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외전 1. 답장
시간은 언제나처럼 제 속도를 잊지 않고 달렸다. 유일하게 재계약을 하지 않은 은호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던 기자들도, 믿을 수 없다며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팬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불판을 갈아가며 신나게 그룹을 해부하던 네티즌들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자필로 쓴 심경문 하나를 달랑 남겼던 은호는 그 모든 과정을 감정 소모 없이 관망했다. 그런 일 하나에 일희일비하기에는 그는 이미 이 바닥의 생리를 너무 잘 알았고, 이 일이 금방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날 것도 쉽게 예측했다. 그의 예상처럼 그의 탈퇴를 놓고 벌인 뜨거운 설전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한 달도 생각보다 길었다, 고 생각하며 은호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은호가 살고 있는 곳 앞까지 찾아와 시위하던 팬들은 이번 주부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경비실을 흘긋 바라본 은호가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새로 옮긴 소속사는 은호가 이 기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길 권했다. 현명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음 뮤지컬 연습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작년 말 유독 몰아쳤던 스케줄 때문에 목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못 잤던 잠도 푹 자고 틈날 때마다 운동해 체력을 키워놓으면 활동을 개시할 때도 도움이 될 거였다. 그래. 모든 건 그가 바라던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근데 이 정체 모를 두통은 왜일까. 밥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목을 풀 때도. 새벽 운동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탄 지금 이 순간마저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애매한 고통이 거슬렸다. 매니저에게 부탁해 받아온 두통약은 일주일 만에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효과나 있으면 몰라, 오늘 아침만 해도 세 알이나 먹은 두통약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다시 찾아온 고통에 그의 잇새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소용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던 은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익숙한 호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의 걸음이 멈춘 건 문 앞에 놓인 큰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다 해도 네 가구나 될까, 이름도 모르는 이웃들의 집은 그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반영하듯 널찍이 떨어져 있었다. 텅 빈 복도를 한 번 돌아본 은호가 상자 앞에 섰다. 운송장에 적혀 있는 익숙한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이른 아침부터 도착한 상자가 제게 온 것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보내는 사람: 김진수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핸드폰에는 새로운 알림이 없었다. 한때는 그의 핸드폰에 지속적으로 뜨던 익숙한 이름과 번호는 이제는 한참을 찾아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갔다.
“……하긴.”
진수는 더 이상 그의 매니저가 아니었다. 이제는 담당 아티스트도 아닌 은호에게 택배를 보냈다고 시시콜콜 알려줄 의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계약 기간을 채우고 나왔든 뭐든, 어쨌든 그는 나머지 멤버와 함께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였고, 가장 먼저 그들을 등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숙소에 남기고 온 물건을 대신 부쳐 준 것만 해도 어딘가. 비소는 갈 곳을 잃고 이내 희미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은호가 허리를 굽혀 상자를 들었다. 상자는 크기에 비해 무겁지 않았다. 도어락을 열어 문을 고정해 놓은 은호가 상자를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옆에 아무렇게나 상자를 던져 둔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훑는 눈길이 무심했다. 텅 빈 냉장고 안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그는 결국 제일 앞에 있는 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발로 냉장고 문을 닫은 그가 목을 뒤로 젖혀 물을 한가득 입에 머금었다. 차가운 냉수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두통으로 인해 흐려지던 눈앞이 조금 선명해졌다고 느껴질 때 즈음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티셔츠 끝을 잡아 위로 올리자 땀에 젖은 티셔츠가 걸려 나왔다. 티셔츠를 말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그가 욕실로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현관 옆 상자에 시선이 멎었다.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찾아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송곳이 뇌를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멈춰 선 은호가 욕을 읊조렸다. 탁자 위에 둔 약통에서 동그란 알약을 한 움큼 집어 목구멍으로 털어 넣고는 물까지 삼켰건만 고통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아, 씨발.”
머리를 울리는 듯한 고통에 눈을 찡그리던 그의 시야 안에는 여전히 갈색 상자가 들어와 있었다. 네 공간에서도, 마음에서도 나갈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상자를 노려보던 은호가 결국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상자 위에 붙은 테이프를 거칠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짓에 상자 이음새마다 베이지색의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았다. 곧 모습을 드러낸 상자 안 내용물들은 그의 예상처럼 별게 없었다. 재계약을 할 시기가 다가오며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으로 물건을 옮겨놨던 은호였다. 숙소 제 방에 남겨둔 물건들은 그래도 방에 사람이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 두었던 몇 벌의 옷들과 책 몇 권밖에 없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보인 옷들과 책을 집어 옆으로 던져 놓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보였다. 과대포장이나 다름없는 상자를 내려다보던 은호가 마지막 내용물인 듯한 책을 집어 들다 말고 멈칫했다.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빡였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의 시선은 여전히 상자 안의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얇은 노트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
색도, 모양도, 하단에 위치한 브랜드마저도 제가 알던 것과 꼭 같았다. 이 년을 넘게 가지고 있던 노트였다. 한 번도 제 손에 넣지 못한 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 자신에게 웃어줬으면 싶을 때, 그에게 다가서고 싶을 때마다 꺼내 들었던 것이었다.
닳아버릴 정도로 만져 댔고, 이 노트가 사람이라면 자신을 지겨워할 것 같다 생각할 정도로 찾아댔다. 그 노트는 제게는 그 사람과 다름없었다. 그가 그린 음표에 입을 맞췄고,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가사를 수백 번 곱씹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을 때는 그 사이마다 제 마음을 기록하기도 했다. 덜덜 떨린 손이 점 하나만 찍고는 멈춘 날도 있었다.
‘그거 말고는 바라는 거 없으니까. 부탁할게.’
묻고 싶었다. 왜 나에게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냐고.
난 눈을 뜰 때마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들이 생기는데.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고, 나랑만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내가 당신에게 특별했으면 좋겠어.
나만…… 당신에게 특별했으면 좋겠어.
* * *
“……지후 형.”
“곧 리허설 시작할 것 같으니까 준비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았던 마음들은 태도를 바꿔 도망치기 시작했다. 결국 내놓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이름밖에 없었다. 눈앞에 그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붙잡을 수가 없었다.
“코디 누나한테 메이크업 수정해 달라고 하고.”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그제야 그의 입술을 짧게 응시했다. 삼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의미가 뭔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복도에서 제가 남자가 키스하던 장면을 목격한 건 지후가 맞았다. 하지만 정작 은호가 못 견디겠는 건 따로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묻어나던 무심함. 자신이 누구와 입을 맞추든 상관없다는 듯한 무관심한 표정이 은호의 심장을 짓이겼다. 조금의 거리만을 남기고 그를 지나치는 지후에게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갈아입어.’
언젠가 그가 빌려준 티셔츠에서 났던 향이었다. 그 향을, 건네주던 손을, 하얀 얼굴을 잊지 못해 벌인 일들이었다. 그를 향한 사랑은 늘 그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어서 그를 집요할 정도로 옭아맸다.
쾅.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의 심장을 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었는데, 피를 울컥 토해내는 심장을 달고 선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못에 박힌 듯 제자리에 선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을 곱씹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 ……하하…….”
차마 울지 못했다. 대신 웃음이 나왔다. 비틀린 입매가 뱉어내는 맥없는 웃음소리와 달리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관심이 그의 짝사랑에 대한 답변이 될 줄은.
그리고 그게 제 알량한 자존심이 벌일 일의 시작이자, 제가 사랑하던 사람을 갉아먹는 일이 될 줄은.
* * *
“…….”
겨우 뻗은 손은 언젠가처럼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땀이 노트 표지를 적셨다. 이를 악물고서야 겨우 노트 한 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속지에는 그가 아는 이니셜이 있어야 했다.
익숙한 글씨를 찾아 방황하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팽창된 동공은 까만 글자에 시선을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까만 글자들이 온전히 머릿속에 박힌 순간, 속에서 왈칵 토악질이 올라왔다. 허리를 구부린 그의 손에서 노트가 힘없이 떨어졌다.
몰아세우는 언론들도, 등을 돌린 팬들도,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두통도 은호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노트 위로, 제 오래된 사랑의 흔적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