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17화 (117/119)

117화

* * *

“좋아해?”

“어?”

“저거. 눈을 못 떼길래.”

2주 전 선우와 함께 갔던 서점은 번화가에 위치했고, 영화관을 비롯해 식당 등 모든 문화시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문화생활을 장려하는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후가 그중 한 포스터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하나였다. 마법사와 아이가 그려진 포스터를 보자 살아난 추억은 그의 유년시절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것이었기에.

그러느라 다른 섹션에서 책을 보고 있던 선우가 어느새 다가와 있는지도 몰랐다. 화들짝 놀라 물러선 지후는 그 와중에도 포스터 쪽으로 자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냥…… 봤어.”

“볼래?”

“어?”

“저거. 다음 주부터 한다는 거 같은데.”

“……아냐. 어차피 어렸을 때 봤던 거라.”

포스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자신이면서, 선우가 다가왔다는 사실 하나로 무언가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지후는 허둥지둥했다. 포스터로부터 등을 돌린 그가 부러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 허전한 뒤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제가 그랬던 것처럼 포스터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보였다.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보던 선우는 곧 별말 없이 지후를 따라왔고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배가 고프냐고 묻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지후는 안심했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군 자신의 행위가 그럴듯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 *

그렇지만 제 손에 들린 두 장의 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가 그 엉성한 변명에 아무 말 않았던 것은 그를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서 준 것이라는 것을. 상황을 모면하려 뱉은 그 몇 마디 안 되는 말에서 제 속을 읽고 이런 것까지 준비했을 그를 이제야 알았다. 선우가 대현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준비해 왔다는 게 그제야 마음 깊숙이 닿아왔다.

“미쳤지, 이지후…….”

그런 애한테 대체 뭔 말을 한 거지.

‘내가 널 정대현으로 보고 있는지, 이지후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허탈함까지 느껴지던 말이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 * *

“하…… 하아…….”

한 번도 캠퍼스 안에서 이렇게 숨이 차본 적이 없다. 차를 타거나, 차를 타지 못하면 버스를 타곤 했던 이곳을 이렇게 뛰어본 적은,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 정신없이 두리번댄 적은 처음이다. 물론 그것 말고도 처음인 일들은 많았다. 친구의 몸에 든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거나, 그 사람 때문에 매일매일 기분이 널을 뛰는 것도, 고백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최악의 답변을 듣고도 포기하지 못한 것도, 모두. 모든 게 다 처음이다.

“…….”

“…….”

그 모든 게 저 사람이 제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얼굴을 확인하자 맥이 풀렸다. 그제야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데, 급한 와중에 챙겨 왔다고 생각한 가방이 가볍다. 수업이 덜 끝난 채로 강의실을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노트북이 떠올랐지만 그럼에도 당장 가지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제게 쭈뼛쭈뼛 다가오는 남자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으니까.

여태껏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 없던 그에게서 온 문자를 1분 사이에 열 번은 읽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겨우 잠재우고 내용에 집중하게 될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후였다. 그 길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강의실을 나와, 도서관을 지나, 정문까지. 넉넉잡아도 삼십분은 족히 걸릴 거리를 십오분 만에 달려왔다.

당황한 얼굴로 저를 살피는 얼굴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사실 하나에 그럴 수 있었다. 여러 번 느꼈지만 유독 지후를 좋아하면서는 선우는 제가 이런 행동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뛰어왔어?”

그런 사실을 하나도 모르는 듯한 앞의 남자는 결국 잇새로 웃음이 새게 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임을 알면서도 픽픽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후를 쫓아내고 집에 오자마자 후회했다. 삼 개월을 기다려 놓고, 그 하루를 못 참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깜빡이고, 가끔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는 그를 본 순간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삼키는 치졸한 질투는 영민과 대현에게 환하게 웃는 그를 보았을 때 느낀 가벼운 질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선우는 그제야 이 모든 게 자신의 오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일상의 범위를 넓히는 게 좋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건 그가 다른 사람에게도 제게 하듯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래서였다. 이상하게 구는 자신에게 마땅히 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을 한 지후에게 천천히 드러내자고 수십 번 다짐했던 것도 잊고 제 감정을 한 번에 쏟아부어 버린 건.

충격받은 게 보이는 얼굴을 보고서도 몰아붙였고, 그에 대한 벌인지 머리가 얼얼할 정도의 말까지 들었다.

유치한 행위라는 건 자신도 알았다. 이전에 그를 괴롭게 한 그놈과 뭐가 다르냐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놈처럼 지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의 옆에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멍청한 생각에서 드러낸 질투는 아니었다. 순간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제 불찰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도 다시 그의 얼굴을 보러 찾아가지 못한 건 지후가 한 말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던 눈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왜 그가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지후는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리고 대현의 몸에 들어와 만든 모든 변화에 대해 필요 없는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걸 가장 잘 알면서도 질투에 휩쓸려 일을 저지르고 만 자신이 배로는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처음에야 그저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를 ‘이지후’로 알아가기 시작한 시간이 지날수록 안쓰러움이라는 말로 덮어지지 않을 감정이 생겨났다. 그가 외로울 때 옆에 있어주고 싶었고, 그렇지 않을 때까지도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마음을 드러내면 그는 당황할 것이다. 여태껏 그랬듯 가장 편한 선택지인 ‘도망’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러기는 싫었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려 애썼다. 페이스를 조절해 제 마음을 적당량만 노출시키다 보면 언젠가는 그에 익숙해진 지후에게 다 내보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다짐들이 하루아침에 깨진 것이다. 자신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인내심은 유독 지후 앞에서만 죽을 못 쒔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이미 한 번 추락한 인내심은 제가 가진 바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때마침 오늘이 지후의 수면클리닉 치료 날이었기에 더 그랬다.

아침에 왔던 진료 예약 확인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우는 결국 인내심이고 뭐고 포기했다. 답장을 보낸 그는 눈으로는 수업 자료를 훑으면서도 오늘은 기필코 그 얼굴을 보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 자신이 먼저 죽을 것 같았으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핸드폰을 가방에 쑤셔 넣으려던 찰나 지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고, 바로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결국 최대치가 일주일이었던 인내심은 그의 짧은 문자 하나에 이렇게 알량해지고야 말았다. 그 사실이 웃기고도 신기했다. 겨우 웃음을 멈춘 선우가 숨을 고르느라 구부렸던 어깨를 폈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올려다보는 얼굴을 마주한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응. 한식 먹자.”

뛰어왔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대신, 자신이 늘 보냈던 문자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지후가 보냈던 문자에 대한 답변이었다. 말을 내뱉자마자 지후의 눈이 촉촉해지는 게 보였다.

지금 진짜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네가 울어. 픽 웃으며 지후의 얼굴로 손을 뻗던 선우가 멈칫했다. 지후가 그와의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늘 둘 사이에 존재했던 일정한 거리를 지나쳐 들어온 그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선우의 가슴에 닿았다. 어중간하게 내려간 팔 밑으로 지후의 몸이 들어왔다. 그렇게 둘의 몸이 완전히 닿았다. 대비하지 못했던 접촉에 선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밥 먹고 뮤지컬 보러 가자.”

“…….”

“같이.”

‘같이’란 말에 벅참을 느끼기도 전에, 선우는 손을 들어 지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눈앞의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품 안에 온전히 들어찬 지후는 덜덜 떨고 있었다. 여름에 추위를 느낄 리는 없을 테니, 방금 뱉어낸 말 때문일 터다. 그 사실이 너무 벅차서 선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동그란 머리통에 머리를 기댔다. 지후가 좋아하고, 그러기에 자신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샴푸향이 코를 간질였다.

“응.”

그가 먼저 왔다. ‘같이’라는 단어 안에 선우와 지후를 엮어 넣어줬고, 한 번도 먼저 해온 적 없던 스킨십을 하며, 그와 속도를 맞추려 달리기 시작했다. 트랙에는 더 이상 선우 혼자가 아니었다. 트랙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어느덧 결승선을 무너뜨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이지후가 김선우에게 왔다. 그거면 충분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