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새로운 정보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앞의 명패를 툭 치는 게 보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대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명패에 적힌 이름이 그제야 온전히 뇌리에 박혔다.
김 환.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사촌동생이란 말이 어떻게 나온 건지 알 것도 같았다. 뒤늦게야 찾아온 모든 깨달음들이 대현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어쩌면 그게 갑자기 활발하게 진행된 재계약 관련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대현은 할 말을 잃고 눈앞의 사내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은 굉장히 튀게 마련이거든. 특히나 그게 한 명일 때는 더더욱.”
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꺼낸 건 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현이 몰랐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워왔지, 내가. 솔직히 나라고 그 집 사람들이랑 다를 건 없지만.”
“…….”
“그래도 외로움을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보다야, 알고 말이나 걸어주는 내가 낫겠지 않나 싶어서.”
사촌동생을 거침없이 ‘주워왔다’고 표현하는 그는 뱉어낸 정 없는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단단한 얼굴이 이렇게 스스로 틈을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대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은 신경 써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야.”
“…….”
“이해해. 걔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었던 거겠지.”
눈썹 뼈 부근을 검지로 문지른 얼굴은 나른했다. 손을 내린 그가 대현을 돌아봤다.
“그걸 깨닫게 한 게 너일 테고.”
차분한 눈빛은 확신이 담긴 말투와 다르게 대현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집요한 시선을 받아내던 대현은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얼굴이 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걔가 나한테 뭘 요구한 건 처음이야. 날 보겠다고 찾아온 것도 그렇고.”
“…….”
“둘 다 너와 관련된 일이라는 게 우연인 것 같진 않아.”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오는 그는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대현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조금 비뚤어진 넥타이를 정리한 그가 다시 대현을 돌아봤을 때는 어느새 처음 보았을 때의 단단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야 내 알 바 아니고.”
“…….”
“하던 거 계속해. 물론 그게 회사에 이득이 되는 방향이어야 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하고.”
할 말을 마쳤다는 양 펜을 들고 서류로 시선을 내리는 얼굴을 본 대현은 비록 그가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어도 대화가 끝났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대현이 방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봤다. 첫 만남 때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서류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제야 식과 닮은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입안에 맴돌던 여러 생각들은 결국 시시할 정도로 간단한 문장으로밖에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결국 재계약은 그의 결정으로 완성될 수 있는 거였다. 슬쩍 본 그의 책상 위 서류들은 플러그와 관련된 수치들이 어지러이 담겨져 있었다. 그가 재계약을 결정하기까지 어떤 숙고 과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한 결정으로 인해 제가 지키고 싶었던 그룹은 유지될 수 있을 거였다. 모든 것들을 다 논외로 하고, 대현은 순수하게 그 사실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플러그를 해체시키지 않아줘서. 그리고 식을…… 버리지 않아줘서. 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마친 대현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감사는 너 자신한테 해.”
애초부터 답이 들려올 거라 기대도 하지 않은 인사였다. 그러나 그 인사를 받아준 대상은 문가에 선 대현을 빤히 응시하고 있기까지 했다.
“다 네가 한 거니까.”
“…….”
“덕분에 답지 않은 짓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슬쩍 올라갔던 그의 입꼬리는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문을 열고 나온 대현이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벽에 붙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삼십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럼에도 대현의 마음은 이 순간조차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초점을 잡은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식을 봐야 했다. 지금 당장.
“형. 어디세요?”
[어? 나 잠깐 밖에. 왜?]
“식이랑 같이 계신가 해서요. 아까 스케줄 데려다주러 간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
[식이? 식이 지금 회사에 있는데? 못 만났어?]
“……네?”
[너랑 같이 갈 거라고 해서 아까 내려주고 왔지. ……여보세요?]
‘너랑 같이 간다고…….’
핸드폰을 쥔 손에서 또 힘이 빠질 뻔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진수와의 통화를 마친 대현이 멈칫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은 자연스럽게 연습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피아노를 치나 봐.’
‘연습실에 피아노 넣어달라는 거. 그게 김 식이 내세운 조건 1순위였거든.’
대표의 말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들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끔 목을 막은 것들은 결국 대현을 이토록 흔들고 있었다. 그의 안에서 시작된 흔들림은 점차 커졌다. 대현은 그 사실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홀린 것처럼 걷던 대현이 걸음을 멈춘 곳은 이전에 윤성, 우람과 함께 찾았던 연습실 앞이었다. 입구에 몰린 새로 지은 연습실에 비해 구석진 데에 위치한 연습실은 다른 곳에 비해 연습생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했지만,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까지 갖춘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람과 윤성에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들키기도 했었다.
식과는 한 번도 함께 와본 적이 없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현은 식이 이곳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연습실 문고리에 얹는 손은 벌써부터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결심한 표정을 한 대현이 문고리에 힘을 줘 돌렸다.
♩♪♩♪♩♪♩♪♩♪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소리는 연습실 구석에 위치한 피아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대로 리듬을 갖추지 못한 독립된 음들은 대현의 귀에 닿기가 무섭게 흩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현은 지금 피아노가 아닌, 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는 남자를 눈에 오롯이 담아내기에도 벅찼으니까.
“……형.”
건반을 누르던 얼굴이 자신이 온 걸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대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찾았던 얼굴이 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찾고 있었다거나, 보고 싶었다거나 하는 말들을 하나도 내놓을 수 없었다.
가만히 서서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음에도 앞에 선 얼굴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지후의 사고 당시 병원 로비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지난 일주일간 자신을 피하는 게 분명한 대현을 재촉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모든 순간에 그를 기다려 온 남자는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 충성스러운 기다림이 너무나 벅차서 대현은 이번만큼은 도저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굴 좋아하는 건지.”
“…….”
“물어봐도 돼?”
결국 나간 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식을 의식한 순간부터 그는 늘 떨고 있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식은 늘 그런 자신에게 다가왔다. 때로는 눈빛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지금 제 앞에서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잠시 숨을 골랐을 뿐 이내 망설임 없이 말해오는 얼굴은 늘 그랬다.
대표의 입에서 네가 피아노를 넣어달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내가 피아노를 쳤던 걸 넌 어떻게 알고 있는지. 한때는 그게 나의 인생이었고, 지금은 잠시 잊고 지내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알고도 괜찮은 건지.
그러니까 내가 이지후가 아니어도 괜찮은 건지.
“그러니까 이지후 말고.”
차마 묻지 못한 말들은 그가 선점한 고백으로 인해 모두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
“제 앞에 있는 형을 좋아하는 거예요, 전.”
할 말을 모두 빼앗긴 대현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걸음을 뗐다. 그의 앞까지 걸어가 손을 뻗었다. 저항 없이 딸려오는 목을 잡고는 그의 입술에 떨리는 마음을 가져다 댔다. 말보다 먼저 튀어나간 마음은 그의 입술에 닿고서야 진정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서야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났다.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대현처럼 거친 숨을 내뱉는 식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가 할 말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을 하고도 침착하게 기다리는 얼굴을 마주한 대현이 생각난 말을 뱉었다.
“미안. 그러니까…… 이렇게 입술부터 들이댈 생각은 없었는데.”
여러 번 했던 연애, 하지만 마음을 확인했다고 이렇게 입술부터 가져다 댄 경우는 없었다. 덕분에 나온 사과였지만 들은 식은 잠시 이해 안 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가를 허물어뜨리고 웃을 뿐이었다. 방금 대현이 그랬던 것처럼 목을 끌어 대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댄 그가 대현을 다정하게 응시했다.
“형,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세요.”
그의 입술이 천천히 밑을 향해 내려왔다. 둘의 코가 부딪쳤다.
“말했잖아요.”
“…….”
“졌다고.”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따뜻하게 윗입술을 감싸는 입술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입술이 열렸다.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온 혀가 대현을 건드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대현은 팔을 들어 자신을 안아오는 남자의 목에 둘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별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곳곳에 뽀얗게 먼지가 쌓인 연습실.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남자가 선물한 피아노, 말하기 전에도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 그리고 그런 그에게 차마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준비가 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둘에게는 함께할 순간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 열 오른 입맞춤으로도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더 오래 나누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