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7)

 3.

 연서강은 두 눈을 깜박였다.

 아직도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눈이 방안에 시꺼먼 잔상을 만들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겨우 꿈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연서강의 온 몸은 아직도 차디찼다. 손가락 끝이 달달 떨리고 악 물었던 어금니 때문에 잇몸이 다 쑤셨다. 그리고 .......심장이 덜렁덜렁 끊기듯 아팠다.

 악몽을 꿨다.

 자신이 죽었던 그 겨울밤의 꿈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이 기연조의 등에 시퍼런 칼을 쑤셔 박았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기연조가 붉은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연서강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괴한은 이내 연서강을, 자신을,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이, 자신을.

 아니, 검은 옷을 입은!

 거기서 연서강은 잠에서 깼다.

 온몸이 저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괴이한 일이었다. 자신이 죽는 꿈은 그 전에도 꾼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처럼 음험하고 섬뜩한 기분으로 눈을 뜨지 않았다. 강렬한 고통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땐 오히려 잠에서 드디어 깼다는 감각에 서늘한 후련함이 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결심으로 가슴속이 묵직해지고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악몽에서부터 줄곧 자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끔찍하고 악독한 상상이 잠에서 깨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눈과 가슴에 악몽 속에서와 똑같은 고통을 주었다. 악몽의 잔재가 온몸에 배어 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연서강은 잠에서 깼다는 사실과 별개로 거듭 주변을 돌아보며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곧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나면 연서강은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열에 들뜬 얼굴을 쓸자 차가운 손가락의 감각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아. 연서강은 속으로 한스럽게 탄식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하니 자신을 죽였던 그 검은 옷의 괴한이 연무강일 것이라곤. 확실히 연씨 문중의 사람을 죽이고도 뒤탈이 없을 만한 사람은 또 같은 연시 문중의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이를 악물었다. 악몽을 꿀 때도 하도 악문 어금니라 볼에 있는 부위가 욱신욱신 아파왔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을 적에도 그랬듯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행여 눈물을 흘릴까봐 무서웠다. 바들바들 떨리는 이 처량한 입술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뭉개진 발음으로 보잘 것 없이 울며 ‘어째서? 어째서요, 형님?!’하고 절규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악문 입 속에서는 이미 소리 없는 절규가 끝도 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어째서, 형님?

 대체 어째서!

 연무의의 말을 듣고 연서강은 허겁지겁 녹우당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오찬을 준비하겠다는 모씨 아줌마를 만류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반듯하게 접어놓은 이불을 두 손으로 끄집어 흩트려 놓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이불을 끌어안은 채 연서강은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밖에서 모씨 아줌마가 ‘도련님? 도련님?’하고 불렀지만 괜찮다는 말 한 마디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제 내도록 연서강은 이불을 끌어안고 연신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형이, 연무강이 자신을 죽였다. 연무강이, .......기연조를 죽였다.

 앞의 일만 사실이라면 차라리 좋았다. 연무강이 연서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은 한 두 해 일이 아니었으니까. 연무강은 언제나 자신을 잡아 죽일 것처럼 굴곤 했다. 물론 연무강이 미쳐 돌지 않는 한 실제로 연서강을 죽일 일은 없겠지만, 어찌어찌 생각하면 그건 아주 불가능한 미래도 아니었다. 부친인 연무의가 죽고, 연씨 문중의 주인이 연무강이 된다면 그는 당장 연씨 문중의 피를 빨아먹는 해충과도 다름없는 연서강을 처리할 것이다. 집에서 쫓아내던가, 아예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녹우당에 가둬버리겠지.

 하지만 기연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연무강은 물론이고, 연씨 문중 전체가 기연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버리기로 마음먹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다. 현 황태우화 황귀비 시씨에 얽힌 정치적 원한 관계라니. 자신은 대체 얼마나 엉뚱한 것을 믿었던가.

 악몽에서 흰 복면의 남자가 말했다. ‘어쩔까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연서강을 내려다보며 검은 복면의 남자가 말했다. ‘.......목격자가 없어야, 후에 조작하기 편리하지겠지.’

 어째서 자신을 납치해 끌고 간 곳이 홍월정 뒤편의 숲이지 알 것 같았다. 홍월정 근방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남의 땅이다. 버려진 땅이라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쉬울뿐더러, 행여 시체를 들키더라도 남의 땅이니까 연씨 문중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잡아떼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그만 참지 못해 눈물을 주룩 흘렀다.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한 추측인데도 괴롭고 서글펐다.

 무엇보다, 연씨 문중의 연서강 또한 피해자이니 섣불리 연씨 문중이 한 일이라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

 연서강은 제 손바닥을 보았다. 그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져 앉았다.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움푹 파인 손금을 따라 손바닥 안에 고이는 것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흐윽.’ 서러운 목소리를 겨우 삼켰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죽이는 데에 그 큰 형님이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제는 눈물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발밑이 캄캄해져 이제부터 어째야하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충격 받아 녹우당 안에 틀어 박혀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될 일은 없건만, 태생적으로 타고난 유약한 심성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녹우당 오라버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 밖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이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끌려 연서강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찬란한 가운데 문 위로 여자아이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작고 가녀렸다.

 “일어나셨나요?”

 비로소 연서강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 말에 습기가 묻어나왔는지 홍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우셨나요?’하고 물어오는 아이에게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고개를 젓는다고 홍이가 그걸 보고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또 다시 저 아이에게 자신이 울었다는 증거를 보이고 싶지 않아다. 연서강은 소매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정신 차리자. 부모님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길거리를 배회했던 아이 앞에서 고작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눈물을 보일 수 없지 않은가, 명색이 오라버니인데. 친여동생인 연서령의 앞에서도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며 연서강은 제 몸가짐을 바로 가다듬었다.

 연서강은 느릿느릿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에 홍이가 서 있었다. 그 옆엔 예의 늙은 고양이 아리가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연서강을 보고 홍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는 다리를 굽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연서강의 얼굴을 배꼼 올려다보았다.

 “녹우당 오라버니. 눈가가 붉어요.”

 연서강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홍이가 연서강의 다리를 잡았다. ‘홍이야?’하고 연서강이 쉰 목소리로 말하자 홍이가 여전히 연서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괜히 데리고 돌아왔나요?”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연서강은 거기서 짙은 후회와 걱정을 읽었다. 연서강은 숨을 멈췄다.

 “아니.”

 그리고 홍이가 더 뭐라 말하기 전에 힘주어 입을 열었다.

 “내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 괜히 돌아왔다고 생각한 적 없단다.”

 연서강은 얼굴을 감쌌던 팔을 내리고 홍이를 내려다보았다. 홍이의 새까만 눈이 연서강의 얼굴에게서 거짓과 회한을 찾는 듯 보여, 연서강은 일부러 웃어보였다. 홍이의 질문으로 연서강은 겨우 생각해냈다.

 “.......그 겨울 날, 그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다 땅바닥을 기면서 도와줄 이를 부르지 못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그 날의 아픔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차분해진 머리로 연서강은 생각했다. 오히려 기연조를 죽인 게 누구인지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태후전에서 손을 쓴 일이라고 하면, 사실 연서강은 어떻게 해야 기연조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을지 막막했었다. 자신은 한낱 녹우당 도련님이 아닌가. 태후전이니 황귀비 기씨니, 그 모든 일들이 막연하기 짝이 없고 감히 혼도 댈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연서강은 제 입술에 걸린 억지 미소를 지웠다.

 “.......차라리 잘 됐다. 내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가 손을 쓸 수도 있지 않겠니.”

 이 일은 진실로 웃음 지어야 될 일인 것이다. 기쁘고 축하해야 할 일이다.

 가족들이 자신을 내외한 게 어디 한두 해의 일인가. 연무강 또한 언제나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지 않나. 가족들이 그 해 겨울, 자신을 버렸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쩌면 자신 역시 가족들을 버릴 지도 모르니까.

 “적은 가까이에 있다더니.”

 비밀스럽게 속삭이며 연서강은 홍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가족, 아니 연씨 문중에서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기연조를 살해할 것이다. 연씨 문중과 기연조가 서로 적이 되어 대치된다면 연서강은 당연히 기연조 쪽에 설 것이다. 그런 자신이 매정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서강의 머릿속을 메운 것은 자신을 죽이라 말할 때의 그 검은 복면의 얼굴이었다. 싸늘한 목소리로 한 치 미련도 없이 명했던 연무강의 그 무표정한 눈빛.

 연서강은 한숨 쉬듯 웃었다.

 “.......나도 죽기는 싫으니까.”

 살짝 미간을 좁힌 홍이가 그렇게 말하는 연서강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신이 알 수 있는 미래의 일이 살짝 뒤틀렸다.

 연서강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기록해놓은 서책을 보며 침묵에 빠졌다. 불량배가 일으킨 난동에 기연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쳤듯이, 다가올 겨울에 일어날 일도 연서강이 알고 있던 건과 조금 달라질 것이다. 당연했다. 이전의 연서강은 흰 옷을 입은 괴한이 부친의 손님이라는 사실도,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이 첫째 형인 연무강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부친인 연무의에게 물어 대답을 받아왔기에, 다가올 겨울날 다시 자신이 죽임을 당하더라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연무강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검은 옷의 괴한이 다른 형제인 연무진이 될지, 혹은 연의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연서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아직 기연조를 죽이는 데에 연씨 문중, 모두가 동의한 일이라 결론을 내릴 순 없다. 그러니 가끔 아버지에게 불려가 함께 일을 논의하는 연무진은 몰라도, 황실 의시를 맡아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연의진은 그 일에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누님인 연의향과 여동생인 연서령 또한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연무강이 확실하게 일을 마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울지도 모를 일이다. 부친인 연무의는 비교적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라면 만에 하나를 대비해 이미 들킨 사람을 또 보내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연무강이 확실히 숨을 끊어놓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서강이 무엇보다 생각해야 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누가 기연조를 죽이러 오든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왜, 어째서?’인 것이다.

 황태후전과 황귀비 기씨의 대립에 자신의 부친인 연무의가 관련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관련이 된다 해도 아버지는 황귀비 기씨의 편이지, 태후전에 가담할 리는 없다.

 연무의는 현 황후의 백부였다. 현재 황후는 황귀비 기씨 소생인 황제의 후비(后妃)....... 즉 넓게 생각하면 현재의 황후인 연씨의 친정인 연씨 가문과 황귀비 기씨의 친정인 기씨 가문은 황태후라는 공동의 적을 둔 공동 운명체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연서강은 부친인 연무의가 기씨 문중과 대립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런 연씨 가문에서 기연조를 죽여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연서강은 고뇌했다. 지금 연서강에게 필요한 것은 무리한 납득보다는 타당한 근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알고 있던 것과 미묘하게 달라질 앞으로의 일에 잘 대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녹우당 도련님’으로서 연서강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무척 한정적이었다. 역사책엔 이전의 정쟁과 사건은 잘 풀이되어 있지만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적혀져 있지 않았다. 소문도 믿을 수 있는 게 있고, 믿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자극적인 소재로 범벅이 된지라 각색된 부분과 군더더기가 쓸데없이 많았다.

 “.......”

 자신을 죽인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상 더 충격 받을 사실이 존재할까 싶었다. 게다가 연서강은 한 번 죽어본 적도 잇는 몸이었다. 죽을 때 치는 발버둥을 경험을 했던 몸이라 그런지 이전과 묘하게 담대해진 것도 같았다. 아니, 담대해져야만 한다. 또 죽기 싫다면.

 연서강은 서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연서강이 며칠 간 두고 본 결과, 그 흰 옷을 입은 괴한은 대충 사나흘에 한 번씩 연무의를 만나러 오는 듯 했다. 그가 오는 시간은 늘 비슷했다. 연무의가 태위라는 직책에 있는 탓에 정무가 바빠 그 시각 밖에 시간이 비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얼굴도 익혀 괴한이라 표현하는 것도 미안해졌다. 처음에 보았을 땐 죽을 당시의 공포로 인해 눈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저 지나가는 척 얼굴을 힐끔 볼 수도 있었다.

 남자는 젊었다. 그렇다고 연서강이나 기연조 또래는 아닌 듯 보였다.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비해 몹시도 비굴하게 연무의와 대화를 나누었다. 언뜻 스치는 대화로 보나 목소리로 보나 연무의의 직위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낮은 직책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누굴까.

 과연 누구이기에 부친과 저리 자주 만나고 큰 형인 연무강과 함께 기연조 살해라는 일을 벌였던 것일까. 다만 두고 보는 데엔 알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런 것들이라, 연서강은 하루 날을 잡아 그 남자를 미행해 보기로 했다.

 그 남자가 집을 들리는 시간이 늘 비슷하기에 그 시간에 맞춰 집 근처에 나와 있으면 될 듯 했다. 아무리 ‘녹우당 도련님’인 연서강이라지만 집안에서부터 그 남자의 뒤를 밟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집 근처이면서 남자의 뒤를 따라 가다 대충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 방면에 뭐가 있는지는 후에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연서강은 녹우당을 나섰다.

 “.......”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2시진 정도 지났다.

 연서강은 저잣거리 한 복판에 자리 잡은 고목 아래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직 오월 중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후의 햇빛은 왜 이렇게 따갑게 내리쬐는지. 의자에 앉자마자 더위에 혹사당한 몸이 마치 물이 많은 백설기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어디 그뿐인가. 열이 오른 몸은 현기증까지 나서 몸이 중심을 놓치고 저절로 흐느적거렸다. 고목의 줄기에 등을 대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식혀도 상태가 좀체 나아지지 않아 연서강은 탄식했다.

 결심하고 난생처음 미행에 도전한 것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새로 마음을 고쳐먹고 행동적인 사람이 되자고 해도 그 몸까지 금세 따라오는 것은 아니란 걸 잠시 간과했다. 아주 오랫동안 녹우당을 벗어난 적 없어 아무래도 체력이 밑바닥을 치건만, 긴장과 한낮의 더위가 체력 소모에 속도를 더했다.

 결국 흰 옷을 입은 남자를 미행하기 겨우 한 시진도 안 되어 연서강은 기진맥진했다. 멀리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거리를 벗어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연서강은 아찔해졌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 노니는 아무 아이나 붙잡고 사정했다.

 -저, 저 흰 옷 입은 사람이 어딜 가는지 좀 내게!

 아이는 애원하는 연서강에게 당당히 돈을 요구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서강은 아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줬다. 미행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돈 몇 푼을 더 주겠다고 약조까지 했다. 저잣거리의 아이는 신난다는 얼굴로 제비처럼 사람과 더위 사이를 돌파했다. 파닥이는 물고기처럼 시장거리를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연서강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이럴 것을.

 처음부터 진작 아이 몇 명을 매수해 시켰으면 이 더위에 복날의 개마냥 헉헉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을 일도 없었을 것을. 음모도 흉계도 해본 사람이 더 잘 하는 것 같았다. 연서강은 그늘 아래서 연신 손부채를 부치며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 넣었다. 다음부터 이런 일은 사람을 시켜서 하자고 결심하며, 생각해보니 자신의 부친도 숨겨져 있는 정적을 확인할 때 어린 자신을 시켜 찾아냈지, 본인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찾지 않았다.

 참 못났지. 비로소 얼굴에 오른 열이 내려가는 걸 느끼며 연서강은 한숨을 돌렸다. 땀 때문에 끈적끈적해진 몸이 그늘 아래 불어오는 바람에 말라갔다. 어찌 야무지게 하는 일이 없으니, 어디 한 곳에 틀어박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라 무슨 일을 해도 생소하고 어렵고 요령이 없었다.

 이러니 기연조도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연서강은 시무룩해졌다. 제 자신의 몸도 채 가누지 못하는 덜된 어른에게 그 누가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손부채질을 멈추고 연서강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고목의 넓은 잎 그림자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람에 따라 그 모습을 시시각각 달리 하고 있었다. 금빛이 나부끼는 너른 강물의 수면 위처럼.

 “녹우당 도련님.”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연서강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연서강의 주변에 종종 어린애들과 아주머니 한 명, 아저씨 두 명이 모여 있었다. 연서강을 부른 건 어린애로, 7~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연서강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두 눈을 끔벅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름도 모른다. 나이도 모른다.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굴이 익다. 가끔 연서강이 저잣거리로 나와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때, 이것저것 주고 가거나 관심을 보이며 말 몇 마디 던져주던 사람들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아저씨 한 분부터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뭐땜시 나왔는가? 내 저짝부터 보고 있으니까 시퍼런 얼굴로 휘청휘청 걸어오던데.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지는가 싶어 불안해서 계속 보고 있었다니깐.”

 “아, 죄송합니다. 그냥 나들이 좀.”

 아줌마 한 분이 그 말에 깔깔 웃었다. ‘나들이 두 번 했다간 길바닥에서 죽겠어!’ 연서강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더울 줄 몰랐어요.’ 아이가 그 말에 두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묻는다. ‘지금도 더워?’ 괜찮다. 대답을 해주려던 연서강은 모여든 아이들이 모두 두 손으로 부채질 해주는 것을 보고 그만 웃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일제히 꼼지락거리는 애기 손들이 귀여워서였다.

 “자자,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거 먹고 힘내게.”

 또 다른 아저씨 한 분이 연서강에게 종이꾸러미를 건넸다. 연서강이 ‘네, 네. 감사합니다.’하며 받아들어 입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새빨갛게 잘 익은 앵두가 들어있었다. 더운 데 있어 시원하지 않지만 달기는 엄청 달 거라고 아저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줌마 한 분이 ‘아니! 내가 좀 얻어 달라고 할 땐 안 주더니!’하고 성질을 냈다. 아저씨는 ‘아, 뭐!’ 소리를 버럭 지르며 줄행랑을 쳤다. 그 뒤를 아줌마가 ‘나도 달라니까!’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이 더위에 저렇게 힘차게 달릴 수 있을까,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게 와 닿는-정확히는 앵두 꾸러미에 와 닿는 시선 여러 개에 ‘참.’하고 주변의 아이들에게 앵두를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 연서강도 입안에 앵두를 넣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좀 열기를 품고 있는 앵두는 달고 끝 맛이 조금 시큼했다. 그 단맛에 아찔해졌던 머릿속이 살짝 제정신을 되찾았다.

 쏴아-하고 한 차례 바람이 불어 연서강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앵두를 모두 나눠먹자 종종 모여 있던 아이들이 ‘도련님아, 안녕!’하고 손을 흔들며 제각기 갈 길을 갔다. 나머지 남아 있던 아저씨 한 분만 연서강의 옆자리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참, 그러고 보니 아들놈이 이런 걸 주더라고.”

 문득 옆에 앉은 아저씨가 그리 말하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연서강에게 주었다. 연서강이 엉겁결에 받아드니 나무로 만든 책갈피였다. 의아한 얼굴인 연서강을 보며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보다야 녹우당 도련님이 더 잘 쓰겠지?”

 연서강이 감사합니다, 대답하니 그가 머쓱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또 그렇게 귀한 집 도련님께서 나 같은 천것한테까지 예의를 차리고.”

 간다. 말하는 그에게 연서강은 웃으면서 ‘예.’라도 대답했다. 아무래도 더위를 식힐 목적으로 의자에 앉았던 게 아니라 연서강에게 내내 책갈피를 건네줄 알맞은 때를 찾기 위해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무를 얇게 벗겨내어 만든 책갈피엔 아무 문양도 금박도 없었다. 단순하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책갈피였지만 촉감이 좋았다. 거기에 꽂아두면 좋으려나, 싶으며 연서강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적어놓은 서책을 떠올렸다.

 멍하니 생각하며 연서강은 앞을 보았다. 아저씨가 나간 자리는 금세 새로운 사람이 와서 앉았다. 이렇게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시원에 그늘에 쉬러오는 사람이 그다지 특이한 것은 아니다. 옆에 앉은 사람을 보지도 않은 채 연서강은 여전히 멍하니 앉아 심부름 보낸 아이를 기다렸다.

 옆 사람이 조용히 말을 걸 때까지 말이다.

 “저기, 혹시.”

 옆 사람의 부름에 연서강은 잠깐 멀리 날려버린 의식을 부여잡고 ‘네?’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 앉은 사람은 연서강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색이 옅은 갈색에 살빛이 비교적 하얗고,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어디 고명한 집안의 도련님인가, 하고 연서강은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했다.

 남자의 복장은 어디 평범한 도련님의 것이긴 했는데 그에 사용된 옷감의 색채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곱디고운 분홍에 연녹색의 옷을 보며 연서강은 일순간 움찔했다. 꽃 자수가 놓여 있거나 장신구 몇 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으면 여인의 옷이라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한 색채의 옷이었다.

 수상한 점은 그 뿐만 아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남자가 연서강 쪽으로 상체를 지나치게 기울이며 팔을 잡았다. 뭐지?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연서강은 제 몸을 뒤로 당겼다. 남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갈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눈이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남자가 사람이 아닌 다른 것 같다는 건 아니었다. 약간 다홍빛을 띠는 것도 같은 갈색 눈이 인간의 것 같지 않게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남자가 경계하는 연서강에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수상한 사람은 절대 아닌데.”

 많이 수상했다.

 “다만 조금, 물어볼 게 있어서.”

 연서강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간혹 가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갑자기 풍문으로 들은 그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눈앞의 그 남자가 그 풍문에 꼭 알맞게 수상하고도 기묘한 분위기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혹시 자네, 요 근래 뭔가 신비롭거나 기묘한 일을 체험한 적 없는가?”

 연서강은 남자의 눈에서 읽은 기이하고도 독특한 빛을 그리 해석했다.

 사이비(似而非).

 국교를 믿지 않고 산에서 따로 수행을 하여 자신들만의 그 독특한 종교관을 피력하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 정통한 가르침도, 정당한 믿음도 없이 다만 말로써 사람을 현혹시켜 돈을 뜯어낸다고 한다. 국교가 있기는 하나 타종교를 그리 박대하지 않느지라 가끔 길을 가다 보면 종종 이런 자들이 눈에 띠었다. 누군가 연서강에게 ‘녹우당 도련님은 왠지 그런 사람들에게 붙들리기 쉬워 보이는 용모이니 조심해.’하고 경고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를 해준 사람이 이어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언뜻 그럴 듯 해 그대로 속아 넘어가지. 아예 안 듣는 게 좋아.’ 그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여 연서강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어, 저기. 잘 모르겠네요.”

 연서강이 어물쩡 말을 넘기며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그럴 리가.’하고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대단한 고민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남자를 흘깃 보며 연서강은 순간 속으로 중얼거렸다.

 멀쩡해 보이는데, 어쩌다가.

 사지 멀쩡하고도 용모도 괜찮은 남자다. 나이가 젊고 기골도, 목소리도 괜찮다. 녹우당 도련님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젊고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가 사이비에 현혹되어 이 대낮부터 사기를.

 포기도 하지 않은 채 남자가 연서강을 올려다보며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이상한 꿈을 꾸었다든가, 아니면 신변에 이상한 일이라도.”

 “조상님도 나타난 적 없고, 집에 불우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연서강은 ‘죄송합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 잠깐만.’하고 뒤에서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듣지 않았다. 몇 걸음 걷다 연서강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품속에서 소량의 돈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손안에 돈을 쥐어주었다. 아무래도 당황한 듯한 남자가 연서강의 행동에 더욱 당황했는지 할 말도 잃고 연서강을 쳐다보았다.

 “저기, 저, 고향에 부모님이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실 거요. 그러니 이런 사이비 짓 그만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사이비?!”

 연서강의 말에 남자가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말했다. 그에 연서강은 ‘역시.’하고 씁쓸해졌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남자가 연서강에게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연서강은 재빨리 ‘그럼!’하고 도망쳤다. 그렇지 않으면 멍하게 저 남자가 하는 말에 현혹되어 ‘그렇구나! 우리 집에 그런 우환이!’하며 부적이든 뭐든 사들여버릴 것만 같았다. 집에 우환이 있는 건 맞지만 종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참을 뛰던 연서강은 ‘아차!’하고 무릎을 쳤다.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심부름을 보낸 아이가 돌아왔을 때 그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다 연서강은 우울한 얼굴을 했다. ‘아직 있겠지.’ 그리고 제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연서강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불행하게 보이나.”

 “사이비를 만났다고?”

 연서강의 말을 모두 들은 기연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그에 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요즘 이상한 일을 겪은 적 없냐고, 심상치 않은 꿈 꾼 적 없냐고 묻던걸.’ 이어 연서강이 말하자 기연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하다. 내 주변에서 사이비를 만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강아.”

 기쁘지 않다. 연서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금 생각했다. 역시 내가 불행하게 생겼나. 그러나 확실히 기연조와 자신이 길을 걸을 때, 기연조보다야 자신이 더 말을 걸기 쉽게 생기긴 했다. 연서강은 기연조를 힐끔 쳐다보았다. 호쾌하게 생긴 청년이 술잔을 들다 말고 ‘음? 왜?’하고 묻는다. 연서강은 고개를 저었다.

 저리 생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에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기연조는 모를 일이겠지만 연서강은 기연조의 얼굴과 풍채가 좋았다. 연모하는 대상이니 좋아 보이는 게 당연하다지만, 사심을 배제하고 봐도 기연조의 인상은 참 좋았다. 세간엔 연서강의 첫째형인 연무강더러 ‘풍채 좋고, 듬직하며 됨됨이가 믿음직하다.’라고 평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기연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위압감이 느껴져 그 앞에 서면 절로 초조해지는 연무강과 달리 기연조는 부드럽고 청량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초면에 사람을 휘어잡는 힘은 다소 미흡하나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드는 데엔 능숙하다.

 기연조의 그 특유의 느낌이 너무도 부러워 어렸을 때, 연서강은 그를 흉내 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와 억양을 흉내 내고 행동을 비슷하게 흉내 낸다고 해도 연서강은 연서강이었고, 기연조는 기연조였다. 흉내 내어봤자 그 원본이 아니라 그런지 연서강은 제 모습이 기연조처럼 좋아 보이기는커녕 매우 흉측해 보였다. 그게 너무도 속상해서 연서강은 며칠 간 슬퍼했던 적도 있었다.

 왜, 자신은 이런가.

 심지어 한 핏줄인 형제들과 자신도 너무 달랐다. 연무강은 연무의의 판박이라 말할 것도 없고, 연무진은 지도력과 유쾌함을 지녔다. 연의향은 남자 못지않게 강단이 있어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났으며, 연의진은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하다못해 유일한 동생인 연서령조차도 낙천적인 성격에 행동력을 갖춰 사람들 사이에서 여장군감이라 말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였다. 연서강이 자신의 형제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자신이 형제들과 비교하여 뭔가가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

 연서강은 제 손에 들린 술잔을 응시했다. 비취색 술잔은 안쪽 바닥에 조그맣게 청색 잉어가 그려져 있었다. 잔속의 술이 흔들릴 때마다 잉어가 살아서 꼬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연서강이 아끼는 술잔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오늘 날도 더운데 저잣거리엔 왜 나간 거야? 뭔가 용무가 있었다면 내가 일이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나갔으면 좋았으련만.”

 기연조의 말에 연서강이 ‘그건.......’하고 말끝을 흐렸다. 누군가를 미행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그 미행도 이상한 사이비를 만나 무산되고 말았다. 그나마 그 흰색의 옷을 입은 남자가 남로(南路)쪽으로 향했다는 걸 알게 된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정말 한심할 정도로 처참한 결말에 연서강은 볼을 긁적였다.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한 게 답답해서 한 번 나가봤다네. 그런데 역시 나가지 말 걸 그랬어. 날도 덥고, 이상한 사람도 만나고.”

 이상한 사람, 하니 저절로 그 사이비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그 자도 퍽 분위기가 독특했었지.......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과 깔끔한 피부에 어울리게 단정한 용모의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수려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많은 수의 여인들에게 호감을 끌 법도 했다. 물론 그 화려한 색상의 옷으론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옷이 또 그 사이비에게 안 어울렸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치 오색이 영롱한 고운 빛깔의 새를 보는 듯 썩 잘 어울리긴 했다. 그런 색들이 잘 어울리긴 또 힘들 텐데. 그 남자는 그랬다.

 “분홍색과 연두색이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연서강이 문득 내뱉은 말에 기연조가 ‘응?’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건 못 밝힐 일도 아니라서 연서강은 마음 놓고 속에 품은 것들을 털어놓았다. 마침 밤도 깊었고 술도 몇 잔 마셨으니 술안주로 제격이란 생각도 들었다.

 “오늘 만난 사이비가 말일세. 분홍색과 연두색 옷을 걸치고 있었거든.”

 기연조가 그 말에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분홍색?’

 “그래, 분홍색. 그 사람에게는 잘 어울리긴 했지만, 남자가 쉬이 입기엔 좀 꺼려지는 색이 아닌가.”

 “음, 그렇긴 하지. 뭐 화려한 옷일수록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상대방에거 줄 수도 있으니 일부러 그렇게 입었을지도.”

 거기까지 말하고 기연조가 찡그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모양인지 기연조가 ‘설마, 그 사람도. 아니, 아니야. 그 사람은 그럴 필요도 없는데.’라고 중얼거린다. 무슨 소린가 싶어 연서강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기연조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아니. 화려한 색상의 옷-하니 말인데,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서. 무슨 공작새도 아니고 다양한 색의 옷을 즐겨 입고 다니지. 저번에 무난하게 흰 옷을 입었다, 싶었더니 화조도가 그려진 옷이었네. 붉고 탐스런 꽃과 퍼렇고 노란 깃을 가진 새가 그려진.”

 기연조가 말한 옷을 상상하며 연서강은 고개를 기울였다.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 옷이다. 여인의 옷이라고 하면 쉬이 연상하며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에게 그 옷을 입히면. 기연조가 이어 씁쓸하게 ‘잘 어울리긴 하는데.’하고 중얼거린다.

 세상엔 이상한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그리 이해하며 연서강은 이어 말했다.

 “게다가 광기라는 게 그런 건가 싶었네. 갈색 눈을 처음 봤는데 그 눈 안에 뭔가 기이한 빛이 보였어.”

 갈색 눈?, 하고 기연조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갈색 눈도 생각보다 흔한가 보군.’하고 중얼거리는 그에 연서강은 ‘그렇구나.’하고 신기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기연조가 말하는 사람도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인 듯 하다.

 “이러다가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은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는 편견이 생기겠군.”

 연서강의 말에 기연조가 뭔가 마뜩찮은 얼굴로 ‘그럼 다행이지만.’하고 대꾸한다.

 사이비이긴 했지만 그 남자의 눈은 확실히 뭔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약간 다홍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는 가운데는 또 검정색이라 절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다홍빛이 감도는 갈색까지. 그 남자의 눈동자에 무려 세 가지 색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잘 가공된 보석을 보는 듯 했다. ‘광기’라고 입에 올리긴 했지만 사실 연서강은 그런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묘한, 눈이었어.”

 호박색 보석이 살아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신령함이 깃든다면 그 남자의 눈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영묘’하고 연서강이 한 말을 반복하며 기연조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까부터 기연조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지 개운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아해 연서강이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이내 아니겠지. 고개를 저으며 기연조는 다시 연서강을 보며 활짝 웃었다. ‘사이비 이야기는 그만 하지.’ 떨쳐내고자 했지만 자꾸 뒤통수에의 그 불길한 예감이 들러붙는지 기연조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해서 연서강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의 일이다.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보다야 오늘 밤 기연조가 녹우당에 놀러왔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 *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그런지 주변에 자신과 다른 게 섞이면 귀신처럼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특히나 어린 아이들이 그랬다. 자신에게 위험한 것, 아닌 것, 자신과 비슷한 것, 다른 것, 익숙한 것, 생소한 것들을 아이들은 별 다른 정보 없이도 쉬이 가려내곤 했다. 물론 그에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시 문중의 아이들은 그런 데에 둔하지 않았다. 정작 둔한 것은 그들과 달라 그들에게서 배척된 연서강이었다.

 연서강은 정말로 몰랐다. 왜, 자신이 형제들과 그렇게도 달랐는지.

 다만 자신이 덜떨어지고 어설퍼 따돌림을 당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연서강은 노력했었다. 형제들과 비슷해지기 위해서 검술도 배웠고 말도 타 보았다. 부친인 연무의의 지도는 너무도 엄격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배워보았다. 허나 안 되었다.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형제들은 원래 갖고 있는 재능이 연서강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실패했을 때 얼마나 가혹한 벌을 받아도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부친인 연무의는 그것을 연서강이 칼에 찔려 거의 죽을 뻔 했을 때 깨달았다. 아무리 채찍질해도 연서강이 다른 형제들과 엇비슷하게나마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그는 연서강을 포기했다. 어깨에 붕대를 감고 열에 들뜬 채 누워있는 연서강에게 연무의가 이리 말했다.

 ‘배척받는 게 너의 길이다. 그러니 나도 모른다.’

 그것을 연서강은 단순히 재능의 차이에 따른 차별로 생각했었다. 이후로 자신을 이용하는 것 외엔 연무의가 아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너무도 못나서 연무의가 실망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연무의는 단지 가장으로서 제 집안의 질서와 균형을 위해 최소한의 일을 한 것뿐이었다. 연서강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에도, 손을 놔버린 그 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연서강에게 무심했었다. 연무의가 염려한 일은 곧 일어났다.

 최초로 변한 것은 첫째인 연무강이었다. 아니, 연무강은 처음부터 연서강을 꺼려했으니 최초로 변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 연무강은 연서강이 젖먹이였을 때부터 그를 싫어했다. 같은 한 자리에 있길 거부했고, 가까이 오면 밀어 넘어뜨렸다. 연서강이 넘어져 울면 그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냉담한 얼굴로 지켜보곤 했다.

 연서강을 툭하면 곤경에 빠트리고 때렸던 연무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결코 먼저 연서강에게 손을 대진 않았다. 연서강이 가까이 다가오면, 같은 자리에 있으면 분노했다. 그래서 연서강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연무강이 무서웠다. 12살이나 차이가 나서 대하는 게 어렵기도 했지만 그 태도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둘째인 연무진은 개구쟁이 시절엔 연서강을 괴롭히고 발로 찼지만, 후에 나이가 들고 나서는 그 정도가 덜해졌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폭행이 연서강의 얼굴을 보면 생각나 거북한 듯 보였다. 연무진은 연서강과의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할지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연무강과는 확실히 태도가 달랐다.

 셋째 연의향은 여자애인 만큼 위의 오빠들과 달리 연서강에게 그리 험악한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무시했다. 연서강을 마치 제 집에 놀라온 제 3자를 대하듯 대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사실은 이유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어렸던 연서강은 알지 못했다.

 넷째 연의진은 성격자체가 비교적 냉담한 편이었다. 하지만 성격이 냉담해서 그런 것과 거리감이 느껴져 냉담해지는 것은 다르다. 연의진이 연서가을 대할 때는 후자에 가까웠다. 막내 연서령은 위의 형, 누나들이 줄줄이 연서강을 호의적이지 않자 따라서 연서강과 서먹해졌다.

 첫째인 연무강을 필두로 하여 형제, 남매들이 차례로 연서강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가장으로서 집안의 이변을 연무의는 어떻게 무마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가장인 연무의가 일에 관심을 잃고 침묵하자 편 가르기는 더욱 심해지고, 냉담과 무시도 더욱 심해져 결국 집 바깥사람들까지도 알게 되었다.

 연서강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지 못했고,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지도 못했으며 가족들에게 말 한 마디 건네기도 힘들어졌다. 늘 언제나 혼자 있었고, 때문에 지안에 자신에게 허락된 각종 잡서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후에 자라면서 어째서 집안이 이다지도 자신에게 냉담한지 그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약간의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연서강은 결국 결심했다. 녹우당으로 가자고.

 쫓겨나는 게 아니다. 불편해하고 서먹해하는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와해되기 전에 자신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먹여주고 재워준 집에 대한 보답이라 여겼다. 좀 쓸쓸하긴 했지만 기연조가 있어서 연서강은 웃으며 집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거라 연서강은 자신이 다시 본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뭐라고?”

 그것은 연서강의 부친인 연무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연서강의 말을 들은 연무의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몇 개나 주름이 더 늘어난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서강은 ‘안 됩니까?’하고 물었다. 여전히 연무의에게선 아무 대답도 없었다.

 연서강이 녹우당으로 간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연서강이 녹우당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였듯이 본채 사람들도 연서강이 없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티끌 하나를 밖으로 배출한 가족들은 한층 더 돈독한 사이가 된 듯 했다. 저번보다 탄탄해진 ‘가족’을 보고 연서강은 이제 죽었다 개어나도 저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겠구나, 탄식한 적도 있엇다.

 잔뜩 곪아 있던 환부에서 배출된 고름덩어리.

 첫째 형 연무강에게서 그런 소리까지 들었을 적에도 연서강은 어둑어둑한 얼굴만 해보였을 뿐,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간단 말인가. 좋은 연인 사이에 억지로 끼어드는 눈치 없는 사람보다 배는 얼굴 가죽이 질겨야 가능할 것이다.

 연서강은 연무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청했다. 방안을 밝히는 호롱불이 잠깐 흔들려 벽에 생긴 둘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였다.

 “녹우당 생활을 완전히 청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만이라도 본채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연서강은 제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연무의가 어찌 받아들였는지 낮게 중얼거렸다.

 “녹우당에 있는 게 더 아늑할 것이다. 이제사 돌아 와봤자.”

 연무의의 말이 백 번 맞다. 확연한 거부는 아니지만 그의 말속에 언뜻 비치는 부정의 빛에 연서강은 눈썹을 구겼다. 연서강 또한 본채의 생활보다야 녹우당 생활이 훨씬 평온하고 아늑할 것을 알았다. 그 형제들과 탐탁치 않아 하는 부친, 은근슬쩍 비웃고 무시하는 본채의 가솔들. 녹우당을 제외한 연시 문중의 모든 것들이 연서강을 거부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더 가혹할까.

 그런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목소리가 안정이 되었다. 연서강은 고개를 들고 연무의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연무의가 연서강의 굳은 얼굴을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가 녹우당에 있길 바라는 것은, 골치 아픈 아들을 치워버리고 싶은 아버지의 뜻입니까, 아니면 연시 문중을 위함입니까.”

 연무의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소리지?’ 여전히 근엄한 목소리지만 연서강은 그가 조금 동요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물은 게 그 이유였다. 여유로웠던 그의 마음에 하나, 파문이 일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제 방이 이미 사라진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형님의 방은 아직 남아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 방을 잠시 빌려 쓰겠다는 뜻이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그게 아니라, 방금의 말이 무엇인지 물은 거였다.”

 연서강은 슬쩍 미소 지었다. 비로소 떨림이 사라졌다.

 “어떤 것 말입니까.”

 다소 능청스럽게 되묻자 연무의가 설핏 얼굴을 찌푸렸다. ‘너와 농을 나눌 마음은 없다.’ 차갑게 대꾸하는 그를 향해 연서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요.’ 잠깐 침묵한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연우비.”

 고요한 한 마디의 말이 순간 연무의를 긴장시켰다.

 연서강은 조용히 연무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그 분이 제 어머니시죠?”

 “.......”

 호롱불이 다시 흔들렸다. 벽 위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또 크게 일렁였다. 일렁일렁 춤추다 이내 안정을 되찾았을 땐 방안의 공기는 이미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홍월정에 유희 온 노래 부르는 예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 연무의의 여동생. 홍월정과 녹우당을 폐쇄하는 것도 모자라 완전히 허물어질 위기까지 몰고 간 여인. 혼인을 앞두고 천한 예인과 도망친 그녀 때문에 연씨 문중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었다.

 그리고 연서강의 형제들이 연서강을 배척하는 원인.

 “.......”

 말을 내뱉고 나자 찾아온 무거운 침묵이 연서강을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잔혹하다, 잔혹해. 연서강을 거의 기르다시피 한 유모 서씨가 한탄하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감돌았다. 너무도 하지. 그리 한숨 쉬며 그녀는 어린 연서강을 끌어안았다. 도련님, 서강 도련님. 절대 기죽지 마시고 사셔요. 도련님의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서 도련님이 태어나신 거니까. 상황이 단지 좋지 않을 뿐, 도련님도 충분히 축복받고 태어난 아이랍니다. 나이 어린 계집종이 방금 내뱉었던 망언-죽을 뻔한 목숨이라는 말을 지우기라도 하듯 그녀는 연서강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린 도련님, 하고 한숨을 내쉬듯.

 아무도 돌보지 않고 있던 연서강을 그녀가 챙겨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야반도주한 연우비를 제 손으로 키웠던 지라 차마 연서강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제 자식도 없는 지라 그녀가 얼마나 연우비를 소중히 키워왔는지 연서강은 알지 못한다. 다만 연우비가 야반도주해 세간의 욕을 들어먹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만은 안다. 자신을 키울 때 이미 나이가 많았던 지라, 지금은 죽고 없는 그녀가 연서강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도 계속 녹우당에 있길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연우비를 연무의가 용서할 리가 없다. 아무리 친 여동생이라고 해도 그녀 때문에 부모님이 고통스러워했고, 한점 티도 없이 반듯하게 빛나던 연씨 문중이 세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게 되었다. 연무의에게 연우비가 얼마나 귀여운 여동생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우비가 철없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후유증을 남겼는지는 연서강도 알았다. 아직까지도 세간 사람들의 더럽고 추잡한 농에 연우비의 이름이 오르니 말이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연무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스스로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저도 말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어쩌다 연우비의 자식인 자신이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연무의에게 따져 밝히고 싶진 않았다. 유모 서씨가 했던 말의 뜻이 무엇인지, 주변 가솔들이 철없게 떠든 말도 또 무슨 뜻이었는지. 연무강의 이유 없는 적대감과 연무진의 괴롭힘, 그리고 연의향과 연의진의 냉대와 무시도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오직 여동생 연서령뿐일 것이다. 크면서 저절로 이해하고 추측하게 된 사실에 연서강은 그냥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을 뿐이었다.

 아버지 연무의가 생각하는 것도 이해한다. 굳이 또 연우비와 관련된 추잡한 사실을 끄집어 말해 뭘 하겠는가. 이대로 세간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에 가둬두고 흘러버리는 것이 나았다. 연서강이 숨을 죽이고 살아가다 결국 타계하게 된다면 연씨 문중의 오욕도 비로소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서강도 굳이 자신과 ‘가족’들 사이에 굵고 강직한 선을 긋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완전히 밝히게 되면 연서강은 세상 천지에 홀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고독이 두려워 연서강도 입을 다물었다. 

 누가 얼마나 추측하든 연무의가 나서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한, 연서강은 연무의의 자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었다.

 연서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허울뿐이라도 좋으니 주변과 저를 연결해주는 끈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묻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두렵지 않나 보지?”

 순간 날아온 날카로운 질문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연무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연무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섭고 뾰족했다. 대답은 절로 나왔다. ‘그렇습니다. 그 끈이 정말 허울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하지만 연서강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소리였다.

 “두려운 건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제가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나불거릴까봐 조바심을 느끼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이어 속삭인다.

 “예를 들어, 기연조에게라든가.”

 다시 연무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노기가 얼핏 스치는 것을 본 연서강은 재빨리 그가 뭐라 소리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서강은 완전히 결론을 내렸다. 기씨 문중과 연씨 문중이 서로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실은 곧 연쇄적으로 다음 깨달음을 낳았다. 어째서 기연조에게 자신이 연무의의 자식이 아니란 걸 말하면 안 되는가. 연서강은 씁쓰레 시선을 내렸다.

 .......역시, 연무의는 여차하며 자신을 이요해 기연조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서강을 이용해 기연조를 없앤다. 이어 연서강도 없애, 후에 날아올 자신의 가문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막을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연서강이 연무의의 자식이 아니라 연우비의 자식이란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곤란한 것이다. 연서강이 연우비의 자식이란 게 알려지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연서강도 죽인 게 아닌가, 반박을 받을 수도 있었다. 같은 핏줄이라도 친자식과 야반도주하여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동생의 자식은 다른 것이다. 특히나 연무의의 성미를 안다면.

 가슴속에 가득 찬 비애를 숨기기 위해 연서강은 일부러 말을 꺼냈다.

 “.......서령이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강과 무진은 확실히 알고 있다. 향이는 똑똑해서 제가 스스로 알아챈 것 같더군. 의진이는 어렴풋 알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특히나 연무강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연서강과 연무강은 12살 차이다. 신생아인 상태로 연서강이 이 집에 왔다고 생각해봐도 그는 이미 12살이었다는 소리였다. 12살이면 이미 간단한 사리분별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다. 연무강은 아마 연서강이 어떤 식으로 연씨 문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름덩어리. 연무강이 그런 말을 할 법도 하다고 생각하며 연서강은 ‘그렇습니까.’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제 상관없다. 그런 말을 백번 듣는다고 해도.

 “아무래도 아버지께서는 제가 본채로 돌아오는 걸 꺼려하시는 것 같아 묻겠습니다.”

 한층 묵직해진 연서강의 목소리에 연무의가 한쪽 눈썹을 구겼다. 사실 연무의는 현재 무척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연서강의 성격을 모르는 연무의도 아니었다. 연서강이 그 사실에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고 해도 연무의는 크게 놀랍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조곤조곤 말을 꺼내는 연서강의 태도가 놀라웠다. 연서강은 늘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연무의는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청년이 과연 그 연우비의 자식이 맞는가 의심했다. 형제들의 부당한 배척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던, 그가 맞는가? 자신이 뭔가 말만 하면 떨며 실수했던 그가? 그 의심은 연서강이 입을 열자 더 강해졌다.

 “.......왜, 제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 걸 기연조에게 알리면 안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순간, 연무의는 뜨끔했다.

 전장을 누비며 빛나는 무훈을 세우고 많은 병사들의 정점에 서서 호령했었던 남자는 이 상항이 익숙했다. 반전. 일의 형세가 기이한 꼴로 뒤집히고 있다. 이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연무의는 연서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연서강은 기죽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연무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눈동자에 깃든 빛이 혼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한 점 흔들림 없이 정갈하여 연무의는 속으로 나지막한 신음을 흘렀다.

 마치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눈이었다.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다.”

 알 리가 없다. 연무의는 그리 생각하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리 말하면 연서강은 ‘그렇겠지요.’하고 우울한 얼굴로 제 자리에 돌아가곤 했다. 아니, 애초에 연서강은 뭔가를 알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멍청한 얼굴로 바닥을 기다시피 비굴한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러시겠지요.”

 연서강이 실소를 흘리며 제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 모습이 낯설어 연무의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하긴 기연조 뿐만 아니라 연씨 문중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제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란 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곤란하시겠죠.”

 이어 말하는 말에 연무의는 ‘그렇지.’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본채로 돌아가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연무의는 대체 왜, 연서강이 일도 갑작스럽게 본채로 돌아오기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서 녹우당으로 간 아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게냐?”

 “아닙니다. 원래는 이게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까. 제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면, 게다가.”

 거기서 고의적으로 연서강은 말을 끊었다.

 “게다가?”

 “게다가 문득 앞일을 생각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무의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문득?’

 그에 연서강은 기연조의 기묘한 대답을 떠올렸다. ‘혹시로 시작해서 문득으로 끝나는 대화로군. 여기에 난 새삼. 이라고 대답해도 되는가?’ 또 ‘새삼 조심할 것도 없어.’까지. 그 화법이 현재 연무의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연서강은 미간을 좁혔다.

 “생뚱맞구나.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가 인 이유가 무엇이더냐?”

 곧이곧대로 상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건.

 .......기연조도 마찬가지였던가.

 연서강은 차갑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제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와르륵, 죽기 전까지는 몹시도 평온하다 여겼던 주변이 무너져 내렸다. 사실은 연서강이 말만 하면 무너지는 세계였던 것이다. 연서강은 흐릿해지는 눈에 힘을 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아비가, 자신을 믿을 수 있게.

 “연씨 문중의 비밀을 캐려고 기연조가 제게 접근한 걸, 어버지께서는 .......왜 그냥 두셨습니까.”

 그렇게.

 단풍이 아름다웠던 그 날을 씁쓸한 것으로 채색했다. 연서강의 말에 연무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약만 주고, 빨리 나으라고.

 연서강의 말에 연무의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무르다고 소문난 연서강의 성미를 이용해 뭔가 이쪽의 정보를 캐려고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이리도 어린 아이를 보내 연서강과 접촉할 줄은 몰랐다. 마음대로 하라고 연무의는 생각했다.

 저쪽에서 무슨 마음으로 기연조를 연서강에게 보낸 것인지 그 속이 충분히 짐작가지만, 안타깝게도 연서강은 연씨 문중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다.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알게 되더라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입을 다물겠지.

 허나 기연조는 달랐다. 기씨 문중의 기연조라는 아이가 대단히 영특하다는 소문을 연무의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저 남이라면 부럽다 말하고 말 일이지만, 기씨 문중의 아이라 그 감상이 좀 달랐다.

 연서강은 절대 샐 리 없는 항아리다. 오히려 기연조에게서 연서강이 뭔가 들어오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연무의는 그리 셈하며 입을 다물었다. 연서강이 기연조에게서 받아온 약을 맛보는 것도 보았지만 모르는 척 했다.

 연서강은 물렀다. 무르고 착해서 아마도 상대방을 매우 방심하게 만들 것이리라. 사실 연무의는 연서강의 그런 점 때문에 태후전 사람들이 모이는 연회에 일부러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앞에서는 연무의에게 ‘당신의 편입니다.’하고 살살 기는 사람들이라고해도 연서강의 앞에서만큼 솔직하게 연무의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곤 했었다. 그런 숨어있는 정적을 걸러내는 데 연서강은 무척 탁월했던 것이다.

 그러니 기연조도 언젠가 연서강의 앞에서 실수를 할 날이 올 것이다. 연무의는 그 날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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