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내려.”
선우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서 비롯된 물음은 그들이 주는 애정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사이 지후가 모르는 곳으로 차를 몰던 선우는 차를 멈춘 후 내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밖을 살피던 지후가 자신이 손을 대기도 전에 열린 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차 밖으로 나갔는지도 몰랐던 선우가 그가 내리는 방향으로 문을 열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예약해 놨으니까 들어가 있어. 이름 물어보면 내 이름 말하면 돼.”
선우의 뒤로 한옥 형태의 음식점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곳을 멍하니 훑던 지후가 선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보조석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마자 문을 닫은 선우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게 된 지후가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뒤돈 얼굴은 그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대꾸하고 차에 탔다.
“주차하고 갈게.”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면 안 되나. 바로 든 생각은 이상하게도 뱉을 수 없었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이미 선우의 차는 돌멩이들이 가득 쌓인 곳을 굴러가고 있었다. 한옥 뒤 코너를 돌아 사라진 차를 보던 지후가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
“……“
불편하다. 먹어도 먹어도 쉴 새 없이 나오는 음식들도 불편하고, 방침이기라도 한 건지 쉴 새 없이 방에 들어와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는 점원도 불편하고, 둘만 있기에는 지나치게 큰 방도 불편했지만 아무래도 그중 가장 불편한 건 앞에서 정갈하게 음식을 씹어 넘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로 시선을 둔 얼굴은 그 와중에도 차분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선우와 밥을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학기 시작과 함께 시작된 진료로 인해 매주 금요일마다 그와 병원을 다녀오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외에도 주말마다 영민이나 대현까지 함께 저녁을 먹은 적도 있었고 불쑥 찾아오는 그를 따라 밖에 나서 음식을 먹은 적도 있었다. 영화를 같이 보러 갔을 때도 그랬고.
근데 그 모든 날들 중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선우는 영민처럼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같이 있을 때 딱히 대화가 비거나 적막이 길게 이어진 적은 없었다. 아마 적당한 타이밍에 질문을 건네는 등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주던 그 때문이리라. 그 사실이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없었다. 항상 먼저 말을 걸어주던 선우가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둘을 둘러싼 공기가 배로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명치를 꾹 누르는 것만 같아서, 지후는 조금 숨이 막혔다.
“근데 너 오늘 차 주차장에 댄 거 있잖아.”
“어.”
“왜 그랬냐? 여태까지는 늘 학교 앞에 댔잖아.”
“빨리 도착해서 시간이 있었어, 오늘은.”
“수업이 빨리 끝났어?”
“아니. 휴강.”
“야, 그럼 연락을 하지. 뭐 하러 여기까지…….”
적막을 견디지 못한 지후가 열 번을 고민하다 한 번 뱉은 말로 어렵사리 시작한 대화도 이상한 포인트에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선우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은 지후는 처음으로 영민이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영민이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이 대화에 끼어들어서 어색함을 덜어줄 수 있다면.
슬쩍 본 선우 앞의 돌솔밥은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점심식사가 끝나간다는 신호에 지후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진료도 없으니 이 식사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따라 특히나 더 낯설게 느껴지는 선우와 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된다.
“이지후.”
물잔으로 손을 뻗던 지후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지후를 부른 선우는 여전히 수저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숟가락이 누룽지탕 안에 든 누룽지를 괴롭히고 있는 광경을 잠시 바라보던 지후가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둘밖에 없는 방이니 못 들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선우는 또 말이 없었다.
“그 사람 누구야?”
“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을 마주한 지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해하지 못한 지후에 ‘아까, 정문에서 같이 있던 사람’이라고 덧붙이는 얼굴은 차분했다. 지후는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선우가 말하는 게 아까 정문까지 함께 걸어온 대현의 후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 후배를 봤다니. 그럼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묻고 싶은 것들이 또 생겼지만, 오늘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대화를 할 의지를 보이는 선우에게 대답해 줘야 하는 일이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아, 대현이 후배.”
“후배?”
“어. 왜?”
“……그냥. 친해 보여서.”
뜬금없는 소리에 지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친하다니. 후배랑 있는 건 봤으면서, 후배가 마지막에 건넨 말은 못 들었나 보다. 그래도 그의 오해 덕에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외치고 간 패기 있는 얼굴이 생각난 지후가 피식 웃었다.
“친하긴. 내가 자기 이름 모르는 거 눈치채고는 이름 기억해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
“기억해 줄 거야? 걔 이름.”
드디어 수저를 내려놓은 선우가 지후를 바라보았다. 또였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꼭 듣겠다는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는 게. 대답이야 쉽게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오늘 보여주는 모습들은 마치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만 같아서 지후는 불안해졌다. 그래서였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대답해주는 것 대신, 그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진 건.
“너……진짜 무슨 일 있냐?”
“……““혹시 피곤하거나 그런 거면 나 안 데려다줘도 되니까……“
“그러게.”
“……“
“나 왜 이러냐, 진짜.”
걱정이 묻은 지후의 말을 끊고 일어나는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마저도 그를 평소와 달라 보이게 만드는 거라서, 지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고 그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차 끌고 올게. 앞에 있어.”
시선을 맞추지도 않고 먼저 방에서 나가는 뒷모습에 지후는 결국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알아온 건 아니지만, 오늘 마주쳤을 때부터 선우는 마치 제가 알던 선우가 아닌 것처럼 굴고 있었다.
바쁘게 방을 빠져나간 것치고 치밀하게 계산까지 마친 선우를 욕하며 음식점을 나서던 지후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출구 쪽에 마련된 커피머신에 멎었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그가 금방 알아챌 정도로 꽤 이름 있는 브랜드에서 나온 커피머신이었다. 걸음이 자연적으로 그쪽을 향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뒤를 돌았다. 커피머신 옆에 있는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에게 다가선 그가 기계 쪽을 가리켰다.
“저거.”
“네?”
“먹고 싶은데요.”
“아…… 네! 드시면 돼요.”
“얼마예요?”
지갑을 꺼내는 지후를 본 직원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카운터를 가운데에 두고 눈을 깜빡이던 남녀의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카운터 안의 여자였다. 상황 파악이 끝난 듯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이 애교스러웠다.
“저희가 고객님들께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거라서요. 그러니까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아…….”
커피머신의 가격을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를 신기하다는 듯 힐끔대는 얼굴을 보니 제가 멍청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민망해진 지후가 어색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망설이던 사이, 카운터에서 나온 직원은 직접 커피를 뽑아주기까지 했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네. 더 드시고 싶으시면 더 드셔도 돼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얼굴에서 읽히는 호의에 지후가 방금 건네받은 커피잔을 괜히 고쳐 쥐었다. 선우의 얼굴이 생각난 것도 그쯤이었다. 아직도 제 옆에 선 여자를 응시한 지후가 쑥스럽게 덧붙였다.
“저기…… 혹시 한 잔 더 뽑아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되죠. 제가 뽑아드릴까요?”
“제가 해도……“
“에이. 금방 하는데요 뭐.”
지후가 말리기도 전에 여자는 커피머신의 버튼을 다시 누르고 있었다. 작은 소음과 함께 커피가 내려지는 걸 바라보던 지후가 제게 건네진 커피를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일 때였다.
“감사합니…….”
차마 끝내지 못한 인사가 지후의 입에서 맴돌았다. 갑작스럽게 크게 뜨여진 눈은 제 팔을 거칠게 잡아 이끄는 뒷모습에 박혀 있었다. 선우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데다가, 두 손에 든 커피 덕에 거동이 자유롭지도 못했다.
“김선우. 잠시만! 야! 커피 쏟아진다고!”
“쏟아지면 그냥 버려.”
“뭐?”
“다른 데서 사줄 테니까.”
얼떨떨한 상태로도 저항 없이 끌려 나가던 지후가 발끝에 힘을 줘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음식점과 멀어질수록 팔을 붙잡은 선우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중이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앞만 바라보고 걷던 선우가 그제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