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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106화 (106/119)

106화

“대식은 진짜 아닌 것 같다, 야.”

너무 웃은 탓인지 생리적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던 대현이 제 손을 잡아오는 손길에 멈칫했다. 손을 끌어 제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는 손은 따스했다. 차가운 대현의 손을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던 손가락은 이내 대현의 손가락 사이 빈 곳으로 파고들었다. 보지 않아도 주머니 속의 두 손이 빈틈없이 맞물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웃느라 벌어졌던 입가가 저절로 다물렸다. 온몸의 감각이 그와 잡은 손으로 옮겨간 것만 같아서 방금 전까지 웃던 것도 잊고 대현은 그를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뭐. 성이 김 씨이기만 하면 상관없어요.”

깍지를 껴 온기를 나눠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손등까지 쓸어주는 제 어린 연인은 다정한 행위와 달리 저렇게 능글맞은 말까지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같은 성을 가졌기에 장난에 그칠 뿐인 비현실적인 이야기에도 장단을 맞춰주는 그의 애정이 새삼 닿아왔다. 자신조차 몰랐던 빈틈을 채워주는 그를, 자신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까분다.”

‘사랑스럽다’보다는 ‘멋있다’가 어색함 없이 어울리는 얼굴임에도 눈앞의 든든하게 선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서, 대현은 조금 벅찼다. 마음을 감추며 겨우 내놓은 말에도 눈을 휘어 웃는 얼굴은 때로는 벅찰 만큼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사소해 보이게끔 만든다.

“형.”

“응.”

“우리 여행 가요.”

“뜬금없이?”

“이제 작업하면 바빠질 거니까요.”

“나보다 네가 더 바쁠 것 같은데.”

“응. 그러니까 그 전에 가야 돼요.”

바쁜 스케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전에 가야 된다고 말하는 단호한 얼굴은 생각에 힘을 싣는다. 그가 언제나 옆에서 함께 있어줄 것 같다는 유치하고도 환상 같은 생각.

“그러자.”

환상은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끔 한다. 그 사람이 제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는 착각, 그가 제가 바라는 것처럼 행동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착각.

삼 개월 전, 대현이 무모한 행동을 하게 한 데에는 그런 착각이 작용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삼 년을 좋아한 멤버는 제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제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도 않았고, 그를 실망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앞에서 다정한 눈을 하고 바라봐 주는 사람은.

“형! 저희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야. 캥거루. 근데 우리 진짜 가도 되는 거냐?”

“그뉵 형이 내 밥 다 먹으면 어떠캐?”

“그뉵 형이 누구야?”

“여기!”

“윤아, 엄마가 그렇게 사람 손가락질 하면 된다고 했어요, 안 된다고 했어요?”

“자기야. 근데 그뉵 형이 누군데.”

“아이참. 옆에 사람 있는데 자꾸 그렇게 물어보면 어떡해.”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갈까?”

“네.”

그 모든 착각의 과정을 기꺼이 반복하게 만든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대현은 기쁘게 예감했다.

* * *

“뭐야. 어디 가냐?”

“애들이랑 놀러 가게. 외박할지도 몰라.”

“대현이? 선우?”

“둘 다.”

비니를 눌러쓰며 거실의 시계를 확인한 영민이 이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먼저 소파에 앉아 있던 영채가 짜증을 내면서도 자리를 내줬다. 그녀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공략하려 했지만, 지난 이십삼 년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뚱한 얼굴이 된 그가 영채가 보고 있던 화면을 부루퉁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어? 이거 이번 주 거야?”

“엉.”

“대박. 안 그래도 보려 했는데. 개이득.”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 게 언제였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는 얼굴은 어딘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의심쩍은 눈빛으로 관찰하던 영채가 이내 그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찼다.

“아! 왜!”

“비켜. 안 보인다고.”

“말로 하면 되지 꼭 동생 엉덩이를 차야 돼?”

“그럼 너는 애초부터 안 깝치면 되지 굳이 내가 엉덩이를 차는 수고를 하게끔 해야 돼?”

귀를 후비며 대답하는 얼굴은 역시나 이길 수 없다. 작게 이를 간 영민이 다시 아까처럼 그녀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발로 차였던 곳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리던 얼굴은 곧 화면에 보인 얼굴들을 확인하자 다시 환해졌다.

“오. 때깔 쩌는데.”

“너 쟤네 팬이냐?”

“응.”

“언제부터?”

“몰라.”

“하긴. 대현이가 쟤네 좋아한댔나?”

혼자 나름의 결론을 낸 듯 고개를 끄덕이던 영채도 영민이 빨려 들어갈 듯 보고 있는 화면을 따라 응시했다. 화려한 머리색의 남자들이 번갈아 나오는 화면에서는 발랄한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큽…… 크…… 아…… 정대현 진짜…….”

영민이 정체 모를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영채의 발길질에도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찍는 그는 이미 그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경험상 저러고 있을 때는 말이 안 통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영채가 과자를 집어먹으며 방금 그의 말에서 유일하게 건진 것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대현이는 왜 놀러 안 오냐.”

“엉?”

“대현이. 왜 안 오냐고. 보고 싶은데.”

“누나가 대현이를 왜 보고 싶어 해. 내가 내 친구들 탐내지 말랬지.”

“콱씨. 대답이나 싸게 싸게 해라.”

“……아니 ……내 말은 ……아, 누나 때문에 마지막에 못 봤잖아!”

날아올 발길질에 방어하듯 몸을 둥글게 말던 영민이 화면을 보고는 성질을 냈다. 물론 발  끝을 꿈틀거리는 영채를 보고 금방 다시 깨갱하긴 했지만.

“대현이 한번 데리고 와.”

“왜.”

“왜긴 왜야. 밥 한번 사주려 그러지. 언니도 왜 요새 대현이 안 보이냐고 찾더라.”

“아니, 이놈의 누나들은 친동생은 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씁.”

“알았다고!”

구시렁거리며 일어서던 영민이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현관으로 달려가던 그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이 뒤돌았다.

“근데 누나.”

“뭐. 갈 거면 빨리 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게 아니고. 대현이 있잖아.”

“우리 대현이 왜.”

“……대현이 이제 막 그렇게 다정한 캐릭터 아니다? 데려왔을 때 너무 충격받지 말라고.”

동생이 나가는 것에도 관심 없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던 영채의 시선이 그제야 영민을 향했다. 충격받은 듯한 표정의 그녀를 바라보던 영민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거냐는 듯이.

“나 간다!”

때마침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경적 소리는 영민이 늦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허겁지겁 신발을 찾아 신은 영민이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하긴. 대현이는 좀 그래도 돼. 애가 너무…… 치명적이게 다정했어. 그치. 그래…….”

거실을 휘젓고 나간 동생이 없는 집에는 홀로 생각에 빠져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누나만이 남았을 뿐.

“김선우, 너 어제 전화 안 받더라.”

“아, 어. 문자 남겼잖아 대신에.”

“변했다 너.”

“손 떼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약속시간보다 십분이나 늦은 데다가 늦은 사람이 혼자였던 덕에 대현의 잔소리를 폭탄으로 들어야 했던 영민은 기죽은 척이라도 하던 걸 벌써 포기한 듯했다. 운전하는 선우에게 장난스럽게 앵기는 얼굴을 본 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왜.”

“어?”

“쳐다보길래.”

“그냥. 근데 그러고 보니 너도 어제 전화 안 받더라. 바빴어?”

“어……?”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보는 얼굴을 본 대현이 때마침 생각난 것을 뱉었다. 방금 선우와 영민의 대화 덕분인지 어제 지후가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 연상작용처럼 떠오른 탓이었다.

“뭐야. 이지후 너도 어제 전화를 안 받았다고?”

영민의 고개가 뒤로 넘어온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본 대현은 그의 타깃이 지후로 바뀔 거라는 것을 손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거 수상한데.”

타깃이 바뀐 게 아니라 확대된 건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선우와 지후를 훑는 영민을 본 대현이 웃으며 옆의 과자를 집어 들었다. 태연한 얼굴의 선우와 달리 당황한 표정을 한 지후는 그 와중에 영민에게 장작까지 제공해 주고 있었다. 말려달라는 듯 쳐다보는 지후의 시선을 모른 척한 대현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람했다.

“이지후, 너 어제 뭐했어.”

“……내가 그걸 왜 말해야 돼.”

“말 안 해야 할 이유는?”

“아니…… 그러니까.”

“3.”

“야.”

“2.”

“아니, 숫자는 왜 세는데!”

“1.”

“별거 안…… 영화 봤다, 영화! 왜!”

가만 보면 참 저런 거에 잘 말린단 말이지. 영민의 유치한 장난에 매번 쉽게 걸려들곤 하는 지후는 그때마다 억울한 표정을 했다. 마치 지금 짓고 있는 저 표정처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영민을 쏘아보고 있는 걸 본 대현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룸미러로 눈이 마주친 선우가 미간을 모으는 게 보였다. 안 말리냐는 듯한 눈빛에 도리어 대현의 장난기가 동했다. 과자를 내려놓은 대현이 지후의 쪽을 향해 자세를 바꿔 앉았다.

“어디서 봤는데?”

“오~ 정대까지 등판해쓰! 좋아. 이제 이 판은 무조건 나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다.”

“야. 너까지…….”

배신감 어린 표정을 하는 지후에게 씩 웃어 보인 대현이 질문을 철회하는 것 대신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했다.

“영화관.”

“…….”

“…….”

“영화관에서 봤다고. 나랑. 그러니까 애 그만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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