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외전 3. 질투
“형, 대현이 형!”
“어?”
“이거. 안 챙겨 가신 것 같아서요.”
지후가 뒤돌았다. 손에 든 걸 지후 쪽으로 내밀고 선 남자는 언젠가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대현의 후배였다. 첫 수업, 얼어 있는 제게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이던 얼굴을 기억해 낸 지후가 머뭇거리다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가 내민 건 수업 보충 자료였다. 그제야 쉬는 시간에 대학원생 조교가 들어와 교탁 옆에 올려두었던 하얀 종이 뭉치를 떠올린 지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나왔다. 종이가 쌓여 있는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낄 자신이 없어 나갈 때 가져가야지 생각해 놓고 까먹은 것이었다. 머쓱해진 그가 서둘러 파일 안으로 그것을 끼워 넣었다.
자료를 줬으니 갈 줄 알았던 후배는 지후가 가방 안에 파일을 넣을 때까지도 앞에 서 있었다. 둘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부딪쳤다. 물론 그 어색함은 지후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해 개구진 웃음을 지어 보이는 얼굴은 첫날 마주했던 것처럼 살가웠으니까.
“……고마워.”
“에이. 그냥 한 장 더 챙긴 건데요 뭐.”
망설이다 작은 소리로 건넨 감사 인사를 능숙하게 받아치는 것까지 그랬다. 그와 거리를 두고 내려가려던 지후가 조금 걷다 말고 뒤돌아 저를 기다리는 얼굴을 보고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안 오냐는 듯한 말을 대신하는 듯한 얼굴을 읽어낸 지후는 어깨에 멘 가방을 추스르고 다가섰다. 주춤주춤 다가서는 지후를 기다려 준 그는 이제 자연스레 지후와 보폭을 맞추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근데 형은 아침 수업 괜찮으세요?”
“어? 뭐……“
“전 죽을 것 같아서요. 드랍 기간 지나서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미적지근한 지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솜씨가 능숙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지후는 이렇게 먼저 다가와 친근하게 구는 사람에 약했다. 그래서인지 지후는 어느새 그와 나란히 교정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디까지 같이 걸어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여나 자신 때문에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못 건네는 걸까 생각해 봤지만, 끊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얼굴은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정문에 다다라 있었다.
“어…… 정문이네.”
정말 몰랐다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얼굴을 본 지후가 다시 찾아온 어색함에 목 뒤를 긁었다. 지금쯤 가야 된다고 말하면 되려나? 슬쩍 시계를 보니 선우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형 밥약 있으세요?”
결심한 지후가 말을 내놓기도 전에 쑥 들어온 물음은 또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게 했다. 밥약이라면 밥 약속을 말하는 거겠지? 영민이 언젠가 썼었던 용어를 생각해 나름 이해를 마친 지후가 이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오늘은 한식>
수업 중에 왔던 문자가 떠올라서였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선우와 지후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겹치는 날이고, 그리고 함께 병원을 가는 날이기도 했다. 괜찮다고 해도 기어코 매번 학교 앞에 서 기다리던 얼굴을 떠올린 지후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정문 앞을 훑었다.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근데 문자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려던 지후가 멈칫하고는 앞의 얼굴을 마주했다.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아.”
“아. 밥약 있으시구나.”
“응. 미안.”
“미안하실 게 뭐 있어요, 형. 제가 갑자기 물어본 건데. 대신 나중에 꼭 한 번 같이 먹어요.”
정말 괜찮다는 듯 구김 없이 웃어 보이던 얼굴은 핸드폰 화면을 몇 번 치더니 지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후가 가다 말고 다시 돌아온 얼굴을 어리둥절하게 응시했다.
“형, 그리고 제 이름 지훈이에요.”
“어?”
“모르시는 것 같아서. 다음에는 꼭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다짐받듯 시선을 마주한 얼굴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활짝 웃고는 그를 떠났다. 멀어져 가는 과잠바에 박힌 문구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빡거리던 지후가 그가 뱉고 간 이름을 다시 읊조렸다. 어색해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에 민망하기도 했고, 자신의 이름까지 모르는 것 같은 선배랑 정문 앞까지 걸어온 그 붙임성에 놀랍기도 했다. 미안해서라도 다음에는 잊지 말아야겠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던 지후가 손에 느껴진 진동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
간결한 문자였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크게 뜬 지후가 뒤돌았다.
방금 문자를 보낸 사람답게 선우는 지후와 세 걸음 정도를 남긴 뒤에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슬랙스. 어떻게 보면 지루하리만치 깔끔하게 입고 선 그는 자신에게로 몰리는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내며 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후가 걸음을 빨리 해 그와 거리를 좁혔다.
“어…… 언제 왔어?”
“아까.”
“연락하지.”
“연락했으면 받았을 거야?”
엉뚱한 소리였다.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선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앞장서는 쪽을 살펴보니 주차장 쪽이었다. 자신이 나올 시간을 맞춰서 학교 앞에 도착하곤 했던 선우는 늘 정문 앞에 차를 대고 서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를 기다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까’라고 말하던 뜻이 이거였나.
수업을 듣는 저를 재촉 한번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지후가 걸음 속도를 빨리 해 그의 옆에 섰다. 빨리 걸어가 버릴 때는 언제고 옆에 선 지후를 확인한 그가 걸음의 속도를 줄인다.
뭐 안 좋은 일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지후가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왜?”
“어? 아니.”
시선을 느꼈는지 물어오는 얼굴이 어딘가 평소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았다. 긴가민가한 상태로 차에 탄 지후가 안전벨트를 매며 다시 선우를 힐끔거렸다. 무표정한 옆얼굴은 읽어내기가 어렵다. 지후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뭐 안 좋은 일 있어?”
그제야 선우가 지후를 돌아본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던 것보다야 나았다. 신호가 바뀌고서야 선우의 고개는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여전히 지후의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실이 어딘가 초조하게 느껴져서 지후는 시선을 내린 채 발치에 두었던 가방끈을 괜히 매만졌다.
“미뤄야 될 것 같다고 연락 왔어.”
선우의 입이 열린 건 한참 뒤였다. 차가 제가 아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걸 지후가 막 깨달았을 무렵이기도 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깥을 살피던 지후의 고개가 선우가 입을 연 즉시 그의 쪽으로 돌아갔다.
“진료.”
“아……“
오늘로 예정되어 있던 수면클리닉 센터의 진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지후는 또 다른 물음에 직면해야 했다. 진료가 미뤄졌다면 선우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차에 태웠는가가 바로 그 물음이었다.
지후는 얼마 전부터 선우가 아는 분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야 그도 질색을 했지만, 잔소리를 퍼붓는 대현부터 시작해 상담 예약을 잡았다며 은근하게 압력을 넣는 선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선우는 그날 이후 그가 가는지 감시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진료를 받는 날마다 학교 앞에서 그를 픽업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하게 된 데에는 어느 날 저를 소외시킨 채 방에 들어가 대현과 둘만 나눴던 대화가 영향을 주었으리라. 방에서 나온 선우가 손에 쥐고 있던 약통은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짐작이 가게끔 했다. 약통을 달라고 손을 내민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던 것도 그래서였다.
부끄러웠다. 이제는 익숙함으로 자리잡은 수면 장애에 자신보다 더 가라앉은 눈을 하는 그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그래서 시작된 진료는 아직까지는 별 차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이 년도 넘게 이어온 일이 한 번에 해결될 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진료를 다녀오는 날마다 확인하듯 연락을 하는 대현은 속상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치료를 하게 된 지후야 덤덤했다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선우와 대현에 비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영민마저도 가끔 툭 수면에 좋다는 차 같은 것들을 내밀곤 했다.
벅찬 관심이자 애정이었다. 몇 달이 지났음에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