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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107화 (107/119)
  • 107화

    대답은 뜬금없는 곳에서 흘러나왔다. 뒷자리에 앉은 지후 덕에 뒷자리 쪽으로 몰려 있던 두 쌍의 눈이 동시에 운전자석을 향했다. 앞을 보고 운전하던 선우는 오른손을 뻗어 영민의 머리를 앞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너무 뜬금없었던 탓인지 저항을 하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영민의 고개가 다시 선우에게로 홱 꺾였다.

    “뭐? 너 영화관 안 가잖아. 우리랑.”

    그건 대현도 궁금한 것이었다. 방금 영민이 지적했던 것처럼 선우는 대현과 영민과 함께 영화관만은 함께 가지 않았다. 영화관만은 연애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대나 뭐래나.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혼자 보러 가는 한이 있어도 친구들과는 가지 않았다.

    근데 이지후랑은 보러 갔다는 거면 그 말인즉슨…….

    “나 장난이었는데 이거 뭐죠?”

    차 안의 침묵을 깬 건 역시나 영민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를 본 선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그가 룸미러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지후를 확인하는 것까지 본 대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은 했어도, 남자친구까지 생각해 보지는 못했는데.

    뭐, 근데 생각해 보면 자신도 뭐라 할 수는 없는 처지긴 했다. 식과의 관계를 들으면 지후는 심지어 그가 지금 놀란 것보다 더 놀랄 수도. 역지사지를 적용해 빠르게 생각을 마친 대현이 자꾸만 거슬리게 내려오는 앞머리를 올리기 위해 모자를 잠시 벗었다. 활동을 위해 염색한 머리는 이제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눈을 찌르는 머리길이는 신경 쓰였다. 핸드폰에 머리가 잘 정리 됐나 비춰보던 그가 멈칫했다.

    <형>

    문자의 주인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이내 작은 미소가 떴다.

    <응>

    <어디쯤 갔어요?>

    “우리 어디쯤 왔어?”

    “삼분 내에 도착할 것 같은데.”

    차가 확연히 줄어든 한산한 도로에 들어서며 거의 다 와간다는 걸 눈치는 챘지만 네비게이션을 확인한 선우의 말까지 들으니 정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대현이 다시 손에 쥔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 왔어 이제. 너는? 촬영 끝났어?>

    전송 버튼을 누른 대현이 밖을 응시했다.

    “여기 아냐?”

    “어, 맞네. 저기 나무 보인다.”

    영민의 말처럼 정말 멀지 않은 곳에 나무가 보였다. 꽤 거리가 있음에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나무는 정말 그의 마을 어귀에 있던 나무가 맞았다.

    자연스럽게 돌아간 시선의 끝에는 지후가 있었다. 방금 대현처럼 창밖을 바라보던 얼굴이 시선을 눈치채고는 눈을 맞춰온다. 대현이 안심하라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다행히 그의 의도를 알아챈 듯 조금 풀린 얼굴의 지후가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

    따라 나서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진동을 시작한 핸드폰을 잠시 내려다본 그가 망설이다가 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살폈다. 선우는 지후와 이야기 중이었고, 차가 멈추자마자 가장 먼저 튀어나간 영민은 나무의 반대편에 위치한 슈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깐의 통화는 괜찮을 듯했다. 판단을 마친 그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응.”

    [통화 가능해요?]

    “어. 대신 짧게만. 너는? 촬영 중 아니야?”

    [잠깐 쉬는 시간이요.]

    “밥은 먹었어?”

    [형은요?]

    “……우리 대화 맨날 이런 식인 거 알지.”

    [제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형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한 걸 어떡해요.]

    “가만 보면 넌 그런 닭살 돋는 말 되게 잘하는 것 같아.”

    [하지 말까요?]

    “아니.”

    짧은, 그러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단호한 대답이 나가자마자 작은 웃음소리가 건너온다. 그가 어떤 얼굴로 웃고 있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부드럽게 눈이 휘어지고 단정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다시 쳐다본 창 밖에서는 슈퍼에서 나온 영민이 지후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선우가 영민을 패대기치는 것까지 확인한 대현의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무 웃어서인지 당겨오는 것 같은 입가를 매만진 그가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나무는 찾았어요?]

    “응.”

    [……준비는 됐구요?]

    “응.”

    갑자기 건너온 말에 멈칫 굳었던 입가는 다시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 조금 풀린 신발 끈을 힘주어 묶은 그가 밖을 다시 곁눈질했다.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나오라고 턱짓하는 그를 본 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가야겠다.”

    [네. 저도 지금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응. 촬영 잘하고. 끝나고 연락할게.”

    [네.]

    “끊을게.”

    [형.]

    통화를 마무리하며 문을 열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를 붙잡은 목소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에게 돌아왔다.

    [보고 싶어요.]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곳에 가서 지후와 자신의 진심을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던 그가 떠올랐다. 밤샘 촬영을 하고 와 채 열두 시간도 쉬지 못한 채 또 나가야 하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으면서도, 오늘 아침 현관문에 서서 대현을 배웅하던 그는 포옹으로 제가 하고 싶었을 모든 말들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 모든 배려와 기다림은 오늘도 대현의 세상을 꽉 채웠다.

    “나도.”

    그래서 대현은 꽉 막힌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끊겼음에도 한동안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하던 대현이 차 문을 열었을 때는 평소와 같은 밝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지후에게 쪽지를 건네받은 순간부터 대현은 그 장소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영화관 화장실에서 지후의 사고를 예견한 남자가 쓰던 게 충청도 사투리라는 것을 떠올린 이후로는 더 그랬다. 쪽지에 적힌 주소는 충청북도의 한 동네를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한 쪽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쪽지를 다시 집어 든 건 대현이었다. 지후는 대현이 행복하면 된다고 했지만, 대현은 제 행복을 위해 지후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받지 않는 한 쭉 그럴 것이었다.

    가족이라며.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가족이 되기 싫은데, 난.

    설득의 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말에는 지후도 결국 못 이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렇게 결정된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선우와 영민도 함께하고 싶다고 했고. 결국 이곳을 찾은 건 모두 함께였다.

    이상하게도 다리가 다 나은 뒤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지후 때문에, 그들이 봄에야 찾을 수 있게 된 이곳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임에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물며 이 나무까지도. 쌍둥이 나무라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마을에 있던 소원나무와 놀랄 만큼 똑같이 생긴 나무를 올려다보던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표지판을 읽던 얼굴이 시선을 느끼고는 대현을 돌아봤다.

    “준비됐지?”

    “응.”

    그룹이 해체하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때 지후는 대현처럼 입 밖으로 소원을 내뱉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입 밖으로 소원을 꼭 뱉지 않아도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거였다. 어딘가 어설픈 결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대현은 확신이 있었다. 한때는 서로 알지도 못했던 그들이 따로 빌었던 소원을 절충해 이뤄준 나무는 그때의 그들이 같이 서서 소원을 빌기까지 하는 이번에도 당연히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라는 그런 이유 모를 확신이었다.

    손을 모으려는 준비를 하는 지후를 본 대현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어깨를 잡힌 지후가 그를 멀뚱히 응시하고 있었다.

    “고마워, 이지후.”

    “…….”

    “그냥. 소원 빌기 전에 말하고 싶어서.”

    몸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여섯 달간 항상 곁에 있었던 그를 향해 건네고 싶은 인사였다.

    “……나도. 고마워…… 많이.”

    망설이던 그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말은 대현을 웃을 수밖에 없게 한다. 이번에는 대현이 먼저 눈을 감았다. 손을 모으고 여섯 달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러나 지금은 한시도 떨칠 수 없는 그 생각들을 불어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현이 미간에 힘을 줘 들어올렸다.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강한 힘으로 감고 있던 눈도 함께 떴다. 그러자마자 보인 얼굴은 방금 제가 그랬을 것처럼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서서히 떠지는 눈이 시선을 맞추고 깜빡댔다.

    대현은 문득 지후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이 울음을 참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음을 꾹 눌러 참은 대현이 입꼬리를 힘주어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잘 부탁해.”

    말과 동시에 나간 손은 지후의 몸에서 한 뼘 정도를 남기고 멈춰 섰다. 멍하니 시선을 내린 지후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다른 온기를 가진 두 손이 맞물렸고, 지후는 고개를 숙였다. 대현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눈을 가리는 그는 대현이 그러리라 생각했던 것처럼 울고 있었다.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은 그의 얼굴 위로, 지후의 숙인 고개 위로 꽃잎들이 흩날리게 만들었다. 지후의 머리 위로 붙은 꽃잎을 떼주던 대현은 더는 울음을 참지 않고도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로소, 봄이었다.

    ‘최애와 거리두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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