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꾸벅꾸벅 졸던 우람을 방으로 보낸 대현이 본격적으로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셋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비운 캔이 슬쩍 보이는 것만 해도 열 개를 훌쩍 넘어갔다. 많이 마신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과자 봉지를 치우면서도 자꾸 새어 나오는 하품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대충 치워놓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캔을 넣은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가던 대현이 시선이 문득 화장실에 멎었다. 식이 씻겠다며 들어간 곳이기도 했다.
의식하기도 전에 떠오른 것들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서 나갈 방법을 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숨 쉬는 법까지 잊을 것 같았던 마지막 눈 맞춤까지 떠올린 대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은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에 하등 도움이 안 됐다. 봉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볼을 소리 나게 치자 그제야 정신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식이 씻고 나오기 전에 얼른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리라 마음먹었지만, 생각보다 설거지 거리가 많았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대현이 깜짝 놀라 접시를 헹구는 손길에 속도를 붙였다.
“형, 도와드릴까요?”
그런 대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식은 부엌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말소리에 대현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 아냐. 거의 다 끝났…….”
빠르게 대답하려던 대현은 말을 다 끝나지도 못하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
목에 닿아온 더운 숨 때문이었다. 컵을 든 손에서 힘이 빠졌다. 개수대 안으로 떨어진 컵에서 튄 물에 티셔츠가 젖었는데도, 그는 그 사실에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서 있는 식에게 쏠려 있었다.
뒤에 선 식에게서 나는 향이 후각을 지배했고, 대현의 머리 위로 쭉 뻗어진 하얀 팔은 시각을 붙들었으며, 어깨 부근으로 느껴지는 그의 맨살은 촉각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양 다가와 있었다.
대현이 겨우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이미 까맣게 잊혀진 상태였다. 본능적인 명령을 따라 몸을 돌리던 대현은 바랐던 탈출구 대신 제 앞을 막아선 어깨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보았던 어깨가 눈앞에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그 어깨의 주인이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곳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 사실 형이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를 남기고 선 식이 입을 열 때마다 희미한 민트 향이 났다. 그의 몸에서 나는 머스크향과 겉돌 것 같은 그 향은 이질감 없이 어우러졌다. 아찔할 정도였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겨우 시선을 들어 마주한 식은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대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이 순간에도 대현을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대현은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현의 눈 속에 그가 찾는 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옭아매던 눈이 떨어져 나간 건 분홍빛 입술이 열리고 나서였다.
“형이면…… 말씀드릴 수 있는데.”
“…….”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대현의 이마부터 시작해 코를 타고 내려온 시선은 방금 전까지 대현이 보고 있었던 그의 얼굴 부위와 같은 곳에서 멈췄다.
“지금 그 사람이랑 뭘 하고 싶은지.”
마지막 말은 속삭이는 것과 같았다. 대현은 그제야 자신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로 짚었던 손의 떨림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 작은 움직임이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인지 이내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대현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식이 움직였다. 영원히 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몸을 뗀 그가 대현의 어깨를 잡아 물러나게 했다. 망설임 없이 개수대 위로 몸을 구부리는 그가 보였다. 잘 정리된 등의 움찔거리는 근육으로부터 눈을 뗀 대현이 정신을 차리고 개수대로 다가서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잠시만요. 다칠 것 같아서 그래요.”
몸을 돌린 식이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유리컵의 잔해를 살핀 대현이 제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겨우 맞췄다.
“들어가세요, 형.”
“…….”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그리고…….”
달래듯 말하던 식의 시선이 조금 내려왔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아까 식이 다가온 탓에 물이 튄 가슴께였다. 마치 웅덩이처럼 자리 잡은 얼룩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대현은 이내 제게 다시 돌아온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티셔츠를 바라보던 무표정한 얼굴은 대현과 눈을 맞추고는 그를 안심시키듯 작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던 대현은 마치 듣고 싶은 대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를 몰아세우던 그가 져 주듯 한 걸음 물러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도 대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 그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이내 돌아섰다.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결국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한 채 방에 들어온 대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문에 기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대화 후,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어 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두 번이나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지금 대현을 위해 깨진 유리를 줍고 있었다.
“……아…….”
심장 위에 가져다 댄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쿵쿵 울리는 심장의 속도를 견디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눈앞에 있는 것만 같은 그의 얼굴 때문에 생긴 떨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모든 비이성적인 행위의 중심에는 식이 있었다.
다행인 건 그날 이후로 대현이 정신없이 바빠졌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식에게 느끼는 감정을 재단하는 일을 잠시라 해도 미뤄두는 게 가능했다. 사실 그건 대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의 방치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속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호출의 이유는 어느 날 그를 회의실로 부른 팀장의 입에서 나온 요구사항이란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재계약을 위한 절차였다는 걸.
얼떨떨하기도 잠시, 찾아온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대현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 그날의 잔인한 회의는 잊기라도 한 것처럼, 반대편에 앉아 세부사항을 조율하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사근사근했다. 나름의 노력을 했던 건 맞고, 인터넷 내에서 반응이 좋아진 건 매주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자신도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재계약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 일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정글에 간 윤성이 돌아오기만 하면 회사는 그들 앞에 계약서를 내어놓을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현과 달리 식과 우람은 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일들에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현이 숙소에 돌아올 때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캐묻고 나름의 토론까지 마쳐 결론을 내는 그들을 보며 대현은 벙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모든 게 몰래카메라 같았다. 연습실 마련뿐만 아니라, 개인 활동 지원 등 딱 봐도 이전과 다른 퀄리티로 제공될 것을 못 박은 계약 사항들은 대현의 입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지후의 입에서도 괜찮은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니까, 모든 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되어가고 있었다.
“지후야, 준비됐어?”
“네.”
대현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멤버들 중 그만을 콕 집어 불러냈다는 대표와의 독대가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의 마지막 관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노크를 해준 뒤 응원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진수가 뒤로 물러났다.
“들어와.”
출입을 허락하는 목소리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팬으로서 알 수 있는 정보 외에는 플러그에 대해 아는 정보 하나 없던 자신이 이 문 앞에 섰을 때는, 그 이후로 벌어질 이 모든 일들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삼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지는 일들을 되짚던 대현이 문을 열었다.
“…….”
“…….”
그래도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받기 위해 직접 말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문가에 선 대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얼굴로 쏟아진 시선의 주인은 그의 앞에 놓인 의자를 향해 턱짓을 했다. 엉덩이를 의자에 대기도 전에 그가 꺼낸 첫 마디는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한 대현의 예상을 가볍게 뒤집었다.
“피아노를 치나 봐.”
그가 알 리 없는 정보였다. 그렇기에 잘못 알아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자 팔걸이 위로 올라온 대현의 손을 쳐다보는 시선은 그가 들은 게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습실에 피아노 넣어달라는 거. 그게 김 식이 내세운 조건 1순위였거든.”
혼란스러운 대현의 표정을 읽어낸 양,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덧붙였다.
피아노, 김 식. 맥주를 먹으며 셋이 했던 이야기 이후 한 번도 엮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잊고 지내려 했던 그 두 개가 한 묶음이 찾아온 순간에는 대현도 도저히 초연할 수가 없었다. 표정을 관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 대현이 앞의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아무리 사촌동생을 방치하는 못된 형이어도.”
“…….”
“걔가 피아노 못 치는 것까지는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