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진현아, 미안해.
여섯 글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익숙한 필체가 그의 숨을 멎게 했다. 꿈에도 잊은 적 없던 단정한 글씨가 그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참지 못하고 바닥에 토악질을 시작했지만 쏟아지는 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그의 속에는 게워낼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우욱…… 으……. 흐으…….”
대신 토해낸 건 울음이었다. 구질구질한 제 사랑이 마음이 정해놓은 둑을 타고 넘쳐흘렀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감정들은 이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거 세탁해서 돌려줘.’
‘이거 완전 웃기는 새끼 아니야. 야, 너 내가 우습냐? 혼자 남아서 콜라 닦고 있으니까 졸라 불쌍해 보이든? 그딴 동정 필요 없으니까 좋은 말 할 때 다시 가져가라.’
‘유진현.’
‘……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
'야. 너가 지금 이러는 게 콜라 쏟은 그 새끼들보다 더 나쁜 행동인 거 알고는 있냐? 이름 바꾼 지가 언젠데 옛날 옛적 이름을 부르고 지ㄹ…….’
‘나 너 응원했었다.’
‘…….’
‘그래서 너 우리 소속사 온다는 얘기 듣고도 좋았어. 같은 그룹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
‘…….’
‘그러니까……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거기서 떨어졌다고 해서 데뷔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어딘가 어색한 위로. 그럼에도 그에게 다시 던지려 했던 티셔츠는 이상하게도 던지지 못했었다. 차분하게 말을 끝낸 그가 문을 닫고 나갔음에도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자신의 귀에는 그가 남긴 말만이 웅웅거렸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결국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름을.
‘……쟤가 걔 맞지? 유진현.’
‘와. 진짜 성격 더러워 보인다.’
‘그치. 나도 그 생각함. 야, 솔직히 악마의 편집이라고는 해도 아예 없는 걸 지어낼 수 있겠냐.’
‘그러니까. 곡 선정부터 완전 지 맘대로더만. 그래놓고 자기 떨어질 것 같으니까 속마음 인터뷰에서는 사연 팔이 하면서 눈물 흘리고. 지 때문에 떨어진 애들은 어떻게 할 건데?’
‘그러니까. 그래놓고 지는 떨어지지도 않아요. 노이즈 효과인지 뭔지 저번주에는 4위까지 했잖아.’
‘아, 재수 없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아이들이 모인 공간.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과 비슷한 실력. 나올 수 있는 그림은 제한되어 있고, 피디들의 욕심은 언제나 그렇듯 그 한계를 저울질했다. 카메라에 많이 잡혀야 투표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빼는 것 없이 잘 참여했고 잘 웃었다. 눈치싸움을 하듯 의견 내기를 망설이는 팀 멤버들을 보다 못한 피디가 짜증을 냈을 때는 제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 분위기를 풀었고, 민감한 이야기를 묻는 인터뷰에도 솔직하게 답했다.
첫 방송이 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그 모든 행동은 결국 자신을 낚기 좋은 희생양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걸. 여러 장면을 오려 붙이자 은호는 파트 욕심에 같은 팀원들을 밀어낸, 제 분량 챙기기에 급급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한번 물살을 탄 여론은 은호에게 붙은 꼬리표를 떼주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분위기 흐리는 것 보라며 욕을 했고, 팀원에게 파트를 양보하면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한다고 비아냥댔다. 8주간의 합숙, 10키로가 빠졌고 그는 결국 생방송으로 가는 파이널 멤버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두 번째로 들어간 서바이벌 프로그램 담당자는 은호에게 아쉽게 떨어졌었으니 이번에는 나오기만 한다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냐며 그를 살살 꼬여냈다. 편집을 특별히 신경 써서 해주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그 속을 믿을 수는 없어도 자신이 다시 속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 배로 조심했고, 두 배로 노력했다.
잘되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방송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된 첫 화는 그의 기대를 부수다 못해 하수구로 처박았다. 이번에는 잘 해보고 싶다는 조심스러운 말은 자만심 가득한 발언으로 탈바꿈되어 있었고, 잘 지냈다고 믿었던 팀원들은 속마음 인터뷰에서 그가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인터넷 반응도 별다르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댓글들을 보던 은호는 깨달았다. 이미 그들에게는 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마음대로 씹고 물고 해부할 사람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다. 운이 나쁘게 자신이 그 대상이 되었을 뿐. 머리가 차갑게 식었고, 다음은 가슴이었다. 표정에 대해 욕하는 댓글도 더 이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은 경연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그는 두 번째 서바이벌에서도 파이널 컷 안에 들지 못했다. 마지막 소감을 묻는 mc의 말에 허리를 숙임으로서 인사를 대신한 그는 무대를 내려오는 내내 꽉 쥔 주먹을 풀지 않았었다.
그래도 두 번의 희생으로 얻은 게 있다면,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거였다. 그중 가장 큰 기획사였던 유니버스 엔터테인먼트와의 미팅 자리에서 은호가 물은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름을 바꿀 수 있냐고.
데뷔해 활동명을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 이름으로 살아온 과거에는 한결같이 멍청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자신이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이름을 바꿨다. 그와 동시에 어릴 적부터 제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던 부모, 자신을 농락한 친구들, 뭘 하든 욕부터 하던 얼굴 없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더 이상은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해져야 했다. 그래서 날을 세웠다.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비좁은 세계 안에 자신을 가뒀다.
이지후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가 다가와 제 세계를 부수고 오래전 버린 이름을 그 폐허 안에 새겨 넣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가 세계 안에서 잊혀지고 있던 것들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의 부름으로 모든 것들이 완성됐다.
그래. 당신은 내 세계를 부순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세우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미안 ……미…… 윽……. 미안해요…….”
당신은 이제 이 노트가 내게 무슨 의미였는지를 알아버렸겠지. 노트 곳곳에 묻은 내 추악한 흔적들을 봤다면 모르기가 더 힘들었을 테다. 진득하게 묻어나는 집착과 광기는 여린 당신을 상처 입혔을지도 모른다.
“미안…….”
그럼에도 당신은 내게 뒤늦은 답장을 건넨다. 한참을 늦었으나, 받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답장을. 당신이 남겨준 마지막 배려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목 놓아 우는 것밖에 없다.
이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당신에게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멍청했다. 내가 이기적이었다. 내가…… 내가…… 감히 당신을 욕심냈다.
당신이 밤하늘이라면, 그 안에서 빛을 내는 건 나뿐이었으면 했다. 그 하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별이 나라고 확신했거든. 그러느라, 그 자기중심적이고도 어린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몰랐다.
“잘…… 못…… 흐…… 했어요…….”
당신은 애초에 어두운 밤하늘이고 싶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