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선우와 눈을 맞춘 지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 붙들려 거의 반쯤은 경보 수준으로 걸었기 때문인지 어느새 숨이 거칠어졌다. 숨을 고르던 지후가 곧 눈을 사납게 떴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정신없게 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인내심을 발휘하려 했지만, 이건 해도 좀 너무했다.
“미쳤냐, 너? 왜 이러는데 아까부터.”
“…….”
“무슨 일 있는 거면 말이라도 해줘야 내가 알고 뭘 하든 할 거 아냐!”
참다 참다 못해 나온 고함에도 앞에 선 얼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욕을 읊조리며 고개를 돌리던 지후가 멈칫했다.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래.”
“……뭐?”
“그래서 싫어. 너랑 다른 사람이랑 몸 닿는 거.”
지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의 표정 변화를 빤히 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선우는 이미 말을 멈출 타이밍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말들은 지후의 머리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굳어버리고 있었다.
“후배든, 처음 본 사람이든 상관없어. 내가 유치한 거 아는데 그냥 싫어. 너랑 가까이 있는 거, 너한테 호감 보이는 거. 다 싫다고.”
“…….”
“됐지, 이제. 이게 바로 네가 그렇게 물어보는 ‘무슨 일’이야.”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꾸 입을 뻐끔거리고만 있는 지후를 바라본 선우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흔들리는 지후와 다시 눈을 맞춘 그가 힘을 주어 내뱉었다.
“네가 내 무슨 일이라고.”
어떤 정신으로 다시 선우에 차에 탔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차를 가득 채운 침묵에 어색해하지도 못했다. 선우가 단정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뱉어냈던 말들이 지후의 모든 사고 회로를 막고 있었다. 지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은호와의 일들이 그에게 준 깨달음이 있다면, 사랑이 표현되는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는 거였다.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만을 해주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대상을 다 제거하고 자신만을 남기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었다. 후자를 택해 그를 괴롭혀 댄 게 은호였다. 물론 그의 집착은 사랑이라 쳐 주기 어려운 데가 있었지만, 그래도 굳이 그 근원을 찾아나가자면 그랬다.
하지만 선우는 은호와 달랐다. 그는 지후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후가 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언젠가 함께 했던 식사에서 지후가 생선을 좋아하는 걸 알아채고는 서울 내의 생선구이 맛집이란 맛집은 다 데려갈 것처럼 굴었다. 방금 둘이 갔던 곳도 입구부터 ‘꽁치구이’로 유명세를 탄 집이라는 TV 화면을 캡처한 액자가 걸려 있는 곳이었다.
다른 것들도 그랬다. 냉장고가 빈 것조차 모르는 지후를 대신해 장을 봐왔고, 잠을 못 자는 그를 데리고 심야영화까지 보러 갔다. 평생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다정함 앞에서 지후는 늘 마음이 간지러웠다. 그게 대현과 영민에게 느끼는 안정감과는 결이 다른 것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는 두렵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꽁꽁 감추고 이렇게 그와 마주볼 수 있었던 건, 그의 그런 다정함이 제게 우연처럼 닿은 것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행운처럼 다가온 친구란 존재를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사랑의 영역으로 밀어 넣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던 지후는 그렇게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 대상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듣기 전까지는.
“…….”
“…….”
집 앞에 도착해 주차까지 마쳤음에도 지후는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그건 선우도 마찬가지였는지 시동을 끈 그는 키도 빼지 않은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를 흘긋거린 지후가 보조석 아래의 가방을 들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평생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차에서 나가야 할 거고, 그들이 선 곳이 대현의 집 앞인 걸 깨달았을 때 그 누군가는 지후가 되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
“어떻게 할래.”
그렇지만 선우는 지후가 그러도록 놔두지 않을 셈인 듯했다. 문을 열려던 지후는 모든 행동을 정지한 채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새 차분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내가.”
“…….”
“좋아한다고.”
문고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손만이 아니었다. 앉아 있던 의자가 푹 꺼져 버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정도의 일이었다. 선우가 덤덤한 말투로 뱉어낸 고백이란 것은.
한마디뿐이었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제 귀를 꽉 채우는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가 선우에게까지 가 닿을 것만 같아서 지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선우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겨우 입을 가르고 나갈 수 있었던 말은 완성되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머릿속을 생각해 봤을 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지후.”
그에게 말을 이으라고 재촉하는 것 대신 선우는 지후를 불렀다. 마치 지후가 가지고 있던 물음에 답하는 것처럼. 그의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것처럼. 그가 지금 지긋이 바라보는 사람이 지후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듯.
“도망치지 마. 다른 건 몰라도.”
“…….”
“이건 안 돼.”
부드러운 말투로 나온 말은 단호했다. 지후의 눈이 흔들렸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선우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를 입증하듯 선우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지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정하다고만 생각했던 초콜릿빛 눈동자가 그를 압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황하던 지후의 눈동자는 그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제일 편한 길을 찾아내고서야 떨림을 감출 수 있었다.
“너…… 착각하는 거야. 정대현이 그리워서…… 나랑 있다 보니까 정 들어서.”
“……”
“그러다 보니까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맞아.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
“네가 날 좋아하는 건…… 그건…… 말이 안 돼.”
상황을 부정하는 게 바로 그거였다. 처음에야 자신이 없었던 말들은 뱉어낼수록 형체를 갖추고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마지막 말을 뱉어낼 때쯤에는 선우의 눈을 마주할 용기까지 생길 정도였다. 한 번도 끊지 않고 그의 말을 듣던 선우는 한참 뒤에야 반응했다. 그의 잇새를 가르고 나온 헛웃음에 지후가 멈칫했다.
“오늘 이럴 생각은 없었거든, 나도. 이러려고 삼 개월간…… 하.”
“…….”
“그래서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거 아는데.”
“…….”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하다.”
차에 탄 후 처음으로 선우가 지후를 외면했다. 지후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알았어. 가.”
“……김선우.”
“내가 널 정대현으로 보고 있는지, 이지후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
“가라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쯤이었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뛰쳐나갔고,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선우는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핸들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 진동하는 차를 느낀 지후가 다시 선우를 봤지만, 선우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가운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대현에게 화를 내던 얼굴보다 더 굳어 있는 듯한 얼굴을 본 지후는 결국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후가 내리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차를 보면서도, 지후는 한참이나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돌아온 집에는 대현이 있었다. 막 나서려던 참이었는지, 현관 앞에 선 그가 반가운 표정을 했다.
“어? 왔어?”
“……가려고?”
“어. 안무 연습 있어.”
슬쩍 보이는 거실은 지후가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하다못해 리모컨을 두었던 자리도 그대로였다. 안무 연습 때문에 금방 갈 거면서 뭐 하러 왔을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걸 그대로 내뱉기에는 앞의 대현이 바빠 보이기도 했고, 지후도 지친 상태였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가 현관문에 기대 대현이 운동화를 찾아 신는 것을 바라볼 때였다.
“아, 맞다. 표 식탁 위에 뒀어.”
“……어?”
“뮤지컬 표.”
뜬금없는 뮤지컬 얘기에 지후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거 생각보다 구하기 어렵더라. 하긴, 김선우가 지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거면 애초에 부탁을 할 리가.”
“지금 무슨 소릴…….”
“나 간다!”
그가 해맑은 얼굴로 말을 이어갈수록 묻고 싶은 질문만 쌓였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마친 얼굴은 문 사이로 사라졌다. 문이 닫힌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지후가 황급히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의 걸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식탁 위에 두었다는 대현의 말처럼, 식탁 위에는 하얀 봉투가 올라와 있었다. 홀린 것처럼 연 봉투 안에 있던 표에는 익숙한 뮤지컬 제목이 프린트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