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대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식이 잠깐 멈칫하는 게 보였다. 겨우 매달려 있는 듯한 간판을 바라보는 옆얼굴을 보던 대현은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석유난로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겨울마다 목도리를 푸르며 들어서던 지난 추억들이 떠오르기에 충분한 냄새에 대현의 얼굴이 활짝 폈다. 부엌이 마주 보이는 노란 장판 위에 앉아 깻잎을 정리하고 있던 아주머니의 무심한 시선이 돌아왔다.
“편한 데로 앉으세요.”
묵묵히 시선을 마주하던 아주머니에게서 무뚝뚝하게 흘러나온 말을 듣고서야 머쓱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중학교 때부터 영민과 뻔질나게 다녔던 곳.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친해진 아주머니는 유독 대현을 예뻐했다. 몰려드는 손님으로 바쁠 때가 아니면 부엌에서 나와 그를 맞아줄 정도로.
그 환대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기다리며 한참을 서 있던 게 민망해졌다. 문을 닫고 들어온 식이 어느덧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대현이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겨 곱창집 안 깊숙한 구석으로 들어갔다.
어색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식을 대신해 대현이 손을 들어 익숙하게 야채곱창 2인분을 주문했다. 상대방은 아닐지 몰라도 대현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가워서인지, 물과 쌈 채소를 투박한 손길로 내려놓는 얼굴을 보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끝내는 대현을 이상하게 흘끔거리던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외투조차 벗지 않은 그를 본 대현이 물수건을 건네며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이런 데 와본 적 있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보인다.”
대현의 말에 욕이에요? 라며 찌푸리는 척하던 얼굴은 그러면서도 물수건 포장지를 뜯어 제 손을 닦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앞에 놓인 야채곱창의 양에 놀란 표정을 짓는 식을 본 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먹어봐. 안 죽으니까.”
평생 시도해 본 적 없었을 음식을 떨떠름한 눈으로 응시하던 식은 몇 번의 젓가락질 후 표정이 묘해지더니 그 이후로는 권하지 않아도 잘 먹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던 대현은 더 이상 못 먹겠다 싶을 때쯤에야 수저를 놓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그들만 있었던 곱창집 내부는 어느새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과제에 대해 투덜거리는 대학생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워낙 규모가 작은 가게라 그럴 만도 했다. 가게를 넓히는 게 어떻겠냐는 영민의 오지랖 넓은 말에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며 손을 내젓던 아주머니의 얼굴까지 떠올린 대현의 입에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가 떴다.
“혹시 사촌 동생 있으신가?”
카드 위에 영수증을 얹어 돌려주던 무뚝뚝한 얼굴에서 나온 뜬금없는 이야기에 대현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제 얼굴을 힐끔거리는 얼굴이 가게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호기심이 드러나는 눈은 아까 대현이 가게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닌 척 바라고 있던 친근함을 언뜻 비추고도 있었다. 사투리 억양이 섞이기 시작한 말투도 그렇고.
“웃는 게 우리 단골손님이랑 닮은 것 같아서.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그래요?”
“그 손님도 이 주위 학교 다니는디. h대라고. 공부도 잘해. 예의는 또 얼마나 바르고. 전공이 그, 뭐였더라…… 음악 관련된 거였는데……“
제 나이처럼 차려 입은 대현과 식이 대학생으로 보였는지, 같은 학교의 대학생일지도 모르는 다른 손님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는 말을 이어나가면서도 분주히 대현을 힐끔댔다. 대현이 아닌 다른 손님이었다면 피곤할 수도 있게 느껴질 그녀의 뜬금없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대상이 자신임을 눈치챈 대현에게는 찡하게 다가오는 거라서 대현은 그녀의 말을 끊지도 않고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현이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식의 존재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어깨를 짚은 식이 대현을 대신해 뱉은 말에 앞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대현이! 역시 아는 거 맞았네. 그치? 사촌 동생 맞지? 내가 어쩐지…… 아까 날 보고 딱 웃는데 뭔가 익숙하다 싶어서…….”
박수까지 짝짝 치며 기뻐하는 얼굴을 본 대현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어우, 진작 알았으면 음료수라도 줬을 텐데! 늦게 물어봐서……“
“이모, 저희 주문할게요!”
아쉬운 얼굴이 된 그녀가 손을 들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려다가 이내 다시 대현과 식 쪽으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꺼내 뒤적거리던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요구르트 두 개.
“다음에 오면 꼭 서비스 챙겨줄게~ 오늘은 이거라도 마시고 가!”
바쁘게 달려가면서도 대현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은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돌이켜보게 한다.
‘이모, 오늘도 요구르트 콜?’
‘진짜 뻔뻔하게 요구한다.’
‘님은 안 드실 거?’
‘네가 먹는데 왜 내가 안 먹어.’
‘이모, 안 주셔도 돼요.’
‘아이고 이것들 또 싸우네. 자자, 하나씩 먹고 얼른 집에 가. 고등학생 되면 안 싸울 줄 알았더니 더 싸우는 것 같아 어째.’
‘와, 이모 왜 대현이 것만 얼린 거예요? 저도 얼린 거!’
‘닥치고 먹어라 그냥.’
‘바꿔줄까?’
‘됐어. 시발 김선우 넌 아까 안 먹는다며. 내놔라.’
‘지랄. 내가 언제.’
넥타이 색깔부터 디자인까지 다른 하복을 입고 길을 걷던 셋의 손에 나란히 들려 있던 요구르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현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서서는 걷는 내내 아웅다웅 다투던 영민과 선우.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매미 소리. 손에 들린 요구르트 표면에 맺힌 물방울.
한때 대현의 세상을 채우던 것들.
“갈까요?”
“아…… 어. 가자.”
묘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식을 따라 나온 밖에는 눈이 날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산이 없는 둘도 모자로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없던 눈은 대현과 식이 점차 사람이 뜸해지는 길을 걸어 대현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완전히 그쳤다.
겨울이라 그런지 유달리 빨리 찾아오는 것 같은 어둠은 오늘도 예외가 없었다. 5시를 조금 넘긴 시간부터 벌써 초등학교 위로 꾸물꾸물 범위를 넓혀오는 어둠은 운동장을 썰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운동장 곳곳에 숨은 햇빛까지 몰아내고 있었다.
스탠드 구석에 앉아 대현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식이 뜬금없이 대현의 손을 잡았다. 의아한 채로도 식의 손을 힘주어 맞잡던 대현이 멈칫했다.
“대현이 덕에 좋았다 오늘.”
“……“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 없는 데서 같이 눈도 맞고.”
스스로 정의하지 못할 이상한 감정들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던 대현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문장들이었다. 차마 제 입으로 내뱉기 어려웠던 이름을 먼저 꺼낸 그 덕에, 걸어오는 내내 느꼈던 묘한 그리움과 어색함이 놀랄 만큼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치, 대현아.”
이 기회를 틈타 맞먹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건지,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한 번 더 이름을 불러오는 얼굴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팔을 조금 끌어당기자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딸려오는 사람이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웠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에게 떨리기 시작했을 때도, 그와 처음 입을 맞췄을 때도, 눈물을 참으며 그의 코트 깃에 얼굴을 묻은 지금까지도 식에게서 나는 향은 대현의 머릿속을 차분하게 진정시키면서도 동시에 몽롱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오는 내내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조그맣게 소리를 죽여 흘러나왔다.
“후회하는 건 아니야.”
“알아요.”
“그냥…… 기분이 좀 이상했어. 나에게 너무 익숙한 사람인데 날 모르는 눈빛을 하니까.”“……나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언제 올라온 건지 모를 식의 손이 대현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조심스럽고도 간지러운 행위에 어쩐지 더 마음이 노곤해져서, 대현은 눈을 꼭 감고 그 품에 조금 더 편하게 기댔다.
“형.”
“응.”
“지후 형 몸에 남아 있겠다고 결정했다고 해서 정대현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
“형이 정대현이잖아요. 아까 이모님도 알아보셨듯이.”
그 말에는 코트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눈을 꼭 붙든 단단한 눈은 언젠가 식과 보러 갔던 밤하늘보다 배로는 넓고 따뜻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형은 과거에 있고, 현재에 있고, 미래에도 있어요.”“……“
“그거 다 정대현이야.”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식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끌어안은 사람이 가끔 자신조차도 잊곤 하는 정대현 그 자체라는 사실을. 어디가 비었는지도 모를 빈틈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결국 차츰차츰 범위를 넓히기까지 한 그의 사랑은 결국 대현이 발을 딛고 선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식아.”
“네.”
“사랑해.”
“말로만?”
씩 웃으며 제 볼을 톡톡 치는 얼굴은 방금 제가 해준 것에 비해 너무 작은 보답을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대현은 볼 대신 그의 입술로 직행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뺨을 감싸 안는 손은 따뜻했고, 둘이 나누기 시작한 혀에서는 달큰한 요구르트의 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