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37)

 2.

 연씨 가문의 17대손. 연무의는 현재 쉰 두 살의 나이로 군정 최고대신인 태위의 자리에 오른 자였다. 태위란 병사의 공가를 평가해 상벌을 행하고 나라의 중대한 군사 업무를 보는 직책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 하나였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의 아식(兒息: 아들과 딸)들 또한 하나씩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선 장남인 연무강은 궁성 내부의 경비를 담당하는 위사(衛士)였고, 차남인 연무진도 중앙군인 사방장군 중 하나인 남장군(南將軍)이었다. 셋째이자 장녀인 연의향은 여성의 몸으로도 국경을 지키는 사진군 중 하나인 서진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이었고, 그 아래 여섯째인 계녀(季女) 연서령 또한 중장군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삼남이자 넷째인 연의진은 비록 형제들과 다른 의원의 길을 걸었으나, 명문 연씨 가문의 명성과 위업에 알맞게 황실 의원에 임하고 있었다. 또한 연무의는 현 황후의 백부이기도 했다.

 실로 현재 연시 가문은 엄청난 권세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 대단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인 연시 가문의 유일한 흠은 다섯째인 연서강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야심 찬 연무의의 자식답지 않게 향상심도, 투쟁심도, 권력욕도, 출세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연재 그는 별다른 직책도 없이 저택 변두리의 별당에 들어앉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잘난 집안에 하나 있는 못난 자식은 무릇 세간의 동정을 사는 법이다.

 연서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지라, 가끔 저잣거리에 나가면 그는 사람들에게서 매우 과분한 동정을 받곤 했다. 어린 처녀가 와서 얼린 홍시를 주고 가기도 했으며, 낯모르는 꼬마 아이가 와서 오늘은 많이 땄다며 파란 구슬을 주고 가기도 했다. 걷다가 어지러워 잠깐 길기 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본 것처럼 ‘쯧쯧, 일주일 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말랐구먼.’ 하고 중얼거리며 설탕과자를 쥐어주는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아무 말 없이 고운 수가 놓인 주머니를 쥐어주는 아저씨까지 그 형태도 참으로 다양했다.

 처음에 연무강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몹시 의아해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신이 동정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과,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름 아닌, 기연조가 희희낙락하며 찾아와 연서강에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자네, 녹우당으로 쫓겨났다며?’ 연서강이 제 발로 녹우당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는 소문이 그리 났다며. 이어 기연조는 ‘자네가 열 살 되던 해, 자네 아버님께서 자네가 하등 쓸모없는 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네를 죽이려고 하셨다면서?’라고 물었다. 열 살 때 죽을 뻔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연서강이 칼을 들고 있음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일어난 사고에 불과했다. ‘집안의 모든 형제 식구들이 널 무시하고 구박한다던데.’, 마지막으로 나온 기연조의 말에 연서강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것이었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연서강이 연씨 일가식솔로부터 구박받고 박해받으며 차별받는다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라고.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알리기 위해 각별히 마음먹은 연서강은 어느 하루는 옷을 잘 차려 입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허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연서강이 입고 있는 옷의 좋고 나쁨을, 저잣거리 사람들은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상등품도 그것을 가까이서 접하는 사람만이 능히 알아볼 수 있듯, 그와 같은 이치로 저잣거리 사람들은 연서강이 입고 있는 옷이 얼마나 좋은 옷감에, 얼마나 훌륭한 솜씨로 지어졌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연서강에게 백설기를 쥐어다주던 한 할머니가 ‘아이고, 오늘 입은 옷은 때깔도 좋네.’라고 칭찬해주었을 뿐이었다.

 해서 연서강은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이 여인이라도 되었으면 이래저래 어여쁜 장신구나, 값비싼 보석들로 꾸며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사내인 이상 그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정에 굶주린 연서강은 저잣거리 사람들이 자신을 ‘녹우당 도련님’하고 부르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고 있으면 어린 계집아이가 다가와 ‘녹우당 도련님, 더워요?’하고 물으며 부채를 부쳐주는 것도, 생선을 잡아다 파는 아낙이 어디선가 각얼음을 구해와 연서강의 입안에 넣어주는 것도.

 그들이 보여주는 인정이 좋았다. 삿된 오해를 받는 집안에는 미안하지만, 연서강은 저잣거리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주곤 하는 애정이 좋아 지금껏 소문을 정정하지 않고 지내왔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서강이 혼자 거리를 걷고 있으면 모르는 사이에 슬금슬금 따라붙어 말을 건네던 사람들이, 연서강이 기연조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으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연조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조차도 느껴지지 않아서, 언젠가 연서강은 ‘녹우당 도련님은 사실 저잣거리의 도련님이었구나.’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잘난 집의 못난 자식이란 그 집안이 얼마나 잘났건 간에, 사람들의 친근함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친근함의 정도는 이웃집 개구쟁이와 상등한다. 하지만 그 친근함은 못난 자식의 잘난 친구와는 별개의 문제다.

 “.......자네는 또 얼마나 잘난 집 자식이라 소문이 났기에.”

 오늘도 여전히 혼자 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차디찬 사람들의 냉대(?)에 연서강은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가게에서 찻잎을 사고 연서강의 곁으로 돌아오던 기연조가 ‘뭐가?’라고 되물었다. 그의 손에는 동생에게서 부탁받았다던 녹차 잎이 한 봉투 들려 있었다. 물론 마시려고 산 것이 아니다.

 기연조의 집안도 연서강의 집안 못지않은 명문이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산 녹차 잎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상등(上等)의 찻잎을 기연조도 넘칠 만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연조의 누이동생이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겨한다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국내에서 이름난 명인이 재배한 찻잎부터 시작하여 외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잎까지 모조리 갖춰두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저잣거리까지 나와 찻잎을 구입하는 것은 기연조의 동생이 녹차 잎으로 베개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였다. 수를 놓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던 기연조의 동생은 지금 수를 놓고 있는 베개에 방충과 악취 제거의 효과를 더하기 위해 싼 녹차 잎을 구하고 있었다. 마시고 말린 찻잎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연서강은 생각했지만 부잣집 도련님과 아가씨들은 과연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기연조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응시하며 연서강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마실 수 있는 멀쩡한 찻잎인데 그리 낭비하다니.”

 어깨를 으쓱하며 기연조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쓰고 맛도 없을걸.”

 질 나쁜 찻잎으로 우려낸 차는 향도 좋지 못하고 매우 고약한 맛을 낸다. 씁쓸한 것은 둘째 치고 비리기까지 하다. 거기에 물맛까지 나쁘면 ‘마시자마자 뿜는’ 차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마시자마자 뿜을 정도로 고약한 차를 어찌 그리 마지막 모금까지 닦아 마실 수가 있는지, 가끔 연서강의 여동생인 연서령이 투덜거린 적 있었다. 그 고약한 차를 마시는 연서강의 앞에서 큰 소리로 말이다.

 “.......꿀을 넣어서 마시면 괜찮은데.”

 “꿀을 사먹는 돈으로 차라리 좋은 찻잎을 사는 게 낫겠다, 강아.”

 ‘마시자마자 뿜는’ 차를 마실 수 있는 도련님이든, 마시지 못하는 도련님이든 어찌 됐든 둘 다 ‘도련님’은 도련님이었다. 기연조의 대꾸를 들은 연서강은 지난 번 자신이 지금과 똑같은 대답을 했을 때, 왜 연서령이 한심한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봤는지를 깨달았다. 그때는 꿀도, 조청도, 엿도 모두 일반 서민이 차에 넣어서 마시기에는 비싼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해서 자신의 대꾸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안 연서강은 할 수 없이 ‘베개 잘 만들라고 해.’하고 두 손을 들고 포기했다. 그런 연서강을 보며 기연조가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연서강은 ‘아.’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며 두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 말을 꺼낼까 내심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되었다. 연서강은 무의식중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한낮의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양한 생김새, 다양한 연령,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오가는 큰길이니 당연하기도 했다. 잠시 그늘에서 쉬기 위해 길가의 버드나무 아래로 몸을 옮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방으로 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딱히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해서 연서강은 굳은 얼굴로 기연조의 팔을 잡아 당겼다. 기연조의 상체가 연서강 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연조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댄 연서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르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 요새 근처에 원한 산 곳이 있는가, 하고.”

 “.......뭐?”

 연서강의 질문이 몹시 의외였는지 기연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원한?’하고 다시 기연조가 물었다. 황당해하는 그의 반응을 보고 새삼 연서강은 자신이 얼마나 맥락 없는 질문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아니.......’하고 연서강은 말끝을 흐렸다.

 “자네가 일하는 곳이 일하는 곳이니만큼,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러니까.”

 하고 말하는 연서강을 기연조가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질문이 뜬금없이 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고 있던 차라, 기연조의 그런 행동은 연서강을 더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기연조의 검은 눈이 자신의 얼굴을 향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는, 혹시나 자네가 나쁜 일에 휩쓸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기연조의 시선에 기가 죽은 연서강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기연조가 들고 있는 찻잎 봉투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하얀 먼지가 묻어있는 종이봉투가 버석버석해 보여선지, 왠지 자신의 목도 바짝 말라오는 것 같다.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차마 그 말의 뒤를 이을 수 없어 연서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피를 흘리며 땅 위로 쓰러지던 기연조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이 화살처럼 연서강의 가슴께를 뚫고 나갔다. 싫어.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장면은.

 “생기면?”

 불쑥 기연조가 묻는다.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에 연서강은 다시 눈을 뜨고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문 이 사이로 더운 숨이 나왔다.

 “.......죽을까봐, 나는.”

 간신히 연서강은 말을 이었다.

 자신을 죽였던 그 복면의 사람들은 분명 기연조를 노리고 있었다. 기연조를 없애기 위해 그의 친우인 자신을 납치했던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기연조가 죽지 않길 바란다면 그가 그 사람들에게 죽을 만한 이유를 없애면 된다.

 어째서 기연조가 죽지 않으면 안 될까. 보복? 원한? 아니면 다른 무엇?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녹우당에서 노닐 때, 자신의 친구는 사실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려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걱정할까봐 차마 내색을 하지 못했을 뿐, 그랬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그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한 친구였던가.

 어찌되었든 사람을 둘이나 죽일 정도의 원한 관계라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닐 것이다. 기연조와 자신이 살해당하는 그 날은 비록 먼 겨울로, 지금으로부터 아직 몇 달이나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 시발점이 될 만한 사건은 이 언저리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연서강은 그리 생각했다.

 그때, 기연조가 돌연 크게 웃었다.

 “강아!‘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연서강은 그의 웃음소리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니 기연조가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연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절명한 부군을 따라 죽는 열녀도 아니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네가 죽긴 왜 죽어?”

 이어 멍청한 얼굴을 한 연서강의 어깨를 탕탕 두드린다.

 “하긴 자네에게 벗은 나 뿐이니 내가 죽으면 충격이 크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죽는다니.”

 “아니, 나는.”

 그런 말이 아니다. 죽는 건 자네고, 나는 그게 겁이 난다고.

 그러나 연서강은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기연조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국 모든 사정을 그에게 숨김없이 털어놓게 될 것이라, 연서강은 생각했다.

 묻는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기연조인 바에야 애초에 숨기는 것은 무리다.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탓에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어선지 연서강은 기연조에게 퍽 약한 편이었다. 더더군다나 기연조와 연서강은 십일 년 지기. 연서강이 하는 생각이라면 눈을 감고서도 맞출 수 있을 기연조가 연서강의 서투른 연기에 속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연서강은 애초에 그에게 말을 말기로 결정했다.

 연서강은 아직 기연조에게 자신이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좋을지 숨기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은 상태였다. 또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미래의 일들을 기연조에게 털어놓는 것은 최후에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나는.”

 연서강은 얼굴을 찡그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기연조가 다른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머릿속을 스친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황귀비님의 일도 있고 하니까, 혹시나 너를 음해하는 세력이라도 있을까 하고.”

 그 말에 기연조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강아.’하고 그가 연서강을 나직이 불렀다. 연서강이 무심코 고개를 들자, 기연조가 말했다. 

 “너마저도 그 소문을 믿는 거야? 황태후께서 그 분을 독살케 명하셨다고?”

 “.......”

 단호한 기연조의 말에 연서강은 대답 없이 그저 숨만 삼킬 뿐이었다.

 연서강이 기연조가 살해당하는 이유 중 ‘원한 관계’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여타의 많은 살인 사건들이 그런 이유로 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서강의 부친인 연무의는 현재 황후의 백부가 되는 사람, 즉 연씨 가문은 넓게 보면 황후의 친정이 된다. 때문에 아무리 정치에 무관심한 연서강일지라도 전, 현재의 황족보(皇族譜) 관계가 어찌 되는지 정도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현 황제의 생모인 황귀비 기씨는 다름 아닌 기연조의 증대고모(增大姑母)로 현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5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사후, 황실에서는 원래 몸이 약했던 사람인지라 출산 후 지병이 깊어져 붕하신 것이라 공포하였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불신은 그로부터 5년 후, 현 황제의 부친이 되시는 선제(先帝) 영무제 또한 황귀비 기씨와 비슷한 증세로 붕(崩)하시자 더욱더 강해졌다. 사람들은 현재는 황태후 자리에 오른 황후 현씨(氏)가 그 두 사람을 독살한 것이 분명하다고 수군거렸다. 그 몹쓸 의심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선황제인 영무제와, 황후 현씨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다만 황제의 후궁인 귀비 기씨만이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귀비 기씨가 황제의 첫 아들이 되시는 황자를 생산하였을 당시, 황후 현씨는 제국의 국모다운 자애로움을 발휘하여 온갖 비단과 보석과 함께 귀비의 처소로 행차하여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귀비 기씨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비 기씨는 황공해하기는커녕 지극한 두려움에 벌벌 떨며 황후의 발치에 엎드려 황후의 축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사람은 황제인 영무제가 아닌 황후 현씨였다. 영무제는 태생적으로 유약하고 사람을 부리는데 서투른데다, 야망은 물론 정치적 암투에도 재능이 없었다. 때문에 영무제가 황위에 있을 적, 실질적으로 정사를 돌본 사람은 다름 아닌 황후 현씨였다. 영무제와 달리 현황후는 매우 머리가 영특한데다 권력욕도 강했으며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야망도 컸다.

 당시 나라는 황후 현시의 입맛대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귀비 기씨가 어쩌면 황위를 이을지도 모를 아들을 낳았는데도 되려 공포에 질려 떨 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후 현씨가 자신의 방해꾼이나 다름없는 귀비 기씨와 그녀 소생의 황자를 곧 없애버릴 것이라 믿었다.

 과연 황후 현씨는 그 시꺼먼 속을 금방 드러냈다. 황후 현씨가 내전(內殿)의 수장인 황후라는 직책을 들먹여 손수 귀비와 그녀의 아들을 극진히 돌보기 시작한 이후, 귀비 기씨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낳고 몸이 급속도로 약해진 귀비 기씨는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귀비 기씨의 사후 귀비 기씨 소생의 황자는 완전히 황후 현씨의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황실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황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영무제다 몇 년 뒤, 귀비 기씨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숨을 거두고 만다.

 황제 붕어(崩御). 황제의 자리는 비었고, 황제의 소생은 이제 죽은 귀비 기씨가 낳은 어린 황자 하나뿐이었다.

 그러자 황후 현씨는 당시 고작 8살에 불과했던 귀비 기씨의 아이를 새 황제로 내세우며, 자신이 섭정을 하겠다고 공포했다. 그리하여 황태후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동조(東朝: 수렴청정하던 태우) 자리를 손에 얻은 그녀는, 황제가 된 귀비 기씨의 아리를 앞세워 본격적으로 나라를 제 입맛대로 다스려 나가게 된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황태후가 선대 황제에 이어 이번 황제까지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해 영무제는 물론, 귀비 기씨도 죽인 것이다. 그래서 귀비 기씨의 사후 그녀가 귀비의 아이를 거둔 것이고, 새로운 황제로 다른 종친들의 자식이 아닌 귀비 기씨의 아이로 지목한 것이라고.

 귀비 기씨의 아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귀비 기씨는 황제를 탄생시킨 후궁으로서 황귀비에 추존되었으나 영무제가 황제였던 시절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여덟 살이었던 현 황제가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황태후는 공식적으로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오랜 시간 조정 권력의 정점에 군림하면서 제 세력을 비대하게 키운 황태후와 이제 섭정을 벗게 된 애송이 황제. 불 보듯 뻔한 세력판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황제 스스로가 황태후의 그늘 아래서 벗어날 의지가 보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실공이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된 황태후지만, 그래도 황귀비 기씨 쪽 세력인 기씨 가문은 늘 염두에 두고 경계하고 있지 않을까. 권력암투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연서강은 그리 추측했다. 조정엔 황태후 세력이 만연하니 만약 그들이 기연조를 없애려고 마음먹었다면 겨울의 그 일이 일어날 법도 했다. 게다가 황태후쯤 되면 연서강의 아버지인 연무의의 심기를 거스른다 해도 그리 큰 타격은 없지 않겠는가.

 그게 어젯밤 내도록, 영무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암투에 별 재능 없는 머리를 가진 연서강이 열심히 생각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 겨울날 자신을 납치한 뒤, 기연조를 죽인 자들은 분명 황태후 쪽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기연조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강아, 그건 단지 흉악한 소문일 뿐이다. 그런 소문 때문에 민심이 더 흉흉해지는 것이지. 태후전에서 황귀비님을 독살했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어.”

 기연조의 진지한 말에 연서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기연조의 말이 맞았다. 대다수의 여론이 그러하다고,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지만 거기엔 증거가 없었다. 말 그대로 ‘심증’ 뿐이다. 황태후가 선대 황제와 황귀비 기씨를 살해했다는 것은.

 기연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영안궁(永安宮: 황태후의 처소) 마마를 모후로서 지극히 공경하고 계시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라면 황귀비님의 소생인 황상폐하께서 영안궁 마마를 이리도 잘 따르시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연서강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기연조가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대쪽처럼 강직하고 도덕관념이 투철한 기연조의 성격을 연서강은 평소 깊이 존경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성격에 단점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엔 다소의 융통성과 의심도 필요하지 않나.

 그리 충고하고 싶지만 연서강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기연조가 좋은 사람인 건 추호도 의심할 바 없으나, 자신의 충고를 잘 새겨들을 사람은 또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줏대가 있다는 건 곧 고집이 세다는 말과 상통하는 법이니.

 “.......어찌 되었든, 요사이 자네가 잘 지낸다면 그걸로 됐어.”

 생각해보니 또 그랬다. 연서강도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기연조가 어떤 위험에 빠져 잇을 거라 추호도 생각지도 않았지 않다. 그 말은 그만큼 기연조가 제 신변의 일을 잘 숨겼다는 뜻이었다. 저번에 그랬던 사람이 이번에 새삼 변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연서강에겐 두 번째 겪는 5월이라 전번도, 이번도 다르다. 하지만 기연조에겐 저번도, 이번도 똑같은 5월인 것이다.

 “.......”

 새삼 연서강은 눈앞의 남자에게 섭섭해졌다. 저절로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연서강이 중얼거렸다.

 “내게 듬직한 구석이 있을까 의문스럽지만, .......만약 힘든 일이 있다면 내게도 말해주게.”

 그 겨울이 오기 전까지도 눈앞의 남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의지한 적이 없다.

 기껏 보여주는 약한 구석이라곤 마음이 적적하니 술이나 함께 하자며 청해오는 것 정도. 정작 중요한 일은 말해주지 않는다. 기연조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자신을 배척하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걱정할까봐 염려해서인 것도 알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연서강으로 하여금 눈앞의 남자가 멀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

 말을 마치고 침묵하는 연서강을 기연조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뭔가’를 숨기고 있어 켕겨하는 구석이라곤 하나 없었다. 그저 할 말이 없어 쳐다본다는 느낌이었다. 양쪽에서 입을 다물자 침묵은 어설프게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데에 관심이 생긴 거야?”

 그 침묵을 타파하고자 마음먹었는지, 기연조가 목을 가다듬은 뒤 연서강에게 물었다. 상대방에게서 ‘그럴게.’랄 대답이 아닌 자신의 신변을 묻는 질문을 듣자 연서강은 마음속이 다시금 어둡게 침잠하는 것을 느꼈다. ‘그냥.’하고 연서강은 제 마른 입술을 한 번 손가락으로 훔친 다음 이어 중얼거렸다.

 “저번 시정잡배가 일으킨 난동에 자네가 다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위기감이 들었네.”

 기연조가 연서강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곧추세우며 다시 물었다.

 “.......문득?”

 “문득.”

 ‘그렇군.’하고 기연조가 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연서강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자 기연조가 싱긋 미소 지었다.

 “‘혹시’로 시작해서 ‘문득’으로 끝나는 대화로군. 여기에 난 새삼, 이라고 대답해도 되는가?”

 그 웃음에서 연서강은 오래된 기억 한 조각을 찾아냈다.

 “새삼 조심할 것도 없어.”

 이상하게 시야가 아찔했다. 연서강은 잔뜩 흐려진 표정으로 ‘그런가.’하고 쓰게 대꾸했다. 기연조가 연서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말하며.

               * * 

 계절은 가을이었다.

 정자 옆에 있는 키 작은 단풍나무의 잎이 온통 고운 다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품종자체가 그런 품종인 것인지 유독 작다고 생각한 단풍나무는 잎 또한 작았다. 자잘한 단풍잎들이 조롱조롱 가지에 달려 있는 모습이 단풍잎이라기보다는 한 데 뭉쳐 있는 빨간 색종이 뭉치처럼 보였다.

 정자 안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연서강은 나뭇잎 개수를 세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 수가 참 많아 보였는데, 직접 세보니 생각보다 더 많았다. 셈이 삼백은 훨씬 넘었는데도 센 것보다 세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

 정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은 그런 연서강을 내버려두고 저쪽 연못가로 걸어가 버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신이 팔려 연서강이 뒤쳐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른들이 자신을 두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나뭇잎 수를 세고 있던 연서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쉬이 어린 아이는 미아가 되는 법이었다.

 -뭐 해?

 그때, 그런 연서강의 옆으로 한 아이가 다가와 물었다.

 그것이 어떤 자리였더라.... 연서강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워낙 오래된 기억인지라 세세한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어떤 연회였던 것 같다. 무슨 연회였는지, 또 어떤 연유로 그 자리에 연서강이 따라오게 되었는지, 어른들이 왜 저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연회에서 연서강이 처음 기연조를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연서강은 나뭇잎을 세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아이를 보았다. 순간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바로 연서강은 후회했다. 그는 ‘아차’하며 낭패란 얼굴로 단풍나무를 다시 보았다. 그러나 어디까지 자신이 셌는지 나뭇잎에 표시가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셀 엄두는 나지 않았다.

 -색이 참 곱지?

 절망에 빠진 연서강의 귀에 다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단풍나무는 외래종이라 다른 데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거라고 하더라. 우리나라와 토양이 맞지 않아 계속 말라 죽었다더군. 그걸 간신히 여기까지 키워내 처음 공개하는 거라고.

 -.......

 -기껏해야 관상용인 나무를 왜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워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방금 자신의 곁에서 대화를 나눴던 어른들의 것과 내용이 같아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대꾸했다. 이 대꾸 역시 어른들이 했던 것이었다.

 -태후전에서 좋아하신다고.

 연서강의 얼굴을 본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서늘한 얼굴이라고 연서강은 그 아이를 보고 생각했다. 동시에 저 이목구비를 어디에선가 봤던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골똘히 생각하던 연서강은 마침내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던 것인지 떠올렸다. 저 서늘한 표정도 비슷했다.

 황제.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황제와 눈앞의 아이는 몹시 닮아 있었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연서강은 불현 듯 눈앞의 아이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이 연회에 나오기 전 연서강은 어른들로부터 높으신 분들이 많이 나오는 자리이니 입조심 단단히 하고, 행동거지도 바로 하라고 귀에 못 박히도록 잔소리를 들었었는데. 그와 비슷한 빈도로 들었던 말이 이 자리에 ‘누가’ 나오느냐 였었다.

 -황귀비님의.......

 설마 황제는 아니겠지, 싶어 연서강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황귀비님의.

 연서강이 입술만 달삭일 뿐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자 아이가 웃었다. 그는 연서강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기연조라고 해. 그쪽은, 연서강이라고 하지?

 -반갑습니다.......

 모르겠어. 연서강은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기껏 상대바이 이름까지 밝혀 주었는데, 그것도 상대방은 자신에 대하 무척 잘 알고 있는 듯도 한데 미안하게도 연서강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겨우 머릿속에 ‘그러고 보니 어린 황제의 태사도 기씨, 였던가.’ 말이 떠올랐을 때 누군가 연서강의 이름을 불렀다.

 -강아.

 연서강의 부친인 연무의였다. 이름을 불리자마자 연서강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쪽 연못가에 서 있는 연무의를 보았다. 연무의가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꼭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짓던 것과 엇비슷한 표정이었던지라 연서강은 순간 발을 동동 굴렀다. 연무의가 다시 연서강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어투가 좀 더 험악하다.

 -네.

 지금 가요, 하고 바삐 대답하며 연서강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기연조가 말했다.

 -어깨....... 많이 아팠겠네.

 어깨? 주춤 걸음을 멈춘 연서강은 무심코 자신의 어깨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연회가 열리기 불과 2주일 전의 일이었다. 무예를 익히던 중 연서강은 그만 실수로 제 칼에 어깨를 다쳐 몇 날 며칠을 앓았다. 아랫것들에게 입단속을 시킬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 별 제제를 가하지 않았더니 그 일은 걸림돌 없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해서 연서강은 그 후, 어딜 가나 어깨의 부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은 전부 ‘비아냥거림’이란 종류였다.

 자신을 비아냥거린 사람들이 전부 자신의 한심함을 비웃는 사람이란 걸 연서강은 어렴풋 알고 있었다. 그들의 비아냥거림은 한결같이 지나치게 과장되면서도 은밀하면서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을 비웃으면서 자신의 부친인 연무의까지 싸잡아, 더 나아가 연씨 집안 전체를 비웃는 것이었다. 다 부친인 연무의에게 적이 많아서, 혹은 연무의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긴 일이다.

 -이거.

 그 때문에 일순간 경계의 눈빛이 된 연서강을 향해 기연조가 안심하라는 듯 가벼이 웃어 보이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작은 비단 주머니였다.

 자. 하고 손을 내미는 기연조에게서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은 연서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동그란 환약이 들어있었다.

 기연조가 설명했다.

 -그거, 넘기기 좋도록 꿀을 섞은 약인데, 어깨가 저리면 먹는 게 좋아. 내가 이전에 발목을 다쳐서 아는데 다 아나도 한동안 다쳤던 자리가 저리고 쑤시더라. 그건 그때 먹었다가 남은 약인데 이번 연회에 네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좀 챙겨왔지. 좋은 약인데 상하면 아깝잖아.

 연서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약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준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어찌 대처해야 할지 그 방안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 방황은 곧 오래가지 않았다.

 -강아!

 저쪽에서 연무의가 더 한 차례 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정말 집에 돌아간 이후 큰일이 날 것이다. 그래서 연서강은 황급히, 아이에게 ‘고맙습니다.’하고 작은 목소리고 예를 표한 후에 연무의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다 뛰어가는 도중 연서강은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려 기연조를 한번 다시 보았다. 기연조가 연서강과 눈이 마주치자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웃는다. 그래서 연서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연서강아 가까이 오자 연무의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얼 하기에 이리 행동이 굼뜬 게냐.

 이어 연서강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발견하고 연무의가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건 뭐냐?’하며 묻는 부친에게 연서강은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후에 어깨가 저리면 먹으라고 받았어요.

 -버려.

 딱딱한 목소리로 연무의가 명령했다. 연서강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뭔가 답삭답삭 받아오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연서강은 다시 주머니의 입구를 단단히 여며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비록 나중에는 버릴지라도 지금만큼은 손에 잘 챙겨들고 있고 싶었다. 누군가 봐서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남이 자신을 생각해 이런 걸 줬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연무의가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서강이 힘겹게 그 뒤를 좇아갔다. 그 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연무의가 불쑥 물었다.

 -.......해서 널 조롱한 놈들이 몇이나 있더냐?

 낮게 속삭이는 말에 연서강이 기억을 더듬었다. ‘5명입니다.’, 기억을 떠올려 그렇게 대답하자 이어 연무의가 재촉했다. ‘누구지?’ 연서강은 단풍에 눈이 빼앗겨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그 직위나 호칭이 생각나지 않으면 연회장 안을 둘러보며 그 사람을 직접 가리켰다. 그러면 연무의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연서강은 그런 연무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 칼에 제가 찔린 이야기가 일파만파 퍼진 이후로 연서강은 연무의의, 연씨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 연무의는 천덕꾸리기인 연서강이 비웃음을 당하는 것에 노여워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래서 연서강은 자신이 비웃음 당하는 것을 연무의가 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연무의는 연서강을 끌고 각종 연회며 모임을 돌아 다녔다. 이전엔 장남이자 후계자인 연무강과 동석했던 자리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연무의는 연서강에게 ‘그래서 널 비아냥거린 놈들이 누구지?’하고 물었었다.

 처음에는 부친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친의 성미를 잘 알았기에 연서강은 혹여 그가 자신에게 막말을 한 자들을 혼내주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잔뜩 신이 난 연서강은 부친이 묻는 대로 이것저것을 일러바쳤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 나면 연무의는 ‘됐다.’하며 더 이어지는 연서강의 말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게다가 기대와 달리 연무의는 그들을 혼내주지도 않았다. 정말 단순히 물어보기만 한 것이었다. 거기에 연서강은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생각해보니 자신이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던 거였다.

 어린 연서강은 연회에 가는 것이 싫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격식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고 따분했다. 뭇 어른들이 자신을 향해 알아듣지도 못할 어려운 말을 써가며 조롱하는 것도 싫었고, 아이들이 들으란 듯 수군거리는 것도 싫었다. 부친이 자신을 데리고 야외에 나간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그래서 큰형인 연무강에게 달려가 원래대로 형이 아버지를 따라가면 안 되냐고 묻자, 그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연서강을 보고 쏘아 붙였다.

 ‘바보냐, 너는. 태후전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네가 가는 거잖아.’

 그 대꾸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던 부친의 모습과 겹쳐져 연서강은 입을 다물어 버렸었다. 묘하게 뱃속이 서늘해졌다. 부친은 자신의 대답에서 타인의 뭔가에 대한 꼬투리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해서, 기연조는?

 이어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연서강은 퍼뜩 놀라 손에 든 주머니를 땅에 떨어뜨렸다. 연무의가 서늘한 눈빛을 하며 혀를 찼다. ‘심약하기는.’하고 중얼거리며, 그 말에 연서강은 자신이 진짜 심약한 사람이라도 된 듯 덜덜 떨었다. 주섬주섬 떨어진 주머니를 주운 뒤 연서강은 입을 열었다.

 -약만 주고, 빨리 나으라고.

 -.......그래?

 의외라는 듯 연무의가 중얼거리며 제 턱을 쓸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곧 ‘알았다.’하며 대답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서강도 그 뒤를 필사적으로 좇아 걸었다.

 아버지를 따라 걸으면서 문득 연서강은 살짝 비단 주머니의 입구를 벌렸다. 다홍빛 비단 주머니에는 고운 홍색의 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안의 약을 살짝 손가락으로 눌러 그 부스러기를 손끝에 묻혔다. 이어 연서강은 조심스레 혀에 그 손끝을 대었다. 쌉싸래하면서도 꿀의 단맛이 느껴졌다.

 독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든 것이 거짓 호의가 아니라, 정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연서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걱정되어 이 약을 갖다 준 것이었다. 환희에 북받친 연서강은 그 사이에 조금 더 멀어진 연무의를 향해 뛰어갔다. 기뻤다.

 그 후에 벌어진 연회에서 연서강은 또 기연조를 만났다. 기연조에게 고맙다며 빈 주머니를 건네자 그가 주머니까지 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웃으며 ‘네 이야기를 해줬더니 내 여동생이 아프겠다며 준 주머니야.’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주머니에 수놓아져 있는 꽈리가 여동생의 작품이라며.

 -이른바, 쾌유 기원 주머니라는 거지.

 마지막으로 말하며 기연조가 웃었다. 그 미소를 연서강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태후전 사람들이 모이니까 네가 가는 거잖아. 형인 연무강의 말이 불현듯 생각났지만 그 말과 상관없이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와 세 번재로 만났을 때, 연서강이 먼저 말을 걸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기연조가 환히 웃으며 반겨주었기 때문에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가 있었다. 기연조는 연서강이 어떤 사람이지 상관없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다만 어쩌다 기연조도 자신과 같은 연회에 참석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연유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지, 다른지.

 아니면 그냥 황귀비의 친인척이라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던 것인지.

 하지만 이제 와서 물어본다 한들, 대답해 주지 않겠지.

 고민하며 연서강은 수저로 국을 휘저었다. 이미 수차례 휘저어진 국은 처음 소담하게 담겨져 왔었던 모습을 잃고 폭탄이라도 맞은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식기는 또 다 식어서 이리저리 휘저어도 김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녹우당 도련님을 홍이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서강이 밥 한술을 뜨고 나야 자신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아주 집요하게 녹우당 도련님이 하는 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이는 배가 고팠다. 허나 오래도록 녹우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동안,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적어도 도련님이 밥 한 술 드시고 나면 먹어!’라며 귀가 따갑게 들어온 가솔들의 말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홍이는 수저를 든 채 침을 흘리며 녹우당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솔솔 고기 산적의 기름진 냄새가 불어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뿐만 아니다. 여러 가지 ㅅ야채와 육수를 넣고 푹 졸인 고기 쌈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색채와 맛과 식감을 가진 여러 음식들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음식으로만 가득 찬 이 광활한 탁자를, 홍이는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순간 홍이가 침을 삼켰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에 드디어 상념에서 깨어난 연서강이 홍이를 보았다. 그는 홍이의 턱에 흐른 침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깨끗한 명주수건을 가져와 홍이의 턱을 닦아주었다.

 “미안하구나, 먹자.”

 연서강이 밥을 한 술 떠서 제 입안에 넣자마자 홍이가 허겁지겁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시장했던 모양인지라, 연서강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듭 이전부터 연서강이 ‘먼저 먹어도 되니까.’라고 말해왔지만, 도통 연서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인보다 먼저 수저를 들지 않는 것이 꼭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허나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련님보다 먼저 수저를 들어서는 안돼. 하고 주의를 주었던 가솔들의 수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연서강보다 머릿수가 많은 탓도 있었다. 비록 한 사람이 괜찮다고 해도 다섯 사람이 안 된다고 하면, 홍이는 다섯 사람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약했다.

 그래서 그냥 입양을 보내라는 기연조의 말을 쉬이 그러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두 명만 되도 허겁지겁 도망치는 여자애가 녹우당까지 와서 밥을 먹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그런 아이가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히 잘 지낼 것 같지 않았다.

 ‘헌데.’, 고기반찬을 씹지도 않고 삼키고 있는 홍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연서강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홍이야. 아무래도 네가 갖고 있는 힘 말이다. 이 나라에서 믿는 신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어느 때처럼 홍이는 연서강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대답은 없어도 그녀가 자신의 말을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연서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신은 해와 달의 신이거든. 정확히는 해는 남신, 달은 여신이었지만. 서로 성별이 다른 커다란 뱀이 한 몸에서 나와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한 몸이되, 다른 인격과 성별을 가진 그 신이 서로 교합해 낳은 아이가 최초의 황제라고 전해져 오지.”

 거기까지 말하자 홍이가 찡그린 얼굴로 연서강을 쳐다보았다. 한 쪽 손으로는 국을 뜬 숟가락을 들고 다른 쪽 손으론 젓가락으로 육원전을 집은 채 말이다. 그녀가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연서강은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의아해 하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어린 아이에겐 다소 어려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웃고서 설명을 덧붙였다.

 “어찌되었든 이 나라 국교가 그 신을 믿는 종교거든. 그리고 그 신이 갖고 있는 힘이 ‘시간’과 ‘인과’란다. 그래서 생뚱맞게도 그런 생각을 해봤지. 홍이는 어쩌면 신의 사자인가, 하고.”

 오후에 읽었던 서책에서 그러한 내용을 읽었었다. 아주 오래 전, 이 나라가 처음 건국되었을 때, 이 나라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국가에서 땅을 기는 뱀 신을 믿는 나라라고 조롱한 적이 있었다. 그 주변국은 엄청난 힘과 체력을 가진 호랑이 신을 믿는 나라였다. 이에 분노한 뱀 신이 본보기로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뱀 신이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자신을 조롱한 나라를 멸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했지만 대체 어떤 권능을 이용한 것인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아 연서강도 ‘그래서 뱀 신이 결국 어떻게 했다는 거지?’하고 고개를 갸웃하긴 했다. 여하튼 그 서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제국의 신이 모든 신 중에서도 가장 우월하시며, 더불어 우리 하제국이 황제국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과학적인 근거도, 합리적인 이성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흔한 잡서였다.

 우물우물 홍이가 나물을 씹으며 연서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연서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유치하다는 거지, 미안하구나.”

 신의 사자라니, 어린 아이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말을 경솔하게 입에 올린 스스로를 반성하며 연서강은 그제야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정갈하게 나온 음식은 간이 약간 심심한 듯 했다. 그러나 덕분에 밥맛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이 음식을 넘길 수 있었다. 밥과 국이 식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괜히 데워오게 해서 모씨 아줌마의 일거리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새삼 조심할 필요가 없다, 라.”

 홍이에 대한 수수께끼를 일단 접고 나니 또 드는 상념은 그거였다. 종교에 관련된 서책을 읽기 전까지 연서강은 녹우당 서재에서 하루 종일 처박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에 종이를 옮겨 정리하고 있었다. 오월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죽게 되는 그 겨울날까지 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 혹은 자신의 신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말이다. 그는 월별로 칸을 만들어 최대한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또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일이라도, 나중에 다른 일을 계기로 연달아 생각날지도 모른다. 전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될 테니 미리 정리해서 기록해두는 게 도움이 될지언정 헛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기록하면서 연서강은 또 다시 자신이 ‘녹우당 도련님’이 된 것을 후회했다.

 기연조처럼 벼슬자리라도 하나 꿰어 찼더라면 좀 더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녹우당 오라버니.”

 문득 홍이가 연서강을 불렀다.

 “왜?”

 뜻밖의 부름에 조금 놀란 연서강이 고개를 들며 묻자, 홍이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엔 고기 산적을 든 우스운 꼴로 그녀가 잘도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은 안 돼요.”

 그녀의 말에 연서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니, 뭐가? 이어 그녀가 보충해서 설명했다.

 “두 번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요.”

 말을 마친 홍이는 들고 있던 고기 산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일순 멍해져 있던 연서강이 다음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홍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 것이다.

 “아.......”

 아는 게 없어 활동하기 힘들다면 이번에 최대한 정보를 얻고 죽은 뒤, 다시 돌아가 기연조를 구하는 방법도 있구나! 그러나 이미 홍이가 선수 쳐서 ‘안 된다.’라고 말한 뒤다. 한 순간 밝아졌던 연서강의 낯이 다시 칙칙해졌다. ‘그렇구나.’하고.

 홍이가 그런 연서강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는 녹우당 도련님이 이번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진심으로 놀라 연서강은 홍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녀의 고양이 아리를 제외하고 뭔가에 흥미를 갖고 더 나아가 잘 되길 바라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했다. 어느새 이렇게 인간적이 된 걸까.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동시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고맙다.”

 연서강이 웃으며 말했지만 홍이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서강을 응시하던 그녀가 음식으로 시선을 내린 것은 몇 분이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고기 산적의 나머지 남은 부분을 모두 베어 먹으면서도 연서강을 힐끗거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은 여전했다.

 그런 그녀에게 정말로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고서 연서강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황귀비 기씨의 사후, 승상 기고연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귀비 기씨의 부친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도 많아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이만 자택에서 은거하며 노후를 편히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황제를 대신해 조정업무를 보고 있었던 황태후는 흔쾌히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덧붙여 이제까지 열심히 나라를 위해 힘 써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후한 상도 내려주었다. 물론 기고연은 황태후가 내린 상을 몹시도 험악한 얼굴로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태후전과 황귀비 쪽의 기시 문중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줄 일환느 얼마든지 있었다. 현재 최고 권력자인 현 황태후와, 비록 지금은 특별한 힘이 없기는 하나 현 황제의 외척인 기씨 문중이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역시, .......곧이곧대로 기연조의 말을 믿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판단하며 연서강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있는 본채에 한 번 들려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알 법한 이야기들인지라 문제를 타파하는데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좀 더 태후전과 기씨 문중 사이를 캐 볼 필요가 느껴졌다. 아마도 부친인 연무의를 비롯하여 궁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라면 세간에 알려진 것들과 다른 내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연조처럼 곧이곧대로 가르쳐줄 리가 없겠지만.......

 연서강은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하나하나 얼굴들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이 점점 더 답답해져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그 소름끼치도록 냉정하던 집구석에 들어가야 하나.

 그러나 연서강은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필히 그래야 한다. 피하고 도망친다면 이전과 똑같은 결과가 나올 뿐이니.

 “.......”

 하지만 그리 결심해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연서강을 본 연무가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집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바깥 쪽문에서 바로 연무강과 마주친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아뿔싸.’ 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부친인 연무의야 본채에 들린 이상 문안을 드려야 할 테니 어쩔 수 없지만, 제일 큰 형인 연무강 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뜻밖이었다. 성의 경비를 맡는 위사인 연무강이 이처럼 이른 오후에 자택에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고작 해봐야 둘째 형인 연무진이나 셋째 형인 연의진을 만나겠거니 예상했던 것이다. 둘째, 셋째 형도 자신에게 매정하고 냉랭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첫째 형인 연무강 보다야 훨씬 나앗다.

 연무강은 자신을 보자마자 경직된 연서강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하고 다니는 행색하고는.”

 연서강과 나이 차가 무려 12살이나 나는 연무강은 얼굴만 달랐지, 그 성격과 몸에 배인 버릇들은 전부 부친인 연무의와 똑 닮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연서강에게는 충분히 벅찬 일이건만, 연무강은 연무의보다 훨씬 더 연서강을 싫어했다. 최소한 남의 시선만은 의식하는 연무의와는 달리 연무강은 남들의 눈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연서강을 박대하고 질타하곤 했다.

 “왜? 먹을 것이 모자라더냐? 무슨 낯짝으로 예까지 기어 나왔느냐? 들리는 소문에는 어린 계집애까지 들였다고 하더니, 집안 망신을 아주 고루고루 시키는구나.”

 연서강은 연무강의 앞에만 서면 뱀을 앞둔 개구리가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이 흔들리고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형, 형님.’하고 연서강이 부르자 연무강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연서강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차갑고 날카로워서 연서강은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려 시선을 계속 아래로 내렸다.

 “건, 건강하셨는지요?”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뱉은 말에, 연무강이 대답 대신 혀를 찼다. 연서강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네가 녹우당으로 기어들어갈 때 내가 했던 말을 벌서 잊었더냐? 두 번 다시 네 낯짝을 보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분명 죽을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말라고.”

 자신이 녹우당에 기거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좋아했을 사람은 아마도 이 사람일 것이다. 부친과 형제들 속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서강은 확신했다. 아니면 짐을 싸는 자신의 뒤통수에다 저리 차갑게 말하지는 않았을 테다. 다른 형제들은 그저 연서강을 마뜩찮은, 켕겨하는 눈으로 쳐다봤던 것에 비해 연무강은 연서강을 빨리 녹우당으로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행동했었다.

 연무강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는지 모를 일도 아니라서, 연서강은 그저 꿉꿉한 제 속을 숨기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들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계....... 신지 몰랐습니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연서강에 연무강이 실소를 흘렸다.

 “계신지 몰랐다? 마치 네놈이 있었으면 이리로 기어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로 들리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

 연서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해다, 저는 그저 눈이 띠어서 죄송하다고, 그렇게 말해야, 그러나.

 그러나 연무강과 눈이 마주치자 연서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얼음으로 깎아 넣은 듯한 검은 눈동자가 진득한 증오와 미음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연서강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서워. 배고픈 짐승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잡아먹힐까 무서웠다.

 바짝 굳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연서강을 본 연무강이 비로소 만족한 듯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시간엔 종종 내가 출몰하니 네 놈은 쥐새끼처럼 몸을 숨겨 잘 돌아 다니거라. 한 번 더 내 눈에 띠었다간 그 때는 정말 가만 두지 않을 테니.”

 그리고 그는 휙 몸을 돌려 원래 가던 길을 갔다.

 시퍼레진 얼굴로 연서강은 연무강의 등을 바라보았다. 한창 나이 때의 부친처럼 크고 넓은 등에 오랜 수련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이었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듬직함과 안도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연서강이 그에게서 느끼는 것은 자신의 몸이 언젠가 저 사람의 손에 의해 우악스럽게 찢기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뿐이었다.

 연서강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신의 그러한 상상이 저 사람에 대한 더 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언제나 다음엔 저 사람의 앞에서 이리 떨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

 문득 연서강은 기시감이 들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연무강의 자취를 눈을 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녹우당으로 온 이후 연서강은 연무강은 물론이요, 부친인 연무의나 나머지 형제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기껏 해봐야 연무의가 필요가 있을 때 부르거나, 혹은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의례상 다녀갔던 것이 다였다. 가끔 집을 나설 때 우연찮게 마주한 것도 있지만,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그거 지나쳤었다.

 그런데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연무강의 모습에서 연서강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사람을 볼 때 느끼곤 하는 어색함과 껄끄러움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어디선가 그 모습을, 그것도 최근에 본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

 대체 뭐지?

 “.......”

 연서강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연무강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불투명한 막에 휩싸여 있는 듯 그 기분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연무강이 있었던 곳을 멍하게 응시하던 연서강은 이윽고 연무강이 걸어 나왔던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은 곧 저 너머에 있는 정자에 박혔다.

 녹우당을 통하는 샛문이 있는 곳은 행랑채와 서책들과 여러 문서를 모아둔 서재 겸 강학당인 문후당이 있는 곳이었다. 그 너머 꽃담과 작달만한 후원이 있으며 후원의 바깥쪽에 또 정자가 하나 있었다. 별당 형식으로 지어진 정자로 연후정이라 불리는데 가끔 연무의가 손님을 대접하는데 사용하곤 했다. 사랑채 용도도 거창하게 지은 별당인 성헌당이 있음에도 또 따로 연무의가 만든 곳이었다.

 이에 가솔들이 성헌당 손님, 연후정 손님이라고 종류를 나눠 대접하고 있다는 게 연서강이 가지고 있는 쓸모없는 지식 중의 하나였다. 성헌당 손님에게는 보통의 손님상을 내오면 된다. 그러나 연후정 손님이 들었을 적엔 따로 연무의가 불러 일을 시키지 않는 이상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기껏해야 손님이 오셨을 때 끓여 내놓는 게 전부인 것이다.

 연후정 손님이 오셨을 적에 그 근처를 얼씬하지 못하는 건 비단 가솔들뿐만이 아니다. 연무의는 가족들조차 그 근처로 얼씬하지 못하게 단단히 일렀었다. 그래서 한때 연서강의 여동생인 연서령이 ‘몰래 여인을 만나는 것 아니에요?’하고 단단히 오해한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리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아이라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 역시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어린 날 수없이 많은 연회에 참석한 덕택에 연서강은 연후정 손님이 어떤 부류의 손님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때문에 연서령이 파드득 날뛸 때 다른 형제들처럼 그저 웃으며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어렸던 날의 대수롭지 않으면서도 심상치 않은 기억들.

 “.......”

 연후정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심장이 튀었다.

 연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자박자박 걸음을 옮겨 연후정 쪽으로 다가갔다. 제 형인 연무강이 이른 오후에 저 곳을 다녀왔다는 사실에 딱히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는 건 아니다. 언제나 부친인 연무의는 연무강과 함께 어떠한 일을 논의했으며 가끔 둘째 형인 연무진도 그 자리에 불려가곤 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닌데.......

 그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연서강은 계속해서 누군가 뒤에서 제 머리채를 휘어잡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부친의 ‘접근 금지’ 명령 때문이었다. 당장에라도 누군가 그의 뒤에서 ‘어?’ 그 쪽으로 가면 안 돼요.‘하고 말하며 그를 만류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허나 아무도 없었다.

 잡아주는 이라곤 하나도 없어, 연서강은 결국 허우적거리며 연후정 근처까지 발을 들이밀고 말았다. 이전까지는 바라보는 것도 두려워 시선을 돌렸던 장소이다. 연서강은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넘기며 꽉 옷자락을 쥐었다. 사소하지만 금기를 어겼다는 생각에 어린아이도 아닌데 온 몸이 긴장되었다.

 그때였다. 연후정 근처에서 뭔가 허연 것이 스친 것은.

 “?!”

 깜짝 놀란 연서강이 근처 꽃담 옆 굴뚝으로 몸을 피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굴뚝 옆으론 붉은색 홍매화와 살구나무 등이 있어 사람 몸 하나 숨기는 데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행랑채에서 오찬을 짓는다고 굴뚝을 사용한 모양인지 가까이 몸을 대자 뜨끈뜨끈한 열이 벽돌을 통해 전해졌다.

 굴뚝의 뒤로 피신한 다음에야 연서강은 제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왜 피했지?

 행여나 저기서 사람이 나왔다고 해도 그저 아버지의 손님이 오셨구나, 하고 공손히 인사하며 지나치면 될 일이 아닌가. 연후정 벽 가까이 다가가 안의 대화를 엿들은 것도 아닌데. 방금 연무강을 만난 후라 자신의 몸이 괜히 과민반응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연서강은 제 손바닥에 맺힌 땀을 옷에 닦았다.

 그러나 그게 결코 과민반응은 아니었음을 연서강은 곧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몸은 이전에 한 ‘경험’으로 무의식중에 반응한 것이다.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고.

 연서강은 굴뚝 위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우뚝 몸을 멈추고 말았다. 연후정 근처에서 얼씬한 흰 잔영은 과연 사람이었다. 사람이었고, 부친의 손님이었다. 사람을 하얀 잔상으로 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온통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괴한이었다.

 자신을 죽인 검은 옷의 괴한 뒤에 나타났던. 흰 옷을 입은 괴한.

 아니. 이제는 괴한이 아니었다. 그 흰 옷의 남자 옆으로 연서강의 아버지 연무의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의는 그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그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날 밤에 봤던 것과 달리 괴한은 얼굴까지 꽁꽁 싸매고 있지 않았다.

 연무의와 흰 옷을 입은 괴한이 연후정을 나와 후원을 걸어 연서강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연서강은 딱히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과 몸이 멈췄다. 굴뚝 뒤에서 아주 나온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몸을 숨긴 거도 아니기에 연무의와 흰 옷을 입은 괴한은 이내 연서강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서강을 발견한 연무의가 설핏 얼굴을 찌푸렸다.

 “왜 여기에 있지?”

 별로 당황한 구석 없이 평온한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연서강이 녹우당에서 나와 본채로 돌아왔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 흰 옷을 입은 괴한과 만나는 걸 연서강에게 들킨 게 놀라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무의는 연서강의 지나치게 파리해진 얼굴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날도 따뜻한데 고뿔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연서강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서강아.”

 연무의는 좀체 제 말을 듣지 못하고 있는 연서강의 이름을 불렀다. 연서강이 연무의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얼이 빠진 듯한 연서강의 얼굴을 보고 더더욱 얼굴을 찌푸린 연무의가 차갑게 말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 잠이나 자거라. 인사도 되었다. 멍청한 얼굴 보고 있기가 힘들구나.”

 그에 연서강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말았다. 연무의 옆에 예의 그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았지만, 시선이 가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연서강은 제 부친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연서강을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연무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손님과 함께 길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그때, 비로소 연서강이 입을 열었다. 연무의는 손님에게 먼저 가보라 보내고 나서 몸을 돌려 연서강 쪽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하고 물으니 연서강은 다시 입을 다문다. 그 행동이 답답했는지 연무의가 얼굴을 와작 구겼다. 연무의는 왜 연서강이 이리도 미적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에 연서강은 알아차렸다.

 어째서 방금 자신이 큰형인 연무강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었는지를.

 연서강은 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방금 나가셨는데.”

 “의논할 게 있어서 잠깐 불렀다.”

 연무의는 연서강이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했다. 연서강의 낯이 더더욱 흐려졌다.

 연서강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조금 벌린 입술이 두려움으로 잔경련을 일으켰다. 무섭고, 꺼려졌다. 묻는 것이, 아는 것이, 하지만. 하지만.

 마른침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적어도 연서강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혹시.”

 “혹시?”

 “가끔....... 집안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돌아다니던데....... 그 분도 아버지의 친구 분이십니까?”

 연무의는 혀를 찼다. 그는 연서강에게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너란 놈은 이제 네 큰 형도 못 알아보느냐?”

 아무리 가족들을 떠나 녹우당에 처박혀 산다지만 어찌 가족들의 얼굴도 못 알아보냐는, 질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연서강의 귀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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