緇墨
3월 중순임에도 춘설(春雪)이 어지러이 날리고 있었다.
청매화 꽃잎들이 달밤에 흐뭇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녹우당(綠雨堂)은 새봄이 돌아왔는데도 옛날과 달리 적적했다. 다만 백설이 떨어진 녹우당 뒤편만은 청매화와 적동백이 난만(爛漫)하여 절취를 이루고 있었다. 은은한 유록빛을 띤 매화꽃들이 내뿜는 청려한 향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붉은 동백나무 뿌리까지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동백을 집에 들이면 집안에 목이 잘리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 미신 때문에 어른들은 집안에, 설사 여인들이 즐겨 다니는 구석진 샛담 아래라고 해도 동백을 들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서강은 이곳을 좋아했다. 고작 그런 미신으로 멀리하기에는 동백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연두 빛을 머금은 하연 매화꽃들과 그 아래 자리 잡은 붉은 동백꽃은 달밤이 아닌 대낮에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서강은 이 녹우당 꽃담 아래서 한가로이 노닐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 된다.
서강은 흐릿해져가는 눈으로 백설이 떨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녹빛을 띤 매화꽃과 붉은 동백이 그의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얼굴은 물론이고, 사지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를 꿈틀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일인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런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서강은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부르튼 손가락 사이로 눈보다 따스한 진흙이 잡혔다. 젖은 흙에 파묻힌 동백뿌리 언저리에선 희미한 매화향이 났다.
그리고 그는 제 몸이 내뿜는 피비린내도 맡았다. 죽어가고 있다....... 라고 생각한 순간 서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죽었다. 이미 죽고 말았다. 칼에 찔려서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죽었다. 죽었어! 이미 죽고 말았어! 감각이 사라져 가는 손가락이 움직여 서강은 흙바닥을 긁었다. 어머니와 같이 보드라운 진흙이 그의 손톱 사이에 박혔다.
‘그’가 죽고 말았다고!
“.......읏, .......”
어떻게 된 일인지,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했지만 죽어가는 서강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분노가 아닌 서글픔이었다. 가슴 속이 갈래갈래 찢길 만큼 고통스러운, 죽음보다 더한 비애였다.
그때였다.
“녹우당 오라버니.”
동백꽃 그늘 아래 쓰러져 있는 서강의 눈에 문득 색동 꽃신이 들어왔다. 황접(黃蝶)과 홍매(紅梅) 자수가 들어간 고운 꽃신. 그 꽃신이 너무도 작았다. ‘녹우당 오라버니.’ 꽃신의 주인이 거듭 그를 부르고 나서야 서강은 아찔해져 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서강은 꽃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서강을 부른 것은 꽃신과 짝을 맞춘 듯한 노오란 상의에 매홍빛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긴 검은 머리를 종종 땋아 내린 여자아이는 품안에 축 늘어진 잿빛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 하늘빛과 같은 색의 고양이였다.
서강은 그 여자 아이도, 그 아이가 품고 있는 고양이도 알고 있었다. 여자 아이에게 저 꽃신과 옷을 준 것도 서강이었고, 금박댕기를 물린 아이의 머리를 땋아준 것도 그였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머리를 매만지는 건 어머니 이후로 처음인지라, 서강은 그때 무척 민망하면서도 당혹스러웠었다.
서강은 그녀를 향해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도, 망.......’
허나 그녀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종종 그러했다. 세상 모든 일이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제 귀에 들리지 않는 듯 잿빛 고양이하고만 놀고 그랬다. 그녀는 너무 검어 머루처럼 보이는 눈으로 서강을 내려다보았다. 서강의 몸을 뒤덮고 있는 붉은 피도, 그 위에 드리운 죽음의 기색도 보지 못했다는 듯.
“아리가 죽었어요.”
“.......”
아리는 여자아이가 안고 있는 잿빛 고양이였다. 차가운 춘설이, 갑자기 바람의 세기를 달리해 강하게 불었다. 순간 불어온 강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청매화의 꽃잎들이 봉숭아 열매 터지듯 확 떨어져 내렸다. 연록 빛을 띤 흰 매화 꽃잎들이 눈보다 더 곱게 붉은 동백 위로, 아래로 쌓였다.
“.......그래서 나는 돌아갈 거예요.”
내리기 시작한 녹색 비(綠雨)를 홀린 듯 바라보며 여자아이가 중얼거렸다. 이미 서강은 힘이 다해 눈동자의 빛이 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아이가 그런 서강을 다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녹우당 오라버니.......”
서강의 주검 옆에 두 발 모아 가지런히 앉아 그녀는 고양이를 서강의 옆에 내려놓았다. 늙고 병들어 마르고 비루먹은 잿빛 고양이와 비탄의 숨을 삼킨 채 죽어가는 남자. 흰 매화와 북은 동백. 백설이 뚝뚝 떨어지는 녹우당 뒤편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괴이하면서도 신비로운 경치를 자아냈다.
여자아이가 서강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요.”
동시에 서강은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