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02화 (102/119)

102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이던 지웅의 입에서 끝내 작은 한숨이 나왔다. 함께한 세월은 목소리만으로도 예준이 우울한 상태라는 걸 깨닫게 했지만,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이 젖은 목소리로 내어놓은 심오한 이야기에는 그도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운 다른 쪽 팔을 든 지웅이 그의 새까만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쯤 되면 네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지. 이미 충돌은 일어났을 거고, 너도 상처 입었을 테니까.”

“…….”

“대신, 그때부터는 다른 것들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걸 할 수 있는데?”

“뭐…… 다친 곳을 치료할 수도 있고.”

“…….”

“다시는 안 그러도록 브레이크도 고칠 수 있고.”

비록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지웅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짐작했다. 머리 위에 얹은 손으로 예준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해 주며 지웅은 생각했다.

좋아하는 대상이 있을수록 더더욱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는 제 말에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갸웃대던 동생은 어느덧 제게 브레이크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누가 그에게 브레이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에 도움이 될 순간일 거였다. 그렇기에 지웅은 조금은 자란 것 같은, 그러나 여전히 어린  동생을 그만의 방식으로 익숙하게 위로했다.

“……너무 어려워.”

“알아, 인마.”

“…….”

“그래도 지나갈 거야.”

그러니 괜찮을 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예준이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까.

* * *

착잡한 마음으로 들어선 숙소에서는 그가 여태껏 상상조차 해보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하다 이제 오냐.”

“오셨어요?”

퉁명스럽게 올려다보는 우람이나 몸을 일으키며 그를 맞아주는 식. 그들의 앞에 놓인 치킨과 맥주캔까지 눈에 담은 대현은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둘이…… 술 먹고 있었어?”

입 밖으로 내기에도 어색한 문장이었다. 물음의 의도가 느껴졌는지 바로 인상을 찌푸린 우람은 대답 대신 시선을 어물쩍 돌렸다. 옆에 있던 식이 대신 대답했다.

“그냥요. 어쩌다 보니.”

최근 둘이 은근히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나란히 앉아 치킨에 맥주까지 먹을 사이로 발전한 줄은 몰랐다. 기분 좋은 놀라움이긴 했지만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현관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보다 못한 우람이 그의 팔을 당겨 억지로 가운데 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대현이 외투를 벗으며 제게 건네진 맥주캔을 내려다봤다.

“왜. 먹기 싫어?”

“어? 아니.”

맥주캔을 건넸던 우람이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대현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묘한 기분을 잊기에 술만 한 게 더 있나 싶기도 하고. 익숙하게 캔을 딴 대현이 곧바로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둘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그들 앞에는 치킨 말고도 다른 안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누가 사 왔는지가 너무나 잘 보이는 닭가슴살로 만든 육포를 집어 들며 픽 웃은 대현이 질문했다. 질문을 받은 둘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는 것 대신 시선 교환을 하고 있었다. 또다, 이 느낌. 저번주부터였나. 이야기를 하다가도 저만 오면 하던 말을 뚝 멈추고 딴청을 피우곤 하던 둘을 떠올린 대현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형.”

“어?”

“피아노 잘 치신다고 우람이 형이 그러시던데.”

“아…….”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건너온 것은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피아노 치는 걸 보여준 적이 없는 식이 묻는 말이라 더 의아했다.

윤성, 우람과 함께 갔던 연습실. 점심을 사러 나간 둘을 기다리며 별 생각 없이 손을 얹었던 피아노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둘 덕에 이렇게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후가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이상, 거론될 때마다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기도 했다.

“우람이가 오바한 거야. 안 친 지도 오래됐고.”

식의 시선을 피한 대현이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우람이 내가 무슨 오바를 했냐며 흥분해 그가 그날 봤던 그의 피아노 실력을 설명했다. 대현이 얼른 닭다리를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계속 옆얼굴로 쏟아지고 있는 시선이 불편했다. 특히나 그게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의식하게 되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서 더더욱.

“어, 야. 쟤 어딘가 익숙한데.”

식의 눈빛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대현이 물려준 닭다리를 들고 텔레비전을 응시하던 우람이 큰 소리를 내고서였다. 음량을 낮춰놓은 탓에 딱히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 대현이 우람이 방금 손가락으로 가리킨 브라운관 속 여자를 응시했다. 광고 속 여자는 청초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현에게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영민이 좋아하는 배우였던가.

“이지후. 리모컨 좀 줘 봐. 소리 키워야겠다.”

“응.”

“……주지 마세요.”

우람의 말에 소파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건네던 대현이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식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대현에게서 건네받은 리모컨을 조작하고 있는 우람을 향하고 있었는데,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에 어색하게 둘을 번갈아 응시하던 대현은 우람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내뱉는 말을 듣고서야 이 모든 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야, 쟤 너랑 예전에 열애설 났던 애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채널 돌려요.”

“싫은데.”

리모컨을 내놓으라며 손을 뻗는 식을 놀리듯 리모컨을 쏙 뒤로 빼는 우람은 어느새 개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대현은 화면 속에 웃는 여자로 돌아가는 고개를 막을 수 없었다.

“…….”

듣고 보니 왜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알 것도 같았다. 팬일 때 봤던 기사에서 식과 나란히 붙어 있던 사진 속 여자와 화면 속의 여자가 그제야 하나로 겹쳐졌다. 그때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은 얼굴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긴 생머리, 하얀 얼굴, 나풀나풀 날리는 하얀 원피스가 몸에 맞춘 듯 꼭 어울리는 여자는 눈부셨다. 그 옆에 식이 선 광경이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선남선녀니 붙어 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나란히 서면 키 차이도 딱 보기 좋을 것 같다. 생각을 이어나가던 대현은 마음 속 어딘가를 쿡 찔린 기분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생경한 느낌에 미간을 모은 그가 방금 한 생각을 쫓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차가운 밖에 있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인지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볼로 열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맥주캔을 얼굴에 대던 대현이 아직도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 우람과 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버하는 거 보니까 아직 못 잊었네.”

“시끄러워요.”

“봐봐. 쟤 못 잊었어.”

애초부터 장난으로 건넨 이야기였던 듯, 별 저항 없이 리모컨을 건넨 우람이 웃음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식을 놀려댔다. 늘 말싸움에서 그를 이길 정도로 여유로운 데다가 장난을 걸어도 별 반응이 없는 식이 당황한 티를 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식을 손가락질하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동조를 바라는 듯한 그의 반응에 결국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준 대현이 우람 옆의 맥주캔으로 손을 뻗었다. 목이 탔다. 새로 집은 맥주는 아직 차가웠다. 대현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맥주에 슬쩍 인상을 쓸 때였다.

“누가 못 잊었다는 거예요.”

“누구겠냐. 너지.”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

“지나간 사람에 미련 가지는 스타일도 아니고.”

식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당황한 건 대현뿐만이 아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진지한 대답에 얼빠진 얼굴이 된 우람이 보였다. 대현이 어색하게 허공에 뜬 손을 겨우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가 방금 내려놓은 맥주 캔, 캔을 내려놓은 그의 손, 더 올라와서 그의 얼굴까지 따라오는 시선의 주인은 식이었다. 대현은 황급히 시선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겨우 두 캔을 비웠다. 취기가 벌써 올라올 리가 없는데도 볼을 비롯해 목, 심장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큼. 야, 이지후. 근데 넌 뭐 하다 왔냐? 나갈 때 말했던 것보다는 빨리 들어온 것 같은데.”

“어? 나 그냥…….”

“……근데 너 향수 바꿨냐?”

“아니, 왜?”

“냄새가 바뀐 것 같아서.”

순식간에 진지해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건 우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말을 돌리는 그에 장단을 맞춰 대답해 주던 대현이 시선을 내려 제 옷을 훑었다. 몸을 가까이 하며 킁킁대는 우람에 손을 들어 소매 냄새를 맡던 대현이 이내 깨달은 것에 멈칫했다. 예준을 마주 안아주며 느꼈던 향이었다. 꽤 길었던 포옹 탓인지 그의 향이 자연스레 옷에 묻어온 듯했다. 함께 떠오른 얼굴에 잠시 가라앉은 낯을 하던 대현이 쥐었던 옷을 놓았다.

“…….”

“…….”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한 눈에 대현이 흠칫했다. 그의 왼쪽에 앉아 있던 식이 어느덧 가까워져 있었다. 우람보다도 먼 거리에 있었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저를 쳐다보는 눈은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마주본 것처럼 가깝게만 느껴졌다.

식의 눈빛은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우람의 실없는 말을 받아치는 무표정한 얼굴을 본 대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2