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13화 (113/119)

113화

“……김 식.”

“네.”

“가자니까.”

“한 판만 더 할게요.”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얼굴 위로 영민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목구비의 존재 말고는 하나도 닮은 게 없는 둘이 겹쳐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과도 관련이 있었다. 식이 걸음을 멈추고 오락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망설임 없이 구석의 인형 뽑기 기계로 다가선 그가 조이스틱을 쥐는 걸 보자마자 든 불안감은 그들이 그러고 있던 시간이 이십 분을 훌쩍 넘어가자 슬슬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

오락실 사장님에게까지 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온 식은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게임에 매달리고 있었다. 방금도. 실패했음을 알리는 발랄한 기계음을 듣자마자 지폐를 끼워 넣는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엿볼 수가 없었다.

예전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대현이 뽑아줬던 인형 외에는 평소에 인형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저 조그만 인형 하나 뽑아보겠다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광경이 어이없고도 신기해서, 대현은 말리던 것도 잊고 침침한 오락실에서 홀로 빛이 나는 듯한 옆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점점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한 분침과 시침을 확인한 대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식아. 내가 뽑아줄게. 어? 비켜봐.”

“괜찮아요, 형. 기다리세요.”

사실 옆에서 식의 헛손질을 지켜보는 건 조금 지루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급하게까지 멈추려고 노력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현이 계속 시계를 확인하며 그를 재촉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대현이 계획한 하루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듯한 얼굴은 태평하게 인형 뽑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현은 오락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계획한 곳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찾아 매 초마다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한 대현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형, 그때 저한테 인형 뽑아주셨을 때요.”

“어? 언제?”

“영화관에서요.”

집중을 하기 위해서인지 말을 걸 때 대답하는 것 말고는 침묵을 지키던 식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대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의 앞에 있는 인형 뽑기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 식이 꾸준히 노렸던 인형이 드디어 집게에 잡혀 끌려 나오는 광경을 보던 대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오락실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런 대현의 속도 모른 채 말을 잇다 말고 인형이 나오는 입구로 하얀 손을 가져가 기다리던 식은 마침내 제 손에 잡힌 인형을 보지도 않고 대현 쪽으로 내밀었다.

“새삼 또 반했잖아요, 저.”

함께 건네 오는 어딘가 당당한 고백에 대현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그거 말하고 싶어서 이런 거라고?”

“뭐. 그 김에 형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형 뽑는 나한테 반하면 좋고. 겸사겸사?”

뻔뻔하게 자신에게 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얼굴은 그 와중에도 대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자정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간. 번화가라고도 볼 수 없는 거리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오락실. 그들이 누구인지 신경 쓸 힘조차 없어 보이는 어깨로 듬성듬성 앉아 게임에 나른하게 몰입한 어른들. 빈말로도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쑥 내밀어진 볼품없는 인형은 식이 그 말을 뱉은 순간부터 대현만이 누릴 수 있는 로맨틱한 선물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현은 제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불평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확인한 시계는 자정까지 1분이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식아.”

마스크를 내리고 식을 불렀다.

“생일 축하해.”

그리고 받고 싶은 선물이 있냐는 말에 하루 종일 함께만 있어달라던 제 애인을 오롯이 눈에 담고는 환하게 웃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냐는 말에 형이 좋아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던 사랑스러운 얼굴에 성큼 다가섰다. 몸이 바뀐 후 어딜 가든 항상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타인의 시선을 지워내며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말로만?”

순식간에 짙어진 눈을 한 식이 그와 한 뼘을 남기고 선 거리에서 속삭였다. 대현이 대답 대신 주머니 속 카드를 꺼내 들어 보였다. 끝이 조금 둥글게 휘어진 네모난 플라스틱 카드는 하얗고 가벼웠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준비한 대현의 마음은 그와는 정반대의 색을 띤 채 꿀렁대고 있었고, 식도 그걸 눈치챈 듯했다. 카드를 훑던 눈이 예쁘게 접힌다. 붙은 하체로 서로의 열 뜬 몸이 느껴졌다.

“이번엔 형 도망 못 갈 텐데.”

식의 목소리는 벌써부터 낮아져 있었다. 몸을 겹칠 때마다 그의 온몸을 한 시라도 놓치지 않고 훑던 까만 눈이 열기를 가득 담고 일렁였다.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느리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비롯한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이번에는 샤워를 핑계로 피할 생각이 없는 대현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 그러라고 준비한 건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락실에서 뛰쳐나간 둘은 택시를 타러 가는 그 짧은 길을 견디지 못하고 멈춰 섰다. 가로등조차 없는 으슥한 골목에 선 장정 둘은 자꾸만 넘쳐 오르는 마음을 어떻게 가져다 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거칠게 서로를 탐했다. 그친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팔랑팔랑 내려온 눈송이가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모자 두 개를 축축하게 적실 때까지도 입맞춤은 끝나지 않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