없는 외곽지로 데리고 왔으니.”
“고문......!”
그런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굴을 와작 구기는 연서강을 보고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자네가 그 연태위의 자식이라는 게 의심스럽군.”
맹하게 있지 말고 좀 똘똘하게 세상을 사는 게 어떤가, 하고 남자는 연서강에게 진지한 충고까지 하였다. 연서강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저런 옷을 입은 사람에게 무시당하다니. 대뜸 인생을 헛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