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얘 동생들 오는 거예요?”
피디의 설명을 들은 우람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그의 옆에 있던 윤성마저 눈을 크게 뜨고는 대현을 돌아봤다. 제 가족이 출연한다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우람의 말에 동요부터 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저번 주 회의에서 여러 아이템이 나왔고 그중 몇 개는 대현도 긍정적인 의사를 표했었다. 그중 하나가 멤버들이 아이를 돌봐주는 형식으로 에피소드를 하나 뽑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고, 제 앞에 놓인 어린이 완구들을 보니 그 의견이 결국 제작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우람의 말에 당황한 피디는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늘 촬영에 나오게 될 아이들은 두 살에서 네 살 사이의 유아들이고, 촬영을 위해 따로 부모님들의 협조 요청을 받기도 했다는 설명까지 나왔을 때는 별말 없이 듣고 있던 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대현이 움찔했다. 어느새 다가온 식이 그의 등에 손을 얹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대현이 쳐다봤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앞을 보고 있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등 사이의 골을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던 손은 이제는 조심스럽게 날개뼈를 쓰다듬고 있었다.
잇새로 나올 뻔한 신음을 삼킨 대현이 한 손을 뒤로 뻗어 그의 손을 잡아챘다. 경고라도 하듯 눈을 엄하게 뜨며 바라봤지만 식은 어느새 능청맞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벽 바로 앞이라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식도 애초부터 그걸 알고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구는 거겠지만.
“너…….”
“쉿.”
참다못한 대현이 결국 입을 열었지만 검지를 손에 가져다 대며 웃는 얼굴을 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설명이 끝났고 한 시간 뒤 촬영을 시작할 거라는 감독의 말이 들렸다.
우람과 윤성이 사이좋게 대현 쪽으로 뒤돌았다. 대현이 황급히 식을 밀쳐 내고 둘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엉겨오는 윤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멀쩡한 얼굴로 다가와 우람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식을 볼 수 있었다. 저럴 때 보면 진짜 연기자 맞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대현이 다시 윤성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촬영을 위해 데려온 아이들은 제작진 말처럼 어리고 순했다. 얼마 전 걸음마를 뗐다던 두 살의 하윤이와 나이를 묻는 말에 두 개인지 세 개인지 알 수 없는 손가락을 펴 보이는 세 살의 산호를 본 멤버들은 즉시 그들의 귀여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대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장아장 걷는 하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는 혹시나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숙소 안 날카로운 물건들을 멀리 밀어두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 선 식에게 탁자를 치우라고 눈짓한 대현이 자신을 돌아보는 동그란 눈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뱌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인형을 허공에 흔드는 손이 통통했다. 절로 벌어지는 입가를 막지 못한 대현이 하윤의 볼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 두어 번 쓸었다. 말랑말랑한 볼이 너무 귀여웠다. 다행히 하윤도 싫지 않았는지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대며 속눈썹을 깜빡댔다. 아기치고 풍성하고 긴 속눈썹 아래 눈이 대현에 시선을 맞추고 아래위로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그렇게 좋아요?”
“……어?”
어딘가 부루퉁한 음성을 듣고서야 옆에 선 식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대현처럼 쭈그리고 앉은 그는 거실 안 모두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하윤 대신 대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질투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본 대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종종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던 식이었지만, 이렇게 어린아이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다행인 건 하윤이 그걸 알아채기는커녕 갑자기 등장한 식에 호기심을 갖곤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는 거다. 식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가던 하윤이 이내 멈칫하고는 대현을 돌아봤다. 입에 넣은 손가락 때문인지 작은 입술 밑으로 흐르는 침을 본 대현이 웃으며 하윤의 목에 매여 있던 손수건을 위로 올려 입가를 닦아줬다.
“아이 예쁘다.”
양팔을 벌리자마자 몸을 돌려 뒤뚱뒤뚱 다가오는 것마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을 감싸 안던 대현은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그가 하윤의 등을 조심스레 도닥였다. 조그만 머리통이 그의 어깨 부근에서 바르작거렸다.
“형.”
조용하던 식의 부름에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그대로 있으세요.”
카메라를 든 것뿐인데 얼굴의 반이 가려진 얼굴은 그 와중에 그대로 자세를 유지하라고 요구까지 하고 있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던 대현이 이내 생각을 바꾸고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하윤이 카메라에 더 잘 비춰질 수 있게끔 포즈를 바꾸기까지 했다.
이왕 찍히는 거라면, 나중에라도 하윤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그의 바람을 느꼈는지 식은 한참 동안이나 그와 하윤을 사진에 담았다. 나중에는 산호와 놀아주던 우람과 윤성까지 합류해 관심을 보이는 통에, 결국 식은 아이들과 나머지 멤버들의 사진을 찍어주기까지 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몇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아이들의 낮잠 시간이 되었다.
온도를 잘 맞춰야 한다며 분유를 몇 번씩이나 맛보던 우람은 결국 하윤에게 분유를 먹일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해 냈다. 하윤에게 젖병을 물린 그는 하윤이 누워 있는 아기요 위로 나란히 누워 있었는데, 눈이 슬슬 감기고 있는 하윤에게 전염되었는지 반쯤 감긴 눈으로 하품을 하기까지 했다.
산호랑 놀아주느라 망토를 두르고 한참이나 거실을 휘저어야 했던 윤성은 진작 뻗은 상태였다. 산호와 하윤의 사이에 누워 잠에 든 덩치 큰 남자애 한 명은 이상하리만치 위화감이 없었다.
담요를 찾아 그 위로 덮어준 대현이 거실에 누운 이들을 하나씩 눈 안에 새겨 넣었다.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꽉 차는 듯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일지 모를 미소가 그의 얼굴에 꼭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형. 우리도 자요.”
“산호는? 자?”
그러는 사이 식이 그에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도 산호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던 그를 떠올린 대현이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고갯짓만 했다. 윤성의 등에 딱 달라붙어 곤히 잠든 산호를 확인한 대현이 갑자기 팔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엉거주춤 이불 위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먼저 자리를 잡고 누운 식과 마주 보는 자세로 눕게 된 대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라 하기도 전에 눈부터 감은 얼굴은 대현의 등 뒤로 손을 올려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마치 아까 하윤을 재우던 우람이 그러던 것처럼.
황급히 고개부터 돌려 거실을 빠르게 살피던 대현은 찍을 만한 장면이 다 나왔는지 카메라를 끄는 카메라 감독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 표정을 했다. 어색하게 떠 있던 손을 식의 허리에 얹은 그가 천천히 움직였다. 식이 그러던 것처럼 허리를 두어 번 두드리자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재워주는 거예요?”
“쉿.”
장난기 어린 음성에 아까 그가 한 것처럼 조용히 하라는 뜻의 소리를 냈다. 멈칫하는 것처럼 보이던 얼굴은 이내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사이로 나온 작은 웃음소리를 탓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대현도 그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이나 소리 죽여 웃던 둘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에 든 그들은 그럼에도 이불 밑으로 꼭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포근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